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의 일정으로 대만을 다녀 왔다. (녹색도시부산21 주관) 대만은 첫 방문이다. 사실 대만 뿐아나라 동남아는 왠지 그동안 인연이 없어 거의 가 본 나라가 없었다.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남아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럽이나 미주나 남미를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어쩼든 이래저래 심신이 말이 아닌 상태에서 여행 삼아 다녀오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썩 마음에 든 나들이는 아니었다. 여행 경비도 최소화 했다. 여유롭지 못한 상태에서의 여행은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예전같았으면 미리 거마비도 마련하고, 탐방 장소도 사전에 확인하는 등의 준비를 했겠지만 떠나기 전날만 해도 자정 넘어 사무실일을 보아야 했다.
속옷 몇 벌과 갈아 신을 양말 몇 컬레만 챙겨 김해공항으로 갔다. 익숙한 얼굴의 동행자들이 하나 둘 모이고 오전 10시부터 수속을 밟은 다음 비행기에 올랐다, 바행기는 김해 방향으로 비상하는 가 싶더니 기수를 돌려 남해 상공으로 전진하기를 두 시간 반 쯤 타이뻬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구름 밭 하늘은 대만의 날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우산을 미리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2박 3일 체류기간 내 날씨는 흐렸고 간간이 빗방울이 들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현지에서 우산을 샀다. 그런데 검은색 우산을 샀는데 대만에서는 검은색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비가 오더라도 검은색 우산은 초상집 갈 때나 사용하는 색이라 했든가. 어쨌든 대만 타이뻬이 날씨는 연중 흐린날이 태반이라고 할 정도로 불순하다. 다행 우산을 쓸 정도로 비는 오지 않아 이동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가이드는 화교 출신의 좀은 뻥이 있고 가벼운 느낌의 60대 초 남성이었다. 인천 출신의 그로서도 우리같은 손님이 처음이었고, 안내했던 탐방 장소도 낯설었다고 했다.
그 낯설음은 우리 일행에게도 적용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말자 첫 방문지로 찾아간 곳은 공항에서 두 시간 이상 거리,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무려 다섯 시간 이상을 걸려서 간 곳은 중부 타이중의 '무지개마을'이었다. 웹사이트에서 타이중 무지개마을을 치면 어렵지 않게 여행 후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대만의 새로은 명소로 그려져 있었지만 막상 도착한 다음 보게 된 소문난 그 현장에 대해 일행의 얼굴에는 낙담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벽화마을 이라 하여 그야말로 대단한 볼 거리가 있는 곳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실소했다.
난툰차이홍쥐엔춘(南屯彩虹眷村) 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패배한 중국 병사들이 본토에 가지 못하고 대만에 정착하여 살던 마을로 이 마을에 살던 황용푸 할아버지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마을이 재개발로 철거위기에 몰리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넣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어 현재는 보존 지역으로 보호되어 철거 위기에서 마을을 지켜냈다고 한다.
한 사람의 행위(2008년부터)가 마을?을 지키고 자원화 하여 국제적 명성을 획득함으로써 새로운 명소로 자라매김하였다, 그는 9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림을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이같은 국가 이미지를 높인 기여를 높이 사서 대만정부는 황노인에게 창의상을 주었다고 하든가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심성을 전제로 장난스러운 표정의 그림이 두세채 남짓한 집의 담벼락이며 골목을 채우고 있다.
어떤 기준으로 예술성을 언급해야 할 지는 모르겠다만 비슷한 캐릭터를 빈틈없이 그려넣었다. 원래 황노인은 홍콩 구룔 태생으로 젊은시절 군에 입대 했다가 국민당 정부와 더불어 대만에 정착하여 살았다. 황 노인은 이곳에 정착하기 전 까오슝 등지에서 살다가 타이중 영동과기대학 근처 춘안로 근처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미 마을의 일부는 철거가 이루어져 잡초 무성한 평지가 펼쳐져 있고 주변의 건물과 주택들은 낡고 오래된 변두리 그 자체였다. 그런 마을에 황노인의 그림이 입혀짐으로써 일대가 더불어 변화를 예고 하고 있었다.
황노인은 그림과 더불어 평안과 감사라는 글귀를 입히기도 한다. 방문자들이 모두가 복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벽화그림이 일려지자 당국은 이렇듯 공중화장실을 비롯하여 주변에 나무를 식재하는 등 공원으로 정비중에 있다.
개인적으론 뱍화마을 옆집 수로가 마음에 들었다. 일대가 이런 자원들을 잘 조합한다면 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있는 마을로 변하지 않을까 해 본다.
호텔 도착 시각은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묶었던 호텔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건물 외벽에 반짝이던 네온사인이 무슨 대반점이라 했는데 ㅡㅡ.
첫날 밤을 맹숭히 보낼 수 없어 밤마실을 나갔다. 유난히 세븐 일레븐 이란 24시 편의점이 많은 것도 특이했다. 달리 머물 곳을 찾지못해 맥주 캔 두 묶음과 안주거라를 사서는 김해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양주를 섞어 동행자 몇과 잔을 나누고는 그냥 잠들어 버렸다. 새벽에 눈을 뜨니 룸메이트 주승철 국장이 어수선한 짐이며 옷가지를 말끔히 한 뒤 잠들었던 것 같다. 나름 선배를 위한 배려였던 것 같다. 문득 승철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던 것일까 생각해 본다. 계기는 그의 스승인 고신대 문태영교수였다. 환경운동연합 전신인 공추련 시절 문교수는 산하 시민환경연구소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그때 문교수를 안 뒤로 지금껏 지내오면서 그 제자인 승철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학부 졸업생이었든가 그랬던 것 같다. 헤아려 보니 만만치 않은 세월이다. 늘 스승의 지인이라 챙겨주니 고마을 따름이다.
해외에서의 시간은 금같이 쓴다는 소신에 의거, 이른 아침 마실길에 나섰다.
어떤 건물이든 베란다가 있고, 화분이 놓여져 있었다.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자는 일이 없다보니 거리의 가로수를 비롯하여 화단이 녹음과 푸른 빛을 늘 유지한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파트 베란다며 창문마다 창살로 막혀 있다. 사생활의 문제 때문인지 도둑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죄다 샤시로 중무장한 형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의 집값도 이른바 장난이 아닌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극 격차도 눈에 뛰게 차이가 났다.
산책길에서 강을 만났다.
맑고 유량도 많은 계류였다. 산지가 발달한 대만의 지형 때문이다.
백로들이 수변가장자리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있었다.
열매로만 보았던 그린파파야 의 꽃이다. 과실수로서 바나나와 함께 익숙하게 보였다.
파파야는 원산지가 중남미지역인 성숙된 열매를 먹는 열대 과일이다. 과일보다는 미숙과인 청과를 채소로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콜롬부스에 의하여‘천사의 과일’로 알려진 그린파파야는 기일보다는 미숙과인 그린파파야로 많이 이용된다. 다 익을 경우 열매는 호박과 같은 주황색빛을 띈다. 비타민이 풍부하고 황산화 기능을 하는 ‘폴리페놀’을 비롯하여 간 기능 향상과 암 발생을 억제하는 ‘이소티아네이트’가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완숙한 파파야의 맛은 홍시 직전의 감맛이라 하는데
오래 전 보았던 베트남 영화 ‘그린파파야 향기’ 가 떠올랐다. 화면출처: blog.naver.com/ismingchi/22022241817
주민들은 이 두 유실수를 우리네가 대추나 감나무처럼 심고 가꾸고 있었다.
곳곳에서 보았던 크고 작은 도교사당들, 마치 일본의 신사처럼 도교는 대만 사람들의 생활 속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이는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이 쫒겨오며 가지고 들어 온 것이나 다름 없다. 본래 대만 토착민들에게 도교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대만도 산지가 많다. 여기에 비가 많은 기후대로 인해 물길이 많다.
마을 골목에서 만나는 텃밭은 다양하게 가꾸어 지고 있었다
마을을 돌고 돌아 숙소로 가는 도로변 튀김집에서 어묵인듯하여 가격을 물어보다 첫 마수 대상이라 잠시 당황한다. 마치 안사면 욕 바가지 듣게 될 찰나였지만 얼버무리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지난 밤 둘러 보지 못했던 숙소 뒷쪽의 골목길까지 돌아보았다. 공원이 있었지만 여유가 없어 포기했다. 이들의 공원은 어떤 형태며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긍금했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대만의 공원 정책?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대만의 가로환경과 녹지에 대해 눈여겨 보고자 했다.
대체로 타이베이 시의 가로환경은 양호했다. 2열 3열 가로수들은 이 도시의 경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대북시의 하천 둔치부 이용은 적극적이다. 시민들은 야구를 즐긴다고 한다.
하천 둔치부의 활용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공 구조물과 잠식이 많았다. 가용토지의 부족 때문일까
두번째 방문지 검담리로 향한다 . 지룽강변 북안로를 따라 가다 군 시설들을 관통 한 다음 만나게 된다.
마을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분된다. 얼핏보아 가이드가 입만 열면 말하던 대만의 가공할 집값에 견주어 볼 때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서야 입주가 가능한 저층 고급아파트 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옛마을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은 산자락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거리는 청결했고 도로변 주택은 고급스러웠다. 가이드는 틈만 나면 대만의 부동산 시세를 들먹이곤 했다. 차를 타고 이동 중에 그럴듯한 건물만 보이면 평당 얼마고 저떻고를 혼자서 떠들어 됐다. 대만의 주택사정의 일면을 미루어 짐작케 했지만, 그럴 수록 그의 집값 이야기는 경박해 보였다. 검담리 전체 인구는 4천명이다. 일대는 과거 군인의 거주지로 대만 국방부 관리 토지였다.
우리네 주민센터 라 할 수 있는 회관에 들어서자 주인공 빈부량씨가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숭실구민활동 중심이란 입간판 아래 '검담리 환경교욱중심'이란 붉은 글귀가 눈에 들어 왔다. 마을회관은 예전에 유치원 자리로 리모델링 하였다. 12년 전만 하더라도 쓰레기가 투기되어 쌓여 있는 흉한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대만의 손꼽히는 환경교육의 요람으로 변모했다. 그동안 161개 단체나 기관에서 13,757명이 견학을 다녀갔다. 국내에서도 몇 몇 단체가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왜 ? 어쨌든 검담리는 대만 정부로부터 에너지 절약 및 탄소 감축을 위한 프로모션을 지원받는 마을이다. 학생들의 팔수 교육장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약 20분 남짓한 시간 그가 검담리에서 일군 마을의 변화 과정과 지역민의 동참, 그리고 주목받는 검담리가 되기까지의 이렇고 저런 마을사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아마도 빈부량 이장이 아니었다면 마을은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거나 투기되어 결코 매력적인 마을로서의 변화는 없었을 것 같았다. 2006년부터 매주 둘째 일요일 전주민이 참여하여 마을 청소를 한다고 했다. 2009년부터는 월 1회 전문가를 초청하여 주민들의 생각을 넓히고 있다.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실제 변화된 마을을 통해 나타난 생물종의 유입은 더더욱 매진토록 하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노력을 결과로서 그는 대만정부나 타이베이시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활동의 귀감이 되어 많은 상을 받았다. 마을 회관이며 마을공원 게시판에는 관련 소식들이 훈장처럼 붙어 방문자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마을회관은 그가 일구고자 했고 하고 싶어 했던 크고작은 프로젝트의 집합체 였다. 옥상녹화를 비롯하여, 벽면녹화,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텃밭가꾸기, 태양광 집열판을 이용한 에너지 이용의 다변화와 수자원의 재이용과 효율적 이용을 위한 중수도와 빗물탱크의 설치 등은 마을 실천 의제였다.
그랬건만 왠지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의제였고 보편화돤 내용이었기에. 더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가 막상 와서 보니 달리 얻은 것이 없음에 대한 실망일 수도 있다. 나아가 마을이 주는 외형적 느낌이 국내의 낙후된 마을만들기의 현장과는 다름에서 오는 격차, 예컨대 중산층 이상의 ‘이 정도 사는 마을이라면’ 하고 선입감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동행자들의 일부는 큰 감명을 느낀듯 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빈 이장이 일군 마을의 환경변화는 대단한 일임에는 여지가 없다. 실제 이런 저런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마을만들기를 시도하지만, 공동체의 결집과 공동의 목표를 구현해 내는 일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 게다가 내용적으로 생태환경적 가치를 수행하는 과정 또한 형식적이거나 시늉인 것도 많기 때문에 검담리의 환경적 완성도는 주목할 만 했다.
이장의 안내로 마을 돌아보기 시간이 있었다.
빈 이장은 마을 내 폐공지 650평을 화단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회관 내 공터에 조성된 텃밭을 비롯하여 화분들
벽면 녹화도 시선을 붙들었다.
산지와 이어진 마을 가장자리는 공원으로 재단장되었고, 용수는 언급했듯 대부분 빗물을 이용한다고 했다.
일종의 소공원인데 '역행3호공원' 이란 명칭이 너무도 낯설다. 면적은 5851m²(약 1,770평이다 .
잘 정리되어 있었고 조경기법도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더욱이 그의 말에 의하면 버려진 공간이었다.
공원의 경계부는 마을과 군 시설, 묘지로 이루어졌다.
기존 마을과 공원의 경계가 담장 없이 지연스럽게 공원으로 연결되는 동선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공원의 경계부와는 다르다.
대만에서는 서기나 불기 또는 우라나라같은 단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 1911년 10월10일 손문에 의해 새로운 중국, 중화민국을 건국하던 해로부터 적용한다. 2014년은 대만력 103년이다. 군시설 앞 중화만국 85년 표지석은 1996년을 뜻한다.
마을의 녹화에 사용되는 퇴비생산 통이다. 나뭇잎과 흙을 섞어 발효시키는데 썩는 냄새는 없다. 이렇게 생산된 퇴비는 곧 시중에 판매된디고 했다.
처음 본 대나무류의 떡잎들
이쯤에서 일행은 궁금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으로 생활하는 가" 였다. 빈부량 이장은 의지가 굳고 강직한 사람이다.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대만 총통부 대령 출신의 군인이었다. 군 예편 후 마을 자원봉사를 하다 주민의 추천에 의해 이장이 되었는데 내리 3선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장이긴 하되 그는 월급없이 6만원 연금 생활자다. 결국 그의 활동은 자원봉사인셈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이장한다고 별도의 월급을 받는다면 누가 나를 신뢰하고 따라 주었겠는가. 마음과 열정, 서비스 정신에 더하여 예산이 있을 때 좋은 마을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예산을 언급했던 것은 마을 변화는 예산의 반영 없이는 구두선에 그칠 수 있고, 가시적 성과 없이는 지속적 활동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현재 검담리는 2002년부터 12년간 8억원의 예산을 지원 받고 있다. 예산은 1회적 접근이 아닌 년차적 집행된다. 계획과 수행 그리고 평가를 통해 성과를 공유하고 사업의 목표를 갱신한다.
마을일은 마을 구성원의 대부분인 노인들의 자원 봉사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마을 어른들이 솔선수범하여 마을을 깨끗하게 하니 아이들도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에는 쓰레기통이 없다. 뿐만이 아니다. 마을 구성원의 건강을 위해 빈이장은 걷기를 생활하고, 2010년 이후 초등학교 학생들의 하교길은 부모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다. 걷기를 장려하기 위해 검담산 일원을 걷기코스로하여 최종 종착지를 마을회관으로 하기도 했다. 완주한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걷기 프로그램을 통해 차량이용을 자제한 건강 증진과 마을 결속을 도모했다.
한 사람의 열정과 신념이 지역을 변화시켰다. 더불어 마을 구성원들의 변화도 뒤 따랐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는 ?
습관처럼 검담리 마을에서 본 식물들을 담아 보았다. 일상적으로 보는 식물체가 이니기에 그때 이후 이 식물을 기억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을을 지배하는 검담산 자락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Rhythm Of The Rain - Dan Foge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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