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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대만3-그들의 권력과 흔적

by 이성근 2014. 12. 17.

 

대만 3일차 고궁박물관(故宫博物院)이 목표다.

수도 타이베이의 거리는 기후대 때문인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가로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 있긴해도  가을복장이면 견딜만 한 날씨다. 그렇건만 현지인들은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만의 여름철(5~9) 기온은 28, 겨울철(12~2)10도 내외인데, 갔다 온 다음  지난 1617일 이틀 동안 대만 전역에서 26명이 저체온증이나 심혈관 질환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대만언론들이 18일 보도했다.

어쨌든 식물의 생육환경 중에 기온은 중요한 변수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을 찾았다. 대만의 절대권력이었던 초대 총통 장개석을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 198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타이베이 시 중정구에 위치해 있다. 중정기념관이라고도 한다. 중정기념당의 이름에서 중정(中正)은 장개석의 본명이며, 개석(介石)은 그의 자이다. 넓은 정원 위에 대리석 건물인 기념관이 서 있고 정자,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무게 25t의 장개석 총통 동상을 비롯하여 전시실에는 사진과 총통생애의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명나라식의 아치형 정문 옆에 고전적 건물인 국립극장과 콘서트홀이 세워져 있다.

건물은 웅장했다.

중국에서는  기와 색깔로 그곳에 모셔진 사람들을 가늠한다, 중국인처럼 붉은 색을 좋아하긴 하나  건물에 따라 얹은 기와의 색상을 통해 명대로 살다 갔는지 요절했는지 구분하기도한다고 한다. 예컨데  80대 이상은 기념관으로 청색을, 황색은 60대 이후 사망자는 황색으로  기념당, 60대 전에 사망자는 적색으로 기념사 로 구분한다나

전체적인 배치는 시원했다. 적절한 조경기법의 적용을 통해 광장과 공원의 기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원의 조성은 차분하게 처리했다.

오솔길을 따라 내처 걸으면 웅장한 기념관이 위용을 자랑한다.  

대만민주기념당이라고도 한다. 장개석이 생존했던 89살까지 살았던 것에 기초해 89계단을 오르면 기념당 2층에 대형 동상이 있다.

때마침 공사중이라 전시실로 코스를 바꾸었다. 

전시실 초입에 낯익은 인물이 포함된 그림이 걸려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선생이다.   19321월 이봉창의거, 4월 윤봉길 의거 등을 통해 장개석의 중경(重慶) 임정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장개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실제 두 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표현처럼 “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 한국인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193218일 일왕 히로히토는 중국 침략의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우기 위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부 를 괴뢰정부의 황제로만들기 위해 일본으로데려와 도쿄 교외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했다. 이때 김궁 앞에서 선서를 하고 나타난 이봉창의시가 동경 경시청 앞에서 godt를 마차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이후 3개월 뒤 429일 상해를 점령항 일본군이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일 행사를 위해 상해 홍구공원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는데,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의 중국 파견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하여 상해거류민단 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3함대 사령관 노무라와 제9단장 우에다, 주중 공사 시게마쓰 등을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배후주동자로 일본은 백범주석을 지목하고 현상금을 내걸게 되었는데 지금 시세로 20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장면은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개석의 초대를 받아 중국의 군관학교를 시찰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때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기로 합의하고 사관 백 여명을 양성하게 된다

뜻밖의 장면을 만났다.  이후 전시돤 내용은  장개석 총통의 일대기로 시기별 전시를 해 놓고 있다.

중국 근현대는 장개석과 모텍동의 권력 다툼이라 볼 수있다.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중국 대륙을 놓고 20년을 싸웠다.  장 총통은  1887년에서 태어나 19754월에 죽었고, 모 주석1893년에 태어나 장제스가 죽은 1년 뒤인 19769월에 죽었다.  두 사람 모두 특별한 뒷배경 없이 중국의 격동기를 만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혁명에 뛰어들었다. 훗날 장개석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영웅이되었지만  4년 후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쫓겨갔다. 기간동안  대륙에서는 모택동이 적색테러로 독재를 하는 동안, 장개석은 대만에서 백색테러로 독재를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독선적이며 아집이 강했고 "살아 있는 신"으로 절대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한 사람은 대륙 수복을, 한 사람은 타이완의 수복을 꿈꾸었다고 한다. 

소금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장개석은 아버지가 장개석이 여덟 살 때 죽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궁색하게 지냈다고 한다. 장개석은 이후 어머니에게서 한학과 유교적인 예법을 배웠는데, 서양식 학문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 1906년 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중 쑨원(孫文)이 만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고, 1911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 신해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 쑨원의 신임을 얻은 장개석은 쑨원의 명을 받아 1924년 황푸군관학교의 설립과 군사 간부 양성을 명 받았고 초대교장에 취임 2년 동안 5천여명의 학생을 배출하면서 그것을 기틀로 자신의 인맥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쑨원이 사망한 1926년 국민당을 장악,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며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구민당의 1인자 장개석은 북벌을 시작한다.  군벌로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명분아래 시작된 북벌은 양쯔강 이남까지 평정했지만, 결국 국공합작을 붕괴시키기에 이르고 192810월 남경을 수도로 한 남경시대”의 주역으로  주석이 되어  1930년 내란,, 공산당과의 싸움인 소공전, 1931년 만주사변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내전을 치루었다.

 

19452차 세계대전 후  장개석은 소련과 우호동맹을 맺거나 일본과 화해하는 등의  화평책을 쓰다가  국공내전을 치루게 된다.  1948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올랐으나 다시 그로부터 1년 후1949년 12월  200만 군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대만에서는 장개석이 유명한 만큼 그의 처 숭메이링[宋美齡] 역시 또 다른 권력으로 기록된다.  송미령은 일찌기 미국으로 건너가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았던 송가수의 세딸 중 막내 딸 이다. 송가수는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이렇게 세딸과 세 아들을 슬하에 두었는데 . 딸들을 모두 미국 웨슬리 대학에 유학을 보낼 정도 였다. 그 자매들에 대한 평가를 "큰딸은 재물을 사랑했고, 둘째딸은 나라를사랑했고, 세쟤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다" 고 한다.

 

이중 송미령은 장개석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장개석은 40, 송미령은 30세였다.  장개석의 경우  부인과 아들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비기독교인이었다.  송미령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후 귀국하여 형부인 손문을 돕고 있었는데 손문의 집안을 드나들던 장개석이 그녀에게 반해서 청혼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결혼을  송미령의 언니이며 손문의 부인이었던 송경령(宋慶齡)은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격렬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장개석의 나이나 종교적인 문제뿐만아니라 장개석이 중국의 국부인 손문의 후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맛을 알았는지 송미령은 기어코   장개석과 결혼했고, 의도한 바 대로  살다 갔다,  반면 후일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과 결혼한 송경령은  장개석의 대만 피신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국가부주석의 직위를 받기도 하였다. 하여  중국을 사랑하였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손문 사후 이후 송경령은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하며 남편의 유지를 따라 중국 민중에게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국민정부의 수장인 장개석이 남편 손문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 야욕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고 그와 대립하였다.

 

송미령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며 쌓은 유창한 영어실력과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장개석의 대외 활동을 적극지원하였고, 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르던 1943년의 카이로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장개석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영국의 처칠수상과 만날 때 송미령이 배석하여 통역겸 조언자의 역할을 하면서 중국에서 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중국여인이 되었다. 송미령은 국민당 정부와 미국 사이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했다. 그녀는 미국의회에서 연설을 행한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큰 명망을 얻었다. 송미령은 2003년 103세로 죽었다.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송경령과 송미령이 중국 대정치가의 부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면, 큰 언니 송애령은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그늘에 숨어살면서 재산을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남동생 송자문은 국민당의 재정부장관, 외교부장관 및 행정원장 등을 지낸 사람인데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어쨌든 이런 막강한 인맥으로 송씨 가문은 중국국민당을 이끄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

 

송씨 가문을 둘러싼 이러한 경제력, 정치 · 군사적 배경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발단은 아버지의 사업수완, 송경령과 손문의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당은 장개석 가문, 송씨 가문, 공씨 가문 등 인척으로 얽힌 몇 개의 가문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중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민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보낸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그 가운데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 및 공상희 집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돈을 숨겨서 뉴욕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송경령은 이들의 반대편에 서서 민족과 민중의 지도자로서 이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리는 길고 험난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항일전쟁의 시기에 송경령의 주 임무는 전쟁구호물자를 모아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공산당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헌신적이었으며, 정작 그녀 자신은 세 들어 살 정도로 개인소유 재산은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 사치는 당시 중국 사정에서는 죄악이었다. (글 출처: 그림성경, Haier life 등 다수) 

 

자매의 삶은 이렇게 달랐고 사후 평가는 극명하다,  남의 나라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한다.   

 

 

중정기념관을 나와 인근에 있는 충열사로 갔다. 

의장대 교대를 보기 위해 ㅡㅡ

몇 컷 남긴다ㅣ

 

 

 

 

마지막으로 들린 타이베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

고궁박물원은 파리의 루브르, 뉴욕 메트로폴리탄, 모스크바 에르미타주와 더불어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꼽힌다. 소장 유물 규모나 정교함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고궁박물원은 루브르의 두 배 규모인 68만점을 3개월마다 바꿔가며 전시한다. 이 유물들은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군에 패한 장제스 국민당 총통이 베이징 자금성에 있던 것을 배에 싣고 옮겨왔다. 박물관 건물은 1965년에 건립됐다.

중국에서는 홍샤오로우, 동파육과 같이 돼지고기를 이용한 조림요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동파육형석이라고도 불리는 이 옥은 이름을 보면 누구나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듯  어느모로 보나 돼지고기 모양이며 부드럽고 육즙이 많은 동파육과 홍샤오로우를 연상시키게 한다. 이 육형석의 색과 무늬는 모두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불투명 옥수(玉髓, 이산화규소로 이루어진 규산염 광물이 변하여 생성된 광석)의 층층히 쌓인 무늿결을 장인들이 잘 가공해 낸 것이라고 한다.. 옥수 표면에 아주 세밀한 구멍을 내어 모공의 효과를 연출하고 색을 입힌 것 이라고 하며, 고기와 비계부분의 층이 분명하여 비계의 구멍까지도 완연히 보인다.. 맨 위에 보이는 돼지 껍질은 간장에 절인 듯한 느낌을 살려내어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부각시켰다. 아무튼 대단했다.

청나라 시대의 보물 추이위바이차이(翠玉白菜)’는 손가락 크기의 옥으로 만든 배추 모양 조각품이다. 잎사귀는 녹색이고 밑동은 흰색이다. 잎사귀에는 메뚜기 한 마리가 붙어 있다. 그 옥재의 자연미와 정교한 조형미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예술품으로 칭송된다. 경도 7인 옥은 너무 단단해서 쇠칼로 조각할 수 없다. 이 모든 작업은 실()로 이뤄졌다고 한다.

 

취옥배추는 근비의 혼수 용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 말기에 배추옥은 자금성의 용화궁에 있었다. 당시 용화궁은 광서제의 후궁 근비가 거주하던 침궁 이였다. 이로서 추장하건데 근비가 가져온 혼수가 상징하고 있는 신부의 순결함과 자손을 많이 나아 대대손손 황실의 혈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인 3대가 조각한 상아 공()도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작은 공 속에 다른 공이 있고, 그 안에 또 공이 있다. 16개에 이르는 공은 저마다 따로 움직인다. 아버지가 만드는 상아 조각품을 아들이 곁에서 베끼는 방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수많은 실패 끝에 건져낸 최상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장인 3대는 황제의 노리개인 이 상아조각품을 위해 살았다고 한다.  이런 세공품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디려야 했다.

 

소장품 모두를 관람하려면 8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랬건만 불과 두시간 일정으로 건듯 본다는 것이 참 할말 없게 만들었다,

어쩐지 대만지도와 닮았다.

대만을 떠나며 이 나라를 생각한다.  중국 푸젠성과 마주하고 있고 중국 본토에서 약 150떨어져 있다. 1885년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고, 청일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 성립된 국가이다

 

공식국호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지만, 올림픽 대회 또는 국제기구에 참가할 때는 중화타이베이(Chinese Taipei)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속제도인 펑후제도[澎湖諸島], 훠사오섬[火燒島], 란위섬[蘭嶼] 79개 도서를 합하여 중국의 1개 성()인 타이완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1949년 이래 타이베이[臺北]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있는 타이완 국민정부의 지배지역이 되었고 그 범위는 타이완 및 푸젠성에 속하는 진먼섬[金門島]과 마쭈섬[馬祖島]이다. 지방정부로서의 타이완성 정부는 타이중[臺中] 교외의 중싱신춘[中興新村]에 있다. 세계 각국이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단교하여 국제적 고립화가 진행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과 그에 부속된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2개 직할시, 22개 현(()로 구성된다.

 

타이완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대륙문화와 태평양의 해양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대륙과 해양의 문화 유산이 다양하다. 중국의 한()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한때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으며 서유럽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아왔기 때문에 문화유산이 중첩되어 있다

 

타이완의 주요 도시들은 전통적인 중국식 건축물과 20세기 초의 일본식 건축물 및 근대 서구식 건축물 등 어떤 형태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혼합양식의 건축물들이 많다. 타이난이나 루캉곽 같은 타이완의 오래된 도시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건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국의 건축은 유럽의 고딕식 사원이나 일본의 정원양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건물의 기본구조가 전형적인 U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 또는 2층의 건물로 처마가 매우 가파른 기와지붕의 중국 고대양식 건축물들이 지방에 산재되어 있다. 타이완에는 또 주로 청대(淸代: 1644~1911)에 건축된 사원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절들이 많이 남아 있다.

 

19488월 외교 관계를 수립한 후 타이완의 총통 장제스가 한국을 방문하고 1966년 대통령 박정희가 타이완을 방문하는 등 수교관계를 유지해왔으나 19928월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후, 단교하였다. 1993년 비공식 관계를 설정한 후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가 상주하고 있다. 

 

현재 수교 국가는 10개 남짓한 나라로 대부분 아프라카와 중남미 또는 태평안 연안군도국가들이다. 

 

십수년 전 대만 최대 일간지 중국시보(中國時報) "국민당의 이름으로 먹고 살아온 대만인은 최소 1천만명" 이라고 말했다. 전 국민의 절반이 국민당과 직간접의 인연을 맺었다는 분석이다. 155천여명의 대만 공무원 중 40% 정도가 '대를 이어' 공무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적법하고 공개적인 절차를 거쳐 공무원으로 입신한 게 아니라 부친의 후광이나 집안의 연고, '관시(關係.인간관계) ' 를 통해 관리가 됐다는 얘기다.

 

20143월 집권당인 국민당이 일방적으로 비준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약 200명의 대학생(과 활동가)들이 입법원(국회)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대만 경제의 중국 종속화에 대한 우려와 청년의 미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이 분출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1125일에는 국민당이 선거광고를 냈는데 대만을 아시아의 경제적 고아로 만들지 말자였다. 요지는 한중FTA의 체결로 인하여 장차 (석유화학 등) 대만의 7대 주요산업이 충격을 받을 것이며, 11곳의 도시와 43만명의 일자리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대만의 역사는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였다. 중국의 지배는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가 망할 때(1911)까지였다.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과 네덜란드 식민통치를 차례로 경험 후 겨우 1662년에 독립국으로 있다 청의 침공으로 국가 지위를 상실하고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후 청일전쟁의 대가로 대만을 할양(위안스카이)받게 되어 1945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그 기간이 한국의 식민지배보다(1895~1945) 길었다. 고토 심페이등 유능한 민간인 총독이 와서 대만을 통치했고, 사탕수수 재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100% 자립도와 대만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들어온 국민당 정권의 반체제적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상대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대만의 도로에 질주하는 차량의 대부분이 일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계속 고수해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중국은 세계에서 오직 하나로서 존재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 대만은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하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김해국제공항 3일간의 일정을 공유한 동행들이 악수를 하고 저마다의 선물꾸러미를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집으로 가는 길, 멀리 하구의 불빛이 반갑다.

 Ocean Gypsy - Blackmore's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