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성장
거대 양당 대선 후보 공약의 주요 키워드는 다시 ‘성장’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간 성장주의를 성찰하고 탈성장을 논하며 새로운 발전모델을 탐색하던 시기를 지나 다시 익숙한 자리로 왔다. 극심한 사회적 분열 속에 선진국 진입이라는 성공 경험을 안겨준 ‘성장주의’를 배경음악으로 다시 틀어야 하는 사정, 불평등 해소와 사회 통합을 도모할 공간마저 이 열쇳말로 열어가야 하는 사정을 헤아려 본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정말 해법이 되려면 ‘성장’이라는 개념을 지금 시기에 맞게 재구성해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일하는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성장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는 오래된 질문이다. 조직이 커지는 것이 성장인가? 사회가 얻는 유용함이 커지는 것이 성장인가? 조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사회적 유용함이 커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이와 관련해 더 많은 수치적 결과를 만드는 전략 외에도 지역사회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전략, 법과 정책을 변화시켜 사회 시스템 변화를 도모하는 전략, 관계와 가치, 신념과 의식의 변화를 통해 문화적 뿌리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모두 유효한 성장 전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대할 수 있는 활력과 사회통합, 역량 개발 등 다양한 효과를 고려한다면, 성장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는 관점을 갖는 것이 유용하다.
2030년을 바라보며 추진하는 성장은 적어도 ‘지속가능발전’ 패러다임에 기반한 성장이어야 한다. ‘도넛 경제학’으로 설명되는 지속가능발전 패러다임은, 인류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기초 위에서, 그리고 치명적 환경 위기를 막는 생태적 한계 안에서 경제발전을 추구할 때 지속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음을 설파한다. 지속가능발전은 추진 과정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포괄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태도는 이해관계자 포괄 원칙을 사회 전체로 확대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누구라도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전체를 온전히 알기 어렵다는 겸손함과 신중함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결정 단위일수록 다양성이 갖추어졌는지, 주요 이해관계자가 포괄되어 있는지 살피고 경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지난 몇년 다양성 개념이 각 분야에 전파되고 유행처럼 채택되었지만, 그 의미나 효용성을 체감할 만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불필요한 교정 장치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난겨울부터 이어진, 우리 사회의 질서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은 다양성이 결여된 곳에서 일어나는 집단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누구라도 말 한마디씩 얹어 볼 수 있는 대선 기간이지만, 이상적 가치와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의도치 않은 비난과 시비를 불러오고, 대화가 혼란을 증폭시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공론장에 올라오는 말들은 점점 모호해지기만 한다. 공약을 자세히 공개하면 혼탁한 말싸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인지 텔레비전(TV) 토론이 끝난 뒤에야 전체 공약집이 돌기 시작하는 블랙 코미디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많은 노력과 지면을 할애해 ‘정책 다이브’, ‘팩트 다이브’ 등 양질의 기사로 이 혼탁함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한겨레에 고마움을 전한다. 다양성의 가치가 발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내 실질적 대변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에도 박수를 보낸다. 다시 만나게 될 ‘성장’이 21세기에 걸맞은 모습과 내용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캐묻고 촉구하는 역할도 부탁한다.
장지연 |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총장 | 한겨레 25.06.01.
대선 정신'은 '내란 종식'…우리가 윤석열을 '수거'하는 유일한 방법
투표하기 전 포고령을 꺼내들며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의 12.3 계엄 포고령 1호를 꺼내 다시 꼼꼼히 읽어본다. 충격과 공포다. 혐오와 절멸의 언어다. 만약 국회가 계엄을 해제하지 않았으면 1호를 '헌법'삼은 2호, 3호, 4호 포고령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이 포고령 한장으로 6월 3일 투표해야 할 이유가 전부 설명된다.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유신 포고령에도 이렇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발령한 계엄포고 1호에는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돼 있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은 없다.
윤석열이 국회를 콕 찍어 "정치활동을 금한다"고 한 것은 국회의 계엄 해제권한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포고령으로 국회를 미리 봉쇄해야 계엄 해제를 하지 못하니까. 그 자체로 불법이자 위헌이고, 내란이다. 박정희를 뛰어 넘은 인물이 윤석열이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건 선거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지금 대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행사할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헌법적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것이다. 정치활동이 금지되면 대선이란 건 있을 수 없으며, 이번에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을 일도 없다. 한덕수가 대선에 나오겠다고 국무총리직을 버리고 뛰쳐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조악한 포고령이 막으려 한 것은 바로 나와, 우리, 그리고 당신들의 자유다. 그런 자가 "자유"를 운운하고, "미래"를 언급하고, "국민"을 입에 담있다. 감옥에 있어야 할 자가 개를 끌고 다니면서 식당 순례를 하고, 부정 선거 음모론을 설파하면서 혐오를 퍼트리고 있다. 계엄 해제와 윤석열 탄핵으로 포고령은 형해화됐지만, '포고령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윤석열은 극우 세력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윤석열이 공론장으로 길어올린 '중국인 개입 부정선거 음모론'의 해악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일례로 지난 29일 엑스(X)에는 '구로 중국인 투표 의혹 영상'이라는 경악할만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투표소 앞에서 남성 몇몇이 투표소에서 나오는 여성에게 다짜고짜 "띠가 어떻게 되냐. 무슨 띠냐"고 묻는다. 졸지에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추궁당하기 시작한 여성은 현장을 벗어나려 빠르게 움직이지만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따라가며 "숫자를 세 달라"고 말한다.
102년 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몇몇 일본인들은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쥬고엔 고쥬센(15엔 50전)"을 발음해보라고 말했다. 일본어의 '탁음'에 익숙치 않은 조선인이 '츄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하면 죽창을 들어 무참히 살해했다. 2025년 백주대낮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국어로 숫자를 세보라'는 '인간 튜링 테스트'를 하는 사람들이 민주 국가의 투표소 앞에 나타나고 있다.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과 "선량한 일반 국민들"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그들을 처단하고 수거하는 게 저 포고령에 담긴 '정신'이다. 그들은 '부정 투표'를 입증하고 '윤석열의 계엄'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혐오와 공포를 이용한 대중 선동을 통해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성공하고, 체제 전체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고 의회를 해산하며 내린 첫 포고령이 반체제 세력을 '제거'하는 내용이었다.
독립운동가 김구가 중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다면서 뉴라이트 극우 세력의 '중국 혐오' 주장을 그대로 읊어왔던 김문수는 혐오와 부정선거가 뒤섞인 이 극우적 음모론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하지만 김문수 후보 캠프 사람들은 "사전투표 과정에서 실제로 부정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부정이 일어나는 주요 지점은 해외투표, 우편투표, 그리고 사전투표(이남용 선대위 전략기획총괄본부 특보)라고 말한다. '부정선거론자'들이 후보 캠프에 또아리를 틀었다.
결정적으로 윤석열은 지난 31일 전광훈이 주도하는 단체가 연 집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나라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6월 3일 투표장에 가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에게 힘을 몰아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너무 많은 시간과 희생을 치러야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정상 국가의 회복이 불가능할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가 말하는 정상국가는 '내란 체제'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은 내란범 윤석열 본인이다. 지금 윤석열은 겁에 질려 있다. 내란 체제를 유지하고 가족의 '부패' 의혹을 덮는 게 그의 목적이다. 그 윤석열이 '김문수'를 콕 찍어 지지한고 공표하는 건 김문수 후보가 내란 체제의 유지를 위한 최적의 인물이라는 합리적 의심으로 연결된다.
내란 체제가 종식되지 않으면 윤석열은 계속해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전광훈류의 극우 아스팔트 세력을 손아귀에 쥐고 보수 정당을 이리저리 흔들 것이다. 법사와 무속인들이 연루된 정권 비리 의혹은 줄줄이 '무혐의' 처분으로 귀결될 것이다. 급기야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에서 무죄가 날 수도 있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에 맞서기 위해 우린 혐오를 일삼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을 '처단'하고 '수거'할 수 없다. 보편적 가치와 상식이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투표 뿐이다. 음모론을 일삼는 자들이 사실 이 사회의 철저한 소수 집단이고, 그들의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만이 최선이다. 민주적 질서를 통해 윤석열과 그 일당들에게 반드시 '정당한 좌절'을 맛보게 해줘야 한다.
"썰물이 빠졌을 때 비로소 누가 발가벗고 헤엄쳤는지 알 수 있다." 워렌 버핏의 이 격언을 정치에 접목하면, 내란이 종식된 후에 누가 체제를 전복하고 내란을 획책했는지 투표가 끝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공포의 밤에서 시작된 이번 대선 투표는, 내란 종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괴롭지만 윤석열의 포고령을 한 번씩 읽어보고 투표장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5.06.02.
‘숙의 민주주의’로 열어야 할 개헌의 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4년 연임제’와 ‘결선투표제’ 도입, 그리고 국민투표법 개정을 통해 개헌의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불법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을 거치며 드러난 대통령제의 구조적 한계를 직시하고, ‘87년 체제’의 수명이 다했다는 비판에 응답한 주요 대선 후보의 첫 개헌 입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역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개헌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권력구조 개편, 즉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주로 집중해왔다. 정작 더 근본적인 질문인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현행 헌법 개정 절차는 최종적으로 국민투표를 거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은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단순히 찬반만 선택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다. 헌법 개정은 국민의 삶과 권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다. 따라서 그 논의의 주체 역시 국민이어야 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 바로 ‘시민의회’다.
시민의회는 성별, 연령, 지역 등 인구통계학적 기준에 따라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전문가 발표와 충분한 정보 제공, 토론과 숙의를 거쳐 결정을 내린다. 정당이나 이익 집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어서, ‘숙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정치 불신을 해소할 대안적 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시민의회가 성공적으로 운영된 대표적인 나라가 아일랜드다. 2012년 출범한 ‘헌법회의’(The Convention on the Constitution)는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 66명, 국회의원 33명, 정부 지명 인사 1명으로 구성되어 동성결혼 합법화 개헌안을 마련했고, 이는 국민투표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또한 2016년의 ‘시민의회’(The Citizens’ Assembly)는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99명과 의장 1명으로 구성되어 낙태 금지 조항 개정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했으며, 역시 국민투표로 개헌이 이루어졌다. 두 사례는 숙의 민주주의의 대표적 성공 모델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다. 지난달 20일 김종민 의원(무소속)이 대표발의한 ‘국민참여 헌법개정 절차에 관한 법률안’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산하에 헌법개정시민위원회를 두고, 시민위원들이 헌법개정 기초안 성안과 조문의 내용 검토를 맡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민위원은 성별, 연령, 지역적 분포를 고려해 500명 안팎 무작위 추출하되 사회경제적 다양성도 반영하도록 했다. 이들에겐 수당과 실비를 지급하는 등 실질적 운영 방안도 마련됐다.
이제 이러한 제도를 좀 더 과감하게 도입할 시점이다. 아일랜드의 사례를 참고해 국회 산하에 시민의회를 정식으로 설치하고, 이를 개헌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당이나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은 시민사회단체가 개헌안을 제출하면, 시민의회가 이를 숙의해 개정안을 마련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시민의회가 헌법 초안을 직접 작성하는 데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제출된 개헌안을 검토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효과적이다. 시민의회가 마련한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되어,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은 뒤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된다. 이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국민이 논의의 주체가 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로 취임할 대통령이 개헌 과정에 시민의회를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면, 준비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늦어도 9월부터는 시민의회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이 경우, 내년 6월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하는 일정 역시 충분히 현실적이다.
헌법은 단지 법률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삶과 권리를 규정하는 국가의 근본 규범이다. 그런 만큼 개헌은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시민의회 도입은 그 출발점이다. 무엇보다도 불법 비상계엄 시도를 저지하고 헌정을 지켜낸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다. 이제는 밀실의 정치가 아니라 시민이 중심이 되어 헌법을 바꿔야 할 때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길이다.
이지문 |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정치학박사 | 한겨레 25.06.02.
‘혐오의 매트릭스’가 무너질 날
20대 대선을 앞두었던 삼년 전, 2022 여성의 선택이란 글에서 나는 “새 대통령이 성평등을 얼마나 진심으로 지지하는지 여부에 따라 우리 사회가 만연해 있는 혐오와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가가 결정될 것”이라 예측했었다. 윤석열의 당선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며 쓴 글이었다. 대통령이 된 그의 활약은 당시의 내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끝나지 않는 지루한 공포영화의 마지막 충격적 장면 같았던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대선 토론은 짧은 기간 깊어진 우리 사회의 ‘극우화’ 병증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전시했을 뿐이다.
이준석의 형용할 수 없이 불쾌했던 발언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우리 사회 엘리트 지도층의 타락한 의식 수준에 대한 누적된 분노이기도 하다. 유흥업소 접대 의혹과 관련된 지귀연 판사의 완강한 반박을 보면서 미국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의 외설성 기준에 대한 고전적 표현, “보면 알아”(I know it when I see it)가 떠올랐다. 여성주의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인식론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스튜어트 대법관은 법원이 항상 해오던 일을 그대로 인정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흥업소에서의 접대 여부는 남성적, 판사적 관점에서 결정할 일이지 다른 일반인에 의해 결정될 일이 아닌 것이다. 지귀연 판사의 행위를 비호하던 이준석 캠프 함익병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제 나이대 또래면 룸살롱을 안 가본 사람이 없다고 본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성 접대를 당연시하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성평등을 기대하겠는가.
매키넌은 포르노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이 해악으로 인식되기 어렵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일부 인구집단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강력한 포르노적 공간으로 세상을 재구성하여, 명백히 여성혐오적이며 성폭력적 상상에 기반한 언어를 공적인 공간에서 구사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조차 모른다. 이준석의 사과에 일관성이 결여된 것도 이러한 세계관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했지만, 표현의 자유는 권력 있는 자들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남용되어 왔다. 법과 언어는 사회의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권력자만이 보지 못하는 진실이다.
이준석의 대응 중 눈길을 끈 것은 각계의 비판을 “집단 린치”로 표현한 것이었다. 1991년, 성희롱 의혹으로 미국 상원 청문회에 섰던 공화당 계열의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 지명자는 보수적인 흑인에 대한 “하이테크 린치”, 즉 인종차별적 공격이라는 프레임 전환을 통해 피해자였던 아니타 힐 교수의 증언을 무력화했다. 주로 백인이었던 민주당 상원 의원들은 과거 남부에서 행해지던 불법적인 처형과 폭력을 연상하며 그에 대한 공격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준석은 비장애인 이성애자로 서울에서 태어나 좋은 학벌을 가진 ‘우월한’ 한국 남성이다. 지금은 대선 후보이기까지 하다. 모든 걸 능력으로 재단하는 능력주의자에게 소수자 흉내는 어울리지 않는다. 분노한 시민도 폭도가 아니다. 흑인도 아닌 이준석이 왜 린치를 걱정하는가?
21대 대선을 맞이해 20대 대선에서의 윤석열 당선을 돌이켜본다. 그를 당선시켰던 말은 혐오로 가득 찬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였다. 그러나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지난 삼년간 어떤 소소한 위장의 노력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분열과 혐오의 정치 덕분에 더 많은 시민이, 더 빠르게 진실을 일별하게 되었다. 그가 열심히 만든 나쁜 포르노 같은 극우적 세계관은 그의 당선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준석의 실수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윤 어게인? 아니, 윤 이즈 오버. 새 정권은 전 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성평등의 가치가 인정되는 새 시대를 열어주기 바란다. 주권자인 국민과 함께. 우리는 2025년, 미래로, 다시 나아갈 것이다.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한겨레 25.06.02.
‘종족적 배타주의’는 새 정부의 미래가 아니다
며칠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지난달 22일에 전국역사단체협의회가 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본부와 정책 협약식을 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역사단체협의회’ 같은 명칭은 다소 중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협의회 소속 단체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들이 대개 역사 연구자라기보다는 연구자들을 힘들게 하면서 역사의 사실과 무관한 ‘대안적 과거’를 구축해온 이들이다. 이 협의회 소속 단체 중에는 예컨대 최근 몇년간 ‘전라도 천년사’라는 대규모 역사서 편저자들을 “식민 사관의 소유자”라고 공격해온 이들이 있다. 그 이유인즉 소위 ‘임나일본부’라는 일제 식민주의 학설의 근거를 제공한 ‘일본서기’(720년)에 등장하는 몇개의 지명을 이 책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역사 전공자라면 이런 비난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 것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황국사관이 일제 관학자들에 의해서 날조된 임나일본부설의 배경이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서기가 가치 없는 책은 절대 아니다. 역사단체협의회 소속 단체들이 문제 삼은 지명인 ‘기문국’(己汶國·전북 남원으로 추정)이나 ‘반파국’(伴跛國·경북 고령군 내지 전북 장수군으로 추정)이 등장하는 일본서기 기사들은 백제 계열의 사료에 의거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비록 편찬자들에 의해서 다소 윤색은 되었겠지만,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사실들이 참고할 만하다는 것은 통설이다. 더군다나 약간 다른 한자로 표기된 반파(叛波)는 중국 사료인 ‘양직공도’(6세기 초)에도 등장하며, 섬진강으로 해석되는 기문하(基汶河)는 또 다른 중국 자료인 ‘한원’(660년)에도 나온다. 즉, 전라도 천년사 편저자들의 일본서기 활용은 세계 사학계에서 통용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을 뿐이고 임나일본부설 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렇다면 전라도 천년사 편저자들은 왜 몇년간 이 ‘재야 사학’ 단체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을까.
문제는 이미 일본 학자들마저도 대부분 폐기 처분한 임나일본부설도 아니고, 이미 1960~70년대에 한국 사학계가 극복한 식민 사관도 아니다. 문제는 ‘재야’ 내지 ‘민족 사관’의 단체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한반도의 역사상이다. 이 역사상은 역사의 사실과도 무관하지만, 한국이 지금 지향해야 할 방향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전라도 천년사가 매도당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그 책의 편저자들이 언급한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과 같은 일부 유적과 거기에서 발굴된 출토품들이 일본 내 고분들과 거기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역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듯이, 고대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면 오늘날 국민국가와 같은 국경선과 비자 수속이 없었던 고대 세계에서는 일본 열도 주민들의 한반도로의 이주도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부단한 섞임으로 이루어져왔던 교류와 혼종화의 역사적 사실은, ‘단일민족’의 신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아주 불편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역사상이란 바로 ‘우리’와 ‘남들’이 완벽하게 서로 차단돼 있는, ‘우리’만의 배타적 역사다. 그래서 그들의 또 하나의 공격의 초점은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중심이 오늘날의 평양에 있었다는 등 한사군이 한때 한반도의 일부 영토에 있었다는 사실로 향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낙랑군이 평안·황해도라고 봤고, 수많은 출토품 등으로 봐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타자들이 ‘우리 땅’에 살았다는 것을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은 어디서나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 사관에 반대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사관이야말로 일제의 자국 본위의 과대망상적 어용 사관을 이은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일제 어용 사관이 빚어낸 임나일본부 등의 낭설은 야마토 정권을 마치 ‘제국’처럼 묘사하여 고대 한반도를 일종의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오늘날 ‘재야’ ‘민족’ 사관을 주장하는 단체들 역시 고조선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을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던 ‘제국’으로, 사료와는 무관하게 서술한다. 그들이 욕망하는 한반도 역사상은 타자들과의 경계선이 확실한, 부국강병의 ‘대국’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 사실들이 왜곡되는 것도 문제지만, 과연 이게 미래를 향한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충분한 수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오늘날 한국의 총인구는 2100년쯤이 되면 반토막이 날 것이다. 초저출생률의 시대이자 인구 감소 시대에는 이민자들을 수용하여 통합시키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조선 대제국’을 억지로 상상해내는 것보다는, 실제 한국 역사 전반을 관통해온 이주, 교류, 혼합의 역사를 사실대로 규명하여 오늘날 다민족·다문화 사회 성립의 하나의 역사적 모델로 삼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일본 열도 출신들이 종종 마한으로 이주해 살았다면 그만큼 번창했던 마한의 소국들이 이주자들에게 매력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차라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한반도 사료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고구려 승려 혜자나 일본 불화의 선구자가 된 담징(579~631)에 대한 기억을 담아준 일본서기를, 오히려 한반도 과거를 밝혀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다룰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월경(越境)하는 인구와 문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에, 월경의 역사를 중시하는 것은 미래지향적 태도다.
표밭부터 살피고 표를 의식하는 것이 정치인이다. 단일민족과 같은 과거의 신화에 갇혀 있는 일각의 유권자들에게 전국역사단체협의회와 같은 국수주의적 논리가 호소력이 있을 수 있기에 대선을 앞둔 시기에 민주당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해는 되지만, 그야말로 소탐대실의 전형적 사례다. 당장의 정치적 이해득실보다 미래의 다민족 사회로의 길을, 선견지명의 경세가들은 먼저 고려해야 한다. 아류 제국주의적 욕망과 종족적 배타주의는 결코 우리의 미래는 아니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 25.06.0.3
https://www.youtube.com/watch?v=6c59LsxWG8k
이재명 정부 길들이기 나선 박노자와 한겨레-박노자와 한겨레 , 그 끈끈한 친일 브로맨스 1.- 이덕일
진짜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선거가 끝났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다. 이번에는 진짜 민주주의를 펼치겠다는 목소리가 유세 기간 내내 높았다. 먹고사는 문제만큼이나 민주공화국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이 새 정부의 핵심 과제인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헌을 언급한 지도 오래되었다. 대통령 임기나 중임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고민하여 바로잡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서서 밀려오는 두가지 화두에 젖었다.
첫째는 읍면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문제다. 농촌의 일상은 대부분 읍이나 면을 중심으로 꾸려진다. 군수와 군의원은 선거로 뽑지만, 읍장이나 면장은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한다. 마을 주민의 의견보단 시장이나 군수의 판단이 중요하다.
‘녹색평론’을 발행하며 평생 생태 운동을 이끈 김종철은 말년에 녹색 정치와 직접민주주의를 유난히 강조했다. 이명박 정권이 벌인 4대강 사업으로 인해, 강에 이웃한 마을들이 하루아침에 수몰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목격한 뒤였다. 나라에서 정한 일이니 시군은 무조건 따라야 하고, 시군에서 하는 일이니 읍면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정치가라면, 마을의 대소사를 주민들이 모여 결정하도록 존중해야 한다. 방방곡곡이 제 숨을 쉬는 민주주의를 시작할 때다.
둘째는 시민주권의 문제다.
윤석열 일당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대통령선거는 2027년에 실시했을 것이다. 친위 쿠데타를 무산시키고 대통령을 파면하고 새 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 2024년 겨울부터 2025년 봄까지 ‘빛의 혁명’ 앞에는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까지 ‘촛불 혁명’이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6월 항쟁 역시 마찬가지다.
국회의사당이나 헌법재판소 앞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새운 시민들의 의지와 정성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운집하여 목소리를 높인 것이 국회의원과 헌법재판관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성 기사가 여럿 실렸다. 민의를 반영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깊이 따져 묻는 이들이 생겨났다. 불의에 항거하며 모이는 것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수만 혹은 수십만명의 시민은 집회장에서 한목소리로 외치고 도로를 따라 힘껏 행진만 하는 존재인가.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사이 숱한 소문이 떠돌았다. 재판관들의 출신지와 중요 판결을 검토하였으며, 각 재판관을 추천한 기관의 성향 역시 분석했다. 가결에서 부결까지, 다양한 주장이 신문과 방송을 떠다녔다. 불안과 초조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당연한가. 법이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의견 위에 송곳 같은 질문이 날아든다. 왕정에선 왕이 최종 판결자이듯이, 민주정에선 시민이 최종 판결자여야 하지 않는가.
정병설이 쓴 ‘시민 없는 민주주의’는 이와 같은 물음을 쥐고 답을 찾아간 책이다. 두차례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시민들이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법률가가 아니라, 불법 계엄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선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일군 아테네 시민의 중요한 권리를 두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민회에서 누구나 같은 시간 동안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나 재판관이 되어 판결하는 것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을, 한국에선 재판을 평등하게 받을 권리로 대부분 받아들여왔지만, 아테네에선 시민의 평등한 재판 참여로 이해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시민이 직접 뽑는 데 반해, 사법 영역에선 선거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점도 지적한다. 판사나 검사를 선발하고 징계할 때 시민이 참여할 길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기소와 공소 유지와 재판은 전문 영역인 만큼 법률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의 구속을 취소하고 석방하는 과정에서 보았듯이, 판사나 검사의 결정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거리에서 비판하는 방식 외에 주권자인 시민이 재판에 정당하게 참여할 방법은 무엇인가. 새 정부가 깊이 궁구하였으면 싶다.
선거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매번 뽑는데도, 민주공화국이 휘청거려 시민들이 거듭 거리로 나서야만 했다. 샘과 개천과 강의 관습에 얽매이지 말고, 시민이 주인인 법과 제도를 차근차근 만들고 고쳐 민주주의의 바다에 닿아야 한다.
김탁환 | 소설가 | 한겨레 25.06.0.3
‘진짜’ 기본사회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 복지정책 논의가 미진했고 복지공약도 빈약했다. 무상급식을 계기로 복지국가 바람이 분 이래 가장 복지 주제가 부각되지 않은 대선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복지공약 역시 그랬다.
이 대통령이 내세운 복지정책의 방향은 ‘기본사회’로 집약된다. 대선 전날 페이스북에도 기본사회를 실현하겠다며 거듭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진짜’ 기본사회로 나아갈지 확신을 하기 어렵다. 이 목표 앞에 놓인 장벽들도 높지만 공약집 내용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기본사회를 “주거, 의료, 돌봄, 교육, 공공서비스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모든 권리를 최대한 실현하고,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사회”라고 설명한다. 이는 익숙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사회’를 내세운다면, 묵직한 의제 혹은 복지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획이 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주창했던 기본소득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기본’ 개념만 포장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실제 공약집을 살펴보자. 우선 빈곤 공약은 “최후의 생활안전망을 강화하여 ‘빈곤층 제로’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보통 빈곤 제로는 상대적 빈곤선인 중위소득 50%까지 국가가 소득을 보장해 빈곤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공약집은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보장수준의 단계적 상향’이라고 방향만 말한다. 2022년 대선 공약에서 ‘상대적 빈곤선인 50%까지 보장수준 상향 검토’를 명시했던 것과 대비된다.
주거정책에서 진보성을 보여주는 핵심 기준인 공공임대주택도 “단계적으로 확대”를 제시할 뿐이다. 공공임대주택은 정부 재정이 상당히 투입되기에 목표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흐지부지될 수 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대폭 약화된 부동산 세금을 그대로 둔다. 공시가격 동결, 공정시장가액비율 하향, 종합부동산세 기본공제액 확대, 세율 인하 등 집 있는 사람, 고가의 집을 가진 이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4종 종합세트 감세를 유지한다.
보건의료에서 절박한 과제가 간병이다. 초고령사회에서 많은 가족이 간병돌봄으로 힘겨워하고 극단적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 현재 건강보험이 포괄하는 통합간호간병서비스는 전체 병원급 의료기관 병상 수의 10%에 그치는데, 공약집은 이것도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확대와 간병비 건강보험 적용’이라는 원칙만 적었다. 선관위 방송 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간병비 재정 방안을 묻자 답변 역시 “의료재정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확대해 가겠다였다. 이러면 국민건강보험의 다른 지출도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간병 급여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연금개혁은 보장성과 지속 가능성, 두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다. 공약은 “다층노후소득보장체계 구축” 그리고 “국민연금 재정 우려 해소를 위한 중장기 방안 마련” 수준에 머문다. 노인빈곤율이 40%에 이를 만큼 노후소득 보장이 부족하고 청년들이 나중에 받을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데도 ‘어떻게’를 말하지 않는다. 그나마 “불합리한 연금제도 개선” 취지로 구체적으로 제안한 “기초연금 부부감액 단계적 축소”, “일하는 노인에 대한 국민연금 감액 개선”조차 적절한 정책인지 의문이다. 부부감액은 단독가구와 비교해 공동생활비 지출을 감안한 항목으로 외국에서도 있는 경우가 많다. 소득활동 감액은 국민연금 수급자 중 실제 월 소득이 411만원 넘는, 최상위 2.3%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국민연금 가입 시기에 혜택이 많았고 은퇴 이후에도 상당한 소득이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책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도를 굳이 바꾸어야 할까.
복지재정 공약은 더욱 심각하다. 이 대통령은 복지국가가 부상한 2012년 선거 이래 처음으로 증세 공약이 없는 민주당 대선 후보이다. 예전이라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호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국토보유세까지 주창할 정도로 강력한 증세론자였던 정치인의 대변신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내총생산(GDP)의 22.1%까지 올랐던 조세부담률이 2024년에 17.7%로 낮아졌고, 중앙정부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무려 105조원에 이른다. 앞으로도 막대한 국가재정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변신은 실용일까, 후퇴일까.
진짜 대한민국! 이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다. 인수위원회 없는 조기 대선 정부여서 곧 공약을 국정과제로 재정립하는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진짜 대한민국 꿈을 가슴에 품고 투표장에 갔던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진짜 기본사회로 응답하라.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 경향 25.06.04.
‘극우’보다 무서운 ‘정치의 이권화’
적어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선 그동안 이론으로만 여겨졌던 극우가 뒤늦게 자신의 마각을 드러낸 윤석열이라는 신예 극우 정치인을 통해 그 실체를 보이면서 사회적으로 극우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논의의 기조는 우려와 공포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가시화된 극우 세력에 대해 무섭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극우로 불린 이들은 극우라는 딱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미디어오늘’ 기자 박재령은 지난 5월29일자에 “언론은 어디까지를 ‘극우’라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의제를 던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단체나 유튜버들이 자신을 ‘극우’로 표현한 언론에 대해 최근 언론중재위원회 제소 등을 통해 반발하고 있다. 극우의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지 않는데 언론이 표현을 섣부르게 썼다는 주장이다. 언론은 내란을 옹호하는 자들을 극우라 쓸 수 없는 걸까.”
이 기사에서 다룬 ‘자유대학’의 경우를 보자. 윤석열 지지 단체 중 하나인 자유대학은 자신들을 극우로 표현한 4월17일자 MBC 기사가 “모욕에 해당한다”며 언론중재위원회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자유대학 측은 “친중·친북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자유대학과 극우는 연결될 수 없는 것”이라며 “현대적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보편적 기득권을 부정한 사실이 전혀 없으므로 (자유대학을) 극우 단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자유대학 측은 극우의 기준을 설명한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경향신문 인터뷰(1월22일)를 인용하며 이러한 주장을 폈다. 신진욱은 인터뷰에서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인권·평등·법치같이 사회가 합의한 보편적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라며 “평등의 가치를 부정하는 특성이 가장 강하다. 계층·성별·인종에 상관없이 보편적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격렬한 저항과 증오를 나타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신진욱은 계엄 옹호 자체가 극우 기준에 부합한다고 봤다. 그는 “극우의 정의 역시 완전한 합의는 없다”면서도 “‘내가 미워하는 정당과 사회집단을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계엄 옹호), ‘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서부지법 폭동), ‘이 사회와 정부가 적(공산당 등)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부정선거론) 등의 생각들은 전 세계의 극우 연구에서 널리 관찰되는 전형적인 세계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극우, 서양 극우와 크게 달라
미디어오늘 기사에 인용된 더가능연구소 대표 서복경의 말마따나 지금 시기는 “한국에서 ‘극우’가 정의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해서 극우의 정의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 같진 않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극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서양의 극우 개념을 가져다 쓰고 있는데, 한국의 극우는 이 ‘서양 극우’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에서 때가 묻어 부정적 함의를 강하게 풍기는 극우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면서 공정한 논의에 임할 수 있을까?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는 어떻게 다른가? ‘누가 한국의 극우인가? 한국 극우의 특징과 정치적 함의’(황인정)라는 논문을 소개한 주간경향 특집 기사(3월3일)에 따르면, 보통 ‘극우’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폭력도 불사하는 집단을 지칭하지만 한국의 극우는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럽의 극우는 주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지만 한국의 극우는 여성, 소위 ‘종북세력’, 중국인 등을 희생양으로 삼는 특징을 보인다.
또 ‘한국적 극우 포퓰리즘 담론의 구조와 전파 양상’(김종우)이라는 논문을 소개한 미디어오늘 기사(4월22일)에 따르면, “유럽에서 나타나는 극우 포퓰리즘은 주로 ‘반이민’ ‘반다문화’ ‘반지성주의’ 등을 핵심 이슈로 삼는다. 반면 한국의 극우 담론은 ‘냉전적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구조화됐다. 또 법조인 등 전문가 주도의 극우 채널이 큰 비중을 차지해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와 달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보인다”고 했다.
개념이자 실체로서 극우의 견고성과 지속성도 따져볼 문제다.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이 ‘한겨레’ 칼럼(3월20일)에서 지적했듯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 사이엔 이런 큰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극우 정치는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생활 수준이나 지위가 추락한 사회집단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강력하며, 극복되기 쉽지 않다. 반면 한국의 극우파는 친위쿠데타 발발 이후 급속히 전방위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지만,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해줄 만큼 이 사회에 자리를 잡지는 못한 상태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서양 극우와 한국 극우를 같은 극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양에서 극우에 묻은 때를 지울 수 없다면, 아예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게 공정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한국의 극우는 주로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주의’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주간조선이 트랜드리서치에 의뢰해 5월17~1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한다면 “상대 후보가 싫어서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투표하겠다”가 5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의 극우 현상을 분석한 ‘주간경향’ 1618호(2025년 3월3일)의 표제가 잘 포착했듯이,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라는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단지 “저쪽이 싫어서” 하게 된 반작용에 가까운 일련의 언행을 한국의 독특한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유럽 모델을 가져와 피상적인 외양만 보고 극우로 판단해도 괜찮을까? 사회과학적 개념의 정의를 특수한 사건 중심으로 판단해도 괜찮은 건지 그것도 의문이다. 12·3 계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극우 여부를 가리겠다면, 극우의 규모는 유권자의 20%(880만명) 안팎으로 추산할 수 있다는데, 이게 정녕 사회과학적인 평가 방법일까?
극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는 건 무섭고 두려운 극우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과거에 무섭고 두려운 공산주의에 대한 유비무환의 취지로 빨갱이 타령을 남발했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왜 우리는 “저쪽이 싫은” 이유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정치가 승자독식 체제하에서 ‘이권 산업’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치 않다면, 우리가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극우’라기보다는 ‘정치의 이권화’가 아닐까?
평상시엔 자신이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지만 선거 때만 되면 중도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그 이유가 잘 담겨 있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 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요.” ‘정치의 이권화’가 심화할수록 진영주의가 심해지고 그런 토양에서 극우도 나타날 텐데, 왜 우리는 ‘정치의 이권화’엔 눈을 감은 채 그로 인해 나타난 증상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걸까?
‘정치의 이권화’ 약화시켜야
대선은 그 어떤 숭고한 명분을 내세울망정 이권의 분배를 결정하는 국가적 차원의 ‘밥그릇 전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은 장차관 등 상원의 동의가 필요한 600개 정도의 직위를 비롯해 6000개 직위의 인력을 직접 임명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는 중앙부처 장차관,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등 어림잡아도 3000~4000개에 이르며 법원, 검찰, 공영방송, 각종 협회 등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포함하면 수만개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속된 말로 ‘안면몰수’하는 줄서기와 편가르기가 괜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건 정치 냉소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런 문제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정치의 이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의 극렬함에만 주목하면서 ‘극우 경보령’을 발동하느라 바쁘다. 오늘 취임하는 새 대통령이 이런 현실에도 주목하면서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에까지 파고든 ‘정치의 이권화’와 그 기반이라 할 승자독식 체제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경향 25.06.04.
추경으로 충분? 수정예산 지침이 시급
새 정부가 출범했다. 축하보다 응원과 위로의 말을 먼저 전하고 싶다. 경제 상황과 재정 상황이 모두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만 해도 기재부는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2%로 예측했다. 그러나 연초 이후 정부는 1.8%(1월), 한국은행은 1.5%(2월)로 하향 조정했다. 4월 국제통화기금(IMF)은 1.0%, 5월 한국은행은 0.8%로 전망했다. JP모건체이스 등은 0.5%까지 낮춰 잡기도 한다.
경기 침체 시 정부 지출 증가는 재정의 원칙이다. 그러나 재정 사정도 좋지 않다. 윤석열 정부 2년간 국세 수입은 무려 15% 감소했다. 이는 2020년 코로나 시기의 2.7% 감소나, 1998년 외환위기 당시의 3% 감소를 훌쩍 뛰어넘는다. 즉 내수 진작을 위해 지출을 늘려야 하지만, 재정 여건상 지출을 늘릴 수 없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재명 당선인은 후보 시절 TV토론에서 민생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추경을 통해 내수 경기를 보완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첨단기술, 재생에너지, 문화산업 등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것은 없지만 방향은 맞다.
이제는 구체적인 방안을 통해 실천에 옮길 때다. 제2차 추경으로 지난 1차 추경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한다. 1차 추경 사업을 금액순으로 정렬해보면, 1순위는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전기요금 등 공과금 50만원 지원 사업이다. 그다음이 그래픽처리장치(GPU) 구매 사업이다. 두 사업 모두 필요하긴 하지만, 내수 회복 효과는 제한적이다. 공과금 납부에 한정된 지원금이 소비 선순환을 유도하긴 어렵고, GPU 구매도 마찬가지다.
3순위인 ‘상생 페이백’은 내수 회복을 돕는 방향이지만 매우 복잡하다. 연 매출 30억원 이하 사업자에게 사용한 카드 소비액이 전년보다 증가한 경우, 증가분의 20%를 돌려주는 방식이다. 발급받기도, 사용하기도 어렵다. 매출 30억원 이하 사업자에게 사용한 금액을 비교할 수 있는 소비자는 드물다. 4순위는 재난대책비, 5순위는 소상공인 융자 사업이다.
이에, 2차 추경에는 내수 회복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소비 직접 확대 사업이 포함돼야 한다. 융자 사업은 이미 1차 추경에 포함됐기에, 2차 추경은 소비지원금 중심이 돼야 한다. 지금은 특단의 내수 회복 대책이 필요한 위기 상황이다.
문제는 어떻게 나눠줄 것인가다. 전 국민 대상 지급은 재원이 부족하다. 특히, 고소득층이 소비를 안 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저소득층을 선별해 주자니, 올해 소득 기준으로 선별할 방법이 없다. 건강보험료 등 자료는 전년 혹은 재작년 소득 기준이다. 작년에 어려웠던 가구가 올해는 괜찮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작년 소득이 높았다고 올해 누락되면 안 된다.
해결책은 있다. 바로 ‘보편지원, 선별환수’ 방식이다. 올해는 희망자에 한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비지원금(예를 들면 20만원)을 지급하되, 내년 연말정산에서 세금으로 환수하는 방식이다. 신청자는 연말정산 시 인적공제를 받지 못하게 하면 된다. 저소득층은 전액 수혜를 받고, 소득이 많아지면 일부 혹은 전액을 세금으로 환수하게 된다. 연봉 5000만원 중산층은 약 20만원, 1억원 이상 고소득자는 30만원의 세금을 추가로 낼 수 있다.
올해 소득 기준 선별이 핵심이다. 상반기에 소득이 없어 신청했더라도 하반기에 소득이 늘면 세금으로 환수된다. 1인당 20만원은 작아 보이지만, 3인 가구에는 60만원이다. 급한 가정에는 절실하다. 선별 과정 없이, 받기 싫은 사람은 신청하지 않으면 된다.
더 시급한 과제는 2026년 수정예산안 편성지침 마련이다. 새 정부가 집행할 2025년 예산은, 2차 추경을 제외하면 윤석열 정부가 편성한 것이다. 문제는 2026년 예산도 윤 정부가 설계한 틀 안에서 집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3월 말, 윤 정부는 2026년 예산안 편성지침을 각 부처에 하달했고, 부처들은 예산 요구서를 작성했다. 기재부와 부처 간 조정만 남았다.
5년 임기 중, 2년을 전 정부 예산 집행에만 써야 한다는 건 부적절하다. 새 정부는 시급히 ‘2026년 수정예산안 편성지침’을 마련하고, 7월 중순까지 각 부처가 수정된 요구서를 다시 작성하도록 해야 한다. 매우 긴박하다. 축하보다 위로를 먼저 전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중장기 전략으로는 녹색 투자 증대를 조언한다. 녹색 투자는 탄소중립이란 지구적 가치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확실한 투자처다. 예컨대 에너지 절약 시설 투자는 절감 효과가 투자액을 초과한다. 다만, 그 성과는 다음 정부에 이월될 수 있다. 단기 대응과 함께 이런 장기 전략이 병행되길 기대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경향 25.06.04.
새 대통령이 1년 안에 해야 할 일
21대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나라 경제는 백척간두에 서 있고 해결할 일은 쌓여 있기에 새 대통령은 바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역대 대통령을 보면 대체로 임기 1년 안팎에 성과를 보여줬다.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청산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대통령의 외환위기 극복이 대표적이다. 큰 틀의 국정운영 방향도 대체로 임기 초반에 제시했다. 그렇기에 새 대통령이 1년 안에 해야 할 국정 과제를 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새 대통령은 무엇보다 경제에 집중해야 한다. 단기적으론 침체한 내수 경제를 살려야 한다.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 지난해 2분기부터 경제성장률은 -0.2%, 0.1%, 0.1%, -0.2%로 나타났는데, 건국 이래 4분기 연속 0.1% 이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윤석열 정권이 처음이다.
새 정부는 또 미래 먹거리를 위한 산업 육성 계획을 구체화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 때 정부 주도로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고 아이티(IT)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자생적으로 창업하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재정비해야 한다. 특히 중국산 제품과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인한 국내 산업 공동화 현상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생산 과잉인 철강·석유화학 등 일부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도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두번째는 기후위기 대응과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구체적 실행 계획을 밝혀야 한다. 탄소 배출량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어떻게 늘릴 것인지 연도별 계획과 재원 투자 규모까지 제시해야 한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자료를 보면, 한국은 지난해 10.54%였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은 이미 50%에 육박했고, 중국도 34.2%, 인도도 21.75%다.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 비중은 35.8%다. 지금부터 국가 역량을 동원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세계 평균을 따라잡기 어렵다.
이는 기업의 생존 문제이기도 하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 일명 ‘탄소세’는 내년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미국도 청정경쟁법과 외국오염관세법 등 유사한 제도를 검토 중이다. 국내 기업들이 이들 국가에 제품을 수출하려면 사실상의 추가 관세를 내야 한다. 재생에너지 100%를 의미하는 아르이100(RE100)은 이미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의 표준이 되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면 중국만 배 불린다는 혐중 정서에 편승해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을 사실상 포기했다. 전세계 태양광 패널의 80% 이상이 중국산이다. 그게 싫다면 더 나은 패널을 국내에서 만들면 된다.
다음으로 새 대통령은 정치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밝히고 개헌을 1년 안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대통령 후보들은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선거가 끝나면 모두 개헌은 뒷전이 된다. 하지만 대선 결선투표제는 꼭 필요하다. 유세 기간의 단일화 논의 과잉을 막고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약을 가지고 연합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대통령만 개헌안을 발의하고 야당을 설득하지 못하는 일이 재현되어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정파를 떠나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야 한다. 자기 진영의 유튜브에 출연해 지지층에만 호소하는 일을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특정 진영의 리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리더다. 윤석열 대통령이 극우 유튜브만 보다가 국정을 마비시키고 비상계엄까지 이르게 된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야당을 존중해야 하며 대화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다수 언론의 지적이 있다면 언론을 탄압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고쳐야 한다.
차기 대통령은 굉장히 어려운 정치·경제·안보 환경에서 시작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대통령보다도 큰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윤석열 정권 3년의 허송세월이 너무나 뼈아프다. 새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희생과 절제, 그리고 인재를 두루 쓰는 중용의 도가 필요하다. 새 대통령은 5년 뒤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3년 전 윤석열에게도 많은 사람이 희망을 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김준일 | 시사평론가 한겨레 2025.06.04.
퇴행 끝, ‘이재명 정부’ 골든 타임 시작
이재명 새 대통령이 탄생했다. ‘어쩌다 대통령’의 암흑기를 지나 비로소 대한민국이 ‘준비된 대통령’의 시대로 다시 들어섰다. ‘누굴 대통령으로 뽑느냐’는 대통령제 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다. 이제 우리는 어리석고 포악했던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무능과 전횡을 마감하고 새 인솔자와 함께 또 한번의 도약과 전진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역사는 지난 3년을 대한민국의 거대한 퇴행기로 기록할 것이다. 경제는 추락했고, 민생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민주주의는 질식 직전에 간신히 부활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가 경제와 민생, 민주주의 모두에서 한꺼번에 추락한 건 처음이다. 이 모든 퇴행과 추락을 반전시키는 임무가 이 대통령과 새 정부에 주어졌다.
기억할 건 전임 ‘윤석열 정권’의 몰락이 단지 6개월 전 ‘12·3 내란’으로 갑자기 촉발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3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 나라의 추락과 정권의 몰락은 이미 시작됐고, 이후 한순간도 시한폭탄의 초침은 멈춘 적이 없다. 비상계엄은 자폭 시점을 앞당긴 불쏘시개였을 뿐이다. 새 정부 출범에 즈음해 국민에 의해 끌어내려진 전임 정권 몰락의 출발점을 짚어보려는 건 그 때문이다. 윤 정권은 한번도 최초 설정된 좌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예정된 경로를 질주한 끝에 자폭했다. 이제 출발점에 선 정부의 반면교사로 삼기에 충분하다.
‘국정 비전 실종’은 윤 정권 실패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윤 전 대통령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려는 원초적 권력욕은 탱천했으되, 어떤 나라와 정부를 만들어 국민 삶을 향상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상은 더없이 박약했다. 그의 당선 자체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가 아니었다. 강경 보수층의 정권 탈환 욕망에 문재인 정부의 집값 폭등과 세금 인상, ‘내로남불’에 성난 민심이 가세해 어쩌다 대통령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이후 윤 전 대통령의 국정 추진이 ‘청와대 이전’이나 ‘반국가 세력 척결’ 같은 실제 국민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허한 구호성 과제 중심으로 흘러간 근본 이유라 하겠다. 반면, 그나마 선거용으로 내놨던 자영업자 코로나 손실보상 같은 민생 대책은 ‘건전 재정’ 운운하며 규모와 폭을 줄이기에 급급했다. 민심이 등을 돌린 건 순식간일 수밖에. 이 대통령은 당선 직전 “지금은 개혁보다 급한 것이 민생 회복”이라며 경제·민생을 가장 주력해야 할 국정 과제로 제시했다. 준비된 실용주의자의 진면목을 온 국민이 체감할 수 있게 임해주기 바란다.
‘인사 참사’는 집권 초반 윤 정권에 대한 국민 지지를 반토막 낸 대표 실책이다. 내각과 대통령실 인사에선 ‘쉰내’가 진동했다. ‘40년 지기’나 ‘법대충’(윤 전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대광초, 충암고 동문) 인맥으로 채운 ‘서육남’(서울대 출신, 60대, 남성) 일색 ‘찬스 내각’은 인사 족족 말썽을 빚었다. ‘김건희 라인’은 대통령실 요직을 꿰차고 비선에서 국정을 쥐락펴락했다. 이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인사 실패 아니냐’는 언론 지적에 대해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일축했다. ‘불통과 오기’가 윤 정권 ‘종특’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인사와 관련해 “제1의 기준은 ‘국민에게 충직한가’다”라며 “유능과 청렴, 지역·연령·성별 균형”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늘 이 말을 기억하길 바란다. 혹여라도 인선 뒤 인사청문회 등에서 미처 검증 못 한 문제점이 드러날 수도 있다. 오기로 일관한 전임자와 달리 유연하게 국민 눈높이를 존중하는 자세 또한 견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전임자의 국정 ‘무신경’과 ‘게으름’에 대해서는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을 터다. 그는 집권 초 100년 만의 폭우로 강남역이 물에 잠기고 신림동 반지하에서 일가족이 숨진 날 다른 아파트들이 침수되는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정시 퇴근을 강행해, 국민들이 할 말을 잊게 만든 바 있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이 대통령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이번에는 다르리라 기대할 것이다.
내란 청산과 권력기관 개혁도 국정 ‘골든 타임’을 놓쳐선 안 되는 과제다. 면밀한 계획과 단호하고도 정밀한 집행이 필수다. 전임자는 술과 무속, 권력에 취해 몰락의 길로 달려갔다. 이 대통령은 새 시대, 새 정부의 구상을 빠르게 현실로 만들며 기진맥진한 나라의 기운과 활력을 되살리기 바란다.
손원제 논설위원 한겨레 2025.06.04.
궤변 언론에 시달릴 이재명 정부 5년이 걱정스럽다
6월 3일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역대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번 대선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윤석열의 내란 범죄와 파면으로 인해 실시된 ‘조기’ 대선이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몰고 갈 뻔한 내란 사태를 하루속히 종식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갔을 것이다. 그 결과가 이재명 후보의 완승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하고 막중한 임무는 ‘내란 종식’이다. 내란 종식의 핵심은 내란 범죄의 실체를 정확히 밝혀내고 내란 범죄자들을 엄정한 사법처리로 응징하는 것이다. 내란에 가담하거나 동조한 자들에게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동안 내란수괴가 합법적으로 ‘탈옥’하는가 하면 내란 가담자들이 내란 동조세력의 도움을 받아 처벌을 피하고 집권을 연장하려는 2차 내란이 지속돼 왔다. 경제와 외교는 무너지고 국민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려왔다. 이 불안과 불행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나라를 상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회복시키자는 민심이 선거로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주류 언론들은 또 딴청을 피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가 대선에서 완승을 거둔 다음날 아침 주류 신문들의 사설에서 ‘내란 종식’이라는 국민들의 염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요 언론들은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과 갈등이 누구 때문이지,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내란 종식이 왜 지금 가장 중요한지 따지지 않고 그저 ‘통합’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란 종식 없이 무슨 통합을 하자는 것인가? 민심을 무시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국민을 우롱하는 것 아닌가.
정치인 이재명을 지금까지 가장 극렬히 악마화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키워온 조선일보는 4일 “이 대통령, 갈라진 나라 치유하는 국정을” 제목의 사설을 냈다. 조선일보는 정부 비판자들을 ‘처단해야 할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끝내 비상계엄 내란으로 나라를 분열시킨 윤석열을 가장 열렬히 지지해온 언론이다. 이재명 죽이기에 제일 앞장선 언론이 이재명에게 '치유하는 대통령'이 되라 하고, 국민분열을 가장 극렬하게 조장해온 당사자가 이제와서 '통합' '치유'를 말하고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비상계엄 이후 6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탄핵 찬성과 반대로 극심하게 분열”됐고 “진영, 세대, 지역으로 갈라진 정치풍토가 이제는 사회 곳곳으로 번져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할 것이냐,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활용해 나라를 통합할 것이냐는 이 대통령의 선택”이라고 했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분열의 가장 큰 책임과 원인은 윤석열 내란 세력에게 있다. 그들이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생겨난 혼란이다. 진영, 세대, 지역이 일으킨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조선일보는 혼란의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 그 책임을 모호하게 덮어버리거나 마치 국민들에게 혼란의 원인과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또 이재명 대통령에게 이 혼란과 갈등을 치유하려면 무조건 ‘통합’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국민 혼란을 초래한 내란 세력들을 응징하면 그것은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이니 책임을 묻거나 응징하지 말고 ‘통합’의 깃발 아래 다 파묻고 가자는 것이다. 내란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이해하는 틀(프레임)을 교묘하게 조작ㆍ왜곡하고 이재명 대통령을 겁박하면서 내란 종식을 바라는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3년 전 윤석열 내란수괴에게 ‘윤비어천가’를 헌사했던 중앙일보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당선인, 국민통합의 약속 잊지 말아야” 제목의 같은 날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최악의 중병은 날로 극심해지는 진영 갈등이다...선거가 끝난 뒤 날 선 증오만 남았다. 극한 대립의 상처를 치유하는 책무가 새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기득권 주류 언론이 한국 사회의 갈등을 비판할 때 툭하면 가져다 쓰는 전가의 보도가 ‘진영 갈등’이다. 비겁하고 교활한 양비론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는 프레임 장난이다. 내란 사태는 진보·보수 두 진영 간 논쟁을 벌일 사안이 아니다. 명백히 윤석열 일당이 일으킨 민주주의와 헌법 파괴의 '범죄'다. 기득권 주류 언론들은 스스로 ‘진영 갈등’을 만들고 키워서 정치 혐오를 조장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친일·반민주 세력의 숱한 역사적 죄악을 ‘진영 싸움’이라는 담요로 은폐해왔다.
윤석열 정부 이후 정권 기관지로 변신한 서울신문도 “(내란 세력 응징이) 비판세력에 대한 제압이나 정치보복 논란으로 이어진다면 국론은 분열되고 말 것”이라며 “국민을 가르지 말고 통합하는 통 큰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했다. ‘중도’를 핑계로 기계적 중립(실은 기만적 중립) 태도를 유지해온 한국일보는 “이번에도 국민 분열과 진영갈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과거에 매달려 미래를 대비할 시간을 허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사설을 냈다.
서울신문 사설은 이재명 정부가 내란 세력 처벌에 나서면 이를 ‘정치보복’으로 몰겠다는 경고나 다름없다. ‘통 큰 정치’가 의미하는 것은 내란 세력에 가혹한 처벌과 응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에 매달리면 미래를 대비할 시간을 허비한다’는 한국일보의 주장도 같은 소리다. 다른 기득권 주류 언론들의 사설도 대개 비슷한 논조다.
‘국민통합’이란 무엇인가? 이념·계급·계층·지역·세대 간에 갈라진 틈을 좁혀 극단적 반목과 혐오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 통합을 하려면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범죄를 저지르는 세력을 응징하는 일이 우선이다. 이 세력은 누구인가? 두 말 할 것 없이 윤석열 내란수괴와 가담자들이다. 이에 동조한 극우 세력, 이들에게 마이크를 빌려준 기득권 언론도 공범이다.
그러므로 12.3 내란 이후 진정한 국민통합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내란범죄자들에 대한 처벌과 응징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되살리는 것이며, 경제·외교·민생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란 말이 나치 독일에 굴욕을 당했던 프랑스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이념·계급·계층·지역·세대 간 갈등과 분열이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역대 정권이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전두환 독재세력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 노무현 대통령이 거대 기득권 언론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것,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검찰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것 등이 그 사례다. 오죽하면 국민들이 "윤석열 쿠데타는 전두환 내란수괴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자연사한 결과"라는 말을 할까.
기득권 주류 언론들은 통합을 주장하지만 실은 통합이 아니라 진영 간의 갈등을 키우고 국민 분열을 그대로 덮어놓고 가자는 것이다. 이들이 12.3 내란으로 벌어진 갈등과 분열의 원인을 ‘진영의 문제’로 호도하고, ‘통 큰 정치로 통합하자’며 내란 책임을 덮고 가자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 스스로가 그동안 내란 세력을 옹호하거나 동조해온 '분열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내란 세력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가혹한 응징이 없다면 국민 분열이 수습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나라를 팔아먹거나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을 용서해야 국민통합이 이뤄진다는 기득권 언론의 주장이 거대한 거짓말이었음을 우리는 일제 미청산과 전두환 자연사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주류 기득권 언론들은 자신이 내란을 옹호·동조한 죄를 감추기 위해 이런 궤변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예전부터 유독 민주 정부에게 이런 식의 궤변과 왜곡으로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아왔다. 궤변 언론들로부터 앞으로도 부당한 공격을 당하게 될 이재명 정부 5년이 걱정스럽다.
김성재 시민언론민들레 25.6.5
극우와 K학문
극우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심판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극우의 위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위협은 일국적 차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선진 자본주의 나라 대부분에서 극우 세력이 부활했다. 영국과 미국은 새로운 민족주의의 도전에 직면했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감행했고 미국은 두 번에 걸쳐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새로운 민족주의는 포퓰리스트 급진우파 정당들을 통해 서구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 특히 2015년 유럽 난민 위기를 틈타 극우 정치는 반이민과 반다문화주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이를 통해 민족주의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담론이 사회 곳곳으로 번졌다. 이민자, 성소수자, 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에 반대하는 극우 혐오주의 정치가 현실적인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동안 학자들은 극우 세력의 발흥 원인을 탐구해왔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지난 40년간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실행한 결과 극우가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병리와 극우의 재생이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한 복지국가에 대한 대반격이다. 정치보다 시장을 중시해 재분배에 대한 요구를 부정함으로써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축소했다. 빈부 격차 심화, 사회안전망 약화, 국민의 안녕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태도는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일반 시민은 도덕적 분개를 쏟아낼 대상을 찾았다.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했다. 핵심은 소수자에게 사회적 불평등과 문화적 불안의 모든 원인을 돌리고 혐오하는 것이다. 절망과 환멸을 활용하는 원한의 정치가 판을 친다.
물론 모든 학자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최근 수십년 동안 극우 세력의 부상을 앞당겼다는 데에는 의견이 같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만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극우를 일으키는 여러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셜미디어와 인플루언서 문화의 부상은 극우 아이콘의 인기를 상승시켜 극우 정치를 널리 퍼트린다. 실제로 극우 정당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보급률이 높은 국가들에서 성공했다. 소셜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극우는 익명성을 무기로 날것 그대로의 혐오 언어를 맹렬하게 구사한다. 미디어 공간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는 오프라인 현실의 왜곡된 엘리트 정치와 맞물리면서 극우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기폭제로 신자유주의 물결에 올라탔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많은 국가와 대규모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중국과도 활발한 경제 교류를 해왔다. 신자유주의는 수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지만, 잉여인구 창출과 불평등 심화도 불러왔다. 민족주의를 통해 상상해왔던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의 안정성을 위협했다. 경제적 불안정과 문화적 불안은 분노와 좌절을 낳았고, 극우 유튜버는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해 갈라치기 정치를 구사했다. ‘이대남’과 ‘태극기부대’가 힘을 합쳐 법원을 습격하고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리박스쿨’이 보여주듯 이제는 미래를 내다보며 극우의 재생산을 노리고 있다. ‘역사교육’을 통해 미래세대를 극우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로 개조하려 든다. 끔찍한 국가주의가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막 시작한 새로운 정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민생 문제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소셜미디어, 극우, 민주주의를 하나로 묶는 학제적 연구가 절실하다. K문화만이 아니라 K학문에도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경향 2025.06.05.
부족했던 1%포인트, 대통령 이재명의 숙제
불법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과 대선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몇달이었다.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그사이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앙상하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는 어느새 초록의 이파리로 덮여 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이 하늘을 더럽히던 북의 오물 풍선도 사라졌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정상회담을 앞둔 용산 대통령실 경내에서 발견되던 오물 풍선이었다. 서울 여의도 고층 빌딩에서 보면 오물 풍선이 열기구처럼 둥둥 떠다닌다고도 했다. 우리 쪽에서 대북전단 날리기를 먼저 중단한 것인지, 아니면 북측이 우리 상황을 간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라졌다. 윤석열 정부는 오물 풍선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실효적인 대응은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능했다.
“이제 일 좀 해야지요.”
5일 만난 대기업 간부 A씨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12·3 불법계엄 이후 우리 기업들은 업무가 거의 ‘스톱’ 상태였다고 한다. 국내외 상황이 하도 불확실하다 보니 경영전략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초반 석 달 경영방향이 아주 중요한데, 그냥 날려버렸어요. 몇달을 날린 게 아니라 한 해를 날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돕니다.” 지난달 대기업 간부 B씨는 “빨리 대선이 끝났으면 좋겠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으킨 관세전쟁은 기업들이 겪어보지 못한 역대급 리스크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준의 고관세에 기업들이 개별 대응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다. 상대의 속내를 읽고 이에 맞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대응이 절실한데 불법계엄 사태로 정부는 부재했다. 미국 측은 빠른 협상을 압박해오고, 기업들은 버티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먼저 자동차 분야에 충격파가 전해지자 3월 말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에 4년간 3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트럼프 대통령 옆에 섰다. 그러면서 대기업의 단일대오도 무너진 상태였다고 재계 관계자는 전했다.
이런 상황은 공공부문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제에서 새로운 행정은 꿈꿀 수 없었다. 기존 사업이 별 탈 없이 잘 굴러가는 것만 해도 다행인 상황. 중앙부처 관료 C씨는 “지난 6개월 그냥 손 놓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6·3 대선은 대한민국이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첫날 밤 ‘비상경제점검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주재했다. 이튿날에는 점심으로 김밥을 먹으며 국무위원들로부터 현황 보고를 들었다. 비로소 멈춰 섰던 국정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12·3 불법계엄이 대한민국 경제에 끼친 해악은 생각보다 크다. 주가는 2300대까지 밀렸고 원·달러 환율은 치솟았다. 한국은행은 계엄 사태로 원·달러 환율이 30원가량 높아진 것으로 추정했다. 소비심리 악화, 마이너스 성장률, 외국인직접투자(FDI) 감소 등과 같이 드러난 지표를 차치하고 지난 6개월의 기회비용은 산정조차 하기 어렵다. 남들이 인공지능(AI)이다, 자율주행자동차다, 2차전지다 전쟁을 벌일 때 우리는 계엄법을 들여다봐야 했다.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 젠슨 황의 한마디 한마디를 주목해야 할 때 이승만, 전두환의 망령과 싸워야 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는 6개월을 우리는 그렇게 허비했다.
새 정부 출범 이틀째 코스피가 2800을 돌파했다. 원·달러 환율은 1350원대까지 떨어졌다. ‘실용적 시장주의’에 시장이 화답한 것일까. 새 정부와의 허니문 기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동안 답답했던 무언가가 막 분출하는 느낌은 확실하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 일성을 통해 “박정희의 정책도, 김대중의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고 했다. 박정희의 산업화, 노태우의 북방외교, 김영삼의 금융개혁, 김대중의 정보기술(IT)과 햇볕정책, 노무현의 권위주의 타파는 기억에 남는 성과다. 이 대통령의 ‘먹사니즘’은 역대 대통령의 성과를 어떻게 조합해 보일까.
이 대통령은 6·3대선에서 49%의 지지를 받았다.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더 많다는 얘기다. 과반에 부족한 1%포인트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이제 대통령 이재명에게 남겨진 숙제가 됐다. 그 답 중 하나는 민생이 틀림없다. 시작은 ‘일 열심히 하는 대통령’이다.
박병률 탐사기획에디터 겸 경제에디터 경향 2025.06.05.
분열은 무능의 결과다’
전임 정부의 몰락이 언제부터 시작됐냐고 묻는다면 2022년 1월7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윤석열 당시 후보가 아무런 설명 없이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린 날이다. 2030세대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서였다는데, 여성가족부가 사라지면 이들이 어떤 구체적 실익을 얻을지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젠더 갈등 프레임을 자극해 표를 모으기 위해서 정부 내 성평등 추진체계를 없애버리자고 선언한 것이다. 소수자 혐오에 기반해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결과적으로 3년 뒤 자멸했다. 그를 파면시킨 광장의 주역은 그가 배제했던 여성과 소수자였다.

지난해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안이 가결되자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우스운 것은 이번 대선에서는 너도나도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 ‘여성혐오’를 입에 올렸다는 점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상대 후보의 가족을 검증하겠다며 여성에 대한 가학적 성폭력을 TV 토론에서 묘사하면서 “이것은 여성혐오냐”라고 물었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노동자 출신인 김문수 후보 배우자를 거론하며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와서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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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엘리트 중년 남성 특유의 허위의식이 가득한 이 발언 자체도 듣기가 괴로웠는데, 국민의힘 주요 인사들이 갑자기 여성혐오를 규탄하는 코멘트를 앞다퉈 내놓을 때는 조금 결이 다른 모욕감이 느껴졌다. 3년 전 대선에서 성별 갈라치기를 집권전략으로 삼았던 정당이, 그와 같은 전략은 여성혐오를 부채질하는 것이라는 비판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으면서, 상대편을 공격할 만한 소재로써만 여성을 동원하는 모습이. 그 와중에도 김문수 후보는 “출산지원금 1억원을 아이 낳자마자 통장에 입금시켜 주려고 했는데 혹시 엄마가 주식에 넣었다가 다 털어먹고 이러면 애 못 키운다”고 말했다. B급 블랙코미디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들로 구성된 ‘자유대학’이 주최한 ‘사전투표 폐지·부정선거 검증 촉구’ 집회 참가자들이 지난 4월 17일 중국인 가게가 밀집한 서울 광진구 양꼬치거리 일대에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김태욱 기자
차별과 혐오 공격은 한 집단만을 향하지 않는다. 이번 대선 기간 동안 혐오와 갈라치기의 제물이 된 것은 중국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중국 선거개입설을 주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김문수 후보는 중국인들이 군사시설을 촬영하다 적발된 일 등을 거론하며 중국인을 겨냥해 간첩죄를 개정하겠다고 했다. 중국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민주당이 중국어로 선거유세를 했다며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중국어로 연설을 하면 되겠냐. 나라가 중국의 식민지가 돼서는 안 되지 않냐”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도 한국으로 귀화했다면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고, 국적이 있으면 투표권이 있는 것이 당연하며, 해당 국가 출신 이주민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맞춤형 선거운동을 하는 일은 보편적인데도 그랬다.
공인이 공론장에서 특정 소수자 집단을 배제하거나 악마화하면 혐오표현이나 차별이 사회적으로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실제 차별과 폭력, 혐오범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혐오 선동이 물리적 폭력으로 넘어가는 임계점은 이미 지난 듯해서 우려스럽다. 지난 겨울 내내 몇몇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을 향해 소리를 치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양꼬치 거리를 찾아가 혐중 발언과 욕설을 쏟아낸 ‘청년’들도 있었다. 일부 극우단체는 부정선거를 잡겠다며 중국 출신 이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투표소에 몰려가 투표하고 나오는 시민들을 붙잡고 한국어를 해 보라고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재명 정부의 1순위 과제인 내란 종식과 민주주의 회복은 혐오와 차별을 종식하는 일과 무관치 않다. 내란 사태를 초래한 윤석열 정부는 여성혐오에 기반해 집권했다. 불법 비상계엄 사태의 핵심 지지층은 지난 수십년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선동으로 세를 불려오다가 이번에는 중국인 혐오 정서에 편승했다. 여성과 성소수자, 외국인을 혐오한 세력이 합작한 사태가 지난 겨울 불법 계엄과 6개월간의 혼란이었다.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 선동을 전방위적으로 차단할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내란과 내란이 만든 분열을 종식시킬 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에 널린 혐오 콘텐츠에 대한 법적 책임을 플랫폼 사업자에게 물리는 등 강력한 제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혐오를 장난이나 유머로 쉽게 소비하지 않도록 평등과 인권 교육을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면 한다. 모든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도입하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빠르게 합의를 위한 절차도 추진하길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은 유능함의 지표이고 분열은 무능의 결과다”라고 했다. “국민 삶을 바꿀 실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세력만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편가르고 혐오를 심는다”고도 했다. 이 대통령이 유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진정한 의미의 통합에 성공하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한다.
남지원 젠더데스크 경향 2025.06.05.
판검사가 나라 전체를 인질로 잡을 순 없다
미국 남북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남부 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약삭빠른 검사가 갓 취임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기소해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면 미국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다룬 논문에서 미국의 저명한 법학자 아킬 리드 아마르(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이런 가정적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미합중국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어떤 명목으로 기소했든 북부를 향한 증오가 퍼지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배심원과 판사는 링컨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 있었을 테니 이후 미국 역사의 전개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르 교수는 이 가상 상황을 통해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이 지니는 민주적 가치를 설명한다. “대통령은 전체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 국민 중 어느 일부가 전체 국민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불소추 특권은 대통령이 된 ‘어느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의 원활한 대통령직 수행에 이해관계를 갖는 ‘국민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아마르 교수는 이 점을 더 선명한 비유로 강조한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보다) 국민 대표성이 떨어지는 이들(판검사)이 나라 전체를 인질로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음에도 법 해석과 실무 관행을 통해 이 특권은 미국 역사에 공고히 자리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당선되자 잭 스미스 특별검사가 앞서 제기했던 기소를 철회한 게 최근의 예다.
하물며 헌법에 명문 규정을 둔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받아온 재판의 중단 여부를 논란거리로 삼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소추’ 개념에 재판도 포함되는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재판은 기소의 결과로 당연히 따라붙는 절차인 만큼 ‘기소-재판’을 연결된 하나로 봐야 한다. 대통령의 원활한 직무수행을 보장한다는 불소추 특권의 취지에 비춰 봐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헌법 교과서에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의 형사상 특권은 사법권(재판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규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사법부는 대통령에 대하여 그 신분보유기간 중에는 원칙적으로 형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권영성 ‘헌법학 원론’) 프랑스 헌법에 담긴 더 구체적인 표현도 참고할 만하다. ‘대통령은 임기 중에는 프랑스의 모든 법원 또는 행정기관에서 증언하도록 요구받지 아니하고, 민사 절차, 수사, 기소 및 조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피고인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때에는 임기 종료 시까지 공판 절차를 정지하여야 한다’)은 우리 헌법의 취지를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법 앞의 평등’을 해치는 양 호들갑을 떤다. 다시 말하지만, 불소추 특권은 대통령의 형사책임을 면제시키지 않는다. 재판은 중지될 뿐 임기 뒤 재개된다. 이렇게 임기 중으로 한정해 불소추 특권을 부여한 것은 국가 안보와 외교, 국민의 생명·안전 보호, 민생·경제 등 막중한 임무를 선출된 대통령이 원활히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민주적 요청과 누구도 법 앞에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는 법치의 요청을 모두 충족시키고자 하는 헌법적 지혜다. 대통령이 이 신성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라면 물론 임기 중에도 소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경우 헌법은 일개 검사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인 국회로 하여금 탄핵이라는 방식으로 소추하게 해뒀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인용하면 이후 형사 소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치’를 목청껏 외치는 이들이 정작 따지고 들 지점은 따로 있다. 헌법에 불소추 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규정된 내란죄를 저지르고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누려온 비헌법적 특혜다. 오직 윤석열에게만 적용되는 구속기간 계산법을 만들어 석방해준 판사, 이에 대해 이례적으로 즉시항고조차 하지 않은 검찰, 또 아무런 형사적 특권도 없는 민간인 김건희씨를 제대로 수사도 기소도 못 한 검찰…. 그들이 깨버린 ‘법 앞의 평등’이야말로 법치 파괴 그 자체다.
그리고 이렇게 법치를 내팽개친 법원과 검찰에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삶을 인질로 잡힐 수 없다는 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자명한 원칙이다.
박용현 | 논설위원 | 한겨레 2025.06.05.
20대 대선 선거법 유죄'로 '21대 대선 당선무효' 하겠다는 건가
이재명 대통령은 제21대 대선에서 역대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지난 3년간 그를 옭아맸던 '범죄자 프레임'도 민심의 흐름을 완전히 돌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온 사법의 짐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당선 이후에도 그를 법정에 세우려는 시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에게 불소추 특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미 진행 중인 재판에는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재판이 계속되면 이 대통령은 임기 내내 법정을 오가야 할 처지에 놓인다. 대통령의 시간은 곧 국민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계속 재판으로 소모된다. 이 대통령이 기소된 사건은 모두 5개다. 국정 책임을 진 대통령이 공판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재판은 한없이 길어지고, 그 여파는 국정 운영에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처리 방향이다. 이 사건은 대법원을 거쳐 서울고등법원으로 돌아왔고, 파기환송심 첫 재판이 18일로 예정돼 있다. 이 재판을 끝까지 진행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속으로 희망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이 벌금 100만원 이상의 '당선무효형'을 내리고 대법원이 그대로 확정하면 이재명을 당장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 제 266조에는 '당선무효형이 확정되면 이미 취임 또는 임용된 자라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규정은 위반 행위가 일어난 '해당 선거'의 당선 무효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런데도 이재명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언론은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대선에 출마할 수 없고 국회의원직도 잃는다"고 말했다. 과거 선거의 위반 행위를 이유로 다른 선거의 결과까지 부정하는 것이 법리적 상식적으로 옳은가? 선거가 다른데 책임은 하나로 묶겠다는 기묘한 논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국회의원직 상실을 기정사실화했다. 같은 논리로 이제는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대통령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가능성이 짙다. '20대 대선 패배자'에 대한 '당선무효형'으로 '21대 대선 당선무효화'를 하겠다는 해괴한 발상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재판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대선 출구 조사 결과를 앞세운다. 63.9%가 '계속해야 한다'고 답했고, '중단해야 한다'는 응답은 25.8%였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재판 계속'(42.7%)과 '중단'(44.4%)이 엇비슷하게 나왔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 수치를 내세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국민의 뜻"이라고 사설에서 강조했다.
그런데 질문 내용을 바꿔 여론조사를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대통령이 매주 법원에 출석하느라 국정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판 준비로 민생과 외교가 뒷전에 밀리는 데 동의하십니까?" "임기 후 재판을 재개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게 평등의 원칙을 심각히 위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주당 지지자들한테는 "재판을 계속하면 대통령직 상실 위험도 있는데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바뀌면 민심도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이 여론조사의 본질이다.
헌법 제 84조가 규정한 대통령 불소추 특권은 특정 개인에게 주는 사사로운 혜택이 아니다. 그것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짊어진 국정의 무게에 부여한 제도적 안전 장치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형사 문제로 흔들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헌법은 그것을 막기 위해 예외를 둔 것이다. 국가의 지속을 위한 합의다. 형사 사건에서 기소와 재판은 본래 한 묶음으로 붙어 다닌다. 그런데도 어떤 법학자들은 형사 소추는 '기소'만 의미하고 '이미 기소된 재판'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글자의 미로에 갇혀 헌법 84조의 정신과 취지를 망각한(또는 의도적으로 외면한) 그릇된 해석이다.
국민의 삶은 법보다 무겁고, 민심은 글자보다 깊다. 대통령은 국민의 삶을 최종적으로 보듬고 책임지는 자리다. 민심은 그 책임과 의무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맡겼다. 국민은 이미 기소 사실을 알고서도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법정이 아니라 광장에서 이뤄졌다. 단지 몇 명의 판사가 아니라 4439만 유권자가 배심원으로 참여한 '국민 재판'의 결과다. 이 국민대법정 판결을 판사 몇몇이 뒤집으려는 것은 명백한 사법 쿠데타다.
'20대 대선 선거법 유죄 판결'로 '21대 대선 당선무효'를 꾀하려는 시도는 너무 비상식적이다. 그래서 '설마 그런 일까지야'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비상식이 현실로 나타났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것부터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대법원은 '기소 뒤 1년 내 판결' 조항을 들이밀며 기를 쓰고 대선 전에 유죄를 확정하려 했다. 그것은 법의 외피를 쓴 정치 개입이었다. 그러니 법전 한 귀퉁이 글자 몇 개를 확대해석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하는 시도는 얼마든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정은 멈추고, 대한민국은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법의 운용은 순리에 기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항 또한 순리를 벗어난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대통령 임기 만료까지 재판 중지) 등 대응책의 모양이 썩 아름답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힘은 '방탄 입법'이라고 맹공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 방탄복은 선택이 아니라 마지막 생존 수단이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불소추 특권을 제대로 해석해 적용하기만 하면 굳이 형사소송법을 개정할 필요도 없다. 재판 중단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이다. 이런 순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방탄복이 등장한 것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대통령직 유지 여부를 둘러싼 법적 논쟁으로 나라가 다시 대혼란에 빠지기보다는 방탄 입법이 오히려 나은 현실적 선택이다.
이 문제의 매듭은 대법원이 풀어야 한다. 그런데 대법원은 재판 계속 여부를 개별 재판부에 맡기겠다고 한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다. 대통령 불소추 특권 조항의 해석이 과연 개별 재판부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인가?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상고심에서는 직권을 휘둘러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기고 판결날짜를 서둘러 밀어붙였다. 그런 용감무쌍한 사람이 이번에는 개별 재판부 뒤에 숨어버렸다. 사법부 수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일관성도, 용기도 찾아볼 수 없다.
대선 이후 모두가 입을 모아 '국민 통합'을 말한다. 통합은 선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식에서 태어나고 순리 속에서 자란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무시하고, 민의로 선출된 대통령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통합을 말할 수는 없다. 사법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법적 대응을 '입법 쿠데타'로 몰아 정쟁의 불쏘시개로 삼으면서 화합을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칼을 내려놓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할 수는 없다.
이제 상식과 순리는 현실적으로 서울고등법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대통령 선거법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의 판단이 중대해졌다. 더는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고법이 결정을 미루고 회피한다면, 형사소송법 개정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된다. 상식이 법을 이끌고, 순리가 사법을 감싸야 한다. 서울고등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김종구 (언론인) | 프레시안 2025.06.06.
‘국민주권’이란 무엇인가
21대 대선의 유세에서 이재명 후보는 ‘국민주권 정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취임 선서 뒤 연설에서도 ‘국민주권’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국민주권 정부는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보다는 그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주권’이란 무엇일까. 주권(sovereignty)이란 용어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말이다. 서양에서도 이 개념은 16~17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 로마 교황의 권위와 간섭 아래 놓여 있던 유럽 각 지역의 왕국, 제후국, 도시 정부 등이 스스로 독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주권이었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유럽 각 지역의 국가들은 이 조약을 통해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확립했으며, 각 국가를 독립된 실체로 인정했다. 이로써 각 국가는 독립성과 최고 통치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주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권은 처음에는 당연히 각국 국왕의 것이었다. 그러나 1776년 미국 독립, 1789년 프랑스 혁명 등을 거치면서, 국민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여기에서 국민주권 혹은 주권재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그리고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의회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만들어졌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중국 주변의 국가들은 완벽한 독립성과 최고 통치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0년대에 중국에서 한 선교사가 펴낸 영화(英華)사전에서 ‘sovereignty’(소버린티)를 주권이라 번역하였고, 이후 다른 사전들도 이를 따랐다.
한국에 국민주권의 개념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였다. ‘한성순보’ 1884년 2월7일치에 실린 ‘민주주의와 각국의 장정(헌법) 및 공의당(의회)에 대한 해석’이란 글을 보면, “서양 각국에서 행한 여러 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이 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글은 주권이란 단어는 쓰고 있지 않았지만, 내용상으로 ‘국민주권론’ ‘인민평등론’을 말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주권이란 단어를 처음 언급한 것은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이를 보면, “나라의 권리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내재적인 주권으로 나라 안의 모든 정치와 법령이 그 정부가 세운 헌법을 스스로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적인 주권으로 독립과 평등의 원칙에 따라 외국과 교섭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권을 대내적으로 헌법과 법률에 기초한 통치권, 대외적으로 외교에서의 자주권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후 주권이란 말은 통치권과 자주권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국이었던 대한제국기에 국민주권이란 말은 불온한 말로 금기시되었다. 한국사에서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였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법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이었고,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음”이었다. 1927년 이를 개정한 임시약헌의 제1조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 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의 마지막 임시헌장도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4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음”이라 하였다.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들 때 국회는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계승하여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국민주권 조항이 정식으로 헌법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주권재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로 인하여 국민주권의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이 조항이 다시 살아난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의 자유를 되찾고 참정권(대통령 직선제)도 되찾아 국민이 비로소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국민주권이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40년이 채 안 된 셈이다.
한겨레 지난 5월15일치 기사에 의하면, 한겨레와 한국정당학회, 여론조사업체 에스티아이가 진행한 ‘2025~26 유권자 패널조사’에서 유권자 76.9%는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항상 낫다’고 답했지만, 13.9%는 ‘상황에 따라서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 3.9%는 ‘민주주의나 독재나 상관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약 18%의 유권자가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인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우선 정부 안팎에서 내란의 주체 세력과 비호 세력을 말끔히 척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힘써야 할 일은 시민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 일반인, 공무원, 군인 등 각계각층의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또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각종 법률을 고치고, 필요하다면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투표 이외의 방법으로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국정운영에서 거버넌스를 확대하고, 지방자치에서 국민발안제를 도입하고, 재판에서 배심원제를 확대하는 등 검토해볼 만한 제도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든가, 기득권을 발판으로 특권계급이 되고자 하는 행태를 용납하지 않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새 정부와 국회의 중요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 한겨레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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