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해 해파랑길 답사 중 포항 구간을 제대로 걷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리던 차 감언이설로 지인을 꼬셔 가다가 양동마을을 스친다 .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마을로서 우라나라에서는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판경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 화순, 간화 고인돌유적, 제주 화검산과 용암동굴, 조선왕릉에 이어 안동하회에 이어 열번째로 지정됐다.
이 마을은 양반이 많이 사는 반촌이다. 월성 손씨와 여주이씨가 대립과 협조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게 됐다. 두 집안은 초기 두터운 혈족관계를 가졌으나 점차 경쟁관계로 변했다. 어느 가문이 출세를 많이 했느냐 등으로 기싸움을 벌였다. 그 세월이 500년이다.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마을길 순례는 강화정과 이향정을 둘러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마을의 동구 초입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조선 숙종 21년(1695년)경에 건축된 ‘ㅁ'자형 주택이다. 온양군수를 지낸 이범중(李範中)공과 그의 맏아들로 담양부사를 지낸 이헌유(李憲儒)공이 살던 집이며, 이향정(二香亭)은 이범중 공의 호이다. ㄱ자형으로 된 본채를 제외하고 나머지 건물은 홑처마 맞배집으로 전체구성은 튼 ㅁ자형으로 조리 있게 배치되어있다. 간만에 만나고픈 풍경을 만났다.
사람사는 냄새가 가장 진하게 와닿은 초가집이다. 빨래가 널린 풍경이며 산자락을 병풍삼아 들어선 초가집이 정감있다.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조선 고종 4년(1867년) 경에 지족당 이연상공(李挻祥公, 1819년)이 세운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매우 안정감이 있고 소박하다. 손씨 문중의 안락정(安樂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李淵祥)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건너편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마을에는 향나무가 많다. 마을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수령의 향나무도 곧잘 볼 수있다.
물봉골과 북촌 산등성이 사이 향단, 무첨당, 수졸당(守拙堂)을 비롯 육위정등이 보인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토지 소유관계를 보면 토지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이 1971년 52%가 되고 나머지는 월성손씨, 여강이씨가 5단보 이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과거에 반상계급에 의한 소유분포를 짐작케 한다.
향단쪽으로 가는 마을길
정충비각(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이 비각은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중실한 노(奴)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정충비각은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으로 팔작(八作)지붕이어서 가구방법이 특이하다. 옆에 있는 노(奴)의 비를 세운 충노각(忠奴閣)은 정충각(旌忠閣)보다 건물이 못한 편이다.
관가정 아래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채)으로,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연탄 아궁이와 텔레비젼 안테나가 초가지붕과는 왠지 부조화스럽다 느껴졌지만, 여기도엄연히 사람사는 곳이다. 건축하는 분들이 이런 언발란스를 해소할 수있는 방안을 그렸봤음 했다.
향단이 보인다.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낮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興字型으로 지은 건물로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一자형 평면구조로 몸채를 사이에 두고 좌측에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두고 행랑채도 일자형 몸채와 거의 연접해 있어 거의 한 동(棟)처럼 보이는 집약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 안마당도 극히 폐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향단은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탈피했다는 것이 특징인데 풍수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전한다. 대부분의 자재는 70년대 한 번의 보수공사로 대부분 새 부재로 갈아 끼운 것이다. 행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워 소로 받침없이 납도리를 받고 있는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같은 시단에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막돌처석을 놓아 원주(圓柱)를 세웠다. 구조양식은 초익공계(初翼工系)이고 가구(架構)는 5량이다. 안채는 낮은 막돌허튼층쌓기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 집이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 모두 홑처마이고 한식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고 행랑채와 사랑채는 양측 박공을 만들어 풍판을 달았다. 관가정 가는 길에 보았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으로부터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원래의관가정은 양쪽 측면과 뒷면만을 담장으로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트이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경관을 보라보게 하였었으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내문을 내어 본래의 조망이 감소되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두었는데,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다른 부분과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부엌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을 그리고 부엌 위쪽에는 작은 대청 2칸, 방 2칸 그리고 꺾이어서 큰 대청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 자리잡았다. 안채의 건넌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광 2칸과 마루 1칸을 두어 연결시키고 있다. 양동 4대 고택중 유일하게 주인이 거주하지 않아 내부가 개방된 곳이기도 하다.
관가정에서 나와 성주봉 자락에 들어선 도곡고택이며 동호정 쪽 풍경을 본다. 그 너머에 저수지가 있다.
관가정 앞 은행나무 두 그루 한그루는 팽나무 인듯 한데 마을을 더욱 운치있게 한다.
향단 근경이다.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1칸의 단층 기와지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안계댐으로 가는 길 마을을 스친다.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 본 양동마을이지만 시간을 내어 다시금 찾고 픈 곳이었다. 아쉽다면 외지인의 차량들이 너무 쉽게 마을을 돌아 다난 다는 것이다. 이런 마을에서는 차의 존재는 옥에 티같은 것이다. 마을주민이야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아무튼 생각해 볼일이다.
서둘러 감포로 향한다 . 구룡포에서 권선희 시인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눈이 많은 경주와 포항, 가는 내 눈을 볼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 눈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 사람 - 키보이스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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