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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뉴스타파

비밀 외교문서로 본 김현희 압송 '무지개 공작'

by 이성근 2019. 3. 31.








대선 전에 김현희 압송"...비밀 외교문서로 본 '무지개 공작'

1987년 대선 정국 집어삼킨 ‘KAL기 폭파 사건

 

13대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17일 앞둔 19871129, 승객 115명을 태우고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교신이 끊기고 실종됐다는 급보가 한국을 뒤흔들었다.

 

이틀 뒤인 121, 경유지였던 아부다비에서 내렸던 승객 15명 가운데 일본여권 소지자 2(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이 위조된 여권을 이용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은 바레인 공항에서 출국을 저지당했고, 조사 과정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신이치는 현장에서 숨지고 마유미는 살아났다(이들의 한국 이름은 김승일과 김현희다).

 

한국 정부는 이들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판단하고 김현희(마유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바레인 정부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결국 김현희는 13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인 871215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압송됐다. 김현희 압송 장면은 대선 투표 당일 대다수 조간신문의 1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대선 이슈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17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였다.

 

대통령 선거일 조간 신문들의 1면을 장식 김현희의 서울 압송 모습

 

국정원 과거사위도 북한 소행결론...‘대선 활용위해 공작한 사실 드러나   

87년 대선 정국을 집어삼킨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여러 의문점 때문에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전두환 정권 때 안기부가 군사정권 연장을 위해 기획한 조작극이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3년 동안 KAL기 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조사를 벌였다. 결과는 KAL 858기 폭파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의 범행이라는 기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전두환 정부 당시 안기부가 KAL기 사건을 87년 대선 때 여당 후보 노태우의 승리를 위해 활용했다는 사실을 안기부가 작성한 이른바 무지개 공작문건 등을 통해 확인했다.

 

안기부의 무지개 공작문건

 

김현희의 음독자살 기도 다음날인 122일 작성된 무지개 공작문건에는, KAL기 실종을 북한의 폭탄 테러로 규정하고 대규모 궐기 대회를 조직하는 등 대통령 선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공작의 목적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또 대통령 선거일 전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한다는 계획도 담겨 있었다. 이런 계획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당시 바레인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던 김현희를 최대한 빨리 서울로 압송해 국민들에게 실물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김현희 압송을 위한 바레인과의 협상 과정이 담긴 기밀 해제 외교문서들

 

비밀 해제 외교문서 속 김현희 압송 작전  

김현희 압송을 위해서는 당시 외무부를 중심으로 하는 외교 협상이 필요했다. 생산된 지 30년이 지나 최근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바로 KAL 858기 관련 자료 만여 페이지가 들어 있는데 김현희 압송을 위한 바레인 정부와의 협상 관련 문서도 여기에 별도 항목으로 묶여 있었다.

 

125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이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에게 보낸 전문

 

우선 1987125일 밤, 당시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김현희의 신병 인도를 바레인 정부에게 문서로 요청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곧바로 박수길 1차관보를 바레인으로 급파해 협상을 지휘하도록 하는데, 김현희를 대선 전날인 1215일까지 인수하는 것이 임무라고 기재돼 있다.

 

박수길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가 바레인 도착 후 보낸 첫 번째 전문

 

박 차관보는 안기부 수사관 3명과 함께 127일 바레인에 도착한 뒤 다음날 첫 번째 전문을 보냈다. 여기엔 안기부 수사팀이 김현희 압송 일정으로 10일 밤 출발, 11일 밤 출발, 12일 가능한 시간에 출발 등 3가지 안을 마련해 바레인 측에 비공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1210일이 되도록 바레인 정부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박 차관보는 늦더라도 15일까지 김현희가 서울에 도착하려면 12일까지는 바레인 정부의 신병 인도 통고를 받아야 한다면서 만약 시일이 계속 미뤄질 경우에는 차라리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를 조사하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니까,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김현희를 데려올 수 없다면 굳이 신병 인도 협상에 매달리지 말고 바레인 정부가 조사를 이어가게 놔둘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박 차관보는, 바레인 내무장관이 자신을 만나 대통령 선거 때문에 귀국을 서두르는 것이냐고 문의하는 등 대선을 의식한 발언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박 차관은 바레인 측이 신병 인도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은 한국 대선 이후에 김현희를 넘겨주라는 미국 측의 압박 때문일 수도 있으니 김현희 인도 문제에 관해 미국 측에 너무 소상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 1212, 바레인 측은 김현희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박수길 차관보는 바레인 내무장관과 합의한 신병 인도인수 일정을 즉시 이를 본국에 보고하면서 김현희를 수송할 특별기를 1213일 저녁까지 바레인 공항으로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일정이라면 김현희는 1214일 오후 2시쯤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무부는 바레인과의 공동발표문 문안을 작성하고 청와대에 보고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발생했다. 바레인 정부가 돌연 김현희 신병 인도를 24시간 연기하겠다고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박 차관보의 보고 전문을 보면, 바레인 내무장관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보류를 통보한 것으로 돼 있다. 만약 14일 오후까지 바레인 정부가 신병 인도를 최종 결정하지 않는다면 김현희를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서울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 신병 인도를 24시간 보류하자 외무부가 준비한 2가지 버전의 발표문

 

박수길 차관에게서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본국 외무부도 바빠졌다. 바레인 현지 상황을 청와대 등에 급히 보고하는 한편, 2가지 버전의 대국민 발표문안을 미리 작성한다. 즉 김현희 신병 인도가 바레인 정부와 원만하게 합의될 경우와 14일 오후 이후에도 보류 상태가 이어질 경우를 각각 상정한 발표문을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바레인과의 협상이 어떻게 되든 대선 전날인 15일에는 김현희 관련 대국민 발표를 내놓겠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바레인 정부의 김현희 인도 최종 결정 사실을 본국에 보고한 전문

 

하지만 결국 바레인 정부는 14일 저녁 635분 김현희 신병 인도 결정을 최종 통보해 왔다. 이에 따라 14일 밤 940분 바레인 국제공항을 떠난 김현희는 대통령선거 전날인 15일 오후 25분 김포공항에 도착해 언론사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게 됐다.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대통령 직선제 부활, 군사정권 종식, 이른바 양김의 대결 등 모든 대선 이슈를 집어 삼키고 말았다.

 

외무부, 사실상 무지개 공작의 공동 주역

876월 항쟁으로 이뤄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선에서 선거 막판 안보몰이를 통해 군사정권 연장에 큰 역할을 한 김현희 압송 작전은 안기부 무지개 공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실행 과정에서 외무부는 사실상 안기부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는 당시 김현희 신병 인수 협상을 위해 바레인에 갔던 박수길 전 차관보가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나 나눈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박 차관보는 당시 외무부의 차관급 인사가 안기부에 파견을 나가 있었다. 역시 안기부로 파견된 외무부 직원 가운데 정 모 국장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안기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KAL 관련 정보 등을 바레인 현지에 나가 있는 나와 안기부 수사팀에게 전달해 주는 연락관 역할을 했다. 안기부와 공조가 상당히 잘 이뤄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217일 외무부가 작성한 ‘KAL 사건 관련 서훈 대상자 명단’. 하단에 검게 칠해진 부분은 포상 대상인 안기부 직원들의 명단으로 추정된다.

 

사실상 군사정권 연장으로 마무리된 13대 대통령 선거 바로 다음날인 1217, 외무부는 박수길 차관보를 비롯한 11명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훈장과 포장, 표창 등 각종 서훈을 상신한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KAL 858폭파 사건을 조사했던 안병욱 카톨릭대 교수(현 한국학중앙연구원장)“17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위주의 정권이 계속될 것이냐 민주화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마침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부 기관들은 장기적인 한국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 이 사건에 관한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려 노력했어야 하는데, 정권의 최첨병이었던 안기부 입장에서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고, 외무부는 안기부의 기획 대로 김현희를 대선 전 압송하는 목적을 위해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뉴스타파 김성수 3.31


‘1987’...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 총동원된 외교라인

지난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외교라인을 총동원했던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0년의 비밀유지 기간이 만료된 외교부의 1987년도 외교문서를 통해서다.

 

노 총재는 대선을 3개월 앞둔 1987913일부터 1주일 동안 미국과 일본을 연이어 방문했다. 자신의 외교력을 홍보하고 교민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당 대표 신분이었지만 순방단 규모는 대통령급으로 꾸려졌다. 기자단 규모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훗날 KBS 사장이 된 김인규 기자를 포함해 KBS 3, MBC 3명 등 20명이 넘는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동행했다.

 

여기에 외무부가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노 총재의 미국 방문 전 외무부는 주미대사관에 노 총재의 일정을 비롯해 수행원 명단, 방미 준비사항 등을 전달했다. 스위트룸 등 노 총재의 숙소 배정부터 차량 임대, 운전기사에 대한 보안교육까지 꼼꼼히 지시했다. 또 공항 도착 시 일부 교민들의 반발 대비책을 수립하고, 연회장에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 기자를 초청할 것을 요구한다.

 

지시를 받은 주미대사관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노 총재 공항 도착 시 과격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고, 100여 명을 마중 나가도록 해 환영 무드(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좋겠음’, ‘친한(親韓) 미국 언론인 10명에게 연사 초청 티켓 배분 추진등 정부 외교라인이 여당 대표의 방미 현장 분위기를 제고시키는 데 외교라인이 대거 동원된 흔적이 문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과정에서 주미대사는 미국 정부에 노태우 총재에 대한 경호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굴욕도 겪었다. 주미대사는 미 국무부에 노 총재는 한국 집권여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이며 미국 내 불순세력의 공격을 당할 수 있다며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국무부는 노 총재가 정부 공식 대표가 아니고, 이번 방미도 공식방문 성격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주미 대사는 두 차례나 더 같은 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부 당했다.

 

노태우 총재는 방미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외무부의 개입은 방일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노 총재 방일 전 외무부가 주일대사관에 보낸 문서 속에 이같은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민정당 측이 (일본 기자클럽) 연설문에 포함돼야 할 사항과 예상 질의응답 파악을 희망한다라든가, ‘노 총재 방일 시 면담 주선 및 행정지원 등 필요한 사항을 측면 지원하기 바란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을 분석해 외무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인 클럽(JAPAN PRESS CLUB)VIP를 괴롭히거나 당혹하게 하는 질문은 삼가는 지극히 동양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음’, ‘언론 접촉이 없을 경우 실망과 반발로 인한 역작용 가능성이 큼’, ‘회견이 반드시 실현되도록 민정당 측에 권고 바람등의 내용이다.

 

주일대사는 또 일본 기자들의 예상 질문까지 파악해 보고하기도 했다. ‘두 김 씨(김영삼, 김대중)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단일화되는 경우와 모두 출마할 때 어느 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대중이 당선되면 군 개입 등 소문이 있는데 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등을 예상 질문으로 정리했다.

 

외무부는 노 총재의 미일 순방이 끝난 뒤에도 민정당의 요구사항을 미국과 일본 주재 대사관에 전달하고 보고를 받았다. ‘민정당이 노 총재 연설과 질의응답 기록을 제공해 달라고 했다’, ‘노 총재 방일 기간 공식 발언을 가능한 대로 정리해 보고해 달라등의 지시였다. 여당 대표의 해외순방 일정 준비부터 마무리 이후까지의 전 과정에 정부 부처인 외무부의 외교라인이 사실상 총동원됐던 것이다.

 

심지어 청와대와 안기부 등 국가기관에만 전달해야 할 노 총재의 순방 관련 외교부 기밀문서들이 집권 민정당과 실시간으로 공유됐던 흔적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방 관련 기밀 문서들의 문서 공유 기관에 느닷없이 민정당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행정부와 집권당 간 최소한의 경계선조차 무시한 채 전두환 정부가 노 총재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에 나섰던 방증이다.

 

투쟁으로 얻어낸 직선제’...끝내 군사정권 합법적 연장으로 귀결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경찰의 물고문에 희생된 서울대생 박종철과 직격최루탄에 유명을 달리한 연세대생 이한열 등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 속에 일궈낸 결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막고 노태우에 대한 정권 차원의 대대적 지원을 통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서있었고, 실제로 13대 대선 결과는 그들의 계획대로 마무리됐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와 조작을 옥중에서 취재해 바깥에 알렸던 이부영 전 동아일보 해직기자는, 30년 전 작성된 이 외교문서들을 살펴본 뒤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강력한 경고를 남겼다.

 

다시는 저런 시대가 오지 않도록 이미 촛불시민들이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겠어요. 노태우나 전두환 시대가 다시 오도록 꿈꾸는 사람들이 없으란 법이 없다니까요. 우리나라를 30~40년 전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 사람들, 꿈 깨라고 하고 싶어요. 다시 그런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 문준영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분출하던 지난 1986년과 1987년, 전두환 정권 외무부를 비롯한 다수 행정부처들이 뉴욕타임스에 잇달아 실린 외국인들의 정권 비판 기고문들에 대응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정황이 기밀 해제된 30년 전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외교라인을 총동원해 뉴욕타임스와 미국 정부에 압박과 항의를 전하는가 하면, 법무부와 문교부 등을 통해 국내에 거주 중이던 외국인 기고자에 대한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비판’ NYT 기고문 항의에 외교라인 총동원  

필리핀의 마르코스 장기독재가 시민 궐기 종식된 1986년 초. 한국에서도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던 198642, 뉴욕타임스에 엘살바도르 대사를 지냈던 미국 외교관 로버트 화이트의 기고문이 게재됐다. ‘서울을 향한 과도한 수줍음이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소개하고 이에 대응하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기고자는,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들끓기 시작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노조 운동가들에 대한 구금과 고문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함께 실린 삽화 속에는 이같은 한국의 상황이 표현됐다. 이어서, 미국 정부는 곧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야당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물론, 문익환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 등 재야 종교지도자들과도 적극 소통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 기고문이 실린 지 이틀 뒤부터 한국 외무부가 황급히 움직인 내용이 외교문서 속에서 포착됐다. 44일 외무부는 뉴욕총영사관에 공문을 보내 뉴욕타임스에 항의서한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현지 교민을 섭외해 항의서한을 쓰도록 하라는 지시 내용도 담겨 있었다. 뉴욕 총영사관은 이 지시를 즉각 이행한 뒤 외무부에 보고했다.

 

같은날 외무부는 주미대사관에도 지시 공문을 보냈다. 뉴욕타임스의 삽화가 우방국인 한국의 국기를 모독한 것이라는 점을 미 국무성 관리에게 전달해 주의를 환기시키라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미 정부를 통해 뉴욕타임스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미 국무성 관리에게 이같은 항의를 표명하자 미국 측은 정부가 언론에 영향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응답을 내놓았고, 주미대사관은 이를 그대로 외무부에 보고했다.

 

10개월 뒤인 1987223, 뉴욕타임스에 또 하나의 한국 관련 기고문이 실렸다. 당시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치던 때였다.

 

기고문을 보낸 사람은 에드워드 포이트라스라는 미국인 목사로, 당시 서울의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박대인이라는 한국 이름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기고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민들이 직접선거를 통해 전두환 정권을 축출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외교부는 황급히 주미대사관에 대책 마련을 지시했고, 주미대사관은 즉각 뉴욕타임스 논설주관과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항의한 뒤 그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외무부는 또 주한 미대사관에도 뉴욕타임스 기고문 문제에 대해 항의했는데, 이번에도 돌아온 반응은 언론 보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치는 한계가 있음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대인 목사 직접 압박에 행정부처 총동원

외교라인을 통해 미국 언론의 비판 기사를 막아내는데 한계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아예 기고자인 박대인 목사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청와대와 안기부, 외무부, 법무부, 문교부, 문공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해 대책회의를 갖고 압박 전략을 세워 실행했다. 여기엔 박 목사의 한국 체류기간 연장을 불허하는 방안, 즉 추방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따라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소장은 박대인 목사를 불러 뉴욕타임스에 기고문을 보낸 행위에 대한 문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박 목사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본 한국 사정을 미국인에게 알리려고 한 것일 뿐이며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신상에 대한 조치를 취한다면 그냥 당하지 않고 할 수 있는데까지 싸우겠다고 대응했다.

 

그러자 정부는 박 목사의 비자 연장을 불허할 경우 극단적인 반한인사로 만들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일단 체류기간을 6개월 연장해주고 동태를 파악하기로 결정하고 만다.

 

문교부는 감리교신학대 학장을 압박해 박 목사에게 인사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압박책을 실행했다. 당시 송길섭 감신대 학장은 일단 외국인의 정치적 발언 관여는 곤란한 일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며 알아서 조치하겠다고 답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징계 조치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박 목사를 보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적인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억누르고 있던 1987년의 전두환 정권. 그 같은 현실을 어떻게든 세계로 알리려 노력했던 외국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떻게든 이를 막아내려고 동분서주 했던 공무원들이 공존하고 있던 시대였다. 이들 가운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건 어느 쪽이었을까./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