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엑소더스 - 기후격변이 몰고 올 전 지구적 생존 르포르타주 /곰출판 23.11
가이아 빈스(Gaia Vince) -인간과 지구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과학 작가이자 방송인. 〈네이처〉와 〈뉴사이언티스트〉의 선임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디언〉 〈더 타임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등의 매체에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UCL(University College London) 인류세연구소는 그녀의 활동과 성과를 인정해 명예 선임연구원으로 위촉,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녀는 전 세계 기후변화의 현장을 발로 뛰며 인터뷰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인류세의 모험》(2015)과 《초월》(2021)이 있으며, 데뷔작 《인류세의 모험》으로 여성 최초 왕립학회 올해의 과학도서상을 수상했다.
차례/ 한국어판 서문
서문
1. 폭풍 2. 인류세의 네 기수 3. 집을 떠나다 4. 국경 5. 이주민의 6.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7. 지구의 피난처
8. 이주민의 터전 9. 인류세의 생활환경 10. 식량 11. 전력, 물, 자원 12. 복원
결론
선언
더 읽을거리
감사의 말/ 후주 /도판 목록 /찾아보기
대멸종의 기로에 선 인류,공룡과 다르다 말할 수 있을까
6,600만 년 전 우주에서 소행성이 유카탄 반도에 떨어졌고, 이 사건으로 당시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멸종했다. 소행성의 충돌로 인한 기후급변이 원인이었다. 그때 충돌로 방출된 이산화탄소의 양은 600~1,000기가톤. 그런데 지난 20년간 인류가 뿜어낸 양이 600기가톤이다. 그 결과는 지구 평균기온의 1.3도 상승(산업화 이전 대비)이었다. 우리 인류는 스스로가 소행성이 되어 다시 한번 지구를 대멸종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전 인류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2100년 지구의 기온은 6도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반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2도 상승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2100년 3~4도 상승을 ‘정해진 미래’로 여기는 이유다. 안타깝지만 이 정도의 상승만으로도 지구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고작 3~4도 상승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수치가 지구 전체의 평균 온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구 면적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바다는 육지보다 온도가 서서히 오른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육지에서는 기온 상승이 두 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2100년에는 평균 온도가 10도 가까이 오를 수 있고, 이는 서울에서 50도에 육박하는 상상하기 힘든 더위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기후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인류세의 네 기수인 화재와 폭염, 가뭄, 홍수가 번갈아 일어나면서 인류의 삶은 위협받고 있다. 열대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과 호주를 포함한 중위도 지역 역시,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될 것이다. 지금은 사하라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폭염을 유럽과 미국, 동아시아 전역에서 겪게 될지도 모른다. 즉 이 지역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때쯤이면 티핑포인트를 지날 것이다. 그린란드와 남극에 빙상이 모두 녹아 해수면이 2미터 가까이 상승한 세계로 접어들게 되고, 몇 세기에 걸쳐 해수면은 계속 올라갈 것이다. 그 높이가 10미터가량이다.
열 스트레스나 가뭄으로 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강수량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토양이 뜨거워 물은 빠르게 증발할 것이고, 그 결과 인구 대부분이 충분한 담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세계 식량 가격은 치솟고, 수백만의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거나 도시로 흘러들거나 국경을 넘을 것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거주하는 해안 지역과 저지대 섬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여 2100년까지 약 20억 명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_42쪽 (폭풍)
우리 인류는 유례없이 안정적이었던 기후 시대의 안식처를 떠나고 있다. 어렵지 않게 농작물을 재배하고 문명을 꽃피웠던 시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생물 다양성이 고갈되고 화재와 폭염, 가뭄, 홍수가 수시로 발생하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공룡처럼 대멸종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과연 공룡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후격변에서 살아남는 법,이주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
이주는 우리가 기후격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우리 인류는 이주를 통해 이 행성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이주는 자연에서 널리 사용되는 생존 전략이다. 수많은 종이 먹이와 날씨를 따라 이동하지만, 인간만큼 다양한 환경에 동화해서 살아가는 동물은 없다. 대부분이 특정한 생태 환경에만 적응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한다. 오직 인간만이 지역에 따라 다른 종으로 진화하지 않은 채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호미닌 시절, 우리 인간은 어디서나 터를 잡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우리의 뇌가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기에 가능했겠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자원과 아이디어, 지식을 공유하는 ‘초사회적 존재’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인류가 다른 종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상호 협력을 통해 자원과 지식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세기, 존망의 기로에 선 우리에게 다시 이런 능력들이 요구되고 있다. 유연성과 협력의 능력 말이다.
우리 인간은 이방인을 배척하고 경계하는, 폐쇄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협력 네트워크를 활용해 아이디어와 자원, 유전자를 교환할 수도 있는 존재다. 이미 수많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의외로 우리는 이방인을 내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그것이 바로 인류 문명의 진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주 이야기는 수천 년에 걸쳐 변해온 우리의 유전자, 문화 그리고 땅에 대한 이야기이고, 유목생활과 변화하는 농업의 이야기이며, 평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흙을 일구는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에 관한 이야기, 팽창과 소멸을 거듭하는 제국들, 지구의 가장 구석진 곳에 도달한 탐험가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소속된 사람들과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 집 없는 자, 무국적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주는 도시라는 인간의 생태적 틈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이야기인 동시에, 도시로 몰려오는 수십억 이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짠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그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잘 연결된 곳에서는 이동이 쉽고 사회가 번성하지만, 네트워크가 끊어져 있으면 이동이 제한되고 사회와 문화는 쇠퇴한다. _98쪽 (집을 떠나다)
우리는 이민자가 안보를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낮추고, 건강보험에서 사회보장에 이르는 다양한 혜택에 ‘무임승차’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수당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움직인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곳, 안전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길 희망한다. 오늘날 이런 조건을 갖춘 국가들은 대부분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경제적 활력을 잃어가는 북반구의 선진국들이다. 그래서 이주는 이주민과 받아들이는 사회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이민자들의 유입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성장의 기폭제가 된다. 세계은행의 수석 연구원 마이클 클레멘스는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1억 달러짜리 지폐가 길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벽을 세우고 이주민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다. 분쟁과 기후위기를 피해 온 이주민들이 그런 불행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비극이다. 80억 인류 대부분은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지리적 위치에 갇혀 있다.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누군가는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세계를 여행하지만, 가난한 분쟁지역에서 태어난 또 다른 누군가는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전적으로 태어난 지역이 어딘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핵심은 포용이다. 나도 이주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당신은 아니더라도 당신의 자녀는 기후난민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이주는 우연이든 의도이든 세계를 재구성할 것이다. 의도적인 편이 훨씬 낫다. 온도가 섭씨 3~4도 상승한 세계에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계획이 필요하고, 이 계획에는 극북 지역에 거대한 새 도시를 건설하는 동시에 열대의 넓은 면적을 포기하고 새로운 형태의 농업에 의존하는 방안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변화한 지구와 급변하는 인구구조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의 미래는 인류가 이 전례 없는 협력을 해낼 수 있느냐, 즉 정치적 지도와 지리적 위치를 분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정치가 아니라 지질학과 지리학, 생태학을 기반으로 새로운 계획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_187쪽 (지구의 피난처)
하나뿐인 지구, 인류 역시 하나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지구상에서 기후변화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이 어디든 기후 조건은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 그 변화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극단적인 기후변화는 결국 사람들을 그들의 오랜 삶의 터전에서 떠나게 만든다. 이런 이주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이주가 아니다. 상당한 인구가 한 지역을 비우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기후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식의 엄청난 이주로 이어질 것이다. 당연히 자본과 산업, 투자도 함께 움직일 것이다. 바야흐로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 거대한 변화를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존의 정치적 국경 대신, 기후와 지리적 환경에 맞춰 새롭게 만들어진 국경에 적응하고 그에 걸맞는 규모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준비해야 한다.
엄청난 인원이 이주에 나서는 한편 지구를 다시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구를 시원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이니까. 우선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한 전례 없는 정치적·사회적·기술적 대응이 필요하다. 지구가 더 더워지면 북극으로 이주한다고 해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고, 탄소를 포집해 저장하고, 해양 비옥화를 통해 바닷속에도 비축해야 한다. 햇빛을 반사하는 플리스 담요로 빙하를 덮어 해빙의 시기를 지연시키고, 성층권에 황산염을 살포하여 햇빛을 반사하는 등의 지구공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지구가열화의 시간을 늦출지도 고민해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구는 하나뿐이고, 인류 역시 하나뿐이니까.
지구의 생물 다양성과 기후를 복원하여 인간과 야생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격변의 대부분이 끝날 것이다. 복원을 더 빨리 할수록 대규모 이주가 줄어들고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주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주는 인간 존재의 일부다. 대신 이주의 관리가 훨씬 더 쉬워질 뿐 아니라, 바라건대 더 잘 관리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구의 회복을 빠르게, 그리고 대규모로 하지 않는다면, 지구에서 인간이 안전하게 살 곳이 없는 수준으로 기온이 올라갈 것이다. _336쪽 (복원)
기후변화는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기후는 우리가 삶을 조직하는 기반이므로. 앞으로 우리는 심각한 존재론적 변화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문화와 기술, 자본 등과 결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력한 방관자가 아니다. 이동을 통해 살아남아서 마침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인류세, 엑소더스》는 기후위기를 다루고 있는 책들과 조금 다른 입장을 취한다. 기후격변이 몰고 올 혼란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주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지구공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다시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복원하자고 독자들을 고무시킨다. 일부 환경론자들처럼 경제 활동을 멈추자는 이야기에는 명확히 선을 긋는다. 오히려 이주를 통해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새로운 부를 창출하여 지구를 회복시킬 방법을 모색하자고 한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협력을 조직화할 거버넌스의 출현을 요구한다. 독자들은 《인류세, 엑소더스》에서 기후변화가 몰고 올 미래의 환경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의한 이주와 협력이 전 세계 정치·사회 구조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책 속으로
이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벌써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가뭄으로 농사를 비롯한 생계가 불가능해진 지역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진행 중이던 대도시로의 대규모 이주에 기후로 인한 이주가 더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민자 수는 전 세계적으로 두 배나 늘었다. 지구가 더워짐에 따라 급증하는 난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점점 더 시급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종 수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헤쳐나갈 수 있다.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종류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이주가 필요하다._서문(12~3쪽)
세계는 지금보다 더 적대적이고 위험할 것이 분명하다. 지구의 넓은 지역이 너무 더워서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식량을 재배하는 곳 대부분이 열 스트레스나 가뭄으로 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강수량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토양이 뜨거워 물은 빠르게 증발할 것이고, 그 결과 인구 대부분이 충분한 담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세계 식량 가격은 치솟고, 수백만의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거나 도시로 흘러들거나 국경을 넘을 것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거주하는 해안 지역과 저지대 섬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여 2100년까지 약 20억 명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4도 상승한 세계에서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환경에 내몰리는 끔찍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_1. 폭풍(40~2쪽)
오늘날 국가들이 국경을 봉쇄하고 벽을 쌓으면서 이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100억 명에 달하는 인구, 자원의 한계, 인구구조 문제 등 인류가 최대 환경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존도구인 이동을 제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글로벌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광범위한 인구 이동과 재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규모 이주는 피와 폭력을 불러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세계에는 항상 재앙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시점에 우리는 모두가 지구를 공유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을 토대로 세계적 규모의 관리에 나서야 한다._3. 집을 떠나다(99쪽)
허리케인이 마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는 비극적인 참사는 하루아침에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 수 있지만, 기후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대개 점진적이다. 흉작이나 견딜 수 없는 폭염이 거듭되어, 결국 사람들이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나는 순간이 온다. 그런 사람들은 경제적 이주민으로 분류되지만, 그들도 그들의 조상들이 삶을 꾸렸던 인류세 이전 세계, 홀로세에서 온 난민이다. 홀로세 환경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모두 인류세에 발을 딛고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거주 가능한 땅에 대한 권리를 남들보다 먼저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_4. 국경(131쪽)
우리 종의 협력 능력이 지금만큼 필요한 적은 없었고, 지금만큼 큰 시험대에 오른 적도 없었다. 우리가 처한 위기의 규모는 그에 걸맞은 글로벌 협력을 새롭게 요구한다. 그중 하나가 국제시민권과 이주 및 생물권을 관리할 글로벌 기구다. 우리 세금으로 운영되고 국민국가들이 책임지는 새로운 권위가 필요하다. 정치 이론가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는 세계화의 진전으로 이제 우리는 국경을 벗어나 ‘중첩하는 운명 공동체’ 속에 살고 있으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시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유엔은 국민국가에 대한 집행 권한이 없지만, 우리가 지구 온도를 낮추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생물 다양성을 회복하려면, 세계시민의 위임을 받아 규제하고 관리할 당국이 있어야 한다. 즉 강제력을 갖춘 일종의 글로벌 거버넌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_6. 새로운 코스모폴리탄(179쪽)
2014년에 아노테 통 대통령은 내게 키리바시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키리바시는 다른 여러 도시와 국가들이 생활이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할 때 취해야 할 조치들을 선도하고 있다. 이 나라는 물에 포위된 국민을 위해 피지의 영토를 매입했고, 자국민들이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통 대통령은 10년 전 ‘존엄한 이주’ 프로그램을 시작해 뉴질랜드로 간호사를 파견하는 등 해외 취업을 통해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통 대통령은, 푸에르토리코 같은 다른 섬나라들처럼 극단적인 기상 재난이 닥칠 때 국민들이 난민이 되어 대규모 피난을 떠나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_9. 인류세의 생활환경(245~6쪽)
오늘날에는 인구가 10억 명 더 늘어나는 데 불과 13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에 완승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농업 발전을 뒷받침한 홀로세 밖으로 지구를 밀어냈다. 이제 지구는 담수가 부족하고 기후는 예측 불가능하며 인구가 훨씬 많은, 새로운 가열화된 세계로 들어섰고, 지구에 좋은 땅은 이미 동이 났다. 현대 농법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지구 자원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계가 있다. 현재 지구의 수용 능력은 약 90억 명이지만, 4도 상승한 세계에서는 농작물에 끼치는 영향과 물 부족, 기상이변, 해수면 상승, 바다 산성화 등의 문제들로 인해 그 한계가 10억 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한다._10. 식량(263쪽)
다른 옵션들도 있지만 가장 유망한 옵션인 황산염은 고공 비행하는 항공기나 드론을 이용해 성층권으로 꾸준히 살포할 수 있다. 냉각 효과는 즉각적이지만 대기 중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살포할 필요가 있으며, 이산화탄소 농도가 감소하면 단계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산화탄소의 온난화 효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런 방식으로 지구를 식히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부작용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지속적인 온난화 효과보다 더 큰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다면, 단순히 방출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영향을 멈출 수 있다._12. 복원(331쪽)
우리는 무력한 방관자가 아니다. 하지만 현재는 일관된 계획이 없다. 우리는 그저 뜨거워져 가는 세계를 지켜보면서 가뭄, 태풍, 산불, 이주민의 보트 등 새로운 충격이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미봉책으로 대응할 뿐이다. 우리는 미래를 통제해야 한다. 즉,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험난한 환경에 진입하는 동안, 모든 대륙의 부자와 빈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상상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고정된 주소지에서 벗어나 안전한 장소를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_ 결론(345쪽)
불가피한 ‘기후 이민’…“관리하고 통제하라”
앞으로 80년 동안 15억~30억명 이주 전망
“이주는 기후 위기 문제 아니라 해결책,
‘글로벌 협력 기구’ 등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기후변화는 점점 더 강하게 사람들을 내몰고, 내몰린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난다. 폭증하는 이민의 물결 뒤에 기후 위기가 있다. 온두라스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집단 이주민 행렬 ‘카라반’은, 중남미 지역의 만성적인 부패와 가난뿐 아니라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기후변화에 의해 촉발됐다. 아직 이주의 압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4도가량 올라갈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나’의 이주도 예고된 현실과 다름없다. 운 좋게 북반구의 서늘하고 부유한 지역에서 태어났더라도, 이곳을 찾아올 최대 30억명이나 될 이주민들과 공생해야 할 현실까지 피할 순 없다.
‘네이처’와 ‘뉴사이언티스트’의 선임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과학 작가 가이아 빈스는 지난해 펴낸 ‘인류세, 엑소더스’에서 “(앞으로 기후변화에 따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인구가 많은 대부분의 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벨트가 형성”될 것이라 예측했다. 다만 ‘기후 이주’ 또는 ‘기후 난민’ 문제를 기후변화에 뒤따르는 재앙이라 보는 시각과 달리, 지은이는 이주야말로 인류가 기후 위기를 극복할 거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기후변화의 시계는 이미 되돌릴 수 없으므로, 전 지구적으로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대규모 이주로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2020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깁스랜드에 있는 관광도시 오보스트 동쪽이 산불에 휩싸인 모습을 촬영한 위성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2020년 폭우로 물에 잠긴 도로를 힘겹게 지나가는 나이지리아 바옐사주 주민들. 10년 만의 최악의 홍수로 나이지리아에서 600명 이상이 숨지고, 130만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연합뉴스
먼저 지은이는 여러 기후 모델 연구 결과들을 들어, 앞으로 80년 동안 지구의 온도가 3~4도 올라가는 미래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2도 상승’을 피할 수 없으며, 손을 놓으면 ‘6도 상승’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류세의 네 기사’, 곧 화재·폭염·가뭄·홍수는 전 지구에 영향을 주겠지만, 특히 남반구와 열대 벨트 등 ‘기후 취약’ 지대에 집중되어 이 지역은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 된다. 예컨대 ‘4도 상승’이면 아프리카에서는 폭염에 노출되는 날이 100배 이상 증가하고, 전세계 해수면이 1센티미터 상승할 때마다 저지대 지역을 중심으로 17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다. 유엔국제이주기구는 2050년까지 최대 15억명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야 할 것이라 추정한다. 다른 연구에서는 2070년까지 최대 30억명이 ‘기후 이주’를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전 지구가 기후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내륙과 호수, 고지대, 북위도 지역이 적도와 해안, 작은 섬, 건조·사막 지역, 열대우림·삼림지대보다 더 안전하다. 인간 생산성에 최적인 기후는 11~15도라 하는데, 북위 45도선 북쪽 지역은 평균기온이 약 13도다. 그린란드,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선 얼음이 녹으며 드러난 새로운 땅에 농업이 가능해지고, 북극해 항로가 새로운 무역의 중심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효과적인 제도와 안정된 정부를 갖춘 부유한 나라들이 있다.”
기후변화와 함께 찾아올 또 하나의 중요한 미래는 인구 격변이다. 세계 인구는 2060년대에 100억명으로 정점에 달할 것인데, 기후변화로 타격을 입을 지역의 인구 증가가 두드러지는 반면 북위도 지역의 부유한 국가는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그러니 대규모 이주는 전 지구적인 “전례 없는 협력”을 만들어낼 계기다. 특히 지은이는 이 새로운 공생이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향후 80년 동안 인구 100만명 규모의 도시가 10일마다 하나씩 건설될 것”이라 내다본다.
성공 여부는 인류가 “정치적 지도와 지리적 위치를 분리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 소속된 것을 당연히 여기고 이주민을 배척하는 “지정학적 정체성과 제약”에 빠져 있다. 국경을 높게 세우고 폭력까지 앞세워 이주민을 적대하고 배제·차별하는 행태가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지은이는 애초 인류는 ‘이주하는 종’으로 진화해왔음을,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자원을 교환하는 능력”이 이를 뒷받침해왔음을 역설한다. 현대 문명을 이룬 정주와 농업마저도, ‘이주하는 종’으로서 인간이 발전시켜온 ‘초사회적’ 특징에 기댄 것이다. “이주가 변칙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의 국가 정체성과 국경이야말로 변칙”이며,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지은이는 이제껏 국민국가가 이뤄온 효용성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최대한 포용적으로 ‘재창조’하는 길을 제시한다. 혈통이나 피부색, 출생지 등에 집착하는 ‘종족적 민족주의’ 대신 공동선에 기반한 ‘시민 민족주의’를 토대로 삼아 시민권의 근거를 국제사회 전체로 넓혀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협력의 구조와 제도를 갖추고 있는 기존 국민국가들이 힘을 합쳐 “강제력을 갖춘 일종의 글로벌 거버넌스”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제 시민권’ 개념을 중심으로 삼는 이 기구는 갈등·분쟁 대신 협력에 기대어 전 지구적 차원의 대규모 이주가 가능하도록 적극적인 ‘관리’에 앞장설 것이다. 이를 통해 거주 불가능해지는 지역의 국가가 거주 가능한 북반구 지역을 ‘전세’로 확보하는 일,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해주는 일, 새로운 이주민 도시에 대한 투자와 평등한 분배를 이끄는 일, 장기적으로 기후변화를 멈추고 지구를 복원하는 일, 회복된 지역으로 사람들을 다시 이주시키는 일 등이 가능할 것이란 주장이다.
‘네이처’ 선임 편집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과학 작가 가이아 빈스. 곰출판 제공
지은이는 이주할당제, 무국적자 여권, 전세 도시 등 구체적인 아이디어들로 자신의 과감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풍력 펌프로 북극의 바다 얼음을 다시 얼린다거나 성층권에 황산염을 살포해 햇빛을 반사시키는 등 일각에서 ‘지구 공학’이라 비판받는 아이디어들까지 서슴없이 제시한다. ‘탈성장’류의 논의는 “청교도적 주장”이라며 냉담하게 차단한다.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해야 한다’는 태도다. ‘이미 시작된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미래를 통제해야 한다”는 도발로 이어졌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종말 대비한 벙커? 저커버그의 하와이 자급자족 복합단지
마크 저커버그(사진)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하와이에 자체 식량 생산과 물 공급이 가능한 복합단지를 짓고 있다는 미국 매체 보도가 나왔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와이어드>는 2023년 12월15일, 저커버그가 하와이 카우아이섬에 3500여억원을 들여 지하대피소를 포함한 대규모 복합단지를 비밀리에 짓고 있다고 보도했다. 1400에이커(약 5.7㎢) 규모 토지를 매입하는 데 1억7천만달러(약 2200억원)를 투입했고, 건설비도 1억달러(약 1298억원)에 이른다.
<와이어드>가 입수한 건설계획 관련 문서 등에 따르면, 이 단지에는 두 개의 중앙 맨션이 있는데 생활공간, 기계실, 탈출구 등을 갖춘 5천 제곱피트(약 464㎡) 규모 지하대피소로 연결된다. 특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름 16.7m, 높이 5.5m의 물탱크와 펌프 시스템이 있고 단지 내 농장·목장에서 이미 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는 <와이어드>의 질문에 마크 저커버그 부부 대변인 쪽은 답변을 거부했다.
단지는 이미 부분적으로 완공된 곳도 있는데 적어도 30개의 침실·욕실을 갖춘 12개 이상 건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개의 엘리베이터, 사무실, 회의실과 산업용 규모 주방뿐만 아니라 대형 체육관, 수영장, 사우나, 테니스 코트 등도 포함됐다.
<와이어드>는 현장 작업자들 사이에서 “저커버그가 거대한 지하도시를 짓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장소가 지구 종말 이후를 대비한 벙커라고 예상한다”는 등의 소문이 나온다고 전했다.
미국의 저명한 미디어 전문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그가 정부와 사회를 망치더니, 이젠 하와이에서 요새를 짓고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코프는 저서 <가장 부유한 자들의 생존>(Survival of the Richest)에서 “돈과 기술만 충분하다면 부유한 사람들은 신처럼 살 수 있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닥친 재앙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비판한 바 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왜 억만장자들은 지하벙커를 만드는 걸까
저커버그, 하와이에 상암월드컵경기장 4분의 3 규모 지하기지 건설
“실리콘밸리 부호들 절반 이상이 ‘인류 종말’ 대비 지하벙커 마련 추정”
1236억 달러의 재산으로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 세계 부호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린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지구 종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하벙커를 갖춘 거대 복합생존시설을 미국 하와이에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IT 전문매체 ‘와이어드’와 가십에 강한 일간지 ‘뉴욕포스트’, 비즈니스·기술 뉴스웹사이트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에 따르면 저커버그는 2014년 8월부터 하와이에 거대 생존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저커버그는 1억7000만 달러를 들여 1400에이커(약 5.7㎢)의 땅을 사고 이곳에 1억 달러의 건설비를 들여 대규모 복합생존단지를 짓고 있다.
미국의 부호들이 대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벙커를 건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주목되고 있다. 사진은 콜로라도주의 샤이엔 마운틴 공군기지 안에 있는 지하벙커로 이곳은 30메가톤의 핵폭탄과 화학·생물학·방사선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EPA 연합
프레퍼들, 정부나 미디어 신뢰하지 않아
땅값과 건설비를 합친 2억7000만 달러는 한화로 약 3520억원에 이른다. 일부 매체는 실제로 이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건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복합단지에는 상암월드컵경기장(7140㎥)의 75% 정도인 5만7000제곱피트(약 5295㎡)에 들어서는 두 개의 메인 건물과 주로 게스트하우스 용도인 작은 건물을 포함해 모두 12개 건물이 들어선다. 건물마다 각각 30개 침실과 욕실을 갖췄다고 한다. 메인 건물 하나는 체육관과 수영장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화제가 집중되는 지하벙커는 규모가 5000제곱피트(약 464㎡)로 대피 공간과 창고 등으로 이뤄졌다. 외부와 차단돼도 전기와 식료품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시설이 들어서는 카우아이섬은 제주도(1833.2㎢)의 80% 정도 면적에 7만3000여 명만 거주해 한적하다. 활화산이 없고 오랜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계곡과 아름다운 폭포, 멋진 해변 등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여기에 연간 1200mm가 넘는 강수량으로 수량이 풍부해 섬 전체에 숲과 수목이 울창하며 2500종이 넘는 조류가 서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고 한적한 섬에 지구 종말에 대비하는 시설이 들어서는 셈이다. 문제는 이처럼 지구 종말에 대비하는 이가 저커버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미국에는 ‘대비하는 사람’이란 뜻의 ‘프레퍼(Prepper)’가 대규모로 존재한다. 프레퍼는 대규모 자연재해나 경제공황, 사회적·정치적 혼란 등 지구 대이변이나 파국적·파멸적 상황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피난처 마련, 물자 비축, 피난과 생존술 훈련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프레퍼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통한다. 미국 전체에만 250만~400만 명 정도의 프레퍼가 있다는 추정도 있다. 프레퍼는 1929~3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조금씩 생기기 시작해 1962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소 냉전이 격화하고 핵전쟁 공포가 확산하면서 자신만의 생존을 준비하는 사람이 증가한 셈이다.
프레퍼들은 위기 상황에서 연방정부나 주정부 등의 공적인 지원 없이도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을 추구한다. 이를 생존주의(Survivalism)로 부른다. 생존주의는 대피시설이나 비축 식량 등으로 전쟁 등 위기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추구하는 것을 인생의 으뜸가는 목표로 추구한다. 이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위해 농장을 운영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집 지하에 핵전쟁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피소를 짓거나 기존 건물이나 지하실을 보강해 시설을 요새처럼 개조하기도 한다.
프레퍼들은 연방정부나 주정부, 또는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만 믿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세상을 ‘국제자본가’라는 이름의 지배계급이 좌우한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정부나 미디어를 좌우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다. 그래서 정부나 지배계급의 힘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지역의 라디오나 인터넷, 자신들만의 공동체 모임에서 들은 말만 믿는 경향을 나타낸다.
정부나 미디어를 기득권의 장치로 보고 신뢰하지 않는 대신 생존법을 스스로 익히고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파멸적 상황이 닥쳐 약탈 등 범죄가 만연할 것에 대비해 전문가로부터 교육을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응급처치용 구급상자 확보는 기본이다. 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구급대원 교육을 자청해 받기도 한다. 무술을 비롯한 호신술을 배운다든지 즉석 무기 제조법, 총기 사용법을 배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총기 단체에 등록해 정기적으로 사격술을 연마하기도 한다.
독특한 것은 오랫동안 보관 가능한 비상식량이나 응급처치용 세트와 의약품, 자급자족용 장비와 용품 등 프레퍼용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도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슈퍼에서 비스킷이나 통조림, 레토르트 식품, 분유 등 건조식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아예 프레퍼용 전문 상품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샘 올트먼·스티브 허프먼 등도 유명 프레퍼
주목할 점은 프레퍼들의 정치적 성향이다. 프레퍼 중에는 미국의 건국 정신에 담긴 저항권이나 혁명권, 자립정신 등을 오늘날에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은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미국 공화당 내 보수파의 정치적 신념이나 성향과 일치한다. 프레퍼 상품 구매자도 이러한 공화당 보수파가 주를 이룬다는 평가가 있다. 소수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리버럴 프레퍼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선 환경오염이나 핵전쟁 등으로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프레퍼는 유명 인사 중에도 당연히 존재한다. 얼마 전 이사회에 의해 해임됐다 곧비로 복귀했던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자신의 집에 총기와 항생제, 방독면, 그리고 골드바를 비치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 것으로 평가되는 챗GPT를 출시한 첨단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창업자이자 CEO도 프레퍼인 것이다.
초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인 레딧의 공동 창업자로 20대에 억만장자가 됐던 스티브 허프먼 CEO는 심지어 자연이나 인간에 의한 아포칼립스적 상황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2005년 레이저로 시력 교정 수술을 받았다고 USA투데이가 보도했다. 허프먼은 뉴요커 잡지에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이용하면 위기 상황에서 화를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인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인 리드 호프만은 뉴욕타임스에 “실리콘밸리 부호들의 절반 이상이 지하벙커 같은 일종의 ‘아포칼립스 보험’을 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숨겨진 프레퍼가 많다는 의미다.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모은 사람은 이를 이용해 지구 종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피난처 마련에 나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저커버그가 하와이에 지구 종말에 대비해 지하벙커를 포함한 거대 시설을 짓는 것은 그의 재산 규모에 비례한 프레퍼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저커버그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커버그는 미국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프레퍼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가진 재산과 영향력, 그리고 정보력을 감안해 대중의 관심이 더욱 강하게 쏠렸을 뿐이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시사저널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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