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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17.5.17~20.6.15

by 이성근 2020. 6. 29.

 

임경석의 역사극장-박열 동지 김중한, ‘모욕적 죽음, 비극적 망각

1927224일 경성에서 언론 인터뷰 때의 김중한(왼쪽). 19341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치보위부 심문을 받을 당시 초췌한 모습을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스탈린 집정 시기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 가운데 유동식이란 조선 사람이 있다. 일본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는 망명자였다. 그는 1933514일 체포당해 1년간이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는 끝내 자유를 얻지 못했다. 유죄로 간주된 그에게 극형이 선고됐다. 그리하여 1934521일 결국 총살되고 말았다. 향년 33살이었다.

 

유동식의 혐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행위를 범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근거가 있는 것일까? 소련 오게페우(통합국가정치보위부) 심문관들은 유동식이 적성국가인 일본 영토를 빈번하게 왕래한 점을 문제 삼았다. 소련 정부나 코민테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으로 오갔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안내하여 불법 월경을 방조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조선·소련·중국 국경 지대에 직업을 구해 장기간 체재한 사실도 문제였다. 그는 국경에서 불과 25떨어진, 연해주 포시예트 지구의 얀치헤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 행위는 스파이 활동의 편의를 얻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고 의심을 샀다.

 

1923박열 사건공범인 아나키스트

단지 혼자만 혐의를 받은 게 아니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오랫동안 교제한 사람들도 속속 체포됐다. 그들도 유동식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스파이이거나, 스파이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지, 동료들까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탄압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사람, 유동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의 본명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이었다. 세칭 박열(朴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 천지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 김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중한은 일왕 암살을 음모한 박열로부터 폭탄 구매를 요청받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는 혐의로,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받았다. ‘대역 범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법관의 판단에 따라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죄로 분리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중한의 주검이 묻힌 모스크바 서북쪽 교외 바간코보 묘지 정문. 임경석 제공

 

출옥 뒤 사회주의 강연 연사로

192725일 김중한이 출옥했다. 체포된 지 35개월 만이었다. 도쿄 서북부 외곽에 위치한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노출됐다. 그의 동정이 신문지상에 널리 보도됐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천황 폐하의 신변을 위협한 흉악한 범죄자를 고작 몇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보내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법률이 범죄자를 응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언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출옥 뒤 요코하마 지인 집에서 머물던 김중한도 이 소문을 접했다. 그를 살해하려고 자객을 밀파했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틀 만에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귀국길에 올랐다.

 

경성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달랐다. 비록 일본의 식민지이긴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조선어로 간행되는 신문사 두 곳의 기자들이 그가 머무는 시내 중심지 한 여관을 찾았다.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검정 모직 양복을 입고 안경을 낀 모습이었고, 매우 이지적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오랜 철창생활을 겪은 뒤인데도 조금도 초췌한 빛이 없이 도리어 씩씩한 기운이 넘치는 태도였다고 한다.1

 

옥중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이 질문을 듣고서 그는 자신의 독서와 사유 체험에 관해서 얘기했다. 심리·윤리·문학·생물학 등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원시 인류의 생활 상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마 그때를 억압과 차별, 계급, 착취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시기로 상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도 주목할 만하다. 인생의 본질, 해방, 삶의 가치, 자기 파멸, 비애, 전투 등의 어휘가 그의 내면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이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인생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되 승리를 기약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비애감에 굴복되지 않고 계속 전투해나가겠다고 말했다.2 이어서 좀더 사색하고 좀더 연구하여, 이제부터는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두륵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대동강 입구의 항구도시 진남포에 이웃한 비옥한 농촌지대였다. 자택에서의 정양 기간은 길지 않았다. 김중한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신문 지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남포를 무대로 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진우청년회라는 청년단체가 그의 거점이었다. 이 청년단체는 마르크스 사후 41주년을 맞이해 사회주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4명의 연사 가운데 김중한의 이름이 있었다. 수년 전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던 김중한이 아나키스트 진영을 떠나 마르크스주의 진영으로 몸을 옮기는 중이었다. ‘좀더 가치 있는 일이란 곧 그에게는 사회주의운동을 뜻했던 것 같다. 뒷날 김중한이 직접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면, “나는 이병화, 양명 등 그곳에 있던 조선공산당 엠엘파와 연결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3 출옥 이후 머지않아 김중한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김중한은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청년운동 확장과 사회단체 연대 운동에 힘을 쏟았다. 보기를 들면 진남포 일원의 각종 청년단체를 결속해 진남포시 단일청년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또 재만동포옹호 동맹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22개 사회단체를 결속한 연합 단체였다. 평안도 일대 사회운동단체들의 연대활동에도 뛰어들었다. 평남 안주에서 열린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했고, 그 대회의 단상에 올라 축사를 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192712월 신간회 진남포 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의 반열에 올랐다. 정치연구부 총무간사가 그의 직함이었다. 지회를 이끌고 가는 4인 집행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2년 동안 여섯 번이나 구금·가택수색

김중한의 활동 반경과 내용은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랐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적대시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은 이때 옛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절연했던 것 같다. 동향 출신의 아나키스트 최갑룡은 김중한이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해 축사한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고 회고했다.4

 

김중한은 신간회 중앙기관에도 진출했다. 19296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진남포구 대표위원으로 참석했다. ‘복대표란 소수의 참석 인원만으로도 전국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끔, 각 지회에서 선출된 대표 가운데서 다시 대표위원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복대표는 전국에 걸쳐 34명이었는데, 그중에는 허헌(경성구), 황상규(양산구), 이주연(단천구) 등과 같이 집행부를 담당하게 될 저명 인사가 포진해 있었다. 진남포구를 대표하는 김중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경찰에게는 김중한의 활발한 사회운동 행위가 눈엣가시였다. ‘대역사건연루자가 근신하기는커녕 대중 선동에 열성을 보이다니, 가만둘 수 없었다. 사소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검속·구금했다. 그 탓에 김중한은 체포와 훈방을 뻔질나게 되풀이해야만 했다. 낱낱이 꼽아보자.

 

19278월 현지 관련 유력자와의 알력으로 인한 가택침입죄 사건으로 진남포경찰서에서 10일간 구금됐고, 그해 10월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서 불온한 내용의 축사를 했다는 혐의로 안주경찰서에서 6일간 구금당했으며, 19285월에는 진남포경찰서의 갑작스러운 가택수색을 겪었고, 11월에는 신간회 지회 활동의 불온 혐의로 진남포경찰서에 9일간 구금당했다. 1929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참가하던 중 경성종로경찰서에 며칠 구금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8월 공산주의비밀결사 연루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이틀간 구금당했다. 2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6회에 걸쳐 태클을 당했다.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탈출’, 그의 해외 탈출을 보도하는 192999일치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진남포 사회운동의 맹장으로 고투 중이던 김중한이 최근에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기사였다.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던 진남포를 비롯한 인근의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고, 그의 거취를 엄중하게 뒤쫓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자는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만주 길림 방면으로 사라졌는데,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 가담한 것 같다는 추측 기사를 썼다.5

 

아직도 모스크바 묘지에 외로이

기자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길림 방면으로 잠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민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김중한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곳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의 비밀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했다. 이른바 서상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강력한 단체였다. 서상파에 가담한 계기는 그 지도자 윤자영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그의 식견과 삶에 대해 내면의 공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말하면 28살부터 33살까지 김중한의 생애 마지막 삶은 망명지에서 이뤄졌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피억압 민족의 해방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다. 파란이 중첩한 그 구체적인 행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달리 추적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의 죽음은 이중의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인간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이름으로 단죄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그 비틀림과 망각이 무려 85년이나 계속됐다는 점이다. 정의를 위한 헌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잊힌 채 방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슬프다.

 

처형된 김중한의 주검은 모스크바 서북쪽 외곽지대에 있는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청년 시절에 그가 꿈꿨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해방을 위한 전투를 쉼 없이 계속했으나 도중에 스러지고 만 외로운 영혼이 거기에 지금도 묻혀 있다.

1.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입경’, <조선일보> 1927. 2.25.

2. ‘박열 공범자 金重漢씨 입경’, <동아일보> 1927. 2.25.

3.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유동식(김중한) 심문조서’, 1934. 1.13.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독립기념관, 765, 2019.

4.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아나키즘운동사>, 선인, 317, 2005.

5. ‘박열 사건 공범 金重漢씨 탈주’, <동아일보> 1929. 9.9.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한겨레21

 

 

[역사극장] 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여성운동가 박신우

1927년 혜성처럼 등장한 근우회 책사이자 맹렬한 실행가,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

19331128일 소련 국가정치보위부에 체포된 이튿날 찍은 박신우 사진. 표정에서 당혹감과 공포감이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박신우(朴新友)는 여성운동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1927년 초부터 사회주의 성향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에 출입하더니, 38일 국제여성의날을 기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제무산부인데이라고 불렀다. 이날을 기념해 여성동우회는 서울 종로2YMCA회관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여성운동계 유력자로 구성된 강사 명단 7명 속에 박신우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맡은 강연 제목은 ‘38일과 조선 여성이었다.

 

조직 활동 계획 세우고 전국 돌며 강연회

박신우는 지방 강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여성 의식을 계몽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여성단체 조직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지 <부녀세계>가 주관하는 지방 순회강연에도 선뜻 참가했다. 19274월 창간한 <부녀세계>3·1운동 이후 발간된 <여자시론>(1920), <부인>(1922), <신여성>(1923), <부녀지광>(1924) 뒤를 잇는 대표 여성지였다. 잡지사는 창간호 발행을 기념해 남부조선 순회강연 사업을 벌였다. 417일 기자 2명이 출발하고 같은 달 23일에는 박신우를 포함해 후발대 4명이 경성을 떠났다. 순회 기일은 약 보름 예정이었고, 첫 강연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였다.1

 

박신우가 여성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근우회 때부터였다. 그는 근우회 발기인 명단 40명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 527일 창립총회에서는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통일전선 기구이자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의 간부가 됐다. 창립 직후 처음 열린 집행위원회에선 7명으로 이뤄진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됐다. 핵심 간부가 된 것이다. 상무집행위원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일 상근하는 집행위원이었다. 날마다 출근해 직업적으로 단체 일에 종사하는 직무이니만큼 업무도 많고 권한도 큰 자리였다.

박신우가 맡은 분야는 선전·조직부였다. 이 분야는 단체활동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당시 사회주의 비밀결사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최소 인원 3명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곤 했는데, 이들의 직무는 으레 총무·선전·조직으로 나뉘었다. 그만큼 중책이었다. 박신우는 그 직무를 능히 감당했다. 취임 뒤 20일 만에 선전·조직 분야의 장단기 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615일치 근우회 집행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박신우는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조직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학생부노동부인부두 기구를 만들어 지식계급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을 조직화하며, 조선 각지에 근우회 지부를 설치해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쌓는다는 복안이었다. 조직 계획은 선전 계획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선전 계획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순회강연대를 파견한다, 각 권역의 요충지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한 강좌를 3주간 개설한다, 연극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게 한다, 근우회 선언문과 선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한다, 기관지 <근우>를 발행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2

 

1928년 초 남편 김규열과 소련 국경을 넘다

박신우가 작성한 선전·조직 사업 계획 초안은 하나하나 축조 심의 대상이 됐는데, 그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근우회의 책사였다. 사실상 근우회의 활동 계획 전반을 설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비범한 안목과 수완을 어디서 익혔을까. 나이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이 말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획력뿐이랴, 실행력도 출중했다. 박신우는 지방 강연을 위해 빈번한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결성 이후만 보더라도 평남 평양(66), 경기 개성(627), 경기 수원(88), 전북 전주(824), 경성 용산(826), 전남 목포(123), 전남 담양(1223)에서 여성 문제 강연회를 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년 내내 조선 전역을 누비고 다닌 셈이다. 신문에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을 터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노력은 그대로 조직 확대로 귀결됐다. 창립 첫해인 1927년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된 지방은 4(전주·목포·담양·김천)인데, 이 중 3개 지회가 상무집행위원 박신우의 출장과 관련됐다. 지부 조직의 75%가 그의 활동 결과였다.

 

근우회 첫 1년은 활기찼다. 선전·조직부 동료이던 정칠성이 회고한 것처럼 한참 당년, 근우회의 집행위원들의 멤버는 쟁쟁했고, 종로 네거리를 좁다고 치고 다니는 그들로 인해 유쾌하고 씩씩한 기상이 넘치던 때였다.3 박신우는 그 활기찬 첫해의 선전·조직 담당 상무집행위원이었다. 근우회의 활력이 그의 헌신과 재능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박신우의 신상 정보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박신우란 어떤 사람인가? 더욱이 그의 행적은 이듬해 1928년부터는 어떤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신우의 동향은 뜻밖에 1929~30년 전국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된 함경북도 현지의 한 사회주의자 재판기록에서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19281월 중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때였다. 함경북도 최북단의 항구도시 웅기에 박신우가 나타났다. 남편 김규열과 함께 비밀리에 국경을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월경을 돕는 협력자들이 있었다. 두만강 하구 일대의 지리와 교통에 밝은 현지 비밀결사 동료들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리하여 청진에서 웅기까지 배로 움직이고, 웅기에선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차 한 대를 빌려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소련 연해주로 월경하는 데 성공했다.4

 

박신우의 예기치 않은 월경은 남편과 관련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19271210일 은밀히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김규열이 모스크바 파견 대표로 선출됐다. 소련을 근거지 삼아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조선·북간도와 통신 연락을 주관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 부과된 새 임무였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경력과 재능이 있었다. 아내 박신우는 러시아 교민 2세 출신이었다. 박아니시야 다닐로브나, 이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기생이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코민테른이 제공하는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다. 러시아어 구사 능력도 높은 수준이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소양도 깊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외 부문 사업을 맡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가 체포된 소련 모스크바 마르흘렙스키 거리 18. 이 건물 한쪽에 그들의 거처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밀류틴스키 소로로 개칭됐다. 임경석 제공

 

소련 당국에 간첩 혐의 체포55년 뒤 복권

19331127일 모스크바 도심 동북쪽 마르흘렙스키 거리 1849호에 소련 국가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곳에 사는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사유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혐의였다. 이튿날 찍은 36살 박신우의 초췌한 사진에는 중범죄자로 지목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공포감이 드러나 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연루자가 더 있었다. 사건 번호 ‘P-37359’에 연루된 사람들로는 윤자영, 김영만, 김중한 등도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간부이거나 열성 활동가였다. 1927년 말 당이 분열된 뒤 서상파로 지목된 사람들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소련에 망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연루자가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체포된 이는 1933514일 김중한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6개월 먼저 구금돼 오랫동안 취조를 받았다. 다른 연루자들의 체포 일시는 거의 같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1127, 윤자영과 김영만은 그다음 날이었다.

 

정치보위부 취조관들은 김중한이 스파이임이 틀림없고 그와 친교를 맺은 모든 조선인 망명자도 그렇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증거는 진술뿐이었다. 김규열의 심문기록을 보면, 그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이미 밀정으로 판명됐다고 간주하는 김중한과 연락을 주고받은 점, 코민테른의 지휘나 승인 없이 조선과 만주로 사람을 파견하거나 직접 왕래한 점 등이었다. 소련 비밀경찰의 안목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지도도 받지 않은 채 일본 영토와 세력권으로 왕래하거나 통신을 주고받은 행위는 스파이 행위나 다름없었다.

 

No.P-373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5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너무 뒤늦게 찾아온 정의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야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 을까.

 

범죄의 낙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나긴 망각의 세월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비롯해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 희생자들은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 무명의 헌신을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 것인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婦女世界 巡廻隊 강연>, <조선일보> 1927425일치.

2. 경성 종로경찰서장, ‘근우회 집행위원회의 건’, 1927617. ‘사상 문제에 관한 조사자료’ 2,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3. 장원아,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42, 392, 2019.

4. 조선총독부 도순사 細上玖市, ‘金河龍 신문조서’, 193072.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0 (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2), 2002.

5.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15, 734, 740, 745, 764, 2019.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11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3월부터 1923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12월 체포돼, 1922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1129.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 2019.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4월호, 32(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5,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1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 2015.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701, 702’ , 192012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 1977.

 

사진 한장 안남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사 지도자

조선공산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안광천은 혁명가인가 배신자인가

조선공산당의 역대 책임비서. (왼쪽부터)초대 김재봉, 2대 강달영, 3대 김철수와 제4대 안광천의 펜글씨 필적.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답게 세련된 필치를 보인다. 그의 인물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임경석 제공

 

안광천(安光泉)은 비밀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1926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이 10개월인 점이 눈에 띈다.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고등경찰과 밀정의 삼엄한 감시망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단체의 수뇌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선임자들의 재임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이었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8개월, 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5개월, 3대 책임비서 김철수는 5개월간 재임했다.

 

4대 안광천 책임비서의 당내 입지는 강력하고 안정돼 있었다. 당권 승계 과정이 적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선출됐다. 1926126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의 책임비서 취임이 결정됐다.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대 김재봉 책임비서에 뒤이어 두 번째였다. 2, 3대는 달랐다. 그들은 일제 탄압으로 책임비서 자리가 비게 된 급박한 조건에서 보선(補選)으로 취임했다. 보선이란 당규약에 명시된 중앙위원회의 권한으로서, 중앙위원 가운데 결원이 생겼을 때 당대회 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체 결의로 후임자를 충원하는 제도였다. 강달영과 김철수는 선임자가 경찰에 체포된 뒤 잔존 중앙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에 비하면 안광천의 취임 과정은 훨씬 더 적법할 뿐만 아니라 당당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다

안광천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항일 비밀결사의 요직에 오르기 전부터 언론 지면에 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일 때는 물론이고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 지면에 곧잘 그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름 높은 논객이었다. 기고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의 진로와 정책에 관해 다채로운 담론을 생산해냈다. 그의 문필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어 조선어 종합잡지 <동광>의 흥미로운 한 앙케트 기사를 보자. 잡지사는 경성에서 간행되던 4대 조선어 신문사(<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의 언론인 44명에게 물었다. 여러 신문을 통폐합해 단일한 거대 신문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인물들이 그 신문사를 이끌어가는 적임자가 될 것인가? 놀랍게도 안광천이 편집국장 직위에 올랐다. 다수의 언론인이 안광천을 가리켜 거대 통합 신문사의 지면 배치와 논조를 좌우하는 넘버 3위의 요직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꼽았다.1

 

정연한 이론 능력과 뛰어난 문장이 그를 공산당 책임비서 물망에 오르게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안광천은 신진 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사이에 전개됐던 이전 시기 사회주의운동 내부 대립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새로운 간부 인선에는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 김철수는 당대회를 열기에 앞서 옛 중앙위원들과 함께 신임 중앙위원회 윤곽을 미리 협의했다.2

 

특히 책임비서 인선이 중요했다. 김철수의 판단에 따르면, 안광천은 재능이 뛰어난데다 분파투쟁에 가담한 경력이 없으므로 각파를 망라한 통일된 공산당을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책임비서 취임 이후 조직, 대중, 정책 각 영역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 있었다. 첫째, 양분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인 192611월 당외 서울파 공산그룹의 구성원 140명이 입당한 데 뒤이어, 안광천 취임 이후인 19273월 나머지 서울파 구성원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두 공산그룹 화요파와 서울파가 조선공산당 이름 아래 통합하게 됐다. 대단결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었다.

 

당 사조직에 가담

둘째,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대한 장악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보기를 들면 19275월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그 진로를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의사대로 좌우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집행부는 그 협의회 설립을 저지하기로 결정했고, 대회 석상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통일전선 기관인 신간회가 설립된 것도 안광천 책임비서 재임 시기의 업적이다. 19272월 신간회와 민흥회 두 갈래로 나뉘어 추진된 민족통일전선 설립 운동이 결국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단일화될 수 있었던 것도 비합법 영역의 사회주의운동이 통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광천의 공로이자 통일된 조선공산당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가보다. 달도 차면 기운다. 19279월 즈음, 안광천의 리더십이 위기에 빠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당내 조직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책 문제였다. 조직 문제란 공산당 내부에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단체가 은밀히 만들어져 1년 이상 암약해왔음이 동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일부 간부가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L)’ ‘엘엘(LL)’ ‘엠엘(ML)’ ‘엠엘당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원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당 중 당을 몰래 만드는 것은 당의 규범에 반하는 범죄행위였다. 바윗덩이같이 강고한 단결을 지향하는 전위당 조직론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전에도 분파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조직체를 달리하는 공산그룹 사이의 분쟁이었다. 당 내부에 은밀히 분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책임비서 안광천이 그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당원이 책임비서가 당의 규범을 해치고 사조직을 운용했음을 알게 됐다. 책임비서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내 비밀분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당원들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안광천 등 중앙위원 연서명. 임경석 제공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 주창

정책 문제도 리더십 위기를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당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의 명성이 실추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남친목회 사건이다.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남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가 창립된 19279월 즈음에는 동향 출신자들의 친목단체가 경성에 여럿 존재했다. 호남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호남동우회, 서북 5도 출신자들이 결성한 오성구락부, 일부 영남 출신자들이 따로 만든 상우회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출신지 동일성을 식별 기준으로 하여 이 단체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참여했다. 출신지가 같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입회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부유한 지주와 상공업자도 있고 노동운동 참가자와 사회주의 문필가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안광천이 영남친목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참여만 했을 뿐 아니라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단체 설립의 이유와 논리를 적은 영남친목회 취지서를 작성했다.3

 

그 단체의 이론가 역할을 자담한 것이다. 취지서에는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용기를 고취하여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전 민족적 사업이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본제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치제를 실시하거나, 제국의회나 지방의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료, 대지주들과 같이하는 전 민족적 사업이란 적어도 조선 독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향 각지에서 영남친목회 반대운동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반대책강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영남친목회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머지않아 운동의 외연이 확장됐다. 단지 영남친목회 한 단체만이 아니라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모든 지방열단체를 반대하는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장됐다. 그것을 지방열단체 반대운동이라고 불렀다. 지방열단체는 반동단체, 그에 참여한 사회운동자들은 반동분자로 간주됐다. 반대운동은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 규모의 3대 대중단체로 촉망받던 노총(조선노동총동맹), 농총(조선농민총동맹),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 지방열단체를 반대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그뿐인가. 전 조선의 민족유일당으로 존중받는 신간회도 지방열단체 배척을 결의했다. 막중한 무게를 갖는 결정이었다. 여론의 향배는 이미 결정된 거나 진배없었다.

 

조선공산당 내부 동향도 심각했다. 안광천의 책임을 묻는 당내 흐름이 나타났다. 책임비서가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을 주창하는 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누가 혁명의 적이고 누가 벗인지를 가르는, 혁명운동의 근본 문제를 혼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안광천을 책임비서 직책에서 면직시킴과 아울러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그의 면직을 요구하는 당원들로 분열됐다. 전자에는 엠엘당 그룹이 섰고, 후자에는 엠엘당을 비난하는 그룹이 섰다.

 

결국 1927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남친목회에 참여하여 사회적 분란을 야기한 책임을 진 셈이다.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엠엘당 그룹이 반대파의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임비서 직위만 벗을 뿐이지 중앙위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당내 갈등은 계속됐다.

 

사진 한 장 안 남아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전성기였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그의 사임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새롭게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안광천은 조선공산당 성쇠의 바로미터였다. 또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내부 다양성이 화요파와 서울파의 갈등으로 대표된 데 반해, 안광천 이후에는 엠엘파와 비엠엘파의 대립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래저래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용모를 전하는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4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幹部 公選’, <동광> 29, 1931.12, 63.

2. <김철수 외 20인 조서(2)> 419~420,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197.

3. ‘영남친목회 취지서’ 1927.9. (김철수, <福本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중요 재료> 1928.4.1, 4~5쪽 수록),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43~45об.

4. ‘名士諸氏 맛나기 생각과 맛난 印像’, <별건곤> 11, 1928.2, 68.

 

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

3·1운동 학생 대표로 참석했지만, 신문 도중 내용을 온통 뒤집으며 시작된 변절

김대우(金大羽)191936일 이른 아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하숙집에서였다. 반일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닷새 되는 날, 조선 천지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때였다. 자신이 지핀 혁명 불길이 타올랐지만, 그는 투옥되고 말았다.

 

3·1운동을 기획한 비밀결사 학생단 지도부

김대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이하 경성공전) 광산과 2학년이었다. 경성공전은 1916년 설립된 식민지 조선의 최상급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경성전수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와 더불어 3대 관립 전문학교로 병칭됐다.

 

김대우는 3·1운동 학생단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월 하순, 중국음식점 대관원 모임에서 발족한 이 비공식 조직에 처음부터 그가 가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건 2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1회 학생단 간부회의때부터다. 김대우는 경성공전 대표자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경성 시내에 있는 6개 관립·사립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다. 학생단 지도부는 민족대표 33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한 양대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였다. 학생 대표들은 비밀 회동을 거듭했다. 225, 26, 28일에 모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것을 협의했다.

 

비밀결사는 신뢰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탄압이 예견되는 반일 독립운동 단체라면 더욱 그랬다. 학생단 지도부 구성원에게는 신뢰감이 형성돼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랜 시일에 걸쳐 상대방의 사람됨을 함께 겪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종교단체와 출신 지역별 향우회가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 학교별 학생YMCA 등이 그것이다.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단체들이다.

 

그중 서북학생친목회는 주목할 만하다. 김대우가 학생단 지도부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매개체다. 이 단체는 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 서북 5개도 출신 경성 유학생들의 친목회였다. 김대우는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1913년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경성에 오기 전까지 자랐다. 김대우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공전에서 수학하기까지 6년간 경성에서 낯선 객지 생활을 했다. 그동안 자신과 비슷한 말씨와 생활 관습을 가진 친목회 학생들에게서 편의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서북학생친목회에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학생들이 즐비했다. 학생단 최초 회합인 대관원 모임 참석자 10명 가운데 서북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한위건(함남 홍원), 강기덕(함남 덕원), 김원벽(황해 안악) 등 학생단을 이끈 3인 지도자를 비롯해, 모교인 경성공전의 1년 선배 주종의(함남 함흥)도 있었다.

 

김대우는 용모가 단정하고 키가 컸다. 180cm에 가까워 풍채가 당당했다. 잘생겼을 뿐 아니라 말도 잘했다. 관찰자 의견에 따르면, “회의 같은 데서 말할 때이든가 또는 집회의 의사 진행 같은 것을 할 때에 보면, 명민한 두뇌와 그 달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재능과 활달한 성격이 그가 경성공전 대표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독립 가망이 없으므로 독립 희망하지 않는다

김대우는 경찰에게 체포된 직후에도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야마자와 사이치로 검사와 주고받은 313일치 신문 기록을 보면, 김대우가 어떤 진술 전략을 구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혐의 사실을 시인했다. 시위에 참여한 것과 경성공전 대표임을 인정했다.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공감해 경성에서도 소요를 일으키기로 사전에 협의했노라고 시인했다. 설사 유죄판결을 받을지언정 조선 독립을 요구한 행위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계속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담 시점과 인지 범위는 되도록 줄이려 노력했다. 자신의 혐의 내용을 가볍게 할 수 있고 동료들의 행위에 관한 발언 범위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호리 나오키 총독부 예심판사의 49일치 신문조서에서 진술 기조가 바뀌었다.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경성공전 학생 대표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전에 동료 학생들과 시위를 모의하지도 않았으며, 경성공전 학생들을 시위 현장에 동원한 것도 부인했다. 3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시위에 우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검사 신문조서 내용을 온통 뒤집었다. 조선 독립을 희망하냐는 예심판사의 질의에는 독립이 될 가망이 없으므로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궁금하다. 도대체 김대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의 급격한 심경 변화는 왜 일어났고, 진술 기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진술 번복의 의미는 자기 신념을 버리고 그에 배치되는 이념을 받아들인 점에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유행한 사회현상에 빗대어 말하면 일종의 사상전향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수감 중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 시위 가담자조차 날마다 밤새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실신했다. 김대우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수감자들처럼 좁고 불결한 시설에 갇혀 옆 사람과 살을 맞대고 다리도 뻗지 못한 채 쪼그린 자세로 날밤을 지새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방법만 있다면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그뿐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공학 분야 전문교육을 이수한 그에게 안락한 직업과 세속적 출세가 보장된 터였다.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심경이 변화한 결정적 계기는 가족이었다. 뒷날 전향 정책이 본격화되던 1933년 즈음 경성형무소 수감자 사상전향 동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나 기타 친족에 대한 정서적 반성38%였다.

 

참사가 된 대지주 아버지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사상전향의 촉매가 됐다. 김상준은 강동군의 손꼽히는 큰 부자였다. 소유 농지 규모가 150정보(1정보는 약 9917.4)를 헤아리는 천석꾼이었다. 김상준에게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만도 80여 명이나 됐다.

 

단지 부유할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기구에도 다방면으로 연결된 관변 유력자였다. 일본의 한국 병합 직후인 1911년 군 참사(參事)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김상준은 강동군 초대 참사로 임명됐다. ‘참사란 관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로서 도장관(도지사)이 임명하는 명예직 지방관이었다. 군수의 자문에 응하며, 수당을 받았다. 지방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인 유력자 상층부를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김상준은 일본인 관료들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민하게 역량을 발휘했다. 군내 각지를 찾아다니며 민심 안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부했다. “이번의 지방 소요에 있어서는 본인은 몸소 향당을 설복하여 민중의 향방을 밝혀 경거망동의 억제에 전력을 경주했노라고. 그 결과 강동군에는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 “사방 인근에서는 다 소요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본군에서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과장된 주장이었다. 35일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시위, 37일 고읍면 시위, 같은 날 원탄면 송오리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위 여러 지역에 비해 시위 규모도 작고, 시위 횟수가 적었다.

 

김상준의 관변 네트워크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총독부가 출자한 각종 공공기관에도 임원으로 진출했다. 강동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강동군 지주회 부회장, 강동군 금융조합 조합장, 강동군 잠사업조합 부조합장 등이 그가 겸하던 직책이었다.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상신한 탄원서().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맨 오른쪽이 김대우. 19213. 임경석 제공

 

체포된 지 11일 만에 작성한 공문

바로 그 아버지가 아들의 사상전향에 나섰다. 김대우는 5형제 가운데 맏이로서, 자신이 누리는 재산과 지위를 상속할 아들이었다. 아들의 경솔한 행동 탓에 자신의 성공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김상준은 여러 방면으로 줄을 댔다. 식민지 통치기구의 각급 관료들에게 접근했다.

 

김상준의 대응은 주효했다. 가장 먼저 강동군수가 움직였다. 유진혁 군수는 강동군 관내 치안을 맡은 책임자 헌병분견소장에게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는 317일치 공문을 작성했다. 김대우가 체포된 지 11일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 김상준이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동군 헌병분견소장도 김상준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강동군수의 공문을 받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김대우를 구금한 경성종로경찰서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가급적으로 선처 계시옵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인가. 구금된 학생의 아버지를 파견할 테니, 회답을 주기 바란다는 청탁도 덧붙였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 김상준이 직접 경성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김상준의 로비는 지방관료만이 아니라 경성의 중앙관료들에게도 통했다. 종로경찰서장은 327일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오늘날 검사장)에게 보내는 공문을 발송했다. 김상준이 강동군에서 통치체제 안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의 일족이 지방사회에서 얼마나 명문인지, 붙잡힌 김대우가 얼마나 품행이 바르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는지를 밝히는 별지를 첨부했다. 별지 중에는 강동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 다카시마 요시오의 확인서도 있었다.

 

피고인 김대우의 진술 태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졌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자아를 버리고 관변 유력자인 아버지의 삶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앞으로 조선 독립이나 만세시위 등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고, 권력관계에 순응해 오직 사적 이익 증진에만 노력하겠다는 맹세나 다름없었다.

 

김대우의 변신은 효과가 있었다. 191911163·1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에 게 판결이 내려졌다. 대부분 징역 7개월1년에 해당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데 비해, 김대우는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그는 즉시 석방됐다. 집행유예는 김대우의 변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후 김대우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경성공전에 복학해 19213월 졸업했다. 졸업식 때는 우등생으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해 규슈제국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관료사회에 진출한 그는 군수, 도 과장, 총독부 본청 과장, 도 부장 직을 거쳐, 마침내 도지사(경북·전북) 자리에까지 올랐다.

 

규슈제국대 거쳐 도지사까지

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은 바로 3·1운동이 한창이던 49일 예심판사와의 신문 중에 이뤄졌다. 조선 독립을 더는 희망하지 않는다는 고백 속에, 현존 권력관계에 순응해 공동체의 안위와는 관계없이 일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겠다는 결심 속에 태어났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1. 豫審掛職務代理 朝鮮總督府判事 堀直喜, ‘金大羽 신문조서’, 대정 849,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5 (삼일운동 V), 국사편찬위원회, 1991.

2. 장규식, ‘학생단 독립운동과 35일 시위’, <3.1운동 100: 2. 사건과 목격자들>, 휴머니스트, 141, 2019.

3. 松花學人, ‘總督府 及 各道 高官 人物評’, <삼천리>, 59, 19385월호.

4. 朝鮮總督府 검사 山澤佐一郞, ‘金大羽 신문조서’, , 大正 8313.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삼일운동 IV), 국사편찬위원회, 1991.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 연구’, 미발표 논문, 32, 2019.

6. 宮嶋博史, ‘植民地下朝鮮人大地主存在形態する試論’, <朝鮮史叢> 5·6合倂號, 1982.

7.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 23, 24, <조선총독부관보> 1910930.

8.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름처럼 살아간 미륵

지주 가문의 3대 독자에 의사 되려던 청년 이미륵, 3·1운동에 모든 것을 내놓다

압록강 하구는 넓었다. 키보다 높게 솟은 갈대밭을 한참 헤치고 나아간 끝에 마침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이미륵은 놀랐다. 그것은 강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다 같았다. 강 건너 아득히 먼 곳을 눈으로 짚었으나, 뭍인 듯 환영인 듯 거무스름한 얇은 띠 그림자를 그만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쪽배로 압록강을 건너는데

달밤이었다. 사방이 훤해서 쉽게 사람들 눈에 띌 것 같아 불안했다. 늙은 어부가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달빛이 밝을 때 국경 감시가 소홀하다고 말했다. 강물에 띄운 것은 작은 통나무배였다. 그 쪽배는 너무 작아서 두 사람만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쪽배는 세 척이었고, 사공도 세 사람이었다. 강 건너기를 바라는 이들은 미륵과 그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 두 학생이었다. 둘 중 하얗게 겁에 질린 한 명은 17살도 채 안 돼 보였다. 미륵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셋 다 학생인 셈이었다.

 

쪽배는 충분히 간격을 두고 차례차례 강가를 떠났다. 큰 강물 위로 소리 없이 노를 저어가는 동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마치 영원의 시간을 지나가는 듯했다고 이미륵은 뒷날 회고했다.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다. 멀리서 몇 발 총소리가 들렸다. 어부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마쯤 지나, 어부가 속삭였다. 이따금 압록강 철교 위에서 쏘아대는 경고의 총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수면 한가운데 뜬 쪽배인지라 일본군은 결코 우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1911, 이미륵은 이렇게 국경을 넘었다. 이 체험을 미륵은 평생 잊지 못했다. 자기 삶의 역정을 글로 옮겨서 단행본으로 출판했을 때, 그 책 이름을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쓴 채 험난한 경로로 월경해야 했을까?

 

바로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이미륵의 인생 행로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저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었다. 삶의 궤적이 판이하게 달라질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이미륵뿐이랴. 따져보면 3·1운동을 계기로 운명의 전환을 겪은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망명길에 오른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경찰에게 쫓기기 전 미륵은 의사가 되는 길을 걷던 엘리트 학생이었다. 그가 다니던 경성의전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전문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보기를 들면 <매일신보> 1917년 신년호에 신년을 맞이하는 세 전문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경성전수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사진과 관련 기사를 싣고 있다. 법학·의학·공학 분야 중하급 기술 관료와 그에 상응하는 실무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이었다. 모두 관립이었고, 학비는 면제였다. 총독부가 관할하던 공공기관들처럼 학교 운영도 군대식이었다. 학생들은 강의와 실습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무더운 7월까지 계속되는 강의를 단 한 시간도 빼먹어서는 안 되었다.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유는 무엇보다 정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미륵이 응시했던 1917년도 입학 요강을 보면, 신입생 모집은 조선인 50, 일본인 25명으로 모두 합쳐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적게 부여하되, 실무 기술자 양성 분야에 한정한다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 탓이었다. 조선인 입학 정원이 일본인보다 두 배나 되지 않는가, 이렇게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민족별 인구와 비교하면, 얼마나 심각한 민족차별 정책을 썼는지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 정원 비율은 인구 10만 명당 0.3명인 데 비해, 일본인 비율은 8.3명이었다. 무려 28배의 특혜를 일본인 쪽에 부여했다.

 

생명의 탄생 연구하는 의사 되려고

이미륵은 극심한 경쟁을 뚫고 경성의전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구술시험에서 탈락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려는 개인적 동기를 물었을 때, 미륵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근원을 연구하고 싶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라는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조선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는 학문 연구 기관이 아니라, 실무 분야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식민지 원주민이 넘봐서는 안 되는 고상한 목표를 토로했던 것이다. 면접관은 오래 망설였다. 다행히 그는 관대한 성품을 지녔던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유연한 방식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전문학교 교육의 목표는 실전에 능한 의사들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일러주었고, 앞으로 우리나라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 아니라 일본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맥락으로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엄격한 경쟁 관문을 통과한 수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럽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당국이 자신을 수준 높은 학문 영역으로 이끌어주면서도 특별히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교육비를 전액 국비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여겼다고 이미륵은 회고했다. 그래서일까. 3·1운동이 다가왔을 때, 거사 참여를 요청받은 의전 학생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가담한 것이 당국에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며, ‘총독부에 속한 관립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더 심하게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려에 번민했다.

 

그럼에도 사전 논의에 가담해달라고 권유받은 의전 학생 10여 명은 시위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시위를 위한 준비 사항이나 국기, 전단, 시위 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 속에 이미륵도 있었다. 사전 모의에 가담한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의 용기와 정의감은 다른 고등교육기관의 평균적인 조선인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 수는 208명이었는데, 그중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이는 32명이었다. 15%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에 있는 관립 3개 전문학교, 사립 4개 전문학교를 통틀어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체포를 모면했거나,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훈방이나 기소유예, 태형 처분 등을 받은 학생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미륵은 191931일 서울에서 보았고, 자신도 직접 참여했던 만세시위운동과 군경의 탄압 모습을 유려한 필치로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중에서 그날 일본 군경의 대응 태도가 저물녘에야 비로소 적극 탄압 방식으로 변했다는 증언이 주목된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가 시내를 완전히 통과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중무장한 채 관청 건물을 경비하면서 학생들이 폭력 행위로 넘어가는지를 주시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압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 시위 대열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는 말이었다. 현장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이미륵은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은 네 번째 독립 시위를 벌인 후 공식 활동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31일과 5일 시위가 학생층이 사전 준비해서 벌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계획 시위가 두 차례 더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언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시위 참가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운동에 전념했다고 썼다. 이미륵은 선전문을 쓰는 부서에 소속됐다. 비밀결사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주목을 끈다. 그가 경찰 추적을 받은 계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비밀결사의 간부가 되기도

이미륵은 비밀결사 참여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축적된 연구 성과에 의하면, 그 비밀결사는 청년외교단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5월 결성됐다. 결사체의 이름에서 그해 10월 개막 예정이던 국제연맹 회의에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경 문제를 상정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미륵은 이 단체에서 중앙간부 일원으로 활동했다. 편집부장에 취임했다. 이 단체는 기관지 <외교시보>를 펴냈고, 반일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선전문과 전단을 살포했다. 이 업무들은 아마 편집부장 손을 거쳐 했을 것이다. 당사자가 뒷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즈음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밤을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해 11월 비밀결사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주무 기관은 경상북도 경무국이었다. 전국적으로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들의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이미륵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되돌아온 때는 아마 그 직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알게 됐다. 자기 아들이 고문과 투옥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38살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천석꾼 지주 가문의 대를 이을 3대독자였다. 딸 셋을 내리 낳은 뒤, 미륵불에 치성을 드린 덕분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그래서 이의경(李儀景)이라는 본명 대신 미륵이라는 애칭으로 즐겨 불렀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슬픔을 억누르고서 아들에게 권했다, 망명하라고. 압록강을 건너 안전한 땅으로 도망가라고 거듭 말했다. 집을 떠나던 날 안개가 끼고 어두웠지만 어머니는 동구 밖 멀리까지 배웅 나왔다. 이별의 시간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혹시 우리가 다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넌 내 생애에 너무도 많은 기쁨을 주었단다. , 내 아들. 이젠 너 혼자 가렴. 멈추지 말고.”

 

혼자 멈추지 말고 가라던 어머니

이미륵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에는 바라는 대로 유럽 유학길에 올라, 독일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도 끝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미륵은 19503, 향년 52 중년의 나이에 병사할 때까지 디아스포라(이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일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었다. 대지주의 후손이자 의사라는 전문직이 예정돼 있음에도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은 그의 희생과 헌신에 빚지고 있다.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귀한 것을 내놓았던 그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이미륵 지음, 박균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살림, 213~ 215, 2016.

2.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모집대정6117, <조선총독부관보> 2337, 1917122.

3. 김상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참여 양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0, 152, 2019.

4. 장석흥,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조은경, ‘연병호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8, 2019.

5. 정규화·박균, <이미륵 평전>, 범우, 2010.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

강용흘의 체험적 소설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1920년대 말 미국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졸업할 때쯤의 강용흘(왼쪽). 서재에서 책을 읽는 50대 강용흘의 모습. 김욱동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보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3·1운동 양상을 핍진하게 묘사했거나, 체험적 관찰 결과를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들 말이다. 재미 작가 강용흘의 장편소설 <초당>이 그 두드러진 보기다.

 

강용흘은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힌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말에 북미로 건너가, 캐나다 댈하우지대학과 미국 보스턴대학,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1931년 뉴욕의 찰스스크립너스선스출판사에서 영문소설 <초당>(The Grass Roof)을 발간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성인 세계로 진입하는 한 소년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그린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 조선의 현실이 잘 묘사됐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차츰 이해해가는 소년의 시선이 담겼다.(<초당>,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작가 강용흘도 경찰에 체포돼 고초

<초당>은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이 소설 덕분에 2년 뒤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에서 창작기금 펠로십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의 반향도 컸다. 이광수는 강용흘씨의 초당(·)’이라는 제하에 소설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평론가 홍효민도 초당을 독()하고를 써서 관심을 나타냈다. 6년 뒤에는 프랑스어 번역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는데, 우수한 번역 작품에 주는 할퍼린 카민스키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내 다른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이 대다수 겪는 것처럼, 미국 문단과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미국 문단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최근에야 비로소 <미국문학백과사전>(하퍼콜린스출판사, 2002)에 그의 작품이 소개됐을 뿐, 미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김욱동, 서울대학교출판부, 4~5, 2004)

 

문학사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강용흘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이다. <초당>3·1운동 전후 조선 사회의 내부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다. 그들이 겪은 격정과 고통을 생생히 형상화하고 있다.

 

강용흘 자신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였다.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졸업한 작가는, 이듬해 봄 서울에 있었다. 17살이었다. 어떻게든 미국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는, 북미 선교사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태평양을 건너려면 일본 여권과 여행 경비가 필요했는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을 그들만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간 강용흘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여사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 책은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우화로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됐다.

 

소년 강용흘은 3·1운동에 휩쓸렸다. 서울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갇혀 심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어렸기 때문에 사흘 만에 훈방됐다. 이 체험은 강용흘의 심리에 깊은 인상과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초당>에 그 정황이 상세히 묘사된 것을 보면 말이다.

 

길거리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던 상황을 보자. 기마경찰이 시위 대열의 비무장 조선인들에게 쇠갈고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부상자가 속출했음을 증언한다. <초당>의 주인공 소년도 말 탄 일본인이 들고 있던 큰 쇠갈고리에 걸렸다. “갈고리는 내 목 안으로 파고들어 핏물을 옷에 뚝뚝 떨어뜨리고 뺨을 할퀴었으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줄지어 서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경찰은 툭하면 쇠갈고리를 우리의 머리와 어깨와 소매 위로 휘둘러 여러 차례 우리에게 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썼다.

<초당>, 미국 뉴욕 찰스스크립너스선스(Charles Scribner’s Sons)출판사, 1931년판 겉표지(왼쪽). <초당> 1931년판 속표지. 임경석 제공

 

사흘간 계속 된 몽둥이 고문

소년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그만 유치장 안에 다른 소년 13명이 함께 수감됐다. “모두들 중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찢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졌다.” 유치장은 좁고 불결했다. “통풍 장치가 전혀 없었는데, 창문도 없고 우리가 전부 앉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수감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시설 부족은 갇힌 자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증언이 더 있다. 3·1운동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작가 심훈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갇혀 지냈다. 여름에 더위가 시작되자 고통이 가중됐다.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는조건에서, 수감자들은 다리도 뻗지 못하고 살을 맞댄 상태로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워야 했다.(‘어머님께’, 심훈, 1919829.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다시 <초당>의 주인공에게로 돌아가자. 한밤중에 심문이 시작됐다. 새벽 1시에 호출된 소년은 두 손을 앞으로 묶이고 수갑을 찬 채심문관 앞으로 불려갔다. 구타가 시작됐다. 너무 천천히 걸어도, 너무 빨리 걸어도 등허리를 차였다. 심문실에 들어갈 때도 구둣발에 차여 꼬꾸라졌다. 그는 조선어만 아는 척했다. 경관은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통역을 불렀는데, 통역은 천민 출신의 시골 사람이었다. 심문관은 이름, 나이, 직업, 종교, 그해 봄 서울에 오게 된 경위, 만세를 부르게 된 경위 등을 물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심문관은 묘하게 웃으면서 좋다, 매 좀 맞아봐라라고 내뱉었다. 두 경관이 각목을 각각 집어들었다. 무자비한 매질이 시작됐다. 머잖아 소년은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에게 물을 먹이더니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새벽 5시까지 심문이 계속됐다. 이게 첫 번째 심문이었다.

 

똑같은 몽둥이 고문이 심문 때마다 되풀이됐다. 일요일 새벽에 시작된 심문은 수요일에야 끝났다. 경관들은 판단을 내렸다. 소년을 가리켜 부화뇌동하여 단순 가담한 자라고 규정했다. “독립운동 기간 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구경꾼인데 마음이 약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결국 소년은 훈방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훈방 처분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1일부터 6월 말까지 검사 처분에 부친 3·1운동 피검자 수는 16908명이었다.(조선총독부, ‘소요사건검사처분인원표’, 191978.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其二>, 223~228, 1978)

 

소설엔 최팔용 언급도

그 숫자가 방대한 점이 놀랍다. 여기에는 검사국에 송치되기 이전에 경찰과 헌병이 즉결처분을 하거나 훈방한, 훨씬 더 많은 피검자가 배제됐음을 유의해야 한다. <초당>에는 공식 집계 과정에서 누락된, 이름 없는 참여자들의 수난이 생생히 묘사됐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상습 행위였다. 피의자로부터 범죄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으레 채택하는 심문 방법으로 간주됐다. 일제강점기 일간신문에는 고문 피해 기사가 계속 실렸다. 은폐, 검열 등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막는데도 그랬다. 고문이 반체제 정치범에게만 가해졌던 것은 아니다. 민사·형사상 통상적인 범죄 사건의 피의자도 피해가지 않았다.

 

<초당>에는 주인공의 숙부가 겪은 고문 체험이 상세히 기술됐다. 105인 사건에 연루돼 7년 징역형을 받은 숙부는, 출감 뒤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고문을 겪은 탓이었다. 숙부는 열하루 동안 고문당했다. “양쪽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아놓았는데, 두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지. 마구 때리더구나. 자기들이 묻는 건 무엇이든 다 자백하라는 거야. 그러니 내가 자백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어. 그저 네, 네 할 수밖에 없었지. 아이구 그 고문이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던지! 열두 번도 더 당했어. 놈들한테 당한 것은 체면상 차마 다 말하지 못하겠다. 세 번은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보니 나는 지저분한 마룻바닥에 눕혀져 있고, 한 경관이 내 입에 물을 먹이고 있더구나. 그들에게 채찍질당한 것이 모두 몇 번이었는지 일일이 다 기억나지도 않아. 그들은 나를 발가벗겨 양손을 뒤로 결박시켜놓고 매질을 해댔는데, 그 중간중간에 경관이 내 몸의 가장 부드러운 곳에다 담뱃불을 가져다 대더구나.”

 

강용흘은 <초당> 곳곳에서 고문의 실상과 폐해를 설명한다. 일본 식민지 통치가 저들의 선전과 달리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초당>에는 3·1운동 지도자들을 묘사한 부분도 있다. 그중 단연 주목되는 것은, 2·8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인 최팔용에 대한 것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16, 최팔용은 25살가량의 키가 크고 매우 창백한 청년이었다. 키는 컸으나 비쩍 말랐던 것 같다. 명주옷을 입은 그가 마치 잠자리같이 보였다고 한다. 최팔용은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근거로 하는 집회를 여럿 주도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곳에는 조선인 유학생 대부분이 모였다.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그는 유학생들 내에서 비밀결사를 만들었고, 먼저 귀국한 유학생들이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와 지속적으로 연계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기록

강용흘이 최팔용에 대해 그처럼 잘 알았던 이유가 있다. 동향이었다. 함경남도 홍원이다. 최팔용은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에서 태어났고, 강용흘은 인접한 운학면 산양리에서 출생했다. 두 집안은 겹으로 혼맥을 맺고 있었다. 최팔용의 누이는 강용흘의 당숙 장손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는 강용흘 조모의 조카였다. 달리 말하면 최팔용은 강용흘의 진외가 사위였고, 최팔용의 누이동생은 강용흘의 당숙 집안 손자며느리였다. 두 집안 사이에 긴밀한 왕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당>에는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 기록이 담겨 있다. 소설이니만큼 그 속에 적힌 얘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조선인들 삶의 모습을 반영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혁명가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3·1운동

김단야가 말년에 쓴 자전통해 3·1운동에서 한 역할 확인할 수 있어

1919324일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시위사건 판결문에 김단야의 본명 김태연이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김단야는 생애 말년에 자신의 혁명운동 참여 내력에 관해 글을 썼다. ‘자전’(自傳)이라는 제목의 10여 쪽짜리 원고였다. 이 글에서 그는 언제 처음 혁명운동에 참여했는지를 밝혔다. 바로 3·1운동 때였다. 19살 나던 해,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혁명적 삶을 시작했노라고 썼다.

 

명단에 누락된 배재고보 학생 대표

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이란 바로 2·8독립선언서를 가리킨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고보 재학생 김단야에게 큰 감화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로 많은 복본을 만들었다. 동료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김단야는 여러 차례 필사로 내용을 숙지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서의 정세관과 정책론 등이 그의 내면에서 큰 공명을 얻었으리라고 판단된다.

 

김단야가 경성 시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학생위원회에 참여했다는 문장이 주목된다. 그는 배재고보 대표 자격으로 그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전야에 이러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진다. 종래에도 학생단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19191월 초순과 하순에 중국음식점 대관원에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몰래 모임을 열어 학생 지도부를 구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른바 대관원 회합이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을 뿐, 고보생 대표들은 포함하진 않았다. 고보별 학생 대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2월 초쯤 전문학교 학생단 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해 고보생 대표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 망라된 고보와 그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경성고보: 박쾌인, 김백평, 박노영. 중앙학교: 장기욱.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결. 경신학교: 강우열, 신창준. 선린상업: 이규송, 정세현.

 

이 명단은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성에는 8개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배재고보·휘문고보·양정고보 세 곳이 누락돼 있다. 이 명단 외에 숨겨진 사람이 더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김단야의 진술은 이런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해준다. 누락된 세 학교 가운데 배재고보 학생 대표가 누구였는지는 이제 짐작할 수 있다.

 

미성년자여서 매 90대 맞고 석방

김단야에 따르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비밀 학생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유기적인 연락을 했다. 바로 민족대표 33인을 가리킨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민족대표와 연계하면서도 그와 독립적으로 비밀결사 2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문학교 학생 대표 조직과 고보생 대표 조직이다. 이 중 고보생 대표 조직, 곧 김단야가 말하는 비합법 학생위원회는 3·1운동에 즈음해 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첫째, 만세 시위 현장에 학생 대중을 동원한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 곳곳에 살포한다. 셋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주재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한다.

 

경성의 외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대목에 유의하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이 역할은 배재고보 교사 김진호가 맡았다고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31일 정오에 각자 맡은 외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영사관에 전달한 장용하뿐이었다. 그는 김진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227일 중국영사관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했다. 이튿날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았고, 31일 정오 중국영사관에 가서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기존 연구 성과와 김단야의 진술 사이에 역할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는 불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공통점도 있음에 유의할 만하다.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선언서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단야와 장용하 등이 영국영사관과 프랑스 선교사, 중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준비 과정에만 멈추지 않았다. 김단야는 31일 이후에도 쉼 없이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31일 후에 나는 학교 동무들과 함께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 인쇄물을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고향 쪽으로 내려가 시위를 두 곳에서 성공적으로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징역 3개월 대신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판사의 말로는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3일에 걸쳐 매 90대를 맞고 난 후 석방되었다.”

김단야 등이 소속된 비밀결사가 간행한 반도의 목탁2호 필사본. 임경석 제공

 

시위로 체포돼, 검거되지 않은 김기진

지하 인쇄물 반도의 목탁제작에 참여했다는 정보에 눈길이 간다.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193~4월에는 수많은 지하 인쇄물이 조선 전역에 유포됐다. 경성에서 발간된 정기간행물만 해도 <조선독립신문> <자유민보> <진민보> <국민신보> <경성단신문> <자유신종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경고문’ ‘격문이라는 제목 아래 숱한 반일 인쇄물이 나왔다. ‘반도의 목탁은 경찰에게 적발된 탓에 관련자들이 누군지 이미 알려져 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배재고보 3학년 학생 장용하·이봉순·염형우와 경성고보생 이춘봉,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등 고보생 5명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1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반도의 목탁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체포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었다. 김단야 외에 김기진이 있었다. 뒷날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개척한 팔봉 김기진도 구성원이었다. 배재고보 3학년이던 김기진은 같은 반 반장이던 장용하와 함께 비합법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31일 밤부터 장용하의 하숙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면서 인쇄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구는 등사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 관훈동에서 소격동으로 이르는 골목을 걸으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인쇄물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기진은 35일 남대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까닭에 이 비밀단체 검거 사건에서 벗어났고, 김단야는 3월 중순 귀향함으로써 그렇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김천 개령면 동부동이 김단야의 고향이었다. 귀향한 이후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간 3월 중하순은 3·1운동이 개시 국면을 넘어 시위 군중과 탄압 군경 사이에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는 파상 국면에 있었던 때다. 김단야는 김천의 청년들을 결속해 만세시위를 꾀했다. 그 결과 두 차례 만세시위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324일 고향 마을 뒷산에서 벌어진 산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 만세시위는 일본 관헌의 탄압에 노출되고 말았다.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체포됐는데 그중 네 사람이 재판에 회부됐다. 20~38살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학생 김태연(金泰淵)이 포함됐다. 김태연은 바로 김단야의 본명이었다. 피고인들은 그해 4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징역 3개월에 처해야 하지만 나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태형 9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3·1운동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수형 시설이 부족했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태형이란 엉덩이를 나무 막대로 내려치는 형벌을 말한다. 조선 강점 직후 1912조선태형령으로 법제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식민지 토착민인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차별적이자 모욕적인 징벌이었고, 인간 몸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김단야와 그 동료들은 하루 30대씩 사흘에 걸쳐 모두 90대의 매질을 당했다.

3·1운동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을 무렵의 김단야. 임경석 제공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

김단야는 3·1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숱한 무명의 유공자와 희생자들처럼 그의 3·1운동 참가 사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단야의 3·1운동 행적이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그는 3·1운동 발발 이전에 이미 비밀 학생위원회 일원이었고, 시위가 일어난 뒤에도 비밀결사 반도의 목탁팀의 구성원으로서 반일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에 헌신했다. 3월 중순에는 농촌 만세시위운동 조직화에 참여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야만적인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3·1운동은 김단야에게는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비밀결사 참여, 외국 망명, 사회주의 수용, 귀국 도중 체포와 형무소 수감,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김단야 혁명운동사의 첫 페이지에는 3·1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 문헌

1.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27.

2. ‘3·1항쟁기의 한국학생운동-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 <논문집> 8, 숙명여자대학교, 5, 1968.

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2>, 탐구당, 166, 1966.

4.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도 장용하 등 판결’, ,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229, 1971.

5. 김팔봉, ‘片片夜話 71, 배재와 3·1운동’, , <동아일보> 1974523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김단야 기자가 상하이에 특파된 까닭은

1924년부터 2년간 기자였던 김단야,

기자 신분증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에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김단야. 임경석 제공

 

김단야도 합법 신분을 가진 때가 있었다. 1924~25년 두 해가 그랬다. 24~25살 젊은 때였다. 그땐 공공연하게 식민지 수도 경성의 대로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한평생 혁명운동에 몸담은 까닭에 비합법 영역에서 남의 이목을 피해 다니거나 외국 여러 나라로 망명했던 그로서는 예외적인 시절이었다.

 

국경도 넘고 철도 여행도 하는 신분증

19241월 신의주 감옥에서 출옥한 뒤 그러한 자유를 얻었다. 수감된 이유는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려다 국경에서 그만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실제로는 110개월이나 갇혔다. 경찰 신문과 검사국 예심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었던 탓이다.

 

김단야는 출옥 후 곧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3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공청)에 복귀해 중앙총국 위원에 선임됐다. 체포될 때 재임했던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단야는 합법 공개 영역에서도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해 4월에 설립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합법·비합법 양 영역에서 조선 청년운동의 진행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합법 신분이 공고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문사 덕분이다. 김단야는 그해 8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기자 직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을 하는 데 유용했다. 기자가 되면 여러 활동의 편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철도를 이용한 지방 출장이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 철도 여행은 비합법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기차역 개찰구와 열차 속에는 어느 때건 경찰이 상주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불시에 검문했고,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연행하기를 능사로 했다. 그러나 기자 신분증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심지어 국경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신의주를 지나 중국 영토로 나가거나,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도항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김단야는 합법 신분을 활용하여 각 지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표면상으로 취재 활동에 종사함과 동시에 이면으로는 비밀결사 세포단체들과 연락·통신하는 업무에 임했다. 경찰이 막아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신문사 명함만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기자가 되면 선전도 손쉬웠다. 해방 이념과 자유 서사를 전파하는 데에는 신문 지면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게 더 없었다. 비록 총독부의 검열과 정간의 위협 때문에 표현을 적실하게 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김단야는 그 여지를 잘 활용했다. 그가 자기 명의로 <조선일보> 지면에 기고한 글들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것은 레닌 회견 인상기라는 제목의 11회 연속 기사였다. 레닌 사후 1주년을 기념하여 1925122일부터 23일까지 연재한 글이었다.

 

레닌 회견 내용을 녹인 놀라운 기사

이 글은 레닌 사망 1주년을 맞아 각 신문사가 기획한 특집 기사들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김단야는 레닌과 회견한 경험이 있었다. 1921년 말 1922년 초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갔을 때 조선대표단 일원으로서 레닌과 회견했던 경험을 기사 속에 녹여넣었다. 이 연속 기사는 독자를 놀라게 했다.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의 활동상을 합법적인 신문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세계사적 영향력을 지닌 레닌과 직접 면대한 조선인의 기록이라는 점, 조선일보사 현직 기자가 직접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등도 눈길을 끌었다.

 

김단야는 민완한 신문기자였다. 국내외 정세에 밝고 문장력이 좋았다.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다. 중등학교 이상 교육을 이수한 조선인이라면 다들 할 줄 아는 조선어와 일본어 외에도 두 개의 외국어를 더 구사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김단야의 기명 기사 가운데 상하이에 관한 것이 있다.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두 번째 상해를 밟고, 신년을 맞으면서가 그것이다. 이 글들은 상하이에 가는 노정에서 겪은 일과, 상하이라는 공간이 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비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중 한 소절을 읽어보자. 김단야의 내면 의식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흔들리던 선체는 아주 자는 듯이 침착하여졌다. 둥그런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푸른 물결 저편에 뫼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이 겨우 곤한 잠을 채 깨지 못한 나의 시선을 물들인다. 나는 정신을 차려 한참 주목했다. (중략) 과연 큰 섬이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 섬이 즉 산이오, 그 산이 즉 섬이었다. 그것이 곧 제주도인 한라산이오, 한라산인 제주도이었다.”

 

김단야는 남해 먼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로쿠칸마루 선상에서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일본 모지항에서 출발하여 49시간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19241230일 오후 2시에 출항했으므로, 상하이 도착 예정 시간은 해가 바뀌는 192511일 오후 3시였다.

 

그는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고국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 저것이 과연 제주도이다. 나의 고국의 산천이다라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저 땅에서 발을 옮겨놓은 지가 불과 3일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경성을 떠난 것이 3일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새삼스럽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지 통치하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싣는 글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표현이었다.

상하이 특파원 김단야가 송고한 첫 번째 기사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조선일보> 1925126일치

 

따로 특파원을 파견해야 했을까

그는 갑판에 올라갔다. 혹여 흰옷 입은 사람이라도 보이겠나 싶어서였다. 마침 망원경을 지닌 중국인 승객이 곁에 있었다. 김단야는 말을 걸었다. 망원경을 좀 빌려달라고 중국어로 청했다. 하지만 그 중국인은 잘 못 알아들겠다고 답했는데, 광둥어였다. 김단야는 그제야 그 사람이 광둥 사람인 줄 알고서 다시 광둥어로 청했다고 한다.

 

김단야가 중국어에 더하여 광둥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상하이·광저우 체류 경험이 놓여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12월에 망명을 단행한 김단야는 19224월 입국을 시도할 때까지 주로 상하이에서 체류했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에서 수학할 목적으로 광저우에서 4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김단야가 상하이로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저 땅을 떠난 지 불과 3일도 못 됐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받고서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취재하려고 했는가. 상하이에서 기고한 두 기사만으로는 김단야 특파원의 소임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상하이로 가는 노정기라든가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 관한 스케치 기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따로 특파원을 파견할 것까지는 없는 평범한 테마였다. 도대체 김단야는 왜 상하이에 출장을 갔을까?

 

필자는 최근에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김단야가 19372월에 작성한 <자서전>을 보았는데, 그 기록에 1924년 말~1925년 초 그의 상하이 출장의 비밀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1924년 말 상해 소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국은 상해로 한 동무를 보내 당과 공청의 사업 활동에 관해 보고하도록 하라고 내게 알려왔다. 내가 보고자로 지목되었다. 나는 <조선일보>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용하여,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해로 임시 특파원을 보내야 한다고 신문사 사장을 설득했다. 그때 마침 쑨촨팡(孫傳芳) 장군(장쑤성장)과 루융샹(盧永祥) 장군(저장성장)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상해와 중국어를 아는 사람으로서 내가 꼭 가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가 상하이로 여행하는 내면의 이유는 비밀결사 운동의 필요에서 나왔다. 상하이에 소재하는 국제당 원동국과 경성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비밀결사 집행부 사이에 업무 연락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단야는 당과 공청의 내막을 잘 아는 핵심 간부인데다 합법 신분이 튼튼했다. 국경을 넘어서 오가는 데 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중국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과 공청의 집행부를 대표하여 국제당 원동국과 책임 있는 업무를 협의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외부로는 군벌 취재, 내부로는 비밀결사 운동

상하이로 특파되기 위해서는 신문사 경영진을 설득해야 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은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은 이상재가 추대되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신석우가 재임하고 있었다.

 

김단야가 설득했다는 경영진은 아마도 신석우였을 것이다. 김단야는 중국 군벌전쟁의 취재 필요성을 제기했다. 19248월에 발발한, 장쑤성의 쑨촨팡과 저장성의 루융샹 두 군벌 사이의 전쟁 양상을 보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특파원으로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스스로 추천했다. 2년여 상하이 체류 경험이 있고,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결국 김단야는 1924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상하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의 상대역은 국제당 원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였다. 두 사람은 국제당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창립 문제가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 동의했고,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행동의 골자를 입안하는 데에 성공했다. 4개 대회를 한꺼번에 준비한다는 복잡하고도 거창한 복안이었다. 비밀 영역에서 당과 공청의 창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합법 공개 영역에서 전국 규모의 두 종류 대중 집회를 소집한다는 계획안이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출장에서 되돌아온 직후,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대규모 조직 계획이 은밀하게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단야, ‘레닌 회견 인상기, 그의 서거 1주년에 (1-11)’, , <조선일보> 1925122~23.

2. 김단야, ‘제주도를 眺望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 <조선일보> 1925126.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193727,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4. 이혜인, ‘혁신의 동요와 굴절: 1924-25년 조선일보의 혁신과 사원해직사건’, , <역사연구> 32, 184, 2017.

 

주저 없이 꿈꾸고 사랑하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의사 이덕요

남편 한위건 만나러 중국 망명했다 병에 걸려 세상 떠나

이덕요

 

그 사람 이름이 처음 신문에 난 것은 17살 때였다. 1914년 식민지 조선에서 유일하게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 <매일신보> 지방판에서였다. 함흥자혜의원 간호원 이덕요(李德耀)를 칭찬하는, 함흥지국에서 보낸 기사였다. 그에 따르면 이덕요는 함흥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진학한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도 우등으로 마쳤다. 인성이 어질고 얌전하며 행동이 단아하고, 일본어에 능숙하며 환자 간호에 헌신한 까닭에 칭찬 여론이 자자하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신문지국을 찾아와 이 갸륵한 미담을 보도해달라는 퇴원 환자들도 있었다. 병든 사람을 지극히 돌보는 간호원에게 감복한 이들이었다.

 

의학 공부하러 일본 유학 떠난 간호원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 각 도에 하나씩 만든 총독부 직영 병원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진료기관이자 지방의 일반 개업의를 관리하는 감독기관이었고, 간호원을 양성하는 의학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즈음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의 교육 기간은 16개월로, 한 해 간호원 20명을 양성했다.

 

미담의 주인공 이덕요가 평생 간호원의 길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더 많은 교육을 받는 길을 택했다. 경성으로 가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진학한 곳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였다. 1900년 설립된 이 학교는 11년간의 선행 수업 연한을 요구하는 3년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소학교 6, 고등여학교 5년을 이수한 여학생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이덕요는 입학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본국의 학제와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업 연한은 보통학교 4, 여자고등보통학교 4년으로 모두 합해 8년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수업 연한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예비학교에 다니거나 예과 과정을 이수했을 것이다.

 

그 학교에는 조선인 여성 유학생이 여럿 있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개업의이자 이광수의 부인으로 유명한 허영숙은 그의 7년 선배였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여자 의사 정자영, 현덕신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2년 선배로 송복신·박정 등이 있었고, 1년 선배로는 한소제·길정희, 여성운동 지도자로 유명한 유영준 등이 있었다.

 

이덕요는 학업에 성심성의껏 임했다. 뒷날에 쓴 회상기를 보면, “학교 시대에 어떻게나 공부에만 명심을 했던지 도쿄 생활 6년간에 우에노공원, 히비야공원을 졸업할 때야 비로소 처음 구경했다고 한다. 그처럼 열심히 공부한 것은 내면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후부터는 여자도 경제적으로 꼭 독립하여야 하겠다는 각성으로그러했다고 한다.

 

유학 중에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 이듬해인 1920년에는 도쿄 여자유학생 단체인 조선여자학흥회에 참여해 집행부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애도 했다. 고향이 자기와 같은 함흥이고, 큰 키에 너털웃음을 잘 치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생 주종건과 한때 연인 사이였다. 주종건은 명철하고, 좌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말 잘하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 재능이 이덕요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 른다.

 

1924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덕요는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 조선의 최대 병원인 총독부의원에서 내과·소아과·산부인과 진료를 맡았고, 나중에 개인병원도 열었다. 1928년 인천에서 성실병원을, 1930년에는 경성 낙원동에서 동양부인병원을 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여의사로서 확고한 사회적 명성을 쌓았다. 일간신문 지면에는 여의사 이덕요명의로 질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기고문이 빈번히 실렸다. 홍역, 종두, 백일해, 자궁병, 신경병, 소아감기, 성홍열 등의 질병을 다뤘다. 그뿐인가. 새해가 될 때마다 신문사들이 앞다퉈 여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돼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함께

그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문필과 단체활동으로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남녀평등과 여성 인권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고, 남존여비와 조혼을 반대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혼의 자유를 강조했다. 의가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혼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행위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한다. “우리 여성은 이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굳게 모이라!”고 외쳤다.

 

이덕요는 미모가 출중했다. 언론인이자 극작가인 이서구는 그와 대면했던 일을 이렇게 떠올렸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최서해가 입원했을 때,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가 이덕요를 만났다고 한다. “호박색 윤이 흐르는 그 흰 살결, 불그레 타오르는 입술, 어디까지든지 정열적인 그 눈, 먹장 같은 머리등 어디로 보아도 참 절색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자기 가슴이 꽉 막히더라고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교양과 이지와 총명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그리스의 비너스 여신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윤백남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덕요를 가리켜 대표적인 조선 미인이라고 평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감시 대상자로 지목했다. 경찰의 비밀 정보문서를 보면, 이덕요는 공산주의자로 쓰여 있었다. 이 관찰은 실제에 부합했다. 그가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형적이 뚜렷하다. 두루 알다시피 근우회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 여성들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통일전선 단체였다. 이덕요는 19274월 발기인 모임을 할 때부터 사회주의 몫으로 거기에 참여했다. 그해 527일 창립총회에도 참가했으며, 그 자리에서 회의장의 정숙과 질서를 유지하는 사찰역할을 했다. 주세죽, 강정희 등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들과 함께였다. 그는 집행부에도 진출했다.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집행부에서 그의 역할은 정치부책임자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근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정치연구반을 열었다.

 

근우회에 대한 헌신은 오래 계속됐다. 창립 4년차인 1930년에도 근우회 경성지회에 참여했음이 확인된다. 그해 2월에 이덕요는 집행위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담당 부서는 정치문화부였다. 근우회 여성 회원들의 정치적 각성과 의식 수준을 높이는 일을 줄곧 해온 것이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지어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들여다보자. 그에 따르면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 합법 언론매체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지어서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

일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의 후신인 도쿄여자의과대학 정문(). 이덕요가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근우회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 회의장. 단상에 의장과 서기 2명이 있다. 참석 회원이 80, 남녀 방청객이 300명이었다.

 

사랑하며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봤지만

그의 배우자도 사회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최고 이론가라고 일컫는 유명한 한위건이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1925년 가을에 결혼했다. 아내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총독부의원 의사로, 남편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할 때였다. 한위건은 합법적으로는 언론인 신분이었지만,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도 깊숙이 관련돼 있었다. 결혼한 지 두 해 뒤인 1927년에는 합법·비합법 양쪽에서 공히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정치면 기사 작성을 책임졌으며, 비합법 공간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전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금실은 매우 좋았다. 조그만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부부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요는 결혼생활에 대해 짤막한 수필을 남겼다. 그는 이성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 연후에야 사람은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볼 수 있다고 썼다. 한위건과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남녀에게 권했다. 주저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라고.

 

그러나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83월 남편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이라는 대대적인 탄압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위건은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했다. 당 기관지 <계급투쟁>의 발간을 주도하면서 맹렬히 필봉을 휘날렸다.

 

이덕요는 외로웠다. 의사가 직업이니 여자 혼자 살면서도 생계를 걱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평화를 잃었노라고 고백했다. “H를 멀리 바다 밖으로 보내고 벌써 3년째나 고독한 생활을 해오는중인데, “나에게는 그분을 사모하는 생각이 점점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별 3년차 되던 19311, 신문에 실린 신년 소감문에서 뭔가를 결단했음을 암시했다. 거친 파도를 헤쳐서 저 앞에 가로놓인 큰 바다를 건너가고 싶다고 했다. 작은 배라도 한 척 얻어서 건너가고 싶다고 썼다. 설혹 그 배가 모진 파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도 헤엄쳐서 저 바다를 건너가고야 말겠다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해 5월이었다. 이덕요는 마침내 망명을 결행했다. 행선지는 중국 베이징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남편을 찾아서 출국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의 정보문서를 보면, 베이징에 있는 그의 주소는 북평(北平) 신문내(新門內) 순성가(順城街) 여명보공(黎明補公)중학교 내였다. 남편을 따라간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 동지들의 견해로는 이덕요는 그곳에 가서도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한위건과 나란히 반일 혁명운동에 참여하려고 이덕요가 망명했다고 이해했다.

 

남편과 반일 혁명운동은 해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이덕요의 망명 생활은 길지 못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얼마 안 돼 몸져눕고 말았다. 몹쓸 병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귀국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박문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덕요의 마지막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부군 한위건은 지금까지도 사별한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참고 문헌

1. ‘지방매일, 함경남도 함흥’, , <매일신보> 191459일치.

2. 최은경,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의사들의 활동’, , <코기토> 80, 291, 20168.

3. 이덕요, ‘인습 타파가 목전의 문제’, , <동아일보> 192772일치.

4. ‘현대 장안호걸 찾는 좌담회’, , <삼천리> 193511월호 87~88.

5.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第11312, 槿友會執行委員會’,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7105.

6. 한위건씨 부인 李素山,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생활상 일대 轉機’, , <별건곤> 4, 89, 19272.

7. ‘어떠한 결심과 어떠한 희망으로써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나?’, , <매일신보> 193113일치.

8. 觀相者, ‘사랑이 잡아간 여인상’, , <별건곤> 57, 40, 193211.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상하이파 공산당 쇠락엔 그의 죽음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유학생이 연대한 혁명단체들 이끈 최팔용

조선 사회주의운동 궤적 그리고 요절한 혁명가

조선 사회주의운동 개척자인 최팔용. 임경석 제공

 

최팔용(崔八鏞)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다. 3·1 혁명의 도화선이라 평가받는, 재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192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학우회 총회의 단상에 올라 유학생 수백 명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2·8 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서명

현장 모습을 전하는 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받치는 감격과 눈물 섞인 목소리로 집회를 이끌었다. 그는 독립선언서의 수석 서명자이기도 했다. 그날 배포된 선언서에는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 11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맨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해 16일께부터 시작된 준비 과정도 최팔용이 총괄했다. 보기를 들어, 선언서 집필을 담당한 이광수에게 중국 상하이 망명을 지시한 이도 그였다. 이광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은 선언서를 짓는 것이었는데, 정성과 재주를 다해 밤새워 그 일을 했다고 한다. “2월 초하룻날 잔설은 아직 간다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뜰 앞을 가린 채로, 무서운 간토 폭풍이 시가지를 훑고 지나가던 밤이었다.

 

바람 소리에 유리창이 덜컹거릴 때마다 순사 옆구리에 차는 패검 소리가 아닌가 하여 몇 번이나 작업을 중단했다.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을 때, 최팔용이 찾아와서 상하이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부도 중요하니, 선언서를 가지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선언서 서명자들의 역할 배분 같은 중요하고도 은밀한 일을 최팔용이 관장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관헌들이 보기에도 그는 죄가 컸다. 그는 재판정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2·8 독립선언으로 공판에 회부된 사람은 9명인데, 그중 최팔용은 서춘과 함께 나란히 징역 9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팔용이 큰 영향력을 가졌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립선언이 있기 몇 년 전부터 그는 도쿄 조선유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172월부터 편집부 부원으로 일했고, 그해 9월 책임이 더욱 무거워져서 편집부장으로 선임됐다. 편집부 소임은 유학생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펴내는 일이었다. 19144월 창간된 이 잡지는 격월간으로 기획됐지만 실제로는 연 24회 발간됐다. 최팔용이 편집부에 있는 동안에는 제12(19174)부터 제17(19188)까지 모두 6개호가 나왔다. 직접 글도 썼다. 자신의 본명이나 당남인’(塘南人)이라는 필명으로 다섯 꼭지의 기사를 썼다. 당남은 그의 아호였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의 외모와 재능도 한몫했다. 최팔용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던 최승만은 최팔용을 가리켜 키가 크고 큰 몸집을 가진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함경도 출신으로 허우대가 좋고 유학생들의 리더 격이었다고 회고한 글도 있다. 게다가 그는 웅변도 잘했다. 1918413, ‘각 대학 동창회 연합 현상(懸賞) 웅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최팔용이 1등상을 받을 정도였다.

 

이날 그는 대세와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설령 망했더라도 영구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설혹 융성한다 하더라도 역시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역사를 보라고 환기했다. 망국 폴란드는 오늘날 독립했고, 러시아 제국은 쇠망 상태에 처했음을 지적했다. 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종결될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즈음 청년은 마땅히 자신의 의무를 다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했다.

팔용이 수감됐던 일본 도쿄 스가모감옥의 구조. 임경석 제공

 

일본 형무소 출소 뒤 조선 명사로

합법 공개 집회였기에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조선 멸망은 영구적인 게 아니므로 전쟁 종결을 맞아서 청년은 마땅히 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8 독립선언을 예감케 하는 격렬한 연설이었다.

 

유학생들을 이끄는 지도적 역량은 무엇보다 그의 비밀결사 경력에서 나왔다. 최팔용은 신아동맹당이라는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1916년 결성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단체였다. 조선, 중국 대만 출신 유학생들이 각각 자국의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해서 만든 기구였다. 이 중 조선인 구성원은 18명이었다. 의지가 굳고 조국을 위해 한번 죽음도 불사할 만한 사람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의 동지인 김도연도 같은 멤버였다. 구성원 가운데 절반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 뒷날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중핵을 이루기도 했다. 장덕수, 김철수, 김명식, 홍진의 등이 그 보기였다.

 

2·8 독립선언 이듬해인 1920326, 최팔용은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도쿄 스가모감옥 문을 나섰다. 뒷날 사상범을 주로 수용하던 형무소로 유명해졌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A급 일본인 전범들을 처형한 장소로 이름난 곳이었다. 최팔용은 귀국길에 올랐다. 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의 동정은 언론 매체의 관심 대상이 됐다. 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해 닷새간 체류했다가, 다시 경성발 열차로 귀향하는 일정을 일간신문들은 낱낱이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명사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열차가 함흥역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50~60명이 역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날 저녁에는 만찬에 초대하려는 지인들의 권유 때문에 귀향 일정을 하루 미뤄야 했다. 그뿐인가. 다음날 425, 버스 편으로 고향 홍원으로 출발할 때도 전송객 수십 명이 그를 둘러쌌다.

 

최팔용은 출옥하자마자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이제는 학생운동이 아니라 민중운동이었다. 맨 먼저 착수한 조직 대상은 청년층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20515일에는 홍원청년구락부 결성에 참여했다. 홍원군 내 11개 면의 청년들에게 웅변회, 운동회, 강연회를 여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단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단체를 결성한 게 귀향한 지 불과 20일 만의 일이었다. 옥중에서부터 이미 출감 이후 진로를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

그가 염두에 둔 향후 진로는 바로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20년 가을 경성에서 사회혁명당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에 참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단체였다. 그 멤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설립 당시 구성원은 약 30명이었는데, 중심인물들은 일찍이 도쿄 유학생 시절에 조직했던 비밀단체 신아동맹당의 당원이었다. 최팔용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수, 홍진의, 김명식, 정노식 등이 그러했다. 이 비밀단체는 이듬해 더욱 확대됐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해 고려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단체는 본부를 상하이에 뒀기 때문에 통칭 상하이파 공산당이라 했다.

 

최팔용과 그 동지들은 합법·비합법 운동을 결합하는 방침을 굳게 지켰다. 3·1 혁명 이후 총독부가 허용한 이른바 문화정치 공간을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각계각층의 전국 규모 합법 대중단체를 조직하는 데 노력했다. 전조선청년회연합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의 단체는 그 소산이었다. 그뿐인가. 합법적인 사회주의 선전 기관을 세우는 일에도 진출했다. 최팔용은 잡지 <학생계>의 주간을 맡아, <학생계>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매체로 활용하려 했다. 이 노력은 큰 성과를 올렸다. 사회주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해가 다르게 늘어났다. 요컨대 최팔용의 출옥 뒤 행보는 3·1 혁명 직후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확대되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표상과 같았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일간신문에 최팔용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가 떴다. 1922114일치 신문이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최팔용씨는 그제 2일 오후 10시경에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 자택에서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씨는 성질이 중후 순직한 인격자로 사회의 촉망이 많았으며, 향년이 32세인데, 일반 유지들은 그의 부음을 듣고 사회의 유망한 청년 하나를 잃어버렸다 하여 매우 애석히 생각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며, 시내 종로 6정목에 유숙하고 있는 그의 자녀 삼 남매는 이 놀라운 부음을 듣고 어제 아침에 홍원으로 급행하였다.”

 

32살 청년 떠나니 비밀결사도 힘 잃어

사망 일시와 장소, 원인이 밝혀져 있다. 1922112일 오후 10시께 함경남도 홍원 자택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요절이었다. 1891년생이므로 향년 32살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에 관한 단편적 정보가 눈에 띈다. 경성 종로 6정목에는 어린 자녀 삼 남매가 머물렀다고 한다. 최팔용은 홍원과 경성을 오가기 위해, 또 어린 세 자녀의 교육을 위해 아마도 경성 시내에 살림집을 하나 사두었거나 임대했던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정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유망한 청년을 잃었다는 애석함과 애도의 심리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의 부재는 상하이파 공산당 세력이 부진해진 한 원인이 됐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없었다면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가 약화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이광수, ‘상해의 2년간’, <삼천리> 4-1, 29, 19321.

2. ‘소식’, <학지광> 17, 78, 19188.

3.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6, 東京, みすず書房, 9, 1967.

4. ‘中第274, 新亞同盟黨組織スル’, 大正6(1917)314, 1~12. <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部在内地(2)>

5. ‘최팔용씨 迎送’, <동아일보> 192052일치 4.

6. ‘崔八鏞氏’, <동아일보> 1922114일치 3.

 

다나카 저격수의 탈옥

황포탄 의거오성륜

맹수 우리 같던 감옥을 어떻게 탈출했나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의 크기. 임경석 제공

 

1922328일 다나카 일본군대장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황포탄 의거라고 한다. 사건 직후 이 의거의 주역 가운데 두 사람이 체포됐다. 김익상(28)과 오성륜(23)이었다. 이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일본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권총을 소지한 괴한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상하이 거주 시민들과 교통순경이었다. 한낮에 총을 쏘면서 대로를 뛰어다니지 않았는가. 그들 눈에는 갑작스러운 총격과 위험천만한 난동으로 보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투쟁이라고는 미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일본총영사관이 아니라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에 인계됐다. 사건 장소도 그렇고, 두 사람이 체포된 곳도 공동조계 관할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경찰이 취조했다. 범인들의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거침없이 진술했다. 그리하여 두 명 모두 한국인이고, 한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단체 소속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김익상은 나는 단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할 뿐이라고 했다. 오성륜도 우리 조국이 고통받는 현실을 우리 손으로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노라고 토로했다.1

 

감옥에 가둔 것은 맹수였다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건물. 현재 중국 해군 군사시설로 쓰이고 있다. 임경석 제공

 

이틀 뒤, 두 사람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인계됐다. 사건 수사 기록과 증거물도 함께였다. 바로 그날부터 일본인 경찰의 문초가 시작됐다. 범죄 동기, 범행 경로, 공범자 관계 등을 집요하게 신문했다.

 

두 사람이 갇힌 곳은 높은 담을 둘러친 총영사관 구내의 부속 감옥이었다. 총영사관은 상하이 일본인 지구를 관할하는 일종의 정부와 같았다. 자체 경찰기관이 있을 뿐 아니라 검찰, 재판부, 감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감옥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 이전의 미결수들을 주로 수용했다.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넘겨진 죄수는 본국 나가사키 감옥으로 송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 사람은 분리 수용됐다. 김익상은 1번 방, 오성륜은 5번 방에 갇혔다. 마땅히 독방에 가둬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방 수는 6개에 불과한데 수감 중인 범죄자가 이미 25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잡범들과 같은 방에 수용됐다. 각각 3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혼거방에서 지내게 됐다.2

 

오성륜이 갇힌 5번 방은 감금 설비가 이중으로 돼 있었다. 실내 한쪽에 철봉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아, 따로 철제 우리를 설치한 특수 감방이었다. 맹수를 수용하는 동물원의 철제 우리와 다름이 없었다. 철제 우리 출입문에는 빗장이 걸렸고, 거기에는 다시 쇠자물쇠가 채워졌다. 오성륜은 5번 방 속에서도 철제 우리 안에 갇혔다. 그뿐인가. 팔목에는 수갑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중범죄자인지라 엄중하게 다루었다.

 

수감 열흘쯤 되던 때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감방 내부에 철제 우리를 따로 둔 구조는 간수들에겐 무척 성가신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용변이 문제였다. 변기는 철제 우리 밖에 있었다. 수감자가 용변을 요청할 때마다 간수들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5번 방 문을 따고 들어와서, 다시 철제 우리 차단문에 달린 빗장과 쇠자물쇠를 열어줘야 했다. 수갑과 족쇄도 풀어줘야 했다. 그러고는 얼마쯤 용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으며, 용변이 끝난 뒤에는 이제 역순이었다. 다시 수갑과 족쇄를 채워 철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빗장과 자물쇠를 닫아야 했다. 이렇게 열흘이 지났다. 경찰과 검사의 신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피의자가 범죄행위를 감추지 않고 진술했기 때문에 혐의 사실은 모두 판명된 상태였다. 머잖아 사건은 예심으로 넘어갈 터였다. 중죄인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간수들은 철제 우리 차단문에 걸린 빗장과 잠금장치를 일일이 열고 닫던 행위를 생략했다. 용변 처리를 범죄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오성륜은 철제 우리 안팎으로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손발에 수갑과 족쇄는 달렸지만. 47일부터였다.3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이 어떻게

탈옥을 허용한 원인을 설명하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보고서.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을 언급한 게 보인다. 임경석 제공

 

오성륜은 다른 수감자들과 잘 지냈다. 모두 일본인이었다. 다무라 추이치는 사기 범죄로 징역 16개월형을 선고받은, 전과 2범의 누범자였다. 다른 두 수감자는 고가의 밀수품을 밀매하는 암시장 상인들이었다. 고미야 시카조는 권총 밀매와 공갈죄로 징역 3개월을 받았고, 후지타 가메노스케도 총기 밀매 혐의로 구류 25일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오성륜은 이 수감자들에게서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고문으로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이 그들 마음속에 일었던 것 같다. 사형이 예정된 중죄인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었다. 또 오성륜의 개인적인 성품과 태도에 수감자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5일 경찰과 검사 신문이 끝났다. 사건은 총영사관 판사의 예심에 회부됐다. 10여 일이 지났다. 김익상에 관한 예심 사무는 종료됐고, 오성륜 심리도 완결을 앞두고 있었다. 며칠 뒤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오성륜은 소도’(작은 칼)를 손에 넣었다. 뒷날 경찰 조사에 따르면, ‘히고노카미’(肥後守) 브랜드가 새겨진 접이식 주머니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경찰도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감옥 외부에서 조력자들이 암약했거나, 경계 소홀을 틈타 어디선가 훔쳤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427일이었다. 오성륜은 식기 뚜껑의 작은 금속 부위를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창문 틈에서 뽑아낸 철사 한 줄을 그것에 감았다. 수갑과 족쇄를 풀 열쇠로 쓰기 위해서였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428, 수갑과 족쇄가 열렸다. 이날부터 오성륜은 병에 걸렸다고 가장하며 세수와 목욕 등 감방 밖 출입을 중단했다.

 

사기범 다무라는 오성륜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동반 탈옥을 결심했다. 다른 두 수감자는 형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같은 편이었다. 탈옥 계획을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탈옥이 성공한 뒤에는, 살해 위협 때문에 부득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노라고 진술하기로 입을 맞췄다.

 

5번 방은 건물 2층에 있었다. 원래 영사관 직원 숙소로 쓰던 곳을 감옥으로 개조한 시설이었다. 한쪽 벽면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도로에 접한 창이었다. 창문 밖으로 거리 풍경이 엿보였다. 당연히 거기에는 탈주 방지 시설이 굳게 세워져 있었다. 철망이 둘러쳐지고, 철봉 4개가 조밀하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철망을 뜯어내고 철봉을 한두 개 제거하면 몸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시간 날 때마다 철망 절단 작업에 매달렸다.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겨우 가로세로 10씩 절단할 수 있었다.4

 

탈옥을 위한 한일 연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있던 위치, 현재 황푸로 106번지. 아래 붉은 별 찍힌 곳. 임경석 제공

 

좀더 시간을 들이면 철망은 뜯어낼 수 있겠지만, 철봉 제거는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다. 밀수품 밀매범 고미야는 목수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감방 출입문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감방 출입문 아래쪽 일부는 나무로 돼 있으므로, 그것을 깎아내자는 제안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51일 아침이었다. 세면 시간에 누군가가 간수 사무실에서 조그만 숫돌 하나를 몰래 갖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주머니칼은 다시 날카롭게 벼려졌다. 수감자들은 출입문 널판을 교대로 베어냈다. 숙직 순사의 이목과 간수들의 순시를 피해 소리 없이 해야 했다.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교대로 나무를 깎았다. 온종일 그렇게 했다. 마침내 가로 48, 세로 30직사각형 구멍이 뚫렸다. 성인 남성 한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 만한 크기였다.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떼낸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원래 상태처럼 꾸몄다.5

 

밖으로 나가자면 옷과 신발을 갖춰야 했다. 오성륜은 체포될 때처럼 다갈색 혼방 모직으로 된 중국 옷을 입고 있었다. 다무라가 문제였다. 그는 수의에 맨발 차림이었다. 그를 위해 낡은 양복을 입고 있던 후지타가 자기 옷을 내놨다. 바닥에 깔고 자던 이부자리를 뜯어서 신발 비슷하게 만들었다. 또 준비할 게 있었다. 남은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나갈 사람들은 남은 두 사람의 수족을 감방 속 철봉에 묶고, 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다.

 

새벽 130분이었다. 숙직 순사들의 순시가 끝난 지 30분이 지났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행동에 들어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뒷날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자른 문짝으로 감방을 빠져나왔고, 층계로 1층에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영사관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으로 갔고, 출입자가 드문 영사관 뒷문을 타고 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들은 깊은 밤중이었지만 영사관 건물 앞 황푸로 거리에서 두 대의 인력거를 불러 탈 수 있었다. 인력거는 프랑스 조계로 향했다. 탈옥자들의 피신을 돕는 동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6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탈옥수

오성륜 탈옥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 19221213일치 기사. 임경석 제공

 

두 사람이 옥문을 뚫고 나간 지 30분쯤 지나, 옥중에 남은 이들이 비로소 고함을 질렀다. 간수와 숙직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제야 총영사관 쪽은 탈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상이 걸렸다. 탈옥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행위자가 다나카 대장 저격범이지 않은가. 총영사관은 수배령을 내렸다. 모든 경찰력과 밀정 조직을 가동해 탈출범들의 동선을 추적했다. 범인들의 이동이나 잠복 장소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정거장, 부두, 여관 등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또 상하이 여러 구역을 관장하는 다른 경찰 조직에도 협조를 구했다. 공동조계 공부국 경찰, 프랑스 조계 경찰, 중국 경찰기관에 통첩을 보내 비상경계를 요청했다. 효과는 없었다. 오성륜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총영사관은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또 하나의 저격범 김익상을 부랴부랴 일본으로 이송했다. 오성륜이 탈옥한 바로 이튿날, 53일 자로 김익상은 산조마루 여객선 편으로 나가사키 지방재판소로 압송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더 차이나 프레스> 1922329일치.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 임정편>, 국사편찬위원회 편, 241, 1991.

2.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スル, 大正1153. 日本外務省 編, 外務省警察史 -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2, 高麗書林影印, 678~679, 1991.

3.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スル, 大正11712.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98.

4. 在上海船津總領事, 앞의 글, 大正1153.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83.

5. ‘吳壯士脫獄顚末’, <독립신문> 19221213일치.

6. 위와 같음.

 

독립운동가의 마음에 어린 딸이 떠올랐다

상하이 황푸탄 의거 주도한 독립투사들의 유언

딸아 아우야 나처럼 살길 바란다

군복을 입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사진 임경석 제공

 

중국 상하이 황푸탄에는 배를 접안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이 즐비했다. 오늘날 와이탄이라 하는 그 번화한 곳 말이다. 접안 시설을 중국어로는 마두’(碼頭)라고 했다. ‘세관 마두도 그중 하나였다. 화물과 여객의 입출항을 관리하는 세관이 담당하는 것이니만큼 규모가 컸다. 위치도 번듯했다. 다채로운 유럽식 건축물이 늘어선 황푸탄 지구의 정중앙이라 해도 좋을 곳이었다.

1922328일 화요일이었다. 세관 마두를 향해 호화로운 여객선 파인 트리 스테이트호가 서서히 들어왔다.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입항하는 중이었다. 오후 330, 여객선과 육지를 연결하는 부속선이 승객들을 싣고서 마두에 접안했다. 배에는 여러 나라 사람이 섞여 타고 있었다. 세계 여행을 즐기는 미국인 여행자 그룹도 있었고, 일본인 고관과 그 수행원들도 있었다.

 

주목을 끄는 이는 일본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58) 남작이었다. 191821년 일본 육군대신으로 재임했던, 군벌 수뇌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에 대한 일본군의 유혈 탄압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1920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북간도에서 자행된 독립군 토벌 작전인 경신참변에도 책임이 있는 자였다. 한국인의 해방운동을 총칼로 압살하도록 명령한 자였다. 그가 상하이를 방문한 때는 육군대신 직을 내려놓고 잠시 한가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총독 레너드 우드의 초청으로 마닐라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는 상하이에 들러 현지 일본인 유지들과 환담할 예정이었다. 그의 상하이 방문 일정은 일간신문에도 소개됐다.

 

마두에 상륙한 다나카 남작은 출영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세관 검사소를 지나 큰길로 막 나오려던 때였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괴한이 불쑥 뛰어나오더니 권총을 꺼내 쏘았다. 탕탕탕! 세 발이었다.

 

3·1운동 탄압의 원흉을 겨누다

그뿐인가. 검은색 양복과 갈색 코트를 갖춰 입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나카 남작 앞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아스팔트 위로 떼구르르 굴렀다. 그에 더해 남자는 권총을 빼들고서 표적을 향해 두 발을 쐈다

 

사실은 세 사람이었다.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 사건에 가담한 의열 투사들 말이다. 세 사람이 거사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날 아침 6시였다. 춘분이 지나고 며칠 안 되는 때라서 어둑어둑했다. 해 뜰 무렵이었다. 그처럼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한 까닭은 혹여 언론 보도와 달리 기선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몇 시간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후 3시 남짓까지, 일행은 무려 9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언제나 배가 도착할까, 세 사람의 신경은 온통 그것에만 쏠렸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오성륜(23)은 첫 번째 행위자였다. 표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권총을 쏘기로 돼 있었다. 그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한구로 입구에서 강변 쪽을 향해 9~10m쯤 떨어진 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세관 마두의 검사소 출입구가 환히 보이는 곳이었다. 2선은 김익상(28)이 맡았다. 불행히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가 나설 터였다. 두 번째 거사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는 한 손엔 폭탄을, 다른 한 손엔 권총을 들었다. 갈색 코트가 도구를 감추는 데 제격이었다. 그는 부두 한쪽 전화 부스 뒤에 자리를 잡았다. 3선 행위자도 있었다. 바로 이종암(27)이었다. 이도 저도 실패한다면 그가 나설 참이었다.

 

세 사람은 동지들이었다.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약속한 이들이었다.

 

한 명의 타깃, 세 명의 희생

푸탄 저격 사건에서 뜻밖의 희생자가 된 미국인 여성 스나이더. 사진 임경석 제공

 

다나카 남작은 운이 좋았다. 오성륜이 처음 쏜 총알 세 발은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 그 대신 다나카 남작과 나란히 걷던 미국인 여성 관광객 W. J. 스나이더가 거꾸러지고 말았다. 여성은 최초 사격이 있을 때 막 세관 검사소 건물을 나왔다. 오른쪽 가슴에 세 발의 관통상을 입은 여성은 급히 병원에 옮겨졌지만, 도착 10분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40살 정도인데, 남편과 함께 5개월 전에 세계 여행을 위해 미국 뉴욕을 떠난 8명의 관광단 일원이었다. 상하이에서 이틀간 체류한 뒤 베이징, 한국, 일본을 거쳐 고향인 미국 인디애나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이 부부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슬픔을 잊으려고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듣는 이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김익상이 던진 폭탄도 불운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폭탄은 도로를 가로질러 강둑 가장자리까지 굴러갔는데, 마침 영국 전함 카라일호의 승무원이 발로 차서 강물 속에 넣어버렸다. 왜 불발했을까? 그 소식을 들은 상하이 한국인 망명객들은 하나같이 장탄식을 내뱉었다. 상하이에서 간행되는 <독립신문> 가십난에 다음과 같은 한탄이 실렸다.

 

폭발탄아 폭발탄아 황포탄의 폭발탄아. 다나카 적()을 만나거든 소리치며 터지라고, 천번만번 부탁하고 정성들여 던졌거늘, 네가 무슨 까닭으로 침묵하고 있었더냐. 좋은 기회 다 놓치고 어느 때에 터지려고.”²

 

운 좋게도 저격을 모면한 다나카 일행은 신속히 몸을 피했다. 그 탓에 제3선에 대기 중이던 이종암의 사격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목표를 맞추지 못했다. 사건 현장검증을 맡은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의 리브 형사는 그 기미를 알아챘다. 3의 가담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몇 발의 탄흔을 발견했는데, 김익상과 오성륜이 서 있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황푸탄의 폭발탄아 왜 침묵하였느냐

김익상과 그의 부인. 사진 임경석 제공

황푸탄 의거 현장(붉은 별). 주인공들의 도주 경로와 체포된 장소(위 김익상, 아래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연거푸 터지는 총소리와 군중의 비명 때문에 패닉 상태가 됐다. 오성륜은 뛰었다. 몸을 뒤로 돌려 전찻길 건너 항구로 방향으로 달렸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혼잡한 길이었다. 권총을 쥐고서 내달리는 위험해 보이는 괴한 앞을 행인들이 가로막았다. 그는 길을 가로막는 군중에게 위협사격을 했다. 중국인 순경과 인력거꾼 2명이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한 블록을 지나,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로였다. 그 길을 따라 다시 한 블록을 달렸다. 그러나 복주로와 만나는 십자로에서 현지 순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김익상도 뛰었다. 그는 전찻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달렸다. 현장을 본 몇몇 사람이 추격했다. 그들을 따돌리려면 도주 방향을 지그재그로 변화시키는 것이 유리했다. 추격자들이 뒤쫓아왔다. 도망자는 위협사격을 했다. 중국인 손수레 상인이 총상을 입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로였다. 창고가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 숨어들었다. 그러나 막다른 곳이었다. 되돌아 나왔으나 군중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한 서양 청년이 그를 덮쳤다. <파이낸스 앤드 코머스> 기자 영국인 H. E. 톰슨이었다. 김익상은 그에게 총상을 입혔다. 하지만 곁에서 달려드는 미국인 증권 중개인 호레이스 귤릭을 제압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이틀 전이었다. 1922326일 밤 10,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백이로 정운리 18호에 젊은이 8명이 둘러앉았다

 

세 사람을 송별하는 자리였다. 황푸탄 의거의 세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섯 청년이 합석했다. 김원봉(25)을 비롯해 권준, 강세우, 서상락, 송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그중 네 사람은 191911월 이래 창립 멤버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은 까닭은 죽기를 각오한 동지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한 동지들의 소회를 들으려 했다. 생전 마지막 육성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유언을 듣는 자리였다.

 

딸을 혁명가로 키워달라는 유언

김익상(왼쪽)과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과 오성륜의 유언을 적은 메모지 일부.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은 남은 동지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라고 주문했다. 우리 정신을 관철하기 위해 생사를 넘어서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욕된 운명에 속박돼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고 권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특히 단장 김원봉에게 당부했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그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아내와 3살 딸이 있었다. 서울 남산 너머 이태원리 288번지에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을 결심하는 순간 독립운동가의 마음속에 어린 딸이 떠올랐다. 아버지 없이 자랄 딸의 장래가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오성륜도 죽음을 결단하는 소회를 밝혔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음의 길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지하에서 다들 한자리에 모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도 가족의 장래를 동지들에게 부탁했다. 미혼인 그에게는 나이 어린 두 동생의 장래가 걱정이었다. 17살 오성룡과 6살 오성봉의 교육을 부탁했다. “약산(김원봉)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은 두 아우를 우리의 뜻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 유언은 죽기를 각오한 투쟁에 나서는 독립운동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결단의 순간에 그들 마음속에서 어떤 상념이 오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떠올렸다. 특히 아버지나 형의 보살핌 없이 서럽게 자라게 될 어린 자녀와 동생의 삶을 생각했다. 그 장래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각주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더 차이나 프레스> 1922329일치.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 임정편>, 국사편찬위원회 편, 240, 1991.

2 ‘폭발탄’, <독립신문> 1922415일치.

3 Shanghai Municipal Police, Special Branch, “D.4460, D.4463”, 같은 자료집, 442.

4 ‘프랑스 조계 白爾路 停雲里 18호의 한국인 집에서 329일 발견된 한국어 서류’, 같은 자료집, 448~450.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430.html

재판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101인 사건중 옥사한 34살 좌파 독립운동가 박길양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305.html

19101천억원 모아 서간도로

태백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소년> 잡지 권두시의 비밀

독립운동가들이 의병투쟁·애국계몽운동 다음으로 선택한 망명을 은유해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180.html

일제가 은폐한 재판 박헌영의 법정투쟁

90여 년 만에 드러난 ‘101인 사건재판

박헌영 뜨거운 항의 연설의 전모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093.html

적보다 치명적인 동지

양반 의병장 이범윤의 텃세에 쇠잔해진 홍범도 의병부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923.html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

홍범도 귀순 공작에 맞서 싸운 이씨 부인

일제의 참혹한 고문에 저항하다 비명횡사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863.html

시운이 없으면 영웅도 소용없다

2 러일전쟁 대신 제1차 세계대전 터지며

실패로 끝난 망국 이후 첫 독립운동 전략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591.html

개척리 살인 사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유력자 양성춘의 피살

당파싸움 끝 고의살해인가? 단순사고인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486.html

독립운동가 찍어낸 밀정계의 대부

블라디보스토크의 일제 비밀경찰 기토 통역관

밀정 부리는 데 탁월해 식민 통치 걸림돌 해결사로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380.html

독립운동가를 꺾은 국가의 낙인

김립 암살 사건은 임시정부의 국가 폭력

이젠 허위의 낙인 지우고 명예 되살려야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244.html

피지배민족 위한 인터내셔널리즘

한국 독립운동에 510억원어치 금괴 지원한 레닌

활발한 활동으로 지원 끌어낸 주체는 한인사회당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120.html

동지가 동지를 쐈다

임시정부 인사가 불명확한 의혹으로 김립 암살

정치세력 간 파벌 다툼이 부른 동족상잔의 비극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026.html

누가 독립운동가를 쏘았는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출신의 김립 암살 사건

범인 오리무중에 암살 둘러싼 네 가지 설만 분분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882.html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47살 오현주, 1938. 임경석 제공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786.html

참혹한 고문 이겨낸 조선의 혁명 여걸

한평생 독립에 헌신한 3·1운동의 투사 김마리아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해방 1년 앞두고 목숨 거둬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무부장, 이정숙 적십자부장, 백신영 결사대장, 김마리아 회장, 유인경 대구지부장. 독립기념관 제공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730.html

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김단야

스탈린 대숙청기 일본 밀정혐의 앞세워 총살돼

 

박헌영의 연인 한국의 로자

올 들어 잇따라 소설화된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

최근 자필 기록 이력서발견돼 오류들 정정 기회

주세죽은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1921년 중국 상해, 1925, 19289, 19298,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임경석 제공

 

주세죽(朱世竹)이라는 여성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으니 역사 속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잊힌 인물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는데도 그랬다. 마땅히 남과 북 어디선가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억해왔을 법한데도, 그 존재는 잊혀져왔다.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주세죽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주세죽의 삶

최근 발견된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 사료적 값어치가 높은 이 기록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아래 작은 사진은 코레예바라는 주세죽의 러시아어 서명.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올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연이어 발간되더니, 그 작품들이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올봄에 <코레예바의 눈물>(동하출판)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해 형상화한 <세 여자>(한겨레출판사)가 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112일 부산일보사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떠오르다니 말이다. 주세죽의 삶이 문학의 매력적인 소재로 떠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 신문 연재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있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자리를 점할 것이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생각난다.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가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야기는 소설·희곡·오페레타·영화·뮤지컬 등의 형태로 수백년간 반추돼왔다.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감독 다니엘 비뉴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983년에는 미국의 역사가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가 같은 제목의 역사책을 출간했다. 미시사 연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 책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금도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고 있다.

 

머지않아 주세죽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문학에 이어 영화가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삶이 문학과 예술의 여러 장르를 통해 다양하게 반추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러기를 바란다. 비극적인 삶을 견뎌야 했던 그의 영혼에 따스한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주세죽의 자필 기록이 발견됐다.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다. 직접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서 쓴 것이다. 일제강점기 옛 맞춤법에 따라 쓴 국한문 혼용의 글이다. 오자나 탈자가 눈에 띄지 않고 문장 구성이 문법에 합당하게 짜인, 교육받은 지식층이 작성했을 법한 글이다. 펜촉이 덜 길든 탓인지 잉크 흐름이 균일하지 않아서 더러 진하기가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젊은 여성 특유의 아담하고 단정한 맛이 느껴지는 필적이다. 역사 속 그를 직접 만나는 느낌마저 든다.

 

박헌영·주세죽에 대한 코민테른 신망

이 문서는 연구자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여태까지 활용할 수 있었던 주세죽의 정보는 주로 타자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자라기보다는 적대자라고 해야 더 적절하겠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심문관이 남긴 문답록 따위였다. 그에게서 범죄혐의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의식을 가진 자들이 생산한 기록이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주세죽 삶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든가 내면세계의 진정성을 밝힌다는 등의 목표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정보가 나열되어 있기 일쑤다. 이런 자료에만 의존한다면 아무리 주의 깊게 사료 비판을 하더라도, 메마르고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사자가 자기 의지로 작성한 기록이 나타났다. 이 문서는 1930324일에 쓴 것이다.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살던 때였다. 나이 30, 젊고 활동적이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19292월에 입학했으니 이제 2학년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이도 있었다. 세 살 난 어린 딸 박영(朴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성장하는 만큼 비비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렀다.

 

젊은 부부가 다닌 두 대학교는 코민테른이 경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세죽이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학부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현재 조선인 재학생은 38명이었다.그에 비해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 간부를 위한 학교였다. 입학 자격은 매우 엄격했다. 각국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간부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또 일정한 이론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했다. 조선인으로서 이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1920~30년대에 박헌영을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허용된 사람들에게는 재학 동안 기숙사, 장학금, 의복, 음식 등이 제공됐다. 박헌영과 주세죽이 코민테른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숙소와 생활비를 받고, 양질의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그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망도 두터웠다. 모스크바 시절이 두 사람에게는 황금기였다.

 

그런데 왜 자필 이력서를 썼을까.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은데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까? 이 의문은 문서 끝부분을 보면 풀린다. 조선공산당에서 소련공산당으로 당적을 이전하는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그는 3주 전에 당적 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는 그것을 위한 서류였다.

 

당적을 옮기는 것은 모스크바에 살아야 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였다. ‘코민테른 규약에 따르면, “거주지를 변경한 공산주의자는 이주한 나라의 지부에 가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그것은 국제주의자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모든 공적 활동에서 객체가 아니라 한 주체로서 참여할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눈물 많은 청순가련형 여인?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주세죽은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192511월 말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됐을 때다. 신문 조서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를 깊이 연구한 적이 없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 내용을 잘 모르며, 사상운동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19254월에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이유는 자기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 훈정동에 있는 자기 살림집에서 십수 명의 장정들이 모여서 뭔가를 협의했지만, 주세죽은 논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을 뿐이지 비밀결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피의자들은 엄격히 격리됐을 터였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을 텐데도 박헌영은 자기 아내와 같은 기조로 진술했다. 창립대회 장소로 사용된 자기네 거처는 단칸방이었음을 환기했다. 따라서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회의장에 출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를 대표해 그 회합에 참여했다는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보도되던 주세죽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이었다. 박헌영이 1926721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될 때였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의 동정은 언론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신촌역에서 내리는 공산당사건 피고인들을 잠시라도 만나보려고 7~8명의 지인들이 역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주세죽도 있었다. 그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그리운 남편과 말 한마디 못하고 섰는 정경을 보였는데, “그야말로 비감한 무언극의 일 장면과 같았다고 한다.

 

1927920일 공산당 재판 제4회 공판 때였다. 고문에 항의하는 소란 행위로 피고 박헌영이 공판정 밖으로 끌려나왔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방법원 구내에 와 서 있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여사가 이것을 보고, 어찌된 까닭인지 몰라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 정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밑도 모를 눈물을 재촉했다고 한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눈물을 잘 흘리는 청순가련한 여인! 타자의 기록에 보이는 주세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주세죽이 스스로 작성한 기록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담겨 있다.

 

진보적 사회의식 지닌 독립적 여성

그는 혁명가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3·1운동이 첫 경험이었다. 운동이 고조되던 때 함흥에서 비밀결사 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만세시위운동에도 참가했다. 그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국부인회가 주목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비밀리에 조직됐으며, 만세 시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증언이 흥미롭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단체에 가입한 것은 1921년 망명지 상해에서였다. 그해 6월 상해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입회했고, 11월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한시도 사회주의 단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1923년 국내로 귀환한 뒤에는 함흥에서 비밀리에 공산청년회 세포 단체를 만들었고, 공개 사상단체인 칠칠회’(七七會) 활동에도 관여했다. 19254월에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여성동우회 내부의 비밀 세포 단체를 대표하는 자격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고려공청 서울지방간부 위원에 피선됐고, 2선 지도부인 중앙후보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해 5월에는 인천 정미 여공들을 조직화할 목적으로 인천에 출장을 갔다. 거기서 비밀리에 공청 세포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여성운동가였다. 3·1운동기에 이미 여성 비밀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데다가, 19245월 사회주의 계열 공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 7인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동우회 내부에 은밀하게 공산주의 세포단체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지역의 대중적인 여성단체를 만들기 위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처럼 주세죽의 글에는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독립적인 젊은 여성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눈물 머금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는 그의 겉모습에 취한 착시의 소산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활활 불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예술 방면에서 주세죽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이들은 마땅히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진면목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기록은 사료적 값어치가 높다. 그동안 곡해돼온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이춘, 이정 그리고 이준

맺음말 삼아,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박헌영이 러시아에서 사용한 가명이 있다. ‘Ли Чун’(리춘)이 그것이다. 영문으로는 ‘Lee Chun’으로 표기됐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시절 줄곧 이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가명의 한글과 한자 표기가 무엇인지는 밝히기 어려웠다. 영문과 러시아어 표기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잠정적으로 이춘이라 읽기로 결정했다.음가 그대로 옮겼던 것이다. 뒷날 상해에서 발간한 비합법 출판물 <콤무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박헌영은 이정’(爾丁)이라는 필명을 쓴 바 있다. 그 때문에 Ли Чун (Lee Chun)’이란 이정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절 박헌영의 가명이 이춘이나 이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주세죽 이력서에 기재된 정보가 그를 정정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의 남편을 일관되게 리준으로 부르고 있다. ‘Ли Чун (Lee Chun)’이란 곧 리준이라는 이름의 음차 표기였던 것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한다면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사용한 가명은 이준이었다고 확정해도 좋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Кореева, ‘이력서, 1930.3.24,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0 л.6-9об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특별과(спецсектор) 조선인 학생 명단,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4, л.22об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규약’ 1928.8.29,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 72

신의주경찰서 도경부보 茅根龍夫, ‘피의자신문조서(주세죽)’, 1925.12.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1

캄캄한 밤중에 無言劇一場面’, <동아일보> 1926.7.23

‘30여 경관 총출동, <동아일보> 1927.9.21

주세죽 관계 자료’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145

 

동지 손에 꺾인 비운의 혁명가

조선인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 핵심 지도부 김한

스탈린 대숙청 시절 일본 밀정혐의 들씌워 처형

1920년 수감 중인 김한의 앞모습(왼쪽)과 옆모습. 임경석 제공

 

김한(金翰)이 출옥했다.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1927424일이었다.41, 장년기에 접어드는 연령이었다. 이 형무소는 도쿄 서북쪽 교외에 있는 신설 형무소였다. 주로 사상범을 가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체포된 때가 1923128일이었고 이후 줄곧 갇혀 있었으므로 재감 기간은 꼬박 43개월이었다.

 

43개월 만에 가족과 해후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 철거 전 모습, 도요타마형무소 정문. 임경석 제공

 

철창에서 되돌아온 김한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을 개시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엄혹한 경찰의 취조 속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누설하지 않은 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의 창립 멤버이자 지도부 성원이었다. 하지만 경찰 기록과 공판 문서에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폭탄 문제 하나로 귀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외 반일 단체 의열단과 손잡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 했으며, 폭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상옥이나 박열처럼 필요한 혁명가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개요였다. 그 덕분에 중립당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며,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중심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한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노모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서울 마포 공덕리의 조그만 집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다. 아내가 10리 떨어진 용산의 대륙고무공장에 일을 나가서 한 달에 10여원 받아오는 수입으로 버티는 살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뒷날 노년기에 접어든 둘째딸 김례정은 12살 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분이 정말 내 아버지가 맞나 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두 팔 벌린 아버지 품안에 안겼다.”다른 집과 달리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한편으로는 천하사를 도모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김한의 운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 됐다. 뭔가 의심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하면 으레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연례행사라 해도 좋을 만치 시달림을 받았다. 예컨대 출감한 그해 가을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19271021일 용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딱히 구체적인 혐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덕리 경찰 주재소 인근에서 폭탄과 유사한 폭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두 차례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졌고, 여러 문서와 도서를 압수해갔다.

 

이듬해 가을에는 좀더 심각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형사대가 출동했다. 19281019일 새벽에 그는 긴급체포됐다. 잠자던 중이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서 출동한 경관들이 그를 붙잡아갔다. 비밀결사 조직 혐의였다. 서울, 경기, 황해, 충북 등에서 십수 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경찰은 기대감을 표명했다. 뭔가 거창한 불온단체를 적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검거의 발단은 일본 경찰이 관리하는 밀정배들의 밀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취조 결과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뭔가를 음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검거 개시 4~5일 만에 하나둘 혐의자들이 풀려났다. 당시 언론 보도는 그렇게 떠들던 사건이건만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으로 끝을맺었다고 논평했다.

 

출감 이듬해 비밀결사 설립

 

김한이 알선한 국제선 간부의 은신처 서울 마포구 도화동 85번지 현 위치. 다음 지도

 

김한이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의 날카로운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김한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료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감옥에 있을 동안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가 설립했던 비밀결사는 이미 발전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그새 전국적 통일 전위정당인 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그 뒤로도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 상황은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의 이론과 정책, 운동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한은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출감하자마자 비밀결사 운동 복귀를 조심스레 모색했다. 그리하여 출감 이듬해인 19288월 마침내 고려공산청년회위상을 갖는 비밀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이 단체는 중립당 계열의 과거 동료들을 재결속한 것이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온 옛 동료들과 새로이 운동에 참여한 신진 인사들이 합류했다. 이 단체는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요파공산그룹의 부활로 간주됐다.

 

시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놀랍다. 조직 2개월 만에 경기도경이 이끄는 일제 검거에 휘말렸으나,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점이 말이다. 이 단체의 가담자들이 일본 경찰과 맞대응에 얼마나 숙련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9년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경찰의 억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판단에 의해 스스로 해산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합류했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던 것이다. ‘국제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이들은 각파 공산그룹이 운동 발전에 유해한 역할을 끼쳤다고 보았다. 기존 파벌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선의 국내사업 지도부는 3인이었다. 김단야, 김정하, 조두원이 그들이다. 모스크바의 국제당 집행위원회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비밀리에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곧잘 채택되던 트로이카(삼두마차) 조직 형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들은 19298~9월 국내에 잠입했다. 이들에 더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모스크바 유학생들도 잇따라 입국했다. 권오직(權五稷)을 비롯한 공산대학 졸업생 9명이 국제선의 일원으로서 비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

 

탄로난 비밀과 잇따른 체포

국제선 그룹은 유능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2개월 만에 당과 공청 조직의 근간을 세웠다. 그해 115인으로 구성된 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에는 3인 지도부로 이뤄진 공청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하부조직도 바로바로 구축됐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원산, 부산, 목포, 함흥, 마산, 청진, 웅기,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 지방 당기관을 설치했다.

 

김한은 이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지원과 협력 속에서 활동하는 만큼 자금과 정보가 풍부했고, 비전이 뚜렷했다. 비록 10여 년 연하에 해당하는 후배들이지만 성심껏 협력했다. 그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었다. 서울에 밀입국한 국제선 간부들에게는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한은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마포에서 숙소를 알아봤다. 적당한 곳이 나왔다. 도화동 85번지, 늙은 부부 둘이 사는 집이었다. 남편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안팎살림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국제선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김단야가 입주했다. 그는 안주인의 시골 조카로 가장하고, 병을 고치려 서울에 왔다고 위장했다. 늘 한약을 달이며 약 냄새를 풍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김한은 직접 국제선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모플사업을 전담했다. 모플(МОПР)이란 혁명가후원회를 뜻하는 러시아 외래어였다. 옥중에 수감된 혁명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이었다. 당과 공청의 비밀 조직 사업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김한은 옥중 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 방면의 실정을 꿰뚫고 있었고, 변호사들과 지면도 넓었다. 적임자였다. 그는 국제선 그룹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아, 그 돈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썼다. 6개월간 그가 집행한 돈은 970엔이었다. 초등학교 초임 교원의 월급이 50엔이고, 신문사 논설부 기자의 월급이 90엔 하던 때였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천만원쯤 되는 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듬해 모플 사업비로 8400엔이 필요하다고 국제당 앞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이듬해 2월경이었다. 경찰이 냄새를 맡았다. 급속히 조직을 확대해가던 국제선 그룹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체포가 시작됐다. 김한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조직의 비밀이 탄로났고, 관련자들이 연달아 체포됐다. 온갖 노력을 다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까지 계속 숨을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서울 바닥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등경찰의 삼엄한 경계망과 곳곳에 깔린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형으로 이어진 밀정 혐의

김한을 밀정이라고 지목한 이성태 의견서의 첫 페이지()와 해당 부분. 임경석 제공

 

자신이 제공했던 도화동 은신처가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경찰이 최상급 간부라고 지목한 김단야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미 저들에게 탐지됐다. 그뿐인가. 공산당과 공청 지도부에 다 소속된, 김단야 탈출 이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권오직이 바로 그 집에서 체포됐다. 공청 3인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응기도 떡장수로 분장해 그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도화동 은신처를 둘러싸고 중요 인물들이 거푸 검거된 만큼, 경찰은 그 집을 아지트로 알선한 김한을 기필코 잡아들여야 할 인물로 꼽았다.

김한은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316일 김단야의 아내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사실을 인지한 그는 곧바로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304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핍박을 피해 망명한 혁명가답게 합당한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근무했다. 1930~31년 조선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망명 2년이 지난 1932,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망명지 체류가 장기화할 것을 예상하고 좀더 장기적이고 유의미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간부 재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든가, 국제공산당 본부와 직접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등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벅찬 미래가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국제선 검거 사건이 그처럼 대규모로 터진 이유가 김한에게 있지 않으냐는 혐의였다. 급기야 그는 내무인민위원부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기관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비밀경찰이었다.

 

김한이 일본 밀정 혐의를 받은 데에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내부에 존재하던 적대감이 일정한 몫을 했다. 좀더 뒷시기에 작성된 기록이지만, 언론계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이성태(李星泰)는 김한을 통렬히 비난하는 의견서를 썼다. 그것은 국제당 집행위원회 앞으로 제출됐다. 그에 따르면 김한은 오래전부터 밀정으로 알려져왔다고 한다.이성태가 비단 김한만 겨냥했던 것은 아니다. 김단야, 박헌영, 김찬, 조봉암, 고명자 등도 일본의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공산당 분파와 다른 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을 모두 밀정이라고 지목한 셈이다.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 대숙청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말살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밀정이라고 고발하는 일은 일종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왜 이성태가 한때 이념적 동지였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증오의 화신이 됐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김한은 밀정 혐의를 끝내 벗지 못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32~34년 어느 때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했다.

 

격문에서 촉발된 국제선검거 사건

국제선 그룹의 19302~4월 검거는 어떻게 터졌는가. 무엇이 단서가 되어서 대규모 검거가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 의문에 답할 수 있다. 경찰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거 사건을 마무리하던 19305월 시점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작성한 긴 분량의 사건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수사의 단서는 1930222일 이른 새벽에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배포된 격문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계기가 되어 전국으로 학생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이 격문은 지질과 인쇄 상태가 통례적인 것과는 달랐다. 대다수 격문은 등사판으로 제작한 값싸고 볼품없는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격문은 활자로 인쇄된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경기도경찰부는 이 사안을 중히 여겼다. 서울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 주임들을 소집해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불온단체가 잠재했음이 틀림없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金翰씨 출옥’, , <동아일보> 1927.4.24

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011, 97

경찰부검거사건 무증거로 속속 석방’, <조선일보> 1928.10.24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1025?,火曜派朝鮮共産黨再組織事件檢擧スル’, 1930.7.25, <現代史資料> 29, 1972, 238-239

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 186

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개요’ 1937.2.23, 4,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⑦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1937.9.28, 2,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

1920년 일본 현금 호송대 습격해 탈취한 자금으로 독립군 무장 계획한 철혈광복단

좁혀오는 검거망 피해 150억원 상당 현금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데

192014일 북간도의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현금 수송 행렬을 습격했다. 탈취한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성공했을까.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마적떼가 만주의 열차를 습격하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48km였다. 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에서 북간도 용정에 이르는 거리다. 조선의 전통적 거리 측정 단위로는 120리 길이다. 사람의 평균 걸음으로 1시간에 10리쯤 걸을 수 있으니 새벽 일찍 출발해 부지런히 걸으면 저녁 무렵 도착한다. 아직 철도나 자동차 도로가 없던 때다. 두 곳을 오가려면 걷거나 말을 이용한다.

 

192014일은 월요일이었다. 무장 경관들의 호위를 받는 현금 수송 행렬이 아침 830분 회령을 출발했다. 호송대는 모두 6명으로 호위 경관 2명과 은행원, 우편물 호송인 등이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 식민지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거액의 현금 행낭을 인수해 용정지점에 안전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돈은 청국 연길과 조선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 자금이었다. 철도 부설권은 1909년 간도협약 때 청국이 일본에 양도했다.

 

현금 수송 행렬 습격한 조선인 마적

현금 수송은 긴장되는 업무지만 호송대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최근 3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같은 일을 했다. 첫 번째는 191910월 중순 35만원을 옮겼고, 두 번째는 11월 중순 28만원을 운반했다.

 

현금을 담은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을 실은 말 두 마리를 앞세우고, 무장 경관들이 말에 올라탄 채 뒤따랐다. 마상에 올라앉은 두 경관은 위풍당당했다. 경관 정복을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차고, 어깨에 장총을 멘 채 옆구리에는 육혈포까지 장착했다. 다른 대원들도 권총을 휴대했지만 말고삐를 쥐거나 직접 걸어야 했다. 일행은 도중에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신흥평이라는 마을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쉼없이 이동했다.

 

호송대는 해가 진 뒤 용정에 닿을 수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철이라 일몰 뒤 40분쯤 지난 때였다. 음력 보름날이라서 달이 밝았다. 6km만 더 가면 목적지였다. ‘동량(東良) 어구라 부르는 골짜기에 접어들 무렵 멀리 용정 시내의 불빛이 보였다. 앞서가던 선임 경관 나가토모(長友嘉相次) 순사가 말했다. “저 아래 보이는 전기불빛은 용정 일본영사관 지붕 위에 비치는 것이다. 이제는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그 말에 일행은 긴장을 풀었다.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때였다. ‘사격!’ 신호와 함께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이들은 중국인 마적처럼 모자와 의복, 신발을 갖춰 입었다. 달빛 아래 교교하던 골짜기가 총소리와 고함으로 뒤덮였다. 맨 앞에서 호송대를 이끌던 나가토모 순사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옆에 동행하던 회령 거주 조선인 상인 진길풍(陳吉豊)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다른 대원들은 요행히 탄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는 대신 안전을 택했다.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어찌할 줄 몰랐고, 습격자 수도 호송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건 발생 다음날 일본군 회령 헌병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가 남아 있다.이 문서에 조난경위와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문서를 보면 습격자는 총기를 휴대한 조선인 마적 십수 명이었다. 범인을 조선인 마적이라 지목한 점이 눈에 띈다. 마적 복장을 한 것이 신분을 은폐하는 데 보탬이 됐지만, 끝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감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습격자 수가 10명이 넘는다고 기재한 점이 이채롭다. 수를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호송대원들의 심리가 반영됐다.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신 행위가 불가항력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사망한 호송대원은 2명이었다. 복부 관통상을 입은 중상자는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이튿날 절명했다. 수송마 두 마리는 탈취당했고, 말 등에 실었던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도 빼앗기고 말았다.

 

150억원에 해당하는 현금 탈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역들인 최봉설과 임국정. 1919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짐을 실은 수송마도 중요했다. 총소리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윤준희(26·尹俊熙)가 말에 올랐다. 또 다른 말은 최봉설(23·崔鳳卨)이 낚아챘다. 두 사람은 골짜기 서쪽 산등성이로 말을 몰았다. 내심의 목표 지점과 반대 방향이었다. 눈 위에 찍힐 말 발자국을 서쪽 화룡(和龍)현 방면으로 유도하려는 행동이었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타고 갈 말이 없어 부득이 뛰어야 했다. 임국정(25·林國禎)과 한상호(21·韓相浩)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갔다.

 

습격자는 도합 6명이었다. 남은 두 사람은 사전에 약정한 대로 대열에서 벗어났다. 박웅세(朴雄世)와 김준(金俊)은 습격 작전에만 가담하고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행동하자고 약속했다. 뒷날 두 사람은 각자의 행로를 걸었다. 박웅세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박건(朴健)으로 개명했으며, 사회주의 항일단체 적기단의 유명한 구성원이 되었다. 문필이 뛰어났던 김준은 재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습격대는 비밀결사 철혈광복단단원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 북간도의 3대 항일 중학교로 이름 높던 명동(明東)중학, 창동(昌東)학원, 광성중학 졸업생 가운데 선발됐다. 민족의식이 높고 반일 혁명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3·1혁명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3·13 용정 만세시위를 이끌고, 그해 7월 북간도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단체였다.

 

산속으로 4km쯤 들어갔을까. 습격자들은 말을 멈춰 세웠다. 전리품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공간에서 짐을 부렸다. 철제 궤에는 고액권 지폐가 띠지로 묶인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5원짜리 지폐 2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100, 1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50개였다. 도합 15만원이었다.

 

놀랄 만한 거금이었다. 1919년 당시 경기도 수원에 사는 4인 가족이 가장 월급 25원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시절이다.전리품 15만원은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원에 해당한다.

 

탈취금 전액을 무기 구입에 쓰면 조선독립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 은밀히 거래되는 무기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총 1자루와 탄환 100한 세트를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개인 화기만이 아니다. 공용 화기인 기관총 1문을 구매하는 데 200원이면 족했다.

 

500명 부대 9개 무장할 수 있는 돈

‘15만원 탈취 사건현장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군 부대의 실제 무장 상태를 보자. 19207월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 왕삼덕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의 군인은 500, 소총 500자루, 공용 화기인 기관총 3문이 있었다.말하자면 15만원이란 돈은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더 편성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다음 목표는 거액의 현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자면 말 발자국을 따라 뒤쫓아올 추격대도 따돌려야 했다. 네 사람은 역할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추격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임국정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백두산 방향 서쪽 산악지대 깊숙이 들어가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말 두 마리를 몰고 즉각 길을 떠났다.

 

다른 세 사람은 현금 다발 150개를 나누어 배낭에 넣고 짊어졌다. 밤을 새워서라도 속히 안전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염두에 둔 목표지는 용정 동북쪽에 위치한 왕청(汪淸)현의 산악지대 의란구(依蘭溝)였다. 거기에는 철혈광복단 동지이자 사냥을 업으로 하는 김포수가 아내와 단둘이 거주하는 외딴 가옥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그들은 도회지인 용정을 우회하여 국자가(局子街·오늘날 연길) 교외에 위치한 와룡동까지 약 80리 길을 걸었다. 32km나 되는 눈 쌓인 산길을 밤새 걸었다.

 

와룡동에는 최봉설의 집이 있었다. 새벽닭이 울 즈음 도착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터이므로 의심받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운송 수단도 바꿔야 했다. 청년들은 한복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두루마기는 품이 넉넉해 돈다발을 감추기에 적합했다. 운송 수단도 얻었다. 최봉설의 아우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소달구지를 동원해 값비싼 화물을 수송했다. 와룡동에서 의란구 김포수의 집까지 40리 길, 16km였다.

 

의란구 김포수의 집은 외딴 산속에 있는데다 향후 행로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북쪽으로 향하면 무장투쟁의 한 거점인 하마탕(哈蟆塘), 동쪽으로 향하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갈 수 있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자치단체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 김하석(金河錫)이 그곳에 있었다. 우연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하석은 네 청년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행을 권했다. 그곳에서는 손쉽게 무기를 구매하고, 일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준희와 임국정이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두 청년은 이견을 보였다. 전설의 의병장 홍범도가 본부로 삼은 하마탕을 찾아 북행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쪽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거금을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마침내 발각된 범인의 윤곽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경관대 11명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사건 현장과 주변을 세밀하게 수색했다. 범인이 누군지, 어디로 도주했는지 추론할 단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서 60m 떨어진 농경지에서는 구식 엽총의 총신이 발견됐고, 서북쪽 100m 지점 산기슭에 버려진 우편물 행낭을 발견했다. 재암골, 남양동, 동량 같은 사건 현장 부근 조선인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틀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였다.

 

일본 관헌들은 무차별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평소 반일 성향을 보이던 조선인 마을과 인물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야만적인 압박을 가했다. 북간도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반일 성향의 명문 중학교 소재지는 가혹한 구타와 수색의 대상이 됐다. 명동학교 소재지 장재촌, 창동학원 소재지 와룡동이 곤욕을 겪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별 증거 없이 구타하고 수색해 한동안 청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의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본은 청국 정부의 북간도 행정 책임자인 연길도윤에게 범인 체포에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연길도윤은 요구에 따랐다. ‘포고 제2를 발표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일본돈 5원 지폐와 10원 지폐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청국 관청에 보고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 관헌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31·全洪燮)을 체포하면서다. 경찰은 내부자를 의심했다. 현금 수송은 소수만 아는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범인이 알았을까? 내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조선인 은행원들이 경찰에 불려갔다. 그 결과 평소 반일 조선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전홍섭이 표적이 됐다.

 

마침내 전홍섭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해하던 정보들이 입수됐다. 범인의 윤곽이 떠올랐다.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에 가담한 범인의 이름과 신상이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10일 와룡동을 일제 수색한 것은 일본 관헌이 범인 신상을 정확히 파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날 일본 경찰 37명과 청국 관헌 53명은 와룡동을 포위하고 100여 민가를 전부 수색했다. 급기야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을 체포하고 범인 소재지를 밝히라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

15만원 탈취 사건의 네 주역이 김하석과 더불어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사건 발생 3일째 되던 날이다. 그들은 하마탕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를 행선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마탕 노선을 주장하던 최봉설과 한상호가 다수결을 존중해 자신의 의사를 철회한 것이다. 그들이 포시에트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탑승한 것은 사건 발생 4일째 되던 날이다. 9시 기선이 출발하며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렸다. 기선에 탑승한 네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은행을 습격하여 얻은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한 것만 같았다.(다음회에 계속)

 

참고 문헌

高等法院刑事部, ‘大正10年刑上第42,43號 判決(全洪燮 4) ’, 1921. 4.4. <독립군의 수기> 국가보훈처, 1995, 334

崔溪立,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 1959. 1, 위의 책, 289~290

會憲機第1,於間島公金及郵便物遭難’ 1920. 1.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1~322

간도 십오만원 사건, 최계립 회상기 ’, 1958. 6.15.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 > 독립기념관, 2011, 171

절약의 實例, 25원으로 네 식구가 살아가오’ <매일신보> 1919. 8.3

<조선민족운동연감>, 金正明 , <조선독립운동 2> 東京, 原書房, 258

최계립, 앞의 글, 295

 

 

도대체 누가 밀정이었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한 간도 15만원 사건주역들

무기 계약 뒤 인수 전날 일본 헌병이 급습하는데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1177호에서 계속) 배는 8시간을 달렸다. 192019일 밤 9시 포시에트 항구를 떠난 기선은 이튿날 새벽 5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닿았다. 어둠 속에 도시가 빛났다. 일곱 가지 색깔로 꾸민 조명이 높은 산을 꾸미고 있었다. 찬란했다. 밤하늘의 별인지 전깃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최봉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항만시설이 잘 갖춰진 금각만(金角灣)에 접어들면서 배는 길게 뱃고동을 울렸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마침내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간도총영사관과 중국 지방관청 경찰대의 급박한 추격을 벗어났으니 말이다. 사지를 벗어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100% 안전하지는 않았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촌서 열린 철혈광복단 비밀회의

14개월 전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해주에 간섭군을 파견했다.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19188월이었다.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제각기 연해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내전에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백위파 장군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가장 많은 군대를 가장 오랫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시켰다. 출병 3개월 만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수는 73천 명을 헤아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본 파견군의 중심지였다. 파견군 총사령부와 헌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뿐인가. 일본 총영사관이 있었다. 이 기관은 반일 조선인의 동향을 추적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스파이가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밀집 거주지에는 일본 총영사관에 고용된 밀정들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행은 신한촌에 숨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7개 조선인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거류 조선인의 80%가 모여 살고 인구는 6500명이었다.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위험을 분산하려는 취지였다. 불행히 누군가 발각된다 하더라도, 남은 이들이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였다. 최봉설은 채성하(40·蔡成河)가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주인 채씨는 반일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밤, 비밀리에 철혈광복단 간부회의가 열렸다. 단장 전일(31·全一)이 소집한 회의였다. 1914년 북간도 용정에서 창립될 때부터 비밀결사를 이끌던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주요 단원들이 모였다. 새로 획득한 군자금 15만원의 사용처와 책임자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의안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자금 사용처를 셋으로 정했다. 첫째 무기를 구매하고, 둘째 연해주 동부 산악지대인 수청에 사관학교를 건립하며, 셋째 신한촌 내부에 신문 발간과 도서 출판을 위한 사무소 건물을 구매하기로 했다.

 

결정 사항은 즉시 행동에 옮겨졌다. 장기영(40 전후·張基永)과 채영(29·蔡英) 등이 사관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수청으로 길을 떠났다. 5만루블을 휴대했다. 일본돈으로 치면 1만원이었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10억원이다. 서류상 거래 당사자로는 합법적 신분의 사람을 내세웠다. 대동상회 대표 유찬희(柳讚熙)의 명의를 사용했다.

 

신한촌에 사무소 건물을 구입하는 문제도 실행에 옮겨졌다.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건물이 물망에 올랐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백산학교 자리였다. 교사 4명에 학생 70명인 작은 학교였다. 그 건물이 일본돈 5천엔에 매물로 나왔다. 요즘 화폐 구매력으로 5억원에 상당한 돈이었다. 그것을 샀다. 신한촌 유력자이자 반일 민족주의자인 강양오(45·姜良五)와 조장원(36·趙璋元) 두 사람의 공동 명의로 매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1천 명 규모 독립군 편성할 무기 계약

무기 구입은 전적으로 ‘15만원 사건주역들에게 위임됐다. 네 사람은 업무를 나눴다. 윤준희가 자금과 서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이가 가장 많고 ‘15만원 사건의 입안과 집행을 이끌어왔던 터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구매는 몸집이 크고 체력이 강대한 임국정이 맡았다. 그는 1년 전 권총 구입차 신한촌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독립군 나자구(羅子溝)사관학교 경비 조달을 위해 그 학교 사관생도 40여 명과 함께 저 머나먼 우랄산맥 삼림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했다.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즈음 분산 유숙 대신 단체로 합숙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김하석(40·金河錫)이 제안했다. 중책을 원활히 수행하려면 자주 회의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한집에 모여 지내자는 뜻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김하석은 일찍이 간도 광성중학교 교사를 지냈기 때문에 철혈광복단 단원들에게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이였다. 또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지라 그의 발언은 존중됐다. 유사시에 일망타진될 위험이 상존했지만, 네 사람은 그 말을 좇기로 했다.

 

새로 옮긴 합숙소에서 무기 구매를 위한 논의가 급진전됐다. 임국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기 밀거래 파트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 몰린 대위였다. 백위파 연해주 지방정부 포병 장교였다. 그를 통해 개인 화기는 물론이고 공용 화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중개인이 있었다. 엄인섭(44·嚴仁燮)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왔다. 임국정은 주저 없이 신뢰한다고 답했다. 엄인섭은 1908년 여름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연해주 의병의 중견 지도자였다. 우영장 안중근과 함께 좌영장으로서 의병부대를 지휘한 이였다. 임국정 자신과 개인적 인연도 남달랐다. 우랄산맥에서 벌목노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와 함께 의형제 결의까지 한 사이였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연해주에서 성장한 만큼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무기 밀매 같은 은밀한 일을 추진하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임국정은 아무 걱정 말라고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무기 구매 계약은 잘 진행됐다. 비밀 담판에 나갔던 임국정이 사흘 만에 되돌아와 밝은 얼굴로 보고했다. 소총 1천 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좋은 시세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도합 32천여원에 해당하는 무기였다. 오늘날로 치면 32억원어치였다. 130일 착수금 5만루블(일본돈 1만엔)을 건네고, 이튿날 31일 밤 러시아 군용 자동차에 약속된 분량의 무기를 적재하며, 곧바로 얼어붙은 아무르만을 건너 바라바시 북쪽에 위치한 이도구(二道溝) 방향으로 수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청년들은 기쁨과 함께 긴장감을 느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무기인가. 단숨에 1천 명 규모의 대단위 독립군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날 저녁, 김하석 군무부장이 찾아왔다. 뜻밖의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총과 수류탄을 빌려달라고 했다. 현지 청년들이 일본군 병영 내부에 철병을 촉구하는 선전 삐라를 살포할 예정인데, 거사 당일에 호신용 무기를 갖기 희망한다고 했다.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하루이틀만 빌려달라는 말이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임국정이 승낙했다. 동료들은 그 판단을 존중했다. 책임자 윤준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권총과 수류탄은 김하석에게 인계됐다.

 

밀정 통해 동향 파악하던 일본 경찰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밀정>처럼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도 거사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합숙소 위치는 하바롭스카야 거리 5번지였다. 집주인 임씨는 조선시대 종9품 말단 관리인 참봉이라고 불리는 이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을 두지 않고 부뚜막에 방바닥을 잇달아 꾸민 함경도식 가옥이었다. 그 공간을 정주간이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방이 여럿 있는데, 한가운데 방을 청년들이 사용했다. 그 방에는 윤준희가 관리하는, 거액의 지폐와 기밀문서를 넣은 철제 상자도 보관돼 있었다.

 

130일 밤이었다. 내일 저녁에 있을 대규모 무기 인수를 앞두고 청년들은 들떠 있었다. 최봉설과 한상호는 알고 지내는 사이인 지영감네 집을 방문해 즐겁게 놀았다. 술도 마시고 국수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자고 가라는 주인의 친절한 권유를 사양하고 합숙소에 돌아왔다. 11시쯤이었다. 북간도 용정 청년 나일(羅一)이 와 있었다. 반일 혁명 의식이 강렬하지만 ‘15만원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무람없이 신뢰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날 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12시쯤 다섯 청년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였다. 일본군 헌병대 1개 소대 병력이 임 참봉 집을 에워쌌다. 밀정의 길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명확히 표적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경찰관 2명도 대동했다. 외교 문제를 고려해 사전에 연해주 경찰 당국과 교섭한 결과였다. ‘살인강도범이 신한촌에 잠복해 있음을 탐지했으므로 범인 체포 과정에 입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받아들여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헌병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고등경찰 기토 가쓰미가 이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직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파견된 경찰 간부였다. 조선 강점 뒤 10여 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붙박이로 근무 중이었다. 밀정을 통해 범인동향을 낱낱이 들여다보던 그는 마침내 디데이를 잡았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기간 스파이를 양성해온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출입문에서 네 번째 자리에 누웠던 최봉설은 잠결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주간에서 임 참봉이 누구냐고 물었다. 조선말로 답하는 게 들렸다. “일본 헌병대에서 왔으니 문을 벗기시오!” 화들짝 잠이 깬 최봉설은 동료들을 서둘러 깨웠다. 그새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총부리와 손전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사람당 헌병 3명이 달라붙었다. 하나는 총을 겨누고 다른 둘은 오랏줄을 들고서 결박하기 시작했다. 둘째 열에 누운 윤준희만이 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완강히 저항하며 권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자던 중에 예기치 않은 기습으로 당황해서인지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최봉설에게도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나 혼자서라도 마지막 힘을 다 써야 하겠다고. 그새 헌병들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듯 긴장감이 다소 풀려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두 헌병의 콧등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그 옆에 선 군인의 급소를 발길질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총 든 군인은 박치기로 넘어뜨렸다.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홀로 가까스로 탈출해 도주한 최봉설

복도로 나갔다. 정주간에 대기하던 헌병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팔을 잡은 놈, 목덜미를 붙잡은 놈, 등짝 옷 덜미를 쥔 놈 등 제각각이었다. 최봉설은 뛰어나가던 기세에 더욱 힘을 가해 몸을 내뺐다. 그바람에 어설프게 신체 한 부분씩을 쥐고 있던 군인들이 구들 위로 나자빠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학생 시절 간도 연합운동회 때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1등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최봉설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다.

 

정주문을 나섰다. 총을 짚고서 무심히 서 있는 헌병 하나가 보였다. 그쪽 위치가 한두 계단 낮았다. 최봉설은 뛰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그자의 가슴팍을 찼다. 얼음판 위로 나자빠지는 헌병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마당이었다. 헌병이 여럿 모여 있었다. 마당 너머 큰길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여러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반대편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판자를 잇대서 짠 나무담장이었다. 함경도 방언으로 장재라고 불렀다. 여러 집이 잇달아 자리잡은 탓에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려면 여러 장재를 뛰어넘어야 했다. 얼추 헤아려도 열 개는 넘었다.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재를 뛰어넘는 최봉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는 이집 저집 장재를 무사히 뛰어넘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재를 넘을 때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다. 솜 넣은 내복을 입고 있었다. 총 맞은 곳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눈 쌓인 밭에 드러누워 불을 껐다. 불은 껐지만 피가 흘렀고, 통증이 몰려왔다.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이제는 추격을 따돌려야 했다.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신한촌 지형을 고려해 산 아래쪽으로 뛰었다. 아무르스카야 거리, 멜리니콥스카야 거리, 젤레즈노다로즈나야 거리를 차례로 횡단했다. 그 끝은 바다였다. 한겨울이라 바다가 얼어 있었다. 얼어붙은 아무르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육지까지 거리는 16km였다. 40리 길이었다. 최봉설은 바다를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르만을 향해 뛰었다. 아무르만은 한겨울에 얼어붙기 때문에 으레 교통로로 사용되곤 했다. 사람과 말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 건널 수 있었다.

 

1월 말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 온도는 영하 2030를 오르내렸다. 한밤중인데다 강한 바닷바람이 거침없이 불었다.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잠자던 중 느닷없이 습격당했기 때문에 최봉설은 옷을 충분히 갖춰입을 수 없었다. 양말과 내복을 입었을 뿐이다.

 

그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뛰었다. 왼팔로 총 맞은 오른팔을 쥐고서 달렸다. 절반쯤 건넜을 때다. 아무르만 한가운데였다. 거기에 또 하나의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닷물이 얼지 않은 채 흘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얼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육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서 3km 떨어진 브타라야 레츠카 철도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역전 큰 바위 밑에 도착했다. 어느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총상 입고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과연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해 분산 유숙할 때 머물렀던 채성하의 여관을 떠올렸다. 더욱이 그 집에는 딸 채계복(蔡啓福)이 머물고 있었다. 서울 경신여학교에 유학하는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채성하의 집은 아무르스카야 거리 22번지에 있었다. 피습당한 합숙소 임 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봉설은 살금살금 여관에 접근해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최봉설의 기대는 적중했다. 그는 채씨네 가족의 진심 어린 보호를 받았다. 운도 좋았다. 때마침 여관에 투숙 중이던 여의사 이혜근의 집도로 오른팔에 박힌 탄환을 빼냈다. 적절한 응급조치도 받았다. 여자들은 최봉설의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얼어붙은 양말을 가위로 뜯어냈다. 온몸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하지만 최봉설의 상태는 심각했다. 눈과 입을 빼고 온몸이 얼어 있었다. 몸이 녹으면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하며 채계복은 안타까워 흐느꼈다.

 

채성하는 지혜로운 이였다. 여관은 위험했다. 환자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개점한 아들 채창도의 가게를 선택했다. 가게 한쪽에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새로 벽지를 발라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곳에 환자를 은밀히 수용했다. 가족 중에선 오직 채계복만 드나들게 했다.

 

병상에 누운 최봉설은 자나 깨나 끌려간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악행에 얼마나 고생할지,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말 못할 불행을 겪지나 않을지 근심이었다. 게다가 끝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을까? 도대체 누가 밀정이란 말인가? (다음회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항일 무장투쟁의 거물 최장기 밀정이 되다

사형으로 스러진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

체포 작전 도운 밀정은 안중근의 의형제 엄인섭

 

엄인섭이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암살>에서 거물급 항일운동가인 염석진(이정재)은 밀정으로 전향한 뒤 고등계 형사 노릇까지 한다. ()쇼박스 제공

 

(1180호에서 계속) 체포 작전은 1920131일 새벽 3시부터 4시간 동안 계속됐다. 먼동이 밝아오는 7시가 되어서야 헌병대는 현장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소득이 컸다. ‘살인강도사건 혐의자를 4명이나 한꺼번에 붙잡았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셋은 간도 15만원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나머지 한 사람 나일(羅一)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숙소에서 기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미뤄보아 범죄 가담 혐의가 두터웠다.

 

하루만 늦었어도 실패했을 체포

다만 유감스럽게도 범인 한 명을 놓쳤다. 그는 기민한 자였다. 권총을 빼들고 완강히 저항하는 윤준희를 제압하느라 혼잡한 틈을 타 문 두 짝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헌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도주하는 용의자에게 사격을 가했으며, 그자의 한편 어깨뼈 아래에 관통상을 입혔다. 피를 많이 흘린데다 매섭게 추운 북국의 겨울밤에 속옷 바람으로 내몰렸으므로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빼앗긴 현금도 되찾았다. 철제 상자 안에 담긴 현금을 헤아리니 약 13만원이었다. 잃었던 돈 가운데 87%에 해당하는 현금을 회수했다. 상자 안에는 또 귀중한 게 있었다. 문서들이었다. 노트, 편지, 증서 등이 있었다. 총영사관의 경찰간부 기토 가쓰미 통역관이 이 압수 문서들을 분석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지였다. 범인들은 자신의 행동 양상을 날마다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건의 진범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편지와 거래 서류도 있었다. 신한촌의 조선인 상인들과 자금 투자 방안을 논의하는 편지, 신한촌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가옥 매도 증서 등이 그 궤짝에 들어 있었다. 어느 것이나 다 강탈 자금의 사용처로 의심되는 사안들이었다.

 

하마터면 범인들을 놓칠 뻔했다. 체포 작전을 마치고 불과 2시간 뒤에 연해주에서 정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1319시를 기하여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백위파 로자노프 지방정권이 전복되고 혁명파가 연해주 지방정부를 장악했다. 러시아 사회혁명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연해주 자치위원회가 새 집권자가 됐다. 일본 총영사관에 매사 협조적이던 백위파 정부가 아니었다면 일본 헌병대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공공연하게 민간인을 체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만 지체됐더라도 일은 틀어졌으리라.

 

경찰간부 기토 통역관은 제때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원인을 밀정 덕분으로 돌렸다. 보고서 내에서도 여러 차례 밀정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 밀정’(我 密偵)이라고 은근하게 호칭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현지 부임 이래 10년 동안 세심하게 밀정을 관리해온 자신의 공로를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체포된 사람들은 금각만 부두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지쿠젠마루(筑前丸)로 압송됐다. 군용 운송선으로 사용되는 이 배의 맨 밑창에는 특수 감금 시설이 있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밤낮 전깃불이 켜져 있었다. 네 청년은 결박당했다. 발목, 손목, 허리에 삼중으로 쇠사슬을 채웠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악형을 견뎌야 했다. 뒷날 청년들은 재판정에서 과감히 발언했다. 심문 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저질러졌음을 폭로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반죽음 상태에 있었,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가 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진술하였다고 말했다.

 

사건 발발 17개월 만에 사형 집행

윤준희 등의 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청년들은 순순히 불지 않았다. 자신들을 돕고 지원해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노력했다. 일주일간의 심문을 마치고 일본 본국으로 출항하던 날, 총영사관이 외무장관 앞으로 작성한 수사 보고서가 있다. 사실과 다른 정보가 도처에 눈에 띈다. 현금 수송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사건 이후 도주 경로가 어떠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했다. 시종일관 엉뚱한 답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밀 정보를 제공한 사람과 사건 이후 피신 과정을 도와준 사람, 그리고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수감자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된다.

 

군함 지쿠젠마루호는 27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군함은 규슈 북단의 모지(門司)항을 거쳐, 요코하마(橫浜)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 체포된 청년들을 하선시키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다시 부산항으로 출항했다. 이 사건의 재판 관할을 청진지방법원으로 지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부산항에 내린 피의자들은 철도편으로 서울을 거쳐 원산까지 호송됐다. 철도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원산에서 청진까지는 다시 배편으로 이송됐다.

 

마침내 재판이 시작됐다. 1심은 청진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숙소에서 같이 잠자다가 변을 당한 나일은 결국 무혐의로 인정되어 석방됐다. 그 대신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했던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全洪燮)이 피고인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사건 당일 밤 일찌감치 회령경찰서에 체포됐다. 그를 의심스럽게 본 회령지점장이 고발한 탓이었다. 그는 3주 동안 계속된 심문을 견뎌야 했다. 그 결과 1920128일자로 강도종범 및 정치범혐의로 청진 지청 검사국에 송치됐다.

 

재판은 빠르게 이뤄졌다. 2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에서, 3심은 서울의 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최종심 선고는 192144일에 있었다. 사건 발발 이후 13개월만의 일이었다. 와타나베 노부(渡邊暢) 재판장을 수위로 하는 고등법원 형사부 5인 합의부 판사들은 피고들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15만원 사건에 직접 가담한 윤준희·임국정·한상호 3인에게는 사형을,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한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사무원 전홍섭에게는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선고가 이뤄진 지 4개월20일이 지난 뒤였다. 사형이 집행됐다. 1921825일이었다. 낮 기온이 28도에 이른 더운 여름날이었다. 잠시 맑기도 했지만 종일 흐린 날씨였다. 서대문형무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형장에서 세 청년은 영영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의 주검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수들이 으레 묻히는 홍제동 밖 신사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를 주관한 이는 여성들이었다. 윤준희의 젊은 부인 최씨와 임국정의 어머니 임뵈뵈였다. 임뵈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북간도 성녀라는 별호로 알려진 여성이었다. 멀리 북간도에서 살다가 남편과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낯설고 번잡한 객지에 온 두 여인이었다. 주검을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여인들의 흐느낌 속에 세 무덤이 나란히 들어섰다.

 

홍범도·엄인섭 두 장군 활약 보는 날

 

엄인섭(왼쪽)과 홍범도 장군. 임경석 제공

 

엄인섭(嚴仁燮)이었다. 15만원 사건 주인공들의 거처를 일본 총영사관에 알려준 밀정 말이다. 이 사실은 일본 총영사관의 정보 보고서에 암시되어 있다. 기토 통역관은 자신이 관리하던 밀정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술했다. 보기를 들면 우리 밀정이 저들의 무기 구매를 알선해줬다고 한다. 그 행위는 기만이었다. 구매 협상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우리 밀정은 이 점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속였다고 한다.

 

좀체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엄인섭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으리만큼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견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개시된 연해주 반일 의병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다. 1908년 여름 국내 진공작전 때에는 안중근과 함께 최선봉에 서서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격을 영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안중근의 가장 친한 동지였다. 여순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안중근은 말했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뿐인가. 그들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평양 출신의 반일 혁명가 김기룡(金起龍)과 함께 결의형제를 했다. 그들은 그럴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나이순으로 따진다면 김기룡(1876년생)이 큰형이고, 안중근(1879년생)이 둘째, 엄인섭(1885년생)이 막내였다.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혁명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일본군의 첩보에 따르면, 19084월에 세 사람은 다른 두 사람(현학표, 이범석)을 더하여 5인 단지동맹을 맺었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맹세했고, 다른 세 사람은 친일 매국 행위자인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각각 암살하기로 서약했다. 다섯 사람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증거로 각자 왼손 무명지의 첫 번째 관절부를 절단했다.

 

엄인섭은 힘이 세고 성격이 담대했다.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힘자랑을 즐겨했다. 그는 좌중의 분위기를 제압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키는 164cm였다. 당시 기준으로 중간쯤 되는 키였다. 수염이 많고 다소 뚱뚱한 체격이었다.

 

엄인섭의 반일 행동은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에도 계속됐다.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권업회 지회 설립을 촉구하기 위해서 연해주 각 지방에 파견한 3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191311월 이동휘와 홍범도를 비롯한 혁명가 6인 간담회가 열렸을 때다. 엄인섭도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이동휘는 홍범도와 엄인섭 두 장군의 활약을 보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무장투쟁 시기가 다시 도래할 터이므로 그에 대비해달라는 당부였다. 엄인섭은 홍범도와 병칭되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4년 동안 진행된 밀정 노릇

밀정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독립운동계 내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혁명가들이 상대편을 밀정이라고 의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의혹 말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를 잘 몰랐다. 러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조차 그랬다. 엄인섭은 최재형,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과 나란히 거론되는 의병장이었다. 주요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고, 향후 그에 관한 연구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이제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외 한국사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노력한 성과에 힘입어, 우리는 엄인섭의 밀정 여부를 확증할 수 있게 됐다. 외무성 산하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반일 단체 관련 공문서철(불령단관계잡건)에는 엄인섭의 밀정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엄인섭은 1911년 반일 언론 <대양보>의 간행을 막기 위해서 한글 활자 15천 개를 훔쳤다. 93kg에 달하는 무게였다. 이 활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 기토 통역관에게 전달됐다. <대양보>는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밀정임이 발각된 서영선(徐永善)이란 자를 한밤중에 몰래 탈출시켰다. 1912년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농촌 지대인 연추에서 둔전영(屯田營)을 설립하려는 은밀한 논의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경찰에게 자초지종 밀고했다. 둔전영은 농장 경영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동시에 수행하는 무장투쟁 준비 단체였다. 이동휘, 홍범도, 이종호, 김립, 황병길 등과 같은 반일 인사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도 그의 직분이었다. 이외에도 엄인섭의 밀정 행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밀정을 했는가? 그의 밀정 행위 관련 기록은 1911년부터 남아 있으므로,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그가 타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총영사관의 기밀문서를 보면 엄인섭은 재작년(1908) 11월경 본 영사관에 출두하여 첩보자로서 고용해달라고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영사관에 접근한 시기에 눈길이 간다.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가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밀정이 됐을까? 첩보자로 고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가 바랐던 것은 돈이었다. 밀정이 되면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보기를 들면 용정 총영사관은 밀정에게 하루 150전씩 지불했다. 1개월치는 45원이었다. 그 시기 회령경찰서 순사 나가토모가 받은 월급은 30원이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관보다 월수입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엄인섭은 거물이었고, ‘공로를 여러 번 세웠기 때문에 수령액이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도박 즐기고 여성 관계 문란

그는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러시아 지방관청의 기록 속에 엄인섭 인물평이 있다. “지방 거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엄인섭은 속이기와 카드놀이에 아주 능한 사람이며 방탕하다고 한다. 도박을 즐기고 사람 속이기를 능사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뿐인가. 여성 관계도 문란했다. “그는 합법적인 아내 외에도 몇 명의 첩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그에게 많은 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던 1922년에 엄인섭의 밀정 생활도 끝났다. 그는 일본군을 따라 연해주를 떠났다. 처음에는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경흥에 정착했다. 그러나 일본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처를 옮겼다. 연해주에 가까운 북간도 훈춘을 찾았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제가 자라던 고향 연추와 연결되는 곳이었다. 엄인섭은 193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52살이었다. 그로 인해 15만원 사건 주역들이 30살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음을 상기해보면, 과연 역사에 정의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체포당한 혁명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폭탄 반입 기도해 검거된 중립공산당 핵심 김한

조선 자유와 해방 당위 설파한 최후진술로 보복

 

법정에서조차 부당한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한 아나키스트 박열처럼, 김한은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 비판하다 판사의 보복 선고를 받았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3117일 서울 삼판통(후암동)122일 효제동 총격전이 발발한 뒤 일본 경찰은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이 이미 사망했는데도 그랬다. 현직 경관 4명이 사살당하고 총상을 입은 것에 경찰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다. 김상옥과 조금이라도 접촉했거나 관련된 사람이라면 옥석을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들였다.

 

김한(金翰)도 그 속에 있었다. 한때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을 지냈고, 합법적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 상임위원으로 재임 중이던 그는 37살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그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은 128일이었다.효제동 총격전이 일어난 지 열흘 되던 때였다. 그날 체포된 사람은 김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사람이 김상옥 사건 연루 혐의로 경찰에게 붙잡혔다.연루자들을 낱낱이 적발하기 위해 경찰이 큰 힘을 들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문으로 병상에 누운 채 재판받아

되돌아보면 김상옥의 효제동 은신처가 발각된 것도 한 연루자의 자백 탓이었다. 경성우편국 소속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전우진(全宇鎭)이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3·1혁명 시기에 비밀결사 혁신단활동을 함께한 김상옥의 오랜 동지였다. 이번에도 비밀리에 잠입한 김상옥을 변함없이 도와주었다. 보기를 들면 경성역 수화물 취급소에 배달된 김상옥의 화물을 대신 수령했고, 비밀 편지를 여러 관련자에게 전달했으며, ‘불온 문서제작을 거들었고, 회합 장소와 숙식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신뢰할 만한 동료임에도 그는 고문에 꺾이고 말았다. 효제동 은신처를 발설한 데 이어 경찰대를 이끌어 현장까지 안내하는 일마저 해야 했다.

 

전우진의 배신은 김상옥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 은밀한 내막은 가족도 알고 있었다. 김상옥의 부인 정진주 여사는 해방 이후 신문 기자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동지였던 전모씨의 배신탓에 남편이 죽었노라고.그럼에도 전우진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돼 2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

 

체포된 사람들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들은 독이 올랐다. 시국사건이든 일반 형사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피의자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소 습성이었다. 하물며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데다 현직 경관들이 살해되고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취조 경찰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28살 미혼 여성 이혜수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김상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그녀는 경찰 취조 중에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상태는 위중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뒤 열린 재판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이혜수는 병상에 누운 채 재판정에 나와야 했고, 침대에 누워 신음 소리로 가족의 말을 거쳐 겨우 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3·1혁명 때도 비밀결사 애국부인단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신문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 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경찰 취조가 끝난 뒤 죄질이 무겁다는 이유로 검찰에 송치된 이는 도합 19명이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김상옥과 같이 비밀결사 활동을 해온 동료들이었다. 1919혁신단에 함께 소속된 신화수(27), 윤익중(28), 정설교(27), 전우진(41), 이혜수가 그들이다. 이 중 앞자리에 거론한 세 사람은 1920년 김상옥과 함께 암살단 사건에도 연루됐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할 때 동행한 안홍한(21)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범죄의 형적이 뚜렷하고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의해 기소됐다. ‘불온인쇄물을 제작한 혐의를 받은 서병두(44)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 가운데 가장 중형

 

192942살 때 경찰서에서 사진 찍은 김한(왼쪽)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필적(192811일 김재봉에게 쓴 연하장). ‘마포구 224, 김한이라고 쓰여 있다. 김윤 제공

 

다른 한 부류는 김상옥에게 숙식과 활동의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연락과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 여관업자 이수영(37)과 승려 이종욱(40), 지방도시인 함경남도 원산에서 숙소를 제공해준 주광보(19)가 그들이었다. 효제동 은신처를 제공한 이태성(63) 집안의 경우 일가족 6명이 모두 고초를 겪었다. 이 집은 딸 부잣집이었다. 아내 고성녀(61)와 맏딸 이혜수를 비롯한 네 딸이 모두 경찰 취조를 감당해야 했다. 김상옥의 가족도 핍박을 받았다. 친동생 김춘원(32)과 매제 고봉근(28)이 곤욕을 치렀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갇혀 두 달 동안 끔찍한 취조를 받은 뒤에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김한은 이채로운 존재였다.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김상옥과 비밀결사 활동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네트워크도 맺고 있지 않았다.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공통성 같은 생래적 연줄도 없었다. 뭔가 편의를 제공한 적도 없었다. 김한은 다른 피의자들과 아무런 공통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상옥과 가장 깊숙하고도 위험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김한의 피의 사실은 가장 엄중했다. 그는 적어도 5회에 걸쳐 대리인을 통해 재상하이 의열단장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했고, 그 결과 대규모 음모를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내에 다량의 폭탄을 몰래 반입해 조선 내부를 일거에 동란에 빠트린다는 계획이었다. 김한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김원봉에게서 2천원의 자금까지 수령했다고 한다.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 신문사 기자 월급이 40원이고, 총독부 서기관의 월급이 50원이었다. 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또는 110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취조 결과에 따르면 폭탄은 미처 반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한은 의열투쟁을 감행하려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에게 그것을 넘겨줄 수 없었다. 일본 사법 관료들이 보기에, 범죄행위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죄질이 심각했다. 김한은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16개월에서 3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구형받았는데, 김한의 구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대략 곱절이었다.

 

김한이 체포되자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탄로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김한이 가담한 조직은 3·1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비밀결사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자 대중을 위해 일하며, 조선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혁명가들의 결사였다.

 

이 비밀결사의 명칭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뒷날 1925년 전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단일한 공산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다른 것이었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한이 가담한 1922년의 비밀결사를 중립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다. 줄여서 중립당이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그 단체를 가리켜 중립공산당이라거나 중립당이라는 호칭으로 즐겨 불렀다.

 

일 꾸미고 작전 짜는 데 탁월

중립인가? 3·1운동 이후 조선 내부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도도히 흘러들었는데, 이 흐름을 주도한 단체는 해외에 기반을 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었다. 그러나 상하이파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두 공산당은 조선 국내의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서로 다투는 게 옳지 않고 둘 다 정책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김한을 비롯한 국내 신진 사회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제3의 공산당을 세우려 했다.

 

이 비밀결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 1921년 메이데이(51)에 설립했다는 정재달의 주장이 있지만,자기 단체의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소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19221월 즈음 성립됐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그해 119무산자동지회명칭의 합법적 사상단체가 등장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합법 영역의 공개 단체와 비밀결사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중립당에는 3·1혁명 투사들이 속속 가담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 막 출옥한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 대열에 들어왔다. 조봉암의 회고에 의하면 1922년 경성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두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김한과 김사국이었다. 조봉암은 이들을 가리켜 양웅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과 개성이 달랐다. 김한은 책사(策士)형이고, 김사국은 투사(鬪士)형이었다.김한은 일을 꾸미고 작전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에 비해 김사국은 뜻이 굳세고 강직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끝까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시인 황석우가 남긴 인물평도 비슷했다. 그가 보기에 김한은 일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모든 정열과 재략을 넘치도록 발휘했다고 한다. 꾀가 많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이었다. 만약 혁명가로서 사명감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김한은 천성으로 미뤄볼 때 전율할 만한 악당의 괴수가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두 사람은 중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나란히 선임됐다. 둘이 악수하니 조선의 사상계가 크게 요동쳤다. 두 사람은 신진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기존 양대 고려공산당을 배격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중 첫 번째는 그해 1~2월에 추진된 김윤식 사회장 반대운동이었다. 구 한국의 개화파 대신이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조선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던 상하이파 공산당과 민족주의 그룹의 의도를 저지했던 것이다. 4월에는 청년운동 내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의 영향력을 약화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 석상에서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5개 회원 단체의 탈퇴를 단행케 한 일이 그것을 의미했다. 6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에 소속된 임원 6명을 제명했다. 또 서울청년회 제5회 총회 석상에서 상하이파 출신 임원 5명을 축출했다. 9월에는 노동대회라는 단체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소속의 기존 간부들을 배제하고 노동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노동운동 헤게모니 장악한 중립당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922년은 노동자가 비로소 직접 노동운동을 개시한 해라거나, 민중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해방의 길을 제시한 첫해였다는 경찰 쪽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국내 민중운동의 헤게모니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김한과 김사국이 공동으로 이끌던 중립당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이 항구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그해 말쯤 갈라섰다. 달리 말하면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분열 과정에서 중심인물이 됐다. 김한은 뒷날 화요파라는 공산그룹의 수장이 됐고, 김사국은 서울파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대표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한 지점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큰 것 하나가 바로 의열투쟁 전술에 대한 태도였다. 김한은 의열투쟁을 가리켜 3·1혁명 이후 가라앉고 있는 대중의 투쟁 의욕을 북돋는 수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 때문에 해외의 의열단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대규모 폭탄 반입 공작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김사국은 의열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광범한 대중을 투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대중과 운동단체의 괴리를 심화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각각 제 길을 걸었다. 김상옥 사건은 이처럼 초창기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분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23517,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이었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제2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 최후진술이 허용되자 김한은 작심한 듯 발언을 토해냈다. 그는 얼굴에 세상을 비웃는 듯한 빛을 띠고 일어서서, 1시간 동안 흐르는 물같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총독 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요,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은 다름 아니라 총독 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발언했다. 김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혁명을 언급했다.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설명했다.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한의 진술은 감동적이었다. 신문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방청석을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조리 있는 말을 숙연히 경청했다.

 

그러나 김한은 재판부에 보복을 당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 미쓰야(三矢) 판사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순간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검사 구형보다 2년이나 더 무거운 형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청객들은 법정을 나서면서 울분을 토했다. 불평을 부르짖고 판사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의 외조부

김한의 최후진술은 피억압자에게는 감동을 주고, 억압자에게는 보복의 칼날을 갈게 했다. 진실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은 당대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60년이 지난 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투옥된 그의 외손자 우원식(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그 진술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자긍심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중립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판단과 책임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시종일관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하여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진술 전략은 주효했다. 중립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노출되지 않았다. 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무산자회 간부의 검거’, <조선일보> 1923130일치

李遂榮씨도 검거’, <조선일보> 1923130일치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 국사편찬위원회, 320, 1955

열사의 후예들 6: 김상옥 의사의 미망인 여사’, <동아일보> 19591128일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병상에 누운 대로 이혜수양 공판’, <동아일보> 19231226일치

폭탄과 권총의 대음모 김상옥 사건의 공판’, <동아일보> 1923513일치

⑧ История и деятельность нейтральной коркомпартии: Доклад делегата Тену(중립공산당의 역사와 활동, 대표자 전우의 보고), с.7,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64, л.51-57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죽산 조봉암 전집> 1, 344345, 1999

金思國氏 永眠, <동아일보> 1926510

황석우, ‘나의 8인관’, <삼천리> 4-4, 29, 19324

<고등경찰보> 4, 281, 283

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53, 2011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888.html

혁명가의 총구 경성 뒤흔들다

영화 <밀정> 총격전 실제 모델인 암살단원 김상옥

총독 암살 기도 후 경찰과 벌인 3시간 총격전 전모

 

혁명과 사랑의 불꽃

남편 김사국과 조선 독립운동 근거지인 북간도에 사회주의 기지 건설한 혁명가 박원희

프롤레타리아혁명 위해 명멸한 삶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74일 아침 8시의 일이었다. 더운 때였다. 전날 최고 기온이 섭씨 31.5까지 올랐다. 아침나절이라 선선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회령경찰서로 압송됐다.국경 너머로 잠입해 들어오는 반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적발해내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경찰서였다.

 

북간도 최초 사회주의 탄압 사건

혼자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 붙들렸다. 젊은 여성이 둘이고, 남성이 하나였다. 모두 북간도의 중심 도시 용정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동양학원 관계자였다. 박원희는 그 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32살의 건장한 남성 김정기(金正琪)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아들로도 유명했다. 그간 경영해오던 <동아일보> 용정 지국 경영을 접고 동양학원 설립과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진규(陳奎)는 그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세 사람은 동양학원이 파견한 강연단 멤버였다. 군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능란하게 연설할 수 있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강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동양학원이 기획한 여름방학맞이 조선 내지 순회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회령을 필두로 청진·함흥·원산 등 함경남북도의 큰 도시들을 돌아 서울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참이었다. 7월 한 달 내내 12개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강연회 수입을 모아서 학교 확장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설립된 신생 학교 동양학원은 북간도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년 204, 2학년 54명이 등록해 학생 총수가 258명에 달했다. 설립 첫해 첫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미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교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들었다. 북간도 동포들의 기부에 힘입어 새 학교 부지 4천 평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건축비가 모자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학교 관계자들은 순회강연을 고안해냈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동양학원의 존재를 선전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다.

 

경찰은 무슨 혐의로 강연단을 체포했는가? 사람들은 강연 내용이 불온할까봐 미리 검속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경찰의 목표는 강연회를 봉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박원희 일행은 체포된 이튿날 첫 열차편으로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양학원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북간도 망명 생활의 한 결실이었다. 부부가 해외로 뛰쳐나간 것은 1922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였다. 임박한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적극적인 목표를 수립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전통적 근거지인 해도’(연해주와 북간도)에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3·1운동 출소자와 인텔리 여성의 결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부부는 용정 시내에 은밀하게 거처를 마련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중국 간도 용정촌 제4였다. 용정은 북간도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수도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었다.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부부는 서울에서 조직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두 가지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하나는 공산당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청년회 조직이었다. 전자는 조선공산당(중립당) 지부에 해당했다. 달리 말하면 서울파 공산그룹의 북간도 지방조직이었다. 후자는 19234월 결실을 맺었다. ‘간도공산청년회라는 명칭의 비밀결사를 창립 멤버 13인으로 처음 출범시켰다.

 

부부는 합법적 공개 영역 활동도 중시했다. 용정에 설립한 동양학원과 영고탑(寧古塔)에 세운 대동학원이 대표적 보기였다. 이 학교들은 서울파 공산그룹이 사실상 주도하는 합법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동양학원은 급진적 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19235월 이 학교 학생회의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은 세 학생이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강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았다.

 

용정 생활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바쁘고 긴장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혼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젊은 부부에겐 두 사람만의 달콤한 생활이기도 했다. 결혼 뒤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주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둘이 결혼한 때는 19217월이었다. 3·1혁명에 참가했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랑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치고 교사로 재직 중인 인텔리 여성의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매일신보>김사국씨 결혼식, 30일에 거행이라는 제하에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결혼 뒤 두 사람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신부의 친정집이었다. 당시 행정구역 명칭에 따르면 경성부 계동 125번지였다. 말하자면 신랑이 처갓집에 얹혀살았던 것이다. 서울 북촌에 위치한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으므로 그 집의 호주는 신부의 큰오빠 박광희(朴廣熙)의 몫이었다. 입학난구제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등의 활동에 참여한 것을 보면 큰오빠도 사회주의자이거나 그 운동에 공감하는 동조자였다.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사상적 유대가 둘 사이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이다.

 

용정 시절은 젊은 부부에게 자유롭고 오붓한 둘만의 사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젊은 새댁 박원희는 용정 시절에 첫아이를 잉태했다.

 

박헌영 부인 주세죽과 조직 결성

동양학원 사건은 김사국·박원희 부부가 북간도에서 쌓아올린 공든 탑을 허물어뜨렸다. 합법과 비합법 공간을 교차하면서 양성했던 젊은 혁명가들이 대거 투옥됐다. 3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간도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고 그중 16명이 예심에 회부됐다. 박원희도 그 속에 포함됐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용정 감옥에 투옥됐다. 임신 중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옥고가 더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원희의 적극성과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미국인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시청각 장애인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영어 교사를 해내고, 영문 저술을 번역할 만큼 그녀의 영어 능력이 출중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행히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그녀는 예심 종결과 더불어 방면 처분을 받았다. 수감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고, 게다가 임신 중이었음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석방된 박원희는 귀국길에 올랐다. 남편은 경찰 수배망을 피해 지하로 잠행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용정, 영고탑을 오가며 비밀결사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출산을 앞둔 임신부임을 감안했을 것이다.

 

서울로 되돌아온 박원희는 친정집에서 기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4429일 아이를 출산했다.다행히 순산이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을 잃지 않았다. 아이는 딸이었다. 이름은 사건이라고 지었다. 역사 사(), 세울 건()자를 썼다. 아마 출산 전에 작명을 해두었던 것 같다. 성별과 상관없이 그 이름을 부여하자고 부부가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자라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엿보인다. 자식의 이름을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이라고 지었던 할아버지의 뜻이 다음 세대에도 꿋꿋이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생각 깊고 성적 좋고 연설 재주

 

19281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원 안국당 무덤 옆 박원희 묘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임경석 제공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14인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창립 집행위원 3인 가운데 1인이었다. 창립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다. 박원희,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이 그들이다.셋 다 배우자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林元根)이었고,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朴憲永)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동우회 창립 집행부는 커플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박원희는 여성운동의 조직자였다. 각종 여성단체와 사회단체의 설립에 참여했고, 그 임원진에 취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1925년에만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노동교육회 대회준비위원, 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국제청년데이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여자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취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인 근우회 설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임됐다.

 

박원희는 강연회의 단골 연사였다. 강연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1924년 러시아혁명 7주년 기념 사상단체 연합강연회에서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이듬해에는 서울청년회 춘계 강연회, 국제무산부인데이(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 출연했다. 특히 여성문제가 중점 분야였다. 그녀의 강연 제목을 보면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결혼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운동과 조선 부인운동등이었다. 서울과 지방도 가리지 않았다. 요청이 있으면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북 이리, 평남 진남포, 평양, 안주, 함남 원산 등이 그녀가 다녀온 출장지였다.

 

일찍이 오빠 박광희가 젊은 시절 여동생의 인물됨을 평하되, “생각이 제법 깊고, 공부 성적도 좋으며, 연설 재주가 있다고 했음이 인상적이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단체 임원진 내에서 역할을 분담할 적에는 으레 교양부를 맡았다. 회원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육·선전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어린 딸의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건이는 몸이 약했다. 고열이 나고 앓는 경우가 많았다. 박원희가 딸을 업고 서둘러 병원에 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어린 아기를 절구통같이 들쳐 업고, 부스스한 트레머리로 더풀더풀하며 재동 네거리를 지나가는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녀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이듬해 1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살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뿐이랴. 그 가족에게 거듭 몰려오는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홀로 남은 어린 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철모르는 사건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나는 조문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 온다고 부르며 울었다. “이 애를 보는 사람 누군들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비극이 꼬리를 무는 이 집안의 가족사를 취재하던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혁명가 부모 죽음 뒤 사건이의 삶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1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였다. 그녀는 2년 전에 먼저 간 남편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사건이의 운명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북간도 용정에서 박원희와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그녀의 1주기가 되던 날 추도회를 열었다. 용정의 여자청년회 주최로 열린 추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린 사건이에게 위로금 10원과 저고리 하나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192848일치 지면에 고 박원희의 어린 딸에게 전달할 돈과 물건이 도착했다는 보도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사건이는 잘 자랐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양육을 맡았다. 박원희의 친정어머니가 일찍 가버린 딸을 대신하여 어린 피붙이를 길렀다. 박원희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한 신문기자는 9살로 성장한 사건이가 서울 북촌의 재동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고 문헌

동양학원 巡講, 의외의 로 중지’, <동아일보> 1923715일치

재간도총영사 鈴木要太郞, ‘기밀 제271, 동양학원 학생 조사에 관한 건’ 1923827/ <불령단관계잡건-재만주의 부>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간도 동양학원, 내지 巡講 계획’ <동아일보> 192375일치

④ Ким-Хобан(김호반), Доклад(보고), 19231030, с.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83 л.108-114

새밝, ‘고 박원희 여사 회상’ <삼천리> 3-12, 18, 193112

<매일신보> 1921730일치

김사건, 장묘시설사용허가신청서, 19931218

여성동우 창립’ <동아일보> 1924511일치

車相瓚, ‘想像印象記, 만나보기 과 만나본 : 朴元熙氏’ <별건곤> 3, 43, 19271

路上’ <별건곤> 4, 39, 192721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3)’, <동아일보> 192819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혁명으로 살다간 붉은 형제

비합법과 합법 운동 병행하며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큰 족적 남긴 김사국·김사민 형제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활동 주도하다 폐결핵으로 숨지고 정신이상 비극적 생애

 

김사국씨의 출생지인 충남 연산(連山)에서 씨가 다섯 살 때에 씨의 진 아우 사민군과 24세 된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장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로부터 씨의 가정에는 눈물의 바다를 이루기 시작이다. 어머니 안국당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눈물겨운 상청 앞에서 3년간이나 보냈다.” ①

 

두 형제의 불행한 어린 시절에 대해 뒷날 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형은 5살이고 동생은 이제 막 갓난아기 때였다. 두 사람은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커다란 결핍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

아버지 김경수(金慶秀)가 어린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주였다. 떵떵거리는 대지주는 아닐지라도 한 해에 수백 석의 소작료를 거두는 유족한 집안이었다. 거주지인 충남 연산에는 물론이고 강원도에도 땅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범상치 않은 이름을 남겨주었다. 큰아이에게는 생각 사()에 나라 국()자를 붙였고, 작은아이에게는 백성 민()자를 지어줬다. 국가와 민중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뜻이었으리라. 가운데에 위치한 생각 사()자는 항렬이었다. 그의 본관은 연안 김씨였는데, 22세손의 항렬자는 ()’이고 23세손은 ()였다. 젊은 아버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자식들의 이름을 짓되, 그 속에 바람직한 삶의 규범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 약소국 조선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들들이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위해 살기 바랐던 아버지의 강렬한 내면의식이 느껴진다. 그는 의병 봉기에 공감하는 위정척사파 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근대화 정책을 지지하는 소장 개화파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젊어서 요절한 김경수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기가 막힌 이는 젊은 아내였다. 20대 중반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된 안씨 부인의 처지는 참으로 딱했다. 평생을 남편 없이 홀로 지내야 할 뿐 아니라 어린 두 자식을 키워야 했다. 그녀는 당대의 일반화된 규범을 따랐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는 한편, 남편 삼년상을 치렀다. 사후 2주년에 지내는 제사인 대상(大祥)까지 마쳤다.

 

삼년상을 마친 안씨 부인은 시댁을 떠나 친정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붙이가 사는 충북 충주로 이사했다. 친정 부모와 오라비, 자매에게 의지하면서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두 아이는 이제 그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다.

 

두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던 것 같다. 진맥을 위해 한의원들이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더러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들도 다녀갔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안씨 부인은 불길한 말을 듣곤 했다. 형제가 둘 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요절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씨 부인은 이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는 절대자에게 귀의해 그 가호를 빌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멀리 떨어진 금강산의 유명한 사찰 유점사(楡岾寺)를 택했다.

 

안씨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입산했다. 자신은 머리를 깎고 장삼을 몸에 둘렀으며, 아이들에게는 독선생을 붙여서 한학 교육을 했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호적부에 기재된 안국당이란 그녀의 이름은 아마 유점사 시절에 불리던 당호인 듯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영특했다.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던지, 두 아이는 몇 번만 일러주면 곧 돌아앉아서 줄줄 외울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아픈 데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었다.

 

아비의 뜻대로 3·1혁명 참가한 형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 열린 신생활사 사건 재판 사진. 앞줄 왼쪽 흰옷 입은 사람이 김사민으로 추정된다. 임경석 제공

 

어머니 안국당은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산중에서 한학만 배우다가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이수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수학했다. 보성학교란 1906년에 신입생 240명을 모집해 개교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송동 44번지 오늘날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 한때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요동반도에 위치한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 들어가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중국어를 배운 것도 이때였다.

 

김사민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 소학교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조선조 왕가 경비를 위해 잔존시켰던 조선인 군대의 명칭이었다. 1931년까지 존속했는데, 해산 당시 병력은 200명이었다. 무기와 탄약, 인사관리 등을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장했다. 그는 기질적으로 무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부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망해버린 조국의 해방을 위한 길에 기꺼이 나섰다. 두 사람은 19193·1혁명의 참가자였다.

 

3·1혁명 당시 학생대표를 지낸 강기덕(康基德)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사국이 입국해 학생층의 독립선언문을 따로 기초했다고 한다.그뿐만이 아니다. 3·1혁명의 한 전환점인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든 이도 김사국이었다. 그는 19194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국민대회 사건이라고 한다. 김사국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고, 1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투옥 중일 때 아우가 새로운 투쟁을 조직했다. 19208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내방했을 때, 그에 호응해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대 시위운동을 기획했다. 김사민은 이 사건으로 동료 15인과 함께 체포됐다. 그 결과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덕적도에 1년간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

 

두 형제는 민족독립운동 투사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비합법 영역에선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합법 공개 영역에선 노동·청년·사상단체 운동의 확장을 꾀했다. 두 사람이 참여한 비밀결사는 조선공산당(약칭 중립당)과 고려공산청년회였다. 특히 김사국은 중립당의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한(金翰)과 더불어 양대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김한이 사회주의운동의 책사형지도자라고 한다면, 김사국은 투사형지도자라고 평가받았다.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19228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5인 간부진에 나란히 취임했다. 국제공산청년회 가입 단체로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최초 사회주의 재판, 신생활사 사건

합법 공개 영역에서 두 사람의 활동 거점이 된 단체들이 있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청년회가, 노동운동에선 노동대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두 형제는 이 단체들을 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거점 역할을 한 사회단체 가운데 서울청년회가 두드러진 활동성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불렀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바로 서울파 공산그룹의 유력한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김사국은 동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군의 머리는 천하에 가장 밝아서,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평은 듣는 자로 하여금 경탄케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김사국은 1922년 말부터 2년 동안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른바 자유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경찰의 추적을 받은 그는 좁혀오는 체포망을 피해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망명지는 북간도와 연해주였다. 한 글자씩 따서 해도라고 묶어 부르던 곳이다. 일찍이 <정감록>에서 해도로부터 진인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사람들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구원할 근거지가 바로 북간도와 연해주라고 생각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속에 배태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서구에서처럼 노동운동의 한 갈래로 사회주의가 발전돼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특징은 식민지를 경유해 근대사회로 진입한 광범한 비서구의 각 민족과 국가의 사회주의운동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마는, 사람들은 일단 불행에 빠지면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곧잘 상기하는 법이다. 우연일지언정 외견상 어쩜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놀라울 때가 있다. 두 형제의 운명이 그랬다. 마치 예언이 적중한 것만 같았다.

 

아우 김사민이 먼저 화를 입었다. 그의 나이 26살 되던 192321일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는 지목을 받던 신생활사(新生活社)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죄목은 자유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취지서를 기초했으며, 그 취지서를 <신생활> 잡지에 게재한 혐의였다.자유노동조합이란 19221029일 창립한 노동단체로서, 서울의 지게꾼과 막벌이꾼 200여 명을 회원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었다. 그즈음 다른 노동단체들이 주로 지식인 출신자로 구성된 데 비하면, 이채롭고 본격적인 노동자 단체였다. 일제하 노동운동 역사 속에 획기적 의의를 갖는 조직이었다. 그 단체의 설립을 김사민이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불온하게 여겼다. 김사민을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해 재판에 부쳤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다른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코뮤니스트

 

192651240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른 김사국 영결식 때 배포된 사진(왼쪽). 김사국 영결식. 만장이 수십 개 늘어서 있고, 그중 몇 개는 글자가 보인다. ‘애도 고 김사국 동무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김사민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불법 감금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옥중 규칙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21일 그날도 그랬다. 유죄판결을 받은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옥중 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간수장에게서 단단히 설유(말로 타이름)’를 받아야 했다. 아마 가혹한 징벌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 뒤 간수 두 사람의 감시가 붙은 상태에서 구치감 문을 들어설 때였다. “김사민은 용맹하게 간수의 칼을 빼어 문턱에 섰던 간수 요코오 마사이치(橫尾政一)의 머리를 찍었다고 한다.간수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됐다. 이 사건은 김사민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거센 기질을 잘 보여준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조선인 사회에서 큰 주목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반항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총독부 쪽의 판단과 보도 통제로 인해 다시는 신문 지상에 거론되지 못했다. 가혹한 보복을 당하지 않았을까, 몸은 무사한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무려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가족 면회가 허용됐다. 그해 53일 둘째아들을 면회하고 나온 어머니 안국당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면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사민은 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앞뒤로 간수 3명의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머니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겨우 눈을 한 번 들어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멍하게 허공만 쳐다봐다고 한다.정신이상 증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가혹한 보복과 폭력을 가했기에, 그처럼 자긍심 높던 정신이 끝내 파괴되고 말았을까.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렸다.

 

김사민은 이후 온전한 정신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19247월 만기 출옥했지만, 노동운동 일선에 복귀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인 사생활도 영위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는 옛 동료들의 호의로 청년총동맹 회관 한쪽에 자그마한 숙소를 마련했지만, 종신토록 어머니 안국당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지 않은 채 서울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문에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신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은 26살 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아우의 삶을 파괴한 것이 식민지 통치 기관의 폭력인 데 반해, 형 김사국의 삶을 파괴한 것은 질병이었다. 19245월 해외 망명지에서 서울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 중증이었다. 폐결핵이란 몸 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발병하는 질환이었다. 그는 해외 망명지에서 이 병을 얻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불안정한 숙소, 끊임없는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이 그의 면역력을 약화했던 것이다.

 

김사국은 귀국 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내이자 동지인 사회주의자 박원희(朴元熙)의 병구완을 받았다. 병세가 오르락내리락 변동이 있었다. 증상이 혹은 더하고 혹은 덜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 시절 폐결핵은 치사율이 높은 위험한 질병이었다. 게다가 김사국은 투병 중에도 일손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는 단일한 전국적 전위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여러 비밀 공산주의 그룹이 밀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내지 중심론을 표방하며 이 논의를 주도했다.

 

35살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사국

이러한 긴장과 과로가 그의 병세를 악화했음이 틀림없다. 급기야 귀국 2년째 되던 때 걷잡을 수 없이 병이 깊어졌다. 19265월 초 입원 치료를 위해 관립 총독부병원을 비롯해 여러 사립병원의 문을 두드렸으나 어디서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병이 너무 깊어서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김사국은 192658일 사망했다. 향년 35살이었다.

 

어머니 안국당은 오래 살았다. 71살까지 살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섭섭한 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했노라고 축복받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만년은 궁핍했다. 수중의 재산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생활의 방도는 탁발이었다. 머리 깎고 장삼을 갖춰 입은 그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경문을 읽어주고 얻는 탁발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녀는 맏아들 김사국을 보낸 이후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그날그날 밥때를 챙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맏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노모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국이 제사나 한번 지냈으면. 노인의 탄식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노라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신문기자는 그렇게 썼다.

 

참고 문헌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2)’, <동아일보> 192818일치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54일치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 당시의 전국학생대표 康基德氏談’<경향신문> 1950226일치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2·3·5월호. <죽산 조봉암 전집 1>, 세명서관, 344345, 1999

소식’, <청년조선 1>, 1922215

인쇄기 1대도 몰수’<동아일보> 1923117일치

재옥 중의 金思民, 看守의 검으로 看守斫傷’, <조선일보> 192322일치

김사민의 위독설’<조선일보> 192359일치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54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한겨레21 블루 기획 임경석의 역사극장

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

억압자와 저항자 기록으로 본 역사의 속살한국 근현대사 사료로

지배자의 희극적 서사와 혁명세력 비극적 서사 형상화할 예정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연출되는 극장이다. 강자의 입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희극이었지만 대다수 약자의 시선으로 보면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 비극은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 삼아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교직하는 이유다.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낼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3주마다 개봉한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성균관대 사학과의 임경석 교수입니다.....저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료를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지요. 오래된 옛날 기록을 뒤져서 유용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합니다. 수집한 정보가 많아지면 적절히 분류도 하고요, 그것을 분석해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지루하기도 하지만, 맛을 들이면 꽤 재밌습니다. 작으나마 새 지견을 얻을 때는 보람도 느낍니다.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우리 공동체가 걸어온 길입니다. 특히 가까운 과거의 궤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최근의 궤적에 주목하냐고요?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좌표를 알아야 항로를 설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역사 본질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

콜럼버스 이래 세계는 하나로 통합돼왔습니다. 지구의 여기저기에 분산돼 있던 여러 문명과 민족이 연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 과정은 평화롭거나 수평적이지 않았습니다. 서구는 우월한 힘을 이용해 비서구 지역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통합해나갔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민족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약소국 위치에 놓였습니다. 자립적으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식민 시기를 경과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영웅적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에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 역사를 고통의 역사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는 <한국통사(痛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血史)>를 썼습니다. 우리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을 구사했던 거죠.

 

저는 박은식의 문제의식을 배우려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고난과 분투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주도의 위계적인 세계 체제는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체제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하고 안정화돼 있는 듯 보입니다.

 

이 현실을 감안해 저는 두 종류의 사료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하나는 억압자들의 기록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식민지 통치 기록, 옛 일본제국 외무성이 생산한 해외 한국인에 대한 자료가 그것이죠. 다른 하나는 저항자들의 기록입니다.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문서가 대표적 보기입니다.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 풍부하게 보관돼 있습니다.

 

정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하면서 읽어왔습니다. 양자를 교차시키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불꽃이 튑니다. 두 개의 시선이 충돌하는 것이죠. 관찰자의 시선이 어떠한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완전히 상이한 이미지를 띠고 나타납니다. 이 불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 추구의 사명을 지닌 역사학자는 모순에 찬 기록을 비교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신뢰할 만한 역사적 지식이 생산될 가능성이 주어지는 거죠.

 

이제 제가 어떤 일에 종사해왔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근대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 연구 분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료의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입니다. 총독부 문서가 그러하고, 코민테른 문서가 그러합니다. 외무성 기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래도록 이 분야 연구에 집중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사료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추 계산해도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꾸준한 작업 덕분에 적잖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맘먹고 한번 헤아려봤습니다. 그간 8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4권의 단행본을 간행했더군요.

 

역사 대중화에 맞춤한 글쓰기

이 지면을 통해 역사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에세이 장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산문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빌려 역사에 대해 쓰겠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다채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오늘날 역사학의 주된 글쓰기 장르는 논문입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논문 작성에 전념합니다. 그 이유는 논문이 역사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은 형식과 규범이 고정화된 역사 글쓰기의 한 양식입니다. 문제 제기를 명백히 해야 하고, 기존 연구에 비춰 독창적인 입론을 세워야 하는 글입니다. 학술지에 기고할 때는 분량도 일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학계 내부의 소통에 최적화된 장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논문 집필에 몰입하는 이유에는 학문 외적인 것도 있습니다. 취업과 승진, 연구 프로젝트 수주 등이 연구논문 실적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논문 실적을 두텁게 갖추지 않고서는 안정된 연구 여건을 보장하는 직장을 갖기 어렵습니다. 취업한 뒤에도 승진과 재임용의 문턱을 넘으려면 논문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논문은 시민사회와 폭넓은 소통을 목표로 하는 글쓰기 양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문가 내부의 소통에 목적을 둔 글이라서 역사 대중화에 필요한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학이 시민사회와 소통하려면 논문을 벗어나 다른 장르를 개척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사의식 형성을 돕고 정체성 통합을 도모하는 데 적합한 글쓰기가 요구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기 확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해방의 확신으로 제우스와 타협하길 거부했다. 한겨레

 

역사 에세이가 그 요구에 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글쓰기 양식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제가 전하려는 것은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들입니다. 사료를 대하다보면 더러 감정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가슴 뭉클하고, 눈물겹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는 이런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논문은 논리적 짜임새를 중시해서 이런 이야기가 배제되기 일쑤입니다. 논문의 논리적 짜임새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세이 장르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논문에는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에세이에는 쉬이 담을 수 있습니다.

 

역사 에세이를 통해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특히 비극과 희극을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비극은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비극이 단순히 슬픈 얘기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볼까요. 그리스 비극의 특성은 신이 부여한 객관적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투쟁을 그리는 데 있습니다. 이 투쟁은 인간의 패배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신의 질서는 엄연하고 객관적인 것이므로 그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패배와 좌절의 원인은 항상 자기 내부에 있습니다.

 

위대한 비극은 단지 패배만을 그리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이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인간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비극적 서사의 핵심이며, 또한 이 역사 에세이의 목표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들의 좌절과 고뇌를 재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한국 역사에서 형상화하려 합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13세대의 역사가 지난 뒤에는 제우스도 파멸에 부딪힐 것이며, 그때 자기는 해방될 것을 확신하노라고. 그러한 내면의 확신 덕분에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와 타협하기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그 확신을 역사 에세이에 담고 싶습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하다

역사 속에서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식민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면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관순(왼쪽)과 이완용은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의 상징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한겨레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선한 사람입니다. 도덕성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다소 더 선한 사람입니다. 평균 수준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다릅니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려 합니다.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예견되는데도 그랬습니다. 합법적 공개 영역의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을 때, 그들은 수배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생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감옥 가는 것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험준한 산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운하게도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공동체 구성원은 그렇게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할 의무가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인가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습니다.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비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평균 수준보다 더 낮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희극은 도덕적으로 저열한 군상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시한 사람, 대의를 저버린 사람,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 외세를 추종해 민족적 이익을 훼손한 사람이 그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인간의 온갖 악에 관련됐다고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결함과 창피스러운 점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 관변 유력자층에 잇닿아 있음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들은 식민 체제가 종언된 뒤에도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외세 밑에서 지배 시스템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힘은 오늘날 거대하게 성장했지만, 그 본질이 우스꽝스러운 것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로 그려야 합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합니다. 현실을 변혁하는 직접적 무기가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현존 지배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희극은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장미의 이름> 속 역사적 통찰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4세기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희극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 수도원에 비밀리에 소장돼 있고, 그것이 세상에 유포되는 걸 막기 위해 살인이 저질러진다는 얘기이지요. 희극론이 세상에 나오면 교회와 기득권층이 누리는 기존 권력과 영향력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했던 거지요. 희극이 현존하는 권력과 지배질서에 대해 얼마나 강력한 전복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희극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입니다.

 

제 의도는 역사 에세이에서 비극과 희극 서사를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소재로 비극적 혹은 희극적 형상화를 도모하겠습니다. 더러 그에 못 미치는 이야기도 있겠지요. 그저 재미로 읽는 이야기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설혹 그렇더라도 관대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비극적 혹은 희극적 서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