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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내 비명이자 통곡이다” 광주가 매년 5월 몸살을 앓듯이 제주는 4월이 오면 몸살을 앓는다. 4월이 오면 몸살을 앓는 사람이 있다. 이산하 시인(58)이다. 그는 제주 4·3사건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쓴 당사자다. 그것도 권위주의 시절인 1987년 제주 4·3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할 때였다. 거기에 반미감정을 가득 담은 서사시 <한라산>은 한마디로 “나를 죽여라”고 항거한 시다.
“제주 4·3은 큰 변화가 없다. 국가가 기념식을 한다는 것이 달라진 것이지만…. 제주 4·3에서 가장 큰 약자는 죽은 자들인데. 그들은 아무 변화가 없다. 다음은 죽은 자의 가족인데 거기도 변화 없다. 제주의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제주 사람들은 70년 동안 이념을 가진 후보보다 무소속 후보에게만 표를 줬다. 최근 좀 달라지긴 했지만….” 가장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부터 1954년 9월까지 경찰과 우익단체가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다. 제주 4·3평화공원에 1만4231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다. 정부는 ‘남로당 소탕’이라고 했지만 당시 남로당원은 350여명에 불과했다. 제주 4·3사건은 사회적 공론은커녕 1978년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에서 잠깐 언급됐을 뿐 거의 금기시된 주제였다.
그래도 이번 4·3사건 70주년을 맞는 그는 조금 남다르다. 절판됐던 그의 시집 <한라산>을 시인학교 제자·후배들이 다시 발간하고, 재심 변호사 비용까지 모금하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김태진 18.1.24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로 시작하는 <한라산>은 1987년 무크지 <녹두서평>에 처음 게재됐다. 이후 2003년 시학사에서 다시 출간했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이번에 나오는 시집은 그때 누락된 부분을 보완한 ‘진본’이라고 했다.
“2003년 한 번 나왔었는데 그때 보완하지 못해 이번에 전면적으로 다듬었다. 1987년 넘긴 <한라산> 원고를 인쇄소에서 거부했다. ‘센 책’을 많이 만든 녹두출판사조차 이 책만큼은 도저히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을 완화했다. ‘일단 4·3사건을 널리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그때 완화했던 부분을 원래대로 바로잡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한라산>은 과거 것보다 훨씬 ‘빨간색’이겠다.
“그렇다.(하~하) ‘한반도는 미국 성조기의 51번째 별…’ 등 미국 관계 내용을 다시 복원했다.”금기시됐던 제주 4·3사건은 그나마 1999년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제주 4·3평화공원이 만들어졌다. 진상규명과 치유·화해의 자리가 마련됐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폭력을 사과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들어 다시 ‘제주 4·3은 남로당 소행’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황교안 총리 얼굴이 TV에 등장할 때마다 과거 당했던 고문과 용공조작이 떠올라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고 말했다. 그가 <한라산>을 쓴 계기는 이렇다.
<한라산> 복원판 표지 / 노마드북 제공
“학생운동으로 수배 중이던 1986년 우연히 만난 출판사 직원이 ‘혹시 제주 4·3사건을 아느냐’고 속삭이듯 물었다. 잘 모른다고 했더니, 우리 출판사에 원고가 있는데 사장이 겁을 먹고 책을 못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원고가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4·3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였다. 나중에 출판사에서 이 원고 그대로 책을 내지 말고 시적으로 각색하는 것이 부담도 줄이고 파급력이 크다며 나에게 그 작업을 맡겼다.”
그는 이 작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거부하면 역사의 방관자가 되고, 쓰자니 폭탄을 안고 터져야 할 운명이 원망스러웠다”면서 “알고 못하면 비겁한 것이니 비겁해지지 말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료를 더 수집해 86년 가을부터 시작해 87년 1월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원고를 넘길 때 출판사 편집장(신형식)으로부터 “종철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은 그의 고등학교(부산 혜광고) 후배로 서로 잘 알던 사이였다.
박종철의 죽음을 씹으며 <한라산>은 3월 무크지 <녹두서평>에 실려 세상에 공개됐다. 본명 이상백인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산하’라는 필명을 썼고, 이는 출판사 몇 사람만 아는 극비였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그가 누구인지 금방 확인했고, 11월 광화문 한 카페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 한라산>은 워낙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강렬한 시’로 아무도 그의 변론을 맡지 않으려 했다. 신경림·고은·백낙청 등 유명 평론가·작가조차 재판정에서 증언을 서주지 않았다. 그는 “이 재판이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고, 숨겨진 4·3사건이 공론화됐어야 했는데, 평론가·작가 아무도 안 나왔다”면서 “진보의 기회주의자들에게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단어가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정작 결정적 순간에 입을 닫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죽일 때 국제펜클럽이나 국제신문인협회(IPU)에서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구명운동에 나설 때 정작 국내 펜클럽이나 언론단체는 침묵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무차별 종북몰이를 벌일 때도 진보를 자처했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했다.(보통 그들을 ‘입 진보’라 부른다)
“진보의 기회주의자에 대한 실망으로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이 4월혁명 직후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의 시를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다. 그때 김수영이 그 시를 발표했으면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는 훨씬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감방에서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반공 이데올로기와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던지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1·2절을 그대로 적어 냈다.”
-그 항소이유서를 보고 황교안 검사가 ‘영원히 콩밥 먹게 해주겠다’고 했던 것인가.
“변호사가 달려왔다. 당신 미쳤나. 내 항소이유서로 검찰뿐만 아니라 법원까지 발칵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말에는 같이 한 운동권에 대한 회의가 함축돼 있다.
“재판 중 자유실천문인협회가 ‘이산하 시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때 논의의 주제는 이산하를 시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회원도 아닌데 우리가 왜 입장을 발표해야 하나 등의 논쟁이었다고 한다. 문학의 본질적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회원이냐 아니냐를 논의했다.”(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1심에서 4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은 그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고, 국제펜클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돼 있었다. 당시 수잔 손택 국제펜클럽 회장이 직접 한국에 와 시인 김남주와 함께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겠다는 협박도 넣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항소심에서 1년 6개월을 받은 그를 특사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출소한 그는 다시 재야단체인 전민련 편집실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이 이부영·김근태·이태복·이인영·민병두·정봉주 등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4·3연구소와 함께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채록하면서 2년을 보냈다. 다시 서울로 온 그는 출판사와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에서 인권 대중지 <사람이 사람에게>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그때 편집위원이 유시민·한홍구 등이다. 1992년 현기영 소설가의 주례로 재야단체 민청련 선전국 후배와 결혼했다.
그는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영일이지만 바다가 안 보이는 깡촌으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부친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하지만 부친은 손재주가 좋아 마을에서 뭐든지 고치는 목수로, 또 인텔리로 통했다. 그는 “아버지는 북한에서 김책공대에 다니다 6·25때 인민군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포로수용소에서 남한에 남았다는 것을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알았다”고 말했다. 그랬다. 그의 원형질에는 부친에서부터 이어진 분단의 아픔이 ‘잔인하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늘 연장을 갈았다. 나는 옆에서 물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마지막 칼 끝을 햇볕에 비치며 ‘어떤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파랗다’고 대답했다. 칼을 잘 갈았을 때 칼날 끝이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나는 시를 쓰면서 시어에 그 푸른 기운이 비치는가를 스스로 자문하곤 한다. 그런데 한 번도 아버지가 간 칼끝의 푸른 색을 시어에서 그려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마이뉴스 김태진 17. 12.19
학생시절 전국 고교 문학상을 휩쓸어
그는 ‘허~허~’ 하고 웃었지만 약간 허(虛)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그의 원형질은 고교시절 발현되기 시작했다. 기자의 ‘어떻게 운동권 학생이 됐나’라는 질문에 그는 “고등학교 때 자주 가던 서점 점원이 ‘내가 추천하는 책 1권을 보면 네가 보고 싶은 문학책 2권을 빌려 주겠다’는 제안으로 사회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면서 “문학책을 마음껏 보고 싶어 제안에 응했는데 나중에 열심히 사회과학책을 읽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시절 이미 ‘주한미군 철수’를 주제로 시를 쓰기도 했다.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생각지 않았지만 전국 고교 문학상을 휩쓸었다. 이 문학상 수상 성적으로 1979년 대학(경희대) 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82년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로 등단했지만 문학보다 운동에 더 매진했다. 결국 그는 수배와 구속을 이어가다 1996년에야 겨우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현재 <문학뉴스> 편집위원, <유레카> 편집위원장과 진보 인터넷 매체인 <민플러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불심검문시대>와 소설집 <양철북>, 산사 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 <피었으므로 진다>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시를 번역한 <체 게바라 시집>을 내기도 했다.
제주 4·3사건은 이후 많은 재조사·연구를 통해 미국이나 좌·우 한쪽의 잘못을 특정하지 않고 단지 엄청난 국가 폭력이 자행됐다는 점만 확인했다. 진실규명보다 화해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서사시 <한라산> 마지막은 “천 년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단코/ 잊지도 말자”로 끝 맺는다.
지금도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적폐 두 가지 중 하나는 친일적폐요, 다른 하나는 미국적폐”라면서 “4·3사건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싹이 틀 때마다 싹을 자른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 대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나온 시집 후기에 “<한라산>은 내 비명이자, 통곡이다”라고 썼다. 그는 아직 4·3사건을 자행한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04.03ㅣ주간경향 1270호
한라산 이산하 장편 서사시/ 저자 이산하|시학사 |2003.06
이산하-1960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 경남중과 혜광고를 졸업하고, 1979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6년만인 1995년에 졸업했다. 1982년 '이 륭'이라는 필명으로 문학동인지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대학시절 학생운동과 지하신문을 제작 배포한 혐의로 수배된 이후, 5년에 가까운 긴 도피생활 동안 민청련 선전국 등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수배 중이던 1987년 3월에 발표한 제주도 4.3 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은 김지하의 「오적」이후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그해 가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석방후 10년 이상 절필 끝에 1999년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문단에 복귀했다. 2002년 봄 전국의 유명사찰을 돌아보고 쓴 산사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로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받았고, 가을에는 세계 최초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시집 『먼 저편』을 엮어 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인권 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목차
서시 ... 8
제1장 정복자
1. 움직이는 세계 ... 25
2. 진주해 온 미군 ... 28
3. 침몰해 가는 남한 ... 32
4. 두 개의 길 ... 35
5. 대참화극 ... 38
제2장 폭풍 전야
1. 꽃샘추위 ... 45
2, 한 소년의 죽음 ... 47
3. 총파업 ... 51
4. '제2의 모스크바' 그 마지막 밤 ... 54
5. 진군을 기다리는 아들을 위하여 ... 57
제3장 포문을 열다
1. 어둠을 찢은 한 발의 총성 ... 63
2. 불이여, 불길이여 ... 68
3.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인민공화국 ... 73
4. 빨갱이 사냥 ... 77
제4장 불타는 섬
1. 로울러 작전 ... 83
2. 장밋빛 피의 거리 ... 86
3. 죽음의 정글에서 ... 90
4. 항쟁의 불꽃 ... 93
5. 그리움 ... 97
6. 비밀회담 ... 99
7. 산으로, 산으로 ... 112
8. 토벌대장 암살 ... 115
9. 바비큐 작전 ... 118
10. 날개 달린 게릴라 ... 121
11. 수색에서 지다 ... 125
저자 후기 ... 131
제주 4. 3과 이산하의 <한라산>
시인 이산하는 1987년 장시 <한라산>을 통해 당시까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던 ‘제주4·3 사건’을 다뤄 이 사건의 비극을 최초로 공론화했다. <한라산>은 16년 전인 1987년 3월 사회과학 무크지인 「녹두서평」 창간호에 발표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온 국민들의 분노와 눈물이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였다.
「녹두서평」의 맨 앞에 실린 <한라산>은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출판사는 ‘초상집’으로 변했고 시인에게는 물론 「녹두서평」의 다른 필자들도 대부분 수배되었다. 결국 저자는 도피생활 끝에 1987년 11월 11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발표 이후 한라산은 역사의 진실에 목마른 양심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시가 되었지만 공안정국을 위기 때마다 조성해온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 오랫동안 한 권의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한라산>의 발표 이후 4.3에 대한 민주세력과 국민들, 당사자인 제주도민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져갔고 최근에 국회 주도로 4.3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했다. 진상조사보고서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4.3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산하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보다 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벽이었다. 제주도는 40여년이나 입에 재갈을 물린 거대한 벽이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표정이 없었다. 그들에게 4·3은 마치 기억조차 하면 안 되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최근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했지만 진상규명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탄압과 학살의 선봉에 선 서북청년단원들마저 그 누구 하나 양심선언을 하거나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군경이 갖고 있던 자료들은 거의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복원판’ <한라산>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노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한라산은 1987년에 녹두서평 창간호의 지면을 빌어 세상에 나온 후 16년 동안이나 한권의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미완성’이다. 16년 동안이나 출간도 ‘완성’도 미뤄졌던 것은 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다. 복원판 <한라산>에는 한라산의 집필배경과 비화, 87년 대선을 앞두고 한건을 노리던 공안당국의 음모, 재판과정, ‘복원판’ <한라산>에 대해 밝힌 후기가 덧붙었다.
시인은 이 후기에서 미완성의 이유를 1990년 석방 이후에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주에 다녀온 이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다. 또 그것이 다시 생기리라고 섣불리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한라산>의 완결이라는 숙제는 좀더 미뤄지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다.
한라산의 출간본이 ‘복원판’인 까닭은 나중에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은 작품이었다고 판명되기는 했지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인쇄물이면 인쇄소에서 작업을 거부하던 공안정국의 서슬과 완화된 내용이라도 세상에 보여야 한다는 절박함의 타협이라고 시인은 밝히고 있다. 결국 한라산조차도 ‘자기검열’의 고개를 넘지 못했으며 시인은 “타협해서는 안 될 문제를 타협해서라도 풀겠다는 마음의 틈새를 스스로에게 들켜”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태진 사진
<한라산>의 배경
장시 한라산은 ‘그날의 폭도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된다. 서시에는 4.3의 비극을 예고하는 한반도의 정국을 담은 비장한 전주곡이 울린다. 4장으로 구성된 한라산은 1장 ‘정복자’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으로 이어진다.
1948년 4월3일 새벽 1시 제주 전역에서 무장 게릴라들이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4·3의 봉화를 올린 ‘폭도’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반대를 거사의 취지로 내세웠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풀려난 우리 겨레가 독립국가의 꼴을 갖추기 전에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외세와 그에 빌붙은 분열주의자들은 반분된 땅덩어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몫을 차지하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단독선거 반대’라는 4·3의 취지는 당시의 정세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족적 정당성을 담고 있었다.
4·3은 또한 해방과 더불어 삼팔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에 대한 이 땅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의 표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운형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이 독립국가 수립의 채비를 착착 다져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친일파와 민족분열주의자들을 두둔하고 나선 미군정의 처사는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의 그들의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이다. 게다가 대흉년과 콜레라의 창궐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제주에서는 그나마 미곡정책 실패와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포화지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3월1일 제주 읍내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이 사망한다. 이 사건은 미군정 및 경찰과 민중들 사이의 관계를 화해 불능 상태로 몰고갔으며 결국 4·3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산하, 4.3항쟁의 시 <한라산> 필화 1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이산하(李山河)는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사회과학전문 부정기간행물 <녹두서평> 1집에 제주4․3사건을 다른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이 시는 1,300행의 미완의 서사시로 미국과 역대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돼 온 제주4.3사건을 격정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87년 4월 발행인 김영호가, 이어서 편집장 신형식이 검거, 구속된다. 이산하도 즉시 수배됐으나 도피, 1987년 11월 11일 구속된다. 검찰은 제주4․3사건을 다룬 ‘한라산’은,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사회로 규정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폭동을 진압한 정부의 조치를 ‘무차별한 주민학살극’으로 묘사․비방하는 한편,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발)를 찬양하는 등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이산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1988년 2월 27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김영호는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5년, 신형식은 징역 1년 6월과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87고단3707; 항소심판결 87노66943). 고은 시인은 재판부에 낸 의견서를 통해 “민족의 자주통일에 대한 하나의 자기요청적 산물인 ‘한라산’이 획일적인 냉전사관에 의해 재단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변론했으나 이산하는 1심과 2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87고합1481).
‘녹두서평사건’은 안영도·홍성우 두 변호사가 맡아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산하는 김영호와 신형식보다 늦게 구속됐으므로 ‘한라산’은 이 사건의 일부로 포함되어 심리됐다.
1심은 위 두 변호사가 맡아 진행했지만 문제는 2심이었다. 수감 중 자신의 사건을 담당할 변호사를 구하지 못한 이산하는 선임을 포기하고 직접 항소이유서를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한다. 그 서면은 자필로 작성된 편지지 4쪽 분량의 짤막한 내용이다. 이산하는 그 이유서 마지막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써서 제출한다.
<항소이유서>
“척박한 이 땅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여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따뜻하고도 새로운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강철같이 믿고 있습니다.
본인의 ‘한라산‘도 다만 그런 믿음과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런 역사의 부름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하여 쓰여졌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 역사가 다시 나를 부른다면, 그래서 내가 다시 대답해야 한다면 본인은 기꺼이 다시 큰소리로 대답할 것입니다. 한 번 잠든 자 다시 깨어나지 않을 피투성이 이 땅 이 산하에 꽃잎처럼 뿌려진 수많은 이름 없는 전사들의 피를 결코 헛되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필코 그 피의 댓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
력력희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 하라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 하라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 피고인 이상백(이산하의 본명)
1988년 5월 28일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공식 출범하기 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도 활동하던 ‘인권변호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산하가 ‘한라산필화사건’을 맡을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산하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구속된 시점이 1987년 11월 11일로, ‘대선 한 달 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변호사 없이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특히 기대하고 있던 문인들의 법정증언까지 거절당하고, 차가운 겨울 감방에서 거듭된 단식투쟁으로 그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산하는 변호사 없이 자신이 직접 항소이유서를 썼다.
1989년 10월 3일 이산하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된다. 이듬해 1990년 이산하는 ‘한라산’을 완성하기 위해 2년 간 제주도에 머문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악할 수 있나”라며 충격을 받고 절필을 선언한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조사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다보니 너무나 참혹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는다. 이산하의 절친 하응백은, "산하야, 이제 역사와 세상이 네게 행한 악행을 잊어버리고, 이쪽 세상으로 오는 다리를 건너거라"라며 그에게 다시 습작할 것을 권유한다. 1999년 늦여름 그는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편 2003년 6월, 시학사는 판금된 상태에 있던 ‘한라산’을 단행본 시집 <한라산>으로 출간한다. 이 시집은 <녹두서평>에 실릴 당시 불가피하게 ‘자기검열’로 삭제한 부분들을 모두 되살려 낸 ‘복원판’이다. 이 ‘복원판’ <한라산> 저자후기에서 이산하는 ‘복원’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출판사측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한 발 물러서더라도 4․3의 진실은 알려야 한다고 판단해 작품을 완화시키기로 했다.”
이산하가 고백한대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렸다는 <한라산>도 실은 ‘자기검열’을 거친 작품”이었다. ‘자기검열’로 삭제된 내용을 복원한 탓(혹은 덕분)에 전체적인 흐름에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녹두서평>에 실린 ‘한라산’과 ‘복원판’ <한라산>은 내용의 많은 부분이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한라산>은 ‘복원’돼 독자들이 구해 읽을 수 있지만 여전히 ‘법적으로는’ 판금 상태이다. 2003년 시학사에서 발간된 <한라산>은 ‘복원판’일 뿐 ‘시인 이산하’와 <한라산>의 권리는 아직도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현장언론 민플러스 2016.12.02.
작품 줄거리
‘한라산’은 이렇게 시작한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민족해방을 위해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글을 바친다.”
이 글에 뒤이어 ‘서시’, ‘제1장 정복자’, ‘제2장 폭풍 전야’, ‘제3장 포문을 열다’, ‘제4장 불타는 섬’으로 구성된 1,300행의 미완의 장편 서사시이다. 2003년 이산하는 <녹두서평>에 실린 원작을 수정하여 ‘시학사’에서 ‘한라산’을 재발간한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필화의 대상이 된 ‘원작’ 중에서 ‘서시’의 중요 부분과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판결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이유로 적시한 내용을 중심으로 인용한다. (‘서시’의 인용 부분 중 색칠한 부분은 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이유로 적시한 내용이다.)
▲ 그림 강요배
서 시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동아시아의 해군기지로서 조선이 결정된 지/80년의 모진 세월이 흐른 1945년 불볕 여름,/한 손에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마침내/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였을 뿐,/‘창살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그리하여/제국주의침략사 120여년,/다시 쓰여져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바람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누가 잊을 것인가/누가 잊으라고 하는가/l948년 4월 3일/‘제2의 모스크바’/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혹한의 한라산/그 눈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 간/이름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누가 잊는가/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며/뼈를 깎는 모진 고문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그들은 기어이 갔다/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의 어깨에 매달려/진지로 돌아 가다/진지로 돌아 가다/끝내 쓰러져 버린, 그들은 갔다/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분노 없이는 갈 수 없는 땅/통곡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尾帝의 각을 뜨다/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끝내 다 뜨지 못한 채/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한 줌 피묻은 뼈가루로 날아 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3
30여 년만에 걸어 보는 이 학살의 숲은/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산등성이마다 뼈가루로 쌓여 있는 흰 눈이며/나무가지마다 암호를 주고 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멀리 사람 실은 배 한척, 돌 실은 배 한척, 떠나는 바다며/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마지막 남은 잎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이 학살의 숲은/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그러나/우리는 보고 쏘았지만/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간 것은/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해안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조국통일 만세!/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위로 지고 있었다/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그 빈 숲에/그들은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살아 흘러가고 죽어 흘러가고/마침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흘러 갔다/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 숲/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누가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 영화 '지슬' 의 한 장면
4
돌려 주자/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아! 피의 섬 제주도/그 4.3이여,/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여나는 이 진달래꽃을/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돌려주자/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그들에게 돌려주자/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 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얼어붙은 배추포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 간/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그리고/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저 피묻은 손을/찢어,/갈갈이, 찢어서,/'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 주자/.../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싹둑 잘려 나간 손가락이 아직도 팔팔 살아뛰는 붉은 피가 있어/농약 먹은 가슴으로 타오르는 싯붉은 피가 있어/탄환의 불꽃으로/탄환의 불꽃으로/저 헐벗고 굶주린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숲을 이룰 때까지/마침내 해방의 숲을 이룰 때까지/적들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 주자!!/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동지의 시체를 되돌려 받자,받자!!!
제1장 정복자
1. 움직이는 세계
미군은 처음부터/‘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그들은 반드시 한국인 동포를 이용해 싸웠다/현지에 허수아비 파쇼정부를 세우고/그것에 경제․군사 원조를 하면서/반공을 명분으로 서로 피터지게 물어뜯도록 하는 것/그것이 바로 그들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전후 소련의 국제적 지위/중구 및 동남아 국가에서의 인민민주주의 성립/북한의 사회주의 발전/또한, 47년 9월/폴란드 바르샤바 코민포름 결성대회에서의/소련 대표 지다노프가 행한/‘반미반제 무력투쟁’ 선언과/아시아 전역에서의 민족해방전쟁 등에/자극되고 영향받아, 그러나/결정적으로는,/중국인민해방군의 승리에 영향받아//
반도의 싸리울타리/토담 빛 천막처럼 기울어진 하늘 아래/인민의/민족해방투쟁은 불붙어 올랐다//
2. 진주해 온 미군
미국은 왔다./.../정복자로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산주의 전통과 노련한 지도자들을 가진 나라, 그 나라의 인민들이 체온처럼 배인 주눅을 벗어내고 이 뜨거운 해방의 날을 위해, 그리고 어쩌면 시작된 해방의 매듭을 짓기 위해 한창 훌쩍이며 용을 틀고 있을 때, 저 피빛 여명을 헤쳐 지친 영혼에 감격을 안겨줄 새로운 시대가 열어주는 문턱, 바로 그 문지방을 넘으려고 할 때, 그 때 그만 와버린 것이다. ...//
5. 대참화극 중에서
이 봉기는/자연발생적 저항에서 게릴라투쟁으로 이어져/허수아비 정권을 송두치채 뒤집으며/8년여 세월 동안/불멸의 저항을 이어갔다/그것은 마치 칼날을 쥔 자가/칼자루를 쥔 자를 향해 쑤시는 격이었다//...
제2장 폭풍전야
4. ‘제2의 모스크바’ 그 마지막 밤
“우리는 ‘제2의 모스크바’ 제주도를 공격하러 온 멸공대다”//
파업이 끝나고, 전남 전북의 무장경찰이 들어왔다. 파업이 끝나고, 시청이 들어왔다 파업이 끝나고, 중앙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들어왔다 파업이 끝나고, 테러의 폭풍은 순식간에 온 섬을 짓밟아버렸다 테러집단은 경찰 및 우익과 협잡하여 ‘주민사냥’을 시작하였다//...
제3장 포문을 열다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도민의 85%가 좌익이어서 사실상 인공의 작은 블록인 듯하였다. 도지사 박경원은 인민투쟁위원장이고, 제주읍장은 부위원장이며 면장들도 각지부 투쟁위원장이었다.
가혹한 투쟁의 불길 속에서 단련된 전사들은 인민의 피와 땀의 결정을 보전하기 위하여 대중적인 정치투쟁에서 점차 자위적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어 갔다.
1. 어둠을 찢은 한 발의 총성
항일 빨치산의 혁명정신을 계승하자!
1. 친애하는 경찰관 여러분!
탄압하면 항쟁할 뿐이다. 제주도 빨치산은 인민을 수호하고 인민과 함께 있다. 항쟁을 원하지 않으면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 여러분!
하루 빨리 선(조직선)을 찾아 구하고, 소정의 임무를 완수하며, 직장을 지키고, 악질동료들과 최후까지 용감하게 투쟁하라!
▲ 그림 강요배
3.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토벌대는 더욱 사나와졌다. ‘섬놈’이라는 멸시와 편견이 찢어진 입을 통해 거침없이 발설됐다 게릴라전술에 따라 항상 먼저 공격을 준비하던 인민군 유격대는 제주도 인민유격대장의 이름으로 5․10단선반대의 성명을 내외에 발표했다....//
비로소 4월 17일, 인민유격대와 경찰토벌대가 처음으로 만나 항쟁의 첫 교전을 치뤘다//
4. 빨갱이사냥
남로당지령문서나 삐라가 발견되면/그 즉시/남로당원, 도피자가족, 게릴라가족/통비분자의 명목으로 노인까지 사살되는/이른바 ‘빨갱이 소탕작전’/인적이 끊긴 마을을 향하여/흘리며 토하며 사방에서 울고 오는/저어 저, 곡소리, 곡소리, 통곡소리/...
제4장 불타는 섬
1. 로울러작전
온 섬은 군경토벌대로 메워져/온통 굶주린 암흑과 죽음의 섬으로 모습이 바뀌고/섬사람들은 벌레처럼 짓밟히고/들풀 베이듯 난도질당했다//
가축보다도 더 간단히/비바람에 우는 들풀보다도 더 간단히/마치 큰 산이 송두리째 벌목되듯/살해된 사람들이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고/그 피는 온 섬을 홍건히 적셨다//
11. 수색에서 지다
한라산 깊은 골 우리의 진지/깍아세운 바위절벽은 우리의 요새/우리의 자유를 지킨다/아아! 제주도 빨치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육신이 찢어진 운명이라 해도/인민의 자유를 지킨다/아아! 제주도 한라산//...
3. 법적 쟁점과 판단
검찰은 ‘도서출판 녹두’ 명의로 부정기 간행물 <녹두서평>을 발행한 행위가 국외 공산계열과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찬양․동조하는 이적표현물을 제작․반포한 행위로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1987년 4월 발행인 김영호와 편집장 신형식을 구속했다.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는 도피했다가 그 해 11월 11일 구속된다. 따라서 재판은 먼저 <녹두서평>를 중심으로 진행됐고, 그 후 이산하가 구속되면서 ‘한라산’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도 심리됐다. 이산하에 대한 혐의사실은 다음과 같다.
① 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마르크스, 레인주의에 기초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른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과 계급투쟁론을 주장하면서, 소수자본가 계급에 의한 생산수단의 독점과 노동착취로 인하여 발생하는 노동자계급과 자본자계급 사이의 적대적 모순은 특히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첨예한 계급적 대립으로 나타나며, 우리나라의 현상에 대하여 미제국주의의 강점 하에서 그들이 내세운 군사파쇼정권을 통하여 철저히 종속된 신식민지로서 모든 인민이 수탈당하고 있고,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어 있다고 모략하는 한편,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인민해방을 위하여는 남조선에서 미제국의 침략자들과 파쇼정권을 폭력으로 타도함으로써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전략 아래 이를 위하여 그들의 이른바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폭력, 비폭력, 합법, 비합법 등 각종 투쟁 형태를 적절히 배합하여 남조선 사회에 첨예화된 모순의 중심고리를 공격함으로써 미일제국주의와 군사파쇼, 매판자본가의 무리들을 타도하여야 한다고 선전, 선동하며 대남적화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② 장편 연작시 ‘한라산’ 제하로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사회로 파악하고, 제주4․3폭동을 “민족해방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인민들의 항쟁”으로 미화하고, 이를 진압한 정부의 조치를 “무차별한 주민학살극”으로 묘사․비방하는 한편, 인공기를 찬양하는 등의 내용이 게재된 200자 원고지 200매 분량을 작성하여 녹두출판사에서 출판하여 서점에 배포함으로써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 반포하였다.
위의 사유로 서울형사지법 제14부는 이산하에게 징역 1년 6월과 자격정지 1년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안영도·홍성우 변호사가 작성한 녹두서평필화사건 변론서에는 ‘한라산’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변호인들은 시 ‘한라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첫째, “시 ‘한라산’의 기본적 구도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아래서 야기된 제주도 4․3폭동을 외세의 분단논리에 대한 제주도민의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시의 형태로 형상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의 내용을 이루는 역사적 기술들의 대부분, 특히 인공의 정치적 영향아래 대다수의 제주도민이 직접․간접으로 관련됨으로써 사건의 주체가 되었던 점, 미군정 당국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석을 구분하여 많은 양민을 희생시켰다는 점, 당시의 인공의 내부에 남로당계열이 침투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도민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양민으로서 사건자체가 민족사적 비극이었던 점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며 이는 증인 김학준의 이 법정에서의 증언에 의하여도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둘째, 다만 피고인들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 요지는 시의 표현의 일부가 북한공산집단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선동용어와 유사한 점이나 몇몇 군데 직설적이고 생경한 표현들을 문제 삼고 있는 듯하나, 위 ‘시’의 역사적 배경이 북한공산집단이 생기기 이전의 미군정 당시의 사건인 점, 사건에 관련된 정치세력인 ‘인공’은 1945. 9. 6. 결성되었다가 그 후 곧 미군정에 의하여 불법화 되었던 역사적 정치적 실재로서 분단의 당사자인 북한공산집단과는 별개의 존재인 점, 사건의 주체인 제주도민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양민이었던 점에 비추어 위 ‘시’가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하는 내용이라고 단정한 공소사실 부분은 사실과는 크게 다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두 변호인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산하는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한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을 다룬 필화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은 이산하를 변호해줄 변호사를 찾을 수 없었다. 부득이 이산하는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 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라며 자신이 직접 자필로 항소이유서를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한다.
이산하 자신이 회고하는 것처럼, 이 서면은 감옥 바깥의 기회주의자들에 대해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솟은 상태에서 다분히 감정적으로 쓴 것이다. 당시의 그는 가식과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점진적인 양심들’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분노와 경멸의 침을 내뱉고 싶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산하는 자신이 직접 ‘다분히 격정적인’ 항소이유서를 썼다.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항소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녹두서평필화사건 항소 변론서에 포함되어 있는 ‘한라산’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항소심에서 변호인은 시 ‘한라산’에 대해 이렇게 항변하면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첫째, “시 ‘한라산’은 제주도 4․3폭동을 주제로 하여 쓰인 것이고 그 내용을 이루는 역사적 기술 특히 대다수의 제주도민이 ‘인공’의 정치적 영향아래서 사건에 관여했던 점 및 미군정 당국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무관한 많은 양민을 희생시켰던 점 등은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며 이는 원심을 통하여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둘째, 시 ‘한라산’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밝혀진 바 없는 ‘제주도 4․3폭동’을 외세의 분단논리에 대한 제주도민의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시’의 형태로 형상화 한 것으로서 분단의 책임을 지는 북한공산집단과는 그 역사적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셋째, 다만 그 사건의 구체적 전개과정이나 관련된 정치단체들의 성격규명에 관해서는 아직 학계의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고 또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건자체의 성격에 관해서는 학문적인 견해의 대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견해의 차이는 이 사건 ‘시’가 취급하는 주제는 아닐뿐더러 더구나 그 ‘시’가 그중 어떠한 견해에 입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적어도 이 사건에서 ‘시’의 용공성의 문제와는 결부되어질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이산하의 ‘한라산’이 어떤 이유로 공안당국에 의해 필화를 겪어야 했는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주4·3사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
「4․3사건법」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법은 사건의 발생 시기를 기준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이 사건의 발생원인과 그 진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의결행위취소등”에 관한 결정에서 헌법재판소(헌재 2001.9.27. 선고 2000헌마238․302(병합))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주4·3사건(명칭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으나 법률에서 정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의 발생원인에 대하여는 사건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제주4·3사건은 '공산계열의 사주에 의한 무장폭동'으로 알려져 왔고, 일부 급진적 견해를 가진 측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반미 구국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 두고, 단기적 목표는 남한의 단독정부와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1947. 3. 1. 봉기시 민간인 피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던가, 미군정수립을 반대하는 것이 그 직접적인 동기라던가, 육지출신 공무원들에 대한 반감과 제주도에서 복무하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고, 이러한 인자들이 종합된 민중항쟁이라고 보거나, 좌익계열의 모험적 도발과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과잉진압이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등 다각적인 각도에서 제주4·3사건에 접근하여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경향이 새롭게 나타났다. 결국 해방전후의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당시 제주도의 여러 특수상황에 대한 고려정도에 따라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 및 성격을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제주4·3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결부되어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4․3사건법」에 의해 설치된 ‘제주4·3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경찰에 의한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위군중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고,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조직적 반경(反警)활동과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총파업(3․10총파업)이 일어났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어 일선 지서에서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고, 무장대와 군경-우익단체들 간 무력충돌이 전개됐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를 출동시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군은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들도 무차별 학살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죽임을 당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난 때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제주4·3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까? 1994년 2월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피해신고를 받아 조사한 희생자의 수는 14,841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희생자의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들이 있다.
<4․3사건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헌재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4·3’의 문제는 모두 해결됐을까? “지금 ‘4․3의 현주소’는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십니까?”란 이산하의 질문에 소설 <순이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4․3이 어느 중턱을 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완전한 해결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라산 정상을 넘어야 한다고 보면, 어리목쯤이나 사재비 동산쯤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정도 왔겠지 하면 어느새 수구세력이 끌어내려 나락으로 떨어진다. 진척된 것은 사실이지만 갈 길이 멀고 험하다. ‘4․3특별법’을 보면 불이익처분 금지조항이 있다. 4․3에 대해 얘기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4․3특별법’ 제정 당시 초안 작성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조항만큼은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두려움 없이 자기 기억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기영 선생은, “두려움 없이 자기 기억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제주도민들에게 4․3은 단순한 ‘사건’이나 흘러가고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 중인 ‘지옥’이다. 이산하가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쓴 것도 ‘4․3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를 기억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기억투쟁이자 기록투쟁이다. 실제로 이산하가 ‘한라산’을 발표하기 전까지 제주4․3사건은 정부당국에 의해 은폐되어 일반대중들에게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산하의 ‘한라산’은 제주4․3사건을 세간의 주목을 끌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됐으며, 또한 4․3문학과 4․3운동에서 ‘큰 업적’을 남긴 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긍정적 평가에 대해 ‘한라산’이 4․3문학이나 4․3운동에 긍정적인 작용만 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 김동윤은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중후반의 상황에서는 4․3이 아직 금기에서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전 국민적으로 정서적 공감을 얻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한라산’이, 제주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양상이나 현실적인 분위기는 거의 감안하지 않은 채 반미와 이념의 문제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계적 접근을 어렵게 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냉전이데올로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더욱 강화시키지 않았나 한다. ‘인공의 깃발’(17쪽), ‘북한의 사회주의 발전’(24쪽), ‘공산주의 전통’(25쪽) 등 신중하지 못한 용어를 구사함으로써 공안당국이 4․3진상규명운동을 친북행위로 몰아 탄압하는 빌미를 주기도 하였다.”
김동윤은 ‘한라산’이 “4․3의 역사적 의미와 항쟁의 당위성을 부각하고 그 인식 틀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다양성을 도모한 성과”가 있다고 하면서도 이 시가 “반미와 이념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도 있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로 그는 “현장취재가 결여되어 그 정서적 접근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품화한 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김동윤의 평가는 여러 면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첫째, 현장취재 결여로 인한 정서적 접근의 부족에 대한 것이다. <녹두서평1>에 ‘한라산’이 발표된 것은 1987년 봄(3월 25일)이다. 이 시기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공안정치가 극성을 피우던 시기다.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나온 6․29선언으로 해빙분위기가 조성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현저히 감소하지만 이 시가 발표된 당시에 수배 중인 이산하가 제주도 현지에 가서 ‘현장취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취재’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현장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한라산의 창작비화’에서 이산하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라산을) 쓰기로 결단을 내린 다음부터는 4․3 주변 참고 자료준비 등 은밀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4․3에 대한 극우적 관변자료 외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고 현대사 전공자들 역시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더구나 1986년 전두환 독재정권의 살벌한 공안정국에서 수배자 신분으로 제주 현지까지 내려가 생존자들의 증언을 취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본래대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본으로 해서 시적으로 각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산하가 말한대로 ‘한라산’은 ‘조총련 코뮤니스트’ 김봉현·김민주가 공저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이하, ‘4·3무장투쟁사‘)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쓴 것이다. 우연히 이 원고를 건네받고 ‘한라산’을 쓰기까지 이산하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해서는 ‘복원판’ <한라산> 저자후기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시 그는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그리고 ‘무등산’을 중심으로 ‘민족해방 서사시 전 4부작’을 구상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4·3무장투쟁사를 건네받고 이것을 시로 각색할 것을 요청받은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 순간 이산하는 불현듯 ‘김지하의 오적’을 떠올린다. “아~ 씨발, 이런 시를 써야 진짜 시인이지!”
“그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기회가 하필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피하지는 말자. 피하지 말고 죽든 살든 한번 불 속으로 뛰어들어보기나 하자.”
“복잡하게 미래를 당겨서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침내 ‘한라산’을 쓰기로 수락해 버린다. 이산하는 “이것이 <한라산>을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자전적 성장소설 <양철북>에서 법운스님이 말한 대로 그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펜 삼아 힘껏 양철북을 치고 만 것이다.
둘째, “반미와 이념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도 있었다”라는 평가에 대한 것이다. 김동윤의 ‘한라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위 첫 번째 견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한라산’의 반미적 성격은 서시의 처음부터 강하게 제기된다. 1980년대 중후반에 운동권을 중심으로 뜨겁게 전개되었던 반미의식이 이 작품을 통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라며 ‘한라산’이 가지는 반미적․운동적 성격에 대해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한라산’은 “4․3봉기를 짓밟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을 남한을 통치하는 주도세력으로 인식하고, 현실에서의 반미 혹은 5공 정권 퇴진투쟁이 바로 ‘한라산’의 지향점이다. 결국 이산하는 현장취재를 하지 못해 그 정서적 접근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라산’을 운동의 수단으로 작품화함으로써 반미와 이념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4․3을 금기시․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동윤의 이와 같은 평가는 오히려 문학작품이 가지는 그 고유한 성질인 창작성과 예술성을 ‘이념’과 ‘운동의 수단’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더욱이 문학가가 작품을 쓰면서 현실에 미치는 정치사회적 영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즉, 문학도 현실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김동윤의 견해보다는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4·3사건을 다루는 시문학작품에 대한 문혜원의 비판이 더 적절하고, 균형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문혜원은, 제주4․3사건을 소재로 한 시문학작품이 넘어서야 할 것으로, ① 내용상의 동어반복과 그에 따른 시의 획일화, ② 4․3을 바라보는 시각의 평면성, ③ 시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 수준의 확보를 제시한다. 그의 지적대로 <순이삼촌>을 비롯하여 제주4·3사건을 다룬 소설문학은 그 소재가 다양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4·3시문학에 있어서는 이산하의 ‘한라산’ 이후 그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4·3문학’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현기영은 이렇게 답한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정권이 이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민중의 기억을 되살려서 정권의 불합리한 공식 기억을 물리쳐야 한다.”
그는 ‘관제 기억’에 대항한 ‘기억투쟁’을 촉구하면서 4.3을 제주만이 아닌 세계의 문제로 지평을 확장시킬 것을 주문한다.
“’순이삼촌’을 처음 발간했을 때 일부에선 4.3을 ‘제주의 풍토병’이라거나 ‘빨갱이’들이여서 당연한 것이란 반응을 나타내 분노했었다. 4.3은 육지 병사와 경찰, 토벌대가 섬땅을 짓밟은 것이다. 또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면 세계의 문제다. 세계 전략에 의해 4.3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의 4.3문학에는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하다.”
현기영의 지적은 4·3소설문학만이 아니라 시문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4·3문학’이 언제나 새롭고 영원”하기 위해서는 “4.3을 체험한 듯 감정이입을 해야만 성공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그의 말은 ‘4·3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라산’의 마지막 원고를 녹두출판사의 김영호 사장에서 넘기며 이산하는 이렇게 말한다. “형, 이거 내 모가지 걸고 쓴 거요.” 그 말에, 김영호는, “아니 상백 씨, 시도 목숨 걸고 써요?”라고 되묻지만 이산하는 더 이상 답변하지 않는다.
이산하의 말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한 듯 했다.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으로 그의 ‘모가지’를 옭죈다. 1987년 11월 그는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서울시경체포조에게 검거된다. 그리고는 검은 승용차 속으로 끌려가 곧 얼굴에서 목까지 검은 주머니로 뒤덮인 채 근처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24시간 동안 관절꺾기와 물고문을 받는다. 물고문은 그의 온몸을 해체시켜 버린다. 그때의 악몽에 대해 이산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몸에 관절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하루에 평생 먹을 물을 다 먹으면 세포가 분열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인권변호사들 마저 변론을 맡지 않은 상황에서 이산하는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한다. 백낙청, 고은, 신경림 등 당시 진보적 문인들마저 법정증언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당시의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다.
“다른 사건도 아니고 ‘필화사건’이라 진보적인 문인들이 법정에 나와 작품을 놓고 검찰과 논쟁한다면, 그 자체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장이자 4·3의 진실을 더욱 확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비록 ‘선배문인들’은 법정증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은, 신경림, 황광수가 ‘한라산’에 대한 작품평가서를 작성하여 법정에 제출하여 서면 증언을 한 것이다. “여러 선배 작가들의 엄호가 있었기에 검찰과의 공방은 한결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이산하가 평가하는 이유다
최근 이산하는 인터넷언론 <민플러스>에 ‘세월호참사’의 현장 진도 팽목항을 찾은 심경에 대해 글을 썼다. “바다와 욕조”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말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나에게도 있다. 난 생사가 오가던 ‘물’과의 깊은 악연이 두 번 있다. 10살 때 익사 직전에 살아난 출렁거리는 강과 27살 때 물고문으로 신체포기각서를 쓰던 찰랑거리는 좁은 욕조다. 수평으로 찰랑거리던 욕조의 물이 강처럼 수직으로 출렁거리는 순간, 빛은 꺾여 혼절한다. 난 그 혼절을 수없이 겪어 오랫동안 내 인생에는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자기최면까지 걸었다. 물고문을 부정했다. 그것만이 물한테 박살난 내 몸과 정신을 내 스스로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이산화와 직접 전화통화와 이메일 또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가 출간됐을 때 대구에서 <채형복 교수와 함께 하는 이산하 시인 북 콘서트>를 열어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그와 대화하고, 또 그가 쓴 글을 읽으면서 느꼈다. 그는 아직도 ‘4․3트라우마’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실형을 살았고 몸은 감옥 밖이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면서 자신이 당한 물고문을 자기최면까지 걸면서 부정하고 싶은 그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한라산 필화사건’을 담당한 ‘황교안 검사’가 법무장관이 되고, 국무총리가 되는 이 현실에 대해, 그는 ‘빨갱이’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이 사회에 대한 울분을 갖고 있다. 또한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점진적인 양심들’에게 분노와 경멸의 침을 내뱉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쓸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므로 항상 백척간두에서 한발 대딛는 마음으로 쓰”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그는 “네가 네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란 말에서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도 중심이 없는 삶 속에서는 한낱 위안거리에 불과하듯 어쩌면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자책한다.
그런 이산하에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적들의 말보다 친구들의 침묵을 더 오래 기억한다.”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이제 이산하는 친구들의 침묵보다 그들의 말을 듣고,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한다, 고 나는 느꼈다
I Do It For You (Everything I Do) - Bryan Ad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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