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런 분이 있는 줄 몰랐다. 페이스북에 지인 두 사람이 고인의 친구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어떤 자료를 찾다가 그의 사진에 꽂혔다. 그리고 고향이 의령이란 것에 주목하였고 정보를 찾다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그사람' 16번째에 그의 이름을 올리며 추모에 가름한다. 올리는 사진들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것이다.
권태균(權泰鈞, 1955-2015)은 경남 의령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수료하였다. 뿌리깊은나무사의 월간 『샘이깊은물』 사진기자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부장과 청와대 대통령실 17대 대통령 사진기록 담당관을 역임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과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모임인 ‘온빛’ 회장을 지냈고, 신구대학교 사진영상미디어과 교수로 재직했다.
개인전으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노마드 NOMAD-변화하는 1980년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갤러리 룩스, 서울)전을 네 차례 열었으며, 침묵하는 돌-고인돌(고은사진미술관, 부산)을 2010년에 가진 바 있다. 그룹전으로는 1982년 사진 2인전을 시작으로 2013년 제5회 중국 따리 국제사진전까지 수십 차례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예술가의 이야기, 사진가 임응식』(나무숲, 2006),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열화당, 2006), 『The Discovery Of Korea』(Discovery Media)의 영문판과 일본어판이 있으며, 출판사진에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 소설가, 사학자 등과 공동작업으로 펴낸 공저가 다수 있다. 그는 한국의 문화, 역사, 한국 사람들의 삶에 관한 사진작업을 줄곧 해왔으며, 한국의 정서를 가장 사진적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묵묵히 사진으로 천착해 온 사진가이다. 2014년 봄부터 준비해 온 첫 번째 사진집은 안타깝게도 2015년 1월, 그의 갑작스런 타계로 유작 사진집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사진가 임에도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사진집 한권을 남기지 못했다. 아마도 급작스런 죽음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1주기에 즈음하여 유작 사진집이 출간도었다. 평생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사진세계라고 평하고 있다.
저자 권태균 지음 출판사 눈빛 | 2016.01.04 형태 판형 규격外 | 페이지 수 248
NOMAD 는 라틴어로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던 삶의 방식을 가진 유목민을 뜻한다.
중앙일보 정재숙 문화전문기자가 고인의 유고 사진전 개최(<2016. 1.4~ 2.20 >서울 강남역 2번 출구 앞 대안공간 SPPACE22)소식을 전하며 썻던 기사로서 그가 남겼던 사진작품들을 올려 본다. 사진은 경남 의령 촬영지를 한 묶음으로 하고 기타 지역을 두 묶음, 그리고 나머지 흔적을 세 묶음으로 하여 올린다.
“유랑(流浪)은 그의 주제이자 삶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태균(1955~2015)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느꼈던 것들을 찍었다. 길 위에서 그는 인생을 곱씹었다. “나의 사진적 관심은 삶이란 것, 사람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가”라고 그는 생전에 말했다.
지난해 1월 2일, 60세를 일기로 갑자기 떠나버린 권태균 1주기 추모 및 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서울 강남대로 스페이스 22에서 열리고 있다. 『노마드-변화하는 1980년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눈빛)은 고인이 1980년대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주로 촬영한 흑백사진 110점을 담고 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편안하게 카메라 렌즈를 바라본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장터에서 한잔 걸치고 흥이 난 촌부, 시골 다방에서 맛있게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농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는 “사진 속의 인물들은 어떤 세대와 민족의 전통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썼다.
유목민이 겪은 변화에 못지않은 격변을 기록하면서 권태균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인연인데,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인연들을 버리지 않고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의미 있다”고 고마워했다. 그는 이 땅과 거기 뿌리내리고 사는 이들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사진을 40여 년 찍은 ‘시간 수집가’였다. 꼼꼼한 자료 정리로 이름난 그는 소장한 사진 원고 양이 어마어마해서 ‘역사 사진가’라고도 불렸다. 사라지는 직업과 집단적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루겠다던 그의 약속은 돌연 침묵 속에 잠겼다.
권태균의 스승인 원로 사진가 강운구씨는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가 스승의 작업을 이어 내놓은 『마을 삼부작 30년 후』는 그 슬픔을 잠시 잊게 해주는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겨루기에서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지만 권태균은 주저하지 않고 그 슬픔조차 똑바로 바라보았다.“
1980 의령 아버지의 빈자리
1983 장을 마치고
1983 신반장날 의령
1983 의령 신반장날
1983 의령 집으로 가는 길 3
1981 의령 둘째형과 친구들
1981 의령 경운기 위의 아이들
1980 의령 기념사진
1983 의령
1980 의령 아이와 창
1980 의령 중학생과 지게
1980 중학생과 지게 2
1986 의령 축제의 할머니
1981 의령 할머니와 아이들
1980 의령 집으로 가는 길 1
1982 의령 길위에서
신-'노마드'를 통해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해 온 사진기행을 정리하기 시작하셨는데, 사진을 묶어가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권-'노마드'는 1980년대 한국의 모습이며,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랑 특별한 관계는 없지만 제가 좋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국을 다니며 찍었던 걸 정리한 것입니다. 1980년대는 굉장히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서 변화를 인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 역시 그 당시엔 변화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봤을 때야 이게 엄청난 변화였다는 걸 알고 저도 놀랐습니다. 저는 그 안에 사람의 양태를 사진으로 보여주었는데, 실제로 사람뿐아니라 환경과 주택, 건축물, 지형학적 요소들, 그 모든 변화가 엄청나다는 것을 이제는 사진을 보는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신-처음 촬영하실 때는 사람만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람이 속해 있는 공간과 함께 보이더라는 말씀이시군요. 촬영 당시 관심사들이 지금과 같은 주제의식이라고 말 할 순 없지만 지속적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촬영을 한 것이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네요.
권-우리는 언젠가 모두 떠나야 합닏. 시간이 흐르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산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그 여정을 기록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런 시각으로 처음 접근했던 작업이 임하댐에 관한 사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안동댐을 갔었습니다. 마을이 수몰되기 직전의 해였습닏. 안동댐의 수몰지역을 보고 '참 안타까운 환경이다'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하댐이 곧 그렇게 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임하댐에 관한 작업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단순히 물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노마드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사진잡지 <VON> 2013년 8월호 rear interview -중
1982 안동 소주인
1983 안동 버들강아지와 책보
1985 안동 가을걷이
1986 안동 퇴계 제삿날
1986 안동 퇴계 제사를 마치고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의「짧은 연대기」
사진갤러리 “瓦 WA”(www.Gallerywa.com)
전시기간 : 2005년 10월 6일 ~ 11월 27일
3명의 사진가가 한데모여 우리 땅 우리 사람들에 대한 사진을 전시한다. 이 세 사람은 선후배 사이로 옛 교양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함께 일한바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자 내가 모두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기다려지는 전시이다.
Ⅰ
사진갤러리 “瓦WA” 개관전의 전시작「짧은 연대기」는 한국 농• 어촌의 70, 80, 90년대에 관한 기록, 해석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사진전이다. 이 전시회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회의 탐구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회 제 현상의 패턴을 정의하고 원인을 설명하여 보다 깊은 시대의 중요한 역사 기록을 제공한다. 그래서 첫 기획으로 현재의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사진가 가운데 중심축을 이루는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를 초대하였다. 첫 단추의 의미를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3인의 사진 세계가 갤러리의 성격과 방향성에 지표가 되리라 믿는다.
Ⅱ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는 스스로 작업의 역사를 지닌 사진가들이다. 주제의 깊이와 통일, 나아가 작업의 지속성을 갖고 있다. 한 주제에 대한 관점, 주장, 해석이 뚜렷하여 하나의 주제를 위해 통일되고 정돈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덧붙여 그 주제 혹은 그와 유사한 주제들을 오랜 기간동안 천착함으로써 작업의 일관성을 획득하였다.
세상의 모든 일과 연구가 대상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하듯이, 강운구에게 있어서 1970년대 초반에 새마을운동에 관한 회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고 현실에 능동적으로 저항하도록 하였다. 1960.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한 근대화의 목표는 너무도 분명했고 강력해서 뒤돌아볼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 박정희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급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강운구도 서둘러서 기록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쫓기고 있었다. 그는 60년대 후반부터 제주도, 거제도, 흑산도, 다물도, 신안군의 여러 섬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산업사회로 돌입하면서 경제개발과 독재라는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70년대 상황 자체가 지식인이라면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강운구도 사회발전의 개발 논리와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가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아래 초가를 헐어 함석지붕에다 시멘트벽을 발랐다. 국민의,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라 정권의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택은 경제의 윤택에 따라서 변화할 때에 자연스러운 것인데 인위적인 전시행정으로 변화하였으니 주거 환경이 더 열악해졌다. 여름에 더 더워지고 겨울에 더 추워진 것이다. 주택개량이 합리적인 구조라면 발전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개발이 폭력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초가는 환경과 어울리고 풍토에 맞도록 오랫동안 잘 갖추어진 것으로 이 땅의 산물로 지어졌다. 그래서 초가는 마을 전경과 잘 어울렸다. 강운구의 사진은 어촌의 초가와 주변 환경이 어우러져 있다. 자생적인 건축물풍토에 어울리는, 이 땅의 고유한 서정성과 어우러지는 환경이다. 나아가 자연의 질서와 사람들의 삶이 동시에 읽혀진다.
권태균은 80년대 후반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둔 안동시 임화면을 기록했다. 물이 부족하여 거대한 댐이 절실하다는 수몰의 경제적 이유는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집단이주는 민초들이 스스로 지켜왔던 것을 갈갈이 찢겨나가게 한다. 그 곳에는 수천 년 동안 시간의 흐름을 축적하면서 삶의 터전으로 생활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끈끈한 역사가 있다. 이곳에는 웃음도 있고 사랑도 있고 희생도 있지만, 반대로 미움도 있고 반목도 있고 질시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임하면에서 함께 한 시간이다. 바로 역사이다. 한 마을의 수몰은 이 역사를 한순간에 수장시키는 것으로 고향 전체를 잃게 한다. 마을 공동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것, 즉 생활과 역사와 문화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맞는 마지막 설날에 종손은 수몰 지역 바깥에 위패를 모시면서 슬피 곡을 하였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날에 한 노파가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그들의 행위는 자신의 뿌리,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이자 죄를 고하는 의례이다. 우리말의 ‘집’이란 단순히 건물만을 뜻하지 않고 주로 집안, 가문을 뜻한다.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집이 수몰당하는 것은 뿌리내리고 살아온 자리에서 뿌리에 달라붙은 흙까지 털려서 뿌리를 드러낸 채 아무데나 던져지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뿌리 뽑힘의 문제이다.
70년대 근대화, 80년대 도시화 이후 90년대 심각한 이농현상으로 농촌은 파탄을 맞는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인위적으로 파괴되거나 도시화의 물결로 농촌은 공동화되어갔으며 농촌 존재의 당위성이 약화되어갔다. 그것은 바로 농촌 풍경의 소멸이기도 했다. 농촌 마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추방된 것이다. 허용무는 개발이라는 자가당착적인 논리와 궤변을 통해서 유린된 농촌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의 기층민에 관심을 가졌다.
현대사회는 도시화로 인해 삶이 고립되어가면서 예전의 농경사회와 달리 농부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독립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빚더미에 앉았거나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거나 일은 하지만 대가가 너무 적어 굶기도 해야 하는 절망적인 처지에 몰린 농민이 적지 않다. 그는 정선, 영월, 봉화, 안동 등 절망적인 농촌을 통해 가난이 엄청난 공포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참혹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또한 허용무는 농촌의 노인 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살길을 찾아서 젊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고 남겨진 노인들은 아이들을 돌보아야 할 보모 역할로 전락했다. 그리고 농촌 경제의 붕괴와 더불어 농촌 문화마저 파괴된 상황에서 노인들이 찾는 경로당은 노인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농촌에 대한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농촌이 사라진다는 것은 농촌의 면적이 줄어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농촌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사진 작업은 시대 인식에 근거하여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 등을 기록하여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사진은 그 시대의 산물이자 그 시대를 산 사람의 증언이다.
Ⅲ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는 사진기자와 프리랜서를 오가면서 새로운 저널리즘의 실천과 사적 다큐멘터리를 접목시켜왔다. 그들은 부조리한 것에 대한 사건 위주의 단순보도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농어촌의 보편적 상황 즉 일상의 생활에 관심이 있다. 보편적 일상 속에 시대적 요소가 있고 보편성을 찾는 것이 시대의식의 정수를 추출하는 것이라 믿는다. 사건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증거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가의 강한 해석으로 사회를 탐구한 사진이다. 그들의 사진은 사진가의 주관성, 정체성이 사실을 왜곡시키기보다 오히려 진실을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톰 울페(Tom Wolfe), 노만 마일러(Norman Mailer), 헌터 톰슨(Hunter Thompson) 트루만 카포테(Truman Capote) 등은 60년대 중반이후의 새로운 저널리즘의 경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은 개인적 시각(personal vision)과 사실적 정보(factual information) 사이의 균형이며, 예술과 저널리즘 사이에 놓여 있다고 했다. 이것은 기록을 예술의 단계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매그넘(Magnum)의 이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사진가의 주관적인 자아의식이 강해지면서 사진가의 개인적 시각이 강조되고, 사진의 관심이 내용에서 형식으로 옮겨지면서 영상적 표현의 독특한 다양성으로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정보뿐만 아니라 사진가의 기준 설정에 의하여 주관적인 느낌이나 견해 또는 대상에의 의미부여로 다큐멘터리 표현을 가진다. 이들은 개인적, 주관적 시각과 혁명적 영상성으로 사진가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버전을 제시한다. 주제에 있어서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사진 형식에 있어서도 감흥을 준다. 그들의 사진 세계는 사진가가 가진 독특한 표현법을 지칭하는 사진의 스타일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들 사진 주제의 공통점은 기층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그런데 전통적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대표격인 도로디어 레인지(Dorothea Lange)나 유진 스미스(W.Eugene Smith)의 사진으로부터 현대영상사진의 대표주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나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그리고 ‘뉴 다큐멘트(New Documents)'의 개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리 프리들랜드(Lee Friedlander),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나아가 당대의 ‘포스트 다큐멘터리(Post Documentary)'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터리 사진의 주제는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다. 근대 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르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 철학이다.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는 소외된 계층의 불우한 삶과 더불어 인간의 소박하거나 사소한 평범함 가운데 맛 볼 수 있는 삶 등을 찍었다. 그는 일상적 상황 즉 보편적 삶의 단편 속에서 어우러지는 생활감정을 가슴으로 느끼려했다. 그들의 작품 구석구석은 인간애로 가득히 스며 있다.
Ⅳ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대전제는 사진에 찍혀진 것이 사실(Fact)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조작이 쉬운 디지털사진일지라도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의 범위에 들어오면 조작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비록 사실이 진실(Reality)이 아닐 수도 있지만,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은 있는 것만을 기록하여야 한다. 디지털시대조차도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은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해 낼 뿐 무(無)에서는 어떠한 것도 형상화해 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황금률과도 같은 것으로 이것이 무너지면 포토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토저널리스트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그 곳에 있었다는 현장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역사와 직접 맞닥뜨리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운구, 권태균, 허용무가 한국 현대사에서 진정한 역사가가 아닐까 싶다. / 이기명 큐레이터
1988 안동 임동리
1988 안동 마령리
1988 안동 박곡리
1989 안동 수곡리
1989 안동 수곡리
1989 안동 지례리
갤러리 룩스 권태균展 2009.1.13 – 1.26
- 노마드 NOMAD_부제 : 변화하는 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 - 1
노마드, 사진가 권태균과의 대화
1월 13일부터 인사동 갤러리 룩스에서 사진가 권태균의 첫 개인전이 열린다. 사진가 권태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가 첫 개인전을 연단 말인가?”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사진가 권태균은 80년대 이후 한국 사진계에서 큰 위상을 지녔던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는 깊고 아름다운 컬러 사진을 보여왔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많은 개인 작업은 흑백사진으로 제작됐다. <변화하는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1>이라는 부제로 1980년대의 한국인의 일상 적인 삶을 담은 사진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선보인다.
내 삶이 노마드
전시회준비로 바쁜 그를 인사동 골목의 선술집에서 만났다. 권태균은 술을 즐기지 않지만 그의 사진 인생 첫 번째 개인전에 대한 소회를 듣기위해 ‘한 잔의 술’은 필수일 듯 했다. 우선 그에게 왜 ‘노마드’인가 물었다. 80년대 우리네 풍경과 몽골을 연상할 ‘노마드’는 참 멀었다. “내 삶이 그렇다. 그리고 이 단어의 느낌을 좋아한다. 순전히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이다. 소재 자체는 아니다. 십수년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그런 느낌이 더 강해졌다.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주도 카슈가르의 구도심을 취재할 때나 윈난성의 석두성을 찍을 때 그랬다. 평소 매진하는 것은 우리 땅 우리 사람들이지만, 사람의 삶에 천착하다보면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는 듯 했다. 그 폭을 넓힌 것뿐이다. 사실 더 많은 해외 취재를 했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을 취재했지만 우리네와는 너무 달라 느낌이 없었고, 미국은 감동이 없었다. 유럽은 삶 자체의 지향이 달랐다. 하지만 중국에서 느낀 것은 같은 아시아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에 대한 삶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80년대 일까? 70년대 학교를 다닌 그와 80년대 학교를 다닌 필자와는 어떤 간극이 존재할까? “시대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느끼다시피 88년에는 올림픽이 있었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만 내 사진작업이 80년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70년대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70년대 찍었던 사진들도 이번에 꺼내보았는데, 마치 100년 전 사진 같았다. 소통의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우리네 삶이 너무 변화해서 과연 ‘우리는 우리일까?’를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초가집이 등장하는 당시의 사진이 신기하고 재미있겠지만, 시간의 위력을 보이기는 싫었다.”
강이 내 작업의 원천
그의 개인전은 처음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기획전 등을 통해 그의 작업 일부가 공개되고 있었다. 그 사진 중 ‘강’에 대한 천착은 인상적이다. 왜 강일까? “내 고향은 의령이다. 낙동강에서 멀지 않다. 어린 시절 낙동강이 넘치면 마을까지 잠기곤 했다. 물론 당시는 공포가 아니라 즐거움이었던 기억이 난다. 수박과 참외가 둥둥 떠내려 오면 그것을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 대학 때는 ‘민속학연구반’에 들어가 답사를 다녔다. 댐으로 수몰된 마을을 돌며 강과 사람을 지켜봤다. 강은 예전에 100리를 영향권에 뒀다고 한다. 강을 중심으로 좌우로 20킬로미터씩 영향을 준 것이다. 사진과에서는 주지 못한 인문학적인 소양을 이 답사를 통해 얻었다. 그래서 80년대 본격적으로 낙동강을 찍었고, 지금도 찍는다. 하지만 역시 기억되는 작업은 86년 시작했던 임하댐 수몰리 작업이다.”
필자는 아주 오랫동안 그의 사진을 지켜봤다. 아마도 그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발행하던 <샘이 깊은 물>이었을 것이다. 강운구선생이 사진편집자였고 그가 기자였을 것이다. 전통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사진 언어를 구사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아주 오랫동안 묵힌 사진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통틀어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사진은 어떤 특정한 테마를 갖고 있지 않다. 정리해 나가면서 최종으로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은 사람일 것이다. 풍경도 좋아했고 찍었지만 이번에는 배제했다. 당시로서는 극도로 피했던 사람의 뒷모습, 로우앵글, 피사체를 복합적으로 배치하는 방식 등이다. 그래서 내게는 카르티에-브레송과 강운구, 로버트 프랑크 모두가 선생이다. 이런 작업이 한국 상황에 녹아드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게 느껴졌지만 <사회적 풍경을 향하여>의 동인인 게리 위노그랜드나 리 프리들랜더 등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흡수된 것 같다. 그래서 80년, 제대하고는 강남으로 가서 작업을 했다. 당시는 강남 개발 시기로 코엑스 앞이 황무지였던 때였다. 화양리에서 살며 영동대교를 지나 코엑스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흑석동 학교로 갈 때였다. 그곳에서 사람과 풍경이 변화하는 모습을 봤다. 과거 전통과 현대적인 한국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 상황으로 학교가 휴교를 하면 집에 내려가 고향에 남은 모습과 강을 찍었다.”
전통적이지만 일관성있는 태도로
그렇다면 왜 굳이 흑백이었을까? 컬러작업이라면 훨씬 더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호흡하기 좋지 않았을까? 그는 분명 사진을 내보이는데 인쇄매체를 선호하는 작가이며 컬러사진가 처럼 보였다. 윌리엄 이글스톤이나 조엘 메이로워츠 처럼 코닥크롬의 맛을 아는 작가인데 말이다. “결과물로 보자면 컬러는 분명 현란하고 과장된다. 요즘의 디지털 컬러 역시 마찬가지지만 필름보다도 깊이가 떨어진다. 흑백에는 일관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도 흑백을 찍고 현상한다. 하지만 역시 암실문제가 있어 프린트가 문제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 역시 프린트는 디지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요즘 전시와는 다른 점이 몇 있다. 큰 전시장 보다는 작은 전시장을 선택해서 4차례에 걸쳐 진행할 생각이다. 이것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쉽고 친근감있게 전시장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다. 소박한 전시다. 그리고 사진을 크기도 12x16inch를 넘지 않을 것이다.”
권태균은 보수다. 그의 생활태도도 그의 세상보기도 보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보수는 분명 건강한 그것이다. 지키고 기록해야 할 것에 대한 신념과 행동의 보수이다. 그것이 노마드의 태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고 있는 혁신과 실험의 형식은 지키고자하는 신념에 대한 보수의 내용에서 나온다. 그것이 어떤 때는 진보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로 표현되기도 한다. 분명 80년대 그의 기록은 진보로 표현되었으되 당대는 보수의 추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기록을 반면교사로 채택했을 때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제 전시회를 보는 관객의 몫이 되었다. 전시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월간 <카메라타> 글 이상엽/사진가
서울 은마아파트
1982 서울 버스안의 부부
1982 김해 을숙도의 두 노인
1982 김해 나룻배 고고장
부산
1982. 2 김해 다방의 오후
1983 경남 고성 얼씨구나
1983 담양 집으로
1983 밀양 버스 뒷자리
1983 제천 기다리는 사람들
1983 함안
1983 마산
1983 함안 법수2
1986 진도
1987 벌교 바람 부는 날
1987 언양 꽃놀이 갔다오는 할머니들
1988 구례 의관을 정제한 노인
1988 함양 노인의 그림자
1988 함양 타작하는 날
1989 청송 미류나무길
1989 화순
1990 진도 맨드라미꽃과 소녀
1992 구례 일상의 편린
1997 상주
2002 경주
권 태 균-작가노트
침묵하는 돌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돌, 고인돌
고대 신석기인들의 매장풍습은 흙으로 시체를 덮는 토묘(土墓)가 주였다. 그러나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유재산과 부족의 개념이 생겨나고 문명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영생에 대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거석(巨石)에는 신비한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청동기인들은 족장이나 권력자의 무덤에 거대한 돌을 얹어 정령의 보호를 기원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의 수는 대략 6만여 기다. 남한에만 3만여 기의 고인돌이 있고, 북한에도 2만 안팎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다. 특히 2천여 기가 밀집되어 있는 고창의 고인돌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한반도가 청동기시대에 강성한 부족국가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인돌이 무덤으로 추정되는 근거는 무덤 속에서 돌화살촉이나 돌칼, 토기 등의 부장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인돌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날의 작업 시간과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로 미루어 고인돌은 상당한 경제력과 정치력을 지닌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만큼의 인원이 동원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집단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의 유물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국의 고인돌은 산맥의 능선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강이나 계곡 등의 방향을 반영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이 오는 쪽이 생명의 발원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물에 대한 숭배의식은 농업 문화권인 고대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인돌이란 명칭은 하나의 큰 덮개돌을 아래의 두 개나 서너 개의 굄돌이 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돌을 당시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운반해온 것일까. 이 비밀은 고인돌이 위치한 장소를 주목하면 금세 알 수 있다. 돌은 해안가의 거대한 바위나 산의 암벽 중에서 단단하면서도 잘 쪼개지는 화강편마암이다. 아마도 돌의 결을 잘 아는 석수장이가 그 일을 주도했을 것이고 그는 단순한 장인(匠人)이 아닌 주술사였을 것이다.
돌의 말을 알아듣고 천문을 풀이하는… 먼저 석수장이는 하늘에 기도한 연후에 바위에 작은 홈을 파고 그곳에 나무말뚝을 박는다. 그리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게 한다. 나무가 물에 불어 팽창하면서 바위가 결에 따라 서서히 갈라진다. 어쩌면 석수장이는 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기 바로 전날 나무말뚝을 박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개인이 아닌 집단의 축제가 시작된다. 갈라진 바위를 운반하기 위해 통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깔고 전 부족민들이 밀고 당기며 바위를 무덤 위치까지 운반한다.
그 다음 흙산을 쌓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 덮개돌을 밀고 당겨 끌어올린 후에 흙을 제거하면 비로소 고인돌이 완성된다. 무덤으로 사용된 고인돌도 있지만 평지에 축조된 탁자식 고인돌은 하나의 상징물로 존재한다. 부족과 부족의 경계를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하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이나 사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농사철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앞서 장엄한 의식을 치르거나 회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때로 부족장이 병이 들면 온 부족민이 모여 부족장의 치유를 기도했을 것이다.
내가 고인돌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의 일이다.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황토 언덕길 양 옆에 군락을 이룬 고인돌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고인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몇 년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 때의 쓸쓸함이란!
모종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고인돌 군락은 무참히 훼손되었고 길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돌들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만행은 일제강점기시대부터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마을 앞에 신작로를 내거나 저수지를 만드는 데 고인돌을 함부로 옮겨다 썼고 집 마당의 고인돌은 장독대나 댓돌, 담으로 활용되었으며 때로 고인돌을 집안에 들여놓은 채로 집을 짓기도 하고 부엌의 부뚜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그 돌들이 사라지기 전에 미처 사진으로라도 제대로 담아두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고인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인돌은 단지 무덤이나 제단, 상징을 떠나 주변의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자연은 사진작가에게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내가 찍은 수백 수천 개의 고인돌 사진은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공존이었다. 고인돌은 영원한 항구성 속에서 침묵하는 돌이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지난 2천년이상 돌이 간직한 비밀의 이야기였다. 돌들은 비바람에 대끼고 무수한 별들과 대화를 나눴다. 꽃과 나비들이 놀다 가기도 하고 벅찬 희망을 품거나 혹은 좌절한 나그네가 잠시 등을 기대기도 했을 것이다. 여전히 돌은 침묵하고 있지만 풍경은 시대를 거듭해 변화해 왔고 내 사진들은 그것에 대한 기록이다.
차붓소처럼 그곳에 버티고 있는 고인돌 옆의 소나무가 베어지고 대신 전봇대가 들어섰다. 하천의 나무다리나 복찻다리 대신 인위적인 조형물과 건축물이 새로 생겨났다. 고인돌은 응축된 역사성 안에서 자연 그 자체가 되어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 문명과 묘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서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고인돌 자체의 리얼리티다. 나는 돌이면서도 돌이 아니고 문명으로 조성되었지만 이제 자연으로 회귀한 고인돌의 독특한 주술(呪術)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고인돌은 내게 하나의 아름다운 꿈이 되었다.
1997 나주 도곡리 침묵하는 돌
1998 순창
2002 경주 오야리
2002 청도 범곡리
2000 포항 기계
1999 해남 화산
2000 영암
1988 고창
1988 광양
1998 봉화
....사진 속 고인돌은 더 이상 인공조형물로서 당대의 위용을 가진 권력자의 무덤이 아니다. 되레 위용은 사라지고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모습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무참히 훼손되거나 초라하게 남아 있는 고인돌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이 강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 고인돌은 단지 무덤이나 제단, 상징을 떠나 주변의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으로 우리 곁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작가는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사진 가운데 고인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바위 모습도 있다. 그렇다고 '이게 고인돌 맞아'라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작가는 각 지역 문화유적 지표조사 자료와 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고인돌을 확인한 후 카메라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는 "향후 중국 땅에 있는 우리 고인돌도 사진에 담을 것"이라 했다. 요동반도부터 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는 고인돌의 분포지는 바로 초기 고조선의 옛 강토와 일치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고인돌을 단순히 역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그는 "내가 찍은 수백 수천 개의 고인돌 사진은 역사적 의미가 함축돼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공존이다. 고인돌은 항구성 속에서 침묵하는 돌이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부산일보 2011 3.22 정달식 기자
개인전
2012 노마드 NOMAD –변화하는 한국인의 삶에대한 작은기록-3(갤러리 룩스)
2011 침묵하는 돌-고인돌(고은 사진미술관 기획초대전)
2011 노마드 NOMAD -변화하는 한국인의 삶에대한 작은기록-2(갤러리 룩스)
2010 노마드 NOMAD -변화하는 한국인의 삶에대한 작은기록-1(갤러리 룩스)
단체전
2013 사진의 터(Art Space J 개관전)
2013년 제5회 중국 따리 국제사진 전시회
2013 서울사진축제‘초상의 시대’초대(서울시립미술관)
2012 The Orgin.근원 (고은사진미술관)
2008 한국 현대사진 6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2007 대구 국제사진비엔날레 '아시아의 얼굴‘초대
5028,사람 그리고 경 (갤러리 이룸개관기념 초대전)
한국현대사진10인전- 전통과진보 (한미 사진미술관)
2006 사람,사람들! (인사아트센타)
2005 짧은 연대기-3인의 사진가 (와 갤러리)
광복60년,사진60년-시대와사람들 (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2003 한국사진의 탐색 (서울 경인 미술관)
1999 우리사진 오늘의 정신전(미술회관),
환경 기획전-동강별곡(가나아트센터)
시간의 선분(서남미술전시관)
1998 서울사진대전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사진역사전 (예술의 전당)
우리의 환경사진전(영풍문고 전시실)
1997 서울사진대전 (서울시립미술관),
생활의 발견-사진가 4인의다큐멘트(서남미술전시관)
1996 사진은 사진이다(삼성포토갤러리)
1995 우리의 환경사진(예술의 전당),
우리사진 오늘의 정신전(인데코화랑)
1994 한국사진의 현단계(인데코화랑),
민중미술 15년(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예술의 전당)
1993 관점과 중재-93한국현대사진(예술의 전당)
1983 사진4인전-Landscape(관훈미술관)
1982 사진2인전-Landscape(관훈미술관)
저서
예술가의 이야기-사진가 임응식 -나무숲 2006년
강운구 마을삼부작, 그리고30년후 -열화당 2006년
The Discovery Of Korea(Discovery Media)-영문판. 일본어판
공저
고향 물길을 거닐며(김주영)-김영사 2012년
강은 이야기 하며 흐른다(한승원)-김영사 2012년
조선의 문화공간(이 종묵)-휴머니스트 출판사 2006년
이덕일의 역사사랑(이덕일)-랜덤하우스출판사 2005년
어머니의 전설(정 동주)-이룸출판사 2002년 등
1993. 제일합섬 사외보 '一合' 2월호
고향 물길을 거닐며/김주영 지음`권태균 사진/김영사 펴냄 2012
영남의 젖줄 낙동강 1천300리에는 한반도의 역사가 스며있다. 선사시대 터전이자 가야의 철기문명이 꽃피웠고, 중국과 일본의 무역 거점이자 내륙과 왕래하던 뱃길이었다. 왜적에게 항거하며 흘린 피가 흘렀고, 6`25전쟁때는 최후의 전선으로 숱한 생명이 스러졌다. 수많은 생명을 낳고 기른 젖줄이자 산업 발전과 함께 사람들이 쏟아낸 오폐수까지 묵묵히 받아들인 자애로운 강이기도 하다.
'고향 물길을 거닐며'는 경북 청송이 고향인 작가 김주영이 풀어낸 낙동강 이야기다. 남한 제일의 강이자 무려 남한 땅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유역지를 가진 낙동강은 영남의 역사, 한반도 생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저자는 태백에서 남해까지 흐르는 낙동강의 개요와 낙동강에 서려있는 눈물의 역사를 펼쳐낸다.
걸쭉한 입담으로 유명한 작가답게 곳곳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점도 특징. '낙동강 오리알'이 탄생한 배경인 상주시 사벌면 용머리바위 아래 하중도 이야기를 비롯해 태백 구문소와 도산서원, 경천대, 우포늪, 을숙도 등 낙동강의 대표적인 경관들에 대한 입담이 이어진다. 도산서원 등 낙동강과 얽힌 문화 유산과 인문학 이야기가 풍성하고, 닭실마을, 낙동마을, 안동댐 수몰지구 등을 두루 찾아 낙동강변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얼굴들도 만날 수 있다.
글과 맞물려 감동을 더하는 것은 경남 의령 출신의 사진작가 권태균의 140여 컷의 사진이다. 밤을 새워 산에 올라 찍은 안개와 풍경이 어울린 사진들과 항공사진을 방불케 하는 파노라마 사진 등 사진 한 컷마다 낙동강의 아름다움이 절절이 드러난다. 저자는 낙동강은 오랫동안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면서 풍요를 선사했으며 낙동강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다시 낙동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 북한-삼지연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다 사진 권태균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북한- 백두산에서 바라본 개마고원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 북한- 압록강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 북한-압록강 위화도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북한 의주 백마산성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 7.북한- 을밀대
고종욱의 '다시 쓰는 고대사' V 문무왕 수증왕릉 사진 권태균
나는 이제 허망하게 이승을 떠난 한 중년 남자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그는 35만km를 달린 진한 갈색의 낡은 SUV를 몰고 다녔다. 내비게이터가 없는 차다. 대신 낡아 해어진 뒷자리에는 너덜너덜한 축척 5만분의 1 두툼한 대형 지도책이 있다. 국내에서 축척이 가장 작아, 역으로 가장 자세히 나와 있는 때 묻은 지도다. 카키색 사파리 차림에 챙이 넓은 모자가 썩 잘 어울린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사진작가 킨케이드를 연상하면 쉽겠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한반도 남쪽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의 관심은 한국의 자연과 그 속에 부대끼고 사는 한국인이다. 출발은 ‘뿌리 깊은 나무’다. 이제 전설이 돼버린 이 잡지에서 그는 개발 광풍 속에 사라져가는 한국 문화와 역사, 한국인의 삶을 흑백사진에 담았다. 시절이 하수상해 잡지는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폐간되고, 그는 중앙일보 출판부로 옮겨 작업을 계속한다. 언론매체에 등장한 그의 사진은 늘 사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개인적인 작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차에 걸친 개인 전시회의 타이틀은 ‘노마드(nomad)’. 그는 이 땅의 사람, 그것도 가지지 못한 자, 수상한 세월이나 권력 또는 그 무엇에 휘둘려 뿌리까지 파헤쳐져 떠나야만 하는 자들의 곤고하고 남루한 삶을 렌즈에 담아왔다. 지난 정부 때는 청와대로 초대돼 의전비서실에서 4년 남짓 대통령의 동정을 카메라에 담는 일을 맡았다. 이른바 ‘대통령의 사진가’였다. 객관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자리였다.
그는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곤소곤 말하는 그의 수다는 마치 북미 평원을 날아 다니는 허밍 버드의 울림과 같이 소박했다. 그와 나는 지난 10년간 붙어 다녔다. 시베리아 냉기가 몰려온 겨울날, 그는 아직은 한창인 나이에 떠났다. 눈빛은 맑고 티가 없이 깨끗했으며 때때로 몹시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는 꿈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추억은 이미지로, 또는 그리움으로 존재한다.
‘오지기행’과 ‘노래가 있는 풍경’
우리는 지난 10년간 매달 만나 공동 작업을 해왔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월간 ‘나라경제’의 시리즈물 ‘오지기행’이 그 시작이다. 지금에야 자연인 시리즈가 넘쳐나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2000년대 초 그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한국과 한국인의 빛바랜 모습을 렌즈에 고스란히 담았다.
오지기행은 큰 호응을 얻었으며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전통의 지성지인 ‘신동아’로 옮겨 연재되기에 이른다. 강원도 비무장지대 오지에서부터 완도 앞바다 외로운 섬 노화도까지, 그와 함께 한 오지기행은 고향을 떠나온 보통 한국인의 큰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미디어에 비슷한 기획물을 등장하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그 많던 오지는 이제 없어졌다. 이후 우리는 동시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클래식 반열에 오른 노래의 배경과 현장을 기록에 남기기로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동아’의 ‘노래가 있는 풍경’이다. 송창식의 ‘고래사냥’, 김현식의 ‘골목길’, 김민기와 김광석과 양희은과 이문세 노래의 근원을 찾아다녔다.
이승을 떠나기 사흘 전, 그와 나는 이 연재물을 위해 부산을 찾았다. 수다를 떨며 유쾌하게 국제시장 골목을 걸어 다녔다. 부산 오뎅을 먹고 단팥죽을 나눠 먹고, 셔터를 연방 누르며 거리를 취재했다. 그런 그가 자다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떠났다. 그렇다. 그는 갔다.
그러나 만일 저승에서 비슷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 해왔던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슬픔을, 기쁨을, 외로움을, 그리고 아름다움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런 그가 갔다. 피안을 향해 눈 덮인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다. 아아, 그는 갔지만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아니했다. 그가 어디선가 짓고 있는 웃음을, 속삭임을 나는 깊은 우정으로 느낀다. 그의 이름은 권태균. 그는 쉰아홉 나이에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났다. 오, 장려했느니, 우리 시대의 작가여!
Beegie Ad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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