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 판사 조무제 전 대법관
1941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조무제는 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동신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임용되면서 동아대학교 국문과 야간과정에 입학했으나 박정희에 의한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군복무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불합격 판정을 받고 교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동아대학교 주간부로 옮겼다. 동아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수석을 하던 조무제는 3학년때 사법시험 1차시험에 합격하고 4학년때인 1964년에 2차시험에 합격하여 최종적으로 22명을 선발한 1965년 제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67년부터 공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1970년에 부산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78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84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어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지휘하였다.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행하면서 조무제는 신고 대상 고위법관 103명 중 가장 적은 82m2형(25평) 아파트 한 채와 부인 명의 예금 1075만원 등 6434만원을 신고하여 청념의 표상인 딸깍발이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4년 7월 창원지방법원장 1997년 2월 부산지방법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하여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8년 8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하여 6년 임기의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신고한 재산은 7000여만원이었으며 전세 보증금 2000만원짜리 원룸 오피스텔에서 대법원으로 출퇴근하였다. 법관으로 재직 중인 1967년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석사, 1986년에 동아대 법학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던 조무제는 후배 판사들에게 "법관은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법관은 깊이 있는 사색과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보편적인 상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법관 임기를 마쳤고 이후 유명 법무법인으로부터 수십억원의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후배 법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며 고사하고 모교인 동아대학교 법과대 법학부에서 석좌교수에 임명되어 동아대 법과전문대학원에서 ‘법과대학 생활의 목표와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첫 수업을 하면서 "법관 생활을 하면서 재물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있다 없다라고 사례를 공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법관이 사건과 관련해 유혹을 당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법관의 청렴도도 다른 나라 법조인 못지않게 높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고 답했다
2009년 4월에는 4년 임기의 부산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장을 마치고 2014년 5월까지 1년 남짓 부산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을 끝으로 법원 근무를 은퇴했다.
조무제는 1994년 창원지방법원장으로 승진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은 전별금으로 책을 사서 부산고등법원 도서관에 익명으로 기부했으며 모교인 동아대학교 후배 학생을 돕기 위해 1993년 100만원을 시작으로 20여년간 8000만원이 넘는 발전기금을 냈지만 대법관 재직때 비서관을 두지 않고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음은 물론 조정위원으로 재직할 때는 스스로 수당을 삭감하여 다른 사람보다 1/2 정도 적은 수당을 받았다.(위키백과)
법 앞에 평등해야 공정한 세상을 세울 수 있다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 '청렴 판사' 조무제 전 대법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산역을 출발한 택시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쉬지 않고 올라가 목적지에 닿았다. 대학병원에서 운영하는 큰 요양병원이었다. 방문 연락을 받은 조 전 대법관 부부가 로비에 나와 있었다.
"바쁜 분이 와 이 먼 길을 오셨습니꺼?"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조무제 전 대법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온화한 말씨가 반갑다. 조금 야위셨지만 혈색이 좋다. 나와 조 전 대법관, 우리 두 사람 모두 말이 느렸다. 안단테(Andante, 느리게)로 출발한 우리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다지오(Adagio, 아주 느리게)에 머물렀다. 조 전 대법관은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부인 김연미 씨가 곁에서 남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차원의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외부의 변화에 결코 흔들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 재판에 임해주세요." 조무제 전 대법관이 2004년 퇴임식에서 후배 판사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그에게는 '청렴 판사', '청빈 법관'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밤늦게까지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였다. 공정한 판결이 공정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재판자료를 밤새워 읽고 직접 판결문을 썼다. 법관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려면 소송 내용을 본인이 소상히 알아야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판결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무제 전 대법관은 '공직자윤리법'에 의해 처음으로 시행된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 당시 전국 고위 법관 중 꼴찌를 차지했다. 가난은 자랑할 일이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아니, 청백리로서 청빈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외압이나 재물 앞에 초연했다. 그래서 삶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대법관 퇴임사에 그런 고뇌가 담겼다. "이해관계에 얽힌 주위로부터 초연하려면 고독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법관은 그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공정을 위해 고독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조무제 전 대법관을 청렴 판사,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기억한다. 그가 목숨처럼 지켰던 청렴한 처신, 원칙을 지키는 태도, 공평무사한 판결 때문일 것이다.

1. 사표(師表)가 되신 어머니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한학을 공부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5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경남 하동이었지만 당시 열악한 위생 환경과 의료 시설로 첫째와 둘째 아들을 잇따라 잃자, 어머니는 고향을 등지고 진주로 이사했다. 더 이상 자식을 잃지 않고 남은 자식들을 공부시키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병약했던 아버지는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처음으로 농사를 짓게 되자 무척 힘겨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학비가 싼 초등학교를 찾아 전학을 다니던 소년 조무제는 어머니의 농사를 돕기 위해 휴학을 했다.
어머니와 소년 조무제는 1년 동안 경남 하동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어린 그에게 어머니는 어떻게 비쳤을까. "홀로 농사를 짓다 나중에는 전 재산을 팔아 자식을 가르치셨는데 놀라울 정도로 근검절약하셨고, 아무리 어려워도 바른길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으셨습니다." 공직자로서 절제되고 청렴한 그의 처신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소년 조무제는 진주중학교에 합격했다. 휴학으로 인한 1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공부를 시작한 지 석 달 만의 일이다. 가난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학비가 저렴한 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로 전학했다. 학비를 내지 못해 다시 1년 휴학을 했지만 진주사범학교에 거뜬히 합격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가정교사로 벌었다. 그러면서 문예주간신문 제작을 주도했다. 그는 대도시로 나가고 싶었다. 당시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졸업생 중 두 사람만 부산 초등학교에 부임할 수 있었는데 그가 수석 졸업하면서 다행히 꿈이 이루어졌다.
진주사범학교 재학 시절의 조무제 전 대법관(사진 맨 왼쪽)
부임한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아대가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았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야간대학 국문과에 등록했다. 초등학교 두 개 반의 담임을 맡아 매일 8시간씩 수업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삶이 녹록지 않았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가난의 굴레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법고시를 보기로 결심하고 법학과로 전과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숙식은 입주 과외로 해결하며 사법시험에 매달린 지 2년 8개월 만에 합격했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주위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다. 합격자 22명 중 15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2. 공정을 고민한 판사
삶의 스승을 만났다. 대학 4학년 때 만난 김병규 교수였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뒤 저처럼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신 분입니다.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명예교수로 퇴직하셨습니다. 박학다식하셨고 무엇보다 글을 잘 쓰셔서 현대수필 문학 대상을 받으셨어요. 김 교수님의 삶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청년 조무제는 이때 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판사 임용이 안 된다면 자신도 학교에 남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부임지는 부산이었다. 그는 부산을 시작으로 마산, 통영, 대구, 진주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만 근무했다. 어떻게 지역 판사, 일명 향판(鄕判)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모든 판사가 서울 근무를 희망했습니다. 저는 서울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부산에 배정받은 것이지요. 부산과 대구에는 친척이나 지인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중고교를 나온 진주에서 근무할 때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교류를 끊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친구나 친척조차 만나지 않았다.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던 부인 김연미 씨가 거들었다. "친척 소개로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에게 대뜸 절대로 돈봉투나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청렴 서약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조 전 대법관이 말을 이어받았다. "그때는 지금과 다른 시절이었어요. 돈봉투를 준 뒤 어떤 판사에게 뇌물을 줬다고 소문을 내면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결혼 전부터 단단히 약속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조무제 판사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집 앞에 줄을 섰다. 하지만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집으로 걸려 오는 전화도 법원 동료와 사무처 직원, 절친한 법대 교수 세 사람을 제외하곤 일절 받지 않았다.

신혼 시절 조무제 판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부인 김 씨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남편은 '法(법)'이라고 새겨진 보라색 보따리를 끌어안고 퇴근했습니다. 매일 자정이 넘도록 판결에 필요하다며 자료들을 읽었고 일요일에도 책보를 끼고 살았습니다. 일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것이 저의 신혼생활이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조무제 판사는 원칙에 어긋나면 타협하지 않았고 사소한 청탁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 변호사 사이에는 "조무제에게 청탁하느니 돌부처에게 빌거나 예수에게 기도하는 게 낫다"는 농담이 퍼졌다. 그는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판결 속에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무엇보다 신속한 판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심리가 길어질수록 소송 당사자는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 뿐 아니라 소송비용이 높아지고, 만약 패소할 경우 상대방의 비용까지 모두 물어줘야 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판결 후 "비록 패소했지만 재판은 공정했다"는 편지를 여러 사람에게 받았다.
1994년 창원으로 발령이 나자 직원들이 전별금 500만 원을 모아 전달했다. 그는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이 돈으로 법원도서관에 필요한 책을 사서 기증했다. 직원들은 그가 떠난 뒤에야 기증 소식을 들었다. 그 이유를 묻자 "당시 전별금은 오랜 관행이었기 때문에 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환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지요. 너무 부끄러운 이야기니 이 정도로 하시지요" 하고 얼굴을 붉혔다.

3. 드디어 대법관이 되다
조무제 판사는 57세가 되던 해인 1998년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른바 비서울대 출신 지역판사의 대법관 임명은 큰 화제가 됐다. 오래전 일이지만 당시 소회가 궁금했다.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반갑기도 했지만 대법관은 격무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잘 해낼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제가 평판사에서 부장판사로, 지방법원장으로 승진하는 과정에서도 '승진이 안 돼도 할 수 없다, 근무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늘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부인에게 대법관 임명 소식을 어떻게 들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다른 말 안 하고 출근하면서 오늘 라디오 뉴스를 잘 들어보라고만 했습니다. 오후 1시에 대법관에 임명됐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대법관이 되고 보니 업무가 너무 많았다. 2004년 퇴임할 때까지 6년 동안 주심을 맡은 사건만 해도 1만 4000건이 넘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면서 재임시절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장관급인 대법관에 임명됐지만 경기도 용인에 보증금 2000만 원의 원룸을 얻어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다른 대법관은 모두 서울에 집이 있으니 사택이 필요 없었지요. 행정처에서 사택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저만 특혜를 받을 수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관용차와 기사까지 거절한 것도 역대 대법관뿐 아니라 부장판사 이상의 고위 법관 중 전무한 일일 것이다.

그는 국민 세금을 절대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며 비서뿐 아니라 전속 비서관조차 두지 않았다. "재판연구관에게 판결에 필요한 자료를 도움받거나 판결문 자체를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판결문을 쓰다 보니 다른 대법관에 비해 일이 두 배나 많아졌을 것이다.
조무제 전 대법관은 한국 사회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판결을 많이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신분상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공무를 다루는 위원회에 위촉된 사람이 직무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면 수뢰죄가 성립된다'는 판결(2002.11)이다. 이 판결로 인해 '국회의원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더라도 청탁과 함께 돈을 받으면 뇌물'이라는 기준이 마련됐다.
의미 있는 다른 판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이유로 공무원 직위를 해제한 것은 재량권 남용'이라는 판결(2001.5)이다. 이로 인해 공무원임용령에 규정된 직위해제를 엄격하게 적용하게 됐다.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재산상속 판례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가다듬었다. 그는 30년 동안 어머니를 모신 딸에게 더 많은 재산상속권을 인정한 효도상속권 판결(1998.10)을 내렸다. 딸이 노부모를 모시고 오랜 시간 간병과 식사 수발을 했으므로 특별기여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지로 사회적인 파장이 컸다. 30여 년간 판사로 재임하면서 그는 인권을 보호하고 뇌물 등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4. 다시 대학 강단으로
그는 늘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6년 동안 헌신한 대법관을 퇴임하면서 변호사 개업이나 로펌을 마다하고 모교 강단에 섰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 만약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면 변호사가 되는 대신 대학 강단에 서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전관예우'라는 법조계 관행을 뿌리쳤다는 점에서 존경의 대상이 됐다. 대법관 출신이 변호사로 개업할 경우, 2~3년 안에 수십억 원의 수임료 수입을 올리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결단은 후배인 전수안 대법관과 김영란 대법관에게 이어져 퇴임 후 대형 로펌 대신 사회단체의 법률고문을 맡거나 대학으로 돌아가는 사법부의 아름다운 전통이 만들어졌다.
부인 김연미 씨는 "판사는 박봉인데다 남편이 여기저기 어려운 곳을 남을 돕느라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지 않았습니다. 변호사가 되면 살림이 필 거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헛된 꿈이 되고 말았지요" 하고 웃었다. 조 전 대법관은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조 윤리'라는 과목을 맡아 4년 동안 법조인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과 윤리적 처신, 사회적인 책임을 강의했다.
그는 1993년 단행된 공직자 재산 공개 당시 6400만 원을 신고해 고위 법관 103명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2004년 대법관 퇴임 때에도 전 재산은 2억 원에 불과했다. 법원 조정위원으로 재직할 때는 수당이 너무 많다며 자진 삭감을 요청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화제가 됐다. 가난한 판사 시절부터 더 가난한 대학생들의 장학금을 지원해 왔고 동아대에도 2억 4000만 원 이상을 학교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2007년 조무제 전 대법관은 이가 아파 먹지 못하는 장애인을 위해 푸르메재단이 민간 최초의 장애인전문치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100인 후원회'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했고 연말이 되면 큰 기금을 보내줬다. 조무제 기금에 다른 기부자들의 정성이 더해져 지난 15년간 5만 명의 장애인들이 치과 치료를 받았고 어린이재활병원을 짓는 데 큰 기둥이 됐다. 조무제 전 대법관의 강직한 성품과 청빈한 삶은 젊은 판사와 시민 사이에 존경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장애인과 가족들에게도 큰 여운을 남겼다.
우리 사회에 존경할 스승과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공직자의 청렴과 청빈한 삶에서 나눔을 실천한 조무제 전 대법관을 통해 큰 감동과 위안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정이 무너져가는 요즘, 평생 법 앞에 만인의 평등과 공정한 판결을 추구했던 조무제 전 대법관의 가치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 | 프레시안 2025.02.01
가인과 조무제, 그리고 이균용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은 법관의 표상으로 추앙받는다. 단지 ‘첫’ 대법원장이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법률가로서, 나라의 큰어른으로서 값진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법률 초안 대부분이 가인의 손길을 거쳤고,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그가 이뤄낸 성취 중 하나다. 후세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법률가로서 업적과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기 절제와 함께 청렴한 삶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존경받았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인 김병로>(2017)에서 해방 후 미 군정청 경무부장이던 조병옥(1894~1960)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가인이 ‘공직자 부패와 권력남용이 만연했던 시절 청렴강직의 표상’이었다고 평가했다.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늘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고, 청탁을 배격했다. 판사를 비롯해 사법부에 몸담은 사람에게는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할 것을 당부했다.
“해방 정국에서 위세를 지녔다고 할 만한 그들은 큰 집은커녕 작은 집 하나도 불하받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살던 집, 적산가옥을 적당히 차지하고, 군정청과 줄을 대기만 하면 자기 것이 되는 풍조에서 그들은 공직의 청렴성을 철저히 지켜갔고, 그 공직을 남용하여 재산불리기의 시도를 일체 하지 않았던 것이다.”(<가인 김병로>, 442쪽)
한 교수는 가인을 가리켜 “공직자로서 사적 이익을 탐한 적이 전혀 없기에 그에게는 선공후사(先公後私)보다도 지공무사(至公無私·지극히 공평해 사사로움이 없음)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했다.
조무제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도 청빈한 법관의 사표(師表)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1993년 부산고법 부장판사 시절 공직자 재산공개 때 25평 아파트 한 채 등 6434만원을 신고해 재산공개 대상 법관 103명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2004년 대법관 퇴임 때도 재산은 아파트 한 채를 포함해 2억여원이 전부였다.
판사 시절 재판수당을 털어 직원 회식비로 내놓는가 하면 창원지법원장 퇴임 때엔 직원들이 모아준 전별금 500만원을 받지 않고 책을 사서 법원 도서관에 기증하도록 했다. 법복을 벗은 뒤에는 거액의 보수가 보장되는 로펌 대신 모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길을 택했다. 교수가 되어서도 사택과 연구실, 강의실만을 오갔고 점심시간이 되면 걸어서 사택에 가 식사를 한 뒤 다시 학교로 나왔다고 한다.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법권을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행사할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를 요구받는다. 법관윤리강령 제3조는 ‘법관은 공평무사하고 청렴하여야 하며, 공정성과 청렴성을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남을 심판하는 자리인 만큼 스스로 삼가라는 얘기일 터다.(하략) 경향 조홍민 사회에디터 2023.09.21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
제목이 무겁다. 정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매일매일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잣대가 합일되기보다는 균열되고, 희망보다는 좌절과 포기하는 사람이 더욱 늘어가니, 외부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늘 불편하다
잠실역 8번 출구에서 매주 마다 로또복권을 살려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볼 수 있다. 로또복권 당첨률이 높은 판매처로 소문이 나서 그렇다고 한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행운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복권 한 장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나를 아프게 한다. 또 한편에서는 장관 청문회 때마다 깨끗한 사람이 없다. 10여 년 전에 DJ 대통령 이후 국무총리 후보 1순위로 자주 거론됐던 조무제 대법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너무 청빈해서 국회 청문회를 하면 5분 이내 끝날 사람이라고 했다.부산에서 향판 생활을 계속하다 대법관으로 승진하게 되어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그 당시 재산이 몇천만원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전세를 얻어 주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청백리 기준이 이렇다고 한다.
청백리 1은 월급이외 일체 안 받는 사람
청백리 2는 관례 수준의 상납을 받음 (부조금 등)
청백리 3은 관행 수준의 상납을 받음 (소액 정도의 뇌물)
이 기준에 따르면 그는 청백리 1에 해당하는 분으로 현대판 청백리의 표상이다
그러나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청백리 3 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청백리 1, 2의 경우 사람이 너무 맑아 세상이 잘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대법관 퇴직 후에도 벼락부자가 된다는 변호사 취업을 하지 않고,그냥 모교에서 석좌교수로 남았다. 그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조무제 대법관이 뜨면 존경하는 마음에서 모두 기립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가 물질적이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은 청교도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자신에게는 이해를 바라고 타자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다.
아마도 물질만능의 개인주의 시대에 대한 심리적 저항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모순스럽고 남 탓만 하는 세상이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한다
서울 강남에서 오랫동안 정신과 병원을 운영해온 의사 한 분이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원시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원시사회는 춥고 외롭다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 돈을 좇는 사회, 양극화 등이 사람을 무서워하고 관계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돈 보다 관계가 중요한데 요즈음은 돈 때문에 춥고 외로워진다. 부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남이 정신병원이 잘 된다 삶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사람을 못 믿고 사기 안 당하려고 경계하다 보니 그들도 피곤하게 산다
돈보다도 자기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되는데 그것이 잘 안된다''
병원장의 말을 들어보면 돈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현대인의 삶에는 참 행복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욕구와 지나친 경쟁 심리로 살아온 우리들은 자기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당당하게 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타인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이 자유로워지게 되고그것이 당당함이라고 생각된다.
전문가들도 행복의 첫 단추는 비교의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하고, 비교는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다.오늘날의 가족관계는 존중과 배려보다는 돈이 주요한 수단이 되고 소통의 연결 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솔직히 이런 물질적 문화에 적응이 어렵고 세대 차이로 인한 단절과 소외를 느낀다. 그렇다 보니 자꾸만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 하고 되묻게 된다. 무슨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다르지만, 인생의 시기 시기마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 시점에 필요한 삶의 덕목과 요구되는 옳은 처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내 경우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눈 높이가 아닌 나만의 가치를 구현하는 삶을 살고자 했고, 그런 노력과 결과로서 오는 명예를 선택했다. 덜 물질적이었고 개인의 이기를 앞세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덕(德)이라는 말을 좋아했고 솔선수범의 자세로 따뜻한 리더십을 실천 하도록 노력했다.
나 자신이 출중한 능력과 학력이 있는 사람이 못되어,인생을 길게 보는 승부관을 가졌고, 돌탑을 쌓듯이 하나하나 쌓아가는 삶의 자세와 '인내'를 중시했다 어찌 보면 대기만성형의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를 요구했고 경쟁을 부추기니, 나 스스로가 힘에 부치는 삶을 살았다 비굴한 삶을 싫어하는 성품 때문에, 지연 학연도 없는 사람이 혼자 힘으로 뭔가 성취를 하겠다고 발버둥 쳤고, 나름의 보람과 성과도 있었으나 은퇴시점에서의 나는 에너지가 거의 고갈 되어 버렸다 더 이상의 사회적활동이 싫어졌다.
그러다 정년퇴직을 하니 존경하는 직장 선배님께서 '은퇴생활백서'라는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셨다. 이 책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면 좋은지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 하고 버킷리스트를 이야기하며 그동안 못했던 일을 이제부터 후회 없이 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여행이나 취미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퇴직 후 10년 즉, 나의 60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퇴직하는 다음날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작된 90대 장모님 돌봄과 손자 육아, 그리고 집안일 도와주기 등이 나의 고정된 일과로 자리 잡으면서,내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여유시간이 생기면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명상을 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렸다.
주변의 지인들은 황금 같은 60대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며 위로의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나의 이런 생활에 후회는 없다.오히려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즐겨 하는 명상과 자기성찰이 내면의 성장을 주고 있고, 취미로 시작한 독서와 글쓰기가 집중과 몰입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들이 어찌할 수 없이 나에게 준 인생 숙제들도 고통과 희생이 컸지만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인내하면서 굳건히 대처해온 것이 지금은 보람스럽고 떳떳하다.
딱 한 가지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가끔씩 목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나 스스로가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지만, 집안 사정으로 큰돈이 필요해지면 불편한 마음이 든다. 나 한테 요구되는 역할을 다 해 주고 싶지만, 그럴때마다 자중해야하는 현실이 가끔씩 자괴감을 들게한다.100세 시대에 몸 건강한 사람이 왜 경제 활동을 안 하느냐? 이래도 되는가? 라며 반문하게 된다.그럴 때마다 돈 벌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도리가 없다.현재 느끼는 이 행복을 돈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며칠 전 나의 칠순 생일을 축하한다며 자식들이 정성스러운 선물과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와 고마웠다.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법정 스님 말씀에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우리는 곡선의 묘미를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우리들은 그동안 빠른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시간과 효율을 너무 따지며 살았다.이것은 직선적 삶이다.나같이 나이 든 사람은 이제 순리를 따르고 지혜로움과 모범적 삶이 전부가 되도록노력해야 한다.잘못된 처신은 노년을 망친다.
매일 한 가지 일을 한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고대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빌어 내 답을 대신한다.
'' 매일 저녁,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가?
어떤 좋은 일을 했는가?
어떤 의무를 수행했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책 '세내카의 행복론' 박정민 옮김
NAVER블로그 블로그 심천해 心泉海 2024. 7. 29
검찰이 비난한 '패륜' '야심' '탐욕'이 친부살해 무죄 밝혀
친부살해 무기징역 김신혜 씨, 재심 끝에 24년만에 무죄 선고
한국일보 인터뷰 "각본 짠 검·경, 사과한 사람 한 명도 없다"
김웅, 변호인·언론 비판 "무고한 죄 뒤집어쓴 것처럼 세상 호도"
[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수면제 탄 술을 친부에게 먹여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된 김신혜 씨가 24년여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김신혜 씨와 동생 김성후 씨는 언론에 '각본'을 짠 검찰과 경찰 단 한 사람도 사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6일 광주지법 해남지원 형사1부(지원장 박현수)는 김신혜 씨의 존속살해·시체유기 혐의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김신혜 씨 사건과 관련한 검찰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김웅 전 국민의힘 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김웅 전 의원은 광주지검 해남지청장 시절 김신혜 씨 재심 결정에 대한 첫 항고를 진행했다. 김웅 전 의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김신혜 씨를 '극악한 패륜 범죄자'라고 했다. 김신혜 씨 변호인과 이를 취재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야심가' '탐욕가'라고 했다.

지난 2000년 3월 전남 완도군의 한 버스정류장 앞 도로에서 김신혜 씨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큰딸 김신혜 씨(당시 23세)를 살인·사체유기 혐의로 긴급체포했고, 검찰은 그를 존속살해·사체유기 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발생 1년 만인 2001년 3월 대법원은 김신혜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수사기관은 김신혜 씨와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점, 보험설계사로 일하던 김신혜 씨가 아버지 명의로 거액의 보험을 가입한 점 등을 근거로 친부살해라고 판단했다. 김신혜 씨의 자백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재판에 넘겨진 김신혜 씨는 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다는 고모부의 말을 듣고 대신 교도소에 가기 위해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적도 없다고 했다.
재심 재판부는 ▲김신혜 씨의 자백을 신뢰하기 어렵다 ▲검찰이 제시한 수면제 30알로 부검 결과상 독실아민 수치(13.02㎍/㎖)가 나오기 어렵다 ▲경찰이 영장 없이 김신혜 일기장 등을 압수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부족하다 ▲김신혜 씨가 보험금을 탈 수 없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등의 이유를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김신혜 씨는 9일 공개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내 말을 한 번만 믿어주지. 얼마나 억울했는데"라며 "경찰과 검사가 원하는 각본대로 됐다"고 말했다. 김신혜 씨는 "조사받으러 갈 때마다 '밖에서 증인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니가 어떻게 밝힐 거냐. 각본대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며 "내가 아니면 동생이 뒤집어쓸 수 있다고도 했다"고 말했다. 김신혜 씨 동생 김후성 씨는 "지금까지 사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재심 법정에서 만난 경찰들은 우릴 째려보기만 했고, 지금도 잘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고 했다.
김신혜 씨를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는 "처음부터 김신혜를 목표로 해서 진행된 수사였다"며 "진술 받는 과정, 압수수색 과정, 자백을 강요하는 현장 검증 등 수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위법이 있었다"고 했다.
재심 절차는 2015년에 시작됐다. 2015년 1월 대한변협 인권위원회가 사건을 맡아 재심을 청구했고, 그해 11월 광주지법 해남지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당시 광주지검 해남지청장인 김웅 전 의원은 김신혜 씨 사건 재심 결정에 항고했다. 2017년 광주고법이 항고를 기각하자 검찰은 재항고에 나섰다. 대법원은 2018년 9월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2019년 3월이 되어서야 재심 재판이 사작됐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재심 결심공판에서도 김신혜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지난 2023년 5월 자신의 SNS에 "김웅 의원은 검사로 재직할 당시 이 사건 기록을 꼼꼼히 봤을 것이다. 그는 <검사내전>에 이 사건을 언급했다"며 "직접적이지 않았지만 저는 바로 알아챘다"고 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김웅 의원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김신혜 씨에게 재심 전 무기징역을 확정지었던 대법관은 많은 법조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조무제 동아대 석좌교수이다.(중략)저는 재심 판결로 '지연된 정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고 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2023년 10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웅 의원이 김신혜 사건의 증거가 충분하다며 변호사님을 야심가라고 한 적이 있다'는 질문에 "김웅 의원과 검찰개혁위에서 함께 활동했다. 능력 있는 검사, 일 잘하는 검사였다고 생각한다"면서 "그 분도 확신에 차서 그런 글을 썼을 텐데 저는 그걸 비판하려고 한 게 아니라 사건과 사람에 대한 판단이 정말 어려울 수 있다는 것, 이 사건을 통해 한번 살펴봐달라는 그런 목적으로 글을 올린 것"이라고 했다.
한국일보는 2023년 5월 기사 <'아버지 살해 무기수' 김신혜 재심 본격화... 박준영·김웅 '진실 공방'>에서 "검사 시절 사건 기록을 검토했던 김 의원 주장의 핵심은 수사 과정에서의 하자가 김씨의 무죄를 입증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김웅 의원은 한국일보에 "(강압수사 등)김씨 주장은 이미 과거 법정에서 모두 검토됐고, 재판 단계에서 거의 수사를 새로 한 수준"이라며 "유죄 증거가 많아 압수조서 문제 등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고 밝혔다.
"SBS 기자, MBC PD 모두 고맙다"
박준영 변호사와 고상만 인권운동가는 김신혜 씨 재심 과정에서 방송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2023년 5월 자신의 SNS에 "2001년 6월 SBS '뉴스추적', 2003년 10월 MBC 'PD수첩'에서 사건을 재조명했다"며 "20년 넘게 흘렀지만 당시 방송 자료가 상당히 의미 있다. 고모, 고모부, 큰아버지 진술의 모순과 문제점을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재판에 두 프로그램의 영상을 제1호, 제2호 증거로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20년 전 SBS 정명원·유희준 기자, MBC 이동희·김진만 PD, 고상만 인권운동가(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의 방송 영상 캡처본을 SNS에 게재했다.
고상만 인권운동가는 9일 자신의 SNS에 "김신혜 씨 사건이 무죄가 나올 수 있었던 힘은 역시 방송이었다. 24년 전 재심이 아예 불가능했던 그 때에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때 가장 많이 도와준 매체가 SBS '뉴스추적'의 정명원 기자였다. 이후 'PD수첩'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연락이 와서 보도로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고 했다.
고상만 인권운동가는 "재심 재판에서 프리뷰 증언 기록이 큰 역할을 했다.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현역 무기수가 최초로 무죄를 받은 재심 사건이 되었다"며 "SBS 정명원 기자, 2003년 'PD수첩' 김진만 PD, 그리고 2014년 방영해 준 '그알'의 주시평 기자 모두 고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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