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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뉴스타파

사학은 왜 정계로 진출했나

by 이성근 2019. 7. 2.

교육: 불평등 해소 수단에서 불평등 악순환 고리로

 

스위스 출신의 교육자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는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교육열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교육은 불평등 해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기제가 됐다.

 

2000년 대에 들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자사고 등 이른바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대거 등장했다. 다양한 교육 수요를 담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외국어고, 과학고, 자사고 등은 특수목적이라는 취지와 달리, ‘SKY’로 불리는 서울 유명 대학과 의대 진학 등에 초점을 맞춘 입시전문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가 본격적으로 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사법고시 폐지를 전제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이 도입되고, 외무고시 폐지와 함께 외교아카데미를 졸업해야 외교관이 될 수 있도록 제도가 변경됐다. 이런 제도 변화와 경쟁 위주의 교육은 결과적으로 불평등의 제도화를 초래하고 있다. 극빈층과 차상위 계층의 자녀들은 사교육 비용을 대지 못해 대학 진학에서 절대 불리해지고, 이것이 학교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는 걸림돌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이동(계층이동: social mobility)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제도와 구조를 고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학 설립자 가족 나경원·홍문종, 국회의원으로 맹활약

교육의 변질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진행됐다. 예로부터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로 여겨졌다. 실제 명예를 먹고 산다고 말하는 사학 설립자나 종사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많은 사학 설립자나 그 가족들이 국회 등 정계에 진출해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아버지 나채성(전 공군 조종사)씨가 1973년 설립한 홍신학원(홍신유치원, 화곡중학교, 화곡고등학교, 화곡보건경영고등학교)의 이사를 10년 이상 지냈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남편은 김재호(1963년생) 판사다.

 

최근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대한애국당(최근 우리공화당으로 이름을 고침) 공동대표가 된 홍문종 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은 경민학원(경민대학교, 경민고등학교, 경민비즈니스고등학교, 경민IT고등학교, 경민중학교, 경민여자중학교, 경민유치원)의 설립자이자 민정당(자유한국당의 전신) 국회의원(11-12)을 지낸 홍우준(洪禹俊: 1923.04.23.-2018.03.17.)의 아들이다. 홍우준은 1968년 경민학원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가 1981년 전두환의 5공화국 첫 국회인 11대 국회에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입성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홍문종 의원도 아버지가 설립한 경민학원 이사장, 경민대 학장 등도 지냈으며 아버지 지역구였던 의정부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현재 홍문종 의원의 어머니인 이연신 씨가 경민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제원 의원 부친 고 장성만, 국회부의장과 민정당 정책위 의장 역임

장제원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부산의 동서대를 설립한 장성만(張聖萬: 1932.11.02.-2015.12.06.) 전 국회부의장(목사)이다. 고 장성만 의원은 1970년 선교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학교법인 동서학원을 설립해 경남전문대를 운영해오다 1992년에 동서공대를 세워 4년제 대학 설립의 꿈을 이룬다. 1995년엔 이 대학을 종합대학인 동서대로 개편해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1981년 전두환의 민정당 시절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북구)에서 당선해 정계에 진출했다. 198512대 총선에서 재선(12인제)해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2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에 사실상 단독 출마해 당선된다.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집권당(민정당)과 정부의 관계는 지금의 당정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이 우위에 있었다. 민정당에서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 의장(이른바 당3)의 위세는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부총리, 총리에 못지 않았다. 민정당에서 장관이나 부총리 등을 호출하면 바로 장차관을 비롯한 각료들이 당사 등으로 달려가 당의 요구를 듣거나 당정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장제원 의원의 아버지 장성만 의원은 정책위 의장으로 정부 각 부처와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74, 학교법인 동서학원과 동서대의 비자금 조성 및 횡령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장성만 전 총장과 장형부 재단 사업국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조사 결과, 장성만 씨는 이사장 자리를 자신의 부인인 박동순 씨에게 넘겨주고, 6촌 동생인 장형부 씨를 재단 사무국장에 앉히는 등 족벌체제를 구축한 뒤 1993년부터 학교공금을 빼돌려 무려 55억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드러났다.

 

장 씨는 경남전문대 진입로 건설 관련 55천만 원, 교육문화센터 신축공사 관련 10억 원 등 공사비 과다계상을 통해 비자금 299천만 원을 조성했으며, 동서대 인문사회관과 경남전문대 본관 신축공사의 시공업체인 남도개발에서 12억 원의 리베이트를 받기도 했다고 당시 검찰은 발표했다. 199610월에는 교수들이 기업체에서 받은 연구 용역비 23천만 원을 교수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유용했으며, 그해 3월에는 학생들의 등록금인 학교운영자금 86천만 원까지 비자금으로 빼돌린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장 씨가 비자금에서 큰아들(장제국)의 서울 여의도 89평짜리 아파트 구입비로 435백만 원, 둘째 아들(장제원)의 출판사 운영비로 844백만 원, 부인의 골프회원권 구입비로 62백만 원, 생활비로 529백만 원을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한 달이 넘도록 폭넓은 수사를 펴 구체적인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도 신병처리 단계에서 장 씨가 총장직을 자진사퇴하고 고령인데다 횡령한 돈을 모두 갚았다는 점 등을 들어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횡령액이 많고 돈세탁을 통해 범행을 감추려 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검찰이 불구속 기소했기 때문에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구속 수사가 보편적이던 당시, 막대한 비자금 조성과 횡령으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구속 대신 불구속 기소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학교 운영에 이런 난맥상이 드러났지만 동서대는 해마다 정원이 늘어났고, 정보화 우수대학으로 선정돼 교육부에서 지원금까지 받고 있다. 현재 동서대 이사장은 장제원 의원의 어머니 박동순 씨가 맡고 있고, 친형인 장제국 씨는 동서대 총장이다. 18대 국회에 진출한 장제원 의원은 동서학원 이사, 경남정보대 학장, 동서대 부총장을 지냈다.

 

사학의 정계진출 원조는 고려대 김성수

인촌 김성수(金性洙:1891.10.11-1955.02.18)는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제 때 행적을 두고 그만큼 논란이 많은 인물도 드물다. ‘음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고 주장하지만, 공개적으로 청년학생들의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을 창당하고 2대 부통령(1951.06-1952.05)을 지냈다. 1962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56년 만인 2018년 정부는 서훈을 박탈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했다.

 

그는 호남의 만석꾼 지주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규장각 직각(요즘의 서울대 도서관장 격)을 지낸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43)가 설립한 창평 영학숙(英學塾: 창평의숙)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54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고, 1932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를 인수하여 재단 주무이사를 지내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이 맡았으나 재정난이 계속되자 김성수에게 넘어 간 것이다. 보성전문은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촌 김성수의 출발은 기업인이었다. 191910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했다. 김성수는 192041일 창간한 동아일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해방 다음 달인 19459월 미 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0월에는 미 군정청 한국인 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김성수는 정치에 본격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소유·지배하던 기업(경영)은 동생인 김연수(金秊洙: 1896.08.25.-1979.12.04.)에게 맡겼다. 김연수의 아들과 손자 가족들이 지금 삼양사와 경방을 비롯한 삼양그룹을 소유지배하고 있다. 동생 김연수는 기업을 경영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을 지냈다. 김연수는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한국경제협의회(지금의 전경련의 전신) 초대회장도 지냈다. 동생 김연수 역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다.

 

김성수가 정계에 뛰어들어 부통령까지 지냄으로써 그의 일가는 돈(재벌), (정치)권력, 명예(사학재단)라는 세 가지 세속적 가치와 수단을 동시에 갖게 됐다. 김성수가 두 명의 부인과 사이에 낳은 94녀와 동생 김연수의 76녀와 후손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기득권 세력과 거대한 혼맥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인 고려중앙학원 현 이사장은 증손자 김재호(1964년생,채널A대표 이사). 김성수(인수자), 김상만(장남) , 김병관(손자)에 이어 세습이 4대째 이어지고 있다.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국민대 인수에 뉴스통신사(동양통신)까지 설립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독립한 후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임시정부 지도부 인사들이 멀리 내다보고 민족 지도자를 길러낼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해 설립한 대학이 국민대학이다. 194691일 서울 창성동에 국민대학관으로 설립한 국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신익희(申翼熙: 1894-1956.05.05.)가 취임했다.

 

김성곤은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경북지부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자극받아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형), 황태성(나중에 북한 무역성 차관으로 특사로 남파됐으나 박정희 정권이 간첩으로 몰아 처형)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을 하다 1958년 고향인 달성군(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4.19 혁명 후 한때 정계를 은퇴했으나 5.16 쿠데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대부터 8대까지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내에서 박정희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 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그는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의원과 함께 이른바 4인방(체제)으로 불리며 박정희를 대리해 공화당을 사실상 관리했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 발주공사 금액의 10%를 자신을 통해 정치자금으로 상납하게 하면서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자신으로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곤은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학교법인 이사장은 김성곤의 손자인 김지용(1973년생) 태아산업 부사장이 맡고 있다. 김성곤은 1952년 설립한 뉴스통신사 동양통신의 회장을 역임했고, 국회의원과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동양통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당시 우리나라 뉴스 통신사는 합동통신과 동양통신 두 개가 주축이었으나 전두환의 1980년 언론통폐합 때 두 통신사를 강제합병하여 연합통신(현재 연합뉴스로 개명)으로 탄생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성곤 사망 후 그의 장남인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아버지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구에서 199615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부자(父子) 국회의원이 됐다. 김석원은 회사가 경영위기에 빠지자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경영에 복귀했고, 달성 지역구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요청으로 입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박정희-김성곤 사이에 시작된 특수관계가 대를 이어 자식 사이의 주고받기로 이어진 셈이다. 김석원 회장은 1997년 말 외환 위기를 전후해 분식회계로 수십억 원의 회사재산을 빼돌린 혐의로 2005년 구속기소되기도 했다. 동생인 김석준 당시 쌍용건설 회장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사학비리 상징’, 상지대 김문기 전 이사장

지금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상지대가 정상화됐지만, 상지대(총장 정대화)는 한 때 세종대, 수원대와 함께 사학비리의 상징이었다. 김문기(金文起: 1932년생) 상지대 전 이사장은 가구공예점을 경영하다 1974년 상지학원을 인수했고, 1980년 전두환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창당발기인으로 참여,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다. 이어 13-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강원도 명주·양양 지역구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내리 당선, 3의원을 지냈다. 그가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상지학원은 설립자 가족들의 각종 비리와 불법 의혹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김문기 이사장 가족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처럼 학교 정상화와 사퇴를 요구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목소리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하고 징계했다.

 

김문기가 상지대를 장악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72년 종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 씨의 지원으로 그는 강원도 원주대학 임시이사로 파견된다. 교육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그가 갑자기 대학의 관선이사가 되면서 상지대학 사학비리의 서막이 열렸다. 19741월 원주대학 설립자인 원홍묵 씨로부터 대학을 인수한 그는 상지대로 이름을 바꿔 이사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김문기는 여러 차례 자신이 설립자라고 주장해 왔지만 지난 2004년 대법원은 상지대 법인은 원홍묵 씨가 설립했고 운영권만 이전됐을 뿐이라고 판결했다. 원 씨는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의 압박 속에서 원주대 운영권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김문기에게 넘겼다고 주장해 왔다.

 

상지대 이사장에 오른 1974년부터 구속된 1993년까지 2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김문기의 사업체는 강원상호신용금고(현 강원저축은행)와 가구점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무슨 돈으로 100건에 이르는 부동산을 매입했을까. 그의 부동산 매입 자금 출처를 가늠케 하는 사례들이 있다.

 

교육부는 199210월부터 1993년 상반기까지 상지대에 대한 특별감사를 벌였다.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규모를 축소한 점, 1990-1992년 사이에만 12천만 원 상당의 수의계약이 이뤄진 점, 실험실습비와 장학금을 유용한 점 등이 감사에서 적발됐다. 특히 도서구입비를 건축비용으로 유용한 뒤 청계천 상가에서 헌책을 톤(t) 단위로 사다가 도서관에 비치한 일이나 당시 도서관에 정기간행물이 하나도 없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재산 축적 과정을 잘 아는 상지대 관계자들은 그의 왕국이 권력유착과 비리로 쌓아올린 바벨탑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부동산 재벌이 되는 과정은 대표적 사학비리의 주인공이 돼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교육과 무관했던 가구업자가 정치 연줄을 이용해 대학을 인수한 뒤 학교에서 빼낸 돈으로 땅을 넓히고 건물을 높여온 경로와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상지학원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김문기 씨의 재산 가운데 절반 이상은 상지대 이사장을 지낼 때 학생들 등록금으로 산 부동산들이라고 증언했다.

 

1960년대 후반 김문기는 당시 종로가 지역구이던 민관식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운 것을 계기로 정부에 가구를 납품하면서 재력을 키운다. 1967년에서 1970년 사이 그는 인사동, 숭인동 땅 외에 도봉구(현 강북구) 우이동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도 눈길을 돌렸다. 등기부등본엔 그가 우이동 226번지와 228-233번지 대지 8727(2644)와 길 건너 산8-15번지의 임야 45045(13650) 16천여 평의 땅을 1967914일에 집중 매입한 것으로 나온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7124, 서울시는 40만 평에 달하는 우이동유원지 개발사업을 발표한다. 이후 거짓말처럼 김 씨가 매입한 터에 우이동유원지가 들어섰다.

 

김문기는 1972년과 1981년 임야와 대지를 추가 매입해 지금도 우이동 일대 62932(19071)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인근 임야와 대지의 가격은 올 2분기 국토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200억 원대에 이른다.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됐다가 1998년 취락지구로 변경된 이곳에 그는 5개 음식점을 임대해주고 있다. (2016.07.16.일자 한겨레 토요판: ‘사학비리의 끝은 1조원대 부동산 왕국에서 인용)

 

김문기 사학 족벌, 장남의 장인은 조찬형 전 국회법사위원장

김영삼 정권 출범 첫해인 1993문민정부 사학비리 1로 교육계에서 퇴출된 김문기 일가가 한때 상지대의 운영권을 다시 장악하기도 했다. 김 씨의 둘째아들 김길남 씨가 20143월 말 상지대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던 것이다.

 

상지대는 김문기 일가의 일자리이자 축재 수단이었다. 김문기 씨는 부인 김옥희(194년 생) 씨와 42남을 두고 있다. 부인은 상지대 이사와 상지문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사위가 총장 비서실장, 매제는 전문대학장, 8촌은 교무과장·한방병원 총무과장을 지내는 등 김문기 가족이 학교를 완벽하게 사유화했다.

 

김문기의 장남 김성남(金晟南: 1965년생)은 건설회사 사장으로 있으며, 상지대의 상임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장인이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낸 조찬형(趙贊衡: 1938년생) 전 평민당 의원(13, 15)이다. 김문기와 김성남은 모두 상지대 이사진 명단에 빠졌지만, 현재 김문기의 며느리(김성남의 부인) 조민정 씨가 법인 이사로 선임돼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2003년 박근혜의 한나라당, 사학법 개정 저지 장외투쟁 이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개혁 저항이 거센 영역이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상승이동(계층이동: social mobility)은 누군가의 하강이동을 통하거나, 빈곤층과 상대적 약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했던 현실, 제도,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사학 설립자 가족들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오롯이 써야 할 등록금과 국가 예산지원을 가로채 자신들의 사익을 채워도 이를 감시해야 할 정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2004년 박근혜 대표 지휘 아래 노무현 정부가 내걸었던 4대 개혁입법 중 사립학교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53일간 사활을 걸고 일사불란하게 벌인 장외투쟁은 사학법 재개정 논의 약속 등을 얻어내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이 그렇게 일사불란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2004년 당시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개정 방침을 좌절시키고 몇 년이 지난 뒤 모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사학 재단의 이사()를 지냈거나 지내고 있는 한나라당 소속 전·현직 국회의원이 30명 정도였다.

 

박근혜(영남대 이사장), 정몽준(현대학원 이사장), 강석호(벽산학원 이사장), 고흥길(경원학원 개방이사), 김태환(성일학원 이사), 김호연(서강대 개방이사), 여상규(신진학원 이사), 이은재(진명전진학원 개방이사), 조진형(송도학원 이사), 장제원(동서학원 이사), 정해걸(삼영학원 이사), 나경원(홍신학원 이사), 김충환(세명학원 이사), 고승덕(유신학원 이사), 이강두(한국승강기대학 이사장), 김정숙(단국대학 개방이사), 박재욱(경북학원 이사장), 김일윤(경흥학원/원석학원 이사장), 홍문종(경민학원 이사), 홍우준(경민학원 이사장), 김찬진(가톨릭학원 개방이사), 현승일(국민학원 이사), 강창희(거붕학원 이사), 정창화(근영학숙 이사), 김영덕(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고려학원 이사), 이해구(두원학원 이사), 현경대(대광학원 이사), 신영국(남북학원 설립자/이사), 나경수(우송학원 이사), 이상희(일광학원 이사). <이상 2006-2010년 통계>

뉴스타파 신학림


족벌사학과 세습교육용 매입 18억 주택, 알고보니 이사장 일가 거주   

족벌사학 설립자 일가의 반칙과 특권

 

2016년 동덕여학단(동덕여대 운영)은 평창동 고급 주택을 18억 원에 매입했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시설로 쓰겠다며 취득세도 감면받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육용 시설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 뉴스타파 확인 결과, 대학 이사장 일가가 이 고급 주택에서 거주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동덕여대는 처음에는 이사장 일가의 거주 사실을 부인하다 나중에는 월세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뉴스타파는 <민국100년 특별기획 :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 일환으로 족벌 사학과 세습연속 보도를 해오고 있다. 이번 편에는 족벌 사학 동덕여대에서 벌어진 설립자 일가의 반칙과 특권을 고발한다.

 

동덕여대는 왜 평창동 고급 주택을 샀을까

동덕여자대학교. 조동식(趙東植)1950년에 설립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했다. 조동식의 친일행적은 화려하다. 그는 일제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적극 독려했으며, 내선일체와 황민화 운동도 주도했다.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장이던 194239일과 512, 조동식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제목은 각각 <충성과 효도는 하나>, <군인의 안해(아내)를 육성할 여학교 교육의 새정신>으로 징병을 적극 독려하는 내용이다.

 

동덕여대 설립자 조동식 동상

 

1942512일 매일신보

 

194239일 매일신보

 

조동식은 해방 이후 1950년 설립한 동덕여대의 이사장과 초대 총장을 지냈다. 그리고 조동식의 후손들은 지금도 동덕여대를 지배하고 있다. 학교법인 동덕여학단의 이사장 자리는 조동식에 이어 아들 조용각, 며느리 이은주(조용각 부인)으로 이어졌고, 2015년 조용각의 장남인 조원영 씨가 이사장 자리에 올라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3대째 족벌 세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사장 일가가 살던 고급주택, 동덕여대가 교육용 시설로 매입

 

동덕여학단이 교육용 기본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평창동 고급주택

 

족벌 세습의 폐해를 볼 수 있는 사례 중 하나가 현재 동덕여학단(동덕여대 학교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고급주택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고급 주택가에 있는 대지면적 563제곱미터 규모 2층 주택이다.

 

이 집은 1983년 설립자 조동식의 아들인 조용각 씨가 매입해 살던 곳이다. 1999년 조 씨가 사망한 이후 아내인 이은주 씨와 아들인 조원영(현 이사장) 씨가 상속받았다. 하지만 조원영 씨가 개인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됐고 결국 집은 법원 경매에 넘어갔다. 그리고 20164월 동덕여학단이 이 집을 경매를 통해 사들였다.

 

당시 주택 매입 가액은 187,900만 원이었다. 동덕여대 관계자는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해당 주택을) 비교적 싼 가격에 매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덕여대는 18억 원 넘는 매입 자금을 정부 보조금이 들어있는 교비회계 항목에서 지출했다.

 

결과적으로, 이사장이 살던 집을 대학 측이 매입한 게 됐다. 이 때문에 평창동 고급 주택을 학교가 굳이 살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과 함께 조원영 이사장의 개인 빚을 학교 법인이 대신 갚아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교육용으로 쓰겠다며, 6천만 원이 넘는 취득세 면제 받아

그러나 당시 동덕여대 측은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학교 측은 이 주택을 갤러리나 문화공간 등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시설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20162월 동덕여대 이사회에서, 설미애 이사는 주택 매입을 승인하면서 평창동 주택을 매입해서 활용할 때 학생들을 위해서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 동덕여대는 이 주택을 교육 시설로 쓴다는 조건을 내걸어 6천만 원이 넘는 주택 취득세를 면제받았다. 그리고 201610, 동덕여대는 평창동 주택을 동덕문화원으로 설계하겠다는 입찰 공고까지 냈다.

 

매입 후 3년째 교육시설로 사용한 흔적 없어

3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이 주택은 동덕여대의 약속대로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시설로 활용되고 있을까? 뉴스타파가 현장을 찾아 확인한 결과 현재 해당 주택은 교육용으로 활용되지 않고 있었다. 3년 전 경매로 나왔을 때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해당 주택을 갤러리 등의 교육용 공간으로 바꾼 흔적은 전혀 없었다.

 

20197월 현재 평창동 주택 사진(왼쪽) 2016년 경매 당시 평창동 주택 사진(오른쪽)

 

오히려 주택 곳곳에서 누군가 거주하는 흔적이 나왔다. 마당에는 행주 등이 널려있었고, 계량기도 켜져 있었다. 밤이 되자 1층과 2층 거실에 불이 켜졌다. 대문 앞에는 외제 차량 두 대가 주차돼 있었다. 학교법인이 교육용 시설 명목으로 사들인 주택에 과연 누가 살고 있는 것일까.

 

주택 앞 외제차 소유주 이름, 조원영 이사장의 장남 부부와 일치

뉴스타파는 주택 앞에 주차돼 있는 외제 차량의 차주를 확인했다. 1976년생 조 모 씨와 이 모 씨, 공동명의로 나온다. 그런데 조 모 씨는 조원영 이사장 장남의 이름과 생년이 정확히 일치했고, 이 모 씨 역시 조 씨의 아내 이름과 같았다. 차량 주소로 등록한 곳도 이 주택의 주소와 일치했다.

 

차주 명의, 택배 수신자 등 파악해 이사장 일가 평창동 주거 사실 확인

 

평창동 주택 앞에 주차돼있던 외제 차량

 

한참을 기다린 끝에 해당 외제 차량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조원영 이사장의 장남으로 추정됐다. 취재진은 차량 주인에게 조원영 이사장의 장남이 아닌지 물었지만, 그는 모른다”, “얘기하기 싫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뉴스타파는 조원영의 장남 부부 등이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더 발견했다. 우선 201972, 평창동 주택으로 배달된 택배, 수신자가 조원영 이사장의 첫째 며느리 이 모 씨 이름과 같았다. 20196월 배달된 택배 겉면에는 조 이사장의 어머니인 이은주 씨 댁이라고 적혀 있었다.

 

경매에 넘어간 이사장의 고급 주택을 학교가 교육시설 명목으로 사들인 뒤, 이 집에 이사장 일가가 계속 거주한다는 것은 학교를 개인재산으로 보는 족벌세습 학교가 아니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조원영 이사장에게 해명 요청했지만, 답변은 없어

취재진은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묻기 위해 동덕여대를 찾아갔다. 학교법인 관계자는 “(해당 주택에 대해) 모른다며 자신의 소관 업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법인 소유의 건물을 관리하는 시설관재팀을 찾아갔지만 본교 일이 바빠서 해당 주택에는 가본 적도 없다“(주택 활용 방안은) 윗분들이 정해준다는 답변을 들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여러차례 법인 이사장실을 찾았다. 이사장 일가에게 학교 소유 주택을 사용할 수 있도록 특혜를 제공한 이유 등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조원영 이사장을 만날 수 없었다. 이사장 비서실장이자 법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도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통해, 해명을 요청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동덕여대 측 노모가 있어 한동안 살게 했다... 사용료 받아

뉴스타파 취재가 진행되자, 동덕여대는 79일 이사장 일가의 거주 사실을 뒤늦게 시인했다. 취재진과 만난 동덕여대 관계자는 조원영 이사장님의 일가분들이 학교가 주택을 매입한 후에도 한동안 살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은주 씨(조원영 이사장의 모친)가 아흔이 넘었고, 거동도 불편해 오랫동안 살아온 집에서 하루아침에 이사를 나가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이은주 씨가 현 이사장의 모친이자 법인의 전 이사장이기도 하니 배려를 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동덕여대 관계자는 학교 측은 주택 사용에 대한 월세를 이사장 가족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사용료 명목으로 매월 월세를 받았다는 것이다. 뉴스타파는 누가 얼마나 월세를 냈는지, 전월세 계약서는 작성했는지, 만약 월세를 받았다면 돈을 교비회계에 넣었는지 등에 대해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답변을 하지 않았고, 증빙 자료도 제시하지 않았다. 하루 뒤, 학교 측은 이사장 일가가 월세를 낸 자료는 대외비여서 외부에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사장이기에 가능한 특권...취재 시작되자 집에서 사람 빠져 나가

 

취재진이 평창동 주택 앞에서 만난 남성

 

뉴스타파 취재 결과, 동덕여대는 경매에 넘어간 이사장 주택을 교육용 시설로 사용하겠다며 매입한 뒤 실제로는 이사장 일가가 거주하도록 했다. 조원영 이사장 일가가 평창동 주택을 계속 소유하고 있었다면 대지면적과 공시가격 등을 고려할때 조 이사장은 매년 300만 원 가량의 재산세를 납부해야 한다. 소유권이 동덕여대로 넘어간 2016년부터 계산하면 1,200여만 원이다.

 

그러나 조 이사장 일가는 이 재산세를 내지 않아도 됐을뿐 아니라 소유권이 학교로 넘어간 이후에도 제 집 처럼 자유롭게 해당 주택에 거주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동덕여대는 이 주택을 교육용 시설로 만들겠다며 6,000만 원에 이르는 취득세까지 감면받았다.

 

동덕여대가 조 이사장 집을 매입하며 지출한 돈 187,900만 원은, 학생 한 명에게 300만 원 씩의 장학금을 지원한다면 모두 600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금액이다.

 

족벌사학과 세습동의학원에 설립자 일가친척 34명 취업

설립자 일가 친인척을 먹여 살린다” ‘가족회사동의대학교

 

가족 회사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대학이 있다. 설립자의 일가·친인척 34명이 이 대학 법인, 또는 소속 학교와 병원에서 근무했거나 재직 중이다. 설립자의 장남, 차남, 삼남이 각각 이사장과 병원 행정원장, 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사장을 물려받은 장남은 이사장 재직 당시 배임수재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최종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학교 법인 사무소를 드나들며 여전히 이사장으로 불리고 있다. 바로 부산에 있는 동의대학교다.

 

뉴스타파는 <민국100년 특별기획 :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 일환으로 족벌 사학과 세습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4편에서는 족벌사학 동의대를 무대로 벌어진 설립자 일가·친인척들의 학교 취업실태를 고발한다.

 

설립자 김임식, 이사장만 ‘50’... 이후 세 아들에게 골고루 물려줘

 

동의학원 설립자 김임식

 

동의대학교는 박정희 정권 시절 공화당 4선 의원을 지낸 김임식(金任植)이 설립했다. 1977년 경동공업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뒤, 동의대학교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임식은 1966년 학교법인 동의학원을 만들고 초대 이사장이 된 후, 2010년 사망 때까지 50년 넘게 이사장직을 유지했다.

 

그는 학교법인 설립 이후 동의중학교, 동의공업고등학교, 동의과학대학(옛 동의공전), 동의대학교, 동의의료원을 세웠다. 또 한국대학법인협의회 회장과 한국사학법인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김임식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교육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의미인 교육보국의 일념으로 학교를 설립했다고 회고했다.

 

동의학원 설립자 김임식과 장남 김인도 씨, 차남 김형도 씨, 3남 김영도 씨 (출처 김임식 자서전)

 

20101월 김임식 사망 이후, 장남인 김인도 씨가 동의학원 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차남 김형도 씨는 동의대학교 부속 동의의료원의 행정원장을 지냈고 삼남인 김영도 씨는 현재 동의과학대 총장을 맡고 있다. 김임식의 아들 3형제가 나란히 동의학원에서 한자리씩 맡은 것이다. 김영도 총장은 세습과 관련해 설립자의 아들이 대학 총장을 맡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뉴스타파 취재진의 이메일 질의에 임명권자인 학교 재단 이사회 이사들에게 문의하라고 답했다.

 

대학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세 아들 만이 아니다. 김임식의 아내 구수연 씨는 동의학원 이사를 지냈고, 김임식의 셋째 사위인 이인길 씨는 현재 동의의료원 원장으로 있다. 장남 김인도 씨의 아내이자 김임식의 첫째 며느리 이인옥 씨는 현재 동의학원 상임이사로 재직 중이다.

 

장남 김인도의 자녀들, 전부 교수로 채용

 

동의학원 소속 학교, 병원 등에 취업했거나 근무 중인 설립자 김임식 일가 11

 

김임식의 장손자, 즉 김인도 씨의 자녀들도 모두 동의대와 동의과학대 교수로 채용됐다. 김 전 이사장의 장남 김현규 씨는 동의대 경영학부 교수로 재직했고, 장녀인 김주연 씨는 동의과학대 교수로, 차녀인 김성희 씨는 동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밖에 김임식의 둘째 며느리 문혜리 씨 역시 동의과학대 교수로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임식의 직계존비속과 그 배우자를 합하면 설립 학교와 병원에서 근무했거나 재직 중인 일가는 모두 11명으로 집계됐다.

 

족보 확인하니, 동의학원 취업 일가 친인척 34명으로 늘어

 

김임식이 편집에 참여한 ‘1997년판 김임식 일가 족보’. 인물마다 근무지가 기재돼있다.

 

설립자 김임식의 친인척으로 조사범위를 확대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뉴스타파는 김임식이 편집에 참여해 1997년 만든 <1997년판 김해김씨 금성군파 족보>를 확보해 동의학원 소속 학교와 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모두 집계했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마다 근무지가 기재돼 있었다.

 

그 결과, 동의공전(동의과학대 전신), 동의중학교, 동의의료원, 동의대 등 등 동의학원 소속 기관에서 근무한 김임식의 친인척은 모두 23명이었다. 직책은 동의대 교수, 동의의료원 의사, 동의공업고등학교 서무과장 등이다. 앞서 확인한 설립자 일가 11명과 족보로 확인한 친인척 23명을 합하면, 무려 34명이 설립자가 세운 학교와 소속 기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나온다. 학교를 세워 일가친척 전체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닐 정도다. 그 어떤 곳보다 투명하게 운영돼야 할 교육기관이 폐쇄적인 가족기업 경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족벌경영의 부작용... 장남, 비리 운영으로 징역형 선고

이 같은 족벌 경영은 비리와 범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설립자의 장남인 김인도 이사장은 2016년 동의대 캠퍼스 건물 신축 공사 과정에서 리베이트 명목 등으로 금품을 받은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1심 재판부는 김인도 이사장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고 2심과 대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유지됐다.

 

멈추지 않는 일가의 이사회 지배’...남편 사퇴하자 아내를 상임이사로

그렇다면 현재, 학교법인은 누가 운영하고 있을까? 김인도 씨는 2심에서도 징역 2년 형이 선고되자 2017610일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딱 하루 뒤인 611, 김 씨의 아내 이인옥 씨가 이사로 선임됐다. 이사 선임 당시 이 씨의 경력은 동의대 부설 어린이집 원장이 전부였다.

 

이후 이 씨는 상임이사의 왕성한 대외활동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매월 1,200만 원 씩, 1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고 있다. 동의학원 설립 이후 상임이사를 맡은 사람은 김인도 씨와 부인 이인옥 씨 단 2명뿐이다. 김인도 씨 역시 부친이 생전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상임이사를 맡아 매월 1,000만 원이 넘는 월급을 수령했다.

 

김인도 전 이사장은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자신을 대신해 아내가 상임이사가 된 배경을 묻는 질문에 배경이 왜 궁금하냐”, “내가 (이사장직을) 관두게 됐으니까 (아내가 상임이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어린이집 원장을 오랫동안 운영해 경력도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학교법인 분사무소에서 개인비서두고 이사장 행세의혹

 

지난 430일 동의대 명예의전당 행사에 참석한 김인도 씨(맨 앞 왼쪽에서 네번째 안경 쓴 이) , 총장 바로 옆 자리에서 기념촬영했다.

 

2년형이 확정돼 복역을 마친 김인도 전 이사장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김인도 씨는 불과 세 달 전 학교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430일 동의대 명예의전당 완공식 행사장에 나와 앞 줄 총장 바로 옆자리를 차지해 기념촬영을 했다.

 

학교 주변에서는 그가 최근까지도 학교법인 사무실에 출근하는 등 대학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김 씨가 동의학원의 분사무소 명목으로 낸 사무실에 드나들며 개인 비서까지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동의학원은 20184월 이사회 승인을 거쳐, 부산 서면에 있는 메디컬센터에 학교법인 분사무소를 마련했다. 메디컬센터의 관리를 한다는 명목이었다.

 

취재진은 분사무실이 있다는 메디컬센터를 방문했다. 건물 입구 어디에도 학교법인 분사무실이 있다는 안내표지는 없었다. 빌딩 맨 위층인 14층에 들어서자 동의학원 간판이 있었다. 이 곳에 30평 쯤 되는 동의학원 서면 사무소가 있었다.

 

직원 이사장님(김인도 씨) 사무실현 이사장은 한번도 온 적 없다

 

부산 서면 동의학원 분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직원. 김인도 전 이사장을 보좌하는 업무를 한다고 설명했다.

 

한 직원이 취재진을 맞이했다. 이 직원은 이 사무실이 어떤 사무실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사장님(김인도 전 이사장) 사무실이라고 명확히 말했다. 이 직원은 김인도 전 이사장을 이사장님으로 호칭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할은 김 전 이사장을 보좌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직원에게 구체적으로 맡고 있는 업무를 묻자, “이사장님(김인도 전 이사장)이 사무실에 올 때는 손님을 맞는다. 손님이 오면 이사장님에게 안내를 하고 안으로 들여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김인도 씨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 사무실에 현재 이사장인 구영수 이사장은 출근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답했다. 서면 빌딩 관리소장도 김인도 전 이사장이 드나드는 걸 수차례 봤다다른 사람은 그 사무실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리로 유죄판결을 받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설립자의 장남이 공식 직함도 없이, 개인 비서를 두고 학교 법인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학교 경영에 개입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동의대 김인도 출근하지 않는다”... 대학 명예이사장으로 대우

취재진은 김인도 씨에게 사실 관계를 물었다. 그는 취재진과 통화에서 내가 무슨 비서가 있냐. (그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이라며 해당 사무실에 드나들지도 않는다고 했다. 동의대 측도 취재진에게 김인도 전 이사장이 서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냐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이사장은 해당 사무실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학 측은 김인도 전 이사장을 단지 명예이사장으로 대우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교육기관을 사적인 이익추구 기관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가진 나라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그것(사적 이익추구)을 막아주는 게 사립학교법인데 법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설립자 일가들이) 그런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스타파 강혜인



 

노래출처: 다음블로그 아름다운 음악여행

Peaceful Easy Feeling / Eag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