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벤트, 시식회까지 한 달 기록 4.11 한겨레 물바람숲 조홍섭
조선 호랑이 포수 총동원 150명이 전국 뒤져, 호랑이와 표범 2마리, 승냥이 사냥
경성과 도쿄에서 요인 불러 호랑이 고기 시식회 열어…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기여
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
루스벨트 그 무엇이랴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표범 덤벼라 늑대도 곰도 덤벼라
안 나오면 쏘겠다 오연발로
호랑이여 오라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동행 취재하게 된 기자는 아마도 흥분했던 것 같다. 한 기자가 지은 ‘정호군가’라는 노래는 1917년 11월10일 일본 도쿄역을 출발해 같은 해 12월10일 다시 도쿄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한 원정대의 분위기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그 속내까지도 드러냈다.
■ <정호기>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정호기(征虎記)>는 말 그대로 조선 반도의 호랑이를 친 일본 원정대의 수렵기이다. 1918년 출간된 이 책은 사냥 행사 때 찍은 사진과 일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이 행사 후원자와 참가자에게 일종의 기념품으로 주기 위해 만든 비매품 한정판이다. 한국범보전기금은 일본의 한 인터넷 고서적 판매상에서 이 책의 원본을 구해 이번에 번역해 냈다.
사냥 행사를 주관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탄광회사와 선박회사를 소유한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원개발과 해운으로 떼돈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이 행사에 “칠, 팔만 원의 큰돈”을 들였다. 당시 쌀 한 석에 15원 정도였으니 거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3억원쯤 된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쌀 수탈로 쌀값이 폭등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던 3·1 운동 직전의 피폐한 상황이었다. 야마모토는 이 행사의 취지를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매일신보> 1917년 11월3일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은 이 책의 해제에서 이렇게 밝혔다.
겉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짐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동기는 개인의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의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18쪽)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종종 식민지에서 맹수사냥을 벌이곤 했다. 20세기 초부터 조선 땅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커밋 루스벨트를 비롯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 등이 호랑이 사냥을 하러 왔다. 이들이 직접 사냥총을 쥐었다면 야마모토는 사냥꾼과 몰이꾼을 고용하고 자신은 지휘만 하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사냥대는 24명의 사냥꾼과 약 150명의 몰이꾼으로 구성됐고 매일신보사, 중앙신문, 경성일보, 규슈일보사, 야마토신문 등에서 기자 19명이 동행 취재했다. 사냥꾼은 8개 반으로 나눠 백두산 등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 파견한 뒤 사냥물을 한 곳에 모았다. 요즘 많이 하는 팸 투어처럼 언론을 통한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 엿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3명을 뺀 사냥꾼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냥꾼이 모두 동원됐는데, 호랑이 100마리를 쏘아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로 꼽히던 강용근,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실이 공인한 엽사로 하루에 꿩 106마리를 잡은 기록을 갖는 이윤회 등이 포함됐다. 다른 포수가 화승총을 쓰던 시절이었지만 이 둘은 엽총을 사용했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구식 단발 엽총으로 호랑이 같은 큰 맹수를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급소를 단번에 맞춰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를 따로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도 작용했다. 이들이 정호군의 핵심을 이뤘지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급급했지 일제에 이용당한다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멈칫거림도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원정대는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는 등 일제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지역 행정당국과 유지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일본인 대부호의 엽기적인 사냥 이벤트는 큰 구경거리여서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해마다 사람 200명 이상, 가축 7000마리 이상이 호랑이 등 맹수의 피해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언론의 호의적이 보도가 이어졌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아 이들의 여망에 부응하려고 경쟁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포수 백운학은 함경북도 성진에 상륙한 뒤 남운령에서 열흘 만에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고 다른 세 명의 사냥꾼과 함께 산 정상의 목을 지키자 몰이꾼 10여 명이 산 밑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허리 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왔고, 백운학이 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세 발을 연달아 쏘아 잡았다.
다른 포수 최순원도 호랑이를 잡았다. 그는 함경남도 죽암동에서 이틀 만에 상수리나무 숲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멀리서 쏘았으나 총에 맞은 호랑이가 바위굴에 숨어들었다. 그는 돌을 굴려 굴 입구를 막고 석공과 인부를 고용해 굴 옆에 구멍을 뚫은 뒤 사격을 해 호랑이를 죽였다. 총을 맞고 굴에 뛰어든 지 일주일 만에 호랑이가 잡힌 것이다. 야마모토는 최순원의 무용담에 감동해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선물로 주었다.
함경도 일대에서 잡은 호랑이, 표범, 곰, 노루, 산양 등을 기차에 산더미처럼 쌓은 기차가 12월3일 경성에 도착했다. 신문이 매일처럼 사냥 소식을 보도했기 때문에 이들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폭죽이 터지고 조선 음악대의 떠들썩한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카이젤 수염을 한 야마모토는 가슴을 펴고 환영 나온 장관들과 사진을 찍었다.”(70쪽)
전라남도 능주 천태산에서는 일본인 포수 곤도가 이틀 만에 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호랑이 굴을 발견했고 이곳에 숨어있던 몸길이 2.85m의 거대한 표범을 쏘았다.
12월6일 사냥 원정대는 남대문 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기차 화물칸을 가득 채운 포획물은 호랑이 2마리, 표범 2마리, 반달가슴곰 1마리, 멧돼지 3마리, 산양 5마리, 승냥이 1마리, 노루 9마리, 기러기·청둥오리·꿩 다수였다.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사냥감을 그저 가져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2월7일 경성에서는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주빈으로 경성의 명사 120명을 초대해 호랑이 등 포획물의 시식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호랑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양주를 넣어 익힌 요리 등을 맛나게 먹었다. 이 사냥이 정치적 퍼포먼스임을 보여준 대목이다.
호랑이 시식연 참석자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했는데, 이 책에 언론인들의 서명이 실려 있다. 사냥 행사를 취재한 기자들의 서명 가운데 한국 이름이 하나 눈에 띈다. 정호군을 따라다니며 <매일신보>에 그 여정을 상세히 기사로 쓴 심천풍(18980~1946)이 그이다.
그의 본명은 심우섭으로 <상록수>를 쓴 작가 심훈의 맏형으로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호랑이 시식회’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12월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추밀원 고문관, 육군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여명이 모여 일본에는 없는 이 신기한 고기맛을 보면서 대일본제국의 힘을 만끽했다. 당시 연회의 메뉴판에는 요리 순서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197쪽)
1.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푹 익힘, 토마토케첩으로 마리네 함)
2. 영흥 기러기 수프
3. 부산 도미 양주 찜(국물과 함께)
4. 북청 산양 볶음(야채 곁들임)
5. 고원 멧돼지 구이(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곁들임)
6. 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7. 과일, 커피
그러나 호랑이 원정대 이야기는 시식회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범보전기금은 한국 호랑이의 실체를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한국 호랑이의 표본을 추적하던 중 야마모토 원정대가 잡아 내용물을 먹은 호랑이의 표본과 조우하게 된다.
야마모토는 호랑이를 비롯한 포획물의 표본을 만들어 자신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는 것이다. 표본관을 들른 이항 교수는 ‘조선산’이란 표지가 선명한 호랑이, 표범, 반달가슴곰, 승냥이, 산양, 멧돼지의 표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이제 맥이 끊긴 호랑이, 표범, 승냥이를 머나먼 땅에서 만난 것은 감상적인 일이었지만, 실질적인 의미도 있다. 이항 교수 등 한국범보전기금 전문가들은 해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멸절된 동물 중 포획한 사람, 장소와 시기, 과정 등 표본과 관련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현재까지 이 도시샤 고등학교의 표본들이 유일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멸절된 동물에 관한 기록과 표본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정호군 대장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덕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 와서 호랑이를 사냥해 기록과 표본으로 남겨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를 씁쓸하게 했다.”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사진=에이도스
한국호랑이는 멸종하지 않았다 2012.2.11한겨레 조흥섭
한국호랑이, 별도 아종 아닌 아무르호랑이와 같은 아종 밝혀져
통일 되면 한반도도 호랑이 서식권역 편입, 아무르호랑이 보존 나서야
단군 신화부터 프로 야구팀의 마스코트까지, 호랑이 만큼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동물은 없다. 민속학자 천진기씨는 “우리 조상은 이런 호랑이를 좋으면서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 우러러보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호랑이의 나라’를 자처하면서도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지는 한 세기를 바라본다. 1980년 한 석간신문이 서울대공원에서 벵골호랑이를 찍은 거짓 제보 사진을 ‘한국산 호랑이가 57년만에 나타났다’고 섣불리 보도한 오보 사건도, 한국 호랑이가 없는 허전함과 호랑이를 되찾고 싶다는 염원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호랑이 발자국이나 포식 잔해에 대한 제보가 아직도 끊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최근 이항 서울대 교수팀이 발표한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는 같은 아종’이라는 발표는 다시 한 번 우리 의식 속의 호랑이 향수를 깨웠다. 이 발표는 애초 한국호랑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호랑이는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 내막을 알아보자.
먼저 한국호랑이에 대한 개념정리. 현재 호랑이에는 6가지 아종이 있는데,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북지방에 서식하는 아종을 흔히 시베리아호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식지가 시베리아와 무관한 이 아종을 러시아와 국제 학계는 ‘아무르호랑이’라고 부르며 중국은 ‘동북호’를 고집한다.
문제는 이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하나였던 한반도 개체의 정체가 무어냐는 것이다. 독일학자 브라스는 1904년 아무르호랑이 가운데 한반도에 서식하는 호랑이가 ‘줄무늬가 뚜렷하고 붉은 색을 띠며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가죽을 지닌다’며, 별개의 아종인 ‘한국호랑이’로 분류했다.
이 분류는 1965년까지 유지되다가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이 별다른 검토 없이 한국호랑이를 아무르호랑이에 편입시키면서, 이미 남한의 야생에서 사라진 한국호랑이는 이름마저 잃고 말았다.
이항 교수팀의 이번 연구는 학계의 숙제를 뒤늦게 한 셈이다. 한반도의 호랑이는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북부, 그리고 한반도를 넘나들던 유전적으로 동일한 집단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호랑이란 실체가 없어지지만 동시에 한국호랑이가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아무르호랑이가 한반도에 돌아오면 한국호랑이가 복원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스피호랑이는 1815년 멸종했지만 유전적으로 아무르호랑이와 매우 가까와 아무르호랑이를 이용한 복원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이항 교수는 아무르호랑이가 우리에겐 ‘호랑이 카레이스키’라고 했다. 우리가 러시아의 고려인을 돌봐야 하는 것처럼 아무르호랑이를 한국호랑이처럼 지켜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최근 환경부가 멸종위기종을 재정비하면서 멸종한 다른 동물은 보호종에서 제외하면서도 호랑이를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에 유지시킨 데엔 이런 고려가 있었을 터이다.
아무르호랑이는 1940년대 20~30마리까지 줄어 절멸 직전에 몰렸으나 국제적인 보호운동에 힘입어 현재 400여 마리가 남아있다. 이 호랑이를 구한 것은 호랑이와 아무 인연도 없는 네덜란드, 미국 등 선진국 사람들이었다. 국제적인 아무르호랑이 보호단체인 티그리스재단 홈페이지의 후원자 명단을 보면, 미국 동물원 27곳과 유럽 동물원 18곳이 후원자로 나와 있다. 후원액도 네덜란드 정부 12만 달러, 영국 동물학회 2만6000달러 등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한국범보존기금이 2004년부터 해마다 약 2000달러를 모금해 보내고 있다. 지난해엔 후원금이 늘어 4000달러가 됐지만 소수의 관심 있는 후원자가 참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호랑이가 아무르호랑이와 한 핏줄로 드러났지만 기후와 지형이 다른 한반도 호랑이가 러시아의 호랑이와 꼭 같은 수는 없다. 특히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훨씬 많은 호랑이가 고밀도로 분포했다. 일제의 ‘해수구제사업’이 진행된 1919~1924년의 6년 동안 잡아 죽인 호랑이만 65마리에 이르는 것은 한반도의 마지막 호랑이 집단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또 한반도 호랑이가 깊은 산보다는 먹이가 많은 초지와 늪지대에 많이 살았고 특히 섬과 해안에 높은 서식밀도를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국호랑이 표본이 남아있는 목포 유달초등학교의 한국호랑이도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잡힌 것이고, 1924년도 전남도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포획됐다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결국 유전적으로 동일할지라도 한국호랑이는 아무르호랑이와 미세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의 연구가 밝혀야 할 과제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고 환경을 복원하면 아무르호랑이는 한반도 남쪽까지 올 수 있다. 그날을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아무르호랑이, 아니 한국호랑이를 보존하는데 손을 보태는 일이다.
백두산 호랑이의 귀환, 사진으로 확인 2012.6.27 조홍섭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에 소수가 남아있던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가 옛 서식지인 백두산에 출몰하고 있음이 무인 사진 촬영으로 확인됐다. 중국 베이징대 연구진과 지린성 임업당국은 지난 3월 왕칭 자연보호구역에 적외선 카메라 100여대를 설치해 아무르호랑이와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의 분포 실태를 조사했다. 지난 6월12일 왕칭 임업국 직원이 두황즈 임업장에 설치한 카메라를 회수해 확인한 결과 야생 아무르호랑이가 촬영된 것을 발견했다고 <중국망 신문 중심>이 최근 보도했다. 촬영 시점은 4월4일 오전 7시32분이며 장소는 백두산 북쪽 해발 837m 지점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카메라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이 2장의 사진에 찍혔다.
현재 아무르호랑이의 최대 서식지는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430~500마리가 이곳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는 헤이룽장성의 완다산 일대와 지린성의 왕칭과 훈춘 지역을 중심으로 18~24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적인 번식집단은 러시아에만 있다. 왕칭 보호구역에서는 2008년 이후 발자국은 여러 차례 발견됐지만 호랑이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지앙 세계자연보호기금 중국 동북프로그램 책임자는 “이번 사진은 적절한 보전과 관리대책을 세우면 호랑이가 원래의 서식지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며 “무인 카메라가 희귀한 야생동물을 모니터링 하는데 매우 효과적임을 보여 주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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