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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2023 묘사 스케치

by 이성근 2023. 11. 26.

일에 쫒기다 겨우 틈 내어 시제 진행 문서를 작성하고 아침 7시 집을 나서 고향으로 향하다.  제수 음식을 전적으로 부모님께 부탁해야 했다.  이로 인해 형제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 하지 않있다. 그  자체가 피곤했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기면 과정을 공유하고  이해를 구할 예정이다.  

칙칙하던 산빛이 11월 말 들어서야 모습을 찾는듯 했다.  시제는 10시반 의외로 고속도로 정체는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달리 할일도 없는 상황, 이들 운전 연습도 시킬 겸 주변을 드라이브 했다. 실제로 큰놈 직은 놈  둘다 고속도로 운전은 처음이었고 마누라는 교관처럼 코치했다. 

옛날 유곡면은 정실(정곡,定谷), 미요(未要), 능인(能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신촌마을은 능인(니인)에 속했던 지역이다. 분계와 양지(신상곡), 상촌(구상곡), 오목(작은 외에목으로 구오목), 평촌(신오목), 장군당(신촌 남서쪽 골안), 매미껄(신촌)등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정곡과 유곡의 경계지점인 막실재를 넘어 첫 동네가 신촌이고 이 마을 앞에서 유곡 소재지와 궁류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이다. 이 동네에서 서쪽으로 십리가 더 되는 깊은 골안이 능인촌(니인촌)이다. 매미껄이란 말은 가장밑(아래쪽)에 있는 동네란 뜻이다. 그러니까 받침소리 니은(ㄴ)과 티읕(ㅌ) 이 탈락 또는 묵음이 된 채 매미로 발음하게 된 것이며 껄은 거리(길거리)의 준말이자 토박이말로 경음화현상의 예이니「가장밑거리」 즉 능인골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란 말임을 알 수 있는 지명이다. 동네 뒤는 뒷동산인데 앞산은 겅구지니, 겅구지먼데이라 부른다. 이 마른 풀이나 갈비 등 검불로 된 땔나무를 말하는 거부지기 또는 검부저기가 변음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동남쪽 골짜기를 장군댕이, 장군당으로 부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던 곳이고 광복직후에도 1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장군당에는 영험이 있는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었고 그 밑에 수구대장군(水口大將軍) 건륭46년(乾隆 46年) 안국서(安國瑞)라 새겨진 큰돌비가 서 있다. 풍수지리설에 있는 수구장문(水口藏門) 즉 골짜기 물이 멀리 돌아서 흘러가 저 밑 하류가 보이지 않게된 땅의 형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수구막이 또는 수구대장군이라는 글을 장승에 써서 세우거나 돌에 새겨 세우는 풍습에 결국 피재(避災)와 발복(發福)의 염원과 함께 허한지기를 비보하는 민속신앙의 한가지라 할 것이다. 이곳 장군당 뒷재를 넘으면 구오목마을이고 거기서 다시 큰외에목재를 넘으면 용소마을로 이어지게 되는데 동네도 없어지고 잿길도 없어진 채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신촌동네옆에 섬안들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한여름 장마가 지면 낮은 지대에 물이 들어서 꼭 섬처럼 되는 지역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 뒤편 산밑에 살갈덤이란 큰바위 밑에 약물새미가 있는데 이 물은 신기한 약수로 소문이 나 있으며 석달만 마시고 몸을 씻으면 오래된 마목도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살강덤은 바위의 모양이 부엌에 있는 살강(시렁을 말함)처럼 생겼다해서 그렇게 부르며 이 바위밑에서 물이 나온다. 또 마을을 조금 지나 골안으로 가면 길옆 산언덕에 애기를 엎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바위는 할망구덤, 물동이를 이고 있는 여인 같은 각시덤, 그옆에 좀 우람해 보이는 것이 신랑덤이다. 이 덤의 옆쪽 산버덩은 애장터였다고 한다.

마을 앞산자락에 달성 서(徐)씨문중의 경암재(景 齋 또는 景 齋)와 윤(尹)씨문중의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신창 표(表)씨라고 하며 지금은 달성 서(徐)씨가 27가구로 가장 많고 박(朴)·윤(尹)·주(朱)·이(□)씨가 서너집이며 임(□)·전(田)·강(姜)씨가 두어집씩 모두 49가구가 살고 있다 2003.08.07 의령군 홈페이지 유곡면 읍면 안내 

시제 참석자가 생각했던 예상치를 넘어 모였다. 급강한 날씨로 인해 참석자가 현저히 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논 사항에 있어 앞으로 시제며 벌초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35대와 36대를 넘어 37대가 계속 참여할 수 있는가. 참여를 지속화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유인책을 쓸 것인가.  36대 거의 대부분과 37대는 이곳에 대한 정서적 동질감은 거의 없다.  묘사 자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 지배적이다.  60대 중반에서  70대 초 그리고 80대 중후반이 주류인 35대들의 생각은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관점은 달랐다. 36대는 40대 후반에서 60대 초고 37대는 30대가 주류다. 그리고 20대들이 뒤를 잇고 있다. 

그럼에도 산신제는 큰놈이 올렸다. 

기념 촬영에서 빠진 7명을 포함하면 올해 참석자 총수는 29명 

뚜렷한 결정은 없었지만 그래서 한번 더 해보고 내년에 답을 찾자며 묘사는 마무리 되었다. 

나 태어난 집터는 흔적 없다.  최근 말들이 있어 찾았다. 

댐이 들어서고 난 이후 시내가 달라졌다.   물빛까지 흐리고 오염은 심화됐다. 용도는 용업유지용수 공급 

신송산마을은 1,2,3구로 나누어 행정조례상 동리로 확정하는데 원래는 중땀(가운데뜸)이라 불리던 동네다. 마을역사로는 2구와 3구가 오래 되었다고 하며 타성바지가 없는 박씨촌이라 흔히 송산박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땀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중장(中檣)으로 했다. 음택도 돌비를 세우고 석물을많이 놓으면 자손이 곤중하다는 얘기도 자주 듣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 동네도 뱃설이라서 큰나무를 심어서 허한지기를 비보하면서 마을의 평안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마을옆에는 박씨 대종재실인 내견재(乃□齋)와 소종재실인 전천재(前川齋)가 있으며 재실마당 옆에는 아당(啞堂) 박선생시향지단과 행보공장군(行保功將軍) 충무위사직승사랑(忠武衛司直承仕郞) 예조정랑(□曺正郞) 밀양박공지제단(密陽朴公之祭壇), 현감밀성박공지위(縣監密城朴公之位)등 제단비가 모셔져 있다. 일찍이 밀양박씨가 일촌을 이루었고 지금도 타성바지는 없이 39세대가 모두 박씨다. 2003.08.07 의령군 홈페이지 유곡면 읍면 안내

묘사 다음의  일정은 한결같다  이모님 댁 방문과 정미소에서 쌀을 찌어 간다. 통상 차 한대로 움직이지만 올해는 2대였다. 

신송산2구 중장의 모습도 해가 갈수록 달라진다 

최근들어 어머니가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없다 80대와 90대의 만남이다.  두분의 나이차가 그렇게 난다. 큰이모님이 살아계셨다면 100세 인근일 것이다만 ... 

정미소에서 바라 다 본 의동중학교 옆 미륵불이라 이름 붙인 곳이 싸덤이라나 

법정동리는 압곡(鴨谷)리이고 조례상으로는 압곡 2구 마을이다. 매곡(梅谷)과 임천(□川) 두 뜸을 이루고 있다. 면소재지 못미쳐 거장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윗마을이 매곡인데 보통「매실」이라 부른다. 마을 뒤 골짝이「매소골」(매수골, 매시골로 들린다)인데 옛날엔 자생하는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고 한다. 처음 담양 전(田)씨가 한집이 정착하였는데 어른들이 밭일을 하는 어느날 꼬맹이 두 놈이 배 아프다고 뒹굴면서 야단이었다. 무엇을 먹었나 싶어 물어보니 골안에서 새파란 열매를 주워 먹었다고 했다. 얼른 가서 보니 곯아떨어진 풋매실이었다. 이때부터 마을이름이 매실(梅實, 梅谷)로 된 것이다. 아래땀 임천(□川)은 원래 소지명이 숲안(林內)이었는데 「수반」으로 변음되어 오다가 나중에 숲 좋고 냇물 좋으니 숲내로 바꾼 것이다. 마을 뒤는 역시 큰 거장산(주민들은 거창산이라 부르고 있음)이고 앞은 넓고 긴 하천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서 보이는 산은 시루모양이라서 시리봉(시루봉)이고, 옛날 장터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들이름이「돌구지들」이다. 길쌈할 때 쓰는 돌곳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또 밭언덕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대추밭들」이란다. 의동중학교 밑 가파른 산중턱에「장수덤」또는 「싸덤」(싸더미)이라 부르는 탑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신성시하고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는 곳이다. 「싸덤」과 함께 건너 압실마을 앞 밭가운데 이름 모르는 큰 무덤이 있어 이 묘가 임장군묘라고 전해 왔다고 한다. 매실은 담양 전(田)씨가 터줏대감으로 15집이고 이(□)·김(金)·서(徐)씨가 각각 네댓집씩이다. 전(田)씨 문중재실인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임천은 창녕 성(成)씨와 담양 전(田)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하며, 금년이 정착한지 1백년이라고 하니 1890년(고종 27년)쯤 마을이 생긴 셈이다. 옛 서재로서 인근마을 학동들이 붐볐던 서암정(棲巖亭)은 텅빈 재실로 변했고, 한길 가에 계와(桂窩)공의 묘소와 나란히 효열부 창녕성씨 기적비가 서 있다. 2003.08.07 의령군 홈페이지 궁류면 읍면 안내

귀가길 차창으로 건너다 본 마두 

유곡면소재지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해 있고 십리길이다. 큰 도랑을 사이에 두고 양지편에 마두양지, 음달쪽에 마두음지마을이 있어서 두 뜸이 마주보고 있다. 옛 기록에는 괴성(槐城 :홰나무재), 괴산(槐山:홰나무산 )이고 일반적인 호칭은「기암재(개암재)」다. 아마 일제강점기 지명정비 때 마두(말대가리)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아직도 상노인들은「기암재」로 부르고 있다. 토박이말로는「깨금」「깨암」이란 나무열매가 있다. 표준어로는「개암」이고 한자론 진자다. 일설에는 이 동네 주위 산언덕이나 잿길에 깨끔(개암)나무가 많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기암나무(小枾 : 고욤나무)가 많아서라는 등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다. 다만 마두란 소지명은 근거가 확실하다. 동쪽을 감싸듯 흘러내린 산줄기가 말대가리 산이고 끄트머리가 묘하게도 말머리 모양이다. 대마가 도랑물을 벌떡벌떡 마시는 듯한 형상이다. 「기암재」「괴성」,또는「괴산」그리고 「마두」로 변천된 것이다. 이 마을 주위에는 말머리덤, 말머리쏘, 말대가리 꼭데이(꼭대기), 마등더러(등어리), 말질매등(길마등), 말꼬랭이(꼬리)등 말에 관한 땅이름이 많다. 옛날에는 조선종이, 뜨는 일도 많이 했던 종이곳이면서 삼농사도 많이 했다고 한다. 말꼬리 산고개를 넘으면 돌실이라서「돌실재」, 남동쪽 산길을 넘으면 오방촌이라고 재이름이「오뱅이재」다. 말머리쏘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고여 있고 사철 어른 한길 정도 깊이다. 동네앞 「서재골」은 옛날 여처사(여진선공)가 서당을 열고 인근 어린이들을 모아 글공부시키던 수회재(水廻齋)가 있었던 주변이다. 음지땀 동구밖 도랑 둑을 따라서 긴 동숲이 있어서 좋았는데 일제 때 공출하면서 베어냈다고 한다. 양지땀 11집, 음지땀 40집이다. 신안 주(朱)씨, 파평 윤(尹)씨가 먼저 자리 잡았고 뒤이어서 여러 성바지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윤씨 15집, 안악 이씨 10집, 그리고 김·박·진·표·임·홍씨 등 모두 54가구만 남았다. 박씨의 괴양재(槐陽齋), 성씨의 흥효당(興孝堂), 이씨의 경수재(敬修齋), 남씨의 우애정(友愛亭) 등 유서 깊은 재실과 정자도 여러 채다. 동구밖 산코숭이에는 「효자여양진병화공포행비」가 있다.  2003.08.07 의령군 홈페이지 유곡면 읍면 안내

몸과마음이 피곤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