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원전 게이트’가 ‘가짜 쟁점’인 세 가지 이유
불가능한 ‘북 원전’…선 넘은 정치 공세
판사 출신 이수진 "법관 탄핵, 법원 내에서 먼저 나왔다“
임성근 판사 탄핵이 '법원 길들이기'라는 거짓말
유튜브·스마트폰 시대,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까
임대사업자 건보료 80% 감면, 누구 작품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 후 아무도 안 싸워... 당혹스런 결과
경실련 “국회의원 부부 76명, 여의도 면적 47.5배 농지보유”
“북에 원전 제공은 수출” 주장했던 사람 누구?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향후 2주가 고비”라는 희망 고문 멈춰라
돈이 넘쳐나는 시대 불안한 파티는 계속될까
한명숙 사건, 검사실 '증언 연습' 확인됐다
2025년까지 주택 83만채 공급, 역대최대
역대급 공급, 공급불안 해소될까
2.4 부동산대책]원주민 쫓겨나는 ‘제2 뉴타운’ 우려도
투기와 투자 구별 않되 불로소득은 환수하자
종부세 벨트’는 무섭도록 단단했다
TV조선 ‘뉴스9’, MBC·SBS 메인뉴스 처음으로 앞섰다
‘대북 원전 게이트’가 ‘가짜 쟁점’인 세 가지 이유
미국 정부는 1994년 10월21일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통해 북한에 ’비핵화’의 대가로 경수로형 핵발전소 2기를 지어주겠다고 공식 약속했다. 이를 근거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 함경남도 신포지구에 짓던 한국형 경수로 핵발전소의 원자로 기초콘크리트 타설공사(2002년 8월7일) 모습. 케도 누리집 갈무리
정치권을 느닷없이 뜨겁게 달구는 이른바 ‘북한 원전 건설 지원 의혹’은 전형적인 ‘가짜 쟁점’이다.
일단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대북 경수로(형 핵발전소) 건설 지원 사업은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오랜 ‘북한 비핵화’ 보상책 꾸러미의 하나다. 둘째, ‘북한에 핵발전소 지어주기’는 남북 당국 차원의 양자 협력 사업으로 공식적으로 제기되거나 논의된 적이 없다. 셋째, 무엇보다 미국·유엔의 고강도 대북 제재가 완화·해제되지 않는 한 ‘북한에 핵발전소 지어주기’는 종이 위의 집만큼의 가치도 없는 몽상이자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명시된 핵발전소 계획
우선 ‘대북 경수로 건설 사업’은 비밀 프로젝트가 아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공개 프로젝트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실천하면 경수로를 지어주겠다’는 건 국제사회의 공식 약속이다. 말뿐만 아니다. 북한 함경남도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를 탑재한 핵발전소 건설 공사를 실제로 진행했다. 1994년 10월21일 합의·발표된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그 근거다. 이 합의서 1조1항은 “미합중국은 1994년 10월20일부 미합중국 대통령의 담보 서한에 따라 2003년까지 총 200만킬로와트 발전능력의 경수로 발전소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하기 위한 조처들을 책임지고 취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미국·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이 이사국으로 참여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케도)가 구성돼 북한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를 탑재한 100만 킬로와트급 핵발전소 2기를 짓는 건설 공사가, 국민의힘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집권당이던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됐다. 경수로를 ‘한국형’으로 하는 조건으로 건설 비용의 70%는 한국이 대기로 했다. ‘신포 경수로’는 2002년 8월7일 원자로 기초콘크리트 타설 공사를 하기도 했으나 그해 10월 이후 이른바 ‘2차 북핵위기’의 발발과 함께 건설 공사가 중단됐다.
’한반도 비핵화’의 청사진으로 불리는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 합의·채택의 주역인 송민순 당시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오른쪽 둘째)와 김계관 북한 단장(왼쪽 둘째), 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왼쪽 첫째)가 어울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5년 9·19공동성명…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북한 권리 인정
‘경수로 건설 사업’은 2000년대 중반 6자회담을 거치며 되살아났다. 2005년 9월19일 6자회담에서 합의·발표된 ‘9·19 공동성명’은 1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여타 당사국들은 이에 대한 존중을 표명하였고, 적절한 시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수로 제공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데 동의하였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3조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러시아연방 및 미합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에너지 지원을 제공할 용의를 표명하였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200만킬로와트의 전력공급에 관한 2005년 7월12일자 제안을 재확인하였다”고 명시했다. ‘200만킬로와트 대북송전’은, 참여정부가 6자회담 비핵화 합의의 마중물 차원에서 2005년에 제안한 내용의 재확인인데,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의 장기 공전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북한과 미국 또는 북한과 국제사회의 ‘비핵화’ 관련 합의에 “경수로” 또는 “에너지 지원”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건, 북쪽이 이 협상을 안전 담보와 함께 에너지 문제 해소의 지렛대로 활용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애초 대북 경수로 건설 지원 약속은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북한의 줄기찬 요청을 받아들여 경수로 4기를 신포에 지어주기로 약속한 데서 출발했다(물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이 전제조건으로 달렸다). 고르바초프의 이 약속은 소련연방의 해체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고, 1990년대 초 이른바 ‘제1차 북핵위기’를 거쳐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 정부의 경수로 건설 지원 약속’으로 되살아났다. 경수로 건설 지역으로 거듭 지목된 신포는 남쪽 사람들한테는 북청사자놀음 또는 북청물장수로 유명한 그 북청의 새로운 행정구역명이다.
멀리는 1985년, 짧게 잡아도 1994년부터 이어진 ‘대북 경수로 건설 지원 프로젝트’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중단 상태인 핵협상이 재개되면 다시 북한의 의미있는 비핵화 실천을 이끌 ‘보상책’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듯 ‘대북 경수로 건설 지원’ 방안은 1990년대 이후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 당사국들과 유럽연합의 ‘북한 비핵화 보상책’으로서 다자 프로젝트로 검토·추진·실행돼왔을 뿐, 남북 당국 차원의 양자 협력 사업의 맥락에서는 논의된 바 없다. 역대 한국 정부는 1982년 2월1일 전두환 정권의 손재식 국토통일원장관이 ‘20개 남북 협력 시범 실천 사업’을 제안한 이후로 지금껏 도로·철도 연결이나 자연자원 공동개발 등은 논의·실천해왔으나 핵발전소 건설은 양자 차원에서 다룬 적이 없다. 이런 논의 지형의 역사는 ‘비핵화’ 문제가 결정적 고빗길을 넘기 전에는 달라질 가능성이 없다.
미국 협력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북한 핵발전소 건설
무엇보다 지금은 미국과 유엔의 고강도 대북 제재가 북한과 협력사업을 전방위로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 코로나19를 포함한 감염병 예방과 임산부·영유아 영양 지원 등 국제사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조차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1718위원회)의 ‘제재 면제’ 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봐도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건설 사업이 한동안 진행된 ‘한국형 경수로’도 그 원천 기술은 미국이 갖고 있어, 설혹 대북 제재가 완화·해제되더라도 미국의 동의·협력이 없이는 한국 정부가 혼자 어쩌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정이 이런데 ‘경수로 건설 사업의 비밀 추진’이라고?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질문이다. “핵무장한 북한에 핵발전소를? 충격적 대북 원전 게이트”라는 국민의힘의 인식과 주장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불가능한 ‘북 원전’…선 넘은 정치 공세
북핵 해결·미국 동의 없인 ‘비현실적 구상’에도 야당, 집요한 의혹 제기
핵 포기 대가로 ‘원전’ 요구할지도 불투명…산업부 “문건에 한계 적혀”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3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대북 원전 의혹 긴급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원전 건설’ 논란이 커지고 있다. 월성 원전 1호기 감사 과정에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파일 목록에 북한 원전 건설 관련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게 계기다. 보수야당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려 했다”며 “이적행위”라고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원전 건설 자체가 북핵 문제 해결 등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야당의 의혹 제기가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북한에 원전이 지어지려면 매우 요원해 보이는 여러 여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북핵 문제 해결이 선결 조건이다. 북한에 원전을 짓는 것도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특히 남한이 북한에 원전을 제공한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남한이 북한에 원전을 짓는다는 것은 핵기술과 장비에 대한 미국의 원천기술이 북한에 제공되는 것이다. 북·미 사이에 평화적 원자력 협력에 관한 협정, 즉 ‘북·미 원자력협정’이 먼저 체결되어야 한다. 미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회원국이 돼 정기적 사찰을 받아야 한다. 이는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이미 보유 중인 핵무기·핵물질도 제거된 상태가 됐음을 의미한다. 북한 원전 건설이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구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과 핵협정을 맺고 원자로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중·러가 국제비확산체제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할 가능성은 없다.
지금으로서 북한 원전 건설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구상이기 때문에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야당도 이를 모를 리 없으므로 지금 같은 대정부 공세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산업부는 31일 “에너지 분야 협력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내부 자료”라며 “결문에서 ‘북·미 비핵화 조치 내용·수준 등에 따라 불확실성이 높아 구체적 추진 방안 도출에 한계가 있으며, 향후 비핵화 조치가 구체화한 이후 추가 검토 필요’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핵 협상이 타결된다고 해도 북한이 원자로 제공을 대가로 요구할지도 불투명하다. 북한은 북·미 협상 초기 핵개발 의혹을 부인하고 전력난 해소를 위한 원자로를 개발 중이라면서 핵 포기 대가로 중유 등 에너지 제공과 경수로 건설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 경수로 제공 내용이 포함됐으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출범했다.
북한은 2010년 11월 실험용 경수로 건설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핵 전문가들은 북한이 자체 경수로 개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과 함께 우라늄 농축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경수로 건설을 내세웠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유신모·박효재 기자 simon@kyunghyang.com
판사 출신 이수진 "법관 탄핵, 법원 내에서 먼저 나왔다"
"법관 탄핵 반발 야당, 반민생세력"... 국민의 힘 "사법부 쥐려는 오만"
이제 사법부 역사는 법관 탄핵 전과 후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국민의 마음과 인권을 무시하는 일부 판사들은 이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판사 출신인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의 말이다.
이 의원은 31일 자신의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법관 탄핵은 사법부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 이수진 의원실
민주당은 이탄희 의원을 필두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를 추진하고 있다.
임 부장판사는 세월호 관련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기소돼 1심 무죄 판결을 받았고,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재판관여행위에 대해 위헌적 행위를 했다는 명시적 판단을 받았다"라며 "특히 국민 공분을 샀던 '세월호'에 대해 재판 거래를 시도했다, 국민의 아픔을 감싸는 판사가 아니라 정치적 흥정을 했다"라고 날을 세웠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의 요청은 진행 중인 특정 사건의 재판 내용이나 결과를 유도하고 재판의 절차 진행에 간섭하는 재판 관여 행위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의원은 일각에서 '사법부 길들이기'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에 대해 "사법부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며 "헌법을 위반한 정치 판사들을 걸러내고,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의원은 "법관 탄핵 목소리는 국회보다 법원 내부에서 먼저 나왔다, 2018년 11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사법 농단 판사들에 대한 탄핵소추 절차를 검토해야한다는 의결을 했다"라며 "헌법을 위반한 판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의결권을 갖고있는 국회가 그동안 책임을 방기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판사들의 처신과 판결도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건강한 긴장 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법관 탄핵 소추를 가결시켜 국회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의원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미래의 발목을 잡게 된다,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은 반민생세력이기도 하다"라며 "지금 법관 탄핵에 반발하는 야당의 모습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2월 임시회 개회일인 오는 1일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72시간 내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여야의 첨예한 대치가 예고되는 대목이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다음 달이면 법정을 떠나는 일선 판사에 대한 탄핵이 어떤 실익이 있나,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소의 이익은 무엇이냐"라며 "정권의 이익에 반하는 판결을 한 판사는 탄핵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배 대변인은 "정권을 위한 탄핵이다, 오만한 여당이 사법부를 손안에 쥐려 한다"라며 "겉으로는 법관의 범죄를 단죄한다지만 사실은 법관들의 숨통을 움켜잡겠다는 여당의 검은 속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라고 밝혔다.
탄핵소추안 의결을 위해서는 재적의원 과반수(151명) 찬성이 필요하다. 야당 협조 없이 단독 의결이 가능하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9명 중 6명의 찬성으로 파면을 결정하게 된다. /이주연(ld84) // 오마이뉴스
임성근 판사 탄핵이 '법원 길들이기'라는 거짓말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은 달라... 그는 법정 밖에서 법정 안을 흔들었다
1년, 2년, 3년, 4년... 숫자를 헤아려보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2017년 3월에 "A판사가 양승태 대법원의 '판사 뒷조사'에, 사법개혁 저지 움직임에 항의하며 사표를 던졌다"고 기사를 썼다. 그때 내 뱃속에 있던 아이는 올봄 유치원에 간다. A판사는 '이탄희 판사'에서 '이탄희 변호사'를 거쳐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됐다. 그럼에도 사법농단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아무런 노력도, 어떤 시도도 없는 시절은 아니었다. 법원은 총 3번의 자체 조사를 벌였다. 2018년 5월 31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의 재판에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사법부는 더 이상 존립의 근거가 없고 미래도 없다"고 말했지만, 후속 조치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 결국 검찰이 움직였다. 판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갔고, 2019년 1월 24일 전직 대법원장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됐다.
▲ 양승태, 석방 하루만에 재판 출석 2019년 7월 23일, 전날 보석으로 풀려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법농단’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사법행정권자에겐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번번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에 나오는 모든 쟁점을 다툴 것 같은 기세로 법정에 선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현직 고위법관과 판사들에게 쩔쩔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만 해도 2년 가까이 진행 중이다.
법원의 실패
법대에 앉은 판사도, 피고인석에 앉은 판사도 '독립한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했을 뿐'이라는 말만 내세웠다. 그들은 '법정 밖'의 일로 '법정 안'이 오염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정 밖'의 일 때문에 '법정 안'을 의심한다는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한국 법원은 높디높은 절벽 위, 견고한 담으로 에워싸인 '서초산성' 안에 스스로를 가둔 듯한 모습이었다.
2019년 여름, 조금이나마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독일을 찾았다. 당시 뮌스터의 베스트팔렌 빌헬름대학교(Westfälische Wilhelms-Universität Münster)에서 만난 파비안 비트렉 교수는 행정부가 사법행정 전반을 관리·감독하고, 입법부까지 법관 인사에 참여하는 독일 사법체계를 소개하며 말했다.
"단순히 법원을 통제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법관들이 정당하게, 올바르고 공정하게 일하는지 감독해야 한다. 또 (법원에) 문제가 생겼을 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권한을 의회와 행정부가 맡음으로써 전체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균형과 견제. 대한민국 제헌국회도 이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 흔적이 헌법 62조 1항, 국회의 탄핵 소추 권한조항에 담겨 있다.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행정각부의 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감사원장, 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지난 22일 이탄희·류호정·강민정·용혜인 의원도 "헌법이 정한 법관 견제장치는 국회"라며 '세월호 7시간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판사의 탄핵 소추를 제안했다. 발의(100명)·의결(150명) 정족수를 넘기기에 충분한 의석 수를 가진 민주당은 사실상 당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이낙연 대표도 탄핵 소추안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탄핵은 길들이기'라는 주장이 빈곤한 이유
▲ 이탄희 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세월호 7시간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판사의 탄핵 소추가 추진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10월 2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법원 국정감사에 참석해 답변하고 있는 임성근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모습이다. ⓒ 연합뉴스
어떤 이들은 임성근 판사 탄핵 소추를 '법원 길들이기'라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다. 다 떠나서 임성근 판사는 자신이 내린 판결 때문에 법관 탄핵 대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다른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줬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그는 박근혜씨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관련 의혹을 다룬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재판을 '법정 밖'에서 흔들었다. 재판장 이동근 판사에게 판결의 방향을 제시하고, 선고 당일 재판장이 낭독할 판결 요지도 수정했다. 임성근 판사의 1심 재판부는 이 일이 형사처벌대상은 아니지만 "재판관여행위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라고 판단했다.
형사상 무죄이고, 아직 확정판결이 나오기 전 아니냐며 '법관 탄핵은 이르다'는 말들은 순환논법과 다름없다. 그들은 항소심과 상고심 결론이 나오더라도 똑같이 말할 것이다. 이 빈곤한 말들은 '판사의 헌법 위반 행위'를 가려주지 못한다. 개인의 범죄 여부를 판단, 처벌 수준을 결정하는 형사재판과 공무원의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 따져보고 파면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탄핵심판의 차이를 흐릿하게 지웠던 박근혜씨 쪽 주장과 다름없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도 지난해 6월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재판 독립을 위해서는 법관 독립이 필수적"이라며 "그 사람을 도저히 법관 직위에 두어선 안 된다 할 경우, 국회에서 탄핵을 논의하고 헌법재판소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연한 일이 그동안 '미뤄졌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진척 없었다.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졌을 당시 태아가 이제 유치원에 간다. 언젠가 그 아이가 읽을 역사책에 사법농단을, 법관 탄핵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당리당략 앞에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기록을 남길 기회가 국회 앞에 놓여있다.
▲ "사법농단 법관탄핵" 목청높인 네 정당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강민정 열린민주당, 류호정 정의당,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과 함께 "사법농단 법관탄핵"을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기자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 기사]- '사법 독립' 스스로 흔든 대법원... 내부 반발 이어져 (2017년 3월 8일) http://omn.kr/mp92
- [특별기획] 2018년 사법농단 3차 진상조사부터 검찰수사까지 http://omn.kr/1pvn
- 52년생 노씨는 그들처럼 재판받을 수 있을까 (2019년 6월 10일) http://omn.kr/1jmdd
- 법원 불신 시대, 누가 판사를 감독할 것인가 (2019년 8월 26일) http://omn.kr/1rg5j
- 기이했던 '세월호 7시간' 재판, 알고보니 사법농단이었네 (2020년 12월 23일)
박소희(sost) // 오마이뉴스
유튜브·스마트폰 시대,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까
‘유아 삶 중심’ 구체화된 리터러시 교육 필요, 부모가 상호작용하는 교육 모델 이상적
유튜브와 스마트폰의 시대, 부모와 자녀를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언론학회가 지난 29일 홈앤쇼핑의 후원으로 개최한 ‘돌봄 연계 미디어리터러시 교육’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이선민 시청자미디어재단 정책연구팀 선임은 “유아의 삶을 중심으로 한 구체화된 교육이 국내에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선민 선임과 김아미 시청자미디어재단 정책연구팀 연구위원은 유네스코, 영국 인터넷안전위원회, 미국 비영리 단체 커먼센스 에듀케이션, 구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교육부 등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들 기관은 공통적으로 ‘디지털 시민성’을 강조했고 △ 디지털 정서 △ 디지털 안전 △ 디지털 정체성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분야를 다뤘다.
‘디지털 정서와 디지털 안전’은 사이버불링, 피싱, 해킹 등 위험상황에 대해 알려주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은지 시뮬레이션 형식으로 경험하게 하는 내용이다. ‘디지털 정체성’은 자신이 디지털 공간에 올린 정보가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경험적 학습 활동을 통해 인지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포함한다.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는 허위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단서를 알아보는 방법, 피싱 메일이나 사이트를 알아보는 방법, 온라인과 오프라인 생활의 균형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교육 등이다.
이선민 선임은 “기본적으로 유아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보고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느냐를 고민하는 교육”이라며 “우리 교육엔 ‘보호주의적’ 접근이 많은데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고, 타인을 돕고 존중하며, 배려하는 소통의 태도 등의 교육 내용도 중요한데 인성교육과 접점을 찾아 구체화할 수 있다”고 했다.
유아 대상 교육엔 ‘쉽고 흥미로운 교육 방식’이 중요하다. 미국 비영리단체 커먼센스 에듀케이션의 교육은 디지털 시민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신체 부위와 연결시켜 쉽게 설명한다. 수업을 시작하며 ‘스마트폰 등을 오랜 시간 썼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묻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식이다. ‘프라이버시와 보안’ 교육의 경우 “항상 어른과 함께 다니세요. 너에게 맞는 장소에 있으세요. 아는 사람하고만 대화하세요”라는 내용을 노래 등의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 배운다.
이선민 선임은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교육 시간은 대부분 20~30분이 넘어가지 않는다”며 “계속 반복적으로 노래를 불렀다가, 색칠공부로 이어지는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반복을 통한 학습 효과를 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부모와 보호자가 동반돼야 지속성을 갖고 효과를 가질 수 있기에 부모와 보호자에게 어떻게 유아 관련 교육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며 “성인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커먼센스 에듀케이션' 교육자료 갈무리.
또 다른 발제를 맡은 조재희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는 지난해 초등학생 학부모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 ‘뉴스와 1인 미디어 따라잡기’를 운영한 사례를 발표했다. 16주차로 진행된 교육은 △ 온라인 콘텐츠 이용과 한국 청소년의 특징 △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할 때 주의사항 △ 뉴스 사용 설명서 만들어보기 △ 부모와 자녀의 역할극을 활용한 인터뷰 체험 △ 유튜브 추천채널 찾아보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조재희 교수는 “가정 내 돌봄이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부모 대상 교육을 하게 됐다. 교육 내용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뉴스를 읽어보는 프로그램 등 ‘상호작용’을 했을 때 반응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디어에 대해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나눌 때 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 단순히 부모에게 팁을 준 다음 ‘집에 가서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이를 주체로 보고 상호작용할 필요가 있다”며 “그간의 연구를 보더라도 부모와 자녀가 게임의 역효과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면 부정적인 영향력이 완화되고, 높은 수준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가진 부모는 자녀의 미디어 이용을 효과적으로 중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조재희 교수는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학은 전문가들이 있고 도서관, 미디어센터 등 인프라가 있는 데다 주변 지역사회 거점 역할을 할 수 있기에 학부모 교육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했다.
오수정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진흥실장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부모가 양육자가 아닌 경우가 많아 양육자에 대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수정 실장은 유아 어린이 대상 리터러시 교육에 대해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날씨정보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기사를 함께 보면서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기사를 보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광고와 뉴스는 무엇이 다른지 얘기해보는 등의 교육을 할 수 있다”며 “교육 이후 부모가 뉴스를 보고 있으면 자녀가 관심을 갖게 됐다는 반응이 있다”고 했다.
▲ 사진=pixabay
배상률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청소년미디어문화연구실장은 “부모 대상 미디어 교육이 중요하지만 의도치 않게 미디어 기업과 사회의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부모 가정소득에 따라 격차가 벌어지는 문제가 있다. 교육 프로그램에 소외계층은 잘 찾아오지 않기에 찾아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유아 교육의 경우 부모의 애착 정도가 미치는 영향이 큰데, 애착 정도가 덜한 가정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 조사에 따르면 부모의 80% 정도가 미디어 교육을 받고 싶다고 응답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는데, 오히려 현재와 같은 (비대면 중심) 상황에서 온라인 서비스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언론, 미디어 기업의 역할에 대한 주문도 이어졌다. 오수정 실장은 “돌봄의 주체는 학부모, 교사여야만 하는가. 미디어 생태계 측면에서 생산자가 콘텐츠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유통자들이 나쁜 콘텐츠를 걸러주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광희 서촌초등학교 교사는 “국내에서는 (미디어 교육에 필요한)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콘텐츠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금준경 기자 teenkjk@mediatoday.co.kr
임대사업자 건보료 80% 감면, 누구 작품인가
[주장] 형평성 어긋나고 정부 고시까지 어긴 부당 특혜... 국민은 알아야겠다
▲ 지난 2018년 9월 13일, 당시 김동연 경제부총리(오른쪽)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주택시장 안정방안 관련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을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최근 몇 년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원인으로 '주택임대사업자 특혜'가 많이 거론된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8·2부동산대책을 통해 다주택자가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양도소득세 중과를 피하게 해줌으로써 양도세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그리고 12월 13일에 발표한 임대주택등록 활성화 방안에서는 주택임대사업자 등록시 주어지던 각종 세금 특혜를 유지‧확대하면서 건강보험료 증가분 최대 80% 감면이라는 혜택을 추가로 제공했다. 이 글은 주택임대사업자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혜 중에 이 건보료 감면 특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건보료 고시 어겼다
주택임대사업자 건보료 특혜는 국회 질의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다음은 지난해 7월 1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무소속 이용호 의원이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질의했던 내용이다.
이용호 : (영상자료를 보며) 보험료 경감고시 2조에 보면 보험료 경감은 어떤 경우에도 50%를 넘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렇지요?
박능후 : 예.
이용호 : 지금 볼 때 요즘에 아주 비상 상황에서 우리가… 다음 장으로 넘겨 보세요. 경감은 50%를 넘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심지어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취약계층, 특별재난지역 주민, 세월호 피해주민, 개성공단 근로자, 65세 이상 노인세대, 이 모든 사람한테도 50%를 안 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임대사업자한테 80%를 준다, 이것 국민들이 납득하겠습니까? 이것 어떻게 하시겠어요?
박능후 : 그 제도 시행 당시에 부처 간에 상당히 격론이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이용호 : 그래서 최근에 국토부 여기서도 그동안 했던 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임대사업 소득자들에게 주는 혜택이 너무 많았다라고 해서 요즘에 발을 빼고 있는 상황인데요. 복지부도 이것 취소하십시오. 아시겠어요?
박능후 : 아마 법적인 안정성 때문에 그 이전의 것을 취소하기는 좀 힘듭니다.
이용호 : 법적인 안정성의 문제가 아니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국민들한테는 집값을 잡는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가 얘기하는 것은 임대사업 소득자들에 대한 약속만 중요하다? 나머지 사람들한테의 약속은 안 중요합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이것 취소하십시오. 그리고 임대사업 소득자들 그동안에 돈 많이 벌었어요. 이것 안 줘도 부동산 50%, 2배 가까이가 올랐어요. 그래서 다 세금 걷어도 넘치고 남습니다.
질의와 대답만으로도 내용이 충분히 설명된다. 이용호 의원이 영상자료로 보여준 '보험료 경감고시' 제2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2조(보험료 경감 적용방법) ① 보험료 경감액(「농어촌주민의 보건복지증진을 위한 특별법」제27조에 따른 농어업인에 대한 보험료 지원을 포함한다)은 가입자 또는 세대별 보험료액의 100분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을 넘지 아니한다. 다만, 육아휴직자에 대하여 제8조 단서에 따라 경감하는 경우에는 100분의 50을 넘는 금액을 경감할 수 있다.
▲ 지난 해 9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 전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 ⓒ 공동취재사진
이용호 의원의 지적처럼, 장기임대 등록시 건강보험료를 80%까지 감면하는 혜택은 보험료 경감고시 제2조와 충돌한다. 그리고 이 혜택은 조세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다른 어떤 소득도 그동안 숨어 있던 새로운 소득이 노출된다고 해서 건보료 증가분을 획기적으로 감면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주택임대사업자에게 기존 고시에도 없는 막대한 특혜를 챙겨준 것이다. 그것도 출범 당시 '촛불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이런 정책을 세입자 주거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당당하게 시행했다. 사실은 임기 초에 주택임대사업자 등록을 의무화하지 않고 자율에 맡기면서 세금 특혜를 제공한 것부터가 잘못된 출발이었다.
지난 몇 년간 주택임대사업자 등록 제도는 다주택자들의 세금 회피처가 되고 주택 사재기 수단이 되었다.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어도 세금 부담이 없고 임대소득에 대한 건보료 부담마저 미미한 수준이니 당연히 투기 바람이 불었다. 그 결과는 시중의 매물 잠김과 집값 폭등이었다.
세월호 참사 때도, 개성공단 피해자에게도, 특별재난지역에도 이 정도 아니었다
그러면 주택임대사업자에게 주어지는 40~80%의 건보료 감면 혜택을 다른 건보료 경감 대상자와 비교해 보자. 우선 국민건강보험법 제75조를 보면 국민건강보험료 경감 대상자가 될 수 있는 경우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나열되어 있다.
제75조(보험료의 경감 등)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가입자 중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가입자에 대하여는 그 가입자 또는 그 가입자가 속한 세대의 보험료의 일부를 경감할 수 있다.
1. 섬ㆍ벽지(僻地)ㆍ농어촌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
2. 65세 이상인 사람
3.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등록한 장애인
4.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제1항제4호, 제6호, 제12호, 제15호 및 제17호에 따른 국가유공자
5. 휴직자
6. 그 밖에 생활이 어렵거나 천재지변 등의 사유로 보험료를 경감할 필요가 있다고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사람
국민건강보험법 제75조는 농어촌 거주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지역에 거주하는 지역가입자 등 특수한 경우에만 건보료를 깎아준다고 규정한다. 관련 고시와 사례를 살펴보면 실제로도 그렇다. 천재지변을 당했거나 불가피한 외적 상황에 의한 소득 상실이 명백한 경우에도 건보료 경감 기간은 길어야 6개월이었고 경감률은 50%를 넘지 않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2014년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피해 주민들은 2014년 4월에서 9월까지 건보료를 30~50% 감면받았다. 감면 조치는 세월호 승선자로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또 2016년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개성공단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졸지에 실직 상태가 된 개성공단 근로자 등에게는 2월부터 7월까지 건보료가 50% 경감되었다. 2020년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대구 지역 주민들은 어떨까? 대구에 거주하는 지역가입자 중 보험료가 일정 금액 미만인 가입자에 한해 3개월간 최대 50% 감면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8월 사상 유례없는 수해가 발생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구례군의 경우를 보자. 폭우 때 어미소가 55km나 떠내려갔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뉴스의 진원지가 바로 구례군이다. 집이 물에 잠기고 가축이 죽어 나가는 등 피해는 실로 심각했지만, 구례군의 피해 주민들은 "피해 정도에 따라" 건보료의 30~50%를 경감 받았다. 기본은 3개월 경감이었고,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가 동시에 발생한 경우는 6개월까지 경감 받았다.
그런데 주택임대사업자는 단기임대(4년) 등록시 건보료 증가분의 40%를, 그리고 장기임대(8년) 등록시 건보료 증가분의 80%를 감면받는다. 세월호 피해자들도, 수해 피해자들도, 코로나 취약계층도 누리지 못한 특혜가 이들에게 주어진다. 주택임대사업자가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닌 이상, 보험료 경감 고시까지 어겨 가면서 이처럼 과도한 혜택을 부여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용호 의원의 계산에 따르면 52만 명에 달하는 주택임대사업자(다주택자)에게 할인해준 보험료가 2019년 기준 월 5631만원에 달한다.
무책임한 보건복지부 장관
▲ 지난 2018년 11월 20일, 당시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청와대에서 열린 제3차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들 52만 명의 보험료는 누가 내고 있을까? 무주택자를 포함한 5000만 국민이 내고 있다. 한국에는 불평등한 법과 제도와 관행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것만큼 사회 정의에 역행하는 제도가 또 있을까 싶다.
지난해 7월 15일 이용호 의원의 질의가 끝난 후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가 다시 이어졌다. 강 의원은 임대사업자에 대한 건보료 감면은 불공정하다고 따졌다.
강병원 : 임대사업자로 등록을 하면 취득세가 감면되고요, 재산세가 감면되고요, 임대소득에 대해서는 소득세, 법인세가 또 감면됩니다. 또 이분들이 갖고 있는 임대주택에 대해서는 종합부동산세에서 합산이 배제가 됩니다. 또 이분들이 4년·8년 후에 이 주택을 팔 때 양도소득세를 감면해 줍니다. 그런데 게다가 건강보험료까지 80% 감면해 주겠다고 하는 거고, 그중에서 투기하시는 분도 많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우리 5000만 국민들은 건강보험료 내 가지고 그분들 의료비까지 다 챙겨 주고 있는 거예요.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왜 그 결정 할 당시에 보건복지부장관은 그걸 용인했느냐 이겁니다. 어떤 논리로 어떻게 해서 장관님은 그걸 수용하게 됐습니까?
박능후 : 제가 조금 전에 설명을 드렸는데 아마 정부 전체의 정책에서는 우선순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부동산정책이 강력한 우선순위에 있었고, 그래서 은닉되어 있거나 숨어 있는 임대사업자들을 다 드러내게 하는, 그것을 통해서 부동산을 좀 더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그런 어떤 국토교통부의 판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쪽으로 임대사업을 활성화한다 하는 측면으로 정책을 만들었고 그것이 부동산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런 논리를 가지고 각 부처와 협의를 했습니다.
강병원 : 지금 판단해 보시니까 그 판단이 옳았습니까, 아니면 틀렸습니까?
박능후 : 그다지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략)
강병원 : 작년 한 해 건보료 적자가 3조 6000억입니다. 아실 겁니다. 이렇게 적자 나는 상황에서 52만 명의 임대사업자를 나머지 5000만 국민들이 다 내고 있다라는 것, 어느 국민이 이 사실을 알면 납득하겠습니까? 장관으로서 책임지고 결자해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박능후 : 제 이야기가 정말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마는 저희들은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 반대했던 입장이고 지금이라도 그게 법적 안정성을 해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 조항을 적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박능후 전 장관은 보건복지부가 주택임대사업자 건보료 혜택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 입장이었다고, 그 혜택을 폐지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폐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장관직을 떠났다. 그는 무책임했다.
누구 작품인가? 국민은 알아야겠다
그러나 복지부만 물고 늘어질 일은 아니다. 주택임대사업자에게만 최대 8년간 건보료 80% 감면이라는 특혜를 주게 된 과정을 더 철저히 밝혀야 한다. 이토록 불공평하고 부작용 많은 정책을 누가 처음 제안했고 누가 결정했을까? 보건복지부가 반대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어떤 이유에서 주택임대사업자 건보료 감면을 밀어붙였을까?
당시 청와대 사회수석이었던 김수현? 경제부총리였던 김동연? 아니면 국토부의 김현미 장관이었을까? 국토부·복지부·기재부 등 관련 부처의 고위 공무원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공무원들 가운데 자신이나 존비속이 주택임대사업자 등록을 통해 특혜를 누린 사람은 없을까? 국민에게는 알 권리가 있다.
나중에 집값이 폭등하고 여론이 나빠지자 문재인 정부는 주택임대사업자에 대한 특혜를 찔끔찔끔 축소하기 시작했다. 특혜 축소는 조정지역 대상 신규 등록자에 한해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그런데 이때도 건보료 특혜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정책을 입안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 추궁도 전혀 없었다.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전례 없는 특혜를 부여해 집값 폭등이라는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공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실감한다.
다시 묻는다. 누가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비정상적인 특혜를 주는 정책을 입안했는가? 필요하다면 감사와 수사 등의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정책 결정 과정을 밝히고, 책임자를 찾아내 문책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부당한 특혜는 당연히 되돌려야 한다./더불어삶(livewithalll) / 오마이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 후 아무도 안 싸워... 당혹스런 결과
[하성태의 사이드뷰]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
"언론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권력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언론은 날이 잘 드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그것이 정의에 의해 쓰여질 때에는 역사를 진전케 하는 훌륭한 힘이지만, 그것이 잘못 쓰일 때, 권력에 결탁했을 때 그 폐해는 엄청날 수 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성이 묵직하게 깔린다. 취임 이듬해인 2014년 12월, 한 중소 진보 언론사의 창립 50주년 자리에서 기념사를 한 노 전 대통령. 그 음성 위로, 조선일보 사옥이 위풍당당 위용을 자랑한다. 뒤이어 청와대를 응시했던 카메라가 그 반대편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을 비춘다.
▲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 관련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보수언론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이런 '언론관'은 '조중동'을 겨냥한 것이라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취임 직후였던 2003년 4월 국정연설에서는 대놓고 "견제 받지 않는 (언론)권력은 위험하다", "몇몇 언론사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고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선빵'을 날렸을 정도다. 그 언론사들이 참여정부 내내 '건달정부'를 비롯해 저주에 가까운 독설과 편파‧왜곡 보도를 일삼은 것은 물론이다.
뉴스타파함께센터가 기획·제작하고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가 공동연출한 '추적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아래 <족벌>)가 노 전 대통령의 일성을 첫 장면으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노 전 대통령만큼 족벌(族閥) 신문과 혹독하고 처절하게 싸운 대통령은 없었으니까. <족벌>은 그 중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은 '조선'과 '동아' 미디어기업의 '흑역사'에 집중한다.
노무현의 전쟁과 인상적인 첫 장면
여하간 <족벌>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영화의 시작이면서 전체를 함축한다 해도 무방하다. (<족벌>이 인용한) 사후 공개된 노 전 대통령의 메모를 재인용해 보자면, '대통령 노무현'은 임기 내내 '썩어빠진 언론, 철없는 언론'과의 '숙명적인 대척'을 마다하지 않았고, '책임 없는 언론과의 투쟁'을 이어갔다.
재임 마지막 해인 2007년 신년연설이나 6.10항쟁 기념사를 통해서도 언론개혁을 향한 직설화법은 계속됐다. 이는 결국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일명 '기자실 통폐합'으로 이어졌고,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모든 기득권 언론사의 반발을 샀다.
그 독야청청하던 노 전 대통령은 망자가 된 지 벌써 11년이다. 시작부터 <족벌>이 소환한 그 망자의 일성이 한편으론 처연하면서도 처절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는 쓰러졌지만, 그를 쓰러뜨린 '족벌' 언론의 위세는 한층 더 강화됐다.
그러나 <자백> <공범자들> <김복동> <월성>에 이어 <뉴스타파>가 다섯 번째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은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영화적 기교나 감정에 공력을 나누는 대신, '족벌' 언론의 행태를 좀 더 넓게 소개하고 깊게 파헤치는 데 주력한다.
이를 위해 <족벌>은 '조선'과 '동아'의 '친일' 경쟁을 그린 '앞잡이들', 광복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기생해 제 배를 불려갔던 시기를 그린 '밤의 대통령', 그리고 현재 이들 '족벌'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악의 축'이란 세 장으로 나뉜다.
'조선'의 창업자 방응모, 방응모의 손자 방우영, '동아'의 시조 격인 김성수,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 '동아'와 '조선' 해직기자 출신 정연주와 신홍범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고,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악의 축' 챕터를 여는 주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이 중 지난 2016년 작고한 방우영 <조선일보> 전 사장의 활약은 괄목할 만하다. 1988년 국회 '언론 청문회'에서 한 방우영의 증언은 <족벌>이 길어 올린 명장면이었다.
<족벌>이 발굴한 '친일전사'들의 맨얼굴
"'조선', '동아'가 일제 때 왜놈한테 굴종하고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겁니까? 저는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조선'이나 '동아'나 68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저희들의 선배, 선인들이 그 혹독한 조선총독부 밑에서 피 흘리고 고문당하고 옥살이를 하면서까지 그래도 겨레를 위하고 민족의 존립을 위해서 끝까지 목숨을 싸우다가 조선동아는 끝내 폐간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 '족벌' 신문의 친일 이력이 도마 위에 오르자, 방우영은 울분에 차서는 핏대를 세우며 반박에 나섰다. '족벌' 신문 사주들의 정서를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족벌>은 취재를 통해 그간 두 신문이 주장해 온 '조선총독부에 의한 강제 폐간'이란 일종의 신화를 팩트 체크한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관된 관련 조선총독부 '극비문서'가 그 증거였다. 문서에 따르면, 당시 총독부 경무부장은 두 신문의 대표자를 만나 폐간을 논의했고, 당시 발행인인 방응모는 일종의 거래 끝에 '폐간계'까지 제출하며 거래에 응했다.
방응모의 요구사항은 '<동아일보>도 함께 폐간할 것', '폐간 당일까지 협의를 극비로 할 것', '건물을 포함 100만원을 양도할 것'이었다고 한다. 두 신문이 폐간됐던 1940년은 조선총독부가 일종의 언론통폐합을 실시했던 시기였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과 별다를 바 없는 기사와 논조로 일관했던 '조선'과 '동아' 역시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족벌>이 만난 전문가들을 말한다.
폐간 이후에도 '조선'과 '동아'의 발행인들은 기고문 등을 통해 친일 행위를 이어갔고,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 각각 보란 듯이 복간호를 냈다. 눈에 띄는 것은 '동아'의 복간호 속 영어 기사다. 이 '족벌' 신문들이 동물적 감각을 바탕으로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에 옮겼음을 증명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과 '동아'는 1985년 과거 상대방의 친일 경력을 들먹이고 자신들이 유일한 민족지라며 지면 상 논쟁을 펼친 '흑역사'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본인들만 부인할 뿐, 두 신문의 친일 행각에 대한 고발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족벌>이 이들의 창간 100주년에 발굴해 낸 '팩트'들을 영상을 통해 두 눈으로 접하는 일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지금의 독자들이 두 신문이 1937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폐간 때까지 새해와 일왕 생일 등 기념일에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 중앙에 경쟁하듯이 실었다는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또 컬러 인쇄가 희귀하던 그 시절 '조선'이 일본의 기념일마다 신문 제호 위에 일장기를 컬러로 인쇄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주겠는가. '조선' 해직 기자 출신 김홍범씨마저 "그걸 누가 가르쳐줬겠느냐, 전혀 알지 못했다"고 손사래를 쳤다.
'밤의 대통령'은 어떻게 '악의 축'이 되었나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 관련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그 권력지향의 DNA는 군사독재시절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리라. '밤의 대통령'은 '조선'과 '동아'가 승승장구했던 시절의 약사(略史)라 할 수 있다. 특히 전두환 집권 시기의 '용비어천가'를 영상으로 다시 확인하는 일은 가히 목불인견 수준이라 고역이란 표현도 아까울 정도다.
일왕의 사진을 1면에 내걸었던 '조선'과 '동아'가 전씨와 전씨 가족의 사진을 다시 내건 것도 이때였다. 1980년대는 '박정희 시대'에 일선 기자들이 벌였던 투쟁조차 없었다. <족벌>이 '동아투위' 등에 참여했던 해직 기자들, 즉 언론계 원로들을 소환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인터뷰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 이들이 과거 자신들이 외쳤던 언론자유수호 선언문을 다시 읽어내려 가는 장면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박정희 군부 당시 법정에 서서 판사 앞에서 '언론 자유'의 가치를 호령하던 이들이 바라보는 작금의 '언론 현실', 그 시선의 교차 자체로 <족벌>은 큰 의미를 지닌다. 과거 일왕과 '인간 전두환'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현재 어떻게 재림되는지를, 또 어떤 방식으로 변주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족벌>은 '악의 축'에 이르러 한국 언론계를 좀먹는 '조선'과 '동아'의 생존 전략을 횡으로 나열한다. 거대하고 방대한 '혼맥'으로 얽힌 '족벌' 언론 일가는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조중동 사주와 임원들의 개인비리와 친인척 가족 비리를 가지고 조중동을 통제해라, 이게 제일 많은 건의사항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이 유혹을 단칼에 끊어버렸어요. 나는 그런 대통령 안 한다. 내가 언론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두고 봐라. 합법적으로 하자. 내가 보수언론 기사가 잘못됐다고 하면 국민들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참여정부 국정홍보비서관 출신인 김종민 의원)
하지만 그런 대통령을 '족벌' 언론들은 '고졸'이라 조롱했고, 처가를 '빨갱이'라 몰아갔고, '건달정부'라 참칭했다. 노 전 대통령 이후, 종합편성채널이 탄생했다. '보수언론 프랜들리'를 선언한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가 족벌 언론에게 준 선물이었다. 언론자유와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세월호 참사 직후 이른바 '기레기' 담론이 출현했다.
노 전 대통령 이후 그 어느 정권도 무소불위 족벌 언론의 권력에 손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족벌 언론은 이제 '권력지향'을 넘어 '권력창출'의 단계로 넘어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조선' 출신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는 국회는 21대가 유일할 정도다.
그런 권력은 시간이 갈수록 공고화해지는 중이다. '조선'과 '동아'의 세습 체제 기간은 이미 북한 김일성 일가를 넘어섰다. 방일영문화재단 등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 엘리트층을 포섭 중이다. 경찰 조직 역시 '조선'이 주는 청룡봉사상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엄청난 금권을 바탕으로 땅 장사에도 열을 올린다. '조선' 경우엔, TV조선이나 콘텐츠 제작사 하이그라운드를 포함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다. 또 구독료 대신 변종 기사 광고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재계의 이해와 요구에 발맞춘다. 종교계도 빠질 수 없다. 주류 개신교가 이단으로 규정한 '하나님의 교회' 홍보 기사를 통해 큰 수익을 거둔 곳도, 신천지 홍보 기사에 앞장섰던 곳도 이들 족벌 언론들이었다.
'필람'의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 관련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내정설이 도는, <족벌>의 주요 출연자인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조선'과 '동아'로부터 총공세를 받는 중이다. 반면 TV조선의 <미스트롯2>는 현재 종편 시청률의 새역사를 쓰는 중이다. 일감몰아주기 의혹을 받는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는 별 일 없이 잘 먹고 잘 산다.
'검언유착' 의혹을 받은 채널A에 대한 비난 역시 잠잠해졌다. 신문 구독률은 꾸준히 줄고 있지만, 미디어 그룹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족벌' 언론들은 그런 하락세 경향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다. '안티조선' 운동으로부터 20년, 가장 크게 변한 상황이리라.
이런 현재를 직시하는 <족벌>은 이른바 '레거시 언론'을 신뢰한다는 논객은 물론 이땅의 지식인들 모두가 '필람'해야 할 다큐일 것이다. 이들이 인터뷰를 하고 칼럼을 게재하는 등 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조선'과 '동아'와 우호 관계를 지속해오는 사이, '족벌' 언론의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이야말로 <족벌> 언론의 가장 큰 공범일지 모른다.
이들 '족벌' 언론이 여전히 이슈에 대한 논조를 선도하고 있다. 포털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구독하는 뉴스 소비자에게도, 현직의 젊은 기자들에게도 <족벌>의 '필람'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중앙'이 빠졌다고 아쉬워 말고, 상영시간이 다소 길다고 버거워 할 필요 없다.
영화의 마지막, 두 족벌 언론의 사옥을 삼보일배한 동아일보·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의 염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족벌>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들 '족벌' 언론을 개혁해 내는 일이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일이 더 중요할 테니 말이다
경실련 “국회의원 부부 76명, 여의도 면적 47.5배 농지보유”
농지 관련 정책, 입법에 관여하면 이해충돌 우려”
농지 면적 기준 국회의원 상위 10명. 경실련 제공
국회의원과 배우자 76명이 농지를 보유하고 있고, 이들이 보유한 농지 면적을 합치면 여의도 면적의 47배가 넘는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1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21대 국회의원 농지소유 현황 조사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의원 부부 76명이 39만9193㎡의 농지(전, 답, 과수원)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여의도 면적(8.4㎢)의 47.5배로 총 가액은 133억6139만원에 달한다. 1인당 평균 면적 및 가액은 각각 5253㎡, 1억7천여만원으로 집계됐다. 총 76명 중 의원 본인만 농지를 가진 경우는 46명이었다. 9명이 본인과 배우자 모두 농지를 소유했고, 21명은 배우자만 농지를 갖고 있었다. 경실련은 국회의원 재산공개 관보 및 통계청 자료를 참고해 농지소유 현황을 분석했다고 밝혔다.
정당별로 보면, 국민의힘 소속 의원은 나머지 3개 정당(더불어민주당·정의당·열린민주당)이 보유한 농지(12만3282㎡)의 약 2배인 총 24만705㎡의 농지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보유한 농지의 총 가액은 86억7천여만원이었다.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이 11만5천㎡의 농지를 보유해 의원 중 가장 넓은 면적의 농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3만5천㎡의 농지를 보유한 박덕흠 무소속 의원이 뒤를 이었다.
경실련은 “농지는 현행법상 농업경영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면 소유하지 못한다. 배우자 등이 경작을 하거나 위탁경영을 할 수도 있지만, 농지 관련 정책과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의 농지소유는 이해충돌 여지가 있고 투기 목적으로 악용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농지 가액 기준 국회의원 상위 10명. 경실련 제공 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북에 원전 제공은 수출” 주장했던 사람 누구?
이병령 원안위원 자유한국당이 천거
3년전 “민족 앞날 위해 한국형원전” 전영기 중앙 칼럼니스트 “핵무기 없애면 원전 지어주자”
양이원영 “나경원, 이병령도 이적세력? 국민의힘은 이적세력 숙주인가”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자는 문건이 삭제됐다는 논란과 관련,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추천한 이병령 원자력안전위원회 비상임위원이 3년 전 “북한에 원전을 제공하는 것을 수출” “평화공존을 위해 북한에 원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재조명되고 있다.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2019년 3월 원안위 상임위원 결격사유가 지적되자 ‘삼권분립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청와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병령 박사도 이적세력인가”라며 “국민의힘은 이적세력의 숙주이냐”고 비판했다.
이병령 원안위 비상임위원은 지난 2018년 3월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원전수출 국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에서 ‘북한 지원방안 중 원전이 또하나의 케도처럼 대안이 될 수 있을텐데,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느냐’는 황웅재 요미우리신문 기자의 질의에 “북한 원자력 발전소를 지켜주는 것이 수출이냐 아니냐를 갖고 내부적으로 알규(논쟁)를 많이 했는데, 이것은 수출”이라며 “북한이 돈이 없으니까 돈을 줄 수 있겠냐고 하는데, 영국도 원전 건설 때 돈을 안내고, BOT 방식으로 빌딩을 세우고 운전하고 (돈을) 넘겨주는 방식을 쓴다. 북한도 그런 식으로 수출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이어 북한에 광석이 대단히 많이 묻혀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위원은 우리가 북한에 원전을 지어줘야 하는 당위성을 두고 “북한의 전기는 발전용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질이 형편 없다”며 “북한 비핵화로 정상국가가 되고, 남북화해가 이뤄진다면 북한 경제를 위해서도 우리가 원전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위원은 “비핵화되고 나서 남북간 진정한 화해 평화공존해야 할 더 어렵고 먼 숙제 가지고 있는데, 그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해서도 북한에 원전을 공급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은 북한에 제공할 원자로의 노형 문제를 두고 “90년대 북한 원자력발전소 지을 때 우리와 미국간에 싸움이 있었을 정도로 어느 나라 원자로로 할 것이냐고 중요하고 다시 북한에 원전을 제공하기로 결정이 되면 어느나라 원자로를 선택할지에 대해 미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강하게 나올 것”이라며 “남북 화해가 되면 북한에 자기 나라 원전 제공이 상업적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노형을 둘러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제가 정부에게 그런 것을 알고 도와줄 생각”이라며 “중국과 일본에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북한도 민족의 앞날을 위해 그런데 귀기울이지 말고 한국형 원전을 짓는데 협력하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린다”고 강조했다.
▲이병령(왼쪽) 원자력안전위원회 비상임위원(국민의힘 추천)이 지난 2018년 3월20일 원전수출 국민행동 출범식 기자회견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그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일순 원전수출국민행동 추진본부장(울산과학기술원 석좌교수)도 ‘어떤 원전을 북에 줄 수 있겠느냐’는 질의에 “우리 국민행동은 수출에 집중하기 때문에 북한 원전 제공은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개인 의견으로 볼 때 북한은 핵폐기가 복구 불가능한 수준에, 확실한 폐기에 대한 확신이 선다면 북한의 송전체계가 부실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송전체계를 최소화하고 제공할 수 있는 소형 원전 이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단기간에 제공할 수 있는 원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 본부장은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원전 시설을 폐기하고 나면 북핵개발 관련 인력을 흡수할 대형 원전, 핵연료 제조공장 원전 안전관리를 위한 대형원전을 고려할 수도 있겠다”고 주장했다.
전영기 당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는 이 위원의 주장을 인용해 2018년 3월15일 ‘김정은 핵무기 없애면 한국형 원전 지어주자’라는 칼럼에서 일본과 함께 부담하는 조건으로 연 1조5000억원 정도의 부담을 한다는 점을 들어 “이 정도면 검토해 볼 만하지 않을까”라며 “김정은이 핵무기를 없애면 북한에 한국형 원전을 지어주자는 방안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병령 원안위원은 2018년 12월27일 자유한국당 추천으로 국회에서 의결하고 청와대에 넘겨졌으나 청와대가 이 위원의 자격요건을 문제삼아 한동안 임명되지 못했다. 이후 지난 2019년 10월7일에 원안위 비상임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과정에서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2019년 3월4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이병령 박사는 1990년대 원자력 연구원 본부장으로 북한 신포에 보낸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 개발, 완성한 분”이라며 “(청와대가) 결격 사유 운운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것은 명백한 삼권분립 파괴행위이자, 입법부를 무시한 초유의 사태”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중앙일보 2018년 3월15일자 26면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북한 원전 건설주장은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천영우 외교부 차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원자력계에서 공공연히 주장하던 일”이라며 “최근까지 북한에 원전을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병령씨를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한 정당이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라고 비판했다.
양이 의원은 나 전 원내대표를 향해 “이병령씨가 이적세력인가. 이병령씨를 이렇게까지 지키려 한 당시 자유한국당은 이적세력의 숙주인가”라며 “나 전의원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반문했다. 양이 의원은 2018년 3월 ‘원전수출 국민행동’에 소속된 이병령, 정범진, 황일순, 조성은 등은 국민의힘과 함께 탈원전 반대에 공조해오던 사람들이 아니냐며 “원자력계와 한목소리를 내던 국민의힘이 이제 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원자력계와 이제 갈라서겠다는 것이냐”고 따져물었다.
이에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비핵화 전제 경수로라면 노무현 정부 당시 6자 회담이든 김영삼 정부든 국제사회와 함께 다뤄왔던 주제”라며 “그런데 오랜 협상에도 북한원전이 수포로 돌아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실패의 역사와 영변 핵시설을 평화적 핵 이용으로 둔갑시키고 싶은 북한의 속셈을 모른 척 한 채 이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중간에 급히 만든 원전 문건은 그래서 국민들에게 졸속 상납의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자고 보도했던 기사 제목들 모음. 이미지=양이원영 페이스북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이 사라지는 능력주의 시대
최첨단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가 낳는 한국 사회 불평등을 극복해갈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데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과연 능력주의가 이렇게 시끄럽게 다뤄야 할 사안이냐는 것이다. 21세기 불평등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기여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는 현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여러 부차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말하자면 불평등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해결해나가면 자연스레 누그러질 현상은 아닌가?
나올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하기에는 능력주의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너무 불길하다. 가령 우리 시대에 평등을 실현하려는 대표적인 전망들을 보자. 그 가운데에는, 자본주의 발전은 결국 경제 활동 전반의 완전 자동화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한편으로 다수 대중을 실업 상태로 내몰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민기본소득과 노동시간의 보편적-획기적 단축이 동반되면 자유와 평등이 만개한 세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런 비전에 크게 공감하지만, 만약 능력주의 문제를 계속 사각지대에 놔둔다면 이 구상이 실현될지라도 새로운 불평등이 사회를 덮칠 것이라 본다. 완전 자동화의 발단이 된 제3차 산업혁명(정보화)의 추세가 그러하다. 과학기술이 경제 활동에 보다 직접적으로 통합될수록 대중이 보유하던 기존 역량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지능에 바탕을 둔 단일한 위계제가 더욱 막강한 힘을 얻는다. 시장의 지배나 관료제를 축소시킬 수도 있는 기술이 오히려 지대 수익을 빨아먹는 거대 기업이나 더 고약한 관료기구의 기반이 돼버리며, 그럴수록 이 새 시스템에서 기회를 얻은 이들과 나머지 대다수 시민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런 상태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추가된다면, 적어도 기본소득 없는 경우보다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빈곤에 내몰릴 위험이 적어질 뿐, 불평등의 근본적인 측면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는 소득의 불평등도, 심지어는 자산의 불평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의 불평등이다.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일정하게 교정되더라도 시민들 사이에서 결정권을 행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지위의 차이가 지속된다면, 이런 사회는 민주주의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언제든 재연, 확대될 수 있다.
한데 정보화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자본-국가 관료체계의 중심에 얼마나 가깝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시민들의 지위가 달라지게 만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이 이런 근본적 불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기는커녕 이를 경쟁의 결과로서 스스로 정당화하게 만든다. 능력주의가 존속하는 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추세인 정보화는 세상을 항상 해방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되고 말 것이다.
능력주의 극복 없이는, 정보화 시대에 평등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럼 능력주의를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능력주의의 지배가 더욱 확산하지 못하게 막을 힘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이제껏 능력주의 비판가들이 제시한 여러 대안이 모두 일리가 있다. 마이클 영이 강조한 것처럼 능력주의의 직접적 기반이 되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이에 맞설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고, 능력주의의 신자가 된 지식인-중간층에게 각성을 촉구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에는 중대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지난 글("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 ... 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프레시안> 2021. 1. 21)에서 나는 지식인-중간층의 성장이 능력주의 확산의 강력한 추동력이 된 반면에 노동계급 문화의 존재는 이에 맞서는 균형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급 문화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는데, 이는 능력주의의 성장에 꼭 필요한 능력의 일원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문화가 주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노동계급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우선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노동계급 문화는 결코 바람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서유럽 노동계급 문화는 당대의 다른 계급-계층과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주의에 중독돼 있었고, 사회주의 같은 요소와 결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지성주의로 쏠릴 위험(오늘날 이미 나타나고 있는 위험) 또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노동계급 문화로 단순히 되돌아가자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느 자본주의 사회든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거치며 노동계급 구성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했다. 제1차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에 뿌리내린 전통이나 제2차 산업혁명 중에 독일에 등장한 문화가 참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 복제, 이식될 수는 없다. 심지어 지금의 영국과 독일에서조차 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시기에 노동계급이 능력주의 확산을 막는 세력이 되게 만든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과거의 노동계급이 부활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사뭇 다른 사회 주체들 사이에서 이들 요소가 새롭게 배양될 수 있을지 타진해봐야 하다. 그래서 한 세기 전의 산업 노동계급과는 다른 언어와 몸짓을 통해,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와는 전혀 다른 평등 관념을 견지할 사회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럼 노동계급을 능력주의에 맞서는 역사적 대항 세력으로 만든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위치'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요소다. 자본주의 역사상 상당 기간 동안 노동계급은 교육 제도에 통합돼 있지 못했고, 국민 교육 체계가 발전한 뒤에도 고등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지금에 비하면 기계화 정도가 뒤떨어지는 만큼 노동 현장의 자율성도 컸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역량과 덕성을 주장할 이유가 충분했다.
둘째는 '이상'이다. 혹은 '세계관', '이념'이다. 사실 위와 같은 노동계급의 위치는 패배감이나 열등의식을 낳을 수도 있으며, 실제 많은 경우 그러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위치에 이상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결합되는 경우에는 정반대 효과가 나타났고, 서유럽 노동계급의 많은 이들은 이 가능성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여러 좌파 이념을 통해 자신들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역이라 인식했다. 이럴 때에 그들의 일상은 패배자에게 남은 몫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가진 것과는 종류가 다른 역량과 덕성의 보고가 되곤 했다.
셋째는 '조직'이다. 능력주의가 힘을 얻기는 너무도 쉽다. 능력주의와 친화적인 막강한 조직들, 즉 근대 국가와 이를 닮으려 하는 거대 기업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을 통해 능력의 일원론이 막강한 물질적 실체가 된다. 이에 맞서려면 당연히 대항 세력에게도 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그러한 조직들을 실제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방어하는 조직이지만, 회사의 질서와는 별개로 노동자들만의 상호 인정이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국가나 기업과는 상관없이 노동자 조직들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량과 덕성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독특한 위치와 이상, 조직이 결합돼 어떤 힘의 자장이 구축됐다. 이 자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기준들에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발전의 전위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견지하던 찬란한 덕목이다. 그들은 '주눅 들지 않는' 주체였고, 그래서 시민이 시민 되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불평등을 자신들의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저들의 실패의 결과라 이해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승리할 집단적 기회를 요구했다. 현재의 패배자가 아니라 미래의 진정한 승리자로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구축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힘의 자장이다. 그러자면 이 시대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선 이들이 누구인지 식별해야 하고, 그들이 그 위치를 열등감이 아닌 항의의 기반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할 '이상'이 필요하며, 이 모두에 물질적 힘을 부여할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이들 요소의 결합을 통해 '주눅 들지 않는' 주체들이 형성되지 않는 한, 능력주의는 단순히 지식인-중간층 내부의 각성과 전환만으로는 결코 위축되거나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주눅 들지 않는' 주체의 뒷심이 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에서 저자 마이클 영은 가상의 미래 능력주의 사회에 맞서 궐기한 이들이 발표한 '첼시 선언'을 소개한다. 이는 <능력주의>에서 영이 능력주의 극복의 방향을 제시한, 몇 안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일부를 옮겨본다.
"계급 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인간은 ...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268쪽)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른 평가라? 너무 천진난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게 대안이라면, 능력주의 사회란 난공불락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에 '조직'이라는 변수가 개입된다면, 어떻겠는가? 가령 누가 뭐래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에 따라 평가할 조직들과 나란히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 평가하려 하는 조직들이 버티고 있다면 말이다.
영이 열거한 너무나 감성적인 단어들을 곧바로 평가 기준으로 들이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들 사이에는 소유인과 지능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참으로 다양한 역량과 덕성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경작인이 있고, 공작인이 있으며, 예능인이 있고, 돌봄인과 봉사인이 있다. 바로 이런 각각의 능력을 중심으로 뭉친 대중의 조직들이 있다면? 모르긴 해도, 이 경우에는 누구도 '첼시 선언'의 문구들을 그저 웃어넘기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대안 사회는 결코 개인과 국가, 기업만으로 이뤄진 사회일 수 없다. 그게 아무리 헌법상의 권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인이나, 민주화된 국가, 사회화된 기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반드시 이들 사이에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덕성을 대표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다만, 현실과 목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금도 우리에게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라 할 수 있는 조직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거의 모든 현대 헌법이 특별한 존재로 다루는 노동조합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조합과 이 글이 논하는 조직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 간극이 유례없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하다. 만약 지금 있는 조직조차 바람직한 조직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런 조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에 대한 독후감에서 시작된 잇단 논의의 마지막 순서가 될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향후 2주가 고비”라는 희망 고문 멈춰라
확진자 수만 줄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그사이 많은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위기는 계속될 것이고 지금의 대응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위험을 직시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
ⓒEPA2020년 7월2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식당 직원들이 봉쇄에 항의하는 모습.
〈'지속 가능 방역' 연속 토론〉
①지속 가능한 방역에 대한 어느 의사의 질문
-오명돈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감염내과 교수)
②‘두려움 해소’ 아닌 ‘위험 대처’가 중요하다
-김현철 (홍콩 과학기술대 경제학과·코넬 대학 정책학과 교수)
③‘당장의 손실’보다 ‘미래의 이득’을 보자
-김탁 (순천향대 부천병원 감염내과 교수)
④지속 가능 방역, 검사·조사·기술보다 ‘질적 전환’이 중요하다
-임승관 (경기도 코로나19 긴급대책단 공동단장)
⑤‘균형 잡힌’ 방역이라야 지속가능하다
COVID-19 워킹그룹
⑥우리의 ‘방역 소통’은 충분히 최선이었을까
COVID-19 워킹그룹
⑦“향후 2주가 고비”라는 희망 고문 멈춰라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⑧확진자 수에 집착 말고 '위험 수용 능력' 높여야
권순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장면 1.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난해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일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 청정국’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을 하던 터라, 부모님과 친지들이 계신 한국 상황을 걱정스레 주시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유럽을 거쳐 남반구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월 초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여행객을 시작으로 서서히 지역사회에 감염이 번지더니, 어느 순간 확진자 수가 세 자리로 늘었다.
남아공 정부는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첫 코로나19 사망자가 발생하자 전격적인 봉쇄(lockdown)를 단행한다. 첫 번째 감염이 발생한 후 3주 만에 내린 매우 신속한 결정이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남아공의 봉쇄는 꽤 엄격했다. 식료품점과 의료기관 외 모든 시설이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못 나가게 강제했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이 돌아다니며 이동 인원을 통제했다.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국경을 넘는 것이 금지되었다.
나는 당시 이직이 결정되어 한국행을 앞두고 있었다. 귀국 전까지 아껴뒀던 아프리카 여행은 일찌감치 단념했고, 여행은커녕 한국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최초 3주 계획이었던 록다운은 5주로, 8주로 계속 늘어났다. 계약이 끝난 집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미리 예약해둔 비행기 티켓도 기약 없이 미뤄졌다. 그 와중에도 확진자 수는 계속 증가했다. 사람들을 집에 가둬놓는데 도대체 왜 확진자가 느는지 의아했다. 일일 확진자 수는 점차 수십 명에서 100명대로, 500명대로 계속 늘어났다.
정부에서 마련해준 전세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 건 지난해 5월20일경이었다. 3월 말부터 8주간 꼬박 집에 갇혀 있었다. 내가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남아공에서는 몇 주간 록다운이 지속되었고, 봉쇄가 시작될 때 500명이었던 누적 확진자 수는 봉쇄가 해제될 즈음 3만5000명으로 늘어 있었다. 중간 단계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된 9월까지 일일 1만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하며 누적 확진자가 60만명으로 불어났다.
확진자가 급증해도 남아공 정부는 거리두기 단계를 높일 생각을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거리두기 단계를 높이는 게 소용이 없었다. 내가 성실히 집에 갇혀 있던 그 8주가 끝날 즈음, 이미 사람들은 마치 코로나19가 없는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식당이 문을 닫자 사람들은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고, 주류 판매가 금지되자 파인애플을 사서 직접 주조에 나섰다. 브라이(남아공식 바비큐)를 하는지 여기저기서 숯불에 구운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좀이 쑤셔서 이웃집에 놀러가는 정도는 사치였다. 봉쇄로 인해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사람이 속출했다. 안 그래도 높은 실업률에, 비숙련 서비스직 일자리가 몇 주 사이 완전히 사라졌다. 간간이 봉사활동을 나가던 빈민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먹을 게 없다며 돈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눈에 띄었다. 군인도 경찰도 그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돌아갈 집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에는 걸려도 살 가능성이 있지만, 몇 주간 밥을 못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아공 정부의 재정 상황에 넉넉한 재난지원금은 꿈같은 얘기다. 텔레비전에선 군인들이 봉쇄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장면이 나왔다. 집 근처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확진자는 계속 늘지만 봉쇄는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장면 2. 유럽
한국에 와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에 배치받았다. 유럽에서 여름 동안 잠잠해졌던 코로나19 유행이 가을부터 다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코로나19 재확산에 대한 보고서를 하나 작성했다.
유럽의 재확산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그림〉을 보면 1, 2차 유행에서 모두 심각한 피해를 본 국가(유형 ①), 1차 유행은 잘 막았으나 2차 땐 피해가 컸던 국가(유형 ②), 1·2차 모두 비교적 잘 통제하는 국가들이 있다(유형 ③).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벨기에·스위스 등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1번 유형이다. 1차 유행 시 뒤늦은 대처로 피해가 컸는데 2차 때도 신속히 반응하지 못하고 피해가 심각했다. 〈그림〉에서 영국·스웨덴·아일랜드가 1차 때는 피해가 컸지만 2차 때는 낮은 유형 ④에 위치해 있긴 하나 유럽 평균 대비 낮았을 뿐 피해가 적지 않았고, 보고서가 발행된 이후인 지난해 12월부터 확진자가 급증해 다시 유형 ①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유형 ④로 분류된 나라가 전무한 것은 1차 피해가 컸던 나라에 유행 통제에 불리한, 그리고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어떤 특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유형 ②도 주목할 만하다. 오스트리아·체코·폴란드·슬로베니아 등 대부분의 중동부 유럽 국가는 1차 유행 시 발 빠르게 대처해 감염 확산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경험이 있다. 신속한 입국금지, 이동 및 모임 제한, 휴교 등의 봉쇄 조치로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들 대부분이 2차 유행에선 맥을 못 추었다. 체코처럼 오히려 유형 ① 국가들보다 더 큰 피해를 본 나라도 있다.
간단하게 이유를 제시할 수 없지만 내가 남아공에서 겪은 일이 동일하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봉쇄 조치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몇 주간의 봉쇄로 처음엔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방심하는 순간 다시 감염 확산이 무섭게 일어난다. 두 번째 봉쇄는 더 고통스럽다. 이미 사람들은 봉쇄의 피해를 경험했고, 규칙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사이의 반목은 심해지며, 강렬하게 저항하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어난다. 1차 때 신속히 대응했던 나라들도 2차 확산에선 개입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의료체계 붕괴의 위기를 겪은 다음에야 재봉쇄를 단행했다.
유형 ③처럼 1·2차 유행에서 모두 선방한 나라는 매우 희귀하다. 그나마 보고서를 냈을 지난해 11월만 해도 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독일 등이 여기에 분류되었는데, 연말을 지나면서 상당수가 유형 ②로 넘어갔다. 현재 독일은 매일 수만 명대 확진자와 10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고, 덴마크와 발트 3국 역시 확진자 급증에 몸살을 앓는다. 남아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핀란드·그리스 정도로 손에 꼽힌다.
ⓒEPA1월1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교생들이 개학 연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유럽의 사례는 코로나19 유행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국가마다 의료체계 붕괴를 겪은 뒤에야 봉쇄 조치를 들고 왔지만 피크를 꺾는 이상의 효과는 보지 못했다. 지역사회 감염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준까지 봉쇄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봉쇄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서 핼러윈과 크리스마스를 즐긴다.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라는 구호는 개인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 약발이 떨어진다. 그래도 유럽은 나랏돈으로 피해를 보상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GDP의 30~50%에 달하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도 장기간 경제를 멈추면서 생기는 모든 피해를 다 보상할 수는 없다.
짧고 굵은 봉쇄는 없었다. 겨울은 길고 바이러스는 진화한다. 이 지독한 적은 잠시 주춤한다고 방심하면 다시 맹렬한 공세를 펼친다. 지난해 11월 봉쇄를 단행하며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던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크리스마스 직후 ‘바이러스 변이’를 이유로 대며 몇 주만 더 해보자고 겸연쩍게 부탁했다. 백신 접종까지 서둘러 시작했지만 코로나19 확산세는 아직까지도 잡힐 줄을 모른다.
장면 3. 한국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성과는, 적어도 지난해 11월까지는, 놀라웠다. 높은 의료 수준과 행정력, 기술력을 바탕으로 봉쇄 없이도 감염 확산을 몇 차례나 저지해냈다. 제한 업종과 이동 통제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경제 피해도 비교적 적었고, 낮은 수준의 협조만으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K방역’을 너무 믿었던 것일까? 겨울을 대비하지 않은 우리에게 일일 확진자 1000명은 가혹한 시험이었다. 병상은 부족하고 있는 병상도 제대로 못 쓰게 되면서 요양병원, 재활시설, 교정기관 등 취약시설에서 감염 확산과 사망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3단계 격상을 주문했지만 정부는 주저했다. 애초에 기준을 잘못 만든 탓이 크다. 3단계 조치로 막을 수 없는 감염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단계 격상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정부는 희생을 일부에 몰아주는 정책을 폈다. 고위험 업종 영업 중단을 유지하고 거기에 5인 이상 모임 금지를 더했다. 선제 검사를 늘리고 뒤늦게 병상 및 인력 확보에 나섰다.
그래도 시민들은 협조적이었다. 그 흔한 노마스크 시위 한번 없고 그나마 있는 저항도 “마스크 잘 쓰고 환기 잘 할 테니까 영업하게 (예배드리게) 해주세요” 정도였다. 베를린·런던·브뤼셀·마드리드·더블린·파리·빈·프라하 등 곳곳에서 대규모 반봉쇄(anti-lockdown) 시위가 열린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는다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행이 시작되고 꼬박 1년이 지났다. 그나마 전면적인 봉쇄가 없어서 협조 여력이 있지만 그것도 사정이 괜찮은 사람 이야기다. 1년 내 장사를 제대로 못한 고위험 업종 자영업자들, 가장 먼저 거리에 나앉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공교육의 보호 없이 방치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요양시설 노인들, 한계 이상으로 업무를 감당하는 방역 공무원과 의료진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연합뉴스 1월12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전국당구장업주연합 및 대한당구장협회 소속 회원들이 상복을 입고 집합금지 반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잠깐만 버티면 나아질 거라고,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왜 ‘짧고 굵은 3단계’를 안 해서 고통을 가중시키느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남아공과 유럽의 예에서 보듯 짧고 굵은 봉쇄는 없다.
봉쇄로 감염 확산을 저지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설령 감염 통제에 성공해도 유행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백신으로 인한 유행 종식은 적어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역사회 감염 제거가 제1 목표라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오랜 기간 고강도 거리두기를 단행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정도의 통제 수준에도 보이는 희생과 보이지 않는 희생이 너무 크다. 거리두기 단계는 언젠가 완화할 수밖에 없고, 이제 어떻게 완화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첫 번째 과제는 방역의 목표를 ‘확진자 감소’에서 ‘피해 최소화’로 바꾸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감염 확산에 대비하여 우선순위에 따른 자원배분 체계를 명확히 갖출 필요가 있다. 요양병원 등 취약시설 보호를 강화하여 확진자 발생 시 최우선으로 치료 자원이 배분되게 하고, 대신 중증화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자의 경우 퇴원과 퇴소 기준을 완화하여 병상 및 생활치료센터 회전율을 높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체계가 정비되면 업종 불문 영업 중단을 해제하되 업장에서 위생 수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관리하는 쪽으로 방역의 방식을 조정할 수 있다.
사실 이 제안은 유행 초기부터 논의되었던 완화정책과 맥을 같이한다. 경제가 생명보다 소중하다거나 살릴 수 있는 환자를 포기한다는 게 아니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 재난 상황에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또한 어느 정도 일상을 보장해야만 방역정책이 지속 가능하기도 하다. 방역이 사회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리면 오히려 사회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더 큰 피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종류의 대응은 이미 견고하게 굳어진 코로나 시대의 ‘상식’과 상충한다. 감염자에 대한 비난이 확진자를 줄이는 무기로 쓰인다. 집에 머무르는 게 시민의식이고, 술 마시고 스키장 가고 교회에 가는 건 개념 없는 행동으로 치부된다. 자유나 인권을 외치는 사람은 철없는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는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연대의 가치가 희미해지지만 확진자 수만 줄일 수 있다면 모든 게 용서된다. 그사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과연 우리는 이 상식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균형으로 옮아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의료체계 붕괴를 막을 수 있을까.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대신 모두가 함께 고통을 분담할 수 있을까. 답이 있는지 모를 질문만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위기는 계속될 것이고 지금의 대응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앞으로 2주가 고비” 같은 희망 고문에서 벗어나,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을 정확히 평가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시사인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돈이 넘쳐나는 시대 불안한 파티는 계속될까
|코로나19 위기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부를 늘리는 거대한 괴리가 생겨났다. 체감 경제는 엉망인데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치솟았다. 파티의 끝에 중앙은행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시사IN 이정현
새해 벽두부터 상반된 두 풍경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실업급여 수급자 수가 사상 최대(2020년 5만1772명) 규모를 기록했다. 2020년 3분기 말 기준 가계부채 총액은 약 1682조원으로 국내총생산(2019년 4분기~2020년 3분기 GDP)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코로나19 3차 대유행으로 자영업자의 시름이 깊어지고, 오는 3월에 몰린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 만기 때 얼마나 많은 부도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 공포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다.
주식시장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지난해 3월 1457포인트까지 떨어졌던 코스피 지수가 올해 1월14일 현재 3114포인트로 두 배 이상 치솟았다. 서점가에서는 재테크와 금융시장을 다룬 책이 인기를 끌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경제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투자’가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됐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유례없는 ‘거대한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만든 위기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부를 늘렸다. 평소 금융시장에 관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우리가 체감하는 경제는 엉망인데 왜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은 치솟을까. 팬데믹은 어떤 기준으로 경제주체들을 환희와 절망으로 갈라치기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려면, 팬데믹 이전의 글로벌 금융환경과 지난해 주요 국가들의 금융적 대응을 함께 조망해야 한다. 그런 뒤에 올 한 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제적 변수들을 미리 짚어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완결된 이야기일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막 ‘팬데믹 경제의 기승전결’ 가운데 ‘기’와 ‘승’을 목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2021년 벽두, 감염병이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국면에서 이 이야기의 ‘전’과 ‘결’이 어찌 흐를지 예단하긴 어렵다. 다만 이 같은 ‘괴리’의 진행 원리와 방향을 이해해야 팬데믹이 만든 격차와 불평등을 제대로 직시하고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 팬데믹 이전 11년– 고조된 과열
2019년 8월, 전 세계 금융시장은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미국 국채 시장에서 12년 만에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장기국채(10년 만기 미국 재무부 채권)의 수익률이 단기국채(2년 만기)의 수익률을 밑도는 현상이다.
채권의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한다. 채권 수요가 늘어나서 그 가격이 오르면 수익률은 떨어진다. 반대로 수요 하락 때문에 채권 가격이 내리면 수익률은 오른다. 또한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수익률이 높고 가격이 싼 경향이 있다. 잠시 빌려주는 것보다는 오래 빌려주는 돈에 더 많은 이자(수익률)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장단기 금리 역전’은 이런 당연함이 깨졌다는 소리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주체들이 경기 전망을 어둡게 볼 경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미국 장기국채가 인기를 끌게 된다. 이에 따라 장기국채의 가격은 오르고 수익률은 떨어진다. 2019년 8월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은, 경제주체들이 경기를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경제주체들이 장기국채를 너무 많이 사들여서 그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바람에 수익률이 단기국채의 수익률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기침체의 사전 지표’로 통한다. 1978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국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은 총 여섯 차례 발생했다. 이 현상이 발생한 뒤 1~2년 시차를 두고 어김없이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2019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시장 곳곳에서 ‘조만간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위기의 불씨를 댕기는 주인공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 글로벌 경제, 특히 주식 등 자산시장은 전반적으로 호경기였다. 과열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0년 유럽발 재정위기를 겪은 후 전 세계 중앙은행이 10년 넘게 ‘초저금리 환경’을 제공한 덕분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008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기준금리를 연 0.25% 정도로 유지했다. 이렇게 기준금리를 낮추면 시장금리 역시 하락해서 대출이 활발해지게 된다. 기업이 저금리로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실물경제에 활기를 띠게 하려는 목적이다. 전통적 통화정책의 기조다.
그런데 2010년대 미국 연준은 이 ‘전통적인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금리만 낮춘 게 아니라 세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미국·유럽·일본 같은 금융 선진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도 초저금리 상황이었다. 원래 낮은 금리를 좀 더 내린다고 해서 큰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정책수단으로 쓸 만한 ‘재료’ 자체가 적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연준이 꺼내든 카드가 바로 ‘양적완화’다. 원래 중앙은행은 시중은행과의 거래를 통해 금리를 내리거나(통화량 증가) 올린다(통화량 감소). 즉, 중앙은행이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당시 연준은 아예 시장의 ‘큰손’이 되기를 자청했다. 연준이 새로 발행한 통화로 시중에 나가 있는 국채·회사채·주식 등의 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간의 경제주체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
연준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대공황이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인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대공황 여파로 미국 시중 통화량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는데, 돈줄이 끊기자 기업과 가계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때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통화량)을 늘렸다면 공황의 여파와 지속 기간을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철학을 따라 ‘이번만은 넋 놓고 바라만 보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게 당대 ‘대공황 연구의 1인자’로 불리던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었다.
경기침체 상황에서 돈을 융통하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은 가계나 기업이 부도를 막을 수 있는 ‘숨구멍’이 생긴다는 의미다. 기업들은 저금리 상황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이런 투자가 늘면 경제의 활력이 살아난다. 연준만이 아니었다. 힘이 센 화폐를 가진 나라들은 2010년대 들어 양적완화에 하나둘 동참했다. 유럽 중앙은행(ECB)은 2012년 무제한 국채 매입을 천명했고,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2013년부터 ‘아베노믹스’로 명명되는 돈 풀기에 나섰다.
하지만 빌린 돈은 생산적인 분야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낮은 금리는 자산가격이 오를 수 있는 좋은 환경이다. 싸게 빌린 돈으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큰손인 중앙은행이 채권이나 주식 같은 자산을 매입하면 시장 전체적으로는 해당 자산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그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어떤 회사들은 설비나 인력에 투자하기보다 자사주를 사들였다(자사주를 사들이면 주가 상승을 기대하는 주주들이 좋아한다). 주식시장이 활황을 누렸다. 2009년 3월 6547포인트까지 하락한 다우존스 지수가 팬데믹 직전인 지난해 2월12일엔 2만9551포인트까지 상승했다. 11년 동안 4.5배 정도로 치솟은 셈이다. 버냉키 의장 시절 연준은 시장에 3조 달러가 넘는 돈을 풀었다(그만큼의 자산을 사들였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돈 줄기의 수도꼭지’를 잠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연준뿐 아니라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돈이 풀린 만큼 물가도 인상된다’고 믿었다. 엄청난 돈이 풀렸으니 물가가 엄청나게 오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돈을 푸는 규모를 줄이고, 이차적으로는 풀었던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 2013년 6월, 버냉키 의장은 ‘양적완화를 줄이겠다’는 말을 꺼냈다. 곧바로 자산시장이 출렁거렸다. 양적완화 자체도 처음이었지만, 양적완화를 줄이는 것도 당시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중앙은행은 ‘테이퍼링(tapering)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테이퍼링이란 중앙은행이 시중 자산(채권·부동산·주식 등)의 매입 규모를 줄이는 걸 의미한다. ‘매입 중단’이 아니라 ‘매입 규모 감소(돈을 푸는 규모를 줄인다)’에 불과했지만, 시장에서는 ‘큰손이 빠지기 시작한다’며 금리인상을 걱정한다. 은행들도 대출을 옥죄면서 경제 불안을 가중시켰다.
몇 차례 부침을 겪었지만, 실제의 ‘테이퍼링’은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진행되었다. ‘저금리 환경’이 극적으로 뒤바뀌진 않았다. 2014년 벤 버냉키의 뒤를 이은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뿐만 아니라 ‘고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물가안정’을 위해 함부로 돈줄을 조이다가 경제위기가 재발하고 고용이 불안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옐런은 ‘충분한 고용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낸다. 이렇게 양적완화를 서서히 퇴조시키면서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는 소방수 역할이 옐런에게 부여되었다. 옐런 의장은 2018년 퇴임할 때까지 미국 경제의 실업률을 4.1%까지 낮추고,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0.25%에서 1.5%까지 조심스럽게 올렸다.
ⓒAP Photo 2017년 11월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왼쪽)과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폴 더글러스 시상식에 참석했다.
회복에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제대로 회복된 것이 맞냐’는 의구심도 남았다. 금융·재정 위기의 후폭풍으로 2010년대는 ‘로플레이션(Lowflation)’ 시대로 기억된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낮은(로) 시대라는 의미다. 오히려 2010년대의 선진국 경제관료들은 그렇게 돈이 많이 풀린 상황에서도 물가상승이 아니라 디플레이션(물가하락 등 경기침체)을 우려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저금리와 양적완화로 엄청난 돈을 풀었지만 실물경기가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재화와 서비스, 나아가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지 않으니 생활물가와 임금(노동의 가격)도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떨어질 것이 우려되었다. 풀린 돈이 실제 생산이나 소비로 이어지기보다는 금융기관으로 흘러가 자산시장의 과열을 일으킨 것이다. 주가는 뛰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산시장 폭등과 이에 따른 ‘괴리’는 최근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제기되던 문제였다. 지금은 ‘괴리’는 좁혀지지 않은 채 폭발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조심스럽게 경제를 어르고 달래는 풍경이 2021년 초에 나타난 ‘괴리’의 ‘전초전’이다. 이렇게 과열되었던 자산시장이 엉뚱한 원인과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은 바이러스였다.
■ 바이러스가 초래한 붕괴와 회복
지난해 3월, 전 세계 경제지표가 와르르 무너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현과 유가 급락이 불씨를 지폈다. 역사상 손꼽힐 대규모 폭락이 뒤따랐다. 2020년 2월12일 2만9348포인트였던 다우존스 지수는 한 달여 만인 3월23일 1만8591포인트로 급락했다. 한국의 코스피 지수도 2020년 3월5일 2085포인트에서 3월19일 1457포인트로 폭락하는 유례없는 패닉을 경험했다.
전 세계 금융당국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미국 연준은 다시금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를 천명했다. 2020년 3월15일 기준금리를 0~0.25%까지 낮췄고, 민간기업들의 채권과 어음(CP)도 매입하면서 시장을 현금으로 폭격했다. 2008~2012년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 양적완화였다.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은 경제활동 자체를 중단시켰다. 가장 먼저 쓰러지는 건 경영 사정이 좋지 못한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무너지면 연쇄적 부도와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 정부들이 10여 년 전에 개시했다가 서서히 빠져나오려고 했던 ‘돈풀기 정책’에 다시 풀무질을 시작한 배경이다.
한국도 이에 발맞춰야 했다. 한국은행은 2020년 3월26일, 유동성 공급정책을 발표하며 사상 처음으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는 “지금은 2008년 금융위기보다 엄중한 상황이다”라고 정책 배경을 설명했다.
거시경제 역사상 전례 없는 돈이 흘러나왔다. 기존 양적완화와 다른 점은 정부의 재정정책도 동원됐다는 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양적완화로 퍼부은 돈은 약 3조7000억 달러(약 4070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직후 10개월여 동안 미국 정부는 이보다 많은 약 4조 달러(약 4400조 원)를 재정지출로 투입했다. 새로 취임한 바이든 행정부는 2조 달러(약 2200조원) 규모의 추가 부양책을 앞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월19일 〈월스트리트저널〉은 전 세계 코로나 관련 정부 재정지출이 약 13조 달러(약 1경4300조원)에 달한다고 전했다.
ⓒ시사IN 이정현
2020년 봄에 시작된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위협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은 아직까지 금융시장에서 ‘이머징 마켓’으로 불린다. 일종의 ‘금융 개발도상국’ 등급이다. 한국이나 타이완처럼 경제의 개방 정도가 강한 국가는 위기가 닥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쉽다. 이 때문에 지난해 3월엔 환율부터 들썩였다. 2020년 3월23일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273원까지 치솟았다. 다행히 한·미 통화스와프로 한국은행이 일종의 ‘달러 마이너스통장’을 갖게 되면서 외환시장의 불안을 잠재웠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전 세계적인 저금리·양적완화·재정지출 기조를, 비록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도, 쫓아왔다.
지금의 ‘거대한 괴리’는 2020년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방역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만큼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그러나 1·2·3차 대유행을 겪으며 전통적인 대면 서비스 자영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권리금’에 발목이 묶인 자영업자들은 경제적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버텨야 했다. 서비스직군, 저소득층 임시직부터 사라졌다. 1월1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 연간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21만8000명이나 감소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27만여 명 감소) 이래 최대 규모다.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교육서비스업 같은 대면 서비스 분야에서 실업자가 늘었다. 아무리 한국이 수준 높은 방역을 통해 전 세계에서 일자리·경기 방어를 잘했다 하더라도 GDP(국내총생산)의 역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면 자산시장은 빠르게 회복되면서 코로나19 이전의 지표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미국의 다우 지수는 코로나19 충격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코스피 지수는 두 달 만인 5월26일에 2000포인트를 회복한 뒤 2021년 들어서는 3000포인트를 넘겼다.
ⓒ연합뉴스 1월7일 한국거래소에서 코스피 3000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소비를 진작시키고 투자를 늘리는 데 쓰여야 할 시중 유동성이 자산시장에 붙어 있게 되었다. 금융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니다.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환경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기업의 영업 환경이 개선되지 못했으며, 장사를 벌일 만한 환경도 조성되지 않았다. 돈이 고여 있는 방죽에서 그나마 새어 나오는 물줄기는 인터넷 쇼핑 같은 ‘언택트 산업’으로 흘러나갔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엔 은행·보험사가 무너지고 금융시스템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서는 시스템이 고장 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소비를 할 수 없다. 2008년 금융위기는 정부가 금융회사를 수습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고쳐나갔다. 2020년의 정부는 의학기술로 집단면역을 이루지 못하는 한 경제주체들에게 ‘버티는 삶’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자산시장에선 전례 없는 강세장이 다시 펼쳐진다.
코로나19가 만든 강세장은 2009~ 2019년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아무도 호텔, 항공사, 여행사 등이 금세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혜를 입는 기업, 사람들의 돈이 몰리는 기업은 극소수 테크 기업으로 좁혀졌다. ‘MAGAT(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애플, 테슬라)’나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으로 불리는 기술 기업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특히 2020년 ‘시대의 아이콘’이 된 기업이 바로 미국의 전기차 회사 테슬라다. 2020년 3월19일 주당 85.51달러(액면분할 이후 가격 기준)였던 테슬라 주가는 1월8일 주당 880달러까지 치솟았다. 10개월 만에 11배가 오른 셈이다.
2020년 경제는 한마디로, ‘현금’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손해가 되는 시기였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국은 그 정도가 매우 도드라졌다. 2020년 3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여행·항공·숙박 서비스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대다수 산업군의 주식이 팬데믹 이전 가격을 상회했다. 코스닥 지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으로 평가받았다. 2020년 3월19일 428.35포인트였던 코스닥 시장은 2021년 1월7일 988.86포인트로 치솟았다.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경제활동이 꽁꽁 묶인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례 없던 방식으로 돈을 풀었다. 일단 ‘살포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부도를 막고 일자리를 지켜야 바이러스를 퇴치한 이후 국가경제의 회복을 도모해볼 수 있다. 그때까지는 돈을 살포하며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합의된 질서’였다. 하지만 2021년 과열된 자산시장을 마주하며 동시에 논의되는 것이 바로 ‘머니 무브(Money Move)’다. 머니 무브는 자산시장에 있는 돈이 실물경제로 향하게 된다는 의미다.
ⓒ한국은행 제공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월15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 참석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2021년의 화두, 인플레이션은 오는가
2020년에 세계가 겪은 대규모 ‘현금 살포’는, 1980년대 이후 ‘주류 경제학’으로는 나오기 힘든 처방이었다. 당시의 주류 경제학과 정부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었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물가는 통화량 증가만큼 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20년까지 살포된 현금들은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못했다. 다만 백신이 보급되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서서히 퇴조할 2021년부터 경제활동 재개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돌아올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문제는 2021년 초 현재 대다수 국가의 실물경제가 여전히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질병을 통제했다고 자평하는 중국, 상대적으로 빠른 방역으로 경제활동이 유지되었던 한국·타이완을 제외하면 여전히 경제활동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자체는 듣기 좋은 소식일 수 있다. ‘머니 무브(금융→실물)’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앙은행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는 물가를 잡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면 고용은 어떻게 될까? 혹은 물가상승을 그냥 놔둔다고 고용이 정상화될 수 있을까?
일단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실제로 벌어질 것인가’라는 논쟁부터 정리해보자.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댄다. 전례 없는 재정·통화 정책으로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고,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돈을 쓰기 위해 벼르고 있으며(이전 수요), 물가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원자재 가격이 상당히 올랐다는 것이다. 특히 구리·니켈·대두 등은 투기적 수요까지 몰리면서 가격이 급상승했다. 물가가 상승할 경우 화폐는 물론 주식 같은 자산의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에 일종의 위험 대비(인플레 헤지) 수단으로 원자재를 찾는 이들이 늘어서다.
하지만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이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여기는 측은 ‘코로나19가 그렇게 만만한 위기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일시적인 물가상승이 찾아올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물가가 계속 오를 가능성은 예상보다 낮다는 인식이다. 무엇보다 일자리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 백신 확대 이후 경기가 살아난다 해도 고용은 여전히 불안할 가능성이 크다. 2010년대 이후 발생한 사회적 변화도 고민거리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대면 서비스 상당수가 비대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통분야에서는 그 변화가 극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일상 속 생산과 소비가 2019년 수준으로 바로 복귀하긴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백신 직후 일시적인 물가상승이 다가올지 몰라도, 지금 돈을 뿌려둔 것 때문에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기란 어렵다는 관측이다.
미국 연준이 경기회복에 따른 단기적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용인하겠다는 의사도 밝힌 바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해 8월27일 잭슨홀 회의 연설에서 “연준의 새로운 전략은 ‘유연한 형태의 평균물가목표제(Flexible Form of Average Inflation Targeting)’다”라고 말했다. 과거 연준은 물가상승률을 억제하는 상한선을 2%로 잡고, 매 시점 가이드라인인 2%를 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치를 위협하면 금리인상을 단행한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 기간에 걸쳐 평균적으로’ 2% 정도 물가가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의미다. 가령 올해 물가가 3% 넘게 상승했다고 치자. 연준의 원래 규범대로라면 ‘올해 물가상승률이 2%를 넘겼으니 금리인상을 바로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물가가 많이 떨어져 ‘특정 기간(지난해와 올해)’의 평균적인 물가상승률이 2% 이하라면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직된 가이드라인에 따르지 않고 경제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일시적인 물가 급상승은 용인하겠다는 의미다.
물가상승은 저축과 연금, 주식 등 자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가령 삼성전자 주식이 8만원에서 8만5000원으로 오른들, 물가가 10%가 뛰면 주식의 실질적 가치도 하락해 결국 손해를 입게 된다. 자산 상승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을 계속 걱정하는 이유다.
ⓒAP Photo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2020년 3월3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전격 인하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파티는 계속될 것인가
2020년 각국 중앙은행은 자산시장 참여자들의 환호를 에둘러 무시했다. 자산 유무에 따른 격차가 점차 커졌지만, 당장 경제를 무너뜨려 실업자를 쏟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 파티가 벌어지는 와중에 자산시장 참여자들은 슬슬 중앙은행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린다면, 순식간에 버블은 사그라들고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3년의 벤 버냉키처럼 ‘돈을 줄이겠다는 신호’만 시장에 보내도 경기는 출렁이게 된다. 최근 금융시장은 연준의 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앞서 설명한 ‘테이퍼링(양적완화를 통한 자산 매입 축소)’을 언제 시작할 것이냐는 질문이 뒤따른다. 비유하자면 연준은 현재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튼 다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잠그기 위해 조금씩 발걸음을 떼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반응할 만큼 자산시장이 과열되어 있다. 양적완화 환경에서 자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중앙은행의 몸짓을 살피고 있다. 중앙은행이 잠시 시계를 흘깃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움찔거리는 게 최근 시장의 경향성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혹여 유동성 공급을 줄일 때에는 미리 신호를 주겠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낸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1월14일 프린스턴 대학이 주최한 온라인 간담회에서 “출구전략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금리를 올려야 할 때가 되면 분명히 그렇게 하겠지만 당분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해서도 “한 번의 가격 상승은 그리 크지도 지속되지도 않는다”라고 답했다. 자산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파월 의장의 ‘신호를 보내겠다’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파월 의장은 “점진적인 자산 매입 축소의 시작을 고려하기 전에 매우 명확히 대중과 소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테이퍼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는 시그널을 미리 주겠다는 의미다. 수도꼭지를 향해 발을 내밀기 전에 미리 ‘나 지금 한 발짝 옮길 거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과연 과열된 자산시장을 이대로 보고만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만만찮다. 실물경제로 돈이 충분히 옮아오기 이전에 자산시장에서 버블이 터진다면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경기는 지금 당장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경제주체가 ‘어떤 예상을 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2021년 1월 현재를 축약하자면 모두가 자산시장이 과열되었다고 인식하고, 언제 수습책이 나올지 긴장하는 상태다. 대규모 재정정책으로 인한 국가부채도 문제시되고 있지만 ‘나중 일’로 치부된다. 물론 코로나19가 수습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증세 문제’도 언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적어도 정부와 중앙은행은 부채 문제를 터뜨리지 않는 선에서 ‘거대한 괴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발생한 자산 불평등을 금융시스템을 통해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백신이 확대되기까지 정부와 중앙은행이 우선시하는 것은 고용 충격이 최소화되도록 시간을 버는 일이다. 다만 2021년에 2020년 같은 자산시장 폭등을 경험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중앙은행의 ‘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괴리를 좁히기 위한 연착륙은 2010년대만큼이나 섬세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될 것이다.
시사IN 김동인 기자
한명숙 사건, 검사실 '증언 연습' 확인됐다
한명숙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이하 한명숙 사건) 검찰 수사팀이 재판정에 서게 될 증인을 상대로 ‘증언 연습’을 시켰다는 수사팀 관계자의 진술을 대검 감찰부가 확보했다. 이는 지금까지 "검사의 위증 교사는 없었다"고 주장했던 한명숙 사건 수사팀의 주장과 배치되는 정황이다. 증인 김 모 씨가 출소 이후에도 법정 증언을 앞두고 적어도 10차례 이상 검사실에서 강도 높은 조사 또는 연습을 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뉴스타파는 감찰부가 폭로 당사자인 죄수H를 조사한 문답서를 입수해 이 같은 내용들을 확인했다.
뉴스타파는 또 한명숙 사건 재판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위증을 한 의혹을 받고 있는 증인 김 씨가 법정 증언 두 달 전에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은 녹취록을 확보했다. 이 녹취록과 법정 증언을 비교해보니 김 씨는 진술은 두 달 사이 크게 달라졌다. 검사실에서는 잘 기억이 안난다고 하거나 명확히 진술하지 못한 내용을 법정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한 것이다. 검사실을 드나들며 증언 훈련을 받았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
증인 김 씨가 법정 증언을 한 것은 2011년 2월 21일과 3월 23일이다. 김 씨의 모해위증과 검사의 모해위증교사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김 씨와 수사팀에 대한 공소시효는 3월 22일 완성된다. 한명숙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대검 감찰부가 증인 김 씨와 수사팀 검사를 기소하려면 이 시한 안에 해야한다는 뜻이다.
뉴스타파는 대검 감찰부가 죄수H를 조사한 문답서와 증인 김 씨의 검찰 조사 녹취록을 입수했다.
뉴스타파, 대검 감찰부 ‘죄수H 문답서’ 입수
지난해 뉴스타파의 <죄수와 검사Ⅱ한명숙> 보도 이후, 지난해 6월 대검 한동수 감찰부장은 감찰에 착수했다. 검사가 증인들에게 위증을 교사했는지 여부가 감찰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건을 중앙지검에 넘겨 감찰 방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2010년 7월 한명숙 전 총리는 동향의 사업가 한만호로부터 9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에서 한명숙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던 한만호는 2010년 12월 법정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고 진술을 뒤집었다. 이후 검찰은 한만호의 동료 재소자였던 김 모 씨와 최 모 씨를 법정에 세워 한만호가 법정에서 한 진술 번복이 거짓이라는 증언을 끌어냈다. 뉴스타파는 지난해 한만호의 진술 번복을 탄핵하기 위해 김 씨, 최 씨와 함께 증언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죄수H를 찾아내 당시 수사팀의 의증 교사 의혹을 폭로했다.
대검 감찰부는 최근 검찰의 모해위증교사(남을 해할 목적으로 위증을 교사한 행위) 의혹을 폭로한 죄수H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했다. 뉴스타파는 죄수H의 변호인을 통해 감찰부의 ‘조사 문답서’를 입수했다.
검찰 측 증인 김OO, 출소 후에도 수시로 검사실 출입
문답서에는 2011년 당시 한명숙 사건 수사팀이었던 엄희준 검사실의 조사 일정이 첨부돼 있다. 한만호는 2010년 12월 20일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다. 검찰측 증인인 동료 재소자 김 씨는 2011년 2월 21일, 3월 23일 증언했고, 또다른 동료 재소자 최 씨의 증언은 3월 7일이었다. 감찰부가 확인한 조사 일정은 1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이다. 한만호의 진술 번복과 김 씨의 법정 증언 사이 김 씨가 검찰에서 몇 번이나 조사를 받았는지가 확인된 것이다. 뉴스타파는 지난해 보도 당시 죄수H와 최 씨의 검사실 출정기록은 확보해 보도했지만, 김 씨는 2010년 출소한 상태여서 재소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감찰부가 작성한 조사 일정에는 김 씨의 공식적인 검사실 출입 기록이 포함돼 있다.
증인 김 씨, 최 씨의 법정 증언 일정. 김 씨의 검사실 출입 기록은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뉴스타팍 확보한 대검 감찰부의 문답서에를 통해 김 씨의 검사실 출입 기록이 확인됐다.
2011년 1월 27일부터 김 씨의 2차 법정 증언이 있었던 3월 23일까지 죄수H는 21번 검사실에 불려갔다. 최 씨는 18번이었다. 뉴스타파가 확보한 대검 감찰부의 문답서에 따르면 김 씨는 2010년 9월 출소했던 상태였지만 이 시기 검사실을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 10번이나 방문했다. 김 씨는 지난해 KBS와의 인터뷰에서 “출소 이후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검찰 직원을 따라 건물(중앙지검) 뒷문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따라서 실제 검사실 방문 횟수는 이보다 많을 가능성이 높다.
최 씨의 경우 본인의 법정 증언이 끝나고 나서도 김 씨의 증언이 끝날 때까지 엄희준 검사실에 3번을 출정한 사실이 확인됐다. 김 씨와 최 씨, 죄수H가 같은 날 조사를 받은 것도 8번에 이른다. 밤 11시를 넘어서까지 조사를 받은 날이 적어도 7번에 이른다. 피의자가 아니라 단순 참고인, 목격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강도 높게 조사한 이유는 뭘까.
검찰은 증인 김 씨와 최 씨, 그리고 죄수H를 증언을 앞두고 수십 차례 검사실에 부른다.
“엄희준 검사실 관계자, 증인신문 연습 사실 인정”
감찰부 문답서에는 “엄희준 검사실 관계자들이나 김 씨는 증인신문 연습 사실은 인정(중앙지검 기록 2314면)”했다고 적혀있다. 통상적인 조사를 넘어서 검사와 증인이 법정 증언을 연습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한명숙 수사팀은 뉴스타파 질의에 대해 “죄수H의 주장은 명백한 허위”라고 답했었다. 대검 감찰부의 조사 결과 뉴스타파에 답변한 것과는 달라진 입장이 확인된 것이다. 법정 증언을 앞두고 적어도 김 씨가 10회 이상 검사실에 방문했고, 밤 늦게까지 무언가를 한 객관적 기록이 발견된 이상 완전히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검 감찰부가 죄수H를 조사한 문답서. 대검 감찰부 조사에 따르면 한명숙 수사팀 관계자는 증인과 함께 '증인 신문 연습'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수사팀 관계자들은 대검 감찰부 조사에서 “증언 연습시 답변 내용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고, 간단명료하게 하라거나, 없는 얘기를 더 보태지 말라고 했다(중앙지검 기록 2314면)”고 문답서에 돼 있다. '연습'은 했지만 증언 내용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죄수H는 문답서에서 “수사팀이 '사전 급조한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하라했고, 수사팀이 급조한 내용 외에 다른 얘기를 보태지 말라 한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간단명료하게 보태지 말라고 한 것은 맞지만 ‘수사팀이 급조한 내용에서’라는 단서가 빠졌다는 주장이다. 뉴스타파는 검찰에 이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답변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죄수H의 대리인을 맡고 있는 신장식 변호사는 “(김 씨가) 10차례 (검사실에) 나가서 도대체 뭘 했는지 알 수 없다”며, 증인을 지나치게 여러 번 불러 증언을 연습하는 행위는 “공개재판주의와 적법절차를 위반하고,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청에서 사라진 증인 김 씨 검찰 조사 영상
죄수H는 대검 감찰부 조사에서 “검사실에서 충분한 훈련을 받은 뒤 진술을 영상 녹화했고, 관련 서류에 서명과 날인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나 최 씨, 죄수H가 수십 차례 불려간 검사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는 영상 등 객관적인 자료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조사 영상’의 존재 여부는 2011년 한명숙 사건 재판 당시에도 쟁점이었다. 당시 변호인단이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검사는 의견서에서는 “(김OO, 최OO 증인 관련) 당사자를 면담하고 있을 뿐 조서나 진술서, 영상녹화 등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기재하면서도 2011.3.7. 공판 기일 당일에는 “증인 김OO에 대하여는 영상녹화를 하였고, 증인 최OO이나 공소외 한OO(죄수H) 등에 대하여는 하지 않았다”고 구두로 진술하였습니다.--2011년 한명숙 변호인단 의견서 중
증인들에 대한 사전 조사(혹은 연습)를 녹화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검찰측 말이 오락가락 바뀌었다는 지적이었다. 문답서에 따르면 대검 감찰부도 “2011년 한명숙 수사팀이었던 엄희준 검사는 ‘영상녹화CD가 있다는 것은 변호인의 추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변호인의 자료 제출) 요청을 불허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변호인은 결국 재판부의 증거개시결정으로 영상녹화CD를 확보했다. 다만 검찰이 재판에 제출한 영상은 2010년 12월 27일 증인 김 씨를 조사한 것 단 한 개뿐이었다.
2010년 한명숙 수사팀은 증인 김 씨를 법정 증언 두 달 전에 검사실에 불러 조사했다. 검찰은 이 과정을 녹화했다. 위 사진은 뉴스타파가 취재를 토대로 재구성한 화면이다
대검 감찰부는 지난해 한명숙 수사팀에게 이 영상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수사팀은 이 영상 자체를 보관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검찰보존사무규칙에 따르면 유기징역이나 금고 형 이상이 확정된 사건 기록은 영구 혹은 준영구 보관하도록 돼 있다. 준영구는 최소 70년을 의미한다.
내부에서 영상을 구하지 못한 대검 감찰부는 결국 과거 한명숙 변호인단에 “검찰에 있어야 하는 기록인데 없다, 영상이 혹시 있으면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인단은 “검찰에 영상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렵게 자료를 찾아 제출했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이 사건 기록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았다면 영상은 사라질 뻔했다. 뉴스타파는 검찰에 영상 자료가 보관돼 있는지 질의했지만 역시 “답변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검사실 조사와 법정 증언, 달라진 진술
변호인단은 감찰부에 영상을 제공했지만 법적인 문제로 언론에는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뉴스타파는 다른 경로로 녹취록을 확보했다. 2010년 12월 27일 서울중앙지검 한명숙 수사팀 엄희준 검사실에서 검사가 김 씨를 30분 정도 조사한 내용이다. 김 씨의 1차 법정 증언은 2011년 2월 21일, 법정 증언 두 달 전이었다.
김 씨의 검사실 조사 녹취록과 두 달 뒤 법정 증언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검사실 조사에서는 엉성하고 정확하지 않았던 진술이 두 달 뒤 법정에서는 세부적이고 정확해진 것이다.
우선 한만호와의 첫 만남에 대한 진술부터 달랐다. 김 씨는 검사실 조사에서 한만호를 검찰청 구치감에서 만났는지 구치소 접견장에서 만났는지 기억을 못했다. 그러나 법정 증언에서는 날짜와 장소, 구체적인 대화 내용까지 정확하게 진술했다.
물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정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사실 관계가 배치되는 진술도 발견된다.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에 대해, 김 씨는 검사실 조사에서는 '처음 만난 날 뇌물을 준 것 때문에 조사를 받는 것 같다고 말하고, 2~3일 뒤 한명숙 국무총리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반면 법정에서는 '처음 만난 날 저녁에 한명숙 총리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뉴스타파와 전화 통화에서는 '감옥에서 한만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고, 지난해 KBS와 인터뷰에서는 '한만호가 직접 돈을 준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만호는 법정 증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뇌물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고 반박한 바 있다.
김 씨의 4가지 진술. 검사실 조사, 법정 증언, 뉴스타파 인터뷰, KBS 인터뷰. 모두 사실 관계가 다 다르다.
증인 김 씨는 어디서 사실 관계를 ‘학습’했을까
증인 김 씨의 검사실 진술과 법정 증언이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어떻게 돈을 전달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김 씨는 검사실 조사에서 돈을 전달한 순서는 모른다는 전제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달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달 뒤 법정에서는 돈을 준 순서와 일시까지 정확하게 기억했고, 아파트 '주차장'은 아파트 '근처'로 바뀌었다. 김 씨의 법정 증언은 검찰의 수사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죄수H는 김 씨와 최 씨, 그리고 본인이 법정 증언을 앞두고 검사실에서 혹독한 증언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최 씨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컴퓨터에 써주면 그걸 그대로 베끼고, 검찰이 작성해 놓은 대로 연습을 했다”고 주장했다. 감찰부 조사에 따르면 김 씨와 최 씨, 죄수H는 법정 증언을 전후로 모두 8일 동안 같은 날 검사실 조사를 받았다. 죄수 H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두 달 사이 김 씨의 증언이 정교해진 것은 이같은 학습의 결과였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뉴스타파는 김 씨에게 사실 확인을 위해 여러차례 전화했지만 김 씨는 뉴스타파라는 말을 듣자마자 끊었다. 엄희준 검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카카오톡은 읽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검찰에도 질의를 보냈지만 “답변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김 씨의 모해위증 의혹, 그리고 검찰의 모해위증교사 의혹의 최종적인 공소시효는 3월 22일이다. 증인 김 씨와 당시 수사팀으로부터 '증언 연습을 했다'는 증언을 이끌어낸 대검 감찰부가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 김 씨와 당시 수사팀을 기소할 수 있을까./ 김경래 뉴스타파
2025년까지 주택 83만채 공급, 역대최대
서울만 32만채 공급
공공기관이 직접 시행
과다이익은 기부채납
정부, 공공주도 대도시 주택공급정책 발표 |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별관 강당에서 열린 ‘공공주도 3080+ 대도시권 주택공급 획기적 확대방안 브리핑’에서 공공주도 대도시 주택공급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주택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 2025년까지 83만6000호 규모의 주택 공급 확대 방안을 확정했다. 서울에서만 32만호로 전국에 분당신도시(10만호) 8개 이상이 공급되는 셈이다. 신속한 개발과 개발이익환수를 위해 공공기관이 직접 시행에 나선다. 역세권·준공업지역·저층주거지에 대해선 정부가 직접 지구지정을 하고 공공기관이 사업을 이끄는 공공주택 복합사업이 시행된다.
정부는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공공주도 3080+, 대도시권 주택공급 획기적 확대방안’을 발표했다. 현 정부의 25번째 부동산 대책이면서 공급 대책 중 현 정부 최대 규모다.
이번 방안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 공공기관이 직접 시행하는 개발 방식이 도입된 것이 핵심이다.
재개발과 재건축 등 정비사업에 공공기관이 직접 시행하는 유형이 신설됐고, 역세권과 준공업지역, 저층주거지 개발 사업도 공공주택특별법을 활용해 공공이 직접 사업을 맡아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도심공공주택복합사업’ 이 추진된다. 신속한 개발을 위해 법정상한을 초과하는 용적률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특별건축지역으로 지정돼 일조권이나 높이제한 등 각종 도시규제가 완화된다.
역세권에선 700%, 준공업지역에선 500%까지 용적률이 올라간다. 기존 주민에게는 기존 자체 사업 대비 10~30%p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 보장된 수익률을 넘기는 개발이익은 환수해 생활 SOC 확충, 세입자 지원,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임대·공공자가주택 등에 활용한다.
사업을 통해 확보되는 주택 공급물량의 70~80%는 공공분양으로 공급하고 환매조건부·토지임대부·지분적립형 등 공공자가주택, 공공임대는 20~30% 범위에서 공급된다.
용적률 인센티브를 통해 받는 기부채납 주택을 공공임대 위주로 쓰지 않고 다양한 유형의 주택으로 활용해 기존 주민의 만족도를 높이고 주택 수요자에게도 선택권을 넓혀준다는 취지다.
수도권 등 신규 택지의 구체적인 입지는 추후 발표된다. 기존 주거복지로드맵과 3기 신도시 등을 통해 추진 중인 수도권 127만호 공급계획을 합하면 이번 정부에서 수도권에 공급되는 주택은 200만호에 육박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는 그동안 주택공급에 대한 우려 심리를 완전 불식하고 주택시장 안정을 확실하게 도모하기 위해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특단의 공급방안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 오늘의 대책을 마련하여 발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청약제도를 개선해 신혼부부와 생애최초자뿐 아니라 일반 30~40대 무주택 세대의 내집마련 기회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이날 오전 당정협의를 열고 상반기 중 이번 주택 공급대책을 위한 입법절차를 마무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성홍식 김병국 박준규 기자 king@naeil.com
역대급 공급, 공급불안 해소될까
공공 정비 도입, 13→5년으로 단축 … 거래가격.량 상승시 사업지역 제외
문재인정부의 도심 주택공급 방안이 발표됐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취임 후 공언했던 주택공급 확대 방안이다.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역대급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공공이 직접시행하는 정비사업을 도입해 사업기간을 기존 13년에서 5년으로 획기적으로 단축한다.
이와 함께 거래가격.거래량 상승시 대상지역에서 제외하는 등 강력한 투기방지대책도 시행키로 했다.2.4 공급대책의 주요내용은 2025년까지 서울에 32만가구, 전국에 85만가구를 공급하는 것이다. 기존 주거복지로드맵 및 3기 신도시 등을 통해 추진중인 수도권 127만가구 공급과 합하면 약 200만가구를 넘는 역대급 물량공급이다.
구체적으로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소규모 재개발 30만6000가구 △ 공공직접시행 정비사업 13만6000가구 △도시재생(주거재생혁신지구) 사업방식 변경 약 3만가구 △공공택지 신규지정 약 26만3000가구 △단기 주택확충 약 10만1000가구 등이다.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은 3년 한시적으로 도입한다. 역세권, 준공업지, 저층주거지 등을 신속히 정비하는 내용이다. 토지주, 민간기업, 지자체 등이 저개발된 도심 우수 주거지를 발굴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주택공사(SH) 등에 주택.거점 복합조성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요청이 들어오면 국토부 등은 예정지구로 지정, 신속하게 추진한다. 예정지구 지정 1년내에 토지주 등 2/3가 동의하면 사업이 확정된다. 용적률 상향, 기부채납 제한 등을 통해 사업성을 대폭 높일 방침이다.
토지소유자에게 기존 자체사업 추진방식보다 높은 수익률과 아파트.상가 ‘우선공급’을 보장할 예정이다. 정부는 공공이 직접 시행하는 정비사업을 도입한다. 주민동의를 거쳐 LH, SH 공사 등이 재개발.재건축을 직접시행하고, 사업.분양계획 등을 주도한다.
조합원 과반수가 요청하면 된다. 조합이 없는 경우 토지 등 소유자 과반수 찬성으로 신청한다. 조합총회 및 관리처분인가 절차를 생략하고, 통합심의한다. 기존 15년 이상 걸리던 사업기간이 5년 이내로 대폭 단축된다. 특히 △1단계 종상향 또는 법적상한 용적률 120% 상향 △재건축 조합원 2년 거주 의무 미적용 △재건축초과이익부담금 미부과 등의 혜택을 제공할 계획이다.
도시재생 사업 방식도 개선한다. 공공이 쇠퇴지역에 지구단위 주택정비를 추진하는 ‘주거재생혁신지구’를 신설한다. 주민 2/3 동의를 통한 수용방식을 적용한다. 입지규제 최소구역 의제, 기반시설 설치 국비지원 등도 추진한다.
연간 120곳 이내 사업지를 선정할 계획이다.
정부는 공공택지도 신규지정키로 했다. 전국 15~20곳을 지정할 계획이다. 수도권은 서울 인근, 서울 접근성이 우수한 지역을 중심으로 선정한다. 지방권역은 광역시를 중심으로 지정한다. 구체적인 입지와 물량은 별도로 발표할 계획이다.
단기 주택확충에도 적극 나선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전세대책 11만4000가구 공급계획의 일환이다. 공실 호텔.오피스를 청년주택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을 활성화하기 위해 준주택 관련 제도를 개선할 방침이다. 공사비 기금지원, 세제혜택도 강화한다.
공급확대와 함께 투기방지 대책을 시행한다. 투기수요 차단을 위해 우선공급권은 1세대 1주택 공급을 원칙으로 한다. 또 대책발표일 이후 사업구역내에서는 기존부동산 신규매입 계약을 체결하면 우선공급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책발표 후 지분변동, 다세대 신축 등을 통해 추가지분을 확보해도 우선공급원을 주지 않는다. 또 우선공급권은 소유권이전등기시까지 전매제한이 설정된다.
이와함께 사업예정지 지역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한다. 실거주, 실경영 목적이 아닌 부동산 매입은 제한한다. 특히 최근 거래가격 또는 거래량이 예전보다 10~20% 상승시 대상지역에서 제외할 계획이다.
김흥진 국토부 주택토지실장은 “주택시장 조기안정을 위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며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엄중한 마음가짐으로 이번 대책을 속도감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병국 기자 bgkim@naeil.com
2.4 부동산대책]원주민 쫓겨나는 ‘제2 뉴타운’ 우려도
정부는 4일 발표한 공공 주도의 83만여 가구 주택공급 대책을 통해 개발이익을 공유하고 투기 수요를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울에 32만 가구가 넘는 대규모 개발사업이 펼쳐지면 집값 상승이라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신속 공급’에 방점이 찍히면서 원주민 및 세입자들이 주거지를 떠나야 할 가능성도 있다. 이번 대책이 자칫 ‘제2의 뉴타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002년 추진된 뉴타운 사업은 단기간 내 26개에 이르는 지구를 지정하며 집값이 뜀박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발이익을 노린 토지 소유주 등이 사업에 뛰어들면서다. 정부는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개발이익을 생활 SOC 확충 등으로 공유하고 투기수요 차단 대책을 포함했다. 그러나 공공 정비사업이 시장에서 ‘호재’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도심 내 30만 가구 공급은 과거와 비슷한 문제를 되풀이 할 위험이 있다.
실제 정부가 지난달 서울 지역 공공재개발 사업 후보지 8곳을 발표한 이후에 빌라(연립·다세대 주택) 가격 상승률이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1월 전국주택가격동향 조사를 보면 서울 지역 빌라 매매값은 지난달보다 0.41% 올라 아파트(0.4%) 보다 상승률이 높았다. 특히 구도심과 저층주거지 다수가 위치한 한강 이북 지역에서 연립·단독주택 가격 상승이 두드러졌다. 정부가 공공재개발·재건축 중심으로 한 ‘8·4 공급대책’ 발표 직전인 지난해 7월 대비 지난달 연립주택 매매가격 변동률을 살펴보면, 강북권(1.43%)·동북권(1.61%)·서북권(1.38%)이 강남권(1.28%), 서남권(0.94%) 등 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올랐다.
무엇보다 공급대책이 ‘개발 호재’로 받아 들여지는 시장에선 정부 의도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올해 들어 정부가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 “특단의 공급”을 예고하는 동안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아파트값은 ‘역대 최고’를 갈아치우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한 주택업계 관계자는 “공공이 주도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개발 가능성과 용이성이 높아지는 것”이라며 “한번 풀린 용적률 완화 등은 시장에선 규제완화 신호로 여겨져 결국 개발사업 인근 지역 집값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개발사업으로 내몰리게 될 세입자 등 주거불안도 문제다. 정부는 순환정비 형식으로 개발에 나서고, 세입자를 대상으로 인근 매입임대나 수도권 공공임대 주택을 임시 거주지로 제공하겠다는 방침이다. 건설 후 일부 물량은 재정착 공공임대로 활용하겠다고 했으나,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등에서 70~80%는 공공분양으로 공급되고, 나머지 공공임대 물량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뉴타운 사업에서도 용적률 상향으로 늘어난 주택의 50%를 임대주택으로 공급하도록 권고했으나 세입자를 포함한 원주민 재정착률은 17.1%에 불과해 큰 문제로 꼽힌 바 있다. 최근 전세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개발로 인한 이주 수요가 늘어나면, 또 다시 집값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공공이 주도하는 개발 사업의 실효성 여부도 관건이다. 정부는 주민 동의율을 3분의 2 수준으로 낮추고 사업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하겠다고 밝혔지만, 이것만으로 사업 성사를 보장하긴 어렵다. 오히려 빠른 공급확대를 떠나 개발 지역의 주거환경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해당 주민들 선호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재홍 변호사(민변 환경보건위원회 위원장)는 “반대하는 주민의 경우 토지 수용 형태로 사업 용이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라며 “이때 수용보상금 규모 등 공익정 담보장치는 얼마나 마련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동의율을 낮춘다는 건 해당 지역에서 개발하고 싶은 사람들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간 간극이 더 벌어지는 것”이라며 “부작용이 없도록 하려면 건물과 주거환경의 열악한 정도 등을 바탕으로 정말 꼭 필요한 개발 사업인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투기와 투자 구별 않되 불로소득은 환수하자
한국의 부동산 정책은 시장 원리와 주거권을 혼합한 모델을 지향한다. 시장에 맡기되 탄력적인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실수요와 투기수요를 구별하지 말고 다양한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시사IN 이명익 서울 송파구 잠실새내역 인근 공동주택 밀집 지역.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논란이 크다.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 및 저금리, 그리고 다른 투자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부동산이 최고의 투자 대안으로 부각된 결과다.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정책은 단순히 주거뿐 아니라 교통, 교육, 자산 증식 등 여러 영역에서 전 국민의 관심사다. 정부 정책의 목표는 집값 안정, 부동산 투기 근절, 서민 주거복지 확대 등이었다. 이런 선한 의도들을 가진 정책의 결과가 왜 목표와 반대로 간 것일까?
주택은 토지라는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므로 공급에 제한이 있다. 시장만능주의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거래되는 주택을 시장을 무시한 규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잘못되었다. 부동산 정책은 ‘시장’을 인정하고 시장 참여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선 ‘투기와 투자를 구별해서 투기는 근절해야 한다’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이런 인식을 초래한 대표적 지표로 주택보급률(주택수/가구수)이 있다.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은 104%(2018년)로 가구수보다 주택수가 많다. 반면 자가보유율(주택을 보유한 가구의 비율)은 61%, 자가점유율(자기 주택에서 사는 비율)은 57%(2015년) 수준에 불과하다. 이 통계수치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한국의 주택 공급은 부족하지 않으며, 주택가격 상승은 다주택자의 투기로 벌어지는 것으로 보게 된다. 결국 다주택자를 강력히 규제해서 주택을 매각하도록 유도하면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와 투자를 엄밀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1가구 1주택은 좋은 것’ ‘다주택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 아래 정책을 마련하는 기조를 버려야 한다.
일부 시민들이 다주택자가 된 이유는 다양하다. “집은 사는(live) 곳이지 사는(buy) 것이 아니다”라며 시민들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집은 그 두 가지 요소(live와 buy)를 모두 포함하는 자원이다. 경제개발 초기부터 부동산 가격은 1997년 외환위기 같은 일시적 시기를 제외하곤 꾸준히 상승해왔다.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다주택자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는지’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실수요와 투기수요의 구별, 이 구별에 기반한 투기수요의 억제라는 정책 틀을 바꿔야 한다. 실수요자(1주택자)도 자기가 사는 주택가격이 올라가길 바란다. 개인마다 다양한 목적으로 더 좋은 지역에 더 좋은 주택을 원한다. 모두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시민들의 이주 수요에 대응하거나 낡은 집의 멸실을 대체할 주택 공급도 필요하다. 더욱이 인구 감소 추세와 달리 1인 가구의 급증으로 가구수는 증가해왔다. 집을 살 여력이 없거나 혹은 주택 매입 전 주거 징검다리로 임차를 하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 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정책은 국민이 원하는 지역에 주택 공급이 가능하도록 유인체계를 만들고 필요한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쪽으로 맞춰야 한다. 토지라는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는 주거비용이 어느 정도일 때 적정한지 고려하면서 주택 거래와 신규 공급이 적절하게 이뤄질 수 있는 세제와 금융제도를 만드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개입할 공공주택 시장과 그렇지 않은 민간 시장의 역할을 구별하고 각각에 걸맞은 정책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한국 부동산 정책의 목표는 헌법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제35조 제3항은 “국가는 주택 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국민의 주거권을 국가가 제공해야 할 의무로 보는 것이다. 제122조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 토지가 사유재산권의 대상이지만 공공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 재산권 행사에서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는 토지공개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토지공개념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소유권 행사를 적법하게 제한하더라도 그 토지를 이용하려는 개인의 이윤추구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수준으로 본다.
ⓒ연합뉴스 1월18일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부동산 관련 기관 관계자들이 부동산 시장 관련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헌법의 주거권과 토지공개념 조항들을 고려하면, 한국의 부동산 정책은 ‘시장 지향’과 ‘국민들의 주거권을 충족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국가의 복지서비스 제공’을 혼합한 모델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주택시장을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의 원리에 맡기되 ‘국가의 주택시장 개입’ ‘공공주택의 공급’ ‘주택보조금 지급’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 세제’ 등의 정책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정책 수단들 역시 획일적 방식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적 상황과 재정 여력에 따라 탄력적으로 구사해야 한다.
물론 일정 가액 이상의 주택에 대해선 보유세를 강화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란 어떤 물건을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처분하는 권한이다. 토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일정 기간 잘 사용하고 보전해서 후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국토는 그냥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 토지의 가치는 도로 등 인프라 건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지하철, 교량,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의 유무에 따라 토지의 가치가 다르다. 토지 가치가 오르기 위한 비용은 누가 부담했을까? 국가가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며,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조달된다. 따라서 토지의 가치 상승분이 오로지 그 보유자에게만 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정부의 부동산 시장 개입 수단은 크게 세금제도(세제), 금융, 공공주택 공급으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에 대해 각각 살펴보자.
거래비용 낮추고 보유비용 높여야
세제엔 보유세와 거래세가 있다. 보유세는 크게 보편적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일정 가액 이상 소유자에게 부과하는 부유세 성격의 세금·종부세)로 나뉜다. 보유세는 징벌적 세금이 아니다. 한정된 자원인 토지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는 정당한 대가다.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보유세를 ‘과세 왜곡이 적고 불로소득 환수에 효과적’인 바람직한 조세로 평가한다. 그러나 보유세엔 수많은 부동산 소유자들이 관련된 까닭에 조세 저항이 크다. 이에 따라 한국의 보유세는 각종 감면뿐 아니라 시가 반영률이 낮은 과세표준을 적용받아왔다. 반면 거래세는 취득세와 양도세로 구성된다. 한국의 부동산은 다른 나라에 비해 거래세율이 높은 편이다. 국제 비교로 볼 때 한국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동산의 자산가액이 큰 데다 거래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투기 방지 목적으로 양도세율도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부동산 세제는 다른 선진국과 반대로 ‘낮은 보유세, 높은 거래세’의 기조를 띠게 되었다.
한국의 보유세는 GDP 대비 0.8%, 전체 조세수입 비중의 4.1%다(2017년 기준). OECD 평균인 GDP 대비 1.1%보다 낮고, 조세수입 비중 면에서는 OECD의 절반 수준이다. 특히 부동산 가액 대비 보유세 비율인 실효세율은 0.16%로, OECD 평균 0.38%의 약 40%밖에 안 된다. 반면 거래세의 경우 GDP 대비 1.6%, 전체 조세수입 비중의 7.9%다. OECD 평균인 GDP 대비 0.4%보다 4배 높은 수준으로, 조세수입 비중도 OECD보다 4배 정도 높다. 거래비용은 낮추고 보유비용을 높이는 방향으로 세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보유비용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공시지가의 시가 반영률을 현실화해야 한다. 정부는 공시가격을 시가의 90%까지 올리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수립하여 공동주택은 5~10년, 단독주택은 7~15년에 걸쳐 시행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다만 보유세를 강화하면 거래세는 다소 완화해야 조세 저항을 줄이면서 부동산 세제 개편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다. 보유세 강화와 거래세 완화는 하나의 패키지가 되어야 한다. 특히 거래 동결 효과를 유발하는 양도소득세 중과 정책은 완화할 필요가 있다. 시장이 안정되면 다주택자가 시장에 보유 주택을 내놓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이다. 취득세까지 포함한 모든 부동산세를 강화하는 방안은 거래 위축 및 조세 저항으로 이어져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또한 종부세에 대해선 과세이연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은퇴 이후 현금이 들어오지 않는 만 60세 이상 1주택 실거주자가 앞으로 증가하면서 종부세가 조세 저항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주택을 양도하거나 상속, 증여할 때까지 과세를 미뤄 납부할 수 있는 과세이연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종부세 이연 납부에 관한 법률(종합부동산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통화량, 이자율과 함께 부동산 관련 금융제도는 수요자의 구매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동산 시장에서 중요한 단기 조절 정책 수단이다. 현재 지역별, 수요자별로 세밀하게 나누어 각각의 대출한도를 설정하는 매우 복잡한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과열지구를 ‘핀셋’처럼 콕 집어 대출을 억제하려고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핀셋 규제’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좋다. 거시경제 환경에 따른 통화량, 이자율 조정과 금융기관 건전성 및 부동산 자금흐름 관리 차원에서 LTV, DTI, DSR 등 대출한도비율 조절만 하도록 금융제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청년, 신혼부부 등 ‘생애 최초로 주택을 구입하는’ 계층에 대해서는 취득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취득세와 등록세 감면과 함께 금융지원제도(장기 모기지)를 만들어야 한다.
한편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전세’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 전세는, 은행제도가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 수요가 자금 공급을 훨씬 초과하던 1960~ 1970년대에 발생한 일종의 민간 사금융이다. 전세에서 임대인은 주택을 빌려준 대가로 임차인으로부터 무이자 대출을 받는다. 임차인은 전세보증금의 이자만큼 임차료를 내는 셈인데 월세보다는 낫기 때문에 전세를 선호한다.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활용해서 다른 주택에 투자하는 경우를 ‘갭투자’라고 부른다. 통상적으로 집값 대비 전세보증금 비율은 평균 70% 정도다. 이 비율이 높을수록 임대인은 적은 밑천으로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다. 특히 집값 상승이 기대되는 경우 갭투자가 성행한다. 이는 집값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은행대출을 규제하는 정책수단들(LTV 등)을 무력화한다. 반면 집값이 하락하면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므로 전세금 비율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그동안 민간 임대사업자에게 종부세와 양도세 혜택을 부여한 제도가 갭투자와 결합하면서 다주택자들을 중심으로 주택에 대한 가수요를 만들었다. 이는 잘못된 정책으로 늦게나마 폐지한 것은 다행이다. 다만 세제 혜택 폐지가 기존 등록사업자들에게 소급 적용되지는 않는다. 기존 사업자들은 의무 임대기간의 절반만 채우면 세제 혜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보유 주택이 매물로 나오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근 매년 40만~60만 호 규모의 주택이 공급되고 있지만 무주택자의 구입 비율은 20% 수준에 불과하다. 자가보유율이 크게 개선되지도 못했다. 이에 따라 주택 공급이 투기세력을 도와줄 뿐이라는 회의론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 낮다. 서울 및 근교 주택가격 급등으로 거주자들이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도시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고소득자뿐 아니라 중·저소득자도 같이 공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주택을 제공해야 한다. 즉 분양주택뿐 아니라 임대주택,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등 거주자의 재무 능력에 따라 다양한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
공공주택 공급의 목표를 설정하고 ‘게토(ghetto)화’를 방지하는 정책도 시급하다. 현재 공공임대주택 비중은 약 7.4%로 OECD 평균 약 20%보다 크게 낮다. 한국의 국공유지 비중이 원래 낮은 데다 공공택지개발분 역시 민간에 분양해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택의 수요·공급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겨져왔다. 자가 소유가 바람직한 거주 형태로 여겨졌다. 공공주택은 저소득층 등 시장 참여가 어려운 계층에 제한해서 엄격한 공급 기준에 따라 배분되었다. 시장 소외계층에만 공급하는 공공임대주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 부실 등 슬럼화 문제가 야기되어 기피 주거 형태로 전락하곤 했다.
앞으로는 중산층도 살고 싶은 공공주택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도심 역세권에 중형 규모의 공공주택이 들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공공개발에 필요한 역세권의 용적률을 상향 조정하고 장기 공공임대주택의 공급 방안을 새롭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1월19일, 역세권 복합용도개발 지구단위계획으로 주거지역 용적률을 700%까지 완화하고, 용적률 완화로 인한 토지가치 상승분의 일부(조례로 정하는 비율)를 공공임대주택으로 기부채납하도록 하는 국토계획법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동안은 주로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공공주택 공급을 주도해왔다. 앞으로 LH는 더욱 다양한 사업 시행 방안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LH가 제공한 토지에 민간이 주택을 건설하는 민관 공동개발사업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업에서 공급하는 부동산은 공공영구임대주택으로 공급하거나 혹은 (토지의 소유권은 공공부문에 둔 채) 주택만 분양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연합뉴스 2018년 6월28일 서울 중구에 오픈한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위스테이’ 견본주택.
개발이익 공유하는 장치
최근 논의 중인 도심·역세권 개발을 통한 공급 방안에는 용적률 상한 확대, 용도변경 등 규제완화가 수반된다. 이에 따른 개발이익은 기부채납으로 공공이 환수해서 공공영구임대주택 등에 활용하는 방안이 같이 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본이득이 오직 개발업체와 분양을 받는 사람에게 귀속된다. 로또 당첨 사태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개발이익의 어느 정도까지 공공이 환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토지임대부 형태의 주택(공공기관이 토지를 보유해서 분양가를 크게 낮춘 집) 공급도 확대해야 한다. 매입자는 시중 가격의 반값에 이런 주택을 매입해서 주거 사다리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공공주택 비중을 현행 7.4%에서 최소한 20% 수준까지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 집값 안정, 개발이익 공유는 물론 저소득층의 주거복지 실현이 가능하다.
시세에 비해 낮은 분양가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 상승에 따른 높은 자본이득 기대로 아파트 선분양은 엄청난 청약률을 보이고 있다. 당첨자에게만 높은 개발이익을 안겨주는 현재의 분양제도 아래 공공택지개발을 그대로 민간에 분양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주택 소유 욕구가 높으므로 분양 공급도 필요하지만 일정한 제한조건을 가하거나 양질의 공공영구임대아파트 공급을 더 높여 개발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다만 공공주택 재고 비중을 높이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조세수입 증대가 필요한 정부 지출에 의존하지 않고도 필요 재원을 조달할 방법은 있다. 공공주택은 국민의 주거복지 실현을 통해 인구 감소를 예방하여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다. 마침 기존 주택도시기금(주거복지를 위해 보증업무를 수행하는 공기업) 외에 국민연금공단, 보험, 은행, 펀드 등 각종 금융기관들이 사회책임투자(ESG)를 본격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공공주택 건설이 이런 사회책임투자의 적절한 대상으로 부상하면 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그 매개는 공공주택사업 시행자(LH, SH 등 각 지방자치단체 공사)들이 발행하는 채권이다. 이 채권은 고정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므로, 지금 같은 초저금리 시대에는 충분히 매력 있는 투자 수단으로 활성화가 기대된다./시사인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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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벨트’는 무섭도록 단단했다
〈시사IN〉이 서울·경기 주요 지역구의 개표 결과를 투표소 단위로 분석해본 결과, 종부세·재건축 문제를 가진 고가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미래통합당을 지지했다.
4·15 총선은 거대 여당의 탄생과 보수 야당의 붕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도권은 특히 여당의 압승이었다. 수도권 전체 지역구 122석 가운데 미래통합당은 겨우 16석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서는 미래통합당이 의석을 확보한 수도권 지역구를 한데 묶어 ‘종부세 벨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종합부동산세 부과 대상(1주택자인 경우 공시가 9억원 이상)인 고가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서초·송파·용산, 경기도 성남시 분당 지역에서 그나마 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의 큰 승리로 지나간 위기가 쉬이 가려진다. 여당 입장에서는 ‘부자 동네’를 일부 잃었지만, 종부세를 낼 만큼 고가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은 일부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세부 개표 통계를 들여다보면 이번 총선에서 부동산 이슈는 결코 가볍게 작동하지 않았다. 미래통합당이 승리한 지역구는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이 의석을 차지한 지역구에서도 ‘조직적인 불만 표’가 드러난다. 이 불만은 다가올 대선에서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시사IN〉은 부동산 이슈가 표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수도권 주요 지역구 개표 결과를 투표소 단위로 분석해보았다. 부동산 이슈로 여야가 가장 선명하게 맞부딪친 지역구는 서울 송파을이다. 2018년 재선거 당시 한 차례 맞붙은 바 있는 더불어민주당 최재성 후보와 미래통합당 배현진 후보가 재대결을 벌였다. 개표 결과 득표율 50.5%를 차지한 배현진 후보가 득표율 46.0%를 기록한 최재성 후보를 꺾었다. 표 차는 6309표였다.
2018년 재선거 당시에는 최재성 후보가 배현진 후보를 이겼다. 2년 만에 그 구도가 뒤집혔다. ‘동네별 득표 구도’를 그린 아래 〈표 1〉을 살펴보자. 배현진 후보는 가락1동에서만 최 후보보다 3151표를 더 확보했다. 지역구 전체 표 차이(6309표)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가락1동은 2018년 선거에서 유권자가 적은 동네였다. 2018년 12월부터 9510세대 규모 헬리오시티 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하면서 이번 선거의 승패를 가른 핵심 지역이 되었다. 부동산 빅데이터 ‘직방시세’에 따르면 이 아파트 단지의 3.3㎡당 매매가는 5300만원을 상회한다. 전용면적 84.98㎡ 아파트 한 채가 17억원 남짓에 거래되고 있다. 주민 다수가 종합부동산세 납부 대상이다.
잠실3동에서도 가락1동과 비슷하게 배현진 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졌다. 이 지역에는 잠실주공5단지와 ‘잠실 대장주 아파트’로 불리는 트리지움 아파트 등이 위치해 있다. 매매가격이 헬리오시티를 넘어서는 동네다. 잠실3동에서 최재성 후보의 득표율은 33.7%에 그친다. 반면 배현진 후보는 이 동네에서만 5875표를 최 후보보다 더 얻었다. 비슷하게 고가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잠실2동, 잠실7동, 문정2동도 배 후보가 앞섰다. 반대로 최 후보는 일반 주거단지가 밀집한 잠실본동, 삼전동, 석촌동에서 승부를 보았다.
주거 형태와 주택 가격에 따른 ‘계급투표’ 대결이 펼쳐졌지만, 결국 투표율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 지역구 전체 투표율은 전국 평균을 상회하는 72% 수준이다. 특히 고가 아파트 지역에서 적극적인 투표 성향이 드러났다. 배현진 후보가 득표율 68.3%를 기록한 잠실7동은 투표율이 80%에 육박했다. 가락1동 77.9%, 잠실2동 76.2%, 잠실3동 75.7% 등 사실상 고가 아파트 단지가 지역구 전체 투표율을 끌어올렸다. 반면 최재성 후보에게 호의적인 잠실본동(63.1%)·삼전동(63.6%)·석촌동(63.1%) 등은 투표율이 전국 평균치(66.2%)에도 미치지 못했다. 고가 아파트 단지 유권자의 적극적인 투표가 집권 여당 현역의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종부세 반발 표심’의 현주소
민주당 후보가 당선한 지역구에서도 국지적으로 ‘종부세 반발 표심’이 드러난다. 강남과 가까운 한강변 지역일수록, 종부세를 내야 하는 고가 아파트 동네일수록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표심이 두드러졌다. 〈표 2-1〉과 〈표 2-2〉를 살펴보자. 두 표는 각각 서울 광진을, 중·성동갑 지역구 선거 결과다. 서울 광진을은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후보와 미래통합당 오세훈 후보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고민정 후보는 이곳에서 득표율 50.4%로 오세훈 후보(득표율 47.8%)에게 신승했다. 2746표 차이였다. 광진구 한강변 동네인 자양2·3·4동과 구의3동에서 오 후보가 더 많은 표를 확보했다. 특히 자양3동이 고 후보에게는 험지였다. 이 지역에서 가장 비싼 더샵스타시티 아파트(자양3동 제7투표소)에서 오 후보는 1632표를 받은 반면 고 후보는 484표밖에 얻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 한 곳에서 1148표나 차이가 났다. 이곳은 전용면적 100.32㎡ 아파트 한 채에 13억원 넘게 거래되고 있다.
인근 한강변 지역인 성동구 일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서울 중·성동갑 지역구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후보는 득표율 54.3%를 기록해 미래통합당 진수희 후보(득표율 40.9%)를 넉넉하게 앞질렀다. 하지만 지역 내 고가 아파트 단지에서만은 ‘득표율 1위 후보’가 뒤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울 내에서도 고가 아파트로 손꼽히는 트리마제 아파트와 강변건영 아파트가 위치한 성수1가1동 제2투표소, 서울숲힐스테이트 아파트 주민이 투표하는 성수2가1동 제1투표소, 롯데캐슬파크 아파트 주민이 투표하는 성수2가3동 제2투표소에서 진 후보는 홍 후보보다 더 많은 표를 확보했다. 지역구 전체 평균을 고려하면 더욱 이례적인 표차다.
종부세만큼 이번 총선에서 논란이 된 부동산 이슈가 하나 더 있다. 노후 아파트 재건축 문제다. 대단지 아파트 재건축은 주민들의 오래된 욕망이다. 그러나 사업 시행은 더디고 어렵다. 안전진단 등 각종 기준을 통과하는 데에도 하세월이다. 현 정부의 기조는 집값 상승을 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수도권 재건축 이슈가 지역 전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불쏘시개가 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재건축 추진에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는 만큼, 재건축을 열망하는 표심은 상대적으로 정부·여당에 호의적이지 않다.
재건축이 두드러진 이슈가 된 지역에서 정부·여당에 대한 반감이 표심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선거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2020년 이후 향후 10년은 ‘1기 신도시’ 재건축 원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에 조성한 1기 신도시 고층 아파트가 건축 연한 30년을 넘기기 시작했다. 30년이 넘은 건축물은 안전진단 등을 실시해 재건축 적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되고 해당 지역 선호도가 높은 동네일수록 재건축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다. 1기 신도시로 가장 대표적인 곳이 경기 분당과 서울 목동이다.
오른쪽 〈표 3-1〉과 〈표 3-2〉는 각각 경기 성남분당갑과 서울 양천갑 지역구 개표 결과를 정리한 표다. 경기 성남분당갑은 ‘판교신도시 대 분당신도시’ 대결 구도가 선명했다. 서현1·2동과 이매1·2동, 야탑2동처럼 1990년대 초에 지은 1기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는 미래통합당 김은혜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뚜렷했다. 반면 판교동, 야탑3동 등지에서는 현역 의원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차지했다. 합산 결과는 득표율 50.0% 대 49.3%로 김은혜 후보의 승리였다. 1128표 차이였다.
김은혜 후보는 부동산 이슈를 선거 전면에 내세웠다. 종부세 완화, 재건축 이슈 외에도 표심을 붙잡기 위해 공개적으로 서현1동 공공주택지구 건설 반대 공약까지 내세웠다. 서현1동 외곽에 24만7631㎡ 규모로 들어서는 이 공공주택지구는 청년과 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들어설 예정이지만, 서현1동 주민들은 교통난과 학교 부족, 범죄 증가 등이 우려된다며 사업 철회를 주장해왔다. 일부 주민들은 임대주택을 ‘난민촌’으로 비하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님비현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후보는 이 사업을 본인이 직접 나서서 백지화하겠다고 공약했고,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호응했다. 김 후보는 서현1동에서만 2704표를 김병관 후보보다 더 얻어 당선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당 일각에서 ‘종부세 개편’ 운운하는 까닭
서울 양천갑 지역구도 재건축 이슈가 불거진 곳이다. 서울 서부권에서 가장 큰 재건축 단지인 목동아파트가 이 지역구에 속해 있다. 현역 의원인 더불어민주당 황희 후보는 득표율 51.8%를 기록해 미래통합당 송한섭 후보(득표율 44.9%)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1만 표 이상 차이가 날 만큼 겉보기에는 무난한 승리로 평가받았다. 이 지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심이 양극화되어 있다. 황희 후보는 재건축 열망이 큰 아파트 단지에서 고전한 반면, 빌라 주택이 밀집해 있는 동네(목2·3동)에서 득표율이 높았다.
〈표 3-2〉를 살펴보자. 황희 후보는 목동 아파트 5·9·14단지에서 득표율 40%를 넘기지 못했다. 특히 고가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목5동에서는 송한섭 후보에게 1743표 차이로 뒤진 것으로 나타난다. 주택 형태에 따라 표심이 갈린 송파을과 비슷한 구도다. 다만 양천갑 지역구는 선거 전부터 이미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었고, 황희 후보도 다른 민주당 후보들과는 상반된 부동산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재건축 핵심 사안인 구조 안정성 평가 기준을 낮추겠다고 공약했고, 1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부과 기준을 개편하겠다고 주장했다. 목1·5동, 신정1·6동 등 아파트 지역에서 표를 잃기는 했지만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국지적인 ‘지역구 선거’에서는 여당 후보도 어쩔 수 없이 부동산 이슈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셈이다.
고가 아파트의 종부세 문제, 오래된 아파트의 재건축 문제는 대다수 수도권 주요 격전지에서 혼재되어 나타난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후보가 3선에 성공한 서울 강동갑(명일동 재건축, 상일동 고가 아파트),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후보가 당선된 경기 성남분당을(정자동 고가 아파트),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후보가 당선된 서울 송파병(문정동, 위례동 고가 아파트) 지역구도 세부 지표에서 부동산 표심이 드러났다.
특히 신규 아파트가 대거 들어선 서울 송파병 위례신도시 일대는 투표소(아파트)별로 흥미로운 분화를 보여준다. 단지별 주택 크기와 가격, 공공주택 여부에 따라 여야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극단적으로 갈렸다. 힐스테이트송파위례(전용면적 101.8㎡ 기준 매매가 14억원 선), 위례2차 아이파크(전용면적 108.13㎡ 기준 매매가 15억원 선)처럼 고가 아파트에서는 남 후보가 미래통합당 김근식 후보에게 뒤졌다. 그러나 옆 단지에 위치한 장기전세 아파트 위례포레샤인에서는 남 후보의 득표율이 60%를 넘겼다. 같은 동네 안에서도 부동산 소유 여부에 따라 표심이 엇갈렸다.
부동산 규제 확대를 통한 집값 안정 정책은 정부·여당의 핵심 공약이다. 종부세와 같은 보유세는 아직 ‘소수’에게 해당되는 이슈다. 수도권 전체 판세에 큰 지장을 끼치는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9억원 이하 아파트의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 종부세 부과 대상이 늘었고, 집값 안정화 정책의 체감 정도는 낮아 정치권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문제가 되었다. 만약 코로나19 국면이 아니었다면 이번 총선에서 부동산 문제는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통합당은 당 차원에서 보유세 완화, 3기 신도시 백지화 등을 주장했을 정도로 부동산 문제를 전면에 부각할 심산이었다. 부동산 가격 안정화 실패라는 책임을 정권심판론과 연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결과적으로 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부동산 규제 강화와 공공임대주택 및 주택 복지 증대라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다수가 얼마나 만족할 만한 정책 효과를 거두어내느냐가 관건이다. 2022년 대선에서 집값 안정화에 대한 체감 정도가 떨어진다면, 여당 내에서도 종부세 감면과 재건축 관련 발언이 힘을 낼 가능성이 생긴다.
이미 여당 내에서도 종부세 개편에 대한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 점차 발언권이 커지고 있는 이낙연 당선자가 지난 4월2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남긴 말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이날 이 당선자는 “1가구 1주택 실소유자가 뾰족한 소득이 없는 경우에는 현실을 감안한 고려가 필요하다. 종부세도 개선 여지가 있다”라며 종부세 부과 대상 완화를 시사했다. 여당 내에서도 주요 격전지 후보들이 종부세 완화 공약을 남겨 관련 논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수도권 접전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일수록 지역 내 부동산 관련 이슈와 민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앞으로 2년 동안 거대 여당이 부동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다음 대선의 ‘큰 그림’이 달라질 수 있다.
시사인 김동인 기자 | 승인 2020.05.05
TV조선 ‘뉴스9’, MBC·SBS 메인뉴스 처음으로 앞섰다
‘미스트롯2’ 등 오후 10시대 인기 예능 ‘텐트폴’ 효과 속 시청자 흡수
“JTBC가 뉴스로 ‘종편’ 벽 허물었다면, TV조선은 트롯으로 허물었다”
TV조선 메인뉴스 ‘뉴스9’의 시청자수가 MBC ‘뉴스데스크’와 SBS ‘8뉴스’를 앞선 지표가 나왔다. TV조선 개국 이래 최초다. KBS 편성전략국이 지난 3일 발행한 월간 코코파이(Korea Content Program Index for Evaluation, KOCO PIE) TV 지표에 따르면 TV조선 ‘뉴스9’는 1월 평균 시청자수에서 133만 명을 기록하며 SBS ‘8뉴스’(121만 명), MBC ‘뉴스데스크’(120만 명)를 앞섰다. KBS ‘뉴스9’(280만명)에 이어 방송사 메인뉴스 2위 기록이다.
코코파이는 전국 단위로 10개 주요 채널의 본방송·재방송과 55개 유통채널의 평균 시청자 수와 방송 후 7일간의 VOD 평균 시청자 수 합으로 KBS가 닐슨코리아 등과 함께 만든 콘텐츠 이용통합지수다. 네이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메인뉴스 시청률(이하 닐슨코리아)의 경우 MBC와 SBS는 수도권 가구 기준, TV조선은 전국 유료방송가구 기준, KBS는 13대 전국 기준으로 공개하고 있어 각각 모집단이 달라 일괄 비교가 어렵다.
앞서 지난해 12월 코코파이 TV 지표에서 TV조선 ‘뉴스9’ 시청자수는 123만명으로, 124만명을 기록했던 SBS ‘8뉴스’와 MBC ‘뉴스데스크’에 근소하게 밀렸으나 이번에는 앞선 결과가 나왔다. 예능의 ‘선전’ 덕분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1월30일자 사보에서 “‘미스트롯2’는 방송 첫 회부터 7회분까지 7주 간 전 채널 주간 예능 시청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예능 장르뿐만이 아니다. 목요일에는 ‘미스트롯2’의 적수가 없다”고 자평했다.
▲TV조선 '뉴스9'에 출연한 임영웅씨.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의 한 장면.
TV조선은 ‘우리 이혼했어요’(월요일 오후 10시), ‘아내의 맛’(화요일 오후 10시), ‘뽕숭아학당’(수요일 오후 10시), ‘내일은 미스트롯2’(목요일 오후 10시), ‘사랑의 콜센타’(금요일 오후 10시) 등 중장년층을 겨냥한 평일 밤 10시 예능이 모두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오후 9시 편성된 메인뉴스는 일종의 ‘텐트폴’ 효과(주변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상황, 유의어는 떡고물 효과)를 보고 있다. 토요일 메인뉴스인 ‘뉴스7’은 아예 ‘미스트롯2’ 재방송을 1부와 2부로 쪼갠 뒤 그사이 편성해놨다. 일요일 메인뉴스도 ‘미스트롯2’ 재방송 직후 편성했다.
‘미스트롯2’는 1월 코코파이 지표에서 KBS2TV 주말 드라마 ‘오 삼광빌라’(776만명)에 이은 747만명의 시청자 수로 전 채널 2위를 기록했다. ‘사랑의 콜센타’(359만명)는 전체 10위, ‘뽕숭아학당’(301만명)은 전체 16위다. 지난달 ‘우리 이혼했어요’(169만명)는 MBC ‘라디오스타’(165만명),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162만명)보다 많은 시청자를 모았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은 TV조선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 시청률로 출발했다.
TV조선 뉴스 상승세의 변수는 ‘예능’이다. ‘미스터트롯’이 30% 시청률로 흥행하던 지난해 2월과 3월 수도권 메인뉴스 시청자 수(닐슨코리아, 전 연령대)는 각각 45만2800여명, 46만5200여명으로 높았다가 4월부터 30만명대로 하락했다. 11월 37만9400여명이었던 시청자수는 ‘미스트롯2’가 시작된 12월 50만8900여명으로 증가했고 지난 1월에는 52만4600여명을 나타냈다. TV조선 역사상 최고치로, 같은 기간 채널A(25만7400여명)의 2배 수준이다.
TV조선의 한 시사토크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는 “요즘 TV조선 스튜디오 분위기는 최고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늘 트롯으로 마무리하며 끝낸다”고 전했다. 시사토크 프로그램에 예능 이슈를 입힌 것으로, 이 때문에 변호사·시사평론가·기자들이 트롯 이야기를 하는 기이한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TV조선 메인뉴스에는 임영웅씨를 비롯해 TV조선이 키워낸 트롯스타들이 빈번하게 출연하고 있다. 이런 ‘예능·시사 콜라보’는 결국 채널 전반의 분위기를 바꿔내고 있다. 이 같은 TV조선의 현 상황을 두고 한 방송사 고위관계자는 “JTBC가 뉴스로 종편이라는 벽을 허물었다면, TV조선은 트롯으로 그 벽을 허물었다”고 지적했다.
한때 ‘유사 보도채널’, 서혜진PD 영입하며 반전
높아진 뉴스 영향력, 선거 국면에서 힘 발휘할 듯
앞서 본지 기자는 2016년 3월25일자 기사에서 “60대 이상 고령 시청자층으로 가득한 종편의 상황은 정부의 각종 특혜로도 극복할 수 없다”며 “종편이 현재 시청률을 넘어 지상파 3사와 맞먹는 성과를 내고자 한다면 채널 전략의 전면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종편은 지금이 ‘전성기’였다고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제목은 ‘TV조선·채널A 시청률 이미 천장 찍었다’였다. 역시 단정적인 제목은 언제나 실패한다.
당시 기사 이후 5년간 TV조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TV조선은 2016년부터 ‘엄마가 뭐길래’, ‘모란봉클럽’ 등을 통해 조금씩 예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3년 17.2%에 불과했던 오락 편성비율도 2019년 38.5%까지 높였다. 2017년 방송통신위원회의 강력한 재승인 조건이 ‘예능 투자’를 견인한 측면도 있다. 그리고 SBS 출신 서혜진PD(현 TV조선 제작본부장)를 2018년 1월 영입하며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서PD는 ‘미스트롯’을 비롯, 각종 예능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지난해 TV조선에 역대 최대 영업이익을 안겼다는 평가다. 선거 직전 거물 정치인들의 통과 의례같은 예능출연이 과거 MBC ‘무릎팍 도사’나 SBS ‘힐링캠프’ 등 지상파3사에서 이뤄지던 것이 이번에는 TV조선 ‘아내의 맛’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TV조선의 현 위치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다.
▲TV조선 '아내의맛'에 출연한 나경원 전 의원.
이런 가운데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차남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가 서혜진PD 영입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미디어그룹 후계 구도가 장남인 방준오 조선일보 부사장에서 방정오 전 대표이사로 옮겨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조선일보 안팎에서 조금씩 나오고 있다. 방상훈 사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TV조선의 평균 시청률은 KBS, SBS에 이어 3위”라고 자평한 뒤 “‘뽕짝’은 사라지고 트롯이란 장르를 재해석해 폭발적인 반응을 만들어낸 것이야말로 콘텐츠의 힘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TV조선의 ‘퍼포먼스’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011년 12월 종편 출범 이후 수년간 TV조선은 ‘유사 보도채널’이란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트롯’이란 장르를 주도하며 예능 판을 바꾸고, 뉴스의 영향력까지 키웠다. 조국 사태 이후 정부 비판으로 돌아선 중도층 시청자를 흡수하고 있다. 이 같은 영향력은 향후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비롯해 대선까지 이어질 수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예상할 수 없었던 TV조선의 현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다. 조선일보 논조가 TV조선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던 언론운동진영에는 복잡한 숙제가 주어졌다.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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