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 국가 -미국의 해외 군사기지는 어떻게 미국과 세계에 해를 끼치는가 데이비드 바인 지음, 유강은 옮김/갈마바람
저자 데이비드 바인은 현재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인류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수치의 섬: 디에고가르시아 미군 기지의 비밀스러운 역사ISLAND OF SHAME: THE SECRET HISTORY OF THE U.S. MILITARY BASE on DIEGO GARCIA》가 있으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마더존스〉, 〈크로니클오브하이어에듀케이션〉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목차
추천의 글 _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한국어판 서문
서론
1부토대
1장 기지 국가의 탄생
2장 리틀아메리카에서 릴리패드까지
2부발자국
3장 쫓겨난 사람들
4장 현재의 식민주의
5장 독재자의 편을 들다
6장 마피아와의 동침
7장 독성 환경
3부노동
8장 모두가 복무한다
9장 섹스를 팝니다
10장 군사화된 남성성
4부돈
11장 계산서
12장 우리는 전쟁 모리배입니다
13장 밀콘 건설
5부선택
14장 갈취의 대가들
15장 이제 그만
16장 릴리패드 전략
17장 진정한 안보
지은이의 말
감사의 말
주
온라인 자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기지 국가, 미국
미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독일에 174개, 일본에 113개, 한국에 83개를 비롯하여 해외에 686개의 ‘기지 소재지’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공식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기지까지 합치면 해외 미군 기지의 수는 800여 개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그 어떤 민족이나 국가, 제국보다도 많은 군사 기지를 다른 민족의 땅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어느 누구도 미국이 그렇게 많은 해외 기지를 둘 필요가 있는지 묻지 않는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미국이 해외에 수백 개의 군사 기지를 유지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거나 당연하게 여기며, 해외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도 자신들의 땅에 외국 군대의 군사시설이 있는 것을 정상적인 일이라 여긴다. 이처럼 미국의 해외 군사 기지는 오랫동안 의문 없이 받아들여졌고, 소위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평화 유지에 필수적인 당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지도 20여 년이 흘렀고 전통적인 동맹이나 우방의 개념도 희미해져가는 이 시대에, 과연 이 거대한 ‘기지 국가’는 여전히 세계 평화에 긍정적이고 필요한 존재일까?
미국의 군사 문제에 천착해온 아메리칸대학교의 데이비드 바인 교수는 이 책 『기지 국가』에서 미국이 왜 그렇게 많은 군사 기지를 해외에 두려 하는지, 그리고 미국의 해외 군사 기지가 미국과 전 세계인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날카롭고 냉철한 시선으로 분석한다. 과연 미군 기지는 세계 평화의 수호라는 명분에 맞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바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미국의 해외 군사 기지라는 렌즈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와 이 나라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미국이 지구의 나머지 국가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솔직하고 단호하게 살펴보는 책이다. 미국이 해외 곳곳에 무질서하게 세워놓은 기지들을 검토하면, 미국이 어떻게 영구 전시 체제에 놓여 있었는지, 미국 경제와 정부가 어떻게 지속적인 전투 준비에 의해 지배되어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담장 안에서, 군대에서 하는 말로 ‘철조망 안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기지들 덕분에 더 안전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외기지 때문에 우리는 영구적인 군사 사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사회는 여러 면에서 우리 모두의 안전과 안정을 해치고, 국내와 해외의 많은 이들의 삶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많은 미군 기지는 여전히 세계 평화에 긍정적이고 필요한 존재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이 많은 숫자의 기지와 병력을 해외에 상시 주둔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미국과 그 동맹 국가들의 안보 정책에서 거의 종교적 신념이나 다름없었다. 기지가 많을수록 안보가 튼튼해지고 전쟁에 대한 억지력이 생긴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이러한 뿌리 깊은 믿음의 기저에는 소련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미국의 군사력과 기지를 집중시킨다는 ‘전진 전략’이라는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야만 이른바 소련의 팽창주의를 포위해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해체되었고, 냉전 체제는 깨졌으며, 미국과 맞설 초강대국은 존재하지 않고, 동맹의 개념은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 전략’에 대한 믿음은 미국은 물론 여전히 ‘동맹국’이라 일컬어지는 국가들에서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당연시 되고 있다. 하지만 바인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냉전 시대의 전통적인 군사 정책에 의문을 제기해야할 때이며, 미국의 군사 기지를 다른 나라의 영토에 그토록 많이 주둔시키는 것이 과연 미국 및 주둔국의 이익과 안보, 더 나아가 세계 평화의 유지에 부합하는 일인지를 냉철하게 따져보아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바인 교수는 이 책에서 해외 미군 기지가 만들어내고 있는 온갖 악폐와 문제들을 보여준다. 오수 유출 사고 및 독성 물질의 고의적 매립·배출 등에 따른 광범위한 환경 훼손, 주둔지 현지 주민을 상대로 한 강간 등의 범죄, 현지 주민들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거주 권리를 침탈하는 기지 건설, 기지 유지 또는 친미 정권 수립에 도움이 되는 마피아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기지 외부에서의 착취적인 성매매 산업에 대한 암묵적 용인 등 미군 기지가 유발하는 사회적 문제와 갈등은 끝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과 주둔지 국가들이 미군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막대한 경제적 비용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제대로 된 검증 작업도 없이 대규모의 국방 예산이 편성되고, 결국 교육, 복지, 주거, 일자리 창출 등 사회 발전에 투여되어야 할 국민의 세금이 군산복합체라는 거대한 공룡의 배를 불리는데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군 기지가 세계 평화와 기지 수용국의 안전을 증대시켜주니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바인 교수는 정말로 그런지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령 중국이나 러시아가 장래에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세우는 미군 기지들이 오히려 중국이나 러시아의 군사적인 대응을 자극함으로써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군 기지가 오히려 위협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어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는커녕 실제로 전쟁 가능성을 높이고 주둔지 국가의 안전을 해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땅의 미군 기지를 다시 생각한다.
외국의 군대가 우리나라의 땅 한복판에 높은 담장을 둘러치고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현실이다. 게다가 전범국가가 아님에도 한국에는 독일, 일본에 이어 가장 많은 수의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큰 안도감을 느끼면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주한 미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이는 곧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로 치부하여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물론 대북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주한 미군의 존재를 부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대북 억지력 이상의 다른 목적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규모의 주한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야기하며 대한민국에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따져볼 필요는 있다. 최근만 해도 그 효용성이 제대로 입증되지도 않은 사드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배치하면서 사회적 충돌이 야기되고 중국과의 갈등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주한 미군이 주둔지를 용산에서 평택으로 옮기면서 건설한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 해외 기지 ‘캠프 험프리스’는 주한 미군의 목적이 단순히 대북 억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군사허브’이자 세계 최대 대중(對中) 전초기지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주한 미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자주 국방의 실현을 저해한다. 지금까지 북한보다 10배에 가까운 국방비를 지출하면서도 여전히 미국에 국가의 안보를 의존하는 현실은 많은 병폐를 낳는다. 국가 방위력의 제고가 최우선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할 무기 수입이 미국 군산복합체의 로비에 휘둘리면서 ‘정무적 판단’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등장하고 방산 비리로까지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우리가 북한 군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로지 한미연합 방위능력에 의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에 반대하는 군 장성들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일갈한 바 있다.
최근 미국과 북한이 서로를 향해 위협의 수위를 높이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과연 미국은 진정으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원할까? 그래서 이 땅에 주한 미군이 없어도 되는 날을 우리만큼 고대할까? 한반도에 대규모의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 및 미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만큼 진정으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원할는지는 미지수다. 결국 대한민국이 주체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시대와 국민의 요구이다. 그렇게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먼저 미국과 주한 미군을 맹신의 대상이 아닌 객관적 실체로서 이해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기지 국가’ 미국의 실체를 보여주는 이 책은 주한 미군을 좀 더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인 교수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기지 국가』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기지가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궁극적으로 이 책이 한국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진영과 이념을 떠나 우리 국민 모두가 염원하는 일이다.
책속으로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중동에서의 기지 증강은 세계 곳곳에서 힘을 추구하려는 수천 년 넘게 이어진 전략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부터 영국제국에 이르는 여느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해외기지를 활용해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땅과 자원과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은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비롯한 앞선 제국들보다 훨씬 더 지구를 에워싸는 전례 없는 규모의 기지망으로 정의되기에 이르렀다.--- p.73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미국 정부의 지난 기록을 보면 비민주적 국가, 심지어 카타르나 바레인 같은 독재 국가에 기지를 두는 쪽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32쪽)
미국은 1944년 괌을 일본에게서 다시 빼앗은 뒤 수천 명을 강제 이주시키거나 주민들이 섬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다 … 군은 결국 섬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했다. 군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 중에 오키나와의 넓은 구획의 땅을 빼앗고, 주택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미국은 1년 만에 오키나와섬 경작지의 20퍼센트에 이르는 4만 에이커를 차지했다. 1950년대에 이르면, 군은 오키나와 경작지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해서 결국 섬 주민의 약 절반인 25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114쪽)
군은 어떤 지역에 기지를 보유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때는 대체로 전략적인 고려를 중시하지만, 주어진 지역 안에서 특정한 기지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토지 취득이 얼마나 용이한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군이 토지를 얼마나 쉽게 취득할 수 있는가는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무력한지와 큰 연관성이 있으며, 이 사실은 다시 민족, 피부색, 인구 규모 같은 요소와 연결된다.--- p.119
미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 정부는 토지 수용권을 발동해 대추리와 평택시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 농민들의 땅 2,851에이커를 확보했다. 농민들이 저항하자 한국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보내 퇴거를 집행했다. 전투경찰이 불도저와 포클레인을 앞세우고 대추리에 진입해서는 시위대를 구타하고, 학교를 부수고, 농민들의 논과 관개수로를 망쳐놓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계속 이주를 거부하자 한국 정부는 경찰, 군인, 철조망으로 마을을 에워쌌다. 2007년 4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이 마침내 쫓겨났다.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아. 가슴이 갈가리 찢어졌어.”--- p.120
1898년 이후 생겨난 미군 기지에 관한 한 대규모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독재 국가는 미국 관리들에게 기지 수용국으로 “변함없이 매력적”이었다. 그에 비해 민주 국가는 “선거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과 일관성의 측면에서 덜 매력적”이었다.--- p.155
워낙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하다 보니 미국 군대가 하루에 소비하는 석유량은 스웨덴 전체의 소비량보다도 많다 … 석면, 납이 함유된 페인트, 기타 위험 물질 등 독성 물질을 강과 개천에 그냥 흘려보냈다. 또 툭하면 먼지를 막기 위해 비포장도로에 기름을 뿌렸다. 일부 기지에서는 핵무기, 생물무기, 화학무기와 관련된 위험 물질들을 바다에 버렸다. 육군의 한 대변인은 미국 11개 주의 수역에서 육군이 “비밀리에 신경가스와 머스터드가스 물질 6400만 파운드를 바다에 버렸고, 화학물질이 함유된 폭탄, 지뢰, 로켓탄 40만 개, 500톤이 넘는 방사성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거나 배의 짐칸에 넣어 통째로 가라앉혔다”고 인정했다. (194, 195쪽)
한국에서 미군 기지는 화학물질, 연료, 기타 독성 폐기물의 유출, 누수,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고의적인 매립 등으로 광범위한 피해를 야기해왔다. 미군이 최근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한 기지 34개 가운데 14개에서 검출된 암 발생과 관련 있는 화학물질 잔여량은 한국의 일반적 기준을 초과한다. 군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한 기지에서는 살충제, 제초제, 용제, 배터리액, 석유 제품 등을 함부로 보관하고 처리한 결과 주변 토양과 지하수가 오염되었다.--- p.201
기지촌과 성매매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고자 분투하던 한국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정부 문서를 보면, 남성 관리들이 휴가를 받은 미군 병사가 일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돈을 쓰도록 장려하는 전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관리들은 기초 영어와 예절 수업을 제공해 여성들이 좀더 효율적으로 자기를 팔고 더 많은 돈을 벌도록 장려했다. (232쪽)
2002년 한 보고서에서 (미국) 국무부는 한국이 인신매매 피해 여성의 종착지라는 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2007년, 3명의 연구자는 한국의 미군 기지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 유라시아 출신의 여성들을 한국과 미국에 공급하는 초국가적인 여성 인신매매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235쪽)
군대의 제도화된 성매매는 기존의 젠더 규범?남자와 여자는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문화적 관념?에 의존하는 한편 이런 규범을 강화하기도 한다. 군대의 제도화된 성매매는 남자들에게 여성의 성적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군인 정체성의 일부이자 남성 정체성의 일부라고 믿도록 훈련시킨다. 또한 신시아 인로를 비롯한 이들이 말하는 이른바 “군사화된 남성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군사화된 남성성은 여성에 대한 권력 의식과 우월감, 그리고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폭력을 행사하는 태도를 수반한다.--- p.253
해외에서 PX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미국) 군대만이 아니었다. 미 공군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바로 위에 제트기를 띄우고 있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스페인 고위 장교들에게 미군 PX와 장교클럽을 이용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334쪽)
미군 기지가 있는 곳이면 거의 어디서든 항상 인명 사고, 폭력 범죄, 현지인의 분노 등을 목격할 수 있다. (360쪽)
미군이 범죄를 저질러도 수용국의 기소를 면할 수 있게 해주는 주둔군 지위 협정(SOFA)때문에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미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해외 대다수 나라에 주둔하는 미군의 조세에서부터 운전면허, 미군 병사가 수용국의 법률을 어겼을 때의 신병 처리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 나라마다 주둔군 지위 협정의 내용은 모두 다르다. 기지 전문가 조지프 거슨은 내게 주둔군 지위 협정의 길이가 보통 미국과 수용국 사이의 권력 격차의 역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수용국에 비해 미국의 힘이 클수록 주둔군 지위 협정이 짧아서 군과 군 인력에 대한 제한이 적다는 것이다.--- p.362,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준 1972년의 거래는 ‘반환’이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일본은 오키나와 반환 협상의 일환으로 대미 섬유 수출 할당량을 준수하고, 6억 85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 현재 일본은 미군 병사 1인당 연간 15만 달러가량의 배려 예산을 미군에 지원한다. 2011년 한 해에만 일본 납세자들은 전체 기지 비용의 4분의 3 정도인 71억 달러를 제공했다. (368, 369쪽)
여전히 비첸차의 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미군 기지가 과거 1954년에 이탈리아 의회나 미국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비밀리에 이루어진 협정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달몰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결정이 실제로 얼마나 민주적인 것이었을지 의문을 품고 있다. 그들은 만약 이탈리아와 미국 관리들이 최초의 합의를 이루기 전까지 국가 또는 지역의 수준에서 어떤 공적 토론도 막은 채 비밀리에 달몰린 기지 협상을 진행했다면, 이 결정을 과연 민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또한 지방법원의 판단처럼, 설령 그것이 민주적인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이탈리아와 유럽의 계약 입찰 규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민주적인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환경부가 계획한 환경영향평가를 무시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p.395
2001년 9월 11일에 벌어진 공격 직후, 많은 군사 전략가들은 “전 세계가 전쟁터”라는 신보수주의의 주문(呪文)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소규모 개입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미래를 예상한다. 장래에는 곧바로 개입 지역에 접근해서 행동할 수 있게, 지리적으로 분산된 대규모 기지들의 집합체가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펜타곤 관리들은 거의 무제한적인 유연성, 즉 지구상 어디에서 상황이 벌어지든 순식간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꿈꾼다. 지구 전체를 완전히 군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추구하는 것이다.--- p.426
독일, 일본, 한국,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노르웨이, 벨기에 등과 달리 미국은 자국 시민 전부에게 의료보장을 해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국민 의료보험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포기하자고 한다 … 나는 독일, 일본, 한국같이 미국 기지를 수용하는 몇몇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던 인상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미국의 기지 투자는 수십 년 동안 교통, 의료, 교육, 주거, 기반 시설, 기타 인간의 필수품을 무시하고 희생시켰다. 매년 전 세계 기지에 투입되는 700억 달러 이상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는 데 쓴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 보라. (434, 435쪽)
미군 기지는 평화를 유지하고 한반도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보다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할지 모른다. 이런 긴장 상태는 전쟁 발발 가능성을 높이고 평화의 정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실제로 전쟁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한국과 더 나아가 아시아 대륙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 정당한 근거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부 미국 관리들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이익에 부합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 p.441
북한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 최강의 군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국의 군사력과 핵 역량을 증강하는 게 타당하다. 중국으로서도 북한이 붕괴해 한반도가 통일되면 이미 아시아 대륙 본토에 있는 수만 명의 미군이 중국 국경에 가까이 배치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므로, 북한을 지원할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441쪽)
기지가 스스로 생명을 얻으면서 발생하는 위험은 돈과 국가 자원의 낭비를 훨씬 뛰어넘는다. 소방관과 달리, 해외기지가 할 일을 찾는 경우 그 결과는 잠재적 낭비와 비효율을 한층 뛰어넘는다. 여러 면에서 해외기지는 안보를 제공하기는커녕 종종 세계를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447쪽)
미군기지, 과연 평화를 위한 것인가
800개 넘는 미군의 해외기지 전모
평화·번영 아닌 전쟁·부패의 불씨 식민주의 재생산, 민주주의에도 걸림돌
83개로 세번째 많은 한국도 마찬가지 국제적 연대로 ‘기지 국가’ 해체해야
전세계에 800개가 넘는 미군기지가 산재해 있다. 70개국이 넘는 미군 주둔국 중에 독일(174개), 일본(113개), 한국(83개), 이탈리아(50개) 순서로 미군기지가 많다. 이 중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는 모두 2차대전 전범국이다. 그런데 왜 전쟁 피해자인 한국이 전승국의 해외기지 텃밭이 됐는가? 그 이유를 중단한 지 60년도 더 지난 한국전쟁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대북 억지력이 무너지고 한국의 안전과 동아시아 평화도 깨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이른바 ‘친북좌빨’의 불온한 수작 내지 치기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인 풍토에서 데이비드 바인 아메리칸대 부교수가 <기지 국가>(Base Nation, 2015)에서 펼친 아래와 같은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2015년 현재 미국의 해외 군사기지. 세계 70여개국에 산재한 800개가 넘는 미국의 해외 군사기지 가운데 83개가 있는 한국은 독일(174개), 일본(113개)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나라다. 그다음은 50개의 이탈리아. 갈마바람 제공
1898~2015년 사이, 미군기지 건설 때문에 세계 곳곳의 주민들이 살아오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미군 해외 군사기지 가운데 최대급의 최신 기지가 될 평택 기지 조성 때문에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도 거기에 들어 있다. 갈마바람 제공
1945~2015년 사이 미국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기지 소재지에서 벌어졌으며, 일부 기지들은 그 때문에 폐쇄, 철수했다. 갈마바람 제공
“미군의 대규모 해외 주둔에 찬성하는 이들은 종종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있는 미군이 북한의 남한 공격을 억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군의 한국 주둔 때문에, (…)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갖는다. 북한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 최강의 군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 자국의 군사력(과 핵 역량)을 증강하는 게 타당하다.”
바인 교수는 중국도 남한 주도로 한반도가 통일되면 수만명의 미군이 중국 접경지대에 배치될 수 있는 정세 아래에서 “북한을 지원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서, 따라서 “미군기지는 평화를 유지하고 한반도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보다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전쟁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한국과 더 나아가 아시아 대륙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 정당한 근거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부 미국 관리들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이익에 부합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장래에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미군기지를 세우는 것은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시킬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기지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군사적인 대응을 자극함으로써 애초에 방비하고자 한 바로 그 위협을 야기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해외기지는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는커녕 실제로 전쟁 가능성을 높이고 미국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
주한 미군기지인 캠프 케이시 주변에 형성된 상업적 성매매 지구의 ‘주시 바’ 앞에서 필리핀에서 온 ‘주시 걸’들이 지나가는 미군 병사들을 쳐다보고 있다. 2009년 7월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에 게재된 사진. 갈마바람 제공
새로운 미군기지 하나가 끼칠 악순환 파장의 실상을 우리는 경북 성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소동을 통해 체감하고 있다. 사드 포대를 “일개 포병 중대에 불과하다”며 국회 동의 절차는 필요없다고 한민구 당시 국방장관은 주장했지만, 그 일개 미군 포병 중대 기지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안보지형과 이 땅 민초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지금 파나마 운하 건설 이래 미국 육군 역사상 최대급이요 미군 해외시설 중 최고급이라는 ‘캠프 험프리스’의 마무리 공사를 한국 평택에서 (거의 한국 돈으로) 진행하고 있다. 분단 해소 또는 긴장 완화 이후의 한반도 정세변동과 미군기지 위상 변화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눈곱만큼도 없이, 그들만의 계산대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사드를 포함한 미군기지 존속 내지 확장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일부 미국 관료들만이 아니다. 그들과 결탁한 정치가와 군 장성, 무기산업체, 석유업체, 군납업체, 수다한 미군 주둔국의 부패한 정치인, 관료, 기업 등도 수혜자다. 그들이 앗아간 천문학적 이익에 반비례해 대다수 사람은 정치·경제·사회적 부패와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환경파괴, 만연한 성폭력과 성매매로 치명적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 피해자가 된다. 그 피해 정도는 주변부, 빈곤층, 여성, 유색인종 쪽으로 갈수록 증폭된다. 식민주의의 21세기식 재생산이다.
이탈리아 비첸차에 미국 육군이 새로운 ‘달몰린 기지’를 건설하려 하자 주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갈마바람 제공
그뿐만 아니라 미국민 대다수도 그 피해자. 6년간 12개국 60곳의 현장 취재를 토대로 쓴 이 책은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우리는 해외기지라는 렌즈를 통해 (…) 미국이 어떻게 영구 전시체제하에 놓여 있는지, 미국 경제와 정부가 어떻게 지속적인 전투 준비에 지배당해 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미국과 세계가 미군기지들 덕에 더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영구적인 군사사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바인 교수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이 해외기지로 잃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예산과 그 집행 내역으로 보여준다. 2012년 미 국무부는 해외 군사활동에 들어간 비용을 227억달러(현재 환율로 약 26조원)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바인 교수는 여러 근거를 토대로 적어도 1700억달러(약 193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연간 연방 교육예산의 몇 배나 되는 규모다. 그렇다고 주둔국들이 득을 보는 것도 아니다. 미군기지 철수 뒤 응용과학대학과 쇼핑몰 등이 들어선 독일 안스바흐 등의 경제지표가 호전되기도 했다. 일부 기지가 철수한 오키나와 나하 인근 해변지역은 미군 주거지가 들어차 있을 때보다 경제적 이익이 6배나 커졌다는 연구도 있다.
이탈리아 비첸차의 옛 공항 자리에 건설 중인 미군 카세르마달몰린(카세르마델딘) 기지. 공수여단이 주로 사용하는 이 기지를 건설하느라 공항의 유일한 활주로가 파괴됐다. 갈마바람 제공
미군기지는 민주주의도 가로막았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는 우익 자민당, 한국에서는 독재정부를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지원했다. 그 덕에 미군기지를 가장 많이 수용한 네 나라 가운데 세 나라(한·일·이)에서 반 세기 또는 그 이상 사실상의 1당 지배가 지속됐다. 독일에서도 전후 20년 동안 1당 지배가 유지됐다.”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의 과테말라, 에콰도르, 니카라과 등이 미군기지와 거기에 결탁한 매판 세력 때문에 겪어야 했던 세월은 너무나 길고 비참했다. 주둔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할 경우 미군기지가 쫓겨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워싱턴의 군사주의 실력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그것을 저지하면서 그들에게 고분고분한 세력을 지원했다.
최근에 미군은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소규모이면서 유사시 단기간에 대규모로 변용할 수 있는 ‘릴리 패드’(lily pad) 기지를 세계 50개 이상 지역에 건설하면서 영구적이고 전일적인 세계 지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단다. 해법은 기지들을 축소하고 줄여 기지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다. 남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이 답이다. 이를 위해선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 바인 교수는 책 수익금을 모두 그 연대기구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 실패하지 않았다”
<기지 국가> 여러 대목에서 주한 미군기지 얘기들이 등장하지만, 한국의 예가 가장 집중적으로 거론된 것은 미군들의 기지촌 성매매 문제다. 바인 교수는 미군 점령군 당국이 군국 일본의 ‘위안소’ 일부를 넘겨받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한국 정부가 성매매 여성들을 ‘달러벌이’ 애국자로 치켜세우며 국가가 일종의 거대 포주 노릇을 한 점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다(제9장 ‘섹스를 팝니다’ 전체가 한국 기지촌 사례를 다룬다).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 여성들이 그 일선에서 빠져나간 대신 ‘예술 유흥’ 비자를 만들어 불러들인 동남아 여성과 러시아, 동유럽 출신 여성들이 그 자리를 채웠는데, 미국 국무부의 2002년 보고서는 “한국이 인신매매 피해 여성의 종착지”라는 점을 확인했다. 2007년 연구 보고서는 한국의 미군기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라시아 출신 여성들을 한국과 미국에 공급하는 초국가적인 여성 인신매매의 중심축”이 됐다고 결론지었다.
바인 교수는 사드 성주 배치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무기경쟁을 부추기면서 군비지출과 군사주의를 고조시켜, 군사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면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도 동렬에 올렸다. 제주도에서 장시간 현장 취재를 한 그는 강정 해군기지가 공식적으로는 ‘미국 기지’가 아니지만, 미 해군 함정들의 연이은 강정 기항은 “(강정항이) 미군의 동아시아 지역 기지 기반시설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많은 기지 반대론자들의 우려를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을 막지 못한 것을 실패한 투쟁으로 보는 건 섣부르다며 긴 안목으로 그 긍정적 효과를 살려나가자고 했다.
바인 교수는 1980년 ‘광주 학살’ 때 전두환의 행동을 미국이 실제로 지지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미국 관리들이 미군 기지 주둔국들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민주화와 탈식민화, 인권 증진을 경시했다는 건 분명하다며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예를 들었다. 그는 한-미 연례 군사훈련과 유사한 미국-스페인 연례 군사훈련이 프랑코 정권을 계속 집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었음이 미국 상원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고 했다.
군사기지 확장론자들은 공공성에 입각한 전략적 판단보다는 예산 축소를 막아 자신들의 지위와 사적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관성적으로 기지를 유지, 확장하는 쪽으로 끊임없이 나아갔다. 구성원들에게 미 국내 또는 그 이상의 높은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평택 기지와 같은 대규모 자족적 해외기지 ‘리틀 아메리카’ 등의 건설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US forces, Korea (USFK)
주한미군 [駐韓美軍]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한미군은 해방 이후 미 군정시기부터 한반도에 주둔해 왔다. 미 군정시기에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에 따라 남한지역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6.25전쟁기에는 유엔의 이름으로 공산군을 격퇴하기 위해 주둔하였고, 정전협정이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해외파견 미군 병력 중 독일에 6만9천 명, 일본에 4만 명에 이어 한국에는 3번째로 많은 2만8천5백 명을 주둔시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유사시 미 해군의 40%, 공군의 50%, 해병대의 70% 이상의 대규모 증원전력을 전개하도록 계획 훈련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미군 장병들의 숫자는 무려 10만 여명에 이른다.
주한미군 주요 전력 현황
주한미군 병력추이
1953 - 한국전 휴전, ‘한·미 상호방위조약’체결
1964 - 한국군 베트남 파병 결정
1969 - 닉슨 독트린 발표
1971 - 닉슨 독트린에 의한 전략적 감축
1977 - 카터 행정부의 철수계획 발표
1979 - 철수계획 잠정중단
1989 - 넌 워너 수정안 채택, 주한미군 5개년 감축계획
1990 - 미 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 주한미군의 3단계 감축계획
1992 - 주한미군 1단계 철수(7,000명 감축)
1995 - 미 클린턴 행정부 감축 계획 보류
2004 - 미 2사단 2여단의 이라크 차출
2008 - 주한미군 현수준 유지(28,500명) 합의
주한미군 지위협정
1) 명칭
‘주한미군 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Agreement under Article Ⅳ of the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garding Facilities and Areas and the Status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the Republic of Korea)’이 정식 명칭이며, ‘한·미 SOFA’로도 통용된다.
2) 의의
주한미군 지위협정은 주한미군의 원만한 임무 수행을 위하여 접수국인 한국이 주한미군과 군속 및 그 가족에게 부여하는 법적 지위를 제도화한 협정이다.
3) 연혁
주한미군 지위협정은 1953년 10월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 체결이 필요하여 13년에 걸친 교섭 끝에 1966년 7월 9일에 서명이 이루어지고, 1967년 2월 9일에 발효되었다. 주요 내용은 형사재판권, 시설·구역 등 미군 주둔에 따른 제반 사항을 포괄적으로 규율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한미군 (미국 개황, 2009. 6., 외교부)
한미SOFA와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는 조약이며, 한미SOFA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둔하게 된 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SOFA의 모법(母法)이다.
그런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영토, 영해, 영공 전 영토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있고, 미군 주둔의 목적이 결여된 점, 무엇보다 조약의 시효가 무기한으로 규정된 데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자동적으로 한미SOFA 역시 무기한 유효하다.
따라서, 한미SOFA의 근본적인 개정을 위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불가피하다. 적어도 유효기간을 최소 10년 정도로 제한하고, 그때마다 변호된 국제성세 및 국내현실에 맞게 동 조약의 종료 및 개정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체결의 변천과정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인 6월 27일과 7월 7일의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와 1953년 10월 1일에 체결된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따라 한국의 영역 및 그 부근에 미군이 배치되었다. 이에 미군의 주둔에 필요한 세부절차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미SOFA가 1966년 7월 9일 한국정부대표 외무부장관과 미국정부대표 국무장관 간에 조인되어 1967년 2월 9일 발효되었으며,1991년 2월 1일에 1차 개정, 2001년 4월 2일에 2차 개정이 되었다.
한미SOFA의 체결
한국전쟁 후 미군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협상 때부터 SOFA 체결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대전협정, 마이어협정에 보장된 특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협상조차 회피했다. 그러다 1950년대 계속된 주한미군의 범죄와 만행으로 한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1962년 비로소 SOFA 체결을 위한 양국간 실무협상이 시작되어 1966년 7월 9일 타결되었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협상을 제의한 지 13년만에, 그리고 실무자급 협상을 정식으로 개시한 후 만 4년 동안 무려 82회에 달하는 공식•비공식회의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다. 협정은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협정은 본 협정 이외에 '합의의사록', '본 협정 및 합의의사록에 대한 양해사항', '형사재판관할에 관한 한•미 간 교환각서'의 3개 부속문서로 구성되었다. 협정 체결로 외형상 불평등성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형사재판권의 자동포기조항을 담은 교환각서가 말해 주듯 그 내용은 이전의 대전협정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치욕적인 협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한국은 협정 체결의 대가로 한국군의 월남 파병 및 한일협정 체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미SOFA의 1차 개정
1980년대 들어 광범위한 반미의식의 성장에 따라 미군의 각종 범죄행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SOFA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1988년 12월부터 개정협상이 시작돼 2년여 만인 1991년 1월 4일 개정안에 서명한 후 2월 1일 발효되었다. 이때도 미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정부의 방위비분담금 지원을 관철시켰다.
1차 개정으로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형사재판권 자동포기조항 등 독소조항을 담은 교환각서와 양해사항이 폐기되고 새로운 개정 양해사항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일정한 진전이 있었으나 본 협정과 합의의사록은 전혀 손대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협정과 거의 변함없는 불평등 구조를 온전시켰다.
2차 개정의 한계
형식면에서 보면 본 협정은 기소시 신병인도에 관한 한 개 조항만이 개정되었고, 합의의사록은 4개 조항, 양해사항은 10개 조항이 개정되었으며, 나머지는 SOFA에 삽입되지 못하고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 '한국인고용원의 우선고용 및 가족구성원의 취업에 관한 합동위원회 합의사항'의 형태로 별도 규정되었다. 정부당국은 신법 우선의 원칙 등에 따라 모두가 같은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조항만 보더라도 사실상 환경오염의 원상회복 의무를 면제한 본 협정은 그대로 둔 채 합의의사록에서 환경보호에 관한 선언적인 문구와 특별 양해각서로 대체한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핵심 줄기는 그대로 둔 채 곁가지만 친 꼴이다.
내용면에서는 형사재판권, 환경, 노무, 동•식물 검역, 시설•구역의 공여와 반환, 비세출자금기관, 민사소송절차 등 총 7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소시 신병인도, 환경조항 시설에서 보여지듯이 그동안 국민 여론이 집중된 조항들에 대한 상징적 개정에 그쳐, 보다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바람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한 2차 개정에서 역시 미국은 개정협상의 대가로 미군 피의자에 대한 특혜를 강화하고, 공여지 침해방지 조항을 신설하는 등 오히려 개악하는가 하면, 미군•미군속 가족들이 SOFA상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내 취업을 가능케 하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결론적으로 2차 개정은 당시 드높아만 가던 국민들의 반미열기를 잠재우기 위한 고육책에서 나온 것으로, 상징적•부분적 개정에 그쳐 여전히 많은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협정의 구조
한·미 SOFA는 크게 전문 31조로 된 본문(이하 본 협정)과 후속문서인 합의의사록, 양해사항, 교환서한 등 3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타 양해각서 및 합동위원회 합의사항 등이 이를 보완하고 있다. 한미SOFA를 구성하는 주요협정 문서는 다음과 같다.
◾ 본협정(1966) –> 2001년 협정에서 한 개 조항(22조 5항) 개정
◾ 합의의사록(1966) –> 2001년 협정에서 4개 조항 개정
◾ 본 협정 및 합의의사록에 대한 양해사항(1966) –> 2001년 협정으로 10개 조항 개정?
◾ 형사재판관할에 관한 한•미 간 교환각서(1966) –> 91년 협정으로 폐기
◾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 양해각서(2001)
◾ 한국인고용원의 우선고용 및 가족구성원의 취업에 관한 양해각서(2001)
◾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합동위원회 합의사항(2001)
SOFA 본협정은 3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미군기지
지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주한미군 기지 및 시설의 수는 대략 100여 개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지난 2004년 이후 미군기지이전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반환된 40여 개 기지를 제외하면 60여개 정도가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래는 주한 미군의 지역별 배치이다.
◾ Area I: USAG 레드 클라우드
◾ Area II: USAG 용산
◾ Area III: USAG 험프리스
◾ Area IV: USAG 대구
◾ Area V: 오산공군기지
◾ Area VI: 군산공항
미군기지 주요 환경오염 사건
◾ 동두천 캠프 케이시 건축폐기물 불법 매립사건(1998)
◾ 백운산 메디슨 통신기지 기름 유출(1998)
◾ 미군기지 인근 명산 바위 낙서 사건(1998)
◾ 평택 오산공군기지 폐기물 물법 매립(1999)
◾ 군산미군기지 오폐수 무단 방류(1999)
◾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2000)
◾ 스토리 사격장 확장 공사와 산림 훼손(2001, 2004)
◾ 녹사평역 기름유출(2001)
◾ 원주 캠프 롱 기름유출(2001)
◾ 군산미군기지 유수분리기 밸브 동파로 인한 기름 유출(2003)
◾ 군산 미군기지 인근 송촌마을 일대 장기간 기름유출(2003)
◾ 평택 오산공군기지 오폐수 방류사건(2003)
◾ 캠프 홀링워터 흥선지하차도 기름유출(2003)
◾ 포천 사격장 기름유출(2004)
◾ 군산 미군기지 유류저장탱크 오작동으로 인한 기름유출(2005)
◾ 캠프캐럴 고엽제 불법매립 의혹(2011)
◾ 평택 캠프 험프리 기름유출(2015)
◾ 캠프 캐슬 반환기지 주변 환경오염
◾ 용산기지 환경오염(~2017)
◾ 부평기지 환경오염(~2017)
주한미군의 범죄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주한미군의 주둔이 공식화되었고 1966년 미군의 지위와 시설 구역에 대한 규정인 주한미군지위협정이 체결되어 이듬해인 1967년에 발효되었다.
1945년 미군이 처음 주둔하던 때로부터 1967년 SOFA가 발효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가 미군범죄에 대해 일체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에 이 기간 동안 미군범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수사, 재판 등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를 근거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양국정부는 변화된 상황에 맞게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SOFA)을 조속히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정작 SOFA가 체결된 것은 그로부터 13년만인 1966년이 되어서였다. SOFA가 체결되기까지 미군범죄는 대전협정에 따라 미군당국이 모두 재판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처럼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군범죄에 대해 아무런 단속이나 처벌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범죄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만, SOFA가 발효된 첫해 발생한 미군범죄가 총 1,710건(1967.2.9~1967.12.31)이었고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일부 알려진 미군범죄를 토대로 살펴보면, 최소한 연간 2천 건 가까이 미군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죄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아이와 10대 청소년들에 대한 총기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던 1957년, 그들의 영문 모를 죽음에 대해 미군 당국은 군법회의에서 무죄 또는 급여 몰수, 불명예 제대와 중노동형 등을 선고하였다고 한다. 1957년 7월 6일 인천 미군 송유관에 올라 앉아 있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숨진 김용호, 당시 3살이었다고 한다. 총을 쏜 미군은 군법회의에서 오발로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8월 25일 인천 용현동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이 이유 없이 돌팔매질을 하다 총을 발사하여 조병길(18세)이 숨진 사건, 9월 15일 군산 미군 비행장 부근에서 풀을 베고 있던 10대 소녀 7명을 향해 미군이 총을 발사하여 엄금순(17세), 김정애(18세) 2명이 숨진 사건, 10월 3일 경북 김천에서 열차 수리 중이던 미군이 길을 가는 학생 5명에게 정지 명령을 하였는데 학생들이 영문을 모르고 계속 걸어가자 총을 쏴 가장 뒤에서 걷던 송준원(15세)이 숨진 사건 등 총기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1)
계속되는 미군범죄로 인해 SOFA 체결의 요구가 높아졌고, 이에 1962년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군 범죄에 대한 한국의 수사권과 재판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SOFA 협상이 시작되던 해인 1962년 경찰청(당시 치안국)에 신고된 미군범죄로 살인 13건, 폭행 107건, 상해 64건에 이르며, SOFA를 체결한 1966년의 경우 살인 1건, 폭행 199건, 상해 31건이 확인되었다. 2)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라 SOFA를 체결하기로 합의는 했지만 정작 협상은 지지부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자국 군인들이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허용하는 협정 체결을 원하지 않았다. 협상이 제자리걸음으로 진척이 없는 상태에서 미군들에 의한 살인, 방화, 강간, 폭행 등 상상할 수 없는 범죄들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범죄로 인한 주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SOFA 체결을 요구하는 시위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져 여론이 악화되자 1962년 실무협상이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협상을 제의한 지 13년만에, 그리고 실무자급 협상을 정식으로 재개한 후 4년 동안 무려 82회에 달하는 공식․비공식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66년 7월 9일 협상이 타결되었다. 협정은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SOFA 협정이 발효되는 날, 한미 양국은 1차 한미 합동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SOFA 발효 후 미군범죄는 주춤했을까?
미국 자료에 의하면, 첫 합동위원회 회의를 축하하는 의미로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쨍그랑 소리를 멈추게 한 첫 번째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1967년 2월 9일 오후 3시 50분경 군산 공군기지 소속 미 헌병대 데이비드 귤은 지프차로 방삭순(11세)을 치어 상해를 입혔다. 미군은 차에 치어 얼굴이 긁히고 이가 부러진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떠났다. 뺑소니 교통사고가 SOFA 발효 이후 발생한 첫 사건으로 기록된다. 3)
이 사건은 미군측에서 공무중 사건이라고 주장하여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일 이 사건 외에도 파주에서 미군에 의한 폭행과 방화 사건 등이 발생하였지만 이 또한 한국 정부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죄 유형에는 ‘특히 중요한 사건’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폭행 1건, 상해 2건, 방화 1건, 교통사고 2건 등 6건의 범죄가 발생하였으나 재판권은 행사하지 않았다.
1967년 1710건의 SOFA 사건 중에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9건에 불과하며 살인 2건 중 1건, 강간 14건 중 2건, 방화 8건 중 1건, 관세법 위반 21건 중 2건, 폭력행위등 263건 중 2건 상해치사 1건 중 1건 등 4) 이다. 전체 발생 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이 0.5%에 불과하며 중대범죄에 대해서도 재판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1968년 1751건의 SOFA 사건 중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14건에 불과하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재판권 행사율이 1%에 이르게 된 때가 1991년(1034건 중 14건)인 것을 보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미군 범죄들이 방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SOFA는 체결되었으나 미군 범죄에 대해 한국 수사기관과 사법당국이 무력함을 보였고, 재판권 행사도 1%도 안 되는 등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는 계속되었다.
1992년 10월 발생한 고 윤금이씨의 참혹한 죽음으로 미군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으며 살인미군 처벌과 불평등한 SOFA 개정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시민들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를 구성하여 상설적인 미군범죄 신고센터를 설립하고 불평등한 SOFA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활동의 성과로 미군범죄가 줄어들고 한계가 있지만 SOFA의 개정 협상을 이끌어냈다. 2001년 개정된 한미 SOFA는 과거보다 반걸음 더 진보하였다. 그러나 불평등한 한미 SOFA의 문제점은 미군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지적되고 있다. 한미 SOFA는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한 체포, 수사, 재판 절차 등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한국의 수사와 재판 권한이 여전히 제약받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미군들의 가족, 미군속 및 그들의 가족들도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한미 SOFA의 적용을 받아 미군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SOFA 사건 신분별 발생 현황>
(대검찰청 정보공개 청구 결과. 2014년)
주요 사건사고
◾ 윤금이씨 살해사건(1992년)
◾ 존 병장에 의한 김미순씨(가명) 성폭행 사건(1993년)
◾ 리차드 이병과 브리안 이병에 의한 한창열씨 택시강도사건(1993년)
◾ 미군 헌병대에 의한 세 모녀 감금폭행 사건(1994년)
◾ 미군 5명에 의한 이영직씨 집단 폭행사건(1994년)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 난동 사건(1995년)
◾ 윌리엄스 일병에 의한 에바다 농아원생 성추행 사건(1996년)
◾ 스티븐 이병에 의한 이기순씨 살해사건(1996년)
◾ 이태원 조중필씨 살인사건(1997년)
◾ 헨릭스 병장에 의한 허주연씨 살해, 방화사건(1998년)
◾ 매카시 상병에 의한 이태원 외국인 전용 클럽 여종업원 살해사건(2000년)
◾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2000년)
◾ 신원 미상의 미군에 의한 서정만씨 살인사건(2000년)
◾ 키르디 하사에 의한 전정자씨 교통사고(2001년)
◾ 전동록씨 미군 고압선 사망사고(2001년)
◾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압사사건(2002년)
◾ 온켄 병장에 의한 오산 미군 음주 뺑소니 사망사고(2003년)
◾ 신촌 미군 흉기 난동사건(2004년)
◾ 미군 대형트럭(LMTV) 김명자씨 압사사건(2005년)
◾ 라미레즈 이병에 의한 66세 여성 성폭행 사건(2007년)
◾ 베이즐 병장에 의한 28세 여성 성폭행 미수사건(2007년)
◾ 군산 택시기사 집단 폭행 강도 사건(2007년)
◾ 동두천 10대 여성 성폭행 사건(2010년)
◾ 평택 미헌병 수갑 사건(2012년)
◾ 이태원 BB탄 난동사건(2013년)
◾ 탄저균 불법반입사건(2015년)
駐韓 美軍 裝甲車- 女中生 壓死 事件
[경과]
사건은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편도 1차선인 지방도 56호선을 걷고 있던 조양중학교 2학년 신효순과 심미선 두 여학생을 미군의 장갑차가 치고 압사시키면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2사단을 비롯한 주한 미군, 미국 정부는 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 치부하며 미온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들은 유족들에 대한 사고 설명에서 우발적 사고임을 강조하였고,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누구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한국 검찰 역시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유족들과 한국 시민 사회에서는 진상 조사와 재판 회부 등을 일차적으로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 미군 당국은 유족과 한국 시민 사회의 관련자 재판 회부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미군은 “동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제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미군 당국은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 미2사단장 등에 대한 재판권을 한국 법무부 등으로 이속하지 않고, 단지 공무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재판권이 미국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결국 재판은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군사 법정에서 군사 재판으로 열리게 되었다.
[결과]
양주 시민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서는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효순이 미선이 추모공원을 조성하였으며, 2002년 9월 21일 미 2사단에서는 이곳에 신효순과 심미선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2년 11월 18~23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 법정 배심원단은 당시 장갑차를 조종하던 페르난도 니노와 마크 워커 두 병사에 대해 공무를 행하던 중 발생한 과실 사고라 하여 무죄[not guilty] 평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한국 시민 사회의 반발은 폭발하였다. 각계각층의 시민 사회에서는 미군장갑차여중생사망사건범국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11월 26일 압사 여중생 추모 대회를 겸한 촛불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때 반미 감정이 더욱 증폭되었고 반미 운동과 함께 ‘주한 미군 철수’라는 슬로건이 나오기도 하였다.
언론에서도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을 전면 재개정하고 재판 관할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할 것 등을 논하는 요구들이 나왔다. 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의 간접 사과와 유감 표시 등이 행해졌으며 한미간 SOFA 개선 방침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조문 해석에 대한 논의에 그쳤다.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진실 규명은 아직도 미해결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해 한미 양국 간의 지위 문제, 인권 문제, 방위 문제 등에 대한 재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기지에 갇혀 60년 고립된 마을 17.4.16 오마이뉴스
[르포] 미군 기지의 숨은 그림자, 동두천시 걸산동
그가 수백 년 대대로 농사지어온 땅을 빼앗기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어졌던 삼팔선을 넘어 1950년 북한군이 남하했다. 외딴 분지였던 이곳에 그 소식은 쉽게 전파되지 않았다.
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밀고 올라왔다. 북으로 북으로 전진하던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인해전술' 중공군이었다. 일사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남부두에선 피난민 수만 명이 철수하는 미군 배에 올랐다.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가 씨 뿌리던 고향이 거기 있었다.
▲ 육지속의 섬 걸산동 1951년, 미군은 동두천의 작은 마을 걸산동에 주둔했다. 마을을 빼앗긴 이들은 산으로 쫓겨갔다. 미군기지는 통행을 불허했다. 산속의 걸산리는 60여 년을 갇혔다. ⓒ 원동업
'캠프 케이시'에 빼앗긴 마을 걸산리
피란민으로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땅에는 미군기가 올라있었다. 철조망이 세워지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접근을 막았다. 그가 살던 집은 불타 없어졌다. 전쟁 중이었고, 더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요청한 외국군대의 주둔이었다. 맨손인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당했다. 군 주둔지를 새로 만든다면, 당연히 빈 땅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 바깥에, 그러니까 광암리 같은 곳은 비어 있었다. '턱거리'라 불리던 공간이었다. 마을의 원주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협의해야 했다. 통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인디언을 쫓아냈던 것처럼, 미군들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 땅을 보면, 울화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마을에 살던 많은 이들이 외지로 떠나갔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스스로 삭였다. 마을을 바라보는 소요산 남동쪽 산골에 화전을 갖고 있는 몇 사람이 거기로 올랐다. 고향 땅을 죽어도 떠날 수 없다는 사람들이었다.
마을 아래서 미군들은 더욱더 넓은 땅를 원했다. 럭비장을 지을 부지도 필요했다. 미군기지 어디에나 있다는 그것이었다. 미군들은 그렇게 거기 평지 걸산리를 다 차지하고는 벽을 둘렀다. 통행은 금지되었다. 철조망을 타고 넘어들어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미군들은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다. 보상은 오랜 시간 후에, 공시지가보다 싼 가격으로, 대개 20여 년 거치로 이루어졌다.
산에 사는 걸산동 사람들은 '육지속의 섬'에 갇혔다. 단절된 그들이 택할 길은 두 가지였다. 고립 혹은 북쪽 산을 넘어 풀 길에 사람 발자국 길을 내는 것이었다. 산에서 땔감을 키보다 높게 짊어지고 나가면, 해가 지기 전까지 다시 그 지게에 무엇이고 양식될 것을 동여매고 와야 했다. 울화에 막걸리는 한잔했지, 겨울이면 그 추운 산의 북사면을 걷다가, 그들은 잠시 쉬었다. 따뜻해진 발(실은 동상에 걸려) 때문에 신발을 벗고 한숨 자고 나면, 그들의 한 많은 이 세상도 안녕이었다.
미군기지 통행증이 발급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첫 패스 발행 때, 통행증은 마을 하나당 열 개였다. 230여 명의 주민들은 번갈아 그 통행증을 달고는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마을 경계 안에 들어섰다. 외부에서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서너 명이 마중과 배웅을 해야 했다. 사람 하나당 2~3명밖에는 동행할 수 없어서였다.
지금도 통행증은 3년마다 재발급받아야 한다. 자동차보험증, 등록증, 주민등록증 면허증을 다 내고 신원조회를 해야 통행증을 내준다. 외부인은 한 달 전에 미리 통행증을 신청을 해야 하고, 3일 동안만 유효하다. 동북아 최대의 미군기지라던 동두천의 캠프 호비, 캠프 케이시의 땅 걸산동 이야기다.
인적 없는 길, 문 닫힌 건물들 광암동
지난 8일, 걸산동에 다녀왔다. 2년여 전인 2015년 8월 8일 '박래군 석방요구 문화제' 때, 지금은 더불어꿈 협동조합 김대용 이사장에게서, 글 하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군기지에 갇혀 60여 년을 고립된 마을에 대해 조사하고,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거였다. 당시 집회에서 처음 만난 사이에, 함께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참여는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2017년 촛불시위가 탄핵 인용을 이룬 3월의 봄에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동두천 그곳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동두천 시내 그네들의 터 '더불어꿈 카페'에서 <육지 속의 섬-걸산동 마을기록> 자료집을 받고, 동두천의 속살로 이동했다. 안내를 맡아준 이는 책의 공동 편집인 최희신씨.
▲ 산속의 걸산동 가는 길. 그 마을에 대한 기록 '<육지속의 섬, 걸산동 마을기록>은 미군기지에 갇힌 우리땅'에 대한 기록이다. 더불어꿈 협동조합의 김대용씨와 최희신씨가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편집했다. ⓒ 동두천 기지촌 연구회
처음 들른 곳은 동광극장. 시내 동광교 부근에 위치한 이 극장은 과거의 영화(榮華)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화(映畵)관. 1970~80년대엔 서울 시내 곳곳에도 우뚝했을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이었다. 당시에는 '환쟁이'들이 그렸을 극장 간판도 인쇄로 바뀌었고, 상영도 이제는 디지털 영사기로밖에는 할 수 없지만, 이곳 극장 안에는 여전히 아날로그 상영기가 놓여있다.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필름을 걸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계. 하지만 요즘 누가 필름으로 영화를 찍겠는가. 영화 <프리즌>이 상영되고 있는 영화관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간이 30~40년쯤 과거로 흐른 것 같다.
광암동-걸산리를 오르는 베이스 캠프
광암동은 소요산을 오르는 베이스 캠프 같은 곳이랄까? 화석처럼 빛바랜 채 남아있는 옛 건물들마다 희미하게 상호가 남아있다. 오래 전 문 닫은 환전소(Money Exchange)는 지붕이 벗겨져 있다. 수많은 '아가씨'들이 들락거렸을 미용실도, 그네들과 함께했을 세탁소 문도 닫히고 비어있다. 이들 아가씨들과 건달들이 묵었을 수많은 임대건물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한때는 번쩍번쩍했을 네온들은 깨진 채 간판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곳 광암동은 왜 이렇게 길이 많나? 큰길 말고도, 골목마다 차도 겸 인도다. "가난한 동네라, 이곳을 방문하는 시장님 혹은 국회의원님들이 매번 '선물'로 마련해 주신 것"이란다. 그렇게 넓게 트인 길옆으로 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수없이 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카터 대통령의 도로 주행을 위한 '장식용'으로 지어졌단다. 마치 서부영화의 세트장처럼, 이 건물들은 앞쪽은 번드르르 높이 섰지만, 안쪽은 부실한 곳이 많다.
미군 캠프 후문 앞, 왼편 언덕 위로 시민 아파트 같은 낡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적이 아예 없는데, 애초 사람이 입주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동두천 경기의 끝물을 타고 지어진 것. 물은 여전히 지금도 미군기지의 캠프를 내려다보고 있다.
▲ 문 닫힌 환전소. 동두천 광암동. 캠프 케이시, 캠프 호비 등 미군기지가 있어 이 마을은 한때 번성했다.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 평택 미군기지로의 이전 등 변화된 환경속에서 광암동은 빈 거리로 변했다. ⓒ 최희신
▲ 동두천 광암동의 빈 아파트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들. 전시작전권 환수의 여파로,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 건으로, 미군 주둔지의 전환 배치 등으로 광암리의 옛 영화는 사라졌다. ⓒ 원동업
걸산리 가는 길은 차마고도 같았다. 평지로부터 산을 오르는 산허리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물론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다. 중간중간 콘크리트 포장도 되어있다. 하지만 앞에서 차가 오면, 바짝 긴장해야 한다. 길 왼편으로 험준한 산길 낭떠러지 길이다.
길은 고립된 마을 걸산동 주민을 위해 난 길이 아니다. 동두천시가 산악자전거와 트레일 대회를 열면서 낸 길이다. 아래 평지로 캠프 케이시와 멀리 캠프 호비가 보인다. 햇살이 고루 비추는 땅에 들어선 보병부대, 기갑부대의 차량들 사이로 너른 공터, 십자가를 가진 교회도 보인다. 햇살이 고루 비추는 평지에 감도는 것은, 오로지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압도적 물질력이 뿜어내는 살벌함이다.
걸산리, 60년 고립된 땅에서 여전히
걸산리 사는 어르신을 찾았다. 고향서 쫓겨난 이야기, 고립되었던 60년 세월 이야기, 미군과의 동거로 인해 힘들고 신산했던 삶을 들을까 했다. 하지만 할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신다. 동두천사를 펼치고 그 땅에 살았던 그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이야기. 할아버지 생신날이면 그의 친구들이 여러 동리서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찾는 것, 그 친구들이 내놓은 선물은, 글씨였다. 할아버지도 여러 곳에 글을 썼고, 글씨를 올렸다. 존경받는 삶이었다. 갇힌 섬처럼 되었던 이곳에 사재로 학교를 열어 가르쳤던 장태영 선생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는 두 번 세워졌다. 그만큼 은혜를 각별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지고만 그 학교, 덕계공민학교 터에서 어르신의 기억은 따뜻하고 존엄했던 옛 삶을 반추한다.
"동두천에는 미군기지만 있는 게 아니오. 여기 걸산은 걸출한 인물을 내던 땅이라오. 여전히 여기 이 땅 안에서 정직하고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오. 기지촌 주변 성매매 여성들, 그들을 따라온 어깨들만 있는 게 아니야. 미선이 효순이를 깔려 죽게 만든 캠프 케이시의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지.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오. 땅을 빼앗겼지만, 그걸 국민의 생존 값이라고 여기고 있는 생각들이 살고 있다오. "
그의 목소리는 이런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걸산리 고개넘이까지 올랐다. 봄이 온통인 마을엔 매화, 산수유, 벚꽃이 피어있었다. 건강한 얼굴의 어린 오누이가 햇볕을 받으며 자전거를 탔다. 할머니들은 아주 천천히 고랑에 구멍을 내고, 거기 한 포기 상추를 겨눠 넣었다. 희신씨가 그 옆에서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한참을 앉아 있다. 걸산리의 산은 무릉도원 같았다. 고립되어 찾아갈 수 없는 땅이어서도 그랬겠지만, 이렇게나 따뜻한 햇살이며, 그 안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걸어서 내려올 때, 저기 아래 아스팔트 길에서 너울너울 나무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대추나무를 이고 오는 지게였다. 마을 길이 막혀,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걸산리의 농부가 그 지게를 이고 있었다. 평지 쪽에서 산으로 오르는 희망이었다.
여긴 광주 정씨, 남양 홍씨, 경주 김씨, 김녕 김씨가 묻힌 땅이다. 학교에 가고, 논밭에서 밭 갈고 열매 거두던 삶의 터전이다. 성공회 나눔의 집과 함께 하는 협동조합도 만들고, 화력발전소에 맞서 마을을 지키려 노력하는 미래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이 여기의 꽃이며 잎새며 동시에 열매였을 것이다.
▲ 덕계공민학교 설립자 장태영의 공덕비. 나중에 동두천국민학교 걸산분교가 된 이 학교는 마을 문중에서 희사한 700평 땅에 세워졌고, 월남한 장태영 선생이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났다. 걸산동 산꼭대기에 위치. ⓒ 원동업
동두천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더 이상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상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수도권 규제, 군사시설 보호구역 등 촘촘한 규제를 상기할 것이다. 주둔군의 횡포를 바로 잡는 대신, 그 위기를 돈 벌 기회로 전환한 국가 정책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1945년 분단, 1950년 전쟁이 잘못 끼운 첫 단추에 대해서도 번민할 것이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에 대하여, 쇠퇴해 가는 이 땅의 재생에 대하여서도 간절히 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의연하게 삶을 가꾸어온 걸산리 주민들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1) 오연호, 1990. 7. 25 『발로 찾은 주한미군범죄 45년사-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백산서당. p31
2) 표 1. 행정협정발효전의 미군인범죄 발생상황(내무부 치안국집계), 「한미행정협정에 의한 형사재판 관할권의 운영상황과 문제점」, 1968. 6. 『범죄백서 1967』, 대검찰청
3) AmEmbassy SEOUL, 1967. 5. 17. “SOFA: Criminal Jurisdiction; the first three month”
오연호, 1990. 7. 25 『발로 찾은 주한미군범죄 45년사-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백산서당. p315
4) 표 3. 중요범죄별 처리상황(1967. 2. 9 ~ 1967. 12. 31), 「한미행정협정에 의한 형사재판 관할권의 운영현상과 문제점」, 1968. 6. 『범죄백서 1967』, 대검찰청
"5년간 미군범죄자 1천766명…절반은 '수사포기'" 15.9.3 연합뉴스
'공무중' 주장하면 미군에 신병…서영교 의원 SOFA 개정 촉구
5년간 주한미군 소속 범죄 피의자 2명 중 1명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벌어진 범죄지만 우리 당국은 제대로 된 수사 한 번 못해보고 피의자를 미군 측으로 인도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이 법무부에서 받아 3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올해 6월까지 적발된 주한미군 피의자는 모두 1천766명에 달했다. 같은 기간 기소된 주한미군 피의자는 503명에 불과했다. 절반에 달하는 893명은 '공소권 없음'으로 미군 측에 내어줬다. 미군에 대한 재판권 포기를 명시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조항 때문이다.
SOFA는 미군이나 군속이 범죄로 입건됐을 때 미군 당국이 당시 '공무 중'이었다는 증명서를 써주면 어떤 범죄라도 재판권이 미군 쪽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 우리 당국은 범죄 발생 후 제대로 된 사실확인조차 못 하는 상황이다.
앞서 1일 서울고법은 이렇게 SOFA에 따라 재판권 행사를 포기한 사건을 공개하라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정보공개 청구소송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법은 "SOFA 규정은 주한미군의 특수성과 외교관계 등을 고려해 한·미 사이 이뤄진 협정으로 사건 정보는 비록 통계자료라 해도 함의가 있다"며 "북한이나 동조세력이 악용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서영교 의원은 "주한미군의 범죄내역 공개는 최소한의 주권행사"라며 "이를 막고 있는 법무부와 법원은 각성해야 한다"며 고 말했다. 그는 "주권국가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당 SOFA 조항은 조속히 개정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지촌 여성' 국가 상대 집단 손배소송
국내 기지촌 내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 단체들은 2014년 6월 25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기지촌 내 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원고인단은 성명서에서 “한국에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미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철저히 관리했다”면서 “모든 성매매를 불법으로 정해놓고 '특정지역' 설치라는 꼼수를 써 위안부가 미군 성매매를 하도록 했으며 '애국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신교육까지 시켰다”고 주장했다.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 사건 항소심 선고 결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
◾ 2018년 2월 8일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 사건 항소심 선고가 있었다. 이 사건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국가가 기지촌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미군 ‘위안부’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행위를 하였고 위법한 강제격리수용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1. 재판부는 과거 보건부, 지자체, 경찰 등 국가 기관이 작성한 문서를 통해 그들이 기지촌에서 여성들의 성적 서비스를 향상시키고 영업시설을 개선하는 등 성매매를 조장했다고 확인하였다.
2. 또한 재판부는 과거 위안부 등록제와 ‘애국교육’이 실시된 것을 통해 기지촌에서 성매매 행위를 적극 조장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국가가 미군 위안부들의 성(性) 내지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또는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보고, 이로 인해 미군 ‘위안부’들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보았다.
3. 재판부는 국가 기관들이 ‘토벌’이나 ‘컨택’으로 ‘위안부’ 여성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로 데려온 후 의료 진단없이 무차별적으로 페니실린을 투약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인권 존중의 의무에 위배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 117명의 미군 ’위안부’였던 원고들은 이번 판결로 기지촌에서 국가의 위법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받았고, 자신들이 겪었던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국가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 국가의 위법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정부는 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법률과 조례의 제정이 필요하다.
◾ 기지촌에서 벌어진 성매매 조장과 정당화, 인권 침해 행위는 한국 정부의 책임일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책임이기도 하다.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
출처: start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http://usacrime.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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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강정 기지는 미국 본토 방어용?
ⓒ뉴시스 사실상 미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세우는 강정 기지의 건설 비용 전액을 한국이 부담한다. 위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기지 건설 반대 시위.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정부가 미국 국방부의 뜻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 정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설립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점점 더 강하게 탄압하고 있다.
예전에 어떤 이들은 미국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강정 기지 건설을 반대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대사관 측에서는 상대도 해주지 않는다. 강정 기지 설립 주체인 미국 해군에 항의하라고 핀잔을 줄 뿐이다. 제주도에 정박할 미국의 이지스 레이더함이 한ㆍ중 관계를 악화시키고 이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엄청난 부담을 가할 것인데도 말이다. 사실 강정 기지는 미국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따른 부담은 한국이 감당해야 한다. 왜 그런가.
제주도의 강정 기지, 그리고 이에 정박할 이지스 레이더 함대 등은 미국이 구상해온 이른바 미사일 방어(MD) 체계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는 실험과 분석을 통해 MD의 실제적 방어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제주에 정주하게 될 이지스 함대는 전 세계 육지와 바다에 흩어져 있는 미국 레이더 네트워크의 일부분으로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향하는 적의 미사일을 탐지, 폭파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탐지와 폭파가 실제로 가능한지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소설(SF)의 영역에 속한다. 차라리 MD가 실제로 하는 일은, 국방세를 내는 미국 시민들에게 '적의 공격이 언제든 개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각성시키는 역할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ㆍ일본의 구축함 및 전함에는 이지스 레이더 시스템이 장착되었다. 두 나라는 그 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스템 중 일부만이 돈을 지불한 한국ㆍ일본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2005년 미국 미사일방어청장은 한국ㆍ일본의 이지스 레이더 시스템이 미국을 겨냥한 미사일을 추적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중 핵공격에서 한국ㆍ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는 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PACⅢ)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MD 시스템에는 (이름과는 달리) 어떤 방어력도 없다. 그러나 엄청난 공격 능력은 보유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전 세계에 깔려 있는 MD 네트워크는, 미국 주요 도시를 겨냥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방어용 미사일을 겨누고 있다. 미국이 이런 무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선제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민간인들도 이런 체제의 피해자다. 냉전 이후 핵무기는 실제 사용되기보다는 '심리적 무기'였다. 미국 시민들은 옛 소련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정부 예산의 사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교육ㆍ건강보험ㆍ소자영업 지원 등에 사용할 예산을 무기 구입으로 돌렸다. 결국 사회보장 관련 지출은 줄었고, 대신 무기 구입 비용은 급증했다. 이렇게 공격용 미사일 혹은 방어용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수선을 떠는 와중에 방위산업에 투자한 금융 자본가들은 떼돈을 벌어들였다.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결과만 봐도 미국 시민들이 어떤 피해를 보는지 알 수 있다. 전쟁을 치른 이후, 이라크와 아프간은 새로운 반미주의자 양성소로 탈바꿈했다. 미국 시민들은 '안보'를 확보하기는커녕 전쟁 비용만 내고 말았다.
한국인들도 강정 기지 때문에 세금을 내야한다. 그러나 '안보'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세금이 비생산적으로 사용되리라는 이야기다. 강정 기지와 관련,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해상 주권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 역시 남해의 안보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말리아 해적이 최근 아시아 해상에 나타나기라도 했나? 그렇지 않다면 제주도의 안보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는, 일부 관광객이 일삼는 못된 짓밖에 없지 않을까. 더욱이 강정 기지 때문에 한ㆍ중 관계만 악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강정 기지에 애면글면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강정 기지에 레이더ㆍ미사일 등을 설치하고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일 록히드마틴 사와 한국 정부 간에 혹시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뉴시스 남해는 강정 기지를 건설해야 할 만한 군사적 위협이 거의 없다. 위는 최신형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
한ㆍ중 관계만 해칠 강정 기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해온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간다. 주민들은 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진행하는 가운데 체포되거나 기소되었으며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러나 해군 측은 '이미 공사는 시작되었다'며 기지 착공을 기정 사실화하는 상태다.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에 느끼는 공포는 당연한 것이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이지스함을 정박시키는 것 자체가 중국에 대한 뚜렷하고도 노골적인 자극이다. 이는 중국 처지에서 미국이 언제든 공습 가능하다는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중국은 유사시에 제주도를 주요 타격 목표로 정할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전함들이 급유를 위해 방문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무방비 상태이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중국은 현재 수조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 중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정부 운영 예산을 중국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미국 국채 신용등급이 AAA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중국은 미국 국채를 팔아 치우고 다른 나라의 국채를 사거나, 미국 국채의 이자율을 올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미ㆍ중 간의 갈등은 심각하게 고조될 수 있다. 심지어 한국 근해의 중국 상선들이 미군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한국에는 불리하고 미국에는 유리한 군사시설을 제주도에 짓겠다는 이명박 정부를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번역ㆍ이의헌 인턴 기자 매슈 라이스 (미국 언론인)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가짜 안보 저자 정욱식|서해문집 |2012.10
유령의 위협과 흔들리는 국익
정욱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 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6년 9월부터 2007년 8월까지 미국의 조지워싱턴대 객원연구원으로 한미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0년 후반, 북한의 대기근과 남한의 IMF 경제위기를 목도하면서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 운동과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 (www.peacekorea.org)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MD 저지와 평화실현공동대책위원회' 공동 집행위원장, '한겨레신문' 언론비평위원,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2004년에는 '한겨레신문'이 뽑은 “미래의 한국을 이끌어나갈 10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평화·통일 문제 담당기자를 겸직하고 있고,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http://blog.ohmynews.com/wooksik)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핵무기』(2008년, 열린길),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2008년, 한울), 『북핵, 대파국과 대타협의 분수령』(2005년, 창해), 『동맹의 덫: 지독한 역설, 두 개의 코리아와 미국』(2005년, 삼인), 『2003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부시의 예방 전쟁과 노무현의 예방 외교』(2003년, 이후)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미군 없는 한국을 준비하자』(공저), 『한반도의 선택-부시의 MD 구상, 무엇을 노리나』(공저) 『전쟁과 평화, 21세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공저) 등이 있다.
프롤로그 ★7
Part.1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제주해군기지 ★19
Part.2 2012 대선과 제주해군기지 ★35
Part.3 ‘유령’의 위협 ★53
Part.4 제주해군기지로 이어도를 지킨다? ★65
Part.5 가열되는 미중 패권경쟁과 ‘동맹의 덫’ ★79
Part.6 미군, 올까 안 올까? ★107
Part.7 제주해군기지와 ‘신의 방패’ ★125
Part.8 ‘유사시’와 제주해군기지 ★151
Part.9 ‘평화의 섬’을 위한 융합형 대안 ★169
유령의 위협
2012년 3월, 구럼비 바위 기습 폭파는 거대한 국가 폭력의 상징과도 같았다. 지역 주민들의 압도적 반대ㆍ주민대책위ㆍ시민단체, 국제 평화단체 및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국가 안보’와 ‘국익’을 들고 있다.
그중 ‘말라카 해협 해적’의 위협은 이미 사라졌다. 제주 남쪽에서 인도네시아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한국 수출 물동량의 60% 지나가는 이 해양 수송로에 해적이 출몰한다는 것인데, 2010년 이후 해적의 활동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 위협론 역시 제주해군기지의 필요 이유로 중요하게 제기되지만, 실제 일본과의 마찰 가능성으로 제기되는 독도 문제는 군사 갈등이라기보다 외교 갈등의 성격이 짙다. 설사 군사 갈등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동해 함대 사령부와 부산ㆍ진해 기지가 유사시에 더욱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더욱이 해군은 2015년까지 울릉도에 해군기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 역시 제주해군기지와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북한 잠수정은 대부분 1천 톤 미만으로 동ㆍ서해 우회 침투가 거의 불가능하며, 평택-목포-진해-부산-동해로 이어지는 남한 해군의 함대 사령부 및 한미연합군의 탐지·추적·차단 능력을 돌파하기도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들어 크게 제기되는 것이 중국 위협론이다. 이는 중국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 시도 및 이어도 관할권 문제와 맞물려 더욱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이어도는 영토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면 4~5m 아래 있는 암초로 한국과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있다. 따라서 이어도 문제는 협상을 통해 외교적 해결을 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도 협상 의사를 내비친 적이 있다. 오히려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가시화된 이후 중국의 강경발언이 나오기 시작한 점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미중 패권경쟁 시대, 격랑의 한반도
중국의 국력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미국은 중동에서 10년 전쟁을 치른 뒤, 심각한 재정적자로 군비 삭감이 불가피해진 와중에도, 2012년 1월 ‘아시아로의 귀환’을 선언하며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군사력을 더욱 확충해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항모 추가 배치, 미사일 전력 강화 등 공군력과 해군력의 상당 부분을 아시아 지역에 재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으며, 추가적인 기지와 기항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한-미-일, 미-일-호주, 미-일-인도로 이어지는 세 가지 3자동맹을 구축해 중국에 대한 포위·봉쇄망을 강화하고 있다. 이중 한-미-일 동맹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최근 논란이 된 바 있는 한일군사협정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며,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MD 체제에 한국이 깊숙이 편입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주해군기지의 건설은 한국이, 미국의 중국 봉쇄 전초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제주해군기지는 한국군이 보유하지도 않은 핵추진 항공모함(CVN-65급)을 전제로 설계되었고, 설계 적용은 주한미군해군사령관(CNFK)의 요구를 만족하는 수심으로 계획되었다”고 폭로한 바 있으며,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미군은 이 기지를 한국 정부에 통보만 하면 사용할 수 있다. 미국에게 제주해군기지는 대만과도 가깝고 오키나와기지보다 규모가 큰 매력적인 기지이다.
실제로 미군이 제주해군기지를 이용하게 되거나 한국군이 이어도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초계활동에 나선다면, 중국과 군사적 마찰을 초래할 수 있다. 제주해군기지를 겨냥한 미사일 배치, 공군 및 해군 작전 범위에 제주도 포함, 제주도 인근 수역에서의 군사훈련 실시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응해 한미동맹도 군사적 맞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우리와 유일한 동맹이지만, 중국이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차지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대중 교역액은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많으며 대중 무역흑자는 5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남북한 간 긴장이 조성됐을 때,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한반도를 군사적 충돌의 중심지로 만들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이는 제주해군기지는 국가 안보와 국익에 있어서 심대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해군은 기항지로, 강정마을은 생명평화마을로
결론적으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국가 안보상의 전략적인 위험과 함께, 절차적 민주성의 훼손, 천혜의 자연환경 및 마을 공동체 파괴, 건설비와 전력투자비를 합쳐 7조 원이 넘는 예산상의 부담, 해군기지 찬반 갈등 격화로 인한 사회적 비용,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 타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렇다. 하지만 제주해군기지 건설에서 얘기한 안보적 실익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안보상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해군기지 건설 강행으로 제 기되어온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여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을 수 있는 융합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백지화하는 대신에, 해군이 제주항과 화순항에 확장·신설할 예정인 해경 부두를 ‘기항지’로 이용하고, 강정마을은 세계 생명평화마을로 지정하며,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취지를 살려 ‘동북아시아 평화군축 포럼’을 창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국가 안보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파국으로 치닫는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풀 수 있는 ‘윈-윈’ 해법이자 포괄안보를 구현할 수 있는 기틀이라고 할 수 있다.
책속으로
일각에서는 독도 문제를 거론하지만, 이 문제는 군사 갈등이라기보다는 외교 갈등의 성격이 짙다. 지리·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제주해군기지보다 동해 함대 사령부와 부산·진해 기지가 동해 유사시에 훨씬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더구나 정부와 군 당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울릉도에 해군기지 확장을 추진하는 등 대비책도 세워두고 있다. --- p.62
중국은 1996년 이어도를 포함한 배타적 경제수역을 발표했지만, 대응 수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2003년 한국이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외교적 항의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2007년 이후에는 대응의 수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 p.73
한국이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MD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MD는 미국의 선제공격 능력을 배가하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략적 균형을 와해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국제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목되어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MD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미국 MD로의 편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 p.95
특히 중국은 MD를 21세기 최대의 전략적 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한 연구자가 중국의 정부 관리, 군 관계자, 민간 전문가 등 60여 명을 인터뷰해 작성한 보고서는 “중국이 미국 주도의 MD를 21세기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 p.98
미-중 간 군사 충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미군의 제주해군기지 사용을 불허한다면, 한미동맹의 파기까지 각오해야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이 상호방위조약과 SOFA를 위반했다고 할 것이고, 미국 국내에서는 ‘배은망덕’이라는 단어가 맹위를 떨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기지 사용을 용인하면 중국과의 갈등에 따른 막대한 국익 손실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국제법적으로도 제3자가, 분쟁 중인 어느 한쪽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면 다른 한쪽에게는 군사적 적대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고, 군사적 지원에는 영토?영해?영공 제공도 포함된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국에 대한 외교적 항의에서부터 여행 금지, 무역 보복,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해양 수송로 봉쇄와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군사적 보복까지 취할 수 있다. --- p.105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비밀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가을 미국과 MD 기구 창설에 합의했다. 2008년 11월 4일 주한 미대사관이 작성한 비밀문서에는 2008년 9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에서 “그들(SPI 한국 측 파트너들)은 MD 프로그램 분석팀 창설에 동의했다”고 나와 있다. --- p.129
한국에게도 동아시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를 제외하곤 한국이 분쟁 방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따라서 유사 상황이 발생하면 한국으로선 중립을 선택하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길이다. --- p.168
제주해군기지 건설 대신에 해경 부두를 해군 기항지로 사용하면 해경과 해군에 대한 중복 투자를 해소하면서 둘 사이의 원활한 협조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해양 수송로와 해저 자원 보호 등 경제 안보와 국가 안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또한 강정마을을 세계 생명평화마을로 지정해 국제적인 평화의 성지로 육성하자는 주장은 인간 안보와 환경 안보를 지키면서도 생명평화의 가치와 국가 안보를 조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 p.173
이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고 본격적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해경 부두의 해군 기항지로의 겸용-강정마을을 세계 생명평화마을로 만들기-동북아시아 평화군축 포럼 창설’이 어우러지는 융합형 대안은 그 유력한 방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p.184
눈물 속에서 자라난 평화 저자 강정마을회|단비 |2012.12
4 3 아픔 딛고 생명평화마을 된 강정 이야기
머리말 모두가 하나의 ‘마을’이 되기를 / 고권일 제주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대책위원장
오빤 강정 스타일 _ 강부언 / 정찬일
그날의 어두웠던 아픔 _ 강성원 / 양혜영
당팟 감귤나무도 푸르게, 통물질 배추도 푸르게 _ 고병현 / 조정
질긴 놈이 이기는 거 아닙니까? _ 고영진 / 이종형
우리 바당 지키자는 것, 이런 것도 죄가 되나요? _ 김미량 / 허영선
강정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습니다 _ 김봉규 / 김영란
들꽃의 노래를 들어라! _ 들꽃 / 조미영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자연 앞에선 무력하다 _ 양홍찬 / 김경훈
구럼비의 바우덕이 _ 이영자 / 한진오
묵주알 속의 평화 _ 이영찬 신부 / 김진숙
미소천사 정영희, 욕쟁이가 된 사연 _ 정영희 / 김영숙
끝나지 않은 이야기 _ 조병태 / 현택훈
4. 3은 역사다. 그리고 또하나의 4. 3, 강정 해군기지 _ 조용훈 / 김영미
엉킨 실은 풀어야 쓴다 _ 윤경노 / 최연미
발문 4.3 이 평화라면 강정은 희망입니다 / 김수열
2007년 4월 26일, 제주 강정마을에서는 마을 유권자 1200여 명 중 불과 87명이 참석한 가운데 투표도 없이 만장일치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가 결의되었다. 행정과 해군이 해녀회, 어촌계, 노인회, 청년회 등 마을 자치단체들을 이미 포섭하고 있었던 것. 이에 반발한 대다수 반대측 주민들은 2007년 5월 18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대대책위를 공식 출범시켰고, 7월에는 법원이 인정한 총회를 열어서 강동균 신임 마을회장을 선출했다. 곧이어 8월 20일에는 마을 유권자 1200여 명 중 725명이 참가한 주민투표에서 680명(94%)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해군기지 반대를 공식 의결하였다. 그 이후로 강정마을회는 공식적으로 해군기지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5년이 넘도록 국가와 거대기업을 상대로 끈질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해군기지 찬반에 대한 입장이 갈리면서 강정마을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평화로웠던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고 말았다. 토질이 좋고 배수가 잘 되어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곳, 농부가 게을러도 땅과 볕이 알아서 농사를 지어준다고 할 만큼 살기 좋고 이웃 간에 인심도 좋았던 마을, ‘제일강정’이라 불리던 강정마을은 이제 옛날 이야기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강정마을 주민들은 친인척 간, 형제 간에도 의견이 갈라져 제사 때도 함께 모이지 않고 반목하는 현실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공권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우울증, 적대감, 자살충동 등에 시달리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 않은 지난 5년의 세월 동안 대다수의 주민들이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군다나 제주도민들에게는 60여 년 전 겪은 4. 3 이라는 거대한 상처가 있다. “아무 혐의 없는 사람들을 끌고 가 죽여도 이유를 묻거나 원망할 수조차 없는 막강한 힘”(47쪽)이 국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국가권력에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제주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한국작가회의 소속 14명의 작가들은 올 여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강정마을의 역사, 어린 시절 혹은 청년 시절에 겪었던 4. 3의 기억, 그리고 해군기지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는 지금의 상황까지, 14명의 주민들을 통해 돌아보는 강정마을이라는 한 마을의 역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안타깝다.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강정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재발견하고, ‘연대’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는 마을 주민들은 강정마을에 공사가 중단되고 진정한 생명평화마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연대와 사랑으로 평화를 지켜가는 사람들
(나는) 배우지 못했어도 정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강정에 사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닙니까? 왜 한 번쯤 찾아와서 이곳 사람들의 얘기를 직접 듣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섭섭한 것입니다. (…)
저는 정부가 지금 자신의 일을 다 하고 있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6~17쪽)
스스로 칠십 평생을 ‘없는 듯이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강부언씨. 한없이 순한 얼굴의 그는 ‘업무방해’로 네 번이나 재판을 받았고 우울증 진단까지 받아 치료약을 복용중이다. 그런가 하면, 열여섯의 나이로 4. 3을 겪었던 강성원씨는 그날의 어두웠던 아픔이 지금 도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전한다.
구럼비를 폭파시키는 발파음이 들릴 때마다 밤낮으로 바깥의 인기척에 숨소리를 죽이며 가슴을 졸이던 4·3 당시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매일같이 경찰과 몸싸움이 일어나고 욕설이 난무하고 이웃 간에 웃음이 사라져가는 모습이 보면서 그날의 어두웠던 아픔을 반복되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픕니다. 빨리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그래야 우리 안사람 얼굴도 좀 자주 보고 마을 이웃들과도 예전처럼 화통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잔 하고 그럴 텐데 말입니다.
(35~36쪽)
40대 귀농자 김봉규씨는 ‘강정 이야기’라는 소식지를 발행해 해군기지 반대의 목소리를 알리며, ‘생명평화강정불자회’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그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강정 의 땅과 바다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야기한다.
바다가 일터인 해녀와 어부들이 바다 반쪽이 없어지는 것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바다가 주는 이익은 전복, 소라, 물고기가 전부가 아니며 해산물 및 자연환경과 서비스가 결합되는 상태에서 강정마을에 가져다줄 이익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강정 이야기’를 통해 홍보하는데도 먹혀들지 않는다 했다. 바다에 우리의 꿈과 희망, 미래가 있다고 바다 관련 정부기관들도 홍보하는데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에 어떻게 찬성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힌다고 했다. (92쪽)
누가 이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그르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대대로 땅과 바다를 통해 먹고살아온 이들에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말라”고 윽박지를 수 있겠는가. 마을의 가장 큰 어르신인 윤경노(91)옹은 놀랍도록 꼼꼼하고 자세한 4. 3 관련 기록 노트를 건네며, 마을의 화합을 위한 절절한 당부를 남기고 있다.
나 윤경노는 일제치하의 고난도, 4?3의 아픔도, 6?25동란도 다 겪으며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 제일강정이 해군기지 찬·반으로 마을주민 모두가 천신만고를 겪고 있습니다. 해답은 토론에 있습니다. 어렵더라도 찬·반 주민이 머리를 맞대고 몇 번이고 토론하면서 엉키고 설긴 실마리를 풀어 우리의 제일강정이 되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219쪽)
토론이 두려운 사람들이 토론을 거부하고 오로지 완력으로 마을 주민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명분도 적법성도 없는 해군기지에 삶의 터전을 빼앗길 수 없다고 하는 이 사람들의 피맺힌 외침에 과연 무어라 대답해야 할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것이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강정마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추천사에서 이야기했듯 “아름다운 강정은 강정 주민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며 우리 당대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 강정아, 너는 이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 주교의 강론 가운데서)
강정평화서신 평화는 가둘 수 없다 저자 송강호, 박정경수|짓다 |2018.01
저자 송강호-나는 전쟁도 군대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나의 이 꿈은 어느 날 아침 자다 일어나 떠오른 그냥 스쳐 지나가는 꿈이 아니다. 이미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가 꾸었던 꿈이었고 2000년 전 예수라는 젊은이가 가르친 꿈이었다. 이 꿈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감옥에 갇혀야 했으며 난민이 되어 정처 없이 낯선 이국땅을 떠돌아야 했다. 나는 그런 위험한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 마치 이단 집단으로 개종한 이들처럼 두려우면서도 가슴 설레게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내가 어린 시절 자라났던 동두천에는 미군기지가 있었다. 나는 왜 그 때 어머니께서 막내였던 나를 어린 나이에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키셔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부모를 떠나 사춘기를 홀로 방황하며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그 때는 몰랐다. 어머니는 군사기지를 보고 자라는 것이 자녀의 성장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셨던 게다. 나는 르완다, 보스니아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등지의 내전지역을 돌아보며 밤에는 악몽을 꾸었고 낮에는 평화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제주도 강정에 지어지고 있는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려다 세 번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어둡고 좁은 감방에서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꾸게 되었고 제주와 오키나와 타이완을 잇는 동중국해가 전쟁도 군사훈련도 할 수 없는 평화의 바다가 되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 비무장 중립국가가 되는 꿈이다.
저자 박정경수 -내게 평화는 옆 사람을 보면서 가는 길이다. 앞에 서서는 보이지 않는다. 앞서 가서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평화가 무언지 설명할 때 망설여진다. 현학적인 단어로는 평화를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현장과 내가 만난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는 보다 분명한 평화의 길을 발견한다. 촛불을 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때 나는 평화를 목소리를 듣는다. 더 간절한 목소리가 나침반이 된다. 내게 평화는 그들 옆에 서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내 발걸음이 느리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때는 교사의 체벌보다 학교라는 구조가 더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때 나는 내 몸이 말하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그것이 용기보다는 간절함이라고 생각했다. 그 선택은 내게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걸음 멀리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역거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화주의자여서 병역거부를 했다기보다 그 선택이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했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를 했을 때에도 한 걸음 더 멀리 보였을 뿐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한다. 다행히 늘 나보다 먼저 그 길을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군사기지를 주제로 활동했고 지금은 틈틈이 몇 개의 평화단체를 돕고 있다. 녹색당에서 일하고 있으며, 사람들과 하나씩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한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아서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다.
목차
프롤로그 - 깊은 절망의 밤에 평화의 꿈을 꾼다 7
1부 강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 평화의 길목에서 보낸 편지 13
1. 왜 교도소 앞마당에서 평화를 배워야 하나요? 15
송강호의 옥중일기 1 24
2. 평화의 학교는 이미 열려 있어요 35
송강호의 옥중일기 2 56
3. 군사기지로 고통받는 작은 섬들의 연대를 꿈꾸며 61
송강호의 옥중일기 3 77
4. 평화의 꿈을 좇는 난민이 됩시다 81
송강호의 옥중일기 4 98
5. 공권력의 폭력에 노출될 때 103
6. 다시, ‘3천년의 꿈’을 꿉시다 121
7. 포기할 수 없는 꿈, 생명평화의 마을 ‘강정’ 139
제주법정 최후진술서 1 (2012. 12. 20) 149
8.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도를 꿈꿉니다 157
제주법정 최후진술서 2 (2013. 1. 21) 165
9. 역사는 악인뿐 아니라 방관자도 심판합니다 175
10. 다시, 평화의 돛을 올립니다 193
11. ‘자유의 도성’ 대한민국을 꿈꾸며 207
12. 한국전쟁은 왜 60년 전쟁이 되었나? 223
13. 폭력과 싸우는 힘, 상상력 241
송강호의 옥중일기 5 248
14. 통일 길목을 지키는 이정표들 261
15. 젊은이들에게 군복무 대신 ‘평화복무’를 277
16.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당을 꿈꾸며 293
17. 전쟁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 313
2부 강정 이후를 말하다 - 평화를 만드는 대화 331
에필로그 - 평화의 답장을 기다리며 389
강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도는 2005년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지만 바로 2년 후(2007년) 해군기지 사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정부는 해군기지를 강정마을에 유치하기로 결정한다. 강정마을은 주민투표를 실시해 해군기지 건설 반대로 저항하지만 결국 2011년에 공사는 강행된다. 구럼비 바위의 혼을 보호 계승하고 강정의 생태계 속 생물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마을 주민들은 권력과 힘겹게 싸웠다.
송강호는 구럼비 폭파 현장에서 철조망을 넘다가 공무 업무 방해혐의로 체포 구속된다. 송강호는 약 1년의 수감생활로 고초를 겪는다. 1부는 송강호의 수감생활 중 평화활동가 박정경수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엮은 것이다. 박정경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1년 6개월 수감생활 경험이 있고 군사기지 반대운동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일까. 그는 평화와 투쟁의 삶의 고단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의 교감은 각별했다. 송강호는 보석으로 석방되지만 시위를 계속 이어간다. 강정마을 주민 모두에 큰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섬 제주도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활동가들은 현재를 산다고 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틈을 내는 몸부림, 그것이 이들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해군군사기지는 완공되었지만 강정 평화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강정 이후를 말하다
누가 시간이 지나면 서로 잊힌다고 했든가. 몸에 새겨진 세월은 지워지지 않는다. 송강호가 활동하는 ‘개척자들’이 있는 양평 ‘샘터’에서 송강호와 박정경수가 오랜만에 만났다(2016년 12월 26일). ‘강정 이후’를 말해보기 위해서이지만 현재의 투쟁에서 희망을 말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강정의 ‘이후’를 말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평화는 투쟁의 끝이 아니라 항상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지속적으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희미한 희망을 말한다면 “평화는 가둘 수 없다”는 믿음이랄까.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평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인터뷰를 하고도 1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평화 투쟁’ 중이다.
‘평화수감자’의 삶
누구도 가둘 수 없는 평화 의지와 몸짓. 지역의 특수한 사건의 현장에서 보편적인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했던 자들 없이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평화는 지속될 수 없다. ‘평화수감자들’이 미래의 불가능한 희망을 현재에 앞당기는 ‘사건적 몸짓’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평화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다. 평화를 진작하는 ‘평화수감자들’의 투쟁적 삶은 현재도 계속 되고 있지만 이러한 비극적 현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할 때까지 그 누군가에 의해 이 평화 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평화는 가둘 수 없다.”
책속으로
--- p.9 군사주의나 전쟁 그 자체의 투쟁은 힘과 무력에 의한 싸움이 아니다. 평화를 위한 싸움은 상상력과 예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며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하며 현실 너머에 있는 가능성의 세상을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의 상상력이 폭력을 이기는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p.41 언젠가 선생님은 “제주가 그리고 강정마을이 그런 평화를 위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 강정마을이 평화 공원, 평화의 학습장이 되어야 한다. UN 평화대학을 유치하자” 이야기하셨죠. 사실 그때 저는 강정마을이 처한 현실, 그러니까 해군기지 공사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만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앞일을 내다볼 여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요즘 그런 것들이 필요하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의 꿈은 평화학교 짓는 것이었지요.
--- p.53 저는 정의와 평화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빛이 거기에서 비취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불의한 강자에게 억울하게 짓밟힌 약자들이나 불화와 갈등으로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가 있습니다. 이들이 딛고 있는 고통스런 대지에 하나님의 나라가 닿아 있습니다.
--- p.116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것처럼 몹시 외로워 본적이 없느냐고요? 있었지요.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정의와 평화 같이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우리를 고독한 인생으로 만듭니다. 그런 삶은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손해를 보아야 하고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거나 수감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어야 하기도 할 테니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지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잊혀 간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 p.135 내가 아니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무기와 그 무기를 만드는 기업이 더 많이 줄어든다면, 그래서 우리 사회가 군대가 아니라 조금 더 아름다운 얼굴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따금씩 상상해 보곤 하는 거지요. 선생님은 그것을 바로 ‘꿈’이라고 말씀하실 테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병역기피자, 혹은 이상주의자로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말처럼 그리스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실적일 수도 없고, 현실적이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겠지요.
--- p.191 이제는 평화를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쟁업자들이 팔고 있는 불안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의 불안한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안까지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보았던 공포를 잃어버린 딱딱해진 마음이 아니라, 불안을 희망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말랑말랑한 마음을 가진 평화를 연습해야 합니다.
--- p.221 평화운동은 어쩌면 앞으로 분명 ‘국가의 이익’이라는 신화를 넘어서야 할지 모릅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국경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보편적 인권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건너야 하는 커다란 목표일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국가의 이익이 권력자들의 이익이 되고 국경이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사람과 사람이 친구가 되는 길에 장애가 된다면 언젠가는 그 국경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 p.251 제가 처음 선생님과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도 선생님의 체포 때문이었지요. 편지를 주고받았던 별로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선생님의 체포와 구속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요. 주민들의 완력과 저항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기에 거대한 기업과 정부, 군대는 주민들을 기어이 감옥으로 보내려는 것일까요. 강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평화를 희망하는 일이 그렇게 위험하고 불법적인 걸까요. 이 땅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 평화의 길이 아니라면 두터운 담장 안의 좁은 방이라도 피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 p.278 군복무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청년 시절 1년 6개월이나 되는 인생의 황금기를 철창 속에 갇혀 지내야만 했으니까요.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형제님을 접견하러 갔던 날,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제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국가가 자신의 양심과 신념으로 선택한 삶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으며 자국의 폭력 이데올로기를 강요해도 되는 것일까?’ 국가의 무지나 나태가 아니라 철저한 무능함이고 악독이라는 절망감에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 p.316 나는 평화에 대한 신념 때문에 세 번째 수감이 되었습니다. 수감될 때마다 감옥은 나를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평화의 꿈이 어떤 고난이나 슬픔이 닥친다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임을 수용생활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평생을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천하고 전파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변할 수 없습니다.
--- p.328 저는 지금도 ‘평화수감자’라는 말이 이상합니다. 평화를 감옥에 가두고야 마는 우리의 역설적 현실을 그 이름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그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옥에 평화수감자라 불러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발걸음은 평화를 향한 희망일 것입니다. 단지 하루뿐이지만 추운 겨울에 우리가 평화를 위한 감옥의 고통과 무게에 함께할 수 있는 날이기에 소중하게 지켜가려 합니다.
--- p.335 저는 해군기지가 준공이 되면서 평화운동이 오히려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봐요. 준공이 되었으니 이제 끝난 것 아니냐는 무언의 질문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이제 해군기지가 건설이 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강정을 새로운 평화운동의 모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새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새로운 응답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군기지의 준공은 강정에 있는 활동가들에게는 새롭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어요. 이 점은 그나마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봅니다.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4년간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강정마을에는 결국 해군기지가 완공되었고, 사드 배치 문제로 이번에는 성주 소성리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수 천 명의 공권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올해 들어 북한은 한 달에 몇 차례씩 미사일을 발사했고 핵실험까지 진행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평화도 멈추지 않습니다. 강정마을에는 군사기지를 감시하고 다시 해군을 내보내기 위한 움직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성주 주민들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추리는 이제 10년이 되었지만 아직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평화교육을 위한 활동도 과거보다 활발해졌습니다. 다른 나라의 분쟁지역과 연대하는 활동도 계속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 p.393
사드배치 거짓과 진실 사드 제대로 알기 저자 고영대|나무와숲 |2017.04
저자 고영대는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집행위원장(1999), 매향리미군국제폭격장폐쇄범국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2000), 미군장갑차여중생살인사건범국민대책위 진상조사위원장(2002), MD저지와평화실현 공동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2001) 등을 지냈다.
현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공동대표이자, 평화통일연구원 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전환기 한미관계의 새판짜기』 1?2권과 『전쟁과 분단을 끝내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있으며, 작전통제권, 한반도 비핵화, 평화협정, 사드 배치 등과 관련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이 밖에 NPT(핵확산금지조약) 사이드 이벤트 등 국제행사에서 MD 관련 글을 다수 발표했다
들어가는 글
1장미사일 방어란 무엇인가
1. 미사일 방어MD란?
2. 사드THAAD란?
2장미국·일본·한국의 MD 역사
1. 미국 MD 역사
레이건 대통령 이전 시기(1945~1980) |레이건 대통령 시기(1981~1988)|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1989~1992)|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1993~2000)|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2001~2008)|오바마 대통령 시기(2009~2016)
2. 미·일 MD 협력의 역사
미·일 기업 간 MD 공동연구 | 미·일 정부 간 탄도미사일 방어 공동연구|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 미·일 MD 협력의 분수령|북한의 핵보유 선언 이후 MD 체계 구축에 박차|미·일 MD 협력,
MD 정보 공유와 작전 및 훈련으로 확대|미·일 연합 MD 훈련 강화|일본,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MD 전략 보유
3. 한·미 MD 갈등과 협력(?)의 역사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 미국의 눈치를 보던 시기|김대중-노무현 정권 : 미국에 맞선 시기|이명박-박근혜 정권 : 미국을 추종한 시기 |한국군 보유 MD 전력 현황과 향후 도입 계획
3장사드로 북한 핵·미사일 막을 수 있나
-사드, 군사적 효용성 없다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상 요격 불가능|사드의 요격을 피할 수 있는 회피기동 가능|탄도미사일의 비행 특성상 요격 불가능|진짜 탄두와 가짜 탄두 구별 불가능|동시에 대량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 요격 불가능
4장사드 배치는 한국의 미국 MD 전면 참여
국방부가 제시한 한국의 미국 MD 참여 기준|미국 전략사령부의 전략지휘와 태평양 사령부의 작전통제를 받는 사드 레이더|사드 배치로 성격과 임무가 달라지는 한국 MD|한국 MD 지휘통제체계와 주한미군 지휘통제체계 연동
5장미국은 왜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려고 하나
1. 동북아 및 전 세계 MD 체계 구축
미국 주도의 동북아 MD 체계 구축|미국 주도의 전 세계 MD 체계 구축
2. 동북아 및 전 세계 군사동맹 구축
미국 주도의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한·미·일 MD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매개고리|한·미·일 통합 MD와 군사동맹의 제도화|한·미·일 군사동맹, 나토 개별 파트너십 가입으로 나토와도 결합
3. 중국 견제 위한 한·미·일 집단방위 행사
한·미·일 통합 MD 체계와 군사동맹 구축은 한·미·일 집단방위의 축|집단방위는 곧 동맹의 집단적 무력행사|한국의 동북아 지역 집단방위 참여가 의미하는 것
6장미국 주도의 동북아 MD와 군사동맹, 무엇을 노리나
1. 미국 절대 우위의 전략지형 구축
2. 미·일 절대 우위의 지역지형 구축
3.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와 대북 선제공격
미·일의 대북 선제공격 뒷받침|한국 MD, 주로 미국과 일본 방어에 복무
7장가장 대미 종속적인 한·미·일 통합 MD 체계
1. 지역 통합 MD 체계의 특성과 방어 임무
나토 통합 MD 체계의 성격과 방어 임무|미·일 통합 MD 체계의 성격과 방어 임무|한·미 통합 MD 체계의 성격과 방어 임무
2. 지역 통합 MD 체계의 작전통제권, 누가 갖나
나토 통합 MD 체계의 작전통제권 행사 주체|미·일 통합 MD 체계의 작전통제권 행사 주체|한·미 통합 MD 체계의 작전통제권 행사 주체
3. 지역 통합 MD 체계 구축 비용, 누가 부담하나
나토 통합 MD 체계 구축 비용, 미국이 대부분 부담|미·일 통합 MD 체계 구축 비용, 양국 각자 부담 |한·미 통합 MD 체계 구축 비용, 한국이 모두 부담
8장한·미·일 집단방위 행사와 한국의 대일 군사적 종속 가능성
1. 한·미·일 통합 MD 구축과 집단방위 행사
한·미·일 통합 MD 체계 구축의 현주소와 미일의 군사적 이해|한·미·일 통합 MD 체계의 성격|한·미·일 통합 MD 체계의 주 임무는 미국 방어|한·미·일 통합 MD 체계 구축과 집단방위가 가져올 대일 군사적 종속 가능성|한·미·일 통합 MD 지휘체계 구축과 집단방위가 초래할 한국의 대일 군사적 종속 가능성
2.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과 집단방위 행사
3. 한·미·일 간 동북아 집단방위 행사에 따른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예상 경로
침략의 정의|‘침략의 정의’로 본 주한미군과 향후 한반도에 들어올 자위대의 성격|예상되는 자위대의 한반도 재침략 경로
9장 법적 근거 없는 주한미군 사드 배치
1. 실체도 없고 법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한·미 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한 주한미군 사드 배치의 불법성|한·미 합의가 조약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한·미 합의가 ‘기관 간 약정’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주한미군 사드 배치 관련 한·미 합의는 ‘거시기’ 협정(?)
2. 용산미군기지 이전 사업의 교훈
‘1990년 한·미 합의(MOA, MOU)’의 위법성|‘1990년 합의’의 위법성을 시정하려 한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용산미군기지 이전 사업에서 드러난 정부 관료들의 대미 추종적 자세와 무책임성
3. 폴란드와 루마니아 사례로 본 주한미군 사드 배치의 국회 동의 필요성
미-루마니아, 미-폴란드 합의와 한·미 합의 간 법적 지위의 차이|미·루마니아, 미·폴란드 합의와 한·미 합의의 내용적 차이
4. 한·미 합의의 법적 근거를 밝히고 그 불법성을 제거하는 것은 국회의 책무
10장사드 배치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1.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과 북극성-2호를 사드로 요격할 수 있다?
2. 사드 배치로 북한 탄도미사일에 대한 다층방어가 가능하다?
3. 한국 배치 사드로 미국을 겨냥한 ICBM을 요격할 수 있다?
4. 대구 배치 사드로 일본을 겨냥한 노동미사일을 요격할 수 없다
5. 사드 레이더로는 중국 내륙에서 발사하는 ICBM을 탐지할 수 없다?
6. 노동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사드를 도입해야 한다?
7. 고각 발사한 노동미사일의 하강 속도가 빨라 패트리엇으로 요격할 수 없다?
8. 주한미군 사드 배치에 한국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다?
9. 사드 레이더의 전자파가 안전하다는 정부의 주장은 신뢰할 수 있는가?
10. 중국의 성주 사드 기지 공격 가능성과 만약 중국이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맺는글 :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핵폭탄이 투하되는 나라가 되려는가?
미 주
2012년, 미국은 아태 지역 MD를 구축하겠다고 대외에 공표하였다. 그 첫걸음이 ‘MD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사드 레이더의 대중 전진 배치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사드 레이더 배치를 요구한 데 이어, 한국에도 사드 레이더 배치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한국은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제 한국도 사드를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드 한국 배치는 동북아 MD, 나아가 이를 한 축으로 하여 전 세계 MD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사드 레이더가 있다. 사드 체계, 그중에서도 사드 레이더는 동북아 지역 MD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 고리라고 할 수 있다 . --- p.96
한국 사드 배치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은 동북아 MD와 군사동맹 구축, 나아가 세계 MD와 군사동맹 구축으로 아태 지역은 물론, 세계 패권을 유지·강화하려는 미국의 핵심 이해와 군사전략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따라서 사드 배치는 단순히 무기 체계 하나를 도입하는 문제가 아니며, 또한 한국과 미국의 일개 정권 차원에서 정략적으로 추진하는 일시적이고 전술적인 사안도 결코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세계 패권을 유지·강화하려는 미국의 국가적 이해와 군사전략에 따라 강고하고도 집요하게 추진되고 있는 지역적·지구적 차원의 전략적 사안이다.--- p.113
불행하게도 한국은 미·일이 주도하는 동북아 MD의 하위 체계로 편입되어 미국이 실질적으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될 한·미·일 통합 MD 지휘체계의 작전통제를 받아 주로 미·일 방어 임무에 복무하게 될것이다. --- p.128
한국은 MD 구축 비용 부담 측면에서도 미국이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해 상층 체계 MD를 구축하는 나토 유럽 회원국들에 비해 훨씬 대미 굴욕적이다. 또한 한국처럼 상·하층 체계 MD 구축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지만 일부 자산만 미국 방어에 할당될 뿐, 대부분은 자국 방어에 할당되는 일본의 경우보다도 대미 굴욕적이라고 하겠다..... 한국 MD 체계는 방어 임무(방어 지역), MD 지휘통제체계, 비용 부담 등 모든 측면에서 나토나 미·일 통합 MD 체계에 비해 훨씬 대미 종속적이고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p.154
레이건과 부시 정권의 군사적 일방주의에 경제적 일방주의까지 결합 시킨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한반도와 동북아를 그 첫 번째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한·미·일 대 북·중·러 간 신냉전 대결 구도의 도래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고강도의 대결이 한반도와 동북아를 중심으로 펼쳐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북아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의 시험대에 오르지 않으려면 반드시 한·미·일 MD 체계 및 군사동맹 구축과 동북아지역 집단방위 행사를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사드 배치 철회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가 최우선적 과제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186)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추가적인 조약 체결 없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추진할 수 있다는 국방부와 법제처의 입장은 사드 성능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p.193)
한편 SLBM이 레이더의 탐지 각도를 피해 발사될 경우 이를 조기에 탐지, 추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하다. 포스톨 교수도 만약 북한이 KN-11(북극성 1호)을 실전 배치(2018년 추정)한다면 사드의 효용성은 완전히 무력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드가 SLBM을 요격하지못하는 것은 요격미사일이 갖는 한계도 있지만, 사드가 고정된 단일 레이더를 사용하기 때문에 북한 잠수함이 레이더의 탐지 각도(120도)를 피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p.215
포스톨 교수도 지난해 8월 필자에게 보내온 메일에서 “중국이 사드를 대미 보복 공격력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중국군이 (성주)사드 레이더를 공격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며 뤄위안 소장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이 성주를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200~300킬로톤의 핵탄두가 장착된 단·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미국의 핵탄두는 12.5킬로톤에 불과하다 --- p.245
성주촛불일기 사드배치 철회 성주투쟁 365일의 기록 저자 김충환|문예미학사 |2017.08
저자 김충환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를 나왔으며,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현재 사드배치 철회 성주투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성주기행”이 있다.
목차
무용지물(無用之物) 사드, 성주에 왔다 / 2016년 7월 7일
성주대첩, 한반도 어디에도 최적지는 없다 / 7월 23일
관군의 출구전략, 제3부지론 / 8월 16일
관군의 배신, 전열을 정비하다 / 9월 13일
관군과의 협상, 진지를 구축하다 / 10월 2일
김천과 원불교, 원군(援軍)이 왔다 / 10월 11일
끈질긴 투쟁,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10월 27일
의병들, 한겨울을 버티다 / 12월 10일
촛불투쟁 200일, 성주가 평화다 / 2017년 1월 28일
소성리 전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2월 27일
절망을 딛고 일어나 다시 희망을 보다 / 4월 27일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다 / 5월 10일
성주촛불의 영웅들, 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 7월 13일
느닷없이 사드가 왔다. 상황이 엄중했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남과 북의 문제가 얽힌 난제였다. 한반도 평화의 문제이고, 동북아평화의 문제였다.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들불이 되어 번져나갔고,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이 불거졌다. 100만, 190만, 232만의 촛불이 광화문을 밝혔다. 새누리당은 분열했고, 박근혜는 탄핵되어 구속됐다.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성주촛불 302일째 되는 날이다. 투쟁의 상처는 컸다. 역사가 늘 그렇듯이 성주군수를 비롯한 관군(官軍)은 저항을 포기하고 배신했으며, 분열을 조장했다. 의병(義兵)만 남아 어렵게 싸워왔다. 2017년 2월 27일, 롯데가 사드배치 부지를 제공했으며, 4월 26일 새벽, 불법적으로 사드가 반입됐다. 성주촛불은 8천명의 무장경찰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수많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성주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서로 부둥켜안고 다시 일어나 희망의 싹을 틔웠다. 많은 갈등이 있었고, 깊은 고뇌가 있었고, 밀고 당기는 협상이 있었고, 굴욕적인 타협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는 단 하나, 사드배치 철회였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다시 여름이 됐다. 성주 주민들은 365일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촛불을 들었다. 이 책은 사드배치 철회 성주투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서 함께 투쟁하며 기록한 365일 동안의 일기(日記)이다.
일본 열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일본 도도부현 중 하나이며, 류큐 제도에 있는 지역이다. 2012년 기준으로 인구는 142만 명 정도이며, 면적은 2,271 km²이다.(제주도 면적은 1,848 km²이다.) 기후는 야에야마 제도에선 최한월 평균 기온이 18℃ 이상되는 해양성 열대 기후이며, 다른 지역은 온대 기후를 보인다. 현청은 나하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하 국제공항이 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전체 일본 미군기지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또 오키나와 본섬의 20%가 이런 미군기지의 공여지로 제공되고 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군은 대부분 해병대와 공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군과 육군도 있다.
후텐마 비행장
후텐마 비행장(일본어: 普天間飛行場 ふてんまひこうじょう) 또는 후텐마 미국 해병대 비행장(영어: Marine Corps Air Station Futenma)는 일본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비행장으로, 보통 후텐마 기지(일본어: 普天間基地 ふてんまきち, 영어: MCAS Futenma)라고도 부른다. 활주로 길이가 2.7 km에 이르며, 가데나 기지와 함께 주일 미군의 오키나와 지역에서의 양대 거점이다.
카데나 공군기지
가데나 공군 기지(영어: Kadena Air Base, 일본어: 嘉手納飛行場 가데나 히코죠[*])는 일본 오키나와에 위치한 태평양 미군의 가장 큰 군용 비행장이다. 18 비행단이 주둔해 있다. 한국전쟁 당시, 19 폭격기 전대, 22 폭격기 전대, 307 폭격기 전대의 B-29 폭격기가 원산 상륙 작전 등의 공습을 하였다.
주요한 사건과 사고
◾ 1955년 유미코짱 성폭행 살인사건
◾ 이에지마 주민들의 '거지행각' 투쟁
◾ 프라이스 권고와 섬 전체의 투쟁
◾ 미군용지특조법과 한평반전지주회
◾ 1995년 소녀 성폭행 사건
◾ SACO합의와 헤노코 해상기지 건설
◾ 2004년 오키나와국제대학 헬기 추락 사고
◾ 다카에 헬리패드 건설
◾ 오스프리의 오키나와 배치
◾ 여성 살해 시신 유기 사건(2016.4)
기지의 섬, 오키나와 현실과 운동,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 제1권 저자 정근식, 전경수, 이지원 외 |논형 |2008.08
목차
책머리에 / 정근식
서장/ 이지원
1부.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
1장. 오키나와 미군정사 연구의 현실과 도전 / 임현진, 정근식
1. 오키나와 미군정사 연구의 문제설정
2. 점령과 전후, 오키나와 문제의 기원
3. 초기 미군정에 관한 미일관계사적 연구
4. 미군정사에 관한 3자관계적 접근
5. 도전적 질문들: 동아시아체제론 시각에서의 재해석
2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오키나와 미군기지
2장. 동아시아에서 점령의 문제와 점령기 인식 / 정영신
1. 문제제기: 동아시아 점령의 연계성과 점령기 인식의 균열
2. 점령의 문제설정과 미국의 동아시아 점령
3.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미국의 점령과 그 모순
4. 일본에서 전후 인식과 점령사 연구
5. 한국에서 점령의 경험과 점령기 인식
6. 나오며: 점령기 인식과 전후 인식의 균열을 넘어서
3장. 한국전쟁과 '기지국가' 일본의 탄생 / 남기정
1. '기지국가'론의 재기
2. 한국전쟁과 '기지국가'의 탄생
3. '기지국가'의 해체 시도
4. '기지국가'의 평화
5. '기지국가'론이 오키나와 문제에 던지는 함의
4장 냉전체제의 붕괴와 미일동맹의 변화 / 마상윤
1. 서론
2. 냉전 종식과 동맹표류
3. 동맹재정의
4. 대테러전과 미일밀착
5. 결론
5장. 오키나와의 기지화·군사화에 관한 연구 / 정영신
1. '기지의 섬' 오키나와
2. 1945년까지 구일본군에 의한 기지건설
3, 전쟁과 점령, 미군지배하에서 기지의 건설과 확장
4.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이후의 미군기지 문제
5. 기지의 반환에 새겨진 오키나와 민중들의 저항
6. 나오며: 기지에 대한 관심에서 평화를 위한 연대로
3부. 미군기지와 오키나와 지역사회
6장.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관계에서 본 오키나와 문제 / 장은주
1. 들어가며
2. 전전 오키나와의 지방자치제도
3. 전후 미국 정부 통치하의 오키나와 지방자치제도
4.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와 지방자치제도 및 행정제도의 변화
5. 지방분권개혁과 오키나와
6. 나오며
7장. 현대 오키나와에서 '혁신'의 의미적 특징 / 이지원
1. 오키나와에서 혁신의 재발견
2. 일본 본토에서의 '혁신'의 궤적
3. 오키나와 혁신자치의 특징
4. 오키나와의 선거양상
5. 90년대 이후의 '유동화' 상황과 오키나와 아이덴티티
6. 나오며
8장. 오키나와 기지촌의 형성과 미군·주민 관계 / 전경수
1. 문제제기: 미군기지와 일상생활
2. 오키나와의 기지종속과 사교업
3. 미군과 군·민 관계: 미시적 활동을 중심으로
4. 킨초와 신카이치: 농촌에서 기지촌으로
5. 맺음말: 기지촌의 비교문화론
9장. 미군기지 마을 여성들의 성차별에 대한 도전과 한계 / 진필수
1. 재판의 경위: 부계원리와 성차별의 문제
2. 재판 사례의 문화론적 의미와 분석들
3. 소송당사자들의 목표와 관계들
4. 소송의 문화적 배경: 사마의 혈연적 구성원리
5. 경합되는 문화적 규범과 사상들
6. 두 가지 가치의 공존: 촌락공동체의 전통과 여성 인권
4부. 기지 성매매와 여성평화운동
10장. 미군 점령기 오키나와의 기지 성매매와 여성운동 / 박경미
1. 서론
2. 점령기 오키나와의 기지 성매매의 구축
3. 오키나와의 성매매 반대운동
4. 결론
11장.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과 여성평화운동 / 문소정
1. 반기지투쟁과 여성평화운동
2. 오키나와 반기지투쟁과 여성평화운동의 전개
3. 오키나와 여성평화운동의 발전적 전개의 요소
4. 오키나와 여성평화운동의 특성
12장. 오키나와 여성운동의 정치학 / 윤소정
1. 동아시아와 오키나와 여성
2. '행동하는 여성모임'의 주체와 목표, 행동
3. '행동하는 여성모임'의 여성운동의 정치학
4. '행동하는 여성모임'의 여성평화운동의 동아시아 정치학
5부.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의 국제적 현황
13장. 독일 미군기지의 역사와 현황 / 임종현
1. 서론
2. 미국의 대독일정책
3. 독일주둔 미군기지의 현황
4. 냉전 이후의 독일미군기지의 전략적 의미와 지역사회의 변화
14장 국가-시민사회 관계와 필리핀의 반기지운동 / 여인엽
1. 문제제기: 반기지운동의 성공과 실패
2. 역사적 배경
3. 반기지연합, 1981~1991
4. 활동가들과 구갠 정치엘리트들 간의 관계
5. 오키나와 반기지운동에 대한 합의
15장. 주한미군의 정치사회적 동학과 한국의 미군기지반대운동 / 정영신
1. 문제제기: '정치사회적 문제'로서의 주한미군
2. 한미동맹의 구축과 그 모순
3. 주한미군 주둔과 철수의 역사적 동학
4. 탈냉전기 안보의 제정의와 미군재배치
5. 한국의 미군기지반대운동
6. 나오며: '주한미군의 정치사회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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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관광의 섬’ 이전에 ‘기지의 섬’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류큐왕국을 절멸시키고 병합한 것도 열강과의 생존경쟁 및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전략적 목적에서였고, 그러한 일본을 패퇴시킨 미국이 오키나와를 직접 관장한 것도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을 군사적으로 아우르기 위함이었다. 한국전쟁 시기부터 본격화된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는 1972년에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반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가 감소되었다는 점, 또한 시정권 반환 이후 일본 자위대도 오키나와에 함께 발을 디디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상대적인 기지화의 정도는 더욱 높아졌다. 2006년 3월 말 현재,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작은 면적에 37개(23,667.5ha)의 미군기지가 배치되어 있는 등 일본 내 미군 전용시설의 무려 74.6%가 집중되어 있는 것이 오키나와의 현실인 것이다.
1부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미군정사 연구의 현실과 도전」(임현진.정근식)을 실었다. 이 글은 1945년부터 1972년까지의 오키나와 미군정의 구조와 변동을 개괄하면서 동시에 미군정사 연구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오타(大田昌秀)와 엘드리지(Robert D. Eldridge), 미야자토(宮里政玄) 등 기존 미군정 연구의 대표적인 성과를 기초로 하여 오키나와 미군정사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2자관계나 3자관계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체제론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종의 방법론적 시좌(視座)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러한 작업은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미군정 및 1970년대 초반까지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군사적 기반을 탐구하기 위한 예비적 작업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나아가 주로 문화론적 측면에서 논의되는 동아시아체제론을 정치경제적 영역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2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는 1부의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각지에 미군기지가 정착하는 역사와 논리 및 냉전 후의 재편성 상황, 그리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화를 총론적으로 다룬 글 네 편을 실었다. 이 작업들을 통해서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우선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이상을 관통하는 통사적 시각 위에서, 또 미국을 정점으로 한 ‘‘동아시아형’ 냉전체제 - ‘분단(휴전)국가’ 한국 - ‘기지국가’ 일본 - ‘기지의 섬’ 오키나와’라는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부 “미군기지와 오키나와 지역사회”에서는 일본 및 오키나와 내부의 시각에서 접근을 시도하였다. 오키나와는 현실 법제도상으로는 엄연히 일본이라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47개 행정구역의 하나로 위치 지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되 일본이 아닌 곳’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일본 사회 일반의 논리로는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방 - 중앙정부 간 관계를 통해, 또 보수 - 혁신(자치)대립 구도와 관련하여 살피는 한편, 다시 오키나와 내부의 지역사회로 파고들어가 일상세계 및 촌락구성의 차원에서 미군기지 문제를 바라보는 네 편의 글을 실었다.
4부 “기지 성매매와 여성평화운동”에서는 여성 문제와 기지 문제가 중첩되는 부분을 다루었다. ‘탈냉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1995년의 미군에 의한 소녀성폭행사건이었듯, 오키나와에서 여성 문제와 여성운동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또한 기지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역사적인 경과와 사회운동의 특성 및 사례를 연구한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5부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의 국제적 현황”에서는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을 비교사적 시각에서 살피기 위해 각각 독일, 필리핀, 한국의 사례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기지 문제 전문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독자는 자기나라의 일부 현황이나 매스컴에 오르내린 기지관련 사건 정도를 기억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상황에 대한 윤곽이라도 그리기 위해서는 각 지역 사례에 대한 객관적 자료의 수집과 분석이 필수적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이를 위한 예비적 시도다.
오키나와의 실상이 상당 정도 알려진 오늘날 ‘기지의 섬’이라는 이름붙이기는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오키나와의 이미지를 고정시켜버리는 ‘낙인찍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이나 이미지 차원 이전에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는 현실적 고통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아픔을 안은 채,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언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울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러한 이름붙이기가 가능해진 것은 기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항구 불변한 것은 없다. 이 책의 목표는, 바로 책 제목과 같은 이름붙이기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와 더불어 이러한 책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경계의 섬, 오키나와 기억과 정체성, 논형일본학11,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 제2권
저자 정근식, 주은우, 김백영 외 |논형 |2008.08
목차
책머리에 / 정근식
서장 / 주은우
1부. 동아시아 근현대사 속의 류큐와 한반도
1장. 오키나와 근대사를 생각한다 / 나미히라 츠네오
1. 머리말
2. 근세의 류큐/오키나와
3. 류큐왕국의 사회 구성
4. 근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5. '류큐처분'
6. 저항 운동으로서의 도청/ 탈청행동
7. 폐번치현 후의 오키나와 사회
8. 전환점으로서의 청일전쟁
9. 맺음말: 오키나와 근대사의 재검토
2장. 일본의 류큐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 강상규
1. 머리말
2. 전통적인 중화질서와 류큐왕국의 위상
3.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과 일보느이 류큐왕국 해체의 정치과정
4. 중국 측의 태도변화와 '조선 문제'의 부상
5. 류큐왕국의 해체와 조선 정치의 상관관계
6. 맺음말
3장. '류큐처분'기 류큐 지배층의 자국인식과 국제관 / 박훈
1. 머리말
2. 류큐왕국 부활운동의 경위: 혈판서약과 걸사운동
3. 류큐 지배층의 자기인식
4. 국제관계 속의 류큐왕국의 위치에 대한 인식
5. 맺음말
4장 한국 근현대사와 오키나와 / 신주백
1. 머리말
2 식민지 조선과 오키나와 전투
3. 전후에 잊혀진 오키나와, 기억 속에 정복당한 상처
4. 경쟁과 배제의 분단체제 속에서 표피적으로 재생된 기억
5. 맺음말
5장. 오키나와전에서의 주민학살의 논리 / 아카비 오사무
1. 들어가며
2. 오키나와 수비군과 오키나와 주민의 전력화
3. 일본군의 방첩대책과 그 논리
4. 주민 학살의 논리
2부. 전쟁의 경험과 기억의 정치
1. '죽음'으로의 동원과 이에 대한 저항 가능성 / 강성현
1. 들어가며
2. 기존 연구에서의 쟁점들
3. 집단자결의 가해와 피해, 강제와 자발의 상호연속성
4. 집단자결에 저항하는 '가능성': 전쟁 체험과 이민 체험의 대조적 귀결
5. 나오며: 요약 및 과제
7장 오키나와 한센병사에서의 절대격리체제 형성과 변이 / 정근식
1. 세 개의 기념물
2. 애락원의 창설과 전쟁경험
3. 미군 점령하의 애략원
4. 국가배상소송과 그 이후
5. 애락원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념에 대한 평가
8장 일본 군국주의와 탈맥락화된 평화 사이에서 / 김민환
1. 머리말
2.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의 현황
3.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이 내포한 오키나와전 기억의 긴장
4. 맺음말
3부. 지역 문화와 공간 형성
9장 오키나와 도시공간의 문화적 혼종성 / 김백영
1. 머리말: 역사의 단절, 공간의 연속
2. 오키나와 도시화의 공간적·장소적 특징
3. 왕조 권략과 시민 권력의 역사적 유산
4. 전쟁과 점령, 파괴와 재건
5. 난민촌에서 번화가로
6. 맺음말: 해태로토피아로서 오키나와 도시공간
10장 미군기지 내에서의 농촌자치와 지역문화 / 임경택
1. 서론
2. 요미탄촌의 역사적 배경
3. 패전 후 요미탄촌의 산업구조
4. 문화운동과 농촌자치
5. 결론: 무라즈쿠리와 '지역;, 자립의 전망
11장. 촌락공유지의 변천 과정을 통해 보는 지역사 / 진필수
1. 머리말
2. 근세의 촌락공유지 - 소마야마를 중심으로
3. 1899년 토지정리법의 시행과 소마야마의 불화
4. 패전과 미군기지의 건설
5. 미군정기의 토지투쟁과 촌락공동체
6. 일본복귀와 군용지료의 상승
7. 맺음말
4부. 오키나와의 정체성: 우치나와 일본 사이에서
12장. 동화론과 오키나와 아이덴티티 / 박훈
1. 머리말
2. 오키나와 아이덴티티의 위상과 특성
3. 오타 초후의 동화론
4. 오키나와 도오하주의의 정위
5. 맺음말
13장. 근대국가와 시티즌십 / 최현
1. 머리말
2. 류큐인에서 일본인으로: 1972년 류큐저분과 1879년 일본 편입
3. 미군정하의 피점령인, 1945년부터 1972년까지
4. 일본 반환 후의 오키나와인
5. 맺음말
14장. 섬의 시선 / 주은우
1. 오키나와와 정체성의 문화정치
2. 오키나와와 영화,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
3. 오키나와가 만든 몇 가지 영화들의 세 가지 경향
4. 영화, 기억투쟁, 정체성 정치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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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오키나와의 문화를 혼성성 또는 혼종성의 문화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곧 오키나와가 ‘경계의 섬’이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의 혼성적인 문화를 보여주고 오키나와를 경계의 섬이라 일컫게 해주는 사실은 물리적·지리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에 기인한다. ‘관광의 섬’과 병존하는 ‘기지의 섬’ 이미지가 이미 오키나와의 지난했던 고통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기지의 섬’ 오키나와는 그 자체가 ‘경계의 섬’ 오키나와를 의미한다. 미군기지 자체가 이질적인 힘과 문화에 직면하고 그것들과 충돌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며, 미군이라는 외국 군대가 주둔한 기지 시설들은 주권의 공백 지대이기 때문이다. 기지의 경계는 오키나와의 공간을 심하게 변형시켰고 오키나와의 풍경에 자신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미군기지의 현존은 사실상 오키나와 전체를 이런 의미에서의 거대한 문화적 경계지로 만든다.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이질성들이 조우하는 문화적 접촉지대로서의 오키나와를 공간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환기시켜준다.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은 오키나와를 다수의―적어도 류큐/오키나와와 일본과 미국의―상이한 문화가 만나고 부딪치면서 새로운 혼성적 문화를 창출해내는 경계지대로 만든다. 즉, 오키나와를 경계의 섬으로, 그 문화와 현실을 혼성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오키나와의 그러한 경계성과 혼성성은 무엇보다 오키나와를 자신의 내부식민지로 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 그리고 오키나와를 미국과 일본의 이중식민지로 위치시켰던 전후 미일동맹의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
‘경계의 섬’ 오키나와의 문화적 특성을 탐구하고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면, 전방위 비평가인 나카자토 이사오(仲里?)가 말한 것처럼 ‘복수의 경계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 복수의 경계들은 나란히 병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중층적으로 교차하고 뒤얽혀 있다. 식민지―내부 식민지, 이중식민지―로서 헤쳐 온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 그리고 현대 오키나와의 탈식민지적, 혹은 여전히 식민지적 현실이 오키나와의 문화적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고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1부 “동아시아 근현대사 속의 류큐와 한반도”는 ‘류큐 처분’에서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는 오키나와 근대사를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고찰하고 한반도의 근현대사와의 연관관계를 탐색하는 다섯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문들은 대체로 류큐왕국이 오키나와‘현’으로서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와 오키나와 전투 전후 시기를 구체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한반도와의 관계 및 동아시아의 큰 맥락에서 오키나와에 대해 생각한다.
2부 “전쟁의 경험과 기억의 정치”에서는 오키나와 역사에서 가장 외상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키나와전투를 둘러싼, 혹은 그것과 연관된 기억의 정치를 다루고 있다. 그 기억의 정치의 장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펼쳐지고 있는데, 그 지형 또한 단순하지 않다. 2부를 구성하는 세 편의 논문은 각각 전쟁 동원의 경험, 한센병자들이라는 ‘주변 속의 주변인’, 그리고 기념공간이라는 상이한 영역들에서 전개되어온 기억의 정치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3부 “지역문화와 공간 형성”은 점령과 미군기지가 오키나와 지역사회와 문화, 그리고 도시 공간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사례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이 3부를 구성하고 있는 3편의 논문에서 분석과 설명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각각 나하시, 요미탄촌, 킨정(킨초, 金武町)으로서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소재한 지역들이다. 오키나와에서 제일 중심적인 도시이자 현청 소재지인 나하는 오키나와 본도 남단에 위치하며, 요미탄촌은 중부 약간 이남의 서쪽, 그리고 킨정은 오키나와 본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해 있다. 나하시는 현재 슈리성도 포함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오키나와 경제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요미탄촌은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최초로 상륙한 지점의 하나이고 기지반환투쟁으로 유명한 곳이며, 킨정 역시 캠프 한센과 기지촌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미군기지 소재지의 하나다. 그러므로 이 세 지역에 대한 사례연구들은 오키나와 본도에 한정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역사와 미군기지의 현존이 오키나와의 공간 문화에 미친 영향을 균형 있게 잘 보여줄 것이라 생각된다.
4부 “오키나와의 정체성: 우치나와 일본 사이에서”는 역사, 정치, 대중문화라는 세 측면에서 오키나와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우치나(うちな)’는 오키나와인 자신들이 ‘야마토(やまと)’라 부르는 일본 본토와 대비하여 오키나와를 부르는 명칭이다.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을 ‘우치난추(沖?人)’, 본토 일본인을 ‘야마톤추(大和人)’라 부른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역사는 대부분의 오키나와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일본인인 동시에 일본인과 구별되는 오키나와인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오키나와는 한편으로 자신의 역사적 ? 문화적 특수성과 차이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데, 이 투쟁의 전선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권력과 군사력에 대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토 일본에 대해서 그어진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오키나와인들은 본토에 대해 완전한 일본인으로서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정체성은 일본과 구별되는 오키나와와 일본으로서의 오키나와, 즉 우치나와 일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계의 섬’ 오키나와의 문화적 혼성성(혼종성)은 따라서 오키나와가 치열한 문화적 정치의 장이며, 또한 오키나와 문화가 치열한 기억의 정치, 정체성 정치의 장임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의 고단한 근현대사, 그리고 오키나와가 기지를 핵심 고리로 미국 및 일본 본토와 맺고 있는 현실적 관계가 이 문화적 정치의 장을 틀 짓지만, 섬 전체의 투쟁과 조국복귀운동 및 최근의 반기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인들 자신의 투쟁과 문화적 저력은 그 장의 지형과 틀 자체를 변형시켜왔다.
오키나와인들의 이러한 투쟁에서 특히 돋을새김 되고 있는 것이 평화의 메시지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새겨 넣고 포용하려 하는 오키나와 평화공원의 ‘평화의 초석’에 의해 제일 잘 상징될 이 오키나와의 평화주의는, 비록 낭만화되고 탈맥락화되어 히로시마화되거나 자본이나 내셔널리즘에 의해 포섭될 위험에 시달릴지라도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과 기지의 현실이라는 현재적 아픔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쉽게 무화되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바로 그 역사적 경험과 현재적 아픔이 많은 오키나와 평화운동가들에게 동아시아와 세계적 맥락으로 고통의 공유를 넓혀나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원천일 것이다. 집단학살과 강제적 집단자결의 현장 치비치리가마 앞에 새겨진,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チビチリガマから世界へ平和の祈りを”)처럼 말이다. (주은우, 서장에서)
오키나와의 문화를 혼성성 또는 혼종성의 문화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곧 오키나와가 ‘경계의 섬’이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의 혼성적인 문화를 보여주고 오키나와를 경계의 섬이라 일컫게 해주는 사실은 물리적.지리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에 기인한다. ‘관광의 섬’과 병존하는 ‘기지의 섬’ 이미지가 이미 오키나와의 지난했던 고통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기지의 섬’ 오키나와는 그 자체가 ‘경계의 섬’ 오키나와를 의미한다. 미군기지 자체가 이질적인 힘과 문화에 직면하고 그것들과 충돌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며, 미군이라는 외국 군대가 주둔한 기지 시설들은 주권의 공백 지대이기 때문이다. 기지의 경계는 오키나와의 공간을 심하게 변형시켰고 오키나와의 풍경에 자신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미군기지의 현존은 사실상 오키나와 전체를 이런 의미에서의 거대한 문화적 경계지로 만든다.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이질성들이 조우하는 문화적 접촉지대로서의 오키나와를 공간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환기시켜준다.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은 오키나와를 다수의―적어도 류큐/오키나와와 일본과 미국의―상이한 문화가 만나고 부딪치면서 새로운 혼성적 문화를 창출해내는 경계지대로 만든다. 즉, 오키나와를 경계의 섬으로, 그 문화와 현실을 혼성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오키나와의 그러한 경계성과 혼성성은 무엇보다 오키나와를 자신의 내부식민지로 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 그리고 오키나와를 미국과 일본의 이중식민지로 위치시켰던 전후 미일동맹의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
3부 “지역문화와 공간 형성”은 점령과 미군기지가 오키나와 지역사회와 문화, 그리고 도시 공간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사례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이 3부를 구성하고 있는 3편의 논문에서 분석과 설명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각각 나하시, 요미탄촌, 킨정(킨초, 金武町)으로서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소재한 지역들이다. 오키나와에서 제일 중심적인 도시이자 현청 소재지인 나하는 오키나와 본도 남단에 위치하며, 요미탄촌은 중부 약간 이남의 서쪽, 그리고 킨정은 오키나와 본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해 있다. 나하시는 현재 슈리성도 포함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오키나와 경제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요미탄촌은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최초로 상륙한 지점의 하나이고 기지반환투쟁으로 유명한 곳이며, 킨정 역시 캠프 한센과 기지촌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미군기지 소재지의 하나다. 그러므로 이 세 지역에 대한 사례연구들은 오키나와 본도에 한정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역사와 미군기지의 현존이 오키나와의 공간 문화에 미친 영향을 균형 있게 잘 보여줄 것이라 생각된다.
4부 “오키나와의 정체성: 우치나와 일본 사이에서”는 역사, 정치, 대중문화라는 세 측면에서 오키나와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우치나(うちな)’는 오키나와인 자신들이 ‘야마토(やまと)’라 부르는 일본 본토와 대비하여 오키나와를 부르는 명칭이다.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을 ‘우치난추(沖?人)’, 본토 일본인을 ‘야마톤추(大和人)’라 부른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역사는 대부분의 오키나와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일본인인 동시에 일본인과 구별되는 오키나와인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오키나와는 한편으로 자신의 역사적.문화적 특수성과 차이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데, 이 투쟁의 전선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권력과 군사력에 대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토 일본에 대해서 그어진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오키나와인들은 본토에 대해 완전한 일본인으로서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정체성은 일본과 구별되는 오키나와와 일본으로서의 오키나와, 즉 우치나와 일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계의 섬’ 오키나와의 문화적 혼성성(혼종성)은 따라서 오키나와가 치열한 문화적 정치의 장이며, 또한 오키나와 문화가 치열한 기억의 정치, 정체성 정치의 장임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의 고단한 근현대사, 그리고 오키나와가 기지를 핵심 고리로 미국 및 일본 본토와 맺고 있는 현실적 관계가 이 문화적 정치의 장을 틀 짓지만, 섬 전체의 투쟁과 조국복귀운동 및 최근의 반기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인들 자신의 투쟁과 문화적 저력은 그 장의 지형과 틀 자체를 변형시켜왔다.
오키나와인들의 이러한 투쟁에서 특히 돋을새김 되고 있는 것이 평화의 메시지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새겨 넣고 포용하려 하는 오키나와 평화공원의 ‘평화의 초석’에 의해 제일 잘 상징될 이 오키나와의 평화주의는, 비록 낭만화되고 탈맥락화되어 히로시마화되거나 자본이나 내셔널리즘에 의해 포섭될 위험에 시달릴지라도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과 기지의 현실이라는 현재적 아픔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쉽게 무화되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바로 그 역사적 경험과 현재적 아픔이 많은 오키나와 평화운동가들에게 동아시아와 세계적 맥락으로 고통의 공유를 넓혀나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원천일 것이다. 집단학살과 강제적 집단자결의 현장 치비치리가마 앞에 새겨진,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チビチリガマから世界へ平和の祈りを”)처럼 말이다.
‘경계의 섬’ 오키나와의 문화적 특성을 탐구하고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면, 전방위 비평가인 나카자토 이사오(仲里□)가 말한 것처럼 ‘복수의 경계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 복수의 경계들은 나란히 병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중층적으로 교차하고 뒤얽혀 있다. 식민지―내부 식민지, 이중식민지―로서 헤쳐 온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 그리고 현대 오키나와의 탈식민지적, 혹은 여전히 식민지적 현실이 오키나와의 문화적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고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1부 “동아시아 근현대사 속의 류큐와 한반도”는 ‘류큐 처분’에서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는 오키나와 근대사를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고찰하고 한반도의 근현대사와의 연관관계를 탐색하는 다섯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문들은 대체로 류큐왕국이 오키나와‘현’으로서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와 오키나와 전투 전후 시기를 구체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한반도와의 관계 및 동아시아의 큰 맥락에서 오키나와에 대해 생각한다.
2부 “전쟁의 경험과 기억의 정치”에서는 오키나와 역사에서 가장 외상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키나와전투를 둘러싼, 혹은 그것과 연관된 기억의 정치를 다루고 있다. 그 기억의 정치의 장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펼쳐지고 있는데, 그 지형 또한 단순하지 않다. 2부를 구성하는 세 편의 논문은 각각 전쟁 동원의 경험, 한센병자들이라는 ‘주변 속의 주변인’, 그리고 기념공간이라는 상이한 영역들에서 전개되어온 기억의 정치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캠프 마켓 아픈 희망의 역사 부평미군기지를 말하다 저자 한만송|봉구네책방 |2013.12
저자 한만송은 1974년 인천시 중구 송월동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초·중·고를 졸업했다. 오랜 군사 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로 권력이 이양된 1993년 인천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과 거의 동시에 비리 사학에 맞선 학원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인천시 덕적면 굴업도를 핵폐기물 처분장으로 지정하자 인천의 아들로 그냥 있을 수 없어 인천의 거리 곳곳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2001년 군에서 제대한 후, 부평구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2004년, <부평신문>에 입사해 팔자에 없는 기자 노릇을 시작했다. 정치와 사회 영역을 취재하면서 캠프마켓 문제를 접했다. 반환 후 캠프마켓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부산, 의정부, ‘기지의 섬’ 일본 오키나와 등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캠프마켓은 조만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 책에는 <부평신문>에서 <시사인천>기자로 10년 동안 취재하면서 모은 자료를 토대로 캠프마켓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들어가며
1. 오욕의 땅 부평미군기지
나라 잃은 우국지사의 땅, 외세 100년 주둔
오욕의 땅 부평미군기지
친일재산 국가 귀속의 세계사적 의미
2. 조선 최대 군수 공장, 부평조병창
일제는 조병창을 왜 부평에 신설했을까?
일제의 조선 침략의 역사를 간직한 영단주택
학습권 박탈과 강제 동원
조병창에 번진 민족해방투쟁
해방 후 조병창에 쏠린 관심
일제가 나간 자리, 미군이 차지
3. 조병창과 미군기지 노무자들이 선택한 죽산 조봉암
4. 일제에 이어 미군도 병참기지화 한 부평
남한 최대 병원이 있었던 애스컴
또 다른 성역, 주한미군 범죄
전범국가보다 못한 불평등한 소파(SOFA)
기지촌 정화 운동
5. 한국 최초의 기지촌, 부평의 명암
6. 폐허에서 재건사업
7.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 애스컴
한국 대중음악의 출발지 미8군 무대
애스컴시티에 클럽만 수십 개
8. 인천 주미노조
9. 주한미군의 감축과 철수는 왜 이루어졌는가?
10. 미군기지 반환 vs 이전
11.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의 시발, 인천시민회의
반환 운동 주도한 인천시민회의
미군기지 반환 운동의 상징 ‘철야농성장 ’
친일파와 환경문제 집중
12. 미군기지 문제 정치 쟁점화시킨 부공추
김대중과 클린턴에게 보낸 한 통의 이메일
미군기지 이전 주민투표로 결정하자
13. 캠프마켓 환경오염의 실태와 과제
퇴역 미군, 고엽제 매립 의혹 제기
환경 기초조사 결과
나가며
부록
1. 인천 북부권역 공공의료시설 설치 필요
2. 군사기지의 섬, 오키나와는 투쟁 중
3. 고엽제 담은 드럼통 묻은 미군 ‘들통 ’
4.‘새들의 천국 이케고 숲’을 지키기 위한 즈시시 시민들의 투쟁
주석
부평미군기지(이하 캠프마켓)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간직한 축소판이다. 친일의 탐욕과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그대로 간직한 캠프마켓은 조만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외세의 의해 빼앗긴 땅이 100여년 만에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이 책은 캠프마켓 땅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역사학자 카(E.H.Carr)는 그의 명저 ‘역사는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해석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2013년은 한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은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외교부는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반세기 넘게 한·미 동맹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하고 동북아시아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핵심축(linchpin)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반세기 넘게 지속된 한·미 동맹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어떠할까? 외교부는 이 조약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하고 동북아시아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지만, 사실 한·미 관계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미국의 방위 지원 규모,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 불평등한 한·미 행정협정 개정 등 여러 갈등을 겪었다. 미군이 인천에 첫 발을 내디딜 당시, 주한미군이 이렇게 오랜 시간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주둔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주권 국가에서 반세기 넘게 영토를 점유하고, 해당 국가의 엄청난 보조금을 받으며 주둔하는 외국 군대는 전 세계에 주한미군이 유일하다. (중략)
이 책에는 캠프마켓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부평신문>부터 <시사인천> 기자로 10년 동안 취재하면서 모은 자료 등을 종합했다. 이 책은 반환 예정인 캠프마켓의 역사성을 되짚어보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되찾은 캠프마켓의 올바른 활용 방안이 도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부평은 인천과 다른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도시로 성장했다. 일제 조병창, 미군의 애스컴과 캠프마켓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부평의 ‘타자성(他者性)’이 왜 형성되었 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술했다.- ‘들어가며’ 중에서
시대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 한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나라를 빼앗긴 힘없는 민초는 온갖 설움과 수탈을 36년간 겪어야 했다. 캠프마켓 부지는 우국지사 민영환의 소유였지만 우려 곡절 끝에 친일파의 손에 넘어갔고, 조선 최대의 군수 공장까지 들어서게 됐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더 많은 것을 수탈하기 위해 공업화를 추진했고, 그 핵심 지역은 부평이었다. 1939년에는 조선 최대 군수 공장인 ‘일본육군조병창’이 들어왔다. 그 아픔을 간직한 건물들이 현재 캠프마켓 부지 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가 부평에 조선 최대의 군수 공장을 신설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부평이 가진 지질학적 특성과 함께,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하는 인천의 특성 때문이다.
해방을 맞이한 우리는 또 다시 미군이라는 군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맹주에서 세계 최강 미군에 의해 부평은 또 다시 병참기지화가 됐다. 광복 후에는 미군의 24군수지원단이 부평에 자리를 잡았다. 부평에 들어선 ‘애스컴’은 한국에 복무하는 거의 모든 미군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규모 기지였다. 1973년 애스컴이 해체되어 현재의 캠프마켓으로 됐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영욕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부평미군기지다.
한국전쟁을 겪고 부평은 한반도의 전형적인 기지촌이 됐다. 미군기지에서 흘러 나 온 물품과 달러는 사람들을 부평으로 몰리게 했다. 가난에 찌든 당시 기지촌에 흘러넘친 미제 물품과 달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선진화된 미국의 각종 의약품과 기계 장치산업의 산물인 군수 물품, 문화는 우리에겐 탐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평기지촌은 약소국가 대한민국이 겪어야 할 온갖 불평등이 만연했다. 미군범죄와 추잡한 자본주의의 낳은 외설 문화와 성범죄, 마약 등도 넘쳐 났다.
한반도에 미군이 첫발을 내딛을 때 미군이 이렇게 오랜 시간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68년 동안 주둔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주한미군은 동아시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핵심축의 역할을 했다고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은 평가를 내 놓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근거해 한반도에 미군을 배치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또한 전략적 이유로 미군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
반환되는 캠프마켓 부지에는 공원, 도로, 공공청사, 문화체육시설 등이 향후에 들어설 예정이라, 부평 시민들의 삶의 질은 한 단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땅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기에, 역사성을 가미한 활용 방안 수립도 중요하다. 이 땅은 친일의 배신과 탐욕,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이다. 또한 전쟁과 외국 군대의 주둔, 그리고 자각된 시민들의 저력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인천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태 이후 동북아 최대 화약고로 부상됐다. 반세기 전 평화통일을 주창했다가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의 평화 사상을 계승하고, 후배들이 실천하기 위해 죽산 동상 건립을 외세에 의해 100여 년 동안 빼앗겼다가 되찾은 캠프마켓 부지에 하자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받고 있다. 또한 친일의 탐욕과 나라 잃은 민족의 역사를 간직한 캠프마켓 부지에 친일역사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제안도 눈길을 끈다. 여기다 ‘공장도시’와 ‘회색도시’에서 ‘문화도시’로 탈바꿈 하려는 부평을 위해 일제가 전쟁을 위해 만든 땅굴 등을 발굴 복원해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다. 몇 년 앞으로 다가온 캠프마켓 반환 시점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하다. 그 몫은 우리에게 남은 셈이다. --- 본문 중에서
오버 데어 2차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미군 제국과 함께 살아온 삶 저자 문승숙, 마리아 혼|역자 이현숙|그린비 |2017.01
원제 Over There
엮은이 문승숙은 바사대학교 사회학 교수이다. 저서로는 MILITARIZED MODERNITY AND GENDERED CITIZENSHIP IN SOUTH KOREA(DUKE UNIVERSITY PRESS, 2005)가 있고, 이 책은 한국에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국민 만들기, 시민 되기, 그리고 성의 정치』(또하나의문화, 2007)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엮은이 마리아 혼은 바사대학교 역사학 교수이다. 저서로는 GIS AND FR?ULEINS: THE GERMAN-AMERICAN ENCOUNTER IN 1950S WEST GERMANY(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2)가 있고, 공저로는 A BREATH OF FREEDOM: THE CIVIL RIGHTS STRUGGLE, AFRICAN AMERICAN GIS AND GERMANY(PALGRAVE MACMILLAN, 2010)가 있다.
감사의 글
한국어판 서문문승숙
서론 / 미 군사제국 내 젠더, 성, 인종 및계급의 정치학 문승숙.마리아 혼
1부 감시받고 있는 관계: 제국주의 형성 중 지역 여성과 미군 병사
1장 / 욕망을 규제하고, 제국을 경영하기: 1945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 내 미군 성매매_ 문승숙
2장 / 팬-팬 걸스: 1945~1952년 점령지 일본에 있었던 성매매와 신식민주의에 대한 수행과 저항_ 다케우치 미치코
3장 / ‘누구도 대천사 위에 그려진 병장의 계급장에 핀을 꽂을 순 없다’ : 독일에서의 군인생활, 성 그리고 미군 정책_다케우치 미치코
2부 제국주의와 민간인과의 복잡한 관계성: 해외주둔 및 본국에 있는 미군과 외국여성
4장 / 냉전 후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_ 도나 알바
5장 / 진퇴양난에 빠진 커플 : 미군과 관계를 맺는 오키나와여성들의 주변화와 에이전시_크리스 에임스
6장 / 숨겨진 군인들: ‘국가방위’를 위해 일하기_로빈 라일리
3부 제국에 말대꾸하기: 지역 남성과 여성
7장 / 미 육군 안에 있지만 미군은 아닌 존재: 카투사 담론 속 제국주의 권력에 대한 저항_문승숙
8장 / ‘미군은 춤을,독일군은 행진을’: 미군, 남성성 그리고 군사주의에 관한 독일인들의 시각 변화_ 마리아 혼
9장 / 꼼짝없이 서 있어야 했던 거리 한가운데서_ 크리스토퍼 넬슨
4부 포위당한 제국: 인종갈등, 남용 그리고 폭력
10장 / 1971년 미군 내 인종갈등 위기: 서독과 한국에서 해결책 찾기_마리아 혼
11장 / 기지촌 성매매와 제국주의적인 SOFA: 한국 내 초국가적인 기지촌여성에 대한 학대와 폭력_문승숙
12장 / 아부.그라이브,예측 가능했던 비극_ 제프 베넷
결론 / 교차로에 서 있는 제국 문승숙.마리아 혼
옮긴이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오버 데어’를 통해 바라보는 미 군사제국의 이면!
주둔 미군과 민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관계성에 대한 탐구!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냉전이 저물고 데탕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지구화라는 이름하에 전 세계가 개방을 향해 가는 듯했다. 그러나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를 필두로 세계는 다시 새로운 고립을 향하고 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2차대전 이후의 세계질서에서 60년간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미국의 군사적 팽창뿐이다. 냉전과 화해, 개방과 고립에 상관없이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기지를 형성해 왔고, 이 상황은 현재 진행 중이다. 미국은 2차대전 초기에 영국 제국주의가 ‘물려 준’ 많은 수의 군 기지를 물려받았고, 대전 후에는 전리품으로 일본과 나치 독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권력으로부터 군 기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제국으로 ‘그저 우연하게’ 변모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신의 국제적 위치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이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군 기지를 통해 가능했다. 냉전은 단지 제국의 윤곽을 형성했을 뿐이며, 오늘날의 테러와의 전쟁 역시 다르지 않다. 근래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에 파병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했으나, 미군 사령부와 전략가들은 건설된 기지를 지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이 책 『오버 데어: 2차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미군 제국과 함께 살아온 삶』은 미 본토 외부에 배치된 미군의 거의 90%를 수용하고 있는 한국,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그리고 서독을 중심으로 하여 미군이 군사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지역주민들(특히 여성)과 어떻게 만나고, 접경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미군의 팽창은 단순히 세계경찰로서의 군대의 확대라는 맥락에서만 바라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각국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미군 제국이 주둔국에 기지를 건설하면서 인종, 젠더, 성, 계급이 교차하는 ‘오버 데어’를 만들어 내고, 그 결과들이 주둔사회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새로운 시선으로 드러낸다. 또한 기지를 지으면서 현지 국가에 부가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비용과 기지가 지어진 후 팽창하면서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물들, 지역주민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무질서와 폭력의 출현에 대해 ‘미국’의 입장과 ‘현지 국가’의 관점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국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장까지 넓히고 있다. 미군과 민간인들과의 상호작용은 다양한 층위에 속해 있으며, 제국의 중심에 중점을 둔 기존 연구들이 제시한 것처럼 정적이지 않다. 이 책은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넘어 지역주민들의 능동성에 초점을 맞추고, 미군 주둔지와 지역사회 사이의 ‘혼성공간’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작점이라 말한다.
주둔군지위협정(SOFA): 주둔국과 미군 사이를 가로지르는 권력의 낙차
미군기지들은 주둔군지위협정을 통해 주둔지에 치외법권적인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군 기지 자체가 주둔국 안에서도 주변화된 지역에 있기에 지역 민간인들과의 상호 교류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주둔하고 있으나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군 기지의 특성 때문에 주둔국 학자들도 대개 이를 자신들의 역사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책의 필자들은 치외법권적 공간의 현장에서 군사제국이 운영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이 간극을 메꾸고자 했다.
미국이 자유세계의 수호자라 자임했지만, 과거 미국이 말하는 ‘자유세계’에 주둔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국주의적인 주둔군지위협정을 통제하는 미군과 민간인 사회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치외법권적인 공간인 주둔지의 사창가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다. 예컨대 미국 본토에 있는 대다수 민간인들은 미국 국내에서는 금지된 사창가들이 한국의 기지촌에서 사실상 미군의 묵인하에 운영되고 있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2002년 여름, 폭스 뉴스가 한국의 기지촌 사창가와 미군의 유착관계에 대해 보도한 이후, 미 국방부는 해외주둔 미군기지 주변에 위치한 사창가와 인신매매에 대해 불관용(Zero-tolerance) 정책을 이행하지만, 이 정책은 기지촌 여성에게 가해지고 있는 학대와 폭력을 줄이지는 못했다. 제국의 매끄러운 운영을 위해 미군 당국이 기지촌 사창가를 통제하고 유지하는 동안, 미국남성 군인들과 기지촌 성노동자들 간의 권력관계는 여전히 불평등하게 지속되었고, 결국 학대와 유기, 방임, 폭력이라는 인권유린 문제를 촉발시켰다.
미군 위안부가 드러내는, 가려진 역사
2017년 현재 한국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한 미군 위안부의 손해배상소송이 진행 중이다. ‘미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단어에만 익숙하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Comfort Women)는 문자 그대로 위안부가 시기나 국적을 막론하고 군인/남성들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여성’은 2차세계대전 이전에나 이후에나 군대가 진출할 때 병사들과 함께 호명되는 존재들이었다. 한국,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서독에 주둔을 시작했을 때, 미군 사령부는 성매매와 강간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그러자 각국의 지배층 엘리트들은 하층계급의 여성들을 동원하여 미군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여성을 동원하여 미군과의 유화국면을 형성하려는 시스템은 한국과 일본, 서독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또한 지난 60여 년간의 각국의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긴장 상황을 여성으로 해결하려는 시스템은 변함이 없었다. 성매매를 도맡던 세 나라의 하층계급 여성들이 점차 다른 국적의 여성들로 대체되었지만, 기지촌 근처의 성매매 공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곳이 이 지점이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1장)과 일본(2장), 서독(3장)까지 각국에서 벌어진 미군 성매매 문제는 이성애 남성으로 표상되는 군대로 인해, 지역의 하층계급 여성들이 어떠한 일들을 감수했는지, 지역 엘리트와 미군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보여 준다. 또한 저자들은 거시적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던 자료만이 아니라, 국가의 통제에 저항하기 위해 자치회를 조직했던 지역 여성들의 세세한 활동이 담긴 자료를 함께 분석하면서 지역 여성들이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노력했던 능동적인 주체임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미군과 주둔사회 간 상호관계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필자들은 지역주민들이나 카투사(미군 내에서 병역 의무를 하는 한국군)가 자신들의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젠더, 인종 그리고 계급의 수직적 관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는지 역시 분석한다. 주둔국이 미군기지로 인해 만나게 되는 내재적 억압과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역주민들의 노력은 민주화가 시작되던 서독(8장)에서도, 상처를 이겨 내고 기억을 재생산하기 위한 오키나와(9장)에서도, 한국의 기지촌(1장)과 카투사 담론(7장)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버 데어, 혹은 제국주의의 교차로
전 세계 미군기지의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지역 여성과 남성들에게 미군기지는 너무 분명한 현실 그 자체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군 기지와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상호관계들이 미국 역사의 서술 안으로 완전히 편입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자신만의 예외주의를 강조하고 명백한 제국주의적 현실을 오랫동안 부정해 오면서 해외의 미군 주둔지 역시 미국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을 은폐해 왔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지역주민과 이주노동자들이 짊어져 온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주둔국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저항들은 기로에 서 있는 제국이 변화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불평등하고 불투명한 주둔군지위협정(SOFA)에서 비롯되는 치외법권적인 공간과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아무런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지역주민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또한 미국이 국제관계에서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수사학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어느 누구도 미 제국이 조만간 후퇴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큼 순진하지 않지만, 미국이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주둔지의 지역주민들과 다양한 분야에서 소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주둔국의 경제상황과 민주주의가 개선되면서 미군과 주둔국이 상호관계를 맺는 방식을 결정했던 비대칭적 권력관계의 수준은 이미 크게 바뀌었다. 서독(1960년대)보다는 좀 늦게 나타났지만, 오키나와(1970년대)와 한국(1980년대 말)에서 미군이 보여 준 변화의 궤도는 분명하며, 기존 주둔군지위협정에 대한 재협상은 국가주권에 대한 터무니없는 제한을 개선함으로써 관계를 향상시켰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이상에 걸맞은 국제 권력구조를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더 평등하고 투명한 주둔군지위협정, 주둔국에 대한 더 깊은 역사적?문화적 이해, 그리고 지역주민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일 것이다. 주둔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젠더, 인종, 그리고 계급 간에 존재하는 위계적 관계 속 지역 남녀가 가지고 있는 능동성은, 필자들이 여기서 강조한 것처럼 군-민간 관계가 민주적으로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에게도 우리에게도 소외되어 온 혼성공간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군기지와 민간인 사이의 ‘오버 데어’를 우리의 것으로 마주할 때이다.
유착의 사상 ‘오키나와 문제’의 계보학과 새로운 사유의 방법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역자 심정명|글항아리 |2015.02
원제 流着の思想 「沖繩問題」の系譜學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는 1957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베외국어대학, 오사카대학을 거쳐 현재 도시샤대학 글로벌스터디즈 교수로 있다. 프란츠 파농과 이하 후유伊波普猷를 사상적 준거점으로 삼아 오키나와 사상사와 이민을 연구하며 일상과 함께 있는 전장과 폭력성을 묻는다. 아울러 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말에 대한 사유를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근대 일본사회와 ‘오키나와인’』(1990), 『전장의 기억』(1995: 한국어판 2002), 『폭력의 예감』(2002: 한국어판 2009), 편저로 『포스트 유토피아의 인류학』(2008), 『현대 오키나와의 역사 경험』(2010) 등이 있다.
한국어판 서문 … 4
서장 | 위화를 경험하다
균열: 누구의 경험인가? … 12
폭력의 예감: 계엄령을 감지한다는 것 … 20
위장복 … 26
제1장 | 계엄령과 ‘오키나와 문제’
‘떠도는 류큐인’ … 34
‘오키나와 문제’의 문턱 … 40
계엄령 … 49
마지막으로: 제국에서 이탈하다 … 59
제2장 | 유민의 고향
망국의 유민 … 66
어진 … 75
유착이라는 것 … 88
류큐 여인의 수기 … 95
대표와 표상 … 109
제3장 | 소철지옥이라는 시작
이하 후유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116
소철지옥의 세계성과 국가의 재정의 … 130
남도인은 누구인가?: 류큐 민족의 정신분석 … 148
아마미라는 물음 … 165
소철지옥이라는 시작: 다시 노예가 된다는 것 … 182
제4장 | 제국의 인종주의
노예와 제국 … 186
제국의 인종주의 … 195
계급의 인종주의 … 203
노동력이라는 자연 … 224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 … 235
독립이라는 것: 제국으로부터의 이탈과 대표성 … 246
종장 | 전후라는 물음
귀환과 탈출 … 254
미결성에 대해, 혹은 뒤처진 사람들 … 264
기아 … 276
탈식민지화와 냉전 사이 … 288
유랑자들의 계보 … 302
전후의 시작 … 324
보론 | 대항하기와 거슬러 올라가기: 프란츠 파농의 서술에 관하여
역사의 거부 … 336
비非역사 혹은 우리의 역사 … 343
적의를 품은 자연 혹은 사악한 바람 … 351
전장과 임상치료 … 359
전장의 서술 … 368
후기 … 374
일본제국 편입 후 오키나와가 겪은 극빈, 전쟁, 기지화 등의 아픈 현실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부흥이라는 이름 속에 지금까지도 은폐되어 있다. 국가에 의해 버려진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문제’라는 틀이 아닌 ‘오키나와인들의 경험’으로부터 ‘말’을 포착해감으로써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국가에 의해 신문당한 이들의 식은땀에 무엇이 배어 있는가? 전후 오키나와 땅으로 돌아온 이들은 “몸은 잘 다잡고 있는 편이 좋다”며 “질문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의 태도에는 어떤 계기가 새겨져 있는가?
* * *
“어떠한 경험에 마치 숙명이기라도 하다는 듯 오키나와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특정한 이들에게 부과하여 그들을 당사자로 놓은 다음,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며 장황하게 해설하는 ‘오키나와 문제’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장황한 해설이 무엇을 줄곧 회피해왔으며 어떠한 사태를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서장 “위화를 경험하다” 中
책 소개
‘정착’ 아닌 ‘유착流着’이란, “어딘가에서 흘러온” 즉 타의에 의해 고향에서 이탈해 유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개념이다. 일본 제국으로의 통합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이후의 미군기지화까지. 일본 현대사 속 오키나와는 일본제국에 편입된 후 극빈 지역에서 전쟁터로, 전후에는 미국령으로 놓였고 일본에 반환되었으나 다시 미군기지가 되었다. 국가에 의해 유기된 이 땅에서 오키나와 토착인들은 계속되는 위기의 예감 속에 살고 있다. 체제 속에서 출향出鄕한 이들은 타이완, 필리핀, 브라질, 남양 군도 혹은 일본 본토 등지로 흩어졌고 오키나와 현이라는 영토에 남은 이들 역시 군용기지의 “펜스 옆에서” 이탈의 경험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이들의 현실을 제대로 사유하기 위한 키워드로서 저자는 ‘유착流着’을 제시한다. 이는 일상 속에서 위화를 경험하는 이들의 언어화되지 않은 현실을 기존 ‘오키나와 문제’의 틀을 넘어 사유하기 위함이며, 여기서 “유착의 사상”이 요청된다.
오키나와의 현재를 사유하기
오키나와 근현대사에서 늘 등장하는 물음은 오키나와는 국내의 한 지역인가 아니면 식민지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리적으로 구획된 식민지와 국내라는 구분이 아니라, 오키나와가 우선은 계엄 상태를 계속해서 짊어져온 장소라는 점이다. 계엄 상태는 때로 주권이 부정된 식민지 또는 국가 주권의 예외상태로 이해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구분함으로써 부인한다. 즉 식민지라고 말하며 국내에서 분리하고 국내라고 말하며 식민지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오키나와는 늘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노출된다. 저자는 이런 국가주의적 물음이 이미 ‘오키나와’를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들을 ‘오인’하고 ‘폭력’ 속에 남겨둔다고 말한다.
식민지의 역사를 안고 항시적 계엄 상태에 놓인 당사자들과 그 지역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난 것처럼 취급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쟁은 끝났으며 수탈은 종식되었다고 여기는 국가 부흥의 기조 속에서 수탈당한 지역과 그곳의 사람들은 구제 혹은 정책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다. 하지만 전후니 부흥이니 하는 시간이 소위 전체 현실을 정의해나갈 때, 여전히 폭력에 노출된 채 미군기지의 철조망 옆에서 일상의 고통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의를 가지고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명확한 언어로 오키나와가 끌어안은 부조리, 그들이 구제받아야 할 현실, 정의 등을 말한다. 반면 미군기지 철조망 옆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은 이 풍경이 너무나 당연할 뿐 아니라 그 위험성이 너무나도 움직이기 힘든 현실이기 때문에 침묵한다. 현실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자 침묵하는 이들과 이것을 ‘오키나와 문제’로서 말하는 이들은 때로 철조망의 위협과 포스트식민의 현실에 관해 말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명확한 말들이 대화를 지배하게 되고 이때 침묵하는 이들의 고통과 경험은 다시 유기된다. 이곳에서 오키나와를 ‘말하는’ 사람들의 국가적, 정책적 언어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경험을 ‘오인’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이들의 침묵, 즉 ‘말할 수 없음’을 언어화해야 하며, 포스트식민과 이것의 극복을 논의하는 지점은 이 말해지는 것과 은폐된 것 사이의 균열로부터 확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이 필요 없는 폭력 앞에서 ‘말’을 확보하기
“식민지주의자가 만들어낸 세계와 직면할 때 원주민은 늘 범죄 용의자다”
저자가 인용하는 프란츠 파농의 위 구절이 보여주듯, 식민지와 비식민지, 계엄 상태에 놓인 주민과 일반 국민 같은 구분을 할 때 ‘식민지 주민’과 ‘계엄 상태에 놓인 주민’은 범죄 용의자이며, 신문의 대상이다. 실제로 오키나와인들은 전시에 잠재적 위험분자로서 감시받고,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신문당했으며, 군대에 동원되었다가 버려졌고, 국가사업 실패로 인한 극빈 속에서 난민이 되었다.
당신은 위험분자인가? 천황에게 충성하는가? 일본 국민이 맞는가? 이런 것을 신문당할 때, 오키나와 사람들은 ‘대답할 수 없다.’ “너희들도 오인되어 사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한 교사의 말은 신문의 폭력 앞에 놓인 이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신문 앞에서 오키나와인은 “오키나와는 독립해야 하는데, 독립은 시켜주지 않을 테니까 좋든 싫든 일본인이 되는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문에 대비해 천황의 어진을 가지고 다니며 ‘나는 일본인이며 위험분자가 아니’라고 외친다. 신문과 색출이라는 폭력 앞에서 “몸을 잘 다잡고 있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문에 대비하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들의 입은 ‘나는 일본인이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물론 그들의 진실한 자기규정이 아니다. 그들의 불끈 쥔 주먹, 그리고 거기에 배어나오는 식은땀이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는 이렇게 ‘방어태세를 취하’거나 다가올 폭력을 ‘예감하는’ 그들의 ‘행위’에 그들의 진실한 ‘말’이 있다고 본다.
전시가 끝난 현재의 일본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오키나와인은 여전히 이러한 역사 속에서 구성된 ‘일본인 듯하지만 일본이 아닌’ 것 같은 의심 속에서 규정된다. 미군기지 옆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독립을 열망하는 ‘오키나와 현 사람들’로 간주되며 예외적인 특별법 아래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말이 필요 없는 폭력’이라 정의한다. 이런 국가주의적 타자화, 혹은 이들을 ‘구제’하려고 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말이 이들의 존재에 관한 ‘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이들에게 “당신은 일본 국민이냐 아니냐”를 묻는 계속되는 신문의 시선은 이들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폭력이다. 신문의 시선은 말의 영역을 넘어 작동하며, 그 시선의 대상에게 폭력으로서 내리꽂힌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 앞에서 신문의 대상이 하는 말은 말로 간주되지 않는다. 지배적인 것이 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으며, 이 말이 지배적이지 못한 이들의 말과 개성을 배제한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배제된 ‘말’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것이 저자의 근본 물음이자, 오키나와를 제대로 사유하기 위한 시작이다.
그들만의 일이 아니다
말이 필요 없는 폭력과 이를 통한 말의 배제란, 오키나와인들 혹은 피식민자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프란츠 파농은 피부색만으로 마르티니크인인 자신을 식민지 원주민과 오인한 경관에게 신문을 당한 적이 있다. 경관은 원주민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가버렸지만, 여기서 파농은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폭력’을 직감한다. 즉 어떤 말 이전에 ‘그렇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작동하는 구분과 배제의 폭력,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원주민이냐 아니냐라는 구분을 위해 행사되는 신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원주민이든 아니든, 또는 오키나와인이든 아니든 신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여기서 폭력을 회피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감지하는 파농을 본다.
오늘날 국가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은 숱하게 볼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다시 전면에 드러난 국가 폭력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위험을 숨기는 데 급급한 국가, 현재진행형의 위기 상황에서 고작 ‘일본’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내세우고 또 매달리는 이들의 심성 속에서 저자는 다시금 말을 배제하고 필요한 말을 들리지 않게끔 만드는 ‘말의 폭력’을 본다. 국내에서도 국가와 제도의 폭력은 나날이 기승을 부린다. 세월호라는 비극 앞에서 말을 잃은 사람들, 누구의 필요인지 모를 고압송전탑 설치를 명분으로 삶터를 빼앗긴 사람들, 직장에서 일하다 다치고 죽어갔지만 억울하다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말을 ‘말’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말들은 사실 말 이전에 작동하는 폭력임을 이 책에서 저자는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배제된 말을 들리게 하는 일은 보이지 않게끔 된 것, 형용하기 어렵지만 존재하는 것을 말로써 확보하고자 할 때에 가능하다. 예컨대 정착해 사는 듯 보이는 오키나와인의 현재에서 유랑과 이탈을 읽어내는 것, 그로 인해 ‘유착’이라는 사유 영역을 확보하는 것은 오키나와인의 ‘말’을 가능케하기 위한 하나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그들의 사상은 가능하다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저자 개번 맥코맥, 노리마쯔 사또꼬|역자 정영신|창비 |2014.07
미국과 일본에 맞선 70년간의 기록,Resistant Islands
저자 개번 매코맥 GAVAN MCCORMACK은 호주국립대학 태평양·아시아사학과 명예교수. 호주 호놀룰루대학을 졸업하고 런던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치·사회문제를 역사적 지평에서 고찰하는 연구로 정평이 나 있다.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의 책임편집자로 있으며, 『종속국가 일본』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 『일본, 허울뿐인 풍요』 등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관한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하고 있다.
저자 노리마쯔 사또꼬 乘松聰子는 케이오오기주꾸대학(慶應義塾大學) 문학부를 졸업하고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에 평화철학센터(PEACE PHILOSOPHY CENTRE)를 설립하고 대표를 맡고 있다. 평화철학센터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들의 평화교육단체이며, 오끼나와 군사점령,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와 기억,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폐지 같은 문제들에 관한 정보와 논문을 제공하고 있다.
역자 정영신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동아시아 안보분업구조와 반기지운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강사로 있다. 평화학과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기지의 섬, 오키나와』(공저) 「동아시아 분단체제와 안보분업구조의 형성」 「오키나와 복귀운동의 역사적 동학」 등을 썼으며, 『오키나와 현대사』를 공역했다
목차
1장 류우뀨우/오끼나와 : 처분에서 저항으로
2장 전쟁, 기억, 그리고 기념
3장 미국과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파트너십 '
4장 오끼나와 : 분리와 복귀
5장 헤노꼬 : 불필요한 기지
6장 하또야마의 난
7장 선거와 민주주의
8장 환경영향(비)평가
9장 동맹의 '심화' : 칸 어젠다
10장 동맹의 '심화' : 워싱턴 어젠다
11장 센까꾸/댜오위 : 동중국해의 폭풍
12장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들
13장 오끼나와의 미래
출판사 서평
2014년 7월, 일본이 각의에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의했다. 평화헌법 아래 무력 사용을 금지받았던 일본이 70년 만에 ‘전쟁국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오(安倍晋三)와 자민당이 평화헌법을 재해석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내비쳤지만 만만치 않은 여론의 반발에 입법 처리는 갑작스레 내년으로 미루어졌다. 일본 정권의 ‘전쟁국가’ 선언에 일본 내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일본 평화운동의 구심점이 바로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다.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원제 Resistant Islands: Okinawa Confronts Japan and the United States)는 호주국립대학 명예교수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과 평화운동가 노리마쯔 사또꼬(乘松聰子)가 오끼나와 저항운동 70년사를 집대성한 저서다. 개번 매코맥은 『종속국가 일본』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 『일본, 허울뿐인 풍요』 등을 저술한 바 있으며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치·사회문제를 역사적 지평에서 고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은 15세기부터 번성하는 해상왕국이었던 류우뀨우(流球)왕국의 역사에서 시작해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점령을 겪고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일본과 미국의 전략적 군사기지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까지의 오끼나와 역사를 총정리한다. 일본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본 현대사 교양서인 셈이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운동과도 비견하여 주목할 만한 오끼나와 기지 건설 반대운동은 지역주민의 자치와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전세계적 패권국가에 맞서 동아시아 평화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미일동맹의 패권주의적 팽창과 오끼나와 저항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이 책은, 동북아시아의 지역질서를 알고자 하는 이들과 평화운동에 관심이 있는 독자 모두에게 주요한 참고서적이 될 것이다.
해상왕국 류우뀨우가 일본의 속국이 되기까지
15세기, 지금의 오끼나와는 ‘류우뀨우왕국’으로 불리며 명나라와 긴밀한 조공관계를 맺고 아시아태평양의 경계에서 번성했다. 17세기 초, 일본 사쯔마번의 침략을 받고 실질적으로는 일본 본토의 지배하에 놓이지만 겉으로는 청나라와 긴밀한 조공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양속(兩屬)체제에 속박된다. 결국 19세기 후반 류우뀨우왕국과 슈리(首里)왕조는 메이지국가의 새로운 질서에 적극적으로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통해 근대 일본국가에 병합되며 ‘처분’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오끼나와인들에게 자신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버리고 본토의 언어, 신화와 의례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본토의 폐번치현은 동일한 민족·언어·문화를 기초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실시되었지만 오끼나와에서는 오로지 군사적·정치적 의도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일련의 황민화 정책이 시작된 지 7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오끼나와를 전장으로 삼았다.
“천황을 위해 죽어라!” ― 오끼나와전의 참화
‘철의 폭풍’이라고 불리는 3개월간의 무차별적 폭격으로 오끼나와전은 총 21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당시 오끼나와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명의 오끼나와인이 사망했다. 이중 약 80%가 민간인 희생자였다. 일본군으로 징용당하거나 성노예로 징집당한 조선인 사망자도 1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된다.
오끼나와인을 학살한 것은 미군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국 군대인 일본군은 오끼나와인을 자국민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연합군의 스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현지 주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공격물로 내세우거나 자살하도록 강요했으며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산간지역으로 강제이주를 시키고 때로는 직접 살해하기까지 했다. 오끼나와인들은 전쟁의 참화를 통해 일본 본토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내재화했다. 민간인 살해와 집단적인 자살은 일본군이 있는 곳에서만 발생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현재 오끼나와의 반(反) 일본 정서의 가장 뿌리 깊은 이유가 되는 것은 ‘강제집단사’다(58면). 일본군은 군사기밀 유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오끼나와 주민들에게 ‘옥쇄(玉碎)’, 즉 천황을 위해 자살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군의 강제 아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고, 형이 동생을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참혹한 강제집단사에 대한 기록과 용어는 지금도 일본 역사논쟁의 뜨거운 화두다. 일본의 새역모를 비롯한 극우단체들은 역사교과서에서 오끼나와에서 벌어진 학살과 차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조작을 서슴지 않고 있다(교과서 문제는 73면).
‘분리’되고 ‘반환’되어도, 여전히 기지를 떠안은 오끼나와
일본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은 찰나에 불과했다. 망연자실한 오끼나와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미군의 토지수탈과 생활파괴였다. 종전 이후 27년간 오끼나와는 미군의 직접적인 군사지배를 받았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되어 본토는 미군정에서 벗어났지만 오끼나와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그대로 군사식민지로 남았다. 오끼나와인들은 이 날을 ‘굴욕의 날’로 기억한다. 매코맥은 대일강화조약 이후 일본은 명목상으로는 평화헌법을 가진 ‘평화국가’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속국으로 남았다고 주장한다. 1960년 본토의 미군기지는 1952년에 비해 4분의 1로 축소되었지만 오끼나와의 기지는 오히려 두배로 증가했다. 본토의 부담을 오끼나와로 떠넘기는 이러한 관행은 이때부터 정착되었다. 일본은 오끼나와를 국가의 일부가 아닌 군사적 거점으로 보았고, 본토 일본은 헌법상으로 ‘평화국가’였던 반면 오끼나와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추진하고 세계대전을 대비하는 위헌적인 기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1972년 미국은 일본에 오끼나와를 ‘반환’했지만 여전히 오끼나와는 기지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함에도 현재 주일미군 기지의 75%를 떠안고 있는 것이다. 본토에 비해 500배 높은 기지 밀도는 오끼나와에 극심한 기지피해를 미치고 있다. 환경파괴에 더해 기지는 범죄의 온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세명의 미군이 12세 소녀를 강간한 1995년의 소녀 성폭행 사건은 기지범죄의 대표적인 예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1972년의 복귀를 통해 전쟁과 점령으로 얼룩진 군사주의의 섬을 일본 헌법 제9조에 입각한 ‘평화의 섬’으로 변화시키길 기대했다. 1995년 소녀 성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끓어오른 반기지 여론은 오끼나와에서 이를 이룰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일정부는 ‘후뗀마기지를 반환한다’라고 말하고는 뒤로는 더 크고 강력한 대체기지의 건설 계획을 꾸몄다.
더 크고 강력한 대체기지, 헤노꼬
1996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후뗀마 대체기지 건설지는 헤노꼬 앞바다로 압축되었다. ‘헬리포트’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크고 사고 위험이 높은 ‘오스프레이’(osprey) 이착륙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주민들은 단합하여 대체기지 건설에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양국의 정부는 오히려 점점 더 강력한 건설 의지를 보였다. 정부는 계획의 겉껍데기만 바꿔 씌워 헤노꼬 기지 건설 계획을 계속 진행했다(5장 참조). 외교·정치·군사상의 여러 문제를 제쳐놓고 환경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듀공 등 희귀생물이 서식하는 헤노꼬에 제대로 된 환경평가도 하지 않고 거대한 군사시설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정부는 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면서 연좌농성과 해상 카누로 반대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기소했으며, 미국은 기지 건설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끼나와의 선거에 은밀하게 개입했다(7, 8장).
오끼나와 주민들은 이와 같은 기만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하또야마 유끼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는 “최소한 현외 이전”이라는 문구를 내걸면서 미국과 기지 이전지를 재협상하려고 미약하게나마 애썼다. 하지만 긴밀하고도 유서 깊은 미일동맹을 뒷받침하던 양국의 엘리뜨들은 하또야마 총리에게 모욕과 협박으로 일관했다. 결국 강고한 벽에 부딪힌 하또야마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진 자민당 정권에서는 반대운동에 대한 탄압과 동맹의 ‘심화’가 계속되었다(6, 9, 10장).
오끼나와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읽는다!
오끼나와와 한반도의 현대사는 여러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과거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고, 2차대전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며,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구도 속에서 불평등한 지위를 감내해야 했다. 또한 미국이 ‘아시아 회귀’(Pivot Back to Asia)를 선언하며 태평양의 두번째 ‘요석’으로 낙점한 제주도의 미래 역시 오끼나와에서 미리 엿볼 수 있다.
미일동맹의 강고한 사슬과 일본 정권의 ‘전쟁국가’를 향한 끊이지 않는 야욕은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를 압제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한다. 이 책은 변경지역의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강대국의 권력관계를 주시하며 거시적인 시야를 잃지 않는다. 저항운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서도 국제 정세를 다각도로 파악하며, 더불어 오끼나와 현지에서 저항운동에 헌신해온 오끼나와 사람들과의 인터뷰(12장)도 실려 있어 오끼나와 주민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끼나와 저항운동은 “세계적인 군사기지제국인 미국의 전략적 계획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자 비폭력 시민운동의 요체를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역설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망과 미국의 패권질서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오끼나와는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전후 및 패권 이후의 질서가 이 지역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준다”라는 저자들의 희망적인 메시지처럼, 한국에서 오끼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연대를 넘어서 한반도 문제에도 직결되는 것이다. 오끼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키나와 이야기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역자 김경자|역사비평사 |2016.10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오키나와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현재 오키나와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1982년 1평반전지주회를 설립했고 오키나와평화시민연락회 대표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1993년에 계간지 『게시가지(역풍)』를 창간했고, 저서로는 『오키나와 문제 20년』(공저), 『오키나와 동시대사』(전10권,별권1권), 『오키나와를 안다 일본을 안다』, 『오키나와 현대사』 등 다수가 있다. 국내에는 『오키나와 이야기―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현대사』, 『오키나와―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등이 번역되었다.
『오키나와 이야기』는 일본사의 변곡점마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섰던 비극의 섬 오키나와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는 대일본제국의 전쟁기지가 되었다. 또한 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작전에 의해 ‘일본 유일의 지상전투’가 벌어진 땅이 되고 말았다. 강제로 주입된 ‘귀축미영’에 대한 공포 이미지 와 천황 이데올로기 때문에 주민들은 동굴에 숨어들어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군인들은 민간인 보호는 아랑곳없이 ‘본토결전’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탈주하며 전투를 지속했다. 그러나 ‘본토결전’ 따위는 없었다. 결국 전쟁은 원자폭탄과 천황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오키나와에는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일관계의 기본 틀인 미·일 안보체제는 일본을 반공의 방패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냉전체제가 종언을 고한 뒤 그 존재가치는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그러나 미·일 양국 정부는 아시아 지역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구실로 미·일 안보체제를 더욱 긴밀하게 미국의 세계전략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럴 경우 세계적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오키나와는 계속 그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어도 괜찮은가? 기지를 정리 축소하고 미·일 안보체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다.
전쟁과 기지의 시대를 끝내고자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투쟁은 후텐마 기지의 반환을 둘러싸고 불이 붙었다. 미군은 지역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민의 요구에 따라 반환하기로 했지만, 이를 대신할 다른 기지가 필요하다며 헤노코에 새로운 기지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미일동맹’의 이름으로 노후한 기지를 최신 설비의 기지로 바꾸어주는 데 흔쾌히,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후텐마와 헤노코를 시작으로 오키나와와 일본,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기지를 정리 축소시켜야 한다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시당할 뿐이었다.
새로운 군사기지 설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보수·진보의 입장 차이를 떠나 ‘올 오키나와’의 이름으로 단결하고 지사 선거와 주민투표 등 모든 민주적 의사결정 단위에서 승리했지만 미국과 일본 정부의 뜻은 여전히 완고하고 집요했다. 주민 동의 없이 토지를 점거하고, 지사의 승인 없이 기지 건설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신기지 건설을 강행하려는 국가와 이를 저지하려는 오키나와현의 분쟁은 법정으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오키나와의 투쟁은 일본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지지와 연대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단순히 하나의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 소수파 자기결정권의 본연의 자세를 묻는 문제가 된 것이다.
'미군기지 이전 반대' 日오키나와 주민투표 난항…유권자 30% 불참 가능성
오키나와현 내 5개시 시장 "주민투표 불참"표명
현 측은 마땅한 대항방법 없어 고심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沖縄)현 헤노코(辺野古) 매립공사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반대 의사를 나타내기 위한 주민투표가 난항에 빠져있다고 16일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오키나와현 내 몇몇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이 투표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나선 탓이다. 오키나와 주민 투표는 오는 2월 24일로 예정돼 있지만, 투표를 5주 앞둔 시점에서 투표 불참을 표명한 지자체는 5곳이다. 이들 지역 주민은 오키나와 전체 유권자의 30%를 차지한다.
현재 오키나와현 측은 마땅한 대응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는 상태다. 해당 기초지자체에 투표실시 권고를 내렸지만 법적 강제력이 없다. '임의 투표소'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정규절차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신문은 "유권자의 30%가 불참하게 될 경우 이를 주민투표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이 나올 것"이라며 오키나와현 측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오키나와현 기노완시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후텐마 미군 비행장의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현 단계에선 주민 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지난 15일 시마부쿠 도시오(島袋俊夫) 오키나와현 우루마(うるま)시 시장은 이 같은 내용의 문서를 오키나와현 측에 전달했다. 시마부쿠 시장은 문서를 통해 주민투표 선택지가 찬성과 반대 양자택일이라면 우루마시에선 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주민투표 불참 의사를 표명한 지자체는 우루마시를 포함해 오키나와(沖縄)시, 기노완(宜野湾)시, 미야코지마(宮古島)시, 이시가키(石垣)시 총 5곳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드는 불참 이유는 '시 의회'다. 5곳 모두 보수계열 의원이 시 의회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투표관련 경비가 부결됐다. 일본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이 경우 시장의 재량으로 경비를 지출할 수 있도록 했지만, 마쓰카와 마사노리(松川正則) 기노완시 시장은 "시정운영에서 시 의회와의 신뢰관계는 불가결하다"며 "의회에 반해서 실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신문은 "5곳 시장 모두 헤노코 이설을 진행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정권과 가까워 다마키 데니(玉城デニー) 오키나와현 지사와 거리를 두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마쓰카와 시장은 "현 지사 선거를 통해 기지 이설 반대라는 민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주민투표는 예산 낭비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오키나와현은 이들 시장과 개별적으로 만나 투·개표는 시의 의무인 만큼 실시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일부 지자체엔 지방자치법에 근거해 '권고'를 했지만 입장을 번복한 곳은 없다. 현 측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시정 요구'를 할 방침이지만, 이 역시 법적인 강제력은 없다.
신도 무네유키(新藤宗幸) 지바(千葉)대 행정학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주민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법제도를 악용하는 것"이라며, 이들 기초지자체장들이 지방분권의 빈틈을 노렸다고 비판했다. 앞서 1996년 실시됐던 오키나와 주민투표의 경우 현과 시정촌(市町村·기초지자체)의 관계가 상하관계였기 때문에 모든 지자체에서 실시됐었다. 하지만 2000년대 전후로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현과 현 내의 기초지자체는 상하관계에서 대등한 관계가 됐다.
신도 교수는 "지방분권 개혁 당시에는 지금 같은 사태는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방자치법보다 상위규범인 헌법에서는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의사표시 기회를 지자체장이나 의회가 뺏는다는 건 헌법 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헌법개정과 관련한 국민투표다.국민투표법에는 기초지자체의 투·개표 작업은 '법정 수탁사무'라고 명기돼있다. 일본 총무성도 아사히신문 취재에 "(국민투표에) 지자체가 참가하지 않는 건 생각할 수 없다"고 답했다.
13일 오키나와 나고시에 위치한 주일미군 슈와브 캠프에 진입하는 공사차량과 이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주민들. 주민들의 든 팻말에는 '신 기지건설 반대 토사투입 멈춰라' 등이 적혀있다.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 위기감 높아지는 오키나와현
"나도 오키나와시 시민인데 투표에 참가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건가"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는 14일 밤 기자단을 만나 이 같이 말했다. 불참의사를 밝힌 지자체의 입장이 확고하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투표는 어려운 상황이다. 다마키 지사는 "주민투표는 민의를 나타내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며 "현 전체 실시를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오키나와현의 '민의'는 현 지사 선거 등을 통해 여러차례 드러났지만, 아베 정부는 공사 재개를 강행해왔다.
오키나와현 측은 당초 조례를 개정해 투·개표 사무를 현이 대행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하지만 5개시의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유권자 명부를 제출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단념했다. 일부 시장이 요구한 선택지 수정 요구도 "일단 양보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내부 의견에 따랐다.
오키나와현 현정여당 등은 5개 시에서 투표라도 진행될 수 있도록 '임의 투표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규정된 절차가 아니기 때문에 투표 결과는 '참고치'에 그치게 된다.
신문은 "유권자의 30%가 불참하게 되면 '주민투표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라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마키 지사가 지난 9월 현지사선거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배제되지 않는 정치'를 내걸었던 만큼, 정치적 구심력이 저하될 가능성도 있다.
다마키 지사와 가까운 관계인 한 현의원은 "투·개표 사무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하는 오키나와현의 조정능력 부족은 부정할 수 없다"며 "비판의 칼 끝이 다마키 지사나 사민당과 공산당 등 현정 여당으로 향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베 정부는 "전력으로 매립공사를 진행한다"는 입장으로, 헤노코 연안부 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는 매립예정지의 약 20% 정도에 토사가 투입됐다.
신문은 "다마키 지사는 주민투표를 통해 다수의 반대표를 얻어 정부에 대항할 생각이었지만, 이 전략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La Canzone Di Orfeo - Marisa San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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