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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법흥리 수리부엉이, 장단콩웰빙마루 사업으로 서식지 파괴 위기

by 이성근 2017. 6. 17.

법흥리 수리부엉이, 장단콩웰빙마루 사업으로 서식지 파괴 위기

 

법흥리 수리부엉이 한 쌍이 낳은 새끼들. - 정다미 제공

 

법흥리 부엉이산에 사는 수리부엉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614일 오후 5,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사무소에서 장단콩웰빙마루사업 3차 상생협의회가 열렸다. 장단콩웰빙마루는 파주시가 230억 원을 들여 법흥리 1785번지 인근 138212에 시행하는 관광단지 개발 사업이다. 옛 장단군 지역에서 나는 흰 콩의 일종인 장단콩을 특산물로 삼아 장단콩 관광특구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장을 발효시키는 시설과 홍보관, 민간 장독대 분양 사업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도비 100억 원이 확보돼 4월 공사를 시작했다.

 

도비가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지만 장단콩웰빙마루 사업 진행이 순조롭지는 않다. 지난해 실시한 환경영향평가부터 문제였다. 환경영향평가는 대규모 사업 진행에 앞서 환경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사업 계획을 세우도록 정한 규정이다. 이 지역에 사는 법정보호종 수리부엉이(멸종위기 2, 천연기념물 324)가 환경영형평가에서 아예 빠진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

 

문제가 불거지가 파주장단콩웰빙마루는 환경영향평가에서 언급했던 법정보호종이 발견될 경우 즉각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방침대로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파주시는 전문가를 불러 장단콩웰빙마루 사업이 수리부엉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듣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리고 열린 것이 3차 상생협의회다. 이 회의에는 법흥리 주민대표와 파주장단콩웰빙마루 관계자, 파주시 공무원, 환경단체가 추천한 전문위원 등 10여 명과 참관을 원하는 파주시민이 참가했으나 특별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법흥리 수리부엉이는 약 20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명물이다. 이 곳 수리부엉이를 소재로 2008년에는 KBS 환경스페셜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가 제작되기도 했다. 올해가 2017년이니 적어도 10년은 법흥리에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환경영향평가에서 수리부엉이가 아예 빠진 것에 의혹이 일었다.

 

정다미 꾸룩새연구소장은 수리부엉이는 날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도록 진화한 소음에 민감한 동물이라며 멸종위기 2급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보호종이 이미 해당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왔음에도 환경영향평가에 언급조차 되지 않은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업체 측은 공사를 중단할 의지가 없다는 입장이다. 김일중 파주장단콩웰빙마루 팀장은 상생협의회는 지역주민과 사업주체 간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자리지 수리부엉이를 위해 모인 모임은 아니다라며 상생협의회에서는 사업이 진행된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태현 법흥1리장은 사업 진행을 멈추고 싶다면 상생협의회가 아닌 별도의 단체를 구성해서 거기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작 사업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법흥리 주민은 아무런 정보를 받지못해 가치판단을 할 수조차 없다. 법흥4리 주민 대표는 “4월부터 사업이 진행됐고 이미 두 차례 상생협의회가 있었다지만 주민들은 장단콩웰빙마루 사업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어떤 시설이 들어서고, 상주 인원이 몇 명인지, 주차 공간이 40대 정도로 상당히 부족해 보이는데 인근 지역과 주차 공간 등에 대해 협의가 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토했다. 이에 대해 박 이장은 지난 회의 때부터 주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지만 아직 자료가 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614 동아사이언스


아기 부엉아, 어디에 있니? 621 한겨레21

경기도 김포의 마을 뒷산에 있는 멸종위기종 수리부엉이

 

볕을 쬐며 졸음을 쫓는 어미 수리부엉이의 품에서 새끼 수리부엉이가 길게 하품하고 있다.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수리부엉이는 매년 1월부터 같은 장소에 알을 낳아 숲에서 새끼를 키운다.

 

경기도 김포의 마을 뒷산에서 수리부엉이를 지켜본 지 벌써 3년이 됐다   처음 만났을 때 추위가 여전했는데 녀석은 맨땅에서 하얀 알을 품고 있었다. 둥지라 해봐야 찬 바위 위에 얇게 깔린 흙이 전부였다. 겨우내 찬 바람을 맨몸으로 견디며 알의 온기를 지켜내고 있었다.

 

수리부엉이는 올빼밋과 새 중 덩치가 가장 큰 텃새다. 하지만 서식지가 파괴되거나 먹이가 줄어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하는 경우가 많아, 천연기념물 제324호이자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지난 2월 둥지 옆에 작은 카메라 한 대를 설치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자동으로 찍히는 인터벌 방식으로 촬영을 시도했다. 한번 설치한 카메라는 30시간에 걸쳐 4만여 컷의 사진을 찍어댔다. 128GB(기가바이트) 저장장치가 매번 가득 찼다. 직접 눈으로 보고 중요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아쉬울 때도 있었다.

 

321일 새벽 120분께, 사냥에 성공한 수컷이 먹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왔다. 머문 시간은 딱 1.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사진이 찍혔는지도 모를 뻔했다. 어미는 새끼나 알을 품기 시작하면 꿈쩍없이 오랫동안 둥지를 지킨다. 사진이 너무 많아 확인할 때는 자연스레 어미가 둥지서 벗어나거나 들어올 때를 우선시했다. 암컷이 둥지를 지키는 장면이 이어지면 별일 없겠거니 생각해 수컷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다. 어렵게 찍은 사진을 놓칠 뻔했다.

 

직접 눈으로 지켜보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도 있었다. 어미 품에서 새끼 한 마리가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새끼 두 마리를 품었는데, 어미가 둥지를 떠날 때는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어미 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무작위로 찍힌 사진만 봐선 단서가 될 장면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동네의 뒷산에도 수리부엉이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수리부엉이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사는 새가 아니다. 가을마다 동네 뒷산에서 부우~’ 하고 울던 새다. 과거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으로 절멸 위기에도 처했지만, 마을을 지키고 지혜와 부를 상징하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매년 전국 곳곳에서 수리부엉이 번식 소식이 전해진다. 하지만 나라 전체를 기준으로 수리부엉이 수가 늘어나는지 알 수 없다. 공식적인 서식 실태 조사나 연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둥지에서 어미 수리부엉이가 사냥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이고 있다.

수리부엉이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고개를 270도 정도 돌린다. 눈동자를 통해 둥지 앞 숲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냥에 나섰던 수컷 수리부엉이가 새벽 1시께 쥐를 물어왔다. 암컷 수리부엉이는 덩치가 크고 털이 풍성해 알을 품기에 유리하다. 호리호리한 수컷의 체구는 사냥과 경계에 알맞다. 번식기에 암수의 역할은 분명하게 나뉜다.

 

암컷 수리부엉이의 배에는 알을 품을 때 털이 빠져 알에 어미의 온기를 전하는 포란반이 발달해 있다. 풍성한 깃털은 추운 날씨에 체온을 빼앗기지 않는 이불 구실을 한다.   둥지를 비웠던 어미 수리부엉이가 다시 알을 품기 전에 주위를 살피고 있다. 3개를 낳아 2개가 부화했고 한 마리만 성공적으로 자라 둥지를 떠났다.

 

새끼 수리부엉이는 난치를 이용해 알을 깨고 나온다. 부화 뒤 2주가 지나면 부리 끝 돌기인 난치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미 수리부엉이가 알을 품는 동안 이웃 까마귀도 가끔 둥지 근처로 내려온다.

 

우리나라 미술로 본 부엉이 이야기 621 한겨레21

 

나는 부엉이미술품수집가이다. 1968년 경주 수학 여행길에 구입한 작은 부엉이 목조각품 구입을 시작으로 50년 가까이 `부엉이들을 모으고 있다. 예전엔 외국 여행을 갈 기회가 거의 없었어도 세계 각지의 다양한 부엉이 미술품과 생활용품을 수집하기 위해 국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외교부 바자나 각국 대사관과 적십자바자 같은 벼룩시장을 순례하듯 다니길 좋아 한 덕분이다. 2002년 작은 박물관 답사를 위해 일본에 갔다 온 뒤 이듬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부엉이박물관을 개관했다.

 

부엉이를 모아 보니 각각의 부엉이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것은 동양대로, 서양의 것은 서양대로. 부엉이는 신화고 전설이고 이야기였다. 또 그림과 조각, 노래와 문헌의 부엉이는 당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따라 그려지고 또 불려졌다.

 

우리나라만 해도 옛 문헌부터 그림, 민화, 도자기 같은 미술품에서 일상생활에 쓰던 물품과 건축물, 즐겨 부르던 노래까지 다양한 부엉이들이 문화와 생활에 녹아 있었다. 부엉이박물관에 모인 전시품 중에 옛날 우리 생활에 쓰이던 미술품과 생활용품에 함께 했던 부엉이 이야기를 모았다.

 

청화백자 항아리

 

20여 년 전 추운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여사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엉아(별명)! 나 지방에 내려 왔는데, 이 집 큰 항아리에 부엉이가 그려져 있어?” “어떻게 할까?” 흥분된 목소리로 보아 엄청 좋은 물건 같아 나도 들뜬 소리로 크게 말했다. 빨리 사진 보내 주세요, 제가 그림을 봐야 결정하잖아요. 가끔 박쥐도 부엉이라고 우기셨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딩동 - 폴더 폰에서 폴더 폰으로 온 사진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연세도 있으신 분이고 기계치이셨으니까. 마음은 바쁜데...

 

아휴! 사장님 잘 안보여요.” “가격은요? 비싸요? 사장님이 보시기에 어때요?”

 

마음이 바빠 급히 통화중인데 다른 분이 후한 값을 치루겠다고 한다며 소리치신다. 아니 상거래라는 게 있지 어떻게 물어보는 사이에 그럴 수가 있나. 우여곡절 끝에 나에게로 온 귀한 항아리이다.

 

조선 후기 개성지방요로 추정되는 항아리의 왼쪽에 버드나무 한그루, 오른쪽엔 소나무가 있는 풍경이다. 구름과 보름달이 떠있는 나무위에 부엉이가 늠름하게 앉아 있는 청화백자 항아리 크기는 높이 65cm, 둘레 134cm이었다. 도자기 둘레에는 사군자 중 난초, 매화, 대나무가 있으며, 큰 소나무 옆에 살짝 가려진 기와집 한 채, 배부른 황소, , 운지 버섯을 물고 있는 사슴, 거북등이 군자로서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오래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 된다.

 

부엉이와 황소가 그려진 항아리는 흔하지 않은 도안이다. 이 항아리는 가마에서 굽는 과정에 균열이 생기고 청화안료가 휘발되어 그림이 옅게 남겨져 조금 아쉬움이 있으며 아마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은 도공의 손에 있었다면 진즉 어떻게 될 물건이었지만, 가마 지기의 알뜰한 마음 덕분에 재미나고 귀한 물건이 외양간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져 운 좋게 내가 소장하게 된 것이다.

 

부엉이 가리개(가로130cm세로180cm)

 

오래전 두 폭 가리개를 수집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타려는데 기사분이 손사래 친다. 승객이 없는 시간이고 사이즈만 크고 가벼운데도 승차가 안 된다는 것이다. 계속 버스 정류장에서 집 방향의 차만 오면 가리개를 들어올리기를 여러 번. 오늘 안에 집에 갈수 있을까? 마침 마음씨 좋은 기사 덕분에 버스에 탈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얼굴을 익혀 두었다. 자주 이용하는 버스라 다음에 다시 만나면 작은 선물을 드리려고 장만했으나, 기사 분들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도무지 헷갈려 결국은 전하지 못하였다. 수집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크고 작은 성취감에 시간, , 노력을 들이며 평생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한다.

 

꽃피는 매화나무위에 부엉이 한 쌍이 다정하게 앉아 있는 그림이다. 부엉이는 한번 짝 짓기 하면 평생해로 한다고 한다. 옛날 혼례를 치른 첫날 밤 장난기 많은 동네 아낙네들이 문풍지에 구멍을 내어 신방을 훔쳐보는 것을 가리기위해 사용한 것으로써, 고대 중국인에게 매화와 그 열매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주화(呪花) 또는 주과(呪果)였다고 한다.

 

부엉이도 이 시기는 번식기이면서 부화시기로 상서롭게 표현한 그림으로 오른쪽 상단의 어려운 글은 아직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엉이는 70년 이상의 수명으로 어른들의 희수연(77)에는 부엉이 그림 등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민화

 

민화(民畵)의 왼쪽에 한문으로 화제가 쓰여 있다. 其鳴曰富興 必是積玉堆金(기명왈부흥 필시적옥퇴금) 풀이하면 이렇다.

 

그 울림은 가로되 부흥이니 필시 옥과 금을 쌓으리로다

 

조선시대의 선한 백성들은 글은 모르니 숲에서 울리는 부엉이 소리를 부흥으로 들린다 하여 부흥이로 불리었으며, 더 오래전에 그려진 민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두운 밤 귀신과 같이 날며 괴물같이 엉금 거리는데 그 울림은 부흥이로 해()하지 아니하는 대주(代主)는 큰 부()를 이뤄 잘 살 것이다.”

 

일제 강점기엔 부흥, 재건이란 글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일반인들은 부흥상회, 부흥철물 등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정부에서도 1950년대 후반 부흥부(1961년 건설부로 변경)에 의해 경제 부흥 5년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흥주택(주택 건설 사업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이란 이름이 강조되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부흥금고, 초인종 소리통, 습도계 온도계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부흥금고, 초인종 소리통, 습도계 온도계

 

1890년대 신문화가 들어오면서 옛 화신백화점에서는 철판으로 제작된 부흥금고를 판매했다. 양쪽 번호판(다이얼)을 부엉이 눈으로, 중간의 열쇠구멍을 부리로 표현하였다. 이 금고에 돈을 넣으면 부자처럼 흥할거란 바람이 담긴 금고이다.

 

초인종 소리통은 대문 밖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대청에 달아 놓은 부엉이 소리통에서 철판이 떨리는 소리가 () . . .” 하고 났다고 하며, 경주 최부자 집 초인종도 부엉이 소리통이었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부엉이의 왼쪽 눈이 습도계, 오른쪽 눈을 온도계로 사용한 것으로 현대 감각으로 보아도 실용성과 디자인이 훌륭하다고 생각되며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이화장에도 황동으로 제작된 것이 있다.

 

부엉이 방귀(둘레72cm, 높이48cm)

 

부엉이가 방귀를 뀌면 아람()이 벌어진다고 했다. 옛날 배고픈 보릿고개를 보내면서 다른 마을 보다 우리 마을에 부엉이가 먼저 와서 방귀를 뀌어 오곡의 결실이 열리길 빌었다. 부엉이 방구는 복력목(福力木)으로 행운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뜻으로 불린다.

 

관솔의 혹으로 참나무 포자가 바람에 날려 소나무에 붙어 융합 형성되어 타원형으로 굵게 자라는데 맑은 공기와 토질, 기온, 기후에 의한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만들어진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부엉이방구로 복(쌀 됫박)이 되는 귀한 것을 만들어 썼다. 부엉이방구 됫박으로 쌀을 푸면 부자가 된다고 하였으며, 부모는 아들, 딸의 혼사에 제일 먼저 주시는 혼수 예물이기도 하였다. 부엉이방구 됫박은 절대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내 복이 새어 나간다고 하여 남에게 주지 않는다.

 

혜안을 가진 부엉이는 방귀냄새는 나지 않고 송진 냄새가 났다고 한다. 삼청동 부엉이 박물관을 찾은 방문객 중에선 귀한 부엉이 방귀를 알아보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소원을 빌기도 하신다.

 

수석

 

미사리 호피석으로 2m 정도 떨어져 보면 윙크하는 부엉이 모습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자연석이다. 오래전 인사동 수석가게 주인이 소장했던 것으로 나무부엉이를 구경하다 수석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부엉이를 좋아한다고 하니 이 작은 수석 사진을 한번 찍어가라 하신다. 찍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필름을 인화해 보니 부엉이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음 날 주인을 찾아 흥정을 하니 엄청 비싸게 요구하셨다. 값이 비싸 당장 구입을 못하고 후에 인사동에 갈 때마다 찾아가 뵈었다. 수석이 잘 있는지 확인도 할 겸 꼬박 꼬박 인사를 드렸다. 어느 날 내가 찾아온 날만큼 계산해서 깎아 줄 테니 구입하라 하시며 잘 소장하라 하시기에 즉시 구입했다. 지금도 좋은 작품을 주신 주인께 감사드린다.

 

방범대원 혁대(벨트)

 

해방이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야간순찰을 하시던 분들이 사용하던 벨트이다. 아쉽게도 함께 차고 다니던 곤봉은 빠져있다. 부엉이가 혁대 버클에 간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밤을 지키고 재물을 상징하는 문양이 부엉이로 표현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의 물건을 보면 야간 정찰하던 야경(순라)꾼의 지팡이나 손잡이 꼭지에 부엉이 장식 있다. 밤에 돌아다닐 때 징이 박힌 지팡이로 탁탁 소리를 내어 자기의 위치를 알려주며 움직였다고 한다. 현재 강남경찰서에서 활용하고 있는 부엉이 기념 배지와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은 부엉이박물관 둘째 아들(시각디자이너)이 재능 기부하였다.

 

옥 목걸이

 

고대 신화 집 산해경에 옥()은 권위의 상징이다.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벽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옥은 군자의 덕(), , , , 仁義禮知信으로, 군자무고옥불거신君子無故玉不去辛군자는 반드시 옥을 지녀야 한다고 되어있다.

 

특히 부엉이는 어두운 밤에 활동하여 선사시대에서는 신이 보낸 새(토템)로 표현했다. 신의 대변자인 샤먼(제사장)의 장식이나 의례의식에 쓰였던 부엉이로 표현된 옥장신구, 청동기, 향로 ,토기와 같은 많은 유물이 세계 여러 박물관의 귀한 보물,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

 

치미

 

치미는 왕이 거처하는 궁의 기와지붕 양쪽 용마루 끝 장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치는 솔개. 수리부엉이. 올빼미 등을 뜻하는데 궁의 지붕 양쪽 끝에 치미를 장식하는 것은 길상과 어두운 밤에 하늘에서 나쁜 기운이 서릴 때 막아주는 벽사를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중국 동진(317-420) 때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후세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 중기까지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황룡사절에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치미(망새기와)의 크기는 높이 182cm 105cm나 된다. 치미의 실물은 소장할 수 없기에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시경언해본

 

시경언해본은 조선 선조 때 삼경의 하나인 시경을 언해본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시경언해본 물명에 부엉이와 올빼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책에 부훵이(부엉이는 치효 鴟鴞 ), 올바미(올빼미는 효)라고 쓰여 있다.

 

근래 한자사전을 보면 올빼미 효()와 효수 효() 두 글자 모두 올빼미 또는 부엉이를 뜻하는 글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두 글자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 우에노 박물관에도 부엉이 청동기에는 치효존(鴟鴞尊)으로, 중국 고대 청동기에도 치효존 또는 효존(鴞尊)이라는 표기가 달려있다.

 

중국 상나라(기원전 16001046)때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효존(鴞尊 49.5cm) 청동기 술병은 현재 중국 하남성 하남박물관의 최고 보물급 소장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고대 제례 의식 때 사용된 술을 담는 용기로 추정되며, 넓은 부리와 꼬리, 둥근 눈, 귀깃이 있는 머리모양과 날개는 영락없이 수리부엉이를 닮아있다.

 

2015년 하남박물관 답사에서 치효존(鴟鴞尊) 청동기와 유물들을 감상하고 하남박물관만이 발행하고 제작하는 치효존(鴟鴞尊)이 실린 도록과 도자기접시(지름42cm)를 구입하여 왔다.

 

자전 석요

우두의 창시자이며 한학자 지석영이 쓴 활자본으로 1909(융희3)에 간행된 옥편이다. 종래의 옥편이 자음과 자의를 한글로 달지 않은 데 비해, 이 책은 자음과 자의를 한글로 달아 소리와 뜻을 알아보기 쉽게 하고 또한 속음과 속자를 붙여 놓았다. 근대적인 체제를 갖춘 것으로는 최초의 옥편인 셈이다. 그림을 통해 한자가 의미하는 바를 쉬이 알아보게 하였는데 수리부엉이는()자가, 올빼미 그림에는 () 자가 들어가 있다.

 

조선어학회의 훈민정음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학회에서 만든훈민정음에서는 자의 쓰임새를 설명하여 부헝이를 예로 들고 있다. 여기에서 부엉이는 휴(.수리부엉이)로 표현되고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가요무대 30년 동안 1위곡으로 선정되었던 울고 넘는 박달재가 실린 SP 돌 판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3절까지 녹음이 되어 있으며 수동으로 태엽을 감는 콜롬비아 유성기로 사용한다.

 

2절 가사의 내용에 부엉이가 나오기 때문에 수집된 물건이다.

부엉이 우는 산골/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박달재의 금봉이냐`

 

박 등과 스탠드

요즘엔 자연적으로 큰 박이 잘 열리지 않는다. 예전엔 큰 박이 열리면 속은 긁어내고 부엉이와 소나무, (), 그믐달, 큰 대문이 있는 친환경적인 등()을 조각하여 멋스럽게 사용하였다. 어두운 밤이면 예쁜 불빛을 비추는데 높이 36cm에 둘레가 88cm나 되는 제법 큰 등이다.

 

스탠드는 친구 결혼식에 신부 친구들이 돈을 모아 선물로 사주었던 60년대 신식 전기용품이었다. 금술 좋은 수리부엉이처럼 백년해로하는 것과 부자로 잘살라는 뜻이 담긴 선물이었으며, 부엉이는 지혜(知慧)를 상징하니 밤을 새워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도 있다.

 

편지함과 거울

초가집 뒤 나무 위의 부엉이는 농사일로 집을 비운 주인을 대신 하여 집도 지키면서 배달부가 정다운 소식을 꽂아두던 편지통이며, 작은 나무거울은 이른 아침 앞마당에서 세수하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얼굴에 거품을 내며 면도를 하실 때 쓰시던 것이다.

 

제주도와 경주여행 부엉이기념품

요즈음 현대인들은 멋지고 세련된 작품을 쉽게 접하고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장식품이나 기념품이 흔하지 않았다. 또 갖고 싶어도 아무나 갖질 못하기도 했다.

 

신혼 여행지로 유명하고 여행가들에게 인기 많은 지역이 제주도, 경주였다. 누구나 살림살이가 빠듯함에도 부자로 살고 싶고 수호신처럼 지켜준다는 말에 부엉이 장식품이 기념품으로 인기가 있었던 같다.

 

성냥, 재떨이 오르골담배통

해방이후의 성냥통과 재떨이, 그리고 60년대 후반 만들어진 부엉이 오르골 담배통은 뚜껑을 열면 음악소리가 나며 그 안에는 라이터와 우리나라 최초의 탄소필터 담배인 은하수가 들어 있다. 그 시절에는 귀한 용품으로 사장님, 회장님 책상 위에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성냥, 재떨이, 담배통에 부엉이가 등장하는 것은 자나 깨나 불조심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으로 추측해본다.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씨가 그린 한 밤중 소방서 굴뚝 위에 앉아있는 부엉이도 재미있다.

 

과자 통(높이20cm)

오래전 사용하던 사랑스런 과자통. 장식장 어디에 두어도 예쁘고 귀여워서 눈에 띠는 정든 물건이다. 미얀마에서 쓰던 차()도 비슷한 것이 여럿 있다. 이 과자 통을 설탕통, 양념 통으로 사용하던 분도 계시지만 나는 과자 통을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기 밥그릇과 베이비 크림 통

귀한자식에게 밥을 담을 때마다 훌륭하게 커서 큰 부자로 살고, 아무 탈 없이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아이의 작은 밥그릇에 부엉이를 그려놓은 것으로 상상된다.

 

베이비 크림 통은 1980년대 추운 겨울에 아이들 얼굴이나 손이 틀 때 사용하던 용품이다. 그 때도 어려운 시절이라 아무나 사용하지 못한 비싼 크림이었다.

부엉이 저금통

예로부터 우리 주변에는 화수분같이 아무리 퍼내도 계속 재물이 나오는 부엉이 저금통이 많았다고 한다.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어려운 시절에서도 아끼고 절약하고 모아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부를 이루 듯,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의 창고는 부엉이 굴(창고)이었으며 그는 박물군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부엉이 굴에는 천하의 기보, 명보, 명기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한다. `부엉이 굴`에는 없는 것이 없고 자기도 모르게 재물이 부쩍 부쩍 불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임상옥의 창고가 그러했는데 그는 후에 큰 부를 이룬 뒤 후학을 위해 모두 사용하였다 한다.

 

우리나라 전통 풍습

정월 초 자손축성과 대보름 지신밟기 할 때 축성문을 읽는다.

 

축성문의 내용은 이렇다. 이 댁 가중 일문 권속 금일 금시 이 정성에 인간오복을 점지한다. 온갖 복을 점지할 때 구름복은 모여들고, 바람복은 불어들고, 물길복은 흘러든다. 인간 업은 걸어들고, 부엉이 업은 날아들고, 구렁이 업은 기어들고, 두꺼비 업은 넘어들고, 도야지 업은 몰려들고, 족제비 업은 뛰어든다. 온갖 업이 다 모였으니 자손만대 축원하여 보자라고 큰 소리로 축성한다.

 

업은 집안의 복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곳간과 재물의 축적을 책임지는 신이다.

 

*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조선시대 백성들의 이름

부엉이처럼 눈이 크고 눈이 나온 사람 : 이부엉, 키가 큰 사람 : 박큰노미, 키가 작은 사람: 김자근노미, 일 잘하면 : 김기특, 착하면 : 박선노미, 조호노미 등 평민들의 신체 특징 따라 쉬운 대로 그대로 불렀다.

 

* 소만

농가월령가에 “4이라 맹하소만 절기로다. 했다. 소만이 되면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는 부엉이가 울어 옜다고 한다. 이 때쯤이면 보리 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너나없이 없이 양식이 떨어져 가난하고 힘겹게 연명하던 시기이다.

 

* 부엉이 구전가요

떡해 먹자 부엉, 양식 없다 부엉, 걱정 말게 부엉, 꿔다하지 부엉, 언제 갚지 부엉, 갈에 갚지 부엉(갈은 가을의 준말이다)

 

* 부엉이 울음 점

송전동에서는 10월에 부엉이가 울면 이듬해 바닷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부엉이가 3마리의 새끼를 번식하면 대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10월 밤에 부엉이가 앞산에서 울면 혼사가 있고, 분례가 시집가기 전날 목욕을 하면서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 시집가서 잘산다고 하였다. 뒷산에서 울면 초상이 나고 자주 울면 초상이 잦다고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변진전

큰새(부엉이는)의 깃털로 장례를 치루는데 이는 죽은 자가 가볍게 날아오를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새를 본떠 만든 그릇을 통해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이끈다는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동속금언십경 고서에도 날아다니는 10가지 짐승()중 부엉이는 인간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새로 나온다. 어릴 적 강원도에 살면서 보았던 상여앞의 장식에는 부엉이가 있었다. 왜 일까? 어른들은 저승길은 깜깜하고 무서우니 눈 밝은 부엉이가 밝혀준다고 하였다. 그때 부엉이는 복() 이라 부르셨다./ 배명희 부엉이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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