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9월 28일 자 프레시안 기사에 다큐사진 작가 김녕만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1973년 서라벌예대 사진학과에서 졸업 후 중앙대 사진학과에 편입하고서 기자가 되고 싶어 했고 그 바램대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가 되어 활동하면서 여러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사진들 중에 출입처 특성상 분단 현장을 기록하는 기회가 있었고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의 기록과 일상에서의 기록이 시대를 담고 있기에 담아 보았다. 올리는 사진은 김녕만의 블로그 사진마당 '어른들의 일기장'과 이곳 저곳에서 퍼 왔다. 올해 70살 그가 찍었던 사진들 속에 내 기억도 클로즈업 된다.
분단풍경 8 경기도 파주 1993
꽃피는 봄날 남과 북 2018
노동당사 2016
독수리 2018
백령도에서 바라 본 장산반도 2018
분단풍경 6
분단 13
분단 15
분단 19
판문점 2010
분단의 현장 판분점과 DMZ, 판문점 남북경비병 1994
분단풍경 2
손 잡은 남과 북
임진각의 실향민
DMZ14 탈북한 여성이 임진각 앞 철책선에서 고향을 향해 차례를 지내고 있다
철책선의 능소화 -생명의 땅 DMZ 2016
DMZ의 기록, 철책보다 더 무서운 게 먹고 사는 일이었다
김녕만의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처음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만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늘 철책 너머 그 안쪽으로만 골몰했던 시선을 돌리자 접경지역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철책 바로 아래까지 농작물을 심고 하루종일 멈추지 않는 대북 대남방송의 웅성거림 속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을 접했을 때 아찔한 전율이 왔다. "이것이 삶이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되는 것이로구나." 지뢰 팻말이 매달린 철책 옆에서 고추모종을 하는 농민, 풍년을 꿈꾸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농민, 논을 갈아엎는 이양기 뒤를 따라가며 뒤집어진 땅 속에서 기어 나온 벌레를 잡아먹는 백로와 왜가리, 저어새...
철책보다 더 무서운 것이 먹고 사는 일이었다."
(김녕만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中)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SF 영화에 나오는 판타지로 생각할 것 같다"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말이다. 김 위원장 스스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판타지'로 느꼈다.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을 하고 배석자도, 통역도 없는 회담을 진행했을 때 많은 이들이 "초현실적 광경"이라고 평했다. 보고도 믿지 못할 풍경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초현실적 판타지. 전쟁과 분단, 단단하게 구축된 비정한 현실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인식에 던져진 파장은 컸다. 한반도에 정말 평화가 오는 것일까.
우리 땅에는 초현실적인 곳이 많다. DMZ(비무장지대)와 판문점이 대표적인 곳이다. 5000년을 오갔던 땅이지만 65년간 방치된 곳이다. 지금은 따로 없지만, 예전엔 '판문점 출입기자'가 있었다. 그렇다고 판문점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생중계되고 수많은 미디어가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시대가 아니던 때에는 제한된 미디어만 그 긴장의 집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1983년~85년, 1988년~94년 판문점 출입기자를 지낸 사진 작가 김녕만의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도서출판 윤진, 2018년 7월)은 판문점과 DMZ, NLL(북방한계선) 등 분단 현장의 기록이다. 김녕만은 1980년 광주를 기록했고, 냉전 말기 베트남을 찾아 전쟁의 상흔을 기록했으며, 한반도 분단의 현장에 천착해 왔다. 사진기자로서, 사진 작가로서 아시아 냉전의 시대와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해온 셈이다.
4.27판문점 선언 이후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은 대사건이다. 공간이 주는 진정한 힘은, 그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이 우리에게 어떠한 기억으로 남을 때다. 김녕만은 판문점을 "80년대와 90년대에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남북 스포츠 교류, 북한의 수해물자 전달 등 대화의 기조가 이어지다가도, 금세 상황이 급변하면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로 반전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던 곳으로 기억한다. 도끼날이 오가기도, 평화의 사절이 오가기도 하던 곳이 그곳이었다.
두려움과 슬픔, 희망이 뒤섞인 그 공간에서 저널리스트들은 고군분투했다.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리는 제 6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해 판문점에서 북측 지역으로 가던 남북의 장교가 전날 눈이 내려 미끄러운 내리막길에서 빙판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잡은 짧은 순간을 포착해낸 사진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긴장감을 그대로 전해야 할 의무 속에서도 '한국'의 저널리스트들은 그렇게 애태우며 작은 희망을 기록해 왔다.
김녕만의 분단 기록은 2000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83년부터 2000년 이전까지는 사진기자의 신분으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안'을 취재했고, 2000년 이후부터는 신문사를 퇴직하고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작업으로 비무장지대와 접경지역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철원에는 분단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생창리 용양보는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DMZ 철책선이 북진하는 바람에 지금은 제한적으로 민간인도 들어갈 수 있게 된 용양보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마치 태고적 풍경처럼 정갈하고 신비롭다. 왕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룬 물가로 각종 새들이 날고 부서진 출렁다리 목책에는 가마우지가 나란히 줄지어 앉아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 뒤로 멀리 높은 산봉우리에 북한군 초소가 작은 점으로 보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곳에 고요히 서면 분단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분단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지 아득해진다."
"강화도에서 더 서쪽 교동도에는 엄마 손을 잡고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엄마를 따라온 한 소년은 어른이 되어 시장골목에 이발소를 차렸고 백발이 되도록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발사로 늙어가고 있다“
김녕만의 '분단의 현장'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DMZ은 철책, 경계선 그 자체만이 아니다. 지뢰 표지판을 등지고 땅을 가는 농부의 삶이고, 정갈한 늪 속에서 헤험치는 노루의 삶이며, 남측을 노려보는 이름 모를 북한 병사의 삶이기도 하다. 사진 속에는 '선'이 없다. '선'이 있을 것이라 상상한 곳에 세워진 철책만 있다. 분단선 근처의 풍경 사진을 보다 보면 경계선이란 건 마음속에 있어서 단단한 것이지, 물리적 철책 자체로 단단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마음 속 분단을 허무는 작업들이 지금 한반도 주변에서 진행중이다. 김녕만의 사진들이 판타지같으면서 판타지같지 않은 이유다. / 프레시안 박세열기자 18.9.28
김녕만(金寧万 Kim Nyungman, 1949년~ 전북 고창)은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1978년에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그해에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되었다.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고 판문점 출입기자를 거쳐 청와대 출입기자로 일했다.[1] 2001년에 편집국장석 편집위원직을 끝으로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2001년부터 2015년 3월까지 월간사진예술 발행인겸 대표로 재직했다.[2] 김녕만은 월간사진예술 재직시 상명대 영상학부 겸임교수와 동강국제사진제 운영위원, 대구사진비에날레 조직위원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사진을 통하여 역사의 기록을 남긴 공로로 2003년 제52회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일본 히가시카와 국제사진 페스티벌에서 해외작가상을 받고 수상 기념전으로 “격동20년”전시회를 열었다
MY life story-내일은 없다. 그러나 꿈은 있다
1993 1994 1999 2013 시대의 기억
2014 2018
윤세영의 사진가탐방 김녕만 -기록하는 순간 역사가 된다
오늘은 결국 과거가 된다
지난 25년 동안 숱한 사진가들을 인터뷰 했지만 사진가 김녕만은 필자가 가장 글쓰기 거북스러운 상대이다.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요즘 유행어로 ‘패싱’을 해왔다. 아마도 지난 7월에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지 않았더라면 의도적인 ‘패싱’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우선 그가 필자의 남편이라는 고백부터 하고 이 기사를 시작한다.
2018년 봄은 영화 같은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눈을 의심케 한 역사적인 씬(scene)이었다. 그 장면의 전과 후가 어떻게 해석되고 전개될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핑 도는 감동이었다. 1983년부터 판문점을 출입하기 시작하여
35년의 분단기록이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눈 앞의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는 실향민. (2017)
오늘은 결국 과거가 된다
지난 25년 동안 숱한 사진가들을 인터뷰 했지만 사진가 김녕만은 필자가 가장 글쓰기 거북스러운 상대이다.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요즘 유행어로 ‘패싱’을 해왔다. 아마도 지난 7월에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지 않았더라면 의도적인 ‘패싱’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우선 그가 필자의 남편이라는 고백부터 하고 이 기사를 시작한다.
2018년 봄은 영화 같은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눈을 의심케 한 역사적인 씬(scene)이었다. 그 장면의 전과 후가 어떻게 해석되고 전개될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핑 도는 감동이었다. 1983년부터 판문점을 출입하기 시작하여 35년 동안 남북분단이라는 주제로 작업해온 사진가 김녕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 같다. 그 순간에 사진가로서 그는 직감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자신의 분단 작업을 세상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동안 남북관계를 떠올리면 다시 뒷걸음질 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 번 벌어진 사건은 잠시 후퇴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죠. 결국은 그 지점에서부터 나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번 봄처럼 언제 갑자기 새로운 변화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남북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것이란 예상 아래 지금까지의 내 작업을 정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진집을 출간하게 된 배경이다. 이 사진집의 출발은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김녕만 기자가 판문점 출입을 하게 되면서였다. 처음에는 기자로서 신문에 쓸 뉴스만 촬영했으나 곧 판문점이야말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 있는 이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기자의 업무에서 더 나아가 사진가의 시각으로 판문점을 바라보고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판문점은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는 특수지역이므로 사실 제가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진지하고 충실하게 기록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판문점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철조망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의 표지로 쓰인 북한경비병과 제비 한 마리의 뒷모습사진에서도 봄의 전령으로 상징되는 제비를 통하여 남북의 봄을 고대하는 그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책을 내고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아요. 조금만 더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면 더 내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죠.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어요. 부족하지만 이 사진들이 먼 훗날에는 지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종전선언이 된다면 휴전상황 아래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환경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미래에는 이 사진들로 과거를 들추어 보고 회상하게 될지 모른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를 예측하며 분단사진집을 준비했다고 말한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영화 〈공동 경비 구역 JSA) 주요장면의 모티프가 된 사진. 판문점은 긴장의 상징이다.
견고하게 선 병사의 뒷모습에서 엄위함과 냉정함이 느껴진다 (1992)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남북 경비병. 판문점 (1984)
기록 역사 사진
그에게 사진은 운명이었다. 전북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는 자신이 평생 사진가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마침 고창군에서 고창읍성인 모양성 축성연대 찾기를 공모했다. 허실삼아 도전한 이 과제는 그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어디 한 구석에라도 축성연대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전혀 필요 없었을 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증거자료용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기록, 역사, 사진의 상관관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축성연대를 찾는 데에 성공하여 그 상금으로 본격적인 사진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말이 있듯이 그의 삶에 뚜렷한 방향이 정해지자 사진으로 나아가는 길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전국에 불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그의 고향에도 밀어 닥쳤고, 그는 새마을운동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농촌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업이 된 “고향시리즈”다. 20대에 벌써 따뜻하고 토속적인 농촌사진에 몰두한 그는 서른 살에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하기까지 한국의 70년대 농촌을 정감 있는 사진으로 남겼다.
1978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새내기 사진기자로서 맞닥뜨린 서울의 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80년대 한국사회를 관통한 민주화운동은 그가 다시 한 번 기록과 역사의 가치를 실감케 만들어준 주요사건들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의 사진집 <광주, 그날>, <격동 20년>으로 남아 우리의 현대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기록의 가치는 소중합니다. 다행이 사진기자로서 그 현장에 있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 그 당시에는 보도할 수 없었지만 훗날 언젠가는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상대로 9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면서 <광주, 그날>이라는 사진집이 나올 수 있게 되었어요.”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잊혀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서면 열성을 다했다고 한다. 사진기자야말로 붓 대신 카메라로 이 땅의 오늘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판문점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집중적으로 촬영되었다. 10년 동안 판문점을 출입했고 수시로 비무장지대(DMZ)를 취재하면서 미래를 위해 반드시 남겨야 할 기록임을 확신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과 그 이듬해 평양고위급회담 취재차 평양 방문 등을 통해 그의 분단기록은 더 다양해지고 탄탄해졌다.
“2001년 봄 동아일보에서 퇴직하면서 사진기자에서 다시 사진가로 돌아왔어요. 분단작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신분이 바뀌니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고민하다가 밖에서 들여다보는 비무장지대와 접근이 가능한 지역을 찾아 분단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기자시절처럼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점이 오히려 분단기록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그의 사진집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판문점, 2부는 비무장지대, 3부는 철책 앞에서 삶을 이어가는 접경지역을 다루고 있다.
<고향시리즈> 전라북도 고창(1976)
인간에 대한 애정
20대 초반에 사진을 시작하여 46년을 사진과 함께 살아온 김녕만은 그 세월의 절반은 사진기자로, 나머지 절반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어떤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대목인데 사실 그가 사진기자였든 사진가였든 그의 일관된 관심은 ‘인간’이었다.
그의 사진은 항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했다. 사실 사람을 빼고는 그의 사진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특히 그의 사람 사진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정성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대상을 바라본 그 눈빛을 우리가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을 바라보지만 실은 그 대상을 바라본 사진가의 시선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나와 사진가, 그리고 사진 속 대상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 진정한 감정이입이 되는데 김녕만의 사진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은 그의 사진적 특성이기도 한 해학적인 시선과 맞물려 김녕만 특유의 사진세계를 형성한다. 그가 따로 해학적인 사진을 의도하고 촬영한 게 아니라 기존의 작업 가운데 해학적인 면이 두드러진 사진들만 모아서 <유머가 있는 풍경>이란 사진집(1991년)을 따로 냈을 정도로 해학은 김녕만의 사진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머러스한 사진을 찍는 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이나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의 서양식 유머와 달리 우리의 토속적인 해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해학사진은 차별화 된다.
사진가 김녕만에게 해학은 단순히 재미있고 웃기는 사진이 아니라 고단한 삶에 여백을 만들어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해학은 여유로운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최루탄가스로 뿌연 데모현장에서까지 발휘된다. 최루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콧구멍에 솜을 틀어막고 있는 전투경찰, 얼굴에 비닐봉투를 뒤집어쓰고 지나가는 시민의 사진이나 긴장감이 감도는 판문점에서 자신의 작은 카메라는 애써 뒤로 두고 남한기자의 큰 카메라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북한군인 등,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진다.김녕만의 사진이 이렇게 보도사진에서조차 휴머니즘과 해학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타고난 기질이고 개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격렬한 시위현장이거나 근엄한 대통령 앞에서거나 로봇처럼 딱딱한 북한군을 앞에 두고서나, 인간적이고 해학적인 그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보도사진의 영역에서조차 작가정신을 잃지 않았다.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을 슬쩍 비틀어 포착하는 김녕만의 방식은 더 큰 여백과 감동을 주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광주, 그날>계엄군의 도청 진입 이후 광주에서는 젊은이들에 대한 검거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고등학생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1980)
이 어린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광주(1980)
기록을 넘어 예술로
휴머니즘과 해학이 스며들어 따듯한 정서를 품고 있는 김녕만의 평생작업은 크게 구별하면 농촌사진과 보도사진, 분단사진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자리에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명에 답해온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기록과 아카이브 위주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작가의식에 방점을 찍는 미술관 양쪽에 작품이 소장된 것에서도 김녕만의 작업이 기록적인 면과 예술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예술이길 원하든 말든 극사실이 추상과 통하듯 때로는 가장 정직하고 사실적인 접근이 오히려 큰 울림과 감동을 유발하며 예술성을 획득한다. 수많은 언어 가운데에서 길어 올린 시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숱한 현상 가운데에서 시공간을 포착하는 한 장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때로는 어떤 곡진한 언어보다 더 심장을 꿰뚫을 수 있어서이다. 김녕만의 사진은 때로는 은근히 변죽을 울리고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순발력으로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서 긴 여운을 남긴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당장 보기에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숙성되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이 찍힌 순간과 정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감성이 작용하는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실의 힘, 더 나아가 진정성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게 바로 다큐멘터리사진의 결정적인 매력입니다.”
바로 그 매력에 빠져 50년 가까운 세월 고난의 행군을 해온 그는 앞으로도 그 행군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젠 새롭게 달라지는 남북분단 상황에 대한 사진작업을 준비하면서 20대 초반에 했던 고향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순수한 시골청년의 시각도 변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1970년대의 농촌과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된 오늘의 농촌이 어떻게 표현될지 흥미롭다. 출처: https://blog.naver.com/majung815/221358455753 18.9.13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1980년 광주 그날
"기자를 벌레 취급... 하지만 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07.8.11 오마이뉴스
[인터뷰] 사진집 <광주, 그날> 의 사진작가 김녕만씨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 13일 만인 지난 7일 관객 수 38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를 다루어서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많은 편에 속한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오는 관객들의 눈은 모두 촉촉이 젖어있었다. 젊은 관객들은 '영화가 슬퍼서' 보다 '저런 끔찍한 일이 불과 27년 전에 우리나라에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울었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광주시민들은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실제로는 대검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며 제작사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어린 아이였거나 태어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상황을 영화나 사진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현장 취재를 갔던 사진작가 김녕만(현 월간 사진예술 대표)씨. 김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김씨는 취재를 해도 보도되지 못할 것을 안 다른 기자들이 철수한 현장에 남아 끝까지 취재하면서 광주의 슬픔을 사진에 생생하게 담았다. 그리고 1994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보도되지 못했던 사진들을 모아 선배기자인 황종건씨와 함께 '광주, 그날'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했다.
김녕만씨는 1949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2001년 '올해의 사진기자상' 등을 수상한 사진기자이자 사진작가이다. 김씨를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 당시 광주의 참혹했던 상황과 기자로서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던 심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 어떻게 사진기자가 되셨는지?
"대학시절부터 내 꿈은 <동아일보> 사진기자였다. <동아일보>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당시 <동아일보>가 민족지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사건 같이 사진 한 장 때문에 <동아일보>가 폐간도 되었다. 나는 1977년과 1978년 동아일보 사진동우회원전에서 2회 연속 최고상을 받아 입사할 수 있었다. 시험 봐서 들어가라고 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셨는데 집안 내력이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되려는데 영향을 미쳤나?
"그런 것보다 '관심'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나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 광주 민주화 항쟁이 터졌을 당시 신문사 입사 2년차였는데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게 되었나?
"그 당시 황종건 선배가 큰 사건인 줄 모르고 내려가 있었는데 통신도 안 되고 해서 비상이 걸렸다. 그러다 사회부 기자가 어떻게 광주에서 빠져나와 신문사로 돌아왔다. 좋게 말하면 빨리 보고하려고 온 거고 나쁘게 말하면 상황이 무서우니까 도망쳐 온 것이다. 그 기자가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광주에서 경상도 사투리 쓰면 큰 코 다친다'고 해서 누구를 보낼까 하다가 전라도 사투리 할 수 있는 김녕만씨가 가야겠다 해서 내가 가게 됐다."
-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무섭지 않았나
"당시에는 가고 싶었다. 두려움이야 다 있다. 하지만 주어진 일이 있으면 힘이 생긴다. 큰 일이라면 내가 희생해서라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보도 사진기자들에게 큰 사건은 행운이기도 하다. 내가 위험한 일을 해냄으로서 사회에 기여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
내려가기 전에 서울에서 임응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신문기자가 광주에 안가고 왜 여기에서 돌아다니는가? 사진기자가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뭘 하는 있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부장이 보내줘야 갈 수 있었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에 고향인 전북 고창을 지나가게 되어 어머니를 만났다. 그때는 마음속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같이 자는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어머니는 '신문기자 그만두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형님이 택시로 송정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 그 당시 광주로 가는 길을 다 막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들어 갔나?
"당시 시내는 시민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건너편에는 시민군들이 통나무로 막았다. 휴전선처럼 대치 상태가 되어 시민들은 그 사이를 비무장지대처럼 왔다갔다 했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동아일보> 신광연 선배기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 들렀다가 카메라를 분리해서 봉투에, 렌즈는 호주머니에 넣고 몰래 시내로 들어갔다. 계엄군은 계엄군대로, 시민군은 시민군대로 기자를 배척하여 기자들이 설 곳이 없었다."
"한국 기자들은 악의 축처럼 대우 받아"
- 외신 기자들의 상황은 어땠나?
"외신 기자들은 자신들이 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왔다. 미국과 일본, 독일 기자들이 많이 왔다. 시민군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 외신 기자들을 대우해줬다.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좋은 대우를 받는데 굳이 한국 기자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한국 기자들은 악의 축처럼 대우 받았다. 학생들이 외국 신문을 벽에 붙여놓으면 학생들이 그것을 보면서 번역을 해줬다. 그리고 '한국 기자들을 타도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 기자로서 심정이 어땠나?
"당시 기자로서 가장 큰 자괴감을 느꼈다. 알려야 할 것을 못 알렸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못 말할 때 참담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보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는데 이런 나를 선배 기자들이 '무슨 영화를 찍느냐'고 야유하기도 했다."
시민을 '폭도'로 쓸 바에야 사진을 싣지 않겠다"
- 그렇다면 취재한 사진은 전혀 쓰지 못했나?
"계엄 시대라 신문에 나가려면 계엄사령부에서 보도통제를 했다. '가(可)', '불가(不可)' 표시로 검열을 했다. 불가 판정을 받은 사진이나 기사가 빈칸으로 나가면 독자들이 의아해 할까봐 광주민주화 항쟁 때의 계엄당국은 빈칸이 없이 대신 뭐라도 채워서 신문을 내보내도록 했다.
<동아일보>에 사진을 쓰려면 폭도라는 표현을 써야했다. 그럴 바에는 쓰지 말자고 생각해 사진이 나가지 않은 날도 있었다. <동아일보>에 사진이 안 나가니까 집에서는 내가 죽었나 살았나 걱정했다고 한다."
- 진실을 알리지 않는 보도를 한 언론에 분노해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질렀다고 들었다. 진실을 위해서 사직서를 내거나 보도를 고집한 기자들은 없었나.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것에 반발해 사직서를 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기자 한 명이 그만둔다고 사안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꼭 살아남아서 이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김훈씨는 80년대에 자신이 전두환 전 대통령 기사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다고 여겨 90년이 다가오기 전인 89년 12월에 사표를 냈다. 하지만 김훈씨는 다른 기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 기사를 쓰기 싫어해 자신이 도맡아 해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왜 기사 다 써놓고 사직서 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 도청이 진압되었을 당시 한국 사진 기자 중 유일하게 도청 안에서 취재를 할 수 있었다는데?
"다른 기자들은 도청에 못 들어간다고 판단해서 먼저 갔다. 하지만 나는 당시 기자 초년생이었으므로 '혹시나 들어갈 수 있나'하고 도청 앞에 앉아 기다렸다. 문을 지키는 군인들은 권한이 없으므로 포기하고 대령이 지나가자 한번 찍자 했다. 대령은 나름대로 진압이 끝나서 안심하고 있었으므로 들여보내 주었다.
들어가서 계속 찍었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군인들이 도청 앞에 넙죽 엎드려 있는 시민군들에게 폼으로 총부리를 들이대기도 했다. 내가 '끔찍하니 총 치우라'고 말하고 사진 찍었다. 그러다 나중에 대위가 '이거 뭐야? 어떻게 들어와서 사진을 찍는 거야'하고 고함을 질러서 끌려나왔다. 대령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 군인들은 상황을 정말 잘못 알고 있었나?
"기자들도 잘 모르는데 군인들은 오죽했겠나. 진압 군인들을 많이 만났었다. 명령을 따르는 게 군인이라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가 저장된 정보만 알고 있는 것처럼 명령만 따르는 이들은 외부 상황을 잘 몰랐다. 시민을 폭도로밖에 볼 수 없었던 상황은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지역의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역사의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진압 군인들도 이해해줘야 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힘들었다. 역사라는 것이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 혼란 속에서 약탈이 없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시민들이 결합했기 때문에 약탈은 없었다. 월드컵 때처럼 사람이 뭉쳐지면 무섭다."
- 유족들의 사진을 찍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당연히 찍히는 걸 싫어했다. 기자들을 벌레 보듯 했다. 이후에 찾아가는 것도 싫어했다. 하지만 기자는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 나한테 나쁘게 대했다고 나쁘게 보도해서는 안 된다. 기자는 객관적인 잣대로 사실을 봐야한다."
-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에도 몇 년 간 5월 18일이면 광주에 취재를 다녀왔는데 다시 가본 광주는 어땠나?
"역사라는 게 평가내리기가 참 어렵다. 그동안 너무 지엽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광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다. 이 때문에 일부러 광주 사진집을 늦게 만들었다. 1994년에 13년만에 책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까지는 힘든 상황이라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만들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김영삼 대통령과 수석들에게 책을 주었다. 수석들이 책을 받아들고 '세상 좋아졌다. 청와대에서 이런 책 들고 다니다니'라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 책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말만 하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의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보면 슬픔이 여성들에게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 사진집 출판 당시 '전사모(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의 반대는 없었는지?
"그때는 없었다. 없는 사진을 꾸며낸 것이 아니고 본 한도 내에서 정리한 것이니까. 하지만 군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 일부러 잘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군인들도 국민이다. 그 당시에는 장발이 유행이었지만 지금 시각에서는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의 시각으로 역사를 평가하기 힘들다.
나는 사진기자로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집을 만들었다. 불에 덴 사람이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면 다시 화상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역사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역사는 또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같은 민족끼리 슬픈 일이다."
- 마지막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광주를 지역의 아픔으로만 치우쳐 보지 말고 국가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역사를 한 쪽에 처박아 두지 말고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통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스신 하나 없는 영화 중 성공한 건 이 영화가 처음일 것이다(웃음)."
1980 서울 남대문
1985년 서울 수유리
1987년 서울 세종로
1990년 서울 세종대
1991 서울 종로 2가
1991 서울 명지대 입구
1992 서울대 입구
1992 서울대 입구
1991년 서울 신촌
1975 서울 상암동
서울역 1977
서울 중림동 1979
서울송파 1981
서울송파 1982
서울 중림동 1982
서울 계동 1992
서울역 1993
중림동 1986
중림동 1986
1981 1991 1996
전라북도 부안 1973
1974 서울 상암동
1978 전북 임실
전북 정읍 1977
서울 행당동 1982
경남 함양 1991
1971 고창
1972 고창읍 버스 정류소
1971 새마을운동 전북고창
1972
1973 고창
1973 고창
1973 고창군 아산면
1974 고창
1974 고창
1974 고창군 신림면
고창군 흥덕면 1974
1975 고창
1976 고창
1977 고창읍 서흥동
1977 고창
1978 고창읍 우시장
1976 고창
Carmelo Zapplla-Questo Grande A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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