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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6·25 한국전쟁 70년

by 이성근 2020. 6. 25.

전국 최소 169곳서 집단학살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수십만 희생자

2006년 진실화해위, 전국 168곳 집단매장추정

실제 발굴은 13곳 불과유해는 1617구 수습

20142020 민간단체가 8380구 추가발굴

대부분 사유지·도로·택지 등으로 접근에 난항

현재 정부 대신 지자체 나서 유해 발굴 지원

올해말 재가동 예정인 2기 과거사위에 기대

정권따라 활동 제약발굴상설기구 설립해야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 발굴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는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다. 학살 추정지만 170곳에 이른다.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10년까지 유해발굴을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은 전국 13곳밖에 안 된다. 진실화해위 해산 이후 유해발굴은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유해발굴 현황과 과제를 짚어봤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숨진 가족의 유골만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를 70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

 

골로 간다.’

이 말의 유래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있다. 학살터가 대부분 골(계곡)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골로 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됐다.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조사단)은 그 죽음의 시원을 찾아 골로 가는이들이다.

 

지난 9,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는 유해발굴이 한창이었다. 지난달 26일부터 유해발굴이 시작된 여우굴은 한국전쟁 초기 주민들이 임시피난처로 판 굴이었다. 지금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단원 10여명은 30가 넘는 더위 속에서 차양막과 얼음물에 의지한 채 길이 50m, 너비 5~10m인 발굴터 바닥을 호미로 1씩 조심스레 긁어내고 있었다. 여우굴 희생자들은 가매장이 됐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50아래까지 확인해야 했다. 단원들은 가끔 특이한 물체가 나오면 물로 세척해 유해 여부를 가렸다.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판명되면 다시 호미를 들었다.

 

발굴은 원래 땅인 생토층이 나올 때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표토층을 걷어낸 뒤 10여개 구획으로 나눠 진행된다. 이날 위령제를 끝으로 종료된 이번 조사에서 모두 8구의 유해(허벅지뼈 기준)가 발견됐다. 1950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육군방첩대(CIC), 경찰 등이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예비검속자 1200~1500명을 학살한 이른바 청원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중 일부로 추정됐다. 함께 출토된 엠(M)1 소총 탄피 1, 카빈 소총 탄피 1점은 가해 무기와 주체를, 여름옷용 흰색 단추 1점은 매장 시기를 가늠하게 했다. 조사단은 정밀감식을 거쳐 유해와 유품 등을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장할 계획이다.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를 찾기 위해 호미로 땅바닥을 긁어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여우굴 희생자들은 하마터면 영원히 잊혔을 수도 있었다. 여우굴은 2007~2008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 336구를 발굴한 분터골에서 500m 떨어져 있다. 유족들은 당시 진실화해위에 여우굴에도 20여명이 묻혀 있다고 증언했지만 진실화해위 활동이 2010년 종료되며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후 고은리 일대에 전원주택 건설 열풍이 불며 경사진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여우굴은 조사단이 올해 3월 진행한 시굴조사에서 유골 64점을 발견했지만 정식 조사를 준비하는 사이 토지 소유주가 브이(V)자 형태 골짜기를 높이 5m 이상 흙으로 메워 주택공사를 시작했다. 문화재와 달리 유해는 공사 중단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조사단은 공사기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조사 종료 뒤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토지 소유주의 동의를 얻은 끝에 발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발굴 조사를 총괄 진행하는 안경호(54)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70년이 지나며 대부분 지형이 바뀌고 사유지이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 여우굴은 다행히 주택공사를 시작하기 전 조사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학살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경작지로 쓰이거나 택지가 들어선 곳이 많다. 어쩌면 우리 발밑에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2015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출토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2006년 진실화해위가 접수한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신청 건수는 집단희생 사건 7922, 적대세력 관련 사건 1687건 등 9609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는 신청기간이 1년으로 한정됐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청을 꺼려 포기한 경우도 있어 실제 희생 건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봤다. 학계나 민간단체들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부역 혐의 희생자 등을 모두 더하면 최소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목격자·유족 증언과 경찰기록 등 문헌, 지표조사 등을 통해 모두 168곳을 집단희생사건 관련 유해매장 추정 장소로 파악했다. 경남 41전남 35경북 28수도권 25충북 22충남 9전북 4강원 2제주 2곳이다. 대부분 산이나 골짜기, 바닷가지만 광산, , 공동묘지 등 외진 장소와 심지어 양곡창고, 우물도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59곳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파악하고 시급성, 현장 특정 여부 등을 고려해 39곳을 우선 발굴 대상지로 선정해, 2009년까지 13(중복 포함)을 발굴했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수습 유해 370), 충남 공주시 상왕동(317), 충북 청원 분터골(336), 경남 산청 원리와 외공리(257), 대전 동구 낭월동(34), 전남 구례 봉성산(14), 진도 갈매기섬(19), 전남 순천 매곡동(유해 미발견) 등에서 총 1617,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19507월 촬영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진실화해위는 20104월 활동기간이 종료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에서는 활동기간을 2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보수정권의 압박으로 두달 연장에 그쳤다. 진실화해위는 훗날을 기약하며 전국 10개 시·, 32개 시··64곳에 한국전쟁 희생자 매장 추정지임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또 조사보고서를 통해 유해발굴을 이어갈 수 있는 정부기구 설립 등을 권고했으나,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해발굴 재개 가능성이 작아지자 민간단체가 나섰다. 2014218일 한국전쟁유족회의 요청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조사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진실화해위 조사를 주도했던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팀장을 지낸 안경호 사무국장이 조사단을 이끌었다.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단원들이 이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 터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조사단 제공

 

조사단은 같은 달 24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718명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에 들어가 유해 39구를 수습했다. 이듬해 2월에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추정 희생자 1800~7000)에서 유해 20구를, 20162월에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36)에서 유해 21구를 찾았다. 20172월에는 진주 용산고개 1차 발굴지에서 100m 떨어진 곳을 조사해 유해 38구를 수습했고 20182월에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150~300)에서 208구를 찾았다. 지난해 3월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150)에서는 40구를, 같은 해 5~9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수십명)에서는 6구를 수습하는 등 조사단은 이달 청주 여우굴까지 8차례에 걸친 조사를 진행해 희생자 380명의 넋을 달랬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북 경산시 폐코발트광산에서 수습한 유해에 조화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3500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한달 1억원가량이 드는 발굴조사를 8차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기초자치단체들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조사단이 활동에 들어가자 2013년부터 최근까지 제주를 제외한 16개 광역시·도와 60개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를 제정하며 유골발굴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20174차까지는 후원금으로 발굴비용을 충당했지만 2018년부터는 아산시와 충북도 등에서 지방보조금사업으로 비용을 지원받았다. 중앙정부가 해야 될 일을 안 하니까 지방정부가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족들과 전문가들은 지난달 20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올해 말 재가동 예정인 2기 진실화해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기는 1기보다 활동기간(최대 4)이 짧고 위원 규모(9)도 적지만 정부 유해발굴 전문기구 설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박선주 교수는 발굴된 유해와 유족의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한번 하는 데 100만원 상당이 든다. 전체 규모로 봤을 때 한국전쟁 유해발굴은 자치단체나 한시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 상설기구를 만들고 유해 전문가를 양성해 연구자료를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분열된 한국 사회를 통합하려면 지난 70년간 빨갱이로 몰려 땅속에 잠자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야 한다고 했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민간인 매장 추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설치한 안내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3일동안 부역자들 씨 말리겠다며 젖먹이까지 끌고 갔다

1951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

일제 폐탄광서 쏟아진 비녀·구슬

발굴 유해 대다수가 여성·어린이

아산·천안 곳곳에 보복살해흔적

2018년 봄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에서 어린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208명의 여성과 아이 등의 유해가 발굴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70년 전 한반도는 적의로 가득 찬 생지옥이었다. 적의 가족이기에 또는 적을 이롭게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학살이 이뤄졌다. 전세가 역전되자 반대편에서 보복에 나섰다. 피해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친척끼리도 총부리를 겨눴다. 그런 야만의 세월 동안 이뤄진 민간인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념 차이에서 시작한 한국전쟁은 사실 거대한 보복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가운데 덜 알려진 여성과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에 주목했다. 참혹했던 사건과 함께 유해발굴사업 현주소,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과 올바른 과거청산 해법 등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구슬과 비녀.

아이들이 죽던 겨울은 많은 눈이 내렸다. 19511월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폐탄광 부지까지 왔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차마 울지 못했다.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의 엠(M)1·카빈이 200여명의 주민들을 향해 불을 뿜을 때, 엄마들이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쌌다. 아이들은 구슬을 손에 꼭 쥔 채 엄마와 함께 죽었다. 아이들은 사회주의가 뭔지 알지 못했다. 엄마와 아이들이 죽은 자리에서 비녀와 구슬이 발굴됐다. 이들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3리 마을회관에서 20분 넘게 풀숲을 헤치고 도착한 야산 중턱. ‘부역혐의 사건이라는 철제 표시판 하나가 이곳이 민간인 학살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른바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2018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208구를 수습했다. 조사 결과 어른 150명의 유해 중 131(85%)가 여성이었고, 58구가 어린이 유해였다. 부녀자들이 착용한 ()비녀 89점과 어린이 장난감, 학살에 사용된 M1·카빈총 탄피도 다수 발견됐다.

 

발굴 작업에 참여한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제 때 폐탄광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뒤엉켜 발견됐고, 예쁜 은비녀와 꽃단추, 아이 신발 등도 함께 나왔어요. 다른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건장한 남성 유골이 대다수인데 이곳에선 여자와 아이들의 유골이 주로 발견돼 현장 관계자들도 많이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폐탄광터에서 발견된 은비녀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지난 2009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19509월 말부터 19511월 초까지 김석남(金石男, 사건번호 다-117) 등 최소 77명 이상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배방면 남리 배방산(성재산) 방공호, 배방면 수철리(세일) 폐금광, 염치면 대동리(황골) 새지기, 염치면 산양1(남산말) 방공호, 선장면 군덕리 쇠판이골, 탕정면 용두리1구 뒷산, 그리고 신창면 일대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산과 천안 일대의 민간인들이 설화산으로 끌려와 집단학살됐다. 주변 마을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학살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폐탄광 부지에 많은 구덩이가 파여 있어 주검을 묻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진짜 부역 활동을 한 남성들은 다 도망간 뒤 남은 부인과 가족들만 억울하게 희생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학살 현장이라고 했다.

임현재씨가 설화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유해가 발굴된 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이 마을에 평생 살았다는 임현재(84)씨는 어머니와 살던 예전 집이 폐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줄줄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봤다한참 뒤 총소리가 빗발쳤고 군인들이 줄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어머니와 나는 겁에 질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이 지난 뒤 소 먹일 풀을 베러 뒷산에 갔을 때 흙더미에서 쏟아지는 사람 유골을 보고 놀랐던 기억도 있고, 동네 개가 뒷산에서 사람 뼈를 물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의 시작은 1950927일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충남 아산 염치면(현 염치읍)에는 대한청년단, 태극동맹 등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마을 치안대가 급조됐다. “부역자들의 씨를 말리겠다며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은 치안대는 낫과 삽 등을 이용해 부역 혐의자와 가족 등 80여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학살은 3일 동안 계속됐다. 시신들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새지기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이었다. 군경이 아산 지역에 배치된 시점은 101일이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주민들에 의한 사적인 집단살해가 벌어진 것이었다.

6·25전쟁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 후손과 이들의 좌익 혐의를 밀고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선 가해자 후손이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전쟁 이전에는 두 집터와 주변 땅 모두가 피해자 가족 소유였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대부분의 땅을 가해자 가족이 빼앗았다. 옥기원 기자

 

당시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 이아무개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생자들은 젖먹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줄 세워져 마을 공동묘지 새지기로 끌려갔다. 죽이려고 가는 사람보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끌려가던 중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가 무성했던 콩밭으로 몸을 굴려 숨어 있다가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아 들키지 않고 용케 살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생매장되었다.” 처형과 상관없는 주민들은 희생 장소로 몰려가 구경했다고 한다.

 

새지기 사건은 부역자 처벌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내막에는 집성촌 내 친척 사이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안대는 홍사학씨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3대에 걸친 대가족 14명을 살해했다. 학살 주도자는 홍사학씨와 같은 홍씨 집안의 홍○○ ○○ 형제로, 동생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 쪽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 직전 우익으로 전향해 좌익 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이들 홍씨 형제는 당시 마을 유지였던 홍사학씨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사학과 그의 가족을 집단살해한 홍씨 형제는 홍사학의 남은 집과 땅, 세간살이를 모두 차지했다. 이때 마을의 채씨와 이씨 가족 수십명도 마을 공동묘지에서 몰살당했다.

세상이 언제 또 바뀔지 알고 그런 걸 말해.” 목격자인 이아무개(87) 할아버지는 70년 전 사건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으로 수십명의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던 그 미친 세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다른 원한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모두 숨졌지만, 가해자 후손과 일부 살아남은 피해자 후손들이 지금도 한마을에서 마주 보고 살고 있다. 홍사학씨와 같은 문중인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전쟁이 만든 좌우익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몰살하고 친인척을 원수로 만들었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재발하지 않게 진실이 규명되고 기록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 간 학살이 자행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새지기의 유해 매장지 일대를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새지기 사건은 홍사학씨 양자 홍민선(74)씨가 2006년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5월엔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굴 작업도 진행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박꽃님씨는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이 남아 있어 주민 중 누구도 유해가 매장된 장소나 당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아 발굴팀이 매우 고생했다유해 발굴 추정지가 마을 공동묘지와 밭으로 사용되면서 유해들이 많이 훼손돼 예상보다 적은 수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발굴팀은 한달 남짓의 작업 끝에 훼손 상태가 심한 팔, 허벅지뼈 일부를 찾았고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7명의 유해인 것으로 판정됐다.

 

아산 지역의 유해 매장지는 8곳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방읍 설화산과 탕정면 용두1, 염치읍 새지기 등 3곳만 발굴이 진행됐다. 염치읍 새지기에선 7명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탕정면 용두1리에서는 도로 공사 등으로 일대가 훼손돼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하지만 배방읍 성재산같이 유해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현장도 남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희열(85)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시켜서 (성재산에서) 방공호를 팠고, 국군이 아산을 수복한 뒤 그곳에 많은 사람이 묻혔다. 부역혐의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총소리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누리집에 게시된 아산 부역혐의 사건보고서에도 성재산 방공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를 목격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담겼다.

잔인했던 학살의 흔적은 7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학살된 공동묘지는 수풀이 무성했고, 부역혐의자들을 파묻었다는 폐탄광 구덩이들은 모두 유실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입구 팔각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네 뒷산에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마음이 불편했는데, 유해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내서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다.

 

홍남화 전 지회장은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어른들이 몇명 살아 계시지 않아 진실을 규명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더 늦기 전에 이념 학살의 아픈 역사를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유해들을 발굴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토대라고 강조했다.

아산(충남)/옥기원 기자 ok@hani.co.kr

 

빨갱이찍힌 순간부터산산이 부서진 일곱 가족의 삶

산산이 부서진 박온섭씨 가족

큰형은 보도연맹 소집에서 학살

미군에게 집단 성폭행 당한 뒤

둘째 누나는 스스로 삶 끝내고

계속된 비극에 어머니는 화병

박온섭씨, 가는 곳마다 경찰에 쫓겨

연좌제억울한 족쇄 끊겠다 다짐

태어나서 처음 취직한게 도의원

당선되니 더는 신경쓰지 않더라

박온섭 5남매. 왼쪽부터 큰누나 양섭, 작은누나 완섭, 큰형 홍섭, 작은형 주섭. 홍섭이 아기인 온섭을 안고 있다. 1939년 촬영된 유일한 형제들 사진이다.

 

큰형은 보도연맹으로 학살됐다. 작은형은 월북을 시도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둘째 누이는 미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큰매형은 빨치산 활동으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좌익활동에 연루돼 경찰에 고문을 당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었다. 충북 괴산에 사는 박온섭(82)씨가 겪은 한국전쟁이다. 충북도의원을 지낸 박씨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박동수는 청천면 송면리에서 논 20마지기(13200)와 담배밭 13마지기(8580)를 가진 부농이었다. 일꾼도 여럿 있었다. 큰형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는 1942년 청주농업학교를 나와 부산에서 축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충북도청 축산과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큰형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1940년대 후반 공무원을 그만두고, 박씨의 첫째 사위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1948년 둘째 형이 월북을 시도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나이 10살 때였다. 이듬해인 1949년 첫째 형이 경찰에 붙잡혔다. 괴산경찰서는 194910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박씨와 두 누나를 연행해 고문했다. 모진 구타와 고문 끝에 누나들은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6개월 동안 청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뒤 19504월에야 풀려났다.

박온섭이 한국전쟁 당시 집의 창고로 쓰던 건물 앞에 서 있다.

 

경찰에 체포된 뒤 전향한 큰형은 그사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만들어준다며 이승만 정부가 주도해 꾸린 전국적 관변단체였다.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군경이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큰형은 청주의 보도연맹원 소집으로 집을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다.

 

큰형이 710일 청원군(현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분터골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지였다. 박만순 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운영위원장은 분터골 민간인 학살 목격자와 가해자 조사 때 박씨의 첫째 아들이 피해자로 확인됐다. 미신고자로 보고서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19507월 중순 충북 괴산군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와 내무서(경찰서)를 만들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동네 노인들이 아버지 박씨를 찾아와 인민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사정했다. 아버지는 송면리 인민위원장으로, 첫째 딸은 여맹(여성동맹) 위원장으로 각각 임명됐다. 박씨 부녀는 북한군의 지시로 애국미를 걷고 농작물 실태조사 등을 수행했다. 아버지는 의용군을 모집하는 인민군의 재촉에 동네 일손이 없어서 힘들다고 둘러대며 마을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박온섭이 큰형 홍섭의 청주농업학교 졸업증서를 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군경은 19509월 말 괴산군을 수복했다. 아버지는 애국미 80여가마를 숨겼다가 북한 인민군 퇴각 뒤 동네 근처에 주둔한 국군과 마을 주민한테 나눠주었다. 덕분에 이들 부녀는 수복 뒤 부역 혐의로 또다시 고초를 겪진 않았다.

 

잠시 물러간 듯한 비극은 이윽고 다시 그들을 찾아왔다. 12, 집에 들이닥친 미군들이 둘째 누이를 조사할 것이 있다며 데려갔다. 누나는 18살이었다. 아버지 박씨가 밤에 무슨 조사를 하냐며 막아섰다. 군인들은 총과 완력으로 박씨를 제압한 뒤 울며 몸부림치는 둘째 딸을 끌고 갔다. 미군들한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둘째 누이는 처참한 몰골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딸의 모습에 통곡했다. 박씨는 둘째 딸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살피라고 말했다. 당시 12살이던 박온섭씨는 둘째 누나 말고도 이평리·송정리 등 이웃 동네에서도 여러 처녀가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일부 처녀들은 근처 산골짜기로 몸을 피했다고 말했다.

 

1951년 새해부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두 아들(둘째 아들은 이후 생환)과 첫째 사위의 행방불명, 미군들한테 성폭행당한 딸, 빨갱이 집안이라는 멸시를 견디지 못해 화병이 난 것이었다. 1년 동안 앓던 어머니는 그해 124일 숨졌다. 박온섭씨는 돌아가시기 전 한달 동안 정신을 잃었고, 온몸이 붓더니 결국 돌아가셨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다. 고생만 했다. 화병이라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1952년 북한 인민군과 함께 활동했던 첫째 매형이 처가에 들렀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미군한테 성폭행당한 둘째 누나는 인근 마을 청년과 서둘러 혼인했지만 아이 둘을 남긴 채 1959년 결국 스스로 삶을 끝냈다.

 

박씨가 송면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배워도 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지게질을 시켰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담배 농사를 지었다. ‘빨갱이 집안 자식손가락질을 참기 어려웠던 박씨는 17살 때 고향을 떠나 충주 공장에 들어갔지만 며칠 뒤 경찰이 찾아오는 바람에 공장에서 쫓겨났다. 약국, 음식점 등의 직원으로 취직했을 때도 경찰에 쫓겨 일을 그만둬야 했다. 지독한 연좌제였다. 선원이 되려고 부산에 갔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다. 박씨는 다른 집 형들은 동생을 챙겨주기 바쁜데, 우리 형들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원수로 생각했다. 분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1974년 아버지가 숨진 뒤 방황했던 박씨는 연좌제의 족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답답한 처지가 억울해 남을 해치려는 나쁜 생각도 했다. 계속 당하다 보니 오기가 생겼고, 국회의원을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동네 크고 작은 일에 앞장섰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지역 정치권의 문을 두드렸다. 1975년 괴산군 행정자문위원으로 일했고, 19812, ‘체육관 선거인 대통령선거인단에도 당선돼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1988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위촉, 1995년 민주당 충북도당 부위원장에 이어 제5대 충북도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고 나니, 보안 당국에서 더 이상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빨갱이 꼬리표도 사라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직한 것이 도의원이라고 말했다. 현재 박씨는 화양서원 등 지역 문화재 복원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가 큰형을 괴산군 피해자로 확인했지만, 박씨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 “70년 동안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속으로 삭이고 살았다. 그렇게 오늘까지 버텼다. 괴롭던 옛일을 다시 떠올리기가 힘들다고 한 그는 한국전쟁 70주년의 회한을 묻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처럼 말했다. “전쟁으로 많은 양민이 피해를 입었고 희생됐다.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 유족의 억울함을 완전히 풀어줬으면 좋겠다. 열강의 흥정으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고 결국 동족끼리 싸웠고, 지금도 총을 겨누고 있다. 민족이 하나로 뭉쳐 다 같이 용서하고,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괴산(충북)/·사진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우익 방앗간 쓴다고, “국군 환영외쳤다고좌익도 우익 집단학살

 

[6·25전쟁 70]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인민군·좌익 반동세력 처단들어

전쟁기간 총 12만명 학살 추산

전세 역전 뒤엔 우익 보복 이어져

군경 민간인 학살10배 달해

영화 <장마>에서 완장을 찬 좌익 청년들이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전쟁기 전국 곳곳에선 인민군의 비호 아래 지방 좌익세력의 우익세력에 대한 집단학살 사건도 발생했다. 전선이 남북으로 이동하면서 좌익과 우익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반복됐다.

 

특히 남한 중심부에 위치한 충남은 교통·군사의 요충지로 좌우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충남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충남지역에서만 인민위원회 등 좌익에 의해 대한청년단과 국민회 등 우익단체 활동을 한 민간인 2천여명이 학살됐다.

 

대부분은 지역 반동세력을 처단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경찰 등 우익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이 된 사례도 있었다. 서천군 문산면에서는 양정목(당시 24)씨와 그의 동생이 경찰 형제라는 이유로 살해됐다. 당시 인민위원회는 19508월 초 양씨 형제와 함께 경찰관 15명을 붙잡았는데, 형제가 경찰이니깐 더 악랄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형제 경찰 등 3명을 총살하고 나머지는 풀어줬다. 논산 부적면에선 마을 이장(안종구·당시 30)의 형이 국민회장 활동을 한 우익 집안이라는 이유로 안씨 일가 13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안씨의 형과 동생, 그들의 부인 등은 국군의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던 1950928일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 전깃줄로 손이 묶인 채 총살당한 뒤 매장됐다. 서천군 종천면에서는 마을 두곳의 방앗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우파와 좌파로 갈렸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좌파 방앗간 세력이 우파 방앗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우익 활동과 큰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 살해당한 사건도 있었다. 1950929일 공주 유구면(현 유구읍)에서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국군 환영 만세를 외치던 마을 한문선생님 정종현(당시 43) 8명이 마을 인민위원회에 붙잡혀 다리 밑에서 살해됐다. 사흘 뒤 경찰에 의해 수습된 이들의 시신에서는 창에 찔린 자국과 총상의 흔적이 발견됐다.

 

대한민국통계연감을 보면 한국전쟁 기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122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군경 등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국군을 오가며 노역(방공호) 작업을 한 아산 배방면(현 배방읍) 김희열(85·당시 15)씨는 전쟁 전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던 이장과 우익세력(가족)이 좌익한테 죽임을 당한 뒤 전세가 역전된 다음 우익세력들이 더 악랄하게 좌익에 보복하는 일이 벌어졌다마을 주민들은 혹시나 좌우익 갈등에 휘말릴까 봐 하루하루를 숨죽이고 살았다고 했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광복 후 국가건설을 둘러싼 남북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와 무관한 민간인 수십만명의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한 것이라며 과거사를 청산하고 국민화합을 위해서라도 좌우를 막론한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옥기원 기자 ok@hani.co.kr

 

진상규명 시작도 못한성폭행이라는 학살

전선 이동하는 치안 공백기 틈타

좌우익 청년단·군인 등 범죄에도

집성촌 등 유족들 나서기 꺼리고

살해로 이어져 피해 파악 어려움

한국전쟁기 남북한 정규군과 미군, 우익 청년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저질러진 성폭력 사건은 비일비재했다. 전쟁이 보여주는 가장 추악한 단면이자 또 하나의 학살이었지만, 다른 학살사건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유족들이 피해를 호소하기 어려운데다, 성폭행 뒤 학살이 이뤄지면서 일반 피해자로 합산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은 탓이다. 간헐적으로 드러날 뿐, 전체적인 피해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성폭행 사건들은 사적 처형과 더불어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지 못했던 치안 공백기에 주로 발생했다. 한국전쟁의 게릴라전 특성상 전선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사적 보복에 따른 학살과 성폭력이 횡행했다.

 

19509~10, 충남 아산에선 좌우익 청년들에 의한 성폭행 학살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북한 인민군 점령기 때인 9월 배방면 인민위원회 청년들이 마을의 22살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 국군이 수복한 10월에는 우익 청년단들이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집안 여성들을 농락한 뒤 학살했다. 당시 우익 청년단원들은 빨갱이 가족을 처단한다며 좌익활동 뒤 달아난 배방국민학교 교감을 대신해 그의 아내를 성폭행한 뒤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배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목격했던 마을 주민 김희열(85)씨는 그때는 보복이 두려워 모두가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104일에는 탕정국민학교 교사 김지선(당시 21안옥훈(22)씨가 탕정면사무소 곡물 창고로 끌려갔다. 인민군 점령 때 학생들에게 공산당 노래와 인공기 그리기를 가르쳤다는 혐의였다. 김씨와 안씨는 이후 10여일 동안 수차례 성폭행당한 뒤 마을 뒷산에서 총살됐다. 당시 15살이던 채수선(85)씨는 우익 청년단이 이들의 옷을 벗기고 마을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라고 시킨 모습을 본 목격자도 있다. 완장을 차고 총을 든 놈들에게 마을 여성들은 노리개에 불과했다. 남아무개·원아무개·김아무개가 그들이라고 증언했다.

 

19511월 충북 충주 살미면 신당리 새터말에서는 안아무개씨의 딸이 군인들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안씨의 딸은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으로 일주일 뒤 숨졌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딸들을 김칫독에 숨기거나 얼굴을 까맣게 칠했다. 마을 주민 이아무개(82)씨는 “(군인들이) 동네 곳곳의 젊은 여자들을 붙잡아 성폭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엔 한국전쟁 당시 경남 산청경찰서 의용경찰이었던 민아무개가 빨갱이 마누라라고 잡아다가 잔인한 성고문을 했다고 진술한 기록도 있다.

 

김장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아산유족회장은 어르신들에게 딸의 치욕스러운 사건은 말하기 힘든 상처다. 아직 한마을에 피해자와 가해자 후손이 함께 사는 사례도 있어 나서기 힘든 경우도 있다고 했다. 박만순 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 운영위원장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등의 성폭행 사건들에 대해 언론, 정부 등을 통한 국민 공론화가 현재까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희생자 유족 등의 증언과 뒷받침 증거 등을 확보해 전쟁범죄 기록으로 분명히 남겨야 한다.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기원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빨갱이 자식 설움, 경찰 사찰, 연좌제, 가난까지유족의 70년 고통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은행 취직하고도 신원 조회에 걸려

빨갱이 낙인 농사지을 땅도 못얻어

유족 대부분은 저학력·40%는 무직

과거사법 반쪽배보상안 추가를

“31살 때 은행에 취직했는데 출근하라는 연락이 없더라고. 알아보니까 신원조회에서 걸렸다는 것이여. 연좌제인지 뭔지 고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살았제.”

충북 청주 고은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발굴조사 현장에서 만난 박남순(77) 청주·청원 보도연맹 분터골 유족회장은 한 많은 70년 세월을 토로했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보도연맹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195077일 군인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박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어렵게 살았다. 한밤중에 경찰이 신발도 벗지 않고 집에 들어와 가족들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경우는 예삿일이었다. 그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창원 보도연맹 피해자 유족 문강자(79)씨 또한 빨갱이 자식이라는 소리가 지긋지긋하다. 문씨의 아버지는 195088일 갑자기 끌려가 다음날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희생됐다. 빨갱이 낙인에 농사지을 땅을 얻기도 힘들었다. 문씨 오빠는 동네 유지였던 외갓집의 도움으로 공무원이 됐지만 30여년 동안 한직을 떠돌다 진급도 못 하고 9급으로 퇴직했다. 문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빨갱이 손가락질, 삶의 고단함만 남았다. 우리 가족의 원통함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20059, 서울 종로에서 열린 ‘1945-2005 과거청산 전진대회에서 진관 스님이 채의진 전국유족협의회 상임공동대표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채 공동대표는 민간인학살규명법 제정 때까지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16년 동안 머리카락을 길러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구철도 노조원 간부였던 나정태(73)씨의 아버지는 1946101일 친일경찰을 채용하고 쌀을 강제로 걷는 미 군정에 항의한 대구 10월 사건에 참여했다가 1950년까지 복역했다. 같은 해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은 나씨 아버지를 연행했고, 76일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처형했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을 나갔고, 여동생은 남의 집으로, 자신은 큰집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씨는 1983<한국방송>의 이산가족 찾기에서 여동생을 찾았지만 정부의 감시가 시작됐다. 나씨는 “201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2016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으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일부 국민은 희생자 유족을 여전히 빨갱이라고 한다. 국민 모두가 희생자 유족의 억울함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2006~2007년 집단희생자 가족 385명의 심리적 피해 현황을 조사한 결과 38.9%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 대부분은 저학력이었고 40%는 무직이었다. 유족들은 진실규명 후 경제적 배상, 명예 회복, 국가의 공개사과, 추모위령제 순으로 국가의 조치를 요구했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장은 지난달 20일 통과한 과거사법은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상안이 빠진 반쪽짜리다. 21대 국회에서 논의를 통해 반드시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보상안이 추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희 김영동 기자 kimyh@hani.co.kr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규명은 한반도 평화체제전제조건이다

쿠데타 직후 대구·경남북 지역

전국 유족회 간부들 체포·수감

, 제주·거창 합장묘 파헤치고

비석의 글자를 뭉개는 짓 벌여

학살 문제는 단순히 유족들의

민원해결 사안으로 볼 수 없어

민간인학살 조사, 전쟁 종식과

남북 평화체제 수립 전제조건

19601113일 경북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경주피학살자유족회가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당시 행사에는 경찰서장·시장·국회의원도 참석했지만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북괴에 이로운 일을 했다며 유족회 회장인 김하종씨만 잡혀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무덤도 없는 영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전쟁기 학살 사건에 대한 폭로가 봇물 터지듯이 나왔다. 곧이어 대구·경북 각 지역에서 유족들이 집결했을 때 이런 구호가 내걸렸다. 남편을 졸지에 잃은 수백명의 청상과부들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울고 있는 모습은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처연한 현장이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비극, 아니 단군 이래 한반도에 살아온 한국인들끼리 자행한 최대의 살육이 바로 한국전쟁 초기 1년 동안 남한 전역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 사건이었다.

 

8·15 해방 후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좌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중층적으로 겹쳐 발생했던 폭력적 갈등은 6·25 북한의 남침으로 마치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전국에서 상호 살육으로 비화했다. 전쟁의 방아쇠는 북한이 당겼으나, 위기에 몰려 후퇴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의 군과 경찰은 내부의 적이 두려워 남하하면서 전국의 모든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혐의자나 요주의 인물들을 싹 잡아다 죽였다. 그 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이후 군과 경찰과 우익 청년조직은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또다시 무참하게 학살했다.

 

물론 당시 잠시 남한을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은 지방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우익 가족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북으로 후퇴했다. 지리산, 전남 일대의 산악지역 주민들은 국군의 토벌작전 희생양이 되었고, 호남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인민군이 물러간 이후에도 좌우 주민들 간의 보복적 상호 살육이 계속돼, 전남 영광군의 경우 주민 3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셀 수 없는 성폭력과 재산 탈취도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한국 사회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산송장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시절 기자회견을 하는 김동춘 교수. 뒤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송기인 위원장(신부)이 앉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군부세력이 내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구호는 사실 4·19 혁명 이후 불길처럼 일어난 학살 사건 고발과 보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진상조사 작업에 대한 한국군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쿠데타 직후 그들은 대구·경북·경남 지역에서 시작된 전국 유족회 간부들을 제일 먼저 체포·수감하였고, 제주·거창 등지에서 유족들이 조성해놓은 합장묘를 파헤치고 세워놓은 비석의 글자를 뭉개고 비석을 쪼개서 땅속에 다시 묻었다. 그들에게 학살은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기억이었다.

 

유족들은 이후 30여년의 세월 동안 이웃의 배척과 사회의 냉대를 겪어야 했다. 대구·마산 등지에 모였던 유족 중 부모들은 거의 사망했고, 젊은 아내가 할머니가 된 90년대 중반 이후에야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각 지역에서 유족회가 조직되고 언론과 시민사회도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였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운동이 전개됐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과거사법 통과에 적극성을 보였으며, 결국 사건 발생 이후 55년이 지난 2005년에 드디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게 됐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이 조사차 어떤 유족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니, 1960년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조사를 기억하고 있던 할머니는 “40년 만에 전화를 하셨네요라고 원망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반세기 이상의 세월과 민주화라는 정치 변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등장도 대다수 유족들의 입을 열게 하거나 진상규명 신청을 하거나, 억울함을 공개적으로 외치게 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고, 학살의 가해자들이 전쟁 영웅으로 공식화되어 추앙받는 세상에서 이들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드러냈다가 또다시 탄압의 칼을 맞지 않을까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회원들이 201012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정금자(61·경주)씨가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출범 후 1년이라는 짧은 신청 시간, 그리고 홍보 예산이 거의 없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당시 상임위원이었던 나는 송기인 위원장(천주교 신부)과 전국 지방자치단체 순회를 하면서 이런 위원회가 출범했으니 주민들에게 신청 홍보를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돌아다녔고, 직원들은 서울역 케이티엑스(KTX)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서 추석 귀성객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줬다. 홍보를 위한 당시 진실화해위원회의 눈물겨운 노력은, 이후 서울의 모든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마다 붙어 있던 ‘6·25 납북자 신고홍보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홍보 활동을 했음에도 유족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당수 지역이나 대도시의 유족들은 과거사 특별법은 물론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던 상당수의 유족들도 후환이 두려워 신청을 기피해 결국 신청자는 1만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이후 약 5년 동안 조사활동을 진행해 새로운 증언과 많은 자료를 확보했다. 또한 민간인 희생과 적대세력 사건 8천여 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여 유족들의 묵은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었다.

 

물론 진실화해위원회에 앞서 별도의 특별법이 통과되었던 제주 4·3, 거창산청함양 사건, 노근리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이미 진행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특별법은 주로 유족의 신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사전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진실, 가해자나 가해 명령계통, 사건 이후 유족들이 당한 고통, 성폭력과 연좌제 피해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결국 분단과 휴전체제의 제약 속에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 사건 조사는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최소로 위로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부의 공식 사과, 위령사업 등 최소한의 것은 이행되었으나, 추가 유해 발굴, 보상 혹은 배상, 전국 단위의 위령시설 혹은 평화공원 설립, 작전권을 갖고 있었던 미국과의 추가 협의, 과거사 재단의 설립 등의 권고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201010, 충남 아산시 아산시민문화복지센터에서 ‘60주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아산지역 합동위령제가 열려, 참석한 유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날 위령제는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위해 60년 만에 처음 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아든 유족들은 개별적으로 정부를 향해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법원은 대체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보상 결정을 내렸다. 일부 유족들은 재단을 설립해 추가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일괄 배·보상 조치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리라고 예상되었던 문제들, 즉 진상규명이 불능처리된 유족이나 미신청 유족들의 불만, 앞서 진상조사를 했던 제주 4·3 등의 다른 유족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이 계속 제기됐다. 이명박 정부가 배·보상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이것을 일괄 처리했더라면 이 모든 문제는 훨씬 더 깔끔하게 처리될 수 있었으나, 그들이 위원회 권고를 무시한 결과 매우 불합리한 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난달, 20대 국회 막바지에 과거사법이 통과되어, 곧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바라보게 된 것은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2004년 통과된 법과 달리 이번에 통과된 과거사법은 사망 사건뿐만 아니라 상해·실종 사건까지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동안의 조사 기간과 2년의 신청 기간을 둔 점, 이전 위원회에서 진상규명 불능 처리된 사건도 재조사를 할 수 있게 한 점, 비록 비공개이나 청문회 조항이 들어간 점 등 진일보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난 위원회가 종료되고 10년의 세월이 더 지났기 때문에 가해자나 현장 목격자의 증언 청취는 더 어려워졌고, 정부 자료의 확보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유족 배·보상, 재단 설립 등은 별도의 특별법이 제정돼야 하기 때문에 이후 국회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문제는 단순히 유족들의 민원 해결 사안이 아니다. 아직 학살의 전체적인 그림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피해의 성격과 규모, 가해의 명령계통, 미군의 한국군 지휘 책임, 그리고 이러한 비극을 가져오게 된 남북한 정권의 책임과 정치사회적 조건 등을 모두 고려하고 분석해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이것은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다년간 연구 조사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전쟁의 종식과 남북한 평화체제의 수립을 향한 길에서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는 가장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고, 또한 학살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전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사상 검증에 아비규환"..지옥도라 불린 섬

전쟁 중에는, 아군이 상대편에 물들지 않도록 세뇌하고 그마저도 믿을 수 없어서 사상을 검증했습니다.

 

그 상징적인 공간이 전쟁 포로들이 지옥도라고 부른 용초도입니다. 전쟁 때는 북한군 포로를 수용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선 북에 잡혀 있던 국군 포로를 다시 가두었습니다.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시 영상과 함께 이재민 기자가 이어서 보도합니다.

리포트 포로 교환 협상이 한창이던 1952, 남쪽 포로수용소에서는 반란과 진압이 반복됐습니다. 급기야 포로수용소 도드소장이 포로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선우용수/당시 인민군 포로] "우리들 자체가 우익과 좌익이 갈렸어요. 발 두 개를 잡아서, 텐트 가운데에서 끌고 나가는 거예요. 끌고 나가면 죽이는 거예요."

 

포로 교환이 다가오자 성향에 따라 포로들을 분리하기 위한 분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착검을 한 미군 경계 속에, 수용소 안으로 최루탄을 잇따라 투척합니다.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쏟아져 나오고, 쓰러진 포로들 위로 계속 최루탄이 쏟아집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진압된 이른바 '악질' 포로들이 분산된 곳은 통영을 거쳐 배로 다시 40분을 가야하는 용초도였습니다.

 

[김두진/용초도 주민] "딱 입을 벌렸지. 입을 벌리니까 처음에 도저가 내려오더라고, 불도저. 차들이 계속 연달아 나오는 거야 그 안에서. 나오더니 저쪽 산에다가 천막을 치는 거예요."

마을 주민들이 강제로 내몰린 자리에는 속속 북한군 포로들이 도착했습니다. 해안가와 산등성이를 따라, 섬 전체에 포로 수용소 16동이 세워졌습니다.

 

[강기재/추봉도 주민] "철조망도 치고. 포로들도 자기들이 지낼 막사, 철조망을 자기들이 만든 거예요. 미리 만들어 놓고 입주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 보면 참 전쟁치고는 이상했지"

'인민군 만세'.

시멘트 담 위에는 아직도 포로들이 새겨 넣은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장교 2600명을 포함한 북한군 포로는 8000여명.

포로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고 총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남조/용초도 주민] "합동 노래처럼 부르는 거야, '인민의 총알을 받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으면 뭐가 나타나는 거야, 총 소리가. , , 하고."

공식 기록으로 북한군 25명이 사망했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북한군 포로들은 1953년 포로 교환 때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갔습니다.

비어 있는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북한군에 잡혔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휴전과 함께 돌아온 국군 포로 78백여명.

집이 아니라, 북한군 수용소였던 용초도로 실려갔습니다.공산주의에 물들었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국군 포로들은 사상 검증을 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갑생/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실제로 돌아와 보니까 심문하는 방식이 적으로 먼저 간주하고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발을 하게끔 하는 그런 강압성"

 

국군 포로는 군대에 복귀시킬 '', 처단해야 하는 '', 고향으로 돌려보낼 ''으로 분류됐습니다. 북한 노래를 알고 있는지, 포로 수용소에서 간부로 활동했는지가 기준이었습니다.

 

[박진홍/귀환 국군 포로] "이북의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도 자살이라고 하는 건 전혀 없었습니다. 살아 돌아와서 자살하는 그런 광경을 보니까"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군 포로 120여명을 '처단 대상'으로 분류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은 16.260여명은 '미 소집자'라는 이름으로 분류해 행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영상 취재: 방종혁 / 영상 편집: 유다혜 / 화면 제공: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경남 거제시·통영시)이재민 기자 (epic@mbc.co.kr)

 

한국전쟁70주년특집] 공군 폭격 '초토화 작전'

한국전쟁이 터지고 보름쯤 뒤인 1950711. 전북 이리시 이리역 상공에 미국극동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나타났다. 당시 이리 지역은 전선도 아니었고, 적군의 징후도 없었다. 그러나 B-29는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등에 폭탄을 퍼부었다. 느닷없는 폭격으로 이리역 철도 직원과 승객, 인근 주민 등 최소 91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미공군 B-29의 이리역 오폭 사건 2달 뒤인 1950916일 이리 철도 조차장을 폭격하는 미공군 B-26.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50910, 인천상륙작전을 5일 앞두고 미 해병대 소속 F4U 전폭기가 인천 월미도 상공에 나타났다. 콜새르라고도 불리는 이 전폭기는 양 날개에 소이탄의 일종인 네이팜탄을 한 개씩 장착하고 있었다. F4U 편대는 월미도 촌락에 네이팜탄 등을 투하해 마을을 불태우고 집밖으로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기총소사까지 했다.

 

지난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날 미 해병대 15항모전단 전폭기 총 33대가 월미도 동쪽 마을에 세 차례에 걸쳐 네이팜탄 95발을 퍼붓고 기관포까지 발사한 사실을 확인했다. 미군의 월미도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100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19509, 미군 폭격으로 불타는 월미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1951120, 미국 공군 F-51 머스탱과 F-80 슈팅스타 전투기 10여 대가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곡계굴 일대를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당시 곡계굴에는 피난민과 인근 주민 300여 명이 전화를 피해 숨어있다가 네이팜탄 불길과 연기에 참변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곡계굴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는 모두 167명이다. 피난 온 무연고 사망자를 포함하면 희생자는 36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951120F-51 등 미공군 전투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내부에 대피해 있던 인근 주민과 피난민 등 300여 명이 사망한 충북 단양 곡계골 입구와 위령비.

 

이처럼 한국전쟁 기간에 미공군의 오폭 등으로 한반도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는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규명해 달라는 신청이 모두 172건 접수된 바 있다. 이 가운데 미군 공중폭격 관련 사건이 120건으로 70%를 차지했다. 희생자 수로 보면 공중폭격 관련 비율이 훨씬 높아 진다. 신고된 전체 희생자 5천여 명 가운데 무려 90%48백여 명이 미공군 폭격 관련 사망자였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안병욱 교수는 뉴스타파 인터뷰에서 6.25 전쟁 때 발생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의 경우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이 전체 발생 사건의 5-10%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조사 신청이 안 돼 조사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영상자료 열심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공군 폭격 영상 기록을 열람, 수집하는 뉴스타파 취재진

 

뉴스타파는 지난해부터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당시 미공군 작전 영상기록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서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군이 직접 촬영한 폭격 영상 46, 7시간 분량을 발굴했다. 대부분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영상들이다.

취재진은 이 영상을 분석해서 한국전쟁 때 미공군이 군사적 목표물뿐 아니라 민간인 거주지역 등에도 무차별 폭격을 가한 사실을 생생한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미 공군은 전쟁 초기에는 군사 목표를 정밀타격하는 전술폭격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195011월부터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군사적 목표뿐 아니라 대도시를 무차별 융단폭격해 초토화시키는 전술폭격정책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미공군은 이른바 싹쓸이 폭격에 가장 효과적인 소이탄의 일종인 네이팜탄을 마구잡이로 활용했다. 미군이 한국전쟁 3년간 한반도에 투하한 네이팜탄은 32,357톤에 이른다.

미공군이 한국전쟁 작전 중 소이탄인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장면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김용진/ 뉴스타파

 

굶어죽고, 맞아죽고... 어느 부대에서 일어난 참상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진실위 자료

 

19501217일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예비병의 성격이 강했다. 국민방위군 창설 이전에 이미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와 경상남·북도에 49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19511월 중공군이 남침하자 이승만 정권은 몇 십만 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급속히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1951129일이었다. 그 내역은 국민방위군 장병 수를 50만 명으로 잡고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 연료비, 잡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장정들의 하루 식량이 1인당 4홉으로 당시 55작이었던 전쟁포로보다도 적었다. 또한 이 예산에는 교육대의 운영비, 장병들의 피복비, 의료비 등과 장교와 기간병에 대한 급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전 이들의 소집장소는 지역별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서울은 창덕궁, 경기북부지역은 안산초등학교, 경기남부수원은 수원공설운동장, 인천은 축현초등학교 등이었다. 그렇게 모인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 100200명씩을 편성해 인솔자를 붙여 남하시켰다.

 

당시 유엔군이 모든 도로를 주 보급로로 지정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국민방위군은 샛길, 산길 등을 엄동설한에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남하 경로는 서울의 경우 창경궁-덕소-양평-여주-괴산-문경새재-문경-상주-영천-경산을 거쳐 부산·마산·진주·울산·통영·제주 방면 등으로 나뉘어 가는 것이었다.

 

부족한 식량과 지휘관들의 횡령으로 국민방위군은 배를 굶주린 채 걷거나 해군 함정을 타고 남쪽의 교육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충분한 보급품이나 시설이 없었다. 결국 동상·기아·질병 등으로 수만 명 사상자가 속출하는 참상이 이어졌다.

 

당시 하동지역 교육대장 차연홍은 19511월의 국민방위군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식 4, 부식비 25원은 빠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만 축내지 않고 장정들에게 급식했었던들 허기져 쓰러지는 일은 없이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 운영비가 전혀 지급되지 않아 부득이 부식비 일부를 전용할 수밖에 없었고, 또 수령해 오는 양곡도 으레 가마당 6, 7킬로 이상씩이 축난 것이었다. 사령부에 항의했으나 회답은 번번이 '양해하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지 않나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교육대의 운영을 하나부터 열까지 주민들의 협조로 감당했다. 볼 일이 있어 대구 사령부에 갔다. 일과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으레 사령부 간부들은 시내 요정에서 찾기가 일쑤였다. 요정에 찾아가 보면 돈을 수북이 쌓아놓고 '섰다'판을 벌이고 있곤 했다.

 

항상 기아에 시달렸다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숙식은 또 인솔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도착한 마을에서 이장이 알아서 숙소를 배정해주고 식사도 민가에서 해주는 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늦게 도착하면 아예 밥이 없었다. 또한 매일 수천 명씩 몰려드는 장정들을 계속 먹일 식량이 없었다. 그 결과 국민방위군 대부분은 항상 기아에 시달렸다.

 

남하하는 국민방위군을 따라 떡이나 엿 등을 파는 행상이 도로변에 나와 있기도 했다. 일부 국민방위군은 자비로 음식을 사 먹기도 했으나 돈이 별로 없던 대부분의 국민방위군은 배가 고픈 나머지 행상의 음식을 일부러 발로 차 땅에 떨어지면 주워 먹거나 마구 달려들어 거지처럼 약탈했다.

 

많은 국민방위군이 열악한 시설에 있다 보니 전염병 등 질환도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을 치료할 의약품은 거의 없었다. 교육대 간부들은 그나마도 부족한 쌀이나 의약품을 상인들에게 팔아 횡령을 일삼았다. 심지어 간부들은 자유당 국회의원 30명에게 자기들이 횡령한 돈을 뇌물로 주기도 했다.

 

전염병 환자가 생기면 간부들은 환자를 닭장, 창고 등에 격리했다가 죽으면 들것에 실어 아무 곳에나 묻어버렸다. 그나마 교육대 근처에서 사망한 사람은 암매장지라도 추정할 수 있었으나, 귀향 도중 길가에서 죽은 국민방위군의 숫자는 파악조차 안 되었다. 사망해도 가족에게 거의 통지하지 않았다. 고향 친구가 살아 돌아와 가족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

 

국가 예산을 지원받는 국민방위군은 당연히 예산집행이나 군수물자 관리에 있어서 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통제가 안 됐다.

 

간부들이 부정과 횡령을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 정권이 이들에게 봉급을 아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군복도 횡령한 돈으로 만들어 입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시설에 수용되었던 국민방위군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배급된 식사량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란만 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다. 굶주림에 직면한 국민방위군은 민가에 뛰어들어 구걸이나 약탈을 하고,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 땅속의 풀뿌리, 정미소 벽에 붙은 왕겨, 인분을 뿌린 밭작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었다. 우물가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기도 했고, 배가 고파 바닷물을 마시다가 죽기도 했다. 밥을 훔쳐 먹다 간부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 국민방위군 수용소에 있었던 심재갑은 지난 2010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하루는 국민방위군 장교가 운동장에 모이게 하더니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호통이었다. 이 돈 때문에 제주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서 윽박질렀는데, 모두들 조용히 있자 한 사병을 불러내서 주머니와 내복을 뒤졌다. 돈이 발견되자 마구 몽둥이질을 해대면서 나머지 모두의 옷을 뒤지겠다고 하는 말에 모두 질겁하고 가진 돈을 다 내어놓았다. 그런데 이후 서귀포 국민학교에서의 국민방위군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20평 규모의 교실을 근 2백여 명이 사용해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운동장에 모여서 보면 모두들 기침을 하고 시커먼 가래침을 뱉어냈다.

 

식사는 주먹밥에 반찬은 소금국에 고사리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식사 시간이면 커다란 국통에 있는 고사리 하나라도 건져 먹기 위해 아비규환이었다. 우리들의 일과는 훈련을 하고 틈틈이 한라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행군 중에는 주민들이 말리던 썩은 고구마 조각을 주워 먹고, 한라산에서는 소나무 껍질이나 풀을 먹었다. 우물가를 지날 때는 시궁창에 버려진 밥찌꺼기들을 밥풀 하나하나를 닭이 쪼아 먹듯이 건져서 삼켰다. 인분을 잔뜩 뿌린 채소밭에 뛰어 들어가 당근이며 마늘 등을 씻지도 않고 입에 처넣었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

국민방위군이었던 박상규는 통영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진술했다.

백여 명이 이동해서 도착한 곳이 외딴 섬이야. 전에 있던 곳은 밥덩이가 주먹만 했는데, 여기서는 계란만 해. 또 바닷물에다 고구마 줄거리, 그걸 집어넣어서 국이라고 주는 거여. 그것도 받으면 건더기는 하나도 없어. 그냥 바닷물 끓인 것만 준단 말이야. 벌써 건더기는 다른 놈이 다 먹어버려.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거기서 계란만 한 밥덩이 하나를 100원씩에 팔아. 중대장이 팔아먹는 거라고. 우리에게 주는 주먹밥을 쪼개서 그걸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라고. 그렇게 한 달을 먹고 났더니 다리가 뒤틀려서 걷지를 못하겠더라고. 아주 삐쩍 말라가지고. 하루는 옆에 있는 젊은 사람이 낮에 바닷가에서 무슨 해초 같은 걸 뜯어 먹었어. 밤새 배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데, 병원이 있나 뭐가 있나. 그냥 내버려 뒀더니 아침에 죽었어. 제사를 지내주는데 밥 한 사발에 반찬 좀 올려놓고 전부 다 서서 초상을 치른 거지. 그리고 학교 뒤 산비탈을 파고서 그냥 묻었어. 그리고는 제사를 지낸 밥을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도 아니고 완전히 개, 돼지보다도 못한 꼴이지 뭐.

 

삼천포교육대 근처에서 두부 장사를 하던 강은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삼천포에는 강원도 사람들이 많이 왔다. 국민방위군 장교들은 방을 따로 얻어서 살림을 살았다. 방위군이 한 명 그 옆에서 심부름을 했다. 그 당시 삼천포 중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거기 있던 방위군들은 참 많이 죽었다. 수용된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잘 모른다.

 

그 사람들 가을에 잡혀왔는지 옷들이 얇았고 이는 바글바글했다. 추운데 이불도 없어서 동네 반별로 갖다주기도 하고, 78호씩 동네에서 돌아가면서 밥을 해주고 그랬다. 우리에게는 쌀을 주지도 않고 밥을 해달라고 하는 거였다. 내가 그때 두부 장사를 했는데, 거기서 나온 콩비지를 방위군들이 마구 와서 허락도 없이 다 먹었다. 그 사람들 이제 죽을 판이니까 옆에 친구고 뭐고 없었다.

 

방위군 식량이 나오기는 나왔다. 그런데 동사무소 마당에 식량을 쌓아놓고 장교들이 상인들 불러서 다 팔아먹었다. 쌀을 쌓아 올리기는 방위군들이 져 올렸는데, 또 그러다가 배가 고프니까 한 줌씩 훔쳐 먹다 걸리면 장교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안 주고 다 팔아먹었다.

 

교육대에서 저녁 때가 되면 대여섯씩 지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보면 다 죽은 사람이었다. 사람들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은 공동묘지에 다 갖다 묻었다. 여기서 살아간 사람이 몇 안 된다. 90%는 죽었다. 우리 집에 심부름하며 드나들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나는 살아갑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러 왔었다.

 

당시 사천에서 국민방위군을 보았던 변윤수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장교들이 착복한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보급 나온 쌀을 안 줬기 때문에 국민방위군 사람들이 감시망을 피해 민가에 와서 걸식을 하지 않았겠나. 국민방위군이 수용되었던 곳은 사천비행장 자리였다. 거기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다.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국민방위군 사람들 못 나오게 철망을 치고 보초도 세우고 그랬는데, 배가 고프니까 몰래 담을 넘어서 마을로 나왔던 사람들 중에는 모르고 간부 집에 들어갔다가 개 맞듯이 맞은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배가 고프니까 철망을 사이에 두고 장사꾼들에게 떡이나 빵을 물물교환으로 바꿔 먹기도 했다.

 

삼천포읍 암매장 추정지. 참고인이 가리키는 곳이 제2국민병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삼천포읍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현재 경작지가 되어버려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진실위 자료

 

"밥 훔쳐 먹다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진주교육대에서 수용되었던 김광식은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 당시 진주사범 정문에 국민방위군 제8교육대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처음엔 그곳에서 잤는데, 사람이 많아지니까 일렬로 사람을 세워서 그대로 눕게 했다. 나는 뒷사람 배를 베고 자고, 앞사람은 내 배를 베고 자고 그런 상황이었다. 교실 바닥에 가마니 깔고 잤는데 위생 상태가 엉망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엔 한 끼에 소금 주먹밥 하나씩 먹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견딜 만했다.

 

그러다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중대 편성(200)을 하고 이동했다. 중대는 철저히 지역을 섞어서 아는 사이를 다 갈라놓았다. 그런 후에 우리 중대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주먹밥 하나 먹고 하루 종일 이동을 했는데 밤 8시쯤 지리산 자락의 어느 허름한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개월을 1개 중대가 같이 보냈다. 거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철저히 민가하고 분리시켜서 만나지 못하게 했다. 완전히 고립되어서 민가에 먹을 것을 얻으러 갈 수도 없었다. 먹을 게 없으니까 다들 소나무 새순을 먹었는데 난 잘 먹지 못했다. 메뿌리라고 콩나물 같이 생긴 것이 있었는데, 보리밭 같은 땅속에서 재수가 좋으면 발견되는 것이다. 배가 너무 고프니까 그런 걸 항상 찾았다.

 

배급은 꼭 죽지 않을 만큼만 안남미로 만든 밥을 줬다. 중대장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는데, 우리 먹을 것도 모자란 판에 그 사람 가족들까지 먹여준 거다. 원래 4홉을 배급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한 2홉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밥그릇도 제각각이었는데, 국은 무슨 해초 같은 것으로 끓인 것이었다. 정말 배부르게 밥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3월 말이 되자 한 사람씩 기상할 때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보면 뻣뻣하게 굳어서 죽어 있었다. 매일 한두 사람씩 죽어나갔다. 그 사람들 다 굶어죽은 거다. 산 속이라서 죽으면 그냥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산속에다 묻어버렸다. 의약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날짜도 얘기해 주지 않아서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이 우리 중대에서만 열댓 명 되었다. 다른 중대는 잘 모른다. 그런데 밥 훔쳐 먹다 맞아죽은 사람도 있다. 상상도 못한다. 소가 똥을 싸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 냄새가 그렇게 구수했다. 잘 먹는 소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당시 김해읍장이던 허성룡은 그때 김해교육대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김해에 도착하던 날 밤 2명의 국민방위군이 죽자 마을사람들은 너무도 불쌍한 생각이 들어 널을 사다가 공동묘지에 안장해 주었다. 막걸리와 북어, 과일 두서너 개를 사다가 제를 지낸 후 상여가 나갔다. 그러나 꽃상여는 아니었다. 리어카에 널 두 개를 실은 후 흰 보자기를 덮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국민방위병의 죽음에 널을 쓴 장례식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일 23명씩의 장정이 죽어나니 널을 사댈 돈도 없었다. 그러니 자연 막걸리와 북어 한 마리를 놓고 지내주던 제마저 치워버렸다.

 

장정들이 몰려드니 사망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어떤 날은 10여 명씩 죽어나갔다. 일일이 장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막사 옆에 거적때기로 덮어두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한꺼번에 리어카에 실어다 공동묘지에 갖다 묻었다. 처음에는 봉분도 만들어 주었으나 그도 중단해 버렸다. 그날에 죽은 인원이 몇 명이든 한 구덩이에 몽땅 묻었다. 깊이 파려면 힘이 드니까 시체가 들어가서 안 보일 만큼만 파고는 슬슬 흙을 덮어버렸다.

 

"영양부족으로 대부분 사망"

당시 구포교육대 위병소 조장이었던 이동영은 그때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50) 12월경 약 9천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구포다리 옆에 생선창고를 치우고 수용했었다. 식량, 의약품 사정이 안 좋아 사망자가 많았다. 하루에 소량의 주먹밥만 제공되고 병이 들면 환자끼리 한곳에 모아놓았다. 이삼일에 한명 꼴로 죽어 나갔던 것 같다. 영양부족으로 대부분 사망했던 것 같다. 죽은 시체를 매장하는 곳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트럭에다 싣고 가는 것이 어디 멀리 가는 것 같았다.

 

창녕읍 주민으로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한태원은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 경기도, 강원도 사람들이 겨울에 무더기로 내려와서 여기 창락국민학교에 꽉 차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서 전염병이 나서 무더기로 거의 다 죽었다. 학교 너머가 공동묘지인데, 거기다 막 갖다 실어다가 묻었다. 이듬해 봄이 되니까 개가 시체 일부를 물고 오기도 하고 온갖 것을 다 물어 오고, 그 후 몇 해 동안 환경적으로 동네가 고통을 많이 당했다. 누가 찾아오지도 않고,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표지를 꽂아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찾을 수가 없다.

 

경산시 압량면 당리리 주민 이산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4 후퇴 즈음에 국민방위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 마구 몰려들었다. 동네 몇몇 창고에 50100명씩 수용했는데 밥을 못 줘가지고 봄이 되자 창고에서 기어 나와 '밥 좀 줘요, 밥 좀 줘요' 했다. 그런데 우리도 살기가 굉장히 곤란했거든. 도와주기가 쉽지 않았어. 원래 창고가 일본 사람들이 지었는데, 함석으로 만든 거요. 거기서 살아나간 사람이 얼마 없어. 거의 다 죽었어. 내려올 때는 다들 괜찮았어, 그런데 좀 있으니 죽기 시작하는데, 다 죽어 가는데 누가 그걸 치우겠어. 그 시체 처리를 우리 마을 반 단위로 배정을 시켰어. 그래서 우리 마을 공동묘지나 개울가에 그 죽은 사람들을 가마니에 싸가지고 가서 묻었어. 봉분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묻고 덮고 마는 거지. 처음에는 표지를 해놨지만, 나중엔 비가 오고 그러니 다 쓸려 내려가 버렸어. 우리 중학교 때(1953~55) 장마가 지면 시신이 다 드러나고 그랬어.

 

창녕읍 매장 추정지. 동네 주민이 가리키는 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세로 약 30m, 가로 약 100m가 제2국민병 암매장지로 추정된다. 진실위 자료

 

"너무 배가 고파 돌멩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김봉수는 경주교육대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거기서 내가 장질부사에 걸렸다. 의약품을 제대로 먹은 것은 없고 물을 끓여서 계속 먹었다. 다행히 병은 나았지만 나를 도와주시던 분이 오히려 병이 들었다. 그런데 그 병이 퍼지게 된 것이 그곳에 있던 장교들이 귀향하던 장정들을 또 끌고 온다. 그중에 병에 걸린 사람을 함께 수용하니 병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죽으면 연병장에 시신을 덮어놓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20명가량 죽음을 목격했다. 어디다 갖다 묻었는지는 잘 모른다.

 

공장이 엄청 커서 수백 명이 함께 있었다. 부대 편성은 하지도 않고 돼지처럼 우리를 몰아넣고 수용했다. 장소가 좁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배가 고프면 저녁에 몰래 나가서 동네에서 얻어먹곤 했다. 소금에 절인 작은 주먹밥 하나씩 세끼 나눠주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돌멩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밥 훔쳐 먹다 걸린 사람이 있었는데, 식기를 입에 물고 연병장 돌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전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은 자인교육대에서의 당시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17세 때인 195012월 말에 노량진에서 국민방위군으로 거리징집을 당했다. 기차 타고 남하했다가 자인교육대에 수용되어 19515월 중순 해산했다. 수용된 곳은 바닥에 가마니가 깔려있는 창고였다. 창고마다 6070명 정도 수용되었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으나 아무런 난방기구도 없이 내내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낮에는 훈련 받는 것도 아니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햇볕을 쬐며 이를 잡던 기억이 난다.

 

식사는 처음에는 주로 보리밥에 소금국이 나왔으나, 점점 사정이 악화되어 소금물을 뿌린 주먹밥으로 대체되었다. 입대할 때부터 환자인 대원들도 있었으나, 추위와 기아로 환자들이 날로 증가했다. 의료진이나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곳 지방의원에서 진찰을 받기도 하는 것 같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밤새 환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지냈고,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도 생겼다. 사망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피해가 많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승만이 195012월 무리하게 모집한 국민방위군은 그 다음해인 1951430'국민방위군설치법 폐지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4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뒤 국방부는 국민방위군 68만여 명을 소집해 질병, 동상 등에 의한 낙오 및 도망자를 제외하고 약 30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사망자는 1234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나머지 38만여 명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넉 달에 5만여 명이 죽다

국방부 발표와는 달리 국민방위군으로 5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부산일보>의 보도가 있었다. 또한 당시 국민방위군 피해 상황에 대한 국회보고서는 '팔십 퍼센트의 (국민방위군) 귀환 장정이 노력취업이 불가능하며, 그 중 대다수는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렵다'로 적고 있다. 진실위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수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했다. 불과 넉 달 만에 이승만 정권은 부패와 관리부실로 자국민 장정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한편 국민방위군 해체 후 귀향 장정에게는 쌀과 광목이 얼마씩 지급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으로 강제 소집된 후 사망이나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은 대부분 정부로부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희생자들은 국가에서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했다.

 

1951719일 결국 재심 군사재판정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등 관련자 5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이들은 그 해 813일 처형되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조사해 진실규명을 결정을 내린 진실위는 지난 2010년 아래와 같이 국가에 권고했다.

국가는 19501119518월경까지 국민방위군의 소집·수용 등의 과정에서 발생된 국민방위군의 사망·실종 등 전반적 실태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조사결과에 따라 사망자·실종자 등과 그 가족에게 공식적 사과, 위령제 실시,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및 전사 또는 순직자에 준하는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갖추는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국가는 위 진실위 권고사항에 대해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김성수(wadans)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