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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5.5.12~18

by 이성근 2025. 5. 19.

 

 

압도적 승리를 위하여

압도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 표를 더 달라는 말이야 어느 정당이나 한다. 이왕 당선될 거라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고 싶다는 기대에 잘못은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 승리가 민주주의의 압도적 승리일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계엄까지 겪었으니 압도적 안정감을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 숨은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은 지난 대선에서 0.73%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간신히 이기고도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선출된 대표에 부여된 정당성의 한계를 고심하는 대신 선출된 대표에 부여된 권한의 한계마저 부숴버렸다. 여기서 남겨야 할 교훈이 압도적 득표는 아니다. 집권의 정당성이 득표율로 보증된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압도적 정권교체는 선거의 결과일 수 있을지언정 민주주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압도적 정권교체가 침묵을 강요하는 말이 되어가는 것은 더욱 우려스럽다. 여성 지우기는 노골적이다. “왜 자꾸 남성 여성을 가릅니까? 그냥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들 아닌가요?” 이재명의 말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윤석열의 말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을 이기자고 윤석열의 선거 전략을 따라 한다? 민주당은 덜 대표하면서 더 득표하려고 한다.

대표성은 어려운 숙제다. 정책공약에 무엇을 넣거나 빼는 일과 다르다. 정체성으로 획득되거나 보증되지도 않는다. 소년공이라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여성이라고 여성이 대표되지 않는다. “국민과 함께 이기겠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다 같은 국민에서 누가 더 지워지고 뭉개지는지, 누가 더 대표되며 권력을 누리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노력이 대표성을 키운다. 민주주의의 힘은 덜 대표되던 사람들이 더 대표되고 더 대표하게 될 가능성에서 나온다.

대표하는 일은 누가 여기에 있는지 보이게 하는 일이다.

계엄 이후 광장에 그런 투쟁과 도전이 있었다. 성소수자로,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는 이들이 재난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짓는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이주민과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호명을 넘어 연대의 실천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누가 무대에 서더라도 언제나 그의 정체성을 초과하는 우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구체적 얼굴을 지우지 않고도 보편적 얼굴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시간. 압도적 대표성을 만들어간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2030 여성은 광장의 지분을 요구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대표성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파면 이후 빛의 속도로 광장을 지우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만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 정권교체를 위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광장 대선 후보로 선정하고 지지한다.” 지난주 광장대선연합정치시민연대라는 단체가 야 5당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광장 대선 후보선정할 권한은 누가 주었나. 정권교체를 넘어서자던 광장의 목소리를 압도적 정권교체로 둔갑시키며 민주당에 사회대개혁 과제 목록을 안긴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민주주의는 허약해질 뿐이다.

광장에 나섰던 이들 모두 내란의 진원지인 국민의힘이 덜 득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자멸의 길을 향하는 국민의힘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에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안 된다. 광장을 이어가려는 정당은 더 대표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안에 내 자리가 있고 내가 초대할 사람들이 있다고 느낄수록 민주주의는 강해진다. 선거를 넘어 풀뿌리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할 힘. 압도적 정권교체가 아니라 압도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승리로 길을 낼 선택지가 있어 다행이다. 압도적 득표와는 다를, 민주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를 바란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경향 2025.05.12.

 

최고의 자리, 최악의 인간들

한때 개를 키웠다.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어머, 골든리트리버네요. 친절하고 다정해서 애들 있는 집에 최고지요!” 이런 일이 반복되며 여기저기서 견종의 특성을 얻어들었다. 예컨대 요크셔테리어는 고집이 세지만 애교 만점이다, 셰퍼드는 용감하고 충성스럽다 같은 것. 말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한다는 ‘3대 악마견이 있는가 하면, 지능에 따른 견종 순위 같은 것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꾸 듣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듯, 나도 이런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다 개의 인지와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쓴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깜짝 놀랐다. ‘견종은 개의 행동이나 성격과 아무 관련이 없다. 선택육종의 결과 공통적인 체형과 외모를 지닌 것뿐이다.’ 저자들은 장애인을 돕는 보조견을 효율적으로 육성하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결국 모든 개는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아지 때 인지, 기질, 자제력, 기억력 등을 다면적으로 파악해 보조견이 될 만한 개는 전문적으로 훈련하고, 다른 특성을 지닌 개는 일찌감치 맞는 역할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 헌법 제1조를 참담하게 깔아뭉개는 일이 6개월째, 매일같이 벌어진다. 가장 기막힌 것은 어떻게 저런 자들이 국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느냐는 물음이다. 손바닥에 임금 왕자를 쓴 채 티브이 토론에 나온 날부터 윤석열과 김건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엽기적인 행각을 이어갔다. 비상계엄 당시 행적이 분명치 않은 전직 국무총리는 헌법재판소를 장악하려다 좌절되자 느닷없이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며 무리수를 두다 망신을 당했다. 집권당이었던 국민의힘은 대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런 저질 쇼를 펼치는가? 한편 전직 기획재정부 장관은 헌법재판관 임명을 두고 꼼수를 부리더니, 환율을 방어해야 할 경제 수장이 원화 평가절하 때 이익을 보게 되어 있는 미국 국채에 투자한 사실이 밝혀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뿐인가? 법원은 검찰과 손발을 맞춰 전례 없는 법 적용으로 내란 수괴를 풀어준다. 대법원은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에게 판결로 영향을 미치려 한다. 국가가 어떻게 되든, 국민은 죽든 말든 기득권 세력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식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과 맥락이 있지만, 인재 양성과 등용 체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시험 치는 기술로 사람을 평가하고, 어린 나이에 정한 기준에 든 사람을 높이 쳐서 사회와 거리를 둔 채 엘리트 코스를 밟게 하는 관행은 공부 잘하는 바보, 비겁하고 교활한 관료를 만들기 딱 좋다. 특정 학교와 직군끼리 패거리 짓는 문화가 싹트기에도 더없는 조건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지난해 123일 이후 벌어진 일을 지문으로 주고 올바른 행동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낸다면 앞서 예로 든 모든 사람이 만점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왜 행동은 다를까?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특별 대접을 받았고, 자신의 계급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수석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 훌륭한 사람인가? 청렴하고 공정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공동체가 어찌 되든 자기 이익만 챙기고, 동료 엘리트와 결탁해 그런 사실을 감추고, 항의하는 시민을 짓밟는다면 없느니만 못한 존재, 도려내야 할 종양에 불과할 것이다. 지난 6개월간 우리는 이런 자들을 너무 많이 봤다.

어떻게 하면 사심이 없고, 공정하며,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키우고, 적재적소에 등용할 것인가? 우리가 천운으로 이번 사태를 극복한다면 제도의 정비와 함께 반드시 이 점을 돌아봐야 한다. 언제까지 시험 잘 치는 요령만 익힌 얄팍한 자들을 인재로 대우할 것인가? 한낱 개조차 특성을 다면적으로 파악해 교육한다지 않는가?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 한겨레 2025.05.12.

 

누가 이재명 만독불침의 수호신인가

일생 동안 보수만 학살하다 가는구나.”

12·3 비상계엄령 나흘 뒤인 지난해 127일 전 국민의힘 의원 김웅이 대통령 윤석열을 향해 한 말이다.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시절 적폐청산 수사를 통해 보수를 죽이더니 대통령이 되고 나선 비상계엄 선포로 보수를 죽이느냐는 비판이다. 나는 보수 학살표현이 가슴에 강하게 와닿는 게 있어 한달 전 이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윤석열의 보수 죽이기에 국민의힘이 져야 할 책임을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책임을 묻긴 했지만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같은 수준에 놓진 않았다. 윤석열의 정체성이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독특했기 때문이다. 사악함과 우둔함이 혼합된 윤석열의 괴물성은 뜻밖에도 희극적이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가 자신을 파면한 것에 대해 둔기로 얻어맞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했다나. 탄핵이 인용될 줄은 전혀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 계몽용계엄을 주장할 때엔 살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하는구나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모든 말을 상황에 따라 지어낸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서 65년을 산 사람이 마치 딴 세상에서 온 것처럼 전혀 엉뚱한 말을 해댄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곤 하지만, 저런 판단력으로 대통령으로 일했다는 게 무섭지 않은가?

윤석열의 집권을 분노와 살기로 바라본 사람들 역시 무서웠다. 그의 대통령 취임 6개월 만에 대통령 전용기의 추락을 빌고 경찰의 무기 사용을 권하는 성직자들이 나타났고, 야권 진영, 아니 온 나라가 그런 증오와 혐오가 들끓는 살벌한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부 영향력 있는 원로 지식인들조차 특정 진영의 지도자에게 위대하다는 찬사를 바치면서도 화해와 통합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양극화된 진영 전쟁에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자신의 과오와 문제에 대해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윤석열은?”이라는 한마디로 족했다. 미진하면 그럼 김건희는?”이라고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이재명은 경기도지사 시절 무협지 화법으로 말하자면 난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라고 호언했다. 만독불침은 어떠한 독에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그건 그에게 바쳐진 찬사처럼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만독불침을 가능케 한 수호신은 하늘이 아니라 윤석열이었다.

윤석열을 겨냥한 증오 마케팅은 대성공이었다. 유권자들이 식상할 겨를이 없었다. 윤석열 부부가 늘 신선한 재료를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적폐청산 수사와 비상계엄 선포만으로 보수를 학살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공사를 구분하지 않는 권력의 사유화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면서 그걸 정권과 여당의 정치적 문화로 고착시킴으로써 보수를 확인사살했다. 그는 김건희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고 사실상 장려함으로써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야매 정치가 기승을 부리게 만들었고, 이게 계엄으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이 모든 걸 방관했던 국민의힘은 계엄에 대한 윤석열의 책임을 물었던 당내 인사들을 탄압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윤석열과 같은 수준의 한통속이 아닌가. 문제의 핵심은 계엄을 저질러 파면당한 윤석열과의 관계 설정인데, 국민의힘은 사실상 윤석열을 껴안는 길을 택했다. 같이 죽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러면서 대선엔 왜 기대를 거는가? 국민의힘이 이재명과 민주당을 향해 나라를 망칠 세력이라고 아무리 비난해봐야 소용없다. “너희들보다 더 망치겠느냐?”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국민의힘은 대통령직을 미친 짓 하나로 날려버린 윤석열에게 몰매와 저주를 퍼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왜 그를 모시지 못해 안달할까? 의리? 아니다. 그건 노예근성이다. 권력에 맹종하던 두뇌가 몸에 각인시킨 버릇이다.

대선은 시늉일 뿐 친윤 의원들의 주된 관심은 당권과 의원직이라는 기득권 보호일 뿐이라는 시각이 유력하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니다. 그들 역시 윤석열처럼 딴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쇼를 보라. 국민의힘은 어떻게 하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지 그것조차 전혀 모르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전 대구시장 홍준표가 최후의 순간에 옳은 말을 했다. “윤석열은 나라 망치고 이제 당도 망치고 있다.” 그걸 이제서야 알았다는 게 놀랍다. 윤석열의 광기 어린 자해를 지적하고 비판했던 한동훈을 그간 배신자로 모욕했던 것에 대한 사과를 곁들였더라면 더욱 좋았을 게다.

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 한겨레 2025.05.12.

 

민주당,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1870~1924) 사후에 발간된 그의 전집 중 <여성의 해방>은 실제로는 반여성적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레닌은 동료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이 여성 당원들에게 성 문제(피임)를 주제로 토론을 조직했다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클라라, 당신이 저지른 잘못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레닌) 들은 바로는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독서와 토론을 하도록 지정된 저녁 시간에 성과 결혼 문제를 우선으로 취급했다고 하더군요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소.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초로 무산계급 국가가 전 세계의 반혁명 세력을 상대로 투쟁 중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단결해야 할 이때에 결혼 문제를 두고 토론하느라 바쁘시군요.” 레닌의 입장에서 보면, 체트킨은 혁명 의식을 고양해야 할 시간에 사소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한가한 남성의 입장이며,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남성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여성은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지만, “여성의 민주주의는 나중에라는 주장은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현실 정치권을 포함한 범진보 세력의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는 입장은 유래가 깊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배제 없는 사회인데도 우리는 늘 민주주의를 다수결 논리로 착각한다. 아니, 이는 착각이 아니라 명백한 이해관계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젠더가 계급, 인종처럼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남성과 여성이-협상은 가능할지 몰라도-“단결해야 할 때는, 없다. 일상생활은 물론 국가 건설, 사회운동, 혁명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다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인간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이중의 억압을 겪거나 남성보다 두세 배 노동을 담당한다.

투쟁 과정에서 여성의 업적을 인정하고 여성을 알아서 배려하는 정치가는 매우 드물다. 우리 정치사에서 그런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여성이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있으려면 힘 있는 남성에 의해 픽업되거나 최소한 그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정치권 바깥에서는 여성 정치인을 응원해도 남성 정치인은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엉뚱한 여성을 뽑는 사례도 많다. 정치와 젠더(성별 제도) 이슈에는 대의(大義)는커녕 기본적인 대의(代議)나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작은 파이를 놓고 여성들끼리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사회적 약자의 분열은 안타까운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여성의 요구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깊고 폭넓은 정치이다. 이른바 사적이라고 불리는 영역과 무의식 그리고 체현(體現)까지 아우르는, 보다 근본적인 역사 창조다.

진보·보수든 여·야든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남성끼리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남성 연대(male bonding) 혹은 적대적 공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 연대에도 어느 정도의 룰이 있다.

계엄, 남성 연대의 파탄

윤석열 일당의 계엄령 사태, 대행의 대행의 대행의 정치, 고등법원에 의해 제지되긴 했지만 작금의 대법원 행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쿠데타 등은 최소한의 상식도 찾아볼 수 없는 난장판이다. 이때 여성들은 성평등을 말할 뿐 아니라 비상식적인 남성 정치 세력과도 싸워야 하는데, 작년 123일 이후의 일상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현재 대한민국의 내란, 내전 사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한 부정의한 남성 연대조차 반칙을 일삼는 이들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다.

인간사 전반의 선택, 즉 무엇이 최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가는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 대개 힘의 원리에 달려 있다. 하지만 광장에서 여성들은 힘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들은 힘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국민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미리 겁먹고 일부 남성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다. 차선이든 최선이든 민주당에 투표할 의사가 있는 여성이 더 이상 자기 갈등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민주당의 성평등 정책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당이라면, 성평등 정책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느 약자 집단에나 여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과 사회적 약자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3년 전 이재명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 때 여성에게 혐오적인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노골적으로 민주당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민주당? 믿을 수 있는가. 이전의 문재인 정권도 이미지와 달리, 여성 친화적이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가 아니었다. 트럼프가 재당선된 직후 미국의 라틴계 배우 에바 롱고리아는 더 이상 민주당은 히스패닉이 당연히 민주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에서 만일 민주당이 젊은 남성들을 의식해 젠더 관련 정책을 폐기, 은폐하려 한다면 반면교사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우선, 남성의 투표율이 여성보다 낮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도 남성 76.8%, 여성 77.5%였다. 둘째, 여성이나 남성이나 똑같이 한 표인데 왜 남성의 표만을 의식하는 것일까. 11표라는 원칙도 잊은 모양이다. 남성은 온전한 인간이고 여성은 반쪽 인간(half-person)’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다. 성차별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것이다. 셋째, ‘성평등 정책=남성 표 이탈이라는 고정관념이 실제로 확인·실증된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 사회의 대통령 선거를 좌우하는 가장 큰 모순은 지역, 세대, 남북 문제 아닌가? 만일 젠더 정치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젠더가 주요한 사회적 모순, 인식론으로 자리 잡은 바람직한 현실일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광장의 목소리를 담은 사회대개혁 온라인 종합 페이지 천만의 연결에서 가장 많이 요구된 의제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는 응원봉을 들고 광장을 주도했던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을 묻는 질문에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했다. 국민이라는 거대 공동체 모두의 성과다. 모든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다(주간경향 1626광장의 외침은 어디로, 진보 어젠다가 사라졌다”).

논공행상을 행하라

민주당은 여성에게 빚이 있다. 만일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상당 부분 여성의 공이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당연한 이치인데 여성 집단에만 예외여서는 안 된다. 이 후보의 위 발언은 3년 전과 달리 젠더 이슈는 피해 가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여성의 참여는 급격히 높아졌는데, 여성을 위한 정치는 후퇴하고 있다. 작년 123일 이후 대선 정국에 이르기까지 광장에서 여성들 특히 20, 30대 젊은 여성의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광장 자체가 성별화됐다. 또래 남성보다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이에 대한 많은 분석이 이루어졌다.

상대가 누구든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어대명’. 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재명에서 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인 상황이라면, 민주당에 필요한 과제는 우클릭이 아니라 겸손과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책이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지만 윤석열 정권 3년 동안 여성의 삶은 크게 후퇴했다. ‘문제는여성들의 의식이 예전에 비해 크게 진보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고통은 배가된다.

레닌의 대표적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의 영어 표현을 직역하면 무엇이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이다. 나는 수동태 표현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할 것인가는 이미 무엇이 이루어진 상태(to be done)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무엇이 되었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 입장에서 내키는 투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기권을 피하기 위해, 단지 황망한 계엄 세력과 더 황당한 정당을 피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 경향 2025.05.13.

 

트럼프 관세와 제국의 욕망

지난 주말 중국과 미국이 상호관세 장벽을 낮추기로 합의하면서 중·미 관세전쟁의 향방에 다시 이목이 쏠린다. 무역 금지령이나 다름없던 양국 간 엄포용 관세율은 유동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향후 트럼프 1기 수준을 기준으로 조정될 수 있어 보인다. 트럼프 2기의 급발진이 중국산 제품에 의존해온 미국 소기업들에 타격을 입히면서 민생고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그간 소비시장과 안보우산을 제공했으니 고율 관세로 값을 치르라던 동맹국들에 대한 협박도 개별 협상이 진행되면서 나라마다 양상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미 간에 공급사슬이 분리되는 시나리오보다는 첨단 분야의 전략적 경쟁과 기타 분야의 협업 공존이라는 낙관적 시나리오 쪽으로 기울어온 기존 인식의 재검토 필요성은 남아 있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궁극적인 목표가 인공지능 등 기술 패권에 기초한 제조업 부활이라고 알려져 있다. 트럼프가 위대한 미국으로 찬양하는, 남북전쟁 전후부터 1913년 연방 소득세 도입 이전까지의 시기도 고율 관세로 보호무역을 추진하면서 제조업 육성에 열 올리던 시절이긴 했다. 부자들이 누진 소득세를 부담하지 않았기에 관세에 대한 의존이 컸던 당시 미국 제조업 성공의 원인은, 하나는 산업정책의 유치산업 보호 효과였고 다른 하나는 사회 기반시설과 공공서비스의 확충을 통해 노동자 가구의 생계비를 낮추고 기업의 원가 부담을 줄인 데에 있었다.

기실 미국 자본주의가 지난 수십년간 제조업 이탈을 겪은 원인 역시 주택·교육·보건·연금·교통·통신 등 공적인 공급이 가능한 서비스의 민영화로 금융자본의 지대 추출 기회가 늘면서 경제 내 고비용 구조가 고착된 데에서 찾아야 옳다. 그러니 트럼프처럼 관세폭탄 날리고 부자감세에 진심이어서는 제조업 부활이 잘될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에는 오직 제국주의 미국만 시도할 만한 방법으로, 한마디로 다른 나라의 생산 능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미국 바깥의 제조업체들은 관세를 부담하면서 자국 생산을 할 게 아니라 미국 내로 생산 단위를 옮겨오라는 상무장관 하워드 러트닉의 거듭되는 촉구에서 확인되듯 지금 미국은 세계 제조업 역량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 시대 일극 패권국가인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완성된 제국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경쟁국의 저변이 확대됐고 식민지의 직접 관리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던 탓이다. 더욱이 산업 경쟁력 문제가 장기화하자 미국으로서는 대외 적자와 국가채무의 누적에 따른 패권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전략 변경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 변경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을 약화시키고 안보와 고율 관세를 미끼로 종속국과 도전자 나라들의 생산 및 고용 기반을 앗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미국이 완성된 제국으로 도약하려는 그 헛된 욕망의 과정은 또한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이 다른 나라 민중들의 삶 속으로 고스란히 전가되는 고통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구체제 내란 세력에게 그런 미국은 연명 수단 이상이다. 트럼프가 원스톱 쇼핑장바구니에 정확히 뭘 담았는지, 이달 15~16일 한·미 정부 간 2차 통상협상을 거치면 어떻게 달라질지, 내막을 알 길 없는 조급한 밀실 협상 과정에서 내란 정부가 관세, 주한미군 주둔비, 농산물 추가 개방 등 첨예한 사안들을 어떻게 다룰지, 한숨부터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행여 뒤질세라 한·미 동맹 결의부터 서두르며 미국의 인정에 목이 타는 제1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들 사정이 다를까. 미국이 전략적 파트너로 간택해주기를 고대하며 미국 측 조건을 상당 폭 수용하고 상호관세에서 다소 양보를 받는 정도의 절충에 스스로 갇히지는 않을까. 품목별 관세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는 연관 산업에 대한 대책은 충분할까. 이제 다자주의는 끝났으니 결국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가자면서 혹시 한··FTA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재추진하고 한·FTA를 미국 입맛에 맞게 재협상하려 들지 않을까. 석수역의 전봉준 트랙터를 적시던 농민들의 눈물 같은 비는 어느 세상이 돼야 마를 수 있을까.

우리는 세계 경제의 다극화라는 긴 흐름 속에서 진정으로 탈미국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됐다. 제국의 일방적인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국민국가의 정책 자율성을 지켜내면서 국제 협력의 범위와 영역, 수출입망을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한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하고 다변화할 때가 됐다. 그와 같은 대외정책 방향을 진보 정치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발전시키고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갈 때가 됐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 경향 2025.05.13.

 

집으로 가출한 아이들

4월 초 검정고시가 있었고, 진료실은 결과를 보고하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내가 진료하는 10대 중 3분의 1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어서다. 예전에 학교 안 다닌 아이는 대개 가출을 반복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 혹은 심한 폭력의 피해자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10년 새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에는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거나 학폭위가 열릴 수준의 충돌을 빚기보다는 학교 다니는 게 최고의 스트레스인 아이들이 많다. 부모는 선량하고 아이를 무척 염려한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부모 모두 양육에 적극적이다. 아이 성향은 내성적인 편이고, 초등학교까지 공부 잘하고 학원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 학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교복까지 입고 나서려다가 멈춰요.”

어렵사리 부모가 학교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지만, 교문 앞에서 등교를 포기해버리는 날도 늘어난다. 학교 가는 게 큰 모험이 된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이들 떠드는 소리, 책걸상 부딪치는 소리가 고통스럽다고 한다. 옆자리에서 무신경하게 내뱉는 말이나, 툭툭 몸이 부딪히면 위협으로 느낀다. 부모의 기대에 맞추려는 학업 스트레스가 얹히고, 학년 초에 친구들 그룹에 끼지 못하면 급식을 안 먹고 하루하루가 버거워지다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고 자퇴로 이어진다.

소아정신과 의사 류한욱과 심리학자 김경일이 쓴 책 <적절한 좌절>에서는 이 현상을 집으로 가출한 아이들이라 절묘하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갸우뚱했는데 읽어보니 고민하던 부분이 명료해졌다. 예전에는 갑갑한 집과 권위적 부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했는데 지금 10대에게는 집 밖, 특히 학교가 위험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집 안으로, 자기 방 안으로 숨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학교는 시끄럽고 불편하고 타인의 시선을 종일 견뎌야 하니 교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지친다. 생활 소음 수준의 외부 자극이 고통스러운 공사장 소음으로 느껴진다. 그에 반해 방 안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느덧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용기를 낼 일이 된다.

아이를 방치해서 그런 게 아니다. 너무 열심히 아이를 양육한 것이 역효과를 냈다.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의 길을 찾고 장애물을 미리 제거해주며 함께 나아갔을 뿐이다. 부모의 애정이 과잉 공급됐고, 아이는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라나 정서적 비만이 되어버린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결심이 아이의 사회적 근육을 흐물흐물하게 하고 정서적으로 과하게 민감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잘해보려는 부모와 민감한 아이가 하나가 되어버린 부정적 시너지다.

아이들은 두통, 소화불량 같은 애매한 신체 불편감을 느끼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호흡이 곤란한 것 같다는 신체 신호를 불안으로 인식하는 게 특징이다. 조용한 자기 방에 머물다 보니 내면에서 오는 신호들에 귀를 기울이는 데 익숙해지고 쉽게 잘 찾아낸다. 부모는 심리상담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내면의 상태를 관찰하는 데 몰두하는 아이들에게 일반적 상담은 그런 면을 더 강화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부모 문제로 타깃이 바뀔 위험도 있다.

방을 나와 집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내면의 신호에서 생활 소음을 적당한 잡음으로 이해하고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집 밖은 위협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이 돼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증상을 묻지 않는다. 뭘 했는지 묻고 칭찬하고 북돋아준다. 관심을 외부로 돌리며 탐색하도록 하면 내면의 신호는 줄어든다. 이 과정은 천천히 일어난다. 부모는 지켜보며 외출을 제안하고 차근차근 재활치료를 하듯 사회화 과정을 다시 거치도록 하되 개입은 최소화한다. 부모가 자기 불안을 견딜수록 아이는 성장을 다시 시작한다. 세상을 향한 진짜 가출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경향 2025.05.13.

 

한반도의 거대한 전환6·3 대선의 역사적 의미

21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거리에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202563일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는 역사적인 선거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환이 예상되는 해에 펼쳐지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방 이후 80년간 한반도를 짓눌러온 냉전 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치러지는 첫 선거다. 6·3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은 한반도 탈냉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게 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을 기형적 냉전국가로 고착시킨 강고한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국가 체제를 세우는 일이 그의 손에 달렸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은 우선 냉전 체제평화 체제로 바꾸는 대전환의 시대적 사명을 떠맡지 않을 수 없다. 2025년은, 지난 연말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의 제목처럼, “트럼프-김정은 제2막이 세계를 뒤흔드는해가 될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반도 냉전 체제의 해체가 시작될 것이다. 종전 선언, 평화 협정, -미 수교로 이어지는 냉전 해체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출판된 책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예상하듯이, 올가을 도널드 트럼프의 평양 방문과 연이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 참석이 이뤄진다면 지난 80년간 한반도를 옭아매온 냉전의 족쇄를 풀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6·3 대선으로 탄생할 한국의 대통령은 트럼프, 시진핑, 이시바 시게루 등 역내 주요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아펙의 호스트로서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거에 국제적 정치인으로 부상할 것이다. 신임 대통령은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냉전 시대에 관성화된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창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외교의 케이(K)-이니셔티브를 보여야 한다.

나아가 새 정부는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로 뿌리부터 흔들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의 정치 지형을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에서 명실상부한 진보-보수 경쟁체제로 재편해야 한다. 윤석열 내란 사태와 그에 이은 국민의힘 소란 사태는 이 정당이 수구보수 정당이 아니라 수구파시스트 정당임을 자백한 것이다. 이런 반민주적 정당이 거대 양당 체제의 한축을 담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쿠데타를 자행한 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정당이 최악의 경우라도다시 제1야당이 되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새로 탄생하는 정부는 중도보수 정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정립함으로써, 오른쪽으로는 수구파시스트 정당을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왼쪽으로는 합리적인 진보 정당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이 나라의 정치 지형을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정상 형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새 정부는 또한 적극적으로 사회대개혁에 나서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교육개혁이다. 윤석열 내란 사태와 의사 파업 사태는 한국 교육이 길러낸 최고의 엘리트들이 파시스트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주었다. 서울 법대 내란과출신의 법조인들과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의사들은 한국 교육의 파탄을 상징한다. 한국 교실에서 12년 교육을 받으면, 특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모범생일수록,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파시스트가 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새 정부는 교육혁명을 통해 사활을 건 전쟁터에서 파시스트를 양산하는 극단적 경쟁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대전환의 시대에 치러지는 2025년 대선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현재로선 집권이 유력해 보이는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한반도 탈냉전의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여 국제적으로는 담대한 균형외교를 펼치고, 국내적으로는 과감한 사회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 시대적 과제를 이번에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 문재인 트라우마위에 이재명 트라우마가 겹친다면, 민주당의 운명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요컨대, 6·3 대선은 냉전 기생 세력과 탈냉전 평화 세력의 대결이고, 파시즘 세력과 민주 세력의 대결이며, 수구 세력과 개혁 세력의 대결이다. 탈냉전, 민주, 개혁 세력이 압승하여 한반도의 평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한국 사회의 개혁을 기필코 이루어야 한다. 다가올 대선은 영구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사회개혁을 감행하는 용기와 비전의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대선 이후 펼쳐질 한반도의 거대한 전환을 상상하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나날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 한겨레 2025.05.13.

 

기재부 해체만으론 안 된다

코로나19가 최고조에 달했던 2020·2021년은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기획재정부의 갈등 역시 정점을 찍었던 때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20204월 총선에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공약했지만, 기재부는 소득 하위 70%로 한정해야 한다며 맞섰다.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가 재난지원금을 30만원씩 50, 100번 지급해도 서구 선진국의 국가부채 비율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홍남기 당시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책임감 없는 발언이라고 맞받았다. 20211월에는 자영업자의 손실보상 법제화 문제를 놓고 기재부가 법제화한 나라는 찾기 어렵다며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가 격노하며 했다는 말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여기가 기재부의 나라냐발언이다.

당시 충돌의 근본적인 이유는 재정정책에 대한 양쪽의 관점 차이였다. 민주당은 국가채무가 일시적으로 증가하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과 국민 피해를 정부지출을 통해 줄여야 한다고 보았고, 기재부는 국가채무가 늘면 재정건전성이 흔들릴 수 있는 만큼 정부지출을 가급적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국가채무를 다소 늘리거나 세금을 올리더라도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경기침체를 방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재정확대주의와, 재정적자를 최소화한 예산 편성을 통해 국가채무 증가를 막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여기는 재정보수주의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재부는 곳간지기로서의 의무를 내세우는 재정보수주의의 뿌리가 깊다. 박재완 전 기재부 장관은 기재부가 복지 포퓰리즘에 맞선 최정예 전사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들에 견줘 정부 규모와 복지지출 규모가 작고 국가채무 비율이 낮은 것은 이런 전통의 결과일 것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대선을 앞두고 기재부 해체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주당은 소속 의원들이 관련 법안들을 발의했고,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조국혁신당은 지난달 30기획재정부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구체적 방안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핵심은 대체로 기재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또는 예산처, 기획예산부)로 쪼개자는 것이다. 그중에는 예산 부처를 대통령실 산하에 두자는 주장도 있다.

개편 명분은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다’ ‘다른 부처들의 상위 부처로 군림한다등 여러 갈래가 있지만 주요한 부분은 기재부의 재정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재난지원금 등 자금을 유연하게 운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국가부채 등의 사유를 들어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허성무 민주당 의원)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가 예산에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채 기재부에 종속되고 있다”(조국혁신당) “윤석열 정부의 기재부는 표면적인 건전재정 지표에 집착해 재정의 경기 부양 역할을 거부했다”(정일영 민주당 의원)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노동·복지·교육 등 확장적 재정정책을 가로막는 기재부의 보수적인 행태는 국가 경제의 균형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박홍근 민주당 의원)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기재부를 쪼갠다고 재정보수주의를 바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을 개편한다고 사람들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재부 소속에서 예산처 소속으로 바뀐다고, 대통령실 직속으로 옮겨 간다고 곳간지기의 디엔에이(DNA)까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재정보수주의는 기재부를 넘어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강력한 이념이다.

조직 개편만큼 중요한 것은 재정보수주의에 맞설 수 있는 근본적이고 정치한 재정전략이다. 어느 수준의 정부지출과 복지를 지향할 것인지, 이를 위한 재원 조달은 어떻게 할 것인지, 국가채무는 어디까지 늘릴 수 있고, 세금은 얼마나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종합적인 청사진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관료들을 이끌어야 한다.

만약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정권을 잡는다면 재정보수주의와 다시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하반기 2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추진할 예정이고, 이재명 대통령 후보는 아동수당 확대, 자영업자 채무 조정·탕감, 지역화폐 발행 규모 확대, 인공지능 예산 증액 등 재정 소요가 큰 공약들을 내놓았다. 벌써 퍼주기 경쟁’ ‘나랏빚 급증 우려같은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재정에 대한 치밀한 고민과 전략이 있어야만 정부 안팎에서 몰아치는 반발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선희기자 | 한겨레 2025.05.13.

 

내란 주축 세력은 성적중심 경쟁교육의 승리자들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차 내란 윤석열의 12·3 계엄에 이어, 지귀연-심우정 합작 내란수괴 탈옥이라는 2차 내란, 조희대 대법원의 3차 내란. 다행히 지금까지 지속된 연속 내란은 시민저항에 부딪쳐 모두 실패했다. 민주시민으로 사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인 민주공화국 주권자 덕분이다.

윤석열, 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이들 내란 주연들은 하나같이 같은 대학 동문들이다. 내란 동조 의혹을 받고 있는 조연들은 어떨까.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이상민 행안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대법 전원합의체에서 이재명 공선법 사건 파기환송에 찬성한 9명의 대법관. 이들 역시 거의 같은 대학 출신들이며, 모두 소위 SKY 출신이다.

과도한 권력과 부를 차지하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

봉숭아 학당보다 더 기괴하고 한심한 작태를 보인 국민의힘 대선후보 쟁탈전 주자였던 김문수, 한덕수도 마찬가지다. 다들 같은 대학 동문들이다. 소위 SKY 출신들이 모두 이들처럼 권력과 부가 보장된 자리에 가지는 않지만, 거꾸로 권력과 부를 차지하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소위 SKY 출신들이다.

이들은 보나마나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이들이 그 대학에 합격했을 때는 자랑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더 많은 공적 자원이 집중되는 것을 동의하거나 눈감아 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시험을 통과해 얻은 알량한 자격증을 얻어 큰 권한 행사하는 자리에 진입했고, 사회는 이를 용인해 왔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하나같이 탄핵당하고, 탄핵 직전 사퇴하고, 내란 동조 의혹으로 수사대상이 되고, 국민 분노와 지탄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선망 대상으로 삼고, 롤 모델 삼고, 내 아이를 그 트랙에 올라타게 하고 싶었던 기대와 욕망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무언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났다. 경고음이 울릴 때가 수리를 해야 할 때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석열, 한덕수, 김문수, 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오만과 자만심이 세상과 그 스스로를 망치게 하는 교육

우리는 지금 교육목적이 소위 SKY 입학, 그것도 법대와 의대 입학이 되는 사회의 필연적 결과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교육이 입시준비와 등치되고, 진로는 입시와 동의어가 된다. 교육은 어린 사람들이 성장의 기쁨을 누리며 자라 삶의 주인이자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일이어야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그 반대로 질주해 왔다.

시험 잘 보는 능력, 그것도 객관식 선다형 시험 잘 보는 능력은 참된 지적 능력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인간이 가지는 무수한 능력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능력이 다른 모든 능력을 압도하며 사람에 대한 공적 평가 잣대가 되면 자존감 대신 자만심에 포획된 이들이 세상을 망치며, 결국 자신도 망친다. 이들에게 다양성 인정, 상호존중, 비판과 견제, 집단지성 같은 민주주의 원리는 이해불가 영역이 된다. 경쟁교육 수혜자이자 승리자들이 벌인 내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적중심 경쟁교육은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복합적 존재인지 다들 알면서도 성적 외의 모든 요소들을 거세하도록 강요한다. 그리하여 성적 상위 아이들은 승자의 오만과 경쟁탈락 두려움에 휩싸이고, 성적 중하위 아이들은 자존감 약화와 의욕상실, 무기력에 시달린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잠재력을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 발휘할 기회를 원천차단 한다.

성적중심 경쟁교육체제 수혜자이며 승리자들인 내란세력들이야말로 이 체제를 바꾸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체제의 꼭대기에 올라오기까지 이들은 우월의식과 차별과 혐오를 내면화한다. 그러니 9, 8수까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그들에겐 인간승리로 미화되지 않겠는가. 그들에게는 헌법과 민주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파괴하는 일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민주주의 구한 헌법처럼 교육기본법이 교육 살리게 해야

법전 속 활자에 불과했던 헌법이 내란세력을 응징하고 있다. 활자에 불과했던 헌법조항들이 비로소 현실 속에 작동해 민주주의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력과 소중함을 확인하고 있다. 헌법 제65조 국회의 대통령·국무위원 등 탄핵소추 의결권, 헌법 제77조 비상계엄 구성과 해제요건, 헌법 제113조 헌법재판소 탄핵결정권, 헌법 제116조 선거운동 균등기회 보장권 등이 그렇다.

이제 헌법처럼 교육기본법 제2조가 우리 안에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교육기본법 제2)

누군가는 이번 내란세력은 박정희·전두환 교육 산물이 아니냐며 반문할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군사독재가 끝난 후 첫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는 5·31 교육개혁으로 더 노골적으로 경쟁과 효율원리를 앞세운 교육정책을 추진했고, 부끄럽지만 김대중 정부는 교육을 인적자원 양성으로 보며 교육부를 아예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꿨다. 이 기조는 오늘날까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성적중심 경쟁교육은 아이 낳기 거부하는 사회,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처럼 더욱 괴물이 되어 우리 아이들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젊은 SKY 출신들마저 엘리트 카르텔에 올라타 성적 중심 경쟁교육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 사태 때 전교1등 출신 의사운운하는 웹자보를 보지 않았나. 그러니 인격도야나 자주적 생활능력, 민주시민 자질을 기르는 교육이 설 자리는 내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여전히 SKY 합격자 수가 교육성공 잣대가 되는 사회다.

적자생존을 위한 교육 아닌 사람을 기르는 교육

또 하나, 교육도 사회의 일부이고, 극단적 양극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 경쟁사회에서 경쟁교육 비판은 하나마나한 공자님 말씀이라며 고개 돌리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그럴 듯한 사회구조적 관점을 앞세우지만 만물경제결정론이나 무한 순환론에 빠져 교육개혁을 회피하는 명분이 될 뿐이다.

제도나 정책이 사람을 규정하지만, 역으로 그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건 구체적인 사람이다. 이번 내란과정에서 내란세력들이 온갖 편법과 법·제도 허점을 악용해 내란진압에 저항하고 국면전환을 도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생생히 보고 있지 않나. 생존과 생계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경제정책도, 노동정책도 구체적인 사람이 만든다. 연금제도도 복지안전망도 마찬가지다.

성적중심 경쟁교육은 0.1% 기득권들에게 권력과 부를 독점할 공인 프리패스를 부여해준다. 이제는 대를 이은 계층 재생산에 부역하고 있기도 하다. 정책과 법·제도를 직접 만드는 사람도 중요하고, 그들이 어떤 정책과 법·제도를 만들게 할 것인가를 주문하고 요구하는 주권자 생각과 태도도 중요하다. 이 점에서 사람의 성장을 돕는 교육이 정책과 법·제도의 토대이자 동력이 된다.

이제 성적중심 경쟁교육 대신 정말 사람을 기르는 교육, 그것도 민주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하자. 그래서 오만과 엘리트의식에 찌들지 않은 민주시민인 대통령, 민주시민인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 민주시민인 장관과 총리, 민주시민인 군인이 당연한 사회가 되게 하자. 그것이 또 다른 내란을 차단하는 길이다.

강민정 전 국회의원 | 시민언론민들레 2025.05.13.

 

국민의힘,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지난 8일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공개 회동을 생중계로 보던 지인이 참으로 진귀한 볼거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단일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한덕수에게 김문수가 어디서 나온 거냐’ ‘왜 입당하지 않는 거냐고 하더라며 김문수가 한덕수를 갖고 노는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김덕수 단일화를 약속하고도 입을 씻은 김문수이지만, 그보다는 대선에 무임승차하려는 한덕수의 기회주의적 처신이 훨씬 밉상이었던 모양이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 반응도 비슷했다. 지인들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관련 속보가 속속 올라왔다. 그 뒤에는 어김없이 한덕수가 제일 나쁜 X’라는 식의 반응이 이어졌다.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이슈는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거기에는 배신, 모략, 개연성 없는 반전, 돌연한 역할 전도와 같은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누군가는 욕하면서 왜 막장 드라마를 보냐고 하지만, 사람들은 욕하려고 막장 드라마를 본다. 욕 나오는 상황이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대고 욕하면서 자신의 윤리 감각이 정상임을 확인한다.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막장극을 지켜본 사람들 심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 칭하는 자칭 호남사람 한덕수는 난데없이 새된 소리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인류애를 호소했다. 이 무의미한 음성에 합당한 반응은 욕일 수밖에 없다. 12·3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시종 옹호하더니 자신의 후보직 박탈 시도는 정치 쿠데타로 규정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도 부를 기세로 농성한 김문수, 그런 김문수를 두고 전형적인 좌파형 노선투쟁의 답습이라고 등에 칼을 꽂은 김문수 캠프 핵심 의원의 행태는 어떤가.

압권은 후보 교체 쿠데타를 주도한 원내대표 권성동의 처신이다. 단일화를 촉구하며 며칠 단식한 그는 김문수더러 알량한 후보라고 하더니 정치 쿠데타가 실패하자 다 묻자김문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정권 창출을 위해 매진하자고 했다. 김문수는 그런 권성동에게 이제 원팀이라며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겼다. 이 장면은 무엇 하나 맺고 끊지 못하는 이 당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찬찬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12·3 내란처럼 정치 쿠데타도 어물쩍 넘기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쿠데타 세력이 계속 자리를 보전하면 그 쿠데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한 것이라는 한동훈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그러니 극우의 지지마저 시들해진 윤석열이 물귀신처럼 국민의힘을 내란의 강에 묶어두려 준동하는 것이다. 정치 쿠데타 배후로 의심받는 윤석열은 한덕수가 낙마하고 김문수가 후보로 확정되자 페이스북에 올린 국민께 드리는 호소제하의 글에서 우리의 싸움은 내부가 아니라 자유를 위협하는 외부의 전체주의적 도전에 맞서는 싸움이라며 김문수 지지를 호소했다. 김문수는 윤석열 출당을 거부했고, 윤석열 친구인 내란 옹호자 석동현을 선대위 시민사회특별위원장에 임명했다. 12·3 내란 세력, 정치 쿠데타 세력이 국민의힘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국민의힘은 박근혜 탄핵으로 무너졌으나 그릇된 유산과 단절하지 않았다. 잘못을 직시할 용기,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결단을 대체한 건 눈앞의 상황만 모면하려는 조악한 꼼수와 기회주의였다. 기회주의는 이 당의 기풍이 되었다.

이 당 주류는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에 불참했고, 윤석열 탄핵소추에 반대했고, 윤석열 파면에 반대했다. 이준석을 내쫓고 나경원을 주저앉히고 한동훈을 끌어내리더니 김문수를 한덕수로 갈아치우려 했다. 황교안에서 윤석열로, 윤석열에서 한동훈으로, 한동훈에서 한덕수로 쉼 없이 간판을 바꾸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총선 참패, 내란 반대 물결에도 민심과 엇나갔다. 그러면서 윤석열 탄핵안이 기각되면’ ‘한덕수를 후보로 내세우면’ ‘김문수·이준석 단일화에 성공하면하는 식의 요행수만 끝도 없이 바란다. 도박꾼식 한탕주의다. 이 모든 게 오로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사욕의 발로이다.

정당은 헌정질서를 지키고, 정당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고, 민심에 반응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이 모든 걸 어겼다. 그런 당이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국민의힘이 살기 위해 할 일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와 반대로만 하면 된다. 골수에 박힌 기회주의 근성부터 도려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당은 어떻게 자멸하는가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정제혁 논설위원 | 경향 2025.05.14.

 

차이는 손이 아닌 발에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체적 특성 중 하나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의 존재이다. 우리는 손으로 수없이 많은 것을 만들고 가꾸고 다듬어왔다. 발로는 그런 걸 할 수 없다. 엄청나게 서툰 결과물을 접할 때 발로 만들었냐며 비꼬는 건 그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의 손은 해부학적 구성이 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는 물론이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구성하는 뼈의 수도 14개로 동일하다.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각각 5개의 뼈가 있으며, 이들은 다시 여러 개의 뼈들이 어우러져 커다란 관절을 구성하는 손목뼈와 발목뼈들과 맞물린다. 손목뼈가 8개인 데 비해 발목뼈는 7개로 하나가 적을 뿐 손과 발의 전체적인 뼈의 수와 구성, 그 배열 패턴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인간의 손과 발의 주된 기능과 할 수 있는 일은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만들어내는 차이는 엄지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발은 엄지가 다른 발가락과 나란한 방향으로 같은 각도로 붙어 있지만, 손의 경우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과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손에 붙은 각도 역시 비틀어져 있다. 이렇게 엄지가 분리되고 비틀어진 손의 구조는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의 끝을 마주 댈 수 있게 한다. 마주하는 엄지의 존재는 손이 물체를 세게 잡거나 움켜쥘 수 있게 만든다. 신체적으로 별다른 방어수단을 가지지 못했던 인류의 조상에게 있어, 높은 나무에 오를 수 있고, 나뭇가지를 쥐고 휘두르거나 돌을 잡고 던질 수 있는 능력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거나 먹잇감을 구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마주하는 엄지를 가진 존재가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침팬지 역시 비슷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우리의 생활 양식은 이미 오래전 갈라져 다르게 이어져 왔다. 비슷한 손을 가졌음에도 이토록 차이가 난다면, 진짜 차이는 다른 곳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주목한 곳이 바로 발이다.

사람과 침팬지의 차이는 손보다 발에서 두드러진다. 침팬지는 마주하는 엄지를 지닌 발을 가지고 있다. 나무 위에서 주로 살아가는 침팬지들에게는 손뿐 아니라 발도 나뭇가지를 움켜쥘 수 있어야 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숲속 영장류인 오랑우탄이나 고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인간만의 고유성은 마주하는 엄지손가락을 지닌 손이 아니라, 평행한 엄지발가락을 지닌 발에 빚진 바가 크다. 마주한 엄지를 지닌 손이 마음껏 날개를 펴고 잠재력을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원래 타고난 위치를 벗어나면서까지 발가락의 정렬을 다시 맞춰 손을 오랜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한 발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사람을 제외하고, 사지가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에게 앞발의 주된 역할은 이동수단으로써의 기능이다. 사지동물은 당연하고, 얼핏 이족보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류나 박쥐 역시 앞발을 날개로 변화시켰을 뿐,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다. 영장류들조차도 숲속에서는 손을 이용해 나무를 타고, 초원에서는 주먹 쥔 손을 땅에 짚는 너클 보행(knuckle walking)을 통해 이동하며 움직이는 데 손을 꼭 보탠다.

반면 인간은 손과 발의 기능 구분이 명확하다. 이동은 발이 전적으로 담당하며, 손은 이동에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를 위해 나무 위에 살 때는 분리됐던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들과 평행하여 단단히 땅을 누를 수 있는 위치로 이동했으며, 사지로 분산됐던 하중을 두 다리로만 받치기 위해 발바닥 구조 역시 아치형을 이루며 둥글게 휘어지도록 변화했다. 하지만 인간의 발은 애초에 분리된 엄지에서 시작됐는지라, 그 오랜 직립보행에도 불구하고 발에 가해지는 하중이 누적되면 엄지의 각도가 벌어지며 발이 변형되기 쉽다. 그게 바로 무지외반증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두 손으로 문명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인간의 손이 그 가능성을 모두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손을 이동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오롯이 몸을 버텨준 발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들 뒤에는 늘 그들이 최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스태프와 후원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 위 주인공만큼 무대 뒤 인물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경향 2025.05.14.

 

압도적 승리는 21세기 체공녀를 구할까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2019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좌파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평생 계급불평등 연구에 매진했다. 실현 가능한 대안을 구상하는 리얼 유토피아프로젝트를 생의 마지막까지 수행했다. 68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에는 체스 게임이라는 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 뒷줄에 선 왕과 귀족들이 앞줄의 졸들을 조종한다. 싸움에 이용되고 버려지던 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고 함께 흥겹게 춤춘다. 이윽고 새판이 시작된다. 이제 뒷줄에 선 졸들이 왕과 귀족을 앞세운다. 앞줄과 뒷줄은 바뀌었지만 게임의 규칙은 바뀌지 않았다. 불평등한 세상 그대로다.

반란조차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의 반란 대신 조금씩의 선거를 치른다. 그렇게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된다. 적대하는 정당과 지지자들 사이에 논쟁이 달아오르고, 온갖 이익단체와 사회단체가 요구를 내걸며, 언론은 여론을 달군다. 무시받던 약자도 이때만큼은 조금 관심을 받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겠다며 약속이 난무한다. 한표가 아쉬우니 벌어지는 일이다.

그 약속 중 상당수는 공수표가 된다. 심지어 후퇴하기도 한다. 열광만큼 냉소가 넘치는 이유다. 장자크 루소는 영국인은 선거 때만 자유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고 일갈했다. 대표자에게 맡기는 위임 민주주의는 필경 무조건적 신탁으로 퇴보하게 되니, 직접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다. 반면 독재자들은 선거에 대한 냉소를 이용하면서 민주주의 대신 독재자를 따르라고 선동한다. 거짓 약속이라며 선거에 냉소할 수도 없고, 거짓인 줄 알면서 열광할 수도 없다. 그 좁은, 없을 것 같은 틈 사이에서 길을 내야 한다. 위임 민주주의의 딜레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런 딜레마를 찾기 어렵다. 약속 따위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상상 이상의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국민의힘은 약속 여부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진지하게 해산을 고민해야 한다. 이명박의 ‘747 성장론을 빼닮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345 성장론이나 10대 공약도 별반 논란이 못 된다.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과 사회단체 등 진보진영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 후보를 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내란 진압이라는 긴급한 당위가 공론장을 뒤덮었다. 선거 때나마 조명받던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꿈에 대한 논쟁이 실종됐다. 지금은 불평등 완화나 차별 철폐의 요구를, 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비판을 꺼낼 때가 아니라는 경고가 준엄하다. 집권 이후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포괄적 위임, 신탁의 논리가 횡행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목소리들이 있다.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전봉준투쟁단은 결연했다. “사람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1987년 이후 역대 모든 정권이 농업, 농민을 무시하고 파괴했다며 대선 후보들을 직접 만나 확고한 대답을 듣겠다는 각오다. 경찰이 서울 진입을 원천 봉쇄했지만, 곧 다시 상경할 것이다.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 박정혜는 공장 옥상에서 농성 중이다. 521일이면 500일이 된다. 함께하던 소현숙은 얼마 전 건강 악화로 내려갔다. 이 회사는 일본 기업 닛토덴코가 외국인투자지역에 설립한 자회사로서 토지 무상임대, 법인세 감면 등 혜택을 받으며 수백억원의 이익을 내왔다. 2022년 화재가 발생하자 법인 청산을 결정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자회사로 고용승계를 요구했고, 박정혜와 소현숙이 불탄 공장의 옥상에 올랐다.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고진수가,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의 김형수가, 홈플러스 노동자들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공에서, 지상에서 단식하고 싸우며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고 있다. 명태균과 김건희의 문자에 시시콜콜 열광하는 주류 언론이 이들의 이야기에는 100분의 1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거대 정당들도 모른 체한다.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한남동에서, 남태령에서, 전국 곳곳에서 내란 진압에 앞장섰던 청년 여성들은 선거 국면이 되자 더불어민주당 주위에서 금지어가 됐다. 성평등 의제 자체가 금기라는 말도 들린다. “잡은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더니 인심이 무섭다. 심지어 여성 혐오 발언까지 들린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2.5배 이상 높아서 최고다. 남녀노소 모두 힘들다. 그중 청년 여성의 자살률 증가가 두드러진다. 높아진 기대와 차별의 현실 사이 간극이 아찔하다. 그 절박함에 응원봉 들고 광장에 섰을 것이다. 잡은 물고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이들이 아니다.

사회대개혁의 열망이 추운 광장을 메웠다. 농민도, 불안정 노동자도, 청년 여성도,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이주민도, 당신과 우리도 좀 더 나은 삶을 외쳤다. 그 목소리에 힘입어 선거가 이뤄지자 정치는 광장에 없던 기득권자들 몫을 챙겨주는 데 몰두하고 있다. 압도적 승리를 위해 우경화해야 한단다. 압도적으로 승리한 이명박 정권이 안정적이었던가? 한때 지지율이 90%에 이르던 김영삼 정권의 말로는 어땠나? 사람의 삶이 사라지면 지지율은 신기루일 뿐이다.

1931529, 평양의 원평고무공장에서 임금 삭감에 맞서 단식 투쟁을 하던 여성 노동자 49명이 새벽에 해고됐다. 쫓겨난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우리 49명 파업단의 임금 감하만이 아니라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 감하를 막기 위해서 싸운다고 외쳤다. 해고 노동자가 절반으로 줄었다. 체포된 강주룡은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내 죽었다. 젊디젊은 나이, 31살이었다. 공중에 머물렀다며 세상이 체공녀라고 불렀다. 노동자 고공 농성의 효시다.

남화숙의 책 체공녀 연대기1931년 강주룡부터 2011년 한진중공업의 용접공 출신 해고 노동자 김진숙까지 80년에 걸친 여성 노동자 고공농성 투쟁기를 다룬다. 김진숙의 309일 최장 농성 기록이 박정혜와 소현숙에 의해 속절없이 깨졌다. 투쟁기도 80년을 훌쩍 넘어 94년을 맞았다. 100년을 넘길 기세다. “아직은 이르다는 말만 계속하다가는 200년도 될 것 같다. 슬프고 아득하다. 하지만 나아가야 한다.

조형근 | 사회학자 | 한겨레 2025.05.14.

 

현실을 진짜 모르는 정치인은 누굴까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반국가세력은 무엇이었나.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며 계엄을 선포한다고 했을 때, 국가정보원이 대규모 간첩단이라도 포착했나 싶었다. 계엄 선포 전후 변명처럼 덧붙인 발언 어디에서도 그런 건 없었다.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간첩’이라는 단어만 25번 들었을 뿐이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은 그 세계관을 파헤치기 위해 윤 전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는 이른바 ‘극우’ 유튜버 채널 12개의 영상 600개를 수집해 분석했다.

흩어진 말들을 겨우 긁어모아 보니 그들이 말하는 ‘좌파’ 혹은 ‘간첩’이란 중국, 북한, 민주노총,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당시 대표 등을 뭉뚱그린 말이었다. 윤 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의 머릿속에서 민주당과 좌파언론은 민주노총이 장악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좌파 세력과 북한, 중국의 지령 아래 움직인다. 짧은 경험으로 미뤄볼 때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필시 그건 ‘좌파’ 세력은 아닐 거다. 민주노총과 민주당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좌파’ 세력은 모두들 조금씩 입장과 의견이 다르다. 중국과 북한을 싫어하는 ‘좌파’들도 많다.

윤 전 대통령과 ‘극우’ 유튜버들의 엇나간 인식은 20세기 미국 정치평론가였던 월터 리프먼이 <여론>에서 지적한 현대사회의 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근거리의 친밀한 관계가 현실의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대부분의 주어진 현실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하나의 국면과 양상뿐이다. 사람들은 손 닿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각자 머릿속에 만들고, 실제 세계가 아닌 허구의 세계 속에서 산다. 그 사이를 고정관념과 편견, 선전과 선동이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가 사실로 믿는 대부분은 판단이나 해석이다. “우리는 우선 보고 그다음에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정의부터 하고 그다음에 본다”는 말은 그들에게 딱 들어맞는다.

리프먼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선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론 조작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여론>을 썼다. 사람은 부분적으로 비슷한 것을 쉽게 동일시한다. “유니언 리그 클럽(미국의 보수 엘리트 단체) 회원들에게는 민주당원, 사회주의자, 그리고 도둑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그가 남긴 20세기 초의 묘파는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가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나쁜 사람을 본다.” 반대편은 “악당과 음모가로 취급”하며 “만일 박빙의 선거에서 진다면, 정치적 부패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리프먼의 생각은 민주주의의 본질, 이상에 대한 의문에까지 가닿는다. 시민들은 유권자로서 알 수 없는 세계,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민주정치를 삐걱거리게 만든다. 더욱이 이태원 참사도 산불도 모두 ‘좌파’ 탓이라며 내란을 부추기고 옹호한 ‘극우’ 유튜버들, 법원을 습격한 이들까지도 과연 시민으로서 존중받을 자격이 있을까.

 
 

리프먼은 비관적이었지만, 그 시각을 오늘날 모든 시민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최근 ‘불평등 물어가는 범청년행동’이 진행한 20~30대 청년 100명의 인터뷰를 읽었다. 청년들은 계엄과 폭동 사태를 잘못됐다 하면서 동시에 민주당도 똑같이 비판했다. 한계는 있지만 분명 시민들은 현실에 좀 더 가닿고 있다. 탄핵 과정에서의 집회와 연대 양상을 살펴보면 더 그렇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청년들도 정치를 “거대 양당 체제의 밥그릇 싸움”일 뿐이라고 하면서 “대통령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양당 대선 후보들은 경제 강국,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1순위 공약으로 제시했다. 여러분의 자녀도 나처럼 될 수 있다는 후보도 나왔다. 수십 년간 변하지도 않는 구호와 매번 똑같은 전통시장 방문이 지겹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정말 그것인지 묻고 싶다. 윤 전 대통령의 사례처럼 진짜 그들이 보는 세계가 그렇게 편협할지 모른다는 것이 무섭다. 김문수 후보는 ‘극우’ 유튜버들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어쩌면 첫 일정으로 고공농성장을 찾은 후보처럼, 현실을 모른다고 치부받는 정당과 정치인이 가장 우리 현실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경상 기자 | 경향 2025.05.15.

 

언론 자유 성적표KBS와 방심위를 돌아보며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 한겨레 2025.05.15.

 

그 사람의 통합이 뭘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2일 경기도 화성시 동탄 센트럴파크 음악분수중앙광장 유세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후보가 신은 운동화에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공동취재사진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 한겨레 2025.05.15.

 

김문수와 피로스의 승리, 그리고 이재명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 한겨레 2025.05.15.

 

정치는 약자들의 강한 무기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경향 2025.05.15.

 

있지만 없는 농어촌 공약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 경향 2025.05.15.

 

오동나무에 꽃 필 때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 경향 2025.05.15.

 

고용없는 성장, 지방청년들은 어찌 해야 하나

총실업률 3%, 청년실업률은 그 2.5배인 7.5%, 20189.8% 이후 최고치다. 통계청 고용조사는 총취업률 증가 소식을 앞세우나, 그런다고 공공근로 노인일자리 34만 명 증가 이면에 청년 취업 22만 명 감소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속사정까지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1/4분기 경제성장률 0.2%, 코로나 사태 이후 근 4년 만의 역성장, 트럼프 관세 유예 충격이 도달하는 7월이면 어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실업 청년들을 어쩔 것인가. 조기 대선의 각 후보 집중 공약은 단연 경기침체 해결, 성장, 지방균형발전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방은 숨넘어가는 판에 어떻게 균형 성장을 달성할 것인지 궁금하다. 외관상 고용시장 성장의 초점은 미래 성장동력 AI 중심 수도권, 수원 화성 용인 등 이른바 경기 남부 지역이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취업증가 집중, 지방 격차가 재현된다. AI가 미래 성장동력은 맞나? 오히려 기계가 사람 일자리를 대신하는 고용없는 성장 요인 아닌가? 디지털 성장론은 고용감소, 지방균형발전에 역행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고용노동부 대책은 뭔가.

저예산 고용노동부 땜질 처방은 대책 아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청년취업 고양책은 크게 노동시장구조 이원성(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생산직과 사무직)과 직업 격차, 둘째 직무역량 부족, 현장경험 부족, 셋째 대면 서비스업 퇴조와 디지털 (코딩)역량 부족에 집중하는 체계로 구성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무 현장교육, 코딩교육, 중소기업 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 세제 혜택, 주거 지원, 교통 인프라 등을 보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문화시설 공공기관 연구기관 인턴십 확대, 청년일자리 특화사업 20만원 6개월, 청년 채용 중소기업 청년일자리 도약장려금 80만원*12개월 등 총 25천억 원을 지원한다. 노동부는 이 정도로 청년 일자리가 충족될 거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를 전부 갖추려면 이 예산으로는 어림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체면치레 관료주의적 땜질 방식은 더 이상 안 통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청년창업 사정은 어떤가. 자영업자 3년 평균 폐업률 80%, 온오프라인 청년 폐업률은 연 20%로 사상 최대치이며 주업종은 음식업 및 소매업이다. 손쉬운 소매시장 기획 정도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기업현장 요구 맞춤형 개인 역량 훈련 보조 방식도 기업 사정상 고용 불가인 경우는 속수무책이다. 2025년 주요 중견기업의 신규 고용계획 전혀 없음은 40%에 이른다. 고용은 산업의 활력과 함께 성장한다는 말이 그저 나온 소리가 아니다.

청년 고용 증진 고민 이전에 산업경쟁력 확보가 선결 문제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 고용 증진을 고민하기 이전에 국가의 성장전략을 원점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 첫 번째는 성장의 미래 동력을 악화시킬 가장 위험한 요소로서 무역전쟁과 산업공동화에 대한 대책이다. 트럼프 관세 도발로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등에서 대규모 대미 현지투자(현대차 210억 달러, 삼성 1921억 달러 등등)가 약정되어 수출을 대체하는 만큼 산업공동화가 발생할 것이다. 최종 결과는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적어도 미국의 세계시장 약세(성장률 1-2%) 현상을 간과한 것은 틀림없다. 경쟁국들(중국 멕시코 캐나다 등)은 대단위 현지투자 없이 보복관세로 대항, 관세 타결, 산업공동화 없는 산업경쟁력을 확보하였다는데, 사돈 땅 산 것처럼 배 아프다. 그러므로 한국의 산업경쟁력 우선 순위 첫 번째 고양책이란 최근 세계 무역전쟁 결과물인 완성품 고관세, 부분품 저관세 추세 중, 유리한 부분품에 초점을 맞추어 부분품 중간재 생산공급 허브기지 구축, 미국 보호무역주의 회피, 대미 의존도 축소, BRICS 등 다극화 혹은 베트남 캐나다 멕시코 등등 미국 우회 무역 경로 확대 모색을 추천한다.

둘째, 청년 고용 생산성이란 젊은 시절 발휘되는 높은 학습 취득력, 혹은 젊은이 특유의 활력과 패기에 기반한다. 이를 지원하는 청년 경쟁력 고양책으로 전문가급 능력 확대를 추천한다. 인간의 학습 능력은 AI의 딥러닝에 비할 바 아니다. 전문가급 디지털 능력개발이란 불과 몇 개월의 정부 지원 코딩학습능력으로 달성되지 않으며 적어도 석박사급 고급 연구개발 능력을 의미한다. 창의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며, 목적의식과 생산 동기 없는 AI에 의해 발현되지 않는다. 다양한 인격과 철학, 가치관과 문화, 각종 사회관계를 학습하고 경험한 인간은 다른 인간사회에 대한 나름의 주관을 가지며 목적의식을 구현해 생산 대상과 소비 주체를 결정하고 인간의 행동의식에 대해 연구개발한다. 다양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결합되어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 철학, 세계관이 정립된다.

창의성 발휘해 고급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 구축

아이폰을 개척한 스티브 잡스는 코딩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차고 창업 시절부터 인간 행동과 소통, 벌레 먹은 사과란 독특한 애플문화와 유대감을 형상화하는데 재능을 보였다. 오늘날 수억 명이 사용하는 카톡 등의 각종 메신저는 기존의 이메일, 또는 단순 메시지 단계를 뛰어넘어 인간들 간의 사회관계를 재구축하는 소공동체 창출과 네트워크, 소통, 연결의 아이디어에 의해 발굴되었다. 청년들이 희망하는 고급 일자리란 결국 구상과 기획 능력 혹은 구상과 실행을 결합하는 연구개발 능력 혹은 관리자 지위일 것이다.

AI 알파고와 싸운 바둑기사 이세돌은 대국료 수억을 벌었을 뿐이지만 그를 구상 기획한 구글은 몇 수십조를 벌었다. 구상능력을 성장시키려면 각종 연구기관과 연구원 또는 교수 인력 같은 고급 능력, 전문 일자리 확대가 공급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연구개발(R&D)지원은 기업 현장 개선 위주이며, 산학 연구개발 주체인 교수, 연구원 인력 충원은 거의 미미하며, 심지어 소비 주체로서 인간 자신의 문화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처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 분야는 당장에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장의 기본, 창의성은 AI 자체가 아니라 AI를 도구의 하나로 이용하는 인간, 인간의 목적의식이 발현될 때 비로소 산출된다.

생성용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나 텍스트, 음악 등은 엄격히 말해서 AI 고유의 창작성 발현이 아니라 인간의 기존 지적 생산물의 짜깁기 또는 복제물의 조합에 불과하다. 인간이 생산해 놓은 수많은 데이터를 저비용으로 조합하기 위해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오픈 데이터)을 이용(입력)하며 인간의 가장 간단한 인지방식인 형상화(출력)를 위해 성능 좋은 그래픽카드와 고대역메모리(HBM)가 필요하다. 영화 아이로봇 같은 완벽한 인공지능 비서는 자신만의 인격을 형성하고 어떤 명령이든지 결과를 단번에 제출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AI가 생산적인 이유는 AI의 출력의 결과물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떤 명령이든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기대감이 매출과 이윤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지원과 비용 없이 어떻게 AI 세계에 도전할 인재들 키울 수 있나

이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경쟁력 있는 엄청난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검색을 위한 막대한 전력과 시설, 관리비용이 소모된다. 간단히 말해서 일전에 소멸된 메타버스 구축 소동과 유사한 신기루, 돈으로 치면 과잉 자본이자 자원 낭비이자 환경 파괴이며, 그 생명력은 증권시장에서 다음 단계 금융자본 수익과 기대치로 이전 대치될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모든 상품에 AI를 대입시켜야 팔린다는데야 당분간 이를 경쟁력있는 조건으로 수용해서 생산과 고용을 늘리는데 집중해 보자.

생성형 AI GPT 개발에 막대한 비용(수조 달러?)이 동원된 것에 반해서 중국의 딥시크 개발비는 그 수십 분의 180억 달러 정도, 그 저력은 중국 당국의 엄청난 투자 지원 기반에 기인한다는 소식이다. 중요한 것은 AI 인프라 구축에 얼마를 투자해야 경쟁력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과 과정을 거쳐 저가 AI를 생산했느냐이다. 연구개발의 결과물은 당장의 성과가 아니라, 시장 검증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확정된다. 신시장 신제품 개척은 시간과의 싸움이며, 승자독식의 논리가 작용하는 모험자본의 세계다. 패자의 노동에 한 푼도 지급되지 않는 이 세계에 도전하고 경력을 쌓을 인재에 대한 지원과 비용없이 이 환경은 결코 구축되지 않는다.

창업 인큐베이터란 성공 보수만 가지고 운영되지 않는다. 벤처의 세계에 뛰어드는 대자본은 알아서 적자생존의 기업논리를 구사하면 되지만, 맨땅의 차고 창업자, 또는 경력을 쌓고자 하는 연구개발자, 훈련 연구 지원생은 대학에서, 또는 지식센터 등에서 교육훈련비와 연구개발 지원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의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는 모태펀드 또는 엔젤투자 환경, 물류 및 판로 지원시스템, 기획된 과제에 대한 연구개발 능력을 대학기관이 보조하는 구조의 실리콘밸리 같은 창업환경이라면 금상첨화다. 안타깝게도 지역마다 산재한 우리의 시설 분양형 지식산업센터는 이 시스템 구축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공실 문제가 심각하다. 신산업 성장을 바란다면 모험자본의 위험을 개인이 떠맡는 수준이라면 곤란하다. 시행착오 비용을 줄여 모험시장에 뛰어들 승부사들을 유인, 자유로운 상상력의 영혼들이 활개칠 사회적 인프라가 절실하다.

로봇세로 청년의무고용제 실시, 전인교육 기회 마련

고용없는 성장이 문제가 된다면, 경기 선순환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벨기에 로제타 플랜(청년고용 의무화 정책: 근로자 50인 이상 기업 전체 근로자의 3% 청년 의무 고용제도)처럼 각지의 열혈 지방청년에게 의무고용의 기회를 줄 것을 권장한다. 매년 35만 명의 청년학생이 졸업하며 실질 청년실업률 17%(고용정보원)를 가정하면, 청년실업자 6만명*2400만원()=14400억 원, 2년 유지를 가정하면 매년 약 3조 원으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025년 예산의 0.5%, 교육부 예산의 3%에 불과하다. 사회 초년생 실질 실업률 40%를 최대치로 적용해도 15만 명, 7조 원이다. 병장 월급 150만 원 시대인데 이 정도 비용으로 경력쌓기에 도움 주고 청년실업을 구제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닌가. 여유가 더 있다면 청년들 돈 벌게 해준다고 애쓰지 말고 청년에게 세계관과 세계시장을 연구하고 가르칠 고급 인력 일자리, 전문 학자, 연구원, 교수를 더 충당하자. 우리는 처세술, 인기없는 취업길을 알선하는 현장 강사보다, 시대정신을 우뚝 세워 스스로 배우고 치고 나갈 용기를 북돋울 전인교육의 스승이 매우 모자란다.

재원이 모자란다면 로봇세라도 강구하자. 고용없는 성장이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상징어인데, 오죽하면 디지털 경제의 산실 빌 게이츠가 로봇세를 제안했을까. 지대란 자연의 산물인 토지를 인간이 소유하고 치부하기 위해서 고안된 일종의 세금이다. 스마트팩토리란 심지어 무인공정(현대차 미국 현지공장 40% 자동화) 경지까지 도달했다. 기계가 인간 고용을 완전 대체하면 소비도 없다. 로봇세는 경기순환을 원활하기 위한 자연 지대 대비 일종의 사회적 지대쯤에 해당한다. AI란 하늘에서 떨어진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개개인이 생산한 지식정보를 기초 데이터로 이용한다면 공공 사용료를 지불하라. 먼 얘기가 아니다. 공공무선망 사용료를 놓고 다투었던 얼마 전 넷플릭스 분쟁을 기억해 보라.

백일 전 울산과학대 교수·경제학 | 시민언론민들레 2025.05.15.

 

윤석열' 끊지 못한 국민의힘, 대선 뒤 나락간다

잘 지는 법도 잊은 막장 대선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5.05.16.

 

윤석열은 추경호와 통화 1분 후 국회 봉쇄를 명했다

내란, 그날 밤의 재구성추경호는 무엇을 알고 있나?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5.05.17.

 

4일제·하루 9시간제 실험,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장시간 노동의 재포장: '4일제'라는 이름의 위선

윤효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강사 | 프레시안 2025.05.17.

 

6월이 온다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난 15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유권자들이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 한겨레 2025.05.17.

 

"총살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이어져"누구나 '자발적 학살자'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6

[A: "나는 단지 내 지역에 사는 유대인의 목록을 갖고 있을 뿐이야. 나는 유대인을 모으지 않았어. 그저 요청을 받았을 때 그 목록을 넘겨주었을 뿐이야." B: "나는 이 주소로 가서 그 사람을 체포하고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라고 들었어.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야." C: "내 일은 기차의 문을 여는 것이야. 그게 다야." D: "내 일은 사람들을 열차로 안내하는 것이었어." E: "내 일은 열차의 문을 닫는 것이었어.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가나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묻지 않았어." F: "내 일은 단지 열차를 운전한 것뿐이야." Z: "내 일은 단지 독가스가 방출되는 샤워기를 트는 것뿐이었어."](사이먼 배런코언, <공감 제로>, 사이언스북스, 2013, 195-196쪽).

윗글은 영국 유대인 출신의 신경과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 사이먼 배런코언(캠브리지대)이 쓴 책(Zero Degrees of Empathy, 2011)에서 가져왔다. 원서 두께가 200쪽가량으로 심리학 분야에선 필독서로 알려진다. 배런코언이 이 책에서 펼치는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는 "공감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망설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잔인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엔, 나치 정권 아래서 많은 독일인들이 '공감 회로'에 문제가 있었다. 예루살렘 재판에서 아이히만이 주장했던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상부의 명령을 따랐고,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임무를 성실하게 해냈다.

죄의식 못 느끼는 '공감 제로'의 연쇄 과정

위 인용문에 나오는 A부터 Z까지는 나치 지도부가 아닌 독일의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 '유대인 절멸'을 지시했던 아돌프 히틀러, 수용소를 총괄 감독했던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총사령관처럼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나 책임자는 아니다. 각자가 해낸 일들이 모여 아우슈비츠의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그저 한 부문만을 맡았을 뿐이기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죽음에 이르는 연쇄과정'에서 본인이 한 역할을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악한 의도를 지닌 광기 어린 악마'가 아니라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상부의 명령을 따른 인물이라고 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인간이 엄청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꺼냈다. 배런코언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수만 명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크든 작든 공범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봤다. A부터 Z까지 모두 "나는 그저 작은 역할만 했을 뿐"이라 여겼고, 따라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그런 작은 부문들이 모여 엄청나게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런코언은 아이히만에 대해서만큼은 아렌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위의 A부터 Z까지의 역할과는 달리 아이히만의 죄질이 너무 무겁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주 글에서 짚었듯이, 아이히만을 '사악한 범죄자'로 보는 여러 연구자들은 아렌트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나는 명령에 따라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 했던)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고 여긴다. 배런코언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렌트가 예루살렘 재판을 모두 지켜본 게 아니라 초반부만 지켜봤다"는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자라니(런던대, 2015년 타계)의 지적을 떠올리면서, "실제로 그녀가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렀다면, 아이히만이 단지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른 게 아니라 학살에 어떻게 창조성을 발휘했는지 봤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배런코언, 197쪽).

▲ 1945년 4월19일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접수한 영국군이 붙잡은 친위대(SS) 소속 여자 경비대원들.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를 떠올린다. Ⓒ영국군 제5군 Film & Photographic Unit

아이히만에게도 양심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Ich habe kein Gewissensbiss gefühlt)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도망자 시절 그곳으로 도망쳐온 다른 골수 나치들에게 이렇게 큰소리쳤다. 나치 시절 공포의 대상이었던 국가보안본부(RSHA)의 중간 간부(제4부 B과장, 친위대 중령)로서 유대인 추방과 수송을 맡았던 아이히만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다 하더라도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실제로 없었을까.

1960년 5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으로 납치된 뒤 유대인 심리학자가 조사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극악한 범죄자의 심리상태와 범행 동기의 뿌리를 찾기 위한 프로파일링 때문이었다. 그 심리학자는 아이히만에게 '양심'이 있는지 어떤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며 손을 씻었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얘기를 일부러 꺼냈다. 아르헨티나 시절의 아이히만 행적을 파헤친 독일 철학자․역사학자 베티나 슈탕네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나 자신은 그 역사적 인물과 견줄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참 고맙다"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바로 제 입장입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자신은 (예수를 죽이는) 결정 과정에 관련 없다는 뜻을 나타냈어요. 그는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은 것이었지요. 그의 상황은 저와 똑 같았습니다."(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글항아리, 2025, 384쪽)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가슴을 치겠지만, 아이히만은 '양심이 깨끗하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주문을 외우듯 입에 달고 살았다. 베티나 슈탕네트에 따르면, 독일 패전 뒤 숨어살던 아이히만이 1951년 아르헨티나로 도망치기 전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과 손은 깨끗해. 내 아이들의 목숨에 걸고 맹세하는 거야." 1956년 자신의 회고록(미발간)에서도 가장 먼저 '깨끗한 양심'을 거듭 강조했다.

[원고에서 (첫째로) 자신의 '깨끗한 양심'을 단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기에, 그는 두 가지를 덧붙였다. "둘째, 상대편은 양처럼 온순한 존재가 아니었고, 오직 독일인들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셋째, 이 피비린내 나는 최종해결(유대인 학살)을 낳은 장본인이 나란 말인가?"](베티나 슈탕네트, 388쪽)

'깨끗한 양심'을 들먹이는 것은 아이히만의 자유겠지만, 문제는 그 자신의 사악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요행히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아이히만을 보면서 홀로코스트 희생자(생존자, 유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덕 불감증'이니 '공감회로 고장'이니 하는 학술 용어를 쓸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양심 불량'이라 분개했을 것이다.

"우린 어쨌든 명령을 따라야 했지요"

독일군에서도 아이히만처럼 명령에 따라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생각이 부족한 장병들이 많았다. 이들을 흔히 '작은 나치'라 일컫는다. '작은 아이히만'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영국 국립보존기록관에는 특이한 서류뭉치 하나가 보관돼 있다. 그 속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병들이 수용소에서 나눈 대화들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담겼다. 포로들 몰래 도청을 해 만든 기록이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뒤 두 명의 전쟁사 연구자(런던정경대 죙케 나이첼, 폴렌스부르크유럽대 하랄트 벨처)가 그 기록들을 모아 한 권의 책(Soldaten, 2011)으로 편집해 냈다. 그 책에서 친위대 상사가 옆자리 장교(중위)에게 자신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였던 학살을 털어놓는 대목을 보자.

[총살이 컨베이어벨트처럼 벌어졌어요. 하루에 추가 수당 12마르크, 그러니까 120크로네가 지급됐어요. 우리는 그 짓밖에 안 했어요. 그러니까 12명이 한 조가 돼 각각 6명씩을 끌고 와서 죽이는 거죠. 저는 14일 동안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했을 겁니다. 여자들도 총살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낫더군요. 많은 남자들이 최후의 순간에 흐느끼는 걸 보았거든요. 그런 겁쟁이가 있으면 가운데로 데려와 일으켜 세웠죠. 우리는 식사를 두 배로 받고 12마르크를 받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한 거예요. 반나절 동안 여자들을 50명이나 죽였으니까요. 우리 중에는 여자들을 총살할 때 마음이 약해지는 자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명령을 따라야 했지요.](죙케 나이첼 &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2015, 201-202쪽)

명령에 따랐다고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경우 면죄부를 받게 될까. 아니다. 부당한 명령을 받았다면, 그것을 거부해야만 전쟁범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서독에서 1960년대에 열린 여러 전범재판에서 피고들은 한결같이 "명령에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 주장은 재판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체로 고령의 나이였던 점이 양형에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무죄로 이어지진 않았다(이들은 흔히 '작은 나치'들로 일컬어진다. 이들에 대한 전범재판은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볼 참이다).

"괴벨스 밑에서 타자 친 것 말고 한 일 없다"

법학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베를린 훔볼트대)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 1995)의 원작자이다. 소설 주인공 '나'는 독일 패전 뒤 나이 많은 여인 '한나'를 사랑한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한나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기 앞서 책을 읽어준다. 얼마 뒤 둘은 헤어진다. 법대생이 된 '나'는 나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을 단죄하는 법정에 견학을 갔다가 한나를 보고 놀란다. '나'는 몰랐지만 그녀는 한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여자 감시원이었다. 수용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 중에 머물던 교회가 공습으로 불타면서 안에 갇혔던 유대인 여자들이 죽은 사건으로 한나는 재판에 넘겨졌다.

"당신은 왜 교회 문을 왜 열어주지 않았는가?"는 판사의 질문에 한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을 그렇게 간단하게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했어요."(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레, 2004, 137쪽) 한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시 책임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화염에 휩싸인 수감자들의 고통을 심각하게 헤아리지 못했다. 한나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뭐가 잘못인지 제대로 깨닫질 못했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교활한 아이히만보다는 한나에게 맞을 듯하다.

위의 소설 속 '한나'와 닮은 실제 인물로는 브룬힐데 폼젤(1911~2017)이 있다. 폼젤은 1942년부터 패전 때까지 히틀러의 나팔수였던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속기사 겸 비서로 일했다. 괴벨스 일가족이 히틀러 벙커에서 자살한 뒤 소련군에 붙잡혀 엄한 조사를 받았고, 5년 동안 재판도 없이 감옥에 갇혀 지내다 풀려났다. 폼젤은 나이 103세 때 남긴 증언에서 아무런 참회의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투철한 의무감에 따라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으며, "그 일이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상관 없었다"는 식이다.

[나는 러시아인들이 나만 콕 집어서 잡아간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어요. 괴벨스 밑에서 타자를 친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냥 러시아 군인들이 선전부 지하 벙커로 들이닥쳤을 때 거기에서 붙잡힌 것뿐이에요.](브룬힐데 폼젤, <어느 독일인의 삶>, 열린책들, 2018, 186쪽)

폼젤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을 거듭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하며 일찍이 지적했던,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을 못하는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과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폼젤의 증언 곳곳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괴벨스가 전쟁 중에 내뱉었던 숱한 인종차별적 독설들 가운데는 폼젤의 속기록을 통해 기록되고 가다듬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완전히 잊은 모습이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주장했던 것처럼) 괴벨스의 비서로서 성실하게 일을 했을 뿐이란 상투적인 얘기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될 뿐이다.

▲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숨진 희생자들을 집단 매장지로 옮기는 모습. 영국군의 감시 아래 여자 경비대원들이 작업에 강제 동원됐다. Ⓒ영국군 제5군 Film & Photographic Unit

밀그램 '복종 실험'이 확인한 '악의 평범성'

유대인 출신의 미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전 뉴욕시립대, 1933-1984)의 '복종 실험'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맞닿는다. 그 실험은 보통 사람 누구라도 주어진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험은 대체로 진행자 A와 피험자 B, '희생자' 역을 맡은 C, 이렇게 3인으로 이뤄졌다. C가 올바른 대답을 못할 때마다 B는 전기 자극을 높여가는 방식이었다.

진행자 A가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고 말하면서 B에게 '계속하라'고 재촉하면, C가 "제발 그만두라"고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B는 전기 자극을 그치지 않았다. 또한 옆에서 진행되는 다른 실험에서 피험자가 전기 자극을 높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B는 덩달아 대담하게 자극을 높였다. 한 실험에선 실험 참가자들 가운데 65%가 최고전압인 450볼트까지 이어갔다(실제로는 전기 자극이 없는 시뮬레이션이었다. 진행자 A와 한패인 C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가짜로 냈지만, B는 그 사실을 몰랐다).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of Authority, 1974)은 문제의 '복종 실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실험의 주제는 부당한 명령을 따를 것인가, 맞설 것인가를 둘러싼 '명령에 따른 복종의 딜레마'였다. 밀그램에 따르면, 희생자를 거의 죽일 정도로 전압을 올린 이들은 특별히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게 아닌,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이었다.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 밀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실험자의 지시를 더 기꺼이 따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모두 합쳐 1000명쯤이 참여했던 실험 끝에 밀그램이 내린 결론은 "권위(명령)에 대한 인간의 복종 성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가학적인 괴물'로 묘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며, 그는 단지 책상 앞에 앉아 일한 '생각 없는 관료주의자'에 가까웠을 뿐이라 했다. 이 주장으로 아렌트는 비웃음을 샀고, 심지어 조롱거리가 됐다. 당시 아이히만의 괴물과 같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선 '야만적이고 뒤틀리고 가학적인 성격'과 '악의 화신'이 필요했다. 우리의 실험에서 수백 명의 피험자들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목격한 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사실일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에코리브르, 2009, 30-31쪽)

1961년 예일대에서 처음 시작했던 실험은 그 뒤 비윤리성 논란에 휩싸였다. 실험 참여자들은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했다. 1963년 밀그램은 하버드대 조교수로 옮겨갔지만, 실험의 비윤리성이 문제 돼 종신교수직(tenure)을 받지 못했다. 심장 질환과 스트레스가 겹쳐 51세로 일찍 숨졌다. 그는 타계 2년 전(1979년 3월) 미 CBS방송의 간판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에서 매우 섬뜩한 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는 실험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 실험을 통해 형성된 정보와 나 자신의 직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나치 독일에서 본 것과 같은 죽음의 수용소 시스템이 미국에 설치된다면, 미국의 중간 규모 도시에서는 수용소를 꾸려가는 데 충분한 인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이스라엘 차니, <폭력의 전염: 우리 안의 12가지 제노사이드 심리>, 선인, 2024, 61쪽에서 재인용)

곰곰 새겨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위의 글을 쓴 이는 유대인 심리학자인 이스라엘 차니(전 히브리대)다. 예루살렘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연구소' 소장인 차니는 그의 책(The Genocide Contagion, 2016)에서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히틀러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731부대장)와 같은 '사탄' 범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살인을 돕기로 동의한 보통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그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잔인성․공격성에서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손에 피를 묻혀가며 학살을 거들었다는 얘기다.

"우린 괴물이 될 수 없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19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인 잇단 내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부부 암살)으로 터졌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의 화약고'란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 붙었고, 영어사전에 'balkanize(분열하다)'는 단어가 보태졌다. 독일 통일(1990), 소련 해체(1991)와 더불어 냉전 체제가 무너질 때 유고연방도 쪼개졌고 10년 내내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다. 90년대 전반기는 보스니아 내전, 후반기는 코소보 내전을 치렀다. 보스니아에서 10만 명이 희생되고 200만의 난민이, 코소보에선 1만 3000명이 희생되고 90만의 난민이 생겼다(필자는 보스니아 2회, 코소보 3회 현지취재를 다녀왔다. 발칸내전이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은 김재명, <오늘의 세계분쟁>, 미지북스, 2023, 개정 2판 240-303쪽 참조 바람).

내전이 터지자,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이웃집 아저씨가 곧바로 총을 들고 인종청소에 나섰고 전쟁범죄자가 됐다. 네덜란드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ICTY) 법정의 피고들은 내전이 터지기 전만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크로아티아 기자이자 작가인 슬라벤카 드라쿨리치는 헤이그 법정에서 피고들을 지켜보면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그가 낸 책(They Would Never Hurt a Fly, 2004)의 핵심 대목을 데이비드 스미스(뉴잉글랜드대, 철학)는 이렇게 옮겼다.

[당신은 날마다 법정에 앉아 피고인들을 지켜보면서, 추하든 잘생겼든 그들의 얼굴, 하품하는 방식, 머리를 긁거나 손톱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전쟁범죄자도 평범한 사람일 수 있음을 깨닫고 점점 더 두려워진다. 왜? 그들이 괴물인 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음을 뜻한다. 이제 당신은 그들이 괴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쉽고 편안한 이유를 이해한다.](데이비드 스미스, <인간 이하>, 웨일북, 2022, 203쪽)

데이비드 스미스는 비인간화와 집단폭력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연구자다. 스미스는 그의 책(Less Than Human, 2011)에서 "괴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사람들이 전쟁범죄자들을 '괴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지만, 스미스는 틀렸다고 말한다. 위 글을 쓴 드라쿨리치의 지적처럼, 전범자들을 '괴물'로 낙인찍고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다, 우린 괴물이 될 수 없다"며 거리를 두려는 편리한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괴물과는 다른 평범한 우리'도 전범자로 피고석에 설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숨진 희생자를 기리는 동판 걸림돌(Stolperstein). 유럽에는 독일을 비롯한 18개국에서 약 10만 개의 걸림돌이 희생자의 옛집 가까이에 놓여 있다. Ⓒ김재명

'자발적 학살자'로 동원되는 '평범한 사람들'

지난 주 글에서 짧게 짚었듯이, 크리스토퍼 브라우닝(노스캐롤라니아대, 독일현대사)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지닌 통찰력을 높이 사면서도, 아이히만에겐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의도를 지녔고, 그가 저질렀던 죄의 무게가 독일의 보통 전범자들에 견주어 매우 무겁다고 봤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의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가 학살부대로 바뀌는 과정을 다룬 그의 역작(Ordinary Men, 1992)에서 (앞에서 살펴본)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 대해 보충 의견을 냈다. 그는 '밀그램의 실험에서 언급되긴 했지만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요소'로 '동료집단에 대한 동조'(conformity to the group)를 꼽았다. 병사들이 상급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밀그램의 실험 방식처럼)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세뇌(洗腦)뿐만 아니라, 동료 집단을 의식해서라는 얘기다. 브라우닝은 '집단에 대한 동조' 말고도 'peer pressure'란 용어도 함께 썼다. 개인이 동료들의 기대나 행동에 자신을 맞추려는 압박감을 뜻한다.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대열에서 이탈하면 (학살의) '궂은 일'을 다른 동료들에게 미룰 뿐이라 생각했다. 사실 몇몇 대원이 이탈한다 해도 대대는 그 (학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에 사살조 참여 거부는 부대 전체가 함께 불쾌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작전에서 자신의 몫을 거부하는 것을 뜻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였다. 사살에 가담하지 않은 대원은 다른 대원으로부터 고립되고 따돌림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책과함께, 2023, 284쪽)

브라우닝에 따르면, 대부분의 대원들은 자신의 살인행위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집단의 움직임을 따라 '나는 동료들과 함께 한다'며 자신을 '포장'했다. 학살 임무에서 빠진 대원은 '겁쟁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화장실 청소 같은 일이 주어졌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더 쉬었다"는 얘기다. 브라우닝의 학살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면서 거부반응은 무뎌지고 어느덧 '작은 나치' 또는 '작은 아이히만'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브라우닝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 여긴 것도 바로 이런 대목에서다.

"평범한 이들 누구라도 학살자가 될 수 있다"

브라우닝은 홀로코스트 연구의 뛰어난 업적과 더불어 사려 깊은 역사가로 잘 알려졌다. 그는 인종주의가 세계 곳곳에 퍼진 상황에서 많은 보통사람들이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걱정한다. (글 위에서 본) 크로아티아 기자 슬라벤카 드라쿨리치가 헤이그 법정에서 했던 '괴물' 걱정과 맥을 같이한다. 인용문이 길지만, 깊은 뜻을 지니고 있기에 브라우닝의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사실상 오늘 글의 결론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전쟁과 인종주의가 만연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국가가 대중을 동원하고 또 그들의 (폭력) 명분을 정당화하는 힘 또한 여전히 막강할 뿐 아니라 계속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전문화와 관료화 때문에 (전쟁범죄 등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으며, 집단이 개개 구성원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며 (잘못된) 도덕적 기준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우 두렵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만약에 어떤 근대적인(침략적인) 정부들이 집단학살을 저지르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그들의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하고자 한다면 여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346-347쪽)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전세계 곳곳에는 (신경과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인 사이먼 배런코언이 말한) '공감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아렌트가 지적한대로 생각이 모자랐던(무사유의) 전쟁범죄자 아이히만까진 아니더라도, 잠재적인 '작은 아이히만'이자 '작은 나치' 예비후보자들이다. 그들에게 그럴듯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브라우닝이 걱정했던 대로)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먼 남의 나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어떤 정치·경제·군사적 위기의 순간에 탐욕스런 권력자의 선동에 휘둘린다면,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던 '작은 아이히만'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 12.3 계엄 뒤의 혼란 속에서 서울 서부지법을 습격했던 폭도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이 힐끗 보였다. 브라우닝의 경고처럼,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이 이 비좁은 땅에서 일어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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