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 기승이라는 말도 이젠 지겹습니다.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한다는데도 오랜 가뭄이 해소될 거라는 생각에 ‘착한 태풍’으로 간주해 반겨 맞습니다. 매년 휩쓸고 가던 태풍이 6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참 신기하다 싶은 일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올해의 이상 기후현상만 해도 얼마나 이례적입니까? 봄에는 이상 저온으로 서늘한 날이 이어지더니 여름에는 이상 고온으로 한 달 넘게 폭염이 지속되고, 올 겨울은 반대로 기록적인 한파가 예상되는 모양입니다. 이 더위 속에서 수련 하나만큼은 싱싱하게 잘 피어나 있습니다.
▲ 더위 속에서도 싱싱하게 피어난 수련(국립수목원 육림호)
이렇게 급변하는 날씨 속에 식물들은 아마 죽을 맛일 겁니다. 다 죽어가는 낙지처럼 힘없이 축 처져 있거나, 미국선녀벌레 같은 각종 병충해에 시달리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태풍이라도 와서 한바탕 흔들어놓은 후 새로운 질서체계로 재편하는 것이 한 번쯤은 필요해 보입니다.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변화는 사실 식물의 생존과 멸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식물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로 수억 년간 쌓이고 쌓였을 빅데이터를 활용해 서서히 진화를 거듭해 오며 그러한 환경변화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종족 보존에 임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개 후손을 많이 만들어 퍼뜨리는 전략을 썼을 겁니다. 많이 낳으면 많이 살아남을 거라는 단순한 계산에서 무식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후손을 많이 만든대도 유전적으로 비슷한 것들뿐이면 급격한 기후변화가 닥쳤을 때 단박에 멸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유전적으로 단순한 후손보다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한 후손을 만들기로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예상치 못한 변화가 닥친대도 모두 죽지 않고 일부만이라도 살아남아 종족을 보존할 가능성을 높아지는 것입니다.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만들려면 번식 방법부터 새롭게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 몸에서 나온 꽃가루와 밑씨를 수정시켜 만들어지는 후손은 만날 그놈이 그놈이라는 사실을 식물은 경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종이면서 다른 개체인 상대방의 꽃가루를 받아들여 각자의 유전자를 반반 섞은 후손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기로 합니다.
▲ 닭의장풀은 제꽃가루받이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꽃이다
세부적인 실천 방안은 꽃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암꽃과 수꽃으로 나누어 피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하나의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모두 달리는 양성화는 꽃이 피는 과정에서 자기 꽃가루가 자기 암술머리에 닿아 제꽃가루받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암술이나 수술 중 어느 한쪽만 분명한 성기능을 하는 꽃인 암꽃과 수꽃을 따로 만드는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꽃과 수꽃을 따로 만들면 뭐 합니까? 암꽃과 수꽃이 같은 나무에 달리는 암수한그루 나무들은 자기 수꽃의 꽃가루가 자기 암꽃의 암술머리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양성화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중력의 방향에서 높은 곳에 암꽃을 만들고 그 아래쪽에 수꽃이 달리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소나무가 그러합니다.
▲ 소나무의 암꽃은 위쪽에 달리고 수꽃은 아래쪽에 달린다
그래도 맘에 놓이지 않으니까 암꽃과 수꽃의 성숙시기를 다르게 하는 전략을 쓰기도 합니다. 즉, 수꽃을 먼저 피우고 나중에 암꽃을 피우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양성화 내에서는 수술과 암술의 성숙에 시간차를 두어서 제꽃가루받이를 피하는 방법을 씁니다. 도라지 같은 초롱꽃과 식물을 잘 보면 수술 먼저 핀 후에 암술이 돋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도라지의 수술이 발달한 시기(왼쪽 사진)와 암술이 발달한 시기의 달라진 꽃의 모습.
아니면 아예 암꽃이 피는 개체와 수꽃이 피는 개체를 따로 만듭니다. 그렇게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나무에 피는 걸 암수딴그루라고 합니다.
생강나무가 대표적인 경우이고,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습니다. 암나무와 수나무의 거리가 너무 멀면 바람의 중매만으로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람보다 멀리 이동하는 곤충 같은 매개자를 불러들여 심부름 시키는 전략을 씁니다. 일종의 택배입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꽃들의 생존전략 일단 곤충의 눈에 잘 띄어야 하니까 꽃들은 점점 화려해집니다. 말채나무나 층층나무처럼 여러 개의 작은 꽃을 만들어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하는 전략을 쓰기도 합니다. 아니면 백당나무나 산수국처럼 분업화된 기능을 가진 꽃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 층층나무는 여러 개의 자잘한 꽃이 모여 핀다
▲ 산수국은 분업화된 방식의 꽃을 피운다
매개자라 불리는 심부름꾼들은 심부름 값을 주지 않으면 계속 부려먹기 곤란합니다. 그러니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할 꿀이나 꽃가루를 은밀한 곳에 숨겨둡니다. 향기를 날려 꿀의 존재를 알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후각으로 맡느냐 못 맡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곤충을 유혹하는 꽃들은 대개 향기가 있습니다.
▲ 미선나무는 개나리처럼 생겼지만 매우 좋은 향기를 날린다
집단 개화도 나름의 전략입니다. 높은 산 또는 고지대의 식물들은 개화할 수 있는 기간이 짧으므로 단시간에 많은 양의 꿀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무리지어 꽃을 피우는 전략을 씁니다.
그렇게 집단으로 꽃이 피면 많은 양의 꿀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벌들이 알고 찾아와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꽃가루받이를 해줍니다. 가구점이 밀집한 가구단지에 가구점을 내면 전단지를 많이 뿌리지 않아도 손님이 알아서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철저히 경제성의 원리를 따르는 식물사회에 있어 아주 경제적인 방법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셈입니다.
▲ 중국 왕지에 집단으로 일시에 피어난 꽃들
이렇듯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전략을 갖고 끊임없이 진화해 온 식물이 이 초록별의 진짜 주인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당장 나 하나의 생존보다 종족 전체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진화 방식이 어쩐지 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지구에 남을 최후의 승자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입니다./ 08.25 조선/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La Canzone Di Orfeo - Marisa San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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