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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공원녹지

하야리아 미군부대 반환, 공원 조성 20년사 -

by 이성근 2014. 3. 17.

 

 

하야리아 미군부대 반환, 공원 조성 20년사 -

 

우여곡절을 겪으며 옛 하야리아부대 부지 부산시민공원이 개장한다. 현장의 어수선함이 지워지면서 공원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새롭게 다가선다. 어찌보면 낮설기도하다. 많은 사건들이 부산시민공원의 이름으로 제기되고 대두되면서 시민참여와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만큼 부산시민공원의 탄생은 많은 사건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 기억되는 이름과 잊혀진 이름들이 겹친다. 이쯤에서 부산시민공원 조성, ‘1등 공신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그 주인공이다. 단박에 그렇게 답할 수 있음은 그들의 문제의식과 활동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부산시민공원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감히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난 20년간 벌여왔던 운동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화와 자존, 미국의 그림자를 꺼집어 내다.

부산시민공원의 역사는 오욕의 역사를 오롯히 담고 있다. 일제식민의 잔재를 청산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등장했다. 그들은 철저히 군사적 정치적 배경아래 투입된 점령군으로서 이땅에 진주했다. 이 관계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혈맹’으로 격상되어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각인되었다. 심지어 은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나라, 미국에 대한 실체가 벗겨지기 시작한 계기는 12.12 쿠테타로부터 5.17 비상계엄령,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묵인이 밝혀지면서였다. 청년학생들은 미국을 규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고신대 대학생이었던 김은숙, 문부식 등이 미국문화원을 점거, 방화하였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반미투쟁의 첫 신호탄이 되었다. 반미운동은 방화사건을 계기로 대학가 일원에 번지기 시작하면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전체의 공감대로 전이되기에는 분단 이데올로기가 너무도 강력히 자리 잡고 있었다. 1992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우리땅 되찾기 시민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부산에서는 1993년 5월 연지동 정희철 구의원의 주도로 ‘하얄리아부대 이전 촉구 결의안이 진구의회를 통해 발표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부울총련 소속 대학생들은 곧잘 하야리아 부대 앞에서 부대이전을 촉구하며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11월 사회단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부산연합’이 연구소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운동의 이론적 검토가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 정치군사적 반미운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지역주둔 미군의 존재와 그 피해를 시민의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도출된 문제는 첫째, 캠프하야리아의 기능이 현저히 감소되었다는 것 둘째, 갬프하야리아의 지역경제 기여도, 셋째, 80년 대 이후 미군 주둔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각종 퇴폐문화와 미군범죄, 환경오염의 급증 넷째, 서면을 중심으로 한 도심팽창과 발전에 따른 치명적 걸림돌에 더하여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세계 각국에 산재한 미군기지 대부분이 이전. 반환되고 있는 현실 등이었다. 약 1년간의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24개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1995년 3월6일 ‘우리땅 하얄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대책위는 격주간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인간띠잇기 대회 등을 개최했다. 6월 8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하여 하야리아 부대문제를 정부차원에서 해결 할 것임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얄리아 부지를 부산시민의 품으로

1996년 2월 9일 대책위는 하야리아 반환 원년을 선포하면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부지 반환을 정치쟁점화 시키기 위해 후보 전술을 택하는 한편 지역주민 속으로 파고 들었다. 당감동 주민노래자랑대회를 개최, 미군부대가 지역발전의 걸림돌이자 부산발전의 암적 존재임을 부각시키며 부당성을 알려내었다. 서면 구 대한극장 앞에서 ‘부산땅 하얄리아 되찾기 1차 시민대회’를 가지고 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하였다. 배다지 의장은 성명서 낭독을 통해 "지난 50여년간 우리의 의사와 아무런 관계없이 미군이 강제로 점유 무상사용 해온 하얄리아부대는 마땅히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며 "하얄리아부대 반환운동에 시민들의 뜻을 모으자"고 주장했다. 나아가 부지이전이 또 다른 지역민의 삶을 불모로 삼는 계기도 반대하여 이전 예정부지로 거론된 강서구의 송정마을과 뜻을 같이 하는 궐기대회며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대청동 미문화원이 폐쇄되었다.

 

1997년과 1998년 활동은 주로 부산연합을 중심으로 부대 앞에서의 집회와 시위를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부지반환을 위한 전국미군기지 실태 및 해외 미군기지반환운동 자료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더불어 대중강연이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한반도 정세파악과 미군기지 반환의 당위성들이 설파되었다.

 

1999년 4월30일 미 문회원 반환 결정은 다소간의 침체국면에 들었던 반환운동에 새로운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한편 개별적 활동을 벌여왔던 ‘우리땅 하야리아 등 되찾기 시민대책위’와 ‘아메리칸 센터 반환을 위한 시민대책위’가 발전적 해체와 더불어 ‘미국점유 부산땅 되찾기 범시민추진위’로의 통합을 이룸으로써 대시민 부지반환 단일 창구를 만들어 내었다. 나아가 문화원 반환에 고무된 대책위는 1999년을 ‘유솜부지 반환집중의 해’로 설정하고 반환을 위한 집중적 캠페인을 전개했다. 부산진구 국립국악원 자리에 있던 당시 미군장교숙소인 유솜(USOM)부지 반환운동은 부산시의회와 진구의회의 부지 반환 결의문 채택을 유도했고, 12월15일에는 마침내 반환을 달성했다. 환영대회는 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참여 속에 개최되었다. 당시 이성우 집행위원장은 “부지반환과 관련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미간 불평등 협약인 SOFA를 철폐해야 정상적인 협상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라며 "자주정부를 표방하는 "국민의 정부"에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에서 2002년 시기의 반환운동은 16대 총선과 3대 지방선거공간에서의 출마 후보의 시민공원화 공약채택 전술이 채택되었다. 출마 후보 모두가 공약으로 채택했다. 시내 곳곳에서 '미군없는 세상, 살기좋은 부산' 이란 슬로건으로 거리문화제가 벌어졌다. 특히 2000년 6월15일,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이 만나 채택한 남북공동선언은 하야리아부대 같은 미군기지 및 시설의 반환, 불평등 협정 청산을 촉구 하는 활동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무지개 연대로 꽃 피운 반환운동

반환운동이 분수령을 이룬 때는 2004년 7월23일 FOTA(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 8차 회의를 통해 ‘하야리아부지 2005년 조기 반환’이 발표되면서부터 였다. 전국의 34개 기지를 총 17개로 통폐합하면서 서울·부산·춘천·의정부·인천·원주·대구 7개 대도시의 도심지에 있던 370여만평이 반환되고, 이가운데 춘천·부산·파주·의정부 등은 종전의 LPP(LPP: Land Partnership Plan)계획보다 1~6년씩 앞당겨 돌려받게 됐던 것이다. 시민대책위 명칭도 지역내 모든 시민사화단체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하야리아부지 시민공원화추진 범시민운동본부’(이하: 범시민운동본부)로 확대개편 되었다. 부산민중연대며 시민연대 등 지역 3개 주요 연대체를 중심으로 각 대학 민주동문회 등 기존의 활동을 주도해오던 진보적 시민사회 단체만의 참여에서 보수 관변이 망라된 범 시민기구였다. 부산지역 제 정당과 행정의 결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 시민의 이익, 부산의 미래 가치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범시민운동본부는 발족기자회견을 통해 주한미군기지의 이전에 따른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고 무상양여를 분명히 했다. 부산시도 반환 부지 전체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의 방침은 평택으로의 기지 이전 비용을 지자체에 강요하고 있음을 규탄하고 총력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특히 2005년 1월 13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점검차 부산을 방문한 이해찬 국무총리의 ‘무상양여 불가, 부지매각 방침’에 격분하게 된다. 시민염원을 무시한 이같은 발언은 민관이 함께하는 비상대책회의를 가동시키게 만들었다.

 

범시민운동본부는 그 같은 부산시민의 입장을 서명운동으로 표출했다. 부지반환 무상양여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서명운동의 결과는 놀라웠다. 2005년 2월 시작되어 그해 8월 부산시민 절반에 해당하는 152만명의 서명을 받아 냄으로서 부산시민의 염원과 바램이 정치권과 국방부, 미군당국 등에 전달되었다. 말이 백만 서명운동이지 서명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단위의 헌신적 노력과 시민적 관심이 승화된 결과였다. 전국적 연대도 가동되었다. 그만큼 하야리아부대의 반환은 시민의 일상을 관통하고 있었다. 미군기지 반환운동 10주년 되던 해였다.

 

당시 범시민운동본부 허운영 공동운영위원장은 "정부가 하얄리아부지가 주한미군기지로 공여된 기간 동안 부산시와 주민들이 입은 엄청난 좌절과 고통에 대해 보상은 못해줄 망정, 떠나는 미군기지의 이전비용 마련을 위해 하얄리아부지의 무상 양여 불가 방침을 고수하는 것은 국가적 폭력"이었다고 했다. 이같은 반발이 고조될 무렵인 12월 초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 2천700억원에 달하는 하얄리아 부지비용 가운데 70%를 국가가 부담할 경우 1천890억원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범시민운동본부는 긴급회의를 통해 정부의 안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대신 800여억원에 이르는 부지 공원화 비용은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동안 벌여온 부지 무상양여 운동을 공원조성비용 국가부담 운동으로 전환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었다.

 

2006년 2월 미군기지 주변지역 지원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8월10일 캠프하야리아 연병장에서 역사적인 기지폐쇄식이 있었다. 주둔 56년만에 폐쇄됐다. 주목되는 일은 이날 범시민운동본부는 기지폐쇄식에 앞서 하야리아 부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오염정화 없이 기지 반납은 안된다"며 "정부는 미군측과 재협상을 통해 기지내 오염 정도를 확인하고 반드시 정화토록 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실제 2006년 4월부터 한.미공동 환경오염조사 들었지만 조사기간에 대한 이견이 발생했고 조사된 자료조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부속서인 '환경정보 공유 및 접근절차'(미군 반환·공여지 환경조사와 오염치유 협의를 위한 절차합의서)에 의거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고비 마다 그들이 있었다.

2006년 8월 난데없이 하얄리아부대 부지에 대한 정부지원 국고부담률을 60~80%에서 20%로 낮추려는 기획예산처의 발표가 있었다. 즉각적인 규탄 기자회견을 통해 대정부 반대투쟁이 예고 되었다. 동시에 부산출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범시민운동본부 이종석, 이정이, 김희로 공동대표가 청와대 면담을 신청했다. 고 노무현대통령은 시민대표들에게 당초 행정자치부 시행령안 대로 추진할 것을 약속해 사태가 진정됐다. 부산역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대규모 규탄 시민결의 대회는 경과보고로 급히 조정되었다.

 

2010년 1월27일 주한미군기지 하야리아 부지에 대한 역사적인 관리권 이양식이 열렸다. 100년만의 귀속이었고 반환운동 15년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남식 시장은 "부지반환에 애써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다"며 "하얄리아 부지는 여러 의견을 수렴해 빠른 시일 내 명품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이 모두 공유할수 있도록 하는 한편 부지 동편에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변과 조화롭게 꾸며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한 2013년 주목 받던 라운드테이블은 시나브로 실종되었고 토양오염 문제는 책임전가와 회피로 이어졌다. 범시민운동본부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고 분노했다.

 

지속적 문제제기가 언론을 통해 전달되었다. 2011년 서울고등법원 행정 9부는 부산 하야리아 미군기지의 환경영향조사 결과에 대한 정보비공개결정을 취소하라며 부산환경운동연합이 환경부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를 판결했다. 나아가 미군기지 환경주권이 송두리째 포기된 사실을 담고 있는 ‘주한미군 주변지역 환경기초조사 보고서’가 2013년 12월 발표되었다. 보고서는 여전히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현주소와 정치권의 기만을 고발하고 있다.

 

 

기억해야 할 것과 새로운 상상력을 위해

곤혹스러운 문제제기와 비판은 공원조성 기간 내 집요하게 이어졌다. 혹자는 시민사회단체의 이같은 문제제기를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며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결코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런 불편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하야리아 부지의 반환운동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지반환 운동의 역사는 기지가 폐쇄되는 시점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된 재생을 통한 개장까지를 담는다. 시민사회단체는 그것을 책무로 보았다. 돌이켜보면 시민사회단체는 시민공원이 만들어 지기까지 중요 고비마다 ‘해결사’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공원 내 기억의 숲길에는 그 기록들이 벽화로 남아 있다. 또한 공원역사관에는 부지 반환운동에서 조성이 이루어지는 시기별 활동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백을 가지고 볼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을 도모할 일이다.

 

 

참고자료:

1. 국제신문: 1992년 1월~2014년 1월

2. 부산일보: 1992년 1월~2014년 1월

3. 미디어오늘: 2013년 12월 23일 미디어현장-“국회의원도, 공무원도, 기자도 다 나쁜 놈들!”

4. 부산시민공원조성 범시민운동본부: 하야리아부지의 점령반환역사와 부산지역 시민단체의 기지반환 시민공원 조성운동 경과보고

 

 

음악출처: 다음 블로그 음악과 여행

 10-Wedding Waltz, The.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