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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뉴스타파

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부역자들

by 이성근 2019. 7. 20.

[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부역자들()

순위와 결과지상주의 교육의 뿌리는 일제 식민·국가주의에

 

1968125일 박정희는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학교(199631일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뀜)를 다녔던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국민교육헌장(전문)을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종홍·안호상·이인기·유형진을 비롯한 기초위원 26명과 심사위원 48명이 초안을 작성하고 19681126일 국회의 만장일치동의에 따라 박정희가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직접 발표했다. 이 헌장은 이후 모든 학교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고 새마을 운동과 함께 20여 년간 국가적으로보급되었다가 1994년에 사실상 폐기됐다.

 

당시 학교에선 국민교육헌장을 의무적으로 외워야 했기 때문에 반세기(50)가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외우지 못해 체벌 받은 트라우마가 살아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 국민교육헌장의 전부 혹은 일부 구절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10대 때 받은 교육의 영향과 충격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교육과 교육 시스템이 중요하다.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일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고 7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교육계와 교육제도, 그리고 학교 교육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도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 제국주의식 교육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요즘 자율형 사립고’(약칭 자사고) 재지정과 취소를 둘러싼 논쟁의 뿌리도 따지고 보면, 일본식 경쟁과 결과 지상주의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탈락과 희생, 혹은 좌절을 전제로 한, 나의 합격과 승진 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슬픈 모습이 남아있다.

 

일본 천황제국가주의의 첨병, ‘제국대학시스템

1948년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 제도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일본이 군국주의에 바탕을 둔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설립한 일본의 제국대학’(시스템)과 만나게 된다.

 

제국(帝國)대학. 글자 그대로, 우리가 일왕(日王)’으로 부르는 천황제()’()가주의가 결합돼 있는 이름이다.

 

메이지 유신(1868)을 거쳐 군국주의의 외길을 걷던 일본이 1886년 발표한 제국대학령() 1조는 제국대학이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여 학술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蘊奧: 학문이나 기예의 깊고 오묘함: 편집자 주)를 공구(功求: 힘써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국대학령을 발표한 1886년 도쿄(東京)제국대학 개교를 시작으로, 교토(京都)제국대학(1897), 도호쿠(東北)제국대학(1907), 규슈(九州)제국대학(1910), 홋카이도(北海道)제국대학(1918), 게이조(京城)제국대학(1924), 다이호쿠(臺北)제국대학(1928), 오사카(大阪)제국대학(1931)과 나고야(名古屋)제국대학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9개의 제국대학 중 한국의 서울(경성)과 대만(대북)의 제국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7개 제국대학이 일본에 있다.

 

일본 정부가 제국대학과 졸업생들에 제공한 특혜와 특권, 그리고 제국대학들의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제국대학이란 이름은 글자 그대로 실상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일본인들은 졸업과 동시에 특권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1892년까지는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고급)관료로 임용됐고, 제국대학 교수들은 국가의 고급관료로 신분보장과 함께 높은 급료가 지급됐다.

 

1918대학령이 선포될 때까지 일본에서 대학은 오로지 제국대학 뿐이었다. 게이오(慶應)대학과 와세다(早稲田)대학 등이 대학 명칭을 사용했지만, ‘사립와세다대학처럼 대학 이름 앞에 사립을 붙여 사용했다. ‘학사(學士)’라는 호칭도 제국대학 졸업생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적 칭호였다.

 

일본 문부성의 1909년 통계에 따르면,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졸업생의 44%가 관공청의 관료로, 24%는 관·공립 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 졸업생의 2/368%가 관() 분야로 진출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와 패망 이후 일본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관료국가였으며 일본의 군부 파시즘을 지탱한 것도 도쿄제국대학의 엘리트 관료들의 카르텔이었다는 것이 제국대학의 조센징의 저자 정종현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의 평가다. 정종현 교수의 이 같은 평가는 197912.12. 군사쿠데타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을 육군사관학교 출신 실세들과 서울법대 출신 정치인과 당료들이 좌지우지한다고 하여 이름붙인 육법(육사+서울법대)을 연상시킨다. 서울법대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의 법학부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얼마나 많은 한국인(조선인)들이 일본의 7개 제국대학에 유학을 간 것일까? 지난 6월 발행된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란 긴 부제가 붙은 제국대학의 조센징에 따르면,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에 유학하여 학사를 받은 조선인 졸업생은 모두 784명이었다. 여기에 선과(選科), 전수과(專修科), 위탁(교육)생에다 입학한 후 이러저런 이유로 학업을 포기한 사람까지 합치면, 일본 소재 7개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은 1천 명이 넘을 것으로 저자 정종현 교수는 파악했다.

 

1924년 서울에서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1942년까지 졸업한 조선인 누적총수가 629명인 것과 비교하면, 일본의 7개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 졸업생의 68%가 관() 분야에 근무했던 것처럼,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도 비슷하거나 높은 관계 진출 비율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아래 도표를 보면,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7개 학부 중 법학부를 졸업한 조선인이 각각 60(36.8%)102(46.6%)으로 나머지 6개 학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이들이 졸업 후 취업하거나 진출한 분야를 보자.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중 64명이 관료로 출발,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에서 근무하거나, 일본 본토에서 관료 혹은 준관료로 근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전체 졸업생 163명의 39.3%에 해당한다. 그러나 163명의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중 행적을 확인하기 어려운 41명을 제외하면, 관료가 된 비율이 52.5%가 된다.

 

교토제국대학의 경우, 조선인 졸업생 중 관료가 된 이가 96명으로 전체졸업생(236)40.7%에 해당한다. 행적이 확인 안 된 55명을 제외한 비율로 따지면, 역시 절반이 넘는 53%가 관료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일본, 조선, 만주국의 대학과 전문학교 교원이나 해방 후 남한과 북한의 교수직을 지낸 졸업생들을 보면, 도쿄제국대학의 경우 53명으로 전체 졸업생의 32.5%에 해당하고, 행적 미확인자(41)를 제외하면, 43.4%에 해당한다. 교토제국대학 졸업자는 전체졸업생의 19.5%에 해당하는 46명이 교수직을 거쳤고, 행적 미확인 졸업생을 제외하면 25.4%가 되는 셈이다.

 

도쿄제국대학의 경우, 관료와 교수(교원)가 된 조선인 졸업자를 합치면 117명으로 행적이 확인된 조선인 전체 졸업생(112)의 무려 95.9%에 해당한다. 교토제국대학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78.4%에 해당한다.

 

일제 강점기 도쿄·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과 취업(진출) 현황. 도표는 제국대학의 조센징저자(정종현)<도쿄대학졸업생씨명록(1950)>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내용을 재작성한 것임

 

1968년 국민교육헌장, 1948년 폐기한 일왕의 교육칙어에 뿌리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국민교육헌장도 그 뿌리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일왕(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한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 教育勅語)’에 있다. 189010월 발표된 교육칙어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한 것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 식민지에서 시행된 조선교육령과 타이완 교육령에서 교육 전반의 규범을 정했다.

 

패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의 1946년 교육칙어 금지 통첩을 받은 일본 정부가 1947년 교육기본법을 공포·시행하며 교육칙어를 배제하였고, 1948년 일본 중의원이 교육칙어 등의 배제에 관한 결의를 하고, 이어 참의원이 교육칙어 등의 실효 확인에 관한 결의를 통해 교육칙어가 학교 교육에서 효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사라진 교육칙어가 20년 뒤 식민지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국민교육헌장으로 이름만 바꾼 채 살아난 것이다. 일왕의 교육칙령과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은 그 제정 취지와 내용 등에서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천황제 하의 제국주의 신민이나 공화국의 국민이 용어만 다를 뿐, 통치의 대상으로 완벽하게 같다는 것을 시대를 달리하는 두 나라의 교육칙령이 보여준다.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이인기.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름을 올렸고,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뒤, 숙명여대와 영남대 총장을 지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기초위원 26명 중에서 특히 이인기(李寅基: 1907-1987.06.28.)는 단연 눈에 띤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교육학)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지금의 교원)를 지냈다가 1939년 만주 간도성에서 시학관(視學官: 고종이 1894년 학무부를 설치했을 때 처음 직책으로 학교 수업 내용을 감찰, 지도감독하는 자리)으로 일했다. 1940년에는 건국시묘창건기념장을 받았고 친일단체 흥아청년구락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에 들어오자마자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경전) 교장을 맡다 1년 뒤에 서울상대로 통합되자 서울상대의 학장을 지낸다. 그의 가족 중에는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띤다.

 

우선 그의 부친 이우정(李愚正: 1880.08.28.-1956.11.03.)은 법관양성소를 거쳐 1909년 판사가 된 뒤 일제에 부역하다 각종 훈장을 받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우정은 안동지청 판사로 재직하던 19193월 안동군 일직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이구덕에게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태형 90대를 선고했다.

 

이우정, 이인기 부자(父子)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인기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주요 대학의 교수자리와 요직을 쉬지 않고 거쳐 갔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하고 숙명여대와 영남대 총장을 잇따라 지낸다.

 

도쿄제대 졸업생 이인기, 자신과 부친, 장인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이인기의 장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의 모태가 된 박승직 상점을 연 거상(巨商) 박승직(朴承稷: 1864.07.25.-1950.12.20.)이다. 박승직은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포목상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일제 총독부에 막대한 금액의 국방헌금 등을 제공하고, 일본의 전쟁에 협조하고 전시동원을 위한 여러 단체에서 적극 활동했다. 박승직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이인기는 61남을 뒀는데, 그의 맏사위(이덕용)는 서울의대 교수를 거쳐 한국보훈병원장을 지냈다. 차녀(이근원)의 남편은 현재천 고려대 교수로 조부가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이다. 6.25 때 납북된 현상윤(조선임전보국단 이사) 전 고려대 총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이인기의 3(이근수)는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의 큰아버지(김용택)의 손자(김종언)와 결혼했고, 4(이근영)의 남편(김중헌)은 민주공화당 원내총무와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택수(1926-1983) IOC 위원의 장남이다. 이뿐 아니다. 이인기의 여동생의 아들이 유종하(1936) 전 외무부 장관으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이인기를 비롯, 일본으로 건너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 고등학교(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제국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는 동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와 20대 초반 10년 안팎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 보니 이들은 사실상 일본인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학연과 혈연 등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일본의 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도 또 하나의 가족이 돼 대한민국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다

 

[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교육으로 일제와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공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사학 설립자나 교육계 고위 인사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과 이를 계승한 전두환 군부정권에 적극 협력하며 승승장구했다.

 

일제 강점기 이광수·최남선 같은 이는 민족개조론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일제부역 행위를 호도했고, 다른 이들은 실력양성운운하며 자신들의 반민족·매국 행위를 정당화했다. 일본 제국주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7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른바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망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거대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수많은 친일파들이 2차대전 당시 일제가 연합군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는 동안, 영미(영국과 미국)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해방 이후 국제정세가 바뀌자, 이번엔 맹목적친미사대주의로 돌아서 반공을 앞세운 (군부)독재정권에 충성해 온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백낙준, ‘천황폐하’, ‘미영 타도외치다 친미·독재 부역으로

저들의 자기망상은 전 세계의 제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우리 동아(東亞) 천지(天地)에서는 저들의 부당한 간섭과 오만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 제국의 존립상 절대적인 것이요,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위한 성전(聖戰)의 이름이 완전히 도의적인 까닭입니다.-친일인명사전 2200-201

 

여기서 말하는 저들은 미국과 영국이고 우리 제국은 일본이다. 이것은 백낙준이 194112<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주장한 내용이다. 1년 뒤인 1942년 기독교신문에는 징병을 적극 찬양하는 글도 발표한다.

 

오늘의 미영(米英) 등국(等國)은 폭력행사자요.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의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입니다. 이러한 성전(聖戰)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의 생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올시다. (중략) 병역은 국민의 가장 숭고한 의무입니다. 아니 의무만이 아니올시다. 영광이올시다. 우리에게 병역의 의무를 주신 천황폐하께옵서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분부이옵니다. 그 얼마나 황송하옵고 감격스러운 일이옵니까? (중략) 우리는 조국 일본을 결사수호하고 황화(皇化)를 우내(宇內)에 펴고 황위(皇威)를 사해(四海)에 떨치옵시다.  

-백낙준, <설교 - 내 아버지의 집> 기독교신문 1942520, 3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황민화 정책과 일제 침략전쟁을 적극 선동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장로교 목사다.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으로 비행기헌납운동에 앞장섰고 신도들로부터 취합한 헌납금을 전달하기 위해 기독교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일본군 사령부를 방문해 헌납하기도 했다. 그의 창씨명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이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친일파가 그렇듯, 백낙준도 해방 이후 친미파로 변신했다. 백낙준이 19492<새교육>민족적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의 일부다.

 

우리 민족이 위기를 당한 것은 일본의 침범과 도적질입니다. (중략) 우리가 근래 접촉한 나라 가운데에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은 제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짧으나마 안으로 부하고 밖으로는 강한 힘을 떨치어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새교육 제2권 제1호 통권 제4(19492) 중 백낙준 "민족적 이상" 발췌

 

불과 7년 전, ‘미영 제국주의 타도천황폐하를 외치며 일제의 침략전쟁(대동아전쟁)을 찬양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이제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도적질로 비난하고 미국의 강력함을 찬양하고 있다. 같은 사람의 생각과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변신이다. 이 같은 백낙준의 표변은 강자 중심주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를 보냈던 백낙준을 포함한 수많은 친일파들의 처세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백낙준은 해방 직후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교장을 거쳐 1960년까지 연세대 총장과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0년부터 이승만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2년 가까이 지낸 뒤에는 국사편찬위원장까지 맡았다. 이후 서울시교육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약칭 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회장(1956-1958)도 지냈다.

 

다시 연세대로 돌아간 백낙준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내다 4·19 직후에는 참의원 의장도 맡았다. 1961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국토통일원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국정자문위원직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연세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백낙준과 연세대학교에 있는 백낙준 동상

 

연세대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경영관 지하층은 그의 호를 따 용재홀로 명명됐고 용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용재학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대학 도서관 앞에는 백낙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에는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 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라고 백낙준을 기리고 있다. “조국 일본을 결사수호하고” ‘천황폐하를 찬양하던 백낙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나 반성의 문구는 없다.

 

백낙준의 네 아들과 손자들 대부분은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하고 생활했다. 그의 장남(백순욱; 1933년생; 작고)은 작곡가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의 셋째딸(玄海玉: 1934년생; 줄리어드음대 졸)과 결혼했다. 현제명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 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낸 현제명의 맏사위는 박정희 시절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張昌國: 1924-1996) 예비역 육군 대장이다. 백낙준의 부인(최이권: 1905-1990)YWCA 회장을 지냈고, 그의 처제(최이순: 1911-1987)는 연세대 가정대학장과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다.

 

미군정청 교육위원 유억겸, 4촌 이내 친인척 8명 친일부역행위

유억겸(兪億兼: 1896-1947)은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고려중앙학원 이사장·부통령),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이화학당 이사장; 이화여대 총장), 백낙준 등과 함께 해방 직후인 19459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 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학무국장, 즉 지금의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미군정청 교육위원을 지낸 유억겸

 

그는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부터 시작해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1년 더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 전편에서 소개했듯이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제국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려면 중학교부터 시작해 10년 이상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억겸은 1923년 귀국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경성지방법원 변호사로 등록하고, 중앙고보 교사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교수 및 부교장 등을 거쳤다. 또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 위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활동하면서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일제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를 포함해 4촌 이내의 친인척 중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사람이 8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유억겸의 아버지는 대한제국 내부대신(요즘의 행정안전부장관)을 거친 개화파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다. 유억겸의 형 유만겸(兪萬兼: 1889-1944)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과를 졸업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충북도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부역하며, 많은 돈(수당)과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유만겸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다.

유억겸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1876-1935)과 그의 둘째형 윤덕영(尹德榮: 1873-1940) 형제는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이완용 못지않은 역할을 한 매국 수작이다. 윤택영의 큰딸(尹曾順: 1894-1966)이 순종(純宗: 1874-1926; 결혼 당시 황태자)의 둘째부인인 순정황후(純貞皇后). 고종이 강제퇴위당한 뒤 순종이 즉위하면서 윤택영은 국구(國舅: 왕의 장인)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칭호를 받는다.

 

유억겸 장인 윤택영의 형 윤덕영, 조카 순정황후가 숨긴 국새 뺏어 강제합병 종용

특히 윤덕영은 매국노 중의 매국노였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을 거쳐 1908년 황후궁 대부(皇后宮 大夫: 지금의 청와대 제2부속실장)와 시종원경(侍從院卿: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까지 겸했다. 1910826, 강제합병을 조인하던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약에 동의했다. 그는 조카인 순종과 황후를 협박해 국새를 빼앗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순종은 유억겸의 동서다.

 

윤덕영은 이런 공로로 일제로부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직과 자작 작위를 받았고 5만 원의 은사공채를 하사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윤덕영은 인왕산 자락(지금의 옥인동)3천여 평이 넘는 대저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조선의 왕들이 거처하던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살았다. 1940년 윤덕영이 죽자 그의 귀족 작위는 양손(養孫)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이어받았다. 윤강로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

 

유억겸의 장인 윤택영도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함께 50만 원이 넘는 막대한 은사공채를 받았다. 그는 사치스러운 호화생활을 하다 빚을 졌고 1928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 처분을 받기도 했다. 중국으로 도피해 살다가 1935년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차남 윤의섭(尹毅燮: 1912-1966)이 이어받았다. 윤택영, 윤의섭 부자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유억겸의 친인척을 간단히 살펴보자. 유억겸의 큰아버지의 장남 유빈겸(兪斌兼: 1868-1932)은 일제 때 중추원 참의와 군수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유억겸의 작은아버지(숙부) 유성준(兪星濬: 1860-1934)도 중추원 참의와 강원도지사 등을 지내며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유성준의 22녀 중 장녀인 유각경(兪珏卿: 1892-1966)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과 기독교여자청년일본동맹 조선연합회 총무 등을 지내며 각종 강연과 기고 등으로 조선 여성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고 참여하자고 선동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해방 이후 유각경은 여러 여성단체와 행정부·정당에 참여했다. 19495월 여러 여성관련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부인회가 창설될 때 부회장을 맡았다. 대한부인회의 총재는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회장은 박순천(朴順天: 1898-1983; 2-7대 국회의원)이었다.

 

유각경은 1956년 이승만의 자유당 중앙위원, 1959년에는 당무위원을 지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대책위원회 제4부장(부녀부장)과 기획위원을 맡아 3·15부정선거를 기획·집행했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행위에 이어, 또 다시 대한민국 역사에 가해자가 된 것이다. 유각경은 3·15부정선거에 연루된 혐의로 4·19혁명 이후 재판에 회부돼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 이후 석방됐다.

 

일제강점기 거대한 일제부역 족벌 중의 하나인 유억겸 가문의 8번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인사는 고모부 유정수(柳正秀: 1857-1938). 강제합병 3년 전인 1907년 탁지부 차관(이전에는 협판·協瓣으로 불렸음)에 임명됐다. 유정수는 강제합병 직후인 191010월부터 1921년까지 11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1921년부터 1938년 사망 때까지 약 18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제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유억겸 인척 이재형 국회의장의 사돈이 정치군인원용덕 헌병총사령관

유정수의 손녀(유갑경, 柳甲慶: 1917-1990)의 남편, 즉 손녀 사위가 이재형(李載灐: 1914-1992) 전 국회의장(1985.05-1988.05; 7선 국회의원)이다.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독특한 성격과 정치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197912·12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이 기존 정당을 전부 해산하고, 기성 정치인들을 대부분 정치규제에 묶어놓고,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을 창당할 때 간판으로 내세운 인물이다.

 

그는 19676월 치러진 제7대 총선(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이 된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지 않아 보통사람들에게는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경기도 시흥(지금의 군포)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1938년 일본중앙(주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금융조합 이사를 지내다, 1948년 치러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 재경위원장과 이승만 정부에서 상공부 장관까지 지낸다. 이어 4-5대와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신민당 부총재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유신시절 야당의원으로 있던 이재형은 정치군인이자 독재자인 전두환 민정당 총재 밑에서 형식상 제2인자로 다시 정치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재형은 전두환 민정당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해 당 간판 격인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1983년에는 민정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1981년부터 4년 동안 한일의원연맹 회장과 한일친선협회 회장을 동시에 맡았고, 민정당 전당대회 의장을 거쳐 198512대 총선에서 다시 전국구 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까지 지낸다.

 

이재형의 44녀 중 장녀(李鳳姬: 1935-)의 남편, 즉 맏사위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원용덕(元容德: 1908-1968: 육군 중장) 헌병사령관의 아들 원창희(元昶喜).

 

원용덕은 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군의관으로 만주군 중교(중령급)로 활동하다 1945년 해방 이후 군사영어학교의 보좌관 겸 부교장을 지낸다. 이어 국방경비대 참령(소령)으로 임관한 뒤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교장과 여단장을 거쳐 19506·25 때 전라북도지구 사령관까지 지낸다. 1949년 백범 김구를 시해한 안두희가 군사법정에 회부됐을 때 재판장이 되어, 검사가 구형한 총살형을 종신형으로 낮춰준다.

 

원용덕은 19524월 현역으로 복귀해 이듬해 3월 중장으로 승진하며 헌병총사령관을 맡는다. 헌병총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김창룡 특무대장과 경쟁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충성하면서 정치군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19604·19혁명 후 구속돼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특사로 풀어준다.

 

휘문고 설립한 일제 자작 민영휘 후손, 관광명소 남이섬도 소유

1922년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을 설립한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일제에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 선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매국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후손들은 풍문학원(풍문여고)도 설립했다. 1944년 설립 인가를 받은 풍문학원은 이듬해 풍문여학교를 개교했고,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덕기(閔德基: 1915-1980)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민영휘의 차남 민대식(閔大植: 1882-1951)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민대식의 장남인 민병도(閔丙燾: 1916-2006)1938년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조흥은행, 상업은행 간부와 제일은행장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은행 총재(1962.05-1963.06)를 지냈고, 휘문의숙 이사장도 맡았다.

 

휘문고등학교 설립 일가 가계도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1977()경춘관광개발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남이섬을 개발했다. 배용준, 최지우씨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겨울연가촬영지로 유명해진 남이섬을 소유·관리하는 경춘관광개발은 이후 ()남이섬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민병도의 장남인 민웅기(閔雄基: 1943-) 씨가 대주주로 있다.

 

민웅기 씨의 윗동서가 신동아그룹 전 회장 최순영(崔淳永: 1939-; 전 대한축구협회장)의 동생 최순광(崔淳光: 1942-) 씨다. 또 바로 밑 처제가 이계경(李啓卿: 1950-)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17)이다. 이계경 의원의 남편은 조임현(曺林鉉: 1941-) 전 세종대 교수다. 조 교수의 형은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을 지낸 조영길(曺永吉: 1940-) 씨다. 민웅기의 막내동서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막내동생인 홍석규(洪錫珪: 1956-) ()보광 대표이사 회장이다.

 

민웅기의 동생 민광기(閔光基: 1947)씨는 조선일보 방우영(1928-2016.05.08.) 전 회장의 막내동서다. 방우영 전 회장의 바로 아래 동서가 임철순(1937-2017.03.12.) 전 중앙대 총장·이사장이다.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임철순은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한 임영신(任永信: 1899-1977) 상공부장관의 조카이자 양자다.

 

임철순은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서울 관악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두 차례 당선(12인제)됐고 민정당 정책위 의장도 지냈다. 서울대와 연세대 교수를 거쳐 조선일보 이사와 감사를 지낸 이영조(李泳朝: 1905-; 작고)가 그의 장인이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19801027일 설치한 임시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약칭 국보위) 위원 으로 임명된 81명 가운데 언론사 사주로는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유일하게 참여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은 연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김앤장 대표 김영무 처가, 계명대와 교회 족벌세습경영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는 미국 기독교 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았고 신후식·신태식 형제가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신후식(申厚植: 창씨명 東原厚植; 1905-2010)은 장로교 목사로 일제 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일본식으로 개편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북교구장으로 재직하며 미영 격멸 비행기 헌납운동에 관한 공문을 보내는 등 일제에 부역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해방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대구신명여고를 재건하여 교장을 지냈고, 1958년부터 2년 동안 영남신학교 이사장도 지내다, 대구 계성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후 197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계명대학교 이사장, 총장 가계도

 

동생인 신태식(申泰植: 1909-2004)은 계명대 설립 이사로 참여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신태식은 초대와 2대 학장이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학교를 떠나고 난 뒤부터 줄곧 계명대 학장을 지냈다.

 

이후 그의 장남인 신일희(申一熙: 1939-) 씨가 총장직을 이어받았다. 신일희 씨는 초대 총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7번째(초대, 4-7, 9-10) 총장을 맡고 있다. 설립 초기 미국인 선교사들이 잠시 학교를 맡던 시절을 제외하고, 학내 문제로 학생과 교수들의 항의와 투쟁으로 잠시 물러나 있던 몇 년을 빼고는, 줄곧 신태식, 신일희 부자(父子)가 학장과 총장으로 세습경영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신일희 총장에게 세습에 대한 입장을 질의했지만, 대학 측은 특별한 의견이 없다고 답했다.

 

22녀를 둔 신태식 전 학장의 막내사위가 합동법률사무소 김앤장의 김영무(金永珷: 1942-) 공동대표다. 김영무 대표의 부인 신수희(申水熙: 1949-) 씨는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를 나왔다. 김영무 대표의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근처에서 내과의원을 경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로 활동했던 김승현(1911-1993.01.01.)이고, 어머니 이현경(李賢卿: 1908-1999.01.24.)은 이왕직(李王職: 일제가 조선의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를 없애고 격하해 만든 기구)에서 근무한 궁중 요리와 복식(服飾)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김 대표의 두 형은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살고 있고 누나 김영주(金永珠: 1935-) 씨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과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윤치호(尹致昊: 창씨명 이토치코/伊東致昊; 1866-1945)5남 윤정선(尹珽善: 1928-2008)과 결혼했다. 윤치호의 부친 윤웅열(尹雄烈: 1840-1911)은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지금 국방장관)을 지내고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부자(父子)가 나란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김영무 대표의 여동생 김덕주(金悳珠: 1945-)씨는 피아니스트, 남동생 김영욱(金永旭: 1947-)씨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김영욱씨는 울산대 석좌교수와 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냈다.

 

처음으로 돌아가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고 일본의 전쟁에 참여해 미국과 영국을 타도하자고 외치던 자들이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도 반성은커녕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을 숭배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정권에 아부하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가? 1919년 당시 연인원으로 전 국민의 3분의 1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 정신이 헌법 전문에 기록된 민주공화국에서 어떻게 70년이 넘도록 일제부역자들이 여전히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열쇠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뒤를 이은, 일제 만주국 장교 출신 박정희의 일제부역세력 비호와 발탁 그리고 장기독재에 그 원인과 뿌리가 있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匡正)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역사 독립군임종국(1929-1989) 선생이 유고(遺稿)에서 우리에게 던진 준엄한 경고다.

뉴스타파 신학림


[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이병도, 유진오, 이호

교육·역사·학술·문화모두를 쥐고 흔든 총독부출신 역사학자 이병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반세기 넘게 한국의 교육·역사·학술·문화분야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뿌리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독보적인 사람이 있다.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우리 고유의 나라이름인 ()’과 단군의 ()’을 합쳐 이름 지었다는 진단(震檀)학회 창설을 주도하며 실증사학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연구자료와 결과물은 일제 식민사학의 본질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봉 이 씨 세도 가문에서 태어난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19년 서울에 돌아온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1925년까지 6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역사학도로서 그가 첫발을 디딘 곳이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조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직속기구 조선사편수회였다. 그가 조선사편수회에서 맡은 직책은 이름부터 일제의 의도가 배어 나온다. 이름하여 수사관보(修史官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역사를 수정하는 일을 하는 관리를 보좌하는 자리다.

 

이 조선사편수회에 이병도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라는 일본인 촉탁이 있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촉탁 직원으로 일하며 한국과 한국인들의 성격과 사상, 풍습, 민속 등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저술과 조사자료를 남겼다. 조선총독부에서 그가 펴낸 많은 책들 중 몇 가지 제목만 훑어보자. (괄호안은 발행 년도)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1927)>

<조선의 귀신: 민간신앙 제1(1929)>

<조선의 민간신앙(1931)>

<조선의 풍수(1931)>

<조선의 무격(巫覡): 민간신앙 제3(1932)>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

<조선의 유사종교(1935)>

<부락제(部落祭)(1937)>

<조선의 향토오락(1941)>

 

1932년에 펴낸 <조선의 무격(巫覡): 민간신앙 제3>에 나오는 무격(巫覡)’은 남자무당(박수무당)을 가리킨다. <조선의 향토오락>은 무라야마 지준이 일본으로 귀국하기 직전인 1941년에 펴낸 책이다. 남의 나라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그 나라 사람들의 풍속과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과 귀신, 심지어 남자무당까지 조사·연구해 책으로 펴내는 집요함이 잘 드러난다.

 

이병도, 조선사편수회 촉탁 경력 등에 업고 해방 이후 평생 꽃길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병도는 무라야마 지준이 하는 역사 작업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386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일한 이병도는 1939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儒林)단체들을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을 맡았다. 총후봉공이란 한마디로 총()을 뒤()로 하고 공공()을 위해 봉사()하라, 전시체제 아래서 전쟁수행을 위해 적극 협력하라는 뜻이다.

 

문교부장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병도 출처: 국가기록원

 

1945년 해방 이후 죽기 직전까지 이병도는 꽃길만 걸었다. 그가 맡은 화려한 직책을 몇가지만 보자. 194512월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조선역사 담당 교수로 임용돼 1961년 정년퇴직 때까지 재직했다. 교수로 있는 동안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부속 박물관장, 서울대 대학원장, 사단법인 진단학회 이사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어 19604·19혁명으로 들어선 과도내각에서 문교부장관을 맡으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겸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학술원 원장, 서울대 대학원장(행정대학원장 겸임), 중앙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제정한 ‘5·16민족상심사위원회 고문이사까지 맡았고, 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한 2년 후인 1982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84월 고문으로 추대됐다.

 

이 같은 그의 화려한 경력도 그와 그의 가벌(家閥)이 구축한 혼맥에 비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병도 가문의 혼맥은 잘 짜인 그물망처럼 촘촘하면서도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병도와 6촌이내 친인척만 10명 이상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그의 큰형 이병묵(李丙默: 1876-1950)의 셋째아들 재령(宰寧: 농촌진흥청 시험국장)은 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의 여동생 윤계경(尹桂卿)과 결혼했다. 이재령의 동서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의대) 학감을 지낸 오긍선(吳兢善: 1878-1963)의 아들 진영(震泳)과 결혼했다. 오긍선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상임이사 등을 지내며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오긍선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된다.

 

이병묵의 장녀는 일본 오사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의사로 활동하며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등을 맡아 일제에 부역한 정구충(鄭求忠: 1895-1986)과 결혼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유도연합회 참사(參事)를 지낸 정구충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그의 사촌 형이 박정희가 만든 민주공화당 초대총재와 6-7대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대한변호사협회장(8, 10) 등을 지낸 정구영(鄭求瑛: 1899-1978.05.22.)이다.

 

이병도의 둘째형 이병훈(丙薰: 1880-1953)의 장녀(寅男)가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대법원장과 결혼했다. 일제 판사 출신 민복기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민복기의 아버지는 군부·탁지부·궁내부 대신을 지내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낸 매국수작 민병석(閔丙奭:1858-1940)이다. 민병석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민복기는 사법부의 독립과 판사의 양심마저 내팽개치고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누렸다. 그는 196810월부터 197812월까지 102개월 동안 대법원장을 지냈다. 역대 대법원장 중 재임 최장수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 일본군 육군 중장, 친일파 조성근이 이병도의 장인

이병도의 장인은 한국인 중 최초로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각종 일제 훈장을 받은 친일파 조성근(趙性根:1876-1938)이다. 대한제국 출신 일본군 장교 42명 가운데 조성근 보다 높은 연봉을 받은 사람은 정미7으로 불리며 자작 작위를 받은 이병무(李秉武:1864-1926), 일본군 육군 중장에 올랐고 남작 작위를 받은 조동윤(趙東潤: 1871-1923) 두 사람 뿐이다.

 

이병도의 누이동생(丙映)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막내숙부 윤치영(尹致暎: 1898-1996) 민주공화당 의장과 결혼했으나 곧 세상을 떴다. 윤치영이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해 낳은 큰딸은 김성수(1891-1955) 부통령의 며느리가 됐다.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이자, 윤치영의 둘째형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와 맏형인 윤치오(尹致旿; 1869-1950)도 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찬의를 각각 지내며 일제에 부역했다. 윤치소와 윤치오 모두 나란히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들어있다.

 

이병도의 장남 기녕(基寧)의 차남, 즉 이병도의 둘째손자 웅무(雄茂: 1944-)는 김웅수(金雄洙: 1923-2018) 6군단장의 딸과 결혼했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대했던 김웅수 6군단장의 처남이 강영훈(姜英勳: 1922-2016) 전 국무총리다.

 

이병도의 둘째딸(雲卿)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매국수작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헌기(閔獻基: 1928-) 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부인이다. 민헌기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고, 손윗동서가 화가 장욱진(張旭鎭:1918-1990)이다. 민헌기의 조부 민대식(閔大植: 1882-1951)은 동일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과 각종 상공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많은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철저하게 부역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병도의 차남 춘녕(春寧: 1917-2016)은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농화학과를 졸업하여 서울농대 학장 등을 지냈다. 이춘녕의 장남 장무(長茂: 1945-)는 서울공대 교수, 지식경제부 산하 산업기술평가원 이사장, 서울대 총장,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이사장을 거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됐고, 이춘녕의 차남 건무(建茂: 1947-)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과 문화재청 청장을 지냈다.

 

이병도의 넷째아들 동녕(東寧: 1927-)은 런던대학교에서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포항공대 교수를 지냈다. 장인은 주유엔 대사 등을 지낸 김용우(金用雨: 1912-1985) 전 국방장관이다. 김용우의 동생 김은우(金恩雨: 1916-1999)는 배재학당(배재대) 이사장과 세계일보 뉴욕지사 사장을 지냈는데, 장남 김인회(金仁會: 1938-)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의 장인이 동은학원 이사장을 지낸 최동(崔棟: 1896-1973)이다.

 

최동은 일제 강점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재단이사를 지냈다. 최동은 1936년 조선민족과 야마토(大和) 민족과의 이른바 동종동근(同種同根)을 제시하며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2년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최동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공이나 전문 분야와 상관없이 국공립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학재단의 이사·이사장 혹은 총장 등을 지냈다.

 

뉴스타파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인사 가운데, 해방 이후 중,고등학교 등 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의 학장·()총장, 이사·이사장, 그리고 교육부 장,차관, 교육감 등 교육관련 단체나 기관 대표 등을 지낸 사람을 찾아보니 80명 넘게 나왔다.

 

이 가운데는 정계로 진출한 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진오(兪鎭午: 1906-1987) 전 고려대 총장이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192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부역행위 유진오 고려대 빈소에서 학생들에 수난당해

유진오는 일제 강점기 연설과 작품 등을 통해 학병, 징병, 지원병을 선전, 독려했다.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19448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적국항복문인강연회에 참석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일본이 벌이고 있는 전쟁을 악마와 신의 싸움으로 묘사하며 ()는 미영(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한 길이 있을 뿐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유진오를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했다.

 

유진오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법제처장, 한일회담 대표, 고려대 대학원장, 고려대 총장에다 대한교육연합회(지금의 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6-8)을 지냈다.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에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7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되고 신민당 총재까지 지냈다.

 

이렇게 화려한 길을 걸었으나 친일 경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1987830일 유진오가 사망하고 고려대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자 교수들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빈소 철거를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1965년 고려대 총장 이임식장 유진오 (오른쪽) 출처: 국가기록원

 

유진오는 196510월 고려대 총장 임기 만료로 물러난 뒤 정계로 진출해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고, 이듬해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1970년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야당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한 뒤 국토통일원 고문(1980-1984)과 국정자문위원(1980-1987)에 위촉되는 등 독재세력에 협력했다.

 

김성수와 김용완, 한기악·박동진(외무장관김덕주(대법원장) 등과 친인척

유진오의 가계와 혼맥을 살펴보자. 보수와 진보, 좌우를 떠나 그의 혼맥에 등장하는 식구들은 무슨 용어로 설명하든, 한마디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한다.

 

우선 34녀의 자녀 중 맏사위가 한만년(韓萬年: 1925-2004) 전 일조각 사장이고, 둘째 사위는 박동진(1922-2013) 전 외무장관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보(현재의 경북고)를 나와 일본 중앙(주오)대를 졸업한 박동진은 해방 후 미군정청 상무부 무역국 서무과장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무총리 비서와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외교관으로 활동, 외무부 장관에 올랐다.

 

박동진은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한 뒤 1980년 국회를 해산하고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위원을 역임했다. 이어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1983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도 맡았고,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재선됐다. 그 해부터 이듬해까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1988년부터 3년 동안 미국 주재 대사직을 수행하고 바로 한국전력공사 이사장도 3년 지냈다.

 

유진오의 장녀 효숙(孝淑: 1930-)의 시아버지 한기악(韓基岳:1897-1941)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지금의 국회) 의원과 동아일보 창간동인·편집국장에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장녀(효숙)의 시숙이자 한기악의 장남 한만춘(韓萬春: 1921-1984)은 연세대 공과대 학장을 지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 한기악의 셋째아들 한만청(韓萬靑: 1934-)은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매제이자, 전경련 회장과 경방 회장을 지낸 김용완(金容完: 1904-1996)의 셋째 사위다.

 

한기악의 둘째아들이자 유진오의 맏사위인 한만년 일조각 전 사장은 41녀가 모두 대학교수다. 그 중 5남매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한홍구 교수는 역사학자로 반헌법행위자 열전을 만들고 있다. 한만년-유효숙 부부의 셋째아들 한준구(韓準九: 1958-)의 장인이 김덕주(金德柱: 1933-) 전 대법원장이다. 한준구 교수의 바로 아랫동서가 성백현(成百玹: 1959-) 전 서울가정법원장이다.

 

법무장관 이호 형제, 인촌 김성수 가문과 겹사돈

이호(李澔: 1914-1990)는 법률가로서 지낼 수 있는 최고위직을 거의 섭렵했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붙어 일제 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정부 수립 후 대검찰청 검사, 초대 치안국장, 유엔정전위원회 한국 대표를 지내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국방부차관, 법무장관, 한일회담 대표와 내무부 장관을 차례로 지낸 뒤 1961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서훈 받는 이호 (왼쪽 두번째 고개숙인 이) 출처: 국가기록원

 

6년 뒤에 장관 자리를 포함한 고위직 순례가 다시 시작된다. 박정희에 의해 두 번째 내무부 장관(1967.06-1968.05)에 임명됐고, 곧이어 법무부 장관(1968.05-1970.12)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일본 대사(1971.01-1974.01)직을 마치고 합동통신 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1975-1978), 두산그룹 창업주 가족이 설립한 연강학술재단 이사장, 다시 두 번째 적십자사 총재(1978-1981)와 헌법위원장(지금의 헌법재판소 기능)을 지냈다.

 

일제 검사 이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까지 계속 요직

전두환이 1980년 국회를 해산하고 대신 설치한 비상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한노인회 회장까지 차례로 지낸다. 형과 동생 둘 다 군에서 별을 단 백선엽·인엽 형제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선인학원(현 인천대) 이사장과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 자리가 그가 맡은 마지막 자리였다. 그에게는 서울시립대 총장을 지낸 장남이 있고, 외무고시를 합격하고 직업외교관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차남도 있지만, 주목해야 할 2세는 셋째아들이다.

 

서울대 화학과 교수를 지낸 3남 이은(李檼: 1946-) 씨로 한국 사회의 얽히고설킨 가벌(家閥)과 가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connector)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앞서 언급했던 김성수의 4남 김상흠(金相欽: 1919-1991)의 장녀 김명선(金明宣: 1947-) 씨다.

 

경상도 관찰부 주사를 지낸 이호의 부친 이인석(李璘錫: 1882-1956)은 경북 영천 부자였다. 아들만 넷을 두었는데 장남 이활(李活: 1899-1982)6대 국회의원과 고려대 운영재단 이사장과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지냈다. 이활의 외아들 병린(秉麟: 1915년생)이 김성수의 93녀 중 차녀(김상숙)의 남편, 즉 둘째사위다. 이래서 김성수의 넷째아들의 장녀(김명선)에게는 둘째고모(김상숙)가 남편(이은)에게는 4촌형수, 자신에게는 4촌동서가 된다.

 

전략적으로, 혹은 정략적으로 연결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네트워크의 힘이고 무서움이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냥 수사(修辭)가 아니다. 냉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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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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