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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래’(시사인)

by 이성근 2020. 10. 24.

 

Piano Blues 2 - A two hour long compilation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수명(壽命)으로 인식되는 생물학적 죽음은 과학과 산업의 영역이다. 반면 고립, 빈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죽음은 복지의 영역이다. ‘집에서 죽고 싶다는 것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얼굴이 없는 사망자 숫자

1070시 기준 코로나19 국내 사망자는 425명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지만 매일같이 집계되어 공표되는 숫자에는 얼굴이 없다. 요양시설을 중심으로 한 집단감염, 격리병동에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 장례마저 치르지 못한 죽음은 애도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 유례없는 감염병은 우리에게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질문하고 사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웰다잉부터 호스피스 완화 의료, 존엄사 논쟁까지 좋은 죽음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없지는 않았다. 이에 더해 코로나19는 죽음이 사회적 불평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온 현실을 드러낸다. 계층·젠더·장애 유무·세대·사는 지역에 따라 죽음을 맞는 모습도, 죽음을 바라보는 의미도 달라진다. 빈곤한 사람들은 적절한 의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거나 간병인을 둘 수 없어 홀로 집 안에 고립된다. 생계를 위해 일을 쉴 수 없는 환경, 의료자원이 부족한 지방과 소도시에서도 죽음은 다른 모습으로 엄습한다.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임종기 환자의 병실에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진이 붙어 있곤 했다. 딸과 아들과 손주와 반려동물처럼, 일생을 통해 긴 시간 공들여 기른 것들은 생의 거의 유일한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씨의 병실은 조금 달랐다. 씨의 침대맡에는 사람이 아닌 사진이 붙어 있었다. 씨를 담당했던 호스피스 의사 김호성씨는 그 사진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집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집이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면, 죽음은 가장 사적인 시간이다. 흔히들 집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장 안에는 짐작보다 훨씬 다양한 맥락과 현실이 중첩돼 있다. 그 의미를 헤아려봄으로써 죽음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장악한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담론을 사회적 죽음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집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었다. 집은 병원과 달리 죽음·질병·돌봄이 각기 다른 문제가 아닌 하나의 문제임을 폭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김호성(연세메디람 호스피스전문센터 진료과장), 송병기(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조기현(아빠의 아빠가 됐다저자), 홍종원(방문 진료 전문의원 건강의집의원대표 원장) 네 사람이 각자의 경험과 질문을 가지고 서울시 강북구 건강의집의원에 모였다.

 

우리는 언제부터 병원에서 죽기 시작했을까요. 오늘날 은 죽음과 격리된 장소입니다.

 

김호성:코로나19 때문에 병원에서 집으로 외출하거나 집에서 병원으로 문병 오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집과 시설(병원)이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멀어졌어요. 호스피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 통증 조절이 되면 많은 환자들이 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더불어 말기 환자 증세 중 섬망(譫忘)이 있는데 집에 가자라는 말씀을 공통적으로 많이 하세요. 때문에 환자에게 의식이 있든 없든 집은 굉장히 중요한 의료 현장의 화두입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환자들의 바람과 달리 2018년 통계청 사망통계열람을 보면 전체 사망자의 약 15%, 암 환자로 좁히면 약 8%만이 집에서 사망하고 있어요.

 

송병기:오늘날 한국인 사망자 10명 중 약 8명은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불과 3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지금과는 완전 반대예요. 1990년에는 병원에서 죽은 사망자가 약 17%밖에 안 돼요. 일반적으로 다 집에서 죽었던 거죠.

 

김호성:2000년대 들어서도 집에서 임종을 맞은 비율이 50%에 육박하거든요.

 

송병기: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지 않아 사망신고를 늦게 한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논문이 있을 정도였어요. 1980~90년대 초반에 나온 사망 원인 통계만 해도 증상 불명확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었어요. 이 수치가 22%까지도 잡혀요. 들여다보면 노화로 인한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는 비율이 올라가면서 2008년에는 이 카테고리가 사라집니다. 1990년대에는 그냥 나이가 들었으니 돌아가셨겠지했던 것들이 이제는 다 진단 가능한 질병의 문제가 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죽음과 병원이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게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네요.

 

송병기:의료화(medicalization)로 생명을 관리하는 기술이 짧은 시간에 고도로 발전한 발전한 거죠.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할 때 보통은 평균수명이니 기대수명 같은 수명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웰다잉(well-dying) 담론도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요.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의료인들이 굉장히 자주 나와요. 홈쇼핑에서는 건강보조식품이 인기가 많고요. 노화는 정복해야 하고 의료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 됐어요. 이걸 과학과 산업 측면의 죽음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반대에 또 다른 측면의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고립사나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 있을 수 있고 최근에는 간병살인 같은 것도 많이 가시화되었죠. 또 대표적으로 산업재해를 볼까요? 2019년 통계에 따르면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885명이고 2018년에는 971명이에요. 사건사고, 사회적 문제, 복지 영역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로서 죽음이 있는 거예요. ‘생물학적죽음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이런 사회적죽음은 굉장히 불평등하게 다뤄지잖아요. 돌봄 노동이 가치 절하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 살펴봐야 해요. 사실상 죽음에는 질병 그 자체만이 아니라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조기현:기본적으로 돌봄이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생산력, (건강보험) 재정건정성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생산이 아닌 영역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용환경이 어떻게 돌봄을 대하느냐에 따라서 돌봄 노동의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송병기:대부분 사망 경로 자체가 요양원, 요양병원, 대형병원 등 시설에 집중됩니다. 집에서 아픈 사람들을 돌볼 여력이 없는 거죠. 그런데 병원에서는 의료진이 돌봄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커요. 사회적으로도 돌봄을 가족, 요양보호사, 간병인이 하는 사적인 일로 여깁니다. 돌봄을 주로 개인의 도덕적 차원에서 다루는 사회는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현상을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잘못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시사IN 신선영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 병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죽음, 질병, 돌봄이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별개로 조각난 채 다뤄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김호성:저는 의학에서 돌봄의 가치에 대해 배운 기억이 없어요. 있더라도 매우 겉핥기식이랄까요.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돌봄 서비스)가 정부 정책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의사들이 고민하는 부분은 수가 문제를 넘어서 방문 진료에서의 의사의 역할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장 집에서는 그동안 의학 교육과정에서 훈련받은 전문적인 검사 및 처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일본에 왕진 가는 의사들이 있어서 뭘 하는지 물었더니 “(환자를) 안심시킨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홍종원:저 역시 방문 진료를 하는 의사로서 대형병원처럼 각종 검사를 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데서 좌절감이 없지는 않죠. 하지만 안심한다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한편으로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안심하세요라고 한다고 해서 환자가 안심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뜻 깊죠. 물론 병원과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고 막을 수 있는 죽음은 막아야겠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학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이 관리가능해지면서 현대의학과 의료 전문가들이 죽음을 터부시하고 은폐한 건 아닐까. 사실 저는 생물학적으로 죽는 순간과 사회적으로 죽는 시점은 다르다고 봅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는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죠.

 

송병기:죽음이 병원으로 가게 된, 의료가 죽음을 다루는 주된 담론이 시작된 시점을 저는 1963년으로 봅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데, 그해 12월에 의료보호법이 통과돼요.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시초죠. 쿠데타로 세워진 정부였기 때문에 정당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의료보호법을 활용한 겁니다. 또 하나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1960년대에 북한이 지속적으로 보낸 삐라 내용 중 하나가 사회주의 의료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었거든요.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의료가 산업화를 위한 도구였어요. 병든 몸, 늙은 몸은 산업화에 걸림돌이었거든요. 이걸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조금이라도 아프면 빨리 조치를 취해서 회복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돌봄은 논의될 여지가 없었어요. ‘라는 전통 가치에 강하게 의존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의학이 발전하면서 예전 같으면 임종했을 질병들을 극복하게 됐잖아요. 임종기가 명확히 예측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만큼 환자 보호자나 의료진이 신경 써야 하는 영역도 늘어났어요.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의료 기술이 발전한 만큼 질병도 복잡해졌는데 돌봄의 사회적 가치는 1960~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사실상 한국 사회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돌봄에 대해 근본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취약한 사회적 돌봄의 토대가 존엄한 죽음의 가장 큰 걸림돌일 수 있겠네요.

홍종원:새벽 2시에도, 주말에도 환자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가 있어요. 다짜고짜 선생님,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저는 그 환자가 죽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안 죽어요라고 답하지 않고 왜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지를 들어봐요. 진단을 내릴 때는 환자의 이야기가 중요해요. 이를테면 한쪽 다리가 절단됐고 당뇨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가진 독거 상태의 환자가 있어요. 요양보호사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와서 아주 기본적인 걸 도와주지만 거의 대부분, 하루 종일 집에만 계시거든요. 그게 죽을 것 같은 상황이죠. 저도 그런 상황이면 그렇게 느낄 것 같아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치료가 약을 처방하는 등 기본적인 관리도 있지만 자원활동가와 같이 방문해서 산책하는 거예요. 집이 반지하라 휠체어를 올려야 해서 혼자 할 수도 없어요. 저한테 방문 진료는 이런 의미예요. 환자의 삶과 상태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고요. 저한테 죽고 싶다는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주는 거죠. 자살 시도를 한 환자가 있어요.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지만 우리 뭐라도 한번 해보죠라고 말해요. “건강해져야 해요가 아니라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걸 인정하고 사실은 그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은 이유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단절, 돌봄의 부재, 사회적 편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을 같이 겪는 거죠. 방문 진료를 하다 보면 어떤 환자가 죽을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 불행하게 살아가야 할 삶이 걱정돼요. 우리가 죽음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존엄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해요.

 

송병기:‘죽으면 안 된다라는, 죽음을 극복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주류적 담론이 있어요. 특히 의료계 및 바이오 산업계가 주도하고 있죠. 앞서 언급한 1960년대 산업화 시기부터 이어져온 정부 정책의 경로 의존성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에는 홍종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의 서사, 삶의 경험이 연결돼 있거든요. 이게 분리돼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자꾸만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해요.

 

조기현:제 아버지는 마흔아홉 살이라는 젊은나이에 쓰러지고 치매로 10년간 투병하면서 사회적 죽음을 먼저 맞닥뜨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파서 일을 못하고, 일을 못하니까 가난하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고 이게 다 맞물려 있어요.

 

김호성: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족 간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커뮤니티 케어의 핵심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죽는다는 걸 굉장한 이상처럼 이야기하지만 의료 현장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환자를 돌봐줄 원만한 가족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죽을 수 있는 건 아니죠. 보호자들도 집에서 환자를 돌보거나 임종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해요.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전문적인 기관에 입원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게 집에서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좋을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른바 돈 있고 힘 있는 분들은 집에서 죽지 않아요. 좋은 시설이 있는 병원의 1인실에서 죽죠. 또 운 좋게 호스피스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한국은 호스피스 재원 일수가 평균 2~3주 정도로 한 달이 채 안 됩니다. 그 짧은 시간에도 평범한 가족들이 온전히 곁을 못 지켜요. 생업 때문에요. 병원과 보호자 사이에 갈등이 계속 잔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송병기:집에서 오히려 돌봄이 안 되는 상황도 허다해요. 차라리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수 있는 상황이 많아요. ‘행복한 집이라는 게 당위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시사IN 신선영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경기도립의료원 파주병원의 안내 데스크.

 

죽음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긴급하고 긴밀해 보입니다.

 

김호성: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원인을 암, 치매 및 노쇠, 심장이나 폐 같은 장기가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부전으로 구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질병에 따라 체력의 저하 속도가 다르고 이 다름에 따라서 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겪게 되는 경험이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돌봄도 마찬가지죠.

 

송병기:콜센터에서 10년 근무를 한 폐암 환자가 있어요. 콜센터는 스트레스 때문에 흡연율이 높기로 유명한 직군입니다. 이 환자가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다거나 어린 자녀가 있다고 할 때 돌봄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지겠죠. 환자 개인이 앓고 있는 질병만 해결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병원으로 가는 건 단순한 질병이 아니에요. 관계가 질병을 안고 병원에 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의료진들은 환자복을 입은 상황부터 보잖아요. 사회복지사나 간호사를 통해서 가정환경을 체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병원이 이런 영역까지 커버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이게 왜 문제냐면 치료를 얼마만큼 받을지같은 의료 결정을 할 때 환자 처지는 의학이 내린 결론처럼 명쾌할 수가 없어요. 윤리적·의료적·경제적 갈등이 발생하니까요.

 

김호성:앞으로는 관계 맺는 형식과 맥락이 달라질 거예요. 이를테면 성소수자, 1인 가구처럼 이른바 정상 가족으로부터의 탈가족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가족보다는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돌볼 확률이 훨씬 높아질 거라고 봐요. 해외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아직 간병의 급여화는 걸음마 단계죠. 하다못해 가족이어도 돌봄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죠. 가족돌봄 휴가가 법적으로는 다 정비돼 있어도 실질적으로 쓰기 어렵잖아요.

연합뉴스 전남 무안의 한 요양원에서 환자와 면회 온 가족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가 돌봄 문제에서도 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호성:그동안 일선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부족하나마 집에 있는 환자들을 모니터링해왔던 부분이 있는데 코로나19로 다 끊어지다시피 했어요.

 

송병기:돌봄은 기본적으로 접촉이거든요. 정부는 한국판 뉴딜이라고 해서 비대면 의료(원격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돌봄을 더 비가시적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결국 의료산업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의료 경험 면에서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시사인 정리·장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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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있든 없든 환자에게 집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이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어 하는 환자들의 바람과 달리 2018년 통계청 사망통계열람을 보면 전체 사망자의 약 15%, 암 환자의 경우 약 8%만이 집에서 사망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죽음의 미래’-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아픈 몸으로 살면서 깨달은 것은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픈 몸을 잘 데리고 살아갈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통증은 몸이 살기 위해 보내는 신호였다.”

흔히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를 병마와 싸운다고 표현한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들을 가리켜 기저질환이라 부르기도 하고, 단발병·연예인병 등과 같은 ○○시리즈도 재생산된다. 아픈 몸은 낙인찍히거나 타자화된다. 산업화한 의료체계 안에서 개개인이 겪어온 질병의 경험과 죽음에 대한 고민은 납작해진다.

 

아픈 몸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질병 당사자 6명을 만나 아픈 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연출 허혜경, 기획 조한진희)에 출연한 배우들이기도 하다. 비영리단체 다른몸들이 주최한 이 연극은 질병을 둘러싼 차별과 낙인 속에서 질병 당사자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고령 환자 중심의 질병 담론 속에서 젊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줄곧 안타까운 불행으로만 조명되어왔다. 이들은 질병은 삶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아픈 몸을 극복하지 않고도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질병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미래를 논의하기에 앞서 마주해야 하는 이야기다.

시사IN 신선영 홍수영씨는 아픈 몸 때문에 제대로 건네지 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낼 계획이다.

 

근육병/ 홍수영

한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가 너무 멀다

보이지 않는 병증에는 늘 오해가 뒤따랐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서’, 훨씬 나빠 보여서였다. 퇴행성 근육병을 앓는 홍수영씨(28)는 자주 오해를 받고 살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경련이 반복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얼굴에 경련이 나면 입꼬리와 눈 주위 근육을 통제할 수 없는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는 것 같았다. 그를 본 지인들은 뭐가 그렇게 좋냐라고 물을 때가 많았다. 경련 후에는 안면홍조가 나타났는데 어떤 이는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지 물었다. “저는 보이는 표정과 기분이 다를 때가 많거든요.” 인터뷰를 하던 홍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말을 하다 보면 떨림이 심해진다고 했다. 양해를 구하는 데 익숙한 모습이었다.

 

홍씨는 중학교 1학년 때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근육병은 갑작스러운 경련뿐 아니라 음식물을 삼키기 힘든 연하장애, 기억력 감퇴를 몰고 왔다. 숨 쉬고 잠드는 일상부터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 모두 균열이 났다.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이 결국에는 완전히 지속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삶이거든요.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한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해 신학, 철학, 상담학을 공부했지만 지속하는 게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질병이라 사람들은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라는 말을 건넸다. 홍씨에게는 괴로운 말이었다. “저에겐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거든요.”

 

늘 얼굴 위에 작은 돌멩이들이 얹어진 느낌.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숨 쉬는 방법을 배울수록 돌멩이들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 같다. 횡격막이 열린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빨아들이듯 숨을 쉬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일이 즐겁다. 내 몸은 언제 이런 느낌을 잃어버린 것일까(202078).

 

오전에 스케일링을 받고 온 뒤로 탈진한 사람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목이 돌아가는 걸 제어하려고 애쓰다 보면 몸 전체로 삽시간에 긴장이 퍼진다.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이석증이 온 것처럼 어지럽고 메스껍다. 수저를 들기도 힘들다. 국을 뜨면 절반은 흘리고 만다. 뒷목과 등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류처럼 흐르고 있다(202081).

 

오전에 스케일링을 받고 온 뒤로 탈진한 사람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목이 돌아가는 걸 제어하려고 애쓰다 보면 몸 전체로 삽시간에 긴장이 퍼진다.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이석증이 온 것처럼 어지럽고 메스껍다. 수저를 들기도 힘들다. 국을 뜨면 절반은 흘리고 만다. 뒷목과 등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류처럼 흐르고 있다(202081).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아프면서부터다. 근육병 때문인지 약 부작용인지 점차 기억력이 희미해졌다. 친구와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싶은 사소한 순간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메모장에 하루의 일과를 눌러 적은 것이 시작이었다. 언젠가부터 그가 쓰는 일기들은 편지가 되었다. 몸의 경련으로 인해 끝마치지 못한 대화, 몸 상태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그로 인해 건네지 못한 한마디들을 꾹꾹 써내려갔다. 지난여름, 오랜 기록들을 꺼내 원고 형태로 만들었다. 홍씨는 몸과 말(가제)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박목우씨는 삶을 통해회복의 가능성은 다양하다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현병/ 박목우

괜찮아, 그거 망상이야

하루 종일 내가 내 정신이랑 엄청 싸우는 거야.” 백 아무개씨(47)의 말에 박목우씨(44)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 이동 상인인 백씨는 20년째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라고 했다. “의사가 그러더라고.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916일 서울시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정신장애인 동료 상담. 정신장애인으로서 받았던 낙인과 편견에 대해 박목우씨가 묻자 맞은편에 앉은 방 아무개씨(54)와 신 아무개씨(62)도 한마디씩 보탰다. ‘또라이’ ‘마구잡이’ ‘정신병자와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박목우씨가 약은 도움을 줄 뿐, 동료나 친구로부터 주된 지지를 받는다면 다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하자 백씨가 웃으며 답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기분 좋네.” 동료 상담가로 일하는 박목우씨는 조현병 당사자다.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사업으로 박목우씨는 올해 7월부터 백씨와 방씨, 신씨를 만나왔다. ‘취업 의욕을 고취하여 경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지만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다수가 집에서 나오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의료시스템에서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관점은 질병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가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도록 회복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회복의 가능성은 다양하다라는 말은 박씨가 삶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기도 했다. 2007년 입학한 대학에서 학교폭력을 겪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환청과 망상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누군가 모든 게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약만 잘 먹으면 비장애인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울하다고 하면 항우울제를 처방해주고, 환청과 망상이 심해지면 약을 늘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삶이 막막하고 힘들다는 말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심리 상담은 시간당 비용이 높은 편이라 기초생활수급자인 박씨가 접근하기 어려웠고, 지역의 재활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거의 10년간 박씨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박씨는 2017년 장애인 등록을 하며 정신장애인임을 주변에 밝혔다. 오랜 경력단절로 인해 더 이상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정신장애인으로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다. 정신장애인 문학회 천둥과 번개’, 정신장애인 당사자 창작문화예술단 안티카에서 동료들을 만난 것이 큰 동력이 되었다. ‘엄마 아빠가 날 팔아넘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질 때마다 동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우야, 괜찮아 그거 망상이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환청과 망상은 다른 정신장애인 동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하지만 사회에서 고립되어 살아오던 정신장애인들은 뉴스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올해 초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19에 집단감염되어 사망한 정신장애인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박씨는 누구보다 착잡했다. 그 역시 20대 초반, 부모의 요청으로 한 달간 정신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목우씨는 35평 공간에서 열댓 명과 다닥다닥 붙어서 생활했다. “약을 거부하면 온몸이 결박된 채 격리되거나 코끼리 주사를 맞았다라고 말했다. 코끼리도 잠들게 한다는 수면 주사였다. 강제입원과 비인간적인 처우는 퇴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삶에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무능하고 게으른 존재가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노동하게 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정신장애인을 이웃으로 맞이한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박목우씨가 동료 상담을 위해 직접 준비한 자료에는 당신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박씨가 아직 고립되어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시사IN 조남진 정지혜씨는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유방암/ 정지혜

암 환자가 일하는 이유

자고 일어나면 흰색 베개 커버 위로 머리카락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정지혜씨(33)가 유방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막 시작한 후였다. ‘이참에 여성성을 벗어보는 실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암환자의 민머리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시선에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소셜미디어를 통해 삭발식생중계를 했다. 영상 속에는 윙 하고 울리는 바리캉 소리 사이로 시원하다’ ‘두상이 예쁘다하는 말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담겼다. 질병과 함께하는 삶이 늘 슬픔과 좌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씨는 서울 중구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 기획자다. 기록적인 폭염이 한창이던 2018년 여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가 아픈지 검사받기도 부담이 되는 재정 상태라 계속 미뤄왔거든요.” 프리랜서 기획자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투잡이 필수인 삶을 살았다. 늘 피곤하고 무기력했지만 과로 때문이겠거니, 혹은 더운 날씨 때문이겠거니 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쓰러지고 나서야 몸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혹은 눈에 보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주변 장기까지 암이 전이되어 있는 탓에 검사와 수술, 집중치료가 지난하게 반복되었다. 붙잡고 있던 일들을 한꺼번에 놓아야 했다. 정씨는 아프니까 잠시 쉴 수 있더라라며 웃었다.

 

1년간 항암치료를 여덟 번 받았다. 그사이 유방암 4기 생존자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어떤 날은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어떤 날은 항암 끝나고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생각하느라 설레기도 했다. 매 순간 격렬히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 정씨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울상이 된 지인들의 걱정과 위로를 받으며 괜찮다안심시키느라 매번 진을 뺐다. 사회가 질병에 대해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픈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쉽게 대상화되었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정씨는 질병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암 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싶었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끝내고 머리가 다시 자라기 전에 빡빡이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친구들이 우러러보고 있는 여자 부처가 된 유쾌한 환자의 모습이었다. “아픈 사람이 질병에 대해 자꾸 얘기해야 덜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이게 일상인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요.”

 

올해 초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처방받은 유방암 치료제 입랜스가 건강보험 급여가 인정되지 않아 약값으로만 한 달에 300만원을 쓴 뒤였다(지난 6월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12만원으로 인하했다). 아픈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은 매번 의심에 부딪히는 일이기도 했다. 이력서에 생긴 2년간의 공백은 정씨가 해명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아파서 쉬었다고 말하면 면접관들은 왜 암 환자가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는 안 아픈지되물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씨는 늘 거짓말하는 것 같았다. 고용복지센터에서 청년 일자리를 소개받기도 했지만 지병, 건강쇠약 등으로 근로가 불가하다고 판단하는 자는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다는 조항 앞에서 지원을 망설이게 된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마저 다 건강을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것 같아요. 아픈 몸도 노동을 원해요. 아픈 몸은 돈이 많이 드니까요.”

시사IN 조남진 김수희씨는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턱관절 질환 및 근육경련/ 김수희

다섯 번도 했는데 여섯 번쯤이야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면서 살았다. 김수희씨(43)이 병이 나으면’ ‘치료가 끝나면’ ‘다시 건강해지면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02년 다니던 대학원에 휴학계를 제출할 때만 해도 그랬다. 이미 두 차례나 수술한 턱관절 질환이 재발하면서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로 턱을 다친 이후 턱관절이 심하게 손상되어 통증이 반복되고 있었다. “수술만 마치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못 돌아갔네요.” 수술 이후 김씨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근육경련과 만성통증이 김씨의 일상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학 동기들이 취업하는 동안 김씨는 집과 병원, 재활시설을 오갔다. 깨어 있는 시간은 대부분 근육을 풀고 이완하는 데 쓰였다. 재활치료를 하루이틀 쉬면 금세 몸이 굳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근육경련 때문에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마사지볼·폼롤러·젠링 등 마사지 도구들을 비치해뒀다. “저는 한 번도 쉬지 않았는데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 게 되어버리니까요.” 예전보다 통증은 덜하지만 아팠던 이야기에는 반사적으로 눈물이 난다. 수술 이후 바뀐 얼굴 때문에 거울과 사진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김씨의 목소리가 잠겼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게 건강이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라던 의사의 말대로 손상된 턱관절은 몇 년마다 한 번씩 김씨를 통증으로 괴롭혔다. 대학병원에서 만난 한 의사는 예민한 성격을 고쳐야 한다’ ‘집에서 쉬지만 말고 움직여야 나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럴수록 김씨는 운동에 골몰했다. 재활치료를 3시간씩 받는 것으로 모자라 헬스장이 문 닫을 때까지 몸을 움직였다. 매번 수술대에 누워 이 수술만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주문을 걸었지만, 턱관절 염증과 근육경직 증상이 회복될 무렵 자궁과 난소에서도 혹이 발견되었다. 14크기의 자궁근종이었다. 2017년과 2018년 난소와 자궁 수술까지 받으며 김수희씨는 총 다섯 차례 수술을 거쳤다.

 

건강했던 시간보다 질병과 같이 산 세월이 길어지면서 김씨가 깨달은 사실은 몸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픈 몸을 잘 데리고 살아갈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희망과 절망과 포기는 한 끗 차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섯 번 수술해서 멀쩡했는데 여섯 번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버리고 나니 몸의 변화를 좀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김씨가 아팠던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다.

 

밖에서 보면 아픈 몸의 시간은 쓸모없을지 몰라도, 안에서 보면 몸의 미세한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은 몸이 살기 위해 보내는 신호였다. “정말 많이 굳은 데는 대침을 찔러도 느낌이 없거든요. 몸이 고통을 주는 신호는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시사IN 조남진 안희제씨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크론병/ 안희제

피똥눈물을 아시나요

 

인터뷰 당일이던 914, 안희제씨(25)는 끝내 잡지 못한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런 날이면 항문 근처에 난 상처가 심해져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된다. 복통, 두통과 함께 나타나는 크론병의 흔한 증상 가운데 하나다.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휴지에는 피가 묻어 나온다. 거의 매일 겪는 통증이지만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아 견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몸에게 당하는 느낌이다. “제 아픔을 설명하기 위해 피똥눈물이라고 이름 붙였어요라며 안씨가 웃었다. 크론병과 함께 산 지 벌써 7년이다.

 

크론병은 구강에서 항문까지 위장관 전체에 나타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이다. 주치의는 치료가 아닌 관리가 필요한 난치병이라며 관리를 잘 못하면 암에 걸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형외과부터 소화기내과, 항문외과, 신경정신과까지 종합병원을 이리저리 헤맸다. ‘떠밀렸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했다. 어떤 곳에서는 크론병이 아니라고 했고, 어떤 곳에서는 당장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론병 진단 이후에도 의사는 매번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다며 스트레스 관리를 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3분 진료는 그렇게 끝났고, 염증과 무기력증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상위권 성적에 배드민턴부 대표를 할 정도로 체력도 좋았다. 안씨는 마치 흑역사를 말하듯 아프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은 성과를 꾸준히 내며 살아갔을 사람이라고 과거의 자신을 설명했다. 승부욕은 그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였다. “내 앞에 누가 걸어가면 그걸 못 견뎌 했어요.” 단순히 발걸음 속도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실력으로 추월하는 것에 익숙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청년이었지만 몸이 그렇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밤샘 작업과 술자리로 이루어진 캠퍼스 생활은 건강한 신체로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크론병 환자는 카페인, 알코올, 밀가루, 맵고 짠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다. 안씨는 소주 대신 물을 홀짝이며 술자리를 버텼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복통 때문에 조퇴와 결석, 갑작스러운 불참도 잦았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가 아니었으므로 의심받기 일쑤였다. “청춘은 건강한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까운 이들은 군대 안 가도 되는 병이라거나 치킨이랑 술 못 먹는 병정도로 크론병을 이해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힘들게 한 건 자신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두고 무능하다고 자책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아파도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렇게 일을 마구 벌려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내가 다시 원망스럽고.” 경쟁사회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던 그는 아픈 몸을 미워했다.

 

건강했던 몸을 마냥 그리워하지 않게 된 건 느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장애인권동아리 활동을 하며 걸음걸이, 말하기, 문자를 치는 속도에는 사람들마다 시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안씨는 아픈 몸을 감추며 괜찮은 척하지 않았다.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고 싶어요.”

 

나는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5년이 걸렸다. 안씨가 쓴 책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에 나오는 문장이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었어요.” ‘완치라는 헛된 희망에 매일의 삶을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술 진탕 마시기, 피시방에서 밤새워 게임하기, 매운 음식 먹기. 여전히 건강했던 몸의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관해기(병증이 호전된 상태, 완화된 기간)에는 자꾸 욕심을 내게 된다. 금방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런 시도들 덕분에 청주와 막걸리는 먹을 수 있다는 귀한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프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못 자면 2~3일은 아플 걸 알면서도 밤새워 미뤄둔 원고 작업을 한 까닭이다. 그렇게 아픈 몸과 공존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다리아씨는 다시 자라난 낭종을 더 이상 삶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소낭종/ 다리아

규칙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리아씨(39·활동명) 집 냉장고에는 손글씨로 빼곡히 적어둔 반찬 레시피들이 붙어 있었다. 고추장장아찌, 멸치볶음 만드는 법부터 남은 재료까지 일일이 체크해뒀다. “주부도 직업이고 노동자더라고요라며 다리아씨가 웃었다. 3년 전 난소에 낭종이 재발해 일을 그만둘 때는 집이 또 다른 직장이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 5년째, 집안일을 전담하는 그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인천의 한 부품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은 한겨울에도 내복에 소금이 밸 정도로 중노동을 한다. 몸 곳곳에 화상 상처를 달고 사는 육체노동자라 집안일을 채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리아씨에게는 집도 편히 아플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2013년 난소에 13짜리 혹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낭종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지인들은 예민한 성격때문일 것이라 억측했다. 다리아씨 역시 잘못된 자신의 습관들을 끄집어내 스스로를 나무랐다. 혹이 된 난소를 제거하면서 오른쪽 난소는 70%, 왼쪽 난소는 20%가 남았다. 종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병원의 임무는 끝났지만 몸에 남은 후유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몸의 생태계가 뒤바뀌는 것 같았어요.”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질염에 자주 걸렸고 좋아하던 커피를 끊었다. 바뀐 몸은 새로운 일상을 요구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 의사는 규칙적인 식습관,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리아씨에게는 닿을 수 없는 처방전이었다. “누가 건강해지는 방법을 모르나요? 못하는 거지.” 그의 경우 긴 통근 시간이 몸을 학대했다. 일평생 인천에 살았지만 일자리 대부분은 서울에 몰려 있었다. 대표 지옥철로 꼽히는 신도림역을 포함해 두 번을 더 환승해야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 왕복 네 시간, 사람들 틈바구니에 몸이 구겨진 채 다리아씨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부족한 잠은 커피로 채웠고, 9시가 돼서야 끼니를 허겁지겁 때웠다. ‘규칙’ ‘운동어느 것 하나 그의 삶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2017년 여름, 난소낭종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가족 모두가 이해관계자처럼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리아씨의 아버지는 의사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부터 물었고, 시어머니는 자궁에 좋다며 익모초 환 세 봉지를 챙겨주기도 했다. 아픈 여성도 예외 없이 아기 낳을 몸으로 취급됐다. 정작 다리아씨의 고민은 난임보다는 경력 단절에 있다. “아파서 가난해지고, 가난해서 더 아프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단순히 불행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고도근시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일한 뒤로는 어깨에 만성통증이 생겼다. 피곤한 날에는 안구건조증이나 치질로 고생한다. 어디서부터 아픈 몸이고, 어디서부터 건강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소에 다시 자라났다는 낭종은 더 이상 삶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건 마음 편히 아플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시사인 김영화 기자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