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2일차
예류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YEHLIU GEOPARK)을 방문했다. 대만날씨치고는 을씨년 스러웠다. 가이드가 춥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전날 옷을 갈이입을 시간 없이 다닌 결과 한국에서 입고간 겨울 복장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내복을 벗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의 복장은 한겨울에 가까웠다. 영상 9도에 그들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그 보다 더 차가운 듯 중무장 복장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바다를 본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오전 검단리 방문 다음 코스로 예류지질공원이 잡혀 있었다. 식사는 솔직히 단 한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달리 먹을 것도 없어 매끼니 충실히 먹어 두었다. 문득 사무실 근처 국제호텔 옆 중국인들이 몰려가 먹는 식당을 떠올렸다. 저가의 한끼 식사, 값이 문제가 아니다. 좀 제대로 먹어 봤음 했다. 호텔이든 식당이든 가이드들이 사람들을 풀어 놓고는 식탁에 빙 둘러 앉아 먹는 것이 보통인데 워낙에 사람이 많다보니 부폐고 아니고를 떠나 불결했다. 그리고 소란스러웠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 먹는 밥이 맛이 있을 리 만무 했다. 같이 갔던 일행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해외 여행에 있어 최악의 식단이었다. 그냥 먹었다.
밥과 요리가 나오는 동안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갑각류며 어류들을 구경했다. 갯가재 종류같은데 패트병에 성체가 들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도 추정컨데 페트병을 집으로 여기고 갯가재들이 들어 가 사는 특성을 이용해 잡아 들이는 것 같았다.
예류지질공원은 바다곶 끝단까지의 길이가 약 1.7km, 사이 너비가 300m가 채 되지 않는다. 지진(基金)도로 예류 정류장에서 바다곶 끝까지 길이가 약 2.4k에 다다른다. 해안이 뻗은 방향은 지층 및 구조라인과는 거의 수직에 가깝고 외부적으로 파도 침식과, 암석 풍화, 해륙 상대 운동 및 지각운동 등의 지질 작용의 영향까지 더해져 이와 같은 희귀한 지형, 지질 경관을 만들어냈다. 이하(예류류지질공원 웹사이트 참조)
예류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학설이 있다. 1. 핑푸(平埔)족 지신명의 음역이다. 2. 예류(野柳 ia-liu)는 스페인어의 Punto Diablos(마귀곶)의 Diablos에서 “D”와 “B” 음이 생략되면서 만들어졌다. 3. 예류현지 주민들은 옛부터 바다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육지는 한계가 있고, 쌀이 부족해서 내륙 연안의 쌀 상인을 통해 공급받아야 했다. 매번 식량을 운송할 때마다, 그 곳 주민 몇몇은 “야핑쭈이(鴨平嘴, 대만어, 가는 대나무 끝부분을 깎아 날카롭게 만든 것”로 쌀상인의 등에 맨 쌀 가마니를 찔러 구멍을 내었고, 그 쌀이 흘러 내리면 그것을 따라가며 주웠다. 그래서 쌀상인들의 대화 가운데 자주 “예인(야만인)”에게 또 “리우”(당했어)했어”라고 해서,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류지질공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제1구역에는 버섯바위, 생강바위가 밀집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는 버섯바위의 성장과정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생강바위, 벽개(갈라진 틈), 주전자 동굴과 카르스트판 등이 아주 풍부하며, 유명한 촛대바위와 아이스크림바위도 이 구역에 위치해 있다.
제2구역의 경관은 제1구역과 유사하다. 버섯바위, 생강바위가 그 주를 이루고 있고, 수량면에서는 제1구역보다 적은 편이다. 유명한 여왕머리, 용머리바위와 금강바위 모두가 이 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제2구역에 인접한 해변에는 코끼리바위, 선녀신발, 지구바위와 땅콩바위라 불리는 기이한 암석 4종류를 볼 수 있다. 이 네 바위는 모두 암층 속의 특이한 형상을 가진 단괴 혹은 결핵이 해수 침식을 받아서 해변으로 돌출된 것이다.
제3구역은 예류의 다른 측으로 해식평대이며, 제2구역보다는 좁다. 해식평대의 한 쪽은 절벽이며, 다른 쪽 아래에는 파도가 용솟음치고 있다. 여기에는 아주 많은 괴석들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중에 비교적 특이한 24효바위, 구슬바위, 바다의 새 바위가 있다. 이 세 바위는 특이한 형상의 단괴 혹은 결핵이 해수 침식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제3구역에는 기암괴석의 자연 경관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예류지질공원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보호구역이다.
예류의 지형은 주로 경사진 층의 침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곶과 만의 형성에 있어서 부드러운 암층이 침식되어 오목하게 들어가면서 만을 형성하였고, 견고하고 단단하여 침식력에 강한 암석들은 상대적으로 돌출되어 곶을 형성하게 되었다.
진입로를 따라 들어서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딴미엔(單面)산. 한쪽은 아주 가파르고, 다른 한 쪽은 비교전 완만한 산형이다. 형성원인은 주로 원래 수평이었던 지층이 조산운동의 횡압력으로 인해 점차 높이 솟아 오르고, 비틀리고, 기울어져서 습곡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예류에는 두 개의 딴미엔산이 있으며, 두 딴미엔산 중간에는 좁고 긴 해식평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예류지질공원 입구 근처에 있는 딴미엔산은 「큰 딴미엔산」이라 부르고, 곶 끝단 깊이 바다 가운데에 있는 딴미엔산은 현지인들에게 익히 불리던 「거북머리산」으로 칭하여 구분하고 있다. 큰 딴미엔산의 전망대에서는 멀리에 있는 예류곶 전체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암벽에는 한겹 한겹 조산 운동으로 생긴 밀림과 비틀림의 흔적, 그리고 해식평대 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촛대바위, 생강바위, 버섯바위를 볼 수도 있다.
예류 지역은 아열대에 속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습하다. 1년 중 약 6개월동안 강한 동북 계절풍이 불고 파도의 침식 작용으로 인해 풍화작용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암석은 그 색상이 더욱 다채로워지고, 또한 지하 암층의 특수한 구조로 인해 각양 각색의 기암괴석이 만들어진다.
바위 표면은 풍화작용의 차별적인 침식으로 벌집, 창살 형태의 외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예류의 해식평대에는 두 무리의 버섯 같은 형상의 바위가 있다. 위쪽은 굵고 큰 구슬 형상의 바위이며, 아래쪽은 비교적 가는 돌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바위를 버섯바위라 부른다.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의 유입, 특히 대규모 중국 본토사람들의 방문이 증가하고 있다. 솔직히 이기적 욕심이겠지만 좀 한산했드라면 했다.
다음 블로그에서 ?
혹이나 답압의 영향은 없을까. 바람과 파도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통해 깍아 놓은 기암을 그 보다 무서운 사람의 발길이 일시에 엄청난 양으로 투입되고 있다. 예류지질공원의 잠재된 그렇지만 조만간 현실화 될 수 있는 위기라 본다.
이곳의 식물상은 단순한 것 같다. 몇 종 없다. 입구의 수림대에서 보았던 큰잎 감람나무 군락과 해안가 상록관목의 린토우(林役)이 군락이 기억에 남는다.
지주근이 발달하였는데. 잎사귀 부분은 긴 피침형으로 가지 끝에 무성하게 나선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줄기에 돌아가면서 엽흔이 남아 있고, 잎 가장자리와 엽맥 중간, 엽측 아래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현지에서는 바람막이용 식물로 통했다.
예류지질공원에는 사람의 시선으로 규정되고 명명된 수많은 기암들이 있다. 뭔가를 닮았다 하여 같다붙인 바위명
문득 동해 해파랑길 답사길에서 만났던 온산 공단 이진리 범월곶 타포니 암석지대가 떠올랐다. 허나 그 장소는 공단 개발의 미명하에 무참히 깨어졌다. 타포니 암석지대를 포함한 이진리 해안 공원 28만㎡이 공업용지로 전환되면서 우리땅의 소중한 지질 박물관이 사라진 것이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불과 3~4년 전이었다. 울산시가 내건 도시 브랜드가 에코폴리스임을 감안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도 국가지질공원이 생겼다. 부산만 하더라도 태종대, 이기대, 암남공원 등 십여 곳이 지질공원으로 편입되었다. 시는 이들 자원을 갈맷길과 연계하여 코스화했지만 일반 시민은 늘 접하던 해안의 경치 좋은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질공원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3대 자연환경 보전 제도 [세계유산(World Heritage), 생물권보존지역(Biosphere Reserve), 지질공원(Geopark)] 중 하나로 지형·지질 유산과 함께 생태·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지역을 보전함과 동시에 연구·교육 등에 활용하고, 이를 대상으로 지질관광(지오투어리즘, Geotourism: 천연의 지형·지질 유산을 활용한 관광)을 운영함으로써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쩌면 너무 포괄적 접근이라 제대로 컨셉을 못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반면 예류의 경우 광광자원화를 통해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과제는 지질공원으로 선정 될 당시의 기준에 충실하고 보전 대책이 지속적으로 견지되는 지속 가능성인데, 억겁의 세월을 통해 형성된 지층이며 기암이 단지 뭔가 닮은 바위로서 포토존으로 전락해선 곤란한 일이다.
주변을 돌아 다니다 보면 이런 화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동상이 하나 있어 눈여겨 보는데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사람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단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국네 어디서고처럼 별도의 일본, 중국, 영어로의 소개는 없었다. 귀국 후 인터넷을 뒤적이자니 이 동상에 대한 사연이 전한다.
'의인 린티엔전(林添禎) 동상' 이다. 사연인 즉 , "옛날 예류가 아직 풍경구역으로 정해지지 않았을 때, 이곳은 현지에서 열려 있는 풍경구역에 속해서 안전관리상에 많은 취약점이 있었다. 1964년 3월 18일, 한 무리의 국립타이완대학의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오게 되었다. 그 중에 이름이 장꿔취안(張國權)이라는 홍콩 교포가 바닷가 큰 돌 위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 실수로 실족하여 바다에 빠졌다. 당시 그 근처에서 물건을 팔던 어민 린티엔전(林添禎)이 악천후에도 상관 않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기 내어 바다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계속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두 명은 불행하게도 익사하고 말았다.
린티엔전이 몸을 아끼지 않고 사람을 구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사회 각계를 감동시켰다. 당시의 총통인 장중정(蔣中正)은 이 일을 알고, 특별히 이곳까지 와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뿐만 아니라 린티엔전이 의를 위해 용기를 낸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명을 내려 현지에 동상을 세우고 교과서에 싣도록 하였다" 는 것이다. 출처: . http://www.ylgeopark.org.tw/ 그의 명복을 빈다.
지우펀(九份.Jioufen)으로 향한다. 타이완 북부 신베이시에 속해 있다. 이곳의 방문을 통해 대만 근.현대사에 대한해 대강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예류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가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바다를 담고 싶었으나 빠듯한 일정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을은 해발 500m 정도의 높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에서 내려다 보면 지룽항과 인양하이(陰陽海)가 보인다. 광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 빛깔이 아름답다고 했든가. 지우펀은 1920~1930년대 금광채굴로 번영을 누리던 마을이지만 몰락하면서 한적한 마을이 되었다. 셔틀버스 내린 곳에서 바로 지산제(基山街) 골목으로 주욱 이어진다. 일본풍과 대만 가옥이 뒤 섞인 약 2km의 외길 골목은 한국인 일부가 질색하는 취두부의 강한향이 베어 있고, 다양한 잡화점, 찻집, 군것질 음식점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그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방문 인파에 떠밀려 눈요기만 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야시장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마을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곳의 변화를 견인했던 것은 ‘비정서시’ 같은 몇 개의 영화에 마을이 등장함으로서 비롯됐다는 것이고, 일본 만화영화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을 만드는데 영감을 주기도 한 장소라는 것, 그리고 sbs가 만든 드라마 ‘온에어’ 촬영지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 드라마가 어떤 줄거리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꽃보다 할배’라는 텔레비전 오락프로 방영 이후 한국 관광객의 방문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미디어 효과에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우는 아홉이란 뜻으로 예전에 아홉집 밖에 없던 작은 마을로 늘 장을 볼때 늘 아홉집 전부 구입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우펀은 1947년 2월28일 3만명 이상 학살된 본성인들의 고통과 외성인과의 갈등을 영화로 만든 비정성시(悲情城市)가 촬영된 곳이다. 영화는 1989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받으며 이 마을을 부각시키는 일등공신으로 가능했다. 헌데 정작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228 평화기념일로 지정해고 있다. 2차 대전 후 대만에서는 “개가 가니 돼지가 왔네 ”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말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대만을 떠난(1895년~1945년) 후 중 국 공산당에게 쫒겨온 국민당을 위시한 중국 본토사람들을 비하해서 일컷는 말이다.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한 중국인을 본성인(本省人)이라 하고 2차 대전 후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외성인 이라한다.
1945년 10월 대만 주둔 일본군이 국민당 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후 대만은 국민당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수탈과 지배에 시달리던 본성인들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기대가 .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외성인에 비해 본성인의 수(85%)가 월등히 많았음에도 정부의 요직은 장개석을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을 분 아니라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초기 대만 헌법에 수도는 남경이고 타이뻬이는 임시수도로 규정하고 계엄령을 통해 본성인을 탄압했다.
2.28 사건의 도화선은 1947년 당시 시에서 린쟝마이(林江邁)라는 한 여인이 허가 없이 빌딩 복도에서 담배를 팔다가 담배주류공사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에 걸림으로써 벌어진 사건에서 출발한다. 단속반은 여인을 소총 개머리 판으로 가격하면서 중상을 입히는 등 과잉단속 하는 과정에서 총격이 발생하면서 촉발했다. 예컨대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 역 근처에서 밀수입한 담배를 팔던 여성을 본국 전매국 단속반원이 구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본성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면서 사상자(학생1명)가 나왔다. 28일 성난 군중들은 타이베이시에 발포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찰과 군 본부를 에워싸고 시위에 들었다. 그럼에도 타이완 경비총사령관이었던 천이(陳儀)는 사태수습 보다는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한다. 격분한 시민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들을 구타했고 그 결과 한 경찰관은 사망하게 된다. 이에 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교전 형태로 치닫는 한편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시위가 악화되었다.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해 타이베이시민들의 궐기를 독려하기에 이르렀다.
시위전모가 타이완 전역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부터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일제 패망 후, 국민들에게 자유를 줄 거란 기대를 실망으로 바꾼 1년반 동안의 국민당 체제에 대한 분노가 2.28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3월1일 이후 시위는 전 섬로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대만 언론 자유와 담배의 국가 전매를 폐지를 요청하는 한편 정치제도의 개혁과 인권 보장 등 32개 조항을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국민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이 대만으로 진주 3월 9일부터 대대적 살육과 약탈이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원주민의 학살이 있었고 종교지도자. 정치인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사태는 3개월이 지난 5월 16일 종결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사건은 대만의 분열로 자리잡았고 국민당은 1949년에서 1987년(7.15)까지 계엄령을 지속시키며 탄압정국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계엄령 해제전까지 이런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다. 1988년 리덩후 정권이 출범한 이후 2,28 진상조사가 있었고 4년에 걸친 조사결과 외성인 사망자 7~8백명 포함 본성인 1만8천에서 2만8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위령비가 서고 1997년 사태 50주년인 1997년 대만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있었다.
비정성시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여인의 진통 소리와 이어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된다. 타이완의 지룽(基隆)에서 일흔 다섯 살의 임아록(李天祿) 노인은 작은 식당을 하고 있는데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이자 장사를 하는 문웅, 의사로 일본 군의관으로 나갔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문상, 정신병을 앓고 있으면서 행동이 불량한 문량,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문청(양조위 분)이다.
막내인 문청은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절친한 친구인 오관영과 함께 살고 있다. 문청은 오관영의 누이동생인 간호사인 관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첫째 문웅과 셋째 문량은 상해에 본거지를 둔 범죄 조직의 유혹으로 밀수에 손을 댔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문량은 석방되지만 고문으로 폐인이 된다. 2.28사건이 터지자 넷째 문청의 친구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문청도 옥살이를 한다. 큰형이 상해 깡패들에 죽자 문청은 임씨 집안의 유일한 남자가 된다. 감옥에서 석방된 문청은 관미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낳지만, 그 역시 당국에 체포되어 생사불명이 된다.
참혹한 시대상을 표현한 비정성시는 대만 영화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연출했으며,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양조위가 벙어리 사진사 역으로 출연했다. 격동의 현실 속에 양조위가 맡은 역은 사회에 울분을 느끼지만 벙어리이자 귀머거리인 양조위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삶을 표현한다.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한 가족의 해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에서 벙어리 문청은 말은 자막에 적힌 대사다. 이렇게 된 것은 양조위가 홍콩태생이라 대만어를 할 수앖었던데 기인한다. 감독이 문청 역에 양조위를 염두해 두고 각본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사전에 이곳의 정보를 사전에 알고 갔더러면 훨씬 알찬 방문이었을텐테 그러지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게다가 가만 서 있을 환경도 되지 못했다. 떠밀리고 떠밀려 골목의 끝까지 가야했다.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게 했던 것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은 아메이차로우, 비정성시라는 찻집이 있다. 특히, 아메이차로우는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길의 모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고양이의 의미는 ?
요즘 한창 노거수에 꽃혀 있다보니 여기서도 이 우림한 나무가 반가웠다,
다음 코스인 용산사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셔틀버스 마다 만원이다. 일부는 걸어서 가자 하여 걸어가기로 작정하고 도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갑자기 부른다. 결국 택시를 나누어 타고 전세승합차가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이 또한 아쉬웠다. 짧은 시간이나마 도로를 따라 걸으며 일대의 풍광을 보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무산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 이 바다를 다시 볼 수있을 것인가
지우펀에서 건진 한 컷
용산사까지는 약 한시간 아니 더 걸렸지 싶다. 가는 길에 눈요겨 본 공동묘지
지우펀에 올라가서도 내려 올때도 그리고 차을 타고 아동할 때 마다 보았던 묘지들,
대만의 무덤 형태에서 초분은 없다. 시멘트나 석재를 이용하여 납골과 분묘 등을 혼합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데, 망자니 후손의 재력 여부에 따라 호화여부를 가늠한다, 또 설령 돈이 많지 않더라도 망자에 대한 예우차원애서 과도하게 조성되기도 한다. 평균 50명 규모에서 많게는 수백평에 으르는 초호화 묘가 조성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장례문화는 우리로서는 이해 못할 장면이 많다. 장례기간 또한 상주의 마음먹기기에 따라 몇 달간 지속 될 수도 있다. 좋은 날이 택일되지 않는다면 일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리고 막상 장례가 치루어지게 되면 비키니 무희를 부른다든지 밴들르 불러 망자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생전과 사후에 걸쳐 두번의 큰 행사를 맞하는데 결혼과 장례식이다. 그만큼 대만의 장례식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대만의 장례문화는 좀 많이 튄다. 내침김에 일본의 장례문화도 곁드려 본다, 일본의 경우 죽으면 대부분 사찰에 가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신사에 사서 참배하고 결혼은 교회나 호텔에서, 죽으면 반드시 절에 가서 장례를 치루고 시신은 절로 모시고 가서 장례를 치룬다. 과거 장례와 분묘는 특수한 신분에 국한되고 서민은 산 등에서 풍장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 보이는 석탑묘는 에도시대 중기에 확립된 ‘사청제도’에 기원하며, 그 내용은 서민이 사찰에 신도로 등록하게 되면 호적과 같은 효력을 지니게 된다. 이후 사람이 죽으면 사찰에서 장례를 치루고 묘를 설치하게 된다. 장례절차는 임종 > 유족협의 > 유체안치 > 장의업자 협의 > 납관 > 사망통지 > 신식(神式), 북교식, 무종교식 등으로 장의. 고별 식 후 화장 > 환골(還骨) 하게 된다.
장례식의 경우 밀장(密葬)과 일반적 장례식이 있다. 밀장의 경우 5일장 또는 10일장이 있으며 10일장의 경우 먼저 화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큰 회관이나 사찰에서 영가의 사진과 유골을 모셔두고 고별식을 한다. 일반 장례식은 절에서 영구차로 바로 화장터로 가는 형태다. 예전에는 산에 납골당을 크게 만들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주거지 근처 납골당에 설치하며 대도시에서는 납골아파트를 만들어 분양받아 유지한다. 아래 좌측 사진은 오끼나와 공동묘지로 어딘지 대만 풍이 얼핏 보인다.
한국의 공동묘지 풍경이다. 하지만 한국 역시 장례문화의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 지고 있다. 매장에서 화장 납골형대로의 전환이다. 용지가 없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어 용산사 근처에 도칙했지만 도로는 마비되었다.
때마침 무슨 왕의 생일기념 이라 거리는 거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폭죽소리와 자욱한 연기속에 우리네 날나리같은 악기로 불어 대는 소리 통에 소란하고 혼잡했다. 거기다 오토바이며 차들이 엉키고 설키며 ...
거리가 나리법석이었다. 행열이 지나갈 때 마다 폭죽이 콩 뽁듯 요란한 소라와 연기를 내었다. 도로는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럴려니 하는 것은 이들에게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일정에 없었던 장면과의 만남은 현장 대응이었다. 약소 장소를 정해 두고는 일행은 둘이 서이 나누어 야시장과 용산사로 사라졌다.
용산사는 1470년에 건립되어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여러차례 회손되었다가 195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용산사는 특이하게도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사원으로 사원의 앞부분의 전당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뒷쪽의 전당은 도교의 여러신을 모시고 있다. 화려한 조각이 인상적인 이 사원은 중국 남방식과 타이완 전통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전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문을 연다고 한다. 타이완의 종교 분포를 보면 불교(311만), 도교(198만), 기독교(48만), 천주교(29만), 회교(5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용산사는 전관이 불교이고, 후관이 도교를 위한 사찰이다. 밤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해 방문한다. 참 신神도 많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둥의 조각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또 기도발도 있어 그 소문이 사람을 더 불러 들인다고 한다. 한 젊은 처자가 꿇어 앉아 패를 던지고 있다. 두 개의 패를 던졌을 때 한 개의 패가 뒤집어지고 다른 패가 엎어지면 신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고, 두 개의 패가 모두 엎어진 경우는 신도 잘 모르겠으니 다시 던져보라는 의미이고 두 개의 패가 모두 엎어진 경우는 신조차도 모른다 고 하는데, 아무튼 이 처자 계속 패를 던지고 있었다.
대만이나 중국의 도교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중국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법륜공(法輪功) 사건 역시 도교의 한 파다. 관련한 글을 경인잉보거ㅏ 2012년 한중수교 20년에 즈음하여 기획기사로 다룬 적이 있다. 신진식 인천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가 쓴 글 중에 일부를 가져 와 보았다.
"... 중국 문학의 거장이자 현대 중국 지성사를 대표하는 인물인 루쉰은 도교가 중국 민중생활에서 점유하는 절대적인 지위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이를 "중국의 뿌리는 모두 도교에 있다"라고까지 말하였다. 루쉰의 이 말은 도교를 중국을 중국답게 하는 모든 것이라고 표현한 셈이다. 루쉰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종종 중이나, 여중, 회교도, 예수교인 등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도사는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중국문화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
중국 민중과 도교와의 내적 결속 그리고 도교가 중국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처럼 대변한 말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도교가 중국 혹은 한국의 대다수 민중의 삶과 실제로 깊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교가 중국 혹은 한국 사회 근저의 중요한 문화내용이라는 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들어서 일본 및 서구 제국의 학자들은 일찍이 도교의 이러한 측면에 주목했다. 일본 도교학의 선구자였던 다찌바나는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하에 40여년간 대륙의 향촌에 머물면서 도교를 탐구하였고 서구 도교학의 기초를 마련한 앙리 마스페로 역시 프랑스 중국학의 사회·민속학적 전통을 계승, 도교연구를 통해 중국문화의 바탕을 이해하고자 했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중국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도교의 교리는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중심으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고, 시대에 따라 복점(卜占), 오행(五行), 의술 등을 혼합하며 한편으로는 유교, 불교의 윤리나 의례를 융합하여 성립되었다. 사상 형태상으로 보면, 도교는 한국이나 중국 민족의 현세주의적 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러한 신앙에는 신선술(神仙術), 장생술(長生術), 연단술(鍊丹術), 방중술(房中術)등의 방기(方伎)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세에서의 행복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세에서의 행복은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장수, 무병, 재앙의 소면, 선 등의 오복(五福)이다.
도교의 기본적인 신앙은 다신교이지만, 중심이 되는 신으로는 초기에는 노자를 신격화한 노군(老君)이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있고, 6세기경부터는 우주의 도를 신격화한 태상도군이나 원시천존, 13세기경부터는 황제의 변신인 옥황대제나 여조가 예배의 중심으로 되었다. 이 외에도 연단술에서 유래한 부뚜막의 신이나 해상의 수호신인 마조, 상업과 재물의 신인 관제, 학문의 신 문창제군 등도 도교의 신들로 간주되기도 하나, 이러한 신들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신을 도교화한 것이다.(중략) ...리홍즈(李洪志)가 이끄는 도교수련단체인 법륜공은 개방화 이후 사회주의 이념의 쇠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정신상의 황폐 등 이념적 공백의 상황 속에서 급격히 성장하였다.
수련문화인 법륜공과 국가 권력의 주체인 공산당과의 충돌은 사회주의 정권하에서의 개인성과 사회집단과의 관계, 종교조직의 자율성 등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어쨌든 태평천국(太平天國) 이래 최대 규모 종교조직의 공권력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반정권적 성향의 유래를 지닌 대중적 도교조직이라는 점에서 자못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도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탐색해 보면 은(殷) 및 동이계 신화까지 소급된다. 이들 신화는 주대(周代) 이후 억압, 잠복되었다가 도교로 전화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도교의 주변적·이단적·기층적 성향은 출발부터 내재해 온 생래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살펴 본 바 도교의 이러한 성향은 역사적으로 정치·사회·문화 제 측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왔다. 우리는 도교가 동아시아의 역사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지배이념에 대해 상대적이고 보완적 위치에 서서 비판과 승화의 기능을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도교도 특정한 역사시기에 왕권과 결탁하여 지배계층을 비호하고 정치상의 부작용을 낳은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도교는 비주류의 편에서 경직된 주류의 논리에 활력과 다양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해 왔다. 넓은 의미에서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설정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에 이어 근대 이후의 도교는 어떠한가? 일찍이 노신은 도교를 '중국의 뿌리'라고 지칭했지만 사실 이 말 속에는 근대 지향의 과정에서 비판해야 할 근원적 대상이라는 함의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근대 이후 도교는 유교가 전근대적 봉건의식의 산실로 매도되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비과학과 미신의 온상으로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신앙적인 방면에서 도교는 중국 대륙의 경우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 이후 탄압을 받아 거의 소멸 상태에 있다가 개혁 개방 이후 빠른 속도로 소생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홍콩 및 동남아시아 화교 거주 지역에서는 민간 종교로서 여전히 광범위하게 신앙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인 교단이 존재하고 있으며 도사도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홍콩이나 대만의 수많은 상점이나 식당 등의 입구에는 도교의 재물신을 모신 재단이 놓여 있다. 이를 통해 홍콩과 대만 중국인들의 도교의 신앙심 정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
인근 야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야시장은 제대로 둘러 보지 못했다. 예의 축제 때문이었다.
가계마다 돌며 복을 베푸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주관모임은 행사 진행 연령대로 봐서는 20대를 전후한 극히 젊은 층들이었다. 가이드는 이들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조폭이라 했다.
워낙에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이곳 역시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관광객보다는 지역주민이 많았다.
용등이 거리를 꿐틀거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의 장군들이 팔을 휘저으며 뒤따르고 ,
화려한 복장과 무서우면서도 다소 익살스러운 이들 장군은 그들이 흠모하는 신들 중의 일부다.
요란스러운 행열이 지난간 뒤 야시장 주변을 얼핏 보았다. 낡은 홍등가와 시장은 그들 나름의 생존의 터전이었다.
축제를 주관한 이들은 이렇게 시장 한켠에서 음식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확인하고 있었다.
야시장을 빠져나와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얼추 9시경, 대만 마지막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호텔 근처 간이 주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다.
누군가 술값을 지불하고 자리를 일어서니 11시 반,
대만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밋밋하고 딱히 기억에 남음이 없는 ... 다만 이곳에도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 ...
Parisienne Walkways - Gary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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