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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지역과 마을

쓰시마

by 이성근 2014. 6. 15.

 

부산광역민간협의체 창립준비를 위한 워크샵 참가를 위해 쓰시마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가 본 쓰시마는 인상적이었다.  비교적 일본은 자주 방문하는 편이지만 늘 비켜가듯 스쳐 왔다.  사실 쓰시마는 별도로 활동중인(지금은 이름만 있는) 사) 초량왜관연구회의 원년 멤버로 교류방문의 기회가 많았지만 여의치 못했다.  가는 날 풍랑은 없었지만 흐린 날씨로 인해 빗발이 분분했다.  

김동호 부산마을만들기 지원센터 센터장

부산을 떠난 배는 한시간 반이 못되어 히타카츠항에 도착했다.

 일본 본토의 항구도시에 비하면 참 아담한 풍경이었다. 마치 일제 점령기 구룡포나 거제 일원의 포구같은 느낌이었다.

쓰시마는 남북 약 82km, 동서 18km로 가늘고 긴 모양의 섬이다. 북쪽으로 한국의 부산과 남쪽으로는 이키, 규슈(九州)와 면해 있다.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그 연장길이가 915km에 달한다. 섬의 면적은 708.66㎢로 거제도의 약 2배 정도이다. 전체면적의  89%가 산림지형으로 가파르고 울창한 산림이 해안까지 이어져있다. 본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5개 섬이 유인도이다. 본 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있고, 이는 다리(만제키바시)로 연결되어 있다

2010년 국세(國勢)조사에서 쓰시마시의 총인구는 34,407명이었다. 2005년 조사와 비교해 보면 4,074명(10.6%)이 감소하였으며, 인구 감소는 1960년 이래 지속되고 있다. 세대수는 13,813세대로 1965년 국세조사 이후로는 15,000 이상의 세대수를 지속해 왔으나, 2005년에는 15,000세대를 밑도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각 세대의 인원수가 줄어드는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령화 비율(65세 이상의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29.5%로, 나가사키현 평균의 26%, 전국 평균의 23%와 비교해 볼 때,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인용자료는 부산쓰시마사무소 홈페이지에서 참고)

 

일행이 주로 이용했던 지역은 입출국의 히타카쓰항과 체류했던 사스나 였다. 

부산 국제여객부두에서 발견한 잠자리 ?

비구름이 드리운 하타카츠항

수속을 마치고 대기중인 두대의 승합차에 나누어 탄 일행이 본격적인 탐방에 들었다,

산지가 많은 곳이라 터널이 많았다.  도로는 한산했고 노폭이 넓은 곳이라야 2차선이 최대였다.  교통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히타카쓰항에서 사스나 방향  382번 국도

한국방문자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밸류마트, 일행도 이곳을 오고가며 이용했다.

점심은 사스나에 있는 메밀국수집  소바도죠

국수 재료는 밀가루를 전혀 섞지 않은 메밀 100%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 입맛엔 심심하고 별 맛이 없이 닝닝?할 수 있다.  솔직히 댕기는 맛이 없었다.  아님 화학조미료에 너무 절어있는지도 모른다.

식당이라 하지 않고 굳이 도죠(道場)라 칭한 것은 쿠키, 요리 아카데미처럼 이 곳에서 일정 비용을 내면 직접 메밀 국수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고 또 만든 메밀 국수를 바로 요리해서 먹는 기능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싱겁기 짝이 없는 메밀국수를 날렵하게 먹어 치운 뒤 이번 방문의 목적과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다.

소바도죠 내부 풍경과 의자

헤아려 보니 근 100년

의자는 편백으로 만들었다.  향이 좋았다.  쓰시마는 임업이 발달한 곳이다.

눈길을 끌었던 T셔츠 한장,  쓰시마 야마네코 한국에서는 삵으로 불라우는 야생고양이로 대대적인  보전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마네코에 대해선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지역 특산물에는 야마네코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쓰시마의 100년이란 화보집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들 근대의 대마도가 보였다. 조선과 쓰시마의 교류 역사는 오래됐다. 쓰시마의 경우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자주 출몰하자,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 ·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는 이종무 장군이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고,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고려군과 함께 상륙한 기록이 있다.

 

이후 쓰시마도주(島主) 소[宗]씨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으며, 러일전쟁시에는 상대마와 하대마를 가르는 운하를 개통하여 아소만의 지형을 이용한 쓰시마해전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초량 왜관이 개설 된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를  거쳐 지금의 동경인 에도로 들어 갔다.

 

통신사의 규모는 약 400~500명이었다. 이들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본 본토의 에도에서부터 마중나온 호위병과 신하들이 2천여명에 이르러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하면 이 섬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일본 사료에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향하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식량과 의전으로 고민하던 대마도 도주의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통신사 행렬의 장엄했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강점 이후 조선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49년 기준으로  약 2,000여명의 조선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55년에는 2,385명의 한국인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 수산업이 164명, 목탄제조 41명, 선원 34명, 해녀 30명 등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는  수교 전이라 상당수가 밀무역이나 밀항 등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 4.3 제주 항쟁 당시에는   3백여 명이 난을 피해  시코쿠의 에히메에 밀항하였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한창 때에는 이즈하라에 들어오는 한국배가 하루에 20-30척이었다고 하지만, 목탄 제조업과 무역의 쇠퇴로 인해 1967년에는 757명으로 줄어들었고, 1968년의 국교 수립 이후에는 밀무역 자체가 소멸된 까닭에 거주 한국인은 소수만 남은 있다고 한다. 

 

사스나에서 메밀국수 점심 이후 방문한  가미쓰시마마치(上対馬町)의 모기(茂木) , 모기하마해수욕장(茂木浜海水浴場)

숨겨진 장소, 아는 사람만 찾는 해변이지만 이용 주의 간판에는 한국어 안내문이 있을 정도다.

해안사주가 발달하다가 만 형태이며, 사주의 양끝에 유입되는 작은 물길이 있어 모래 공급이 꾸준히 이루어 지고 있었다.  전반적인 식생은 거제도와 비슷했고 사주 식생의 경우는 낙동강 하구와 비슷했다.

옛 러일전쟁당시 일본함대에 의해 격침된 러시아함대의 함포가 인양되어 전시 중에 있다.

폭이 좁고 아담하기 까지 한 물길이긴 하지만 엄연히 기수역이다.  주변 모래사장에는 달랑게류의 구멍이 도처에 보였다.

해안 파식대 주변 털머위와 돈나무, 갯강활, 사스레피 등이 우점했다.

특이한 암석 ?

사주 뒷편에 입지한 서너채의 가옥 옆 성채의 흔적

침식이 진행 중인 사주와 동쪽편 물길

누군가 앞서 왔던 이가 만든 사람 현상의 모래 조각,  나는 그 앞에  파동에 밀려왔던 조화 한 송이를 꼽았다.

쓰시마에서 반가웠던 친구, 제비  어디서든지 마주했다. 마치 솔개처럼    그래서 부러웠다.

이곳 신사? 이름을 ?

오래된 은행과 편백이 신사 입구에 있어  인상적이었다.

 

 

 

 

 

 

 

 

사스나는  에도시대 조선과 무역거점 번성했던 곳으로 나가사키현 종합청사도 있었던 곳이다.  2004년 합병을 통해 대마도시가 탄생 한 이후 사스나는 조용한 마을로 남았다. 이곳에 전 부산일보  최용호 기자가 나가사키현 독신 공무원 기숙사를 구입하여 옴 봄에 펜션을 열었다. 

마을은 지극히 조용했다.  마을 구경을 다녔지만 주민과 마주친 적이 없을 정도다.

최사장의 펜션은 마을의 끝에 있었다.

객실은 10개로 관광이 아닌 휴양 개념의 펜션이다. 080-8582-6596  숙박비는 방1칸 8만원 두칸 16만원 아침밥(쌀밥+미소시루) 등과 저역밥(물고기 회+ 소라+ 생선머리 매운탕) 합쳐 1인당 2만원 제공(6천앤) 으로 한국식 온돌장판은 1인당 4만원 이다.

최 사장은 오래전부터 일본을 출입하며 쓰시마에 매료된 듯하다. 서일본 신문에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해 부산일보에 그의 생각이 담긴 기사를 발견했다.  옮겨보았다.  노트북 단상] '평화의 섬' 쓰시마를 꿈꾸며/ 부산일보 최용오 국제부 차장13.11.6

 

최근 일본 쓰시마의 자연에 매료되어 자주 간다. 말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 10분이면 도착하니 교통정체를 무릅쓰고 한국의 다른 곳에 가는 것보다 편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어서는 출입국 절차가 까다롭지만 이것도 익숙해진다.

 

쓰시마는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면 약 1시간만에 도착하는 '자연'이라 할수 있다. 쓰시마의 자연은 우리가 경제발전의 대가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어른 집게손보다 큰 메뚜기, 마을 내 작은 도랑에 가득한 씨알 굵은 다슬기, 나리를 포함한 토종꽃들….

 

특히 무엇보다 건강한 숲이 매력적이다. 쓰시마는 섬 전체의 89%가 삼림으로 덮여 있고, 그 숲의 45%가 편백나무와 삼나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쓰시마에 이처럼 때묻지 않은 자연이 남아 있는 것은 '자연을 훼손할 인간이 많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료를 뒤져 보면 쓰시마와 부산은 과거 인구수가 비슷한 이웃 마을 정도였던 것 같다.1910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는 부산의 인구를 9만 6천42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인구가 지금은 360만 명 정도로 크게 늘었다. 반면 쓰시마의 인구는 에도시대에 최고 3만 6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도 비슷한 숫자다. 쓰시마의 인구는 조선시대에 동래상인(내상)들과 교역을 하던 에도시대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과거엔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았던 부산과 쓰시마의 인구가 지금은 약 100배 차이로 벌어진 상황이다.쓰시마의 이런 환경은 많은 한국 여행객들을 부르고 있다.특히 쓰시마 북쪽에는 자연을 제외하고는 별로 볼 것도 없는 데도 많은 한국인들

 

이 몰린다. 몇 년 전만 해도 북쪽 항구에는 한국 여객선이 하루 한 편 기항할까 말까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게는 하루에 총 6~8편이 들어가고 나올 정도가 됐다.평일에는 특별한 준비 없이 거의 국내여행 하듯 쓰시마를 찾은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숨막힐 듯한 '취업 전쟁'과 '경쟁'에서 숨 돌릴 곳이라도 찾는 것일까. 사람들이 '과밀화'한 곳에서 '과소화'한 곳으로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부산-쓰시마 두 지역의 거리도 부산-경주의 절반 조금 넘는 고작 50㎞에 불과하다. 특히, 올들어 한·일 정부간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상황속에서도 쓰시마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쓰시마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면세점 쇼핑만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된다는 불만도 갖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한·일 양국간 관계 악화에 따라 한국인의 쓰시마 방문이 중단될 상황을 우려해 한국인을 위한 관광 관련 시설투자도 어렵다고 토로한다. 제주도를 '평화의 섬'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쓰시마가 '평화의 섬'으로 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민들이 공존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일 국가간 관계가 개선되기에는 '산 너머 산'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 있는 작은 국경의 섬에서 평화적 협력을 실험할 필요성은 더 커진다고 생각된다

 

방을 배정 받고 저녁을 먹기 전까지 산책에 들었다. 

닭과 소를 키우고 있었다. 한낮의 닭울음 소리가 숲 속 멀리까지 따라 왔다. 

포장은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다.

여러 종류의 팽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찾는다면 이 보다 훨씬 많은 종을 볼 듯 하다. 달팽이 걸음같은 느림을 이 섬에서 가져보리라  그래서 찬찬히 들여다 보리라 ...

숲은 적막했다.

그리고 습한 기운으로 어디나 녹색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드디어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운 시간이었 난데없는 특강, 준비가 안된 특강,  속으로 땀을 흘려야 했다 

한번이라도 맡줄 긋고 정리를 해봤어야 하는데  후회 막심이었다.

그 무겁고 거시기한 마음을 저녁밥이 지워 주었다.

소라 요리-쓰시마의 거친 바다에서 자란 소라는 신선하고 쫀득쫀득한 육질을 자랑한다. 깨끗한 바다에서 풍부한 해초를 먹고 자라 영양분 또한 풍부하다

방어회

꽃사슴 육회에 멧돼지 수육, 그리고

꽃사슴 육회는 사냥으로 포획한 것이다.  그많큼 개체수가 많다는 것이다.  포획된 꽃사슴은 시청에 신고한 다음 살처분하는데 마리당 1만엔이면 맛볼 수 있다.

쓰시마 야마네코 Prionailurus bengalensis euptilurus

아주 오랜 옛날 일본과 한국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동물로서 약 10만년 전에 당시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던 대륙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며 벵갈 삵의 아종으로 여겨져, 1971년에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4년에 종 보존법에 기초하여 일본 희소야생동식물종으로 지정되었다.

주요 서식지는  광엽수림 계곡, 녹림부, 산중턱 경사면이다. 암컷의 경우  약 1km×2km 범위내에서 생활하며 한 곳에 머무는 습성이 강하다고 한다

수컷의 행동권은 광범위하다. 특히 겨울철에는 암컷의 7배에서 8배까지 확대될 때도 있는데 번식행동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요 특징으로는 이마에는 세로줄무늬가 있고, 귀 끝부분이 둥글다. 몸통이 길고 다리는 짧다꼬리는 길고 두껍다 귀 뒤쪽에 있는 하얀 반점이 있다.

일행들이 밤새 토론이다.  마을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그렇게 밤이 깊었다.

 

노래출처: 다음 블로그 홍이 이뜨리에

Kiss / I Was Made For Lovi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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