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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보통 일베들의 시대 -‘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by 이성근 2022. 6. 19.

보통 일베들의 시대 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김학준 지음 l 오월의봄 2022.06.

 

저자 : 김학준 유니텔부터 프리챌, 디시인사이드, 인스타그램을 거친 인터넷 죽돌이 출신 사회학 연구자. 2014년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으로 석사학위(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받았고, 이후 아르스프락시아 미디어분석팀장과 서울시청 빅데이터담당관 데이터 분석 요원을 거쳐 현재 LG CNS에서 일하고 있다. 공저로 #혐오_주의(2016), 그런 남자는 없다(2017)가 있으며 혐오의 두 얼굴(2019), 질식의 예감(2017), 빅데이터로 바라본 촛불 민의(2017) 등의 글을 썼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감정적 역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LG트윈스의 열렬한 팬이다.

 

목차

들어가며| 왜 다시 일베인가

 

1장 일베의 계보: 사이버공간의 간략한 문화사

1. 사이버 유머의 기원

2. 사이버 여론은 진보적이었나

3. 디시와 일베의 연결고리

 

2장 혐오의 수치화: 2011~2020 일베 데이터 분석

1. 일베는 망했다?

2. 일베를 채운 혐오의 말들

 

3장 일베적 혐오: 내부의 타자들

1. 일베가 타자를 호명하는 방법

2. 혐오의 정당화

3. 일베의 열광과 의례

 

4장 일베를 만나다: 각자도생의 평범을 꿈꾸는 이들

1. 불안과 공포

2. 응어리진 분노

3. 수치, 순응, 그리고 평범 내러티브

 

5장 여성혐오와 능력주의: 일베만의 문제는 없다

1. 장대호라는 일베의 이념형

2. 루리웹은 일베의 피안인가?

 

6장 결론: 차가운 열광의 확산과 일베적 정치의 탄생

1. 파기된 약속

2. 일베의 주류화

 

나가며| 혐오의 시대에 맞서기 위해

감사의 말

 

출판사 서평

이 책을 안전하게 타자화된 일베라는 작은서클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문제화된 집단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전개되고 있는 정치와 그에 따른 사회적 삶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 엄기호, 문화연구자(추천의 말에서)

 

논문 이후 8,

그사이 일베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면이 책은 출간되지 않았을 것이다

2014, 온라인에서는 한 논문이 화제였다. 사회학 석사학위 졸업논문으로 김학준이 쓴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이었다. 논문은 일베 게시물 전수를 분석한 양적 방법과 일베 이용자 10명을 심층 인터뷰하는 질적 방법을 아우르며 사회학적으로 일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제시했다. 일베를 악마 또는 괴물로 낙인찍으며 타자화하지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일베라며 보편화하지도 않는 균형을 유지하며, “가장 성공적으로 체제가 작동했을 때 산출되는 주체가 바로 일베라는 서늘한 결론을 도출해낸 그 논문은 사회학 관점에서 일베와 같은 문제적온라인 커뮤니티를 연구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는 사이, 데이터 분석계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던 저자는 빅데이터 분석 기술의 발전을 지켜보고 정치적ㆍ사회적으로 급변하는 한국 사회를 관찰하며 일베를 다루었던 논문의 확장을 결심한다. “사이버공간 전반에 걸친 페미니즘의 부상과 백래시의 과정에서 이른바 ‘20대 남자들이라는 새로운(혹은 오래된) 주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역차별담론을 체화한 젊은 남성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는 와중에 2014년 연구 때부터 예상하기도 했던 다양한 모습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승자 독식의 권력 수호와 혐오 또는 차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 근거로 공정정의를 끌어오는 이들의 논리는 2014년 연구를 통해 분석했던 일베의 논리와 매우 유사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커뮤니티 자체로서의 일베에게서 더 이상 과거의 위광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문제는 일베가 흥하고아니고가 아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디시에서 발원하여 일베가 완성한 혐오의 내용과 표현 방식, 즉 농담의 탈을 쓴 혐오가 널리 퍼졌으며 그것이 “‘정의능력따위의 말과 버무려져 일베와 일베 아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버렸다는 데 있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고인드립폭식 집회등으로 일베가 사회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시기에 일베를 연구했던 사회학 연구자가 오늘날 온라인에서 혐오의 자유를 말하는 이들의 기원으로서 다시 일베를 이야기하는 치밀한 보고서다.

 

일베에서 나타난 지독한 혐오의 놀이는 과연 그들만의 것인가?

도대체 일베는 무엇일까? 일베라는 현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인가? 저자는 이에 답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사이버 유머의 기원과 함께 딴지일보와 디시인사이드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베의 계보를 훑는다. 일베가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괴물이 아님을 이해할 때, 다시 말해 일베에서 벌어진 지독한 혐오의 놀이가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이해할 때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일베 또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쓰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자 사이버공간에서 일종의 자본으로 기능하는 웃음을 논하고, 한국형 밈의 기원으로서 딴지일보식 패러디를 설명하며, 그것을 심화ㆍ발전시킨 곳으로 디시인사이드를 서술한다. 일베가 탄생한 직접적인 원인이 디시의 게시물 삭제 조치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99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사이 딴지-디시-일베로 이어지는 사이버공간의 간략한 문화사는 일베가 어떻게 사이버문화의 전통을 나름으로 발전시킨 커뮤니티인지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혐오의 수치화: 2011~2020 일베 데이터 전수를 분석하다

일베의 계보를 훑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베가 어떤 곳인지를 살펴볼 차례다. 일베는 누가 언제 접속하며, 이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열광하는가? 열광은 언제 가장 폭발적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저자는 일베에 첫 게시물이 올라온 2011528일부터 20201231일까지 총 811,327건의 게시물 전수를 수집해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진행된 데이터 분석에 대한 논의는 데이터 전처리와 같은 기초적인 설명에서 시작해 시계열 분석과 텍스트 분석으로 나아가며 혐오를 수치화한다. 시계열 분석을 통해서는 월간 일베 게시물 생성량은 얼마나 되는지, 일베가 급격한 성장을 이룬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일일 게시물수가 폭발적으로 많았던 날들의 이유는 무엇인지, 일베의 게시물 생성량 패턴은 어떠한지 등을 보여줌으로써 일베의 겉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텍스트 분석은 그 속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일베를 채운 혐오표현들은 전체 게시물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가? 혐오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혐오표현이 게시되는가? 이에 대한 다른 이용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어떤 혐오에 가장 열띠게 반응하는가? 9년간 일베를 채운 들을 분석함으로써 저자는 일베의 이 누구인지 또한 명료하게 식별해낸다.

 

내부의 타자를 향하는 일베적 혐오

그렇게 도출해낸 일베의 은 호남과 여성, 그리고 진보좌파였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 결과를 근거로, “일베적 혐오는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존재로서 내부의 타자들을 향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베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극우주의의 선상에 두는 것을 경계하며, 실제 일베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베적 혐오가 어떻게 발화되고 정당화되며 일베 특유의 열광적 상태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실제 일베 게시물 14건을 사례로 서술되었다. 악셀 호네트가 논한 인정과 무시의 개념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게시물 분석은 일베가 타자를 호명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그것이 어떻게 일베 특유의 열광과 의례로 이어지는지를 풀어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베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분노를 논하는 사례 6~10은 일베에서의 혐오가 어떻게 놀이를 넘어 격렬한 비난으로 나아가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신상 털기등 실질적인 사이버 폭력으로도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사이버공간의 혐오문화가 예비하고 있는 사회적인 위협을 다시금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자도생의 평범을 꿈꾸는 이들, 일베를 만나다

일베의 을 식별하고, 에 대한 혐오의 논리를 도출해낸 저자는 이제 실제 그러한 혐오표현을 구사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러 나선다. 저자가 만난 10명의 일베 이용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2030 남성들이었다. 저자는 일베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감정사회학적 이론에 기반한 해석을 제시한다.

 

저자가 만난 일베 이용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불안을 토로했다. 하나는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따른 불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적 위기와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는 친밀성의 영역이 붕괴되었다고 느끼는 데서 기인한 불안이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은 저항 행위를 유발하는 분노로 외사화되지 못하고 내사화됨으로써 순응이라는 행위 전략의 선택으로 이어졌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불안에 기인한 공포,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사회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안으로 침잠함으로써 적극적인 순응과 노력의 이름으로 자기계발(혹은 자기최면)에 몰두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데, 그렇게 퇴출된 공적 분노가 모인 곳이 바로 일베이며, 적극적 순응을 택한 이들의 분노는 혐오로 일그러져 내부의 타자들을 향한다. 끊임없이 사회에 혼란을 조장하는 좌파/종북에 대한 혐오, 국가의 정당한 법 집행에 잠자코 순응하지 않고 감히 폭동을 일으킨 호남에 대한 혐오, ‘무식하고 허영에만 찌들어서 친밀성의 약속을 거침없이 배반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그렇게 완성된다.

 

그렇다면 순응은 무엇으로 가능해지는가? 저자는 이들의 분노가 내사화되는 과정에서 평범 내러티브가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일베 이용자들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평범함의 범주로 수렴시키면서 삶의 특수성을 최대한 억압해 준비된 사회인이라는 목표로 재구성한다. 자신이 겪은 끔찍한 과거의 경험을 이겨낸경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모든 고통을 평범함의 영역으로 재구조화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평범 내러티브가 자신의 고통만 억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의 고통이 평범한데, 타인의 고통이라고 다르겠는가. 이제 고통은 누구나겪는 것이며 따라서 특별히 말할 이유도,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평범 내러티브에서의 고통은 그게 무엇이든 그저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 삭이면 그만인 개인적 경험이 된다. …… 고통을 들어달라고 징징대는 것은 스스로가 약자임을 자임하는 꼴에 불과하며, 이는 곧 자기경영에 실패한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가 된다.”(258)

 

책속으로

하지만 일베는 달랐다. 이들은 딴지일보를 위시한 정치적 패러디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스스로 젊음을 인증하며 자신들이야말로 깨어 있는 일등시민이라는 확신을 사방에 퍼뜨리고 다녔다. 보수 또는 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실존한다는 놀라움, 실존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심지어 젊다는 반전, 그들의 행동이 자발적이라는 데서 오는 당혹, 특히 범진보 진영의 입장에서 행해지던 비판과 풍자의 칼날이 정확히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충격, 정의와 공정 같은 민주적 가치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데 대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일베는 그 등장과 함께 한국 공론장에 거대한 혼돈을 불러온 진앙지가 되었다.--- p.8

 

논문이 발표된 2014년에서 지금 이 글을 쓰는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베는 상당한 부침을 겪었다. 일베 데이터를 분석하는 2장에서 깊게 논의하게 되겠지만, 한국 사이버공간은 메갈리아와 TERF(트랜스젠더 배제적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두와 함께 거대한 균열을 맞이했다. 한때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던 일베와 루리웹, 인벤 등의 커뮤니티는 반페미의 깃발 아래 국공합작을 하여 언론이나 정당, 기업 등에 맹폭을 진행했다. 하지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일베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p.16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일베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니, 일베의 영향력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 급기야 0선 중진이라는 진기록을 쓴 이준석이 보수정당의 당대표가 되더니, ‘여성가족부 폐지를 위시한 현란한 성별 편 가르기와 혐오 선동으로 정치적 재배열(realignment)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위논문을 작성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그 글에 생명력이 남아 있다면 바로 이런 지점들 때문이다.--- p.17~18

 

이 책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일베적 혐오의 구조 또는 기원을 이해하고 현재 강고해 보이는 혐오 선동을 파훼하는 여러 불쏘시개 중 하나로서의 가치일 것이다.--- p.21

 

일베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누군가는 한국형 극우주의의 발흥이라 보았고, 누군가는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나 일본의 유명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 니찬네루(www.2ch.net)와 같은 인종주의적 공간이라고도 했으며,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모인 호모소셜(homo social)의 공간이라 말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이 성립하기 전에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일베의 존재 형식,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로서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이다. 앞으로 지겹도록 확인하겠지만, 일베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다.--- p.27

 

웃길 수 있는 능력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구성된 경쟁체제에서 윤리적·도덕적 잣대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고 더 많은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는 웃음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외의 가치는 우스운 것이 된다. 더 많은 주목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어그로라 할 때, 이를 비난하거나 과도한 주목경쟁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씹선비가 되는 것이다.--- p.69

 

이제 본격적으로, 일베의 담론 구조를 살펴볼 차례다. 이를 위해 이 장에서는 빅데이터 분석의 일종인 텍스트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 이 분석에는 최초의 일베 게시물이 생성된 2011528일부터 20201231일까지 총 811,327건의 일베 게시물 전수가 수집·사용되었다.--- p.85~86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 토픽은 결혼 토픽이었다. 8,239건의 게시물이 해당된 이 토픽은 단순히 결혼하고 싶다따위의 의사 표명이나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 상담이 아니다. 이후 3장의 게시물 사례 분석에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적지 않은 이용자들, 특히 기혼자들은 김치녀와의 결혼을 극구 말리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사흘에 한 번은 패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낸다. ‘시녀와 같은 키워드는 결혼해봤자 아내의 시녀가 될 뿐이라는 일베 이용자들의 자조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2021년 하반기 온라인에서 떠돈 퐁퐁남또는 설거지론을 예비한다.--- p.132

 

이들은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을 겨냥한다면서도 실상은 내부의 적인 종북에 더 많은 냉소와 분노를 표출한다. 내부의 적을 향한 증오는 호남에 대한 멸시와 결합되어 5·18 수정주의로 발전한다. 5·18에 대해 북한군, 다시 말해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반골 기질을 가진 홍어들의 폭동이라고 깎아내리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주의적 포섭의 대상으로서 여성을 향한 맹비난을 쏟아낸다. 요컨대 일베적 혐오는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존재로서 내부의 타자들을 향한다. --- p.149

 

 

나를 두려워하라일베가 열어젖힌 혐오의 시대

8년 전 석사 논문, 빅데이터 만나

사이버공간의 혐오문화 전반 분석

내부의 적에 대한 강렬한 증오

평범을 꿈꾸는 이들의 불안·공포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학 연구자 김학준의 <보통 일베들의 시대>일베 데이터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기원과 이유, 또한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방법을 모색한 책이다. 저자는 일베가 갑툭튀괴물이 아니라 사이버공간의 탄생과 궤를 같이하며,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그중에서도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고 강조한다. 딴지일보의 패러디, 일명 짤방으로 한창 주가를 올린 디시인사이드 등이 일베의 탄생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일베는 이용자들이 자신들을 무식하고 덜떨어진 찌질이/루저로 폄하한 이들에 맞서 201210인증대란을 일으키면서(?) 급성장했다. 한 여초 카페에서 일베를 루저라고 비난하자 일베 이용자 하나가 일베 학력 인증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당장에 500여명에 이르는 일베 이용자들이 호응했다. “‘여성의 무시에 대항해 자신의 학벌을 드러냄으로써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이용자들은 여초 카페 고소·고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반동 등에 나섰다. 여성혐오는 이때 일베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하나의 흐름으로 번져나갔다.

 

저자는 일베 게시물 데이터 분석을 통해 그들이 호남, 여성, 진보좌파’, 즉 내부의 적을 증오한다고 강조한다. 이 증오는 호남에 대한 멸시와 결합해 5·18 수정주의, “‘반골기질을 가진 홍어들의 폭동으로 5·18을 깎아내린다. 이들에게 여성은 이기적이고 의존적이며 계산적인”, 더하여 개념도 없고 안보의식마저 없는 김치녀()’이다. 진보좌파는 북한 인민들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위선적인 인간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일베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20~30대 남성 몇몇을 인터뷰한 결과, 온라인상에서 날 선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던 이들에게서 불안공포를 읽어낸다는 사실이다. 청년세대는 지금 변변한 직장을 찾기도, 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보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못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불안의 한 요인이다. 일베에게 한국 여성 일반사랑의 이상을 물질화하는 존재다.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하고, 병역의무 같은 공동체적 책임도 회피하며, 일상생활에 전혀 필요 없는 물건, 즉 명품백에 집착하는 존재가 여성이다. 불안과 달리 공포의 원천은 외부의 적, 즉 북한이다. 애초에는 연민과 답답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친북은 무식한 거고 종북은 나쁜 거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촉발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일베가 대표선수일 뿐, 일베식 혐오는 이미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에게 무시당하느니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택한 남성들은 각종 범죄를 통해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여성가족부라는 전통적인 의 수장”, 즉 장관에 대한 날 선 공격은 시도 때도 없었다. “젠더 갈등, 극한 대립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도 성토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베식 공격은 정치권으로도 유입되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일베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정돈된 형태의 인물, 내로남불과 냉소를 번갈아 던지면서 한국 정치를 희화화한다.

 

저자는 일베식 혐오의 기원과 구조를 밝힘으로써 일베식 이죽거림과 선동가의 현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방법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보통 일베들의 시대>는 혐오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하는, 제법 의미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한겨레

 

보통사람들의 일베화어느새 주류가 된 혐오문화

농담이나 드립에 혐오를 실어나르는 일베식 문화, 여성 혐오와 능력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일베식 논리,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징징 대지 말라고 누르는 일베식 내러티브는 온라인 공간을 넘어 현실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사회학 연구자 김학준은 이를 보통 일베들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게티이미지

 

일베(일베저장소)는 현재 온라인 커뮤니티로서는 별 의미 없는 존재가 됐다. 이용자 숫자나 게시물 건수, 영향력 등 어떤 면을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디시(디시인사이드)에서 발원해 일베가 완성한 특정한 문화, 즉 농담을 형식으로 하고 혐오를 내용으로 하는 문화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온라인 공간을 넘어 현실 정치에도, 일베 이용자가 아닌 젊은 남성들에게도, 혐오 표현뿐만 아니라 능력 공정 팩트 등의 단어에도 일베식 문화와 논리가 배어들었다. 일베는 쪼그라들었지만 일베화는 오히려 전면화됐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라는 책 제목은 과거 일베충으로 불린 이들의 특정한 문화와 사상이 어느새 보통 시민들의 상식과 논리, 문화 등에 광범위하게 결합된 상황을 가리킨다. 사회학 연구자인 김학준은 서문 왜 다시 일베인가에서 페미니즘 백래시, ‘20대 남자현상,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며 전교 1운운하는 카드뉴스를 내건 젊은 의사들, 이화여대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 반대 집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 등을 일베가 보통이 된 시대의 증거로 제시한다.

 

저자는 책 뒷부분에서 이준석 현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일베적 정치의 탄생, 일베의 주류화라고 그 의미를 분석한다. 그는 이준석은 일베의 사고방식을 그 누구보다 현란한 언어로 구현하며 을 설정하고 농락하는 최고의 공격수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산발적으로 분출되던 혐오와 불만이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정치인에 의해 정당한것으로 인정받고, 그 인정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동원과 승리라는 경험을 축적하기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책은 김학준이 2014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을 대중서로 개고한 것이다. 일베의 역사와 계보를 훑는 것에서 시작해 2011202010년간 일베에 게시된 글 77만여건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일베에서 주목받은 주요 게시물에 대한 담론 분석, 일베 이용자 10명 심층 인터뷰, 그리고 일베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루리웹과 비교 등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일베의 주요 혐오 대상이 여성, 진보좌파, 북한, 호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베의 논리와 도덕을 추출한다. 이어 일베식 문화가 정치화, 주류화되는 현상을 조명한다.

 

이 책의 성과는 일베를 벌레나 괴물로 취급하는 안이한 시각을 깨고 일베가 실은 매우 단단하고 흡인력 있는 문화와 사상이라는 점을 밝히는 한편 일베식 문화와 멘털리티가 온라인을 넘어 정치·사회적으로 전면화하고 있음을 드러낸 데 있다.

 

일베의 부상과 영향력, 확산 등은 웃음 코드를 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은 웃음과 농담에 혐오를 실어 나르는 놀이를 개발했다.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수많은 패륜적 혐오 발언이 즉흥적인 농담’, 드립일 뿐이라는 가림막 아래 열광적으로 공유되었다.”

 

일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동에 대한 증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광우병 촛불집회에 대한 반감에서 출발한다. 일베의 등장은 혐오의 자유를 말하는 이들의 등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일베 이용자들의 분노가 무임승차자를 향한다는 점은 이들이 신앙하는 가치가 노력주의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저자는 일베를 일베이게 하는 핵심을 평범 내러티브라고 본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누구나 겪는 것이고 따라서 특별히 말할 이유도,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고통을 평범함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평범 내러티브는 약자와 소수자, 희생자들의 고통 내러티브를 억압한다. 고통을 들어달라고 징징대는 것은 스스로가 약자임을 자임하는 꼴에 불과하며, 이는 곧 자기경영에 실패한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가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당 지지 성향의 커뮤니티 루리웹을 분석해 일베가 보여주는 여성 혐오와 능력주의가 일베만의 멘털리티가 아님을 보여준다. 루리웹 이용자들은 여성 이슈에 적대적이다. 이 이슈를 건드린다면, 화자가 문재인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비난이 몰아친다. 루리웹에선 사법시험의 공정성을 말하는 댓글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인천국제공항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도 분노 어린 반응이 줄을 이었다.

 

저자는 일베화를 전통적인 평범한 남성들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불안과 불만이 혐오와 냉소로 표출되는 것으로 본다. 그는 평범이 도달 불가능점이 됐다며 평범하게 사는 게 가능한 사회를 혐오 사회의 문을 다시 닫는 대안으로 제시한다./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혐오_주의 김학준 등저 | 알마 | 201612

 

목차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박권일 _7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김학준 _35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 허윤 _73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위근우 _111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_있을까? 이준일 _155

 

 

출판사 리뷰

혐오의 증상을 파악해야 한다

 

소셜 키워드를 통해 사회 현상을 읽고 지금 바로 여기를 바탕으로 미래를 탐구하고자 하는 알마 해시태그는 그 첫 번째 키워드로 혐오를 택했다.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혐오의 감정을 사회학, 정치, 여성학, 대중문화, 법이라는 범주로 분석하며 그 실체를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혐오의 감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점을 그려보려 했다. 혐오주의는 사회학자 박권일의 헬조선담론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는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로 시작한다.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 혐오가 나쁘냐는 물음에 혐오는 나쁜 감정이니까 나쁘다거나, “혐오가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게 만드니까 나쁘다라고 답하곤 한다. 이런 대답들은 분명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대답들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성격을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 혐오라는 정동(affection)에 집중할수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우를 범하기 쉬워진다. (중략)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 나가다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_pp.89, 1#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중에서

 

박권일은 혐오라는 감정을 사회악으로 여기고 무조건 꺼려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상으로 보고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특히 헬조선 담론을 예로 들며 혐오가 만연하는 현상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란 용어의 등장과 특징, 그것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응을 짚어나가면서, 특히 헬조선 담론과 밀착해 있는 단어가 미개임을 주목한다. 인터넷 게시글(트위터·일간베스트 저장소)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헬조선미개탈출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빈도가 높았다는 통계(p.18)가 있는데, 그는 더럽고 추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 모두 미개로 수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헬조선 담론에 자주 등장하는 문명미개라는 이분법이 결국 전형적인 식민주의 사고방식임을 지적하며, 혐오는 다른 어떤 정서보다도 식민주의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오염을 거부하는, 순수함과 완전함에 대한 환상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혐오를 일으킨다. 식민주의적 인식은 식민주의적 감정을 낳고 그 감정은 다시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를 더욱 벌려놓는다. 대상에 개입할 수 없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남는 것은 자기모멸뿐이다. _pp.24~25,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중에서

 

그는 헬조선 담론의 원인을 사회에 만연한 과잉능력주의라고 본다. 과잉능력주의는 평등을 어떻게 달성할지보다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할지에 몰두해온 사회의 산물이며, “사회 곳곳에 넘실대는 혐오는 바로 우열의 논리, 과잉능력주의라는 토양에서 배양되어 확산되어온 감정(p.31)”이라고 말한다. 과잉능력주의라는 색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열등하고 피해야 할 것들로 보인다. 이것이 곧 혐오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분노와는 다른 증상이다. 분노는 주체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감정인 반면, 혐오는 무조건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멀리 떨어뜨리려는 감정이다. 결국 사회 모순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한 헬조선론이 분노가 아닌 혐오라는 정서로 나타나는 현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우리 사회가 현실을 혐오하고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서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순수한 시민에 의한 정치혐오

일베에 관한 석사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회학자 김학준은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를 통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정치혐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21세기적 정치혐오의 원전으로 소환하는 사건은 바로 2008년 촛불집회다.

 

그는 그 당시 다음 아고라에 공유된 루머 중 여대생 사망설소화기남사건에 주목한다. 우선 여대생 사망설의 경우, ‘순수한 촛불시민을 상징하는 여대생과 이를 군홧발로 짓밟았다는 폭력경찰의 이분법적 의미체계는 결국 국가의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불신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저자는 이것이 순수를 갈망하는 참여 민주주의와 광장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부추기며 이후 한국에서의 정치적 참여에 심각한 제약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소화기남 사건의 경우, 시민들은 촛불집회에서 경찰을 향해 빨간 소화기를 휘두르는 남자를 프락치로 몰며 그가 촛불시민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의 폭력성은 촛불집회의 대의를 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형성된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기정체성이 외부 세력이라는 유령을 빙의시킨 장본인인 동시에 이해관계를 둘러싼 협상이라는 정치 행위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고, 시민들로 하여금 상황에서 비롯된 수많은 우발적인 행위들에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켜 결국 정치 자체에 역겨움을 느끼고 혐오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여대생 사망설의 경우와 같이, 소화기남 사건 역시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의례에 참여한 시민들의 의미 체계와 공명한다는 점에서 무가치한 유언비어로 치부해서만은 안 된다. 또한 67일 당일 100만에 이르는 시민들이 운집한 현장에서 돌발행동이 생기지 않을 이유 또한 없는 것도 사실이다. 수십만이 모인 집회 현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혼란과 통제 불가능성은 대규모 집회의 본질이며 한계이다. 하지만 촛불시민이라는 높은 이상은 이러한 흥분과 돌발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높은 수준의 자기통제와 순수성에의 의지는 역으로 너무나 쉬운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근대의 합리성이 친밀성의 배신을 가져온 것처럼, 촛불의 이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_p.49,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중에서

 

또한 김학준은 일베정의당 탈당 사태사례를 통해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존재하는 정치혐오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한다. 일베 이용자들은 무엇보다 평범함을 희구한다. 그들이 보기에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자들은 국민의 자격이 없다. 일베 이용자들에게 있어 개개인이 겪는 고통을 공개적으로 모여서 제시한다는 것은 애초에 스스로를 약자로 인증하는 행위에 불과하다(p.56). 이렇듯 일베가 합리적 시민이라는 믿음에 회의를 갖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명 정의당 탈당 사태는 정치 주체인 시민의 정의로움과 순수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 인해 정치혐오가 유발된 경우다. 성우 김자연 씨 넥슨 계약 해지 논란에 관한 정의당의 논평이 정의당원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결국 대규모 탈당 사태로 이어졌다.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현재까지, 아마도 앞으로도 지속될 젠더 논쟁의 핵인 메갈리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남성들의 반발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치적 개인주의가 꿘혐(운동권 혐오)’으로 구체화되고 운동권 및 진보 세력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순수함에의 의지가 빚어낸 집단지성은 결국 갈등과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파시즘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제는 촛불이 만들어낸 좌절과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로서의 갈등과 차이를 인정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순수함에의 의지가 빚어낸 집단지성은 직접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갈등과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파시즘에 가깝다. 지금 이 자리에 실재하는 갈등을 도외시하고 반대자를 불순하고 불의한 이들로 매도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부정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듯,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갈등, 경쟁, 리더십, 조직이며, “문제는 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계를 조직하는 방법이다. _p.69,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중에서

 

남성성의 불안으로 야기되는 여성혐오

이어 여성학자 허윤과 대중문화기자 위근우는 여성혐오를 주제로 각기 글을 풀어나간다. 허윤은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로 인해 남성 역차별론이 대두되며, 이로 인해 여성혐오가 더욱 짙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면 여성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그저 착각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한국은 세계경제포럼 성평등지수에서 115위를 차지하며, OECD 가입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여성의 범죄 피해 사례도 갈수록 증가해 여성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생계부양자라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패배가 가시화되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강자로 여겨진다.

 

여성들의 미러링을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이들은 메갈리아가 남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 적대는 일베나 메갈리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암탉이 울면 망한다와 같이 부정적인 것을 여성화한 한국 가부장제 문화의 역사와 같이한다. 메갈리아가 현재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가상의 적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남성혐오라는 것이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온 적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지배적 허구라는 판타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약한 남성은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통해 주체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화의 길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흙수저론과 같은 청년 세대의 불안은 곧 남성의 불안으로 치환되고, 이것이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_p.90,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중에서

 

저자는 이런 점에서 남성 청년들이 자신들을 '약자'로서 인식하고,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등 소수자들과 공감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더 이상 가부장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남성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질문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문제의 중핵에는 남성성이 있다. 더이상 가부장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남성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그 자체였던 남성들이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성을 체험하고 있다. ‘약자인 남성들이 소리치듯,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남성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협을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남성들 사이의 차이를 가시화하고 공론장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와 재분배에 대한 요구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게일 루빈이 여성 거래에서 정치하게 논한 것처럼, 성차와 정치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직업과 노동권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투쟁이며,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는 정치의 장소이다.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차를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_p.108,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중에서

 

위근우는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를 통해 언론, 예능, 잡지에서부터 웹툰과 인디 신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가 고착화된 대중문화를 비판한다. 특히 그는 한국 예능은 여성의 패배를 원한다에서 지난 2월부터 방영했던 MBC 일밤진짜 사나이-여군특집시즌4를 예로 들며, 더 이상 여자인 티도 내지 못하는 여성 연예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위근우는 군대라는 특수 조직에 사회인으로서의 방송인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건 분명 여성 출연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남성 출연자들과 달리 여성 출연자들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적이라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한다. 모든 잘못, 미숙함이 은연중에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김여사라는 악의적인 호칭처럼, 운전 미숙을 여성적인 특징으로 규정하는 여성혐오적인 호명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기존의 예능이 예쁜 여성 출연자를 장식처럼 다루거나 반대 케이스를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했다면, 이제는 여성의 장식적인 요소는 강조하되 또한 그 이미지로부터 일탈하길 바라는 것이 문제임을 비판한다(p.137).

 

기존의 예능이 예쁜 여성 출연자를 장식처럼 다루거나 반대 케이스를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했다면, 이제는 여성의 장식적인 요소는 강조하되 또한 그 이미지로부터 일탈하길 바란다. 물론 딱 남성들이 원하는 만큼만. 어린 걸그룹 멤버들이 무언가를 복스럽게 먹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털털함을 증명해야 했던 JTBC 잘 먹는 소녀들이나 걸 그룹 멤버들이 타의적으로 사십대 아저씨 출연자들과 야자타임을 해야 하는 JTBC 아는 형님의 불편한 순간들은 정확히 여성특집과 짝을 이룬다. _p.137138,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중에서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

마지막으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준일은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_있을까?에서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에 관해 논한다. 그는 현재 존재하는 명예훼손죄모욕죄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명예를 추락시켰을 때 처벌하는 범죄이므로 특정한 집단을 표시하여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명예를 추락시켰을 때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집단에 대한 모욕적 발언도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표현의 자유와의 충돌이다. 특정 집단을 모욕하는 발언을 통제하고 제재하는 법적 조치가 가장 기본적인 인권으로 열거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도 유럽인권협약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제한될 수 있다고 한다. 익명이든 실명이든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기본권임에는 틀림없지만, 혐오표현을 처벌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도 표현을 모욕적 표현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형법의 모욕죄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다(p.177).

 

인간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므로 타인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합리적인 범위에서 제한되는 것만으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불법적으로 침해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최근에 유럽인권재판소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 역시 제한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편협함에 근거한 혐오를 전파하거나 선동하거나 고무하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형태의 표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후적인 제재를 가하고, 심지어 사전적인 예방조치까지도 취해질 수 있다고 한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관용과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사실에 대한 존중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유럽인권재판소는 고등학교 사물함에 동성애를 비난하는 전단지를 배포하던 기독교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스웨덴 법원이 당사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_pp.178179,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_있을까?중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에 대해 법이 개입할 경우 그 방식은 형사적 제재(형벌)의 방식, 민사적 제재(손해배상)의 방식, 차별시정의 방식 등 다양하게 구체화될 수 있는데,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입는 인격적 피해를 우선시킬 것인지, 혐오표현의 주체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포함된 중요성을 우선시킬지를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구체적인 법적 규제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끝맺는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저 | 창비 | 201907

저자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에 관해 가르치고 연구한다. 이주민, 성소수자, 아동·청소년, 홈리스 등 다양한 소수자 관련 현안에 관심을 가지고 현장과 밀접한 연구를 통해 사회에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법·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사회복지와 법을 공부하고 서울특별시립아동상담치료센터, 헌법재판소 등 기관에서 일했으며, 이주민의 기본권: 불평등과 윤리적 영토권」 「차별선동의 규제: 혐오표현에 관한 국제법적·비교법적 검토를 중심으로등 다수의 연구논문과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공저) 인권행정 길라잡이(공저) 등을 쓰고, 헌법의 약속』 『사회보장론 입문을 번역했다.

 

목차

프롤로그 당신은 차별이 보이나요?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1장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2장 우리는 한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4장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5장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6장 쫓겨나는 사람들

7내 눈에는 안 보였으면 좋겠어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8장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9장 모두를 위한 평등

10장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에필로그 우리들

감사의 말

참고문헌

 

출판사 리뷰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입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장애인의 시외버스 탑승에 대한 토의 수업에서 한 학생이 한 말이다. 일부러 장애인을 차별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애인이 돈을 더 내야 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질서 속에서 바라보면 버스의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장애인의 결함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다. 애초에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속도와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이미 편향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차별을 보지 못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이유를 1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룬다. 먼저 모든 사람은 가진 조건이 다르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하려 한들 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차별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특권은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그때 발견할 수 있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외버스에는 휠체어 리프트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타인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 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다.

 

그에 더해 저자는 우리가 때에 따라 특권을 가진 다수자가 되기도 하고, 차별받는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개인이 어떤 점에서 소수자라고 해서 늘 차별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런 교차성은 차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 최근 예멘 난민 수용 논란이 일었을 때, 예멘의 성차별적 문화를 이유로 더 거세게 난민 수용에 반대한 이들이 소수자인 여성이었다는 점을 예로 들며, 차별에 대한 논의를 더욱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차별적인 질서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불평등을 유지시키면서, 차별은 고착되고 구조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날카롭고 다각적인 문제제기를 따라가다보면,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차별을 전혀 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우리 사회의 차별감수성은 10~20년 전에 비하면 놀랄 만큼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차별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물으면 어떤 차별은 합리적이라고, 또 어떤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차별이 지워지거나 공정함으로 둔갑되는 메커니즘을 살핀다.

 

예를 들어보자. 코미디 프로그램의 바보캐릭터가 장애인 비하라는 문제제기를 하자 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냐고 말한다. 학생 성적별로 수준에 맞춘 교육을 제공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학급을 우열반으로 나누는 것이 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노키즈존논란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사업주에게는 손님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저자는 차별에 대한 이런 논란들을 차근차근 해부하며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인간 심리와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가 자연스럽게 평등과 차별을 탐구해볼 수 있게 한다. 애초에 바보캐릭터는 왜 웃긴지, 비하적 농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지 되묻는다. 우열반 편성처럼 다른 것은 다르게대우한다는 능력주의원칙은 얼핏 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획일적인 평가기준으로 승자가 모든 기회를 독식하고 패자는 박탈감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노키즈존이 사업주의 정당한 권리라면 노장애인존도 괜찮은가? 사업주가 손님에게 예의를 지켜달라고 요구해도 된다고 해서 어떤 손님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특정 집단전체를 거부해도 괜찮은 걸까? 토론 수업에 참여한 듯 생생한 질문과 대답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몰랐던 차별적인 생각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다!

1부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살피고 2부에서 차별이 숨겨지는 작동원리를 짚었다면, 3부에서는 이러한 차별과 혐오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살핀다. 각종 논쟁과 실험을 풍부하게 제시하며,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한걸음의 대안부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폭넓게 살핀다. 집회·시위·시민불복종처럼 차별에 도전하는 노력들이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충돌과 긴장을 다룸으로써,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목소리에 어떻게 귀를 기울여야 할지 생각해본다. 나아가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논쟁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보편적이면서도 다양한 평등의 원칙은 가능한지, 그 원칙에 어떻게 합의할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의 의미를 평등을 실현하는 해법의 하나로서 짚는다.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우리의 생각은 시야에 갇힌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남기는 메시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uIUPXDkV9c&t=86s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그들이 아닌 우리라는 공존의식다양성 인정해야

 

강릉원주대학교 김지혜 교수가 차별에 대하여 2019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책을 출판한 후 현재까지 63쇄나 발행을 하였으니, 차별에 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저자는 혐오 표현에 관한 토론회에서 결정장애란 말을 무심결에 사용하였다가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부터 결정장애란 말에서 장애는 열등함, 부족함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비하 발언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차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차별은 악의적이거나 의도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수성 부족이나 무심결에 고정관념이 내재화되어 차별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도 한몫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차별 의도가 없이 차별을 하는 사람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명명하였다.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고 하든가,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져요”, 여교사에게 여교사가 신붓감으로 최고지요라는 말들은 듣는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칭찬 같지만 아직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장애인에게 현재는 희망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며, 여교사는 결혼지상주의의 대상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용어를 통해 선량하다차별이 상호 연결되기 어려운 단어임에도, 의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차별에 대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차별을 당하는 입장을 지지하고 적극 참여하여야 함을 지적한다.

 

여성인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며, 남성인권운동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여성평등 정책을 역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도 국외의원이 되고 대통령도 되니 차별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능력이 없음에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특혜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이 안전을 외치면 남성은 모두 성범죄 취급을 받는 기분을 느끼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며, 권리를 호의로 해석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특권은 특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평등이나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하나 마련하거나 사례가 나오면 평등해졌다고 믿는다.

 

이를 토크니즘(토큰을 지불한 효과)이라고 한다. 장애인 중에 위인이 나오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잘못된 시각에서 평등을 바라보는 것을 기울어진 운동장 효과라고 하는데, 자신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상대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익 가능성보다 손실 가능성에 더 민감하여 가진 자의 기득권이 힘을 잃을까 역차별을 주장하는데, 이를 손실 회피 편향이라고 한다.

 

여성이면서 장애인, 이주민이면서 여성 등과 같이 약자가 중첩될 경우, 장애인 정책 따로 여성 정책 따로는 시행하지만, 장애여성 정책은 없다.

 

이주민이 사회적 혼란과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며 자신은 극우파가 아니라 서민이라며 자신의 목소리가 정당함을 힘주어 말하지만, 이주민으로 인한 국내 여성의 안전만 이야기하지 이주민의 여성문제는 눈을 감아 버리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이를 교차성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그들로 보기 때문이며, ‘우리로 보면 해결될 수 있다.

 

계층별로 사회적 정체성을 갖기 마련인데,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이 결과적으로 고정관념대로 되게 만든다. 말이 씨가 되듯이 되는 것이다. 이를 고정관념의 내면화로 인한 고정관념의 압박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여자는 원래 그래란 말과 같이 실제로 약자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입사 시험에 정장을 입듯이 때로는 상대의 편견에 맞추어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의 예로 흑인 아이에게 흑인 인형과 백인 인형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백인 인형을 고른다. 새장의 새는 철망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의 철망 중의 줄 하나를 보기 때문에 갇혔음을 모르듯이, 인간도 전체적 상황이 아닌 한 가지 상황에 집중하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이는 약자의 사회적 고정관념의 내면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개그에서 맹구는 웃음의 소재이고 유머의 수단이라 여길 수 있으나, 사람들은 자신보다 부족한 계층을 대상으로 웃기 때문에, 이런 우월성 이론에 의해 차별적 유머를 던질 때 경시풍조가 조성되는데, 이를 편견규범이론이라고 한다.

 

똥남아’, ‘급식충등 인간의 비인격화한 신조어들은 웃음문화라는 명분 아래 편견이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남성이 김치녀라고 말할 때 여성은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을 느끼지만, 이에 대하여 여성이 한남충(한국남성)’아란 말을 하는 것은 분명 강도가 다르다. 이것은 호명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이름을 바꾸어도 편견은 바뀌지 않는다. 잠시 지워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명권력을 타인에게 주지 않고 당사자가 스스로 가지면서 해석을 긍정적으로 전유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농인’, ‘맹인’(: 한자는 눈이 망가짐을 의미), 퀴어(성소수자, 괴기하다는 의미)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정치인이 상대 정당인에게 귀거 먹었다라고 하면 장애인에게 한 말이 아니므로 비하 발언이 아니라고 사과하면서도 변명을 하는데, 이러한 비하는 약자계층을 지칭하는 데에서 가져오는 것이지 권력을 가진 사회 현상에서 가져오지 않는다. 조롱에 장애인을 부정적으로 빗대는 것이므로 비하가 맞으며, 비하 언어로 차별하는 것에 대응하는 방법은 웃어주지 않고 무반응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소극적 자세로 말한다.

 

편향된 능력주의는 차별은 정당하다고 하는데, ‘무지의 장막을 하여 계층적 조건이 모두 완전히 지워진 후 능력만을 본 것인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입사 시험에서 아무리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고 하여도 가려진 정보들은 간접적으로 추리할 수 있어 반영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결과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양성의 인정에서 상호 존중되지 않고 흡수되거나 하나를 더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다문화아동과 같이 구분을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는 차별을 조장할 뿐이다. 편의시설 미비나 거부로 공공장소에 입장할 수 없다면 그 공간에는 거절당한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잘 보지 못하는 이유다. 여성이 인구수가 소수가 아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수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자가 싫다고 할 때는 차별이 일어난다. 상사나 교사가 특정 사원이나 학생을 싫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과 같다. 성소수자 문제도 문재인 전대통령이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싫다고 한 적이 있는데,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도 성소수자에 비해 권력자이므로 싫다는 표현은 차별의 표현이다.

 

그리스 시대 아고라는 민주의 상징이지만, 그곳의 입장 자격은 제한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 영토 안에 권력의 배분이 평등하지 않으면 반민주적 폭정이 있는 것이다. 안전과 질서라는 말은 인권을 제한하기도 하는데, 원래 인권이란 단어는 폭정에 저항하는 초법적 행동에서 유래한 용어로,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인 행동이라면 시민불복증은 인권의 문제 제기 방식으로 말 걸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단순히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내렸을 뿐인데, 이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다수자는 소수자를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는데, 왜 소수자는 순화하여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심지어 완전히 판을 뒤집는 혁명도 모두를 부정하고 파괴할 수도 있으며, 그 책임보다는 효과에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무질서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하지만 촛불집회로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다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세상을 바꾸려 동참한 사람도 있고, 이를 정치에 활용하여 권력을 잡는데 사용한 자도 있고, 그 권력을 평등하게 나누지 못하고 독식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차별적 시선으로 인권운동에서 자신의 피해 입장만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의 인권운동이라 하더라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평등을 쟁취하는 권력이 소수에게만 집중화되거나 비폭력이지만 폭력보다 더 타격을 주는 철저한 전략에 매몰된 기술자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여 이를 드러내기 위해 고의적 괴롭힘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가하는 의도된 심각한 피해를 정당화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시민과 정치인의 따가운 시선만 언급한 것은 아쉬움이다. 행사장 점거처럼 약자를 대변하여 약자가 아닌 이미 권력자로서 이벤트를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보편성과 다양성에서 주류집단의 입장을 보편성으로 착각하기 쉽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은 다름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 모색과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말이다. 차이 자체를 차별의 정당한 조건으로 인식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모두를 위한 인권에 책임이 있으며, 평등을 향한 운동에 동참하여 누구나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권보장을 법과 제도로 접근하는 국가 책임과 각자 개인이 이행하고 차별행위 시 져야 할 책임으로 나눌 수 있다.

 

인권존중과 권력 배분은 공존 사회를 이룰 때에 가능해지며,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그들이 아닌 우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공존이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인은 우리집, 우리동네, 우리아저씨 같이 우리를 너무 즐기며 소유나 편으로 인식하는데, 이제 공존의 의미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철학이 차별을 말하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차별 감정의 철학을 읽고

 

철학은 오만하다. 과학도 아니면서 본질을 이야기하고, 심리학도 아니면서 내면을 분석하고, 예술이 아니면서 미를 이야기하고, 윤리학이 아니면서 도를 이야기한다. 근대 철학은 하층 계급이나 소수자들의 차별을 외면하면서 특정 지식 집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동양철학은 모든 것을 버린다면서 모든 것을 다 얻으려 하고, 세상을 품은 듯하면서 세상을 비웃으며 조소하며 군림하는 꼰대 역할을 하였다.

 

차별 감정의 철학을 저술한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칸트 전문 독일 유학파 철학자이다. 철학에서 차별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어서 저자도 심리학적 접근과 언어학적 접근을 섞어 고정관념을 제거하고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이상적인 완전한 비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근대철학과 사회구조적 차별의 인권적 접근은 철학에서는 다루지 않으므로, 개인적 감정 측면에서 차별을 철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알아보자. 그것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지, 꼰대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차별문제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차별을 했을 때에도 불편하고, 혹시 차별을 통해 비난 받지 않을까 싶어서도 늘 불편하다. 평소 교통사고를 조심하듯이 긴장되고 초조하게 만든다. 차이처럼 차별 감정도 인간을 다채롭게 하는 요소인데,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인간은 에로스처럼 공격 충동은 본성이라고 프로이드가 말했다. 적이 없는 곳에는 동료도 없다. 단순히 구분 짓기에서, 비교하기, 그리고 공격하기는 차별로 연결된다. 장애 문제는 자신이 그것에 속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문제가 아니라 부채를 지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장애는 제약을 받는 자와 제약을 해결할 책임을 지는 두 집단이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아이는 학생이고 학생다움은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당연히 여기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고정관념을 만들고 차별의 최대의 적이 된다. 그러나 차별을 이슈화하고 열광하는 상태도 위험하다. 차별을 역이용해 권력을 더 가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차별 감정을 다룰 때 중요한 요소는 자기비판 정신이다.

 

차별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며, 불쾌에서 출발한다. 장애를 하나의 문화다양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의 자식이 장애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정상화는 장애인을 정상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애 자체도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불쾌는 수동적 감정이지만 혐오는 능동적 감정이다. 포용의 통합사회는 혐오가 아닌 정상화 감정이 능동적으로 인정될 경우 가능할 것이다.

 

문이 바람에 의해 세게 닫히면 !’ 하고 놀란 제스처를 하는데, 자신이 물을 세게 닫은 것이 아니라는 정상의 증거(신호)로 무브와 토크를 한 것이다. 실례를 하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쾌감을 수정하려는 행동이다.

 

왕따는 누군가를 재물로 삼는 것이다. 차별도 왕따처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정하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러함을 현실을 가르쳐야 한다. 인권주의나 평화주의자니 이념적 입바른 소리보다 사실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은 더욱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옳다는 늘 평가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열화나 권력 관계는 차별을 조장하므로 없애야 하는가? 입학시험은 능력자를 선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권력은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평온하게 균등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나카소네 총리가 미국은 흑인이 있어 지적 수준이 낮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미국국민들은 총리에게 화살을 퍼붓고 일본인을 만나면 토마토를 던지는 등 괴롭혔다. 총리의 차별만 다루고 아무도 일본인이 당하는 괴롭힘을 차별로 다루지 않았다.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 되는 걸까? 싫어함을 받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며 반성을 해야 한다. 학생에게 상냥함이나 배려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잔혹함을 가르치며 차별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경멸은 혐오보다 더 의식이 강한 감정이다. 차별과 공포가 뒤따른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니그로를 불행한 인종이라며 나태하고 잔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천부적 권리는 백인에 한해 적용한 결과이며, 문명의 빛을 전한다는 핑계로 억압하는 것은 언젠가는 위협이 될 것이라는 공포에서 차별을 만든다. 차별은 사실관계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가치관계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계급사회를 선호한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의 집단 공격은 악을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복수이다. 독일 나치를 추종한 국민들도 자기비판 정신이 결여된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러므로 강경 차별 반대 운동가들도 위험한 존재이다.

 

혐오나 불쾌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해야 할 감정이지만 경멸은 자연법에 의해 올바른 행동을 하는 자에 대한 감정으로는 말살해야 할 감정이다. 차별 감정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할 수는 없지만 그 표출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위층이 상위층을 경멸할 경우에는 반드시 도덕적 탈을 쓴다. 명문대를 나왔으면서 윤리의식이 없다는 식이다. 능력과 윤리의식은 별개이다. 고상 하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을 고상하지 않게 만들어 자신의 고상함을 확고하게 만든다.

 

투영은 차별을 조장하는데, 성욕을 여성에게 투영해 여성이 먼저 유혹했다는 말을 만드는 것과 같다. 차별감정의 뿌리에는 공포가 있다. 선량한 사람은 성 안에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성 밖에 사는 방식이 추방된 늑대와 선량한 양을 만든다.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피차별자는 처음에는 쥐를 제거하지만 나중에는 피리로 아이들을 유인해 복수를 한다.

 

마녀사냥은 재앙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고, 피차별자에 대하여 공포와 경외의 이중구조가 있다. 그 두려움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죽을 사자를 피하는 것, 길일을 정하는 것, 말이 씨가 된다며 수험생 앞에서 떨어진다는 말을 삼가고, 결혼식에서 자른다는 말을 삼간다. 경외가 없어지고 공포만 남을 때 피차별자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차별을 없애려면 악을 없애면 된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발전에는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긍심, 자부심, 허영심, 오만, 긍지 등의 감정은 우월감이라는 점에서 고매한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지만, 오만한 사람은 미워하고 질투한다.

 

니체는 고귀함괴 비천함을 대립하여 설명한 바 있는데, 고귀함을 가진 사람은 비천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하류층에 무관심하지만 비천한 사람은 항상 부족한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를 자각한다.

 

칸트는 이성이 존재하면서도 동물이기도 한 대단히 불안정한 인간존재를 존중하라고 했다. 저자는 미인도 아니지만 홀몸으로 고생하여 자식을 키웠다는 식의 마이너스 자부심에 대하여 강렬한 우월감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지적장애인은 법적 보호를 받지만 경계성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철학은 포기한 이런 사각지대에 섬세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대학생과 고졸 기술자가 방송에 나와 대학생이 고졸에게 이미 가는 길이 정해졌으니 부럽다거나, 대학에 들어갔으니 대단하다는 말에 뭘요?’라는 반응은 내면에 깃든 우월감이다.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귀속본능이나, 가족지상주의 등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보장하는 구조이다. 인간관계가 친밀한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함부로 개인의 문제에 개입하는 사회다. 그리고 향상심을 유도하기 위해 상을 주는 것도 차별을 조장한다. 성과주의도 마찬가지다. 나치가 독일 국민에게 학살을 정당화한 것은 향상심에 호소한 결과다.

 

사회의 문제는 노력하느라 지쳐 이상행동을 하는 자가 아니라, 노력해도 안 되거나 노력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로 인한 현실에 지친 사람에 의해 문제가 발생한다. 불리한 사람은 공평하게 경쟁하면 질 것이 뻔한데,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한다. 여기에 차별문제가 없다고 잘못 생각한다.

 

칭찬은 동기를 부여하지만 칭찬은 차별의식을 만든다. 진정한 동기는 칭찬에 냉담해야 한다. 성실성은 감수성 면에서의 성실성과 신념 면에서의 성실성이 있다. 신념이 지나친 사람은 차별주의자가 되기 쉽다. 시선은 권력관계를 만들며 시선만으로도 차별을 할 수 있다.

 

언어는 모종의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다. 차별어는 언어 다양성을 해칠 수 있어 법으로 금할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남자라고 말하면 남자는 사람의 의미인데, ‘좋은 여자라고 말하면 남자에게 잘하는 여자로 인식된다. 장애인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당신이 장애인이어서 존경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험을 알면서도 숨김없이 직언하는 것을 그리스어로 파르헤지아라고 한다. 이것이 선의 근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칸트는 최고의 선은 성실성과 행복의 합치라고 하였다. 히로아키는 차별원론에서 내 안의 권력과 마주하여 감수성이나 신념에 대한 성실성을 소중히 하면서 차별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열어서 파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칸트는 이러한 이성비판이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신이 부과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법이나 운동이 아니라 선을 추구하는 자기비판적 이성이 진정한 차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차별을 세상에서 없애려면 모두 철학자로 교육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차별에 대해 공포나 거부감으로 피로해질 수 있다는 점, 외부의 힘으로만 막을 것이 아님은 분명 철학이 주는 깨우침일 것이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으로 차별이 생산되었다고 하더라도 출발은 인간성에 있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 에이블뉴스 2022-06-07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없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배우 윤여정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뭉클한 장면을 연출했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 코다의 농아인 배우 코처를 호명하며 수어로 축하하고, 코처가 수어로 소감을 밝힐 수 있게 트로피를 대신 받아들고 배려한 모습이었다.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도 두 손을 반짝이는 수어 박수를 보내며 감동을 끌어냈다. 그즈음 국내에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둘러싸고 논쟁이 뜨거웠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며 장애인들의 시위를 비문명적이라고 쏘아붙이자,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장애인의 날을 맞는 오늘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은 없었다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의 말처럼, 21년째 투쟁하고 있는데도 장애인 이동권 보장 확대가 더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다.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장애인의 날만 반짝 관심을 갖고, 정치인의 혐오 발언을 부각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관행이 어쩌면 21년을 싸워야 했던 이유인지 모른다. 장애인 10명 중 7명이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한다는 통계는 최소한의 권리인 이동권 보장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말해준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누군가는 오랜 시간 읍소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현실은 야만적이기까지 하다. 미국 장애운동의 대모인 주디스 휴먼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대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장애인뿐 아닌 언제, 어디선가 발생할지 모르는 내일의 장애인을 위해서도 중요한 활동임을 대중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차기 정부에 제안한 핵심 인권과제를 설명하며 첫 번째 과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과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 차원의 공식 선언을 주문했다. 여성과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향한 혐오표현이 갈수록 심각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진단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장애인 차별적 발언을 보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넘어야 할 높은 벽을 실감한다. ‘외눈박이’ ‘정신분열적’ ‘절름발이같은 발언이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언론은 자유로울까. 박영흠 협성대 교수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포퓰리즘 시대에 언론이 사실의 속기사가 돼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정치인의 말을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쓰기만 해서는 안 되고, 발언의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적극적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에게 차별과 혐오의 발언을 가려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일침이다. 일부 언론이 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맥락을 심층보도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때로 시민불복종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도가 된다고 했다. “사회가 동등한 사람들 간의 협동체제로 해석되는 경우에는, 심각한 부정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도화선이 된 로자 파크스사건은 이런 시민불복종의 대표적 사례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에 맞서 파크스가 저항한 것을 계기로 흑인들의 버스탑승 거부가 1년 넘게 지속되며 인종분리정책에 맞섰다. 결국 법원은 버스 안 인종분리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시민으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인 이동권 요구 목소리를 장애인 배제 정치로 혐오와 차별로 맞대응하는 정치는 이제 끝나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없다./한국기자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