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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식탁위의 한국사 外

by 이성근 2013. 10. 12.

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2만9000원 

 

음식은 각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한식은 한국인의 일상이자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는 과연 한국 음식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지은이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 음식의 원형을 찾는 것보다는 한국 음식의 변화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왜 그러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혀야 음식의 역사에 제대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지금의 음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한국 사회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한국 음식의 역사상 분기점이 되는 시기를 다섯 개로 구분하며 각 시기별 음식문화의 특징을 분석한다. 한국 음식사의 첫 번째 분기점은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서양인·중국인·일본인이 대거 유입된 1880년부터 1900년까지다. 이때 각 나라의 음식문화가 국경을 넘어 유입되면서 구한말 조선 사회의 음식 생산과 소비문화를 변화시켰다.

 

두 번째 분기점은 1890년대 이후부터 1940년대까지다. 이때는 조선요리옥과 선술집, 대폿집 등 근대적 외식공간이 본격적으로 탄생한 시기다. 근대적 외식업의 탄생으로 수많은 조선 음식이 식당의 ‘메뉴’로 변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 분기점은 한국전쟁 발발 시기다. 이때 남북의 인구가 전국 각지로 뒤섞이면서 각 지역의 토속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네 번째 분기점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다. 이 시기는 급격한 이농과 도시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타지에서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고향 음식들이 크게 유행했다. 마지막 분기점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990년대 본격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이때는 배달 음식과 값싼 음식, 다국적 음식이 유행했던 시기다.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음식점 사업이 일어난 것도 이때부터다.

 

지은이는 각 시대별 음식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비되고 있는 음식에는 다종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다고 말한다. 음식문화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것은 ‘혼종’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이 개입되고 음식문화가 변천해 왔다는 맥락에서 20세기 한국 음식은 식민주의, 전통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세계체제, 세계화 담론이 ‘혼종’된 결과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국 사회와 음식문화의 인문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주간경향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강준만 지음·인물과 사상사·1만6000원

 

 

프랑스 외무장관 위베르 베드린은 1992년 미국을 규정하는 초강대국(superpower)이라는 표현이 더는 적합하지 않다며, 초초강대국(hyperpower)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경제와 통화, 군사, 생활방식, 언어와 전 세계를 풍미하는 대중문화 상품에까지 미치면서 하나의 사조를 이루어 미국에 적대적인 사람과 나라들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는 정치, 언론, 사회, 역사, 문화 등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 저술활동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초강대국 미국의 면면을 들여다본 책이다. 지은이는 미국을 ‘실용적으로 쿨하게 볼 것’을 제안한다. 친미·반미, 좌·우라는 이념적 이분법을 넘어서 미국을 제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미국 콤플렉스’의 ‘이중성’을 포착한다. 지은이가 말하는 ‘미국 콤플렉스’는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이중성’을 의미한다. 글과 말로는 반미 성향이 농후하지만, 자식 교육만큼은 미국에서 시키는 교수들만 해도 그렇다. 수시로 미국을 드나들며 미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이 대표적인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렇듯 ‘반미’의 언행일치가 안되는 것을 꼭 ‘가증스런 위선’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를 개인 차원의 위선이라기보다는 ‘한국적 실용주의’의 산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약소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존재하는 가파른 ‘지식의 물매’로 인한 현상이라고 봐야 하며, 이는 ‘숭미’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른 실속 챙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념의 프리즘을 벗어버리고 바라본 미국의 모습은 다채롭다. 서부 개척을 통한 프런티어 문화, 아메리카 드림, 자동차 공화국, 민주주의의 수사학, 처세술과 성공학, 인종의 문화정치학, 폭력과 범죄 등의 주제를 다룬다.  왜 4000만 버팔로는 멸종되었는지, 광란의 1920년대에 어떤 저항이 있었는지, 아이비리그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인지, 자동차는 성 문화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포드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쫓아냈는지, 광고와 PR 전문가들은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왜 미국에서는 총이 영광의 상징인지 등 28가지 미국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암 수술·항암치료 하지 말라…진짜든 가짜든 암은 그냥 놔둬라 도쿄 | 서의동 특파원 경향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요령’ 저자 곤도 마코토

 

 

 

ㆍ“건강하던 사람도 암 진단 받으면 쉽게 사망… 현대의학으로 완치 못해 치료는 고통만 가중”

‘암은 방치해두는 게 낫다. 항암제는 효과가 없다. 건강검진은 백해무익하다.’

 

이 책엔 의료상식을 뒤집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런 만큼 논쟁적이다. 곤도 마코토(近藤誠·63) 게이오(慶應)대 의과대학 방사선과 강사가 지난해 출간한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요령>은 출판 불황 속에서도 100만부가 넘게 팔리며 일본 사회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암에는 진짜암과 유사암이 있어 유사암은 방치해도 진짜암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진짜암은 현대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으니 수술과 항암제 치료를 받아봐야 고통만 가중시키고,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어느 쪽이건 수술을 하지 않는 쪽이 고통이 적고 오래 산다.’

 

암은 무조건 수술로 잘라낸 뒤 항암제 치료를 받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는 의료계 내부에서 곤도 강사는 20년 넘도록 이런 주장을 펼쳐왔고,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1973년 게이오대 의대를 졸업하고 1983년에 강사로 승진한 것을 끝으로 ‘출세’ 길이 막혔다. 하지만 <암방치법의 권유> <항암제만은 그만둬라> 등 책을 통해 의료계 암치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해온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사회 각 분야 공로자에 수상하는 기쿠치칸(菊池寬)상을 수상했다. 지난 9일 도쿄 시나노마치(信濃町)의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곤도 강사를 만나 암치료의 문제점을 비롯해 의료 현실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그의 주장이 타당한지는 단언키 어렵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우리의 의료상식을 한번쯤 의심해보는 기회가 되기엔 충분하다.

 

■ 암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차라리 모르핀을 쓰라

- 선생이 주창해온 ‘암방치법’을 설명해달라.

“20년간 150명의 ‘암방치 환자’를 지켜본 결과 수술하지 않고도 고통 없이 짧게는 3년, 길게는 9년까지 생존했다. 반면 수술과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 1년도 안돼 고통 속에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 암 때문이 아니라 수술로 장기를 통째로 잘라내 몸이 약해졌고, 항암제의 맹독에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진짜암은 현대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고, 유사암은 놔둬도 전이되지 않으니 어느 쪽이건 잘라내는 수술은 불필요하다. 암 자체보다 치료가 고통스럽다.”

 

- 건강진단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평소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던 이들이 건강진단에서 암을 발견해 수술을 받은 뒤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나곤 한다. 자각증상이 없다가 검진에서 나오는 암은 대부분 유사암이다. 그런데도 빨리 죽는 것은 수술 후유증이나 합병증, 맹독성 항암제 탓이다. 항암제는 응어리의 크기를 잠시 줄일 뿐 나중에 다시 커진다. 특히 폐·위·식도암 등은 조기수술을 하면 합병증과 후유증이 크다.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할 경우 암세포가 수술로 생긴 상처 쪽에 모여 증식하면서 오히려 암을 재발하게 만든다.”

 

- 수술과 항암제 대신 방사선 치료와 모르핀(아편 성분의 진통제)을 쓰는 게 낫다고 주장해왔다.

“수술하지 않고 놔두면 대부분의 암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 암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모르핀을 쓰는 편이 수술 후유증이나 항암제 치료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쪽보다는 낫다. 모르핀은 마약성분이라고 경원시돼 왔으나 최근 인식이 바뀌면서 일본에서는 사용량이 늘고 있다. 장기를 잘라내면 삶의 질도 크게 훼손된다.”

- 췌장암은 ‘길어야 3개월’이란 게 정설로 돼 있다.

 

“자각증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황달인데 암으로 담관이 좁아지면서 발생한다. 내시경으로 튜브를 집어넣어 담관을 확장하면 담즙이 분비되면서 증상이 완화된다. 수술이나 항암제 대신 이런 치료법으로 3~5년까지 생존하는 환자도 있다.”

 

■ 유방암 수술 하더라도 완전히 잘라낼 이유 없어

- 유방암도 한국에선 잘라내는 것이 보통이다.

“수술을 하더라도 유방을 완전히 잘라낼 이유가 없다. 특히 마모그래피(유방암 조기발견을 위한 X선 촬영)로 발견되는 유방암은 방치하는 편이 낫다. 응어리가 느껴지지 않고 마모그래피로만 발견되는 유방암은 유사암이다.”

곤도의 여동생이 1983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으나 ‘유방온존치료법’으로 치료한 결과 30년이 지난 현재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곤도 강사는 이후 유방온존치료법을 주창해 지금은 일본 유방암 환자의 60% 이상이 이 치료법을 택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 의료계가 매우 싫어하는 주장만 해온 셈 아닌가.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내 주장에 문제가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내 주장에서 확실한 오류를 못 찾았기 때문에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다.”

곤도의 유사암 이론에 대해 일본 외과학회회장을 지낸 원로 고사키 고로(神前五郞·94)가 반론을 제기해 지난달 ‘주간아사히’ 주선으로 2시간여 동안 토론이 벌어졌다. 고사키는 “유사암이 진짜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곤도 강사는 “유사암은 유사암일 뿐”이라고 맞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 선생은 연명치료에도 반대하고 있다.

“병원에 의존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불필요하게 치료를 받다가 수명을 단축하거나 건강이 상한다. 유럽에선 위루형성술(음식물을 투여하기 위해 배를 뚫고 위에 관을 삽입하는 시술)이나 링거는 쓰지 않는다.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면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다. 그런 상태로 1주일 정도 있다가 숨지지만 고통은 거의 없다.”

곤도는 <의사에 살해당하지 않는…> 마지막 장에 자신의 ‘리빙윌’을 실었다. 리빙윌이란 미리 써두는 의료 관련 유언이다. 그는 구급차를 부르지 말 것,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말 것, 튜브를 통한 영양공급 등 일체의 연명의료를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적어 집에 보관해뒀다.

곤도는 올해부터 암환자들에게 치료방법에 대한 상담을 해주는 ‘세컨드 오피니언’을 시작했다. 환자가 주치의 외의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다 적합한 치료선택을 하도록 하는 상담이다. 도쿄 시부야(澁谷)에 있는 곤도 마코토 암연구소에는 매주 평균 50명의 환자가 찾아온다.

 

■ 병원 멀리하고 의사 말도 무조건 믿지 말아야

- 세컨드 오피니언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

“병원의 치료법에 의문을 품은 환자들이 의견을 들으러 온다. 30분 동안 해당 병원의 진단을 전제로 암 종류와 진행 정도 등을 살펴보고 제안된 치료법의 장단점을 조언한다. 진료가 아니라 상담이다. 지금까지 1000명가량을 상담했는데 이 중 95%의 환자에게 다른 치료법을 권했다. 병원에서 ‘수술이나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처방받은 이들이다. 물론 어떤 치료법을 선택할지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다. 유방암의 경우 병원에서 전부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낙담한 환자들이 많은데, 수술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 ‘치료하지 말고 놔두라’고 권하면 기뻐한다.”

곤도는 “한국에서도 최근 상담신청이 왔으나 언어문제로 거절했다”고 말했다. 의료 상담은 매우 민감해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는 키 180㎝에 체중 80㎏으로 일본인으로선 드물게 체구가 크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게이오대 병원으로 4시쯤 출근한다. 운동은 걷기 외엔 하지 않고, 술도 즐기는 편이다. 지금까지 건강진단은 물론 혈압도 재본 일이 없다고 한다.

 

- 식생활에서 주의할 점은 뭔가.

“편식하지 말고 균형 있게 먹으면 된다. 고기, 생선, 달걀, 채소, 탄수화물 등 뭐든지 먹되 밸런스를 유지하면 된다. 커피도 암, 치매예방에 좋다.”

그는 “건강하다면 병원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는 사고로 다치거나 화상을 입거나 아니면 선천적 기형이 있을 때,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이 발생할 경우엔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건장하고 식욕도 있는 사람이 병원에서 불필요하게 치료를 받다가 몸을 상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는 “의사가 말하는 것은 뭐든 믿는 습관도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요령

‘암 방치법’을 주장해온 현직 의사 곤도 마코토(近藤誠·63)가 지난해 말 출간한 책으로 불필요한 검진과 수술, 항암제 치료에서 벗어나 건강한 생활과 편안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47가지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암 조기 발견은 행운이 아니다’ ‘의사의 건강지도는 심장병을 초래한다’ ‘한 번에 3종류 이상 약을 처방하는 의사는 믿지 말라’ ‘유방암 검진결과는 잊어라’ 등이다. 저자는 의료산업 구조상 환자들은 병원과 가까이 할수록 건강이 상하거나 수명이 줄어드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게이오대병원에서 방사선 암치료를 전문으로 해온 저자는 임상경험과 데이터 분석을 통해 암수술과 항암제 치료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온난화 끝, 이젠 빙하기"? '찌라시'에 속지 말자!

[프레시안 books] 오코우치 나오히코의 <얼음의 나이> 신방실 KBS 보도국 기상전문기자

 

 

▲ <얼음의 나이>(오코우치 나오히코 지음, 윤혜원 옮김, 홍성민 감수, 계단 펴냄).

 

얼마 전 빙하기 논쟁이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북극의 얼음이 지난해보다 60퍼센트 더 늘어났다는 영국의 타블로이드판 외신 기사가 그 시작이었다. 곧바로 지구온난화의 추세를 역행하는 듯 보이는 이 현상에 뜨거운 관심이 집중됐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졌다. 미 항공우주국에서 촬영한 북극의 얼음 사진까지 곁들여져 기사의 신뢰도는 높아졌고 다시 빙하기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걱정스러운 반응까지 나왔다.

 

그러나 기후 변화에 관심이 많았거나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소동이 자극적인 제목 뽑기에만 열중하는 일부 언론이 벌인 쇼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여름에는 이례적으로 한반도에 4개의 태풍이 상륙하는 등 모두 5개의 태풍이 영향을 줬다. 지구온난화로 바다의 수온이 높아지면 태풍의 내습이 잦아진다는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올여름은 태풍 발생이 잠잠했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해 태풍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으로 비껴갔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올여름 태풍 발생 기록은 0개로 언뜻 지구온난화의 추세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 같은 기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 년 규모의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일어나는 단기 변동과 수십 년에서 수백 년, 길게는 수십만 년 규모로 일어나는 장기 변동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난해 사상 최대로 녹았던 북극의 얼음이 올해는 그만큼 녹지 않고 남아있다는 현상에서 미니 빙하기 논쟁이 불거져 나온 것은 바로 물결이 출렁이듯 변화하는 단기간의 변동을 장기 변동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벌어진 에피소드다.

 

기후 변화는 수많은 주기의 단기 변동이 모여 장기적인 추세를 이룰 때 나타난다. 북극의 얼음이 매년 늘었다 줄었다하지만 10년 평균이나 20년, 30년 평균을 봤을 때 감소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면 우리는 북극에서 얼음의 감소가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전달은 생략된 채 빙하기, 간빙기 등의 용어만 난무하기 때문에 대중은 쉽게 현혹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장면처럼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쳐 얼음으로 덮인 세상이 될 것만 같은 불안을 자극한다.

 

자연에서 찾는 기후 변화의 증거들

1년에 적어도 두세 차례는 터져 나오는 기후 변화 스캔들에 현혹되지 않고 비판적으로 해독하고 싶다면 나만의 지식이 필요하다. 기후 변화가 무엇인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증거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정리해줄 친절한 입문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너무 어렵지 않고 적당히 학술적이며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얼음의 나이>(오코우치 나오히코 지음, 윤혜원 옮김, 홍성민 감수, 계단 펴냄)가 출간됐다는 소식에 반가움이 밀려온 것은 바로 이런 시기적 적절함 때문이었다. 게다가 책이 서점에 진열돼 독자를 만나는 시기는 IPCC(정부간 기후 변화 협의체)의 5차 기후 변화 보고서가 발표되는 시점과 때를 같이했다.

 

책의 제목은 <얼음의 나이>로 '자연의 온도계에서 찾아낸 기후 변화의 메커니즘'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제목만 봐도 북극과 남극의 대륙 빙하를 시추하는 장면과 과거 빙하기와 간빙기의 반복적인 주기를 나타내는 그래프들이 겹쳐진다. 책의 저자는 일본해양연구개발기구(JAMSTEC)에서 해저퇴적물로 고기후를 복원하는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첫 장을 바다에서 시작한다. 해저 밑바닥부터 켜켜이 쌓여있는 진흙을 시추해 분석하면 1억 년이 넘는 과거의 기후를 해독할 수 있다. 진흙에 섞여있는 플랑크톤 사체나 조개껍데기 같은 다양한 물질을 분석하면 수온이나 강수량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동위원소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동위원소 분석으로 과거 유물의 연대기를 추측하거나 하는 작업이 일상이 되었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동위원소 분석에 필요한 개념식이나 장비 등이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더구나 기후 변화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 거라는 발상의 전환도 어려웠다.

 

<얼음의 나이>는 우선 기후 변화 연구에 동위원소 분석법이 적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지구의 고기후를 복원하는 데 눈부신 역할을 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온난화에 대한 논쟁만을 다룬 책에서라면 결코 접해볼 수 없는 과학적인 지식을 먼저 풀어 가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과학자들은 지구 역사 속에 진행된 기후 변화가 완만한 사인 곡선이 아니라 톱니 모양의 패턴을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빙하기와 간빙기의 구체적인 시점까지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이후에는 기후 변화를 해독할 수 있는 암호를 그린란드와 남극의 대륙 빙하에서 찾게 되는데, 남극 보스토크 빙하는 과거 16만 년 동안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복원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대륙에 눈이 쌓여 얼음 결정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공기는 기포로 갇히게 된다. 따라서 해저 진흙과 마찬가지로 대륙의 빙하를 시추해 공기 방울을 분석하면 과거의 기후를 연대별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경우 역시 동위원소 비를 이용한 분석법이 활용된다.

 

그린란드 대륙에서 처음 시작된 빙하 시추 작업은 미국의 군사적인 목적으로 수행됐다.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덴마크령인 그린란드에 주둔하면서 얼음의 지하 구조를 파악하고 무기를 운반하거나 저장하기 위해 빙하를 깊숙이 뚫어나갔다. 그런데 혼자서 얼음 시료를 구하기 어려워 연구를 접을 뻔했던 한 기후학자가 이 소식을 듣고 빙하 샘플을 얻으러 달려왔다. '대기의 화석'이라고 부르는 얼음 속 공기는 이렇게 처음 분석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그린란드와 남극 대륙뿐만 아니라 히말라야나 알래스카 등지에서도 빙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더 오래된 기후의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해 더 깊은 곳에서 빙하를 시추하는 경쟁도 뜨겁다. 21세기 들어 가장 큰 규모의 남극 빙하 시추 작업은 대륙의 동남쪽에 위치한 돔 C에서 유럽 11개국이 연합해 진행하는 '에피카 프로젝트'다. 이미 3270미터 깊이의 빙하를 시추해 80만 년 전까지의 기후 기록을 확보했다. 일본 역시 1995년에 남극의 대륙 기지에서 깊이 3035미터까지 빙하를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남극 반도의 킹 조지 섬에 있는 세종기지에 이어 장보고 기지를 2014년 남극 대륙에 준공할 계획이다.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시추기를 활용해 100미터 깊이 이상의 대륙 빙하를 뚫어 나갈 거라고 하니 독자적인 기후 변화 연구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기후가 바뀌는 데 수십 년이면 충분하다?

자연에서 과거 기후 변화의 다양한 증거들을 확보했다면 이제 남는 것은 한 가지 질문이다. 앞으로 계속 더워질 것인가, 아니면 추워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후 방정식이 등장하게 될 것인가. 현재로서는 대기 중의 온실가스 증가 추세가 뚜렷하기 때문에 미래의 기후를 지금보다 더워지는 방향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서서히 진행될지, 또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급격하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책에서는 지금까지의 기후 변화가 대체적으로 수만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돼왔지만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단기 변화도 존재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7세기 중세의 소빙하기를 떠올려보면 된다. 영국의 얼어붙은 템스 강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탔고 마을 근처까지 거대한 빙하가 밀려왔다. 당시 급격한 기후 변화의 원인은 화산 폭발에 의한 대기 중 먼지 증가로 태양 복사 에너지가 감소했거나 태양 표면의 흑점 감소 등 여러 가지로 추측된다. 이러한 변화는 정상적인 주기에 의한 기후 변화보다는 단기적으로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속성을 지닌다.

 

소빙하기에 접어들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인류는 큰 변화와 적응에 직면하게 됐다. 방향은 정 반대지만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 어떤 모습일까. 해수면이 상승하면 뉴욕이나 상하이 등 해안가 대부분이 물에 잠기며 대 이주가 시작될 것이다. 폭우와 가뭄, 폭염과 혹한 같은 상반된 기상이변이 지구촌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전염병과 식수 부족에 시달리며 생존을 위해 엄청난 적응 방법을 마련해야할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기후 변화의 주기대로라면 지금 인류는 간빙기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 같은 시기는 앞으로 1만 년 정도 더 지속될 것이고 다음 빙하기에 대한 걱정은 아직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인간 활동이 기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에만 성립하는 얘기다.

최근 발표된 IPCC 5차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현재의 온난화가 인간 활동에 의해 유발됐다는 과학적 근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난 133년간 지구 평균기온은 0.85도, 해수면은 1900년 이후 19센티미터 높아졌다. 이는 지구 자전축이나 공전 궤도의 변화, 태양과 화산 활동 등의 자연적 요인이 아닌 인간에 의한 외부 요인이 초래한 결과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온난화를 불러오는 온실가스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1988년 IPCC가 설립됐다. 당시는 기후가 수십 년만에도 변화할 수 있다는 국제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의미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IPCC의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5차례의 기후 변화 보고서를 내며 지금처럼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것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특히 21세기 말 지구의 평균 기온은 과거와 비교해 최대 4.8도 상승하고 해수면은 최대 82센티미터 높아질 거라는 예측을 최근 발표했다.

 

기후 방정식(f(x))의 변수는 인류

인류는 얼음 속에 묻혀있던 기후 변화의 화석들을 캐내어 과거를 소상히 알게 됐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눈부신 과학적 성과를 보건대 앞으로 닥쳐올 기후 변화를 예상해 그 속도를 가능한 늦추고 대비하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IPCC의 기후 변화 시나리오에는 늘 전제 조건이 따라 붙는다. 온실가스 배출을 당장 적극 감축하는 최선의 경우에서 시작해 현재 추세대로 배출하는 최악의 경우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존재하는데, 시나리오에 따라 100년 뒤의 기온 변화는 최대 2.7도, 그리고 해수면 상승폭은 23센티미터라는 극적인 차이를 불러온다. 미래를 속단할 수 없는 현재의 기후 방정식, f(x)에서 최종 결과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변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소를 타듯 출렁거리는 단기 변동의 흐름이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아직은 낙관할 수도, 비관할 수도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풍요를 가장한 무한경쟁의 쳇바퀴

 

로버트 스키델스키 외 1명 지음/김병화 옮김/1만6000원

 

이 책은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우리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인 동시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매력적인 청사진이다.

케인스는 1930년 발표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경제 성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하는 세상이 100년 후면 도래하리라 전망했다.

8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성장에 관한 그의 전망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이뤄졌지만, 좋은 삶은 가뭇없이 멀기만 하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아들인 철학자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철학과 역사, 경제학의 전망을 한데 합쳐 그 원인을 추적한다. 저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대가로 상상도 못한 힘을 얻은 파우스트 전설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읽는다. 풍요를 위해 채택한 자본주의가 심어 놓은 습관 때문에 우리는 풍요로울수록 좋은 삶을 즐길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렸음을 논증하고 좋은 삶의 요건을 찾아 동서양을 넘나들며 철학과 종교, 역사의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뒤진다.

또 성장 지상주의를 논박하며 나온 행복 경제학과 환경주의의 최근 성과와 한계까지 치밀하게 검토해 좋은 삶을 위한 기본재, 즉 건강과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의 개념을 끌어낸다.

저자들은 "경제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 이러한 기본재를 보장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리 세대의 목표를 변경해야만 파우스트와의 악마적 계약을 끊고 무한 경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김은광 기자 내일신문

 

 

YES24-서평

오늘 우리의 삶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경제 체제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정신적 뿌리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나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면서도『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가 이들 고전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역사의 고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현실로 한 걸음 바투 다가와 끝없는 욕구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성장 지상주의에 맞서 활발히 활동 중인 행복 경제학과 환경주의의 논의조차도 진지한 비판적 성찰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구’에 대한 반론이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관심을 잃고 질문조차 포기한 ‘좋은 삶’이라는 과제를 되살리려는 묵직한 프로젝트이다. 부자 관계인 공저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매력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는 케인스가 살짝 운만 뗀 ‘바람직한 미래상’을 길게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부터 구현해 나가자는 담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1974년 이후 1인당 실질적인 국내총생산Gross Demestic Product, GDP은 2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행복 지수는 거의 높아지지 않았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생활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소득의 절대적 크기와 행복은 무관해지는 것 같다. 이에 따라 행복 경제학은 선진국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국내총생산이 아니라 국내총행복Gross Domestic Happiness, GDH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비판은 외면당하지 않았다. 2010년에 데이비드 캐머론David Cameron(보수당 출신의 당시 영국 총리.-옮긴이)은 전통적인 거시 경제적 지수를 보완하는 새로운 ‘웰빙 지수’를 공개했다. 이제 행복은 진지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 ---p. 165

 

물론 대부분의 행복 경제학자들이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책 방향을 부의 맹목적인 추구로부터 생활 여건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쪽으로 돌려놓으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다른 방향을-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객관적으로’-가리키고 있다. 만약 행복이 잘 사는 것과 내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그저 사적인 기분에 불과하다면, 소마나 두뇌 자극술이 가장 값싸고 효과적으로 행복을 달성해 줄 수단임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왜 우리의 관심이 좋은 삶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행복은 스스로를 돌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가? ---p. 206

 

환경론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외에도 더 있다. 역병과 폭풍우에 대한 예언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겠지만 절제를 권장하기에는 아름다운 방식이 아니다. 덜 채우는 삶이 좋은 삶이며 그 자체로도 더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삶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더 친절하고 아마도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예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근사한 돔과 장식을 선호하던 독일 로코코 양식이 “공포가 아니라 기쁨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공포에 의존하곤 했다. 우리는 기쁨에 의거해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염원한다. ---p. 210

 

개인의 제1목표가 자신의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제1임무는 능력이 닿는 한에서 모든 시민의 좋은 삶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정의의 이 원리는 앞에서 논의된 대로 상호 존중이라는 좋음에 기초한다.) 이때 “능력이 닿는 한”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건강과 우정은 다분히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이에 비해 개성, 존중, 여가는 부분적으로 개별 주체에게 달린 문제이지만 국가는 이런저런 좋음들이 번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고도 정당한 역할을 맡는다. ---pp. 277~278

사실은 최근까지 서방 세계의 공공 정책은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으로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관한 이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념들은 실패할 운명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정치 투쟁에서 패했을 뿐이다. 그 이념들 중에는 공적 생활의 표면 아래에서나 주변부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 있는 것들도 많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사회라는 이념을 중심부의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p. 303쪽

 

1974년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영국 총리가 주당 사흘만 일하도록 했던 두 달 동안 생산에서 손실은 거의 없었다. 1980년대에 폭스바겐 사는 노동자 3만 명을 해고하지 않기 위해 노동 시간을 주당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단축했다. 이때 공장의 재편은 실제로는 생산성을 높였다. 근로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은 공장들이 더 자주 작업 교대를 시켜야 한다는 뜻이므로,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더라도 공장의 가동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되고, 따라서 단위 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p. 318

 

소비는 현대 사회의 위대한 위약僞藥, placebo이다. 다시 말해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노동하는 데 대한 거짓 보상이 되었다. 부모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나 새로운 기기를 쏟아부어서 강박적 소비주의를 물려준다.24 시장에 강요된 여러 가지 혁신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노동 시간이 줄어들지 못하게 막는 소비 경쟁 무대는 그대로 둔 채 주변적인 개선에만 그친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큰 불평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가 일거리는 너무 많이 만들어 내는 데 비해 여가 및 그것에 뒤따르는 우정, 취미, 자원봉사 같은 것은 불충분하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p.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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