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은 1942년 9월 26일에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이사를 가서 성장하였다. 1968년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입사하여 일하던 그는 1974년 33세에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10월 유신에 맞서 언론자유를 수호하자는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발표하였다가 이듬해 해직되었고, 긴급조치 휘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84년에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1985년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위원장과 사무처장을 지내며 대표적인 재야인사로 활약하였으며, 1986년에 5·3 인천 사태 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1988년에 광주학살진상규명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전두환의 구속수사를 요구하다 다시 검거되어 복역하였고, 1989년에 김근태, 이재오, 장기표 등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조직하여 상임의장이 되었으나 문익환이 방북한 건으로 인해 다시 체포되어 복역하였다.1990년에 3당합당에 반대한 이기택, 노무현 등이 창당한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1992년에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강동구 갑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북한에 조문을 보낼 의사가 없느냐고 질의하여 보수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95년에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다수의 소속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할때 끝까지 민주당에 잔류하였다. 이듬해 실시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통합민주당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1997년 11월에 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을 주도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로는 김대중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쏟아내는 등의 대여 강경 행보로 한나라당의 부총재와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당내 여러 직책을 거쳤다.
그러나 특유의 개혁성향과 이러한 소신에 따라 대북 정책 등에 대해서는 이회창을 비롯한 다른 지도부와 의견이 불일치하였으며, 간혹 한나라당 내의 보수 성향 의원들이 정부 여당을 상대로 색깔론을 제기할 때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 의견을 표출해 당내 불만을 유발하기도 했다.
제16대 대선에서는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나, 대선 이후 점차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 성향 의원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2003년 7월에 같은 당 소속인 이우재,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과 한나라당을 탈당하였고 그해 10월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2004년에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제17대 총선에 출마하였는데 여론조사에서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청장 출신이자 자신의 정치 후배였던 한나라당의 김충환 후보에게 낙마하였다. 그 해 신기남이 부친의 친일 의혹으로 사임한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2007년 12월 6일에 JU그룹으로부터 2억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과 2억 107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이후 민주통합당의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으나 2015년 2월 11일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2015년 2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고문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별사를 통해 "정치인 이부영이 멍에를 내려놓고 떠난다"며 이 같이 밝혔다. 이 고문은 "좀 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으련만 능력과 식견이 모자라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며 "저의 정치인생에 여러모로 도움주시고 이끌어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의 어리석음과 부족함 때문에 피해를 입었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용서를 빈다"면서 "순탄치 못한 저의 인생살이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을 힘들게 했던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새롭게 전진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당원 동지 여러분들에게도 행운과 승리가 함께 해주기를 온 정성을 다해 빌겠다"며 "정치를 떠나더라도 이 나라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사회가 되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면서 살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 고문은 앞으로 시민운동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계획이다. 한일협정재협상국민행동 대표도 맡고 있는 이 고문은 동아시아 평화 문제와 남북문제 등을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이 고문은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남북문제, 동아시아 평화 문제 그 밖에 수목장 운동 등에 더 힘을 보태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면서 "한반도에 닥치는 위기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10.10.12 프레시안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①]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됐다.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과 이같은 부당한 공권력에 굴복해 동아일보사가 134명의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113명의 투위원 가운데 14명이 작고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속 해직 기자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국가 상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기자 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프레시안
1. 들어가는 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인 필자 이부영은 나의 삶에 관한 이 글을 동아투위의 성립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술하려 한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투위원 모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이후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배의 투위원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던 시기에 부닥쳐야 했던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격리, 이단자(아웃사이더)의 굴레는 우리들의 삶을 한 순간에 '체제의 금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1975년에 시작된 동아투위원들의 스산한 삶의 역정은 무려 35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 세월은 일제 식민지배 35년과 같은 기간이다. 6명의 대통령 치세를 지냈고 더욱이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 2명의 치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 14명의 동료들이 그 동안 유명을 달리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판정에 근거해서 민사소송이 뒤늦게나마 진행되는 것에 만시지탄의 희망을 걸어 본다.
나는 동아투위의 민사소송 제출용 참고자료로서는 지나치게 장황한 글을 제출한다. 나는 담당 재판부가 이 글을 인내심을 가지시고 진지하게 읽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쓰고 있다. 1975년에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가 해직되어 언론으로부터 축출된 한 기자가, 자기가 쓸 지면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한 기자가 그 이후 세월 동안 부딪치며 살면서 겪어온 일들을 재야 활동가나 정치인이 아닌 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으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 글을 읽게 되실 담당 재판부께서 글 쓴 이가 자신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나 정치활동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입장만을 편향되게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실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민주화운동과 정치참여의 길을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해직언론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나는 1975년에 독재정권이 저지르고 유신법원이 추인했던 '동아 자유언론 탄압행위'가 민주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서 복권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4·19 민주혁명 정신의 뿌리가 자유언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동료 위원들께서 동아투위의 자유언론운동에 관해서 그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 주었으므로 나는 될수록 지난 35년 동안 동아투위 소속 언론인 입장에서 내가 듣고 본 것 위주로 사실들을 서술하려고 한다.
2. 동아투위 성립 이전의 삶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학창생활을 보냈다. 서울 영등포의 외진 당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전 직후 용산중학교에 입학, 1961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고3 때 4월 민주혁명을 맞았다. 서울대 공대에 진학할 거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친구가 철조망을 넘어나가서 데모에 참여했다가 동대문서 앞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옳은 일에 나서서 죽은 친구 앞에, 공부한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학생들을 죽이는 정치라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대 기계공학과로부터 정치학과로 지원학과를 바꿨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석 달 전에 입학한 서울대 문리대의 분위기는 4월 혁명의 여진으로 용광로 같이 들끓고 있었다. 곧 밀고 들어온 쿠데타군은 5월의 라일락향기 짙은 캠퍼스를 무참히 짓밟았다. 선배들과 교수들도 사라져버린 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배회했다. 우리 세대들은 군사쿠데타에 대한 분노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문리대 학생회 일에 참여하면서 군정연장 반대데모 그리고 막 시작된 대일굴욕외교 반대데모에 참여하던 참에 나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중에 많은 학우들이 이른바 6·3 사태로 제적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1966년에 다시 복교한 대학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같았다. 2년 뒤에는 대학 문을 나서야 할 처지여서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학과의 교수 한 분이 공법을 전공해서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는 가라고 권했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심경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독점경제에 저항하는 현실적인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당시 6·3 학생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김도현 최혜성 김정남 등과 함께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세운 백범사상연구소(명동 소재)에 자주 들렀으며 장 선생님을 사숙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당시 가장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아일보에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수습 11기로 입사한 1968년은 3선 개헌을 앞둔 해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 대해 온갖 압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예를 들면 서울 봉천동 같은 달동네에서는 한겨울에 으레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업자들의 사재기 때문에 산꼭대기 동네에서는 아래 동네의 2~3배의 값을 내고도 연탄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사태를 보도하면 중앙정보부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연행해서 민심선동으로 대북이적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구타해서 내보냈다. 정치부나 경제부 등 핵심부서보다는 일선 경찰기자들에게 겁을 줘서 언론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서서히 퍼뜨리는 수법이었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언론은 완전히 침묵했고 오히려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로 전환했다. 당시 언론이 서서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간다는 자조적 탄식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동아일보에서는 최소한의 기자정신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신문사에서도 상사들에게 자주 불만을 말하다가 눈총을 받았고 다른 동료들이 기피하는 부서인 문화부에 자원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등 주요부서에서는 정부의 보도자료 이외에는 거의 기사를 쓸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도 문화부의 취재대상은 목사 신부 스님 인권변호사 작가 시인 예술인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어서 우회적 은유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신문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는데 있어서 문화부 기자들의 입지는 지식인 사회의 광범한 지지 성원을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형성한 지식인 네트워크는 이후 동아투위원으로 재야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일해 가는데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 1973년 4월 9일 이부영.손수향의 결혼식에서 천관우선생이 주례를 선 가운데 두 사람의 대부였던 장준하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부영
자유언론운동에서 우리의 중심인물은 천관우 주필이었다. 유신체제 선포 전후에 동아일보에서 퇴사와 복귀를 거듭했던 천관우 선생은 유신 직후 회사에 복귀한 뒤, 아예 '민주수호국민협의회'(약칭 민수협)대표를 맡아 재야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천 선생은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유진오, 이병린, 김정한 선생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낼 일이 있으면 나와 몇몇 기자들을 불러 성명서 원고를 주고 서명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내시곤 했다. 서울이 아닌 대전에 머물고 있던 유진오 선생 댁에 감시형사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들러 서명을 받아온 다음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근하기도 했다.
1973년 천관우 선생은 나와 손수향 양(장준하 선생의 비서)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다. 아버지가 없었던 두 사람에게 장준하 선생은 대부가 되어 주셨다.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두 차례 언론자유선언 사건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언론의 숨통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언론자유운동에 열심이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하루아침에 편집부서가 아닌 광고국으로 전보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대형화하기 시작한 재벌기업들이 사원들에 대한 처우를 비약적으로 올리자 언론사들의 급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생겼다. 이때부터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언론인들이 재계나 관계로 자리를 옮겨갔고 또 일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장래에 깊은 회의를 품고 유학길을 떠나기도 했다. 언론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으면서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젊은 언론인들은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독립운동 하는 심경으로' 자유언론운동에 매달렸다.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언론화형식 시위를 벌일 때, 후배들에게 그 같은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특종기사를 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논설을 쓰는 일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고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시국을 맞아 동아일보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유능한 기자가 되어도 쓸데없는 노릇이었다. 체계적인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개인 재능이 아니라 집단 지성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대응방안이 언론노동조합의 결성이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의 언론인들은 당시에 언론노조가 없었으므로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 분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사주측은 즉시 대량해임, 무기정직 처분으로 대응했다. 당시 박 정권은 노조결성 사태를 다소 복잡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조의 간부진이 유신체제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아일보 경영진과는 대립적 입장이었으므로 동아일보 사주 측과 노조 측이 내부 갈등을 벌이는 것이 정권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노조 측에서 부당해고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법리적으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한 사주측은 1개월 뒤 해임 등 징계를 일괄철회하고 복직조치를 취하되, 노조설립에 대한 신고필증이 교부되지 않았으므로 노조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조 측은 노동조합의 성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조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아일보사에서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던 1974년 4월초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었고 수백 명의 학생, 지식인, 종교인, 작가, 예술인들이 구속되었다. 무더기 구속에 따른 고문조작수사 의혹이 제기되었고 종교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서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지에서 열리는 민청학련, 인혁당 구속인사를 위한 기도회는 문화부 기자가 담당하는 행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들은 아예 행사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만 나타나 열심히 취재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취재해 송고하는 기사들도 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시국사건 기사들은 중앙정보부 등 정보수사기관의 간섭과 통제로 철저히 보도되지 못했다. 그런 현장에 나가 취재하는 동아 기자들에게도 구속자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나가지도 않을 기사를 왜 취재하느냐", "너희들 중앙정보부의 하청받고 대리 정보수집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항의를 하면서 취재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했다. 유신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징역, 20년~15년 징역형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법정에서 변론하던 변호사가 변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아 동아노조는 다시 결단의 시기를 준비해야했다. 우리가 언론노조를 만들어 조직을 확대.강화했던 것도 단지 신분보장 받고 월급 몇푼 더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다.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고 고문수사를 통해 사형, 무기징역형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맞서 자유언론의 책무를 다하려고 언론노조를 결성한 것이었다.
▲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에서 홍종민기자가 선언문을 읽고 있다. ⓒ이부영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 국제연합 창립일(유엔데이)인 공휴일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 이전에 몇차례 있었던 언론자유선언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동아 언론인들 입장에서는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유신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은 정말 뜨겁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동아의 지면과 전파를 통해 오랫동안 보도가 통제되었던 수많은 시국사건들이 제대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동아가 앞장서서 자유언론을 실천하자 다른 신문 방송들도 따르려했다. 그러나 1974년 연말에 다가서자 동아일보의 지면에서는 점차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의 동아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성탄절 임박해서는 완전히 광고가 사라졌다. 사라진 백지 광고지면에는 민주주의 회복, 구속자 석방, 유신헌법 개정, 학원의 자유 등을 기원하는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지광고 지면에는 민주주의의 성찬(盛饌), 축제가 벌어졌다. 세계 언론사에 전례가 없는 백지광고 탄압사태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노조의 대변인(섭외부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동아일보사로 찾아오는 국내외의 외신기자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다. 기자 자신이 취재원이 된 것이다.
1975년에 들어서자 동아일보사 내외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사주 측을 압박하여 자유언론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이 백지광고탄압의 공공연한 의도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주 측은 2월에는 기구축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기자들이 소속된 부서를 없애면서 해임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 해임.징계했다. 동아의 언론인들은 제작거부를 하면서 사내 농성에 들어갔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사주 측은 폭력배들을 동원, 농성하던 남녀 언론인들을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외로 내쫓았다. 유신정권과 이에 야합한 동아 사주가 합작하여 동아언론인들을 축출한 것이었다.
동아언론인들의 35년에 걸친 거친 들판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10.10.15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②]
3. 동아투위 성립 이후의 삶
가. '청우회 사건' 1차 투옥
유신체제 아래서 체제 밖의 삶이란 바로 국가폭력에 내맡겨지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개인이 사라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는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134명의 언론인들은 축출된 바로 다음날 한국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초대위원장에는 나와 함께 문화부에서 차장으로 일했던 권영자 선배가 맡았다. 나는 동아노조에 이어서 동아투위의 대변인 역할도 맡았다. 동아투위는 동아 언론인들의 대량축출의 부당성과 자유언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녔다. 필경(筆耕)과 등사판을 이용하여 매일 유인물을 수백부씩 만들어서 외신기자들, 다른 언론사 기자들, 대학교수들,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흐르자 중앙정보부 등 수사정보기관에서는 동아투위원들의 그런 활동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나의 외신기자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투위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처분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동아언론인 집단해고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고 자유언론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연극 '진동아굿'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동아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것이 필자가 구류처분을 당한 이유였다. 동아언론인들을 회사 밖으로 축출한 이상, 그들의 자유언론 투쟁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그들이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만들어져야 했다. 필자가 미리 각오한 바이기는 했지만 정권탄압의 촉수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5년 5월초 미국 AP통신의 부사장 겸 대기자인 존 로더릭이 서울을 방문, 동아일보 사태를 취재하겠다고 해서, 자유언론 농성현장을 우리와 함께 지키다가 함께 쫒겨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안내로 그를 플라자 호텔 로비 커피점에서 만났다. 우리 회견 자리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원들이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동아사태 뿐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과 처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혁당 희생자들에 관한 것 등 꽤 광범한 내용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 타임스의 리차드 핼로런 등 미국 영국 유럽 일본의 여러 외신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숨바꼭질이 있었고 기관원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동아 언론인들이 축출되기 얼마 전에 유신국회에서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 국가모독죄로 처벌할 수 있는 형법 104조 2항이 개정, 신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원들에게 닥쳐오던 가혹한 운명은 너울처럼 겹쳐왔다. 학교 다닐 때 같은 서클 선배였고 동아일보에 먼저 들어왔다가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겠다고 회사를 그 얼마 전 떠난 이창홍이 중앙정보부에 자수하여 필자와 성유보 그리고 정정봉이라는 또 다른 선배와 만나 나눴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그는 동아일보 안의 여러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보다는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급 후배들을 이창홍이 만나 간여한 것 때문에 수배를 당했는데 주모자급 후배들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받는 것에 대해 충격과 공포에 짓눌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가 제 발로 중앙정보부에 걸어 들어갔다고 그의 부인이 나에게 알려왔다. 이창홍은 민청학련에는 간여한 것이 아니었고 나와 성유보 등과 동아의 자유언론운동에 간여했다는 쪽으로 정보부에서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즉 무거운 쪽으로부터는 빠져나오고 가벼운 쪽을 넘겨주겠다는 의도였다. 나눈 이야기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못돼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 1975년 6월 9일 이부영 동아투위 대변인이 연행되고 있다. ⓒ이부영
1975년 6월초 나는 돌을 갓 넘긴 첫 딸과 함께 둘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 처가가 있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출산 사흘 만에 서울에 돌아오자 말자 언론회관 투위 모임에 나갔다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됐다.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처가에 머물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연행 순간 떠올랐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6국, 이른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수사국에서 조사받았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등을 다룬 악명 높은 부서였다. 수사관들은 나를 의도적으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3층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그곳이 최 교수가 뛰어내려 자살한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3명이었는데 2명은 경찰 수사관 출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헌병 출신이었다. 경찰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은 50대 중반의 나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넘겨받자 말자 지하실의 골방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곳에는 한쪽에 야전침대 몽둥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키고 이른바 빠따를 치기 시작했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는 "너희 서울대놈 새끼들은 힘들여 가르쳐 놓으니까 빨갱이나 된다.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이 되느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때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조사나 해보고 말합시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의 조사과정에서도 그는 선임자로서 옆에 서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커다란 삼각뿔자로 나의 등과 어깨를 때리고 때로는 찌르기도 했다. 사흘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나는 심한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는 나를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서 다시 구타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설사를 해버렸다. 그를 수행했던 공채출신 보조 수사관이 그를 만류했고 나를 샤워실로 데리고 가서 씻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지하 3층 조사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누가 들어섰다. 겁이 덜컥 났다. 들어선 사람은 큰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물고문을 하려고 왔나보다고 긴장했다. "야 부영아, 나다. 성태경이야."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 유명한 럭비선수 성태경이 서있었다. "마음 놔,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찾아왔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반말들이 대주전자에 생맥주를 가득 담고 점퍼 주머니에 닭튀김을 넣고 나타났다. 그가 정보부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풍편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날 그와 나는 새벽 3시에 가깝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언론자유 문제로 이렇게 다루는 것에 불만을 말하자 자기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도리 밖에 없다고 위로했다. 오래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몸만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말 그 다음날부터 평안도 말씨의 서북청년단 출신은 나타나지 않고 다른 수사관이 보충되었다. 수사는 이창홍의 진술대로 진행되었다. 고대총장을 지낸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과 육군사관학교 교재인 버트람 울프의 '레닌에서 흐루시쵸프까지'라는 책(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시리즈)이 내가 공산주의에 심취해서 읽은 책으로 압수목록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 9호와 형법 104조 2항(국가모독)이 나에게 적용된 위반법령이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이라는 대단한 사건으로 포장되어 발표되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자 검사의 신문에 응해야 했다. 그는 정보부 조서를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물정을 잘 모르던 나는 이창홍의 자의적 진술대로 작성된 정보부 조서는 나 자신의 임의성이 무시되었다고 항의하자 그러면 정보부에 다시 가서 조사받는 도리 밖에 없다고 정보부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보부에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로 하라고 말했다.
1심 재판에 나의 경우 서울지법과 영등포지원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출정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의 경우엔 서울지법에서, 서울대 데모 배후조종 혐의에 대해서는 영등포지원에서 재판 받았다. 사건들이 폭주해서 재판을 늦게 시작한 탓으로 한 주일에 3회 이상 재판정에 나갔다. 1심 재판의 형량은 '청우회' 사건의 경우 구형 15년에 선고 8년, 서울대 데모배후조종의 경우는 구형 3년에 선고 1년, 도합 구형 18년에 선고 9년이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구치소로, 재판정으로 쫓아다니던 아내는 1심 선고가 있던 날, 장기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나에게 "여보, 밥 잘 먹고 기운내요"라고 소리쳤다. 기죽지 말고 건강해야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미소로 답했다. 많은 동료 동아투위원들이 재판정에 응원 나와 주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나와 성유보가 관련된 '청우회'사건을 통해 동아자유언론운동을 왜곡하고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굳하게 우리를 믿고 성원해 주었다.
내가 서울지법에서 재판받는 동안 취재하러온 지난날의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동아 기자들은 차마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가와 따듯한 위로의 한두 마디 말을 건네고 갔다. 시세 흐름에 빠르기로 소문났던 몇몇 기자들은 "꼴좋다. 그렇게 날뛰더니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모욕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 뿐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도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더 빨리, 오히려 앞서 순응해나가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뒤로도 계속 고민한 주제였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영등포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한여름 8월 20일 경 아내가 초췌한 얼굴로 면회 왔다. 장준하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사하셨다고 발표되었지만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장 선생께서 8월 17일 돌아가시고 장사를 치른 다음 바로 면회왔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경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독방(0.72평)에서 사과와 참외, 그곳의 밥과 찬으로 제상을 차리고 홀로 예를 올렸다. 선생님의 독립, 민주, 통일의 유지를 이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
우리들을 변호해준 분들은 홍성우 황인철 이돈명 강신옥 조준희 이범열 변호사였다.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는 동아 노조 때부터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해주었다. 그 뒤 숱한 나의 송사에 그 분들은 선배가 되고 동지가 되어 주었다. 나의 대학 동기이자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해온 김정남은 홍성우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를 위해 재판 준비를 도왔다. 1심 재판 동안 머물렀던 영등포구치소에서 많은 서울대생들을 만났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정면으로 대항한 서울대 5.22사건 때문에 구속된, 신입생으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박원순 변호사, 나의 같은 사건 공범이었던 이신범 전 의원, 이호웅 전 의원, 그리고 그 뒤 나와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문화운동가 김도연, 시인 김정환,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채광석 등 많은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어 재판받는 것을 보면서 유신체제는 오래 갈 수 없는 체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소심 재판 동안에 머물렀던 서울구치소에서는 더 많은 시국사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등포 구치소가 서울대생들 천지였다면 서울구치소는 전국의 남녀노소 정치범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함세웅 문정현 신부 같은 종교인, 김지하 시인, 한승헌 변호사, 지금은 특임장관이 된 이재오 의원, 최열 환경재단 대표, 조성우 민화협 공동대표, 서상섭 전 의원 등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갇혀 있었다. 김지하 시인에게 나로서는 마음의 큰 부담을 지고 있었다. 1975년 2월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을 때, 나는 그로부터 '고행 1974년'라는 제목의 옥중수기를 받아 동아일보에 실었다. 무엇보다 그 글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사형수 하재완의 증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이제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 조작으로 8명의 생명을 사법살인한 치욕적 사건으로 판결되어 법원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김 시인은 바로 재수감되어 그 자신이 박 정권의 사법살인의 희생양 처지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한 '양심선언' 반출 작전이 내가 서울구치소에 머무는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김정남-전병용 라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비밀리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성공하기만 빌었다. 김지하를 살린 사람들은 많았다. 나중에 인권변호사로 큰 역할을 했던 조영래가 양심선언의 문장을 다듬었으며 김수환 추기경과 윤형중 원로신부님을 비롯해서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움직였고 이름 없는 소년수 출소자까지 기여했다. 그런가 하면 이병철의 삼성재벌의 승계문제 때문에 형제 골육상쟁이 일어나 그 둘째 아들 이창희가 나와 같은 사동에 갇혀있기도 했다. 그는 폐소공포증 때문인지 감방 안에 갇혀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항상 문을 따놓기를 바라니 딱한 노릇이었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유신반대 취지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민주인사들을 돕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은퇴했지만 전병용, 한재동, 김제술 등 여러 헌신적인 동지들을 만났다. 지금도 그 때 만났던 교도관 출신 인사들의 친목모임에 가끔 나를 불러 함께 산에도 가고 회식을 하기도 한다.
항소심에서 2년 6월형이 확정되자 나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역시 그곳에도 30여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정치범들과 함께 수용되기 전 한 달 동안 5평 남짓 되는 감방에 14명의 일반수들, 다시 말해 강절도범과 사기범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 여름 뜨거운 슬라브 지붕 밑의 2층 감방 안은 사람들의 체열까지 더해져 한증막이나 다름없었다. 용케 참다가 자주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팬티만 걸치고 있어도 더웠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자 이른바 형 확정방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정치범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나는 연세대 출신으로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된 강기종 군 그리고 서울대 출신으로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변호사가 된 송병춘 군과 한 방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영등포와 서울 구치소에서 만났던 이호웅 최열 조성우 이명준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의 김효순 등 학생운동 출신들과 이창복 김종대 황현승 정만진 이재형 등 인혁당 사건 인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하루 한 번 30분 동안의 운동시간에 넓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30분을 뛰고 나서 세면장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나면 상쾌했다. 감방 안에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여러 차례 감옥생활 가운데 꽤 충실한 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됐다. 책 검열이 엄격해서 성경 등 종교서적과 문학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총서 12권을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에집트 등 상고사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현대를 차례로 읽었다. 희랍어 라틴어까지 나오는 방대한 문헌을 나의 빈약한 어학으로 모두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재미는 오랜만에 맛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그 후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안양교도소의 행복한(?) 수용생활은 1976년 연말에 끝났다. 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이창복 김종대선생과 학생운동 관련자 이명준 등과 함께 전주교도소로 이송됐다. 이제 본격적인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교도소의 특별사동에 수용됐다. 특별사동이란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수용된 곳이었다. 이미 먼저 와있던 인혁당 관련자 전창일 유진곤 김한덕 강창덕선생과, 오래 전 그러니까 20여년~10여년 전부터 수용되어 있던 미전향 장기수 15명 정도가 그 특별사동에서 갇혀있었다. 특별사동의 왼쪽 남향으로만 0.72평짜리 독방 32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직할통제를 받는 '전향공작반'이 교도소의 교무과 안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반정부 정치범들을 미전향 장기수들 감방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수용했다.
그리고 미전향 장기수들과 통방하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환경변화는 좁은 방안에 높이 달린 스피커를 통해 고음으로 흘러나오는, 전날 방송된 10분짜리 KBS 대북방송이었다. 오승용이라는 성우가 진행하던 그 프로는 "김일성이 이 놈, 네가 제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에 10차례 이상 같은 내용을 반목해서 듣도록 하는 '전향공작'이었다. 소리를 피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달린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봐도 사동 전체를 울리는 방송소리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것은 심리전 고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었던 수용자들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작심하고 일종의 난동(?)을 부렸다. 감방 문짝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다. "방송 고문 중단하라"면서 교도소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자 교무과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조치는 오래 전부터 해온 것으로 중단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와 같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전향공작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라고 통고했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 되었다. 나는 전향해야 할 대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전향공작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와서 방송이 나오면 계속 방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방송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중단되었다. 어느 겨울날 하루 30분 두 명씩 운동하도록 하는 운동시간에 옆방 미전향 장기수 고광인 선생이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그 방송소리 시간 조금 지나면 자장가처럼 들려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1973년 사회안전법(**미전향수가 전향하지 않으면 2년마다 심사하여 수감을 연장토록 한 법)이 생기고 나서 이 독방에 깡패를 함께 넣어서 두들겨 패도록 했고 한 겨울에 방 안에 찬물을 끼얹어서 폐렴이 걸려 죽게 만들곤 했어요." 전향공작반원들은 전향에 성공하면 성공보수를 받도록 했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75년부터 긴급조치로 반정부 정치범들이 들어오면서 전향공작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1976년의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밖의 기온이 영하 10도 정도이면 독방의 실내 온도는 13~4도로 내려갔다. 시멘트 응달의 냉장효과가 더해지는 탓이었다. 잠자고 일어나면 빰과 코가 얼었다. 마루바닥에 깔고 자는 가마니와 요는 찬 바닥공기와 체온 탓으로 습기에 흠뻑 젖었다. 한 겨울에 말릴 곳도 마땅치 않아 다시 그대로 깔고 잤다.
1977년 2월 문익환 목사께서 전주교도소로 이감 오셨다. 76년 3·1구국선언이 있은 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신 것에 격분, "장준하의 혼이 나를 씌웠다"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 목사는 그 뒤 80년대 동안 내가 모시고 운동을 벌인 어른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전주교도소에서 맺어졌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청년이셨다. 나는 그 분의 동생이신 문동환 목사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은 전주에서 처음 만났다. 아직 한 겨울인데도 사모님 고생시키지 않겠다면서 세면장에서 손수 빨래를 하시고 우리들에게는 요가수행 방법이나 심신단련법을 가르치셨다. 그 즈음에는 정치범들 사이의 통방(뒤 창문으로 수감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수월해져 있었다. 내가 이감온 이후 특별사동을 내려다보는 바로 옆의 2사 상층의 일반 재소자들이 특별사동의 정치범들이 통방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전향공작반에 고자질해서, 공작반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특별사동의 각개 독방 뒤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해서 겨우 나무판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일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의 통방을 고발하면 감형과 가출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정치범들은 호를 지어 서로를 부르면서 통방했다. 그래서 한문에 능한 강창덕 선생이 나에게는 청우(靑牛)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나는 강 선생께 "하필 공화당의 상징인 소를 붙여 호를 지어 주셨느냐"고 항의했더니, "젊게 왕성하게 일할 사람이어서 그랬다"는 말씀이었다. 예를 들면 문익환 목사님이 나에게 통방하시려면, "9방 이부영 동지 좀 나오시게"처럼 일반재소자들이 모두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우 동지, 좀 나오시게"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생기곤 했다. 나의 사건 이름이 '청우회'(靑友會)여서 호도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게다. 그것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강 선생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록 강 선생이 자신의 호를 나의 호 보다 더 멋있는 야성(野星) 또는 들별이라고 지은 것에 불평을 말하곤 했지만.
1977년 5월에 접어들면서 전향공작반에서는 전향서가 아니라 반성문을 쓰면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것도 모든 반정부 정치범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량이 얼마 남지 않은 극히 일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공작이었다. 확신범의 경우 자신의 신념을 굽혔다는 죄의식 때문에 더 이상 민주화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교도소 측은 나를 특별사동에서 떼어내 병사로 옮겨놓았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 강문봉 장군을 만났다. 그는 1976년 10월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고 했다. 그가 1956년에 일어난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저격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강 장군은 해방 직후부터 76년 그 당시까지도 한국 정계와 군부를 배후에서 움직이던 미8군 사령관 고문 하우스만을 만난 것이 박정희를 저격하려했다는 혐의로 둔갑하여 구속된 것이었다. 중장으로 예편한 강 장군은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가 5·16 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대사로 기용되었고 유신 선포 뒤에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흘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매만 맞았다고 했다. 1977년 11월의 교도소 안의 바람은 벌써 겨울이었다. 대법원 형이 확정된 강 장군이 머리를 깎는 날이었다. 병사 작은 뒷마당의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강 장군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 앞을 전향한 좌익 무기수 몇 사람이 출역(出役)차 지나가다가 강 장군을 보고 "당신 강문봉 장군 아니시오.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지난 1957년 처음 강 장군이 구속되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났던 장기수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건강히 지내시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1977년 12월 28일 2년 7개월 만에 옥문을 나섰다. 아내와 동아투위의 여러 동료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아직 유신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탄압으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탕에는 월남패망과 주한미군 철수압박으로 불안해진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강문봉 장군과 하우스만의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구속되었을 때 나의 거처는 불광동 천관우 선생댁 부근 전세 집이었지만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청와대 바로 뒤 인왕산 기슭의 청운 아파트 10평짜리였다. 내가 없는 2년 7개월 동안 여섯 차례 삭월 셋방을 전전한 모양이었다. 연년생 어린 아이들이 딸렸다고 해서 삭월 셋방을 얻지 못해 고통을 겪은 얘기도 들려주었다. 생활비는 부산에서 한성여대 교수로 계시던 장모님이 감당하셨다. 또한 동아투위와 여러 민주인사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두 어린 것들 데리고 나의 재판정과 교도소 면회에 나다니면서도 근검절약해서 나의 출옥에 맞춰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없어야 우리 재산이 늘어나는 모양이라고 놀렸다. 동아투위는 1977년 송년회를 나의 출소를 환영하는 모임으로 삼아 많은 민주인사들을 초청, 민주화와 자유언론의 성취를 다짐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고마웠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청운아파트 새집에서는 두개 방을 하나로 터버린 넓은 방에서 백기완 선생, 고은 시인 그리고 많은 투위 동지들과 후배들이 함께 모여 나의 출소를 축하해주었다.
나. 10·24 민권일지 사건과 2차 투옥
동아투위의 동료들은 세가지 정도의 갈래로 나뉘어 생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처음 해직 당했을 때보다는, 복직이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유신체제가 끝날 때를 기다리자는 자세였다. 첫째, 적극적으로 자유언론운동을 촉발하기 위해 언론 내부에 영향을 미치고 '대화' 같은 월간지 등에 글을 싣거나 출판사를 세워 비판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하는 방향, 둘째, 민간기업에 취업해서 생계를 해결하되 언제라도 복직할 기회가 오면 복직하겠다는 방향, 셋째, 연구소 등에 취업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교수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방향 등이었다. 투위 동료들에 대한 유신 정권의 감시 통제는 해직 초기보다는 다소 완화된 것이기는 해도 언론계에만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전문 특수신문이나 주변부 주간신문 등을 제외하고는 주류언론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나의 경우는 택할 수 있는 길이 더 좁았다. 정권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 이상, 나는 국보법 반공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전과자였으므로 감시대상일 뿐 아니라 언제라도 재수감할 수 있는 사회안전법 대상이었다. 실제로 해당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사회안전법 대상자로 분류하여 수시로 호구조사를 나왔다. 나는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영미 소설, 사회과학 서적의 번역에 매달렸다. 당시 동아투위는 안종필 위원장을 중심으로 안성열 박종만 등이 제도언론에서 1년 동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는 사건들을 수집,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선언 4주년을 맞아 '10·24민주·인권일지' 발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빠져있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를 비롯해서 안성열 장윤환 윤할식 박종만 성유보 이기중 김종철 정연주 등 10명의 투위원들이 구속되는 '언론인 대거구속사건'이 일어났다. 주요 투위원들이 구속되고 상당수가 불구속 기소되었으므로 나로서도 달리 방관할 길이 없었다. 구속된 투위원들의 법정투쟁과 옥바라지, 가족들과의 연락 등을 떠맡게 되었다. 78년과 79년은 이렇게 눈코 뜰 새도 없이 지나갔다. 신문로로 옮긴 투위 사무실에서 구속된 투위원들에게 넣어줄 책 영치금 등을 가지고 서대문 구치소로 가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이쪽에 넣어준 책을 다시 받아서 저쪽에 넣어주는 일, 가족들의 어려운 일 상담 등이 일상 업무였다.
아직 다수의 투위원들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10·26 박정희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27일 새벽 4시 30분경 누군가로부터 박정희가 피살당했으니 우선 몸을 피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의 고난이 끝나는 것인가라는 희망을 가져보면서도 위기에 처한 집권세력이 어떤 선택을 할는지 알 수 없었다. 피신한 상태에서 사태추이를 관망하도록 했다. 이틀 동안 관망했지만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 없고 김재규 부장을 비롯한 중앙정보부 세력에 대한 거세조치들이 신속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0월말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최규하 권한대행을 새 대통령으로 다시 뽑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박정희 개인을 위한 유신체제였다면, 그 장본인이 사망했을 경우 그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민주체제를 구성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은 구체제를 그대로 이어갈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었다. 이름뿐인 야당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 1979년 10.26이후 이부영이 계엄포고령 위반사건의 재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이부영
제2기 유신대통령을 내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소리가 나와야 했다. 나는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동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그리고 제적학생들의 모임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 이름으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 저택에서 발표했다. 5개 단체의 대표 급 인사 18명이 계엄당국의 체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백낙청 이우정 김찬국 교수 등 나머지 인사 17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나는 보안사 서울분실로 넘겨졌다가 곧 서울구치소와 육군형무소(일명 남한산성)로 옮겨졌다. 그 사이에 신군부의 12·12반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의전실장인 박선호 예비역 해병대령을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10·26사건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어느 간부직원의 호의로 감독의 눈이 거의 없는 휴일에 그와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려고 한 까닭은 그가 김재규 부장의 측근이었으므로 동아투위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자 마자 그의 손을 맞잡고 "귀하들의 손이 역사를 바꿔놨다"고 치하했다. 그는 무인답게 호방했다. 1976년 김재규 건설부 장관이 중정부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안(懸案)으로 인계받은 것 가운데 동아투위 문제가 들어 있었으며 그 문서 속에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의 각서가 들어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중정 안가에서 박정희를 위한 술자리를 준비하는 업무를 책임졌던 그는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가수들을 불러 들였다고 했다. 그는 81년 5월 김재규와 함께 사형집행 당했다.
나는 수도경비사 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형 3년에 법정최고형인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육군고등군법회의 재판은 국방부 청사 경내의 군법정에서 받았지만 기각이었다. 바로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 때는 이미 12·12군사반란으로 신군부의 기세가 등등해서 분위기가 군부에 반대하는 우리 같은 정치범들에게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에는 나를 비롯해서 이른바 '통대반대 위장결혼식 사건'의 박종태, 양순직, 임채정, 최열, 홍성엽, 최민화 등이 모여 있었다. 임채정은 같은 동아투위원으로 나보다 조금 늦게 구속되었다. 이들은 전두환의 12·12신군부반란 직후 구속되는 바람에 훨씬 모진 고문을 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우리는 1980년 5.18계엄 확대조치와 광주학살사태를 맞았다. 소총에 착검한 군인들이 교도소 사동을 점거하고 교도관들을 대신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감방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앉혀놓고 일일이 감시했다. 일체의 언동도 못하게 만들었다. 6·25한국동란의 후퇴 와중에 대전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학살 사건이 떠올랐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였지만, 광주에서 시민군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민주인사들을 구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전에서도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이틀 정도 지난 뒤 군인들이 철수했다. 그해 여름 7월에 나는 홀로 대구교도소로 옮겨갔다. 대구교도소는 유신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반정부 정치범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우를 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아서 기피 1호 시설이었다.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시련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도록 하늘이 시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구교도소 2사 하의 독방에 갇혔다. 일반재소자들 뿐인 사동의 독방에 내가 왔으니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방의 맞은 편 방에는 70대 초반의 건강한 스님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 담당 교도관은 나에게 그 스님과는 일체 이야기를 하지 말고 지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고소 고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살인으로 무기수가 된 그 스님은 끊임없이 송사를 일으켜 교도소 당국이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스님이 운동을 나다니거나 세면장에 물 길러 나올 때나 반드시 나의 방을 기웃거리면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겸손히 응대했다. 가을이 짙어가는 어느 날, 1사 특별사동 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영 형, 나 서승이요. 창문으로 나와 보세요." 재일교포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 구속되어 수사 받다가 난로를 뒤집어써서 얼굴과 손 등 온 몸에 화상을 입고 10년째 징역을 살고 있던,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온 소식을 듣고 통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는 교무과에 나갈테니 나에게도 함께 교무과 연출(직원 면담요청)을 신청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노스님이 내가 빨갱이와 통방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통방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서 대답한 것이라고 해명, 해명해서 겨우 가라앉혔다. 그 스님은 모든 재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지만 완력이 젊은이 못지않아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생활했다. 승려였고 내연의 여인을 살해했고 그리고 모든 일에 공격적이고 고소를 일삼는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냥 먼 산 바라보듯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자 교도소 안이 웅성거리고 교도관들이 군복으로 갈아입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삼청교육 혹은 순화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는 예외 없이 교육을 이수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하고 있는 미전향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 11월말부터 12월말까지 한 달여 동안 나는 군대의 PT체조, 봉체조, 포복 등 군부대의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했다는 악명높은 폭력적 훈련을 받았다. 80년 겨울엔 대구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연병장에 눈이 내리면 눈을 쓸어 쌓았다. 쌓인 눈 더미는 흙과 잔돌들이 뒤섞인 채 젊은이 키 한 길 정도 높이로 연병장 군데군데 무더기를 이뤘다. 군대에서 나온 조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국보위 몽둥이를 휘둘렀다. "앞으로 포복,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포복" 장난감 다루듯 훈련생들을 부리다가 그들은 별안간 "포복 전진 앞으로, 눈 더미 굴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로 훈련생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려치는 몽둥이를 피하고자 눈 더미를 열 손가락으로 허우적거리면서 파헤쳤다. 그 순간 저쪽 눈 더미에서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면서 "에이 씨팔!!"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를 휘두르는 훈련조교를 노려봤다. 그 청년에게 몽둥이질을 하던 훈련조교는 전체 훈련생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그 청년의 옷을 팬티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벗겼다. 그 청년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잡도록 했다. 가는 지휘봉으로 그 생식기를 내려쳤다. 그 청년은 눈 녹은 진창 속에서 지렁이처럼 몸을 떨면서 꿈틀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청년은 기절했고 퉁퉁 부어오른 그의 생식기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 자신도 겁에 질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인간의 근본을 짓밟는 그런 야만행위에 항의 한 마디 못한 나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얼차려를 주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공포감을 불어넣는 이른바 기합을 준다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이런 짓을 수백 명의 공중 앞에서 자행한 것은 반듯이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런 삼청교육을 나는 이수했다. 그 순화교육을 이수했다고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시행된 특별사면으로 나는 대구교도소 문을 나섰다. 1년 4개월만의 출소였다. 아내와 동아투위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영접해주었다. 대구에서 탄 고속버스 안에서는 전두환의 취임연설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정의사회 구현'이런 말들이 전두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바로 며칠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실과 말의 괴리, 말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허공에 둥둥 떠 다니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박종철 고문사건과 6월 항쟁 10.10.19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③]
다. 민통련과 3차투옥, 박종철, 6월항쟁
나는 석방되자 말자 다시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당주동에 있는 고교 동기생의 음악출판사 한구석에 책상과 한글타이프라이터를 놓고 번역 일에 매달렸다. 한길사에서 부탁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론'과 두레 출판사가 의뢰한 해롤드 라스키의 '국가론'을 82년 중반까지 끝냈다. 역자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출판사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냈다.
내가 1975년부터 잇따라 투옥되는 동안에, 어린 두 아이는 벌써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이르렀다. 민주화운동에 매달려있던 나는 아이들 성장에 아비 노릇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키워가면서 가정을 지키는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금은 부산의 부경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당시 한성여대 가정과 교수로 재직 중이시던 장모님(박기숙)은 토요일 오후에 기차로 상경하셔서 일요일 저녁에 부산으로 가시는 일과를 계속하셨다. 아이들과 한나절 놀아주시려고 그러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원들의 계속적인 감시에 시달렸다. 그들도 항상 우리 아파트 앞에 서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1층인 우리 집을 바로 지척에서 건너다 볼 수 있는 담배 가게주인에게 부탁하여 감시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담배를 피울 때여서 담배 가게로 담배를 사러 가면 그 주인은 이유 모를 증오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그 집에 가서 담배를 샀다. 바로 옆 아파트에는 동아투위의 조양진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 나의 아들 딸과 같은 또래의 두 딸이 있었다. 두 집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잘 놀았다.
81년 말부터 우리 부부는 10평에 큰 방 하나 뿐인 청운 아파트가 두 아이와 살아가기엔 너무 좁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연탄을 사용하던 그 아파트는 본래 청와대 경호원들의 주거용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이미 청와대 직원들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다. 먼저 조양진이 강동구 길동의 삼익파크 아파트로 옮겼다. 24평형의 6층 남향으로 옮겼는데 주거환경이 좋다는 것이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선 듯 결정하지 못했다. 청운 아파트를 팔아도 새 아파트의 반값도 될 수 없었다. 우리도 조양진의 옆동 동향 24평형으로 정해서 옮겨 가기로 했다. 마침 삼익 파크 아파트의 건설사가 삼익건설이었는데 이창수 사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내 친구 김선우와 막역한 사이였고 나와도 잘 아는 처지여서,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미분양분 아파트를 청운 아파트 판 돈에 800만원 20년 장기할부주택부금을 보태 구입할 수 있었다. 82년 여름에 옮겨온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28년이나 살게 되었다. 지금도 이창수 사장에게 감사히 생각한다. 이 집에서 딸 근하와 아들 도균은 초·중고·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근하는 시집가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도균은 이제 배움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할 채비를 갖췄다.
길동 삼익파크로 옮겨와서도 정보기관원들의 감시는 이어졌다. 아파트 입구의 복덕방에 진을 치고 감시했다. 1985년 여름엔가 서울에서 세계은행(IBRD)총회가 열렸다. 그 총회를 저지하려는 시위를 우려한 전두환 정부는 주요 재야인사들을 가택연금하거나 지방으로 강제 여행시킨 일이 있었다. 강동 경찰서 정보형사 3인이 한 조가 되어 나를 끌고 승용차에 태워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충주호로 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수석광(壽石狂)이어서 나를 끌고 다니는 업무를 탐석(探石)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용차 트렁크에 무거운 돌을 지고 옮기는 도구들을 싣고 다녔다. 이른바 남한강의 검은 오석(烏石)을 수집하러 온 것이었다. 총회가 끝나는 사흘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다음 날에는 충주에서 강릉으로 달렸다. 낙산사 해안가로 가서 생선회도 시켜 먹었다. 고성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도 관광했다. 나를 핑계로 강산유람하자는 심산인 듯 했다. 호텔비, 식비, 승용차 연료비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독재정치를 하려면 정말 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기회를 봐서 빠져나갈까 궁리도 했지만 거의 매일 보고 살아야 하는 그들을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 못 된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1981년 초 두 번째 출옥한 이후의 삶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 사회 도처에는 광주 학살의 피 냄새가 배어났다. 학살자들은 밀리면 자신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폭력적 정책을 밀고 나갔다. 작가 한수산이 신문연재 소설이 문제 있다고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 여기저기서 공포정치의 흔적들이 과시됐다. 민주화운동 진영도 상황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우선 학생운동 지도자들로서 도피중인 장기표·심재권 등을 만나 그들을 돕고 다른 도피자들과의 연결도 시도했다. 독재정권 아래서도 비교적 안전지대로 여겨지던 개신교 천주교계와도 접촉했다. 특히 광주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던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만나 뵙고 김지하·박재일·이창복과는 만나 전반적 상황을 점검했다. 원주에서는 이창복 선생을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도록 합의해 주었다. 1983년에는 야당의 양축의 한 사람인 김영삼 씨가 정치범 석방과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면서 23일 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장기표와 나는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양김 공동성명을 내도록 추진했다. 문익환 목사와 안병무 교수를 움직였다. 이른바 동교동계 쪽에서는 아무 투쟁도 하지 않았던 YS 측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른바 YS-DJ 양측의 미래의 분열을 미리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공동성명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1983년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8·15 양김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 성명은 그 후 이른바 유화국면을 만들어내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 성명의 파급은 이어져서 동교동·상도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그 이듬해 결성했고 재야에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결성되었다. 민민협의 공동대표에는 천주교의 김승훈 신부, 개신교의 김동완 목사 그리고 재야의 내가 맡았다. 구성 부분에는 천주교 개신교 문화예술계 언론계 노동 농민 청년 등이 합류했다. 민민협의 구성 부분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부분은 김근태가 의장을 맡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함께 한 것이었다.
민민협은 1985년 2.12총선에서 민추협을 기반으로 김영삼·김상현을 중심으로 탄생한 선명야당 신민당을 지원했다. 민정당과 둘러리 야당인 민한당 후보들을 공격하는 유인물을 대량 제작하여 해당 지역들에서 살포했다. 선거 결과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정권은 당황했지만 다시 강공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민민협은 70~80년대에 등장한 수많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고 주로 부문 조직운동의 활동가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런 흐름은 광주학살 이후 민주화운동 전반에 나타난, 조직 중심이 아니면 군부의 탄압을 견디어낼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탄압이 가해질 경우, 공개운동 조직으로서 대단히 취약한 방어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들이 활동가들과 결합하여 민주화운동을 벌여 나가야 방어력도 있고 폭발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따라 장기표·이창복이 문익환·계훈제·백기완 등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민주통일국민회의를 1984년 연말에 창립했다. 이런 흐름은 어차피 민민협과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12총선 이후 강화되는 전두환 정권의 공안탄압도 두 단체 통합의 당위성을 뒷받침했다. 여기에는 80년대 내내 불붙었던 시민민주주의(CD)-민족민주주의(ND)-민중민주주의(PD) 논쟁, 이른바 사회구성체론에서의 CNP논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끈질긴 이 논쟁은 지금의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는 것으로 대략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개 조직의 통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탄생했다.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백기완 선생이 나서시고 나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상임위원장에 이창복, 정책실장에 장기표가 나섰다. 그러나 운동의 핵심인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다. 그것은 큰 흠결이자 약점이 되었다.
▲ 1985년 12월 9일 민통련 제2차 중앙위언회를 마치고 간부진이 함께 했다. ⓒ이부영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어도 민통련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부문과 지역을 아우르는 최대의 재야 민주화운동단체가 탄생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신민당의 등장과 더불어 범야권도 1980년의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학살 이후 최초로 전열을 정비하고 전두환 집단과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1983년 이후 유화국면에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집단 시위를 제외하고는 재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구류로 대응했다. 나는 1975년부터 86년말 세 번째 구속당하기 전까지 12차례의 구류처분을 당했는데 10차례가 84년부터 86년초까지였다. 구류 기간은 일주일에서 30일까지 다양했다. 20일이나 30일 구류처분에 대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1주일 만에 석방됐다. 1주일 구류 사는 것을 우리는 격무 중에 1주일 휴가 간다고 했다. 정식재판으로 쌓인 잔형(殘刑)은 정식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으면 거기에 얹어서 살고 나와야 했다.
민민협과 민통련의 등장과 궤를 함께 해서 민주언론운동도 기지개를 켰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송건호 선생을 의장으로 모시고 만들어졌다. 동아·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들이 주요구성 멤버들이었다. 동투의 윤활식 성유보 박종만, 조투의 신홍범, 80년 해직언론인 가운데 김태홍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통련에도 동투의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등이 참여했다. 민언협에서는 독자적으로 '말'지를 냈고 거기에 발표된 5공 정권의 '보도지침'사건으로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이 구속되었다.
신민당은 국회에서 간선제 대통령제를 직선제로 개헌을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전두환은 호헌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국의 양상은 한 순간에 호헌 대 직선제 개헌으로 바뀌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민정당 측과 협상에서 내각제를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양김 측은 즉각 신민당으로부터 탈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민우 체제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야권의 친구 정치인으로부터 전두환의 청와대 정무수석 허문도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다. 원주의 김지하 시인으로부터도 보안사의 처장급 인사가 찾아와서 나를 비롯한 민통련의 몇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고 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허문도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의 의도, 즉 직선제 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민통련 같은 재야단체에 대해 탄압을 하지 않고 공존할 의사가 있는지 등을 타진해볼 생각이었다. 강남의 조그만 카페 양주 집이었다. 두 사람만 마주 앉았다. 조선일보 출신인 허 수석의 성향은 조선투위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고 81년의 '국풍'행사 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수로 나왔다. "민통련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험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일방적인 협박이었다. 서울에서도 광주 같은 일을 겪어내지 않으려면 소수의 희생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 마시면서 김지하 시인의 건강 이야기, 문화 부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이미 저들은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을 남영동에 끌고가서 살인적인 고문을 했다는 것이 공개되어 있었다.
▲ 1986년초 민통련의 사무처장이었던 이부영이 집회장에서 연행되고 있다. ⓒ이부영
1986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통일민주당·민통련의 범야권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놓고 일대 공방에 돌입했다. 1986년 봄 마산을 기점으로 시작된 통일민주당의 개헌현판식은 야당과 민통련이 함께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이는 마당이 됐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개헌현판식에 민통련의 박계동 조직국장은 민첩하게 지방의 재야단체들을 연계하고 홍보물을 배포하여 정보기관으로부터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을 비롯해서 야당과 재야세력을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 경찰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최루탄을 무차별로 쐈다. 각 대학들에서도 80년대 초에 활성화된 학생회가 직선으로 총학생회장을 선출, 대규모의 학생시위대를 동원하게 되었다. 각 대학에서는 총학생회장이 구심점이 되어 자연스럽게 연합시위로 발전시켰다. 노학연대, 농학연대 시위가 이뤄지기도 했다. 야당과 민통련의 직선제 투쟁은 바로 학생들과의 연대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던 PD(민중민주)계열의 노동운동이 직선제 개헌운동에서 급진적 '노동해방의 기치'를 들어 올리면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운동을 이념적으로 몰아세울 구실을 찾게 되었다. 직선제 개헌보다 노동해방 기치를 자극적으로 앞세운 예가 5·3인천개헌현판식이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거리시위로 현판식은 무산되었고 민통련 간부들은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배 당했으며 민통련은 해산명령을 받아 기능이 정지상태에 빠졌다. 나도 수배 당했다. 서울의 개헌현판식이라는 대회전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인천대회를 과격화하도록 방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대회 막을 구실을 인천에서 만들었다는 추론이었다. 나는 김정남의 주선으로 고영구 변호사 댁에 피신하고 있었다. 이미 나를 비롯한 민통련 간부들은 마산대회 이후 수배 상태에 놓여 있었다. 대전대회 때는 현장에 나가 대회 진행 상황을 살피다가 당시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이던 이해구씨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도 상황을 살피러 나왔던 모양이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마주쳤으므로 순간적으로 서로 외면하고 헤어졌다. 뒷날 국회의원이 되어 다시 만나 당시 얘기를 하면서 웃고 넘어간 일이 있다.
1986년 가을에 접어들어 건국대 사태가 벌어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1천5백명이 넘는 학생들을 검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통일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어야 한다'고 원내발언을 한 유성환 국회의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나도 민통련의 활동 재개를 위해 수배 중에도 지원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잡혀갔다. 당시 내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고영구 변호사댁은 노모가 80여세로 노환을 앓고 계셨고 부인 황국자 여사도 위경련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고 변호사가 나 때문에 구속되기라도 하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었다. 김정남과 이 문제를 상의한 결과 그는 이돈명 변호사에게 이부영이 이 변호사님 댁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씀드려 그리 하도록 하자는 동의를 얻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계셨다. 그 직책은 교황청 직속의 공식기관이었으므로 이 변호사를 녹록히 대하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상의 범인은닉 혐의로 이변호사를 구속했다. 이미 60대 중반에 이르신 이 변호사의 구속사태에 직면해서 나에게는 자신의 구속은 관심 밖이었다. 고 변호사는 어떠했겠는가. 홍성우, 황인철, 고영구, 김정남 등 제씨들이 만난 자리에서 김정남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후회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1986년 겨울 내내 고영구 변호사는 불 때지 않은 냉방에서 지냈다고 했다. 이 변호사님은 민주화운동을 위해 일하던 사람을 숨겨주었다는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변호사로서 당신 댁에 머물지도 않았던 내가 머물렀다고 '거짓 진술'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적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징역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번 징역살이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이 곧 판명되었다. 뒤에 김정남은 내가 영등포교도소에 갇힌 것을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신의 오묘한 손길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1987년 1월 17일 자정 쯤, 내가 갇혀있던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두 명의 경찰관이 수감되었다. 그 사동은 본래 여재소자들을 수용하려고 담 안에 다시 담을 쌓아 지은 격리사동으로서 당시에는 여재소자들을 다른 교도소로 옮기고 출역하는 일부 모범수들과 나를 그곳에 수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모범수들이 출역하고 나면 나와 그 두 경찰관들만 담당 교도관들의 감시 속에 남아 있었다. 이틀째에 그들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하여 죽인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밖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고문살인 사건에 대해서 항의, 농성, 단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월 3일의 49재에 맞춰 나도 20일 간의 항의단식을 시작했다. 나는 창살을 통해 조한경, 강진규 두 경찰관들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입니다. 저 세상으로 간 박종철 군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어 줍시다"라고 권했다. 그들은 곧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한경 경위는 밤새도록 찬송가를 불렀으며 젊은 강진규 경사는 밤늦도록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토요일 늦은 시간에 한정해 가족면회가 허용됐던 두 사람은 몹시 괴로워했고 특히 강진규 경사의 부친은 "네가 정말 사람을 고문해 죽였느냐"고 확인했다는 사실을 내 사동에 들어온 어느 교도관이 알려주었다. 나는 일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하고 70년대부터 친분을 쌓았던 안유 보안계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안 계장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세상에 이럴 수 있습니까. 지난 며칠 사이에 두 경찰관을 남영동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치안감과 간부 몇 사람이 몇 차례 특별면회 하고 갔는데, 두 경찰관이 자기들에게 모든 혐의를 지고 가라는 것에 강하게 항의하더군요."라고 말했다. 몇 차례 특별면회에서 있었던 두 경찰관들의 항의와 상관들의 회유·협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두 사람 이외에 주요 고문 담당자 세 명이 더 있다는 것, 조한경 강진규는 심문실 안에 함께 있었지만 주심문관이 아니었다는 것, 두 사람이 이대로 혐의를 인정하고 재판을 받을 경우 각각 1억 원씩 입금된 통장으로 가족들과 본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자기들만 고문 살인자의 오명을 지고 처벌받을 수 없으며 자식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처원 단장과 간부들은 "빨갱이 하나 죽인 것 가지고 무얼 그렇게 고민하나"라고 회유하면서 조직의 결정을 배신할 경우 징역을 다 살고 나오더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만남은 그렇게 결렬됐다는 것이었다. 안 계장은 정말 분노하고 있었다.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와의 얘기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것은 뒷일을 위한 내 나름의 예방조치였다. 내가 사태를 전반적으로 파악한 며칠 뒤, 담당 부장검사와 검사도 두 경찰관을 교도소 안에서 있었던 검찰 신문에서 회유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성기 법무장관이 야간에 영등포교도소를 불시에 방문하여 보안을 철저히 당부했고 곧 두 경찰관은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됐다.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폭로 이부영 메모 첫공개 ⓒ이부영
나는 나와는 70년대의 서울구치소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인 한재동을 다른 교도관을 통해 불렀다. 그리고 이른 시일 안에 야간 당직 교대근무로 들어오도록 부탁했다. 이틀 뒤 한재동이 야간에 들어왔다. 그에게 대강의 사태를 이야기하고 심각성을 인식시켰다. 그는 나에게 볼펜심을 건넸고 나는 누런 갱지로 된 교도소 화장지에 전말을 적어 나갔다. "友村 보게..."로 시작되는 김정남에게 보내는, 감옥 밖으로 날리는 비둘기(비밀 서신)가 작성됐다. 이 서신은 장기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던 전직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역시 도피 중이던 김정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그 뒤 추가 취재된 내용이 있어서 다시 한재동을 불렀더니 아직 이전의 비둘기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병용도 도피 중이어서 만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한재동이 다시 찾아왔다. 문제의 서신 3통을 동시에 전병용에게 전했는데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전달한 이틀 뒤에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서신 내용이 수사기관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를 생각하자 식은 땀이 저절로 났다. 서신 내용은 김정남이 정리하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었고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린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사태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6월에 접어들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고문경찰관 3명이 추가로 구속되었고 박처원 대공수사단장과 강민창 치안국장이 구속되었으며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장관 등이 문책 경질되었다.
국민의 저항에 부닥친 전두환 정권은 다시 쿠데타로 대응하려는 듯했지만 그럴 경우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참극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 예상되어 집권세력 안에서 반대에 부닥치자 타협노선으로 선회했다. 그것이 6·29선언이었다. 나는 6월 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영등포교도소 안에서 초조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항쟁이 전두환에 의해 분쇄되어 정보의 역추적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항쟁이 6월 중순을 넘기면서 전국적 수준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했다.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도 특종기사를 써봤지만 이번 경우처럼 목숨이 걸린 특종기사를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당시 아직 언론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대 최대의 특종기사를 쓴 셈이었다. 죄 없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두환 정권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취재하고 알렸지만, 막상 전두환 정권이 그 사태를 계기로 어떤 형식으로든지 물러나게 되자 군부독재 이후의 과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박 군 사건 전말을 밝히는 여러 계기에 안유 계장의 공로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그 뒤 교정계의 고위직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나는 그가 그 일 때문에 직장생활에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최근 영등포교도소의 현직 교도관 황용희 씨의 수기 '가시울타리의 증언'에 최초로 안유 계장의 역사적 기여, 그리고 그의 공분(公憤)의 의미를 밝혔다. 나는 공무원도 영혼이 있는 사람, 공분을 느끼는 시민이 되어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야권 통합의 실패와 정치 역정 10.10.26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⑤]
4. 정치 참여
한겨레신문은 민주화운동 진영과 특히 진보진영의 기대를 모으면서 한국 언론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언론의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거의 다를 것 없는 신문·방송 중에서 민주와 진보를 당당히 내세우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87년 민주항쟁의 거의 유일한 성과로 치부될 수 있었다.
한겨레의 존재 자체가 우리 동아투위의 분신처럼 여겨졌고 우리 언론의 희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더 이상 언론계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진 듯 보였다. 재야민주화운동의 경우도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이 자리 잡아갔고,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선택된 정부를 상대로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투쟁하듯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88서울올림픽을 치른 뒤, 러시아·중국과의 수교 그리고 남북의 유엔동시가입도 성취시켰고 남북 간의 기본합의서에도 합의했다. 아직도 남북분단체제의 대결구도는 해소되지 않고 있었지만, 탈냉전·탈이념을 지향하는 세계의 흐름이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세계의 이런 변화를 외면하고 자행되던 한반도안의 남북독재체제가 시대착오적이었다면, 80년대의 반독재운동 시기에 민주화운동 진영에 나타났던 20세기 초기의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 혁명론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서냉전의 해빙을 견디지 못해 남한의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있는데 그에 대응하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20세기 초기의 급진 사회주의 혁명론이 비등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으며 사회 사상가들의 통절한 반성거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회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독재정치와 재벌독점 경제가 지배해오면서 심화된 빈부격차와 복지의 부재는 진보정치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이 1987년 민주항쟁으로 가져왔어야 할 정치적 변화는 진보정치 세력의 공개적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치에는 이미 1950년대에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실험과 4월 민주혁명 이후의 진보정당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5·16군사 쿠데타로 좌절당했거나 지하활동을 강요당했다. 1990년대 초에는 1992년의 14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 세력의 진출을 위한 모색이 당연히 일어났다.
가. 야권통합과 지도부 참여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합당, 즉 거대 민주자유당의 출현은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거대 보수여당은 야당을 호남에 가두고 민주화운동과 진보진영까지 호남세력 내지 친호남세력으로 몰아 철저한 지역분할구도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태우 정권은 스스로 북방정책이라고 해서 러시아·중국과 수교하고 북한과도 함께 유엔가입하면서 민주화운동 세력과 진보세력을 색깔론을 이용, 공안탄압하려 했다. 분열된 야권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탄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난날처럼 다시 공안탄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가 있고 상투적이랄 수 있는 야권통합론이 제기됐다.
▲ 1990년 초겨울 이부영이 사찰번호 1번을 달고 보안사민간인사찰규탄과 군정청산국민대회에서 지선스님 및 노무현의원과 함께 단상에 앉아있다. ⓒ이부영
김대중의 평민당과,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은 이기택의 작은 민주당과의 통합이 그것이었다. 진보정당을 추진하던 민중정당 추진위원회 측은 중요한 계기 때마다 분열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독재세력에게 반전의 기회만 제공해온 야당 세력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진보정당 추진 세력도 내부의 노선 갈등으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치에 참여하려는 재야민주화 세력은 우선 약체의 이기택 민주당에 합류하여 그 정당의 외형을 큰 규모로 만든 다음 평민당과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이기택 박찬종 이철 노무현 김광일 홍사덕 김정길 장기욱 등 대부분 영남출신의 스타 국회의원들로 이루어진 이기택의 민주당은 규모는 작었어도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재야세력과 먼저 통합하여 규모를 키운 다음 평민당과 통합하면 거대여당이 그 세력을 호남당으로 몰아세우는 데는 설득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민주당 측에서 내가, 평민당 측에서 한광옥이 나서서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에, 김대중 법적 대표 등록안에 합의함으로써 야권통합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거대 민자당에 대항해서 1992년에 있을 14대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준비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공안탄압에도 범야권이 공동대응 할 수 있게 되었다.
▲ 1991년 연말 야권통합 성사 뒤, 이부영이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와 함께 회동하고 있다. ⓒ이부영
나는 통합민주당의 부총재로 취임하여 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천심사위원으로서 재야세력의 공천을 유리하게 이끄는 소임을 맡았다. 이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기택 총재를 비롯해서 노무현 김정길 등 부산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의 선택을 가장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자당의 독식구도에서 야권통합을 안 해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게 생긴 상황에서 통합을 하고 떨어지는 것이 명분이 있다고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야권통합으로 탄생한 통합민주당 덕택에 야권은 총선에서 약진을 보였지만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했다.
나.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및 통합민주당의 소멸
대선패배와 DJ의 정계은퇴는 통합민주당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DJ 없는 민주당, DJ 없는 호남민심은 사공 잃은 나룻배와 같았다. 71년, 87년, 92년 세 차례 대선에서 낙선한 DJ로서는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양김 분열에 따른 패배와 민주세력의 분열, 그리고 잇따른 92년 패배는 DJ로 하여금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동지이자 정적인 YS의 승리로 DJ에 대한 정치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DJ의 후퇴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정계은퇴 선언과 영국체류의 방안이 나왔다. 그것은 일시적 정치망명이었다.
그러나 DJ의 정계은퇴는 민주당의 혼란, 야당의 존재감 약화와 리더십 부재로 이어졌고 YS와 민자당의 오만을 불러왔다. 역설적으로 DJ의 복귀조건을 더욱 강화하는 꼴이었다. 호남세력이 압도적인 민주당에서 DJ의 동교동계는 역설적으로 이기택 대표 체제를 유지시켰다.
DJ의 후계구도를 이기택으로 정한다는 것은 DJ지지 세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택 지도체제는 DJ 없는 야당의 차기지도자를 꿈꾸던 김상현 정대철 등의 부상을 억제하는 임시체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1995 7월 이부영이 이기택 김원기 노무현 강창성 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등과 함께 민주당 지키기를 다짐하고 있다. ⓒ이부영
영국에서 귀국한 DJ는 민주당 분당의 수순을 밟아갔다. 95년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지지 세력의 결집을 시작한 DJ는 지역등권론(호남지역 차별을 배격하는, 달리 말하면 호남 지지세력의 결집을 공식화하는)을 내세우면서 민주당을 분당시켰다. 95년에 분당된 민주당은 무력화되었고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DJ 세력만으로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국민회의는 빠른 속도로 민주당을 분해시켰다. 15대 총선에서 지역구 비례대표 합쳐 16석을 얻은 민주당은 이기택계와 통추세력으로 양분되었지만 김원기를 중심으로 하는 통추세력은 97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국민회의 쪽으로 기울어갔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안에는 정권교체론(국민회의 합류론)과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론(국민회의 합류거부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수파를 형성한 국민회의 합류파는 김원기 노무현을 주축으로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나와 제정구 이철 박계동 김원웅 등 소수파인 삼김정치 지역주의 극복론자들은 97년 대선에 임박해서 선택을 강요당하다가 마지막 순간 DJP연합 보다는 이회창-조순 연합이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의 대의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체인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이로써 삼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 보고자했던 통합민주당과 국민통합추진회의의 정치실험은 분해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오랜 세월 회한으로 남는 일은 이 때 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정계를 떠나 시민운동에 전념하거나, 내부 충전을 위해 뒤늦게나마 공부를 더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했던 동료 후배들을 내버려둔 채 나 홀로 길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나의 입장이기도 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딱한 처지는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볼 따름이지 더 먼 미래를 내다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도리였다.
다. 한나라당 입당, 지도부 역할과 대선후보경선 참여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DJP연합 형성을 구체화해가자 신한국당의 이회창도 민주당의 조순과의 연합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홍성우를 물리치고 총재에 당선된 이기택은 당이 침몰해가자 서울 시장이었다가 DJ와 결별한 조순을 한나라당 총재로 영입했다. DJP연합에 대해서 통추의 일부 세력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주장 앞에 자신들의 주장을 접었다. 국민회의 합류 거부파에게는 DJP연합의 등장이 국민회의 합류를 하지 않을 명분을 제공했다. DJ-JP가 지역주의 보스에다가 부패정치인이어서 이회창-조순 연합이 오히려 지역주의나 부패의 원죄가 없다는 점에서 더 명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회창은 내가 통합민주당에 있으면서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이후 그를 민주당으로 영입하려고 접촉했을 당시 꽤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의식의 일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감사원장이었을 당시, 나는 91년의 남북총리고위급회담에서 벌어진 대통령훈령조작사건을 93년 국회에서 밝히고 그로 하여금 안기부를 최초로 감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넘겨줬고 그는 원칙대로 감사해서 남북고위급회담대표 특보이자 안기부장 특보인 이동복을 해임 조치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97년에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JP를 총리에 지명했으나 원내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한나라당은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패배했으면 승자로 하여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총리인준을 하루 속히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나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DJ정권은 야당의원 36명을 여당으로 이적시켰다. 야당을 설득하거나 대화하지 않고 비리 캐기, 협박 등으로 의원들을 끌어갔다. 뒤에 무죄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사정의 대상이 되었다. DJ정권은 DJP연합의 우당인 자민련에게 3명의 의원을 꿔주어서 교섭단체를 구성토록 해주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붕괴위기에 처해 우왕좌왕했다. 겁이 나서 투쟁에 나서는 인사들이 없었다. 이회창은 나에게 당을 지켜달라면서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회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나라당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한 것도 졸렬한 짓이었지만, 그렇다고 야당의원을 대거 여당으로 끌어가고 자당의원을 우당에게 대여해주는 집권당의 행위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3김은 분명히 민주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야당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자 야당의원 빼가기는 멈췄고 JP총리인준은 98년 8월에야 이루어졌다.
이회창은 1999년 초 나에게 원내총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내에는 이미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박희태를 비롯, 3선 이상의 다선 의원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일부 재선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나서려는 의원들이 없었다. 의원들에 대한 사정 위협이 계속되니 표적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다음해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벌이게 될 선거법 협상이 야당 총무의 어깨에 지워진 가장 큰 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원 36명을 여당에 빼앗기고도 아직 제1당의 지위는 겨우 유지하고 있기는 했어도 다음 총선에서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대응하다가는 얼마만큼 추락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경압박을 일상적으로 가해오는 DJ정권에 대응하는 일도, 더구나 시대의 흐름과는 담을 쌓고 강경보수의 본색을 조금도 바꾸려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주류를 설득하는 일도, 16대 총선을 앞두고 닥치게 될 선거법 협상과 공천문제도 모두 나에게는 원내총무를 맡을 경우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이었다.
▲ 1999년 2월초 박준규 국회의장이 이부영 한나라당 총무 그리고 손세일 국민회의 및 강창희 자민련총무의 회담을 주선하고 있다. ⓒ이부영
나는 연초의 국회 휴회기간에 예정됐던 미국후원회 방문 일정에 나섰다. 이회창은 미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총무경선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응했다. 그는 지난해 야당파괴저지 투쟁 당시 나의 활동에 감사하다면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제1당을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힘든 협상과정에서 여당의 총무 손세일, 한화갑, 박상천 세 사람을 상대해 협상해야했다. 물론 이회창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했어도 홍성우 변호사를 총선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하고 윤여준과 내가 참여한 공천은 김윤환 이기택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파란을 불러 일으켰고 선거법 협상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는 16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야당파괴에서 살아났고 16대 총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은 차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된 나는 이회창의 보수색채 강화에 제동을 자주 걸고 개혁노선을 강조했다. 2000년 DJ정부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난 비방을 퍼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점진적 대북자세전환을 요구했다. 물론 16대 총선 직전에 DJ정권이 정상회담 일정을 미리 발표함으로써 선거에 남북관계를 이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었다. 유권자들도 통일 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여 선거 결과에 전혀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남북관계 통일문제 등에 내가 전향적인 주장을 펴자 민정계를 비롯한 보수파 중진들은 "빨갱이 아니냐, 당을 떠나라"라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 2001년 한나라당의 이부영 김덕룡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의 김상현 김원기 정대철 김근태 이창복 등이 함세웅 신부와 법륜스님 등과 함께 지역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와전진포럼을 결성했다. ⓒ이부영
나는 점차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정치세력의 중심부가 그 같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북관계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사회 내부의 화해 공존도 심각한 장애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97년 IMF외환위기의 발생과정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은 패배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인 노동자 농민들의 고통, 기업구조조정에서의 무리와 부정부패, 선거를 앞두고 경기부양을 위해 남발된 신용카드로 인한 위기와 그에 따른 신용불량자들의 양산과 가계위기 등에 대해 한나라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DJ정권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만 매달리면서 국민들의 경제적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우리지 못했다.
▲ 2002년 이부영이 한나라당 대선후보경선에 나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이부영
나는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이회창의 압도적 우위에 맞서 나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거나 변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라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회창은 주류론, 즉 DJ정권 등장으로 정권을 빼앗긴 한국 사회의 주류 즉 영남중심의 전통적 보수세력이 다시 복귀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나는 남북화해와 민주개혁을 내세우는 세력이 한나라당의 주류가 되어야 탈냉전시대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한나라당이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신주류론'을 내세워 투쟁했다. 결과는 이회창, 최병렬에 이어 3위, 15%의 득표에 그치는 완패였다. 나의 경선캠프 안에서는 15%의 득표도 적지 않은 것이라는 위로의 말도 있었지만, 자갈밭에 모심기라고 자학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운동 막바지까지 미군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을 위한 집회, 농산물개방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항의운동에 한나라당 후보가 관심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강경보수 일변도의 그의 행보를 가능한대로 중도보수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고통당하고 있던 국민 곁으로 다가감으로써 득표에 도움을 주게 할 뿐 아니라 선거 이후에 승패에 관계없이 한나라당의 노선을 중도보수노선으로 이끌어 보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미군장갑차 희생 여중생을 위한 추모농성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지자들 속에서 알레르기 비난 반응이 일어났다. 그 방문을 주선한 나와 박계동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이 같은 퇴영적 자세로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다시 이회창의 패배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에서는 나와 개혁파 의원들에 대한 수구 보수파의 색깔론 공세가 강화되었다. 최병렬 김용갑 정창화 이상배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지난 5년간 한나라당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헛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년 말 거의 같은 시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던 제정구의원이 99년 초에 세상을 등졌다. 그가 있어 한나라당의 변화 노력을 함께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주 생각했다. 그래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 일하면서 보람으로 기억되는 일은 1999년에 '제주 4.3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여야합의로 성사시킨 일이었다. 제주도민들과 당시 한나라당 소속 3명의 국회의원 양정규 현경대 변정일이 찬성했고 정부여당이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당론을 어렵사리 동의 쪽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4.3특별법은 그 후 과거사법 입법의 효시가 되었다.
라. 한나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민주당에서도 DJ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낡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서 벗어나 국민통합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당의 짙은 DJ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듯 했다. 나를 비롯한 한나라당 안의 개혁세력도 그 같은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 형성을 시도했지만 대다수 의원들은 "당을 떠난다"라는 결단에는 거의 움츠러들었다. 거기에는 '야당을 버리고 여당으로 옮긴다'는, '음지를 떠나 양지로 옮긴다'는 엉뚱한 여론의 부담감이 작용했다. 최종적으로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등 의원 5명이 결단했다. 이 5명이 먼저 한나라당을 떠나 벌판에 나서서 결단을 못하고 있던 민주당 안의 새 세력을 이끌어 내기로 했다. 언론은 우리 다섯 사람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정당이 열린우리당이었다. 96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분당으로 공중분해된 통합민주당의 후신이 다시 살아난 듯 했다. 그러나 나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낙선할 것이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정치와 금권보스정치를 넘어서는 정당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오랜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세우고 그 후보로 나섰던 것이다.
▲ 2003년 7월 7일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등 5의원이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내세우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부영
이 선택에 대해서도 나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했다. 과연 그 같은 정치행보는 정치발전에 기여했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왔는가, 뒤에도 두고두고 생각하는 주제가 되었다.
양김의 분열, 민주화운동의 분열 10.10.21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④]
라. 6월 항쟁, 양김분열, 4·5차 투옥과 전민련
나는 노태우의 6.29선언이 있은 지 하루 뒤인 6월 30일 경상북도 김천시의 소년교도소로 이감 갔다. 그곳은 만 19세 이하의 청소년들만 수용하는 곳인데 45세가 된 나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곳에 가보니 학생들 30여명이 이미 와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도 거의 20대 중후반에 이른 성년들이었다.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수용된 것을 보니 전국 곳곳의 교도소에 정치범들이 일정한 숫자 이상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29 이후 교도소 안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고 있었다. 이른바 TK지방의 감옥인데도 교도관들은 태도가 온순해지고 아침마다 신문을 슬쩍 보도록 해주기도 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머지않아 풀려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7,80년대 초의 학생운동 출신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성향이 80년대 중후반의 수감학생들에게서 보였다. 졸업 후나 재학도중에 다수의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취업했거나 노학연대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된 것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의 분명한 흐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른바 민족해방(NL)노선과 민중민주(PD)노선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식사 시간 이외에 토론시간을 가졌는데 점차 노선이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나는 어느 입장을 지지하기 보다는 듣는 쪽이었다. 이 문제가 앞으로 심각한 양상을 보일지 모르겠다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 1987년 6월항쟁의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군의 영결식 ⓒ이부영
7월 중순께 대폭적인 정치범 석방조치가 취해졌다. 김천교도소에서도 대다수 청년들이 나가고 남은 사람은 나와 몇몇 30대의 노동운동 출신 청년들뿐이었다. 전두환 세력은 정치범 석방에 있어서도 철저히 공작적 접근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장기표 김근태 그리고 나와 같이 재야의 조직들을 활동적으로 관리하고 이끌어갈 사람들은 내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집단은 직선제 개헌에 관해서만 양김 세력과 협상을 하되,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제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뽑던 5공의 권력구조를 5년 단임의 직선제 대통령으로 바꾼 것 말고는 독재헌법의 흔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87년 체제'에 전두환 집단과 양김세력은 합의했다. 그리고 양김세력은 분열로 치달았다. 그해 연말 대통령 선거는 신군부 측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4자대결로 치뤄졌다.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다. 양김의 분열로 1987년 12월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과정을, 양김이 분열되는 것과 동시에 몇 개월 동안 지켜본 김천교도소의 청년활동가들은 미친 듯이 분노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주먹으로 시멘트벽을 쳐서 손등의 살 껍질이 벗겨지기도 했다. 나는 남아있던 젊은 노동운동가 몇 사람과 함께 1988년 3월 3일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감옥 문을 나서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힘없이 풀려있었다.
87년 대선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1)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뤄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YS-DJ 진영으로 분열했다. 그리하여 급진파를 제어할 힘을 잃었다.
2)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 세력의 주요 보루인 영남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3) 70, 80년대 동안 제도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되었다.
4) 군부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졌고 냉전시대의 해빙으로 한국정치에서 이념대립지형이 신속히 이완되었다.
80년의 광주학살이 있은 후, 81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던 나는 88년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다시 세 번째로 풀려났다. 당시 많은 국민들이 그랬듯이 나는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DJ-YS의 적전 분열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이 적전 분열을 해방 후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이승만의 결정에 비유한 김상현의 견해는 탁월했다. 한국사회의 질적 변혁의 기회를 상실케 한 점에서는 두 경우가 같다고 본 것이다. 87년 대선에서 DJ-YS-재야의 연합민주세력이 집권했을 경우, 해방 후, 4.19혁명 후 이루지 못하고 유예되어왔던 민주주의 개혁과 남북관계개선이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을 것이다.
87년 대선 패배 뒤에 학계 언론계 지식인 사회에서 그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대선 이후에도 전혀 반성 없이 정계의 강자로 군림하던 YS·DJ에게 위압당했거나 그들도 함께 분열의 당사자들이어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노태우의 취임 특별사면으로 내가 풀려나오던 즈음에, 정권교체에 실패한 것에 분노한 청년학생 노동자들의 항의·분신이 잇따라 일어났다. 3월 하순 영하 10도의 차가운 날씨에 서울 종로구 경희궁 공원에서는 고려대생 유병진군의 장례식이 있었다. 방금 출소한 나에게 장례위원장 소임을 맡겼다. 4월 초로 다가온 총선을 대비해서 분신자결한 대학생의 장례식장에 김대중·김영삼씨가 재야인사들과 함께 참례하고 있었다. 나는 자신들의 분열로 군부독재의 후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것 때문에 학생.노동자들이 분신자결했는데 무슨 염치로 그 장례식장들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에 닥친 국회의원 선거가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 장례식장에 나타나는 것은 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추도사에서 비록 양김 씨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서운할는지 몰라도 나의 그런 솔직한 심경을 말했다. 그 때 양김 씨가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1988년 4월 13대 총선이 벌어졌다. 전국은 철저히 시루떡 네 조각처럼 분할됐다. 군부독재 시대가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지역분할구도로 재편된 것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국구도를 교묘하게 호남-비호남 대결구도로 몰아갔다. 민주화운동 세력을 호남우호 세력으로, 통일지향 세력을 친 호남세력으로 몰아갔다. 오늘날까지도 극우보수 세력의 그런 악의적 분열책동은 변치 않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1987년의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분열은 역사적 배신행위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양김 분열로 인한 영남 민주화운동 세력의 위축 때문에 김영삼의 노태우·김종필과의 연합이 호남고립화 기도로 이어지리라는 전망은 87년의 양김 분열에 이미 잉태되어 있었던 요인이었다.
▲ 1988년 3월 3일 노태우취임 특별사면으로 김천교도소에서 풀려나오는 이부영 ⓒ이부영
나는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가지는 그 당시 한창 창간 준비에 바빴던 한겨레신문에 합류하여 언론인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우리 신문이던가. 1975년에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만 13년 만에 동아·조선 투위와 80년 해직언론인들이 젊은 후배들과 함께 모여 국민이 모아준 돈으로 만드는 신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87년 후반, 그러니까 내가 출옥하기 이전에 이미 한겨레발간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용이 모두 짜여져서 내가 출옥한 88년 2월에는 빈틈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송건호 선생을 모시고 조선투위의 정태기와 신홍범, 동아투위의 장윤환 권근술 성유보, 80년 해직언론인 김태홍 등이 함께 어우러져 애쓰고 있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팀워크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또 한가지 길은 아직 미완상태의 민주화의 길에 계속 매진하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은 지난 87년 대선 당시 양김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후보단일화 진영(이른바 '후단'진영),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비지'진영, 그리고 백기완 후보를 지지했던 독자후보 진영(백본 진영)등으로 나뉘어져서 대통령 선거 뒤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야3당이 과반수 이상의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3김 사이의 이해관계 불일치와 지역분열구도에 묶여 불안한 여야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언론인으로 복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난관에 처해있던 민주화운동에 다시 매진해야 할 것인가, 그 두 가지 길의 선택을 놓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 자신 아직 해직 언론인 신분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이제 언론인 동료들이 국민이 돈을 내서 만들어주는 한겨레신문을 곧 발간한다는데 그 신문에 몸담지 않을 경우 나는 언론계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새 신문 발간작업은 신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분열된 재야 민주화운동진영은 헤매고 있었다. 분열된 민주화운동 진영을 다시 통합하여 공안통치를 유효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노태우 정부를 견제해야 했다. 나는 재야의 민주화운동 진영에 남기로 했다.
우선 5월로 다가온 광주항쟁 8주년을 앞두고 구성된 광주학살진상규명투쟁위원회의 공동위원장 직을 맡았다. 다시 민주화운동 현장에 나섰어도 김천교도소에서 숙제처럼 생각했던 6월 항쟁 당시의 '우리 꿈'이 계속 머리속을 어른거렸다. 양김 세력과 민주화운동 진영이 함께 이른바 6·29선언의 기만성을 지적하면서, 신군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박종철·이한열 군 등 수많은 청년학생들을 죽인 전두환 집단은 민주헌정을 만들어내는 과도정권을 맡을 자격이 없으므로 전두환 정권은 퇴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밀고나갔더라면 어떠했을까. 1960년의 4월 혁명 직후처럼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군부독재를 단죄하고 광주학살진상규명 요구를 관철하면서 87년 헌법개정이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민주화운동 세력 전반이 배제된 상황에서 개헌 협상이 양김 세력과 전두환 군부 사이에 진행되고 비현실적인 제헌의회(制憲議會)운동과 노동해방운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과도정부수립도 광주학살진상규명도 이뤄지지 못했고 이른바 '87년 체제'는 양김의 대통령 출마를 보장해주는 직선제 말고는 민주화를 바라던 일반 국민들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 돼버렸다.
더욱이 양김의 분열로 정권까지 군부에게 다시 내주었으니 양김 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의 한쪽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통한 정치 참여에 몰두했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제헌의회운동이나 노동해방운동 등 급진적 체제변혁운동에 몰두함으로써 현실적인 민주헌법의 쟁취를 통한 제대로 된 '87년 헌정체제'의 도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87년 민주항쟁의 성공적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것을 양김의 분열에만 책임을 미룰 수 없는 이유는 민주화운동 진영도 양김 진영 한편에 편승해 정치권 진입을 시도한 책임과 시대착오적 체제변혁운동에 매달린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과도정부수립이나 광주학살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어도,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이 함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이름으로 최소한 실현가능한 헌법안을 제시하고 협상의 한 주체가 되자고 요구했을 경우, 군부세력도 양김 진영도 이 제의를 무작정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밟았을 경우, 그 위상은 양김의 분열을 막고 단일화를 강제하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광주학살진상규명 활동을 벌이던 과정에 88년 8월 다시 네 번째 구속되어 두달 여 동안 서울 구치소에 갇혀있게 되었다. 이 구속은 야당들이 국회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사태였다. 야당들도 이미 대선과 총선이 끝난 조건에서 재야 민주화운동의 선명한 투쟁성이 회복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국면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제도화가 끝났으니 이제 제도권이 요구하는 '금 안에서만' 활동하기를 강제한 것이었다. 내 주변에는 이른바 지금의 486세대들 김민석 정태근 고진화 원창현 장유식 박선원 등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서울민주투쟁연합을 만들어 나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다시 민통련과 같은 전국적 투쟁조직을 만들기를 바랐고 87년 대선으로 분열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선배 민주화운동 세력들을 설득하여 부문과 지역 조직들의 실무인력으로 나섰다. 김근태와 장기표 등도 함께하고 있었다.
▲ 1989년 1월 22일 전민련상임의장에 취임 ⓒ이부영
89년 1월에 이들은 함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했고 문익환 목사 계훈제·백기완 선생을 상임고문으로 그리고 나를 상임의장에 추대했다. 전민련에는 종교계 노동 농민 청년 문화예술계 등 지역과 부문의 거의 모든 운동단체들이 가입했다. 이 단체는 이름 그대로 해방 후 가장 규모가 큰 재야 단체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선 이후 분열된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민련 결성으로 단일 대오를 형성했다고 해도 내부의 노선 분열양상을 극복할 수 없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분출하기 시작한 민주노동운동의 흐름이 하나였다면, 남북화해와 통일운동이 다른 하나의 흐름이었으며 또 하나의 흐름이 김대중의 평민당과의 연대운동이었다. 전민련 내부에서 이 세 가지 흐름은 주요한 노선 갈등을 만들어냈다.
88년에서 90년대 초에는 독일통일, 소련방의 해체, 동구권의 붕괴, 그리고 이데올로기 대립의 해소 등 세계사적 대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그러나 분단과 이념 대립구도가 여전했던 한국사회에서는 세계사의 변화와는 전혀 관계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전민련과 거의 같은 시기에 결성이 준비되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등장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커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케 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부터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은 89년 봄에 이르러서는 현대중공업 사태로 치달았다. 나는 전민련 상임의장으로서 연대투쟁의 일환으로 울산현대중공업 노동자농성투쟁에 지원차 갔다가 격려연설을 했다. 공안당국은 나에게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위반을 내세워 소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89년 2월 중순경 문익환 목사께서 수유리 자택으로 나를 조용히 혼자 오도록 부르셨다. 문 목사는 "전 세계가 독일통일, 냉전해소, 군비축소로 나아가고 있는데 한반도는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비켜서 있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을 돌파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남북한도 함께 편승하려면 분단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방북하겠다고 말씀했다. 89년 연초에 세배했을 때도 북에 가야한다면서 그런 내용을 담은 시편들을 쓰시기도 했다. 나는 문 목사께서 전민련의 상임고문이시기 때문에 전민련에게 당연히 다시 공안탄압이 가해질 것이 걱정된다고 말씀드렸다. 그에 대해 우리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역량이 그만한 정도의 탄압에 무너질 만큼 녹록하지는 않다고 특유의 낙관론을 피력하셨다. 나는 문 목사의 방북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지만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문 목사의 방북은 현대중공업의 노동자 파업투쟁과 동시에 보도되었다. 문 목사는 귀국하시자 말자 유원호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나도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와 위에 말한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했다고 해서 다섯 번째로 구속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90년 1월 하순 1년 징역형을 받은 나를 11개월 만에 석방했다.
▲ 1989년1월말 전민련 발족 이후 노태우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선 민족민주운동 진영 ⓒ이부영
나는 전민련 의장직을 사임했다. 이미 노선 갈등으로 분열되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덩치만 클 뿐 전노협 전농 전대협 등 부문운동단체들이 독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난날과 같은 통합적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7년간의 징역과 구류로 점철된 16년간에 걸친 나의 재야운동을 마감해야 할 시기에 이른 것이었다.
3류 언론 <동아>, '종편' 보단 신문부터 바로세워라 10.10.29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⑥]
마.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과 열린우리당의 몰락
열린우리당에는 그 이전의 정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흐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17대 총선이 끝난 뒤 확인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주류, 이른바 노사모와 386정치인들이 그들이었다. 노사모 인사들은 지난날의 민주화운동 진영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컬러를 지니고 있었다. 노무현과 그의 언행을 광적으로 추수하는, 그래서 취약한 열린우리당의 메카니즘으로는 대통령 권력을 배경으로 그들이 벌이는 집단적 분파행위를 견디어낼 수 없었다. 정당의 위계가 무너지고 의원총회 혹은 중앙위원회에서는 당론이나 당규가 그들의 집단적 회의투쟁으로 뒤집히거나 무시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 2004년 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백범기년관에서 새 나라 양심건국을 다짐하고 있다. ⓒ이부영
중진의원들이 이른바 젊은 '노빠'의원들로부터 공격당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는 일이 벌어지고 당은 표류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거의 무명이었다가 화려하게 대통령으로 등장한 노무현을 따라하려는 무수한 '노무현 복제판' 정치인들의 경연장이었다. 이렇게 당이 통제불능 상태로 접어드는데도 노무현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당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당정분리'를 내세우면서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정동영 김근태 등 당의 중심인물들을 뽑아내 입각시켰다. 그나마 당의 중심으로 기능해야 할 인물들마저 행정부에 입각하자 당은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탄핵반대 열풍으로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의 지도부는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의 입법)을 비롯, 100대 과제를 내세웠다. 과욕이었다. 대선 패배 후 박근혜 대표를 구원투수로 내세운 한나라당은 적절히 강온전략을 구사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서투른 과욕정치실험을 민심의 바다에 밀어 넣고 흔들어댔다. 총선 전의 전당대회에서 3위의 상임중앙위원(최고위원)에 선출되었던 나는 정동영의 통일부장관 입각과 신기남의 의장낙마에 뒤이어 2004년 8월 당의장에 취임하여 9월부터 시작된 정기국회 동안 거친 싸움과 협상을 이어갔다.
2004년 8월에 있었던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코멘트는 그 법의 폐지를 관철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한, 열린우리당 의원 152명 가운데 약 70명이 반대 입장이었다. 17대 총선 전에 당론을 국가보안법 폐지로 정해놓고 반대 입장을 가진 관료 기업인 대학교수 등을 비례대표와 지역구 후보로 공천한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 의장을 맡아 공천을 주도했던 정동영은 다음 대선을 위한 포석 공천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당론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집권당의 의원 이념분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의 압박 수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폐지를 요구하는 재야와 시민사회 세력이 혹한 속에서 한 달 간의 국회 앞 농성을 벌였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폐지를 관철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법도 아닌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여당만으로 단독강행 처리하라는 것은 야당의 결사반대가 아니더라도 무리였다.
나는 국가보안법의 '찬양 고무 동조 및 회합 통신'의 처벌조항 등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탄압해온 5대 독소조항을 야당과 협상하여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내가 제안한대로 여야의 당대표와 원내대표인 나와 박근혜 그리고 천정배와 김덕룡 4자회담이 열렸다. 그 협상에서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들을 여야합의로 개정하기로 했으며 사학법, 신문법, 과거사법은 여당 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결국 여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고 독소조항만 걷어내는 개정안에 합의하는 대신 다른 개혁입법은 거의 그대로 얻어내는 실익을 얻는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아냈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기는 정권을 한 번 더 잡은 후 차기 정권에서 얻어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한국사회 안에서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을 이용하여 기본권을 억압하고 냉전 분위기를 유지·확대하려는 극우세력의 발호를 막아내는 것도 중요한 진전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런 정도의 국보법 개정안에 대해서 열린우리당 안의 보수파 의원들이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5대 독소조항의 폐기에 강력히 반발하는 기류가 있었다.
그러나 4자회담의 여야합의는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이른바 강경파 소장의원들의 거부로 파기되었다. 여야 4자회담은 당론의 위임을 받아 열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합의는 의원총회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추인의 의제이어야 했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합의사항의 추인을 요구하지 않고 가부토론에 부치자 농성 중이던 강경 소장파 의원들이 의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합의사항은 파기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천 원내대표는 사퇴해버렸다. 협상을 주도한 당의장인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공공연히 있었다. 국가보안법만으로 4차례 구속되고 모두 7년 넘어 수감생활을 해본 나 자신만큼 그 폐지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나 유신과 국가보안법 탄압시대에는 탄압당해본 적이 없는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자유롭게 외쳐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는 시대를 맞아 인기에 영합하다가 정작 국가보안법을 악법 그대로 온존시켜주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저돌적이거나 시류에 지나치게 영합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조타수 역할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 것인지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그 후 많은 인사들이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으로 구속되어 고통 받아왔다. 국가보안법을 악법 그대로 온존시킨 그들은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멀지 않은 시일 안에 그 책임 소재를 밝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한 4대 개혁입법 파동은 열린우리당의 몰락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 레임덕의 시작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1)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으로 분열상태에 빠졌고 정국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2) 한나라당은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끊임없이 '친북좌파'로 몰아 국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계기를 잡았다.
3) 결과적으로 남북화해·협력정책의 동력을 잃게 만들었다.
4) 종국적으로는 정권을 내놓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나 자신도 당의장에서 물러났다. 마치 나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폐기되지 않은 것처럼 비방·비난이 난무했다. 나는 당을 떠나서 진보-보수, 영호남, 세대로 나뉘어 갈등 대립하는 한국사회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중도주의운동이라고 판단하여 중도적 시민운동 '화해상생마당'을 결성하여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했다.
▲ 2006년 11월 9일 중도적 지식인모임인 화해상생마당을 결성, 이부영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창립모임에 참석한 이홍구 전총리, 김지하시인, 김우창 고려대명예교수, 수경, 법륜스님, 박종화목사, 연극인 손숙씨 등. ⓒ이부영
그러나 나는 곧 사정의 대상이 되어 법정에 서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 시련에 다시 직면해 있으면서도 나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돕는 '동북아평화연대'의 공동대표로 고려인문화센터를 5년여에 걸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완공시켰고 '수목장실천모임'의 공동대표로 장묘법을 개정하여 묘지와 납골묘를 줄여가기 위한 수목장을 도입했으며 소원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한-러친선 문화예술교류축전'을 치러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이 생태환경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보고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정부와 타협안 만들어내기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범야권의 전직 국회의원, 전직 광역·기초단체장, 전직 광역의원들의 모임, 그리고 진보정치세력들의 대통합운동에 일조하고 있다.
5. 재야운동과 현실정치의 차이
재야운동은 정권의 획득이나 이윤의 추구 등 목전의 이익이나 목표를 얻어내려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혹은 장기적 지향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은 지난날 우리나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역사적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비해서 현실정치는 2년 내지 4년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우선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국민의 지지, 득표에 연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60~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시대가 지속되면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절실한 과제 때문에 재야운동과 제도권 야당이 함께 제휴·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제도권 야당 안에서도 재야세력을 자신들과 가까이 해야 하므로 선명한 명분을 선점하는, 따라서 군사독재로부터 어느 쪽이 더 혹독한 탄압을 당하느냐가 선명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함께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극우적인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언제나 용공, 좌경의 색깔론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제도권 야당으로서는 민주화에는 같은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 즉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도 재야운동은 명분이나 운동에 치중했다면, 제도권 야당은 실현가능한 제도를 얻어내는 실용적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함께 모인 통합민주당의 개혁파들. 이들의 꿈은 지역주의과 금권정치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부영 제정구 이철 노무현 유인태 김원웅 김홍신 박석무 원혜영 장기욱 홍기훈 이규택 고진화 그리고 시민운동 측의 이삼열 장기표 서경석 성유보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뿔뿔이 흐터졌고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이부영
재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제도 정치권에 참여한 인사들 가운데 적응에 성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건이 너무 다른 현실정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인사들은 더 많았다. 제도 정치권에서는 재야시절의 명분이나 선명성만으로는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지 세력을 많이 결집해낼 수 있는가, 필요한 정치자금을 얼마나 동원해낼 수 있는가가 선명성·명분과 함께, 아니 그보다도 더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지역주의와 연줄, 그리고 보스정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도 정치권에서 젊은 시절부터 돈 버는 일과는 담을 쌓고 감옥 드나들기를 밥 먹듯 했던 재야인사들에게 정치권에서의 성공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겪었던 고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재야출신 인사들이 정치권에 착근했더라도 재야시절의 목표나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갈등 대립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6. 끝내는 말
요즈음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다시 회자된다. 60년대에 대학 철학 강단에서 자주 듣던 이 말이 다시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듯하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민주화일까, 산업화일까. 아니면 요즘 새로 회자되는 선진화일까.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성취하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각각 서로 다른 비전과 세력들을 기반으로 성취함으로써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흐름인 듯이 주장되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봉건왕조시대의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고 국민이 주인인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민주공화국 국체를 내세웠을 뿐 아니라 국민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의 방향도 뚜렷이 했다. 사실상 우리 민주화의 연원은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선포에 닿아있다. 그에 비해 6.25한국전쟁의 폐허 이후 외자도입으로 본격화된 산업화는 식민지 수탈, 전쟁파괴로 생존의 벼랑에 몰린 국민 대중을 먹여살려야한다는 절박성에서 출발했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대한민국 국민대중의 필요를 각각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이제 우리 국민은 집권자를 비판한다고 잡혀가고 고문당하는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부정선거로 주권을 강탈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전복당하는 수모도 겪지 않을 것이다. 아직 부의 불평등, 양극화를 겪고 있어도 사회안전망과 의료보장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가 마련되어가고 있다.
바로 주인(국민대중)의 부름에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응답한 일이 민주화요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 혜택은 부족하기는 해도 주인에게 돌아갔다. 주인은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서로 경쟁시키고, 주인에게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때로는 심부름꾼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날뛰다가 주인에게 벌 받는 일도 있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역사철학에 나오는 '역사의 간지(奸智)'라는 말이 떠오른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정신의 이성의 전개에 역사의 흐름이 봉사하도록 이끈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국민대중의 부름이라고 해석한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부름에 봉사한 것이었다. 부름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다소간 주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20세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억눌려온 한반도 구성원의 자유의 해방 아닐까. 분단의 해소, 즉 대륙과 해양의 원활한 소통의 접점 노릇을 준비하라는, 문명의 소통과 대화를 주선하여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준비하라는 부름이 그 지향이 아닐까. 국민대중은 이미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들의 공로를 인정했고 포상했다. 이제 주역들은 주인의 부름의 다음 지향을 헤아리고 협력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올해 연초 좋은 벗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북한출신 젊은이 몇 사람과 남한산성 산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폐쇄성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3명 중 2명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민주화·산업화한 것을 보고 그들은 이곳으로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동남아 여성들도 새 삶을 찾아왔다. 이제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 영호남이, 보수-진보가, 세대들이, 민주화세력-산업화세력이 서로 대립-갈등하는데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담을 여유가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들을 담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나 자신에게마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봐야겠다. 자기 개인의 안락에 방해가 된다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이고 폐쇠적인 이기주의가 그럴만하다고 이해되는 사회라면 이미 깊은 사회병리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인은 이미 웃으면서 받아들였는데 심부름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성과에 재를 뿌리면서 우리를 부러워해서 찾아온 손님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눈을 들어 멀리 봐야겠다.
길고 지루한 이 글을 읽어주신 재판부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동아투위의 언론인들은 대한민국의 법원이 우리 국민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민주주의 보루일 것으로 믿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절의 그 처절한 비극이 바로 잡히는 데서 그 믿음은 푸른 솔처럼 우뚝 설 것이다.
'동아' 살리는 길, 겸허한 반성과 사과 뿐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연재를 읽어주신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들어가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이 글을 동아투위가 원고가 되고 국가가 피고가 되어 진행하고 있는 민사소송의 참고문건으로 제출했다. 나는 35년에 걸친 나의 삶을 일별하는 이 글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쓸 지면을 박탈당하고 살아온 한 기자로서 썼다고 말했다.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로부터 쫓겨났고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인생의 행로가 뒤틀려버린 한 기자가 지난 35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숱한 일들을 될 수록 기자의 눈으로, 될 수록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썼다고 말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비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동아일보사 측이 1975년 3월 당시 134명의 언론인들을 내쫓은 것이 박정희 유신정권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동아일보사의 경영상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사의 경영이 어려워진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동아의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수입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던 언론인들을 대거 내쫓고 난 이후, 거의 같은 수의 언론인들을 다시 보충채용하고 고가의 색도 윤전기를 구입한 것을 보면 경영이 어려워서 대량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궁색한 거짓말이었다.
이제 동아일보 사주측은 솔직해져야 한다. 사주 측이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압력, 심지어 폐간압력까지 있어서 대량해고조처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한다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폐간을 불사하고라도 자유언론을 주창하는 언론인들과 함께 사주 측도 옥쇄의 길을 걸었어야 했다는 견해는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상황의 엄중함이 그런 지경이었다고 해도 조그만 중소기업도 아닌, 유서 깊은 한국 최대 최고의 신문사에서 유례없는 백지광고 탄압과 대량해고가 어떤 연유로 있었다는 것을 동아일보사 측은 명백히 밝히고 독재정권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었어도 동아 사주 측의 성찰과 반성은 없었다. 동아 사주 측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독재시대의 동아일보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지도 않았고 해고로 고통당한 언론인들과 지지성원했던 시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해직언론인들도, 시민들도 동아일보사 측의 겸허한 용기에 감동했을 것이고 그것은 허위와 기만으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에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사 측이 반성하고 사과했다면, 김종필씨 같은 유신시대의 책임있는 인물들도, 심지어 동아 해직언론인들을 괴롭히고 감옥에 넣었던 중앙정보부의 하수인들도 증언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유신독재 시절 자신들의 자유언론에 대한 공헌을 자화자찬하고 있다. 일제 식민 치하 동아일보의 항일치적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동아일보가 이승만·박정희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도 왜 항일치적이 한 가지도 없었겠는가.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서 동아일보사 측에게 독재정권 시대에 자유언론을 위한 공헌이 있었고 일제 치하의 항일치적이 있었다고 해도, 유신정권 아래서 있었던 자유언론운동 당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고했고 일장기말소사건 당시 현진건 사회부장을 비롯한 다수의 언론인들을 내쫓았던 사태들, 그리고 그 사태들에 대해 그 뒤 한번도 사과한 일도, 원상회복한 일도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동아일보 사주측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솔직해질 때라야 자유언론을 위한 공헌도, 일제 치하의 항일치적도 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제 3류 언론이 됐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에 어느 언론보다 앞장서고 있으며 철지난 냉전시대를 다시 불러들여 민족화해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미친 듯이 가로막고 있다. 방송 종편을 얻어내려 정권에 온갖 추파와 추태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런다고 동아일보의 추락의 추세를 돌이킬 수 있다고 보는가. 온갖 영욕과 조상의 손때가 묻어나는 신문을 과감히 버리고 오락과 스포츠로 가득 찬 선정적 방송으로 변신할 황당한 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동아일보사는 방송을 하려해도 신문을 바로 세우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문도 다시 살리고 방송도 제대로 하는 일은 자유언론실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동아 하나를 살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기풍을 새롭게 바꿔나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35년 세월 제 하늘 아닌 남의 하늘 아래 살아가도록 강요당했던 많은 언론인들(15명이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동아의 자유언론실천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던 참 착했던 시민들에게 사과하는 일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필자도 이런 지루한 글 대신 신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봤으면 한다. 3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법정에서 시비곡직을 가리는 일도 몹시 역겹다. 동아일보사 측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그 결단은 동아일보를 살리는 역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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