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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新허기진 군상

by 이성근 2016. 2. 6.

여기 핏기 잃은 한 행렬이 있다. 누가 오자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가라 해서 물러설 행렬도 아니다. 목구멍이 불러서 나선 것이고 창자가 시켜서 나온 것이다. (중략) 술찌꺼기로 배를 채운 죄로 교실에서 취해 쓰러진 꼬마는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1964519일자 경향신문 1허기진 군상 시리즈-술지게미 수배(受配)행렬 하루 평균 200기사 중)

 

경향신문은 1964허기진 군상시리즈로 아사 직전에 놓인 민중들의 실태를 고발했다. 반세기에 걸친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에 술지게미를 먹는 어린이나 칡뿌리와 쑥으로 연명하는 농민은 주변에서 사라졌다. 1인당 소득은 3만달러에 다가섰고, 세계 13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지옥이라고 부른다. 창간 69주년을 맞아 () 허기진 군상시리즈를 시작한다. 꿈을 잃은 어린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장, 고독한 노인 등 부유한 나라에서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경향신문은 허기진 군상이 문제가 돼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간 조치를 당했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은 역설적이게도 언론의 역할과 언론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신 허기진 군상은 어린이, 청소년, 청년, 비정규직, 노인, 환자, 무주택 서민, 이주노동자 등 한국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처한 심난한 삶의 실태를 다뤘다. 어린아이들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4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을 다닌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교육 때문에 1억원 이상 대출받고 집값이 비싼 동네로 이사한다. 상류층도 경쟁에서 밀리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고액 연봉을 받던 사람도, 외제차를 끌던 사장님도 나이가 들고 자리에서 물러나면 건물주의 횡포와 지인들의 외면에 눈물 흘린다. 희망을 잃은 청년들은 아예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외친다.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거나 게으르지 않았는데 모두들 힘들고 팍팍하게 산다면 잘못된 사회구조와 그것을 방치하거나 조장한 정치를 탓할 수밖에 없다. 1964허기진 군상기아를 해방하겠다는 5·16의 공약이 자살유행을 불러왔다며 박정희 정부에 빈곤 문제의 책임을 직접 물었다. 당시 기사에 등장한 이들은 자유당 시절에도, 민주당 천하에서도 맛보지 못한 핍박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이 사회를 지옥이라 부른다.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은 결국 정치가 풀어야 한다. ‘허기진 군상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96461일자 경향신문 사설은 단 한 사람도 굶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정치는 실패한 것이라고 썼는데, 이 지적은 지금 더욱 적실하다.

 

허기진 군상] (9) 세대·계층 막론한 외로움 119 경향

대학가 하숙생 밥 먹을 때 스마트폰만노년엔 나홀로 식사

직장, 학교, 지역사회. 2015년 한국인들은 모두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곳에 속해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거의 없다.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는 해체돼 버린 지 오래고,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격언도 그 의미를 상실했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눌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겉도는느낌을 받는다.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우울함과 적적함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아이들로 가득 찬 골목길 1970년대 서울의 한 골목에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딱지놀이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학 동아리·학회 실종

동아리나 학회 같은 대학공동체 문화가 퇴색하고 있다. 서울 4년제 대학 졸업반인 최모씨(27)는 단과대 사진 동아리 활동을 했다. 최씨는 동기들이 동아리방 붙박이 책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열성적인 동아리 회원이었다. 공강시간에 동아리방에 가면 항상 사람들이 있었고 공부, 식사 등 모든 일상을 회원들과 함께했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정기 전시회를 위해 산과 바다, 도시 곳곳에 출사를 나갈 때면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즐거웠다. 동아리는 그의 대학생활 전부였다.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찾은 동아리방은 썰렁했다. 복학 후 처음 찾은 동아리 모임엔 신입생보다 최씨 같은 OB 학생들이 더 많았다. 그나마도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드물었고, 2회 하던 정기 전시회도 1회로 줄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동아리방은 최씨 전용 공부방처럼 돼 버렸다. 과 후배는 최씨에게 우리 과 취직 잘 안되는 거 알지 않느냐.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 잘해서 ○○(최씨의 학과명)’하는 게 중요한 애들한테 사진 동아리 같은 건 사치라며 요즘 애들분위기를 전했다.

 

한모씨(53)는 지난 추석 지방에서 올라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한씨 아들은 올해 지방의 한 사립대에 입학해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한다. 한씨가 밥 먹으면서 하숙생들이랑 이야기는 나누느냐고 묻자 아들은 얘기는커녕 다들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나도 이어폰을 끼고 밥을 먹는다고 했다. 한씨는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하숙생들끼리는 일종의 서클이 결성돼 밤늦게 막걸리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는데. 옆방 사람 이름도 모른다는 얘길 듣고 시대가 변한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인적 끊긴 놀이터 지난 2월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이용금지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는 모습을 어린이가 바라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웃사촌은 옛말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은 옛말이 돼 버린 지 오래다. 박모씨(56)는 지난 4월 아파트 전세 만료 뒤 평수를 줄여 서울 서대문의 한 아파트를 매입했다. 외동딸을 시집보낸 터라 넓은 집은 필요가 없었다. 아내와 떡이라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지만 부부 모두 일을 나가던 터라 이내 흐지부지됐다. 한 층에 10여가구가 사는 복도식 아파트지만 박씨는 아직 이웃들과 안면을 트지 못했다. 옆집에 초등학생 남매를 둔 부부가 산다는 것은 알지만 인사를 나눈 적은 없다. 박씨는 이 아파트가 거주민이 많이 들고 나는 아파트라 서로 이웃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우리 부부가 은퇴하고 늙어서 집에만 있을 때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민모씨(51·)는 평소 물건을 살 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꽉 막힌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다 싶을 때는 전에 살던 강동구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봐온다. 손수 자동차를 몰고 40~50분 거리의 재래시장을 찾는 것은 사람 사는 맛을 느끼고 싶어서다. 민씨는 고기든 야채든 시장이 더 비싸지만 안면이 있는 상인들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과일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등 에누리가 있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이곳을 찾게 된다고 했다.

 

고독한 노인들

장모씨(76)는 한때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장씨는 한 주간지 교열부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했다. ‘교열 없으면 신문사가 안 돌아간다고 하던 시절, 그는 20여년간 회사를 두 번 옮겼다.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될 때마다 월급은 1.5배씩 뛰었다. 한 유력 일간지 교열부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한 이후엔 지인과 함께 충청북도 모처에 리조트를 짓는 사업을 벌였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사업은 생각보다 잘 풀렸고, ‘사장님소리를 들으며 운전기사가 모는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돼 사업은 부도가 났고 장씨는 쏟아부은 전 재산을 잃었다. 지역신문 몇 군데를 전전한 뒤 은퇴했다. 이후 장씨의 삶은 단조로웠다. 장씨는 젊을 때 잘나가던 시절 집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오던 사람들의 연락이 일거에 끊겼다고 했다. 혼자 집에 있으면 적적하지만 아내 말고는 대화 상대가 없다. 부동산 콜센터에서 전화영업을 하는 아내의 출근시간에 맞춰 아침을 먹인 뒤 배웅하고, 저녁에 아내가 퇴근하면 밀린 얘기를 나눈다. 출가한 딸 셋은 가끔 전화를 할 뿐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한 달에 한 번, 퇴직자 모임을 가는 날을 빼면 장씨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젊을 때 매주 토요일 직장 동료들과 함께 찾던 산도 10년이 넘도록 혼자 다닌다. 장씨는 혼자 햄버거집에서 끼니를 때우는 또래들을 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걱정된다아내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지난 3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년 노인 실태조사를 보면, 조사 대상 중 10.9%의 노인이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출산·육아 과정에서 사회 단절로 인한 고독을 호소하는 여성들도 많다. 20대 초반에 친정어머니를 여읜 신모씨(36·)는 작년 11월 딸을 출산한 이후 줄곧 우울증에 시달린다. 신씨는 결혼 5년차로 적지 않은 나이에 출산에 성공해 육아휴직 중이다. 문제는 이따금 딸을 맡기고 여유를 가질 만한 시간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지방에 있는 시댁에선 조력을 받기 어렵고, 친정 식구들은 모두들 제 아이를 키우느라 바쁘다. 신씨는 육아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이를 때마다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한다. 그곳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또래 엄마들에게 다가가 무작정 말을 거는 게 유일한 낙이다. 신씨는 남편은 매일 야근이나 술자리가 있어 늦게 들어온다. 세상에 나 홀로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말했다.

 

사회공동체의 어제와 오늘

80년대 고독사 두고 이웃부재질타요즘엔 집값 떨어질라주민끼리 감정싸움

일가 친척과 함께 보내는 명절은 가족공동체를 상징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절이라도 조부모와 부모, 자녀 등 삼대(三代)가 한날 한시에 모이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됐다. 지난 50년간 가족을 비롯한 전통적 공동체는 빠르게 붕괴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는 아직 마땅치 않다.

1960·1970년대 들어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가족, 이웃, 동창 등 1차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대가족이 한집에 살면서 밥상머리에서 교육이 이뤄졌다.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어른들의 생활태도를 배웠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진척되면서 아이들이 집안 어른들을 볼 기회 자체가 대폭 줄어들었다.

 

한국인의 삶의 질

1975919일자 경향신문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인정미가 사라지고 각박해지고 있다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친지나 이웃을 찾아 인사를 나누는 오랜 풍속도 번거로운 도시생활 속에서 차차 잊혀가고 있다. 송편을 넉넉히 빚어 가난한 이웃에 나눠주고 평소 존경하던 분이나 웃어른에게 인사 다니는 대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따라 선물 꾸러미가 분주히 오간다.” 1978710일자 경향신문의 고정칼럼 여적에 이웃사촌 옛말이라는 글이 실렸다. “몰인정으로 숨막힐 듯한 도시생활을 구제하는 길은 이웃부활이다. 다행히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극히 일부에서나마 이웃을 되찾자는 기운이 일고 있음은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빈자가용차 태워주기 운동이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1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이 운동은 서서히 서울 변두리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고독사가 톱기사

지금은 뉴스도 아니지만 1980년대에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던 사람이 고독에 못이겨 자살한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시신이 두 달이나 넘어서 이웃사람들에게 발견됐다는 점을 두고 이웃부재를 질타하며 도시의 황막함을 꾸짖었다. 언론에서는 무성한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껴야 할 만큼 몰인정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귀찮게 생각할 뿐 아니라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등 비판이 줄을 이었다.

 

1982128일 서울 영등포구와 마포구의 주민들이 여의도 샛강 스케이트장에서 양포 친선빙상경기대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옛날의 경평축구대회(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향토애 고취를 위해 실시된 서울과 평양 간의 도시대항 축구대회)나 마을 단위의 각종 부락대항전을 떠올리며 전통의 부활이라고 칭송했다. 1983128일자 경향신문에는 생활수준 높을수록 이웃에 무관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국 11개 대도시 동사무소 계장급 직원 104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80.9%도시민은 이웃에 무관심하다고 응답했다.

 

19861028일 서울시내의 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어린이가 한반 60여명 중 1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 남녀들도 매부와 처남을 구별하지 못한다든지 시숙과 당숙 등 친족관계 호칭을 바르게 쓰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1차 공동체의 붕괴는 국가가 재사회화를 통해 떠안아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그런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경제발전이란 미명 아래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확산된 도시들이 시골 마을과 지역공동체를 지워나갔다.

 

가족·지역공동체 해체

200412200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매일같이 단지 내 주민들끼리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 사이에 철망 형태의 담이 설치돼 임대아파트에 사는 초등학생 80여명이 단지를 빙 돌아 학교에 가는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주민 간 갈등의 원인으로 일반아파트 주민들이 집값 하락을 꺼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섞여 살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다양한 계층이 모여사는 소셜 믹스(Social Mix·더불어 살기)’는 부동산 가격 하락을 우려하는 기득권층과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 것이라는 소외계층의 현실적 주장에 막혀 공론화되지 못했다. 이런 비인간적 갈등은 국가라는 중재자의 조정 역할이 무너진 상황에서 가속화됐다.

 

2013712일 경기도 평택에서 40대 남성이 웃는 사람을 보면 죽이고 싶었다는 이유로 승용차로 치어 행인 1명을 살해하고 11명을 다치게 했다. 이 남성은 검찰에서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들이 무리지어 가는 것을 보면 차로 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진술했다. 당시 병원을 찾은 충동조절장애 환자가 30% 이상 늘어났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93720명이던 충동조절장애 환자 수는 20134934명으로 5년 사이 32.6%(1214) 늘었다.

 

공동체 유대감이 떨어지면서 이혼율·자살률 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하다. OECD가 발간한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에는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묻는 질문에 한국인은 72%만 긍정적인 응답을 해 전체 국가 중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깨진 공동체, 각자도생하는 사람들

가난 탓 친구와 단절·공황장애느끼고 싶다, 함께라는 기분

먹고살기 힘들어도 고민을 나누고 손을 내밀어줄 누군가가 주위에 있다면 삶은 덜 팍팍해진다. 심신이 무너져내려도 일으켜줄 누군가 있다면 새로운 삶의 희망이 싹튼다. 사람의 관계망은 곧 안전망이다. 그러나 가족, 지역, 직장, 학교와 같은 전통적 공동체의 결속력은 예전 같지 않다. 그렇다고 국가나 사회가 옛 공동체의 역할을 대신해주지도 않는다.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홀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다. 고단하고 고독한 개인들의 세계, 그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사회 속 관계가 그리운 김리아씨 이야기

김리아씨(29·가명)는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갈 때를 빼고는 좀처럼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이 없다. 어머니와 둘이 사는 집은 월세 10만원짜리 반지하방이다. 하루 평균 23시간을 방 안에서 보낸다. 요금 문제 등으로 통화하는 휴대폰 판매원 외에 연락하는 사람은 지방에 사는 남자친구와 어머니뿐이다. 김씨를 사회와 연결하는 단 두 가닥 끈이다.

 

 

지난 6일 김리아씨가 경기 군포시 산본동 반지하방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다. 배장현 기자 sayit@kyunghyang.com

 

김씨는 경기 광명에 살던 어린 시절을 가끔 떠올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외할머니와 두 이모네 식구들이 살았다. 왕래가 잦았고 겨울이면 김장도 함께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일자리와 좀 더 넓은 집을 찾아 경기 군포시 산본동으로 이주했다. 갓 개발된 신도시는 8살 김씨에게 낯선 세계였다.

중학생이 되자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김씨에게 폭언을 시작했다. 김씨에게 천자문을 못 외우면 맞을 줄 알아 이 돌대가리야” “이번 수학시험에서 또 점수가 이 모양이면 다 같이 죽어버릴 거야라고 했다. 화가 나면 의자를 집어던졌고, 가스관에 라이터를 들이대며 협박했다. 김씨에게 집은 더 이상 안온한 장소가 아니었다.

 

학교도 김씨에겐 불편한 장소였다. 초등학교 때는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김씨에게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고 방과후에 데리러 온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의 질시를 받았다. 아이들은 욕설로 가득한 편지를 건네고 실내화에 얇은 유리조각을 넣어두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의 친구들이 같은 중학교로 진학했다. 김씨의 왕따 생활도 이어졌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집에 갔다. 쉬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만 봤다. 친구들과 함께라는 기분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김리아씨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그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반지하 월세방으로 이사하면서 김씨는 다른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같은 반 학생 대부분은 횡단보도 건너 넓은 평형 아파트에 살았다. 가난이 동급생들과 김씨를 갈랐다. 유명 브랜드 가방에 좋은 신발을 신고 풍족한 용돈으로 같이 간식을 먹으러 다니는 아이들과 김씨는 어울리지 못했다.

 

김씨는 대학 공동체에도 동화되지 못했다. 동기들과 수업 중간중간 이동하며 조별과제 등에 대해 얘기하는 게 전부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김씨에게 동기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하는, 평범한 관계맺기는 불가능했다.

 

선배들은 학과의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하루 한 번꼴로 1학년을 집합시켰다. “너 왜 어제 날 보고 인사 안 했어?” “너 왜 과제물이 든 바인더를 거꾸로 들었어?” “너 왜 1학년이 염색을 했지? 튀려고 하는 거야?” 김씨는 자주 불려 나가 욕설과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공황장애를 앓은 김씨는 21살 때 처음 자살을 시도했다. 좁은 방 한구석에 누워 벽지무늬만 만지며 하루를 보냈다.

 

다른 사회의 문을 두드리지 않은 건 아니다. 23살 때 친구를 찾아 성당에 나갔다. 그러나 성당 청년부 회식에 참여하려 해도, 공부모임에 들려 해도 돈이 필요했다. 한 청년부 언니는 김씨가 언니 저는 돈이 없어요라고 말을 끝내기 무섭게 몸을 돌려 다른 사람과 이야기했다. 성당에서 새 세례명은 얻었지만, 친구는 끝내 얻지 못했다.

 

25살 때는 인터넷 커뮤니티 모임에 가입해 여러 번 정모에 나갔다.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술을 마셨고, 했던 말을 또 했고, 다음날 연락하면 어제 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김씨는 실망했고 공감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해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공동체를 만났다. 그림 그리기 스터디 모임이었다. 취업준비생, 웹툰작가 등 6명이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카페에 모여 3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는 합평을 하며 새로 나온 웹툰 이야기, 미술학원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나눴다. 종이와 연필, 음료값 3000~4000원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김씨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게임회사에 원화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스터디의 목적이 달성되자 모임은 와해됐다. 김씨는 요즘 목적 없이 취미로 그림 그리는 모임을 찾고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스터디에서 만난 사람들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김씨는 외롭다고 했다.

 

객지 생활맘 둘 곳 없는 김광일씨 이야기

대전에 사는 직장인 김광일씨(47·가명)의 하루 일과는 회사으로 요약된다. 오전 8시쯤에 출근해 12시간 정도 직장에서 보낸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보통 밤 10시가 넘는다. 집에서 취미 생활을 하거나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기엔 늦은 시간이다. 집이 직장 인근이라 동네 바깥으로 나갈 일은 좀체 없다. 김씨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다. 고향은 경남이고 부인과 아들 둘은 부산에 있다. 김씨는 지난해 9월 새로 일을 배워 직장을 구할 생각으로 대전에 왔다. 불황으로 전에 다니던 선박·조선업계에서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대전에 와서는 반 년간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웠다.

 

현재는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인근 원룸에 살고 있다. 김씨는 가끔 가족을 만나러 부산에 간다. 기름값을 아끼려고 한 달에 딱 두 번, 날짜를 정해두고 간다. 부산에 안 가는 주말이면 집에서 방콕을 한다.

 

김씨는 취직난에도 비교적 빨리 직업을 구한 편이다. 하지만 객지에 혼자 살며 생소한 일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올라온 지 16개월이 다 돼가지만 대전은 여전히 낯선 곳이다. 가끔 술자리에 나가는 것이 김씨가 대전에서 갖는 사교 생활의 전부다. 40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술 없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술값이 아쉬워 술자리도 자주 마련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김씨는 옛날에는 소주 한잔 마셔도 되겠지했다면 지금은 내가 술 사먹으면 가족이 힘들겠지란 생각이 먼저 들어 자제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퇴근 후 집에 와 자주 술을 먹는다.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잔을 곁들이는 게 김씨의 낙이다.

 

대전에 김씨의 친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리를 잡고 사는 큰형네 가족이 있다. 그가 애초에 인생 2막의 장소로 부산과 멀리 떨어진 대전을 택한 것도 형이 대전에 오면 일 배울 곳과 취직할 직장을 연결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독립된 가정을 꾸린 형네 식구들과 자주 어울리긴 힘들다. 형도, 형수도 직장에 다니는 상황이라 김씨의 형편까지 일일이 신경 써주기는 어렵다는 것을 김씨도 알고 있다.

 

김씨는 현재 살고 있는 대전, 가족과 친구가 있는 부산 중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산에 있는 두 아들과 매일 짧게라도 카톡을 하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엔 부족하다. 대전에 올라온 뒤 부산이나 경남에 있는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졌다. 거리가 멀어 경조사 챙기기도 어렵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옛 친구를 찾기도 하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전과 부산 사이 어딘가에서 붕 뜬 상태. 가족도, 직장도, 친구도 있지만 공동체소속감이란 단어는 낯설다. 김씨는 그냥 먹고살기 위해 살고 있다. 대전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공동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딱히 없다고 했다.

 

허기진 군상] (10) 그래도 희망을 찾고, 일구는 헬조선의 얼굴들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송곳>에서 노동운동가 구고신은 우리는 경쟁에서 졌다고 해서 벌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한다.현실은 다르다. 경쟁에서의 실패와 빈곤, 절망은 형벌과도 같다. 사람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희망은 희미하고, 무기력과 냉소는 뚜렷하다. 이곳을 지옥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내가 속한 곳만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출이다. 스스로 존중과 우애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다.

 

청년연대은행 토닥

- 1500만원으로 시작불안한 청춘들에 저리대출

단돈 1500만원으로 문을 연 은행이 있다. ‘은행이라 부르기엔 턱없이 작은 규모지만, 20132월 창립한 뒤 210개월 동안 벌써 180여건을 대출해줬다. 무담보 대출에, 이자는 빌리는 이가 스스로 정한다. ‘청년연대은행 토닥이야기다.

 

청년연대은행 조합원들이 신입 조합원 교육인 토닥학 개론에 참가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설립 때 150명이던 토닥조합원은 2년 반 만에 490여명으로 늘어났다. 청년연대은행 토닥 제공

 

토닥은 일종의 공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매달 출자금을 모으고, 모은 출자금으로 급전이 필요한 다른 조합원에게 소액 대출을 해준다. 이 은행의 김진회 이사장(26)은 토닥을 관계 금융이라고 표현했다. “옛날엔 마을마다 계모임이 있었잖아요.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상호부조인데, 지금은 그 영역이 민간 보험회사나 은행 등 모두 자본시장으로 넘어갔어요. 우리는 지금 이웃조차 부재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청년들의 경우 위급할 때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이 더 없어요. ‘토닥은 청년들이 협동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일종의 계모임인 셈이죠.”

 

토닥의 시작엔 2011년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있었다. 최고은 작가가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는 쪽지를 남기고 죽은 뒤 청년유니온 페이스북에 한 조합원의 글이 올라왔다. “쌀이 떨어져서 굶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에 쌀과 라면이 있으니 가져가라, 모금 운동을 진행하자. 청년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김 이사장은 거기서 협동의 가능성을 봤다국가가 청년들의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대안적으로 한 번 만들어보자, 그게 시작이었다고 했다. 다른 금융기관과 달리 토닥은 문턱이 낮다. 15~39세 청년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5000원 이상의 출자금을 내면 조합원 자격이 주어지고, 이렇게 모인 돈으로 최대 100만원까지 대출을 한다. 출자금은 탈퇴 시 전액 돌려주는 일종의 저축개념이기도 하다.

 

토닥의 대출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사전 상담과 4인으로 구성된 대출심사위원회의 최종 승인을 거쳐 대출이 확정된다. 대출액은 출자금 납부기간이 길고 토닥씨앗이 많을수록 늘어난다. 조합원 교육이나 재능나눔 등에 자주 참여할수록 토닥씨앗이 올라간다.

 

이자는 빌리는 사람이 정한다. 김 이사장은 이자로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취지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자율이자제 시행 후 오히려 이자 수익이 늘었다고 했다. 여행자금을 대출받은 한 조합원은 여행 후기와 정보를 공유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자를 대신하기도 했다. 조합원 150, 출자금 1500만원으로 시작한 토닥은 창립 2년 반 만에 조합원 490여명, 출자금 8000만원으로 규모가 커졌다. 김 이사장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실험이라며 작은 것 하나라도 바꾸기 위해선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

- 진실, 우리의 렌즈로 증언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빛에 빚을 진다. 비단 빛뿐일까. “사진이 세상에 진 빛때문에 연말마다 특별한 달력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이다.

 

이들이 만드는 사진 달력 빛에 빚지다가 올해로 7번째 제작된다. 시작은 용산참사였다.

 

참사 현장을 드나들던 사진가들이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현장 사진들로 첫번째 달력을 제작했다. 제작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은 기륭전자(2010), 쌍용자동차(2011), 콜트·콜텍(2012) 등의 해고노동자들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2013), 밀양·강정·청도 주민들(2014)에게 매년 전달해왔다.

 

모임 안에서 제안이 나오면 공동의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 모임의 사진가 여러 명이 올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전후해 진행한 단원고 학생들의 아이들의 빈방촬영은 4·16기억저장소의 아카이브로 남았다. 7회째를 맞는 내년도 달력의 주제는 연대. 달력의 기획자 신유아씨는 “2011년 부산 영도로 향했던 희망버스참가자들 중 벌금을 내고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150여명 있다판매금은 그들의 재판 비용으로 후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인터넷 예약을 받아 진행하는 선구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달력에 이름이 새겨진다. 내년도 달력 4000부가 벌써 사전 예약됐다.

 

최소한의 변화일까. 모임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진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진으로 세상의 작은 사실 하나는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사회적 예술로 올바름알릴 것

-‘거리의 예술가홍승희씨

홍승희씨(25)는 거리의 예술가다. 그는 사회적 예술을 꿈꾼다. 침몰한 세월호를 상징하는 듯한 찢어진 노란천을 매단 낚싯대를 들고 거리를 걷기도 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서울 신촌 거리를 행진했다. 대안교육을 모색하는 신촌대학교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적 예술을 강의하기도 했다.

 

 

홍승희씨가 지난 10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홍씨가 살던 곳은 강원 춘천이다. 거기서 태어나, 사회복지학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졸업한 뒤에는 지인들과 함께 협동조합 형식의 인문학 카페를 운영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통합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했다. 홍씨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서울로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내가 속한 제한된 공간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홍씨 역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태어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땅에서 내가 꿈꾸는 것들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헬조선이라고 해서 우리가 떠날 게 아니다. 헬조선을 만든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게 해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이주자에 법률상담·한국어 교육

-한국 구성원 삶 택한 뚜라씨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있다. 안산의 미얀마센터. 단순 통역부터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 등에 대한 법률상담, 한국어 교육까지 한다. 쉼터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다른 이주민 지원센터와 달리 미얀마 사람이 센터를 이끈다.

 

뚜라씨(왼쪽)가 지난 10월 운동회에서 승리한 팀에 트로피를 건네고 있다.

 

뚜라씨(44)1994년 고국의 군부독재를 피해 한국에 왔다.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공장에 취업했지만, 최저임금의 3분의 1도 안되는 임금에 하루 12시간이 넘는 중노동, 업주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6개월 만에 뛰쳐나왔다. 그 후 수년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지냈다. 낮에는 버마행동이라는 민주화운동단체 활동을 하고, 밤에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국에 있는 동포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 무렵부터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나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처한 동포들을 만나게 됐어요. 고국의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당장 이곳에서 우리 스스로를 도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2년 그는 미얀마 이주노동자의 자립을 위한 협동조합과 미얀마센터를 결성했다.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활동비를 마련하고, 자신과 직원들의 생계를 해결한다.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쉽고 편한 길도 있었다. 미국행을 택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비교적 난민 신청을 잘 받아줘 한국에 있던 미얀마인 상당수가 미국으로 다시 떠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는 동포들을 돕는 활동가가 많았지만, 한국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혼자 잘 먹고 잘살기엔 미국이 더 좋을지 모르지만 나만 바라보는 동포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그가 반평생을 보낸 2의 고향이다. “한국 국적은 없지만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속한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나의 고국도, 2의 고향인 한국도 어제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가 이주노동자에게 가혹한 한국을 떠나지 않은 이유다

 

허기진 군상] (10) 에필로그 - 그래서, 그럼에도

여긴 행복 없다떠나거나함께 헤쳐가자바로잡거나

헬조선’, ‘지옥불반도’, ‘흙수저같은 냉소적인 신조어가 한국 사회를 지칭하는 말이 돼 버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이 땅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을 바꿔보려고 행동하는 이들도 있다. 분명한 건 두 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부터 실천에 나서지 않으면 세상은 눈곱만큼도 바뀌지 않는다. 나의 행동이 곧 나의 대안인 것이다.

 

낮은 스펙에 취업 별따기이민 준비 중인 송주은씨

이제와서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자니 스펙 쌓는 데만 몇 년이 걸려요. 그때는 내 나이 서른 몇 살인데 어느 회사가 데려가겠어요? 전공 살려서 대학원 가면 좋죠. 그런데 돈이 없어요. 나름 명문대 나왔는데 중소기업에서 평범한 여직원으로 대우도 못 받고 살겠죠. 내 삼십대가 그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으로 눈을 돌렸어요. 적어도 최저임금이 여기보다는 높잖아요. 노조에 대한 인식도 괜찮고. 솔직히 말하면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에요. 가만히 있다가 30대 중후반이 돼서 후회하느니 뭐라도 하자는 거죠.”

지난 6일 서울 강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주은씨(27··가명)는 이민을 준비 중이다.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이고, 취업해도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기 어렵다 보니 송씨처럼 이민을 가려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송씨는 21살 때부터 국가고시를 준비했다. 6년이 넘도록 고시를 공부했지만 합격의 벽은 높았다. 송씨에게 남은 것은 대학 졸업장과 2점대의 학점, 토익 700점뿐이다. 뒤늦게 취업을 준비하기에는 초라한 스펙이다. 학내 커뮤니티에는 오픽 AL, 토익 980, 학점 3점대 후반의 스펙을 갖고도 대기업에 줄줄이 낙방한, 스물넷밖에 안되는 청년들의 후기가 올라온다.

 

3년 전만 해도 저 취준(취업준비) 2학기째인데요라는 글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저 취준 5학기째인데요라는 글이 많다. “그걸 보면서 내년쯤 되면 취준 8학기째인데요라는 글이 올라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들이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많이 낮춰도 안되는 거예요.”

 

송씨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대기업 채용에 지원하면서 더 이상 여기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회사마다 질문이 묘하게 달라서 여러 회사에 지원하려면 그때마다 자기소개서를 새로 써야 했다. 기업이 원하는 인간상에 끼워맞춰 자신을 설명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라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 송씨는 지난 9월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문턱이 낮은 만큼 연봉도 짰다. 입사 후 3개월까지는 수습 기간이기 때문에 한 달에 140만원가량만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업무량은 일반 직원과 같았다. 계산해 보니 최저시급도 안 됐다. 회사 선배에게 급여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너랑 별로 차이 안나. 2년 넘게 일했는데 거의 안 올랐어.” 회사에는 노조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취업규칙이 비치돼 있지만, 사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항을 볼펜으로 그어놓았다. 그래도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기술이민이었다. 특정한 기술을 가지고 이민을 가는 것이다. 2년 전 보았던 이민계모집 글을 송씨는 다시 떠올렸다. 금융권 등에서 일하는 30대 골드미스들이 핀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로 떠나기 위해 이민계를 만들어 돈을 모은다고 했다. 송씨는 이민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남긴 후기도 인터넷에서 뒤져봤다.

 

송씨는 이민을 결심했다. 목표는 약 10년 뒤인 36, 나라는 캐나다로 잡았다. 그동안 5000만원을 모아야 한다. 이민 후 직장을 잡기 전까지 1~2년간 생활할 최소한의 생계비다. 월세 50만원 등 생활비로 매달 100~150만원을 계산했다. 기술이민의 첫 걸음으로 송씨는 사이버대학의 컴퓨터 관련 학과에 등록할 계획이다.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송씨가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에도 나가봤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시험기간인 줄 알지만 한 마음이 돼서 잘 구조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대자보도 직접 학교에 써 붙였다. “그때는 일단 가서 자리라도 채우고 서명이라도 한 개 더 받으면 뭔가 바뀔 줄 알았다고 했다. 유니세프에 정기 후원금을 냈고, 취업준비 때문에 봉사활동을 못 가는 대신 헌혈도 많이 했다.

 

그러나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문제제기를 해도 정치공세로 뒤덮이는 모습만 봤다. 집회 안 나가고 학점 관리를 잘한 친구들은 모두 취업을 잘했다. ‘발버둥쳐봐야 나만 손해볼 뿐 달라질 것 없다는 냉소만 남았다.

 

두더지 게임기. 송씨에겐 지금 한국 사회가 꼭 그 모양이다. “올라오면 때리고, 올라오면 때리잖아요. 점수를 많이 따려면 기어오르는 누군가를 때려야 하고. 두더지는 맞고 싶어서 맞겠어요? 올라오면 맞을 수밖에 없는 룰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죠. 제가 두더지가 된 기분이에요.”

송씨는 몇 년간 고민한 끝에 어렵게 결정한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존중받고 싶다고 했다. 단순한 도피로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국민 대접을 못 받잖아요.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 떠나야죠. 한국은 20대한테 너무나 가혹해요. 미래가 없어요.”

 

정규직으로 채용, 가족처럼기업 운영 이상훈씨

유젠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아웃도어 브랜드이다. 전자상거래에서 출발한 이 기업은 사업영역을 아웃도어엔터테인먼트로 확장했고, 신규 아웃도어 브랜드의 매출이 늘면서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 회사에는 눈에 띄는 성장세 말고도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비정규직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유젠(UZEN) 이상훈 대표(가운데)11일 오후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 대표는 사업 목표를 이윤의 적정화로 잡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물류·제조업에 해당하는 아웃도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분야다. 하지만 이 업체는 물류창고 정리를 담당하는 직원도 정규직이다. 업체 대표 이상훈씨(49)자발적인 비정규직을 제외한 상시고용 인력은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직원 한명당 500만원 한도에서 무담보·무이자 대출을 해준다. 상환계획서만 받을 뿐 상환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 작은 배려는 회사 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회사에는 초과근무 수당을 마일리지로 적립한 뒤 복지시설에 기부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직원 상당수가 초근수당 기부하기에 참여한다.

 

협력업체의 사정이 어려워 월급이 밀린다는 얘기가 들리면 대금을 미리 지급하는 관행도 정착돼 있다. 대금 지급 지연이나 체불이 만연하는 업계 풍토를 생각하면 다분히 이례적이다.

 

먹고살 만하니 이렇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회사는 연매출 300억원가량의 중소기업이다. 영업이익률도 10% 정도로 높지 않다. IT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표적인 레드오션 산업이자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이윤을 내기 쉽지 않다. 업계에는 아직도 가격 후려치기등의 악습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직원들의 복지를 후퇴시키거나 협력사에 가격 후려치기를 강요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솔직히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인건비 절감이 아닌 신사업 발굴과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로 버텨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 이 대표는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좋은 회사는 돈 잘 버는, 규모가 큰 회사가 아니다. 사장과 직원, 직원과 직원, 직원과 고객이 서로 동료처럼 지내는 커뮤니티 같은 회사. 그는 대기업과 주로 거래하는데, 거기 직원이나 임원들이 살아남기 위해 승진에 목을 매고 서로를 견제하는 데 하루를 보내는 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면서 출근하면 다니고 싶어지는 회사, 서로 도와주고 살아가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업 목표를 이윤의 극대화가 아닌 이윤의 적정화로 잡았다.

 

그는 기업들이 주주의 이익극대화만 추구해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 등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고 했다. 수익률 극대화를 위한 경비 절감이 당연시되면서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 등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추구하되 적절하게 추구하자는 거다. 아랫사람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 정도로, 아랫사람 생계를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져가도 충분하다는 얘기다. 다같이 사는 사회이니만큼 욕심을 조절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회사 직원들 모두가 이 대표의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나’, ‘자칫하다 망하기 십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대표와 뜻을 같이하는 직원들도 많다. 그는 우리와 일하는 협력업체 가운데 일부는 우리의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해 보려는 이들도 분명 생겨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은 무언가 바뀌지 않겠느냐고 했다

 

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외

 

출처: 블로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