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웃음의 나라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창비· 2020.02.03
정병호-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일본문화에 대한 현장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인도적 구호활동의 일환으로 여러차례 방북했고, 조·중 접경지역에서도 북한 기근 피해상황을 연구했다. 탈북청소년을 위해서 하나원의 ‘하나둘학교’를 설립했고, 다문화이주청소년을 위해서 ‘무지개청소년센터’를 세웠다. 장기간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운동을 이끌고 있으며,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 『한국의 다문화공간』 등을 펴냈다. 공저서로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가 있다.
목차
여는 글
1장 청년장군
1. 아무리 공화국이 어려워도: 핵폭탄과 협상전략
단숨에!: 미사일과 식량구호 |심리를 리해 못 하십니까?: 협상의 문화패턴
2. 척척척 발걸음: 세습과 변화
꼭 같으셔요 | “그깟놈”에서 “좋은 친구”로
3. 외화벌이 일꾼들: 이념에서 발전으로
철없이 돌아온다고 하면 안 되겠다 | 민족보다 국민
4. 사회주의 문명국: 좌절과 도약
발전국가 모델 | 마식령속도로 앞으로! | 기술혁명과 도약발전 |
시도와 좌절의 역사 | 과거, 현재, 미래
2장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
1. 우리는 행복해요: 관계와 소속감
세상에 부럼 없어라 | 선물의 아주 특별한 의미 |
언 감귤과 병든 소 | 장군님의 생일선물 |활짝 웃어라: 자랑스러운 공연
2. 어린이는 나라의 왕입니다: 아이들의 영양식
콩우유차는 왕차 | 콩우유는 두유가 아니다
3. 그리운 장군님: 연모의 찬송
낮아진 밥상: 덕성실화 | 장군님 식솔: 가족국가의 표어 |
충성동이 효성동이 마음껏 커요
3장 아버지 나라의 교육
1. 혁명의 으뜸종자: 고아들의 아버지
만경대혁명학원 | 아버지 사진을 모신 이유 | 대를 이은 혁명가족
2. 이역에서 자라는 아들딸: 입양의 정치
동유럽 조선인민학교 | 냉전과 입양의 정치 | 재일 조선학교
3. 세쌍둥이는 나라의 보물: 사회공학실험
복받은 세쌍둥이 | 멋진 신세계
4. 세 장군 전설: 백두혈통의 탄생
정일봉 탄생설화 | 혁명의 성산, 백두산
5. 아리랑공연: 극장국가의 축제
움직이지 않는 중심 움직이다 | 금수산기념궁전과 호찌민묘
4장 태양민족의 탄생
1. 해님과 해바라기: 수령과 인민
고향의 봄 | 만경대 고향집
2. 고향집에서 궁전까지: 신화와 순례
민족의 태양 | 태양기념건축 |시조왕릉: 단군릉, 동명왕릉, 왕건왕릉 |
거대 동상과 동상공원
3.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영생과 부활
락원의 꽃밭 | 금수산기념궁전 전설
4. 세 장군 전설: 백두혈통의 탄생
정일봉 탄생설화 | 혁명의 성산, 백두산
5. 아리랑공연: 극장국가의 축제
움직이지 않는 중심 움직이다 | 금수산기념궁전과 호찌민묘
5장 빨치산과 고난의 행군
1. 미국놈들 콧대를 꺾어놓았죠: 저항의 역사
악한 것을 물리친 역사 | 원쑤놈들을 미워하는 마음
2. 조선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선군정치
총 든 사람 말 들어야지 | 총폭탄 결사옹위 | 꽃 파는 처녀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3. 넓고, 깊고, 조용한 굶주림: 대기근의 상처
사회주의 기근: 분단체제의 대응 | 탈북난민: 탈냉전시대의 유랑민 |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4. 고난의 행군: 재앙의 미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기근과 웃음 |
키 크기 운동과 키 크는 약: 정신주의의 한계 |
닭알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과시적 강박
5. 구충제와 영양증진제: 기근 구호와 관료주의의 벽
함경도 아이들에게 남해의 미역을 | 요오드화 소금과 국제기구 |
민족이란 게 뭐인가?
6장 차별과 처벌
1. 지방진출 파견장이 떨어졌다: 중심과 주변
평양과 지방 | 평양 것들 | 중심지향
2. 지주였나?: 계급과 성분
차별의 역전: 연좌제와 세습 | 신분상승 전략: 교육과 결혼
3. 성분이 깨끗해서: 순수와 오염
다문화는 민족말살론: 인종차별 | 평양은 나라의 얼굴: 장애차별
4. 혁명의 두 수레바퀴: 남성과 여성
녀성은 꽃이라네 | 남남북녀
5. 녹음하는 소리 안 들려요?: 감시와 처벌
혁명화와 수령님의 은사 | 아직 끝나지 않았네
7장 저변의 흐름
1. 필요한 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비공식경제
단둥의 식량창고 | 길이 없으면 함께 만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
얘네들은 돈맛을 좀 들여야 돼
2. 조선이 더 자본주의 같아요: 공식과 비공식
돈주와 대방: 밀수와 뇌물 | 장마당과 시장: 여성들의 공간
3. 이팝에 고기국, 비단옷에 기와집: 이루지 못한 꿈
풀과 고기를 바꾸자: 식생활 | 바지 입은 녀성 출입금지: 복장검열 |
려명거리와 하모니카집: 주거공간
4. 저리 놀면 정말 재밌지: 놀이와 웃음
중세의 가을: 놀이의 세계 | 시간 훔치기: 웃음과 저항
5. 우리는 교양을 잘해서: 조직생활과 역할극
생활총화: 고백의 문화 | 사회적 교양과 통과의례 |
말밥에 오르지 않게 하라: 겉과 속| 늬들이 혁명을 알아?: 역할극 |
그래도 변하는 것
닫는 글
감사의 글
주
이미지 출처 및 제공처
출판사 서평
이념국가에서 발전국가로-김정은 시대 사회주의 문명국의 꿈과 현실
김정은 시대의 권력연출과 국가경영은 ‘반복과 변화의 메시지’를 통한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로 설명할 수 있다. 국제적 고립과 오래 기근으로 배급제를 비롯한 국가제도가 사실상 무너진 상황에서 김정은은 개방과 경제부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체제안정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김정은은 선대 지도자들의 통치 방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내용과 양식에는 시대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현대적ㆍ물질적 욕망을 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쏙 빼닮은 외모와 스타일, 장엄한 예술공연, 산업현장 현지지도 등 기존의 권력연출 방식을 재현하면서도 팝 음악과 모란봉악단 등 파격적인 공연, 스키장과 놀이공원 같은 화려한 오락시설, 서양음식점과 종합백화점, 고층건물과 네온사인이 즐비한 도시경관이 쏟아져 나오는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ㆍ문화적 배경이 자리한다. 사회주의 문명국이라는 목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 문명국은 이념국가의 용어(사회주의)로 발전국가로의 국가목표(문명국) 전환을 명시한 것이다. 저자는 성공적인 권력세습을 통해 체제방어에 성공한 김정은이 본격적인 발전국가로의 전환에 착수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했던 북한의 발전국가 노선들을 되짚으며 앞으로의 변화를 타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나올 것인지, 북한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중국을 첫번째 공식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만나는 김일성(오른쪽). 마오 뒤에 당시 2인자였던 류사오치가 서 있다. 1954년 9월 말, 베이징 중난하이.
그들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공화국의 내면과 핵협상의 심리구조
실제로 북한 사람들의 심리와 문화를 이해하면 핵폭탄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놓지 않는 북한체제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기근 구호활동을 위해 실제 실무자들과 직접 협상테이블에 앉아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사람들의 협상의 문화패턴을 발견해냈다. 당장 구호물품이 필요한 북한이 아쉬운 입장이지만, ‘당혹스럽게도’ 그들은 ‘효율’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한다. 덕담을 나누다가도 돌연 도덕적 우위에 서서 트집을 잡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이 모든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들은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낸다. 저자는 이렇게 빈한한 사정에도 도움의 손길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결기와 도덕주의적 주장, ‘단숨에’ 뜻을 이루고자 하는 태도, 자존심과 결사항전의 의지가 북한 당국과 엘리트집단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에도 담겨 있는 문화적 ‘아비투스’라고 분석하며, 이 연장선상에서 핵폭탄은 상대를 위협할 만한 무기를 쥔 채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관철시키겠다는 사회적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핵폭탄은 북한체제가 우리를 인정해달라는 절박한 외침인 것이다. 저자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속내를 헤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1984년 10월28일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여연구(여운형의 딸·왼쪽 둘째) 일행을 맞이한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왼쪽 셋째).
교시된 행복과 가족국가의 소속감
북한의 문화예술 공연에서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숨가쁘게 활짝 웃는 아이들의 미소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어린 아이들에게 가혹한 훈련을 강요하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세뇌한다는 식의 냉전적 사고틀을 넘어서면 그 미소의 문화적 배경을 한층 깊게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방북 당시 여러 유치원과 탁아소, 학교를 둘러보며 만났던 아이들과 교육환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과 인민의 웃음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다. “우리는 행복해요” 슬로건이 걸린 유치원에서 ‘세상에 부럼 없어라’ 노래를 부르는 굶주린 원생들을 보며 저자는 놀랍게도 아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참혹한 현실과 동떨어진 표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단순한 세뇌의 산물이나 연출된 모습이 아니다. 북한사회는 치밀한 상징작업과 권력연출을 통해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아버지’ 지도자의 시혜에 감읍하며 공동체적 행복을 공유한다. ‘어린이는 나라의 왕입니다’라는 김일성의 교시와 아이들 간식 콩우유(두유) 공급에 총력을 펼치는 장군님의 온정, 아이들을 위해 밥상 높이를 낮추도록 명령했다는 ‘낮아진 밥상’ 덕성실화, 집집마다 걸어두는 ‘장군님 식솔’ 족자 등 인민의 일상 곳곳에서 가족국가의 관계와 소속감을 발견할 수 있다. 온 인민이 지도자를 어버이로 의식하고 그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이런 의미연결 체계는 오랜 시간 역사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 거듭 다져져온 표현이다. 북한 특유의 과장된 극장국가적 연출과 가족국가적 국민의식이 결합되어 지도자는 ‘신 없는 나라의 신’이 되었고 수령을 사모하고 찬양하는 음악은 찬송가로 울려퍼진다. 남과 북이 함께 웃기 위해서는 이처럼 서로가 느끼는 행복이 전혀 다른 층위에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서적 풍요와 소속감에서 오는 북한 사람들의 웃음을 이해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북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시장경제의 대두와 과학기술의 강조, 불평등의 심화
저자는 북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며 문화인류학자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디테일한 문화적 현상과 일상의 변화를 감지해낸다. “교수 아들은 교수가, 농부 아들은 농부”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은 뜻밖에도 저자가 북한에서 만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당일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도자의 권력세습 덕분에 북한에서는 다양한 직종의 세습과 계급의 재생산이 장려되고 있다.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와 ‘혁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 북한은 자본주의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불평등한 사회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서울의 강남 8학군 엄마들의 치맛바람 못지않은 평양 엄마들의 교육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 교수들과 과학자들이 입주한 평양판 ‘SKY캐슬’은 계층구조의 심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역차별도 빼놓을 수 없다. 평양-지방의 철저한 구분과 차별은 북한 사람들의 중심지향성을 강화하고 중심과 주변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조부모 또는 증조부모의 사회적 계급성분에 따라 출신성분이 서열화되고 핵심-동요-적대계층이라는 정치적인 계급구분도 존재한다.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같은 맥락에서 ‘평양은 나라의 얼굴’이라는 기치 아래 장애를 가진 평양시민을 평양 밖으로 내쫓는 등 장애차별도 노골적이다. 가부장적 가족국가 질서 속에 여성과 남성 간의 위계서열과 성역할 고정관념 또한 고착화되었다.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남과 북이 하나되는 그날을 꿈꾸며
하지만 사회 전반에 스며든 불평등과 차별의 틈바구니에서는 억눌려왔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고난의 행군’시기 이래 주민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길을 모색해왔다. 공식적인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비공식경제가 이를 대체하면서 ‘남한보다 더 자본주의 같은’ 면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저자는 조-중 접경지역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파견노동자의 삶, 밀수와 뇌물이 횡행하며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무역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고, 장마당과 시장이 확장되면서 여성들이 생활경제의 주역으로 활약함에 따라 가부장적 성별 위계질서에 생기고 있는 균열에도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북한사회의 변화를 체제붕괴의 조짐으로 성급하게 해석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제도와 비공식적인 일상 간의 괴리는 지금도 커지고 있지만 두 흐름 모두 현실이고 그 둘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에도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과 북은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감수성을 연마해야 진정한 공존을 꿈꿀 수 있다. 북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안개를 걷어내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 책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은 한걸음이 되리라 기대한다.
아, 북한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문화인류학자 정병호가 장기간 탐구한 북쪽의 내면 풍경
“오랜 고립 속 조롱받는 처지, 실리보다 자존심 앞세워”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처음 공개됐을 때,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악했다. 평양의 화려한 백화점과 호텔 라운지, 명품백을 과시하는 여자들과 네온사인이 빛나는 평양 야경…. 인민들은 굶어 죽어 나가는데 지도층은 핵무기 개발에 올인하는 사회로 알려졌던 기존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판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출신 기자가 “고증이 장난 아니다”라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탈북 유튜버들도 앞다투어 “김정은 체제를 제대로 재현했다”는 평이 이어지면서 드라마가 판타지만은 아님이 드러났다.
이 드라마 작가가 읽었다면 더욱 실감 나는 고증에 도움이 됐을 책이 한 권 나왔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문화인류학자이자 구호 활동가로 북한을 10차례 이상 다녀온 정병호 한양대 교수가 쓴 북한의 삶과 문화에 대한 현장기록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선대 지도자들의 정치적 상징과 통치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 상황에 맞춰 변형해서 활용했다. 김정일처럼 군사시설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현장의 현지지도와 예술공연 같은 권력연출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그 내용과 양식은 현대적 혹은 물질적 욕망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들로 채워나갔다. 그게 바로 스키장과 놀이공원, 팝 음악과 아이돌 공연, 서양 음식점과 백화점, 고층건물과 네온사인 설치 등을 통한 도시경관의 변화다. 스키니진과 명품백, 치킨과 생맥주, 피자와 스파게티, 휴대전화와 택시 등은 김정은 시대 사회변화의 대표적인 상징들이 됐다.
2017년 평양 ‘려명거리’(사진) 등에 완공된 70층짜리 고층아파트 단지는 북한판 ‘스카이 캐슬’에 비견된다. 식당, 미용소, 목욕탕 등 각종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이 아파트 단지엔 김일성종합대 교수 가족들이 대거 입성했는데, 이들 엘리트층은 자녀에게 신분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한 교육 경쟁이 살벌하다. 하지만 평양만 벗어나면 이런 풍경은 아주 낯설다. 평양과 지방의 차별과 차이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 그 이상이다. 환경뿐 아니라 신분과 처우 자체가 추락한다. 그들에게 지방 발령은 그야말로 ‘죽으라’는 소리다. 그래서 탈북자 중에도 서울이 아닌 지방 임대아파트를 배정받으면 거칠게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북한의 려명거리. 창비 제공
이 책의 미덕은 변화한 북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정서와 감정까지도 분석하고 있다는 데 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해 하나원의 ‘하나둘학교’를 설립해 가르치고, 심층면접을 통해 탈북자들을 오래 연구해온 문화인류학자답게 북한 사람들의 행동패턴과 가치관에 대한 분석과 통찰이 남다르다. 지은이가 구호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북한 당국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자. 그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물품의 종류와 규모, 전달방식 등을 두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웃으며 시작되는 협상은 늘 격앙된 감정 표현과 비난, 결렬로 끝난다. 이것은 북한의 전형적인 협상 패턴이다. 받는 입장에서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그들은 이익과 효율보다는 자신의 도덕적 원칙과 체면과 자존심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존심과 결사항전의 의지, 결연한 입장과 유연한 연기력은 비단 북한 협상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가 만난 탈북 청소년과 탈북자들의 공통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나이와 계층을 초월해서 많은 북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아비투스(몸과 마음에 내면화된 습관적 행동패턴)이자 사회적 생존전략이다. 국제사회에서 오랫동안 고립되고 조롱받는 처지였기에 북한 사람들에게 자존심은 늘 실리보다 앞선 잣대다. 세계사와 심리학, 문화인류학을 동원한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대체 북한은 왜 그럴까’는 어느새 ‘북한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한겨레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저자 정병호, 권헌익|창비 |2013.02
원제 North Korea : beyond charismatic politics.
목차
서 론
제1장 대국상
유격대국가
가족국가
새로운 가족국가
그리움의 정치
제2장 현대적 극장국가
과시적 권력
꽃 파는 처녀
피바다
전통의 재발명
제3장 총대
선군정치이론
총이라는 선물
총대철학
총의 힘, 사랑의 힘
제4장 혁명렬사릉
북한의 국립묘지
혁명전쟁열사들을 위한 기념물
만주 빨치산의 정치적 사후세계
세습적 카리스마의 완성
제5장 지도자에게 바치는 선물
글로벌 조선
국제친선전람관
제3세계의 지도자
북한예외론
제6장 도덕경제
도덕경제
고난의 행군
공존의 윤리
결 론
주
참고문헌
도판 출처
찾아보기
감사의 글
출판사 서평
북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에 관한 논쟁적인 책이 출간되었다.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 2012년 영어본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후 저자들이 직접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이자 냉전사 이론연구로 국제학계에서 기어츠상 등 굴지의 상을 수상해온 권헌익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북한을 열차례 이상 방문하며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온 정병호가 북한 정치체제 유지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5년여에 걸쳐 공동 작업한 연구의 결실이다. 이 책은 현 시기 북한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이자 최고의 인류학적 분석으로 손색이 없다.
3대세습으로 들어선 북한의 정치체제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들은 이를 봉건왕조의 연장이 아니라 현대적 카리스마 정치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에 관한 일면적 관측이 여전히 주를 이루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던져주는 주제로서, 북한만이 아니라 21세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양한 상징세습권력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북한은 언제 그리고 왜 극장국가로 탈바꿈했는가
‘극장국가’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발리 네가라(Negara)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 개념으로, 물리적 강제가 아닌 과시의 정치(화려한 의례와 공연)로 통치되는 국가를 통칭한다. 이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는 그 사회를 넘어 다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배권력의 힘에 맞춰져 있으며, 그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삶을 초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 저자들은 ‘극장국가’라는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북한사회에 적용하여 북한의 상징체계와 예술정치를 분석하는 것이다.
북한은 건국 이래 국가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20세기 초 항일무장투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켜왔다. 이는 냉전시대의 다른 공산주의국가들의 시도와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국가정치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단지 북한만이 예외다.
북한의 역사 새로 쓰기는 지도층의 권력유지 특히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세습과 밀접히 연관된다. 저자들은 그 역사가 단순한 서적의 형태를 넘어 음악과 연극 더 나아가 건축 양식의 형태로까지 증폭되어 생산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북한이 언제, 왜 극장국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지를 밝혀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제1장과 2장은 국가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발명해내 이를 문화예술 분야에 반영하는지를 다루는데, 저자들은 1994년 대국상(大國喪, 김일성의 사망)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추모와 그리움의 드라마”를 주의깊게 살핀다. 북한이 다양한 음악?연극 공연을 선보이고 대규모 건축에 열을 올리며 현대적 극장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가 곧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한창 진행되던 때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제작배경은 매우 뚜렷하다.
2000년대 북한이 남한에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많은 이들이 참관했던 아리랑축전(제2장)과 혁명렬사릉(제4장), 국제친선전람관(제5장) 등 대규모 스펙터클의 사례들 또한 모두 권력승계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아리랑축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축전은 북한이 외부세계에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 즉 북한 정치체제의 역사적 기원과 미래의 열망을 청소년과 시민-배우의 집단예술공연으로 보여주는 극적 장치, “예술과 정치의 첨예한 결합체”다. 아리랑축전은 북한의 극장국가 정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의 산물로서 북한이 권력을 매끄럽게 승계해내는 데 큰 몫을 해냈다. 이는 또한 공연에 참여한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메시지를 몸짓과 목소리로 대변하는 과정에서 “일심단결”이라는 북한 고유의 상징이 그들의 정신과 의식에 스며드는 극장국가의 역학을 보여준다.
북한이 창조해낸 이와 같은 극장국가의 면모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고전적 테마, 즉 혁명적 카리스마의 필연적 종말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카리스마 권력은 위기 시에 등장했다가 언젠가 일상의 질서로 돌아가면 서서히 사라져 전통적 권력이나 합리적-법적 권력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는 베버의 주장은 1989년 구사회주의권이 일제히 몰락하면서 여실히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이 극장국가적인 기제를 통해 카리스마의 운명을 진정 극복해낸 것일까.
극장국가 북한은 과연 무엇을 상영하고자 하는가
이 책의 제3장부터 5장까지는 각각 ‘두개의 권총 에피소드’ ‘사라진 전사자묘지들’ ‘김일성이 전세계로부터 받은 선물의 면면’ 등의 흥미롭고 다채로운 서사로 채워진다. 저자들의 체계적인 인류학 연구는 북한의 정보통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문헌?영상?예술작품들을 토대로 그 통제의 벽에 균열을 내면서 내부의 면면을 드러내준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 결국 저자들이 던지는 물음은 하나로 모아진다. “진정 흥미로운 질문은, 그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 또는 얼마만큼 진실이 담겨 있는지가 아니라, 왜 그러한 요소들이 이야기에 도입되었는지 또 이 이야기는 이런 가공의 서사적 요소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다.”
북한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을까. 한편으로 보면 북한은 극장국가적 요소를 통해 감시와 처벌이라는 물리적 강제를 넘어서는 현대적 통치기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과거 유교사회의 충과 효라는 덕목을 종합적으로 개편하여 카리스마 정치의 철학적 토대까지 마련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메시지의 숨은 뜻, 즉 북한은 왜 통치체제에서부터 시민들의 철학까지를 쉼없이 개혁해냈는가를 물어볼 차례다.
제3장 ‘총대’ 편은 그 숨은 뜻을 드러내주는 장으로, 김형직-김일성 부자의 ‘두 자루의 권총’ 일화와 김일성-김정일의 ‘한 자루의 권총’ 이야기를 들려주며 북한이 선군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과정을 차례로 풀어본다. 북한은 냉전종식 후에 스스로가 소련을 대신해 미국의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적수가 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다른 국가들이 빠르게 경제우선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와중에도 홀로 ‘군사우선 사회주의’를 고집했다. 저자들이 보기에 ‘총대’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비단 국가안보만의 문제를 넘어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무엇이 진정한 인간을 만들고 무엇이 윤리적 삶을 구성하며 어떻게 의미있는 정치적 삶을 사느냐”라는 철학적 문제에 가깝다. 이와 같은 철학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세습되는 과정을 준비했는지, 또 차질없이 이뤄내려고 했는가를 낱낱이 드러내준다.
권력세습에 관한 또다른 중요한 사례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체제의 핵심전통인 현지지도다. 이는 극장국가의 연출자가 몸소 변방으로 찾아가 시민을 만나는 방식으로, 김정일은 이를 “선군조선의 모든 기적의 근본원천”이라고 믿었다. 김일성 사후에 이 전통이 강화되면서 특히 그 순례지가 군사시설로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북한의 선군사상과 총대철학이라는 ‘현대적 통치철학’이 결국 ‘총대가문’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를 완강히 지켜내려는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망라한 체계적 인류학 연구의 결실
1994년 이후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과 대기근이라는 두가지 국가적 재앙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 위기는 북한이 냉전과 사회주의권 몰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특히 경제와 국방 중 무엇을 우위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생긴 결과다. 결국 “정치적 권력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가 맞닥뜨린 현실은, 식량위기에 이은 대규모 아사와 조선로동당의 권위 추락이었다(제6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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