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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함양행 -산촌민박 꽃,별,길,새에 들다

by 이성근 2018. 3. 18.


때 아닌 비였다. 제법 빗줄기가 굵었다. 그래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바 주섬주섬 옷가지며, 비상식을 베낭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책 대신 수첩 새것을 챙겼다.  임시이사회를 앞두고 가기에 몇 가지 조치는 취해 놓고 가야 했다.  막상 사무실에 들리고 보니 이것 저것 챙길 것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쫒기는 일정이 되었다. 사상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뭔 생각 끝에 환승 서면역을 지나쳐 동래역에서 다시 서면으로 왔다가 사상 시외버스터미널로 가게 됐다. 

1시발 함양 직행을 놓쳤다. 다음차는 3시, 두시간을 기다리기 싫어 마산에서 함양행을 도모했다. 

마산에서 14:20발 함양행으로 갈아 탔다. 그런데 이 차도 함양 직행이 아니라 진주 경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측은 함양직행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건성건성 이었다. 

빗길이다.

차는 고속으로 달린다.

어둔 하늘에

선팅한 차창, 입김까지 서린 창 

어디로 가는 가 

차창 문질러 창밖을 보지만

차창으로 비켜 흐르는 빗물

이럴 때도 있다 


내 습관 중에 차를 타면 우리집 차든 타인의 차든 차장유리를 딱는다. 달리는 차에서 창밖을 선명히 보기 위함이다.  심한 경우 차 내(內)가 다소 지저분해도 용납하지만 먼지가 자욱하거나 불투명한 유리창은 싫다. 세상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잘 보여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전망에 대한 강박관념 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록하는 것에 익숙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내 생활은 대책없다. 아내는 나의 그런 태도를 곧잘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부정은 변명이나 자기회피로 치부할 뿐이다. 이번 함양행은 내 자신과 가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남편으로, 아버지로, 자식으로서의 내 역할이 형편없음에 대한 반성과 모색인 동시에 부산그린트러스트란 곳에 대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나들이다. 


아내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 했다. 밤낮없이 휴일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돈을 가져다 주지 않느냐 였다.  언제나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다가 임계점을 넘어선  아내가 폭발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내는 아내의 입장이지만 나는 뭔가. 나는 누가 책임져 주는가.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하는가.  자신이 없다. 더이상 이대로 일 수는 없다는 강한 회의가 일을 멈추고 길을 떠나게 한 것이다. 주변의 적극적 권유도 한몫했다. 


마산에서 진주행 버스 승객은 6명, 진주서 함양 승객은 14명  뒤죽박죽이었다.   마산서 탄 차를  진주 (함양행)에서도 탔다는 게 어처구니 없었다. 내 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든가. 하긴 다른사람들의 목적지는 진주나 함양에서 끝났다. 나는 더 가야할 길이 있어 이런 일도 당했다. 

함양가는 길

부산서1시차 놓치고 3 시차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마산 갔다가 경유지 많은 함양행 포기하고  

진주서 갈아 탄다

한번이면 될 것을 함양서 인월  거쳐 창원리까지 도합 4번 

부산발 함양행 직행을 놓쳤기 때문이다.

시골은 여전히 교통편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지역민들이 큰 불만이 없는 것은 차 시간에 적응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5분 10분 단위로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던 사람이 최소 30분에서 1시간 길게는 3시간 넘어의 배차에 익숙할 수는 없다. 

함양서 창원발 막차는 멀리 남원 인월까지 갔다가 안개를 뚧고 마천면 창원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차는 하루 몇 회 없다.

마을 초입 큰 느티나무가 있어 오래된 마을임을 직감한다. 

지리산 들레길 경유지 중 한 마을이다.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장거리 도보길로서 창원마을은   3코스의 등구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마천면내의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창말(창고 마을)’이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져 현재 창원이 되었다.

마을 어귀 당산에는 300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있다.



이 장면들은 2박3일 꽃별길새에 드나들며 되풀이 해서 마주친 장면들이다. 몇 번 봤다고 그 내력 속속들이 알수야 없지만 이곳도 사람사는 마을이고 시기와 이기가 사람의 마음들을 다치게하고 그래서 벽을 세우고 편을 갈라 살기도 한다. 

꽃별길새의 주인은 전 진주환경련 사무국장 출신의 김석봉씨다. 전국환경련 공동대표까지 역임하면서 초기 지리산 숲길의 만들때 중요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한 10년 전 쯤에 이 마을로 왔다. 나도 안 본지가 얼추 그쯤된다. 서로가 반가웠다. 첫날 밤 그는 내가 묵고 지내다 갈 방을 군불 떼워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짐을 풀기 위해 방문을  열자 훅 하고 아니 와락 달려드는 냄새,  잊고 있었던 시골집 냄새 였다. 민박 손님은 안채에 방 한칸 별채에 두칸 이용할 수 있다.  금새 날이 어두워 졌고,  맛있는 저녁으로 주인내외와 마주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맘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전주가 있던 주인장과 더불어 소주 세병을 끝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밤 9시 26분이었다. 

잠시 그의 이야기를 옮겨(페이스북에서 가져옴)  본다.

군수가 감옥에 들어갔다. 네 명의 군수가 내리 감옥행이다. 내가 이곳 지리산이 마주보이는 산골에 터를 잡고 들어오자마자 시작된 군수의 감옥행을 이번 군수도 비켜가지 못했다. 대개부패혐의다. 특히 이번 군수는 과장 진급자로부터 고액을 수수한 매관매직 뇌물수뢰혐의다.
그동안 살아가기가 참 불편하고 험했다. 공직사회가 청렴하지 못하면 지역주민의 삶이 팍팍하기 마련이다. 귀농귀촌을 계획하려면 먼저 그 지역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따져봐야 한다. 귀농10년, 이제껏 경험으로 감히 말하건대 내가 사는 이런 곳은 귀농할만한 곳이 못된다. 공무원은 군림하고 있고 주민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물론 매양 농사만 짓고 세상 나몰라라하며 살 거라면 지역 공직사회의 부패와 청렴 따위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연금 꽤나 받거나 도시에 남겨둔 재산으로 임대수입이라도 있는 귀촌자에겐 어쩌면 이런 관행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을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꾸며보거나, 개인소득을 위해 행정과 관계를 가져야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김 주사, 이따 저녁에 어두워지면 잠시 우리 집에 좀 오시게.” 며칠 전 마을 노인네로부터전화가 걸려왔다. 마을에서는 그나마 말 꽤나 하는 노인네였다.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지난 1년 사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산촌생태마을 때문일 거였다.


마주앉자마자 그 어른은 “자네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네. 지난 일은 잊고 산촌생태마을을다시 맡아주게.”라며 다짜고짜 밀어붙였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아무리 나이를 더먹고 늙었기로서니 어찌 이처럼 낯짝이 없나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야멸차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왜요?” 나는 태연하려 애썼다. “오늘 경로당에서 말이 나왔는데 자네가 아니면 생태마을을운영할 사람이 없다, 지난번 일에 대해서는 마을에서 사과하고 자네에게 다시 맡겨야한다고 결론이 났네.” 노인네는 경로당에서 오간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안들은 걸로 할게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노인네는 자꾸 통사정을 했지만 말을 들을 때마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 마을에 대한 내 감정의 골은 깊게 패였다.

마을기업을 설립하고 체험휴양마을로 지정받아 마을공동사업으로 정착되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었었다. ‘들어온 사람’에게 붙는다는 핀잔에 시달려 함께 했던 조합원이 탈퇴하기도 했고, 산촌생태마을에서 숙박업을 하면 안 된다는 민원을 넣어 검찰에까지 가서 조사를 받는 곤욕을치루기도 했다. 심지어는 고향에 남아있던 농지를 팔아와 아들내외가 살 집을 한 채 지었는데산촌생태마을 운영해서 돈 벌었다는 음해성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난해 마을기업을 마을에 인계하고 정리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민원을 넣었는데 마을기업예산을 잘못 써서 군청이 환수한다는 것이었다. 군청 담당계장은 마을을 드나들며 주민들에게  “아무리 의견서를 내도 끝내는 마을에서 물어내야 할 돈”이라면서 권리행사를 방해하고 다녔다. 군청에 맞서 끝내 부정한 집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냈지만 공무원의 모습은 대개 이랬다.


몇 달 째 나는 진정서 한 장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몇 번씩 ‘진정서’를 ‘고발장’으로 고쳐 썼다가 바꾸기도 했다. “거 봐라. 너 같은 사람도 그걸 함부로 못하는데 주민들이야 오죽 하겠냐.” 고발내용을 듣고 난 지인 변호사가 한 말이었다. 하기야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나조차도 ‘진정서’와 ‘고발장’이란 용어 앞에서 망설이고, 제출할까말까 망설이는 형국이니 행정앞에서 옴짝달싹 못해온 주민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두해 전에 마을회관을 신축하면서 엄청난 기금을 주민들과 출향인들로부터 모금을 했었다. 그런데 마을에 보고한 수지내역에는 모금액이 훨씬 적게 기록되어 있었다. 적어도 수천만 원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가 횡령한 것이 분명했다. 마을 주민 몇몇께 이 내용을 알렸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개인 돈’이 아닌 ‘마을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외면했다. 말을 하고 따지면 더 큰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이웃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정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영농조합은 장애인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임금을 주지도 않았고, 산촌생태마을 운영수익금은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관급공사로 부당이득을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주민은 침묵했다. 공동수도요금을 얼마로 책정해 얼마를 걷어가서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그야말로 군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나서서 설립한 마을기업이 산촌생태마을을 운영할 때는 자력갱생의 원칙을 적용해 일체의 지원도 하지 않던 군청이었다.  지난해 내가 그만두자 시설보수공사에 그늘막 설치공사까지 해주더니 심지어는 대부계약까지 어겨가며 밀린 전기료까지 대납해주었다. 설치한 그늘막이 불법건축물이라 하여 올해는 또 예 산을 투입해 그 그늘막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만드는 행정이었다.


외지에서 들어와 산다는 것이 대개 이렇다. 차라리 마을에서 뚝 떨어진 외딴 곳에 집 짓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이 집에서 나머지 삶을 살아야 하고, 눈만 뜨면 마을 이웃을 만나야 하는 것을. 나날이 야위어가는 이웃들, 지나온 삶처럼 현재의 삶까지도 수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을 보면서 이 진정서를 꼭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난하게 살아온 이웃에 대한 연민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마을을 쥐락펴락하며 못난 권력에 취해 있는 그들로부터 우리 이웃을 구해야하는 것은 내 삶의 숙명이지 않은가. 나마저 입을 다물 수는 없지 않은가. 입은 가졌으되 말은 못하는 그들의 입이 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또 한 번 우리 가족의 생활에는 험한 풍파가 몰아치겠지? 권력을 잃기 싫어하는 그들이 집앞에 몰려와 ‘마을을 떠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할지도 몰라. 마음 약한 아내의 가슴이 또 한 번 쿵쾅거릴지도 몰라. 세상의 험한 파도 맞아보지 못한 우리 착한 며느리 속이 타들어 갈지도 몰라. 그렇다고 침묵하고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 가난한 이웃들이 피땀으로 기부한 돈을 함부로 챙 겨 먹는 그들, 마을사업을 하고 수익금을 모조리 챙겨 먹는 그들, 장애인의 임금마저 갈취하는 그들을 앞에 두고서도 눈 감고 스리슬쩍 덮어주는 일은 그들보다 더한 죄악이겠지? 그렇지?


우리가 이 마을로 들어오고부터 지리산둘레길이 생겨났고, 마을방문자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다랑이논 여기저기에 별장 같은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을을 빙 둘러 열 채가 넘는 새 집이 지어졌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드나들었다. 사람이 안 사는것 같은 집인데 밤이면 들창에 불이 밝았다.
처음엔 ‘어째 사람들이 저리 외롭게 사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마을에서 이웃을 이 루며 우리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을 복판에 있는 이 집을 선택했고,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기를 바랐었다. 마을 사람들과는 관계하지 않으면서 산 너머에 있는 같은 귀농인의 집으로 마실을 다니는 귀농자들을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내 살아온 삶의 역정을 반추하면서 농촌과 농민과 농업에 대한 고민과 성찰과 행동을 하지 않는 귀농인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은 순박했다. 나는 많은 마을사람들과 터놓고 지내게 된 귀농5년차를 넘기면서부터 마을일을 시작했었다. 이웃들과 함께 공동사업에 대한 교육장을 찾았고, 영농조합을 결성해 마을기업을 설립했다. 농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받았고 마을사업 3년차에 기천만 원의 흑자를 냈었다. 그러나 나는 ‘좌빨’이었다. ‘환경운동 지리산댐 반대하는 놈에게 마을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토박이 정치똘만이 말 한마디는 나를 ‘빨갱이’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하던 마을기업은 이제 망했다. 내가 하던 농촌체험마을사업도 망했다. 내가 하던 산촌육차산업육성마을도, 문화마을사업도 다 망했다. 마을공동사업장은 폐허가 되어버렸고, 일생을이 골짜기 이 마을에서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무궁화호 꼬리칸을 달고 기차여행을 꿈꾸던 마을일은 이제 뿌리까지 뽑혀버렸다. 겨울, 경로당 혹은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내 꿈은 찢겨지고 짓밟혔다.


이 마을에 들어온 지 십년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이웃이 아닌 이방인으로 남았다. 마을에 들어온 지 이십년 삼십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들은 주민의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마을을 들쑤셨고, 들어온 사람이 집을 지어 마을 수도관을 연결할 때 오백만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박수갈채를 받는 이 겨울 경로당이 넌더리나게 싫었다. ‘정말 그래볼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 집을 팔고 이 마을을 떠나볼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도 문득 겨울 경로당 혹은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의 탓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친 세월 모질게 살아온 이웃들의 삶에 스며들지 못한 지난한 나의 욕심을 탓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집에는 개와 고양이가 넘쳐 난다.  같이 숙식을 하는 개는 4마리고 고양이는 서른 마리가 넘는다.  오갈데 없는 놈들을 마다 않고 거두웠기 때문이다.  이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예삐

이틀에 불과한 잠자리였지만 이렇듯 군불로 아래목을 달구어 주었다.  방이 녹을 정도였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났던 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들이 정리되거나 갈래지은 것도 없다.  그냥 펼쳐진 채 몇 줄의 메모만 있었을 뿐이다.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날은 몇 잔 술에, 둘째날은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고 고단해서 

가끔씩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골목을 배회하기도 했다. 고향같았다.

아침이면 그림이 달라지는 이 산촌마을에 산보겸 마을구경을 하고 왔다.

이 집의 손녀는 이들에게 또 다른 보물이다. 내외는 아래채 자식들과 더불어 살지만 경계를 분명히 하고 존중해주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아들 또한 한때 문학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선배는 아들이 시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고등학생일 때 녀석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백일장이 열리는 전국 곳곳을 다녔고, 갔다 하면 최소 3위 입상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서울 4년제대학 특기생으로 문창과에 입학할 때까지는 세상을 노래하는 참시인의 탄생이 눈앞에 보였다. 가끔 학교 앞 반지하 자취방에 들러 술잔을 나누며 제법 철이 들어가는 녀석을 대견스러워도 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군 제대후 유명한 출판사에 취직을 하며 직장생활을 하다 어느날 그만두고 지리산으로 들어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지리산생명연대 상근활동가로 활동하다가 얼마전에 사무처장이 되었다.

이 집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의 식재료는 직접 심고 가꾼 것들이다.  형수가 예전에 요리강사이기도 해서 늘 맛과 영양을 고려한 식사가 제공된다.  지리산으로 들어오기 전 진주에 터 잡고 살 때는 형수가 음식점도 경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손맛을 간만에 맛보았다. 엄지척이다. 혹시 방문을 희망한다면 https://www.google.com/calendar/embed?src=jirisanchon%40gmail.com&ctz=Asia/Seoul   예약현황을 확인한 뒤 비어있는 날짜에 비어있는 방을 예약해야 한다.  별도의 예약금이나 선입금을 받지 않는다.  이 집의 방침이다. (010-2557-5882) 문자를 남기면 된다.  사전에 둘러보기는 https://www.facebook.com/jirisanchon 로 간 을 보면 될 듯하다.


사진들은 이렇다할 문제가 없었던 시기, 주민들과 어울려 창원 마을을 한창 가꿀 때의 장면들이다. (김석봉 페이스북 산촌일기 에서 가져온 사진)


원래는 화단이 없었다. 형수가 꽃을 좋아해 일부러 시멘공굴을 깨고 조성했다고 한다.  철마다 꽃이 핀다고 했다. 


밥때가 되면 고양이들이 모여 든다.  먹이 앞에서 큰 다툼없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외 꽃,별,길,새에 더불어 사는 식구들,  생산자와 단순 소비자로 구분된다. 뒤울안에 마련된 닭장에는 매일 신선한 달걀을 젝ㅇ해주는 닭들과 거위가 산다. 그리고 온 동네 고양이란 고양이는 다 긁어 모은 듯 모여든 고양이들은 질겁할 정도로 많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 소비자라 하기네는  그렇고 잔밥도 처리하는 청소부 역할도 한다.  그렇지만 별도의 사료가 매일 주어진다. 그 비용도 적지 않은데 내치지 못한다. 사진의 거위는 뒤뜰 지킴이 "덤벙이"와 "새데기" 이다.


마을은 돌아 보는 일, 차원이 다르다.

돌담과 산, 텃밭, 낮은 집들이 좌우로 둘러싼 산들과 어울려 그 자체가 그림이다.  

머잖아 잎들이 나기 시작하면 이 그림들은 훨씬 풍성할 것이다.


창원마을에는 당산이 세곳 있다. 아미도 할매, 할배 당산에 더해 작은할매 당산이 아닐까 싶은데 정보를 구할 수 없었다.


마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다지


문이 닫힌 생태마을 이 좋은 시설이 방치되고 있다.

생태마을에서 건너다 본 지리능선

봄이 오면 변화가 있지 않겠나



마지막 날 아침 준봉들에 눈이 쌓여 있다.

그리고  능선을 내보인  지리산

서둘러 백무동 산행을 준비했다. 뭐 준비라고 할 것 까진는 없고 가능한 빨리 이동하는 것이 전체 일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짧은 해후를 뒤로하고 창원마을을 벗어난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올 것이다.  


Patoma - Haris Alexi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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