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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관광객의 철학

by 이성근 2021. 8. 22.

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l 리시올(2020)

 

저자 : 아즈마 히로키-1971년 도쿄도 미타카시에서 태어났다. 1994년에 도쿄대학교 교양학부 과학사·과학철학 분과를 졸업했고 1999년 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학술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가라타니 고진이 주재하던 비평지 비평 공간솔제니친 시론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02년부터 2010년대 초반에 걸쳐 게이오의숙대학교, 고쿠사이대학교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센터, 도쿄공업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2010년에 출판사 콘텍처즈를 설립했고 2012년 겐론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2013년부터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출판사 운영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나, 현재는 겐론의 대표직을 사임하고 잡지 겐론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1999년 첫 저서이자 박사 논문이기도 한 존재론적, 우편적으로 제21회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장편 소설 퀀텀 패밀리즈로 제23회 미시마유키오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약한 연결로 제5회 기노쿠니야 인문대상을, 2017년에는 관광객의 철학으로 제71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일반 의지 2.0, 테마 파크화하는 지구등 여러 저서를 발표했다.

 

목차

들어가며

 

1부 관광객의 철학

 

1장관광

보론?2차 창작

2장정치와 그 외부

3?2층 구조

4장우편적 다중으로

 

2???가족의 철학(서론)

 

5장가족

6장섬뜩함

7장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주체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예견했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

20년의 활동을 결산하며 새로운 길을 선언하다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이 착종된 세계에서

다시 한번 보편적 세계 시민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다

검색으로는 알 수 없는 우연한 앎을 향해 열린 관광객의 길

 

2017년 제71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인문·사회 부문 대상 수상

2017년 북로그 대상 인문 부문 대상 수상

2017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 2

 

“20세기가 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관광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 코로나 대유행의 현실에서 자못 도발적으로 들리는 명제다. 그러나 이 책 관광객의 철학이 처음 발표된 2017년의 시점에는 오히려 범상한 예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이 명제는 단순히 관광 산업의 확산을 예상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관광이란 실재하는 현상인 관광에서 출발하되 오늘날에 필요한 정치철학을 논의하기 위한 키워드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철학은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유행을 예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과 그것이 불러올 내셔널리즘의 반동을, 점점 더 심화될 세계의 단절을 전망했다. 그리고 이 단절을 넘어설 새로운 정치철학의 주체로 관광객이라는 존재를 제시했다. 따라서 팬데믹이 가속시킨 전 지구적 소통 단절의 위기 속에서 관광객의 철학은 더욱 절실한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한국에는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오타쿠 문화의 의미를 선구적으로 짚은 비평가로 알려진 아즈마 히로키가 오랜만에 펴낸 철학서다. 1999년 자크 데리다를 다룬 철학서 존재론적, 우편적을 발표하며 일본 신세대를 대표하는 비평가로 주목받으며 등장했던 그는, 특히 2001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007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2011일반 의지 2.0등의 저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정보 사회에 관한 독창적인 논점을 제기해 더욱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반 의지 2.0출간으로부터 얼마지 않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본을 덮쳤고, 이 일은 그의 지적 행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그는 사고 이후 후쿠시마를 둘러싼 여론의 변화와 이에 정보 기술이 미친 영향을 숙고하게 되었다. 요컨대 인터넷이 사용자의 앎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원하는 정보만을 수집해 줌으로써 의견이 다른 사람들 간의 단절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터넷만으로는 현실의 다채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터넷 시대의 대중은 어떻게 다시 현실과 만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갖게 된 그는 학계를 떠나 언론 기업 겐론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비평가=기업가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비평지 겐론을 비롯한 출판 활동만이 아니라 체르노빌 투어를 기획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관광객의 철학은 그런 그가 현재 시점에서 지난 20여 년의 작업을 결산하고 새로운 전개를 선언하는 책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을 전공한 비평가가 정보 사회에 대한 탐구를 거쳐 관광의 실천으로 나아갔다. 이 행로를 결산하는 철학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관광객, 세계 곳곳을 기웃거리는 불손한 산책자

관광 그리고 관광객은 근대와 함께 태동했다. 19세기 대중 소비 사회의 형성은 노동자 계급에 여가를 가져다주었고, 이에 따라 근대 이전의 여행과는 구분되는 관광이 출현했다. 대중 관광 사업의 시초인 토머스 쿡은 계몽과 사회 개량의 신념을 갖고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여행을 대중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많은 반발이 뒤따랐는데, 관광을 경박한 행위로 여기는 시각 또한 그 영향이 남긴 결과라 볼 수 있다(중국 등 신흥 강국의 단체 관광객을 향한 따가운 시선도 그 현대적 예가 될 수 있다).

 

오늘날까지 관광객을 긍정적인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1990년 초판이 간행된 이래 관광 연구의 대표 저작으로 자리매김해 온 관광객의 시선(존 어리·요나스 라르센 지음)조차 20113판에서는 관광 산업의 확산이 가져올 생태계 파괴와 테러 위협 등에 대한 경고로 논의를 마쳤다. 이런 시각에서 보는 한 관광객이란 글로벌리즘의 이면에 무지하고 탈정치적인 들뜬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은이는 관광객의 출현을 발터 벤야민이 말한 산책자의 출현과 병행하는 현상으로 포착하며, 관광객이 함유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벤야민은 쇼핑몰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파사주를 목적 없이 걸어 다니는 사람을 산책자라 불렀는데, 지구화의 진전으로 전 세계가 쇼핑몰을 닮아 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산책자의 다른 이름이 관광객인 셈이다. 그리고 관광객=산책자는 세계를 우연적 시선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갈 필요 없는 장소에 가 볼 필요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 없는 사람을 만나는존재, 우연을 촉발하는 존재다.

 

포스트모던 철학의 유산

타자의 철학을 관광객의 철학으로 갱신하다

이 책은 들뜬 존재로서 관광객의 정치적 가능성에 주목한다. 지은이는 카를 슈미트, 알렉상드르 코제브, 한나 아렌트 등의 진지한정치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이들이 공유한 개인이 한 국가의 시민이자 국민이 된 후 세계 시민으로 나아간다라는 성숙의 신화가 가진 맹점을 짚는다(이런 신화의 뿌리는 헤겔 철학에서 찾아진다). 세계 시민이 되기를 거부하는 테러리스트(나아가서는 불량배 국가’) 같은 미성숙한 존재들을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서 원천 배제하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배제가 가져올 악순환을 우려한다.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던 철학(대표적으로 지은이가 연구했던 자크 데리다 등)은 이런 근대 정치철학의 맹점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타자의 철학을 탐구했으나 정치적 실효성을 거두지 못한 채 퇴조했다. 지은이는 관광객의 철학이 이 타자의 철학을 갱신하려는 시도임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일본 비평의 앞선 세대를 대표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그는 윤리 21, 트랜스크리틱등에서 타자의 철학을 역설했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말은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을 진보적 명제(‘타자를 소중히 하라’)로 돌려보내기 위한 뒷문으로서 관광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검색 알고리즘이 우연을 몰아낸 세계

21세기의 최선설을 비판하다

현대 세계는 우연을 배제한다. 인터넷이 일상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오늘날, 우리는 알고 싶은 사실이 있으면 관련 검색어를 검색 포털에 입력하는 것만으로 무수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IT 대기업이 운용하는 검색 알고리즘은 검색어와 연관성이 높고 사용자 평가가 좋은 웹페이지를 우선적으로 찾아 보여 주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필요한 정보를 찾아 도서관이나 현장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러한 헤맴의 과정이 종종 우리에게 알고자 했던 정보 이외의 생생한 지식을 전해 주곤 했다. 검색 알고리즘은 이런 우연의 생산을 소거한 셈이다.

 

이러한 현실은 극도의 합목적성이 만드는 오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라이프니츠의 최선설을 연상시킨다. 기술 발전과 지구화는 세계에 풍요와 건강을 확산시켰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았던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같은 저작이 보여 주듯 글로벌리즘의 성과는 오늘날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동기를 규정하기 어려운 무차별 테러나 배외주의의 확산 같은 부정적 경향성을 목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관광객의 철학일본어판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영국의 브렉시트가 결정된 지 얼마지 않아 출간되었다). 지은이는 이런 상반되는 두 방향의 현상이 공존하는 원인을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동거하는 세계의 ‘2층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과거 볼테르가 캉디드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최선설을 반박했듯 관광객의 철학을 통해 이 현실의 타개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을 왕복하며

세계에 오배를 발생시키는 우편적 다중

2000년대 정치철학 가운데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 다중등 공동 작업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이론으로서 각광받았다. 이들은 글로벌리즘의 확산과 내셔널리즘(국민 국가)의 쇠퇴가 만들어 낼 세계 질서를 제국이라 명명하고 이런 흐름을 저항적으로 전유하는 전망을 제시했다. 또한 인터넷이나 미디어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경을 넘나들며 제국과 대결하는 새로운 정치 주체로서 다중을 호명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예상과 달리 실제로 내셔널리즘은 쇠퇴하기는커녕(그럼으로써 누구나가 세계 시민으로 직행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기는커녕) 글로벌리즘의 확산에 반발하듯 오히려 기세를 높이고 있다. 더불어 실천 주체인 다중의 정의도 지나치게 모호했다. 낭만적인 수사와 구호를 걷어 내면 이론을 실천으로 이어나가기 위한 전략의 부재가 드러난다. 냉전 이후 이념의 시대가 저물면서 급진 정치철학은 기묘한 부정신학적 논리에 빠져들었다. 부정신학은 신의 존재를 신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중첩을 통해 증명하려는 신학 논리를 뜻한다. 지은이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이 적극적 규정을 기피함으로써 내용이 비워진 개념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신학적 다중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글로벌리즘이 가능하게 한 글로벌리즘의 대안이라는 점에서 다중은 관광객에 선행하는 기획이었다. 따라서 관광객이 새로운 저항의 철학으로서 실효성을 가지려면 다중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먼저 자크 데리다 철학에서 추출한 우편개념을 제시한다. 관광객은 말하자면 우편적 다중이라는 것이다. 우편은 간단히 말해 언제나 배송 사고 즉 오배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관광객은 자기 국경 안에 머물 때는 국민이지만 다른 나라에 체류할 때는 세계 시민의 체험을 한다. 관광은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을 왕복하는 운동이다. 관광객의 목적 없는 발길은 종종 우연한 마주침을 가져오고, 이들은 그 우연의 경험을 갖고서 다시 국민의 경계 안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경험의 누적이 사회관계가 고착화되어 가는 현실에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철학적 논의에 실질성을 더하기 위해 현대 네트워크 이론의 성과(라슬로 바라바시와 레카 앨버트의 무척도’, 던컨 와츠와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스몰 월드개념 등)를 도입해 관광객 개념을 뒷받침한다.

 

관광객의 철학에서 가족의 철학으로 배외주의와 테러리즘의 시대를 넘어

연민의 전파로 맺어지는 우연한 가족의 확산을 꿈꾸다

철학서로서 이 책의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독해 못지않은 비중과 중요도로 문학을 다룬다는 점이다. 라이프니츠의 최선설을 비판한 볼테르의 캉디드, 헤겔 패러다임을 냉소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기술 유토피아의 악몽을 예견한 필립 K. 딕의 발리스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특히 관광객의 철학이 제시하는 정치적 전망과 관련해 도스토옙스키는 큰 무게를 가진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악령을 거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는 그의 작품 세계는 고독한 테러리스트의 내면에서 출발해 연민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연대성에 이르는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를 경유해 관광객의 철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연대성이란 무엇일까. 우선 지은이는 관광객의 철학이 공리공론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튼튼한 정체성의 토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공산주의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체성의 중요성을 간파하고서 계급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이 형해화된 것은 다중에 이렇다 할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기존 정치 이론들에서 나아가 에마뉘엘 토드 등의 인류학적 논의까지 검토한 끝에 개인도 국가도 아니면서 자유 의지로 변경할 수 없고 정치적 연대에 활용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갖춘 개념으로서 가족을 말한다. 관광객의 철학이 말하는 새로운 연대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가족(의 철학)이다. 부정신학적 다중은 고독한 개인들의 결실 없는 단발적 연대를 거듭할 뿐이지만 우편적 다중은 우연한 마주침을 가족의 형성으로 이어 간다.

 

여기서 가족은 관광객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은유였던 것처럼 도래해야 할 정체성의 은유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가족을 말하면 혈연이라는 불변의 요소에 기반한 집단으로서 가족을 중시하는 보수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지은이는 오히려 (일본의) 진보 진영이 원래는 중립적 단어였을 가족을 되찾아 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엄밀히 따졌을 때 가족은 언제나 우연의 산물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가족은 언제나 우연한 가족이다.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은 결코 혈연이 아니라 우연한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연민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은 혈연, 성별만이 아니라 때로는 종의 벽까지 넘어선다. 즉 가족의 철학은 연민에서 시작해 주워 온 길고양이와 만들어 나가는 관계까지 가족으로 포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계를 적극적으로 가족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우연을 향해 자신을 열어젖히는 관광객이 되어라. 우연은 때로 섬뜩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다. 마치 신생아의 얼굴처럼. 그 만남에서 연민을 느끼고 책임을 배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나가라. 책 마지막 부분에서 지은이는 의 죽음이라는 절대적 필연을 중심으로 구축된 (그럼으로써 나치즘과도 가까워졌던) 하이데거 철학을 비판한다. 하이데거 철학에는 가족이 없었고 부모됨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그를 전율케 한 의 죽음은 끝까지 아이로 머물려 한 고독한 존재의 죽음이다. “아이로 죽는 데 그치지 말고 부모로서도 살아가라.” 그리고 세계는 아이들이 바꿀 것이다. 관광객의 철학을 거쳐 이른 가족의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세계는 지금 전례 없이 많은 관광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20세기가 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관광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철학은 관광을 고찰해야 한다. 이 책은 이런 당연한 감각에서 출발한다.--- p.21

 

20세기 후반의 인문 사상은 타자에 대한 관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불량배 국가의 대두는 바로 그런 논리의 설득력을 앗아 간다. 타자에 대한 관용은 분명 중요하나 관용의 태도를 취하려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 성숙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정당한 반론에 기존의 타자론은 거의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p.82

 

관광객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은 대안적인 정치 사상을 사유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특정 국가에 속해 그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회로가 아닌 다른 회로를 통해 보편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길을 통해서인가? 익명이며 동물적 욕구에 충실하고 누구의 친구도 누구의 적도 되지 않는, 들뜬 기분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관광객. 이들이 만약 공공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공공성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물음이다.--- p.119

 

제국 체제와 국민 국가 체제, 글로벌리즘의 층과 내셔널리즘의 층이 공존하는 세계란 한마디로 보편적 세계 시민이 되는 길이 사라진 세계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책에서 다시 한번 세계 시민이 되는 길을 만들고 싶다. 그것도 개인에서 국민을 거쳐 세계 시민으로 향하는 헤겔 이후의 변증법적 상승과는 다른 길을. 그것이 관광객의 길이다.--- p.161

 

가족은 성과 생식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족은 어느 지역에서든 집단 거주, 경제적 공공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토드는 가족 형태를 분류할 때 거주나 유산 상속의 형식을 중시했던 것이다. 거꾸로 말해 함께 살면서 한솥밥을 먹으면 성이나 생식과 상관없이 가족으로 여기는 역학이 전 세계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친밀성의 감각. 애정은 때때로 원칙이나 절차를 뛰어넘는다.--- p.229

 

왜 도스토옙스키인가? 지금이 테러의 시대기 때문이다. 1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관광객의 시대는 테러리스트의 시대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이 테러리스트를 다루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앙과 정의를 잃은 시대에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을 고민했던 소설가다.--- p.273

 

어느 시대에나 철학자는 아이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예전에는 아이였다. 우리 모두 섬뜩한 존재였다. 우연의 아이였다. 우리는 분명 실존적으로 죽는다. 죽음은 필연이다. 하지만 탄생은 필연이 아니며 우리 중 누구도 태어났을 때는 실존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에 도달하는 실존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연에 노출되어 다음 세대를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삶을 완수할 수 있다. --- p.317~318

 

우리시대 연대와 연민의 철학

참신하고 기발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 내부에서 태어나 그 질서에 저항하는 운동주체를 다중이라 이름지었다. 달리 말하면, 다중은 반체제운동이나 시민운동을 가리키는데, 지구 규모로 확장한 자본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그 힘을 이용해 체제 내부에서 변혁을 꾀한다. 네트워크형 게릴라적 연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과거의 변혁운동과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는

 

에서 이처럼 요령껏 설명하고 그 저항적 의미를 일부 인정한 다중 개념을 비판한다. 세계에는 제국만 있다고 여기는 이론적 허점이 있고, 투쟁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연대만을 중시하는지라 장기적으로는 투쟁의 약화와 질적 저하를 불러온다고 말이다.

 

지은이는 다중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관광객을 내세운다. 우리 시대의 저항적 주체가 관광객이라니, ‘신박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현대사회를 2층구조 시대라 분석한다. 국민국가의 통합성은 무너졌지만, 정치는 여전히 이 단위로 작동한다. 경제영역을 보면 글로벌리즘의 실현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21세기 세계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정치와 경제, 사고와 욕망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라는 이질적인 두 원리에 따라 통합되는 일이 없이 각기 다른 질서를 구축하고 말았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이 현실 질서를 사상적으로 표현하면 공동체주의는 현대 내셔널리즘이고, 자유지상주의는 글로벌리즘이 될 터인데, 앞엣것은 공동체의 선의, 뒤엣것은 동물의 쾌락만 강조한다. “어디에도 보편과 타자가 없다.” 이 딜레마를 돌파한 개념으로 제시한 관광객은 제국체제와 국민국가체제 사이를 왕복하고 사적인 삶을 그대로 공적인 정치에 접속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지은이는 자신의 지적 현란함을 마음껏 과시한다. 관광객의 개념은 볼테르와 칸트에서 포집하고, 2층구조론은 슈미트, 코제브, 한나 아렌트를 넘어서면서 얻어냈고 네트워크이론으로 그 논리를 보강했다.

 

지은이는 데리다의 개념을 빌려 관광객의 철학을 강화한다. “관광객이 바로 우편적 다중이라 했는데, 우편은 오배, 즉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를 뜻한다”. 관광이야말로 우연한 마주침으로 예상치 못한 사건을 빚어내지 않던가. 오배를 에피쿠로스가 말한 클리나멘으로 이해해도 될 성싶은데, 지은이는 이를 통해 지금의 현실은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항상 상기하게된다고 설명한다.

 

의외였고 당황스러웠다, 관광객이 토대로 삼아야 할 새 정체성을 가족이라 주장해서. 그럼에도 강제성과 우연성을 가족의 특징으로 들면서 이것이 가족의 확장성과 친밀성으로 이어진다는 분석은 흥미로웠다. 이 지점에서 루소와 로티가 말한 연민이 비롯하기 때문인데, 지은이가 관광객의 철학이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진보적 명제로, 말하자면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가게하는 구상의 산물이라 말한 이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대목을 두고 이모저모 궁리하다, 혹 이 명민한 후기구조주의자의 발랄한 사유가 오배되어 유가철학의 문턱을 넘어선 것은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유가야말로 가족을 가장 중요시했고, 그 사유의 고갱이인 측은지심이 연민과 같은 뜻이니 말이다.

이권우/도서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라는 2층 구조를 극복해내려고 합니다. 철학에 사전 지식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말이지요.

 

우선 아즈마는 '관광'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이것이 새로운 타자론의 기반이 될 수 있으리라 예지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대한 다크 투어리즘을 2차 창작과 비교하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관광객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아즈마는 루소의 재독해를 요청합니다. 아즈마가 보기에 루소는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모순적 명제를 '일반의지'라는 개념으로 유려하게 결합시킨 사상가입니다.

 

루소의 재독해를 위한 선행 문헌으로 아즈마는 볼테르의 캉디드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를 제시합니다. 전자는 세계 각지를 관광하며 라이프니츠의 최선설(지금-여기의 세계는 최선의 세계이기에 긍정해야만 한다)을 부정하고 '오류'를 발견하려 합니다. 한편 후자는 세계시민법에 해당하는 3조항을 통해 관광객의 권리는 방문의 권리이지 환대의 권리가 아니라고 규정하여 '이기심'이나 '상업 정신'을 통해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경로를 발견하려 합니다. 볼테르와 칸트의 논의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성숙한 시민 성숙한 국가 성숙한 국제 질서'라는 단선적 역사를 우회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즈마는 어째서 볼테르와 칸트까지 인용하며 루소의 재독해에 달라붙는 걸까요? 이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상가는 슈미트와 헤겔입니다.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이항 대립(친구/적 이론)'에서 찾으며 윤리와 경제를 배제시켰고, 헤겔은 '국가 의지'를 내세워 슈미트의 이론적 기반을 단단히 다졌지요. 아즈마가 보았을 때 이들은 필연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최선설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는 내셔널리즘으로 흐를 확률이 높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를 혹시 아시나요?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데리다 연구서를 20대 후반의 나이에 발표하면서 그는 일본의 차세대 지성인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을 그와 빗대는 사람도 많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사상의 기미가 서브컬쳐에 웅크려 있다며 돌연 전향(!)을 선언했습니다. 라이트노벨을 연구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그렇게 발표되었지요.

 

그의 전향에 아쉬움을 표했던 사람이라면 이번 책이 반가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라는 2층 구조를 극복해내려고 합니다. 철학에 사전 지식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말이지요.

 

우선 아즈마는 '관광'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이것이 새로운 타자론의 기반이 될 수 있으리라 예지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대한 다크 투어리즘을 2차 창작과 비교하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관광객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아즈마는 루소의 재독해를 요청합니다. 아즈마가 보기에 루소는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모순적 명제를 '일반의지'라는 개념으로 유려하게 결합시킨 사상가입니다.

 

루소의 재독해를 위한 선행 문헌으로 아즈마는 볼테르의 캉디드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를 제시합니다. 전자는 세계 각지를 관광하며 라이프니츠의 최선설(지금-여기의 세계는 최선의 세계이기에 긍정해야만 한다)을 부정하고 '오류'를 발견하려 합니다. 한편 후자는 세계시민법에 해당하는 3조항을 통해 관광객의 권리는 방문의 권리이지 환대의 권리가 아니라고 규정하여 '이기심'이나 '상업 정신'을 통해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경로를 발견하려 합니다. 볼테르와 칸트의 논의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성숙한 시민 성숙한 국가 성숙한 국제 질서'라는 단선적 역사를 우회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즈마는 어째서 볼테르와 칸트까지 인용하며 루소의 재독해에 달라붙는 걸까요? 이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상가는 슈미트와 헤겔입니다.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이항 대립(친구/적 이론)'에서 찾으며 윤리와 경제를 배제시켰고, 헤겔은 '국가 의지'를 내세워 슈미트의 이론적 기반을 단단히 다졌지요. 아즈마가 보았을 때 이들은 필연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최선설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는 내셔널리즘으로 흐를 확률이 높습니다.

 

내셔널리즘을 부연하며 아즈마는 코제브와 아렌트를 인용합니다. 헤겔 독해 입문에서 코제브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역사'는 사실상 끝났으며, 우리는 동물의 모습으로 '포스트 역사'를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활동', '', 노동'으로 분류한 바 있는데, 활동은 고대 그리스의 풍경처럼 타자가 있는 장에서 고유명성에 기초하여 공적 행위를 하는 것이고, 노동/소비는 현대 미국의 풍경처럼 타자가 없는 장에서 익명성에 기초하여 사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슈미트(헤겔)-코제브-아렌트는 각자 활용했던 개념은 달랐지만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글로벌리즘(슈미트식으로는 친구와 적의 구분이 없는, 코제브식으로는 모두가 동물이 되는, 아렌트식으로는 모두가 노동과 소비만 하는 사회)을 비판하기 위해 고전적 '인간'을 제시했습니다.

 

아즈마는 어떻게든 내셔널리즘을 몰아내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셔널리즘이 시대착오적인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경을 벗어나지 않아도 해외의 상품을 구입하며 해외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슈미트(헤겔)-코제브-아렌트의 인간관은 오늘날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따라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즈마는 글로벌리즘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정치는 여전히 국가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즈마는 사유(의식)의 장소인 상반신을 내셔널리즘('국가=정치')에 연결하고 욕망(무의식)의 장소인 하반신을 글로벌리즘('사회=경제')에 연결합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 세계에서는 국가와 시민 사회, 정치와 경제, 사고와 욕망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라는 이질적인 두 원리에 따라 통합되는 일 없이 각기 다른 질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아즈마가 루소의 재독해에 달라붙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가 보았을 때 슈미트(헤겔)-코제브-아렌트는 '세계의 구조가 내셔널리즘에서 글로벌리즘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무의미한 비판을 했을 뿐입니다.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의 2층 구조를 이해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공유하는 '성숙한 시민 성숙한 국가 성숙한 국제 질서'의 메커니즘을 벗어나야 하며, 그때 요청되는 '관광객'은 루소를 재독해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즈마는 사상적 보조선을 추가로 긋습니다. 롤스는 정의론을 통해 자유주의의 대표주자로 올라섰는데, 샌델과 노직은 각각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아나키, 국가, 유토피아로 롤스를 반박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아즈마는 공동체주의는 내셔널리즘에 접합되며 자유지상주의는 글로벌리즘에 접합된다고 보지요.

 

, 이제 루소를 재독해해 관광객을 설명할 차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관광객은 제국다중을 통해 네그리와 하트가 제기한 '제국(내셔널리즘에서 글로벌리즘으로 이행되며 등장한 새로운 정치 질서)''다중(글로벌리즘을 역이용한 새로운 반체제 운동이나 시민 운동)' 개념을 데리다의 '오배(잘못된 배달)' 개념으로 보완한 개념입니다. 아즈마가 보기에 네그리와 하트는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의 2층 구조를 간과했으며 부정신학의 수사를 그대로 가져와 신앙에 가까운 방식으로 투쟁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아즈마는 로티를 빌려와 '우연성'에 기대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일치를 포기하는 '아이러니'를 긍정할 때 비로소 다중의 '연대'가 실현될 수 있다며 네그리와 하트를, 아니 네그리와 하트의 시원인 루소를 우편적으로 읽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도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는 '우연성'에 의한 '아이러니'를 긍정하여 나타난인 '연민' 때문이라며. 이어 그는 와츠와 스트로가츠가 발견한 '스몰 월드(바꿔 연결하기와 지름길)'와 바라바시와 앨버트가 발견한 '무척도(성장과 우선적 선택)'가 어떻게 '복잡계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지 이야기하며 우연에서 태동한 오배가 새로운 철학의 모형을 구축하리라 말합니다.

 

1부에서 수많은 이론을 인용하며 아즈마는 관광객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2부에서 그는 구체적인 형태까지 제시하려 합니다. 우선 그는 '가족'에 주목합니다. 우연적이나 강제적인, 더불어 확장도 가능한 가족의 개념은 관광객의 개념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는 '섬뜩함'에 주목합니다. 뉴로맨서이후 급속도로 퍼진 '사이버 스페이스''분신'의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지적한 다음 그는 라캉의 '상상적 동일화''상징적 동일화'를 인터넷 방송의 구조를 참고해 수정하며 발리스를 통해 드러난 '섬뜩함'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정서가 되리라 단언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즈마는 도스토옙스키를 변증법적으로 비평하며 상당한 도약을 시도합니다. 아즈마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앙과 정의를 잃은 시대에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작가입니다. 하나씩 작품을 살펴볼까요?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글로벌리즘을 연상케 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입니다. 악령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떠올리게끔 쓰여진 소설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실제 인생까지 참고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 『지하 생활자의 수기』 → 『악령'의 흐름은 '사회주의자 지하 생활자 스타브로긴'의 흐름이며 '이상주의자(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는 인간/자유주의) 마조히스트(사회를 바꾸는 것은 위선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인간/공동체주의) 사디스트(사회 따위는 바뀌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인간/자유지상주의)'의 흐름입니다.

 

여기서 아즈마는 가메야마의 연구를 참고해 도스토옙스키의 쓰여지지 않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아이들에 주목합니다. 앞서 언급한 도스토옙스키의 변천사를 참고하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면밀히 읽어보면 카라마조프가의 아이들의 윤곽은 대략적으로 나타납니다. 형제들이 상상적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였으니 아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인 황제를 죽이는 이야기일 테고, 형제들에 부자연스럽게 끼워진 삽화를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실질적 주인공은 콜랴일 테고, …….

 

형제들에는 (편의상) 네 명의 형제가 나옵니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스메르쟈코프죠.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고하면 드미트리는 지하 생활자의 수기식 지하 생활자이며, 스메르쟈코프는 악령식 지하 생활자입니다. 이반은 스타브로긴이고요. 형제들은 고로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악령으로 나아가는 전개를 종합하여 알료샤를 결론으로 제출하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형제들에서 알료샤는 뚜렷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알료샤의 역할은 아이들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날 예정이었던 것 같은데, 형제들에서 콜랴가 스타브로긴을 연상케 하는 대화를 자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들에서 알료샤는 콜랴의 유사 가족이 되었으나 황제 암살에 실패한 콜랴를 구하지 못하는 불능의 아버지로 묘사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즈마는 아이들의 이러한 서사가 "자유주의의 위선을 극복하고 내셔널리즘(공동체주의)이 주는 쾌락의 덫을 피한 다음, 글로벌리즘(자유지상주의)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 최종적으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관광객적 주체"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일류샤가 페레즈본을 보고 예전에 사라진 개인 쥬치카와 동일시하는 장면을 강조하며 그는 우연성의 힘을 믿는 순간이야말로 이반=스타브로긴의 허무주의를 탈피할 수 있는 순간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한 변증법을 성공적으로 완결하는 순간이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1부의 탄탄한 조직력에 비해 2부가 너무도 느슨하게 쓰였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관광객의 철학'필연성'의 자리에 '우연성'을 가져다 놓으며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의 2층 구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면 좋을지 해답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본 리뷰에선 짧은 지면에 많은 내용을 구겨 넣다 보니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방식으로 철학을 풀어갈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출처] blog naver 우편적 다중 - 한설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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