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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영화 '1987' 속 실제 교도관 한재동

by 이성근 2025. 1. 11.

교도소 넘은 진실전병용김정남함세웅으로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9

19873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보안계장 안유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이부영은 한재동 교도관에게 볼펜과 종이를 요청했다. 한재동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볼펜과 근무용지인 보고전몇 장을 제공했다. 수감자들에게 필기도구조차 금지된 때였다. 이부영은 3통의 편지를 써서 박종철 사건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며 건네주었다. 한재동은 편지를 교도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 전직 동료 교도관 전병용에게 전달했다. 그는 당시 수배상태였던 전병용과 연락하고 지내고 있었다.

한재동은 영등포교도소 안에 있는 철공장의 재소자들을 관리·감독하는 일을 했다. 철공장에선 재소자들이 수갑 등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는 오후 5시부터 퇴근시간인 6시까지 그는 매일 이부영을 만나 바깥소식을 전해주었다.

민주 교도관으로서 한재동의 활약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5·3 인천항쟁을 비롯한 주요한 시위가 있을 때마다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70년 대전교도소에서 근무할 때 동료 교도관을 통해 우연히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읽었다.

동료가 어느 날 씨알의 소리라는 작은 책자를 책상 위에 두면서 너도 읽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탐독하며 역사의식을 갖게 됐어요.”

그 후 교도소에서 조영래·김대중·함세웅 등을 만나며 감옥 안과 바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했다. 77년 무렵엔 박정희 유신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모임에 비밀리에 가담했다. 교도관 신분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들이었다. 이부영이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것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그의 실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재동은 내부 제보자가 안유 보안계장일 거라고 추측만 했다. “서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알면 위험하니까요.”

그는 6월항쟁 동안 내내 거리에서 살다시피 하며 시위대와 함께했다.

감옥 안에서 한재동을 통해 바깥소식을 접하고 있던 이부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뒤 항의투쟁을 벌여왔다. 27일 추도대회와 3349재 땐 단식으로 항의했다. 어느 날 고문경관 두 명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 애초 여성 재소자들을 수감하는 여사동이었는데, 죄수들을 다른 교도소로 모두 내보낸 뒤 두 경관이 들어왔다. 마침 같은 사동에 배치된 이부영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조한경, 강진규. 당신들은 이제라도 박종철의 명복을 비십시오. 반성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일방적인 외침이라 그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두 사람이 면회를 다녀온 뒤면 강진규는 흐느껴 울었고, 나중에 교회 장로가 된 조한경은 찬송가를 불렀다. 이부영은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우는 것인지, 면회를 다녀온 일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유에게 면회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을 땐 그도 깜짝 놀랐다. 편지를 밖으로 내보낸 뒤 그가 말했다.

안형, 나와 면회한 기록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언제 내부 수사를 통해 역추적이 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흔적을 모두 없애야 했다. 편지가 그의 손을 떠난 이후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한재동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전병용은 전에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그는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김정남도 수배중인 상태였다. 전병용은 편지를 전달한 이틀 뒤 검거되었다. 이부영은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찔했죠. 며칠만 먼저 체포됐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더 좌불안석이 됐죠. 여러차례 옥살이를 했지만 그때처럼 힘든 때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5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 이후 틈날 때마다 안유가 신문을 가져와서 보여줬고, 한재동이 바깥소식을 전해줬다. 그는 6·29 선언이 나온 뒤에야 안심했다.

김정남은 애초 야당 국회의원을 통해 임시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때 폭로하는 방안을 생각했지만 의원의 고사로 시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는 고민 끝에 사제단에 발표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3월 중순에 건네받은 3통의 편지는 ‘5·18’ 며칠 전에야 함세웅 신부에게 건네졌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국자와 딸 고은영이 편지를 전달한 메신저였다.

언론은 성명서 내용을 대서특필하며 연일 보도했다. 이틀 뒤 검찰은 사건을 축소·조작한 사실을 인정하고 재수사를 시작했다. 526일 오전 정부는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사흘 뒤 사건을 맡은 대검 중앙수사본부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재수사 결과 물고문에 앞서 고문경찰관들이 박군을 조사할 때 가슴을 때리는 등 상당한 구타가 있었음이 입증됐다. 그러나 물고문 이외 전기고문한 사실은 없다.”

박정기는 전기고문이 없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전 국민에게 거짓말이 들통난 정부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한겨레 2012-01-30

"진실 알고도 행동 안하면 악이죠"... 영화 '1987' 속 실제 교도관 한재동 씨

34년간 교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한재동(71)씨가 세간에 알려진 건 퇴직 3년 뒤인 2007년이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부터 민주시민감사패를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한 씨는 19876월 항쟁의 계기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교도소 밖 세상으로 전한 비둘기였다.또 요즘 난리가 난 영화 ‘1987’ 속 유해진씨가 연기한 한병용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배정현 기자 = 14일 오후 서울 갈월동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보호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한재동 전 교도관이 고문치사사건 당시 정황을 밝히고 있다. 2012.1.14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에서 조경 일을 하던 그는 첫 만남에도 이미 수 차례의 인터뷰가 익숙한 듯 무심해보였다.영화 이야기부터 꺼내려고 한 그를 만류하고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고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987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거 아니오?”라고 묻는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알아야 선생님이 왜 편지를 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그가 들려준 그의 역사는 우리나라 민주화가 걸어온 적나라한 실체이기도 했다.

한 사내가 걸어온 길을 추적해보니 그는 1980년대 공직자 신분이면서 민주화의 중점에 선 비범한 인물이었다.15년간 교정일을 하면서 그을러진 검은 피부에 짧은 머리카락은 단호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전라도 말씨에 빈틈없는 말투는 민주화를 열망했던 30년 전 젊은 그를 떠올리게 했다.

-교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인 1963년도에 우리나라에 필드하키가 처음 들어왔죠. 나는 필드하키 선수였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출전 한 번을 안시켜주더군요. 알고보니 광주 학교가 필드하키로 출전하고 우리 순천 학교는 배드민턴에 출전하기로 선생들끼리 입을 맞췄더만. 운동만 했으니 공부를 잘했겠습니까. 일찌감치 전역하고 교도관 시험을 봤어요.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험을 봤는데 교정직이 붙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말인가요.

“1969년에 필기시험을 합격했는데 당시 집안 권유로 서울에서 일을 했어요. 몸이 안좋아서 쉬었는데 71년에 다시 시험에 붙더라고요. 교도관하라는 팔자인가 보다 하고 교도관으로 정착한 거죠.”

-교도관 생활은 어땠는가.

“1971년에 수원교도소로 첫 배정을 받았어요. 만날 졸자로 일을 하다보니까 감시를 하는 관망대, 좁은데서 일을 시키더군요. 군대에서도 이병일 때 일반 하사직에 지원해 근무를 했었습니다. 여기서도 막내로 힘든 일을 할 바엔 간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됐습니다. 근무시간에 교정직 행정학 책을 읽었다고 꼬투리를 잡아서 사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근무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내게 사표를 요구하길래 시말서와 함께 요구사항을 첨부해서 제출했습니다. 교정직 공무원들의 직원 처우가 열악하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랬더니 징계로 만장일치 파면을 내리더라고요. 사표를 강요받았지만 버티다가 대전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죠.”

-트집을 잡아 징계를 받았으니 순탄치 않았겠는데.

대전에서 경주, 장흥, 서울구치소 등등 계속 돌았습니다. 높은 사람 말 안듣는 직원으로 찍혀서 하루종일 감시의 눈을 받고 살았습니다. 새벽 근무중에 잠깐 눈을 붙이면 졸았다고 징계받고. 이런 일이 허다했죠. 당시 어려움을 견뎌내는 데 책이 도움이 됐습니다. 같이 하숙하던 사람이 월간지 씨알의 소리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주더라고요. 그것을 읽으면서 민주 사회에 대한 눈을 떴다고나 할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폐간될때까지 7년을 봤는데 그 책을 보면서 제 생각이 많이 깨어났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생각하는 계기가 된 건가.

책의 영향도 있고 1975년에 서울에 다시 올라왔는데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부터 양심수들을 많이 봤습니다. 당시 정부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양심적으로 성명을 발표한 사람들이 수감돼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76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문익환 목사, 김기하 시인 등이 들어왔는데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됐죠.”

-정의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볼 수 있는가요.

책이나 수감자들을 보면서 이론적으로는 무장이 돼 있었어요. 그러다가 7931일에 일이 터졌죠. 국경일날 무조건 군복을 입고 근무를 해야했는데 출근하던 직원이 교정에 들어와서 갈아입겠다고 항의했습니다. 이게 원인이 돼 간부가 직원을 때렸어요. 직원들이 병원에 모여서 소장에게 진정서를 썼습니다. 직원들 동의를 받았는데 200명 정도 사인을 했어요. 서울구치소 창설 이래 최초의 공무원 단체행동이었습니다. 당시 과장들이 술을 사가면서 진정을 취소해달라고 했는데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사과하라고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전출명령을 내렸더라고요. 끝까지 포기안했던 직원 6명이 소장에게 따지고 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당신들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서 우리는 정당한 일에 대해 말도 못하냐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위에서 반성을 합니까.

아니죠. 나는 김천으로 쫓겨났어요. 한달쯤 됐나. 봉급탈때가 됐는데 봉급을 안주길래 연락해봤더니 서울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봉급받으러 올라왔더니 소장이 왜 여기로 왔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두시간을 이야기하는데 회전의자에 앉아서 대화도 섞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이틀 뒤에 검찰에서 연락이 와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업무방해에 상급자에게 대들었다는 게 이유인거에요. 소장이 고발을 했더라고요. 검찰에서 사표를 낼래 구속이 될래 하더라고요. 도저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들더라고요. 저는 그 해에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습니다. 민주주의가 오기를 희망하면서 데모 현장에도 많이 갔었어요. 절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성동구치소에 구속을 시키더군요. 다른 직원들은 사표를 내고 나갔는데 나는 버티니 구속을 시켰더라고요. 구속이 되니까 김천교도소에서 나를 징계하겠다고 자술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자술서를 썼더니 파면을 시켰습니다. 한 달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파면이 돼서 순식간에 직장을 잃었죠.”

-복직을 위한 싸움이 시작된건가.

소청심사를 청구해 승소했습니다. 그런데 김천교도소에서 다시 징계를 통해 나를 재파면하더라고요. 다시 소청 청구하려고 하는데 하필 박정희 전 대통령 10.26 사태가 발생해 온 나라가 비상사태가 됐어요. 법원에 가니 전부 군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심사들이 하는 말이 군인보다 엄해야할 교도관인 내가 잘못을 했다면서 소청심사를 기각 시키더라고요. 대법원까지 3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힘든 싸움 끝에 김천소년교도소로 복직을 했습니다.”

-눈밖에 난 사람이 서울로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았을텐데요.

예전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청백리상을 탈 만큼 강직한 분이었어요. 우리같은 사람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 좋아하면서도 윗선들이 싫어하는 옳은 소리는 너무 많이 한다고 하신 분이죠. 미운정, 고운정이 다 있었죠. 그 분이 영등포교도소 소장으로 진급해서 저도 그리 데려가달라고 했죠. 당시 결혼할 사람도 서울에 있고 지인들도 있어서 서울로 가야겠다 싶었거든요. 기다리다보니 84630일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때 영등포로 가게된 겁니다.”

-여기서 1987년도를 맞이한 건가.

그렇죠. 19865·3 인천 사태로 이부영씨가 수감됐습니다. 이부영씨는 나보다 다섯 위엔데 76년도에 서울구치소에서 만났던 분입니다. 인연이 되면서 자주 만났고 서울대 앞이나 중앙대 등등 데모현장에 같이 갔었습니다. 당시 교도관들이 5시에 업무가 끝나면 직원이발소에서 6시까지 대기하다가 퇴근을 했습니다. 이부영씨가 수용된 사동이 그 근처여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이부영씨와 이야기를 자주 나눴습니다. 1987년에 남양동 대공분실에서 학생을 조사하다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하게됐죠. 당시 고문 경찰들이 이부영씨 건너 건너방으로 수감이 됐어요. 이부영씨가 어느날 제게 종이와 볼펜 좀 줘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도 모르게 근무용지 몇 장하고 내가 가진 볼펜을 줬습니다. 당시 안유 보안계장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구나 싶더라고요. 안유 계장이 수감된 경찰들에게 고문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거죠. 이부영씨가 전병용씨에게 메모를 전해주라고 해서 이튿날 전병용씨에게 전해줬고 그게 김정남씨한테 건네간 겁니다. 전병용씨는 내가 파면당한 서울구치소 사건 당시 사표를 내고 나간 동료 교도관이었습니다. 전병용씨도 인천 사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도망다닐때였죠. 쪽지를 전병용씨에게 건넸는데 이틀 뒤엔가 전병용씨도 구속이 됐습니다. 이부영씨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그 때부터 김정남씨에게 직접 전해주라고 하더라고요. 세 번 정도 전해줬습니다. 당시 이부영씨가 제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이게 바깥으로 터지면 큰 국민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죠.”

-2004년 퇴직때까지도 이 내용은 비밀처럼 지켜졌는데.

나는 정의사회를 위해서 해야할 일을 전한 것 뿐이고 민주주의 사회를 누구보다 꿈꾼 사람입니다. 쪽지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그 이면에 나같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인거죠.”

-꿈이나 바라는게 있습니까.

내 나이 70이오. 바라는게 있겠소. 물 흐르듯이 사는거에 만족하는거지.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의 본이 되고 따를 수 있도록 정의롭게 살아야겠죠. 그렇지만 젊은이들도 정의롭게 살려도 노력하고 진실이라고 하면 용감하게 해내려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진실을 알고 있더라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것도 악()입니다. 알아도 행동으로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겠죠. 젊은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진기자/chj@joongboo.com 2018.01.23.

‘1987 비둘기날린 어느 민주 교도관

한재동씨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교도관 시절, 양심수 등을 도우며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민주 교도관으로 퇴직한 뒤 민주 경비로 인생 2막을 살고 있었다. 한재동씨(71). 지난해 개봉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2004년 교도관을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출근한다. 근무처는 경비실. 그를 만나 ‘1987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부터 물었다.

부영이 형이 자료를 넘겨주면서 재동아, 일이 잘못되면 큰일 난다. 발각되면 너나 나나 죽을 수도 있어.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했다. 긴장은 되었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교도관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한재동 교도관이 부영이 형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76.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대변인 이부영 해직 기자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다. 한 교도관은 이부영 기자와 대화를 나누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에도 둘은 구치소에서 교도관과 재소자 신분으로 만났다. 호칭부터 달라져 있었다. “이라는 공식 호칭보다 부영이 형이 더 익숙했다. 한 교도관은 부영이 형을 따르며 옥중 생활의 편의를 봐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1987년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이 수감되어 있던 영등포교도소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구속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도 수감됐다. 수감 당시 경찰의 연출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경찰은 똑같은 옷을 입은 대역 3명을 동원해 구속되는 고문 경관의 언론 노출을 막으려고 했다.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교도관들도 재소자를 상대로 고문을 많이 했다. 경찰이고 검찰이고, 중앙정보부고 안기부고 조사할 때 반은 죽여놓는 방식을 뻔히 아니까 우리는 애초부터 경찰 발표를 100% 안 믿었다.”

이부영 사무처장은 고문 경관 2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재동 교도관에게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무처장은 안유 보안계장, 소영환 교도관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했다. 당시 수감 중인 두 고문 경관은 구치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거부하고 잠도 못 자는 등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을 감옥에서 감쪽같이 죽이는 방법으로 진실을 묻어버릴까 봐 공포에 떨었다.”

특히 강진규 경사는 고문에 직접 가담한 다른 경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불안해하는 강 경사를 달래 박종철 고문치사 가담자 이름과 역할, 고문 장소 약도 등 주요 증거를 파악하는 일은 소영환 교도관이 맡았다. 소 교도관은 강진규 경사를 안심시킨 뒤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설득했다. 소 교도관은 강 경사로부터 편지지 5, 앞뒤로 10쪽 분량의 자필 경위서를 받아냈다. 또 두 고문 경관을 면회 온 경찰 간부는 1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보이며 회유했다. 면회에 입회한 안유 보안계장이 이 장면을 포착했다.

민주 교도관들이 파악한 진실은 이부영 사무처장에게 전달되었다. “1987223일 부영이 형이 나를 불러 종이와 펜을 넣어달라고 했다. 드디어 그날이 온 걸로 짐작했다.” 재소자에게 필기구와 종이 소지가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볼펜하고 책상 위에 놓인 영등포교도소 근무용지 한 장을 뜯어서 급히 넣어드리니 다음 날 오후 조용히 오라고 했다. 다음 날 쉬는 시간에 찾아갔더니 빼곡히 쓴 편지를 넘겨주며 보안을 신신당부하고는 김정남씨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연합뉴스1988년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박종철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라고 시위했다.

수감 중인 이부영 사무처장이 한 교도관을 통해 재야 민주화운동가 김정남에게 날린 비둘기는 모두 4통이었다. “첫 번째 편지는 퇴직 교도관이던 전병용씨를 중간에 끼워 김정남씨에게 건넸다. 두 번째 편지부터는 평창동 개울가 산돼지 전문점 식당을 비밀 접선 장소로 잡아 내가 직접 갔다. 매번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 김덕룡씨와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가 함께 나와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직감적으로 이 편지를 국회에서 폭로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1987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 때 진실이 담긴 그 비둘기를 세상 밖으로 날려 보냈다.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아 파면당하기도

한재동은 19714월 교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입직 초기부터 교도소 내 고질적인 부조리를 목격했다. 침묵하지 않았다. 젊은 교도관은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교정 간부들로부터 꼴통 교도관으로 일찌감치 찍혔다. 시련은 첫 부임지인 수원교도소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근무 중 행형법과 형사정책 등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교도 행정에 필요한 책을 읽은 게 뭐가 잘못이냐?”라고 따지는 그에게 교도소장은 시말서(경위서)를 요구했다. 그는 시말서와 함께 교도소 내 부정·비리와 잘못된 관행 18가지를 첨부해서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면 결정이었다. 그가 파면 무효를 주장하자 교도소장은 파면 처분을 취소하는 대신 대전교도소로 보냈다. “대전교도소 앞 하숙집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지냈는데 학생들이 보던 씨의 소리를 나도 읽었다. 유신체제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동료 교도관 중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젊은 교도관들과 논의해 구속된 학생들과 재야인사를 돕는 길을 모색했다. 19763·1민주구국선언으로 수감된 김대중, 함세웅, 문정현 등을 그는 알게 모르게 도왔다. “재소자 옷에 붙은 노란 딱지는 긴급조치 위반자, 빨간 딱지는 보안법 위반 사범이었는데 우리는 일부러 노랑과 빨간 딱지를 단 수형자만 만나서 친하게 지내며 음식과 책을 넣어주고, 시국에 대해 이런저런 고견을 들었다.”

시사IN 신선영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했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한재동 전 교도관.

유신정권이 법무부 소속 교도관들의 일탈을 모른 채 넘길 리 없었다. 전병용·한재동·김재술 세 교도관은 교정 당국에 눈엣가시 3총사였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기 직전 서울구치소 소장실 점거 사건이 터졌다. “완전군장 차림으로 출근하라는 상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동료 교도관이 몽둥이로 맞고 낭심을 걷어차여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교도관 150명이 연판장을 돌려 폭력 행위자 처벌을 요구하며 대표단 8명이 소장실을 찾아갔는데 이걸 소장실 점거로 몰았다. 검찰에서 전원 구속하라고 나왔다.”

검찰은 사표 또는 구속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는 구속을 택했다. 이때 함세웅 신부가 나서서 유현석 변호사를 그에게 소개했다. “검사가 반성문을 요구하기에 잘못한 게 없다고 끝까지 버텼더니 자기가 대신 써와서 지장만 찍으라고 하더라. 구속된 지 30일 만에 풀려났다.”

법무부는 교도관이 상사에게 대들었다라며 하극상을 이유로 그를 파면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교도소에서 쫓겨난 그는 행정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1981년 가을 마산교도소 교도관으로 복직했다. 유신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함세웅 신부 주례로 이촌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복직한 한재동 교도관은 다시 뜻이 맞는 교도관들과 함께 수석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인사들을 가둔 교도소에 근무하지만, 잘 다듬어진 수석처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뜻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87년 김승훈 신부가 날린 비둘기는 거대한 날갯짓으로 6월 항쟁을 일으켰다. 민주화 물결이 사회 곳곳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교도소 민주화는 더뎠다. 한 교도관은 또다시 교도소 내 부패 개혁 운동에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1989년부터 언론에 교도소 부조리 실태가 잇달아 보도되었다. 그가 언론에 날린 고발 비둘기가 기사화된 것이다. “1989년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신문과 방송에 제보한 게 수석회라고 의심해 제보자를 색출하려 했다. 당시 방송사 기자와 직접 인터뷰를 하며 얼굴은 안 나오게 한다고 해서 응했는데 위에서는 다 알더라. 그래도 조사는 별일 없이 마무리됐다. 법무부 한 간부가 한재동을 조사하게 되면 오히려 교도 행정에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서 받아들여졌다고 하더라.”

6월 항쟁 이후 한 교도관은 박종철군 부모도 만났다. “말없이 전화번호만 건네주는데 자식을 그렇게 보낸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 아팠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 규명에 공헌한 그와 민주 교도관들의 활동은 오랫동안 비밀로 남았다. 현직 교도관 신분을 고려해 보안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200412월 그는 정년퇴직했다. 2007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화 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운 공로로 감사패를 수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린 그와 안유 계장 등의 사연은 2012년에야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2012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마당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에 그는 부영이 형’, 안유 계장과 함께 참석했다.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에서 조국 교수(현 청와대 민정수석)가 사회를 봤다. 조 교수가 박종철 열사의 진실을 알렸던 주인공들이라며 부영이 형하고 안유 계장, 나를 소개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취재진과 함께 박종철 열사가 숨졌고, ‘민주 교도관으로 처음 얼굴을 드러냈던 바로 그곳을 찾았다. 경찰청 인권센터로 경찰이 관리해온 이곳은 내년에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뀔 예정이다. 행정안전부는 경찰청으로부터 관리권을 넘겨받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에 관리를 맡긴다. 한재동씨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인권기념관이 들어서면 경비원이 되든 자원봉사자를 하든 소중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알리고 지키고 싶다.”

시사인 정희상 기자 2018.07.26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

6·10항쟁 30숨은 주역이부영과 김정남, 항쟁의 출발점 된 옥중서신

그때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어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만 바라보고 있었죠.”(김정남)

감옥에서 하루도 편히 발 뻗고 잠을 못 잤죠. 언제 어떻게 발표가 날까 매일 매 시각 촉각을 곤두세웠죠.”(이부영)

지난 2일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덕 위에 솟은 성당 건물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명동성당은 30년 전인 1987610일부터 15일까지 청년 학생들과 시민 수백명이 농성 투쟁을 하는 등 6월항쟁의 중심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강제진압을 하려 하자, 김수환 당시 추기경이 학생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라며 단호히 맞섰던 곳이다. 한 중년 여성이 이부영(74) 전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의장에게 다가와 인사하면서 휴대전화로 기념촬영을 요청했다. 계단을 오르던 김정남(74)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하 호칭 생략)이부영의 인기가 아직 여전하네라고 말했다.

친구 사이인 김정남과 이부영은 1987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은커녕 최루탄이 날던 거리에도 한번 나서지 못했다.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은신처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으며,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6월항쟁에 불을 붙인 심지였다.

6·10대회 등 항쟁 기폭제 된

천주교사제단 5·18 성명서

이부영 감옥 편지가 초석

김정남이 막후 기획 완성

영등포교도소 있던 이부영

보안계장 제보로 편지 작성

한재동-전병용 교도관 라인

김정남에 체포 이틀전 전달

 

고영구 변호사 집에 만세가 터지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1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21·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경찰의 물고문 도중 숨졌다. 공권력에 의한 젊은 대학생의 죽음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2·7 고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대회‘3·3 고문 추방 국민평화대행진이 서울과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지만, 정권은 오히려 시위 확산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전두환이 413일 특별담화를 통해 그 전해부터 불붙기 시작한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처에 각계각층의 저항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는 폭발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만 감돌던 518일 저녁 명동성당에는 월요일인데도 성경책을 든 신자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1980년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 김승훈이 단상에 올랐다. 김승훈은 십자가를 향해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얼마나 간절한 절이었던지 제의가 벗겨져 김승훈의 머리를 덮었다.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3120자로 된 이 성명서가 가져온 파장은 막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범인 3명과, 은폐 조작에 관여한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등 경찰 간부들이 구속됐다. , 전두환 후계자였던 국무총리 노신영과 정권 2인자였던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등 정권 주축이 물러났다. 정권에 대항하는 시민 진영은 더 단단해졌다. 학생과 재야단체, 야당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라는 범국민적인 단일 조직으로 뭉쳤다. 이후 ‘6·10 범국민대회‘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등 본격적인 6월항쟁이 이어졌다. 518일 사제단 성명서는 6월항쟁의 동력이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달 30일 서울 경운동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사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5·18 특별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함 신부는 당시 517일 김정남씨가 편지를 보내 신부님들이 십자가를 져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해 최종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는 이부영과 김정남 손에서 태어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정권이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비밀 편지를 이부영이 감옥에서 오랜 친구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인 김정남에게 보냈으며, 김정남은 이를 토대로 성명서 초안을 만들어 정의구현사제단을 움직였다.

-두 분 모두 역사적 현장에는 없었는데요.

이부영을 도피시킨 혐의로 당시 나도 수배 중이었어요. 역촌동에 있는 고영구(80)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는데 그날 저녁 5·18 특별미사에 다녀온 고 변호사의 부인 황숙자 여사(2007년 작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드디어 했다면서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됐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야당 의원의 거절

한해 전인 19865·3 인천사태의 배후 조종 혐의로 수배 중이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이부영에게 친구인 김정남이 은신처를 마련해줬다. 당시 김정남은 주요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뒷수습 등을 책임지는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였다. 이부영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은 변호사 고영구의 역촌동 집이었다. 노모를 모시고 있는 고영구의 처지를 감안해 두 사람은 체포되면 원로 변호사 이돈명 집에 있었던 것으로 말을 맞췄다. 설마 원로를 구속하랴 싶어 낸 꾀였으며, 이돈명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돈명도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하고, 김정남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고영구는 이부영이 잡히고 얼마 뒤 김정남을 다시 자기 집으로 불러 숨겨줬다.

1987518일 광주항쟁 7주년 특별미사에서 발표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 초안.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이 성명서는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작성한 것으로

영등포교도소에서 편지를 밖으로 내보낸 뒤 어떻게 발표될까 걱정 반 궁금증 반으로 바깥 소식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요. 사제단이 성명서를 발표한 며칠 뒤 한재동 교도관이 보도가 난 신문 쪽지를 몰래 가져다가 보여줬어요. 그제서야 일이 성사됐구나 알았지요. 그 뒤에 개각과 관련자 구속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고, 6월 들어가면서 데모가 확 불이 붙길래 이제는 나에게 역추적은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성명서가 그날 발표되는지 알지는 못했다면서요?

“5·18 특별미사를 한다길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그날 할지 여부는 몰랐어요. 황 여사와 딸인 고은영(51)씨를 통해 명동성당 등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74) 신부한테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답이 없었거든요. 사제단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일이 성사되리라 믿기는 했지만, 초조할 수밖에 없었죠.”

김정남은 성명서를 처음에는 야당(통일민주당,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함께 만든 당) 의원을 통해 국회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친분이 두터웠던 김덕룡과 홍사덕에게 국회 대정부질문 때 질의할 의원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두 명은 그 내용으로 질의하겠다는 의원을 찾았다면서 원고를 써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뒤 미안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해당 의원이 내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는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면서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야당 의원이 비겁하다고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요. 자세한 정보 출처를 말해줄 수가 없었던데다가 내용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거든요. 당시 김수환 추기경조차 사제단의 발표를 앞두고 정말 조심해야 하는데라고 여러 번 걱정하는 말을 했을 정도였어요. 어쨌든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사제단뿐이었죠. 사제단은 최종길 교수 고문 사망 의혹 사건 폭로(1974) 때나 1975년 인혁당 사건 조작 문제 제기 때도 제가 쓴 성명서를 발표해주고, 저를 보호해줬거든요. 함세웅 신부한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면서는 최악의 경우는 수배 중인 김정남이 모든 것을 취재해서 보낸 거다, 우린 그 사람을 믿기에 발표한다고 밝혀도 좋다고 했어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김정남 전 수석 제공

신부님이 십자가를함세웅을 울린 편지

김정남이 이부영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맨 처음 받은 것은 315일쯤이었다. 그는 편지 내용을 토대로 지나간 신문 보도 등을 참고해서 3월말~4월초에 원고지 18매짜리 성명서 초안을 완성했다. 이 초안을 서울교구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신부 함세웅에게 보냈다. 추기경에게도 대략적인 내용과 경위를 보냈다. 고영구의 부인 황 여사와 딸 은영이 양쪽을 수십차례 오갔다. 김정남은 30년 만에 성명서 초안을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함세웅(‘6월민주항쟁 30년사업 추진위원회경운동 사무실, 530일 인터뷰) “김정남씨가 이부영이 그런 소식을 보냈다고 하면서 사제단에서 발표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러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내부적으로 의논했지요. 김수환 추기경과 상의를 했는데 추기경께서는 걱정을 하시더군요. 대담하고 과감하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한데 혹시 1975년 인혁당 관계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처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면서요. 박정희 정권 때 인혁당 구명운동을 하니까 재판이 끝나자마자 정권이 목숨을 빼앗아간 사례를 들면서 전두환 정권도 포악한 정권인데 그 경찰관 두 명을 감옥에서 죽이면 어떡하냐고 말이죠. 그러는 중 한편으로는 유현석, 황인철 변호사와 만나 김정남 초안을 토대로 성명서를 다듬어 최종본을 완성했어요. 하지만, 발표를 선뜻 결정하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저도 솔직히 겁이 나서 시기를 엿봤죠.”

-언제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가요?

주일날인 517일이었어요. 당시 주일에는 제가 구파발 성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날 거기까지 황 여사가 쫓아왔어요. 더 피할 수 없구나 싶어 깜짝 놀랐죠. 황 여사가 가져온 김정남씨 편지에는 이게 참 중요한 사건이고, 사제단이 이 책무를 맡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사제단의 어깨에 있다, 이것을 공개하면 포악한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신부님들이 감당해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것을 읽고는 그래, 할 수밖에 없구나결심했지요.”

함세웅은 야당을 통한 폭로가 무산된 것을 알고는 추기경과 상의하면서 5·18 특별미사를 준비했다. 2부에서는 사제단의 성명을 발표한다는 잠정 계획이었다. 당일 기자들에게 미사 뒤에 뭔가 중요한 게 있을 것이라고 예고도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전주의 문정현 등 사제단의 다른 신부들에게도 참석을 요청했다. 여차하면 대신 낭독할 사람들이었다.

-그 편지 역시 명문이었군요.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지요?

그때는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읽고는 바로 불태워 없앴죠. 아무튼 그날 미사 뒤에 곧바로 홍제동 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님한테 갔지요. 그런데 김 신부님의 어머님이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 둘이 만나면 뭐 뻔하니까요. 제가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어머님 나가세요했더니, ‘내가 다 알아하면서 안 나가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제 꿈을 꿨는데 우리 아들이 웅덩이에 빠졌다, 기도를 하니 성모님이 아들을 구해줬다면서 내가 함 신부가 우리 아들 신부한테 하는 얘기 다 알어 그러니 있어야 해하길래, ‘성모님이 구해줬으니 됐잖아요, 그러니 걱정 말고 가세요라고 권해서 다른 방으로 모셨어요.

김 신부님한테 그동안의 과정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내일 미사가 끝나자마자 성명서 발표는 신부님이 하세요, 그리고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했죠. 김 신부님은 기쁘게 내가 이번에 책임지마라고 하셨고요. 그때는 구속을 각오했지요. 저는 홍보국 사무실에 온 뒤 성명서 1천장을 복사하도록 했어요. 그러고는 밤 11시반쯤 김수환 추기경께 갔는데 다음날 할 강론을 쓰고 계셨어요. 평소와 달리 강론을 저한테 보여줬는데 제가 그동안 읽고 들은 추기경님 강론 중에 제일 강했어요. 저는 좋습니다하고는 내일 이렇게 합니다라고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추기경은 저들이 경찰관들을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또 걱정을 하시더군요.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아무리 독재여도 절차 없이 두 사람을 막 죽이지는 못한다고 변호사들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일 추기경님은 미사 뒤에 빠지시면 우리가 그다음에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보안계장 안유의 용감한 제보

이부영이 영등포교도소에서 友村(우촌·김정남의 아호)(), 모든 것은 잘 돼 가는 줄 아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급히 몇자 적어 보내네. 박군 건으로 구속된 조·강 건은 완전 조작극이야.”로 시작되는 첫번째 편지를 쓴 때는 그해 223일이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범으로 구속된 조한경과 강진규가 진짜 범인이 아니며(재수사 결과 조와 강 역시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최종 밝혀짐), 진범 3명은 따로 있다, 조와 강이 심경 변화를 일으키자 경찰이 입막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31일자로 쓴 추신에서는 직접 범인의 이름은 조의 반원으로서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이정오 경장”(반금곤과 이정호의 오기)이라고 적었다. , 227일 검사 안상수가 찾아와 조한경으로부터 그러한 내용을 다 파악한 뒤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윽박질렀다는 사실도 전했다. 은폐·조작된 핵심적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부영은 두 경찰관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37)된 후에도 추가로 알아낸 내용을 43일과 47일치 편지에 담아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이부영은 편지에서, 한두 신문에 제보해서 당국의 조작 내용이 알려지도록 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더 안전한 방식인 야당 의원이나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한 폭로를 기획했다.

-교도소에서 어떻게 그런 내용을 다 파악했어요?

어느 날 낮에 안유(72) 보안계장이 면담하자고 나를 부르더군요. 안 계장은 1970년대 <동아일보> 자유언론선언 사건으로 내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인데, 교도소에 문제가 있으면 나를 가끔 불렀어요. 시위로 잡혀 들어온 대학생들이 교도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거든요. 학생들을 좀 달래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바깥의 시위에 맞춰서 나도 동조 단식을 하던 때였어요. 그는 나에게 단식을 이제 그만하라, 학생들 좀 조용히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그러다가 안 계장이 정색을 하면서 큰일났다, 이러다가 나라 망하겠다고 하더군요.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이 고문해서 (박군을) 죽여놓고 그것을 조작했다, 가장 중요한 수사기관에서 조작하고 거짓말하니 나라 망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기가 직접 보고 들었던 일을 쭉 얘기하더군요. 메모를 할 수도 없고 해서 기억을 했지요. 그러고는 안 계장에게 여보게, 자네 나한테 이 얘기를 안 한 것으로 하자, 나와 면담한 기록도 다 없애라고 했어요.” 그해 120일 사건이 검찰로 넘어감에 따라 조한경과 강진규는 영등포교도소에 입감됐다. 이들이 배치받은 여사동에는 공교롭게도 이부영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이부영은 처음에 이들에게 젊은 학생을 고문해서 죽게 한 게 말이 되느냐.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다. 당신들에게 무리한 일을 시킨 그들이 잘못이다. 그러니 젊은 학생의 명복을 빌어주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별 반응이 없었지만, 수감 직후부터 그들 방에서는 찬송가와 성경 읽는 소리(조한경)나 흐느껴 우는 소리(강진규)가 자주 들렸다. 가족이 면회 온 날은 더 심했다. 두 명은 시간이 갈수록 더 흔들렸으며, 가족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경찰은 경정 유정방 등 대공수사단 간부와 동료들을 보내 이들을 압박하고 회유했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기에 석방되도록 해주고, 목돈도 만들어 주겠다’(실제로 박처원 치안감은 42일 면회에서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각각 1억원씩 예금된 통장을 보여줌)고 했다. 앞서 경찰은 자신들의 면회에 교도관이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규정을 들어 교도소 쪽이 거부하자, 경찰은 중견 간부가 입회할 것과 내용을 일체 기록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보안계장 안유가 유정방 등의 면회에 참관하게 된 이유였다.

이틀 늦었더라면 역사 다를 수도

-딥스로트(비밀 제보자)는 안유 계장이었군요. 그가 얘기한 것은 혹시 실수 아니었나요?

세월이 많이 지난 뒤 안유한테 나한테 얘기하면서 그 내용이 밖에 나갈 줄 몰랐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가 형이 그걸 가만히 묻어뒀겠어?’라고 반문하더군요. 그 소식이 바깥으로 전해질 것을 그도 짐작하고 있었던 거죠. 그는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어요. 그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다가 지난 201225주년 때에야 얼굴을 공개했죠. 그 뒤 퇴직 간부들이 그를 왕따시킨다고 해요.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죠.”

-편지는 언제 쓴 건가요?

안유를 만나고 난 뒤 내 방으로 돌아와서 그날 저녁 근무자인 한재동(70) 교도관을 불렀어요. 교도관들은 근무지를 자기들끼리 융통성 있게 바꿀 수가 있었어요. 한재동 교도관 역시 그전에 징역살이할 때부터 친했는데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에게 필기구와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더니 재생갱지와 볼펜 심(옥방에서는 감추기 쉬운 심을 주로 사용)을 구해주더군요. 기억나는 대로 적어 김정남씨에게 전해달라면서 한재동씨에게 건네줬지요. 다른 교도관들에게 그 후 상황을 들을 때마다 편지를 써서 내보냈어요.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김성진 법무장관이 방문(228)해서 보안을 강조할 정도로 비상이었어요. 편지를 잠시라도 방 안에 둘 수가 없었거든요. 물론 안유와 한재동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 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죠. 두 명 다 나를 따로 돕고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아서 좋을 일은 없잖아요.”

한재동은 도피 중인 김정남의 소재지를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교도관 동료였던 전병용(71)에게 전했다. 이른바 민주 교도관이었던 전병용도 수배 중이었다. 그즈음 교도관을 그만둔 전병용은 연희동 집에 김정남의 요청으로 이부영과 장기표 등을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붙잡히는 바람에 그도 범인 은닉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전병용씨한테 편지를 받은 때가 315일쯤이었다고요?

전병용씨 공소장을 보면 그가 경찰에 체포된 게 317일입니다. 나랑 만나고 이틀 뒤에 체포됐으니 15일이었을 거예요. 그 전날 밤에 저는 미국 이민 갔다가 귀국한 친구 이영철(연세대의 6·3 사태 주역)을 만나서 서초동의 유원호텔에서 같이 지냈어요. 그러고는 아침에 고 변호사 댁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전병용씨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며칠 동안 전화를 기다렸다. 당장 만나자고 하더군요. 호텔로 오라고 해서 만났더니 이부영이 보냈던 편지 2(223일과 31일치 추신)을 보관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건네줬어요. 그 이틀 뒤에 그가 잡혔으니 그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죠. 그 뒤에는 한재동씨한테 직접 받았고요.”

시민들의 거센 항쟁에 정권은 결국 6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전두환에게 건의하는 식으로 민주화 선언을 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이후 야권이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분열돼 그해 12월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패하긴 했지만, 6월항쟁은 19604·19 혁명에 이은 시민들의 승리였다. 6·29 선언 뒤 김정남은 수배 해제로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부영은 김천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88년 초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6월항쟁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6월항쟁은 황국자 여사와 교도관들 등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 즉 민중의 힘으로 성공했어요. 지난겨울과 올봄에 이어진 촛불혁명과 비슷하죠. 한마디로 민중이 이뤄낸 쾌거였어요. 양김 분열 등으로 아쉬움이 있지만, 그때 6월항쟁이 없었더라면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희생과 고생이 더 많았을 거라고 봐요. 김대중씨가 6·29 선언 직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저도 영예로운 역사라고 생각해요.”

198768일 한 외신기자가 방독면을 쓰고 시위현장에서 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부영이 친구, 애썼어

“4월 항쟁과 80년 광주 희생, 876월항쟁이 있었기에 이번에 촛불 시민혁명이 성공했죠. 그때 나를 믿고 교도관들이 아는 것을 얘기해주고, 그 위험한 편지를 운반해주는 것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화가 왜 안 되겠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시민의 힘으로 그 뒤 두 차례의 정권 교체에 이어 이번에 거대한 촛불 평화시민혁명이 가능했죠. 과거의 지혜가 뭉쳐 비무장, 비폭력으로 승화했죠.”

-남은 과제라고 할까, 시민들이 관심을 둬야 할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뒤에는 이것의 정치·사회적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이 제도화 과정에 시민들이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6월항쟁 뒤에 정치권에만 맡겨놓은 결과 5년 대통령 단임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라는 이상한 조합이 만들어졌잖아요. 이번엔 그러면 안 됩니다. 이제는 촛불 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도화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헌법 개정과 선거구제 개편 등에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때 야권이 분열하는 바람에 결국 여러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게 됐고, 그 때문에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사회를 바꾸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고 봐요. 이번 기회에 기회주의가 더는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고, 적어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들이 잘했다고 떵떵거리는 사회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6월항쟁의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해직기자 출신의 이부영이 감옥에서 김정남에게 보낸 비밀 편지는 그의 말대로 그만이 쓸 수 있었던 최대의 특종이었다. 명동성당 문화관 뜰에서 대담을 마칠 즈음 “‘역사를 바꾼 편지를 쓰고 그것을 국민에게 알린 두 분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애썼다고 이부영에게 공을 돌렸다. 이부영은 기자 때나 재야운동할 때나 중뿔나게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라며 우촌의 말대로 오묘한 섭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천우신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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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은 누구?

<동아일보> 기자 시절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1975년 해직된 뒤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1984),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상임위원장과 사무처장(1985)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19865·3 인천 사태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5차례 수감됐다. 1991년엔 이른바 꼬마 민주당부총재로 정계에 입문한 뒤 14, 15, 16대 의원을 지냈다. 1997년 대선 직전 합당으로 한나라당에서 의정활동을 하다가 2003년 김부겸, 김영춘 의원과 함께 탈당해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뒤 당의장(2004)을 지내기도 했다. 1942년 서울 출생 용산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김정남은 누구?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항상 있었다.” 고은의 <만인보 12>에 실린 김정남이란 제목의 시 일부다. 19646·3 사태로 감옥살이를 한 이후 그는 줄곧 재야에서 활동한 민주화운동의 조율사였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폭로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도 그가 썼다. 김영삼 정부 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2003)을 역임했다. <진실, 광장에 서다>(2005), <이 사람을 보라>(2012) 등 다수의 민주화운동사 책을 펴냈다. 1942년 대전 출생 대전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겨레 김종철,강재훈기자 2017-06-10

 

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박종철 고문치사진실 밝힌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교도관 한재동씨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1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19871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씨(당시 21·언어학과 3학년)가 숨졌다. 경찰은 이튿날 책상을 하고 내려치자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로 위장하려던 경찰은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자 다시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등이 모여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며 정권 차원의 조작·은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드러났고,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1987년 민주화운동을 다룬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1주일 만인 4일 현재 302만명이 관람했다. 정치인들과 경찰이 단체관람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 수감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김의성)에게 고문경찰관이 더 있다고 알린 보안계장은 안유씨(74)를 모델로 했다. 이부영의 편지를 몰래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달한 교도관(유해진)은 한재동씨(71)와 전병용씨를 합쳐놓은 것이다. 실제로는 한씨가 전씨를 통해 이부영의 첫번째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고, 두번째 편지부터는 한씨가 직접 가져다줬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안유씨와 한재동씨를 만났다.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했고 그 안에 박종철기념관이 있다. 안씨와 한씨는 2012년 박종철 열사 25주기 기념식에서 수십년 만에 재회했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 <1987> 시사회에 초대돼 함께 영화를 봤다고 했다. 관람 소감을 묻자 안씨는 당시 외부의 최루탄가스가 바람을 타고 교도소 안까지 날아오는 날이 많았다나의 경우 박처원 치안감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 등 픽션이 가미됐지만 그때를 돌아보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안씨는 당시엔 이부영씨의 비둘기(몰래 교도소 밖으로 검열받지 않은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가 한재동씨인 줄 몰랐다고 덧붙였다. 한씨 역시 안유 형님이 이부영 형에게 고문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당시엔 확신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한씨는 영화 속 장면들은 당시의 아슬아슬함에 비할 바가 못된다옛 기억이 상기되면서 다시는 저런 시절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심했던 1986년 한 해 동안 전국 구치소·교도소에 수감된 공안사범만 2800여명이었더군요.

안유 =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시국사범 증가로 감방이 모자랄 정도였어요. 처음에 대학생이 들어오면 독거방을 배정했는데, 숫자가 늘면서 일반 재소자와 같은 방에 넣을 수밖에 없었죠. 몰려 있으면 안되니까 대학생들을 2~3방 건너 한 명꼴로 배정했어요. 이들을 감당하기 위해 1986년 서울 및 수도권과 대도시 구치소·교도소마다 공안 및 공안 관련 사범 전담반이 꾸려졌는데 보안계장이던 제가 영등포교도소에선 전담반장이었습니다.”

두려웠죠, 하지만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실 알린 교도관 2명의 증언

지난 4일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씨(왼쪽)와 전 교도관 한재동씨가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둘러보고 있다. 두 사람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한재동 = “인천 5·3항쟁 이후 학생운동이 더욱 강력해졌어요.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된 학생들은 집단으로 구호를 외치고 단식하고 출정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죠.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어요. 시국사범, 양심수들은 죄없이 갇힌 거니까 저항할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교도관들과 마찰도 많았죠. 당시 학생들이나 양심수들은 교도관들을 정권의 시녀라고 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바깥에 알린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도 ‘5·3 인천항쟁의 배후 조종 혐의로 그때 구속돼 영등포교도소에 있었지요?

안유 = “이부영씨가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서울구치소에 투옥된 1974~75년쯤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부영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한 제 고교 동창이 구치소 관구 주임이었던 제게 그를 부탁했죠. 자주 대화하며 친분을 쌓다 헤어졌는데 1986년 영등포교도소에 이부영씨가 들어오면서 재회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집단구호, 단식 등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부영씨는 재소자 대표, 전 교도소 대표로 협상을 했고, 학생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어요. 주로 법무부가 금지한 책을 반입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전 당국 몰래 눈감아줬죠.”

한재동 = “1976년쯤 부영이 형을 서울구치소에서 만났어요. 형이 출소한 후에도 자주 만나 같이 데모하러 다녔죠.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당시 저는 거의 모든 시국사범들과 알고 지냈어요. 부영이 형이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온 후엔 매일 오후 5시 형을 찾아가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다 퇴근했어요. 당시 제게 배정된 업무공간이 오후 5시에 일을 마치는 수형자 작업실이었는데, 퇴근시간은 6시니까 1시간이 비잖아요.”

박종철이 쇼크사가 아닌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들통난 후 경찰은 119일 치안본부 대공수사352계 조한경과 강진규가 고문치사 가해자라고 발표했다. 이후 불과 5일 만인 24일 검찰 수사팀은 이를 인정하는 1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이 둘을 구속 기소했다. 안씨는 “20일 새벽 2시쯤 영등포경찰서에 봉고차가 도착했는데 내린 사람이 다섯이었다경찰은 이들이 대공 담당이어서 얼굴이 알려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똑같은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다섯명의 경찰을 봉고차에 태우는 촌극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 당시 취재 인파도 많이 몰렸죠.

안유 = “그랬지요. 전 고문경찰 둘을 어디에 수감할지 고민했어요. 양심수들이 있는 사동에 같이 넣으면 큰일날 테니까 이부영씨가 있는 사동에 넣었어요. 이부영씨도 학생들과 섞이면 결과적으로 그에게 안 좋을 것 같아 당시는 사용하지 않던 여자 사동에 배정했거든요. 그곳 창살을 통해 이부영씨가 조한경과 강진규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이라며 박종철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자고 했다고 해요.”

한재동 = “박종철 고문에 둘만 가담했다는 검경 발표가 가짜라는 걸 저는 처음부터 알았어요. 서울구치소에 근무할 때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찰이나 안기부, 보안사 등에 끌려가 고문당한 걸 목격했으니까요. 동료 교도관도 개 패듯 폭행당하고 돌아온 것을 봤고요. 가담자가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죠. 가해 경찰들이 영등포교도소로 온 후 동료 교도관들을 통해 진상을 파악해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조한경은 매일 성경을 크게 읽고 찬송가를 불렀고 강진규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경찰은 교도소 측에 조한경, 강진규를 조용한 공간에서 계속 특별접견(가림막을 사이에 둔 접견이 아닌, 별도 장소에서 편하게 대화하는 접견)해야겠다는 것과 자신들의 면회를 교도관이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안씨는 법무부에 보고한 후 규정을 들어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중견간부가 입회할 것과 내용을 일절 기록하지 말 것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교도소 측은 간부 침실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놓고 경찰에 접견실로 제공했다. 219일 대공5과장 등 6명이 가해 경찰관들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안씨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안유 = “경찰들이 거의 매일 면회를 왔어요. 219일 면회온 사람들이 너희 둘이 다 짊어지고 가라. 그럼 빨리 재판받게 해서 가석방이든 사면이든 빨리 석방되도록 하겠다. 대공조직을 위해 너희 둘이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어요. 조한경은 실제 물고문했다는 동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반발했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잊을까 봐 얼른 업무일지에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반금곤의 오기), 경장 이정오(이정호의 오기)라고 고문경찰 3명의 이름을 들리는 대로 적었죠. 그들은 대화에 빠져 있어 제가 적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어요.”

안씨는 며칠을 고민한 후 이부영을 사무실로 불렀다. 커피를 내주고 큰일났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형이 언젠가 출소할 테니 기록으로 남기라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안씨는 당시 분노를 느껴 고민 끝에 이부영씨에게 전했지만 그게 곧바로 바깥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다다음날인가, 이부영씨가 내게 박종철 관련 모든 업무일지와 자신과 면담한 기록까지 다 없애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했다. 정권을 뒤엎을 정보라고 판단한 이부영은 그 내용을 그날 바로 편지에 써서 다음날 한재동씨를 통해 외부로 내보냈다. 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담겼다.

- 비둘기 노릇은 위험한 일인데 어떻게 이뤄졌나요.

한재동 = “여느 때처럼 오후 5시 부영이 형을 만나러 갔는데 부영이 형이 재동아,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해요. 직감적으로 박종철 고문경찰들 얘기인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서 재생갱지를 찢어 제 볼펜과 함께 건넸죠. 부영이 형이 내일 오라고 하더군요. 이튿날 가서 늘 그랬듯이 감방 창문의 쇠창살을 손으로 잡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형이 제 소매 속에 몇번 접은 편지를 스윽 밀어넣었어요. 그래야 지키고 있는 교도관이 눈치채지 못하거든요. 형은 저의 동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한테 편지를 줘서 김정남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하라고 말했어요. 전 편지가 교도소 정문을 나설 때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다섯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부여잡고 퇴근했죠.”

그즈음 교도관을 그만둔 전병용은 당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김정남의 요청으로 이부영, 장기표 등을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검거되는 바람에 범인 은닉 혐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씨는 전병용과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자주 만났다. 편지는 전병용을 거쳐 315일에야 김정남에게 전달됐다. 역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이 연락하지 않으면 전병용도 그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병용은 편지 전달 이틀 후인 317일 경찰에 붙잡혔다. 김정남이 받은 편지는 223일자 외에 추가로 31일자로 작성된 것도 있었다. 227일 담당검사인 안상수가 두 고문경찰의 요청으로 찾아와 가혹행위 가담자가 3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871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특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밑에서 두번째)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맨 아래)는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1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특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밑에서 두번째)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맨 아래)는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발각됐을 때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없었습니까.

한재동 =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큰 두려움은 없었어요. 박정희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죠. 자질구레한 감정에 흔들려선 안되잖아요. 이전부터 정치범들의 비밀편지를 수없이 전달하기도 했고요.”

안유 = “저는 달랐어요. 역추적이 들어오면 간첩 누명이 씌워져 남영동에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려웠습니다. 솔직히 가족에게도 말 못한 채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죠.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남은 가족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걱정했습니다.”

- 검문검색이 삼엄하던 시절인데, 편지를 전달하러 가실 때 미행 등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한재동 = “중요한 걸 지니고 있으니까 항상 뒤를 나름대로 살피며 다녔어요. 예감이 안 좋은 날엔 일부러 골목을 돌면서 살피기도 하고, 버스와 택시, 지하철도 자주 갈아탔죠. 그러나 별일은 없었어요.”

- 영화에서 보안계장의 역할이 미화돼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안유 = “전 의인이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라고 했어요. 학생 수형자들은 제 얼굴에 짬밥을 뿌리기도 했죠. 그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시엔 수형자들이 고성 등 문제를 일으키면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어요. 그게 규정이었습니다.”

- 안상수 등 수사검사들은 227, 34, 327일 고문경찰을 면담했지만 이들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며 본격적인 수사 착수를 미뤘습니다. 당시 면담 자리에 교도관이 입회했나요.

안유 = “규정상 입회하는 게 맞고, 그날 제가 입회를 했는데 안상수 검사가 수사할 땐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가 조·강에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는 얘기는 추측건대 이부영씨가 같은 사동에 있는 조·강으로부터 밤에 전해들은 게 아닌가 싶어요.”

한재동 = “박종철 사건은 최환 검사가 은폐 시도에 맞서 부검을 밀어붙여 물꼬를 텄고, 안상수 검사는 덮으려 한 건데 안상수 검사가 덕을 본 것 같아요.”

그사이 경찰들은 조한경과 강진규를 계속 찾아와 회유했다. 금품 회유도 있었다.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고문경찰의 부인들을 불러 각 300만원을, 강민창의 뒤를 이어 2월 말 치안본부장이 된 이영창이 각 1000만원을 줬고, 동료 경찰들이 43796000원을 모금해 줬다. 박처원 치안감(대공수사단장)은 고문경찰 명의로 된 5000만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에 2계좌씩 가입한 후 조·강에게 보여주며 장래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있으라고 회유했다. 안씨는 “1억원이 들어 있는 통장으로 회유하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권의 조직적 은폐 기도는 그해 518일 세상에 폭로됐다.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5·18 특별미사 2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부영이 보낸 편지를 토대로 김정남이 작성한 것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2월 말 이미 진상을 파악하고도 본격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검찰은 뒤늦게 5202차 수사팀을 꾸리고 521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를 구속 기소했다. 그래도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529일 은폐 조작에 관여한 박처원, 유정방 등 경찰 간부들도 구속했다. 이후 국무총리 노신영과 정권 2인자였던 안기부장 장세동, 법무장관 김성기도 물러났다. 치안본부장 강민창과 내무장관 정호영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초기인 2월에 이미 퇴진했다.

전국에는 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부르짖는 독재 타도’ ‘호헌 철폐구호가 물결쳤다. 69일 교문 앞에서 전경과 맞서다 전경이 쏜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이 심지가 돼 활활 타올랐던 6월항쟁은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권교체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한재동 = “개인적으로 많이 속상하고 허망했어요. 조금만 더 밀어붙여 전두환을 끌어내리든가 그 패거리들이 못 나오도록 약속을 받아냈어야 하는데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기쁨에 도취돼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으니까요. 내가 이러려고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닌데, 싶었습니다.”

안유 = “오판한 거죠.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될 줄 알았는데 분열되는 바람에. 어쨌든 박종철, 이한열의 희생이 민주화의 초석이 된 거예요. 그들의 희생이 헛되게 해선 안돼요.”

- 촛불집회로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와 관련한 검찰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 차원의 비리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한재동 =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다릅니다. 고문경찰이나 군인 등 많은 공무원들이 흔히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할 때 국가를 위해서였다고 말하죠.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이나 부를 위해서였고, 국가가 아닌 정권에 대한 충성이었으면서도요. 정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국민이 깨어나 양심적 행동을 하는 만큼 정권도 바르게 가는 거니까요.”

경향 박주연 기자 2018.01.06

 

가혹행위자가 '의인'으로 둔갑...<1987>이 가린 진실

영화 속 안 계장이 대구교도소서 실제로 벌인 일...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였다.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게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영화 <1987>'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1)'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 발표로 잘 알려진 사건 말이다. 이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다루고, 마침내 6 · 10 민주 항쟁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스물 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광장의 거대한 함성, 그 역사의 흐름을 다뤘다.

영화 <1987>의 포스터CJ엔터테인먼트

할 말이 많아지는 영화였다. 그래서 오히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게 됐다.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서사는 그 자체로 워낙 영화적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과장되지 않은 연출도 돋보였고, 배우들의 연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등 여섯 명의 주연 배우를 비롯해 특별출연을 한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오달수, 김의성, 문성근, 우현, 문소리, 고창석 등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배우들도 빛났다. 그들은 분량에 관계없이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배우들의 열연 혹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가치 등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이야기했을 테니, 이 글에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87>을 보면서 감동에 젖는 한편, 가슴 한켠에 계속해서 웅크리고 있던 불편함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구미유학단 간첩단 사건(1985)의 피해자인 강용주씨가 <1987>을 두고 고문의 가해자인 안유를 미화한 영화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었던 그때 그 시절

영화 <1987>을 보이콧했던 강용주 씨

"고문가해자 교도관 안유가 의인으로 나오는 <1987>을 보지 않겠습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교도관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등포 구치소 보안계장 안유는 조한경(박희순), 강진규가 가족 및 경찰관들과 면회하는 자리에 입회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다. 경찰이 명백한 물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단순한 심장 쇼크사로 조작하고, 그 대상자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으로 축소하려던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안유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 민주투사 이부영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부영은 친분이 있던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에게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고, 한재동은 그 편지를 재야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한다.

김정남은 성명서를 작성해 함세웅 신부에게 보냈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도 미사가 끝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다.

"그는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어요. 그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다가 지난 201225주년 때에야 얼굴을 공개했죠. 그 뒤 퇴직 간부들이 그를 왕따시킨다고 해요.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죠." (이부영) <한겨레>,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 6월 부른 '감옥 편지'

그 때문에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최강일)와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의로운 교도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7>'딥 스로트'(내부 고발자) 안유라는 인물을 철저히 의인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도 맞선다. 아무래도 그가 세웠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부영 전 의원과 같은 '민주인사'들의 진술만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용주 의사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제게 인간 이하의 가혹행위를 가한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KBS 다큐멘터리(<시민의 탄생>)에 출연한 6월항쟁의 '딥스로트'입니다. 1992년은 87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적 전향공작이 사라졌다고 여겨진 시기였습니다. 광주나 전주로 이감 간 사람들은 징벌방 수용이나 전향 강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의 손으로 전향공작을 당했습니다.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 손에서 말입니다." <경향신문>, [강용주의 안아픈 사회] '딥스로트'의 이중잣대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

<1987>의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강용주의 폭로에 등장하는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안유다. 안유는 1990년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전향 공작을 펼치며 고문을 가했다. "당시 재야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관련 사범들을 감시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했다"(<오마이뉴스>, 25년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사건 폭로 주역들)고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 이전에도 같은 일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1987>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안유라는 이중적인 인물을 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유라는 인물과 그가 했던 내부 고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 그가 '변절자'로 불리며 교정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가해자'라는 것도 변함없는 객관적 진실이다.

'안유=가해자'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영화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지지도 않는다. 잘 나가는 영화에 웬 트집이냐고? 감동적인 영화에 웬 태클이냐고? 그리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 누구도,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던 사람이 버젓이 의인으로 나온다면, 과연 당신은 뭐라 말할 것인가. <1987>을 보며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987>도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심하지 못함에 더욱 불평할 수밖에 없다.

오마이뉴스 김종성(wanderingpoet) 18.01.02

 

'1987' 안유 보안계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31년 전 1987년의 사람들이 언론에 호출되고 있다. 영화 '1987' 덕분이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어른과 형 박종부 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어른은 물론이고, 영화 속 검사 최환,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 의사 오연상과 황적준, 재야인사 이부영과 김정남, 교도관 안유, 한재동, 전병용까지 언론에 등장했다.

이들 중 문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영화 속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에게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안유 보안계장이다. 1987년에 그랬던 그가 이후 다른 교도소에서 보안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시국사건 수감자들에게 가혹행위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2018112일자 경남도민일보 1. 안유가 1990년 마산교도소 보안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그에게 '비녀꽂기' '통닭구이'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보도했다. 경남도민일보

그런 사실에 대해 경남도민일보가 112일자 1면에 보도했고, 이에 앞서 한겨레도 강용주 재단 진실의힘 이사가 1992년 대구교도소에서 보안과장으로 있던 안유에게 전향공작과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가혹행위 피해자들은 특히 이부영 전 의원이 안유에게 "훈장이라도 줬으면 한다"는 페이스북 글에 분개했다. 그래서 이부영 전 의원의 페이스북 글을 찾아봤다.

아마 이 글을 쓴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자신이 있는 영등포교도소 이후 안유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1987년 재야인사 이부영에게 그랬던 안유는 왜 이후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래서 가장 최근 그가 교도관 한재동과 함께 인터뷰이로 등장했던 경향신문 기사를 찾아봤다.

[경향] [1987 그리고 나] 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이 기사에서 안유는 "영화에서 보안계장의 역할이 미화돼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전 의인이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라고 했어요. 학생 수형자들은 제 얼굴에 짬밥을 뿌리기도 했죠. 그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시엔 수형자들이 고성 등 문제를 일으키면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어요. 그게 규정이었습니다.

'미화돼 있다'는 지적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다는 사실을 고백할 뿐 '비녀꽂기'와 같은 가혹행위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규정이었다'는 말로 슬그머니 자신을 잘못을 합리화한다.

1990729일자 한겨레 보도. 한겨레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이중적인 인물이었을까? 그 단서도 경향신문 기사에서 발견해볼 수 있다. 그는 이부영과의 인연을 이렇게 말한다.

이부영씨가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서울구치소에 투옥된 1974~75년쯤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부영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한 제 고교 동창이 구치소 관구 주임이었던 제게 그를 부탁했죠. 자주 대화하며 친분을 쌓다 헤어졌는데 1986년 영등포교도소에 이부영씨가 들어오면서 재회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집단구호, 단식 등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부영씨는 재소자 대표, 전 교도소 대표로 협상을 했고, 학생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어요. 주로 법무부가 금지한 책을 반입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전 당국 몰래 눈감아줬죠.

즉 고교 동창의 부탁을 받으면서 알게 됐고, '공안사범' 관리를 전담하는 그의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 또는 이용하면서 가까워졌음을 은연 중 털어놓고 있다.

은폐된 고문경찰 3명의 이름을 이부영에게 알려준 것도, 그게 곧바로 바깥으로 알려질 것을 모르고 한 일이었다. 이부영이 나중에 출소하고 나서야 알려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기사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안씨는 며칠을 고민한 후 이부영을 사무실로 불렀다. 커피를 내주고 큰일났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형이 언젠가 출소할 테니 기록으로 남기라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안씨는 당시 분노를 느껴 고민 끝에 이부영씨에게 전했지만 그게 곧바로 바깥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다다음날인가, 이부영씨가 내게 박종철 관련 모든 업무일지와 자신과 면담한 기록까지 다 없애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교도관 한재동과 달리 보안계장 안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신념보다는 자신의 직무(공안사범 관리)를 잘 수행하기 위해 이부영과 '주고받는' 사이로 친분을 쌓았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전한 이야기가 얼마나 큰 일로 비화할지도 모르고 말했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않으며 소름'까지 돋았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인터뷰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한재동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위험을 무릅쓴 반면 안유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안유였지만, 이어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의 결과로 민주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더라면 그 또한 민주주의자로 거듭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5공 정권의 연장인 노태우 당선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1987년의 '내부정보 유출'이라는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서 '공안사범 관리'라는 정권의 하수인 역할에 충실하려 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마산교도소와 대구교도소 보안과장 재직시의 가혹행위로 드러난 것이고, 그런 덕분에 교정계의 최고위직인 서울교정청장까지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안유라는 사람에 대해 보다 철저한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경남도민일보''한겨레'의 보도는 중요한 기록이다. 두 신문에 보도된 사례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안유의 악행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페이스북에는 다른 사람들의 피해증언도 올라오고 있다.

네이버

포털에서 '안유'를 검색해봤더니 1944년 생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에너지사업소 전무이사라고 한다. 그는 2004년 서울교정청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는데, 1990~1992년에 있었던 가혹행위라면 아마 밝혀진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 처벌은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해도 역사는 엄밀히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안유의 좀 더 진솔하고 통렬한 고백과 인정, 사과를 기대한다. '미안하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정확한 역사기록을 위해 많은 분들의 증언과 제보를 기대한다.

김주완 -직썰(https://www.ziksir.com) 2018.01.13

 

“‘운동권 조롱불편해하기 앞서 민주화세력 겸손해져야

민주화운동의 막후 김정남 선생

70년대 초부터 민주화운동 외길

독재 항거 최고 막후였어도

한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민주화 이후 30여년 동안

도덕성·인간성 상실 더 심해져

운동가들 타락에 오래전 절망

정권 담당자부터 도덕 쇄신을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운동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진실, 광장에 서다> 추천 글에서 김정남(78·이하 호칭 생략) 선생을 평가한 대목이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민주화운동의 비밀병기’, ‘막후 기획자등의 별명을 가진 김정남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사법살인인 인혁당(2)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김지하의 양심선언에서부터 전두환 정권 시절의 김영삼-김대중 공동성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폭로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막후에서 활약했다. 6월항쟁 때 그의 역할은 2년 전에 나온 영화 <1987>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로도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김정남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 숱한 운동단체의 고문 자리 하나 맡은 적이 없었다. 가정환경 조사 때 아빠 직업을 늘 무직으로 적어야 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소원은 ·반장 아빠였다. 민주화 이후에도 그는 <평화신문> 편집국장 대리, 청와대 교문사회수석을 잠깐 지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글을 쓰는 데 보냈다. 최근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 창비)을 냈다.

지난 7일 오후 그를 만나러 서울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여전히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이 팩스와 연결된 유선전화기 한 대만 놓인 작은 사무실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인 책으로 가득했다.

김지하 구명 활동이 본격 운동의 계기

그동안 회고록 요청을 여러차례 거절했다면서요.

“2005년에 창비에서 <진실, 광장에 서다>를 내고 난 뒤에 회고록으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달라는 권유를 몇차례 받았어요. 회고록이라는 게 보통 자기 자랑하는 거라서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못하겠다고 했죠. 한인섭 교수께서 재작년에 낸 함세웅 신부님의 회고록(<이 땅에 정의를>)을 보고 함 신부가 빠트린 부분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홍성우, 함세웅 회고록 등 현대사 정리 작업을 해온 한 교수가 마지막으로 저와의 대담을 맡아주겠다고 해서 응했습니다.”

책에 보면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다는 말이 여러 군데 있어요. 민주화운동의 비밀병기라든가 막후 주역이라는 별명이 주는 이미지는 주도면밀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강한 인물인데 실제로는 늘 두려움에 떨었다고요?

두려울 수밖에요. 1964년 처음 중앙정보부에 잡혀 갔을 때 그들이 너 하나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다. 휴전선에 데려다 놓고 네가 도망가려고 해서 쏴 죽였다고 하면 끝이다라는 얘길 했어요. 말만의 협박이 아니라 얘들은 실제로 그럴 수 있거든요. 그동안 수백 건의 의문사 중에 몇 건은 아마 그런 식의 죽음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진상조사(197412)2차 인혁당 사건의 구명활동을 위한 성명서 작성(19752) 등을 요청했을 때 신부님들은 천주님 빽이 있지만 저는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늘 무서웠죠. 그래서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면서도 피해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어요. 제가 관여한 것을 나중에라도 중앙정보부가 알면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늘 느끼면서도 그 길을 계속 걷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요?

무서워도 차마 떠날 수가 없었어요. 1974년 친구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뒤에 지하 어머니가 일주일에 두어 차례 찾아오셨어요. 양심수의 대모였던 김한림 선생도 함께 오셔서 재판 진행 소식이나 양심수들에 대한 얘기를 전하면서 도움을 청하는데 그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한발 한발 내딛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그 과정에서 추기경님이나 천주교 신부님 등 주변의 여러 분들이 저를 겹겹이 보호해줬어요. 그 덕분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죠.”

김정남은 대전고 3학년 때인 19603월 이승만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대전 시위(3·8 민주의거)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저항정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법대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3·8 의거 및 4·19를 경험한 뒤에는 법대는 고시를 봐야 한다는 것이 좀 구차하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4·19 이후에 높아진 민주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정치학과를 선택”(<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했다. 학창 시절 서울대 문리대 신문인 <새세대>의 기자로 활동한 김정남은 6·3 시위(1964) 주도 등 학생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6·3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학내 조직 불꽃회사건으로 1964년 구속돼 6개월 옥살이를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동경했던 불꽃회에 연루돼 좌파의 맹장취급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인간”(<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이었다.

2018년에 개봉된 영화 <1987>에서 배우 설경구가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인 김정남씨를 연기하고 있다. 사진 씨제이 이앤엠

 

6월항쟁의 뿌리는 70년 감옥살이

대학 졸업(1966) 후에는 취업 등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나요?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옷 위에 빨간 딱지를 붙여요. 한번 빨간 딱지가 붙으면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죠. 어디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고, 시험 쳐서 공직에 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던 중에 통혁당 사건(1968) 등 여러 공안사건이 터졌어요. 그런 것들과 직접 연관이 없어도 잡혀 들어가는 판이니까 일단 튀고 보자 해서 리어카를 한 대 사서 녹번동 일대의 밭에서 배추 등 야채를 사다가 불광동 시장 등에 내다파는 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혁명을 꿈꿨던 김정남이 의회주의와 대중운동에 눈뜬 것은 1971년 신상우(2012년 작고) 의원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34살의 초선 의원 신상우의 비공식 보좌역으로 대정부질문 등 의정활동을 도왔다. 똑똑한 야당 의원으로 평가받은 신상우는 전두환 세력이 집권한 뒤 관제야당인 민한당의 창당 주역으로 발탁됐다.

직접 정치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신 의원이 민한당 실세인 사무총장 시절 11대 총선(1981) 공천을 할 때 저랑 상의했죠. 당시 고영구(83) 변호사와 친구 홍사덕(20206월 작고) 등을 추천해서 의원이 됐고요. 그런데 난 그때까지도 현실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에 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노동자들과 백 번 데모하는 것보다 국회에서 한 번 올바르게 발언하는 의정활동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았죠. 의회주의를 무시할 게 아니라 최대한 활용해야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민주화투쟁의 한 방편으로 양심선언 운동을 제창하는 등 70년대에도 그의 족적은 뚜렷하지만, 김정남이 가장 빛난 지점은 19876월항쟁 때였다. 그해 1월초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숨졌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가 국민적 분노에 밀려 범인을 3명으로 축소 은폐했다. 이들 3명이 잡혀간 영등포교도소에 먼저 들어와 있던 이부영(78·전 의원)이 교도관한테 범인 축소 조작된 사실을 듣고는 비밀편지(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를 써서 김정남에게 전했다. 이부영은 신문을 통해 터트릴 것을 제안했지만, 김정남은 가장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큰 방안을 구상했다. 김정남이 작성한 성명은 그해 518일 명동성당 특별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로 세상에 나왔다. 이는 6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 6월항쟁의 불쏘시개가 됐으며, 결국 독재정권의 대국민 항복(6·29 민주화선언)으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할 때에는 내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하셨다고요?

사건 조작이 이렇게 됐다는 내용의 편지를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한테 여러 번 보냈는데도 이것이 발표가 안 되는 거예요. 두 분 다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 발표가 늦어지길래 제보한 사람이 김정남이라고 세상에 공개해도 좋다고 했죠. 이것이 독재정권과의 마지막 승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면 내 이름이 공개되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마지막 싸움을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적 희생이든 감수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6월항쟁의 또다른 숨은 주역은 이른바 민주 교도관들이죠. 경찰 고위층이 고문 경관들을 면회해서 회유하는 얘기를 듣고 이부영씨에게 말해준 안유 당시 보안계장, 비밀편지를 밖으로 전한 한재동 교도관, 이를 받아서 선생님에게 전달한 전병용 전 교도관(당시 수배 중) 등이 그들인데, 전병용, 한재동씨는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왔었죠?

“1970년 서울대 사범대 독서회 사건으로 두번째 감옥에 갔을 때 전병용씨를 알았어요. 제가 겨울이었는데도 새벽에 수건으로 냉수마찰을 하는 걸 보면서 교도관들이 저 사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또 저는 사식을 일체 안 먹고 감옥 안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등 구차하게 굴지 않았어요. 그런 것에 대해 저를 달리 여겼는지 출옥한 뒤에도 연락이 되어 아주 가끔씩 같이 놀러 다니는 등 어울렸죠. 물론 그들이 관심이 많은 복지문제 해결 등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서로 신뢰가 쌓였고요. 민청학련이나 인혁당 사건 등 이후 양심수 재판 때마다 효과적인 대응을 짤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어요. 이들이 밖에 있는 저와 안에 있는 민주인사들과의 통신을 다 중개해줬죠.”

한때 혁명 꿈꾼 뜨거운 청년

박정희 독재에 대항하면서 혁신보다 민주화 우선선회

두려웠지만 회피할 순 없었다

5·18 처벌을 와이에스에게 조언

김정남은 1970년대부터 이른바 재야 민주화 세력을 단일 대오로 묶어내고 야당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DJ)과 김영삼(YS)의 연대를 끌어냈으나, 두 사람이 갈라설 때는 김영삼 편에 섰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상을 한 사람 중에 서애 유성룡이 있고 오리 이원익이 있는데 이원익이라는 사람은 하도 착해서 그 사람 앞에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유성룡은 워낙 똑똑해서 거짓말하면 들통이 나니까 그 앞에서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내가 볼 때 이원익 쪽에 해당하는 게 김영삼이고, 유성룡에 해당하는 게 김대중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김영삼을 보면 나라도 곁에 있어줘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와이에스와 디제이가 대립할 때 나는 김영삼이 후보가 되는 게 옳다고 봤어요. 박정희를 거꾸러뜨린 것은 1970년대 말 김영삼의 용기있는 행동의 결과였거든요. 3당 합당(1990) 때는 그 길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걸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말리지는 않았어요. 그다음 대선(92) 때도 양김 단일화가 안 되면 노태우를 잇는 독재세력이 또 될 텐데 그러면 또다시 우리가 민주화라는 고생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는 김영삼 정부의 초대 교문사회수석으로 19932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대통령 취임사와 금융실명제 실시 담화문 등 굵직한 발표문 작성을 도맡다시피 했으며,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을 주도했다. 재직하는 동안 보수세력한테 빨갱이 수석이라는 공격을 집요하게 받았다.

재야에서 민주화운동 하다가 청와대에서 일해보니까 어땠어요?

사실 민주화라는 것만 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향해서 마구 달려왔는데 막상 국정운영에 참여해보니까 우리가 너무 무식하고, 국정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 밤새 울어보긴 했지만, 이 나라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멈춰서서 한 번도 고뇌해본 적이 없었잖아요. 나 자신의 무지를 새삼 느꼈고, 국정 하나하나에 경건해야 하는 거구나 깨달았죠.”

5·18 책임자를 기소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셨다고요?

그때 민정수석실 유권해석으로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공소시효가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미워해서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이들을 법적 심판대에 세워서 일단 진실을 밝히고, 그다음에 화해를 하자는 취지였어요. 그런데 박관용 비서실장 등 다른 참모들의 인식은 우리가 민정계와 연합해서 집권까지 왔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치느냐는 거였어요. 와이에스도 그런 생각에서 그건 역사에 맡기자고 했고요. 그러다가 1995년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 4천억원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와이에스가 결국 5·18 특별법을 만들어 두 사람을 처벌했죠.”

김영삼 정부가 군 하나회 청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오랜 적폐를 많이 청산하고 제도적인 민주화의 기틀을 세우긴 했지만, 지금 와이에스계는 흔적도 없어졌어요. 3당 합당을 계승한 정당(국민의힘)은 와이에스가 추구했던 당의 색깔이나 분위기와도 거리가 멀고요.

무능했기 때문이죠. 민주계(와이에스계)에서는 제대로 자기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김덕룡 정도뿐이었어요. 김영삼이라는 대장 하나가 있어서 와이에스계였지 그 한 명이 무너지니까 계보가 사라진 거죠. 민주화까지는 호랑이 등에 타서 잘 했는데 그걸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지 못하는 바람에 기득권 세력에 거꾸로 흡수되고 말았어요.”

40여년 민주화운동에 관한 회고 대담록인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를 최근 출간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젊은이에게 희망 주는 정치를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냉소를 넘어 조롱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아요. 얼마 전에는 국민의힘 중앙청년위원회의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홍보물에 난 커서도 운동권처럼은 안 될란다고 적은 일도 있었죠.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를 돌아보는 게 먼저여야 해요. 당당하고 떳떳한 도덕성이 우리 운동세력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무기이자 장점인데 지금 그런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혹평과 비난, 조롱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무능하면 겸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나 과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고 위선적인 데가 있잖아요. 나는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이 너무 빨리 타락해버린 게 아닌가, 우리의 초심과 민주화의 열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어요. 부끄러움과 반성이 항상 필요한데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도덕성과 인간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현상이 민주화 이후 30여년 동안에 오히려 확대 심화되어 온 게 아닌가 싶어요. 특히 여야 정치권에서 말이죠.”

87년의 민주화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상당한 수준이 됐지만, 경제·사회적으로는 양극화 등 여러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제일 절망적인 건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것이 보람과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하다고 느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정치인데 정치에서 희망이 안 보여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와 차별은 더 심해질 겁니다. 이런 부분의 해결과 사회 통합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보여요. 어떨 때는 집권세력이 그럴 의지나 능력이 전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현 집권세력에 대해 우려하시는군요.

지금 권력의 주체가 일단은 민주화 세력이잖아요. 그게 아니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어요. 저는 정권 담당 세력부터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봐요. 다른 사람의 눈에 그들이 정의롭게 비치지 않는다면 독재 군사정권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고 떳떳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비루해선 안 됩니다. 모든 개혁은 나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자꾸 남한테 전가하지 말고, 내가 먼저 달라지고 변하는 그런 운동을 정권에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해 나가야죠. 그래야 국민 통합을 향한 희망이 싹틀 수 있어요.”

그는 지금이야말로 도덕적 쇄신 운동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 나름의 절절한 호소가 어떤 이들에게는 옳은 말씀’, ‘지당한 얘기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화를 위해 밤새 울어본 사람들, 그런 초심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민주화운동 경력을 팔지 않는 민주화 대부의 목소리가 다르게 다가오리라.

한겨레 김종철기자 2020-10-18

 

치니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36)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마태오 7,15-16)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마태오 10, 26)

1986년 하반기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애학투련 사건으로 뒤숭숭하고 암울했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마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입니다.

경찰이 취조하던 학생을 고문하고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는 사실은 마치 둔기로 머리를 심하게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당시는 5공 시절로 정부의 공포 분위기와 언론 말살적 보도지침 하에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했던 정의의 수호자들 덕분입니다.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이 가만두겠는가

첫 번째 주인공은 당시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오연상입니다. 그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왕진을 갔을 때 박종철군은 이미 사망 상태였다고 합니다. 박종철 군의 시신이나 현장은 누가 봐도 이상했습니다. 오연상은 용산병원으로 박군을 옮기라는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자칫 고문 사망이 병원의 의료 사고로 조작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박 군은 경찰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연상은 경찰의 지속적 감시와 협박 속에서도 폐 속에 물이 고여 있었고 현장이 흥건했다는 소견서를 남깁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이던 부검의 황적준입니다. 경찰과 검찰 간부의 감시 속에서도 그는 경찰이 주장하는 심장 쇼크사가 아니라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매우 상세한 부검 기록을 남깁니다. 더욱이 그는 부검 전 박군의 명복을 빈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동아투위 기자 이부영, 교도관 한재동과 전병용, 재야인사 김정남 등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실이라는 퍼즐의 한 부분이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합니다.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는 이부영에게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과 은폐조작에 대해 알려주었고, 이부영은 이를 기자 정신으로 기록합니다. 교도관 한재동, 전병용 등은 소위 비둘기가 되어 재야인사인 김정남을 통해 3월 중순에 저에게 전달합니다.

그해 상반기는 호헌 대 개헌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들끓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호헌을 고집하는 4·13 조치가 발표되자 전국에서 호헌 철폐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4월 말에 광주교구 사제들이 항의 단식을 시작하였고 이는 모든 교구 사제들의 릴레이 단식으로 이어졌습니다. 5월 초에는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교수들이 연이어 성명을 발표합니다.

당시 저는 2년 전부터 서울교구 홍보국에서 일하면서 매주 발행하는 주보를 4면에서 8면으로 증면하였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진단하여 5공 시절 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주보의 주제로 삼고 세상의 변혁을 꾀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께 박종철군 사건에 대해 알렸습니다. 그분께서는 인혁당 사건을 보지 않았는가? 이를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이 가만두겠느냐?”고 하시며 매우 걱정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 말씀대로 한 요나처럼

저도 피하고 싶은 본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꼭 해야만 한다는 양심의 명령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법정에 갈 것을 대비해 유현석, 황인철 두 변호사께 말씀드렸습니다. 유 변호사는 이부영의 편지에 기초하여 김정남이 종합한 문건을 토씨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검토하고 교정하여 성명서를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쪽에서 19874월 국회에서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의 입으로 발표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무산됩니다.

저는 당시 주일 아침 어머님을 모시고 구파발 성당에서 어린이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 517일 주일 미사가 끝나자 고영구 인권 변호사의 부인과 딸이 제게 김정남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편지의 핵심은 고문 조작사건을 사제단이 발표하면 전두환 정권은 꼭 무너집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신부님들께 달려 있습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머릿속에 예언자 요나가 떠올랐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회개하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음을 예단하고 배를 타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바다의 신이 노하기라도 한 듯이 배는 풍랑에 휩싸입니다. 이를 모면하려 바다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고 요나가 뽑힙니다. 그 순간 요나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거역하고 도망가려고 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는 것을.

요나는 기꺼이 자신을 바다에 던집니다. 큰 고래가 요나를 통째로 삼킨 후 바다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기도와 회개는 고래 뱃속에서도 계속됩니다. 사흘 만에 고래는 요나를 밖으로 뱉어냅니다. 이것이 요나의 기적이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성서의 상징입니다. 이에 저는 하느님의 섭리를 피할 수 없으며, 이것이 사제단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편지를 품고 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1987126일 박종철씨 추모미사가 끝난 뒤 신부,수녀,신자 등이 성당 정문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18 7주기 추모미사 뒤 세상 뒤집혀

저는 김승훈 신부님에게 내일(5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조작에 대해 꼭 발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이번엔 신부님이 책임지고 감옥 가세요, 저는 밖에서 일하겠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후 저는 서울교구 홍보국에서 성명서 1000여 장을 복사해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날 밤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가 이 모든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5·18 7주기 미사 후에 김승훈 신부님은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전년도에 계획한 일정대로 안양 성 라자로 마을 아론의 집으로 피정을 가셔서 외부와의 접촉이 모두 단절됩니다. 사제로서 이 일을 맡아서 하는 저는 당시 상황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 7면에 1단짜리로 기사가 실렸습니다. 1단 기사의 폭발력은 대단했습니다. 기자들이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고 그 후 국무총리, 안기부장, 부총리, 내무·법무·재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등이 물갈이되는 대대적 개각이 이뤄졌습니다. 치안본부장 강민창, 대공수사처장 박처원 등 조직적 범죄를 일삼았던 경찰 간부들은 이후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로 임명된 한영석 대검 중수부장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변호사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저에게 이번 기회에 중수부장이 그동안 보도된 신문들을 모두 모아서 구속된 경찰들에게 꼭 보여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천지가 개벽했다는 것을 백 마디 말이 아니라 신문이 웅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경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며칠 뒤, 고문살인 주범으로 몰려 구속된 조한경 경위의 형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모 전자회사의 사장으로 조 경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동생 문제로 대공분실 경찰 간부들을 만났는데 이건 나라를 지키는 경찰이 아니라 조직 폭력배와 다름없었다고 큰 실망과 환멸을 제게 토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안기부와 경찰은 오직 조작과 매수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 경위가 진실을 밝히도록 형님으로서 잘 설득하도록 권했습니다.

방조범 검찰, 피해자에 사과해야

박종철 고문살인의 주범은 분명히 경찰입니다. 그러나 검찰도 그에 못지않은 방조범입니다. 안상수 검사를 비롯한 검찰 간부들은 고문살인의 실체를 조한경 경위 등의 진술을 통해 확실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폐했습니다. 이것은 직무 유기일뿐 아니라 은폐조작에 가담한 엄청난 범죄입니다. 그런 검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했으니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에 남영동 대공분실과 안기부에 종속되었다고 자조했던 검찰이 비로소 자율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방조범이었던 그 검찰이 이제는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검찰은 무엇보다도 먼저 박종철 열사를 비롯한 모든 고문 피해자들께 속죄하고 온 겨레와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검찰의 잘못을 청산하고 정의와 역사 앞에 진솔한 법조인, 초심의 시민, 언행일치의 겸허한 실천가가 되길 바랍니다.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조작은 당시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875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졌고 헌법 개정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박종철군 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직선제 개헌과 다원주의 문화 형성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의 안타까운 죽음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부활했습니다.

안타까움은 오늘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장엄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민주주의를 우리는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바쳐 민주주의의 불씨가 되었던 수많은 청년 학생, 활동가들과 희생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서는 저희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복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 고백과 정화 과정입니다. 그런데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권력자는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고 선량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은폐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아벨을 비롯한 순교자들 그리고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 이 불의한 역사 현장에 개입하시어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1987년 박종철 학생의 피가 독재자 전두환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이 고귀한 피의 증언에 함께한 부모·형제자매, 의로운 증언자들과 동료·동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제들과 교우들의 노고를 확인해주십시오. 그리고 아름다운 민주공화국과 평화공존 나아가 일치와 화합의 남북공동체를 이룩하게 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신부 한겨레 2022-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