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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오래된 미래

부산 좌수영(左水營城祉) 5백년 푸조나무와 곰솔

by 이성근 2014. 2. 10.

 

수영은 조선시대 각도 지역별로 유기적으로 편성된 수군기지이다.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던 수영 아래에는 첨 사, 만호가 주재하던 제진이 포함되었고 위로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솔 하기 위해 수군통제영과 그 책임자로서 수군통제사직이 있었다.

 

좌수영성은 부산 수영구 수영동, 망미동, 광안동 일대에 둘레 2,785m 규모의 성으로, 처음 현재는 성 터(부산 시도기념물 제8호, 좌수영성지)가 남아 있고, 성지 관련 유적을 ‘수영사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조선의 수군은 하삼도인 전라, 경상, 충청과 평안도, 경기도 등지에 수영을 설치하였으며, 수영은 오늘 날의 해군 기지와 사령부에 해당한다. 통제영에서 관할하는 하삼도의 수군은 통영의 경상우수영(거제 >임란 전 여수> 임란 후 통영), 경상좌수영, 전라좌수영, 전라 우수영(고려 우왕 무안 당곶포> 세종22년 해남 황원관 ) 충청 수영으로 구분했다.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水軍)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종2품이다. 지휘 관청과 해군 기지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통제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 관직으로 법제화되었다. 1895년 고종 32년에 폐지될 때(초대 이순신~209대 흥남주) 까지 조선 수군의 최고 통치 관청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한편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의 진영으로, 주로 왜구의 침입경로인 낙동강에서 경주지역까지의 수로 방어를 담당하였다. 최초로 설치된 곳은 부산 동래현이었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다가, 1592년 동래 남촌으로 옮겨갔다. 1635년 인조 13년에는 최초의 장소인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는 이유로 1652년 효종 3년에 다시 동래 남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경상좌수영성을 처음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중종9년(1514)에 해운포영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지금의 수영지역에 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좌수영지』에 ‘壬申改築時’라한 임신년은 숙종18년(1692)으로 좌수사 문희성이 재임시에 크게 중수되었으나 「동래부지」(1740)에 ‘석성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무너졌다’하여 이때 이미 상당히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영강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수영이 설치되기에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사천의) 홍수로 인해 모래의 퇴적이(병선의 출입과 정박에 불편하여) 큰 흠이 되어 인조 때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효종 3년(1652)에 다시 오늘의 좌수영에 옮겨 고종 32년까지 약 250년간 존치하였다.

 

 

경상좌수영성의 구성은 석성이며 남북직경 279.6m, 동서직경 534m, 성벽의 길이는 1,480m, 내부 면적은 109,728㎡으로, 평면 형태는 장축이 동서가 긴 장타원형으로 평지와 구릉에 걸쳐 축조되어 있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 13~16척, 동.남.북문의 3곳에는 사각형의 옹성, 각 문 사이에 치성 6~7곳, 여장은 375~384량, 포루가 3곳이 있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은 각각 영일문(迎日門), 호소문(虎嘯門), 주작문(朱雀門), 공진문(拱辰門)이라 하였으며, 성문 중 남문의 규모가 가장 크고, 동문 서문 북문은 각각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동문루가 6칸, 남문루 홍예가 6칸 북문루가 2칸 있었고 성문은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 관해루에 달아둔 북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개폐하였다. 성내에는 수문이 4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성중에는 배수구가 정비되고 수문이 서부고지를 제외한 북, 동, 북동남에 설치되어 동부의 대하에 유입되도록 되어 있었고, 성내에는 우물이 3곳 있었다.

 

                                                                                                                                                                     출처: 국제신문

 

 

좌수영성은 성내에는 본영과 중영으로 나뉘어져 많은 관아 시설과 선소가 있었다. 내성의 부속관아는 수사영인 상영에 절도사의 소거처인 동헌, 비장청, 장관청, 군관청 등이, 우후영인 중영에는 우후의 처소인 세검헌 등을 비롯하여 관아건물과 창고가 많았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종군이 있었으며, 7개의 진이 소속되어 모두 65척의 전투선이 45척의 나룻배가 경상도 동쪽 해안을 방어하는데 힘썼다. 일제강점기에 관리소홀로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성벽과 남문의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자료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경상좌수영의 구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수영 복원),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좌수영 성지 내 천연기념물 제311호  푸조나무 다. 키 18m, 가슴높이 줄기둘레 8.5m 수관 동서 23m 남부 19m 부산에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로 원 불기 밑부분에 굵은 혹이 많이 발달 했다. 마을 당산목으로 지신목(地神木)으로도 불린다.  이 나무 가까이에 있는 서낭당 할머니의 넋이 이 나무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마을의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으며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한편 이 나무는 밑둥치 1m정도의 높이에서 두 갈래 크기로 크게 나뉘어져 북쪽 줄기를 할아버지, 남쪽 줄기를 할머니 나무라 하여 노부부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수영사적 공원에서 일부 남이 있는 남문 등 성곽의 흔적 외에는  좌수영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이 푸조나무는 그 흥하고 쇄한 세월의 기록을 다 알터이다.  이렇듯 노거수의 존재는 그 존재감을 넘어 역사적 내용조차 담는 상징으로서도 자리매김된다.

 수영사적공원 푸조나무 뒷편에 있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선정비, 숫군절도사는 정3품 무관으로 통칭 수사(水使)라 했고ㅡ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해안방어를 수행했다. 모두 33기의 비석으로  조선 인조17년(1639년)부터 고종 27년(1890년) 사이 부임한 수군절도사와 부관인 우후(虞侯)의ㅏ 재임 중 공덕을 칭송하는 선정비들로서 수영성 남문 주변에 흩어진 것을 지난 2002년 재임연노순으로 정비하였다.

좌수영성지 남문의 우주석 위에 조각된  박견(狛犬). '고구려개'로 불리며 도둑 감시견이다. 박견 뒤의 석축에 '辛亥二月(신해이월)'이란 새김이 있어 아마 1692년 좌수영성 증축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날, 경상좌수사 박홍은 죽음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부산 3공(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부산첨사 정발(鄭撥),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 과는 달리 판세를 보고 도망쳤다.  이같은 행적에 대해 부산지역 민심은 그날 이후 만고의 역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관련하여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정리한 국역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에 따르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이때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으로 후퇴하여 적을 방어하려고 하였으나, 조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이미 한양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뒤라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가던 중,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만나 좌위대장(左衛大將)의 직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참여하였다. 당시 유극량(劉克良) 등과 함께 병사를 나누어 파주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평양으로 탈출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서 종군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같은 해 6월 평양이 함락되자 이천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고, 세자를 호위 시종하면서 성천으로 들어가 우위대장·의용도대장에 임명되었다. 평양방면으로 나아가 수차례 왜적과 접전을 벌였다. 1593년 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까지 종군하였다. 그러나 지병이 재발해 치료를 위해 귀향하던 중 사망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조인물고는 조선 시대 인물 2,091명의 전기(傳記)를 담고 있다. 수록된 전기 자료 대부분은 묘지명류(墓誌銘類)에 입각하고 있는데, 박홍에 대한 인물 평 역시 그의 자손에 의해 정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서 좀더 자세하게 언급된 글을 보자면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일을 부지런히 하니, 사졸(士卒)들이 입을 모아 편리하다고 일컬었고 군정(軍政)이 거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순무 어사(巡撫御史)가 성곽이 높고 연못이 깊으며 병기가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을 보고 매우 좋게 여기어 여러 진영(鎭營)으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였다. 임기가 차면 관례상 교체하게 되었으나 조정에서 공의 재능을 알고 특별히 1년을 더 유임하였다. 그 이듬해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倭賊)이 국력을 기울여 우리나라를 침범하자, 공이 해안으로 내려가 맞서 싸우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하여 본진(本鎭)으로 들어가 수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적이 연달아 이웃 고을을 함락한 바람에 구원병의 길이 끊어졌으므로 부득이 편장(褊將)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성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나가게 한 뒤에 자신은 군량과 병기를 챙겨 따라 나가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략)

공의 장례를 치른 지 39년이 되어 아들 박정남이 비석을 갖추어 놓고 나에게 묘갈명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누차 사양하였으나 더욱더 간청하였으므로, 삼가 가장(家狀)에서 발췌하여 위에처럼 서술하고 ..."

 

국고인물고만 가지고 정리하자면 그는 대장부였고, 효자였고, 부임지마다 신뢰받는 목민관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중과부족'으로 방어에 치중하다 결국 후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운이 없었든지 후퇴를 거듭하고 탈출하다 책임회피와 군율위반으로 탄핵까지 받았다. 이후 세자(광해군)를 호위시종하다 지병이 재발하여 귀향하던 중 사망했다. 사후에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극명하다.  한편으론 어떻게 이런 자가 병조참판에 추증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부산지역에서 임진왜란 당시 행적을 두고  지탄받는 인물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과 경상좌병사 이각, 경상감사 김수 등이다.  최고 지휘관인 이들의 도주로 부산경남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왜란 시작 열흘만이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개전 초기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15일(5월25일) 갑진. 맑음

...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우너균)의 통첩에 “왜선 아흔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왜적 300백 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 이광, 병마사 최원 우수사 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경상 감사 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4월16일(5월26일) 을사

밤 열시쯤 영남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4월17일(5월26일) 병오. 흐리고 비오다 저녁 맑음

영남우병마사 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수군(上番)을 새로 드는 수군(下番 )잇다라 방비처로 왔다.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 순절도

지휘관들이 달아난 상황에서  좌수영에서는 조선수군 패잔병과 주민 25명이 유격전으로 7년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사실을 광해군 원년 (1609년) 지방민의 청원으로 동래부사 이안눌이 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영이란 글을 써 붙여 그 뜻을 기가렸다. 그리고 순조 때 동래부사 오한원이 25인의 후손에게 역의 의무를 감해주고 포상했다.  1853년(철종 4) 수군절도사 장인식이 찬한 수영의용비명(水營義勇碑銘)이 전한다. “박홍이 진영을 비우자 군사들도 흩어져 버렸으며, 이런 혼란 속에 적군이 침공하여 수영성을 점령하고 말았다. 수영성에 주둔하던 적군은 민재(民財)와 가축을 탈취하고 인신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감행하였다. 왜군의 만행을 보다 못한 조선 수군 패잔병과 주민 25명이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한 후 7년 동안 유격전을 벌였다" 

푸조나무는 이렇듯 간직한 사연이 많다.

 KNN-BGT 아름다운 가로수 공모전 정향숙(가작) 수상작  

 안용복 장군 사당

 번호 2번이 푸조나무이며 번호 1이 곰솔이다.  11번이 안용복 장군 사당이고 10번이 수사 선정비 정빅역이다.

좌수영지의 곰솔은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3.6m, 둘레 4.50m로 현재 수영공원 안에 있다. 땅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부분까지의 길이가 7.0m에 이르며 껍질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다.

 

 

노래출처 :

고향의 강 - 남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