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독촉한 모과… 이 거목은 알까
2022년 12월1일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관광농원에 있는 모과나무. 가슴높이 나무 둘레가 4.3m에 이른다.
젊은 나무엔 없고 노거수(老巨樹·크고 나이 많은 나무)에만 있는,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물결치듯 굽이굽이 굴곡진 밑동이다. 어린나무의 줄기는 매끈하게 둥글다. 세월이 흐른다. 떡잎 아래에서 원뿌리 외에 수많은 곁뿌리가 물과 양분을 찾아 뻗어나가고 굵어진다. 이런 곁뿌리를 판자를 모로 세운 모양 같다고 해서 판근(板根)이라고 부른다. 물과 양분이 오가는 길인 줄기가 비대해진 곁뿌리를 따라 굵게 발달한다. 이런 노거수의 밑동은 비바람에도 노거수를 지탱해주는 지지대가 되는 동시에 살아온 역사를 증명해준다. 바라보는 사람은 숙연해진다.
2022년 12월1일 오후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신전늪 인근 ㄱ관광농원(펜션)에서 모과나무 노거수와 마주했다. 이날도 철새들이 근처 습지에서 목을 축이며 쉬어갔다. 영하에 가까운 추운 날씨였지만 아낌없이 풍기는 달콤한 향에 몸이 누그러졌다. 이틀 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잎과 열매가 일부 떨어졌지만 여전히 환하게 팔팔한 거목이었다.
키는 보통 다 자란 모과나무와 비슷한 10m가량이지만 밑동 둘레는 6m가 넘는다. ‘나무 크기 가늠자’인 흉고둘레(어른 가슴 높이의 둘레)는 4.3m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모과나무 가운데 유일한 문화재이자 가장 크고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청주 연제리 모과나무’(천연기념물 제522호)의 흉고둘레는 3.3m다.
유일한 문화재 모과나무보다 굵어
열매도 큼지막하다. ‘나무 참외’(木瓜·목과)라는 이름처럼 큰 참외만 했다. 표면에 기름(정유)이 끈끈하게 묻은 낙과를 하나 주워들고 재보니 길이 15㎝에 지름 11㎝였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어물전 꼴뚜기에 빗대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너무 시고 과육에 까슬까슬한 돌세포가 많은 탓에 바로 먹기 어려워서일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굴곡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과나무 특유의 얼룩덜룩 껍질(수피)을 두른 밑동이었다. 촘촘하게 형성된 굴곡은 커튼 주름 같았다. 주름이 크게 진 쪽은 코끼리 다리 근육처럼 튼튼하고 듬직했다. 특히 남쪽으로 굵게 발달한 줄기가 선명했다.
“원래 살았던 곳에 남쪽으로 작은 옹달샘이 있었어요. 모과나무는 물을 좋아합니다. 물을 먹으려고 뿌리가 뻗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굵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옮겨오면서 방향을 맞췄어요.” 농원 주인 박평진(61)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차로 30여 분 거리의 경남 의령군 한 작은 마을에 살았다. 그러다 2012년 12월26일 이곳 신전리로 옮겨왔다. 이식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최대한 뿌리를 살리려고 둘레 5m가량분을 충분히 크게 떴더니 흙 무게까지 총 32t이 나갔다. 대형 건설장비를 옮기는 로베드트레일러를 이용해 전깃줄 등 시골길 장애물을 피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하던 사업이 실패하고 26년 전 고향에 돌아왔어요. 그러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모과나무를 찾아다녔어요. 2010년이었어요. 알고 지내던 분이 의령 어디 마을에 가보라고 했어요. 마을 뒷산 기슭 대밭에 (이 모과나무가) 있었거든요. 처음 딱 봤는데, 어두컴컴한 게 무섭더라고요. 압도당했죠.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큰 나무를 안 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 속 구멍에까지 대나무 8그루가 자랄 정도로 관리가 잘 안돼 있었어요. 자주 갈 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가서 2년간 살폈지요. 구매하려고 보니 소유자가 한 종중이었어요. 처음에는 ‘조상님들 아끼시던 나무’라 안 된다고 했지만 나중에 ‘다들 늙고 관리할 힘도 없다’며 모셔가라 하더라고요. 제사를 올리고 ‘할배(모과나무)요, 세상 구경 가입시다’ 하고 모셔왔습니다. 진짜 우리 할배 모시듯, 거름을 써도 제일 좋은 거로, 매일매일 상태를 살피면서 예를 갖춰 모십니다.” 박평진씨에게 어느 마을인지, 어디 종중인지, 나무 구매비가 얼마인지를 물었으나 “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2022년 11월3일 창녕 모과나무 옆에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 활동가들이 서 있다. 박정기 제공
“다른 노거수 모과나무와 달리 팔팔한 장년”
이날 함께 방문한 박정기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대표와 이 모과나무의 생육상태를 살폈다. △잎이 넓고 많다 △열매가 많고 크다 △도장지(새 가지)가 길고 곧다 등을 들어 나무 상태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식한 나무라 걱정했는데 새 터전에 잘 적응한 것 같네요. 속에 구멍이 생긴 점을 빼곤 썩은 부위도 거의 없고, 국내 모과나무 노거수를 많이 봐왔지만 가장 생육상태가 좋습니다. 다른 노거수들이 노년이라고 한다면 이 나무는 장년으로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있던 곳이 대밭이었다는 건 꽤 큰 마을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차나 술로 즐기는 모과나무를 심었다는 건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고요. 그러다 이제 인구도 줄고 연세 드신 분들만 남게 되니 관리가 안됐다는 거잖아요. 관에서 살펴주는 것도 아니고….”
의령군 인구는 2022년 11월 기준 2만6천여 명으로 경남에서 가장 적다. 이성근 부산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은 “이 모과나무같이 곳곳에 알려지지 않은 노거수가 아직 많다. 지금이라도 정부·지방자치단체가 조사하고 관련 토지를 사들여 노거수들이 살았던 곳에 계속 살도록 제대로 관리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말했다.
지금은 ‘선량한 소유주’를 만나 대접받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이 질문에 박평진씨는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저도 그게 고민이에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나중에 내가 죽으면? 수백 년은 더 살아갈 나무인데….”
이 나무 어르신의 수령이 궁금했다. 박평진씨는 이전 소유주인 종중 쪽에서 들은 말과 다른 노거수 모과나무들과의 비교 등을 근거로 450∼500살 정도로 추정했다. 모과나무는 과일나무 중 드물게 오래 사는 장수목임에도 식재 시기 등이 사료로 남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2022년 12월1일 신전리 관광농원 주인 박평진씨가 모과나무 옆에 떨어진 모과를 들고 서 있다.
“모과나무, 과실수 중 드물게 장수목”
이경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명예교수에게 모과나무에 대해 들어봤다. “모과나무는 더위·가뭄 등을 잘 극복하는 환경저항성이 뛰어난 수종이다. 상처가 생겼을 때 유합조직이 상처를 감싸서 낫게 하는 능력이 특히 좋다. 모과나무에 연리지(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가 잘 생기는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매화 정도를 제외하곤 과실수로 기념식수를 하거나 당산목 등으로 삼진 않는다. 느티나무·소나무·향나무 등과 달리 과실수는 과일을 따 먹고 소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연히 오래 살아 큰 나무가 돼 관심을 갖는 것이지 심을 때부터 기록을 남기진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20년 전만 해도 역사성이 없다는 이유로 과실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최근에 역사성이 부족해도 크거나 나이가 많으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 명예교수는 1997년부터 7년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청주 ‘연제리 모과나무’도 수령이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2000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등록될 때 수령이 ‘300∼350살’로 돼 있었지만 2011년 천연기념물 등재 땐 ‘500살’로 150∼200살 불어났다. 역사적 맥락도 논란거리다. 1455년 단종이 임금에서 끌어내려진 뒤 관직을 버리고 청주 무동(楙洞·모과나무마을·현 연제리)에서 지내던 학자 유윤(柳潤)이 세조의 부름에 ‘이 모과나무(연제리 모과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거부해, 임금으로부터 ‘무동처사’라는 어필(御筆·임금이 쓴 글씨)을 받았다는 내용이 안내판·누리집 등에 쓰여 있다. 하지만 문헌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을뿐더러 ‘어필을 내린 임금’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문화재청은 ‘연제리 모과나무’를 소개할 땐 ‘세조’라고 했지만, 유윤과 관련한 다른 천연기념물인 충남 서산 ‘송곡서원 향나무’(제553호)를 소개할 땐 광해군이라고 했다.
1978년 인근 마을에서 충익사를 ‘의병장 곽재우 유적지’로 성역화하면서 옮겨심은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도 1987년 기념물 지정 땐 280살이라고 됐던 것이 현재 500살로 바뀌었다. 전북 순창 강천사, 강원도 삼척 안의리, 경남 창원 의림사 등등 전국 각지에 수백 살 됐다는 모과나무가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 또한 얼마나 정확할까. 그런데 나이와 근본을 따지는 이 노거수들이 실은 생태적 특징만으로도 충분한 울림을 주는 건 아닐까.
임금이 애타게 찾던 모과, 겨울이 제철
“나는 본시 담증(痰證)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장복하고 있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쌀을 찧는다고 한 개도 올려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속히 파발을 띄워 독촉하라.” <조선왕조실록> 광해 1년(1608년) 10월21일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모과를 애타게 찾는 임금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400∼500살이라면 이때 쓰인 진상품일 수 있다. 모과는 말리거나 꿀·설탕에 재어놓았다가 차로 마시거나 술을 담가 먹는다. 겨울은 ‘임금도 목말라한 모과’를 즐길 제철이다.
참, 모과나무는 벚나무아과로 벚나무와 친척이다. 잎도 안 틔운 상태에서 만개하는 벚꽃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5월 잎사귀 사이사이 핀, 꽃잎 다섯 장 모과꽃도 참 근사하다.
창녕=글·사진 한겨레 21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천연기념물 나무와 농촌공동체
수목문화(樹木文化)는 최고 단계의 문화이고, 천연기념물 나무는 수목문화의 상징이다. 지구상에서 수만년 동안 이어지는 천연기념물 종은 인류 생존의 확실한 증거다. 우리나라에도 200그루가 넘는 천연기념물 나무가 살고 있다. 전국 곳곳의 천연기념물 나무는 대부분 농촌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신목(신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어지는 나무)은 농촌공동체와 운명공동체다. 신목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건강하단 뜻이다.
공동체는 인간 생존의 근간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농촌공동체는 상당수가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 농촌공동체가 붕괴하면 도시공동체도 연쇄적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그래서 농촌공동체를 유지하거나 살리는 것은 나라가 생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농촌 출신이자 농업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농촌공동체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연구하고 있는 나무와 관련해 붕괴 직전의 농촌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유지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깊이 생각하고 있다.
농촌공동체가 위기를 맞으면 신목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전국 곳곳을 다녀보면 신목에 제사를 지내던 풍속이 거의 사라졌다. 신목을 모시려면 신목이 있는 마을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하지만 농촌에선 젊은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연세 지긋한 분들만 살고 계신다. 그분들은 신목을 모신 경험은 있지만 관리할 여력이 없다. 필자는 이러한 광경을 경남 의령에서 확인했다.
경남 의령의 인구는 전국 82개 군 중 70위로, 주민수가 아주 적은 농촌이다. 그렇지만 의령은 천연기념물 나무 1그루 없는 나의 고향 창녕과 달리 4그루의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의령 소재의 천연기념물은 유곡면 세간리 느티나무(제493호)와 은행나무(제302호), 정곡면 성황리 소나무(제359호)와 정곡면 백곡리 감나무(제492호) 등 모두 다른 종류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의령의 감나무 천연기념물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더욱이 의령에는 천연기념물 나무만이 아니라 칠곡면 신포리의 느티나무와 가례면 수성리의 무환자나무 등 상당히 많은 노거수가 살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천연기념물을 제외하면 곳곳에 산재한 이들 노거수는 대부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의령처럼 군 단위에서 4그루의 천연기념물 나무를 소유한 지역은 아주 드물다. 의령에 천연기념물 나무와 노거수가 많다는 것은 예부터 ‘의령(宜寧)’이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다. 아울러 노거수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현재 의령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표다. 필자는 노거수 관리 정도가 지방자치단체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인류에게 가치 있는 삶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려면 살아가는 공간의 장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특히 군민 스스로 공간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없다. 의령처럼 천연기념물과 노거수가 많다는 점은 군 단위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큰 장점이다.
그러나 스스로 장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천연기념물과 노거수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생태의식을 갖춰야 한다. 생태의식은 공동체 스스로 자신이 사는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들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는 나무가 단순히 물질 가치를 넘어 인류가 생존하는 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따라서 농촌공동체의 미래도 나무를 사람처럼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할 때만 기대할 수 있다. 농촌공동체가 나무들과 소통하면 마을도 생기를 되찾을 것이다. 마을에 생기가 돌면 많은 돈을 들여 홍보하지 않아도 스스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나무와 소통하는 간단한 방법은 나무를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거수는 물론 심지어 천연기념물 나무 주위에 농기구나 쓰레기가 난무한다.
숙종 때 경북 영주 금성단 주변의 은행나무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원한이 풀리자 다시 살아났듯이 노거수 주변이 나무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는 날, 농촌공동체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농민신문 20.11.13
기사가 나온 뒤 기자에게 물었다. 이식 전 뿌리내렸던 곳은 아딘지 일 수 없냐고 .. 기자 역시 현 소유주에게 물었지만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관리능력 부재로 나무를 팔아야 했던 의령 어떤 종친회가 그 사실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 든지, 아님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연유가 있겠지만 졸지에 강 건너 창령 남지 성사리로 주소를 바꾼 모과나무는 죄지은 것 없이 그 이력이 삭재된 채 살아야 한다. 나무를 보존 하겠다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말은 바람직하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관할 지자체인 의령군의 노거수 자원 관리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데 의령 가례면 수송리 무환자 나무 역시 대숲에 자리하고 있다. 1982년 지정된 이 나무의 현재 상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두 그루의 무환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보호술 지정된 무환자나무는 수령 300살, 수고 17m, 흉고 3.5m 이며 옆에 수령 200살 흉고 2.45m가 같이 있다. 보전과 관리 나름이다. 때문에 말 못할 저간의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다.
의령 충이가 경내 수령 300살 (수고 12 m 흉고 3.1m 근원부4 m ) 모과나무다. 이 나무 역시 원래 이자리가 뿌리내렸던 곳은 아니다. 본적은 같은 군내 가례면 수성리 당산나무지만 1978년 충익사 정비과정에서 이식되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83호로 지정되었다.
충익사 모과나무도 명함을 내미는데 무리가 없지만 창령으로 뿌리를 옮긴 성사리 모과나무에 비히면 차이가 있다. 이 정도면 천연기념물급으로도 손색없다. 그런데 그런데 이대로 묵히는 일이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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