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0만명 끌어 모은 노란 호박 빨간 호박 114 오마이뉴스
[섬의 부활, 바다의 복권①] 나오시마
▲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작품이 돼버린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 이주빈
한국에서 섬은 여전히 유배지다. 젊은이들은 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늙은이들은 외롭게 파도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섬에 다리가 놓아지면 그나마 살기 좋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이들은 연륙이 된 섬이 결국 도시의 새로운 변두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근심이 크다.
다리를 놓지 않고, 고유의 특성을 살리면서 섬이 살기 좋은 곳이 될 순 없을까. 섬 저마다의 고유한 환경과 전통, 생활문화가 일거리가 되고 돈벌이가 되고 구경거리가 될 순 없을까. 그래서 한국의 섬들이 예전처럼 아이 울음소리 우렁차고, 활기 넘치는 곳으로 다시 일어설 순 없을까.
그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일본 나오시마, 구라시키, 이누지마, 데시마 일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쇠락해가는 섬의 운명을 경험했고, 그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한국보다 먼저 여러 실험과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현지 시각으로 지난 10월 22일 오전 8시 22분께, 덩치 큰 페리호는 나오시마 미야우라항에 더듬더듬 접안을 시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선착장 끄트머리에 눈에 익은 한 설치미술작품이 들어왔다.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다.
쿠사마 야오이의 노란 호박과 빨간 호박은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연간 50만 명의 여행객들이 이 '호박 작품'을 보기 위해 나오시마를 찾는다. 나오시마는 어떻게 '버려진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나오시마는 일본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 떠있는 섬으로 인구는 약 3천명에 불과하다. 원래 나오시마는 구리 제련소로 유명한 섬이었다. 1916년부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은 구리 제련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구리제련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폐기물은 섬을 황폐화 시켰고, 되레 주민들을 섬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지중 미술관과 함께 나오시마 예술의 섬을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미술관 중 하나인 이유환 미술관. ⓒ 이주빈
▲ 나오시마에 새로 설치된 예술 작품.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한 마을노인이 산책을 하고 있다. ⓒ 이주빈
그렇게 버려진 섬 나오시마가 연간 50만 명이 찾는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것은 1992년부터다. 일본 최대의 출판·교육사업 그룹인 베네세 그룹의 후쿠다케 데츠히코 회장과 그의 아들 소이치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이른바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8년에 걸쳐 진행한다. 그 프로젝트의 첫 결실이자 상징이 바로 1992년 문을 연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Benesse House Museum)이다.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은 미술관과 호텔을 일체화한 건물로 안도 다다오가 설계 했다. 이 복합 공간에는 백남준을 비롯 야니스 쿠넬리스, 오다케 신로,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연이어 안다 다다오의 설계로 새로운 미술관들을 건립해 나갔다. 2005년엔 건물을 땅속에 묻은 '지중 미술관'을 선보였고, 2010년에는 한국 작가인 '이우환 미술관'을 개관했다. 나오시마가 예술의 섬으로 변신하는 중심축으로서 미술관 3곳이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나오시마의 예술적 부활은 거대한 미술관이 아닌 '집(家)프로젝트'가 이끌었다. 집 프로젝트는 혼무라 지구에 버려지다시피 있던 빈집과 흉가처럼 변한 신사를 현대미술작품으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미야지마 다쓰오의 '카도야(角屋)'는 작업방식부터 신선했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드는 주인공으로 125명의 마을주민을 공모했고, 그들로 하여금 125개의 디지털 카운터의 점멸속도를 직접 설정토록 했다.
미야지마 다쓰오의 이 작업은 두 가지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전문예술가가 아닌 섬 주민들을 예술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시켜 이들이 예술의 소비주체가 아닌 생산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현대예술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섬 주민들이 전통과 현대미술의 조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민 참여형 섬 개발에 나섰다는 점이다.
▲ 나오시마를 지배했던 한 영주를 모신 신사는 사람들이 찾지 않아 쇠락했다. 쇠락한 신사에 '바다에서 신이 들어오는 길'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해 다시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소로 만들어냈다. ⓒ 이주빈
또한 집 프로젝트는 낡고 버려진 것에서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장소의 역사와 마을 기억이 예술소재로 적극 활용되었다, 빈 집을 마을의 예술을 하는 기억의 창고로 전환 시켰고, 빈집과 노쇠한 신사, 절터를 복원해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마을의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 예술 그 자체이자 힘으로 진화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성과는 대단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외지 여행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섬에 2009년에 약 36만 명이 다녀가더니 2014년엔 연간 50만 명 다녀갔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숙박시설, 음식점, 카폐 등 관광편의시설이 지금은 약 30곳이 생겨났다.
이런 성과는 나오시마 인근 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센병 환자들의 요양섬이었던 오시마, 일본 최악의 산업폐기물 투기 사건이 발생했던 데시마, 제련소가 폐쇄되며 쇠락한 이누지마 등에서 '집 프로젝트'가 실행됐고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나오시마, 데시마 등 세토나이카이 섬 7곳에서 2010년 7월부터 열린 '세토우치 국제예술제'에 약 60만 명이 몰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밑바탕엔 나오시마의 성공 사례가 깔려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3년마다 열리는 트리엔날레인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는 2016년에 3회가 열릴 예정인데 주최 측은 100만 명을 훨씬 웃도는 관람객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신감이 붙은 주민들은 다른 지역주민들이 꺼리는 산업폐기물 처리장도 전격 유치했다. '에코 아일랜드 나오시마 플랜'이라는 이 새로운 도전은, 산업 폐기물중간처리 시설에서 나오는 비산재를 처리해 금속 등의 자원으로서 재생해 새로운 소득을 얻어내고 있다. 예술의 섬 프로젝트와 에코 아일랜드(eco island) 프로젝트가 시행된 후 나오시마의 1인당 평균소득은 가가와 현 내 35개 지자체 중 1위(2015년 3월 기준)로 올라섰다.
▲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설치된 바닷가에 노을이 내리고 있다. ⓒ 이주빈
▲ '환경의 섬 나오시마'를 홍보하는 전광판 옆으로 일본왕이 앉아서 쉬어갔던 자리라는 안내판이 있다. 마을의 기억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고, 마을의 기억이 예술 소재가 되고 있다. ⓒ 이주빈
한국 지자체 공무원 40여 명과 함께 나오시마를 찾은 강형기 충북대 교수는 "연간 50만 명이 넘게 찾고 있지만 나오시마엔 택시 두 대, 공영버스 한 대뿐"이라면서 "딴 데는 없고 오로지 나오시마에만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지방자치경영연구소가 운영하는 공무원 학습글방인 '향부숙(鄕富宿)' 숙장이기도 한 강 교수는 "나오시마처럼 한국의 섬들도 살아나려면 다섯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딴 데는 없고 오로지 그곳에만 있는 게 있어야 하고 ▲그걸 본 방문자들이 즐거움을 느껴야 하며 ▲화제성이 풍부해 할 말이 많아야 하고 ▲왔던 사람이 또 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타겟 층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 3천 명이 사는 섬마을은 한적했다. 하지만 간간히 만난 마을 노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표정은 밝았으며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경쾌했다. 다시 청년이 된 섬처럼 그들은 생기 넘쳤다. 한국의 섬마을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일본은 66년째 도심재생사업, 한국은? 1110 오마이뉴스
[섬의 부활, 바다의 복권②] 구라시키 미관지구
▲ 구라시키가와 강을 따라 유람하는 뱃놀이가 방문자들에겐 인기가 높다.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구라시키 마을가꾸기에 공헌한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아내를 위해서 지은 별장 '유린소'다. ⓒ 이주빈
10월 23일 오전 8시, 숙소를 나선 버스는 구라시키 시청을 향해 부지런히 달렸다. 오전 9시부터 구라시키시의 문화정책에 관한 설명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구라시키는 약 400년 전 에도막부가 직할 통치하는 물류중심지였다. 그래서 구라시키를 '창고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구라시키는 바다와 직접 맞닿은 해항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구라시키가와강이 세토내해와 이어져 있어 물류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구라시키 시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강형기 충북대 교수는 "공공기관이 땅을 갖고 장난을 쳐서 주민들을 힘들게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탄식을 했다. 다른 곳도 아닌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나서 계속 신도시를 만드는 통에 도시가 역사적으로 형성이 안 되고 금방 사멸돼가고 있는데 그걸 살리겠다고 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단기 치적에 눈이 먼 자치단체장들이 신도시만 지어대다 보니 한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축적되지 않고 소멸돼가고 있다"며 "도시를 살리려거든 원도심부터 재투자를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 원조, 구라시키
구라시키는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나 '원도심 살리기'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도시를 건설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전통을 보존해서 성공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안에 끝낸 단기사업이 아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작업의 역사는 무려 70년에 가깝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한 곳은 강 주변에 남아있는 1800년대식 창고와 건물이다. 또 다른 곳은 '마치야(町屋)'라고 하는 1910년대식 가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 나카하시(中橋) 건너편으로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상징하는 하얀 색칠을 한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 이주빈
▲ 선술집과 카페가 즐비한 혼마치, 히가시마치에 인력거가 지나고 있다. ⓒ 이주빈
물류중심지로 성장하던 구라시키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창고마을의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대신 1888년 구라시키방직소 등이 세워지면서 근대공업으로 활기찼다. 근대공업의 발전은 1922년 구라시키은행 설립으로 이어졌다. 1930년엔 일본 최초의 근대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이 개관했다. 그 당시 구라시키가 얼마나 풍족한 도시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구라시키 역시 맥을 추지 못했다. 전시체제에서 돈을 벌었던 기업들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은 문을 닫기 시작했고, 창고는 텅텅 비기 일쑤였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수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아름다운 구라시키를 지켜야 한다며 민간운동을 시작한다. 1949년 '구라시키 도시아름다움협회'를 결성한 주민들은 구라시키의 상징과 같은 흰벽보존운동을 시작한다. 민·관은 모두 이 때를 구라시키 미관지구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삼고 있다.
아름다운 구라시키를 보존하려는 주민들의 운동은 오래된 창고와 공장을 호텔과 민예관으로 바꾸는 기적을 낳았다. 그리고 규모가 큰 마치야는 고고관이나 여관으로 바뀌었다. 용도는 바뀌었지만 건물마다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 주민운동은 1968년 구라시키시 전통미관보존조례 제정, 1978년 구라시키시 전통적 건조물 보존지구 보존조례 제정으로 제도화되었다. 심지어 1990년에는 구라시키시 전통적 건조물 보존지구 배경 보전 조례까지 제정되어 아무리 건물주라도 미관지구 전통 배경을 해치는 일체의 증·건축 행위를 할 수 없게 됐다.
구라사키 인구 46만, 연간 관광객 350만
▲ 옛 구라시키 방적공장 건물은 지금은 복합문화 교류기관인 '구라시키 아이비 스퀘어'로 탈바꿈했다. ⓒ 이주빈
구라시키시청에서 만난 후시와라 학예원은 "조례에 의거해 1979년부터 전통가옥과 건물, 창고 등을 수리해오고 있다"며 "지금까지 모두 533건의 수리를 실시했고 총 수리금액은 약 220억 원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후시와라 학예원은 또 "1986년부터 시작한 전선지중화 사업도 지난 2014년 모두 완료했으며 현재는 NPO에 의한 옛날 민가재생사업을 하고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구라시키 인구가 약 46만 명인데 연간 관광객은 350만 명에 달한다"라고 자랑했다.
구라시키시청에서 약 5분을 걸어가자 미관지구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에도시대부터 운하로 이용했다는 구라시키가와 강변의 수양버들이었다. 찰랑이는 버드나무 줄기 사이로 어린이들과 관광객들이 뱃놀이를 하는 이들을 기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 최초 근대미술관인 오하라 미술관에 들어가 보았다.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과 멀리서 명성을 듣고 찾아온 관람객들로 오하라미술관은 조용하게 북적거렸다. 미술관을 나와 강변을 따라 구라시키 아이비 스퀘어로 향했다. 건물의 붉은 벽돌을 담쟁이가 예쁘게 감싸고 있는 이 건물은 예전엔 방적공장이었다. 지금은 복합문화 교류시설과 호텔 등으로 변신해 있다.
흰색으로 단아하게 색칠을 한 건물들 사이로 작은 골목길이 나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작은 분식집 앞에서 나들이를 나온 중년의 장애인 일행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담소를 즐기고 있다. 아까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20대 여성은 그 유명하다는 구라시키 청바지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 두 여행자가 전통 가옥이 잘 보존돼 있는 구라시키 미관지구 골목을 산책하고 있다. ⓒ 이주빈
골목길을 나와 혼마치, 히가시마치로 접어들었다. 선술집과 카페가 있는 풍경 사이로 인력거가 지나갔다. 순간 시간을 혼돈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흑백사진처럼 찍혀 가슴으로 들어왔다. 기억 혹은 추억이라 부를 그 무엇이 또 하나 생겨난 것이다.
어딜 가나 이야깃거리 풍성한 한국의 도시들이 요즘 앞 다퉈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고 있다. 표현은 도시재생, 도심재생, 원도심 살리기 등 제각각이지만 목표는 다르지 않다. 사람이 떠난 곳에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다시 오게 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시간과 공을 들여야 사람들을 다시 오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저 옆 도시와는 다른 우리 도시만의 '재생'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구라시키는 전통가옥과 거리를 보전하면서 구라시키만의 이야기를 다시 살려냈다. 공식적으로 계산해도 1949년부터 시작했으니 2015년 현재 구라시키는 만 66년째 도심재생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 예비 부부가 구라시키가와강에서 뱃놀이를 하자 주민들이 나와 사진을 찍는 등 즐거워 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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