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 공원 조성 100주년 100인 토론을 위해 중구청을 찾았다 복병산에 들렸다.
대청동(大廳洞)은 초량왜관(지금의 용두산부근 11만평) 북쪽 담장밖에 있는 수문너머, 동래부에서 30리 거리에 위치한 연향대청에서 유래하였다. 연향대청(晏饗大廳)은 일본사신을 맞이하여 동래부사나 부산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이라 불렀다. 연대청의 부속건물로는 북문인 연향문과 1간의 내북문이 있었다. 북문은 연향시 왜사(倭使)가 출입하는 곳으로서 동복병장이 지키고 평시에는 봉쇄하였다. 이 연대청 찰에는 유원(柔遠)이란 액자가 붙어 있어서, 연대청은 일명 유원관, 유원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가진 연향대청은 현재의 남일초등학교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이로서 그 지명을 일제시기부터 대청정 (大廳町)으로 불렀으며, 광복 후에도 일본식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대로 대청동(大廳洞)이라 하게 되었다. 대청동은 1982년 법정동인 복병동을 대청동에 병합시켰으며, 복병동은 부산지방 기상청이 있는 복병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해발 고도 49m의 복병산은 용두산과 함께 독립적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산 이름은 초량왜관(草粱倭館)시대 복병막(伏兵幕)이 설치되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복병막은 잠복 군사 초소였다. 왜인의 난동, 풍기문란, 잠상( 潛商 )밀거래를 막기 위함이었다. 부산포 개항 후 1892년에 복병산 조차(租借)에 관한 협정으로 일본인 공동묘지로 이용되었으나, 1924년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촬영소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나라 영화 제작의 효시가 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산정부에는 체육공원이 있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북쪽 기슭으로 중구청이 있고, 동쪽 기슭을 둘러싸고 남성여자고등학교와 남성초등학교가 있다. 남쪽 사면에는 1933년에 세워진 부산기상청사[대청동 기상관측소]가 있, 이곳은 근대 기상 관측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부산광역시 시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1910년에 건립된 부산 복병산 배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배수지는 성지곡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 부산 시민들의 각 가정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모두 3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배수지 형식을 따라 지하에 저수조를 설치하고 그 위에 복토한 후 잔디를 심어 놓았다. 여과시설 입구와 벽체는 과소벽돌콘크리트조 혹은 붉은 벽돌조로 벽체상부는 석재로 마감되어 있다. 아치 형태의 석조 문틀로 그 위에 현판이 있다. 복병산 배수지 준공으로 부산은 본격적인 상수도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부산 근대 수도사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복병산 배수지 부근에서 보이는 푸조나무
계단을 오르면 산정으로 이어진다.
복병산 자락에 유난히 많이 보이는 가죽나무들
거기서 팽나무 한 그루 만났다.
지난 2001년 중구청에서 안내판을 세웠다.
수령 약 130여년 수고 11m 둘레 2.6 m 수관폭 12m
독립적 공간을 부여 받았지만 주변이 어두웠다. 안그래도수피가 거무튀튀한데
복병산의 봄
김태
대낮인데
산벚나무가 등불을 들고 길을 나선다
일렁이는 불빛에
잠복하였던 옛 병사의 눈망울을 찾는다
햇볕이 옆에 있어도
늘 그늘에 앉은 팽나무는
알고 있다는 눈치를 주지만
숨길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세상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이 다 말하고 있지 않는가
가슴팍에 닿은 산등선은
봄이 와도 흙빛 그대로 인데
복병산 무너질 수 없는 오래된 자존심이
실핏줄처럼 퍼져 땀을 뚫고 올라 간다.
공원에서 삼성여고 쪽으로 이동한다. 산 아래는 동광동과 중앙동이다. 지난해 가을 저 나무를 측정하기 위해 주위를 배회한적도 있다.
남성여고는 일제 강점기에 목사 김길창이 ‘교육 없이는 전도도 없고, 교육 없이는 애국도 없으며, 교육 없이는 소망도 없다’는 교육 철학 아래, 1941년 5월 1일에 서구 서대신동 2가 184번지에 경남성경학교를 신설하였다. 1943년 4월 6일에는 흥아실무여학원으로 정식 인가[일본 전시 교육령]를 받았다. 이후 학교 교사(校舍)가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노무자 수용소로 징발당하자, 당시 김길창이 시무하던 항서교회로 학교를 옮겨 그 명맥을 이어 갔다. 1942년 5월 10일에 흥아고등여학원으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45년 4월 30일에는 흥아여자상업실무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같은 해 1945년 10월 1일에는 남조선고등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미시마[三島]고등실업여학교’ 교사 및 부속 건물을 양수하여 그해 10월 5일에 현 위치인 중구 대청동 1가로 이전하였으며, 교정 내외에 산재해 있던 군국주의의 잔재를 일소하는 등 조국의 동량들을 키우는 데 노력하였다.
1946년 9월 1일에 학제 변경에 따라 남조선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6년제로 승격되었으며, 1951년 7월 5일에는 남성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변경[문보 제348호]하였다. 그해 1951년 9월 1일에 학제 개편에 따라 남성여자중학교와 남성여자고등학교로 나뉘게 되었다. 1952년 3월 7일에 남성여자고등학교로 분리한 이후 처음으로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2015년 2월 에 제67회 졸업식을 가졌다.
옹벽길이 세월을 느끼게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미시마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쌓았던 옹벽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특유의 성벽 쌓기 기법을 보여 주고 있는 석축이다. 돌 크기는 가로 20~40㎝, 세로 15~30㎝ 정도로 다양하며, 최저 높이 2m, 최고 높이 4.5m가량이다.
팽나무 씨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복병산 숲속 팽나무의 후손일까
작은 구릉에 불과한 복병산이지만 이나라의 근대가 도처에 들어서 있다.
한때 저 집을 들락날락 했다. 80년대 시인이었던 원광스님을 만나러 왔었기 때문이다.
차인 원광(圓光)선사는 충남 아산군에서 출생. 속명. 김용진, 호, 아산, 법명. 원광 승려 시인이고 차인이었다. 1968년 해안사에 출가 1969년 범어사 고암대종사를 은사로 비구계 받았다. 1972.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 1974. 부산 대승불교회 회주로 안거하다 1982 부산불교문인협회및 부산차인연합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실상문학. 주장자(1984)창간, 목마 시동우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 시집 ; 풍경. 제자리걸음. 가고지고 가고지고. 차인의 노래 등을 남기고 1989,12. 26. 48세,(법랍 20세) 원적하였다.
사실 우리 차를 마시는 법을 그때 알았다. 찾아가면 늘 차를 끓여 주셨는데, 부어주는 족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감당이 안되었는데, 다 마시지 말고 반만 남기면 된다고 했던가. 그 때 스님이 마땅한 직업이나 거처가 없던 내게 처사 아무개 혜존이라 하여 주었던 시집이 제자리걸음. 가고지고 가고지고 였는데, 어느 결에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문득 이 골목에서 스님을 생가해 보았다.
관자재보살
원광스님
눈으로 자유로운 당신
귀로 평화로운 당신
말씀으로 영원한 당신
마음으로 행복한 당신
꿈으로 아름다운 당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은 내 이름을 부르며
먼 날 먼 곳을 여기 놓아
하루도 잊지 않으시는
당신. 사랑하는 당신.
길을 건너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이동했다
올해 초 영화박물관 만든다며 베어질 부산유치원 자리의 노거수들의 흔적을 보고 싶어서 였다.
용두산공원 산 역사 '100살 칠엽수' 잘려 나가나
100년 역사의 용두산공원을 근대역사의 허브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본보 2월 13일 1면 보도) 용두산공원을 100년 가까이 지켜온 노거수가 잘려나갈 위기에 처해 생존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부산시는 근대 문화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장소를 없애면서 자산으로 남길 것들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화박물관 공사로 벌목 위기
"개발행정 탓…보존방안 찾아야"
13일 부산시에 따르면, 중구 동광동 용두산공원 내 옛 부산유치원 자리에 들어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건립 공사가 이달 말께 시작된다. 임대형 민간투자사업시설(BTL)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한진중공업이 시공사로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부지 안에 수령이 1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엽수와 은행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식재돼 모두 베어져 나갈 운명에 처했다는 것. 공사 현장 관계자는 "이 나무들 중 시설관리공단 측에서 이식을 요구한 왕벚나무 20그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벌목해 폐기물 처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와 학계에서는 100년의 산 역사가 시민들의 무관심과 일방적 개발 행정으로 잘려나가게 생겼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성근 처장은 "밑동 둘레 2.3m 크기의 칠엽수는 인근에 오래 거주하신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수령이 100년은 족히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품격 있는 나무"라고 말했다.
동아대 조경학과 강영조 교수도 "나무 자체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부산유치원에 있었던 나무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민자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어 1천만 원 안팎의 이식비를 부담하라고 강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4년 전에는 이 땅에 모텔을 짓겠다고 해 시민단체가 반대했는데, 이 부지를 사들인 부산시가 노거수나 돌담 같은 근대 유산의 보존 계획을 처음부터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며 "지금이라도 보존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질책했다. 이현정 기자 15.2.16
나무를 추적한 결과 은행나무와 느타나무는 베어졌고 칠엽수만 석대 수목원 부지로 이식됐다.
역사를 이리도 쉽게 허문다. 이런 도시 참
예전에 일제 때 대청로에 서 있던 노거수들
아 저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용두산 주변이 막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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