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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식물의 성욕은 동물보다 강하다?

by 이성근 2017. 11. 11.

식물의 성욕은 동물보다 강하다?

곤충 유혹 위해 잎이 꽃으로 변신, 잎 벌려 꽃 두드러지게 만들기도

수정 마치면 고개 숙이는 산수국 꽃, 다른 꽃에 수정 기회 넘겨



IMG_8073.jpg » 긴꼬리제비나비 애벌레. 새싹으로 곤충을 배불리 먹인 뒤 식물은 자신의 짝짓기에 바빠진다.

 

봄이 되어 숲의 나무마다 맛있는 어린 새싹을 내어 애벌레를 오동통하게 키울 무렵, 숲에는 짝을 찾는 새들의 다양한 구애 소리로 한바탕 시끄러워진다. 그렇게 숲 속 새들의 결혼 시즌이 시끌벅적하게 끝나면 애벌레와 새를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 나무의 결혼 시즌가 시작된다.

 

1432772436588.jpg » 화분 안에 둥지를 튼 박새 가족.

 

20170518_090246.jpg » 화분 안에 둥지를 튼 노랑할미새.

                            

BJ7I1183.jpg » 딱새 둥지에 탁란한 뻐꾸기.


식물이나 동물이나 살아가면서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때는 종 번식을 위한 결혼 적령기이다. 아래 사진의 원앙도 짝짓기 철 혼인 깃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원앙이 화려한 색을 띠는 이유는 자신의 화려한 깃으로 건강미를 과시해 원하는 짝을 얻기 위해서이다.

 

IMG_4469.jpg » 화려한 혼인 깃으로 장식한 원앙 수컷.

 

덜 알려진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새끼를 기를 때 매와 같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이 먼저 눈에 띄어 희생함으로써 아기 새와 엄마 원앙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원앙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새끼나 둥지가 노출될 위협을 느끼면 날개가 부러지거나 다친 척해서 천적을 유인하는 의태 연기가 아주 뛰어난 새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자식 사랑은 사람이나 새나 모두 같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새끼 원앙이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수컷 원앙의 혼인색도 암컷과 비슷한 색으로 변하게 된다. 더는 천적에게 위험하게 노출되는 화려한 깃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결혼 폐백상을 장식하는 목각으로 만든 다정한 새 한 쌍은 많은 이가 원앙으로 알지만 잘못된 상식이다. 원앙은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폐백상에 적합하지 않다. 폐백상에 오르는 새는 평생 한 배우자하고만 살아가는 기러기 부부이다.

 

고등식물이나 동물들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다양한 환경과 장애를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자손에 변화된 유전자를 남기려 한다. 이를 위해 유전자가 서로 다른 암수가 짝짓기와 수분을 통한 수정으로 새로운 유전자 조합의 2세를 탄생시키는 진화를 이룩했다.

 

식물은 동물의 성기 같은 기능을 하는 암꽃과 수꽃을 만들어 수분하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 이동할 수 없어 꽃가루를 이동시켜 주는 다양한 매개체를 이용해 배우체를 만나 수분한다. 꽃가루를 이동시켜 주는 매개체에 따라 바람을 이용하는 풍매화, 물을 이용하는 수매화, 곤충을 이용하는 충매화, 새를 이용하는 조매화가 있고 때론 동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주로 곤충을 이용하는 충매화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IMG_8625.jpg » 개다래 꽃.

 

위 사진은 숲 가장자리 길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덩굴성 나무인 개다래의 꽃이다. 개다래는 자신의 꽃을 먹는 곤충 등쌀에 꽃을 보호하기 위해 꽃을 잎 뒤에 숨기는 전략을 세웠는데, 정작 결혼을 시켜 줄 곤충까지 꽃을 찾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IMG_7046.jpg » 꽃이 피면 개다래의 잎이 희게 변색돼 곤충의 눈길을 끈다.

 

그래서 개다래는 꽃 피는 시절이 되면 자신을 결혼시켜 줄 곤충을 불러 모으기 위해 잎의 일부를 꽃처럼 화려하게 변장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잎을 꽃처럼 위장해서 곤충들을 유혹한 뒤 수정이 끝나 본연의 임무들 마치면 잎은 다시 광합성 작용을 위해 초록색으로 돌아간다.

 

IMG_9202.jpg » 개화기에 붉게 물든 쥐다래의 잎.

 

개다래와 같은 속인 쥐다래는 개다래보다 더 화려한 분홍색으로 잎을 물들여 자신을 결혼시켜 줄 곤충을 유혹한다.

 

qor.jpg » 백당나무.

 

백당나무 꽃에서 우리가 얼핏 꽃으로 생각하는 부위는 사실 꽃이 아니다. 커다랗게 보이는 꽃 안쪽에 있는 작은 꽃이 열매가 맺는 진짜 꽃이고 밖에 보이는 하얀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멀리서도 곤충을 유혹할 수 있게 꽃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헛꽃이다.

 

IMG_6247.jpg » 불두화.

 

꽃 욕심 많은 사람이 백당화의 꽃을 더 화려하게 보기 위해 열매가 맺는 진짜 꽃을 없애고 헛꽃만 피우게 육종했다. 그렇게 만든 꽃이 불두화이다. 불두화는 꿀이 들어있는 진짜 꽃이 없기 때문에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이 찾아오지 않는다. 사찰 주변에는 불두화처럼 꿀이나 향기가 없어 곤충이 찾지 않는 식물을 심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수양하는 스님이 꽃에 찾아오는 벌이나 나비를 보고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되어서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일 수도 있다.

 

IMG_4742.jpg » 산수국.

 

여름이면 산 계곡 주변에서 다양한 색으로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산수국을 볼 수 있다. 산수국도 결혼할 시기가 되면 아름답고 아주 커다랗게 보이는 꽃이 피는데, 백당화처럼 열매를 맺는 유성화와 꽃을 화려하게만 하는 무성화를 피운다.

 

IMG_9808.jpg » 뒤집힌 산수국 헛꽃.

 

그런데 산수국은 특이하게도 수정이 되면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꽃처럼 화려한 색으로 치장했던 무성화가 신기하게도 본연의 임무를 마친 듯 화려한 색을 빼고 뒤로 벌러덩 뒤집히는 특징이 있다. 수정을 마친 꽃은 이제 열매 맺는 데 집중하고, 아직 미수정인 꽃에게 기회를 넘기는 것 같다.

 

20170601_123049.jpg » 흰 꽃처럼 보이는 산딸나무 총포.

 

사진에 보이는 산딸나무는 공처럼 보이는 곳에 작은 성냥개비처럼 붙어 있는 게 진짜 꽃이다. 꽃이 작은 산딸나무는 총포를 하얗고 큰 꽃처럼 만들어 곤충들을 유혹하는 전략을 가졌다.

 

IMG_4407.jpg » 곤충들 눈에 잘 띄게 잎 사이로 꽃을 들어 올린 피나무.

 

잎이 아름다운 하트 모양인 피나무는 결혼할 때가 되면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잎 아래에 달린 꽃대를 잎 사이로 들어올려 꽃을 피우는 결혼 전략을 쓴다.



IMG_8936.jpg » 곤충들에게 꽃을 잘 보이기 위해 잎을 벌린 찰피나무.

 

위 사진에서 한 아름 화려하게 피어 있는 것은 찰피나무의 꽃이다. 찰피나무는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강한 꽃향기와 함께 곤충이 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잎을 좌우로 벌려 꽃이 잘 보이게 하는 전략을 편다. 결혼할 때는 잎을 펼쳐 광합성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곤충에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위를 지퍼를 열 듯 보여 줘 유혹하는 것이다.

이처럼 식물은 자신의 2세를 만들기 위한 온갖 수단을 써 곤충을 유혹한다. 어쩌면 식물의 성욕은 동물보다 강한지도 모른다. / 17.6.12 한겨레 물바람숲 글·사진 양형호/ 국립수목원 전시교육과 현장전문가

 

애벌레 공격 맞서 잎 변신새 눈 잘 띄게 색깔·빛 조절

식물의 반격도와줘요가설 이어 위장 감소가설 나와  

엽록소 줄여 잎 뒤에서도 보이도록, 잎 색깔도 달라져

 

 새끼에 줄 애벌레를 물고 둥지에 돌아온 박새. 박새는 여러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애벌레를 사냥한다. 그 가운데는 나무가 제공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Rosember, 위키미디어 코먼스

 

먹이를 졸라대는 새끼를 둥지에 둔 박새 어미는 어떻게 애벌레를 그토록 쉬지 않고 잡아오는 걸까. 박새가 나뭇잎을 하나씩 샅샅이 훑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박새는 마치 미리 알고 있듯이 애벌레가 있는 곳을 곧바로 찾아가 쉽사리 잡아낸다. 그 비결은 박새가 애벌레를 찾는 단서가 따로 있다는 데 있다.

 

단서는 애벌레의 공격을 받은 나무가 제공한다. ‘도와줘요가설이 그것이다. 손상을 입은 잎에서 화학적 시각적 단서를 보내 애벌레를 잡아먹거나 기생하는 포식자를 끌어들인다는 것이다(관련 기사: 새에게도 "도와줘요", 식물은 소통의 '달인').

 

실제로 일부 식물은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때 휘발성 유기물질(VOCs)을 방출해 기생벌이나 포식성 진드기를 유인한다. 박새는 이 냄새를 맡거나 시각적으로 벌레 먹은 잎을 단서로 애벌레를 사냥할 수 있다.

 

wo1.jpg » 자작나무 잎을 갉아먹는 나방 애벌레.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진다. 코스키(2017).

 

식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애벌레의 위장을 무력화시키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가설이 최근 나오고 있다. 이른바 위장 감소가설이다.  

애벌레는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한다. 배경색에 녹아드는 색깔을 띠고, 밝게 빛나는 부위에 색소를 많이 넣고 어두운 부위에 적게 넣는 식으로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애벌레는 주변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위장한다. 사진의 애벌레는 나뭇가지 밑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것이어서 윗부분이 더 밝게 색소를 분포시켰다. Gopp pi,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런 위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애벌레의 공격을 받는 나무는 잎의 엽록소 농도를 줄여 빛이 잘 투과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 잎 뒤에 숨은 애벌레도 윤곽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무는 또 공격받은 잎의 색조를 초록이나 노랑 등 더 긴 파장으로 바꾸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나무의 조직적 대응은 애벌레를 주변 환경으로부터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효과를 낼 것이다. 과연 이런 전략은 얼마나 효과를 거둘까.

 

Michael Jastremski_1280px-Apple_tree_leaves_with_insect_damage.jpg » 애벌레에 앙상하게 뜯긴 사과나무 이파리. 식물은 이런 치명적 결과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한다. Michael Jastremski, 위키미디어 코먼스

 

툴리-마르야나 코스키 핀란드 투르쿠대 생태학자 등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행동 생태학과 사회생물학> 530일 치 온라인판에 실린 논문에서 자작나무에 나방 애벌레를 올려놓고 박새를 이용해 이 가설을 정량적으로 검증했다.


실험 결과 애벌레에 잎을 갉아 먹힌 자작나무 잎에서 엽록소 농도가 줄어드는 한편 잎의 콘트라스트를 늘리고 반사하는 빛이 더 긴 파장을 띠는 식으로 변화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 애벌레가 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식물이 변했다.

 

그러나 애벌레를 올려놓은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에서 나타나는 이 차이가 실제로 위장 감소 효과를 거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어느 경우에도 박새는 애벌레를 잘 찾아냈다. 연구자들은 새가 나무의 이런 변화를 얼마나 알고 반응하는지 행동 생태학적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Jon Sullivan _Leaf_1_web.jpg » 애벌레의 공격을 받은 나뭇잎은 애벌레가 새 등 천적에게 더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엽록소 양을 줄여 빛이 잘 투과하도록 한다. Jon Sullivan, 위키미디어 코먼스

 

연구자들은 또 이처럼 애벌레의 위장이 효과를 잃게 되면 장기적으로 2차 방어의 진화를 촉진할 것으로 내다봤다. 포식자에게 발견되는 것을 전제로 화학적 방어물질을 내고 경고색을 띠는 쪽으로 애벌레가 변화할 것이란 얘기다. / 한겨레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식물은 '카메라 노출계'로 주변을 본다

피토크롬 단백질로 주변의 빛 감지, 구불구불 유연하게 자라

빛을 가릴 상대 있으면 성장 멈추고, 두 나무가 '혼인목' 이루기도

 

01.jpg »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란 비술나무.

 

» 어릴 때 주변 계수나무에 치어 분재처럼 이리저리 굽어 자란 비술나무. 

무슨 나무일까? 이 나무는 상처 난 곳에서 하얗게 수액이 흐르는 모습이 비가 술술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비술나무라 부른다. 위와 아래 사진의 비술나무는 모두 같은 나무임에도 자라는 모습은 확연히 다른 나무처럼 보인다.

   

이유는 이렇다. 위 사진의 비술나무는 주변에 자신의 생장에 방해가 되는 나무가 없어 자기 마음대로 고유의 형질대로 자랄 수 있었다. 반면 아래 비술나무는 주변 계수나무에 갇혀 어릴 때 많은 방해를 받고 자랐다.

 

생존에 필요한 빛을 찾기 위해 가지를 이쪽저쪽으로 뻗어 헤매다가 결국 요가를 하듯 줄기와 가지가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졌다. 마치 분재처럼 자라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래 사진의 비술나무는 자신의 주변에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사람들 몰래 줄기에서 손을 꺼내어 주변을 더듬어 보는 것은 아닐까?

 

그 비밀은 식물이 카메라에서 빛을 감지하는 노출계처럼 주변의 빛을 감지하는 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피토크롬(phytochrome)이다.

피토크롬은 식물이 지닌 단백질 색소의 하나로 빛의 유무, 일조시간, 빛의 특성에 따라 식물의 성장이나 발육 등 식물 전체의 생리작용을 조절한다. 피토크롬이 식물의 생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두 나무가 인접해 한 나무처럼 자란 구상나무 '혼인목'.

 

다른 각도에서 보면 두 나무임이 분명해 보인다.

위 사진 속 나무는 국립수목원 전시원에 식재되어 있는 구상나무이다. 멀리서 보면 위쪽 사진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보면 구상나무 두 그루가 합쳐져 있는 형태로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그루의 나무가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두 나무가 결혼했다고 해서 혼인목이라 부른다.

 

혼인목은 피토크롬의 기능에 의해 서로가 마주보는 방향으로는 가지를 뻗지 않고 장애물이 없는 쪽으로만 가지를 뻗어 자란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힘을 합쳐 살아가듯 혼인목도 두 나무가 서로 상대방을 보호해 주며 살아간다.

 

이렇게 두 나무가 어우러져 부부처럼 함께 살아가다 인위적으로 한쪽 나무를 베거나 옮기게 되면 홀로 남은 나무는 홀아비나 과부처럼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없게 된다. 숲은 이렇게 나무와 동식물이 수많은 혼인목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숲 공동체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식물의 눈인 피토크롬이다.

 



의지해 자라던 혼인목이 태풍에 쓰러진 뒤 균형을 잃은 향나무.

 

위 사진 속에 나무는 국립수목원 양치식물원에 식재된 향나무인데 지난해 태풍의 피해를 입어 혼인목의 형태를 잃게 되었다. 빨간색 원 부분에 다른 향나무가 식재되어 있었는데 태풍피해로 쓰러져 베어냈다.

 

지금 살아남은 향나무는 이전에는 혼인목 형태로 잘 자랐지만 지금은 파란 타원형 안에 보듯이 가지도 없고 휑하니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무게 중심을 잃지 않게 지지대를 의지하고 있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빛이 적은 곳으로는 가지를 뻗지 않고 빛이 많은 곳으로만 가지를 뻗지만 대부분의 활엽수는 무조건 가지를 뻗은 뒤 빛을 찾아 이리저리로 휘어지는 성질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회화나무, 느티나무, 풍게나무, 귀룽나무 등인데, 이들은 가지를 뻗어 자라다가 장해물을 만나면 이리저리 장해물을 피해서 휘어 자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무에 따라서 빛에 반응하는 정도는 모두 다른데 피토크롬이 제일 발달되어 있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배롱나무다

 

빛을 찾아 이리저리 휘어지며 자란 배롱나무.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배롱나무는 빛을 찾아 새싹을 뻗다가 주변의 다른 가지나 다른 나무를 만나면 정아를 버리고 측아로 자라 주위의 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유연할 수 있는 비결은 피토크롬을 이용해 겨울눈의 정아와 측아 성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빛을 고르게 받아 사방에 헛꽃을 피운 백당나무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헛꽃을 피우지 않은 백당나무.

 

백당나무와 산수국은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헛꽃을 만든다.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쓰는 아주 어려운 생리작용이기 때문에 백당나무와 산수국은 다른 잎에 가려 곤충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헛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뭇잎에 가린 곳에는 헛꽃이 피지 않았다.

 

그곳에서 낭비되는 에너지를 아껴서 꼭 필요한 다른 곳으로 보내주려는 생존전략이다. 백당나무와 산수국 사진을 보면 나뭇잎이 가리지 않은 곳에선 헛꽃을 가득 만든 반면 꽃이 나뭇잎에 가려진 부분에는 헛꽃을 만들지 않았다.

 

마치 가지 끝에 눈이 있는 것처럼 다른 가지가 있는 곳을 피해 자란 구실잣밤나무.

 

위 사진은 제주 돈내코 계곡에서 담은 구실잣밤나무를 하늘 방향으로 촬영한 모습이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을 때 다른 가지와 닿는 곳을 따라 숲 틈이 생겼다. 구실잣밤나무가 자신의 곁에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더는 주변으로 가지를 성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물들도 생존 경쟁을 위해 많은 전략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이경준. 1993 수목생리학

남효창. 2008 나무와 숲

강혜순. 2002 꽃의 제국

이나가키 히데히로. 2006 풀들의 전략

 

·사진 양형호/ 국립수목원 산림자원보존과 현장전문가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

'붉은 나비는 가짜 봄, 흰나비는 진짜 봄

춘분

 

개구리 알 낳자 올챙이 주식인 물장군도 잠 깨어나

생태계 먹이사슬 톱니바퀴 착착 맞물리는데, 인간만 철없어

 

산마늘s.jpg » 명이나물로도 불리는 산마늘이 어린 싹을 탐스럽게 밀어올렸다. 봄은 이제 거역하기 힘든 기세로 왔다.

 

봄은 보임의 준말이라던가. 은밀하게 태동을 준비하던 모든 생물이 불같이 일어나 일제히 활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어 봄이라 했다. 경칩이 천둥소리에 놀라 벌레가 깨어나는 시기라면 춘분은 훈풍으로 모든 생물을 움직인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훈훈한 바람이 잠자는 나무를 깨우고 긴 터널 같은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던 생물들에게 빛을 선물한다.

 

오늘은 춘분. 낮과 밤 길이가 같아져 생물이 자기의 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절기이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해 새벽 6시면 주위가 훤하다. 우뚝 서 있는 나무에 아직은 앙상한 가지만 있고 숲은 갈색이지만 주변은 점점 푸르러지고, 녹색 속도에 따라 연구소 주변을 산책하는 기분도 함께 상쾌해진다. 그 순간 봄 향기에 취한 꿀벌이 윙윙거리고, 따스한 불 켜지듯 나비가 난다. 영혼과 동의어인 나비(Psyche)는 영적이어서 '절대미'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발밑에서 수컷 노랑나비 두 마리가 날아올랐다. 아직은 몸이 덜 덥혀졌는지 힘껏 날지는 못해도 서로 뒤엉키면서 하늘 높이 날아 아득해졌다. 옛날 어르신들은 빨간 나비가 날아다니면 아직 봄이 안 온 것이고, 흰 나비가 날면 진짜 봄이 온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빨간 나비는 몸 색깔이 전체적으로 붉은 네발나비나 뿔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종류일 것이고 흰 나비는 배추흰나비, 대만흰나비, 노랑나비와 같은 흰나비과 나비를 말하는 것이다.

 

붉은 나비 종류는 어른벌레로 겨울을 나는 반면,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나는 흰 나비 종류는 일정한 온도가 계속 이어지며 쌓인 온도(적산온도)가 충족되어 날씨가 따뜻해져야만 어른벌레로 날개를 달고 나온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기온이 급상승하거나 일조량이 많아질 때 반짝 하고 활동하는 네발나비나 뿔나비와는 달리 완연한 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선 흰 나비를 만나 볼 수가 없다. 나비 종류로 진짜 봄인지 가짜 봄인지를 맞추는, 재밌고도 정확한 이야기다.

 

상사화s.jpg » 상사화의 어린 싹.

 

처음이 아니지만 숲 속에 있다 보면 봄은 늘 나무, 바람, , 나비가 자꾸 말을 걸어오는 참 좋은 때다. 날은 한결 풀렸어도 강원도의 해발 450m 높은 지대에 자리한 연구소는 아직도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차가운 겨울이다. 목련과 산수유, 매화와 개나리가 한창이고, 꽃향기 전해주는 남녘의 성큼 다가온 봄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숲은 쌀쌀한 가운데 봄기운이 스며있다. 기어이 봄은 오고 있다.

 

밤사이 얼었던 물방울이 낮이 되면 녹았다 해가 지면 다시 얼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봄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날씨가 해가 길어지면서 꽁꽁 얼었던 땅이 녹고 있다. 해가 진 뒤에도 아직 잔 빛이 남아 있고 그 기운으로 3번째 껍질을 벗은 4령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늦게까지 일광욕을 한다. 겨울에 발육과 성장을 하는 특별한 생활사 덕분에 천적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들에게 혹한은 축복이었다.

 

생강나무의 샛노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고, 목숨 줄 잇는 명이나물이라고도 하는 산마늘이 마늘 맛과 향이 물씬 나는 시퍼런 잎을 꼿꼿이 세우고 봄을 즐기고 있다. 언 땅 수북이 쌓인 낙엽사이로 이별의 슬픔같은 상사화가 늦은 삼월의 아침 햇살을 맞고 있다.

 

쇠딱따구리와 박새.jpg » 박새()와 쇠딱따구리가 나무에서 애벌레를 찾고 있다.

 

돌배나무 껍질을 두드리며 쇠딱따구리는 연신 애벌레를 주워 먹고, 쇠딱따구리를 자세히 보려고 카메라를 당겨보자 돌배나무에 둥지를 튼 박새도 열심히 애벌레 찾기에 나섰다. 마음 바쁜 각시멧노랑나비는 벌써 애벌레가 먹을 식량인 갈매나무에 삐죽하게 생긴 알을 가지런히 낳았다.

 

각시멧노랑나비 알.JPG » 각시멧노랑나비가 갈매나무 어린 잎에 알을 낳아 놓았다.

 

저녁 7시 곤충 채집을 위해 불을 밝히자 북방겨울가지나방, 검은점겨울자나방, 흰무늬겨울가지나방 그리고 보온을 위한 털이 가슴에 수북한 털겨울가지나방이 차례로 인사한다. 저온에 활동한다는 뜻의 겨울이 이름에 들어있는 나방으로 딱 이 때쯤 활동하는 곤충이다.

 

Light trap 313.jpg » 313일 밤에 불을 켜고 나방을 유인해 채집하는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연구원들.

 

흰무늬겨울가지나방.jpg » 불빛에 이끌려 찾아온 흰무늬겨울가지나방.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곳곳에 자리한 크고 작은 연못에도 봄은 와 있다. 알 속 올챙이들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고, 도롱뇽 알 꾸러미도 연못 가장자리에 자리 잡았다. 새끼 손톱만한 버들치 치어들도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수온이 5도를 넘어가자 물가 주변의 수초더미에 몸을 걸고 숨구멍을 밖으로 내어 월동하던 물장군이 서서히 몸을 추스른다.

 

지난해에는 216일 전후해서 북방산개구리들이 알을 낳았고 2015년에는 217일께 알을 낳았지만, 며칠간 계속된 강추위로 알 전체가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재앙을 맞았다. 연구소 주변에 올챙이 씨가 마르면서 물장군 새끼들에게는 시기적으로도 딱 맞는 가장 좋은 먹이인 올챙이를 구하러 전국을 헤매었다.

 

올해는 경칩을 지난 312일께부터 북방산개구리가 비로소 알을 낳기 시작해 올챙이가 잘 자라고 있다. 몇 년에 걸쳐 철모르고 괜히 서두르다 일찍 알을 낳고 제 명에 못 살고 전멸한 기억을 갖고 학습한 때문인지 이번에는 철을 맞췄다.

 

개구리 알이 올챙이가 될 때쯤 물장군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을 것이다. 다시 열흘쯤 지나면 알에서 첫 번째 애벌레가 깨어날 것이다. 그 때쯤 물장군 애벌레가 먹기 좋을 만큼 올챙이가 클 것이다. 식성도 까다롭고 기아 상태였던 그들을 키운 지 10,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담보해야만 하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철따라 나타나는 다른 생명으로 먹이를 제공하면서 멸종위기 곤충 물장군의 목숨만을 연장하고 있다.

 

올챙이는 물장군 새끼에게는 가장 좋은 먹이여서 그들 삶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월동하던 애벌레가 움직이자 박새와 쇠딱따구리가 새끼를 키우기 시작한다. 새순이 나오는 시기와 새로운 생물이 출현하는 철에 맞춰 촘촘한 먹이 사슬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생태계가 작동하고 있다.

 

월동 중인 물장군s.jpg » 꽁무니를 물 밖에 내놓고 겨울잠에 빠진 물장군. 주 먹이인 올챙이가 깨어날 때에 맞춰 알을 낳는다.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새마을 운동을 되살리겠다 하고, 아예 친일·독재를 미화한 거꾸로 가는 국정 역사교과서로 역사를 되돌리려 했다. 역사의식이 없으니 철천지한인 위안부 문제를 제멋대로 봉합하고 실익을 따져 국익을 찾아야 할 외교는 없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언행에는 성찰과 반성의 진정성은 전혀 없다.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잘 버텨준 국민들에게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이 철없이 자기 목소리를 시끄럽게 내면서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백성의 마음을 훔친 도적이 아니라 백성의 행복을 훔친 도적이 되었다.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위험과 고통만 남겨준 철모르는 철부지 대통령이었지만, 이제라도 생태학적 반성의 안목을 가져 철이 들어보라. /·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경칩

 

6개월째 기다린 호랑나비과 나비 번데기, 껍질 속에서 발육 시작

나비에 중요한 생식기와 나비 만들며 껍질 속에서 비상 준비

 

호랑나비의 번데기(왼쪽)와 어른벌레. 온도가 문턱을 넘으며 번데기 속에서 발육이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라면서 한 밤중에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번개와 큰 천둥소리에 놀란 시민들이 소방안전본부에 걱정하는 문의전화를 걸기도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 무렵에 그 해 첫 번째 천둥이 요란하게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깜짝 놀라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개구리 입 떨어진 날, 경칩.

 

봄에 들어선 지 한 달여. 입춘과 우수 그리고 경칩까지, 봄의 전령 3종 세트가 다하니 이제 비로소 봄이다. 널뛰듯 아침, 저녁으로 온도가 오르내려 일교차가 크고 주기적으로 추위와 따뜻함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을 따라주지 못해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 하지만 늘 그렇듯 그럴 때다. 기온은 날마다 상승하며 마침내 봄으로 향하게 된다. 따스한 정겨움이 느껴지는 계절. 이미 봄은 왔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기 시작해 땅을 갈아야 할 이때쯤 농촌은 매우 바쁘다. 동네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올해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할지 새해 영농 설계하느라 분주하다. 요즘은 곤충과 씨름하느라 산골짜기에서 꼼짝 못해 동네일과는 교류가 적은 편이지만, 이사 온 지 고작 2년 반밖에 안 된 나에게 동네 이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겁도 없이 덜컥 이장을 맡은 게 2000. 그때는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영농회의에서 주민들과 열심히 소통하며 이장으로서 주민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3년 동안 연구소가 아닌 동네 일로 헛발질 한 '잃어버린 40'로 표현하곤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값진 시기였던 것 같다. 동네 어르신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장 일을 어렵지 않게 수행하면서 머리를 맑게 하는 노동의 가치를 알고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세월의 마디를 느끼지 못하고 자연의 변화에 무딘 채 도시내기로 40여 년을 살다가 산속 오지의 이장 일을 하면서 때에 맞춰 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꼬리명주번데기s.jpg » 꼬리명주나비의 번데기. 경칩쯤 온도가 13도에 이르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꼬리명주나비s.jpg » 꼬리명주나비 어른벌레.

 

봄이 오면 인간 생태계만 바쁜 것이 아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겨울의 기운을 몰아내는 힘 센 봄이 되면 온도가 오르고 바람이 따뜻해지면서 변온동물인 월동 곤충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겨울 탈출을 시작한다.

 

월동 형태는 알, 애벌레, 어른벌레 등 다양하지만 호랑나비과 곤충 대부분은 번데기로 월동한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번데기는 그저 둥그런 몸뚱이로 보이나 몸속에서 어른나비가 갖출 생식기와 날개를 만드는 곤충 생활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혁명적 시기다. 특별한 방어 전략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극히 위험한 방식이지만 대부분의 호랑나비과 곤충들이 선택한 방식이다.

 

어른벌레나 애벌레로 월동하는 형태는 온도가 상승하면서 다소나마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지만 두터운 껍데기에 쌓여있는 번데기는 과연 어떤 반응을 시작할지 자못 궁금했다. 2008년부터 호랑나비과 월동형 번데기를 대상으로 인큐베이터에서 5가지 온도를 적용해 온도 발육 실험을 통한 기후변화 연구를 수행했다. 번데기 안에서 언제 발육을 시작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나비가 되어 나올지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번데기 내부 사정을 알게 됨으로써 기후변화에 따라 언제, 어떻게 발생하는지 패턴 예측이 가능해졌다.

 

우리 인간 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특별한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곤충은 자신들의 통신수단을 통해 외부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지속적으로 기온이 올라가면서 나뭇잎에, 나뭇가지에, 줄기에, 땅바닥에 은밀히 붙어있던 번데기에 신호가 전달돼 온도에 맞춰 각자 발육을 시작한다.

 

애호랑나비번데기s.jpg » 애호랑나비의 번데기.

 

애호랑나비s.jpg » 이른봄에 출현하는 애호랑나비 어른벌레.

 

발육을 시작하는 발육 임계온도가 12.373인 꼬리명주나비 번데기는 엊그제 한낮 기온이 13도를 넘었으니 아마도 외부 온도 변화의 메시지를 얻어 훈훈한 기운을 타고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애호랑나비(8.088)와 긴꼬리제비나비(7.945)와 호랑나비(10.494)는 벌써 우수께부터 발육을 시작했다. 일단 발육을 시작하는 문턱만 넘어서면 속도감 있게 진행한다. 혹한의 조건에서 살아남은 번데기가 꿈틀거리는 그 시간 동안 밖에서는 유채꽃이 피고지고, 바람이 불다 멈추기를 반복할 것이다.

 

지난 가을 번데기를 만든 후 약 6개월을 기다리며 끊임없는 외부와 교신하며 발육을 시작했고, 차근차근 쌓인 온도(적산온도)가 충분해지면 아름다운 나비로 날아오를 것이다. 매일 매일 쌓아 온 온도뿐만 아니라 번데기에서 나비로 환생할 때쯤이면 기막힌 타이밍으로 애벌레가 먹어야 할 양식인 쥐방울덩굴이나 족도리풀, 산초나무에서 새로 돋은 어린 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모든 생물이 몸을 사리는 한겨울에 부화해 1령 애벌레였던 붉은점모시나비가 80여 일만에 껍질을 벗고 2령으로 컸고 다시 10일 만에 세 번째 애벌레로 성장했다. 몸 양옆으로 띠를 이루던 붉은색 원형 점에 뚜렷하게 노란색 점이 덧대어져 2령 애벌레보다 훨씬 화려해졌다. 머리 크기도 약 1.3mm1.5배 컸다. 붉은점모시나비 사육의 일등 공신인 아내가 먹성이 좋아진 3령 애벌레 먹이를 갈아주다가 꿀벌에 쏘였다. 봄을 알리는 벌이라 반가워서 윙윙거리는 꿀벌 소리를 듣고도 설마 쏠까조심하지 않아 목 주위가 퉁퉁 붓는 호된 신고식을 l치렀다. 이젠 완전히 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설이 통용되던 중세와 근세만 해도 나비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가 가을이면 사라지는 별종이라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혹한을 견디고 번데기에서 몸을 빼 날개를 다는 고난의 세월을 극복한 후에야 나비가 되는 과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용을 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사슴 머리에 돋은 녹용을 빼내는 특별한 기술을 빗댄 것에서 유래됐다고 하지만, 곤충학자인 필자가 생각건대 한꺼번에 모아서 내는 큰 힘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용(: 번데기)의 행동학적 특성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다가 시간이 지나 어쩌다 어른이 되겠지만 어쩌다 나비는 없다. 역시 어쩌다 민주주의도 없을 것이다.

 

우수 봄맞이

우수맞은 자연은 봄맞이 움직임 시작, 마지막 추위 이겨야 찬란한 봄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는 이미 껍질 벗고 2령 돌입, 옆구리 붉은점 드러나

 

이른봄을 알리는 생강나무의 어린잎이 돋았다. 차로 마시면 좋다지만, 언감생심, 애벌레 먹이로 남겨두어야 한다.

 

따가운 찬바람은 어느덧 기분 좋은 부드러운 바람으로 바뀌어 얼굴을 간질인다. 얼굴에 부딪히는 체감온도로는 봄이다.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는 영하의 기온에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성큼 봄이 오고 있다. 아직 녹지 않은 하얀 눈을 배경으로 생강나무 가지 끝에 맺힌 연둣빛 꽃눈이 꿈틀거리며 생기가 넘친다.

 

연구소 산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생강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식물로 꽃과 가지를 잘라 문지르면 진짜 알싸한 생강 향이 난다. 어린싹은 작설차(雀舌茶)라 하여 어린잎이 참새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따서 말렸다가 차로 마시면 좋다 하지만 아직 연구소에서는 마셔 본 적이 없다. 어린 생강나무 잎만 먹는 흰띠왕가지나방이나 가두리들명나방애벌레를 생각하면 내 몸에 좋다고 곤충 밥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218일은 우수(雨水). ‘봄 눈 녹듯이란 말이 아직 이곳 산속에서는 이르지만 매서웠던 막바지 한파가 물러가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땅 위의 눈과 얼음이 녹아 질퍽해지고 이맘때쯤 내리는 봄비로 겨울의 건조한 대기가 촉촉해지면서 날이 많이 풀린다는 절기다.

 

땅을 갈아야 할 이 시기의 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촉촉하게 적셔진 땅으로 대지가 물을 머금어야 씨앗들이 마르지 않고 생기를 되찾아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리고 물이 스며들어 땅이 좀 물러져야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애벌레가 땅을 쉽게 뚫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물은 모든 생물에게 생명 그 자체다.

 

수노랑나비 애벌레s.jpg » 수노랑나비 애벌레가 낙옆 뒤에서 봄 기운을 느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계절마다 풍경이 다르고 절기별로 생물들 사는 모습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이때야말로 절기 따라 자연의 변화가 확연히 전해오는 때다. 마치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는 것 같은, 세상 가득한 에너지를 느낀다.

 

우리나라와 같은 온대지방에서 겨울은 뭇 생명에겐 치명적인 생존조건이 된다. 철 따라 움직이는 여름 철새들에게 바다나 사막, 높은 산과 강 같은 장벽을 넘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 하나 감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추운 날씨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환경 조건이어서 따뜻한 남쪽 나라로 이동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보다 훨씬 더 추운 시베리아에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우리나라로 이동해 오는 겨울 철새도 있지만.

 

그러나 멀고도 험하며, 생태적으로도 이질적인 산과 강, 바다와 사막을 건널 자신도, 방법도 없는 곤충은 자신들이 살던 그 공간에 남아 있으면서 혹한의 조건을 견뎌야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에너지를 저장하고 모든 발육은 중지한 채 추위를 버틸 수 있는 내한성 물질을 만드는 생리적 프로그램으로 대체한다.

 

겨우내 몸을 얼지 않게만 하던 생리 프로그램들이 이 무렵 생식 활동에 장애가 되었던 영하의 조건이 바뀌면서 발육을 재개한다. 매일 매일 낮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올라가는 온도나 햇빛의 양이 곤충의 휴면을 끝내기 위한 특별한 자극인 셈이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 10도를 오르내리며 따뜻해진 봄 햇살에 꿈틀거리며 외부 세상을 향한 창문 역할을 하는 각종 감각기가 적당한 반응을 시작한다. 길섶으로 잠시 발을 들여 아직 월동 중이나 따뜻한 온도에 살짝 반응하고 있는 곤충 애벌레들을 관찰한다.

 

생명 담은 들이 움직이고 있다

 

별박이자나방.jpg » 별박이자나방 애벌레 수십마리가 그물 둥지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붉은 경계색으로 무장한 지옥독나방애벌레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형적으로는 복슬복슬한 털이 많아 따뜻하게 생겼고 아름답지만 독으로 찬 가시 털을 갖고 있어 작아도 무시무시하다. 툭 건드리자 조금씩 몸을 놀린다.

 

사계절 늘 푸르고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의 적갈색 줄기에 들러붙어 갈색 몸에 털로 무장한 솔송나방 애벌레도 스며들 듯 살고 있다.

 

쥐똥나무잎 사이에 별박이자나방 애벌레 수 십 마리가 집단으로 하얀색 실을 내어 커다란 그물 모양의 집을 만들었다. 끈끈하고 탄력성이 좋은 그물로 방어막을 치고 떼 지어 버티는 집단선택을 통해 겨울을 나고 있다.

 

쥐빛비단명나방은 잎끝과 끝을 동그랗게 말아 잎 전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엉성하지만 몸의 크기에 맞춰 집을 만들고 들어온 햇볕을 가두어 따뜻하고 넉넉하게 이용한다. 바람 막고 천적 막는 은신처였던 집을 겨울 눈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게 가지에 실로 꽁꽁 묶어 놓았다. 궁금하여 집을 살짝 열어보니 잘 있다.

 

두줄푸른자나방 애벌레-s.jpg » 두줄푸른자나방은 나뭇가지 형태로 위장한 애벌레 상태로 겨울을 난다.

 

두줄푸른자나방은 몸을 웅크린 채 겨울을 나는 동안에도 나무줄기 곁가지처럼 뻗어 나간 모습으로 위장하며, 수노랑나비, 왕오색나비 애벌레들은 자신의 모습이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게 팽나무 갈색 잎과 하나 되어 숨을 고르고 있다.

 

완연한 봄이 되어 풀과 나무가 푸르러지면 애벌레도 푸르러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저마다 온 힘을 다해 겨울을 보내고 찬란한 봄을 기대하지만 과연 얼마나 생존할지는 미지수다.

 

아무것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고, 모든 생물이 죽은 듯이 몸을 사리는 시련의 계절, 겨울 한복판인 12월에 부화해 1령 애벌레였던 붉은점모시나비가 조금씩 기린초를 먹더니 알에서 나온 지 80여일 만에 껍질을 벗고 2령으로 컸다. 다른 애벌레처럼 에너지를 저장하고 겨울의 추운 조건을 견뎌내는 월동시스템이 아니라 발육을 한다는 증거다.

 

la1.jpg » 겨우내 자라 껍질을 벗고 2령에 돌입한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 특유의 붉은점이 몸에 나타났다.

 

1령 애벌레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점모시나비의 특징적인 붉은색 원형 점이 뚜렷하게 몸 양옆 숨구멍 주위로 띠를 이루어 화려해졌고 크기도 2배가량 커졌다. 크게 자란 몸체에 맞는 많은 양의 먹이를 먹기 위해 더욱 크고 단단한 입틀(Mouthparts)을 가져야 하므로 머리도 약 1.3배 컸다.

 

머리를 제외한 몸통의 껍데기 부분은 아주 딱딱하지 않은 큐티클이라서 신축성이 있고 어느 정도 성장이 가능하나 머리는 딱딱한 캡슐 같아서 크기 위해서는 완전히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발육 단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머리 크기를 측정하는 일이다.

 

head.jpg »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1령부터 4령까지 머리 크기 변화

 

2령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열심히 먹고, 껍질을 벗는 성장 속도에 가속을 붙여 12일 후면 또 한 번 탈피하고, 대략 100일 후면 아름다운 태양의 신’(Apollo Butterfly)으로 환생할 것이다.

 

분명 봄이 아닌데도, 늘 깊은 산 속에서 생물과 붙어 지내는 필자는 산중에 심어진 많은 꽃나무와 풀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를 느낀다. 자연의 속도를 맞춰 천천히 일상을 준비하면서 이 숲에서 생물의 생존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삶이 풍요롭다.

 

때때로 까칠한 바람이 빗장을 채워도 봄을 막을 수 없다. 국정 농단에 세상이 요동쳐 혼란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정해진 대로 무심히 흐르고 있다.

 

입춘이 반가운 겨울나비, 네발나비와 각시멧노랑나비

눈속에 나오는 네발나비, 각시멧노랑나비

어른벌레로 겨울 나다 이맘때 양지바른 낙엽 위에 나와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는 추위 견디고 알은 더위 이겨

 

1네발나비 월동형.jpg » 겨울에도 나비가 있다. 눈밭 낙엽 위에 네발나비가 햇볕을 쪼이고 있다.

 

겨울 끝자락인 입춘 즈음에 몰아친 만만치 않은 강추위와 폭설로 가장 겨울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아직은 겨울로 메마른 들판의 갈색과 주변의 흑백이 더 황량하게 다가온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끝장 추위로 실내에서 꼼짝달싹 못하던 그때 비하면 많이 누그러졌지만 아직 봄 내음 가득한 봄은 아니다. 그러나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지만 때때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에도 꿈틀대는 생물들을 볼 수 있다.

 

창백하게 바랜 날개로 겨울 버텨

계절의 변화와 그 변화의 철이 봄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 입춘만큼 어울리는 날이 없다. 아직 춥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낮 기온이 영상으로 돌아오면서 어김없이 절기가 이름값을 한다. 곤충에 딱 꽂혀 연구소를 열고 벌레에 몰두한 지 21년이나 되었지만 이때쯤 들로 산으로 곤충 마중하는 일은 아직도 설렌다.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면 미리 온 봄을 만날 수 있다. 숲 속 어딘가에서 추운 겨울을 나느라 온몸을 웅크리고 낙엽 밑에서 월동하던 네발나비가 한낮 영상의 기온으로 잠깐 따뜻해지자 햇볕을 쬐느라 외출했다. 잔설 속에서 갈색 낙엽에 몸을 기대어 위장하고 앉아 양지바른 곳에서 일광욕하며 체온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봄이 아주 멀지 않은 것 같다.

 

낙엽 속에서 뭔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날개가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하얗게 낡아빠진 각시멧노랑나비가 날아오른다. 그 고운 노란 빛은 어디로 간 것인지, 날기도 버거워 보이는 찢어진 날개는 겨울이라는 큰 고비에 대항해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각시멧노랑나비 월동형.JPG » 겨울을 나는 각시멧노랑나비의 날개가 창백하다.

 

아직 겨울인데 각시멧노랑나비를 만나볼 수 있다니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된다. 완전한 봄이 올 때까지 푹 자고 에너지는 최대한 아껴두었다가 봄이 되면 짝짓기에 온전히 다 써야 할 텐데변온동물이라 외부 온도가 상승하면서 체온이 올라가 그저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각시멧노랑나비도 부쩍 올라간 온도를 주체 못 하고 잠시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가을에 어른벌레가 되는 가을형 네발나비는 어른벌레 상태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까지 활동하니 어른벌레 수명이 약 여섯 달은 되는 셈이다. 각시멧노랑나비는 6월께 어른벌레가 되어 월동한 후 다음 해 짝짓기할 때까지 약 10개월을 사는 셈이다.

 

네발나비나 각시멧노랑나비 등은 겨울이라도 일시적으로 기온이 급상승하거나 일조량이 많아질 때, 즉 한낮 기온이 5도 이상이 되면 반짝 활동하는 나비로 개월 수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긴 겨울을 견뎌온 한 살배기들이다.

 

각시멧노랑나비2.jpg » 여름철의 각시멧노랑나비.

 

많이 받는 질문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나비는 혹은 곤충은 얼마나 살아요?”인데, 종류마다, 또 같은 종 안에서도 어느 계절에 나오느냐에 따라 수명이 달라질 수 있으니 정말로 다양한 삶을 사는 분류군(생물종)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다는 데 봄 같지는 않은, 한겨울도 봄도 아닌 계절이지만 입춘쯤에 돌발적으로 볼 수 있는 각시멧노랑나비나 네발나비는 우중충한 겨울의 기운을 대신할 자연의 선물이다.

 

입춘은 낮과 밤이 바뀌기 시작하고 생명 가득한 가슴 벅찬 봄의 세상을 미리 살짝 보여준다.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봄이 가까운 이때쯤 생명의 꿈틀거림을 보며 한층 따뜻하고 낙관적이 된다.

 

겨울과 여름 80도 온도차 견디는 비결

 

붉은점모시나비 알 50.jpg » 붉은점모시나비의 알을 50배로 확대한 전자현미경 사진. 울퉁불퉁한 껍질이 특이하다.

 

아무런 생물 활동이 없을 것 같은 겨울의 한복판인 소한과 대한 두 절기에 걸쳐 붉은점모시나비의 혹한기 생활사를 살펴봤다. 애벌레가 영하 35도까지 버틸 수 있는 항 동결 물질을 장착하고 겨울에 성장하는 이유는 알겠다.

 

그러나 부화하기 전 180여 일을 버텨야 할 시기는 무더운 여름이다. 6월부터 시작해 7~8월에는 40도를 오르내리는 땀이 줄줄 흐르는 몹시 더운 시기다. 영하 35도와 영상 45도의 인내해야 할 내성 온도 한계가 거의 80도에 가까우니 얼마나 고단할까! 추위와 더위 한쪽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균형을 잘 맞추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체온이 1도만 올라도 열이 나고, 2도가 오르면 펄펄 끓다가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나약한 인간 입장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온도 차를 극복하고 있다.

 

더위나 가뭄 때문에 발육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미리 애벌레로 몸을 만든 후, 알 속에서 애벌레는 항 동결 물질로 무장해 겨울을 준비한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한여름의 열과 건조를 견디는 내열성은? 가혹한 더위와 극에 다른 추위를 견디는 물질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데 애벌레 몸속에 열을 견디는 메커니즘은 없을 것이다. 이들이 뒤섞인 곤란한 생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을 분석해야 했다.

 

붉은점모시나비뿐만 아니라 같은 과(Family)에 속한 다른 종류의 알을 잘라 전자현미경(COXEM. EM-30)으로 촬영·관찰하면서 알의 물리적 구조를 비교·확인했다. 붉은점모시나비 알은 100.1(0.01), 산호랑나비는 5.5(0.0005), 꼬리명주나비는 10.8(0.001)로 측정되었다. 알 두께는 지극히 얇아 보이지만 꼬리명주나비 비해서는 10, 산호랑나비에 비교하여 20배에 가까운 엄청난 두께다.

 

난각의 두께 비교.jpg » 여러 나비의 알 껍질 두께 비교. 붉은점모시나비의 두께가 단연 두껍다.

 

게다가 알 외부는 올록볼록 엠보싱 형태의 특별한 구조로 공기를 잡아주는 공기층을 형성하여 쉽게 달아오르거나 식지 않도록 해 준다. 항 동결 물질을 지닌 애벌레는 열에 강한 알 속에서 편안히 여름잠을 자면서 겨울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애벌레는 항 동결 물질로 겨울을 준비하고 알은 열을 버티는 이중적 생존 전략을 가진 것이다.

 

알은 다른 포식자를 피할 수 있게 하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둥지였다.

20164월 베를린에서 열렸던 세계소재은행학회(ISBER)에서 붉은점모시나비의 내동결, 내열성 특징인 알에 대해 포스터로 1차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201612, 6년에 걸친 실험, 조사 결과 중 주제를 좁혀서 생리와 생태로 나누어 2개의 국제 학술지에 논문으로 투고했다.

 

세계소재은행학회(ISBER).jpg » 세계소재은행학회에서 포스터를 발표 중인 필자.

 

게재 후에야 논문에 발표한 모든 과학적 사실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진행하면서 수락을 기다리고 있다. 게재가 확정되면 알에 대해서, 생태에 대해서, 분자생물학적 연구 결과까지 독자 여러분에게 보다 자세하고 재미있게 들려드릴 예정이다.

 

(염병할 것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다. 울화가 치미는 현실에 많은 사람이 지쳐가고, 삶은 피폐해지고 있다. 입춘쯤 불어오는 언 땅을 녹이는 기분 좋은 바람으로 귀를 씻고 싶다. 마음을 씻고 싶다.)

 

살아있는 빙하기 생물화석으로 태양의 신

<2> 대한의 붉은점모시나비

생물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뛰어나

알속 애벌레로 173여름잠자며 추위 기다려

 

q1.jpg »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형성 과정.

 

20여 년 강원도 깊은 산 속에서 살다 보니 문득 도인이 된 듯 자연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면 생명의 움직임과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달은 너무 길고, 날은 너무 짧아 맞추기 힘들지만 거의 보름씩마다 마디가 있는 절기를 따라가면 흐르는 시간이, 바뀌는 생태계가 오감에 와 닿는다. 그 때에 맞추어 숲 속에 들어가면 꽃도 피었고 나비도 날고 새도 노래한다. 몸이 근질근질해 창 밖을 내다 보다 계곡으로 나가면 꽁꽁 얼어붙어 있던 물 속 깊은 곳 얼음 밑으로 물 녹는 소리가 들리며 해빙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귀 기울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뭇잎 떨어지고, 눈 오는 소리도 들린다. 말똥가리가 나타나고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 요란한 시점도 대략 그 때, 그 절기쯤이다.

 

q2.jpg » 눈덮힌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전경.

 

 자연이 색을 바꿔 푸른빛 감도는 때가 대한

120일은 24 절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기 대한이다.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춥다. 가장 춥다는 소한을 따뜻하게 보낸 게 아쉬운지 영하 15~17도의 맹렬한 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절정인 한파에 날선 칼바람까지 불어 몸으로 느끼는 온도는 족히 영하 30도는 되어 맨살이 나와 있는 모든 부분은 베인 듯 따갑고 바람이 불 때마다 뼈와 뼈가 부딪혀 덜덜덜 소리를 낸다. 추위와 함께 온 깨끗한 눈 덮인 흰색 비단길을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본다. 연구소 길 끝, 넓고 새하얀 눈밭이 깨끗한 하늘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고요와 생명력을 품고 있는 깊은 자연 앞에서 추위로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지저분했던 땅위의 많은 것들을 감추어 주는 백설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식물을 비롯한 많은 생명들에겐 온도와 습도를 유지시켜 주는 포근한 이불이 되기도 한다. 옷을 두텁게 껴입고 보온을 하거나 해바라기를 하며 몸을 덥힐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버틸 수밖에 없는 생물들에겐 쌓인 눈은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보온 덮개로 고마운 존재다.

 

민들레 13.jpg » 추운 겨울의 얼어붙은 땅에서도 살아나는 민들레

 

절기를 따라가며 자연의 표정을 보면 대한은 가장 어둡고 짙은 회색의 동지에서 반환점을 돌아 조금씩 색을 바꿔 푸른빛이 감도는 때이다. 언뜻 보면 너무 춥고 꽁꽁 얼어서 아무 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때를 맞춘 괴불주머니와 민들레는 이미 파릇파릇하다.

  


산과불 주머니 15.jpg » 괴불주머니 나물

 

 벌레라는 이름으로 천대받는데 얼마나 멋지면! 

모든 생물이 조용히 몸을 사리는 시련의 계절, 겨울 한 복판에서 유독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만이 느긋이 혹한을 즐기며 쑥쑥 자라고 있다. 겨울에만 열리는 강원도 인제, 화천 축제도 추워야 제 맛이 나지만 추워야만 기를 펴는 붉은점모시나비는 빙하기 생태계의 비밀을 300만 년 동안 간직한 빙하기 생물화석이라 할 수 있다. 얼음으로 뒤덮여 모든 생물이 거의 다 죽었던 빙하기 이후 그린랜드의 사향소나 옐로우스톤의 아메리카들소처럼 영하 50도 안팎의 가혹한 선택에서 견뎌낸 멸종위기생물로,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멸종위기 동식물 교역 국제협약(CITES)에서 특별히 보호 받고 있다.

 

q3.jpg » 멸종위기 동식물 교역 국제협약에 따라 특별히 보호 받고 있는 붉은점모시나비.

 

빙하기 생물화석으로, 멸종위기생물로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미적 기준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급 대접을 받고 있다. Apollo butterfly. ‘태양의 신이라는 신격화 된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니! 보통 곤충은 벌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하찮게 천대받는 존재인데, 얼마나 멋지면 태양의 신으로 대접 받을까?

 

붉은점모시나비의 알은 반년 조금 넘게 약 190일을 알 속의 애벌레(Pharate 1st Instar Caterpillar) 상태로 있다가 한겨울이 시작되는 11월 말에서 1월 초에 알에서 나온다. 겨울에 살 수 있는 월동 시스템을 확인 한 후 알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알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체를 확인한 후 알 속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매일 메스와 핀셋으로 알을 잘라 고해상도 현미경, 전자현미경(COXEM. EM-30)으로 촬영, 관찰하였다. 3번의 반복 실험으로 9일만에 소화기관, 14일에는 눈, 16일째는 단단한 머리와 더듬이, 움직일 수 있는 가슴다리 3, 배다리 4, 항문다리 1쌍 등 모든 기관이 형성되었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애벌레로 발육하였고, 알 속 애벌레의 특별한 형태로 173여일을 지낸다는 사실을 2016년 초에 알아냈다.

 

 창조적 즐거움 느껴 학자로서 큰 행운

왜 알이 아니고 애벌레로 그 오랜 시간을 좁디좁은 알 속에서 웅크리고 여름잠을 잘까? 부화 기간이 길어지면서, 붉은점모시나비의 알은 몇 달 동안 지속 될 더위나 가뭄 때문에 발육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미리 몸을 만든 후 버티는 작전을 사용한 것 같다. 알 속 애벌레는 과열과 건조한 여름을 피하고 추위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겨울을 나는 월동(越冬)이 아니고 여름잠을 자는 하면(夏眠)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영하 50도의 혹한에 적응하도록 태어난 붉은점모시나비가 40도가 넘나드는 여름의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는 고문과도 같을 것이므로 피하려고 진화 중인 셈이었다.

 



붉은점모시나비11.jpg » 붉은점 모시나비의 일년 생활사

 

어떤 생물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천적을 피하거나 이용하기 위한 진화적 과정이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떤 생리적 물질을 만드는지, 어떤 장소에 사는지 등 생물의 생활사를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생물학자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규칙을 찾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붉은점모시나비 연구가 계속되면서 단계가 높아지는 재미를 느꼈다. 멸종위기종이라 너무 조심스럽고 어려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육, 관찰, 실험과 일상이 전혀 분리되지 않고 오랜 기간 연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 환호하곤 했다. 끈질기게 현장 조사와 관찰을 하면서 기초 정보를 극복한 후에는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3년 간 재정적 도움으로 집중적인 심층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생태계 구성 원리를 알아가는 창조적 즐거움을 느낀다.

 

생물학적으로, 심미적으로 또한 생물자원으로서 가치를 발하는 위대한 곤충인 붉은점모시나비를 곤충학자로서 연구하게 된 일도 굉장히 큰 행운이다.

 

 일장기 닮아서일까, 일본 삼척에서 밀반출하려다 걸려

빙하기 때 한반도에 붙어 있었던 일본이지만 일본에는 붉은점모시나비가 없다. 뒷날개의 선명한 붉은색 원형 무늬가 마치 일본 일장기와 비슷하여 갖고 싶은 생물이었을까. 20045월 강원도 삼척에서 붉은점모시나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적발 된 적이 있다. 보전지구에서도 겁도 없이 행해지는 일본인들의 밀반출이니 다른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일본인들의 전리품으로 수난을 당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의 고약한 수탈사가 생물에게도 행해지고 있다.

 

역사의식도, 윤리적 사고도 없는 일본인들이 밉다.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단 한 번의 진심어린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에 오히려 말도 되지 않는 협상을 하자고 끌탕하던 박근혜정부가 더 한심하다. 영화 귀향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영혼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가슴 아프다.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한국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겸임교수. 저서로는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Caterpillars of Moths in Korea)>(2015.11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캐터필러>(2016.11 도서출판 홀로세)가 있다.

이메일 : holoce@hecri.re.kr

블로그 : http://m.blog.naver.com/holoce58


‘윙윙’ 벌 소리 들은 꽃의 꿀이 20% 더 달콤하다
달맞이꽃 실험 결과…꽃이 특정 주파수에 반응하는 귀 구실



 식물은 벌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꿀물의 당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꽃가루받이를 효과적으로 하는 전략을 펼지도 모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이 잘 자란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추신경도 귀도 없는 식물이 어떻게 들을 수 있다는 건지, 또 소리를 듣는 것이 식물에 진화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식물이 어떤 기관으로 소리를 듣는지는 알 수 없어도, 식물이 환경 속 소리 신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은 최근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이다. 류충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팀은 지난해 과학저널 ‘식물학 프런티어’에 실린 리뷰 논문에서 “첨단기술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이 분야가 ‘주변부 과학’에서 널리 인정받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식물이 소리를 내고 반응하는 방식을 이용하면 작물의 면역력을 높이고, 수확 후 과일의 익는 속도를 늦추는 등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응용 가능성에도 “대체 식물이 어떻게 소리를 듣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 분야 연구의 한계를 털어놓았다. “고막이 없는데, 식물은 어떻게 소리 신호의 세기와 파장을 파악해 그 정보를 식물세포에 전달할까?” 최근 이런 의문을 부분적이나마 풀어 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소리에 대한 장기적인 생리반응이 아니라, 소리를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내용이다.



바닷가에 분포하는 달맞이꽃 속 식물 비치 이브닝 크림 로즈. 이스라엘 연구자들은 이 식물이 벌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혔다. 지메넥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릴라크 하다니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식물학자 등 이스라엘 연구자들은 달맞이꽃에 벌이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자 3분 안에 꿀물의 당분 농도가 20%까지 높아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달맞이꽃은 벌과 박각시나방이 주로 꽃가루받이를 하는데, 연구자들은 벌이 나는 소리를 녹음하거나 주파수는 같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소리를 들려 주는 실험을 했다. 연구자들은 달맞이꽃 650송이를 대상으로 4번 실험을 거듭해 일관된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식물은 자연적인 벌의 날갯소리와 인공 음 모두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는 식물이 특정 주파수에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동이 큰 고주파나 바람 소리 같은 저주파에는 당분을 높이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꿀물을 빠는 박각시나방. 식물은 화학물질뿐 아니라 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아이런 크리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식물이 꽃가루 매개자에게 생태학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급속히 반응하는 것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꽃가루 매개자가 내는 진동을 감지해 더 달콤한 꿀물을 분비하는 것은 소중한 에너지 자원의 낭비를 막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매개곤충을 이끄는 방법이다.  3분이란 분비 시간은 매개곤충이 머물고, 또는 그 곤충을 보고 다른 곤충이 찾아와 꽃가루받이를 하도록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매개곤충이 없을 때도 높은 당도의 꿀물을 분비하면 미생물이 번성하고 개미 등이 꼬일 우려가 있다.


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진동이다. 진동을 감지하는 기관이 귀이다. 그렇다면 달맞이꽃의 귀는 무얼까. 연구자들은 “꽃이 귀”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벌의 날갯짓 소리가 달맞이꽃 꽃잎에 닿아 일으키는 진동을 레이저로 측정해, 벌이 일으키는 특정 주파수만을 공명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꽃을 유리 덮개로 가리자 당분 증가도 일어나지 않았다. 꽃은 접시 안테나처럼 소리를 받아들이는 ‘귀’ 노릇을 한다고 연구자들은 보았다.



달맞이꽃은 1㎑ 주파수의 소리에 반응해 꿀물의 당도를 높였지만(오른쪽) 귀에 해당하는 꽃을 유리로 가렸을 때(가운데)와 다른 주파수의 소리(왼쪽)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다니 외 (2018) 바이오리시브 제공.


연구자들은 “식물이 듣는 능력이 있다면 매개곤충을 넘어 초식동물, 나아가 다른 식물의 소리에도 반응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야외에서 자연소음을 배경으로 한 실험과, 다른 식물 종과 박쥐 등 다른 꽃가루 매개동물을 대상으로 한 추가 연구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미발간된 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동료 비평을 듣기 위해 미리 공개하는 누리집인 ‘바이오리시브’에 12월 28일 실렸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18 2.22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

           

(1972) - Albert Hammo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