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정에 달한 언론 내부 젠더이슈 논쟁
편집국 합의 어긋난 2차가해성 보도로 내홍 잇달아…언론사 내 성인지감수성 격차, 어디서 오나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재동 화백 등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 몇몇 언론사들에서 ‘기획미투’ 의혹 보도가 나오면서 편집국 내부 갈등으로 격화하고 있다. 당초 성폭력 보도준칙을 비롯한 저널리즘 가이드라인에 충실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보도란 지적이 각 편집국과 학계에서 나온다. 언론사 조직 내 성인지 감수성 격차로 인한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는 진단이 나온다.
일간지들이 자사 2차가해성 보도로 내홍을 겪고 있다. 한겨레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 발인일인 지난달 13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고 박 시장 추모 기고를 실었는데 공적 위주였다. 경향신문은 강진구 기자가 박재동 화백 성폭력 가해자 옹호단체 보도자료를 받아써 ‘기획미투’ 의혹을 제기했다가 기사가 삭제됐다. 서울신문은 지난 6일 곽병찬 논설고문이 박원순 시장 성추행을 고발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 칼럼을 냈다.
편집국 구성원 대다수가 비판 목소리를 냈다. 서울신문은 저연차 50~52기수 기자들과 편집국장, 부국장, 차장, 팀장을 비롯한 데스크급 구성원이 비판 입장글을 냈다. 한겨레는 지난달 15일 10년차 이하 기자들이 편집국 고위직과 소통하기 위해 꾸린 ‘레드위원회’에서 국장단과 회의를 열고 기고에 의견을 냈다. 경향신문 편집국 구성원은 독립언론실천위원회를 열어 사태 규명과 피해자 사과, 재발방지책을 요구해 경위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편집국 구성원과 학계, 여성인권단체 “저널리즘 원칙 어겨”
편집국 구성원과 학계, 여성인권단체는 이들 보도가 보도준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류지영 한국기자협회 서울신문지회장은 “편집국은 성범죄 보도준칙 피해자 관점에서 보도한다는 합의가 있는데, 피해자의 핸드폰을 포렌식하자는 등 적나라한 2차 가해 주장이 논설고문 칼럼으로 나온 데 깜짝 놀랐다”며 “적어도 80~90%가 칼럼이 게재돼선 안 됐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 소속 기자도 “편집국장과 데스크, 연차와 상관없이 모든 구성원이 상태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이들 보도가 공통으로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박 시장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길 바란다고 밝혔지만 경찰과 검찰은 별다른 수사 움직임이 없다.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는 “기자 질문이 수사기관을 향해야 하는 상황에 오히려 피해자와 대리인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박재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법원(1심) 판단이 끝났는데 법정에 제출된 증거를 가지고 의혹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들 보도는 편집국 내 데스킹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서울신문 논설고문 칼럼은 편집국 반대를 무릅쓰고 게재됐다. 이후 편집국이 게재 철회를 요구했지만 일부 표현만 삭제됐다. 경향신문 기사는 편집국 보고를 거치지 않고 미승인 송고돼 4시간 만에 삭제됐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기고의 경우 국·부장 합의를 거쳤지만 조 교육감 쪽의 요청으로 성사됐고, 게재는 ‘소통젠더데스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났다.
기자들 “세대만의 문제 아냐” 젠더·취재경험 등 복합 작용한 듯
보도 경위를 보면 모두 언론사 내 고연차 혹은 고위인사 통로를 통해 게재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 기자의 경우 편집국장급 기수로, 사실상 대다수 구성원이 ‘후배’다. 곽병찬 논설고문도 마찬가지다. 조 교육감의 기고는 오피니언 데스크를 통해 투고 요청이 이뤄졌다.
데스킹 과정뿐 아니라 보도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본 기자들을 세대나 연차만으로 가르기 어렵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의 경우 특히 데스크급과 고연차를 비롯한 절대 다수가 2차가해 보도를 규탄했다. 10년 미만 연차인 한 한겨레 소속 기자는 “‘레드위원회’로 토론회를 열었기에 15년차 미만 기자들의 목소리가 적극 나오긴 했지만 대다수 구성원이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며 “오히려 이 문제를 세대를 앞장세워 풀려 하면 ‘저연차들이라 하는 말’이란 식으로 치부돼 유의미한 해석이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성별이 박 시장 또는 박 화백의 성폭력 사건을 보는 시각을 갈랐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한겨레와 서울신문, 경향신문 저연차 기자 5명은 “성별과 상관 없이 다수 구성원이 보도에 문제점을 인식했다”고 했다. 반면 한겨레의 이정연 소통젠더데스크는 “박 시장이 숨지고 혼란하던 당시, 가해자를 감싸는 보도를 해도 되는지를 두고 여성 기자들이 더 단호한 판단을 했다”고 했다.
현장 기자들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편집국 내 인식 차에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다수가 ‘성폭력 사건과 고발 움직임을 현장에서 취재해온 기자들일수록 젠더 감수성이 민감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 서울신문 기자는 “저연차라서가 아니라 사회부 기자들이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을 수 있다. 현장에서 2015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부터 시작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여성인권단체 움직임을 취재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신문 편집국 구성원이 11일 저녁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 위치한 서울신문 편집국 사무실에서 지난 6일 곽병찬 칼럼 게재 사태를 두고 기자총회를 열었다. 사진=한국기자협회 서울신문지회
이 기자는 “젊은 세대 기자들은 곽 고문의 칼럼을 보고 인권 이슈로 여기는데, 고연차 언론인은 정치권과 정략의 이슈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도 했다. 이정연 소통젠더데스크도 “박 시장의 죽음이 연차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일선에서 취재해온 기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착취 범죄를 취재하면서 더 피해자 관점에서 보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판단했다”고 했다.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도 성폭력 문제를 다룰 때 ‘그를 둘러싼 사람이 누구인가’가 판단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권김 연구활동가는 “피해자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가해자에 이입하는 행위 칼럼들을 통해, 그들을 둘러싼 주류 남성의 전형적인 특성이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언론사 내부 성인지 감수성의 인식차 해결 방안이 있을까. 학계와 현장 기자들은 인식차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인식 차 드러낸 계기… 언론사 내 교육도 필요
최이숙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론사 내부에서 성인지감수성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편집국 내부에 합의됐던 저널리즘 원칙에 반대된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자 사회가 이를 드러내놓고 고민과 성찰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사 차원에서 젠더 이슈 관련 저널리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향신문 편집국의 한 구성원은 독립언론실천위원회 회의를 통해 편집국 차원에서 여성주의 학자나 법학자를 초빙해 교육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정연 젠더데스크는 “이 문제는 하나의 원인을 파악해 해결책을 내는 차원이 아니기에 막막하고 어렵기도 하다”며 “다행스러운 건 논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논의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이 상처나 2차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각자의 스피커만 가지고 주장하기보다 조직 내에 테이블 위에서 의견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겨레는 ‘레드위원회’ 토론회를 통해 성폭력범죄보도 세부권고기준에 의거 2차가해성 보도에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감 폭을 넓혔다. 이후 투고된 외부필진 칼럼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편집국장단 주도 아래 검토한 뒤 기고를 싣지 않기로 결정한 사례가 나왔다.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검찰개혁을 둘러싼 진보 간의 시각차
ㆍ지난해 ‘조국 사태’ 때부터 다른 목소리… 분란이 남긴 상처 치유할 수 있을까
사무실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아파트단지 맞은편, 오래된 사무용 건물 3층에 있다. ‘경제민주주의21’ 김경율 회계사,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조혜경 전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 등이 참여연대를 떠나 만든 단체다. 경제금융센터를 구성하던 핵심인사들이 통째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7월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구내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과거에도 분화 사례는 없지 않았다. 김상조 현 청와대 정책실장 주도로 만들어진 ‘경제개혁연대’가 대표적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후신이다. 분화 당시(2006년) 사무처장은 김기식 전 의원이었다. 김기식 처장에 앞서 사무처장을 맡았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참여연대가 각 분야 전문운동의 산실,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경제개혁연대 이외에도 앞으로 자립 조건을 갖춘 센터들이 독립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21’의 분화는 다르다. 지난해 조국 사태 국면에서 상임집행위원회 내부에서 벌어진 분란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봉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서초동 촛불’ 대 ‘진보 기득권 비판’ 분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공통된 가치관이 있었나 싶다. 과거 이른바 ‘진보’로 뭉뚱그려져 있었는데 돌이켜 놓고 생각해보면 그게 진짜였나 하는 회의가 든다.”(김경율 회계사) “조국 사태로 드러난 것은 진영논리가 우리가 추구한다고 믿어왔던 가치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 따라 ‘자기가 표상하는 가치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보수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이권을 누리는 집단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정권을 잡고 나서 ‘진보도 이권이 가치를 앞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전성인 교수)
지난 8월 3일 경제민주주의21 사무실에서 이 단체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단체 활동은 이전 참여연대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경제 현안에 대한 단체의 입장을 내고 정책대안을 제시한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 파기 환송심에 대한 논평을 담은 1호부터, 역시 검찰이 이 부회장을 기소유예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고 밝힌 18호 최근 논평까지 꾸준하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을 뜯어보면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의 주류시각과는 상당히 다른 프레임이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이 ‘검찰개혁’에 대한 시각이다.
전성인 교수의 말이다.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권한은 대통령이 갖고 있다. 검찰이 권력을 남용한다는데 검찰은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해임하면 된다. 한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야 검찰개혁이 되는 것처럼 몰아가는 건 완전히 잘못된 방향이다.” 이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경율 회계사는 “최근 1년만 보면 이분들(현 정부와 지지자들)이 말하는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이미 거의 완성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검찰·언론 개혁의 실체나 성과는 이미 만들어진 것 아니냐. 그들이 말하는 검찰개혁이란 권력형 범죄수사를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에서 개혁이라는 말 아니냐. 공수처 입법은 그들이 차지한 180석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했고 이른바 한동훈 지검장의 검·언 유착 의혹 사건으로 언론개혁 실상도 큰 그림은 나오지 않았나.”
시각차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이른바 조국 사태 때부터였다. 서초동에 촛불을 들고 모인 이들은 검찰의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인디언 기우제’식 짜맞추기 수사라고 주장하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서초동 촛불’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펀드투자 의혹을 받은 조 장관을 ‘진보 기득권’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시각차는 검찰개혁 문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주요 이슈마다 시각차가 불거졌다. 윤미향 의원 정의연 사태로부터 최근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평가까지 입장은 정반대였다. 앞으로 입장차는 얼마나 더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서초동 촛불’ 시각 반대편의 중심엔 경제민주주의21의 활동이 있다. 개인 페이스북과 언론 기고, 강연 행사 등을 통해 집권당과 지지자들에게 비판적 시각을 보여왔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 단체의 논평과 함께 후원계좌번호도 공유했다.

김남준 법무부 검찰개혁위원장이 7월 27일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 제도개혁 등에 대해 심의의결하고 권고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검찰개혁은 결국 윤석열 총장 찍어내기?
시간이 흐르면서 집권당의 개혁드라이브에 비판적인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조국 사태 초기, 조 전 법무부 장관에게 사퇴 용단을 내릴 것을 공개 요구했던 신평 변호사(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검찰개혁 단상’ 글에서 “현재 검찰개혁의 요점은 검찰권의 무력화와 경찰권의 강화 그리고 윤석열 찍어내기”라며 “촛불시민혁명을 계승했다는 현 정부에서 이 같은 어이없는 처사들이 거침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을 통제하고 나아가 권력에 복종시키겠다는 의중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나아가 검찰권 자체를 완전 무력화시켜버리겠다는 것 아닌가”라며 “이 모든 일은 검찰이 조국 전 장관을 비롯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벌이면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조국 사태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다. 과거 민주 또는 개혁·진보라는 것을 내걸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보수냐, 진보냐 이런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씨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서초동 촛불시위 이후 구도를 정확히 평가한다면 ‘친정권이냐, 반정권이냐’라는 구도가 오히려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당, 민주당의 전망도 이른바 ‘친문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낙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여론조사에서 1위,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이낙연이나 이재명도 친문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참여한 사람은 세 사람이지만 흥행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사실상 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당 내에서 친문표를 얻기 위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후도 마찬가지다.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자기 목소리를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 그래서 민주당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고, 통합당은 어부지리로 지지율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과연 그렇게 될까.

경실련·경제민주주의21·참여연대·민주노총 등 관계자들이 7월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 앞에서 ‘이재용 부회장 불법 경영권 승계 혐의 검찰의 기소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호욱 기자
최근 정부·여당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검찰개혁에 대해 시민사회, 구체적으로 경실련·참여연대가 낸 논평을 보면 마냥 지지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지난 7월 28일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검찰개혁 권고안을 보면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나눠 고등검찰청장에게 부여하고, 또 법무부 장관은 고등검찰청장을 수사 지휘하는 권력 분산안을 제시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고등검찰청장은 추천위원회나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아 독립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며 정 권한분산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지방검찰청장에게 넘기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의 성명은 더 비판적이다. 경실련은 “검찰개혁의 본질은 ‘정치의 시녀’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고 검찰권 오남용 방지는 그다음의 과제”라며 “검찰총장 권한 분산에만 눈이 멀어 검찰개혁의 본질을 망각한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검찰개혁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굳이 시민단체의 시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권고안은 “윤석열 현 총장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검찰 지휘부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의심에 기반을 둔, 결국 한 사람을 겨냥한 위인설관(爲人設官) 식으로 만들어진 권고안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도수 건국대 교수는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윤 총장이 정치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대학 동기(서울대 법대 79학번)라 고시 공부할 때부터 여러 차례 그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그는 처음부터 검찰이 하고 싶었고, ‘위도 없고 아래도 없는 그런 검찰을 원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신임 검사들에게 한 발언(“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는 배격해야 한다”)도 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런 기개를 심어주고 싶어서이지 않나 해석한다.”
윤 총장이 80년대 초 학생 시절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의재판에서 검사 자격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한동안 도피생활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윤 총장이 중도에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정도는 버텨줘야지 총장답지 않나. 법률상으로는 2년 임기가 보장되어 있고, 총장은 정권에 휘둘리지 말고 끝까지 가라는 것이 법률에 의한 명령이니 그것을 지키려 할 것이다.”
진보분화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과정”
반면 김남국 의원은 윤 총장이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것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윤 총장은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부터 윤 총장이 해온 굵직굵직한 수사들은 사실상 정치수사였고, 검찰조직을 내팽개쳐 둔 채 본인과 본인 측근들만 생각한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객관과 중립을 견지하는 것이 검사의 중요한 의무인데, 윤 총장은 이미 그런 기본적인 책무를 포기했기 때문에 검찰 내부로부터도 비판을 받아왔다. 더 이상 불편하게 ‘검찰총장 정치’를 하지 말고 홀가분하게 당당하게 정치를 하면 좋겠다.” 사실상 물러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진보분화’와 관련,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는 “진보 운동의 역사를 생각하면 반공이데올로기나 박정희와 같은 신화 파괴자의 역할을 해왔다”라며 “이제는 집권세력이 되면서 스스로 그동안 쌓아온 신화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적인 의미에서 진보는 ‘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끊임없이 자기 부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라며 “어떻게 보면 고통스럽겠지만 분화는 불가피하며 당연하게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검찰개혁 전망과 관련 이재근 참여연대 권력감시국장은 “이 정부 스스로 목표한 만큼 검찰개혁에 성공하지 못하면 정권 후반기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로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정부 출범 전후로 국정농단·적폐청산 수사를 위해 검찰에 힘을 실어주면서 검찰개혁도 물 건너가거나 약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지난해 조국 장관 사태 이후 벌어진 권력 내 갈등이 역설적으로 공수처의 필요성이나 검찰개혁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이명박부터 박근혜를 지나 문재인까지...부동산 정책의 진짜 맥락
침체기에도, 호황기에도 정부 눈길은 '오직 주택 공급뿐'
미래통합당 윤희숙 국회의원의 '저는 임차인입니다'라는 연설이 화제였다.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바꾸거나 집을 비워둘 것이므로, 임대인이 집을 세놓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해당 연설의 핵심 주장이다. 이는 집값 하락으로 인하여 나타났던 현상을 임차인의 피해(월세 전환)로 비틀어서 결국 임대인을 보호(집값을 떠받쳐야한다)해야한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로 비약하는 억지 주장이다.
6년전 3억 전셋집의 전세금은 4억 5천이 되었고, 당시 5~6억이던 주택 매매가격은 15억 원을 호가하고 있다. 다주택자들이 걱정없이 편안하게 전세를 주고 그 전세금으로 또다시 주택을 구입하여 계속 가격을 올리고,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2030젊은이들의 영혼을 끌어모은 추격 매수로 계속 가격이 올라가는 현상은 임대인과 임차인간의 심각한 자산 격차와 불균형을 초래하는데다 가계부채비율을 높여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 뻔히 예상되는 일인데, 임차인 보호를 위해 높을대로 높아진 부동산 가격을 유지하거나 계속 올려야한다는 것인가.
'부동산 시장과 주택 공급 조속한 정상화, 민간부문을 중심으로 주택 건설 급속히 감소, 주택건설 인허가 실적이 외환위기 이후 최저수준으로 하락, 수급불균형에 따른 주택가격 앙등 및 서민 주거안정 저해 우려.'
위의 내용은 이명박 정부가 2009년 2월 주택공급 정상화를 위한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폐지를 추진하며 추진 배경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당시 보도자료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15%를 차지하는 건설업이 심각한 침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주택 건설을 확대할 대책을 내놓고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부동산은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미분양이 넘쳐났으며, 양도세와 취득세를 대폭 감면해주겠다고 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지어놔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미분양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그 시기에, 놀랍게도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공급대책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택을 구입하게 하려면 해야할 일의 첫 번째가 바로 가격이 계속 오른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투기 심리다. 이명박 정부는 정확히 이를 간파하고 미분양이 넘치는 시기에 부동산 공급 대책과 함께 분양가상한제, 분양원가 공개 폐지를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미분양 해소와 민간건설업계의 자금난 해소를 위하여 환매조건부 미분양주택 매입제도, 자산유동화, 리츠, 펀드 등을 통하여 다양한 미분양 주택 투자상품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어주었고, 주택청약종합저축 가입에 파격적 금리를 제시하며 가입 요건을 완화하고 대상을 넓혀주었다. 미분양이 나더라도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줄테니 걱정말고 지으라는 신호였다. 청약저축 가입을 유도해서 주택 수요로 흡수할 수 있는 대상을 넓혀놓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금리와 함께 최경환의 '빚내서 집사라'는 정책으로도 쉽게 투기 심리가 타오르지 않자, 정부는 배고픈 민간 건설사들을 위하여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형 민간임대주택 뉴스테이 정책을 내놓았다. 그린벨트 해제, 토지수용권 부여, 세제 및 기금 지원, 용적률 상향 등 민간 건설사에 대한 각종 특혜를 담고 있는 월세 임대주택정책이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전월세가격 안정, 서민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하여 취등록세 감면, 양도세 면제 등의 혜택을 통하여 민간임대주택 공급 활성화, 다주택자의 미분양주택 구입을 유도하는 동시에 무주택자의 전세 자금 지원을 점점 확대하였다. 미분양 주택은 민간임대주택공급이라는 명분으로 다주택자에게 세제 혜택을 통하여 구입하도록 하고, 무주택자에게는 전세 자금을 지원함으로서 결국 서민주거안정을 위한 공공자금이 전세제도를 통하여 다주택자들의 주택 구입 자금으로 유입되어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데 일조하게 되는 결과가 됐다.
주택 건설을 통하여 이익을 남기는 방법으로서 분양 방식은 수분양자로부터 모든 투입 비용 과 이익을 한번에 회수하므로, 투기심리가 팽배한 주택가격 상승기에 유용한 마케팅 방법이다. 분양가상한제 등의 규제만 없다면 실체도 불분명한 '시세'라는 이름으로 분양가를 정하고,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투기심리와 불안심리를 조장하여 분양으로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박근혜 정부의 뉴스테이와 같은 임대 방식은 부동산 시장 침체기, 가격 하락 예상시기에 투기 수요가 가라앉았을 때, 장기에 걸쳐서 건설비용과 함께 수익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분양이 어려운 시기에 민간건설사의 수익구조를 염두에 두고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기업형 임대주택 뉴스테이는 월세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국토부는 부동산 시장의 호황기는 호황기 대로, 하락기는 하락기대로 상황에 따라 적절한 공급확대 명분을 만들고, 서민 주거안정 목표를 내세워서 부동산 건설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실로 여러 가지 수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최근 3년간 서울아파트 공급은 연4만호로 과거대비 증가, 향후 3년간 공급도 이보다 높은 4.6만호 전망, 다만 2023년 이후에도 안정적 주택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응방안 마련 필요.'
위의 내용은 2020년 8월 4일 문재인 정부에서 발표된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방안이다. 부동산 공급 정책이 부동산 경기 하락기에도, 과열기에도 항상 부동산 대책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국토부가 갖고있는 기본 철학과 방향성을 보여준다.
정부는 서민주거안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부동산 공급 대책을 발표하지만 실상은 건설사와 다주택자 혜택이 전부다. 부동산 경기 하락기에는 미분양 해소의 수단으로 민간임대사업 활성화를 위한 각종 세제, 금융 지원책을 마련하여 다주택자 주택구매를 독려하고, 부동산 경기 과열기에는 실수요자에 대한 공급 확대를 명분으로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용적율을 높이는 등의 각종 혜택을 부여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부동산 정책과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경기 하강기와 부동산 경기 과열기라는 외부적인 여건의 차이만 있을 뿐, 구체적인 정책 내용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공급 확대, 그린벨트 해제, 용적률 상향 등에서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부동산 경기 하락기에 미분양 해소를 위하여 사용했던 민간임대사업자 활성화 정책을 부동산 경기 과열기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그 혜택을 확대했다는 점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 미분양 해소를 위한 다주택자 주택구입 장려 정책과 서민을 위한 전세 자금 지원은 결국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유입되어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투기 수요가 계속적으로 유입되자, 공급이 부족하다며 공급확대정책을 가져왔다. 자금 여력이 안되는 수요자는 설사 무주택자라고 하더라도 실수요자가 아니다. 전세는 세입자에게 유리한 제도인 듯 보이지만,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는 가격 하락으로 인한 위험이 세입자에게 모두 전가되는 위험이 큰 제도이며, 가격 상승기에는 전세자금이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유입되어 부동산 가격을 더 상승시킨다.
부동산가격 하락기에는 자연스럽게 전세가 소멸하고 월세로 전환되면서 전세가격이 치솟았지만, 부동산가격 흐름이 하락세로 전환되지않은 상태에서 전세가격상승은 다시 부동산가격 상승을 부추길수있기에 더 위험성이 크다.
모든 제도와 정책은 동일한 정책이라도 외부의 여건과 결합하여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어떤 정책을 펴는지보다 어느 시기에 어떤 정책을 펴는지, 어떤 목표를 갖고, 무엇을 가장 최우선에 두고 정책을 설계했는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토부는 부동산 시장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일관되게 공급 확대 정책을 펴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건설산업 부양과 공급확대 자체가 국토부의 정책 목표인지도 모른다.
조정흔 감정평가사 | 프레시안
임대차3법 탓에 10억→14억?... 언론은 어떻게 왜곡하나
[보도 검증] 기사에 거론된 아파트들 찾아가보니... 원래 14억대 거래... 10억이 이례적

▲ 최근 일부 경제지를 중심으로 임대차 3법의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 네이버 화면 캡처
최근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을 중심으로 임대차 3법의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보도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는 곳이 서울 강남구 대치아이파크다. 한 경제지는 지난 2일, 이곳의 전용 85㎡ 짜리 전세 매물을 언급하면서 6월까지만 해도 보증금이 10억원이지만 한 달 만인 7월 말 14억2000만원에 거래됐다고 보도했다.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가 시행되면서 계약 기간과 전·월세 인상폭에 제한이 생기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집주인들이 갑작스레 전세가를 크게 올렸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들은 사실일까?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걸까? <오마이뉴스>가 지난 6일과 11일 이틀간 직접 현장을 찾아 확인해봤다.
상황이 달랐다. 폭등한 시세라고 거론됐던 14억원은 이 아파트의 기존 전세 시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지난 6월 거래된 10억원대 매물이 이례적으로 시세보다 저렴하게 계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차 관련법의 영향 때문에 집주인이 전세가를 갑작스럽게 4억원이나 올렸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ㅇ공인 관계자는 이 매물에 대해 "원래부터 대치아이파크의 84㎡ 전세 가격은 12억~14억원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확인한 결과, 지난 1월 거래된 같은 면적의 매물(13층)의 반전세가는 보증금 10억5000만원에 월세 120만원이었다. 일반적으로 보증금이 1000만원 높아질수록 월세는 3만원 낮아지는 전월세 전환률(기준금리+3.5%)에 따르면, 이미 보증금 14억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던 셈. 게다가 지난해 12월에는 같은 평 전세매물(15층)이 보증금 14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역삼동에 위치한 ㅊ공인 관계자는 "(언론이 가격 비교 대상으로 삼았던 10억원짜리 매물은) 대치동보다 저렴한 역삼동 아파트에서도 보기 힘든 저렴한 매물"이라며 "가격이 낮은 이유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은 집에 융자가 있는지 여부나 인테리어 상태가 보증금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공인중개사들에게 확인해보니] "전세는 계속 오르는 추세였을 뿐"

▲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대치아이파크 전경. ⓒ 류승연
강남구 역삼동과 대치동, 송파구 일대에서 직접 만난 공인중개사들은 전셋값 상승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온전히 임대차3법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전세 매물의 감소나 전셋값 인상은 모두 지난해 연말, 늦어도 올해 초부터 이어진 추세였다"고 입을 모았다. 임대차3법 때문에 갑작스럽게 전·월세 가격이 상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ㅅ공인 관계자는 "최대 1억원(24평형 기준) 정도 전셋값이 오른 건 사실이지만, 이미 전세는 상승 추세였기 때문에 그걸 (임대차 3법으로 인한) 폭등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법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전세 매물 자체가 많지 았았다"고 말했다.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ㅇ공인 관계자도 "(임대차3법 이후) 1~2억 정도 호가가 오른 건 사실이지만 정작 거래는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실제 올랐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며 "언론 보도들이 심리를 자극해 오히려 호가 인상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 (임대차3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엔 이른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헬리오시티 근처 ㄱ공인 관계자 역시 "임대차3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전부터 전세 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였다"며 "2년 전 6억이었던 33평대 전세 매물이 현재는 9~10억원 한다, 적게 올랐다고 볼 수 없다"고 답했다. 이어 "임대차3법을 의식해 전세 대신 반전세를 놓겠다는 집주인은 있었지만, 직접 전셋값을 올리겠다는 주인은 아직 본 적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거래 확인해보니] 3월보다 7월 더 저렴한 전세 매물도
실제 거래된 사례를 봐도 임대차3법으로 인해 전셋값이 대폭 상승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미약한 상황이다. 임대차3법으로 전세가가 폭등한 사례로 언급되는 강남구 역삼동 e-편한세상의 경우도 대치아이파크의 상황과 비슷했다

▲ 지난 7월 30일 거래된 e-편한세상 59㎡평형대(5층) 전세 매물의 가격은 7억원으로, 지난 3월 27일 거래된 같은 층·같은 평 매물(8억2000억원)보다 저렴했다. ⓒ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7월 30일 거래된 59㎡짜리 e-편한세상 전세 매물의 가격은 7억원으로, 지난 3월 27일 거래된 같은 층·같은 평수 매물(8억2000억원)보다 오히려 저렴했다.
또 지난 7월 31일 거래된 84㎡평형대(3층) e-편한세상의 반전세 매물 가격은 보증금 5억원에 월세 170만원이었는데, 지난 5월 11일 거래된 같은 층·같은 평의 반전세 매물은 보증금 4억5000만원에 월세 185만원이었다. 전월세 전환률을 적용해 계산해 보면, 5월과 7월의 거래 금액엔 큰 차이가 없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결과, 이 지역의 전세 가격은 내부 수리 여부 등 개별 주택의 상태나 계약 당시 거래 상황 등에 따라 오르내림세가 천자만별이었다. 임대차3법의 국회 통과가 가시화된 시점에서 이뤄진 거래의 전세가가 연초보다 낮은 경우도 여럿 확인됐다. 특정 상황에서 거래된 사례 하나를 꼽아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현실 왜곡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전망] 전세 영향 요인은 임대차3법보다 낮은 금리
하지만 공인중개사들은 "임대차3법의 영향력은 차치하더라도 지난해 연말부터 전세 물량이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그만큼 전셋값이 오를 여지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또 초저금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갭투자가 아니라 자기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이들은 반전세나 월세 전환을 서두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역삼동 ㅅ공인 관계자는 "금리가 낮아지다 보니 집주인 입장에서는 목돈을 받는 것보다 보증금과 월세 받는 게 유리해져 반전세로 바꾸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치동 ㅇ공인 관계자 역시 "하루아침에 부동산 시장이 월세 위주로 바뀌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부동산 투자 유인이 사라지게 되면 집주인들이 (다른) 부동산에서 돈을 빼 세입자에게 전셋값을 준 뒤 월세를 받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정부는 4일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기관의 참여를 전제로 재건축 단지가 주택 등을 기부채납하면 종상향 등을 통해 용적률을 500%까지 올려주고 층수도 50층까지 올릴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다. 사진은 4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강남구 은마아파트를 비롯한 아파트단지 모습. ⓒ 연합뉴스
오마이뉴스 류승연기자
지금 갑자기 '이명박 열풍'...'삽질'일까 '재평가'일까
구 친이계들 일제히 '4대강 예찬론'...지금 정치권 시계는 2008년?
홍수 피해로 수재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에 때아닌 '이명박 열풍'이 불고 있다. 과거 친이명박계 정치인들 중심으로 '4대강 예찬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 '4대강 논란'에 불을 댕긴 건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미래통합당 정진석 의원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정 의원은 "문재인 정부, 이래도 4대강 보 부술 겁니까?"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4대강 사업이 없었으면 이번에 어쩔 뻔했느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4대강 사업 끝낸 후 지류·지천으로 사업을 확대했더라면, 지금의 물난리 좀 더 잘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고 주장했다.
'대운하 전도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을 지낸 이재오 전 의원은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4대강 16개 보 무용론자들은 이번 수재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라며 "보가 없었으면 온 나라가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이 전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 수립의 상징적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무소속 권성동 의원은 YTN 라디오 <출발 새아침>에 출연, "4대강 사업이 홍수라든가, 가뭄 예방 효과가 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그 유역에 사는 농민들은 다 인정하는 문제"라며 "그렇게 4대강 보가 홍수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폭파시켜라"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지내던 시절 비서관이었던 '친이 직계' 조해진 의원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낙동강을 끼고 있는 자신의 지역구인 밀양시 의령군 함안군 창녕군을 언급하며 "둑이 넘치거나 제방이 터지거나 아니면 침수가 되거나 하는 걸 무시로 겪었기 때문에, 4대강 사업하고 그 뒤로 그런 일 없는 것 보고 (주민들이) 우리 고향이 이 덕분에 이번에 잘됐다고 이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구(舊) 친이계가 MB 재평가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인터넷 보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부동산 정책이나, 4대강 정책 등에 대해 우호적 여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박세열 기자 프레시안



한국·경향·주간동아, 중앙일보까지 진중권 필진으로
중앙일보 19일부터 한 면 할애해 진중권 칼럼… 진중권 “폭넓게 의견 밝힐 것”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중앙일보 오피니언 필진에 합류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한 면 전체에 실리는 ‘진중권의 퍼스펙티브’로 독자를 찾는다.
진 전 교수는 11일자 중앙일보를 통해 “한국의 정치·사회 현안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겠다”며 “최근 페이스북과 언론 기고문을 통해 제시했던 것처럼 폭넓게 의견을 밝히는 글을 쓰겠다. 최근 활동의 확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도 “진 전 교수는 지난해 8월 이른바 ‘조국 사태’가 벌어진 뒤 진보 진영의 위선과 궤변을 질타하고 보수 진영의 무능과 안이함을 지적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며 “그는 이 과정에서 ‘진실로 포장된 거짓’을 세상에 드러내 통렬히 비판하는 대표적 지식인 논객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진 전 교수의 첫 글은 오는 1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다.
진 전 교수는 올해 1월부터 지난달 16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한국일보의 ‘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 칼럼을 썼다. 경향신문에는 ‘진중권의 돌직구’라는 코너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6월부터는 주간동아에 ‘진중권의 직설’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1회 글을 싣는 등 진보·보수 매체를 넘나들며 왕성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진 전 교수는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를 도마 위에 올리지만 특히 진보 진영의 위선을 주제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는 한국일보 마지막 칼럼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죽음에 “그의 몰락이 내게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며 “그의 위선은 우리 세대의 위선이고, 그의 어리석음은 곧 우리 세대의 어리석음”이라고 비판했다/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한겨레 사설] 코로나·물난리에도 ‘재정적자’ 타령만 하는 보수언론
전국적인 물난리 피해 복구를 위한 4차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이 국회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여당은 “예비비 지출로 부족하면 선제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야당들도 추경 필요성에 공감하는 입장을 내놨다.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에 이어 최악의 물난리로 민생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 정부와 국회가 이재민 지원과 피해 복구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추경 편성에 주저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도 보수언론들이 뜬금없이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걸고넘어진다. <조선일보>는 11일 “비상금 깨 현금 뿌리더니 물난리 나자 또 빚내서 추경을 한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예비비를 코로나 지원금과 방역비 명목으로 써버렸다”며 코로나 대응을 ‘예산 낭비’라고 매도했다. <중앙일보>는 “이런 속도면 국가채무가 1천조원에 이를 판”이라며 또다시 ‘재정 파탄론’을 들고나왔다.
그러자 미래통합당도 태도를 바꿨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0일 “수해 규모가 크기 때문에 추경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통합당은 11일 논평에선 “지자체들이 쌓아놓은 재난관리기금을 코로나 지원금으로 다 써서 재정이 부족하다”며 “4차 추경은 거의 60년 만의 일로 재정 운영을 이렇게 해도 되는가”라고 비난에 가세했다.
재난지원금의 효과는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급이 시작된 지난 5월 이후 골목 상권이 활기를 띠면서 소비 진작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지난 2분기 경제성장률도 민간소비 증가(1.4%) 덕분에 성장률 추가 하락을 방어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재난지원금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 높자 김종인 위원장이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까지 제기한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재정 파탄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우리 정부의 ‘코로나 재정’은 지금까지 67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3.5% 수준이다. 미국은 12.3%, 일본은 11.3%, 독일과 영국은 각각 9.4%와 6.2%다. 주요 국가들이 우리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재정지출을 통해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1일 발표한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국가채무비율이 40%대인 재정 여력을 적절히 활용해 코로나 영향을 방어했다”며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을 지속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합리적 비판을 넘어 사실과 여론을 호도하는 혹세무민은 이젠 그만할 때도 됐다.
“큰물에 수천 명 사망” 조선은 홍수를 이렇게 수습했다!
조선 팔도서 '큰물'…수천 명 숨진 기록도
수해 백성에 특별 식량 배급…감세에 노역도 면제
백성 굶주리자 임금도 반찬 가짓수 줄여
“큰물에 수천 명 사망” 조선은 홍수를 이렇게 수습했다!
“이 가을에 삼남에 홍수가 났다. 충청도의 문의·회인· 청주…등의 고을은 민가 1천여 호가 떠내려갔고 익사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으며, 무림사 수백 간이 일시에 물에 잠겨 승려와 속인으로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 경상도의 거창·대구·밀양 등 고을은 물에 떠내려간 것이 1천 수백여 호였고 익사자가 또한 1천 명을 넘었으며…”
위 내용은 경종실록(1723년)에 실린 기사(실록의 기록)입니다. 삼남이란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의미하는데, 당시 조선의 남부 전역에서 물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제방 시설이 열악했던 조선 시대에는 그야말로 팔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홍수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의 피해를 쉽게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팔도에 큰물이 졌는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다.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숙종실록, 1717년)
이처럼, 472년간의 조선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수 발생과 그로 인한 손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곳곳에 기록돼 있습니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다 3대가 숨져”
순조실록(1815년)에는 “지난달 24일과 25일의 비로 평지의 물 깊이가 석 자나 되어서 함안 등 여러 읍이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2천19호이며 물에 빠져 죽거나 깔려 죽은 자가 5백70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석 자는 약 90cm를 의미합니다. 성인 남성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 겁니다.
현종개수실록(1661년)에는 “경상좌도에 큰물이 져 1백 20여 호가 침수되고 70여 명이 죽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고 개천의 물길이 달라졌으며 농토가 망가지고 곡식이 물에 잠기는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현종 시대(1659~1674년)는 홍수와 관련한 기사가 가장 많았던 때로 확인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서비스에 따르면, ‘홍수’ 혹은 홍수를 뜻하는 다른 단어인 ‘큰물’이 표제어에 포함된 기사는 307건인데, 이 중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에 수록된 건 63건입니다. 인조(56건·1623~1649년), 숙종·효종(28건) 때도 홍수 관련 내용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현종실록에는 홍수 중 있었던 본보기가 될 만한 이야기가 기록돼 눈길을 끕니다.
“황해도에 홍수가 나서…송화 사람 이시영은 자기 아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자 시영의 어머니가 그를 구원하려다가 또 빠졌다. 시영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구원하다가 또 빠졌다. 그래서 조모와 아들과 손자가 같은 날 죽었다.”(현종개수실록, 1663년)
현종은 정문을 세워 이 가족의 효성을 표창했다고 합니다. 정문(旌門)이란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합니다.
홍수에 휩쓸린 민심…임금은 개인 돈 보내고 노역 면제

범람한 강물은 인명과 재산을 휩쓸어 갔고 농경지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습니다. 수확할 곡식이 사라진 백성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고 수해의 여파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임금은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여러 구제책을 시행했습니다.
①백성에 쌀 주고 임금은 개인 돈 보내기도
강이 범람해 물바다가 됐던 지역에 임금은 내탕전을 보냈습니다. 내탕전이란 임금이 쓰는 돈을 말합니다. 수해 복구를 위해 임금은 개인 돈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철종실록(1851년)에는 "여름·가을의 홍수는 근래에 드물게 있는 것으로…특별히 내탕전을 관서에 3천 민, 해서에 2천 민을 내려 하찮은 물력이나마 고락을 함께 하는 뜻을 보이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민(緡)이란 ‘동전 꾸러미’를 세는 단위입니다.
나라에서는 수해를 입은 백성들에게는 휼전을 제공했습니다. 휼전(恤典)이란 이재민 등을 구제하기 위해 내리는 식량 등 특전을 말합니다.
영조실록(1763년)에는 “강원도에 큰 홍수가 나서 민호가 표몰되고 사람과 가축이 많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고 돼 있고, 현종개수실록(1670년)에는 “정이원 및 자녀 손자 남녀 6명이 모두 죽었다.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세종은 1441년 황해도에 홍수가 나 벼농사가 손상되자 그 도에 명령해 구황할 자료를 예비하게 했다고 합니다. 구황이란 굶주림에 빠진 빈민을 구제하는 일을 말합니다. 영조는 1732년 홍수가 난 제주에 호남의 곡식 1천5백 석을 보내 백성들의 기근을 막고자 했습니다.
② 감세…“억울하지 않도록 차등”
수해 입은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려는 조치도 병행됐습니다.
태조실록(1395년)에는 ”왕이 광주와 천녕 사이에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었으므로 그 토지의 세곡을 면제하고 또 집집마다 쌀과 서속(기장·조)을 주게 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영조실록(1755년)에는 “‘당년조 환곡을 집이 떠내려간 자에게는 받는 것을 중지하고, 사람과 가축이 갈려 죽은 경우는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어 조세 감면의 차등 기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조세를 막기 위해 수해 지역을 일일이 방문해 피해 정도를 맨눈으로 확인하는 수고도 감내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1789년 “‘강가나 산골짜기 부근에서 침수되거나 씻겨나간 전답을 철저히 조사하여 단 한 사람의 토지에 대해서도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고종은 1892년 의정부에서 “냇물에 떠내려간 토지의 결세는 허물어져 내린 면적의 사실에 따라 처리하고 진흙땅으로 된 곳은 일일이 답사하여 세액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아뢰자 이를 윤허했다고 합니다.
민심 회복을 위해서는 강제 노역도 면제됐습니다. 고종실록(1873년)에는 “물에 집이 떠내려갔거나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감사와 수령들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고락을 함께할 것이니, 부역을 줄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고 안착시키기 위한 온갖 방도를 다하기에 힘쓰도록 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③ 반찬 줄인 임금…“당파 간 협력하라”
임금은 고통을 겪는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감선했다고 합니다. 감선이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근신의 의미로 수라상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것을 말합니다.
영조는 1758년 홍수에 벼와 보리가 잠기자 10일간 감선을 명했고, 정조도 1779년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고 탄식하며 감선했다고 합니다.
1673년 현종은 홍수가 잦자 “그대들 백관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 받아 편당을 짓지 말고 함께 화목하게 협력해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원망도 도맡아 나서고 충성을 다 바칠 것은 물론, 과인의 잘못과 시정의 병통을 극언하여 잘못을 살피고 고칠 수 있도록 하라”며 당파 간 협력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④ 홍수 못 막은 좌의정 “면직해 주옵소서”
태종·세조·숙종실록 등에는 수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 우의정 등이 스스로 면직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좌의정 목내선과 우의정 민암이 큰 비와 홍수의 재앙을 이유로 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다른 건백하는 대책은 없었다”(숙종실록, 1693년)
백성들을 대피시키지 않아 인명 손실을 야기한 관직자에 대해서는 문책이 있었습니다.
“판의주목사 이상흥·판관 김상안 등이 일찍이 낮은 지대에 사는 백성들을 옮겨두지 않았으므로 지난 6월에 큰물이 져서 민가를 떠내려가게 했으니 상흥은 장 80에 해당하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각 90에 해당하며…”(세종실록, 1431년)
⑤ 수해로 숨진 백성 위해 나라서 제사 지내
수해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도맡기도 했습니다.
정조실록(1792년)에는 “공주목 옥천군에 홍수가 나 1백 40여 호가 잠기고 59인이 빠져 죽었다. 관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위로하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조실록(1741년)에도 “관동에 큰 홍수가 나서…익사한 자들에 대해서는 단을 설치하여 사제할 것을 명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그래픽 : 권세라 조선왕조실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kbs



조국백서 “수만 건의 조국 기사, 나치 시대 광기와 흡사”
책 ‘검찰개혁과 촛불시민’, “조국 사태, 레거시 미디어 시대가 저문 것 보여줬다” 평가…“기자들은 오래된 폐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언론비판 대목 살펴보니
책은 4부 프롤로그에서 “조국 사태는 레거시 미디어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대부분의 언론이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에 대해 검찰이 흘리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쓰며 사실 보도, 진실 보도를 외면했다. 이 과정에서 오보와 왜곡보도가 넘쳐났고 인권침해가 벌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시민들은 미디어환경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집단지성을 발현하며 더이상 검찰권력의 여론조작이 통하지 않으며 레거시 미디어가 의제설정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책은 ‘고양이뉴스’, ‘알리미 황희두’, ‘빨간아재’, ‘유시민의 알릴레오’ 등이 가짜뉴스를 막기 위해 싸웠다고 평가했고, 유튜브채널 ‘시사타파TV’ PD 인터뷰를 적지 않은 분량으로 싣기도 했다. “시민들은 댓글을 통해 한 명 한 명이 1인 미디어의 역할을 했다”며 언론 보도에 달린 댓글을 따로 추려 20페이지가량 할애하기도 했다. 책의 맨 뒷부분에는 2019년 8월9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명부터 장관 임명, 의혹 제기, 검찰 수사, 장관 사퇴, 12월31일 불구속기소까지를 일지로 정리해 기록했다.
최민희 조국백서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책의 후기에서 “2019년 10월 중순 ‘다스뵈이다’에서 조국 백서가 공론화되면서 백서 제작을 추진하게 됐다”고 적었으며 “조국 전 장관의 동생과 5촌 조카에 대한 재판과 재판 관련 언론 보도에 대한 평가는 이번 백서에서 다루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최민희 집행위원장은 한겨레가 윤석열 검찰총장 관련 접대 의혹을 제기했다가 사과한 것과 KBS가 최근 검언유착 의혹 관련 보도와 관련해 사과한 것을 언급하며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조국 전 장관이 언론의 사과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최대권력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라고 적었다. 이어 “검찰과 언론이 손을 잡고 ‘선택적 정의’에 의기투합한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라고 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책의 총론에서 “언론매체들은 스스로 짜놓은 ‘조국 개인의 부도덕성’ 또는 ‘강남좌파의 위선’이라는 인식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조국 장관 임명 문제와 관련해 한국 언론이 몇 개월에 걸쳐 쏟아낸 수만 건의 기사에 담긴 것은 광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 목소리로 (유대인의) 대량학살을 유도 또는 방조했던 나치 시대 독일 언론의 광기와도 흡사했다”고 주장했다.
전씨는 조 전 장관의 도덕성 논란에 대해 “한국 사회 상층 엘리트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일반적 관행과 도덕성에 비추어 보면 대개 상식 범위 안에 있는 일이었다. 과거 장관 후보자들에게 제기된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자녀 이중국적 문제 등과 비교하면 개인의 도덕성에 특별히 심각한 하자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특히 조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문제와 관련해 그는 “대다수 언론매체는 대중적 분노를 자극하는데 열중했을 뿐 이 문제가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는 데 중대한 결격 사유인지 여부에 대해 분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조 전 장관 딸이 논문 제1 저자가 된 과정과 관련해 “학부모와 학생들은 학교가 만들어준 시스템과 관행 안에서 움직였다. 언론은 ‘계층별 연줄문화 작동방식’을 문제 삼지 않고 이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해버렸다”고 주장했다.
전우용씨는 이어 “자녀 입시와 관련한 사건은 조국이 평소 지향해온 가치와 비교하면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지만, 우리 사회의 평균적 욕망 실현 방식과 비교하면 특별히 부도덕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자녀 교육에 가용자원의 최대치를 투자하는 것은 한국 학부모들에게 일종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씨는 지난해 조국 전 장관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했다. 그는 “검찰과 언론이 동조해 전직 대통령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몰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것이 고작 10년 전 일이다. 상대가 다를 뿐 진행 과정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조국이 장관 물망에 오른 직후부터 그 일가를 대상으로 한 검찰과 언론의 행위는 ‘정신 고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어 “검찰의 일방적 주장을 사실로 단정하고 작성한 기사의 폐해는 이미 10여년 전 ‘논두렁 시계’ 보도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며 “기자들은 오래된 폐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 몇몇 뉴스 시사프로그램이 검철 주장과 반대되는 증언들을 소개했지만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여론 지형을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적으면서도 “그러나 시민들은 검찰 기소의 의도와 언론 보도의 편파성을 스스로 간파했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3부 에필로그에서 언론보도 관련 민사소송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과 일명 ‘오보방지법’을 ‘언란’에 맞설 해법으로 제시했다. 언론중재법 개정을 통해 언론중재위원 구성을 변경, 일정 자격의 법관·변호사·보도부문 종사자를 각각 20%, 총 60% 구성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을 총 30% 이내로 수정하고 연령대별·직업별 다양성을 반영하자는 내용이다. 오보로 판명되면 원보도와 같은 크기의 정정보도 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책은 또한 “방송통신위원회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 한다면 그 원인은 법적 미비의 문제라기보다는 위원 구성과 운용의 문제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방통위를 위원회 구조가 아닌 독임제로 바꾸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라며 “방송통신산업 발전과 규제혁신 차원 논의가 필요하다”며 다소 뜬금없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연합뉴스 관계법, 언론재단 개혁 등도 필요하다고 했으나 이것이 오보방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언론개혁의 완성은 시민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기획 미투 기사, 검언·권언 유착, 2차 가해 칼럼...언론, 이대론 안된다
[기고] 취재보도의 규범 윤리 회복해 자율적으로 제4부 역할 확보해야
언론계 이곳저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채널A 기자와 현직 검사장 관계에서 비롯한 '검언유착 vs 권언유착' 논란, <경향신문>의 '기획 미투' 기사 삭제 논란, <서울신문>의 박원순 시장 성추행 고발 피해자 2차 가해 칼럼 논란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언론계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언론계 자체의 자율, 자정능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실현될지 여부도 확실치 않은 정도다.
최근 동시 다발적으로 터진 이들 문제의 공통점은 뉴스 취재나 보도 과정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진실성과 정확성을 검증하는데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공성과 공익성의 기본인 대중매체 윤리 의식이 실종된 듯 보인다. '검언유착 vs 권언유착' 논란은 이른바 검찰 개혁과 윤석렬 죽이기라는 틈바구니에서 대중매체가 목탁과 소금으로서 독자적인 역할을 했느냐는 의문이 나오게 만든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의 논란의 경우 내부 작업 시스템의 정상 가동 여부, 특히 취재대상과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생략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언론의 제4부적 위상이 흔들리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언론계 종사자 모두가 공유하는 취재보도 규범, 윤리 규범이 실종된 결과라는 불행한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 대중매체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언론을 사회의 목탁, 소금이라고 그간 일컬은 이유는 언론이 사회의 권력 구조 속에서 부정, 부패를 가려내고 약자를 보호하면서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책무를 지닌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실종되고 있다.
기자실 시스템을 통해 기자가 권력층과 밀착하기 쉽다는 기성 언론의 현실, 그로부터 기득권을 유지한 적폐가 양산된 현실에서 언론이 해방되지 못하면서 '기레기'라는 치욕적인 손가락질까지 받게 된 요즘이다.
이 상황에서 특히 최근 들어 내로남불, 진영논리가 횡행하는 가운데, 언론 또한 이 흐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정권 교체가 거듭되면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는 논리에 따라 사회가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는 현재, 언론은 이런 현상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당위성이 실종되고, 언론계 전체가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
해방 이후 한국 일부 매체가 정권의 나팔수와 같은 비정상적 역할을 이행한 데 따른 후유증이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의 원인이다. 독재정권하에서 많은 언론인들이 정도를 외치다가 불법해직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랜 기간 한국 언론의 제4부로서 영역이 축소, 왜곡됐다. 노태우는 신문사, 이명박은 방송사를 다수 등장하게 만들어 대중매체가 생존논리의 위협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이는 언론과 정권의 유착을 한편으로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이 스스로 공공성을 포기하게끔 했다.
국민의 시청료를 받는 공영 방송사가 다른 상업방송과 경쟁하는 프로그램에 집중할뿐, 영국 BBC와 같은 공공, 공익적 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하지 않는 현실이 대표적 사례다.
정보화 사회로의 전진에 따라 언론이 제4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최근의 위기는 뉴미디어가 속출하고 동종 미디어 업계의 과당경쟁이 심화하면서 그 기반이 약화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개개 언론사의 생존 논리가 사회적 책무 수행에 필요한 대중매체 규범 윤리보다 우선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언론은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 속에 무한경쟁 식의 취재보도를 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 가운데 뉴미디어는 기존 언론을 대체하거나, 대중매체의 과실을 가로채고 있다. 전 세계가 한 지붕 한 가족이 된 소셜미디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기성 대중매체의 미래가 어두우리라는 전망에 오히려 힘을 싣는 모습이다.
언론이 당면한 어려움을 자율적인 노력으로 극복해서 정상화를 기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언론의 취재보도에 필수적인 규범과 윤리 강화와 회복이다. 이를 통해 제4부의 위상을 확보·강화해야 한다. 내로남불, 진영논리의 프레임을 타파하는데 앞장서고 공공, 공익성을 위한 존재로서 대중매체가 스스로의 자리를 각인시켜야 한다. 동시에 뉴스생산 과정에서 시청자의 접근권을 강화해 쌍방향 대중매체의 시스템으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프레시안
성적 수치심, 안 느꼈는데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
강요된 ‘성적 수치심’
성폭력 판단 때 핵심 감정, 수치심
광범위한 실제 피해감정 소외시켜
“퍽치기 당하면 막 수치스러워요?
아니잖아요, 성적 불쾌감이에요”
전문가 “수치심은 정조 개념에 뿌리
자기결정권 담긴 용어로 대체해야”
독일 법 ‘성적 수치심’ ‘음란’ 대신
‘불쾌감 유발’ ‘성적 남용’ 바뀌어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작가 leebido@hanmail.net
▶ ‘성적 수치심’은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지만, 이 표현이 실제로 쏟아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성적 수치심은 2010년대 들어 판결문과 기사문을 타고 일상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2015년, 불법촬영 발생 건수가 최대를 기록한 그해, 성적 수치심이 포함된 기사 개수도 최대치를 찍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이 성적 수치심을 본격적으로 불러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적 침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지문처럼 다양합니다. 피해감정은 지문처럼 정확하게 분류되고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함에도 단 하나의 대답, 수치심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습니까?’ 수사관이 물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예요, 수치심은.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어요. ‘아뇨, 수치심 안 느꼈는데요?’ 피해자인 제가 불리해질 걸 알면서도 그랬어요.”
20대 중반 이나은(가명)씨는 2017년 늦은 밤 길거리에서 강제추행을 당했다.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경찰에 출석한 나은씨는 피해감정이 수치심이었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나은씨가 느낀 피해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불쾌함”이었다.
수치심을 안 느꼈다고 말하자, 나은씨는 수사관의 태도가 바로 달라지는 걸 느꼈다고 했다. “‘아, 그러세요?’ 하면서 받아 적더라고요. 다른 질문은 없었어요. 그때부터 더 이상 피해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거나 조사하려 하지 않고, 가해자 의견을 더 궁금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수사관에게 “화나고, 황당하고, 기분 나쁜” 실제 피해감정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못했다. “다른 의견을 덧붙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비언어적으로도 느껴지잖아요, 더는 제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 결국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나은씨는 피해자인 자신이 “강제추행죄 구성 요건에 정면으로 반하는 말을 해버린” 것이 이런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모르고 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은씨는 경찰에 출석하기 전, 강제추행죄 구성 요건까지 찾아봤다. 형법 제298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를 강제추행죄로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대법원이 판단한 ‘추행’의 의미도 읽어봤다. 대법원 판결문에는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행위의 상대방인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2011도8805)이라고 나온다.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신체접촉’이 강제추행이다.
“성적 수치심이 맨 먼저 나와요. 제가 이런(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대답을 하면 불리하겠구나, 알겠더라고요. 그렇지만 정말, 수치심은 아니었으니까요.” 나은씨에겐 스스로 떳떳한 선택을 한 정직함이, 국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돼버린 셈이다.
• 수치(羞恥) 「명사」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표준국어대사전·이하 생략)
• 수치심(shame) :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판단할 때 발생하는 정서.(심리학용어사전, 한국심리학회)
성폭력 피해자는 ‘분열적인 상황’으로 내몰린다. 수많은 피해감정 가운데 나은씨처럼 ‘수치심을 느끼지 않은’ 피해자는, 그 피해를 입증하려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거짓 진술’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이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 역시 방향이 어긋나 있다. 법이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핵심적인 감정으로 간주하는 수치심. 타인을 볼 낯이 없는 부끄러움을 어째서 피해자에게 묻는 것일까. 피해를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결점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느껴야 하는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쪽은 가해자 아닌가.
<한겨레>가 여성들에게 직접 들어봤다. 언론 보도나 판결문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 어떤 생각 또는 감정이 드는지, 일상생활 속에서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을 직접 쓰거나 들어본 적은 있는지, 실제 피해감정은 무엇인지, 피해자를 향한 공감의 언어는 무엇인지, 어떤 표현이 피해감정을 대변하기에 적절하다고 보는지.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가 성차별적인지.
그들의 대답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회가 성적 수치심을 강요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린 엔(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이번 시위를 벌인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eNd)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제대로 된 수사와 판결을 요구했으며, 성범죄자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사법부를 비판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분하고, 더럽고, 괴롭고, 황당하고, 고통스럽고, 경악스럽고, 토할 것 같고, 속상하고, 비참하고, 괘씸하고, 두렵고, 불안하고, 무기력하고, 배신감, 모욕감, 굴욕감”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성적 수치심이라는 성차별 언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왜, 언제까지 설명해야 하느냐”고도 했다. “그건 약자니까 할 수밖에 없는 하소연”이지 않냐고. 피해자가 하소연까지 해야겠냐고. 이제는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판단하라”고. 인터뷰는 지난 3일부터 12일까지 20~40대 여성 11명을 대상으로 대면, 서면(전자우편), 전화 통화로 이뤄졌다.
천명의 피해자, 천개 이상의 피해감정
이렇게 통쾌한 반문은 오랜만이다. “길 가다가 퍽치기당하면 수치스러워요? 열받고 어이없잖아요. 안 부끄럽잖아요. 그런데 성폭력당하면 왜 부끄러워야 해요?”(혜림·40대 초반·티소믈리에)
성폭력을 보는 차별적 시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똑같이” 화가 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난, 강도, 사기 등 다른 피해를 본 (일부) 사람도 일종의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보도나 판결문에 적시하지 않는 것처럼, 성폭력을 다룰 때도 (감정을 담은 말인 수치심이 아닌)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안평·20대·에디터)
“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 성을 매개로 한 ‘폭력’ 자체에 초점이 없고 ‘성’에 초점이 있으니까 성폭력에만 수치심을 들먹이는 거 아닐까요? 그러니 성적 수치심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성적 불쾌감이죠. 이 말부터 바뀌어야 해요. 피해자가 뭘 부끄러워해야 하나요?”(혜림)
“리얼(정말) 성적 수치심이란 말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하려는 어감이라, 불쾌감이 나아요. 다른 범죄 피해도 마찬가지로 불쾌한 경험이잖아요.”(무지·27·공무원시험 준비)
“성적 수치심, 이 표현 매우 이상해요. 누가 무엇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가해자들에게 네가 한 짓을, 네 입에서 나온 말을 똑똑히 보라고 엄히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사법기관과 언론이 사용하는 성적 수치심은 그 말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하고 있어요. ‘네가 당한 짓을 똑똑히 봐라, 세상에, 어쩌고 다녔길래 그런 짓을 겪은 거야. 수치스러운 줄 알아야지’라고요. 저는 피해자일 때 수치스럽지 않았어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신예희·45·작가)
• 분노(憤怒/忿怒) 「명사」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여성·아동 대상 폭력 사건을 주로 수사해온 박하연 서울 은평경찰서 경위도 피해감정을 구성하는 가장 큰 감정으로 ‘분노’를 꼽았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화가 난다’예요. 수치심은 죄책감과 맞물린 감정이죠. 그건 가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잖아요.” 강력계 형사로 여성과 아동의 분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박 경위는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드문 경찰이다.
법정에서 성적 수치심이 ‘돌부리’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경험은 박 경위를 크게 바꿔놨다. 15년여 전, 그는 가해자 4명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10대 피해아동을 만났다. 그는 아이에게 수치심을 묻고 또 물었다. “수치심을 느꼈나요? 느꼈지요?” 범인들을 반드시 잡아 처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시티브이도 목격자도 없었다. 증거라고는 피해아동의 진술뿐이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아이의 한마디가 꼭 필요했다. 조사를 받던 아이가 대답했다. “네, 수치스러웠어요.”
수개월 수사 끝에 가해자들을 붙잡았다. 재판이 열렸다. 법정에 서게 된 피해아동에게 판사가 다시 물었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습니까?” “……” “수치심을 느꼈나요?” “글쎄요… 그게….” 아이는 판사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고 끝내 말하지 않았다. 판사는 수사 내용과 피해아동의 증언이 엇갈린다며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그사이에 아이는 성장해서 자기 생각을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이라는 논리였다. 결국 가해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경위는 애가 타서 아이에게 물었다. 법정에서 도대체 왜 그랬는지. ‘성장한’ 아이가 말했다.
“수치심은 부끄럽다는 뜻, 맞죠? 몇달 동안 생각해보니까요, 저 그때 안 부끄러웠어요. 무서웠어요.”
• 공포(恐怖) 「명사」 두렵고 무서움.
40대 혜림씨 역시 분노와 함께 공포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게 성폭력을 저지른 범인은 바로 검거되지 않았는데요, 신고하고 4년 뒤에 잡혔어요. 재범 저지르다가요. 그때는 흉기를 들고 있었대요. 4년 반 징역 살았는데, 피해 당시 제 머리카락이 길었거든요. 그놈 출소하고 제 머리부터 쇼트커트로 잘랐어요. 저를 알아볼까 봐 무서워서.”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폭력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혜림씨는 ‘성적 공포감’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성적 불쾌감이라고 하면, 피해가 심각하지 않은 듯한 ‘가벼운’ 뉘앙스라고 얘기하는 분도 있어요. 성적 불쾌감은 사회적 합의를 얻기 어려운 표현 같다고요. 그에 비해서 성적 공포감은 피해를 입증하기에 성적 불쾌감보다 유리하게 여겨진다는 거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여자는 불쾌해하면 안 되죠? 여자가 꼭 무서워해야 돼요?”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피해자에게 ‘없는 수치심’도 억지로 요구하듯이, 성적 공포감이란 표현 역시 피해자를 ‘두려움에 질린 약한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 무기력감(無氣力感) 「명사」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는 기분이나 느낌.
하리씨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미투’를 한 경험이 있다. 용기를 행동으로 옮겼던 그는 가장 복잡한 마음이 얼비치는, 가장 의외의 대답을 했다. “성적 불쾌감, 빡치심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끝낼 수 없는 문제 같아요.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 공포, 어이없음, 더러움, 앞날에 대한 걱정 등 너무 다양해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저는 수치심도 느끼긴 했어요. 실제로 부끄러웠어요. 사람마다 피해감정이 다른 거죠. 그 복잡한 감정을 수치심이란 말로 간단히 대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정연한 톤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목소리로 짓는 문장 끝에 “무기력”이란 단어를 놓았다.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The Female Face of Shame, 2013) 책 표지. 국내 출간 예정.
며칠 뒤 박하연 경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리씨가 했던 그 말을 뒤늦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박 경위의 말이다. “분노가 가장 먼저고, 맨 나중에 오는 감정은 무기력이지 싶어요. 피해 상황과 그때 발생한 감정을 방어할 줄 몰랐다는 것, 방어했더라도 달라질 게 없었을 거란 무기력감. 가장 중요한 건요, 피해감정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에요. 천개의 사건이 있으면, 최소한 천명의 피해자가 있어요. 천명의 피해자가 있으면, 천개 이상의 피해감정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실제로 어떤 감정을 겪을까. 홍상희 상담심리학 박사(에브리마인드 심리상담센터)는 “심리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얼어붙기)부터 공포, 경악, 비현실감, 죄책감, 불안, 우울, 고립감, 수치심, 복수심 등 매우 광범위하다. 또 사건을 경험하고 한참 지난 뒤에 심리적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렇게 수치심은 성폭력 피해 경험자의 다양한 심리적 반응 중 아주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수치심에만 집중해서 성폭력 사건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 불쾌감(不快感) 「명사」 못마땅하여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
복잡하고 다양한 피해감정을 포괄할 수 있는 표현으로 ‘성적 불쾌감’이 “그나마 가장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피해감정의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쨌거나 그것들이 불쾌감 안에 포함돼요. 수치심이란 단어는 그중에서 어감이 가장 세고요. 피해자한테 조명을 확 비추는 말이잖아요. 그게 못마땅한 거죠. 피해자라고 이미 밝혔음에도 얼마만큼 피해를 받았는지 증명해내야 하는 단어로 수치심이 쓰이는 거잖아요. 본인 입으로 성적 수치심이라 말해야 한다는 것도 불쾌하고요.”(호·20대 중반·프리랜서)
“성적 불쾌감이란 단어를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확 달라지는 거예요. 성적 수치심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차별적인 표현인지 알겠고.”(로미·36·카지노 딜러)
“맞아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했구나, 언어라는 무기가 없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구나, 그것도 알겠고요.”(랭보·35·피아노 강사)
“해시태그 운동으로 ‘저출산 대신 저출생 쓰기’ 캠페인을 했잖아요.(2016년) 저출산처럼 성적 수치심도 불쾌감으로 바꿔야겠어요.”(다랑·20대·편집 디자이너)
시민들의 제안은 성차별 언어를 성평등 언어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몰래카메라를 불법촬영으로, 리벤지 포르노를 디지털 성범죄로 바로잡은 것도 시민사회의 목소리였다. 미혼→비혼, 유모차→유아차, 자궁→포궁 등도 그런 경우다.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성차별 언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실제 감정은 연구 결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시 불쾌감이 가장 크다. 여성가족부 자료(2018)를 보면, 여성(62%)과 남성(51%) 모두 ‘불쾌감’을 가장 많이 느끼고, 두번째로 높은 감정은 여성에겐 ‘분노’(14%), 남성에겐 ‘당혹감’(15%)이다.


‘진짜 이름’을 호명하자는 이런 목소리가 나은씨는 “너무 반가웠다”고 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제가 모든 성적 피해 상황을 겪은 건 아니지만, 처음엔 당황하게 되어 있고, 지나가면 분노하고, 아픔·억울함 이런 감정을 많이 느끼는데, 그런 면에서 불쾌함이라는 단어가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적 불쾌감이 성적 수치심보다는 중립적인 용어라고 봐요. 그래도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요? 여성의 경험을 구성하는 새로운 개념이 있었으면 해요.”(이나은)
지난 6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티룸’에서 5명과 한 대면 인터뷰에선,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 불쾌감이라는 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러움”(더러움) “역겨움”으로 번지는 불쾌함과 울분이 커다란 파도로 뻗으며 디지털 성범죄를 세게 때렸다.
“화장실 불법촬영 같은 게 제일 이상해요. 남성 가해자, 유포자들이 불법촬영물 보면서 여성들이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한다는 게. 역겨워요, 안 부끄럽고.”(아쿠아·30대 후반·주부)
“맞아요. 우리는 더러운데. 불법촬영을 통해서 여성이 느끼길 바라는 수치심도 가해자들이 가진 여성에 대한 판타지 아닐까요? 막 부끄러워하면서 얼굴 붉히는? 그게 아니라 화나서 얼굴 벌게진다고!”(혜림)
• 더럽다 「형용사」 못마땅하거나 불쾌하다.
• 역-겹다(逆겹다) 「형용사」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
디지털 성범죄가 불러낸 성적 수치심
성적 수치심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심지어 관용적 표현으로 굳어진 측면도 있다. “20대인 제 경우엔, 성적 수치심이란 말은 익숙하지만 실제 일상에선 제 입으로 말해본 적도, 귀로 직접 들은 적도 없어요. 언론 보도나 판결문에서만 보는 말이에요. 굉장히 ‘공적인 표현’ 아닌가 싶은데요.”(호) “30대 후반인 저는 성적 수치심이란 말에 어느 정도 무뎠죠. 성폭력 기사 보면 제목에 ‘어련히 저 단어 나오겠구나’ 싶고. 10년, 20년 전엔 여자들도 성희롱 겪으면 성적 수치심이라고 스스로 말했던 것 같아요. 다른 단어가 없으니까요. 다른 말을 모르니까.”(아쿠아)
그런데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쏟아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뉴스 빅데이터 서비스 ‘빅카인즈’ 분석 결과, 전국 신문·방송사 54곳 보도 가운데 성적 수치심이 언급된 기사는 1990년 9건, 2000년 162건에 불과하다가 201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나 2015년 2641건을 기록한다. 올해는 8월9일 기준 534건이다.
이렇게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가 판결문과 기사문을 타고 일상으로 스며든 건 2000년대 들어 정책 차원에서 성폭력이 주요하게 논의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법·제도적으로 피해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확대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흥미로운 점은,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포함된 기사 수와 불법촬영 발생 건수 추이가 거의 비슷하다는 대목이다.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2015년은 불법촬영 건수가 최대를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성적 수치심 아니고 성적 불쾌감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에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가 들어가다 보니 상황이 악화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위원은 “우선, 수치심은 ‘음란’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과거 전통적인 정조 관념에 뿌리를 둔다. 신체적 침해에서 나아가 신체 이미지, 비신체적으로도 가해지는 새로운 유형의 성폭력이 빠르게 증가하는 오늘날, 굳이 음란 개념을 가져와서 쓰는 건 문제”라고 설명했다.
성적 수치심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매우 모호한 감정이기도 하다. 장 연구위원은 “음란함은 사회가 공유한 성도덕적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그 기준이 주관적이다. 거기서 나온 성적 수치심이란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인지 사회가 공유해야 하는 감정인지 불분명해 애초부터 제거됐어야 하는 표현이다. 법적으로 판사들이 적용할 때도 범위가 들쭉날쭉하다”며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적 수치심을 삭제한 독일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다. 1969년 형법 대개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독일 판례는 ‘음란’과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는다. 대신 ‘불쾌감 유발’ ‘성적 남용’ 같은 표현으로 대체됐다. 가해자의 행위를 되도록 객관적 언어로 담으려 한 것이다.
전문가들도 성적 수치심을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경찰, 교수, 검사, 판사, 변호사, 비정부기구(NGO) 등 47명을 대상으로 ‘처벌법상 사회적 법익 관련 용어 변경의 필요성’(2018)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의 전문가가 ‘성적 수치심→성적 불쾌감’(65.2%) ‘성적 수치심→성적 모욕감’(63%)으로 변경에 동의했다.

성폭력처벌법 제13조와 제14조 제1항에 대한 법 개정 움직임도 있었다. 2017년 9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안(박남춘 의원 대표발의), 2018년 4월 ‘성적 수치심’을 ‘성적 모욕감’으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안(이춘석 의원 대표발의), 2019년 3월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표현을 가해자의 행위가 중심이 되는 ‘성적 대상으로 하여’로 바꾸는 개정안(윤소하 의원 대표발의)이 나왔지만, 아직 법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윤소하 의원실에서 해당 개정안을 준비했던 이연주 비서관(현재 배진교 의원실)은 “성적 수치심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용어로, 피해자를 위축시킨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다만 수치심을 대체할 용어가 많이 고민됐다. 성적 불쾌감도 딱 맞는 용어는 아니라고 봐서 국회사무처 법제실에 문의했는데, 법제실에서 불쾌감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의견이 나오긴 했다. 그래도 국회에서 점점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걸 느낀다. 정의당에서 다시 개정안을 제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
법은 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수치심을 핵심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걸까. 피해자가 특정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가해자를 처벌하는 경우는 모욕죄의 모욕감, 즉 ‘경멸적 감정 표현의 반응’을 제외하면 성범죄가 유일하다.
이토록 특수한 성적 수치심의 ‘주체’ 대부분은 젠더 권력에서 약자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폭력처벌법의 모태인 형법 제297조에서 강간죄의 객체는 원래 ‘부녀’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야 ‘부녀’가 ‘사람’으로 바뀌면서 남성도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여자의 얼굴을 한 성적 수치심은 어떻게 그 모든 성적 피해감정들의 이름이 되었을까.
<수치심의 여성적 얼굴>(The Female Face of Shame, 국내 출간 예정)을 번역하고 있는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강요된 수치심이란 강간사회를 지탱하고 강화하는 통치술”이라고 풀이했다. 손 교수는 “강간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가 강간사회인데, 피해자 여성에게 수치심을 강요한다는 건 결국 (남부끄러우니) 조용히 숨어 살라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남성이 여성을 옭아매 운신의 폭을 줄이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사악한 감정으로서의 성적 수치심”도 지적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적인 감정임에도, 강요된 성적 수치심은 수치심을 성찰이 아니라 모멸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다’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모멸로서 느끼는 수치심은 약자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 됩니다.”(손희정) “권력을 가진 남성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언어가 성적 수치심이라고 봅니다. 여성에게 ‘너도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어? 그럼 너도 수치심을 느껴야지’ 하며 탓하려고 그 말을 만든 것 아닐까요.”(박하연)
피해 회복에도 걸림돌
‘피해자=부끄러운 존재’라는 낡은 등식은 피해 회복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첫째, 내재된 수치심이 피해자에게 자기혐오로 번질 가능성이다. 홍상희 박사는 “수치심이라는 고정관념을 피해자가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심리적 반응에 대해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난하여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둘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2차 가해의 가능성이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수치심이나 감정적 동요 없이 ‘평범하게’ 진술하면 의심스럽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포함해 신상 공개, 피해 촬영물 재유포 등 2차 피해에 대한 걱정이 성적으로 훼손됐다는 감정보다도 훨씬 크다”고 전했다. 홍 박사도 “피해자의 주변인과 사법기관에서 수치심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수치심 이외의 심리적 반응을 보일 경우(실제로 많은 경우)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수치심은 문제의 그 ‘피해자다움’을 구성하는 감정으로 오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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