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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4월4주 4월21일~28일

by 이성근 2025. 4. 28.

 

 

2002년 노무현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난 27일 평산마을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인터뷰를 마친 뒤 잠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데 대통령실 이전 문제가 나왔다. 문 전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걸 몹시 속상해했다. “청와대에 안 들어오고 용산으로 옮긴다고 해서, 내가 천천히 검토해서 결정하시라고 했어요. 그랬는데도 그렇게 급하게 옮기더라고. 무엇보다 용산은 평지 아닙니까, 미군 부대가 바로 옆에 있고. 보안이 안 되는 지역이에요. 거기(대통령실 용산 이전)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거죠. 다음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세종으로 가는 게 맞는다고 봐요. 세종시에 아직 짓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실 터도 조성해 놨거든요. 건축에 3년 정도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는 다시 청와대에서 집무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 전 대통령은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고 하는데, 나는 거기서 일하면서도 고립되거나 외롭다거나 국민과 단절돼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청와대에선 사람을 왜 못 만납니까? 구중궁궐은 사람이 만드는 거지 땅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라고 덧붙였다. 국민을 거스르며 비상계엄까지 시도하다 쫓겨났으니, 구중궁궐은 청와대가 아닌 용산이었던 셈이다.

문 전 대통령 말처럼 차기 정부 임기 내에 대통령실은 세종시로 이전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김동연·김경수 등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들은 취임 직후 또는 세종시에 새 청사를 건립한 뒤 대통령실을 옮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도 세종시로 대통령실과 국회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의 세종시 이전, 좀 더 크게는 국회까지 포함하는 행정수도 이전을 국민의힘도 과거처럼 격렬하게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관습 헌법이란 해괴한 논리로 행정수도 이전에 제동을 걸었을 때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은 환호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의힘 안에서도 지방을 살리려면 행정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꽤 넓게 퍼져 있다. 지방 소멸은 수도권 집중의 차원을 넘어 이제 대한민국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이전 논란은 선거의 중요한 기능에 대한 하나의 일깨움을 준다. 요즘 대통령실 세종 이전에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는 건 23년 전의 선거 공약 덕분이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을 내걸었다. ‘충청 표를 겨냥한 빈 공약이란 주장부터 서울 집값이 폭락할 것이란 공포감 조장까지 다양한 비난이 쏟아졌다. 보수 진영의 반발은 엄청났다. 결국 헌재 결정으로 공약이 부분 실행에 그친 건 앞에서 얘기한 대로다.

그 뒤 20여년간 지방은 급속도로 피폐해졌다. 저출생 고령화를 악화시키며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균형 발전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물론 이것을 행정수도 이전을 막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 미래와 직결된 사안을 선제적으로 이슈화해서 대응해야 할 책임이 정치에 있음은 분명하다.

선거의 긍정적 의미는 이런 데 있다. 근본적인 현안일수록 찬반양론이 거세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긴 어렵다. 국가 운영을 놓고 다투는 대선에서 이런 문제를 발굴해서 토론하고 국민 평가를 받아야 비로소 해법을 만들고 추진력을 얻을 수가 있다. 얼마 전 서울대 교수회가 제안한 서울대와 지역 거점 국립대의 공동학위제는 그런 예다. 지역의 몰락을 상징하는 징표 중 하나가 거점 국립대의 위상 추락이다. 지방 국립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서울대의 절반에도 미치질 못한다. 공동학위제에 대해선 초일류 인재 육성을 해야 할 때에 오히려 하향 평준화를 조장한다는 반론이 거세다. 하지만 유은혜 전 교육부 장관은 당장 전면 실행은 힘들어도 지방 국립대가 강점을 지닌 특정 학과 1~2개부터 서울대와 연계 수업을 하고 연구 인프라를 공유하는 등의 시도는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대선 공약이란 이렇게 우리 사회의 방향과 미래를 여는 의제를 담아서 논쟁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도 2002년의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공약이 제시되길 바란다. 인공지능(AI)이든 또는 교육개혁이든 국민 관심을 뜨겁게 모아 변화의 에너지를 끓게 하는 공약을 기대한다. 나이 든 한국 사회는 공약의 현실화를 20년 넘게 기다릴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이젠 없다. 윤석열은 파면돼 서울 강남 사저로 돌아가면서 어차피 3년 하나 5년 하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3년간 국가 운영은 멈춰 섰고, 의대 증원 문제처럼 어떤 현안은 오히려 더욱 꼬여버렸다. 앞으로 5년은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지 모른다.

박찬수 | 대기자 | 한겨레 2025.04.21.

 

사교육을 인수분해 해보니

불평등, 경쟁, 사교육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불평등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처럼 대학교육을 상향 평준화시키려는 정책에 대해 냉소적인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관심이 경쟁이 아니라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정량적 연구에 의하면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한 편이고, 2010년대 이후 한국의 소득불평등(지니계수)은 줄곧 감소하고 있다. 통념과 다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왜 이렇게 격렬한 교육 경쟁이 일어나는지를 다소 엉뚱하게 설명한다. 예컨대 중앙대는 합격선이 상위 5~7% 정도로 충분히 좋은 대학인데, 기를 쓰고 더 상위의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는 것은 문화(아시아적 교육열) 때문이라거나 상징자본(학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서울대가 중앙대보다 3배 좋은 대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 학생 1인당 투입되는 교육비(연구비는 제외한 수치다)3배나 차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의 질이 다르다. IT 개발자들 사이에 2000년대부터 거론되는 이야기가 있다. 어셈블리어, 운영체제, 데이터베이스, 컴파일러 등을 모두 끝까지 배우는 곳은 카이스트와 더불어 서울대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서울대가 더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며, 그래서 졸업생의 능력치가 더 높다. 두 대학을 입학할 때 존재했던 약간의 능력 차이가 졸업할 때에는 한층 증폭되는 구조다.

마찬가지로 경쟁사교육역시 등치되는 말이 아니다. ‘경쟁에 의한 사교육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교육 자체로 인한 사교육의 비중이 만만찮다. 통계청은 매년 사교육비 조사를 할 때 학부모에게 사교육을 이용하는 목적을 객관식으로 묻는다. 응답을 보면 보완적 사교육’(학교수업 보충)경쟁적 사교육’(선행학습·진학 준비·불안 심리)과 비슷한 비중으로 나온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제대로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세대 전과 비교해보면, 숙제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 공부를 학(·배움)과 습(·익힘)으로 나눠본다면, ‘의 과정을 학교가 주도하는 고전적인 방법이 숙제다. 그런데 그것이 지난 한 세대 동안 꾸준히 감소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방과후 보충교육(이른바 나머지 공부’)은 줄어들다 못해 거의 멸종 직전이다.

숙제와 나머지 공부가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교권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 교권은 관습과 문화였을 뿐 법령과 제도로 정비되지 않았다. 따라서 숙제가 많다거나 아이를 남기지 말라는 민원이 제기될 때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일종의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숙제나 나머지 공부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다.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약화되었다는 견해는 일종의 착시이며, 주된 문제는 교권의 법령화·제도화가 방기되었다는 점이다(2023919일자 칼럼 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참조).

공교육으로 인한 사교육 만만찮아

핀란드 교육을 마케팅용 이미지로 낭비해버린 한국의 진보 교육계는 이 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핀란드에서는 초등 1학년부터 꾸준히 숙제를 내준다. 수업 시간에 보조교사가 한 그룹의 학생들을 따로 지도하는 장면은 흔하고, 의무교육 9년중 방과후 보충교육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는 학생이 30%에 달한다. 심지어 초등 시절부터 유급이 있다. 여러 지원을 해도 성취도가 일정 수준 이하인 학생은 유급을 시킨다. 대단한 교권이자, 대단한 책무성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인공지능 교과서를 도입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공교육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학(수업)에 인공지능을 도입해 효과를 보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적 플랫폼에서 교사의 개성이나 세밀한 노하우를 살리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습(숙제)은 인공지능을 통해 성과를 내기 쉽다.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맞춤형으로 숙제를 제시하고 관리하고 교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굳이 인공지능이 아니어도 알고리즘 설계를 잘하면 가능하다. 이는 공교육의 책무성을 높이고 보완적 사교육을 줄일 기회가 된다. 여기에 인공지능을 더하면 수학 문제를 풀어가는 학생의 논리적 오류를 짚어낸다든가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이 프리미어리그 축구에 대해 대화하며 영어 실력을 높이도록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경쟁적 사교육을 일으키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구조적 요인으로서 대학 서열(대학 간 격차) 및 학과 서열(직업 간 격차)을 꼽을 수 있다. 대학 서열은 다시 학벌(동문), 평판(명성), 소재지(특히 서울 소재 여부), 교육 품질 등으로 인수분해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교육 품질, 또는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이다(202192일자 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참조). 학과 서열은 대학 서열보다 노동시장의 영향이 더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이다. 2010년대 개업의 평균소득이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의대 선호 현상이 극단화되었다든가, IT 개발자 대우가 좋아지면서 2010년대 이후 컴퓨터공학과 선호도가 높아진 것, 교대의 인기가 높아지다가 최근 낮아진 것 등이 모두 노동시장의 현황과 전망을 반영한다.

경쟁적 사교육을 일으키는 요인에는 구조적 요인’, 즉 대학 간 격차 및 직업 간 격차뿐만 아니라 기술적 요인’, 즉 전형요소의 난이도·복합성·연계성 등도 작용한다. 그중 난이도란 예를 들어 킬러 문항이 많이 출제될수록 사교육이 증가할 것이라는 얘기다. ‘복합성이란 여러 가지 전형요소를 동시에 요구하면 사교육 의존도가 커진다는 얘기다. 철인5종 경기보다 철인10종 경기가 버거운 법이니까. 복합성이 유난히 높았던 전형으로 1994~1996학년도의 수능·내신·본고사 합산, 2008학년도 정시전형의 수능·내신·논술 합산, 전형요소가 다양한 입학사정관제 및 학종(특히 전형요소가 축소되기 전인 2010년대의)을 꼽을 수 있다. ‘연계성이란 통상적인 고교 교육과정을 통해 그 전형요소가 얼마나 대비되는지를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 전형요소 가운데 고교 교육과 연계성이 가장 낮은 전형요소는 논술이다. 유럽 국가들의 대입 시험은 대부분 논술형인데, 이는 과목별 출제이고 철저하게 고교 교육과정과 연계되어 있다. 학교 기말고사 문제와 거의 같은 문항이 대입 시험에 나온다. 반면 한국의 논술고사는 과목도 불분명하고 고교 교육과정의 연계성이 낮아 무조건 사교육에 의존해야 한다.

수능과 내신, 사교육 유발 엇비슷

나는 경쟁적 사교육에서 구조적 요인기술적 요인의 비율이 7 3 내지 8 2 정도 된다고 본다. 즉 대입제도를 통해 사교육을 억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입시제도 변경을 통해 사교육을 줄이는 데 성공한 바 있는데, 당시 정시전형에서 수능·내신·논술을 합산 반영하던 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해체한 것, 그리고 외고 입시에서 면접 이외의 평가를 폐지하고 중학교 내신성적을 영어만 반영하도록 한 것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수능이 사교육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김동춘 교수는 지난해 10월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사교육을 가장 많이 유발하는 전형이 수능이라고 답한 비율이 압도적(61.1%)이었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교사 대상 설문(국회 강경숙 의원실 조사) 결과임에 유의해야 한다. 과거에도 교사 대상 설문에서 유사한 특성이 나타나곤 했다. 학생이나 학부모를 대상으로 설문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2017년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사교육이 가장 많이 유발되는 전형을 설문한 결과, 내신(학생부교과)이 수능(정시)보다 더 높은 비율을 보였다. 물론 당시 학생부교과전형의 정원이 정시전형보다 2배 정도 많았음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20168월 국회 송기석 의원실에서 학부모에게 전형요소별 사교육 유발도를 5점 척도로 설문한 결과 수능(4.2)이 내신(4.0)보다 사교육을 더 많이 유발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한국처럼 심한 경쟁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수능을 축소하거나 없애고 내신 위주로 선발한다고 해서 사교육이 줄어들지는 미지수이다.

이범 교육평론가 | 경향 2025.04.21.

 

지금 절실한 건, 불평등과 제대로 싸우는 법

포르투갈의 총리 살라자르는 1932년부터 1968년 쓰러지기 전까지 무려 36년간 독재를 했다.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인기를 얻은 후, 폐쇄적인 권위주의에 기반해 입맛에 맞게 대통령을 갈아치우고 의회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 폄하하며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대통령 직선제는 간선제로 바꿨다. 그는 수많은 이들을 잡아 가두고 추방하고 비밀경찰을 동원해 감시하며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독재자는 우민화 정책과 함께 고집스럽게 잘못된 방향의 사회경제 정책을 고수했고, 나중에는 기술관료와 소수 엘리트가 그를 둘러싸고 인의 장막을 친 채 포르투갈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갔다. 그 결과 포르투갈은 식민지에 집착하고 산업 발전에는 한참 뒤처지게 됐다.

 

지난해 계엄의 밤에 시민들이 막아낸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자 꺼낸 이야기다.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의회 따위는 불편하기 짝이 없어하며, 어쩌면 독재자를 꿈꾸었던 그가 계엄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말살할 뿐만 아니라 닫힌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듯이 한국 사회의 경제·문화·과학·복지를 큰 폭으로 후퇴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발전 속도가 가장 빨라진 시기에 말이다. 그날 밤 시민들은 계엄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큰 폭의 후퇴를 막았다. 1974년 포르투갈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구에 꽃을 꽂아주며 역사의 뒷걸음질을 막아낸 것처럼 말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425일을 자유의 날’, 카네이션 혁명의 날로 기리고 있다. 우리도 계엄의 날 시민들의 용기에 대해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지킨 이후가 중요하다. 유럽 다른 국가와 달리 포르투갈에서는 약 50년 동안 극우 정당이 존재감을 갖지 못했다. 그랬던 극우 정당이 최근 선거를 통해 제3당으로 약진했다. 심화하는 불평등과 이민자, 기성정당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도 탄핵심판을 계기로 극우 정치가 광장과 정당에서 동시에 크게 성장했다.

 

복지, 특히 국민연금에 관한 이들의 포퓰리즘적 접근은 흥미롭다. 일부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복지 이슈를 가지고 세대를 둘러싼 박탈감과 적대감, 심지어는 분노를 부추긴다. 세대 간 공정이란 해법은 사실상 사회연대 및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제도 해체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세대를 아울러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몇몇 대선 주자들도 세대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한다. 일부 정당은 국민연금의 이민자 정책까지 호도하면서 국민연금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겼다. 이는 분노가 과녁을 제대로 찾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는 불평등이다. 고용 불안정이 심해지고 플랫폼 경제의 지배력이 커질수록 일주일에 7일을 일해도 소득은 부족하고, 유연해진 대자본은 살찐다. 가족, 친구와 삶을 누리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면, 그리고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항상 약자 혹은 패배자로 규정된다면 한국에서도 극우 정치가 번성해 주류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정치가 문제 해결에 무능하다고 비칠 때 이런 틈이 생기는 법이니까.

 

대통령 파면 이후 지금이 정당들이 사회 전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몇몇 추상적이고 파편적인 단어가 아니라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획기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다는 전망과 방법, 그리고 대안 사회에 대한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초저출생·초고령화 사회에서 사회복지 지출은 단순히 비용이 아니라 사회 전환의 마중물역할을 하는 투자이다.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역사의 퇴행을 막아낸 시민의 성과를 그저 흘려보내는 대신 불평등과 제대로 싸우는 법을 내놓아야 한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경향 2025.04.21.

 

당신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누군가에겐 생의 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의 곁에 선 노예가 이 말을 속삭였다고 한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 가장 화려한 순간에조차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죽음의 상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삶을, 오늘의 생을 더 진지하게 살아내라는 다짐에 가깝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고단하다. 어떤 이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일조차 전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고통의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비극이며, 그 과정에서 가능성까지 지워버린다. 살아 있음은 여전히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죽음을 기억하되, 그것이 삶의 가치를 드러내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충실히 살아내야 한다. 자연이 허락한 그날까지, 기꺼이, 때로는 비틀거리더라도 걸어가야 한다.

 

버틴다는 말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버팀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대한 일이다. 생존은 비굴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꺼질 듯 말 듯 타오르는 존엄의 불꽃이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인간은 고통과 불안을 견디기 위해 서로의 손을 붙잡는 존재다. 하지만 이 시대는 외로움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실패를 나약함으로 치부한다. 우리는 지금, 서로를 끌어안고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연대를 회복해야 한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짧은 메시지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생의 끈이 될 수 있다.

 

치열하게 살아라는 말은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정직하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라는 뜻이다. 실패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괜찮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생이 버겁고 괴로운 날이 있다면, 그 하루를 살아낸 자신에게 먼저 박수를 보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 이 한마디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소중한 존재다.

 

지금의 고통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지나고 보면 그 고통 속에도 분명 웃던 날이 있었고, 위로받던 순간이 있었다. 시간은 고통을 줄이고, 기억은 따뜻함을 남긴다. 지금이 가장 어두운 시기라면, 곧 아침이 올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삶은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그 복잡한 얼굴을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서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언젠가 죽을 운명이기에, 오히려 오늘 하루가 더 절실하고 소중하다. 자살하지 말자. 살아 있기에 우리는 어떤 가능성도 품을 수 있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성원 메모리얼소싸이어티 대표 | 경향 2025.04.21.

 

윤석열은 갔지만 혐오가 남았다

과잠을 입은 대학생들이 서울 광진구 건국대 인근 양꼬치 거리에서 ×, 북괴, 빨갱이들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져라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중국인 상인들과의 충돌도 있었다고 한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중국의 샤프 파워가 서울대까지 침투했다며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폐쇄를 촉구했고, 자유통일당 서울 구로구청장 후보는 구로의 주인은 대한민국이라며 중국인 밀집 지역인 개봉역을 을지문덕역으로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중국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중국인이 몰려온다! 집회 참여! 범죄 증가! 혜택은 싹쓸이!”라는 펼침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12·3 계엄 사태와 탄핵심판 국면에서 활개를 친 중국 혐오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계엄 선포 대통령 담화문이나 비상계엄 포고령에서는 중국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계엄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선거 음모론이 제시되고 중국인들이 부정선거에 개입되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탄핵을 막기 위해 혐중이 동원된 것이다. 법원과 헌법재판소에 근무하는 중국인 색출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코로나19 중국 책임론, 실업급여, 건강보험, 참정권, 입시 등에서의 중국인 특혜론이 재등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쪽 국회 대리인단은 중국의 하이브리드전 위협까지 거론해가며 계엄을 옹호했고, 급기야 헌법재판소 앞에는 차이나 아웃팻말을 든 시위대가 등장했다. 탄핵 반대 국면을 주도했던 극우 개신교 세력들은 공산주의, 동성애에 이어 중국을 새로운 적으로 정했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는 아니다. 2010년대 초부터 중국동포 범죄가 부각되며 중국인을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기 시작했고, 방송과 인터넷에 중국인·중국동포를 조롱하는 콘텐츠가 줄을 이었다. 급기야 영화 청년경찰범죄도시가 개봉된 2017년엔 서울 대림동 중국동포들이 영화 상영 반대 시위를 벌였을 정도로 심각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며 반중 정서가 더욱 심각해졌고, 일부 극우 매체들은 중국이 한국 침략을 은밀히 계획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되는 중국인 혐오가 비상계엄 옹호와 부정선거론과 만나면서 폭발한 것이다.

 

외국의 혐오 확산 사례들을 보면, 온라인에서의 표현이 오프라인에서의 정치적 행동으로 바뀔 때, 폭력으로 나아갈 때, 특히 표적집단을 향해 물리적 공격을 가할 때, 정치인들이 혐오를 이용하여 선동·조장할 때, 특별히 위험한 상태가 된다. 중국인을 직접 겨냥한 양꼬치 거리 시위가 벌어졌고, 혐중은 이미 다수 정치인의 단골 메뉴가 되었으며 대선 후보도 가세했다. 탄핵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극우 개신교 집단이 혐중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불안 요소다. 다문화나 이주자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아직 온라인에 머물러 있고, 반동성애는 극우 개신교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지는 못하고 있다. 반면 중국 혐오는 정치인들의 엄호 속에 중국인을 직접 타격하는 단계까지 나아갔고, 대중들의 지지도 훨씬 광범위하다. 위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년 동안 더 늦기 전에 혐오와 차별을 막아야 한다는 호소는 주류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주요 국가 중 혐오·차별에 대한 공적 대응 수준이 가장 낙후한 나라가 되었다. 정부와 국회가 주저하는 사이에 혐오 세력들은 스멀스멀 힘을 키워왔다. 현실 정치에서 혐오, 차별, 성평등, 젠더 등은 어느 순간부터 금기어가 되었고, 2013년 차별금지법안 발의가 철회된 이후 혐오와 차별에 관한 국회 입법과 정부 정책은 사실상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넉달여의 탄핵 국면은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 한편으로 혐오가 극단화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광장에서는 혐오와 차별이 새로운 의제로 떠올랐다. 인권운동가들은 윤석열이 가면 중국 혐오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내란 종식차별금지법 제정을 함께 외쳤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기민하게 극우에 맞선 행동을 조직하고 극우에 대한 분석과 대응 과제를 망라한 극우 리포트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극우와 싸워왔던 경험 덕분이었다. 이 싸움을 더 이상 외롭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광장의 시민들은 윤석열 이후의 세상에 대해 고민했고, 혐오와 차별에 맞선 싸움에 대해서도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혐오 정치에 단호하게 맞서고, 포용과 연대의 민주적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 한겨레 2025.04.22.

 

15년 전부터 오른 엥겔지수먹고살기 참 어렵다

지난 27일 일본 총무성이 지난해 가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언론들은 엥겔지수가 28.3%1981년 이후 43년 만에 최고치에 이른 것을 대서특필했다. 우리나라 언론도 이를 많이 소개했다. 일본인들이 먹고살기 어려워졌다고. 2023년부터 폭등한 일본 쌀값이 화제가 됐다.

 

엥겔지수는 가계의 소비지출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가난한 집, 가난한 나라일수록 높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면 지수는 낮아진다. 그런데 선진국 일본에서는 엥겔지수가 상승 반전한 지 꽤 오래됐다. 2인 이상 가계의 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와 외식비 지출액의 비율이 200523.7%에서 바닥을 친 뒤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벌써 20년 전 시작된 일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가계동향조사에서 2인 이상 도시가구(20172018년은 1인 이상 가구)의 엥겔지수를 계산해보니, 15년 전인 201026.4%를 바닥으로 상승하고 있다. 202028.5%로 올랐고, 지난해엔 28.8%로 올랐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202229.0%까지 뛰었다가 조금 낮아져 있지만, 상승 추세는 이어지고 있다. 일본보다 5년 늦게 엥겔지수의 상승 반전이 시작됐는데, 수치는 일본보다 높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엥겔지수 계산에서 식비는 식료품비(술 아닌 음료 포함)에 외식비를 포함해 계산했다. 밥을 사 먹는 일이 많아진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식재료를 사다 직접 조리하는 경우보다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일이 많아지면 지수가 상승할 수 있다. 근사한 외식을 많이 해도 상승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엥겔지수 상승을 식생활이 더 풍족해지는 흐름으로 보기는 어렵다. 소득 증가는 미진하고, 식료품·외식 가격은 대폭 오르면서 일어난 일이다. 한마디로 먹고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소비자물가는 2010년부터 2024년까지 14년간 15.6% 올랐다. 같은 기간 식료품 물가는 35.1%나 뛰고, 일반외식 물가도 27.9% 올랐다. 가계 소득 형편을 가늠할 수 있는 노동자 1인당 명목임금(5인 이상 사업체, 일반노동자 현금 급여)7.2%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일본에선 최근 몇년간 엔화가 약세를 보이며 수출기업들이 큰돈을 벌어 주가가 급등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선 수입물가 상승으로 소비자물가가 급등하고 실질임금이 지난해까지 3년째 하락했다. 여기에 쌀값 등 식재료비가 특히 크게 오른 것이 엥겔지수를 끌어올리고 있다. 최근 달러가 흔들리면서 엔화 가치가 반등하고 있지만 2022년 하반기 수준이고, 2020년 말에 견주면 35% 넘게 떨어져 있다. 통화가치는 그 나라의 경제력을 반영한다.

 

우리는 최악의 기록을 써가는 일본의 경제지표를 보며 위로를 삼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성장률의 하락 등 많은 지표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에 눈을 감는다. 엥겔지수조차 5년 간격을 두고 상승 반전 흐름을 따라갔다는 걸 확인하면 우울해지고 만다.

 

2010년을 기준으로 2024년까지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32.2% 올랐는데, 농축수산물 물가는 62.8% 뛰고, 외식비 물가도 49.4% 올랐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실질임금이 하락하거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사업체노동력조사를 보면, 20241인당 실질임금은 2021년에 견줘 0.73% 떨어져 있다.

 

먹고사는 데 드는 돈이 늘어나는 것은 살림이 빠듯하다는 이야기다. 다른 데 쓸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가계 소득 부진과 이로 인한 내수 침체의 악순환이 만성화돼가고 있다. 한국 경제는 그렇게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경제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한 윤석열 정부가 내란 대통령 파면으로 자멸하면서, 3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다시 치러진다. 이런저런 장밋빛 경제 공약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는 한가지에 가장 주목하고 싶다. ‘소비자이고 투자자이기 전에 노동자인 이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그들의 소득을 어떻게 늘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덜어줄 것인지 누가 진지하고 솔직한 답을 내놓는가?

 

고 김기원 교수가 한겨레 세상읽기코너에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란 제목의 칼럼을 쓴 게 20123월이었다. 그는 성장만능주의의 약발은 떨어졌다. 대신에 국민들은 이 3개의 키워드로 요약되는 어려움의 해소를 갈구한다고 썼다. 엥겔지수가 상승 반전하기 시작한 초기의 일이다. 그의 말이 여전히, 아니 더 유효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깨닫고 눈앞이 깜깜해진다.

정남구 | 경제산업부 선임기자 | 한겨레 2025.04.22.

 

몇살부터 노인인가요?

우리 엄마가 환갑이 넘으셨는데 이제 노인이셔” TV 드라마 속 딸의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진다. ‘예순이면 노인일까?’ ‘그럼, 환갑이 넘었으면 노인이지.’ ‘아니야, 요즘은 70대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그렇다면 도대체 몇살부터 노인일까?

 

몇해 전 방영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여든을 앞둔 주인공들이 웃고, 싸우고, 여행하고, 사랑한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열정적인 연기를 펼쳐 74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다. 밀라논나, 박막례, 김칠두 같은 시니어 인플루언서들은 자신만의 감성과 철학으로 삶을 멋지게 즐기며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밝고 활기찬 그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어둡고 힘없는 노인의 이미지를 기꺼이 거부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정말 실감 난다.

 

교수님, 몇살부터 노인인가요?” 수업이나 강연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65세부터 노인이라고 여겨왔다.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에서 정한 이 기준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65세를 노인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보통 이 나이가 은퇴 시기이자 각종 복지 혜택이 시작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약 83세로 늘어났고, 건강수명 즉 건강하게 살아가는 기간 역시 74세를 넘어섰다. 정년퇴직 후에도 20~30년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노인이라는 단어가 예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2024 서울서베이 도시정책지표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 시민이 생각하는 노인의 연령 기준은 평균 70.2세였다. 응답자의 절반은 노인의 나이를 70~74세 사이로 생각하고 있었고, 65세 이상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노인의 나이는 이보다 더 높아서 평균 72.3세였다. 실제 사람들의 인식은 법적으로 정해진 노인의 기준인 65세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많았다.

 

노인 연령 기준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도 노인의 연령 기준을 70세로 올리는 논의를 이미 시작했다. 이렇게 노인의 연령 기준을 올리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복지 재정 부담 때문이다. 우리는 초고령화와 초저출생으로 생산연령인구가 줄고 노년부양비가 증가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노인의 기준을 늦춤으로써 복지 지출을 조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연령 기준을 바꾸는 데는 현실적인 고민도 따른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다. 기초연금이나 돌봄 서비스는 많은 노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적 지원이다. 만약 노인의 연령 기준이 갑자기 높아진다면, 이미 어렵게 살아가는 노인들이 복지 혜택에서 밀려나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또한 노인 연령 기준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적 소외감이라는 심리적 문제가 만연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노인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노인의 기준이 필요하다. 연령 기준을 조정하기에 앞서 변화로 인한 파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특히 취약계층 노인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복지정책을 개선해야 한다. 노인을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존중받고 활기찬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 경향 2025.04.22.

 

악마의 정치

지난해 123일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령으로 촉발된 내란 사태는 7개월 만인 63일 대통령 선거로 일단 종결된다. 그러나 내란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라 결코 방심할 수 없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함께 들린다. 이미 각 당은 대선 후보 경선에 들어갔고, 이에 따른 선거 분위기도 점차 달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경선 후보는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고 있지만, 국민의힘 후보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국민의힘 경선 후보들은 모두가 이재명은 절대 안 된다면서 자신만이 그와 승부를 겨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선거전이 시작되면 이재명에 대한 단순한 정치적 비난의 도를 넘어 악마화하는 선동과 선전의 양상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 경쟁자를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악마로 묘사해 공격하는 정치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이와 관련해 나치 독일의 최고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그의 책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지만, 자신의 적을 오로지 악마화한다면 그는 정치적인 반대자가 아니라 이미 말살시켜야만 하는 비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된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반대자를 정당한 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절대 악으로 보는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의미의 적은 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적인 의미에서 적이며, 만약 이러한 적이 없다면 정치는 무미건조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 투쟁에서 흔히 있는 정치적인 반대자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묻지 않고 전과 4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현재 진행 중인 다섯 재판 때문에 이재명을 따라다니는 범죄자라는 꼬리표는 그에게 흉악범이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있다. 그에게 쏟아지는 많은 비난 중에는 우리가 이재명을 악마화한 것이 아니라, 악마가 이미 이재명 속으로 들어갔다면서 악마화를 정당화하는 소리도 들린다. 아마도 악마가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는 <누가복음> 한 구절을 원용하는 것 같다.

 

이재명과 그 주변에 악마의 딱지

정치적인 형상으로서 악마는 그저 은유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고 정치의 구조 전체를 겨냥하기 마련이다. 이재명이 결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확신은 개인을 단순히 악마화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이재명의 배경이 되는 모든 정치적 이념과 조직에도 종북 반국가 세력’ ‘반미 세력이나 종북 친중 세력이라는 악마의 딱지를 붙인다.

 

악마라는 개념은 히브리어의 사탄’, 이를 그리스어로 옮긴 디아볼로스에 뿌리를 둔다. 이 개념은 원래 신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검증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지녔고, 또 인격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이를 타락한 천사로서 신에 반항하고 사람을 죄와 타락으로 유인하고 신이 창조한 질서를 파괴하는 인격체처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악마의 이해 방식은 중세에 있었던 마녀사냥이나 이단자 화형이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처럼 절대 악의 인격체인 악마, 그리고 이와 싸우는 천사 사이의 적대적인 대립 관계가 아니라, 가령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서 우주적인 질서를 파악했다. 음은 결코 사악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은 지옥과 천당이나 악마와 천사의 관계가 아니라 밤과 낮, 겨울과 여름,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또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귀신·악귀·요괴와 같은 개념도 기독교적인 전통 속에서 이해하는, 인간을 타락의 세계로 유혹하고 파괴하는 절대 악으로서의 악마와 다르다. 굿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도 가능한 존재로서 여긴다.

 

기독교 악마의 개념과 비교적 가까운 마라(魔羅)라는 개념이 불교에 있다. 부처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는 것을 훼방하는 존재이자 중생을 감각적 쾌락과 죄악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존재다. 그러나 사탄처럼 인간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만(我慢)처럼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에서 보이는 악마 또는 이와 비슷한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나는 이런 차이에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대결의 전제이자 동시에 이의 결과물인 악마에 대한 생각이나 신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이와 관련해 먼저 기독교 근본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로지 선과 악 사이의 불가피한 투쟁의 현장으로 보는 미국발 근본주의가 한국에 상륙한 이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전도사들도, 또 세계 최대의 복음교회를 이끄는 목사들도 꾸준히 악마들을 지목해 왔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물론 동성애자, 성소수자, 여성주의자, 불교 신자, 무신론자 등 여러 이름을 가진 악마였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모든 정치 생활의 지침이라는 근본주의적인 확신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든 아스팔트 보수는 거리에 나서서, 파면된 윤석열이 핍박받고 있는 예수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종교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해보면 이의 본질은 간단하다. 한국전쟁의 경험과 이에 따른 강력한 반공주의, 개발독재를 통한 경제 성장이 낳은 사회적 갈등의 심화, 그리고 전통적인 믿음의 체계와의 경쟁은 한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어느 나라보다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었다고까지 자부하기도 한다.

 

악마를 척결한다는 ‘12·3 담화문

 

헌재 앞에서 국민의힘 기독인회가 주최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이미 승려직을 박탈당한 한 승려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구호와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반공주의가 그 외연을 이제 불교까지 확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임제(臨濟) 선사의 유명한 법문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라’(逢佛殺佛)를 빨갱이를 만나면 죽여도 된다는 식으로 제멋대로 읽었다.

 

이런 증오의 언어는 우리 역사에서는 결코 말로 끝나지 않았다. 남북 분단 이후,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고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는가.

 

여기서 나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1942~)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원래 신성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추방된 사람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범죄 때문에 공민권이 박탈당해 누구든지 이 인간을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고 제물로서도 바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했다.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배제된, 단지 생물학적 의미의 인간이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빨갱이는 이런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였다. 악마와 같은 존재이기에 죽여도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다는 유죄불벌’(有罪不罰)이 통하는 세상이었다. 문제는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수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주 제한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방증하는 엄청난 사태를 최근 경험했다.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문은 악마와 같은 존재를 국가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라, 예외적인 상태를 선언하고 이를 통해 척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발표를 보면서 차가운 영혼, 떠벌리는 자, 눈먼 자, 주정뱅이는 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두려움을 알지만 이를 제어하고, 파멸을 보지만 자존심을 지닌 자가 가슴에 남는다. 파멸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독수리의 발톱으로 이를 움켜쥐는 자는 용기를 지닌 자다라고 주장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악마를 위한 변명을 떠올렸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독선과 위선을 고발했던, 깨어난 시민은 오는 대선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 경향 2025.04.22

 

 

헌법에서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삭제해야 한다

12·3 내란 이후 내란세력에 대한 형사적 단죄 과정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황당한 일은 단연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전 대통령 석방입니다. 이에 버금가는 일로 검찰이 김성훈 경호처 차장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반려)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내란·마약·코로나·스토킹검찰의 끊임없는 영장 농단

김 차장은 내란범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물리력으로 막은 중차대한 혐의를 받는데다 누가 봐도 증거인멸 우려가 심각한데도 서울서부지검은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이런저런 핑계로 세차례나 기각했습니다. 경찰은 검찰의 이런 조처가 정당한지 묻는 영장심의를 서울고검에 신청했고, 외부인사로 구성된 영장심의위원회가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서부지검은 마지못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는 했지만 영장실질심사에 검사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김 차장 구속에 반대한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입니다.

 

최근 검찰은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의 내란 혐의 수사와 관련해서도 경찰이 대통령 안가 폐회로티브이(CCTV)와 비화폰 서버 등을 대상으로 신청한 압수수색영장을 세차례나 기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찰이 왜 이렇게 내란세력 수사에 제동을 걸었는지는 앞으로 진상이 철저히 규명돼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영장제도의 문제점을 짚어보겠습니다.

 

이번 내란 수사가 아니어도 검찰이 석연찮게 영장을 기각하는 일은 많습니다. 백해룡 경정이 폭로했던 마약조직-세관 유착 의혹사건이 한 사례입니다. 인천공항 세관 직원들이 마약조직과 짜고 대규모 필로폰 밀반입을 도왔다는 의혹을 수사하던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지난해 4월 두차례나 세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기각했습니다. 백 경정이 수사 외압 사실을 폭로하고 난 뒤 지난해 10월에야 압수수색이 이뤄졌습니다. 백 경정이 외압 당사자로 지목한 인물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으로 김건희씨와 엮여있는 이종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가 지난해 7월 공개된 통화녹취에서 승진시켜줄 대상으로 거론한 경찰 고위 간부입니다.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닙니다.

 

또다른 사례. 코로나19로 온나라에 비상이 걸렸던 2020년 대구에서 종교단체 신천지 관련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신천지 쪽이 교인 명단 누락 등으로 방역을 방해하고 있다는 고발이 잇따랐습니다.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지시했지만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은 거부했습니다. 그해 3월 경찰이 신천지 대구교회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두 차례나 기각했습니다. 윤 전 대통령이 무속인 건진법사의 조언을 받고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검찰은 5월이 돼서야 뒤늦게 신천지 시설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습니다.

 

2022년에는 스토킹·폭행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풀려난 남성이 이틀 만에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이미 신변보호 조처를 받고 있던 피해자를 찾아가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 체포됐고, 경찰은 구속 필요성이 높다고 보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기각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수사 대상이 검찰과 관련있는 인물이거나 검찰이 어떤 이유에서든 수사를 비틀고 싶은 사안에서 경찰의 영장 신청을 기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미는 경찰이 영장 청구, 일본은 검경 함께

영장을 둘러싼 검찰의 막무가내식 농단이 가능한 것은 현행법상 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에 청구할 권한이 검사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검사에게 영장을 신청하고 검사가 이를 법원에 다시 청구합니다. 경찰은 독자적으로 영장을 법원에 청구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도 그럴까요?

미국에서는 경찰이 치안판사 앞에 출두해 영장의 필요성에 관해 증언하면 치안판사가 이를 심사해 영장을 발부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경찰이 이메일이나 전화로 치안판사와 소통해 영장을 발부받는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에도 나옵니다. 영장 신청 과정에 검사가 관여하는 경우에도 경찰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는 데 그칩니다. 수사-기소 분리가 더욱 철저한 영국에서도 당연히 경찰이 직접 치안판사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압수수색·체포·구속 등 수사상 강제처분은 주요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예심판사의 권한에 속합니다. 검사가 사건을 수사하는 도중 강제처분이 필요해지면 사건 자체를 예심판사에게 넘겨야 합니다. 예심판사는 수색·체포영장 등을 직접 발부할 수 있으며, 구속영장은 별도의 석방구금판사(우리의 영장전담판사에 해당)가 심사해 발부합니다. 독일의 경우 검찰은 수사의 주재자로 규정돼 있지만 자체 수사인력을 갖지 않고 경찰 수사를 법률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독일 검찰은 ·발 없는 머리로 비유됩니다. 경찰은 강제처분이 필요할 때 검사를 통해 영장을 발부받습니다. 독일 검찰은 우리나라와 달리 경찰과 별개의 수사기관이 아닌 만큼 영장청구권을 악용해 경찰 수사를 방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체포영장은 검사와 경부(우리나라의 경감에 해당) 이상의 경찰관이 청구할 수 있습니다. 구속영장은 검사만 청구할 수 있습니다. 압수수색영장은 경찰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가운데)과 부하들. 한겨레 자료

 

검사의 영장청구 독점은 군사쿠데타 산물

이렇게 영장청구권자는 각 나라의 형사사법 구조, 특히 수사-기소 분리 정도와 검찰-경찰의 관계에 따라 다양합니다. 각국이 나름의 형사사법제도를 설계하고 발전시켜온 결과입니다. 검사만이 영장청구권을 갖는 건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입법을 통해 제도를 개선하기도 어렵습니다.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헌법에 못박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12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현행범인인 경우와 장기 3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이처럼 헌법에 영장청구권의 주체를 특정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와 그리스, 멕시코밖에 없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수사-기소권의 배분 등 형사사법 구조 전반에 대해선 아무런 규정도 없는데, 지엽적 사안인 영장청구권자만 덩그러니 등장합니다. 기형적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1948년 헌법이 제정됐을 때는 영장청구권자를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으로 통칭되고 있을 뿐입니다. 1954년 제정된 형사소송법에도 검사 또는 경찰이 판사의 구속영장을 받아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제정 헌법 제9조 체포, 구금, 압수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 단 범죄의 현행,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후에 영장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

 

영장청구권을 검사가 독점하도록 한 조항은 1962년 제5차 개정 헌법에 처음 등장합니다.

5차 개정 헌법 제10체포·구금·수색·압수에 있어 검찰관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 헌법은 박정희 군부세력이 19615·16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찬탈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정상적 국회가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부친 헌법입니다. 이에 앞서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규정한 뒤 이어진 개헌에서 헌법에까지 명시한 것입니다. 이후 이 조항은 박정희 군사독재 치하의 제6차 개헌(1969)과 제7차 개헌(1972년 유신헌법), 그리고 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의 제8차 개헌(1980)에서도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역대 최악의 헌법으로 평가받는 유신헌법에서는 검사의 신청검사의 요구로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검찰권의 위세에 더욱 힘을 실어준 표현입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인 현행 헌법(9차 개헌)마저 이 조항을 유지한 것은 당시 개헌 과정의 중대한 흠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관보다 검사가 중심? 영장주의 본질 훼손

5차 개헌 과정에서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도입한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독재체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검찰권 강화를 통한 일원적 형사사법 구조를 만들려 한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문이 듭니다. 이와 대비되는 선의의 해석도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5차 개정 헌법이 영장의 발부에 관해 검찰관의 신청이라는 요건을 규정한 취지는 검찰의 다른 수사기관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확립시켜 종래 빈번히 야기되었던 검사 아닌 다른 수사기관의 영장신청에 오는 인권유린의 폐해를 방지하고자 함에 있다”(96헌바 28)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제5차 개정 헌법은 형식적으로도 민주적 절차를 훼손한 채 만들어졌고 내용적으로도 인권보장을 크게 후퇴시킨 헌법입니다. 유독 검사의 영장청구권 조항만 인권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일까요.

 

만약 헌재의 해석이 맞다면 검찰은 인권보장이라는 영장제도의 목적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구속·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필요한 최소한도로 절제하는 인권옹호기관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먼지털기식 수사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나오는 데서 보듯 검찰이야말로 구속·압수수색을 악용하는 사례가 숱합니다. 심지어 검찰이 청구한 구속·압수수색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면 극렬하게 반발합니다. 구속영장 발부에 신중을 기하자는 취지로 1995년 구속영장실질심사 제도가 도입될 당시에도 검찰은 극구 반대했습니다. 근래 들어 압수수색영장을 심사할 때도 서류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법관이 수사기관 관계자나 제보자 등을 불러 의문스러운 사항을 직접 물어보는 대면심사 제도가 추진되고 있으나 검찰은 이 역시 반대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구속·압수수색에 대한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이런 검찰에게 인권보장을 위한 영장제도의 파수꾼 역할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영장제도의 핵심 주체는 누구보다 법관입니다. 무리한 영장 청구를 통제하는 것은 법관의 고유 권한입니다. 헌재는 앞에 인용한 결정문에서 영장제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형사절차에 있어서의 영장주의란 체포·구속·압수 등의 강제처분을 함에 있어서는 사법권 독립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되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원칙이고, 따라서 영장주의의 본질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처분을 함에 있어서는 중립적인 법관이 구체적 판단을 거쳐 발부한 영장에 의하여야만 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만국 공통의 원칙입니다. 외국 헌법들도 영장청구권자는 규정하지 않지만 영장주의는 반드시 규정하고 있습니다.

 

검찰에 영장청구권을 독점시키는 것은 오히려 이 영장주의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검찰이 일차적으로 무리한 영장 청구를 거른다는 미명 아래 법원의 영장심사 역할이 되레 느슨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법원을 향해 영장 자판기라는 비판이 나온 지도 오래됐습니다. 2015년부터 20206월까지 5년 반 동안 구속영장이 발부돼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난 사람이 905명에 이른다는 통계, 2022년 검찰이 법원에 청구한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이 98.4%(청구 361630, 발부 355811)에 이른다는 통계 등이 그 실상을 보여줍니다. 세간에는 구속·압수수색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가 법원이 아니라 검찰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전도된 영장주의입니다. 여기에는 법원이 불구속 수사 원칙, 강제수사 최소화 원칙 실현에 소홀했던 탓도 있지만,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독점하고 있는 탓도 크다고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악용해 경찰 수사를 방해하는 사례까지 심심찮게 벌어진다면, 더 이상 영장청구권의 검사 독점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둘러 폐지하는 게 맞습니다. 대신 법원의 영장심사 기능을 더욱 실질화해야 합니다.

 

헌법 제정권자국민의 뜻 다시 물어야

근본적 대안은 헌법에서 검사의 영장청구권 조항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영장주의는 헌법에 필수적인 조항이지만, 영장청구권자는 영장주의의 본질적인 사안이 아닙니다. 헌법에 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법은 영장청구권을 누구한테 귀속시킬지보다 더 중요한 수사-기소권 배분에 대해서조차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의 변화에 맞춰 바꿔나갈 수 있는 입법의 영역인 것입니다.

 

개헌 전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몇가지 대안도 제시됩니다. 구속·압수수색 관련 지침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경찰이 이를 준수해 영장을 신청했는지 여부만 최소한도로 검찰이 검토하게 하는 방안, 검찰이 경찰 수사를 방해하거나 특정인을 비호할 의도로 영장을 기각할 경우 그 부당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 공수처 검사나 특별검사처럼 검찰청 소속이 아니면서 검사 역할을 하는 이들을 다른 수사기관에도 두는 방안 등입니다(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각국 영장제도 비교분석에 따른 시사점 및 입법론적 대안’).

 

내란 사태 속에 검찰은 구속과 관련한 막강한 권한을 내란세력을 특별대우하는 데 오용했습니다. 군사 쿠데타의 산물이었던 헌법의 영장청구권 조항이 이번엔 내란세력 비호에 악용됐으니 역사의 유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로 인해 그동안 진지한 검토 없이 유지됐던 이 헌법 조항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웠으니 사필귀정이라고 해야겠지요. 이제 헌법 제정권자인 국민의 진정한 뜻을 다시 물어야 할 때입니다. 검찰은 영장청구권을 독점할 자격이 있느냐, 60년 전 군사독재에서 비롯된 이 조항을 그대로 놓아둘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박용현 논설위원

 

인공지능은 인류의 친구일까?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픽사베이

과학 기자와 작가 생활을 20년 넘게 해서 그런지 과학 신간을 보내주겠다며 주소를 묻는 메일이 가끔 온다. 최근 이렇게 받은, 인류와 인공지능(AI)의 관계를 다룬 4차 공생이라는 책을 보고 의아했다. 한 세대 전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쓴 복거일이 저자였기 때문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체역사 소설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작가가 그것도 수십년이 지나 노년에 최첨단 분야의 과학 교양서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찾아보니 복거일 작가는 1946년생으로 79살이다.

 

책은 인공지능의 역사를 깔끔하게 요약하면서(덕분에 단편적인 지식이 잘 정리됐다) 4차 공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참고로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제1차 공생은 두 원핵생물의 공생을 통한 진핵생물의 진화다. 2차 공생은 동물과 미생물의 공생으로 인간과 장내 미생물이 대표적인 예다. 3차 공생은 인류가 야생 동식물을 가축과 작물로 길들여 함께 사는 것으로 농업혁명을 낳았다.

 

저자는 인류가 이미 인공지능과 정보적 공생인 제4차 공생을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많은 영역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초지능을 갖게 되면 인간-인공지능 공생체에서 인간 지능이 부차적인 구실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40억년 유기체 진화의 유산인 본능이 있어 인공지능에게 정복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꽤 흥미로운 발상이다.

 

세계 인공지능 연구자 426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인공지능(AI)의 이익이 더 크다고 답한 비율은 54%였고 위험이 더 크다고 답한 비율은 9%에 불과했다.(왼쪽 맨 위와 위에서 셋째) 반면 대중(영국인)은 각각 14%28%로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오른쪽 맨 위와 위에서 셋째) 런던대 제공

 

지난 1일 영국 런던대 책임혁신센터는 세계 인공지능 연구자 4260명을 대상으로 인공지능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인공지능의 이익과 위험에 대한 질문에 이익이 더 크다고 답한 비율이 54%였고 동등하다가 33%이고 위험이 더 크다는 9%에 불과했다.

 

반면 일반 대중(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각각 14%, 43%, 28%였다. 즉 전문가들은 대중보다 인공지능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학습과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늘리고(75%) 업무가 수월해질 것(72%)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대중은 위의 두 항목에 기대하는 비율이 20% 안팎이었다.

 

물론 전문가들도 우려스러운 점을 묻는 말에는 가짜 뉴스 또는 정보를 식별하기 어렵고(77%) 동의 없이 개인 정보를 쓸 가능성(65%) 등을 언급했다. 이는 대중의 답변과 비슷한 비율이다. 전문가가 대중보다 인공지능을 훨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디지털 기기가 인지능력을 떨어뜨려 디지털 치매를 유발한다는 우려가 있지만 지난 14일 학술지 네이처 인간행동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50살 이상 중노년층 41만여명의 데이터가 있는 기존 연구 57건을 분석한 메타연구 결과는 달랐다.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를 많이 쓸수록 인지 저하 위험성이 크게 낮아지고 그 효과는 운동보다도 큰 것으로 드러났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아름다움은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다가서기를 기다린다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말이 떠오른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한겨레 2025.04.22.

 

광장을 계승할 대선 후보는 누구인가

데릭 벨 주니어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았던 최초의 흑인 교수였다. 공고한 차별을 그대로 드러내는 최초의 흑인같은 수식어가 달갑지 않았겠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대를 살았다. 자연히 그는 법학자로서 차별 철폐를 위한 법제 개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수많은 학문적·실천적 업적을 남겼다. 이후에 그는 하버드의 성차별적 정책에 반대하며 테뉴어를 받고도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평생을 흑인의 권리 증진과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힘썼지만, 당대의 유의미한 제도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꾸만 뒤집히는 판결과 정책을 놓고 깊이 고민하던 그는 결국 통렬한 비판을 담아 이해수렴의 딜레마라는 논문을 펴냈다. 흑인의 권리 신장은 언제 어떻게 이뤄지는가? 차별적 정책은 언제 어떻게 폐지되는가? 백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는 주장은 어떤 경우에 지지를 얻는가? 그는 흑인들의 권리 확장은 오직 흑인들의 요구가 백인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할 때만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이해수렴의 딜레마다.

 

때마침 기득권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소수자의 권리가 확보된다면 이것은 진보인가 아닌가? 구조적 차별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서도 소수자들이 그 구조 속에 성공적으로 편입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나마 나은 삶인가? 기득권이 부당한 특권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재분배가 이뤄진 것도 아닌데, 약소자들의 요구가 특권층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도 평등으로 가는 한 방편일까? 제도적 개선으로 삶이 조금 나아졌으니, 어쨌든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한걸음 가까워졌나? 하지만 그래서 영원히 지연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중에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전선 말이다. 구조적 변혁은 나중에하더라도, 일단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내용부터, 다시 말하면 기득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만한 내용부터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어서 정치인들을 향한 반복적인 배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선거철이면 청년 여성들의 진보적 투표 경향을 치켜세우지만, 공유하는 이해관계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여성 의제는 뒷전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외치다가도, 더 시급한 문제가 넘쳐난다며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말로는 포용사회를 논하지만 정부, 국회, 선거캠프는 온통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

 

광장의 주역들도 이번 선거에서 똑같은 딜레마를 마주하게 될 것인가? 광장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성, 퀴어, 노동자, 이주민, 장애인, 농민, 청소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냈던 그 변혁의 말들은 여전히 나중에의 대상인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자신의 정체성을, 성적 지향을, 장애를, 질환을, 또는 직업을 커밍아웃했을 때 정치인들은 과연 그 말들을 마음에 새겼을까. 그 누구도 편견과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한 연대의 모델을 이어가고자 다짐한 정치인은 있었을까.

 

광장은 정치의 선결조건이다. , 광장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저 현상유지를 위한 기득권의 권력투쟁일 뿐이다. 특권층과 이해관계가 수렴하는 바로 그 지점까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현상유지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광장이 원하는 것은 자명하다. 정권교체와 내란종식을 넘어 평등과 정의를 쟁취하고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장에는 소외되고 주변화된 몸들이 거침없이 거리로 나왔고 저마다의 이상을 무대에서 외쳤다. 이들은 기득권 가부장의 언어가 수명이 다했다는 점을 완전히 입증했고 우리는 이제 다른 세상을 원한다.

 

광장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무에게나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정체성과 국적 때문에 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비인간적 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 돌봄의 이름으로 싼값에 착취당하는 이들이 없는 사회, 가난하기 때문에 재해와 재난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는 나중에만들자고 말하는 사람이 광장의 지지를 얻을 자격이 있을까. 광장의 에너지가 폭발한 지금이 적기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란 말인가. 광장을 계승할 후보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 한겨레 2025.04.23.

 

제복 입은 시민이 나라를 구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인 2013418일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국정원 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다. 1017일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압수수색·체포 영장 청구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201310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서울고검에 대한 국정감사를 했다. 임정혁 서울고검장,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 여주지청장 등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윤석열 지청장은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심했다고 증언했다. 조영곤 지검장이 격노했다고 증언했다. 조영곤 지검장이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 야당이 이것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을 하겠느냐? 정 하려고 그러면 내가 사표 내면 해라. 그리고 우리 이 국정원 사건 수사의 순수성이 얼마나 의심받겠느냐?”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 검사장님 모시고 이 사건을 계속 끌고 나가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증언했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과 윤석열 지청장이 이런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저는 비법조인으로서 오늘 국정감사장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 우리 대한민국 검찰 조직을 믿고 우리 국민이 안심하고 사나 정말 걱정됩니다. 하다못해 세간의 조폭보다 더 못한 조직입니다. 여기 계시는 검사들 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무슨 꼴! 우선 윤석열 지청장 한번 일어서 보세요. 그 자리에서 일어서 보세요, 마이크 들고. 앞에 불러내기도 싫어요. 우리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까?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윤석열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윤석열 검사는 201612월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특검 수사팀장으로 발탁됐다. 그 탄력으로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 대통령까지 올랐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이준석을 쫓아냈다. 20233·8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기현 대표를 만들기 위해 나경원 후보를 주저앉혔다. 안철수 후보를 찍어 눌렀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김건희라는 역린을 건드리자 쫓아내려고 했다. 20247·23 전당대회에서는 한동훈 대표 당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12·3 비상계엄은 어쩌면 민주당이 아니라 한동훈 대표 때문에 결행한 것이리라.

지난 49일 대선 출마를 위해 찾아온 이철우 경북지사에게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면 사람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볼 것은 충성심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었거나 사기였다고 자백한 것이나 다름 없다.

 

421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윤석열 내란 사건 두 번째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수도경비사령부 1경비단장 조성현 대령은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군은 어떤 명령이든 이행하는 무지성 집단이 아니다. 군에 명령은 굉장히 중요하고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반드시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 명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가를 방위하는 육군으로 귀결돼야 한다. 그 지시가 그랬나?”

 

221일 국회 내란특위 4차 청문회에 나왔던 김형기 특수전사령부 1특전대대장. 국회 누리집 갈무리

 

특수전사령부 1특전대대장 김형기 중령은 이렇게 증언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2003년에 이등병으로 입대했습니다. 2004년도에 부사관으로 임관했고, 2006년에 장교가 됐습니다. 올해 나이가 43입니다. 23년 군 생활하면서 과거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직에 충성해왔고, 조직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누군가는 제게 항명이라고 합니다. 저희 조직은 상명하복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명이 맞습니다. 하지만 상급자의 명령에 하급자가 복종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는 고유한 임무를 부여했을 때에만 국한됩니다.

지난 23년 동안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124일 받은 임무를 제가 어떻게 수행하겠습니까? 차라리 저를 항명죄로 처벌해주십시오. 그럼 저희 부하들은 항명죄도 내란죄도 아닙니다. 부하들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그날 그 자리에서 부하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군이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게끔, 특히 제 뒤에 앉아계신 분들께서 필요하다면 날카롭게 질책과 비난을 통해 우리 군을 감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한마디도 버릴 내용이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제복을 입은 시민이 민주주의를 지켰다. 제복을 입은 시민이 나라를 구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성한용 ㅣ정치부 선임기자 | 한겨레 2025.04.23.

 

수능이라는 교육 포퓰리즘

대선 주자들이 또 수능을 부추기고 있다.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첫 공약이 1년에 수능을 두 번 치는 것이었고, 경선 1차에서 낙방한 나경원 후보도 수능 100% 전형을 연 2회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 내가 볼 때, 대선 공약으로 수능을 들고나오는 것은 전형적 포퓰리즘이다. 수능 때문에 교육이 왜곡되는 것은 눈여겨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공정성의 화신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수능이 교육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는 엄청나며, 수능을 폐기함으로써 얻는 교육 본질 수호의 이익은 수능 폐기에 따르는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 수능은 암기식 문제풀이 학습-정답주의 교육-무한경쟁의 연결고리를 가속하는 동시에 재수생과 반수생들을 양산한다. 또 학벌, 대학 서열화, 능력주의 신화 등을 만드는 주범이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의사나 법률가 엘리트 집단은 모두 수능 경쟁에서 그 서열의 꼭대기를 차지하며, 그 결과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능력지배주의(meritocracy)’로 정당화한다. 대학 서열과 학벌 역시 이런 개인 서열화가 집단화한 결과물이며, 그 정점에 스카이가 있다. 초중등학교 대부분 학생들은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며, 학교 교육과정은 수능 역량에 맞추어 교육 방식을 최적화시킨다.

 

당연하지만, 수능이 가정하는 역량들은 결코 한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학교 체계는 문자 발명과 함께 탄생했고, 문자를 기반으로 한 인지학습을 수행하는 데 최적화된 모형을 탑재하고 있다. 수능도 그런 전제를 공유하며, 또한 이 체계를 유지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인공지능이 문자 발명에 준하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 말은 학교의 미래적 변화를 촉구하는 말로 들린다.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먼저 사라질 직종이 의사와 법률가라는 예언은 어쩌면 학교의 미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서늘한 예측일지 모른다.

 

정치가 이끄는 교육 변화는 좌우 견해차를 떠나 그것이 가정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만큼의 근본적 변화를 통찰하는 가운데 제안되어야 한다. 단지 수능 몇번 더 보는 수준의 사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인공지능에 100조원 투자등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공약이 교육 영역에 대해서도 필요할 수 있다.

 

사실, 한국 교육의 근본적 문제 상황을 예견하는 주장들은 이미 다양하게 나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은 앞으로 인공지능과 공진화할 수 있는 인간지능의 새로운 역량모델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학교가 생산한 인간 역량은 주로 인간의 고립적 사고력에만 한정돼 있었다. 반면 미래 교육은 인간을 넘어 인간·인공지능 공동체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새롭게 구상하고, 궁극적으로 기존 교육과정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특히 디지털 교과서 정책이 이런 질문에 얼마나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과 함께 성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국가 및 그를 대행하는 교사가 교육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는 끝났다. 교육은 학습자의 생애와 직업을 위한 학습 나침반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 학습의 주요 흐름을 교과에서 학습자 경험으로 전환해야 하며, 학교 졸업 이후에도 생애 전반에서 학습이 계속될 수 있는 교육 장치들을 제도화해야 한다. 학습과 경험, 일과 학업이 결합된 평생학습이 교육체계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하며, 향후 끊임없이 요구될 재교육, 계속교육, 일터학습 등 새로운 기능을 어떻게 기존의 학교 교육체계 안으로 편입시킬 것인가의 문제 역시 실질적 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미래는 정답이 아닌 질문을 창조하는 능력을 요구하며, 이때 창의성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답이 주어지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 능력이다. 교육의 중심은 선다형 정답 찾기 모형을 과감히 버리고 문제와 상황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모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을 표준화하고 서열화하는 평가 방식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를 감당하기에 현재 학교 체제는 부적합하기 그지없다. 정치는 교육체계의 변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향후 이번 대선 주자들은 지금까지의 초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의 방식들이 차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깊이 따져봐야 한다. 특히 교실과 수업 중심으로 편재된 고립된 학교 교육 활동체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숙고가 필요하다. ·학습 병행은 새로운 미래표준이 될 수 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 경향 2025.04.23.

 

대입 제도, 정말 그 정책이 최선입니까

또 시작됐다.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여야 가릴 것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교육 정책에 저마다 말을 보탠다. 특히 대입과 수능 관련 공약은 선거 단골손님이다. 예기치 않은 대선을 앞두고도 예외 없이 백가쟁명이 벌어진다. 대선 레이스가 본궤도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대입 공약이 보도된다. 정시모집 중심 입시 체계, 2회 수능을 치른 후 대입에 최고 성적 반영, EBS 강좌 80% 이상 반영 등 내용도 다양하다. 공약을 발표하지 않은 분도 있으니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교육학자들이 각 대권 주자 캠프에 들어가 정책 제안을 쏟아내는 시기가 되면 교육 공약은 더 늘어날 것이다.

 

현재 거론되는 정책의 면면을 보면 난감한 부분이 꽤 있다. 수십년을 이른바 입시판에서 지낸 필자가 보기에, 교육 현장에 적용하기 어렵거나 오히려 지금보다 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요소가 있는 탓이다. 헤집어 놓을수록 학부모와 학생 부담만 느는 것이 대입 제도다. 대선 주자들이 이를 깊이 알고 대입을 언급하는지 의문이다.

 

 

대선 주자들이 대입 공약을 꺼내 들지 않아도 이미 교육 현장은 넘치는 개혁안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 전문가발 또는 당국발 대입 제도 정책안이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에는 한국은행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공동으로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에 비례해 대학 신입생을 선발하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폈다. 또 올해 초엔 경기도교육청이 미래 대학 입시 개혁방안을 발표했다. 2026학년도 중1부터 고교 내신 절대평가,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 대상인 2032학년도 수능부터 전 영역 5단계 절대평가와 논·서술형 평가 도입, 인공지능(AI) 기반 채점 시스템 도입, 영어 듣기평가 폐지, 수능 자격시험화, 수시와 정시 통합전형 운영, 수능 100% 전형 축소 등이 제안 내용에 포함됐다.

 

이달 중순에는 서울대 교수회가 대한민국 교육개혁 제안을 공개했다. 이 제안도 꽤 과감하다. 지방 거점 국립대와 서울대의 공동학위제 운영, 3~4회 수능 시행, 중고교 6년제 통합, 학과 경계가 없는 무전공 선발 확대, 각 대학 자율로 모집단위와 교육체계 설계 등 내용이 담겼다. 5월에는 국가교육위원회의 ‘2027~2036 국가 중장기 교육발전계획발표가 예정돼 있다. 물론 조기 대선 정국에서 원래 일정대로 발표될지는 미지수다. 이미 내신 외부 평가제, 수능 서·논술형 문항 도입, 진로형 수능체제 도입 등 논의 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은 대선 주자 공약은커녕 이와 같은 전문가와 당국발 정책에 귀 기울일 힘도 없다. 이들은 이미 예고한 정책 또는 시행되고 있는 입시 제도를 따라가기도 버겁다. 공통 수능, 고교학점제, 전공 자율선택제 등이 예고된 ‘2028 대입 개편안도 교육당국이 안고 있는 큰 과제다. 그것뿐인가. 2027학년도 의대 모집 정원 문제도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여기에 교육과정의 변화, 입시 공정성, 사교육비 경감 문제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새 내용의 발표보다 기존에 예고한 제도의 내실 있는 운영과 보완이 더 절실하다.

 

누구나 현 대입 정책 문제의 본질이 대학 서열화란 걸 잘 안다. 그 어떤 정책도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대입 현장에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대학 서열화 타파는 말이 쉽지, 사회 구조와 인식이 통째로 바뀌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목을 끌고자 툭 던질 공약이 아니다.

 

아무리 준비 기간이 짧아도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한, 통찰력 있는 교육 공약이 나와야 한다. 나열식, 짜깁기식 정책 공약 속에 이득을 보는 건 모든 정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하는 사교육 업계일 뿐이다. 요즘 입시 전문가들의 속마음을 반어적으로 과장하면 이렇다. “옳지, 입시 제도를 더 복잡하게 바꾸어다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 | 경향 2025.04.23.

 

이 괴물 엘리트들을 어찌해야 할까

너무나 이상한 일을 많이 하는데, 자기들끼리 싸여 있다 보니 자신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판단을 못하는 것 같아요.” “몇달 동안 그자들의 민낯이 얼마나 초라한지 분명히 알게 됐죠

 

지난 주말 경향신문 유튜브 채널 경향티비를 보다가 고개를 몇번이나 크게 끄덕였다. 주제는 시험권력고시 엘리트들의 종말. 내란 사태가 드러낸 엘리트 관료, 정치인들의 민낯을 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짚어줘서였다.

 

3년도 안 되는 기간, 윤석열 정부의 어이없는 실책 릴레이와 비현실적인 친위 쿠데타, 그로 인한 자멸로 치러지는 조기 대선이 40일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트라는 관점도 주목해야 할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엘리트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한 우익 언론은 칼럼을 통해 엘리트 리더의 등장을 콕 집어 찬양했다. “윤석열의 등장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정 환경과 전문 교육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들이 리더로 부상(浮上)한 일이다. (중략) 윤 대통령은 대학교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70년 건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서울대를 제대로 나온 대통령이 됐다. (중략) 이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자상()을 정상화하는 의미가 있다.”

 

지금 보면 실소가 나온다. 3년간 윤석열과 그 주변 엘리트들이 곳곳에 얼마나 끔찍한 진창들을 만들어놨는지, 그 그림자들이 얼마나 길게 드리워 있는지 우리는 모두 목도했다. 각종 외교 참사와 공천개입 의혹, 끝을 알 수 없는 의료대란과 R&D 예산 삭감, 수없는 입틀막’, 소위 이채양명주라는 권력형 시리즈 비리 사태, 급기야 내란·탄핵 사태까지. 대통령의 한마디에 소신 없이 맞장구친 엘리트 관료들의 합작품이다.

 

이런 엘리트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사회 교육 현실에 쓴소리를 해온 김누리 중앙대 교수(<경쟁교육은 야만이다> 저자)는 최근 언론에서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는 대다수가 또 다른 윤석열’”이라며 근원으로 거슬러가면, 윤석열을 키운 것은 극단적인 능력주의 경쟁교육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교실이 괴물 윤석열을 잉태한 모태라고 질타했다. 이에 동의한다.

 

최근의 기사들을 보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더 놀아도 부족할 나이에 7, 4세 고시라는 말이 나온다. 영유아, 초등학생 대상 유명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일찍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해 명문대에 입학하고 또 다른 윤석열, 또는 윤석열 주변의 지배 엘리트들로 커주길 기대해서다.

 

극단적인 조기 경쟁교육은 세상에 이런 일이식으로 외신의 주목을 받았고, 교육시민단체에선 이를 아동학대로 규정해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학대외의 이름이 없다. 걷기와 동시에 경쟁을 내면화하는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자명하지 않은가. 끔찍하다.

 

2022년의 칼럼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비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최고에 이르는 것을 두고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한다. 과거에는 통했다. 이제는 아니다. 이제 용은 개천을 뚫고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에 따라 교육받아야 한다. 자기만 잘나고 똑똑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주변이 모두 똑똑한 환경에서 같이 자라야 부정(不正)을 배격하고 공정을 배운다. 이제 대한민국도 그런 시스템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소위 집안, 학벌 좋은 엘리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자는 얘기다. 내란 사태의 와중에도 각종 꼼수가 등장하고, 반성의 말 한마디 없이 다른 엘리트를 추대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권력의 편에서 영향력을 계속 누리겠다는, 왕당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은 저서 <부패의 증후군>에서 국가 부패 유형을 4가지로 나누며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의 대표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 각계 고위층 인사들이 밀접하게 연결돼 이익을 독점하는 형태의 합법적 부패를 가리킨다. 현재의 내란 사태는 한국 사회의 부패 증후군이 곪아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뜻밖의 소득이 있다면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권력 엘리트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은 다신 괴물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줘선 안 된다는 것, 괴물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시스템과 교육을 바꾸고자 하는 다짐에서 치러져야 한다. 부패가 곪아 터진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일신의 안전과 사리사욕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용감하게 증언한 김형기 특수전사령부 제1특전대대장,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 등에게서 희망을 본다. 경쟁 대신 공동체,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새로운 엘리트들의 부상을 꿈꾼다.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논설위원 | 경향 2025.04.23.

 

민주주의 퇴행 단죄할 주권자의 종이 짱돌

대의제 민주정은 선거로 뽑은 대표에게 국정운영을 맡기는 체제다. 현대 민주정의 시작은 선거다. 정치사상가 존 로크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정치사회를 시작하고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다수파를 만들 수 있는 숫자의 자유인들이 연합하고, 그러한 사회에 스스로를 편입시키기로 동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것만이 세상의 모든 합법적 정부의 시작이고, 기원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연합·동의의 제도가 바로 선거다.

 

선거가 없다면 그가 누구라도,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라고 하더라도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선거는 주권자의 뜻이 집합적으로 표출되는 기제이고, 선거 결과는 주권자인 인민의 거역할 수 없는 평결을 뜻한다. 선거, 그중에서도 주권자인 국민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눈앞에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에서 헌법재판소는 총선을 국회 해산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기회로 규정했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우려하여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치러짐에 따라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중에 국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 국회 해산과 마찬가지 효과를 거둘 기회를 갖는 경우가 있다. 피청구인의 경우도 자신의 취임으로부터 약 2년 후에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그와 같은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윤석열 전 대통령은 그 기회를 차버렸다. “야당의 전횡을 바로 잡고 피청구인이 국정을 주도하여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할 2을 허비했다. 여소야대의 국회를 무시하고, 야당을 적대하고, 국민을 겁박했다. 윤 전 대통령은 그로 인해 초래된 22대 총선 패배에 승복하지도 않았다. 체면치레로 야당 대표를 한번 만나는 것에 그쳤을 뿐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국민이 투표를 통해 내린 주권적 심판을 거부한 셈이다.

 

총선 후 윤 전 대통령 앞에는 두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른바 협치의 길이다. 주권자가 야당의 손을 들어줬으니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나라를 함께 운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여소야대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행정부가 이렇게 한다. 다른 하나는, 독재의 길이다. 그냥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이걸 택했다. 그러나 다수 야당의 협조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에 극단적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윤 전 대통령은 독재적 돌파구, 비상계엄이란 친위 쿠데타로 국민이 선거로 구성한 헌정 거버넌스를 뒤집으려 시도했다. 헌재도 특별히 이에 주목했다. “야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한 제22대 국회와의 대립 상황을 병력을 동원하여 타개하기 위하여 이 사건 계엄을 선포하였다.” 쉽게 말해 계엄은 국민 계몽령이 아니라 국회 해산령이었다는 얘기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대의제 민주정의 변함 없는 원칙을 네가지로 정리했다.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선거를 통해 통치할 사람을 임명한다. 통치하는 사람의 정책 결정은 유권자들의 요구로부터 일정 정도 독립성을 갖는다. 피통치자들은 통치자들의 통제에 종속되지 않고, 그들의 의사와 정치적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다. 공공 결정은 토론을 거친다.”(곽준혁 옮김, ‘선거는 민주적인가’)

 

윤 전 대통령은 네가지 원칙을 다 저버렸다. 자신도 선거를 통해 그 자리에 임명되었음에도 역시 선거를 통해 임명된 다른 사람들을 배제했다. 선출된 공직자가 가진 독립성을 거의 절대적 권한으로 간주해 절대왕정의 계몽군주로 군림했다. 피통치자, 즉 국민들의 천부적 권리인 표현·결사의 자유를 침해했다. 공적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전횡했다. ‘대통령 윤석열은 민주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유사 왕정을 꿈꾼, 선출된 독재자였다!’

 

6·3 대선은 단순히 정권 교체와 연장의 싸움이 아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의 다툼도 아니다. 민주정을 굳건히 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다시 도약하느냐 추락하느냐를 결정하는 분수령이다.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를 넘어 정초선거(foundation election). 사전에 따르면, 중대선거는 유권자 재편성이 일어나고 정당에 대한 지지 기반에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소수당이 다수당이 되는 등 정당을 지지하는 계층과 지역에 변화가 발생하는 선거다. 정초선거는 한 사회의 정치 지형을 확정 짓는 선거로, 단순히 일회적 의미를 갖는 선거가 아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고 사회의 틀을 잡는 중대한 선거다. 이번 대선은 대한의 명운을 결정하는 국가적 모멘트, ‘민국의 미래가 달린 역사적 티핑 포인트다.

 

12·3 내란사태는 긴 과정에서 벌어진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그 하나의 계기를 우리는 시민의 저항과 국회·헌재의 결정으로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그러나 긴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보수세력이 민주적 가치보다 권력 장악·유지를 더 중시하면서 극우화에 빠져들고, 정서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등 민주주의의 퇴행 과정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 이후, 심지어 헌재의 파면 결정 이후에도 윤석열 늪에서 허우적대는 국민의힘, 그 모습을 보면 계엄이 일회적 일탈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의 온갖 실정과 구태, 패악질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시종일관 추종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뭉개도, 영부인이 대놓고 선물을 받아도, 해병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을 묵살해도, 연구개발 예산을 싹둑 잘라내도,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을 옥죄어도 그들은 오로지 윤석열 편들기와 김건희 감싸기에 올인했다. 이처럼 민주적 퇴행은 주류 정당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힘은 대통령, 검찰과 더불어 퇴행 과정을 이끈 트라이앵글의 한 축이다. 과하게 보면 공범이요, 적어도 종범인 건 분명하다.

 

투표권은 최고의 시정 권력이다. 6·3 대선을 민주 인프라를 재건하고, 정치 구도를 일신하는 정초선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극우를 수용·동조·조장하는 정치세력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우리는 주저 없이 단죄의 종이 짱돌’(paper stone)을 던져, 윤 전 대통령 등 극우 카르텔이 윤 어게인을 외치며 세를 모으고, 국민의힘이 탈윤은 고사하고 내란 몰이 탄핵내러티브를 고수하는 지금의 상황을 투표로 시정해야 한다. 단호히 응징함으로써 그들이 다시는 민주의 가치보다 당파적 이익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방심이나 온정은 사치이자 해악이다.

 

대의제 민주정은 정당을 축으로 작동한다. 정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거나 심판당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선거 성패의 압력은 당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국민의힘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인 이상 다수표를 얻지 못하는 노선과 행태에 오랫동안 빠져있을 순 없다. 이번 선거에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이 변화, 다시 보수로 복귀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개혁적 보수로 거듭하는 커다란 자극이 될 것이다. 때론 패배가 약이다. 국민의힘이 거듭나기 위해선, 보수의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대선 참패가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우리는 매정해져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산다.

 

87년 체제의 극복이 개헌을 통해서만 가능한 건 아니다. 개헌은 하나의 방법일 뿐, 선거와 정치를 통해 창조적으로 해낼 수도 있다. 책임을 묻는 심판 선거를 통해 헌법을 지키고, 불공정 해소와 불평등 완화 등 유능한 통합정치를 통해 강한 민주정을 구현함으로써 87년 체제의 한계를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다. 이 유능한 통합정치, 다음 정부가 주도해서 풀어야 할 모두의 숙제다.

이철희 |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 | 한겨레 2025.04.24.

 

윤석열 정권의 역사, 후대를 위해 새기는 마음

윤석열 전 대통령은 내란 형사 재판정에서 대통령은 어느 장관이나 국민보다 수백배 수천배 외교·안보 국정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는 탄핵심판정에서도 대통령의 자리에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벼랑 끝으로 가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이 보였다고 진술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이용해 판단했고 그에 따른 정책 수행을 해왔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로서 신뢰받을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집권 내내 주목받은 것은 편향적인 사고와 형편없는 사리 분별력이었다. 그는 이태원 참사를 두고 기획 운운한 것에서 보듯 입맛에 맞는 정보들만 찾았을 것이다. 평소 측근들에게 극우 유튜브 보기를 권유한 것에서도 그의 뒤틀린 인식체계를 짐작할 수 있다. 느닷없는 연구개발(R&D) 예산의 대폭 삭감, 취학 연령의 5살 하향 문제, 의료개혁을 둘러싼 난맥상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미친 사람 널뛰듯 섣부른 정책을 잇달아 터트렸다. 그렇게 그의 집권 2년 반 동안 정치는 엉망이었다. 잼버리 대회에 참가한 전세계 청소년들의 꿈을 짓밟고 위험에 빠트려 국제적인 망신을 했고, 부산 엑스포 유치 외교에선 사우디아라비아에 119표 대 29표로 밀린 득표 결과에서 보듯 외교력도 정보력도 분석력도 맹탕이었다. 그에게서 한 나라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판단력이나 통찰력을 찾을 수 없었다.

 

윤석열의 의식은 제정일치 시대 샤머니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 왕() 자 부적에 의탁해 대통령 선거에 나섰고, 무속과 풍수에 따라 집무실과 관저를 용산과 한남동으로 이전하는 주술로 임기 첫날 업무를 시작했다는 의혹을 샀다. 그는 신내림 받은 것처럼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들을 봤다고 하면서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고 무당의 신탁 같은 억설을 주장했다. 그 망상은 계엄령 선포와 군대를 투입한 내란으로 이어졌다. 한 무속인은 김건희 여사가 공적 문제 처리나 결정을 위해 조언을 구하는 명리학자와 무속인이 본인 외에도 풍수, 관상, 사주, 미래 예측 등 분야별로 7~8명 더 있다고 한겨레 취재에서 증언했다. 무속과 주술에 의탁해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무지몽매가 참으로 가증스럽다.

 

윤석열은 난처한 상황에 놓이면 거짓말로 호도하거나 남 탓으로 돌리고 궤변으로 변명했다. 취임 넉달 뒤 미국 순방 중에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막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는 논란을 뒷수습하면서 보인 행태는 추악함을 넘어 범죄 행위에 가까웠다. 같은 수법으로 12·3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회피하기 위해 철면피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거짓은 그뿐만이 아니다. 한겨레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의 가짜 출근 행렬로 의심되는 차량 행렬을 세차례나 포착했는데, 이는 늦은 출근을 감추려고 위장한 행렬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직은 무단으로 지각해도 될 만큼 한가한 직책인가. 그런데 왜 굳이 위장 행렬로 출근하는 척 국민을 속여야 했는가. 윤석열보다 앞서 탄핵당한 박근혜가 세월호 침몰 참사라는 위기 상황에 7시간이나 국정 공백을 초래했던 것과 같은 모양새다.

 

그런 무책임한 윤석열이 공들여 변호하고 감싸면서 지키려고 애쓴 한가지는 국가가 아닌 그의 부인 김건희 여사였다. 김 여사의 대선 이전 행적은 접어두더라도, 순방외교에서 범한 의전상 결례와 명품점을 찾아 쇼핑에 나선 염치없는 행위는 나라의 위상을 1960~70년대 저개발국 수준으로 추락시켰다. 김 여사는 계속해서 마치 자신이 통치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위세를 떨었다. 중요한 인사에 관여한다는 시중의 공론들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윤석열 부부와 긴밀히 거래했던 명태균씨가 그들을 앉은뱅이 주술사와 장님 무사 관계라고 묘사했을까. 하지만 윤석열은 명품 쇼핑에 호객행위 핑계를 대고, 금품 수수 문제를 박절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인정 탓으로 둘러대는 등 번번이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으로 김 여사의 탈법과 허영과 위선 행각을 감쌌다.

 

국정에서 측근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역대로 중국과 조선 위정자들이 깊이 유념해온 원칙이다. 조선왕조 국정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그의 삼봉집에, 중국 고대 역사를 간추린 통감절요(通鑑節要)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측근에게 있으면 혼란해지고, 궁궐 비빈에게 있으면 망한다라는 경구를 옮겨 실어 국정의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윤 정권에서 고교 동문과 검찰 측근들의 농단은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고, 김 여사의 비빈 정치는 국정을 망친 것이다.

 

부끄러움 없고 반성할 줄 모르는 윤석열은 앞으로 감옥에 갇힐 일밖에 남지 않은 막다른 상황을 탈출하고자 열심히 거리의 광신도와 극우 인사들을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넉달에 걸친 탄핵 운동에서 민주 시민들은 초조와 불안에 휩싸이는 고통을 겪기는 했어도,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튼튼하고 건강한 민주 토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우리 사회는 아스팔트 우익들의 준동을 지혜롭게 극복해낸 것이다. 친일파에서 뉴라이트와 교회 광신도로 이어진 극우 인사들이 얄팍한 잇속을 쫓아 역사의 수레에 맞서는 광기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안으로 충돌과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다. 그 역량으로 이번 내란에서 제주 4·3과 광주 5·18 학살 같은 마녀사냥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선진문명국이다.

 

역사는 어느 한순간도 쉬어갈 수 없다. 나라를 경영할 지도력도, 아무런 국정 철학도,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 역사적 안목도 확인되지 않은 윤석열 패거리에게 운명을 맡긴 과오에서 이 시대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윤석열 정권이 허비하고 그르친 역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나는 2년 전, 이 지면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첫번째 칼럼의 제목을 윤석열 정권도 역사가 된다라고 붙였다.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책임감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선 창피스럽고 망가진 전대미문의 역사를 목도했다. 그래도 후대를 위해 이를 새길 수밖에 없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 한겨레 2025.04.24.

 

기와집 꽉 끌어안고 반이재명 빅텐트라니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자폭으로 그라운드 제로에 선 국민의힘이 6·3 조기 대선에서 그래도 이겨보겠다며 도모하는 구상은, 역시나 반이재명 빅텐트. 경선을 통해 당 대선 후보를 뽑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단일화한 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와 민주당 출신 인사들까지 끌어안아 이재명 당선을 저지하는 대연합 전선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김문수, 안철수, 한동훈, 홍준표 등 2차 경선에 오른 네 후보 모두 반명 빅텐트에 한목소리다. 그 첫 단계인 한덕수 대행과의 단일화에 선을 그어온 한·홍 후보도 기존 태도를 버리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 대행으로선 출마 문턱이 낮아진 셈이다.

 

빅텐트는 선거 승리를 위해 이념·정책 등의 차이는 미뤄두고 유력한 공동의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하나로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1997년 디제이피(DJP) 연합,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2022년 윤석열-안철수 단일화가 유사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빅텐트는 그러나 이들 전례에서도 보듯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세력 간 철학과 인적 구성, 지지 기반의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장 40일 뒤 치러지는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써볼 유일한 전략이 반명 빅텐트뿐이라는 점은 현실적으로 이해는 된다. 그러나 이 구상은 성공할 수 없다.

 

첫째, 태생적 명분 부족이다. 이번 대선은 윤석열이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일으켜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결정을 받음에 따라 치러지는 대통령 궐위 선거다. 내란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아무 일 없던 듯이 다시 정권을 잡겠다며 대선 판을 흔들어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짓이다. 반명 빅텐트는 이 근원적 명분 부족을 은폐하려는 가림막이자, 내란 책임을 회피하려는 우산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한덕수 대행과 국민의힘이 손잡고 대선에 참여한다는 것은 국민 모독이다. 내란 세력의 기득권 연장 시도이기 때문이다. 한 대행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 2인자다. 그는 탄핵심판 국면에서 헌법재판소 9인 체제 완성을 방해하다가, 윤석열이 파면되자 자신의 말까지 뒤집어가며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 2명을 지명해 내란 알박기를 시도한 인물이다. 공정한 대선 관리 등 국정 공백을 책임져야 할 권한대행이 직을 던지고 선수로 뛰어드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무책임이다.

 

셋째, 이번 대선의 성격은 명확하다. 국민들이 정권 교체이재명 저지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는 여론조사 결과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윤석열 계엄이 국민 삶과 국가 경제·안보에 입힌 막대한 피해와 스트레스를 이재명 혐오라는 협소한 깃발 하나만으로 덮을 수는 없다.

 

넷째, 빅텐트를 치려면 계엄·탄핵에 대한 국민의힘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기득권 포기가 선행돼야 하는데, 그게 없다. 결정적 맹점이다. 빅텐트가 성사되려면, 덩치 큰 쪽에서 지분을 내려놓고 벌판으로 나와야 한다. 더구나 국민의힘은 여당 역할을 제대로 못 해 조기 대선을 초래한 원죄 정당이다. 윤석열의 국정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고, 내란을 옹호하고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 당의 대선 후보 경선은 처절한 사과·반성과 보수 재건 논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전환의 계기가 됐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여전히 탄핵의 강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국민들은 내일을 바라보는데 국민의힘은 아직도 찬탄·반탄 논란 중이다. 이런 상태로 국민의힘이 말하고 있는 빅텐트는 무엇인가. 국민의힘의 관심은 대선 승리보다는 당 주도권이라고 당 사람들은 말한다. 대선 뒤 이어질 당 지도부 재편과 지방선거(2026) 공천 등을 염두에 둔 내부 전초전이라는 것이다. 당 주류였던 친윤계로서는 본선에서 이재명을 막아내는 것보다, 경선에서 탄핵 찬성파인 한동훈을 주저앉히는 게 급선무다. 한덕수 차출론이나 반명 빅텐트 주장이 친윤계에서 적극 쏟아져 나오는 게 그런 맥락에서다. 비윤계는 그들대로 주류 교체를 꿈꾸고 있다. 국민의힘은 여당 지위는 놓쳤어도 108석 원내 2당이라는 거대한 기와집이다. 그 기와집을 허물기는커녕 꽉 끌어안은 채 이재명 싫은 사람 다 들어오라고 외치는 게 지금 국민의힘이다. 내란 옹호, 탄핵 반대 세력은 빅텐트의 주역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변화·쇄신은 없이 그저 반명깃발 아래 모이자는 주장은 빅텐트가 아니라, 기득권 유지용 처마 확장에 불과하다.

황준범 | 논설위원 | 한겨레 2025.04.24.

 

윤여정에게 배우는 극우 자식육아법

최근 유명인들의 자식 이야기가 떠들썩한 화제가 됐다. 공부를 잘해서 학비 비싼 외국 대학에 들어갔다(으응?)괜히 클릭했네류의 기사가 아닌 논쟁적인 주제라 눈길을 끌었다.

 

먼저 배우 윤여정씨가 할리우드 신작 영화 인터뷰에서 큰아들이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했고 미국에서 결혼식을 해줬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 게이 손자의 가짜 결혼 이야기를 다룬 결혼 피로연에 출연하면서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감독과 공유했고 그 소통이 영화에 반영됐음을 밝혔다. 윤여정은 자식의 결혼과 관련해 몇년 전 한 방송에서 본인의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내 맘에 드는 사람과 자식이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을 허망한 꿈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식의 배우자는) 대체로 맘에 안 든다. 싫으면 안 보면 된다. 둘이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거 아니냐. (며느리) 꼴 보기 싫다면서 왜 자주 연락해서 김치 가져가라고 하느냐, 아들이 김치랑 결혼했냐고 일갈했다.

 

눈길이 모였던 다른 자식은 대형 언론사 대표와 고위 공직자 출신 부모를 둔 대학생으로 대통령 관저에서 쫓겨난 윤석열과 눈물의 포옹을 했던 이다. 부모는 진보인데 아들은 청년 극우의 상징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 아들은 한 극우 매체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평등을 말씀하시지만 본인의 자녀들은 어떻게든 엘리트화하려고 했다. 그는 윤석열과 껴안을 때 대한민국 부모가 선망하는 스카이 대학의 로고가 빛나는 점퍼를 입고 있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진보 부모와 극우 아들의 갈등은 이제 대한민국 가족생활의 클리셰가 됐다고 할 만큼 흔한 이야기가 됐다. 이미상이나 예소연 등 30~40대 작가들은 이른바 86세대 부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소설로 써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주제는 유감스럽게도극우 청년의 인터뷰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자식은 엘리트로 만들려는 위선에 더해 진보에는 자식을 열받게 만드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다. 극우, 보수의 주장을 멍청이들의 것으로 몰아가는 오만이다.

 

지난해 사춘기가 시작되며 한녀가 어쩌고, ‘페미가 어쩌고 말하기 시작한 아이를 향해 엄마는 페미니스트야라고 선언하며 아이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지적하곤 했다. 그리하여 아이가 승복하고 비하 발언을 멈추었다, 라는 전개라면 대한민국 가정에 평화만 넘쳐나겠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아이는 엄마 들으란 듯이 더 거친 언어를 쓰기 시작했고 우리 집은 성냥불 한번 그으면 터지는 화약고로 바뀌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집은 가자 전쟁의 불안정한 휴전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평화가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사회의 모순을 뜯어고치기 위해 이 한 몸 바친다는 86세대가 아니라 내가 제일 소중한 엑스세대였던 것. 엘리트도 좋고 정치적 올바름도 좋지만 아이를 극우의 수렁에서 건져내고 엘리트의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 내 소중한 시간과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아이의 질풍노도에 조금 무심해지자 아이 입에서 나오던 극단적 표현들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굳이 성장단계를 언급하지 않아도 자식은 부모를 거스르면서 성장한다. 보수적인 부모세대가 아니었다면 86세대의 정체성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기 때문에 독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정작 독립을 못 하는 건 자식보다 배운 게 많고 가진 게 많은 부모 세대가 아닌가 싶다. 사교육이라는 엘리트 지름길을 개척한 부모들은 학업뿐 아니라 가치관에서도 엉뚱한 길을 선택해 이곳저곳 헤매는 자식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하는 꼴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서둘러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해 끌어오려고 하지만 이제 자식은 덩치가 자기보다 더 크니 싸움은 커지고 밥상이 엎어진다. 식구로서의 울타리가 박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자식들이 보수화되면 그 자식의 자식들은 또 부모와 멱살잡이하면서 반대의 길을 가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극우 보수집회에 나가는 자식에 대한 분노도 가라앉고 그러다 보면 부서진 상다리를 반창고로 붙여 함께 밥도 먹게 되고 또 건널 수 없는 강에 다리도 복원될 수 있지 않겠나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독립하기 위해서는 윤여정씨 말대로 자식이 나의 아바타이길 바라는 허망한 꿈일랑 빨리 접어야 한다. 그게 설사 옳고 그름의 문제라도 마찬가지다.

김은형 선임기자 | 한겨레 2025.04.24.

 

들으라, ‘돌봄 넋두리

지금 우리는 초고령사회에 산다. 내란이 한창이던 지난 연말, 한국은 65살 이상 고령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올해 3월 발표된 치매 역학조사에서는 내년이면 치매 환자가 100만명을 넘어선다고 예측한다. 1000만 관객, 100만 조회수같이 영화나 유튜브의 흥행을 표상하는 숫자가 이제는 돌봄 부담을 표상하는 숫자가 됐다. 이 숫자에 도달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내가 처음 병원에서 보호자님이라고 불린 지 14년이 흘렀다. 그사이 20살이던 나는 30대 중반이 됐고, 49살에 쓰러졌던 아버지는 곧 65살 노년을 앞두고 있다. 뭐든 14년 정도 하면 요령도 생겨서 할 만해질 텐데, 어쩐지 돌봄은 그렇지 못하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질병 상태에 따라 병원 다니기에 바쁘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여전히 허둥거리기 일쑤다. 일과 돌봄 사이를 조율하는 건 나름 잘하다가도 가끔 버거워 욱하게 된다.

 

엊그제는 불안해서 잠을 못 잤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요양등급을 다시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요양등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요양보호사님이 집에 오지 못하면 아버지는 고립되고 나도 혼자 다 돌봄을 짊어져야 하나.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할까 봐 잠들지 못하는 밤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눈에 보이는 정책의 가짓수는 늘어났다. 전국에 치매안심센터가 깔렸고, 지역마다 통합돌봄 시범사업이 시행됐다. 간병 부담 완화를 위해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나 간병비 지원이 생겼고, 누군가를 돌보는 청년이나 돌봄이 필요한 중장년을 위한 일상돌봄서비스도 만들어졌다. 2022년 기준으로 성인돌봄 예산은 214천억원을 넘겼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지디피(GDP)1~2% 비율을 성인돌봄 예산으로 쓰는 것과 맞먹는다. 결코 적지 않은 예산을 쓰는데, 우리는 그만큼 안전한 돌봄을 보장받고 있나?

 

정책 종류와 예산이 느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간병살인 비율도 함께 늘었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간병살인 비율은 2000년대 한해 평균 5.6건에서 2020년대 18.8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 21일에도 치매와 지병이 있던 70대 친형을 집에서 돌보다가 살해한 60대 남성이 구속됐다. 돌봄 예산은 예산대로 늘어나는데, 외려 비극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난다. 돌봄 정책과 돌보는 삶의 간극은 왜 이리도 벌어져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돌보는 이들은 넋두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겪은 엎친 데 덮친 격의 돌봄 부담들을 다 말할 수 있는 언어도, 들어줄 귀도 없다. 어렵게 취직했는데 첫 출근에 어머니가 쓰러져 일을 못 한 이야기, 복지나 돌봄서비스들의 기준을 다 비켜 가서 아무런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이야기, 조현병이 있는 동생이 정신병원에서 나왔는데 지역사회에서 아무런 지원이 없어서 다시 입원해야 했던 이야기. 들어줄 이라도 있으면 했던 말 하고 또 하면서 분하고 억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그나마 조금씩 해소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초고령사회를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돌봄의 넋두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돌보는 이에게 위안을 주자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 상존하는 문제임에도 제대로 논의된 적 없는 이야기를 먼저 알리는 비상경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말이 되지 못한 넋두리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어떤 대안적 세계를 담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고민 끝에, 조기 대선에 맞춰 ‘100인 돌봄시민회의를 준비했다. 510일 토요일, 100명의 돌보는 이들이 모여 나의 돌봄 이야기도 실컷 하고, 그 속에서 돌봄정책 시민 공약을 추출해보면 어떨까. 이 자리는 대화 시간을 분배해줄 모더레이터, 사적 이야기에 공적 상상력을 더해줄 정책 멘토, 과거 고통스러운 순간이 전이될 것을 대비한 심리안전 전문가까지 함께한다. 가장 사적인 돌봄의 목소리에서부터 돌봄의 공적 대안을 찾아보자.

조기현 | 작가 | 한겨레 2025.04.24.

 

산업 공동화와 재정 위기

지난 수년간 필자는 한국 사회가 조속히 경로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결국 침몰할 것이고, 어떤 시점에 이르면 침몰을 회피할 경로 변경마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이후 한국 제조업의 위기는 현재화되고 있다. 수출 증가율, 무역특화지수, 제조업 성장률·수익률 등 지표를 살펴보면 뚜렷하게 보인다. 이때부터 중국산 저가 상품들이 한국 제품들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나, 한국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상품에서는 여전히 선진국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이른바 제조업에서 샌드위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기존 산업에서 고부가가치화 실패와 더불어 새로운 산업이나 성장동력도 출현하지 않고 있다. 2001년 이후 10대 수출 품목을 살펴보면, 여기에 진입한 새로운 상품은 2013년에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뿐인데, 이마저 이미 중국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과거 196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발전은 노동집약적 상품에서 자본집약적 단순 상품, 자본집약적 숙련노동 상품, 자본집약적 하이테크 산업, 자본집약적 R&D집약적 산업으로 진화하는 제조업의 고도화 과정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진화는 2000년대 이후 단절됐고, 이는 중화학공업-전속적 하청구조라는 재벌 중심 경제가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동남권은 제조업 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서울대 시장과정부연구센터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권 주요 산업의 수출 감소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에 동남권의 제조업 부가가치는 2015년 대비 23% 정도 감소하고 지역내총생산(GRDP)8.2% 정도 줄어든다. 그러나 이 시뮬레이션에서는 향후 일어날 공장 폐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롯데케미칼 여수 2공장이 가동 중단과 공장 폐쇄 수순에 들어갔고, 포스코는 포항 1제강공장과 1선재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이대로 가면, 동남권은 미국 러스트벨트의 전철을 밟을 것이고, 인구가 급감하는 지방소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제조업 위기는 동남권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과감한 분사를 미루면서 삼성전자의 전망도 매우 불투명해지고 있다. 2030년 파운드리 1위 사업자는 고사하고, 2030년까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부문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첨단 제품 경쟁에선 대만의 TSMC에 뒤지고 범용 제품에서는 중국의 SMIC에 잠식되는 샌드위치현상이 삼성전자 파운드리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에서도 삼성전자의 초격차 전략은 2010년대 중반에 기술적 한계에 봉착했고, 삼성전자가 뒤늦게 고대역폭메모리(HBM) 5세대 제품을 엔비디아에 납품하게 되더라도, 레드오션이 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하나의 기업으로 축소될 개연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과 탄소중립과 RE100 전환 물결로 그나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반도체, 2차전지, 자동차 산업들은 미국 등 해외에 첨단 공장을 투자함으로써 국내 산업의 공동화를 재촉하고 있다.

 

제조업이 여전히 국내총생산(GDP)28% 정도를 차지하는 우리 실정에서 제조업 위기는 경제성장률의 급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산업 공동화와 경제 위기는 가뜩이나 악화되고 있는 재정적자를 재정 위기로 몰고 갈 것이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1935.4%에서 202346.9%로 급증했다. 예산정책처의 2024년 중기재정전망은 이 비율이 2033년에는 57.7%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추정치는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반한 것이다. 최근 3년간 대규모 재정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는 역대급 재정적자가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재정적자의 원인은 예상을 밑도는 경제성장률과 지속된 감세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잃어버린 30년에 들어선 1991년에 GDP 대비 국가채무는 60%였으나, 불과 10년 만인 2001년에 130% 그리고 2021년에는 260%에 육박했다. 그 결과, 2024년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 예산에서 이자 지출은 약 97000억엔으로 전체 예산의 약 8.4%를 차지하는데, 이는 사회보장 지출 약 7.7%보다 높은 수준이다. 고령화 속도도 더 빠른 한국은 산업 공동화와 경제 침체가 발생할 경우에 조기퇴직-자영업 위기-노인 빈곤이라는 악순환이 심화하고, 재정 위기와 채무 위기를 맞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한국의 경로를 변경할 기회의 창이 급격히 닫히고 있다. 산업 공동화와 재정 위기가 대선 주요 쟁점이 되어야만 한다. 대선 기간에 이에 대한 정책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새 정부는 대한민국의 침몰을 회피할 마지막 기회를 잃고, 역사의 오욕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경향 2025.04.24.

 

불탄 개의 넋두리

불길은 한꺼번에 불어닥쳤지만 죽음은 서서히 왔다. 쇠스랑에 묶인 채 우리는 천천히 타 죽었다. 어쩌면 불길이 일어나기 전에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 적 없이 계속 죽기만 했다. 번식장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집과 보호소와 길과 도로에서 학대받아 죽었고,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불타 죽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살다가 쇠사슬에 달궈져 죽었다. 아니, 우리는 죽지도 못했다. 죽는 대신 돈이 되었다. 숫자가 되었다. 우리의 이름은 피해 손실액 1조원이었다.

 

 

인간은 무자비한 신과 같았다. 그들은 끝도 없이 많은 개들을 만들어냈다. 버려진 개들을 구조하고 치료해 되살리는 것보다 새로운 개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익이었으니까. 인간은 개들을 구조할 필요가 없었다. 고장 난 전자제품을 수리해서 다시 쓰는 것보다 새 제품을 구입하는 게 더 이익이듯이. 인간들은 개들이 불타 죽어가는 순간에도 또 다른 개들을 생산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게 뭐든지 넘치게 생산하는 데 도가 텄고, 책임지는 대신 버리는 데 선수였다. 인간은 신이었다. 우리는 개고, 개들은 전자제품이었다가, 나중에는 쓰레기였다.

 

우리는 한 번도 존재인 적 없다. 인간에게 소유되어 인간의 이익으로 살다가 죽었다. 재산으로 태어나 재산으로 살다가 재산으로 죽었다. 우리의 삶이 삶이 아니었듯 우리의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에게 단 한 번, 삶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불길 속에서 서로의 몸을 포개고 덮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존재가 되었다. 버려진 축사의 불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삶을 발견했던 셈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이었으니 우리는 가지고 있는 전부를 서로에게 내어주고 나누었다. 우리는 자신의 몸으로 다른 개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불을 막아 견뎠고, 서로의 부모가, 형제가 되었으며 친구가 되고 아들딸이 되었다. 인간이 사라지자 우리는 그제야 진짜 개가 되었다. 개가 될 수 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려 재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마침내 개로 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죽음이 그렇게 억울하지만은 않다. 억울한 것은 언제나 삶이었다. 개로 태어나 개로 살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인간의 도구로, 수단으로, 재산으로, 물건으로, 상품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죽음과 같았다. 원통한 것은 죽음 뒤에 다시 이 삶이 반복될 거라는 사실뿐이다.

 

누군가는 구조되고 누군가는 구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구조될 이유 또한 없었다. 우리의 할 일은 이제 하나뿐인데, 인간의 개로 구조되는 것이 아니라 개 아닌 누군가로 죽어야 한다. 인간의 소유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들의 수단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인간에게 소유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듯이, 학대받고 버려지는 것을 원한 적 없듯이, 우리는 인간에게 구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개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로 죽고 싶다. 우리는 우리로 살고 싶다. 우리는 개다.

최정화 소설가 | 경향 2025.04.24.

 

불타 죽은 멧돼지를 애도하며

지난 주말 경북 울진에 문상을 다녀오면서 나는 차창 밖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산을 근 한 시간이나 보게 됐다. 서 있는 채로 숯이 된 나무들, 하부 목질 수관이 타버려 꼭대기 잎들이 누렇게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산불 지역의 모습은 처참했다. 피해는 광범위하다. 4500채 정도의 집이 불탔고, 생계 수단이었던 하우스도 사과밭도 양봉장도 양식장도 다 타버렸다. 가축은 20여만마리가 폐사했다. 사람도 많이 상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모두 75명이다.

 

영덕 근처에서 혼자 사시던 지인 어머니는 담대한 성격이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피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오고, 하늘은 벌겋게 물들고, 검은 재가 마당으로 날아오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후배 부모님은 안동 시내에 거주하시는데 안동 시내 대피 바람이라는 문자를 다섯 번이나 연속 받자, 밤에 울면서 딸에게 전화했다. 후배는 지역의 온라인 육아카페나 긴급 신설된 모바일 메신저 오픈채팅방에 들어가, 지역 시민들이 올린 사진과 정보를 모아 상황을 파악한 후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선거 때면 지역의 모든 노인을 촘촘히 동원하던 그 조직망은 이번에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후배는 장탄식했다.

 

 

알다시피 농촌엔 이제 노인만 남았다. 의성군은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65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아 202411월 기준 인구의 47.2%23000여명이 고령자이다. 그 고령자끼리 농사짓고 동네 이장 하고 재난 시 사람 대피시키고 산불 진화대원으로 일한다. 그래서 취약한 노인들은 이런 화재 통에 자기 집 마당에서, 인근 도로에서, 심지어 차 안에서 그대로 변을 당한다.

 

그러나 이런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은 피해도 있다. 바로 야생동물이다. 이것과 관련된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2019년 호주 산불과 관련된 세계자연보호기금(WWF) 보고서이다. 그들은 호주 산불로 코알라를 포함해, 죽거나 살 곳을 잃은 척추동물의 수는 약 30억마리라고 발표했다. 이조차 적절한 조사 방법을 찾지 못해 피해를 측정할 수 없었던 무척추동물과 어류 등을 제외한 것이라고 했다. 산불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 활동이 포함된 복합적인 기후재난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으로 누가 가장 큰 고통을 겪는가를 드러내는 그 보고서는 기후정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그런데 문외한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난 낙산사를 불태운 2005년 고성 산불에서도, 무려 213시간이나 지속된 2022년 울진 산불에서도 비인간 동물의 피해에 대한 공식적 보고를 접한 바 없다. 이번 경북 산불도 마찬가지이다. 이곳, 10나 되는 피해 지역에서는 누가 살고 있던 것일까? 이번 피해 지역의 하나인 주왕산을 조사했다. 그곳에는 포유류 21, 조류 65, 파충류 11종 등이 산다고 한다. 이 중 하늘다람쥐, 대륙목도리담비, 수달, , 검독수리와 수리부엉이, 황조롱이, 도롱뇽 등은 멸종위기종이다.

 

주왕산이 불타고 있을 때 하늘다람쥐는 활공이라는 그들의 특별한 능력으로 탈출해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고목이 모두 불타버려 돌아올 집이 없다. 지표면의 씨앗 등도 남아 있는 게 없으니 돌아와도 먹을 것은 없을 것이다. 고리도롱뇽도 마찬가지이다. 3~4월이 산란기이니 이미 조용한 웅덩이에 알을 낳았거나 그런 웅덩이를 찾아다니고 있었을 텐데 이번 산불로 알을 낳지 못하거나 갓 낳은 알이 모두 죽어버리는 비극을 경험했을 것이다.

 

며칠 전 소셜미디어에서 화재로 타죽은 멧돼지를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정서적 슬픔만은 아니었다. 그 멧돼지가 모든 취약한 것들을 무시하고 응답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아무런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이번 산불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사망자 31명이라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노인들의 죽음을 제대로 드러내고, 집계조차 되지 않는 비인간 동물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조사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 경향 2025.04.24.

 

세상은 이분법이 아닐진대

바야흐로 대선 시즌이다. 확 짧아진 일정 탓에 대선 경쟁에 나서는 정치인들은 급하게 공약을 만들고 국민에게 홍보하는 중이다.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 중 유독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의 공약과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높다. 당내 경선 중인 이 전 대표는 거의 확실하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이고, 현재까지는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그러니 그의 언행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따져보지 않은 채, 막연히 잘하리라 믿고 인물론-그것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선입견-에 기대어 뽑은 바람에 겪어야 했던 생고생을 잊지 않았다면, 공약을 꼼꼼하게 따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그런데 이 전 대표의 정책 발언에 대한 언론의 반응에서 의아한 점이 있다. ‘우클릭논란이다.

이른바 친시장적 정책을 발표하면, 진보와 보수 언론 모두 비판 혹은 기대를 담아 이 전 대표가 우클릭한다는 평가를 내린다. 특정 정책에 대한 찬반은 당연하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정책 자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대신 시장경제 친화적인 정책이면 그냥 우클릭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을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로 나눈 후, 모름지기 진보(또는 좌)라면 분배를, 보수(또는 우)라면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딱히 추구하는 이념이나 신념을 찾기 힘든 정치인이 태반이지만, 어쨌든 정치인을 소속 정당이나 평소 행보에 따라 진보와 보수로 구분 짓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진보는 분배, 보수는 성장이라는 이분법은 타당하지 않다.

 

복지와 친기업 정책은 함께 가야

세상이 복잡한 만큼 국정운영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의 삶이 편안하려면 국방·치안·경제·교육·복지·의료·환경 등 국정 제반 분야가 잘 굴러가야 한다.

이는 대통령과 여당이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진보 측이라고 성장을 도외시하거나 보수 측이라고 복지를 백안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방·치안 등의 체제 유지 기능은 기본이고, 견실한 성장과 공정한 분배는 둘 다 함께 추구해야 하는 목표다.

 

이런 내 지적에 반론이 있을 법하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다만 똑같이 성장을 추구하더라도 보수와 진보는 방식이 다르기 마련인데, 이 전 대표가 하겠다는 것은 친시장적인 보수의 방식이니 우클릭이라는 것이다란 반론이다. 이를테면 진보의 성장 정책은 문재인 정부 시절의 소득주도성장 같은 것이고, 보수의 성장 정책은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비즈니스 프렌들리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대단한 착각이다. 친시장 정책은 보수만의 것이 전혀 아니다. 우리 경제 체제는 시장경제이니 경제가 성장하려면 시장 기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도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진보가 친시장 정책 펼치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면 스웨덴 사례를 보자.

스웨덴은 오랫동안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불렸으며, 여전히 현존하는 복지국가 중 모범이다. 그런데 스웨덴은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것으로도 전 세계에서 수위를 다툰다.

‘IMD 국가 경쟁력 평가라는 게 있다. 국가 경쟁력 순위를 매기고 발표하는 기관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중 가장 공신력이 높은 축에 든다. 이에 따르면 2024년 스웨덴의 국가 경쟁력은 67개국 중 6위이다. 세부 항목별로 보면 기업 규제가 6, 기업 생산성·효율성이 3, (유연한) 노동시장이 4위다. 이에 비해 우리 국가 경쟁력은 20위이다. 그런데 기업 규제는 47, 기업 생산성·효율성은 33, 노동시장은 31위이다. 사회민주주의 체제인 스웨덴이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우리보다 훨씬 기업 친화적이다! 그뿐만 아니다. 스웨덴은 재정이 건전하기로도 유명하다. 스웨덴의 국가채무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분의 1 이하로서 선진국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성장 정책에 우클릭 프레임부당

모범적인 복지국가면서 동시에 친기업적인 경제 체제라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스웨덴 입장에서는 자연스럽다. 스웨덴은 우리처럼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제조업 강국이다. 수출로 먹고사니 기업 경쟁력이 높아야 한다. 대외 여건에 민감한 개방경제 체제에서 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튼튼한 사회안전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 복지와 친기업 정책이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전체 파이가 커야 분배도 넉넉하게 이뤄질 수 있는 법인데, 파이를 키우려면 시장이 활발하게 작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성장이 원활할수록 더 두꺼운 복지가 가능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진보가 성장에 더 절실할 법하다.

성장을 중시한다는 데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다. 그보다는 불평등을 보는 관점에서 둘의 정체성이 구별된다. 불평등의 원인으로 개인과 사회구조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 무슨 수단으로 어떤 불평등을 얼마나 완화하려는가에서 둘의 입장은 다르다.

 

정리하면, 적어도 성장 정책을 두고 우클릭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일단 프레임에 갇히면 해당 정책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니 정당한 평가를 막으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프레임 씌우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보다는 대선에 나선 정치인들이 제안하는 정책별로 비용과 편익, 효과와 부작용을 제대로 따지자. 나는 ‘K엔비디아한국형 팔란티어를 두고 이념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대신 무슨 재원으로 어떻게 구현할지, 그 효과와 부작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장 정책이라는 큰 틀 내에서 이 정책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꼼꼼히 따지고 싶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 경향 2025.04.24.

 

조기 대선, 광장의 열망 담은 '평등정치 후보'에 주목하자

거대 양당 밖 '체제 전환' 목소리에 귀기율여야

우리를 구한 것은 우리

추운 겨울, 쉬지 않고 광장에 나섰던 우리가 내란수괴 윤석열을 몰아냈다. 선고일 발표 직전까지 피를 말리는 듯한 여정이 있었지만 끝내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를 이끌어냈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았다. 국회의원들, 헌법재판소 재판관, 언변 좋은 전직 블랙요원은 조연이었을 뿐, 123일 동안 결정적 국면이 있을 때마다 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광장을 지킨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123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이름 없는 시민들이 달려가 군인과 경찰을 온몸으로 저지하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국회는 비상계엄을 철회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12월 첫째주와 둘째주 매일같이 거센 투쟁과 행진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7일 부결됐던 탄핵소추안을 끝내 통과시킬 순 없었을 것이다. 소강 국면으로 전환되는 듯하던 1221일 응원봉과 깃발을 든 여성, 성소수자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달려가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농민들과 밤새 연대하지 않았더라면 이 투쟁의 질적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란수괴 윤석열이 관저 빗장을 걸어잠근 채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 때 34일에 걸친 한남대로 노숙 농성이 없었더라면 윤석열 체포는 계속 미뤄졌을 것이다.

 

겨우내 지속된 투쟁의 고비마다 여성들이, 성소수자가, 노동자와 농민들이, 도시빈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고군분투하며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러니 어찌 평범한 시민들이 사회적 퇴행을 저지하고 사회를 지켜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지속되는 정치 위기

윤석열 파면으로 조기 대선 국면이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정치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극우세력은 탄핵 결과를 부정하며 아스팔트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이 당장 윤석열을 복귀시킬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극우세력 조직화로는 이어질 수 있다. 2017년 박근혜가 파면되고 조기 대선을 맞이하던 시기를 떠올려보자. 당시 아스팔트 위의 극우세력은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들이 이후 한국 사회를 위협할만한 수준으로 성장하리라 생각치 못했다. 8년 간 이들은 스스로를 정치적·경제적 결사체로 조직했다. 우리는 이를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도전으로 인식하고 긴 전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

 

경기침체는 단순한 경기 순환적 위기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된 결과다.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인한 저임금-장시간-불안정 노동, 복지 축소, 조세 제도 개편 등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켜왔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축적을 위해 사회적 재생산·환경·정치를 끊임없이 침식하며, 돌봄노동·교육·의료 등 재생산 영역을 시장화해 위기를 확산시킨다.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내란으로 귀결된 한국 정치의 모순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축적위기와 통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번갈아가며 야기한 갈등 구조가 폭발한 것이었다.

 

광장을 휘감던 ‘n개의 위기는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최근 각 대학에선 학생운동을 향한 백래시의 파고가 상당하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비이성적 공격은 물론이고, 특별기구 인정을 취소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노동조합들의 정치적 자신감은 희미해졌고,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울부짖음에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정치인들은 비난 공세를 퍼붓고 있다.

 

방향도 없고 자강도 없는 연대연합

광장 투쟁 이후 우리는 한국 사회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데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구상이 재탕되고 있다.

 

기본소득당은 독자 대응을 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다. 지금껏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이 '용혜인 의원'에 환호했던 것은 그가 철저하게 '민주당의 위성'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지, 민주당과 구별되는 독자적·진보적 대안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달 말 기본소득당이 대선에 독자 대응하겠다고 결정하면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고 기본소득당엔 이를 견딜 물리적·심리적 역량이 부재하다.

 

사회민주당은 아예 "범민주진보 최대 연합"을 주장하며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원내 3당인 조국혁신당 역시 "민주 진영의 압도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이번 대선에서 저희는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모든 국민을 위한, 모두의 대통령을 함께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나같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애초에 민주당은 아무런 요구도 한 적이 없고, 스스로 "중도보수"를 표명하며 '우클릭' 정책들을 쏟아냈다. 민주당보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을 자처하는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꺾은 봉으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운동 내 다수를 차지하는 진보당은 내부 경선을 통해 김재연 대표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김재연 쪽 인사들은 내란 청산과 사회대개혁이라는 명분을 이야기하며 "단일화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운동진영 내에선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중도 사퇴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미 올해 초부터 진보당 다수파가 이번 대선에 완주하지 않고 민주당과 단일화할 여지가 높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번 진보당 후보 경선이 유난히 갈등적으로 전개된 것엔 이런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19일 김재연 대표는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내란세력을 청산하라는 시대적 과업을 최우선에 두겠다"면서 "내란세력에 맞서 민주수호세력의 힘을 최대 규모로 키워내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조국혁신당이나 사회민주당의 대선 불출마 메시지와 유사하다.

 

진보당 주류의 이런 전략적 모호성에 대해 내부에서조차 비판 목소리가 나온다. 진보당의 전임 공동대표인 정태흥은 '민중교육연구소' 입장문을 통해 "연합이 기본이 아니고 자강이 기본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당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온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진보정당운동이 독자성과 변혁성을 상실해 추락한 과거를 떠올릴 때 과거의 오류가 반복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모순 낳은 세력이 '광장의 대안'이 될 수 있나?

지난 겨울 '윤석열 퇴진'을 외친 광장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세력들이 모여 내란수괴 파면과 사회대개혁을 요구하고 관철시킨 실천의 장이었다. 좋든 싫든, 민주당류의 신자유주의 세력부터 민족주의자, 국제주의자, 사회주의자,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시민들까지 다양한 세력이 모여 하나의 집회를 구성했고, '내란수괴 파면과 척결'을 위해 투쟁했다.

 

광장에서 외친 요구들과 목소리들을 놓고 볼 때, 광장의 이니셔티브는 분명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사회운동에게 있었다. 2016~17년 당시의 '박근혜 퇴진 촛불'과는 달리, 발언자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밝혔으며 '퇴진'을 넘어 '사회대개혁'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했다.

빈번하게 외쳐진 "평등" 구호는 광장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였다. 이처럼 대중 시위는 다양하게 펼쳐진 정치적 스펙트럼 속에서 사회운동 좌파가 얼마나 이니셔티브와 자신감을 갖고 운동의 급진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민주당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든 장본인이고, 한국 정치를 악무한의 이전투구 현장으로 만든 거대 양당 중 하나다. '정리해고제' 즉 근로기준법 31'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조항을 만든 것은 다름아닌 김대중 정부였으며, 비정규직 및 기간제 근로자 제도의 법제화와 제도적 틀(기간제법과 파견법 개악)을 마련한 정권은 노무현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금융시장 자유화를 심화했고, 재벌 규제를 대폭 완화해 기업의 자율성을 높였다. 공공부문 시장화나 사회서비스 시장화의 많은 조치들은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뤄졌다.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라고 말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공공성 축소에 따른 모순에 의해 야기됐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사회서비스는 축소되고, 노동시장은 극도로 불안정(유연화)해진다. 이렇게 심화된 불평등과 고용 불안, 실업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고, 불만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이는 곧 그 시기 제도정치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평등',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들이 그럴싸한 핑계들을 만들어 민주당으로부터 정치적 떡고물을 챙기려 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의원수 몇 자리를 보장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민중들의 삶에 대한 배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상적으로 거리와 일터에서 투쟁해온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통치세력에 맞서 평등과 민주적 자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지난 겨울 광장의 시민들이 '윤석열 퇴진'만이 아니라, '사회대개혁'을 외쳤던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란세력을 몰아내는 싸움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뒷걸음질치거나 정치적 기권 상태에 머물러선 안 된다.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자신감 있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운동을 확장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이지만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은 이 체제가 야기한 자기 삶의 위기에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끝낼 의지와 존엄을 유지하고 있다. 지리멸렬하고 높은 벽에도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존재한다.

 

문제는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의 정치적 비전이 소실된 것처럼 보이는 현 상태에 있다.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의 건설과 원내 진출로 '좋은 시절'을 맞이했던 진보정당 운동은 민주노동당 분열과 복수 진보정당 시대를 경과하면서 한 시대를 종결했다.

 

지난 몇 년 정의당은 내부 논쟁의 홍역을 겪으며 원외 정당으로 밀려났고, 정의당 내에서 운동과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던 그룹들은 지난 총선을 거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심지어 정의당은 친민주당 인플루언서들로부터 온갖 비합리적인 공격과 비난을 받으면서 기초체력이 될 만한 기반을 잃어버렸다.

 

시민사회운동의 일부 역시 오랜 기간 주류화 노선을 밟으면서 대중운동적 기반과 멀어졌고, 제도정치와의 협업에만 치중된 나머지 독자적인 정치 비전을 잃어버렸다. 2024'체제전환운동' 포럼과 정치대회가 개최되고,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이같은 사회운동의 자기반성과 비판에서 기인한다.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선거인단에 함께하자

광장의 외침과 투쟁은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 광장을 채웠던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로 얼룩진 우리들의 삶도 계속된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하나의 고비를 넘어섰을 뿐이다.

 

윤석열은 어떤 우연과 특별한 광기의 산물이 아니다. 거대양당 정치의 모순이 윤석열을 낳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로부터 극우세력이 확장했다. 따라서 우리의 광장을 '정권교체'라는 목표로 협소화시켜선 안 된다. 그것은 과오의 반복일 따름이다. 대신 우리는 광장에서 터져나온 목소리들을 확장하고, 연결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보다 평등으로 바꾸기 위해 사회운동을 두텁고 넓게 다져야 한다. 그 여정 속에서 더 나은 정치도 가능하고, 착취와 경쟁, 혐오로 얼룩진 질서도 바꿀 수 있다.

 

광장에서 '평등'을 향한 갈망과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확인했다면, 이런 힘들로부터 우리 사회의 대안을 마땅히 모색하는 것이 시민사회운동 전반의 당면한 책무라는 점을 확인했다면, 지금의 모순을 야기한 거대 양당 정치가 아니라 개혁과 체제 전환을 기약할 수 있는 정치적 구상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최근 노동당·정의당·녹색당 등 진보정당들과 다양한 노동·사회운동 그룹들이 뭉쳐 '사회대전환 대선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연대회의는 "함께 평등으로! 함께 체제전환 정치로!"를 기치로, 이번 대선에서 공동의 후보를 선출할 예정이다. 이 여정에 함께해, 퇴진 광장의 목소리와 얼굴을 가진 후보를 통해 "윤석열 퇴진 너머 평등으로 나아가자"고 외쳤던 광장의 목소리를 가시화해야 한다.

 

당선 가능성도 낮고, 당장은 힘도 미약하지만 열망을 지닌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이런 힘들을 집결시킬 때 비로소 '다른 세계'를 향한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사회운동의 얼굴을 자처하며 연대회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두 명의 운동가가 있다. 권영국과 한상균, 한상균과 권영국이다.

 

권영국은 풍산금속에서 노조 결성을 시도했던 해고 노동자였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거리의 변호사"로 수십년 활동하며 쌍용차 노동자 정리해고, 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 씨 산재사고, 파리바게뜨 노조 탄압 등 노동인권 현장을 지켰다. 집회시위의 자유와 노동권을 위해 몸을 던져 싸웠고, 수차례 연행과 재판을 겪으면서도 현장을 지키는 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정의당 대표로 선출된 뒤에는 "현장으로, 민중 속으로"라는 기치 아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왔다.

 

한상균은 805월 광주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민군에 참여해 계엄군에 맞서 총을 들었다. 이 경험이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쌍용차 노동자로 일하며 2009년 정리해고 사태 때 77일의 공장 점거 파업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3년의 수감 생활을 겪었다. 2015년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된 뒤 박근혜 정권에 맞서 민중총궐기를 주도하며 싸웠다. 출소 이후엔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 등 미조직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권리찾기유니온'을 만들어 활동해왔다.

이들 두 사람은 사회운동의 독자성과 변혁성을 위해 아래로부터 헌신하고 앞장섰던 흠잡을 데 없는 인물들이다. 둘 중 누구도 투쟁하는 민중을 대변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칠 후보로 나서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 두 후보의 경선을 통해 이번 대선을 맞이하자.

 

우리의 광장이 20·30대 여성들과 성소수자,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으로 빛날 수 있었듯, 여성이자 성소수자의 얼굴이 후보 중에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는 사회운동이 안고 있는 냉정한 현실적 조건이다. 지금의 한계를 딛고,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두 후보가 퇴진 광장의 달라진 풍경마저 대변할 수 있도록, 나아가 이번 대선 뒤 거대 양당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운동이 새로운 얼굴로 혁신될 수 있도록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길, 운동의 얼굴을 대체해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 프레시안 2025.04.25.

 

 

가난과 싸울 자에게 전하는 부동산 격차 해소 비법

이번 대선에 걸린 경기침체기 부동산정책 향방

역대 대선을 좌우한 가장 뜨거운 경제 쟁점은 단연 부동산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각종 공약이 난무하고, 미래의 한국을 구원할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결국은 기승전 부동산으로 단연 부동산 정책이 주목을 끌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부동산이란 거의 전재산이자 삶의 바탕이며, 우리나라 부동산은 무려 12000조 원, 국내총생산(GDP) 또는 총증권가치의 무려 67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의 부동산정책이 전 국민을 만족시켰다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부동산 지역 격차, 부익부 빈익빈의 소유 격차라는 두 가지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 3구의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에 수십 억씩 하는데 지방은 하물며 광역시급이라도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격차가 현실이다. 하나마나한 1% 성장이니 하는 판에 유예되었던 트럼프 상호관세가 7월쯤 재개되면 부동산 가격은 요동칠 일만 남았다. 이번 대선에 경기침체기 부동산정책 향방이라는 타이틀이 걸리는 이유다.

 

부동산정책 방향은 크게 부동산 부양과 규제-가격안정화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부동산 부양이란 건설경기 활성화, 교통인프라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결국 부동산개발로 수익을 자극하며 경기부양을 도모하는 대표 정책을 말한다. 토지거래허가제(토허제) 등 각종 규제책 해제는 부동산 부양의 통상적 수순이며 함께 종합부동산 부양의 한 세트를 이룬다.

 

결과는 어땠을까. 부동산 부양은 대개 착한 당나귀다. 단기적으로 20~30% 부동산 상승은 기본이고, 심지어 문재인 정부 기간(2017~2022)에는 온갖 규제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2배 폭등하기도 하였다. 역설적으로 부동산 부양에 집중한 이명박 정부 기간은 부동산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화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외부효과(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미국발 세계적 금융침체) 영향이며, 특별한 정책효과라고 볼 수는 없다.

 

부동산정책에 시행착오가 잦고 예측이 어려운 이유

부동산정책은 시행착오가 잦다. 대내외적 변수의 개입으로 예측도 어렵다. 게다가 폭등락도 잦다. 왜 그런가. 일반적으로 부동산 가격 폭등이란 수급에 민감한 부동산 특유의 투기적 성격과 주택 자가보유율이 60%에 불과해 항상 부족한 상태가 결합된 현상을 말한다. 거품이 자주 낀다. 그러나 비정책적 요소가 개입되면 정책결정자의 의지 밖에서 거품이 터진다. 가령 세계적인 10년 주기 경제폭락 현상이 발생하면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개입은 벽에 가로막힌다. 이 주기는 충분히 예측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망각된다. 둘째, 부동산 건설자본은 항상 과잉설비 위험이 커 안정수익 지향, 즉 특정 지구 중심 공급에 주력하기 때문에 특정지역과 비특정지역간 가격 이원화 현상을 유발한다. 그 특정 지역이 바로 수도권이고 강남 3구이다.

 

셋째 도시부동산은 금융자본화를 수반한다. 즉 도시 토지가격은 자연 가치보다는 지대/이자()의 금융공식을 따라 작동한다. 정부 정책은 전 국민 대상이라는 탈을 쓰지만 사실은 부동산 소지자 또는 금융자본의 이해득실 편으로 움직이는 편향을 보이며, 무토지/소토지자를 압박한다. 도시 격차, 중심지 이탈, 도시 궁핍화 현상이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도시 토지 투자는 투자 지역을 중심으로 버는 자와 잃는 자, 이른바 부동산 로또, 부동산 격차 등의 불합리를 낳는다. 근본 철학을 어느 쪽에 두는가에 따라서 정책 방향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그 반대의 임대차 3, 다주택자 중과세, 종부세, 초과이익환수제 등의 규제책은 이번 대선에서 특별히 더 소환될 것 같지 않다. 총괄적으로 규제보다는 부동산 성장론 쪽이 유력하고, 부동산 가격하락, 안정화는 당분간 실종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말하면 강남 진입의 벽은 다시 높아지고, 강북 또는 수도권 외곽은 더 이상 하락하지 않아 부동산 격차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각 후보별 100250만호 공약, 대출규제 조정 등 선심성 경쟁이 대세다. 공급이 가격을 낮춘다는 바로 그 논리지만 문제의 핵심지역은 우회할 것으로 예상되어 얼마나 통할지 의문이다.

 

저출생 인구소멸 대비 청년 신혼부부 주택 공급 및 1억 원 자녀 양육지원, 각 당별 세종시 이전 공약도 기억해 둘만한 소재다. 그런데 나름 훌륭한 이 정책선상의 주택공급지역은 어디인가. 전국 미분양은 24000가구(4월 현재)로 역대급이며, 그중 80%가 지방, 특히 광역시급인 대구, 부산 등이 주력인데 경상권이 선정될 수 있을까? 한편 수도권도 평택 이천 등에서 10% 미분양 비중인데 여기는 어떤가. 이 지역은 트럼프 관세 도발 전후 디지털 반도체 투자가 중단된 산업공동화 지역이다. 후보 지역 선정과 후보별 산업공동화 대처 공약이 궁금한 대목이다.

 

토지사유제 하에서 합리적 부동산 격차 해법은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동산 해법을 재산권 소유 규제 방식으로 접근하면 부동산 격차라는 불합리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지대를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고 전액 국고 환속을 주장하는 헨리 조지(H. George)의 토지공개념을 적용한다면 아마도 전국적으로 거대한 난리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토지사유제 하에서 합리적인 부동산 격차 해소의 어려운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문제는 왜 정부 주도 부동산 부양과 규제가 그렇게 무력한가에 있다. 재산권이 개입하는 한 부동산은 누구나 만족하는 이해조정이 어렵다. 앞의 부동산 식 을 정부가 개입하는 경우로 조정하면 식 부동산가격=지대/(이자()+세금+유지관리비) + 개간비 + 기대치(이윤)로 바꿀 수 있다. 즉 부동산가격은 이자, 세금, 유지관리비에 반비례하며 임대료, 개간비, 기대치에 비례한다. 이자, 세금이 오르면 부동산 가격이 내리고 반대면 오른다. 세금은 정부 통제영역이나 이자는 정부+시장 몫이다. 즉 이자를 통한 정부 통제는 기껏해야 반만 가능하다. 개간비는 정부몫인 교통 등 SOC와 민간투자로 이루어지며 이 또한 반반 영역이다. 문제의 부동산 기대치인 입지, 교육환경, 의료, 문화, 금융 등은 정부개입이 가능하나 정부 목표 완전 달성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른바 강남 3구는 부동산 3대 요소로서, (한강변 입지), 교육, 제도(1가구 1주택 정책)의 복합 산물이다. 즉 부동산정책이란 자연입지, 교육, 제도까지 고려하는 종합능력이 요구되므로 적어도 10년 대계 장기 전략 수립, 임기에 관계없는 지속성 유지, 협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다.

 

후보마다 지역균형발전을 외치지만, 서울에 주요 대학, 5대 병원, 금융 유통 교통 인프라, 디지털 인터넷 첨단 산업과 전 인구의 절반 인구집중 현실을 해체할 수 없다면 서울은 오히려 지방보다 우선할 수 밖에 없다. 우리 국토는 좁다. 어느 지역에서든 2시간 내에 서울 접근이 가능하다. 주요 관공서 지방분산을 강제해도 정작 당사자들은 자녀교육, 의료환경, 똑똑한 놈 한 채의 명분을 걸고 고속철로 서울 오가는 1인 가구 분산을 감행한다.

 

상상하기 싫지만 지역별 도시소멸 혹은 슬럼화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 도시의 발달은 휴전 후 집중개발기인 1970년대, 50여 년의 시간에 불과하다. 100년이 넘은 도시발달을 경험한 미국은 도시 빈민화(슬럼화)와 리모델링 현상, 우리보다 20여 년 앞선 도시경력의 일본은 인구감소와 노령화, 빈집 양산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서 다주택자 재산권 규제는 더 이상 지방소멸의 대책이 되지 못한다. 결국 강남 3구로 상징되는 부동산 격차만 키울 뿐이다. 환경이 성숙했다. 다른 대안, 재산권 중심이 아니라 부동산 서비스화, 또는 주택임대 중심의 주거서비스화로의 전환을 검토할 때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송파구 등 서울시내 아파트 단지 전경. 연합뉴스

 

주택 가격 상승 기대치 떨어지면 공공임대주택에 눈 돌리지 않을까?

채무상환불능의 고위험가구가 38, 가계채무 1900조 원 시대에 주택담보채무 1120조 원이면 59% 비중이다. 1인당 1억 원, 가구당 3~4억 원 채무, 월 평균 100150만 원 이자를 충당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전국 월세 비중 44%, 서울 51%이며, 수도권 평균 월 소득 대비 주택임대료(RIR)20% 비중이다. 이걸 감당할 가구는 얼마나 되나.

 

보완 대책은 주택공급 공약들이 주류이며, 수십 년 전 신도시 주택 200만호 공약의 숫자만 바꾼 판박이다. 전 정부 공약인 위례 김포 남양주 파주 대곡 신도시 계획도 이 부류에 속하며 결국 수도권 공약, 서울 확산에 불과하다. 생색내기용으로 지방에 얼마나 떨굴지는 몰라도 이걸로 과연 지방균형발전이 달성되나. 청년주택,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지분모기지주택 등 제법 괜찮은 이름의 공약들도 결국 수도권이 대상이라면 마찬가지 가계부채 올림 대상이며, 강남 3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격상승 기대치는 감소할 것이며, 도시쇠퇴를 먼저 경험한 일본이 그렇듯 자산상승으로 한몫 잡을 확률은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집없고 가계부채 많은 자, 전국 전월세 4-50% 1000만 가구주, 2000만 선거인단은 당장에 돈 덜 드는 정책, 결국 공공성이 가미된 공공임대주택의 향방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임대주택은 크게 민간임대와 공공임대로 구분된다. 민간임대는 개별적인 임대주택자와 대형 주택임대사업자인 기관투자자, 임대주택 사업자로 구분되며, 이중 민간임대 양성화의 허점을 노린 갭투자 전세사기의 개별 중형 임대사업자가 화제였다. 그러나 이는 주택임대차 제도 정비 과제로, 큰 공약화하기에는 약한 소재다. 핵심 문제는 공공임대와 민간 임대시장의 관계, 또는 부동산 격차를 제어하는 수준으로 공공임대를 어디까지 위치 지울까 하는 것이다. 이 분야 공약은 어느 후보라도 아직 명쾌하지 않은데 현재 시점(2023)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공공임대주택은 9.8% 재고율 175만호 현황이고 2032년까지 265만호 대략 20% 재고율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 관심있는 후보라면 아마도 2030년경 300만호 목표가 최대치로 제시되지 않을까 한다.

 

세곡동 공공임대주택단지.

 

흙수저 청년, 무주택자 위한 통큰 공공임대주택서비스를

문제는 공공임대 주택이란 대개 40안팍 서민형이라는 약점, 5년 또는 10년 후 분양절차를 거치면 결국 다시 재산권의 문제로 환원되고 공공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입지 여하에 따라서 로또 입주 또는 부동산 격차에 한 몫할 뿐, 지속적인 주택임대차 서비스가 될 수 없다. 현실의 지속적 임대주택 주거서비스는 공공주도 혹은 영구임대주택 또는 50년 장기 공공임대주택이다. 장기 공공주거 서비스를 표방하는 이 주택들은 약 총 2만 채, 공공임대의 1%로 너무 작아 민간 임대주택시장의 대항마로 자격 미달. 둘째 그중 70% 대부분 수도권 위치, 셋째 선별적 사회복지 차원의 입주 자격(영세빈민)의 엄격성, 넷째 통합적 서비스 관리 시스템 미비 등이 취약점으로 꼽힌다. 한 마디로 거국적이지 못하고 다양성이 부족해 민간 임대주택 대비 총임대시장의 주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 주거서비스 시장은 상황이 바뀔 것이고 그에 대한 전략이 서지 않으면 부동산시장은 잃어버린 30년의 일본처럼 격변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한국은 65세 인구 1000만 명으로 노인인구 증가속도가 빠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노인 빈곤율 40%이다. 흙수저, 금수저 청년 간 자산 격차는 38, 평균 대출 11000만 원, 평균적인 주택 취득기간 20여 년 이상이다. 부모찬스가 없다면 수도권 주택취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울은 더 이상 집 지을 땅이 없거나 쳐다보지 못할 고가다. 공공이 해결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무주택, 소주택, 빈곤노인, 흙수저 청년, 신혼부부 주택문제 해결의 길은 재산으로서의 주택소유에 대한 무책임한 희망고문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장기 주거임대서비스를 제공하는 길이다. 기왕에 통 크게 장기 공공임대주택서비스 300만호쯤 공약하는 후보가 나오면 좋겠다. 이 장기 공공임대주택서비스가 정착되면 민간임대와 상호 협력하거나 경쟁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임대료 안정에 기여할 것이다. 임대료가 안정되면 토지가격 급등을 제어하며 나아가 부동산 격차도 통제될 수 있다. 이걸 못하는 것은 부동산 이해관계 관리에 게으른 낡은 관료제가 작동하거나 이해관계자가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1가구 1주택 해제하고, 다주택 규제 중심에서 총주택금액 규제로

노인복지주택은 임대형(2015)과 분양형(비수도권)으로 분류되는데 민간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실버타운과 대비된다. 실버타운은 주거서비스 비용이 높고 서비스 질이 좋으며, 노인복지주택은 상대적으로 낮은 서비스와 관리 취약의 차이가 있다. 선택은 자유다. 빈곤한 자 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후자는 장차 보편적 복지로 격상을 염두로 하기 때문에 지속적 제도 정비의 과제가 있다.

 

이번 대선의 부동산정책이란 짧은 선거 일정 때문에 쟁점이 활발하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가령 인공지능(AI) 100, 200조 원 투입이 현실화되면 특정 투자지역 선정 문제로 비화할 것이며, 결국 사필귀정 지역 부동산을 자극할 것이다. 공약이란 공약(空約)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심각한 경기침체가 사실이라면 비생산적 비용의 감축과, 내수의 실속 성장으로 방향 전환은 시급한 것이다.

 

당면한 과제 중 1가구 1주택 제도는 만인에게 평등한 주택 소유의 이상이 아니라 특정 부동산 계급에게 고소득을 안겨주는 비생산비용의 고도화로 변질되었다. 똑똑한 놈 한 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한 때다. 부동산 불로소득 규제가 여전히 필요하다면 금융자산화한 도시주택의 특성을 따라 허접한 주택 수가 아니라 차라리 총주택금액 규제로의 전환이 효과적일 것이다. 시골집이나 서울집이 어떻게 똑같은 한 채인가. 서울집을 두세 채 또는 그 이상 살 능력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총액을 넘긴다면 기존의 무수한 투기억제책으로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

 

우리는 정부 규제가 부동산 폭등락을 훌륭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사례를 그간 숱하게 보아왔다. 시장조정능력을 잠궜기 때문이다. 가령 토지가격을 제어할 시장 수단은 금리 인상인데, 이를 포기하고 토지허가제 등등 다른 정책규제를 동원해서 문제를 키운다. 재산권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시장은 끊임없이 혼돈된다. 재산권이 아니라 주거서비스화로 부동산정책 근본 전환의 동력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래 성장동력은 가난과 싸울 자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올 것

재산권 약화, 주거서비스 강화라는 부동산 정책 전환 시도는 인기가 없을지 모른다. 수십 년간 지속해서 오르는 부동산 가치에 익숙한 환경에 따르면 부동산 인상 중단, 도시 슬럼화 운운, 재산권 무력화 방지 주거서비스 개념을 동원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령화, 노인빈곤화, 인구소멸, 청년 주거 부실, 지방소멸 등으로 미래 부동산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체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적어도 이런 부동산정책 시대전환의 실태가 이번 대선에서 어떤 징후로 반영되는 지를 꼭 지켜보고 싶다. 프란체스코 교황님은 가난과 싸워야지 가난한 사람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미래 경쟁력은 가난과 싸울 자에게 보내는 신뢰로부터 생성될 것이다.

백일 전 울산과학대 교수·경제학 | 시민언론 민들레 2025.04.25.

 

 

한 몸 이룬 극우세력과 사이비 종교

주로 개신교를 숙주 삼아 발흥하는 사이비 종교

종교는 원래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대변하기 위해 탄생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공함으로써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천국이나 극락에 대한 이론 등을 통해 사람들의 이상사회에 대한 꿈을 대변해 주었다. 종교의 부작용이나 비과학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기능으로 인해 종교는 인류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종교에서 순기능은 제거하고 악기능만 극대화하는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람들과 사회에 해를 끼쳐왔다. 한국의 경우 사이비 종교는 지배층인 극우세력과 융합, 결탁함으로써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가로막는 반국민적이고 반역사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전광훈이나 손현보 목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이비 종교가 대체로 천주교나 불교보다는 개신교 쪽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사이비 종교는 주로 개신교를 숙주 삼아 발흥하는 것일까?

 

대기업 직장인 같은 사제, 각자도생 내몰린 자영업자 목사

천주교 공동체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사제로까지 이어지는 정연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의 사제들은 천주교 공동체로부터 생존을 보장받는다. 쉽게 말해 성당에서 월급을 받아 생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주교 사제들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병적이거나 세속적인 욕망에 잠식되지 않는 한, 생존 불안에 시달릴 가능성이 적다.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데, 그 교파들 간에, 또 각 교파들 내에 질서정연한 조직체계가 없는 편이다. 개신교 목사들은 개신교 공동체나 교파 공동체로부터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은 자신이 교회를 운영하면서 재주껏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목사들은 결혼도 하기 때문에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감과 부담감까지 짊어지고 있다.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천주교 사제는, 비록 그 액수가 많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기업에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직장인이고 개신교 목사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돈을 벌어 생활하는 자영업자라고 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은 영업을 잘 하지 못하면 망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개신교 목사들도 이런 자영업자와 처지가 비슷해서 포교를 잘 하지 못해 교회에 신도가 오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일부 목사들은 특정한 사회집단에 특화된 포교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나쁜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극우세력 혹은 보수층을 겨냥한 포교가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그쪽에 올인하는 것이다. 전광훈이나 손현보 같은 사이비 개신교 목사들은 극우세력 시장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감안하여 일찍이 그쪽에 특화된 포교를 하다가 점점 극단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 공동체로부터 생존을 보장받는 천주교 사제들에 비해 각자도생의 경쟁으로 생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사이비 종교의 길,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각자도생의 개인 간 서열경쟁으로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고수한다면 사람들의 타락과 변질 나아가 그들이 악에 물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사실 천주교 사제들은, 그 생활수준과는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천주교 공동체가 제공해주는 기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개신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이비화에 대한 면역력이 더 강하고, 사제들이 상대적으로 덜 타락하는 것은 한국이 기본사회가 되었을 때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배타성을 공통분모로 하는 극우 파시즘과 사이비 개신교

종교 중에는 하나의 신만 섬기는 일신교도 있고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도 있다. 일반적으로 다신교가 배타성, 폐쇄성에 취약한 일신교보다는 개방성, 포용성에서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일신교여서 하나의 신만 섬기고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는 반면 불교는 다신교 평범한 사람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 때문에 불교를 무신론적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서 여러 신을 섬긴다. 과거의 십자군 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국가에 일신교인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일반화되면 그 나라의 토속 신들은 추방당하곤 했다. 반면에 다신교인 불교가 어떤 국가에 전파되어 일반화될 경우 불교는 그 나라의 토속 신들을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했다. 예를 들면, 한국 사찰에 있는 산신령 그림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에 전파된 불교는 토속 신인 산신령을 여러 신들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다신교보다는 일신교가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이비 종교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일신교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사랑이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 참된 기독교는 배타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반면에 사이비 개신교는 사랑이 아닌 배타성, 증오와 혐오에 기초한다. 사이비 개신교는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집단을 이단, 사탄으로 낙인찍고 배타시하면서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를 위해 사이비 개신교는 기독교 사상의 핵인 사랑을 지하 깊숙이 봉인해두고는 일신교 교리만을 절대화한다.

 

극우 파시즘 사상도 증오와 혐오를 특징으로 하는 배타성에 기초한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비롯한 타 인종을 배타시하면서 증오하고 혐오했다. 한국 극우세력은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국민들을 빨갱이, 종북세력,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고 배타시하면서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것은 극우 파시즘과 사이비 개신교가 배타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배타성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한국에서 극우 파시즘 세력과 사이비 개신교 세력은 긴 세월 동안 하나로 융합되어 한국 사회를 마녀사냥이 판치는 아수라장으로 만들어왔다.

 

그들이 세를 확장하는 수단은 공갈협박의 공포 마케팅

극우 파시즘과 사이비 종교가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기본방식은,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공포 마케팅이다. 한국의 극우세력은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을 활용하여 한국을 색깔 공포증이 뒤덮고 있는 파쇼사회, 병든 사회로 만들어왔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빨갱이, 종북,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혀 언제라도 수거될 수 있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 살도록 강요 당했다. 한국 극우세력은 색깔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 반국가세력으로 몰려 죽고 싶지 않으면 극우를 지지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외치면서 세를 확장해왔다. 여기에 더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생존이나 (인간관계 파탄이 초래하는) 존중 등과 관련된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도 시달리고 있다.

 

사이비 개신교는 일신교 교리를 악용하여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에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 간다, 나한테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외치면서 세를 확장해왔다. 한마디로 한국의 지배층인 극우세력과 사이비 개신교 집단은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도록 강요하고는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고 악화시키는 공갈, 협박을 통해 세를 확장해온 것이다. 물론 극우세력은 계엄 같은 국가폭력을 무기삼아 국민들이 보수화되도록 압박하지만 사이비 개신교는 지옥팔이 같은 정신적 폭력을 무기삼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도록 압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극우 파시즘과 사이비 개신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 특히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갈, 협박을 하는 공포 마케팅을 통해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국의 극우세력, 내란세력은 사이비 개신교와 결탁, 융합되어 있다. 사이비 개신교 집단은 윤석열 일당의 내란사태 이후에도 악착스럽게 내란을 지지하고 있다. 내란과 사이비 개신교는 그야말로 한 몸인 것이다. 이것은 사이비 개신교의 확장을 막고 나아가 그들을 청산하려면 반드시 내란부터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란이 종식되고 사회대개혁에 성공한다면 극우세력은 (국가보안법 폐지로 인해) 국민들을 향해 종북세력, 반국가세력이라는 협박질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란이 종식되고 한국이 기본사회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불안과 공포, 무력감, 소외감 등에서 해방되기 시작할 것이므로 사이비 개신교의 공포 마케팅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될 것이다. 내란 종식과 사회대개혁이 곧 사이비 종교 청산이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소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5.04.25.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 목사) 여기에 더해서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무속과 결합한 많은 한국 교회는 결국 무당이 지배하는 대형 점집이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구하려면

20여년 전인 2003년의 일로 기억한다. 노동절을 맞이하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개최된 집회 대열의 맨 앞을 영정을 든 이들이 지키고 있었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영정이었는데 200여개의 영정 중 대부분이 얼굴이 없었다. 그 당시 산재 사망자 수는 2800여명이었는데 그중 그나마 이름과 나이, 산재 사망 경위 등을 짧은 한줄로 기록할 수 있는 노동자의 수가 200명 정도였다는 것이 그 영정들을 준비한 이의 설명이었다. 이름도 익숙하지 않고 얼굴도 없는 200여개의 영정 사진과 그 사진을 들고 서 있는 동료 노동자들이 주는 낯섦과 생경함이 주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 전해에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사람들의 얼굴 없는 영정이 거리를 메우고 있는 그 장면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출근한 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노동자가 죽어간 자리에서 또 같이 일을 하며 살아가는 다른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 20여년이 흐르면서 산재 사망 통계의 집계 방식이 변했고, 산재 사망을 줄이기 위한 정부 조직이 만들어지고, 산재 사망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국정과제가 등장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어 사업주의 책임 소재를 강화하고,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개정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실제 2023년 사고 사망자는 812명까지 줄었다. 여전히 많지만, 확실히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올해 428일은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첫 산업재해 근로자의 날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이 도입된 지 60년이 지나서이고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의 계기가 되었던 타이 인형 공장의 화재 사고가 발생한 지 30여년이 지나서이다. 지난해 국회는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일인 428일을 법정 기념일로 정하고 일주일을 추모 주간으로 정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통과시켰다. 얼굴 없는 영정으로만 남아 있던 사람들을, 그리고 이름도 없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생긴 것이다.

 

법정 기념일 지정을 위한 산재보험법 개정 취지에는 산재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다만, 산재 예방의 목적을 명확히 강조하고 있는 안전보건 강조의 달이 7월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산업재해 근로자의 날에는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사람들을 좀 더 기억하는 한편, 산재 노동자들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과 고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기간이 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첫 기념일을 앞두고 기억 한편에 남아 있던 그날의 영정 사진 행렬이 떠올랐다. 몇년 전 1200명의 산재 사망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1면을 채웠던 일간지도 생각났다. 첫 공식 기념일인데, 그 노동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이, 그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쉬웠다.

 

한국 사회가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노동자의 죽음을 주목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죽음을 막기 위한 노력이 중요한 과제라는 공감대를 형성한 데는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20여년 전 영정 행렬을 기획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공감대가 높지는 않았다. 아무도 구하지 못한 상태로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를 보면서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구의역에서는 김군이 숨졌고, 용광로에 추락한 20대 청년의 죽음이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시와 노래로 남았다.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끼여 사망한 노동자도 있었고, 김용균도 있었다. 병원이나 대학에는 기부금액에 따라 기부자들의 이름을 남겨주는 현판이 있고, 국가정보원에는 작전 중 사망한 요원들을 기억하기 위한 무명의 별이 있다는데,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건 보라매 공원에 있는 위령탑뿐이다.

 

죽음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짐하는 한편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이 회복하여 다시 건강하게 일터로 돌아가고 행복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그런 기념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념일이 형식적인 행사로 그치지 않고,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 한겨레 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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