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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11차 부산시국대회 및 박종철열사 30주기 추모식

by 이성근 2017. 1. 14.

 

 

박종철 사망 30주기···사진과 글로 정리해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13경향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이 숨진 509호 조사실 | 이상훈 기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1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언론·의학·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지면서 19876월 시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64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된 뒤 같은 해 715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2005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따르면, 박종철은 공장에 위장취업한 뒤 3주간의 공장 활동 기간 동안 공장의 위치나 근로조건 등을 꼼꼼히 기록한 <공장활동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다.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을 이어가던 박종철 열사는 19871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14대학문화연구회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박종철 열사가 계속 답하지 않자 물고문·전기고문이 시작됐고 결국 박종철 열사는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영원히 묻힐 것 같던 진실은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기사 이후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종철 열사 사망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해 “‘하고 치니 하고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문에 의한 사망이 아닌, 단순 쇼크사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경향신문은 경찰이 발표한 내용은 이렇게 전한다.

 

-이날 박군은 오전 81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9동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된 뒤 916분쯤 경찰이 제공한 콩나물국과 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는데 어제밤 술을 많이 마셔 밥맛이 없다며 냉수 몇 컵을 요구해 마셨다는 것이다. 이어 10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신문을 받기 시작, 11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종운군(서울대생)의 소재를 물으면서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경찰은 곧바로 박군을 용산의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니 이날 낮 12시 숨졌다. 경찰은 박군을 조사할 당시 수사관의 가혹행위는 절대로 없었다고 전했다-

 

박종철 열사의 시신 부검은 115일 오후 95분부터 1025분까지 한양대병원 영안실에서 서울지검 형사부 안상수 검사의 지휘와 황적준 박사의 집도로 실시됐다. 사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중앙대병원 오연상 전문의가 16일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고, 17일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과 전기고문 흔적이 있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면서 진상이 속속 밝혀졌다.

 

1987119일 구치소로 이송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범인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언론의 의혹 제기가 이어지자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경찰은 마지못해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수사경관이던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다고문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가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김종호 당시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하기에 이른다전국의 많은 교회와 성당, 사찰 등에서는 박종철군 추모 예배와 추모 법회, 고문 사례 발표회 등을 열었다. 노동계와 학생들은 잇따라 박종철 추모 집회를 열었다. 김대중·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은 126일 김대중 자택에서 회동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대책 등을 논의하고 27일 신민당과 재야가 합동으로 박종철 추모대회를 개최키로 합의한디. 이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경찰은 전단지를 발행하는 인쇄소를 수색하기도 하고, 지방에서 전경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87131, 경찰이 2·7 고 박종철 추모대회를 앞두고 관련 전단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수색하는 모습과 198725일 박종철 추도대회 저지를 위해 상경한 지방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27일 박종철 추도대회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침묵시위하는 사제단과 872월 박종철 추도대회 | 경향신문 자료사진

 

넉 달 뒤인 19875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했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모두 5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과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시민들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198733일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박종철 추모행사를 하는 학생들과 1987423일 서울대에서 박종철 49재를 맞아 시위하는 학생들을 막고 있는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종철 49재와 청계천 시가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고 박종철 49제 추모집회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610일 국기하강식의 애국가 음악을 신호로 시작된 박종철 고문살인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당시 서울지검은 198721차 수사에서 고문 경찰관 2명으로부터 고문치사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으며, 2차 수사에서도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범인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고 무혐의 처리했다. 박상옥 현 대법관은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하면서 1·2차 검찰 수사에 모두 참여했다.

 

전두환 정권은 526일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으나, 시민들의 민주화투쟁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거세진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은 6월항쟁으로 이어져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이 경과한 2017년 1월14일 서면 영광도서 옆 소민아트센트에서 박종철열사 30주기 추모식이 열였다.

 첫번째 추도사를 했단 송기인신부는 "...30년 전으로 돌아갔다"며  작금의 벌어지고 있는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에 대한 암울한 현실을 언급하며 열사의 죽음이 이루었던 6월항쟁의 역사를 백만 촛불이 다시 계승하고있고 했다. 이어 김재규 전 민주시민협의회 사무국장이 "...열사의 죽음은 침묵하고 슴죽여 있던 국민을 깨워다" 며 "세월호 백남기 농민이 또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촛불이 되었다..."며  바른 길로나아가고자 하는 역사의 흐름에 우리가 답해야 한다고 했다.

박종철 합창단의 노래공연에 이어 작가회의에서 편지를 읽었고 김해경 시인이 서울대 동문들이 쓴 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추모제에 참석한 박원순 시장이 추모제에 가름하는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가슴아픈 일은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의 모습이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90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쇄잔한 모습에 참석자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종철열사 추모시

                                       서울대 언어학과 동기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끝까지 살아남아 목청 터지도록 해방을 외칠

그리하여 이 땅의 사슬을 끊고 앞서 나아갈 너는

결코 묶인 몸이 될 수 없음을

너를 삼킨 자들이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이 땅, 이 반도에

지금도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쉬는 것조차 틀어막는 모순 덩어리들,

그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 날

우리 모두가 해방춤을 추게 될 그 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 날,

비로소 그 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주리라

 

촛불을 든 당신은 30년 전 박종철이다 오마이뉴스 1.13

[현장]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도식... 가족이 말하는 그때와 오늘

 

13일 오전 경남 양산 성전암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추도식에서 박종철 열사 아버지인 박정기(90)씨와 어머니 정차순(85)씨가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정민규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한 줌으로 변한 막내아들을 강에 뿌리며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었다. 30년 전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90세 노인이 됐다. 허리는 굽었고, 귀는 잘 들리지 않는다.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마다 열리는 아들의 추도식에 참석한다.

 

"밀양후인(后人) 박종철 영가(靈駕)"

서른 번째 추도식 주인공의 위패가 모셔진 경남 양산 통도사의 암자인 성전암으로 13일 오전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세월이 새겨졌지만 영정 속 박종철 열사는 여전히 20대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 박정기씨와 어머니 정차순씨는 이날도 영정을 바라보다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30년 전 25살이었던 누나 박은숙씨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제는 동생의 또래 나이가 된 딸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지금도 생생한 30년 전 '그날'

1시간 남짓의 추도식이 끝나고 박종철 열사 가족과 마주앉았다. 아버지 박씨의 건강부터 궁금했다. 특별한 지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 부쩍 힘이 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30년 전 그날, 1987114일만큼은 지금도 이 가족에게 생생한 현재였다.

 

"무서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대공분실 요원들인 거 같은데 다짜고짜 집 안으로 구두를 신은 채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기차에 태워 서울로 가는데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기차에 탔죠. 기차 안에서야 말해주더라고요. 철이가 죽었다고..."

 

누나 박은숙씨가 말했다. 경찰은 누구보다 건강했던 박종철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박종철의 사인이 폭행과 각종 고문에 의한 쇼크사란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진실을 파헤치려 했던 기자, 양심을 내걸었던 의사, 정의를 포기하지 않은 성직자의 노력 끝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독재 정권은 20대 대학생의 목숨을 뺏은 것도 모자라 한 가정을 송두리째 옭아맸다. 가족 한 명당 적어도 2~3명씩의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붙었다고 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876월 항쟁이 불붙자 온갖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 종철이가 살아 있다면..."

거대하고 추악한 진실은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이었던 평범한 아버지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려고 했던 길이 옳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아들이 못 이룬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다.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이끌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이날 "열 가지 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다시 위기에 처한 지금의 민주주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누나 박씨는 "87년 직선제를 따내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일구어냈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과거로 돌아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는 과거로 회귀했다"면서 "철이의 죽음이 무색하게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고 한숨 쉬었다.

 

아버지 박씨가 세상을 향한 바람을 덧붙였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민주주의를 위한 거였다면 지금 살아 움직이는 국민들은 지속적인 민주주의의 염원을 위해 헌신하는 입장이라 생각한다"면서 "지속해서 움직여 나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만약 30년 전 박종철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고 오늘을 맞이했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누나 박씨가 말했다.

 

"매 주말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을 거 같아요. 타고난 성격이 그러니까요.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살았을 겁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면서..."

 

추운 날씨 때문에 참석자들이 확실히 줄었다. 사실은 이쯤에서 사무실로 오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맘처럼 돌아설 수 없었다. 제출해야 될 보고서 책자 정리작업은 다시 밤을 새더라도 얼마간은 사람들이 시국대회장을 채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 시각 현장의 날씨는 영하5도 였다.

박원순 시장이 등장하자 시민들이 악수를 청하고  기념사진 사진찍기를 희망하고 있다. 

14일 서울 상황 역시 날씨의 영향이 많은 듯했다.   그렇지만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서준 시민들이 참 고마을 따름이다.  하기사 이제 얼마나 모였는지는 이제 무의한 것이다.  이렇게 추운 날 가족단의의 참가는 사실상 어렵다.  경찰도 집회참가 인원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시비가 많아 ? 

 

아무튼 서울 촛불집회주최측은 “‘공작정치주범 및 재벌총수구속 12차 범국민행동의 날로 정했다고 밝혔다. “재벌은 정권의 협박을 받은 피해자라 주장하지만 최순실에게 돈을 주고 경영권 승계 등을 대가로 받은 범죄집단이라는 취지다.

 

본 집회는 오후 530분께 정원스님을 기리는 묵념으로 시작됐다. 정원스님은 지난 7일 오후 1030분께 세월호 참사 1000일 추모 집회가 끝난 직후 광화문 광장에서 분신했다. 정원스님은 분신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9일 오후 세상과 등졌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탄핵반대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과 막말, 잘못된 정보의 맹신, 나아가  미국 국기의 등장은 이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아니 그보다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한다.  천박하고 야비하고 썩은 내 나는 비루한  그래서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아픈 시대에 갇혀 초중등학생보다 못한 사고를 펼친다.  부끄럽게도 저들이 내 어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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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부산에서는 박사모 등 보수단체 회원 750명이 버스 20대를 타고 서울로 이동해 박사모 맞불 집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이런 모임들의 연대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인터넷신문 뉴데일리가 있다.  

동시대를 살면서 어울릴 수없음을 늘 확인하는매체고 요즘들어서는 더욱 노골적인 기사로 채워지고 있다.  다 역겹고 추하다. 

 

박종철 열사 아버지도 '촛불'... "다시 6월 항쟁" 1.14 오마이뉴스

14일 저녁 서면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11차 부산시국대회에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90)씨도 참석해 촛불을 들었다. 또 열사의 누나인 박은숙(55)씨가 눈물을 흘리며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정민규 오마이뉴스

11번째를 맞은 '박근혜 퇴진 부산시국대회'를 관통한 주제어는 '6월 항쟁'이었다. 박종철 열사가 목숨을 잃은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인 14일 저녁 부산 서면에서 열린 시국대회에는 박 열사의 가족과 당시 6월 항쟁의 전면에 섰던 참가자들이 다시 한 번 더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서면 중앙대로를 가득 메운 1만 명(집회 측 추산)의 틈 속에 박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90)씨도 함께 촛불을 들었다. 시민들은 박 열사를 추도하는 의미로 1분간 촛불을 내려놓고 묵념을 하는 시간도 가졌다. 박 열사의 누나인 박은숙(55)씨는 무대에 올라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종철아, 네가 촛불혁명으로 되살아 났구나"

 

"종철아 지금 앞에 계신 수많은 시민, 아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연히 일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들을 보고 있니. 아마도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함께 감격에 겨워 이 촛불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돌려달라고 마음껏 소리 질렀을 거야. 너는 지난 30년간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이제 깨어난 거야. 876월 항쟁 이후 30년간 꿈에서 깨어 이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난 거야. 되살아난 너와 함께 희망을 노래하고 싶단다."

 

박씨가 눈물과 함께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눈시울이 붉어진 참가자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다음 순서로는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의 실제 피해자인 고호석(62)씨가 시민들을 찾았다. 고씨는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투쟁의 전면에 서기도 했던 인물이다.

 

"우리는 80년 광주의 피를 잇고 박종철, 이한열, 이태춘 열사의 힘으로 6월 항쟁에서 승리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입을 연 고씨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어야 했고 백남기 농민 떠나보내야 했고 오늘 또 정원 스님의 장례식 치러야 했다"고 말했다.

 

고씨는 그 이유를 "우리가 87년 체제라는 멋진 민주제도를 쟁취하고도 전두환의 또 다른 권력인 노태우와 그 부역자에게 권력 물려주고 적폐를 청산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국민들을 정말 개돼지처럼 생각하는 것들을 쓸어내지 않고선 그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불의한 정경유착과 일제시대 부터 권력에만 빌붙어 양지만 바라보고 쌓았던 수구 기득권 세력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밖에도 이날 부산시국대회에서는 사드 배치를 규탄하는 발언 등이 이어졌다. 부산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도 시민들 틈에 섞여 촛불을 들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가야대로를 행진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거듭 촉구했다.

 

 

.........Elijah Bossenbroek - A Song Of Simplicity

.........Elijah Bossenbroek - on The Wings

.........Elijah Bossenbroek - I Give Up

.........Elijah Bossenbroek - Rest

.........Elijah Bossenbroek - Ignorance

.........Elijah Bossenbroek - Harmony In Disar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