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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한상훈박사의 한반도야생동물이야기 . 범(虎)

by 이성근 2022. 1. 5.

중국 동북부 아무르호랑이 평균적 사촌관계면역력 약화 우려

1030마리 급증했으나 절반 이상이 인척 관계

근친교배 부작용 우려러시아 집단과 교류 절실

세계에 550마리 미만이 남아있는 아무르호랑이는 한반도 등 대부분의 서식지를 잃고 95%가 러시아에 서식한다. 중국 동북부 집단이 중요한 이유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중국 동북지방의 호랑이가 최근 증가하고 있으나 대부분 혈연관계가 사촌 간으로 가까워 근친교배의 위험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장기적으로 호랑이의 면역력 약화로 이어져 러시아 호랑이 집단과의 유전적 교류가 필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에서 동북호라 부르는 호랑이 아종은 아무르호랑이, 백두산호랑이, 시베리아호랑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장광순(姜廣順) 중국 동북임업대학 교수 등 중국 연구자들이 2013년부터 중국 동북부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호랑이 서식지 8만여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드러났다. 조사지역은 장백산의 지맥인 노야령을 비롯해 완다산, 장광재령, 소흥안령산맥 등으로 이곳에서 연구자들은 호랑이 배설물 150개를 수거해 유전자를 분석했다.

중국 동북부의 지린 성과 헤이룽장 성의 아무르호랑이 서식지. 닝 야오 외 (2021) ‘동물 보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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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저널 동물 보전최근호에 실린 이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배설물로 확인한 중국 동북부의 호랑이는 모두 30마리에 이른다. 이 지역 호랑이는 1980년대에 10마리까지 감소했으나 중국 정부의 보호조처로 20001216마리, 201426마리로 늘어났다.

 

최근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지린 성 훈춘시에서 호랑이 목격담이 잇따르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1일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는 새끼호랑이 동영상이 올랐고 지난달 20일에도 한낮에 촬영한 성체 호랑이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공개됐다.

한낮에 중국 훈춘시에 출현한 호랑이. 1220일 중국 소셜미디어에 소개됐다.

 

그러나 중국의 호랑이 서식지가 워낙 고립돼 새로운 개체의 유입이 드문 데다 애초 출발한 개체수가 적어 유전 다양성이 낮은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인척 관계로 연결되지 않은 호랑이는 전체의 45%에 지나지 않았고 24%는 사촌 간, 30%는 부모 가운데 한쪽이 같은 의붓형제나 자매 사이인 것으로 밝혔다.

 

연구자들은 이 지역 호랑이는 평균적으로 사촌 관계에 가깝다고 논문에 밝혔다. 적은 수의 시조에서 출발해 외부 수혈이 거의 없었던 결과이다. 돌연변이를 고려한 근친교배의 영향은 5마리에 1마리꼴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근친교배가 많이 이뤄진 개체일수록 기생충에 많이 감염됐고 또 장내 미생물집단에 병원성 세균이 많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근친교배의 가장 흔한 부작용이 면역결핍임을 고려할 때 이런 결과는 우려할 만하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연구자들은 실제로 러시아 시호테알린 생물권 보호구역에서 199634마리이던 호랑이가 200538마리까지 불었지만 201210마리로 곤두박질한 사례를 들며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질병이 돌아 떼죽음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인카메라로 촬영한 암컷 호랑이. 아무르호랑이의 대부분이 연해주에 서식한다. 연해주의 호랑이는 1940년대 50마리 이하로 줄었다가 현재 500마리 이상으로 늘었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문제를 겪고 있다. 스베틀라나 수티리나,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무르호랑이 개체수의 95%는 러시아 연해주에 산다. 이 호랑이들이 중국으로 확산해 들어가는 것이 장기적 생존에 필수적이다. 장광순 교수팀은 2019년 이 가능성을 분석한 생태학과 진보논문에서 호랑이 확산의 주요 장애물로 가축 사육으로 호랑이의 먹이인 사슴 등 유제류가 감소한 것과 마을·도로·농지 등 시설이 들어선 것을 들었다.

 

장 교수팀은 소수이지만 러시아 호랑이의 확산이 가능하며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2013년 러시아에서 새끼 3마리를 데리고 암컷 호랑이 한 마리가 훈춘 장백산 산림국으로 이동해 온 것이 그런 사례이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중국 동북지방의 호랑이는 우리가 백두산호랑이나 한국호랑이라 부르는 호랑이와 같은 아종이라며 러시아와 중국 국경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두 지역 호랑이의 유전적 교류가 활발해지도록 이동통로 확보 등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한국호랑이의 장기 보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용 논문: Animal Conservation, DOI: 10.1111/acv.1276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한상훈박사의 한반도야생동물이야기 17. ()> Facebook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여 한반도 범(호랑이와 표범)에 대한 나의 지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몇 차례 나누어 연재한다.

 

1) 남한에서 한국호랑이는 언제 사라졌을까?

1980년대 초 일본인 야생동물연구자 겸 동물작가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1933년생)가 방한하여 당시 동국대학교 원병휘교수(작고)와 경희대학교 원병오교수(작고) 형제를 만나 한반도 호랑이에 관한 국내 정보와 자료를 인터뷰하고 광복 이후 최초로 목포 유달초등학교 구 강당(현 일제강점기 근대역사건물로 지정)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있던 1908년 포획 기증된 전남 함평과 영광 경계 불갑산 호랑이박제를 촬영하고, 경주 대덕산 호랑이에게 물렸던 고 김유근 옹을 인터뷰하고 난 뒤 발간한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원제 韓国はなぜえたか1986年 講談社책자가 발간된 이후 한국의 언론에서는 일제히남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된 호랑이가 마지막 남한 호랑이라는 기사를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마구 쏟아내기 시작하고 34년이 지난 2022년 임인년 호랑이해 기사에도 여전히 남한 마지막 호랑이로 경주 대덕산 호랑이를 당당하게 보도하고 있다. 참으로 과거 같은 업계의 기사 자료를 단 한번 만이라도 살펴보면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 호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새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이 오늘의 우리나라 언론의 자화상이다.

 

개인적으로 엔도 키미오씨와는 30년 이상 친분 관계를 맺고 있고, 지금도 가끔 이메일을 통해 자주 연락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2~3차례 한국 표범 취재차 방한하였을 때는 같이 지방으로 조사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필자의 일본 유학 시절 나에게 그의 저서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를 한국어로 번역해 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나라 호랑이에 대해 일본인이 먼저 썼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웠고 창피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우리나라 호랑이와 표범을 위시한 야생동물 자연사에 대한 글을 후세를 위해 직접 쓰겠다고 생각만 하고 십 년이 훌쩍 흘렀다. 엔도씨의 한국호랑이와 표범 책은 그 후 일본 농공대에 유학간 한국인 유학생에 의해 국내에서 한글 번역판이 출간되어 나왔다.

 

이번 글에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호랑이 출몰, 피해, 포획 기사 보도 연원일, 언론사, 제목을 아래에 열거하였다. 더 상세히 원 기사를 보고 싶은 이는 국내에서 다음 인터넷 주소에 들어가면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db.history.go.kr/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www.nl.go.kr/newspaper/

 

1945년 이전 조선에 대한 일본 신문 아카이브도 있으나 자료 검색이 용이하지 않고, 일본어로 검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여기에 소개하지는 않음

 

(일제강점기 호랑이 관련 언론 기사 기록)

19세기 말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국 열강의 각축 사이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발전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근대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1883년 발간되고, 뒤를 이어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서재필박사) 등 신문이 발간되면서 당시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010년 무렵 국가기관의 정보화 지원 아래 과거 언론 기사 아카이브와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이 진행되어 우리나라의 야생동물에 대한 자그만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어 너무 다행스럽다.

 

일자별 한국호랑이 관련 기사 (1921년 이후 남한지역 호랑이 기사만 발췌)

1906-07-30 공립신보 맹호해인(인명피해)

1907-12-04 대한매일신보 구능촉호 증산군 (증산군에서 개가 범을 잡아)

1908-02-14 대한매일신보 대호입궁 (창경궁에 대호 들어옴)

1908-11-08 대한매일신보 강원 삼척 미로 호환

1908-12-03 皇城新聞 강원 인제 대호 포획

1908-12-08 皇城新聞 한성 삼청동 대호 출현

1908-12-16 공립신보 수렵법공포 (조선인 수렵 애로)

1909-02-18 皇城新聞 강원 춘천 대호 교인(사람을 물다)

1909-03-11 대한매일신보 용산 호랑이 출몰

1909-04-14 신한민보 한성 진입로 맹호 출몰

1909-07-06 신한민보 전남 함평군 맹호 출몰

1909-11-18 大韓每日申報 강원 양구 대호 행인 교식(뜯어먹음)

중략

1921- 경주 대덕산 호랑이 사살 언론 기사는 과거 언론 자료에 나오지 않음. 한국일보에서 19801월 첫 기사 보도, 다음에 자세히 글로 소개할 예정.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로 언론에서 무책임하게 보도하기 시작하여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에 의해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사살된 경주 대덕산 호랑이로 보도되고 있음.

아래 열거한 기사 자료를 보면 남한 전국 각도에서 호랑이가 여전히 출몰, 포획, 피해를 일으킨 사실을 능히 알 수 있음

 

1921년 이후 남한지역 호랑이 출몰, 피해, 포획, 사살 언론 기사(일제강점기 42, 광복 이후 1967년까지 11) 필자 주 : 호랑이 검색으로 나온 기사 중 관련이 적은 기사는 생략

 

1921-11-21 每日申報 강원 인제 봉평면 산중 7백원 대호 포획

1922-06-14 每日申報 전북 부안군 산중 머리 호랑이소행 추정

1923-04-07 동아일보 충남 연기에 맹호출현

1923-09-24 每日申報 경북 영양 청기면 2차 호랑이 포획 개시

1923-11-26 每日申報 전남 장성군 백양산 대호 횡행

1924-01-11 동아일보 경남 산청 지리산 호랑이 2마리 포획

1924-01-31 京城日報 강원도 횡성군 40관의 대호 사진

1924-01-31 朝鮮新聞 강원 횡성평창경계 산림 대호 포획 사진

1924-02-01 每日申報 강원 횡성 대호 포획 기사와 사진

1924-04-09 동아일보 호랑이 2마리 경성 시중 진입

1924-06-24 京城日報 경기도 양주 대호 출몰, 포획도 못해

1924-08-27 京城日報 경기 김포 대호 출몰 소문

1924-09-12 時代日報 고양 은평면 맹호 출몰, 돼지 뜯어먹음

1925-01-17 京城日報 전북 진안 6척 호랑이 2마리 사냥

1925-04-01 동아일보 전남 나주 호랑이 횡행 가축 피해

1925-04-01 朝鮮新聞 경북 영양군 자인지산 대호 출몰 사라짐

1925-10-12 시대일보 용인군 호표 횡행

1926-01-19 동아일보 맹호의 독아 인명가축 피해통계

1926-05-31 朝鮮新聞 경북 봉화 노루 문 대호 출몰

1926-06-10 朝鮮新聞 경남 산청 대호 2마리 출몰 사냥에도 달아나

1927-05-27 중외일보 경북 문경 백화산에 대호 출현 의심

1927-06-03 每日申報 전남 무안에 대호 출몰

1927-08-03 중외일보 경북 군위군 호랑이 수제 방해

1927-08-24 중외일보 충북 단양 맹호 출현

1927-11-20 중외일보 강원도 이천군 호랑이를 너구리로 착각 타살

1928-06-24 중외일보 전북 전주에 맹호 출현

1929-01-15 每日申報 전북 진안(성수산) 백주 대호 포획

1929-03-01 동아일보 경남 함양 천왕봉 맹호 포획

1930-02-22 중외일보 강원도 춘천 신북면 호랑이가 처녀 교식

1931-05-03 동아일보 전북 전주 황방산 맹호 출몰 가축 물고가

1931-09-09 부산일보 경북 청도군 세발 호랑이 식인

1932-01-07 中央日報 충남 논산군 대호 출몰, 늑대가 방에

1932-11-08 釜山日報 경북 김천과 거창경계 우두령 대호 출몰 포획

1932-11-08 朝鮮新聞 경북 김천 우두령 4척 대호, 조선인 몰이꾼 부상

1933-03-10 동아일보 경기 파주군 천현일대 맹호 출몰 빈번 개 4마리 피해

1933-08-17 동아일보 경기 파주 봉서산 맹호 출몰 가축 피해

1934-07-08 朝鮮中央日報(여운형) 강원 김화군 원남면 백주 대호 출몰 주민 긍긍

1935-06-14 부산일보 경북 군위 주인 앞에서 맹호 소 잡아먹어

1935-07-16 부산일보 경북 봉화 대호 출몰

1936-06-24 부산일보 경북 청도 호랑이와 늑대 피해

1937-12-09 朝鮮時報 전북 남원 산내면 나뭇꾼 부상, 함양 경계 도로변 출몰 대호 포획

1940-04-05 每日新報 경북 상주 조선인 순사가 범인 추적중 대호 출몰

1947-03-07 大邱時報 영천 호랑이 소년 포식

1950-01-10 慶南日報 경남 진주 진양군 금산면 월아산 대호 2마리중 십관 수컷 1 포획

1952-06-17 마산일보 경남 창원 진동 호랑이 출몰

1955-01-04 동아일보 부산 동래에 대호출현 사냥개 물고가

1955-02-15 마산일보 창원 내서면 중리 호랑이 출몰 개 10마리 물어감

1961-01-18 동아일보 경남 함안 호랑이 출현 소년 교살

1962-10-03 동아일보 수렵장 지리산과 설악산 호랑이 곰 포획

1964-09-07 마산일보 경남 함안 가야 호랑이출몰 주민 공포 (길이 1미터)

1965-03-16 마산일보 경남 창원 호랑이출몰설(개를 물어감)

1965-03-28 마산일보 경남 창원 삼진일대 호랑이 출몰

1967-07-28 경남매일신문 경남 진해 해군 통제부 뒷산 호랑이 2마리 출현

1. 서울대공원 동물원 사육 북한산 호랑이랑림’. 1993년 북한 자강도 낭림산에서 호랑이 일가족 3마리가 생포, 이때 생포된 호랑이 중 한 마리가 19991월 서울대공원에 반입됨(한상훈 촬영).

2.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된 호랑이. 인물은 직접잡은 이위우 포수의 동생 이복우씨 (1980126일 한국일보에 기사 사진 보도) 이상걸씨 제공. 호랑이는 일본 경찰에 압수되어 일본 황실에 헌납됨

 

3. 1924년 강원도 횡성과 평창 경계 산속에서 사살된 호랑이 사진(경성신문, 조선신문, 매일신문)

4. 목포 유달초등학교 불갑산 호랑이 박제. 1980년대 초 발견 당시 사진(엔도 키미오 제공)

5. 전남에서 6마리가 호랑이가 포획되었다는 공식 문서는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경찰편 해수구제 항목에 기록되어 있음. 이를 보도한 당시 언론 기사 내용 1926-01-19 동아일보 맹호의 독아 인명가축 피해통계

1924년 1월 31일 강원도 횡성과 평창 경계 산속에서 사살된 호랑이 사진과 기사(경성신문)

 

6.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1933년생)와 그의 저서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원제 韓国はなぜえたか1986年 講談社

7. 북한산 솟대박물관

 

<한상훈박사의 한반도 야생동물 이야기 17.() 두번째 이야기>

근대 우리나라 호랑이 형태나 생태와 관련하여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생각되는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전 해인 19094월에 조선에 초빙되어 관립(官立) 한성고등학교(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해방 후 경기고등학교로 개명)에 생물학 교사로 재직하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교 예과(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45815일 광복 이후 일본에 돌아가 고향 효고현에서 말년을 보내다 죽은 모리 타메조(森爲三, 1884~1962)1928년 과학지식(科學知識) 잡지에 실은 조선의 범()’글 일부분이다.

 

모리 타메조(森爲三)는 조선과 만주 지역의 동식물, 지질, 고생물 등 광범위한 분야의 조사와 연구를 하고, 1925년에는 조선박물학회(朝鮮博物學會)를 창립한 한반도 자연박물학의 창시자와 같은 일인 학자이지만 그의 업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가가 매우 절하된 비운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조복성교수(곤충), 최기철교수(어류) 등 많은 그의 제자들이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등에서 한국의 생물학계 기초를 세웠다.

 

2) 1920년대 조선호랑이, 만주호랑이 이야기

원 제목 : 조선의 호랑이(朝鮮)

저자 : 모리 타메조(森爲三),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

출전 : 과학지식, 1928. 81pp. 94-97(필요 부분만 직역)

 

조선의 호랑이

조선의 호랑이는 브라스(Brass)에 의하면 조선호랑이 Felis tigris corensis 로 분류되며, 특징은 체구는 만주호랑이에 비해 작지만, 털은 만주호랑이와 같이 길면서도 두텁고, 몸 색은 대홍색(帶紅色)으로 줄무늬의 폭은 넓고 매우 선명하다고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조선호랑이는 조선반도의 서부에는 적으며, 동부 및 북부에 많이 있다고 쓰여 있지만, 남조선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 이후, 사츠우닌씨는 조선호랑이를 Felis tigris mikadoi 라 하였지만, 이것은 브라스의 조선호랑이와 동종이명(동일 종을 이름만 달리 부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조선의 호랑이는 경무국 조사에 의한 대정 8(1919)부터 동 13(1924)에 걸친 조선호랑이 포획 지방별 표를 보아도 분포상태를 알 수 있듯이 함경남북도에 가장 많고, 중부의 경기도/충청북도에는 포획되지 않으며, 남부의 전라남도랑 경상도에서 꽤 포획되고 있다. 따라서, 북조선의 호랑이와 남조선의 호랑이와는 지리적 관계로부터 고찰하여 아종을 달리할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의 수중에는 북조선의 호랑이에 대해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은 관계로 그 점에 대해서는 후일을 도모한다.

 

그래서 남조선호랑이에 관하여 본인은 전라남도 목포의 송도신사(松島神社) 신관 마츠오(松尾)씨가 소장하고 있는 명치 44(1911) 전라남도 불갑산에서 포획된 것을 조사하였다. 모피는 등의 몸 색이 대홍황색(帶紅黃色)으로 불규칙하게 폭이 넓고 선명한 검은 줄무늬가 많이 존재하고 눈//몸의 아랫면은 순백색으로 현저하게 검은 줄무늬가 있지만 허리부위보다는 적다. 꼬리의 기부는 허리와 같은 색이지만 끝 부위에 다가갈수록 옅어져 담황색이 되고 있다. 꼬리의 기부에는 4개의 검은 무늬 고리가, 그 다음 부위에는 6개의 검은 무늬 고리가 있다. 그 측정은 다음과 같다.

 

모피의 측정

두동장(머리와 몸) 1775mm, 꼬리 885mm, 귀길이 100mm, 뒷발길이 280mm

 

두골의 측정

최대길이 290mm, 최대폭 170mm, 눈과 눈 사이 폭 54mm, 윗턱 송곳니 길이 53mm, 윗턱 제2 앞어금니 길이 22mm, 3 앞어금니 길이 34mm, 3 앞어금니 폭 18mm, 아래턱길이 183mm, 높이 86mm

 

그밖에 대표적인 남조선호랑이로서는 목포소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포획된 훌륭한 박제가 있다. 이들 남조선의 호랑이는 전라남도에 많고, 영광군의 월출산 등은 옛날부터 유명한 서식지였지만, 지금은 현저하게 감소하여 절멸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만주호랑이

조선호랑이에 비해 현저히 대형으로, 브라스 씨의 저서에는 입주둥이부터 꼬리 끝까지 395cm에 달하는 개체도 있다고 하고 있으며, 바이코프 씨가 측정한 것으로는 전장 380cm, 무게 720폰드에 달하는 것이 있다 라고 쓰여 있다. 내가 조사한 길림사범학교의 소장품인 길림성 남대산에서 포획된 것은 잇빨의 상태로 보아 아직 충분히 성숙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이 조선의 호랑이보다 컸다.

 

몸의 측정

두동장 1850mm, 꼬리길이 1000mm, 귀의 길이 90mm, 뒷발바닥의 길이 225mm

눈과 눈사이의 폭 60mm, 윗턱 송곳니 길이 57mm, 2앞어금니길이 22mm, 3앞어금니길이 32mm, 14mm, 아래턱길이 200mm, 높이 91mm

 

바이코프씨가 측정한 나이 든 개체의 만주호랑이의 머리뼈는, 최대길이 400mm, 최대 폭 91mm

 

만주호랑이의 등의 색깔은 조선호랑이와 비교하여 노란색이 짙고, 검은색 줄무늬가 선명하지 않다. 또한 털도 길고, 허리와 옆구리의 털은 50mm에 달한다. 그러나 그 털은 부드러우면서도 두텁다.

 

호랑이의 습성

호랑이는 평소 고독한 생활을 보내며, 낮에는 자신의 주거지역인 물가의 울창한 숲이나 바위굴에 숨어 있다. 특히 조선, 만주의 호랑이의 서식처는 바위굴이 많다. 밤에 흔히 수십 리나 걸어 돌아다니고, 아침이 되면 자신의 주거지로 돌아간다. 이것을 하루에 천리 가서 천리 돌아온다든지, ‘천리의 길을 넘나 다닌다라고 형용한 것이다. 먹이는 사슴, 노루, 사향노루, 너구리, 토끼 등의 초식동물이랑 가축이다. 특히 겨울이 되어 먹이가 부족해지면, 인가 근처에 나타나 사람과 가축에 피해준다. 때문에, 이들 맹수가 있는 지방에서는 밤이 되면 그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밤에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호랑이가 야생동물이랑 가축을 습격할 때는 정면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 미행하여 점차 접근한 뒤, 성공할 기회를 포착하여 달려들어 우선 머리에 앞발로 일격을 가하여, 먹이동물을 실신 상태에 빠뜨린 다음, 다음으로 앞다리에 --- 그 동작의 민첩성은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재빠른 동작이다.

 

그러나 소와 같은 큰 먹이동물은 한번에 쓰러뜨리기가 불가능하여 먼저 앞다리에 일격을 가하여 걸을 수 없도록 한 뒤에, 작업에 들어간다고 전해진다.

 

본인은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호랑이 서너 마리가 협력하여 소를 산으로 몰고 간 다음 죽여 먹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랑이는 흉폭한 듯하지만 의외로 겁이 많은 동물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다만 식인호(食人虎), 즉 한번 사람을 먹은 경험이 있는 호랑이는 빈번히 사람에게 달려든다. 그러한 호랑이에 의해, 인도에서는 매년 천 명 가까운 사람의 목숨이 빼앗기고, 심각한 지역에서는 위험 때문에 마을 전체가 그 지역에서 피난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그러한 무서운 호랑이가 매우 희귀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드물게 있었다고 보이며, 브라스씨가 쓴 책에는 조선의 식인호에 대한 기사가 적혀 있고, 그 내용 중에는 브라스씨 본인의 금강산 여행 중에 마가암(摩珂庵)에서 스님이 밤에 호랑이에게 납치되어 버린 일 등이 적혀 있다.

 

작년 본인이 압록강을 내려갈 적의 배 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중국의 팔도구(八道溝) 오지의 삼림지대 수목 벌목지에서 상처 입은 호랑이가 한 번 중국인을 먹고 난 후부터 식인호가 되어 그 후에는 중국인이라 보이면 달려들어 잡아 먹어버린다고 전해져서 대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흰옷을 입은 조선인을 보면 도망간다고 전해지는 일이다.

 

호랑이는 수영을 잘하고, 좁은 해협 등은 헤엄쳐 건너간다. 재작년 겨울, 황해도 해주 근처에서 호랑이가 바다를 건너가다가 추위 때문에 몸의 자유를 잃어 주검으로 해안에 발견되어 소문이 자자했다(필자주 : 아래 신문기사 참조 1925. 1. 황해주 해주 대호 익사 조선신문(일어)).

보통 호랑이는 한 번에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를 낳는다. 함경북도 단천에서 포획된 암컷호랑이의 배를 갈라보니 출산 가까운 태아가 2마리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현재 경기 제1 고등 보통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이미 어미의 태반 내에 있을 때부터 아름다운 호랑이 무늬를 갖고 있다.

 

호랑이와 인생

일본에서는 호랑이라고 하면 조선, 조선이라고 하면 호랑이, 그리고 카토 키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무용담 등을 연상하고, 조선에는 도처에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옛날에는 매우 많은 개체가 살고 있은 듯하여, 호랑이의 피해 때문에 빈번히 산을 태워버렸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산림황폐의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같은 오래된 책으로부터 최근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또한 지방의 속담 등에서도 호랑이에 관한 일화가 매우 많이 실려있다.

 

요약하면, 조선에는 호랑이가 많고, 맹렬한 피해를 겁내어 호랑이를 신격화하여 산군(山君), 산웅(山雄), 산령(山靈) 등으로 숭배하여 모시고, 또한 백수의 왕, 절대로 건들어서는 안될 영물로서 존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금도 집의 작은 문에는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둔 집이 많다. 그리하면, 귀신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할 때 신부의 가마 위에 상류사회에서는 진짜 호랑이의 모피를, 중류사회에서는 호랑이의 그림을 그린 모피를 걸쳤다. 그리하면, 나쁜 자가 접근하지 못한다고 전해 왔다. 그리고, 호신부처럼 호랑이의 이빨이랑 발톱을 허리띠에 달고 있다. 그러한 속설이랑 미신 등이 있을 정도로 이전에는 호랑이가 많았음에 틀림이 없지만, 현재는 포획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적으며, 사람과 가축의 피해가 평균 매년 사람이 5, 6인 가축이 사오 십 마리에 불과한 상태이다. 이것은 산림을 불태워, 호랑이가 살 수 있는 곳을 없애버렸고, 호랑이의 모피가 매우 값나갔기 때문에 덫이나 총기로 눈 위나, 습한 땅 위에 나타난 발자국을 뒤쫓아 호랑이의 있는 곳을 찾아내 잡았기 때문이다. 덫은 나무상자를 호랑이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설치하여, 한 곳에 입구를 만들어 그 속에 돼지를 줄에 매어 넣어 둔다. 보통, 그 입구는 안쪽을 향하여 열려 있고, 호랑이가 안에 들어와 돼지를 물어 당기면 연결된 줄이 작동되어 문이 자연스럽게 닫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조선호랑이는 시베리아, 만주호랑이와 같이 몸이 크고 털은 두터우면서도 매우 아름다워 중국인이랑 서구인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좋은 것은 한 마리 천 원이나 하였으며, 뼈만도 수백 원이나 나갔다. 따라서 큰 것을 한 마리 잡으면 대단한 가격이 되어, 조선의 모피 동물 가운데 호랑이의 발바닥에도 미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모피는 바닥 깔개나 의자 깔개로 사용되고, 뼈는 한약 또는 강장제로서 조선인, 중국인 사이에 대단히 진귀하게 취급된다.

 

12. 호랑이 발톱이나 송곳니로 만든 호신구(護身具)와 임진왜란때 잡혀 간 조선호랑이 아래턱 뼈(일본 지인 사진 제공)

3. 조선시대 양반집 여식의 결혼 풍습시집가서 귀여움을 받고 잘 살아라는 전통 풍습에 따라 가마 위를 덮은 호랑이 가죽 (출처 :@deginerparty)

4. 1925213일 황해주 해주에서 익사하여 죽은 대호 보도 기사(조선신문 일본어)

 

국내 유일 동물원 소속 박제사인 경력 10년차 윤지나 박제사가 서울대공원에서 박제 표본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대공원 서울신문 제공 2022.1.6

 

<한상훈박사의 한반도 야생동물 이야기 17.() - 세 번째 이야기>

3) 한반도 자연과 범을 사랑했던 푸른 눈의 이방인, 20세기 극동아시아 최고의 사냥꾼유리 미하일로비치 얀콥스키, Yuri Mihailovich Yankovsky’

 

노비나(Novina) : 예술, 지식,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를 뜻한다고 알려져 있고, 조선 함경북도 주흘온천 인근 산 계곡에 유리 얀콥스키가 설계하고 건축한 실낙원

구한말 500년에 걸친 쇄국의 문이 열리자 외국인 선교사와 서양 각국의 대사와 가족, 군인, 교육자와 지식인, 기술자들이 한반도를 찾아왔다. 그들 중 일부는 한반도를 여행하면서 당시 조선 사람들의 생활, 풍습, 문화, 종교를 비롯하여 자연과 야생동물에 대한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글로 써 남겼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으로 가입이 허락된 이사벨 버드 비숍의한국(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 / 필자 주 : 살림출판사(1994)와 집문당(2000)에서 각각 번역서가 출판되어 있다 / 은 외국인들의 조선 기행문 가운데 백미에 꼽힌다. 한성 대로를 호랑이가 다니고 왕이 거주하는 궁 안에도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번 글의 주인공은 3대에 걸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군사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비적이 들끓는 혼돈의 땅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한반도 북부 함경도 등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를 사냥하고, 한반도와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 얀콥스키반도에서 최초로 사슴 사육 농장을 개척한 폴란드 귀족 집안 출신 얀콥스키 일가의 2대 가주 유리 미하일로비치 얀콥스키에 관한 글이다. 양콥스키 가족과 호랑이 사냥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페친은 아래 책자와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The Tiger's Claw" - Tiger hunting in Korea, 1956Burke Publishing 발간, 222페이지. "Mary Linley Taylor(1889.4~1982) 영국 연극배우, 성인이 된 후 한국에서 대부분 거주" - 필자 주 : 유리 얀콥스키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

 

얀콥스키 일가의 사람들 (2009)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 일본어.

The greatest tiger hunter, By Robert Neff. 2018-06-24. The Korea Times.

https://www.koreatimes.co.kr/.../2020/05/715_251092.html

이외 러시아에서 3대 가주 발레리가 쓴 유리 얀콥스키에 관한 책도 있음. , 러시아 어.

Мой отец Юрий Янковский (1990) [My father Yuri Yankovsky](참조)

 

1대 가주

Michał Jankowski or Mikhail Ivanovich Yankovsky (September 24, 1842 October 10, 1912) was a Polish szlachta nobleman who settled in the Russian Far East after serving a sentence in Siberia for participating in the January Uprising of 1863. After being released in 1868 he settled in the Russian Far-East in Sidemi, Primorsky Krai, in a region now known as the Yankovsky Peninsula where he established a horse-breeding farm, reared deer for their antlers, established ginseng plantations, and became a well-known hunter and naturalist. He collected specimens of fauna and flora for museums and collectors and many species were named after him including Jankowski's bunting.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장뇌삼 재배, 말 사육, 최초의 사슴 사육 농장을 건설.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치안이 부재한 불법지대로 만주의 비적무리가 수시로 넘어와 약탈과 살인을 하였는데, 1대 가주는 마을 치안대를 만들어 비적의 습격을 막아 지역 치안과 안전을 지켜내고, 후에 얀콥스키반도로 이름붙여진 지역에 휴양지를 건설하여 해외 각국에서 손님을 맞이하였음. 가까운 친척으로 20세기 중엽 유명한 미국 개성파 영화배우율 브리느(Yul Brynner) Yul Brynner, original name Yuliy Borisovich Bryner, (born July 11, 1920?, Vladivostok, Far Eastern Republic [Russia]died October 10, 1985, New York, New York, U.S.), Russian-born stage and film actor’가 있음. 러시아 연해주 북한 접경지역 얀콥스키반도에 있는 얀콥스키박물관을 방문하면 옛 사진을 볼 수 있음.

 

2대 가주

George (Yuri or Jerzy) Mihailovich Yankovsky

(Russian: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Янковский) (5 June 1879 - 13 June 1956) was a Russian tiger hunter in Manchuria, a son of the Polish settler in the Russian Far East, Michał Jankowski. He was known

as one of the most prolific hunters of Amur tigers and wrote a book on tiger hunting in 1940 called Полвека охоты на тигров

[Half a Century of Tiger Hunting]. The family moved from Sidemi, in Primorsky Krai across the border into northern Korea following in 1922. After the Soviets entered northern Korea, he was arrested in 1945 and sent to the Siberian Gulags where he died. His life became better known to the English speaking world after a biography, The Tiger's Claw, written by English actress in Korea, Mary Linley Taylor, was published in 1956.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혁명 발발이후 연해주 얀콥스키반도에서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주흘군 주흘온천 인근 계곡으로 이주 사슴농장을 설립. 1945년까지 거주하다 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러시아 연해주 수용소로 이송 수용소에서 죽음.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를 방문한 외국 수렵가, 박물학자, 동물학자와 교류 및 채집(수렵) 안내하기도 함. 1927년 호랑이 수렵차 내한한 미국 수렵가 일행 선봉대로 호랑이 사냥 참가. 1935년 한반도 조류 채집을 위해 방문한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아래 글 참조)의 요청을 받아 조류 채집에 아들 발레리와 참여함. 2차 세계대전 발발에도 한반도 북부에 남아 지내다가 종전후 북한에 들어 온 소련군에 의해 일본 정부 협력자란 죄목으로 말년을 수용소에서 보내다가 옥사함. 죽기 2년전 아들 발레리와 14~5년만에 수용소에서 재회하였다고 함. 다른 관련 글에서는 형기 만료후 가족이 기다리는 방향과 정반대의 북한의 옛집을 향해 러시아와 북조선을 잇는 국경 핫산지역의 철도 위를 걷다가 죽었다고 하는 글도 있으나 이는 그의 한반도 애정을 과장하여 감성적으로 포장한 것으로 사료됨.

 

3대 가주

Valery G. Yankovsky (May 15, 1911 April 17, 2010) was a Polish-origin Russian writer and a sharpshooter. Born in the Russian Far East, his family moved to what is now North Korea, where he spent many years in the Gulags. There he wrote many accounts of his family and life in the region. (Wikipedia 인용)

1945815일 광복후 북한에 들어 온 소련군에 의해 일본 정부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젊은 시절 20년 이상 수용소에서 청춘을 보냄. 석방후 많은 책을 저술하였음.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40년대 발레리 얀콥스키는 일본 정부로부터 거금(당시 일화 10,000)을 줄테니백두산호랑이를 죽여(암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신은 네발로 걷는 호랑이만 사냥한다고 거절하였다고 하며, 여기서 백두산호랑이는 백두산일대를 거점으로 빨치산 항일운동을 하며 일본군을 무찔렀던젊은 김정일의 별명이었다고 함 (출전 : 로버트 네프의 가장 위대한 호랑이 사냥꾼 글에 인터뷰하였다는 언급 내용이 있음. The greatest tiger hunter, By Robert Neff)

 

죽기 직전 교육방송 이연규 피디 연출 1935년 꼬레아 다큐에서 직접 인터뷰 한 것이 최초이자 마지막 한국 방송과의 만남

스텐 베리만 Sten Bergman (1895 1975)

스웨덴 출신 동물학자 겸 탐험가. 특히 조류학자로 유명

러시아 캄차카반도의 조류에 관한 책을 썼고, 자신의 한반도 채집 기행기 “In Korean Wild and Village (1938)”- 신복룡 번역 한국의 야생동물지 집문당 발간 - 를 귀국 후 집필하여 발간

 

스웨덴 구스타프(Gustav) 왕자의 명을 받고 한반도를 방문하여 주로 북한지역에서 야생동물채집을 하고 그 표본과 채집품은 스웨덴왕립자연사박물관으로 보냄. 채집품은 조류가 약 380종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살아있는 하늘다람쥐를 스웨덴 집으로 가져가 사육하기도 하였음. 유럽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 기차를 타고 여행 끝에 1935221일 서울 도착. 1년 체류후 1936년 귀국. 동행으로 스웨덴의 일류 표본제작가 훼크비스트(Harald Sjöqvist)를 대동하여 입국 후 곧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시나조류연구소를 방문하여 한반도 조류 정보를 수집하여 다시 한반도에 와서 함경도 지리에 능숙한 일본인 사냥가 후지모토 겐지(藤本源治) - 1922년 함북 경흥에서 호랑이 포획 - 를 고용하여 북한지역 채집 여행 떠남. 주을온천에 캠프를 치고 함경도 특히 백두산일대의 사냥을 시작. 당시 북한 지역에서 거주하던 동북아시아 일급 사냥꾼인 유리 얀콥스키(Yuri M. Jankovski) 부자를 고용하고 일본인 사냥꾼 요시무라(吉村) 추가 고용.

 

북부지방 채집을 종료한 뒤 지리산를 탐사하고 제주도의 야생동물 포획도 함.

2010524~26일 교육방송에서 3부작 다큐멘터리 제작 방영.

제목 : 1935 코레아, 스텐 베리만의 기억(이연규피디 연출, 자문 한상훈박사)

5241- 코레아의 산과 들에서

5252- 잃어버린 땅, 이어지는 삶

5263-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주을온천(현 경성온천)

 

경성온천(鏡城溫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376호이다. 경성군 하온포로동자구에 있다. 원래 경성읍의 옛 지명은 주을읍이었기에 주을온천(朱乙溫川)으로 불렸으나, 북한이 1952년에 군의 중심지에 있는 주을읍으로 군청을 이전하여 그 중심지를 경성읍으로 삼았다. 하온포로동자구는 원래 주을읍에 속했던 지역으로 지금의 경성읍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주을은 여진족의 이름이니 경성으로 바꾸라는 김일성 지시에 따라 1981년에 경성온천으로 바뀌었다.[1] 모래온천이어서 경성모래온천으로도 불린다. (이상 위키백과에서 인용)

 

1. 1대 가주 미카일 얀콥스키의 동상(러 연해주 얀콥스키반도 마을)

2. 유리 얀콥스키와 아들 3형제 그리고 조선표범(사진 @얀콥스키 가족 아카이브)

3. 유리 얀콥스키와 북한과 만주 접경지역에서 잡은 호랑이 포획물 (사진 @얀콥스키 가족 아카이브)

4. 예술, 지식, 자유를 사랑하는 실락원 노비나 (사진 @얀콥스키 가족 아카이브). 한반도 북부 주흘온천 근처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주을온천 인근 계곡에 설립한 '노비나' 실락원의 사슴 사육 농장과 유리 미하일비치 얀콥스키 (1920년대)

5.. 1927년 미국인 한국호랑이 포획 수렵단의 선봉대로 함경북도 현지에 먼저 도착한 유리 얀콥스키 관련 기사(1927-11-09 조선신문 기사)

6. 스텐 베리만이 찍은 유리 얀콥스키와 조선표범 2마리 (1935) 사진 출처 Sten Berigman In Korean Wild and Village 에서

 

<한상훈박사의 한반도 야생동물 이야기 17.() 네 번째 이야기>

 

(虎豹)이 없는 일본에서 일본인들은 한국(조선)의 범(虎豹)을 향한 동경심(憧憬心)이 유달리 강하다. 이름에 (일본식 발음 Tora)를 쓰거나, 동경 미나토구(港區)의 토라노몬(虎之門) 지명, 건물, 프로야구팀 한신(阪神)타이거즈, 만화, 2차 세계대전 일본 패전의 단초가 된 태평양 미일 대해전 토라()-토라()-토라() 영화 등 다양한 곳에서 범(虎豹)에 관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연유인지 확실치 않으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때 왜인 무장 카토 키요마사(加籐淸正)가 조선에 건너가서 조선호랑이를 다 잡았다고 전해지는 속설이 있고 지금도 일부 일본인들은 태연히 그렇게 이야기한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무역과 상선(商船) 사업으로 성공하여 대부호가 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山本唯三郞)의 조선호랑이 맹호정벌군(猛虎征伐軍) 이야기가 있다.이번 글에서는 이들 두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조선호랑이 토벌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4) 한국(조선)호랑이 씨를 말렸다고 알려진 카토 키요마사(加籐淸正)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山本唯三郞)의 숨겨진 이야기

4-1) 카토 키요마사(加籐淸正, 1562725~161182)

어릴 때 아명이'토라노스케'(虎之助)라고 불림.

일본 큐슈(九州) 쿠마모토(熊本)지방 영주(領主). 16세기 말 춘추전국 일본통일을 최초로 성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216~1598918) 가신(家臣).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죽은 주군(主君)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편(요도기미 와 이시이(石井) 일파)을 배신하고 반대파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편으로 갈아 타, 토쿠가와가 승리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영주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결국 토쿠가와 2대 장군(將軍)의 눈 밖에 벗어나 재산과 영토를 전부 몰 수 당하고 멸문함.

 

지금도 불문율처럼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戰場)진정한 남성의 세계로 전장(싸움터)에는 절대 여자를 데려갈 수 없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운 일본 영주와 무사(武士)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 무장의 곁에는 창을 들고 서 있는 어린 미소년들을 2~3명씩 몸종으로 데리고 다니는 관습이 있다. 사실 이 소년들은 밤에 잘 때도 무장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다. 즉 이성 대신 동성과 잠자리를 하며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30대 한창 혈기 왕성한 카토 키요마사는 조선에 어린 소년 몸종을 데려갔고, 그 가운데 특히 애지중지하는 어린 미소년이 있었다. 어린 몸종 소년들은 전장에 나가지 않고 본진에 남아 무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어느 날 본진에 호랑이가 내려와 하필이면 카토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미소년을 물어 가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다. 전장에서 본진에 돌아와 소년이 물려간 소식을 접한 카토는 노발대발하여 군사들을 풀어 소년을 찾았지만 이미 소년은 호랑이에게 뜯겨 먹힌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평소에도 불같은 성격의 카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전쟁이고 나발이고 소년의 원수를 갚겠다고 호랑이 사냥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를 잡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복수에 눈멀어 한 참 전쟁 중에 호랑이 사냥을 하였다는 소문이 토요토미의 귀에 들어갈 것이 두려운 카토는 꾀를 부려 오히려 토요토미의 건강과 장수(長壽)와 불임를 위한 신비한 영약으로 알려진 진귀한 호랑이 고기를 바치기 위해 호랑이 사냥을 하였고 성공하여 소금에 절인 조선호랑이 고기와 가죽, 뼈 등을 툐요토미에게 서신과 함께 보냈다. 이를 받아 본 토요토미는 기특하다고 치하하고, 조선에 있는 무장들에게 카토를 본 받아라고 오히려 질책하여, 그 이후 조선호랑이 사냥이 성행하였고 7년간의 임진왜란 동안 약 십여 마리의 조선호랑이가 일본 무장들에게 잡혀 일본으로 보내졌다.

 

카토의 지극한 정성(?)이 깃든 호랑이고기를 시식한 것으로 짐작되는 노령의 토요토미는 그 영험인지 알 수 없지만,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나이 60에 어린 첩으로부터 갖는 행운을 누린다(일설에는 토요토미가 아닌 가신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음). 하지만 토요토미도 1598년 천수를 다하고 그의 자식과 일가는 얼마 후 토쿠가와(德川家康)일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멸문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 카토 키요마사의 조선호랑이 사냥은 어린 몸종 미소년의 원한을 갚기 위한 정인의 복수극이 당시의 조선 침략전쟁의 사회적 여건을 타고 시대극처럼 회자되어 오늘날 웃픈 전설? 기담을 남기게 되었고, 이를 진짜처럼 믿는 일본의 사회적 풍토가 메이지유신 이후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설(출처: https://oldconan.tistory.com/32811 [올드코난 (Old Conan)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인용]은 카토가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는 것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그 신하의 일화이지만 후에 가토가 직접 잡았다고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호랑이 사냥은 카토가 명령을 내렸다고 보이는데, 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임 치료에 호랑이 고기가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키요마사가 갖다준 호랑이 고기 덕분인지 히데요시는 늦은 나이에 아들 히데요리를 얻는다.

 

4-2) 야마모토 타다사부로(山本唯三郞)

1917년 조선에 대규모 맹호정벌군으로 조선호랑이 사냥을 한 것이 소문나 일본 사회에서는 虎大尽(일본식발음 ToraDaiZin)/ 호랑이부호라는 별명으로 유명

1917년 한국에서의 기행은 아래 기사와 사진을 참조하기 바람. 그의 조선 맹호징벌군 기행문정호기(征虎記)’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이하 야마모토로 부름)는 일본 오카모토출신 향토무사 사카나리 마사유키(坂斉正雪)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야마모토(山本)일가에 양자로 보내져, 친형의 도움을 받아 동지사(同志社)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가 없어 동지사대학을 중퇴 삿포로농학교를 졸업한 뒤, 홋카이도개척사업에 종사하다 대륙웅비(大陸雄飛)의 꿈을 좇아 중국 천진(天津)에 거점을 둔 일중무역회사 쇼우쇼우양행(松昌洋行)에 이전하여 석탄으로 거금을 벌고 선박업에 뛰어들어 큰 이익을 남겨 대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성격이 직선적이면서 권력욕이 강한 야마모토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제무역 호황에 편승하여 당시 4천만엔(지금 가치로 4~5천억)의 현금 자산을 보유할 정도로 성공하여 1916년 지금의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상대 후보에게 패해 낙선한다. 5년 후 재도전하였지만 역시 참패하게 된다. 울분을 참지 못한 야마모토는 기분전환과 동시에 첫 선거에서 자신을 이긴 야마타니(山谷虎三)의 이름 를 징벌하여 복수하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부를 이용한 대규모 조선호랑이 징벌군을 결성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촌극을 벌였다고 일본 동문회에서 평가하고 있다.

 

야마모토의 기행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를 소개하면 매일 밤 기생파티를 즐겼는데 여자 도우미 앞에 돈 다발을 쌓아놓고 지폐다발에 불을 질러 태우는 퍼포먼스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암튼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후 불어닥친 불황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자산을 탕진하여 그의 왕국은 1대에 사라진다. 그의 오오사카(大阪) 대저택은 토지 면적만 37천평이었다고 한다.

, 야마모토의 조선호랑이 징벌군 소동은 금권에 이어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해 도전했다 낙선한 대부호의 개인적 사심의 권력욕을 만끽하기 위한 기분전환용 소위 우리나라의사또 행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비판은 오마이뉴스 이순우기자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끝으로 그의 조선호랑이 2마리 행방은 처음 약속과 달리 1마리는 일본 황태자에게, 다른 1마리는 모교 동지사고등학교에 기증하여 지금도 동지사고등학교에 가면 전시되어 있고, 몇 년전 조선호랑이 박제 반환 운동을 하는 한국인 시민단체의 행동이 일본에서도 사회적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참고자료)

日本同志社學校人物志 90.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일본어). 本井康博

2003. 4. 12. 오마이뉴스 이순우기자의 기사와 사진

 

누가 조선호랑이의 씨를 말렸나?

호육(虎肉)을 시식한 야마모토 정호군(山本 征虎軍)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사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

2014. 4. 11. 한겨레 조홍섭 환경전문기자의 기사

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벤트, 시식회까지 한 달 기록

 

조선 호랑이 포수 총동원 150명이 전국 뒤져, 호랑이와 표범 2마리, 승냥이 사냥, 경성과 도쿄에서 요인 불러 호랑이 고기 시식회 열어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기여

http://ecotopia.hani.co.kr/?document_srl=184517

 

정호기 한글번역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014

한상훈박사의 자료 조사 결과 :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자신의 기이한 행동을 자랑하기 위해 사진과 일본 기행문 자료집 책자를 발간하도록 돈을 냈으며, 이 작업을 한 당사자는 다른 사람으로 일본 귀국 후 요시우라 류타로(吉浦龍太郎)에 의해 정리 집필되어, 야마모토는 저자가 아니라 자비 발행인이다. 나는 원본 정호기 책자를 1996년 가을 홋카이도대학교 중앙도서관 서고 깊숙한 책장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언젠가 이 책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생각했으나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에서 기사화 하였고, 마침 이은옥군이 번역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의 2003년 번역 글 일부도 여기 소개한다.

 

* 표범과 호랑이 포획 경위

1. 5

키쿠타니(菊谷) 포수는 이미 16일부터 용신리의 산중에 들어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맹수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17일 오전 9시에 더욱 큰 발자취를 발견하였다. 흔적은 매우 생생하였고, 표범의 것이라는 확인을 하기 위하여 멀리서부터 에워싸는 진형을 만들고, 11시가 되자 몰이꾼과 포수의 포진이 완료되었다.

 

즉시 추격을 시작하여 산마루()를 주시한 체 기다린 지 오후 3, 돌연히 큰 표범이 출현하였다. 키쿠타니는 엎드려 50() 근거리에 접근하여 1발을 쏘아 우측 뒷발을 맞췄다. 표범이 분노하여 돌진해 올 때 제2탄은 조선인 포수에 의해 발사되었다. 이것 역시 우측 옆구리부위를 관통하자 함께 겁먹지 않고 포효하며 돌진해 오면 어떤 수단을 강구할지 방법을 생각하여, 또 한 명의 조선인포수에게 옆의 소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매달리게 하여 표범이 근소한 물체를 이용하여 튀어 오르면 속임수가 있는지도 모르는 표범은 맹렬히 나무 아래까지 접근하여 포효하며 포수를 물려고 하려다 걸려 머리가 깨져, 2번에 숨을 거두었다. 키쿠타니는 1년에 호랑이 5마리, 표범 2마리를 잡은 과거의 훌륭한 경험이 있으며, 영흥에서 거주하는 후방부대의 상등병이다.

 

석왕사에서 머무는 동안 제3반의 백운학포수가 7척 크기의 암컷 호랑이를 포획했다는 급전을 받음

- 백운학포수는 제3반의 주장으로서 10일 성진에 상륙하여 즉시 산을 향해 10리 들어갔을 때 마침 신강동 주둔의 헌병 파견분소로부터 학서면의 한 부락에 맹호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에게 피해를 준다는 내용의 통지를 접한다. 지체없이 함경의 남북양도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남운령으로 달려가 그 가지 산줄기의 인적미답의 곳에 이르러 이미 쌓인 눈이 수척에 달하는 눈을 발로 헤치며 20일 오후 4시 우연히 호랑이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진열을 정비하여 몰이꾼 10명을 산록에 대기시키고 스스로 지맥의 정상에 서서 기회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중복의 눈에 덮여있는 억새로부터 1마리가 출현하여 산정을 향해 도주할려고 하는 것을 백은 약 40보의 단거리까지 접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제1탄을 등에, 2탄을 복부에, 3탄을 목에 쏘아 쓰러뜨렸다.

 

1반의 분대로부터 호랑이 한 마리를 포획했다는 급보를 받음

2반으로부터 바위굴속에서 호랑이 새끼 2마리를 발견하여 그 어미를 포획하기 위해 추적하다가 우연히 멧돼지 2마리를 잡았다는 보고를 받음.

전라남도의 제7반은 광주의 동쪽, 대음산 부근에서 한 마리의 호랑이를 발견하고 극력 추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음.

 

1반으로부터 50관 무게의 멧돼지 한 마리 보내옴.

최순원은 제1반의 대원으로 별도의 팀을 만들고자 주장 강용근과 헤어져 11일 신포에 상륙하여 도보로 북청과 이원을 지나 북면 죽암동에 들어갔다. 부하로는 박대선과 한석조가 있다. 12일부터 사냥에 들어가 발자국을 발견하지 못하고, 13일 죽암동의 동쪽 2리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산은 험준하여 서천군과 이원군의 경계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표시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14일 새벽에 일어나 다시 동일지점을 향하여 전혀 산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산에 이른다. 거대한 바위가 산의 중복에 솟아 있고, 물은 계곡에 소리내어 흐르며, 낮인데도 불구하고 약간 어두운 것도 무시한 한석조가 호랑이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유유히 길을 거슬러 산정을 향하고 있었다. 앞을 먼저 우회하여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거리는 300, 충분한 사정거리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삼아 한 발을 쏘아 운좋게 등에 명중시켰다. 호랑이는 아픈 나머지 포효하고 그 소리는 전 산을 진동시켜 몰이꾼 1명이 공포로 주저앉는 순간을 훔쳐 홀연히 근처의 바위 굴속으로 들어가 버림. 바위굴은 입구가 2척이 조금 모자랐다. 대반석의 밑 둥에 있고 --- (중략)

바위굴 입구를 큰 돌을 굴러 막아 호랑이가 탈출하지 못하게 한 뒤, 석공을 불러 굴 옆을 공사하여 구멍을 뚫어 총을 싸 열흘만에 잡는데 성공하였다.

 

2. 8

* 포획

경성에 포획물을 기차 화물칸 1량을 가득 채우고 돌아온 뒤, 급히 혼다(本田)포수로부터 승냥이 1두가 급송되어 옴.

는 조선의 해수로서 1

 

(사진 설명)

1. 카토 키요마사와 조선호랑이 그림(일본 교토대학 소장)

2. 카토 키요마사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는 조선호랑이 아래턱뼈. 현재 나고야시 토요토미키요시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3. 1917년 조선호랑이를 잡은 조선 명포수 백운학

4. 1917년 조선호랑이를 잡은 조선 명포수 최순원과 야마모토

5. 야마모토의 정호기 표지 (이상 정호기 원본에서)

1917-11-04 每日申報 장쾌한 맹호정벌군 - 이윤회 강용근 맹호 포획사진과 기사
1917-11-07 매일신보 - 맹호정벌군 4 - 호랑이와 강룡근포수

6-7. 관련 신문기사(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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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포호정책

정도전鄭道傳(1342~1398)에 따르면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였다. 하늘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식량이었기에 조선은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농사와 가축 사육이라는 생산 경제 체제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농정책을 추진한 이유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논의 면적과 소의 마릿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농경지를 더 늘려야 했으며, 더 많은 소를 기르려면 꼴을 베는 땅을 더 많이 확보해야 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언제나 황무지 혹은 산림전택이라 불리던 야생의 공간을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가용공간을 확장하는 농지개간은 야생의 공간에 생성되어 있던 야생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한반도 야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에 맞서야 했다. 범과 표범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서식 영역을 지키려 했고, 사람들은 소를 이끌고 야생의 공간에서 농경지를 마련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소가 호랑이에 물려 죽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를 호환虎患이라 했다. 호환은 경작지를 넓히려는 사람과 서식지를 지키려는 범과 표범이 충돌한 결과였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1

 

백성을 하늘로 삼는 민본주의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 생산을 위한 농지 개간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한반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시베리아호랑이와 아무르표범이 사람과 충돌하여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잦아지자 민본주의를 우선한 조선은 그 초기부터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포호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호랑이와 표범의 숫자를 줄여 나갔는데,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고급 병종인 갑사 중에서도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것을 전담하는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양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착호갑사는 태종 16년인 1416년에 그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며 이를 제도화 한 것은 세종 3년인 1421년으로, 초기에는 당번과 하번을 각각 20명 씩으로 나누어 운영하는 정도였으나 갑사의 정원이 늘며 착호갑사의 수도 증가해 성종 16년인 1485년에 이르러 그 수가 440명이 되었고 착호갑사 체제가 완비된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새로히 생성된 겸사복(兼司僕), 내금위(內禁衛), 우림위(羽林衛) 등 왕의 친위병인 금군도 도성에 나타난 호랑이의 사냥에 앞장설 정도였는데, 특히 세조는 착호대장, 착호위장, 착호장 등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장수를 임명하여 수렵대회를 겸한 군사 훈련인 강무(講武)에서의 사냥을 지휘하게 할 정도였다.

 

조선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조직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조직이 마련되기 전에는 지방에서 호환이 발생할 시 군 지휘관이나 고을의 수령이 미리 강무를 통해 호랑이 사냥법을 전수받아 호랑이 사냥에 나서야 했으나 호랑이 사냥법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에 성종은 1472년에 "범을 잡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착호인(捉虎人)을 뽑아 지방 군현에 착호인을 배치하고 함정과 장비를 관리하는 함정감고와 도감고를 설치했으며, 16세기에 들어서는 강무에서 참여한 지방군에게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법과 사냥도구를 만들어 설치하는 법을 가르치는가 하면 국왕이 지방 거주자 중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특이한 사냥법이나 재능을 지닌 이를 수시로 도성에 불러들여 그 방법을 파악하고 지방에 전파시켰다.

 

착호인의 배치는 주와 부에는 50. 군에는 30. 현에는 20인으로 두었는데, 성종 때 제작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군현의 크기에 따라 계산할 시 착호인의 숫자로 경기도에 1,440. 충청도에 1,350. 함경도에 1,080명으로 총 9,900여명이 계산되며 한반도의 면적에 맞추어 계산하게 되면 한명의 착호인이 22km2, 사방 5km 정도의 범위를 두고 호랑이와 표범을 쫓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으로 계산된다.

 

조선의 포호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중에 삼수병으로 편성된 1,000여명의 훈련도감 군사 중 조총을 사용하는 병사들을 호랑이 사냥에 투입시키기도 할 정도였으며 숙종 25년인 1699년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문에 의해 경기 지역에 호랑이가 출몰할 시 사냥을 담당하도록 하는 사냥 담당 지역을 설정하여 호랑이가 나타난 지역에 따라 투입되는 부대를 달리하는 착호분수제(捉虎分授制)가 시행되었는데, 착호분수제에 의해 파견되는 국왕 파견 포수들이 사냥을 주도함에 따라 호랑이 사냥의 성공률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서 지방의 호랑이 사냥을 위한 조직이 더욱 세밀하게 나눠져 각 면마다는 호랑이 사냥을 주도하는 착호장(捉虎將)을 두고 리마다는 겨울철에 호랑이의 발자국을 쫓는 것을 담당하는 심종장(尋踵將)을 두었다. 문종 즉위년인 1450년에서 영조 41년인 1765년까지 면이 36, 리가 266개 늘어난 만큼 착호장과 심종장의 숫자도 늘어난 것은 물론, 각 지방의 병영에서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산포수(山砲手)라 불리는 호랑이 사냥꾼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현종 15년인 1674년에 5,000명이던 착호군은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11,000여명으로 크게 늘었고, 함경도에서는 18세기까지 7, 000여명의 산포수가 착호군으로 활동했는데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병영의 중심 군사가 되어 그 수가 3만여명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들 산포수는 거주지의 포연대(捕捐隊)에 편성되어 평시에는 호랑이 사냥을 하다 유사시에는 병영의 군사로 동원되었다.

 

가죽을 통한 개체수 추정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포호 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고 호랑이와 표범 사냥을 강제하기위해 호피와 표피를 바치도록 했다. 호피와 표피는 범을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활용되는 동시에 비싸게 거래되는 상품이었는데, 표범의 가죽인 표피는 무늬가 아름답고 부드러워 시장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지만 호랑이의 가죽인 호피는 두껍고 거칠어 깔개나 덮게 정도로나 사용될 뿐. 실질적인 쓰임새가 없어 시장을 통해 유통시키기 어려운 탓에 포호정책의 시행 이유인 호랑이를 사냥하도록 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하였으나 정부에서는 호피를 바치지 못한 책임자에게 호피값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게 책정하여 거둬들이는 식으로 호피의 인위적인 수요를 만들었다.

 

인조 11년인 1633년에 전라도 무안현감이던 신즙(申楫)이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고을에 매년 3장의 호피와 표피를 할당해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계산할 시 조선의 군현은 대략 330여 개였으며 여러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이거나 한번 제출한 가죽을 연이어 제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피와 표피가 머리부터 꼬리까지가 완전한지를 확인하고 특정 부위에 도장을 찍어 같은 호피와 표피를 연이어 바칠 수 없게 만드는 제도를 마련하였기에 매년 포획되어야 하는 호랑이와 표범의 수는 약 1,000마리였다.

 

조선이 건국된지 200여년이 지난 1633년까지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포획하고도 각 고을에서 연간 3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포획할 수 있었으며, 16세기 말에 일부 지역에서 숲의 개간과 호랑이 사냥의 어려움으로 인해 호피와 표피의 진상을 감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17세기 까지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호피와 표피를 마련해 진상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가정하여 호랑이와 표범의 번식을 통한 증식률과 습성, 새끼의 생존률 등을 감안해 매년 1,000마리가 포획되어도 200여년 간 개체수를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는 개체수를 계산할 시. 대략 4,000~6,000마리 가량의 호랑이와 표범이 조선시대의 한반도에 서식했다는 결론이 나오며, 일제 강점기에 포획된 호랑이와 표범의 비율인 1 : 6.4에서 표범보다 큰 호랑이가 먼저 포획되어 그 수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가정하면 15세기 무렵 호랑이와 표범의 비율은 1 : 4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시행되어 왔던 가죽을 바치지 못하는 고을에 한해 가죽 값에 상응하는 세금을 거워들이는 호속목 제도의 시행을 공인했고, 18세기 후반부터는 호랑이와는 경쟁적 배제 관계에 있던 늑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여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한반도 내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해수 구제사업 - 인간에 해를 끼치는 동물제거를 명분으로 한반도의 포유동물 및 조류의 생태계 파괴 짓거리|작성자 우리나라 역사

8폭 병풍 <월하송림호족도>의 세부 모습. 어미 범이 달라붙은 새끼들 사이에서 피곤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재미있다.

까치호랑이 민화들 가운데 이색적인 명품으로 꼽히는 19세기 검은호랑이 그림(흑호도). 이건희 컬렉션을 추려 선보인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의 호랑이 주제전에 나온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꼬리를 S(에스)자형으로 곧추세우고 사납게 포효하는 흑호랑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특징적으로 묘사한 명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