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2.0 저자 임지현, 우찬제, 이욱연|휴머니스트 |2022.02.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목차
여는 글. 우리 안의 파시즘, 그 후 20년
일상적 파시즘은 어떻게 진화했는가?_임지현
01. 능력주의의 두 얼굴
민주적 공정사회인가, 엘리트 계급사회인가?_이진우
02.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낳은 기득권
한국의 노동시장 불평등은 어디서 유래하는가?_이철승
03.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정치
참여가 대의를 밀어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_박상훈
04. 식민지 남성성과 추격발전주의
한국사회는 왜 기후위기를 직면하지 못하는가?_정희진
05. 너무 익숙해서 낯선 일상적 인종주의
한국에는 정말 인종차별이 없을까?_조영한
06. 주목경제 시대의 주인공, 관종
프로보커터는 어떻게 담론을 오염시키는가?_김내훈
07.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_김진호
08. 천千의 언어, 천千의 대화
부사의 정치학이 낳은 배제와 억압을 넘어서_우찬제
09. 우리 안의 행진곡과 소리의 식민성
청각을 통해 작동하는 일상 속의 파시즘_배묘정
출판사 서평
1. 민주주의는 어떻게 더욱더 퇴보하고 있는가
- 1.0에서 2.0으로 진화한 ‘우리 안의 파시즘’
1999년 여름 《당대비평》에 ‘우리 안의 파시즘’ 특집이 발표되자 한국사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처음으로 ‘민주화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던 시기로, IMF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때였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민주화세력이 사회를 개혁하고 진보로 이끈다는 믿음에 제동을 걸었다.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명망가들의 성추행과 가정폭력 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스며든 지도자 숭배와 복종의 문화,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주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 등을 고발한 ‘우리 안의 파시즘’ 담론은 ‘일상적 파시즘’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파헤쳤다.
그러자 ‘운동의 후퇴국면에서 나타나는 문화주의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연상케 한다’는 비판부터 ‘민중을 파시스트로 간주하고 적으로 돌리는 논리’라는 비난까지 격렬한 반응이 뒤따랐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수없이 좌절되었던 민주화가 정권교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 것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특집을 기획하고 일상적 파시즘을 한국사회의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역사학자 임지현은 이와 같은 반응에서 ‘좋은 헤게모니를 가진 우리’가 ‘나쁜 헤게모니를 가진 저들’을 몰아내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민주화세력의 안일한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만 22년이 지난 지금, 임지현 교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권력의 작동방식이 힘에 의한 강제와 억압에서 내면화된 규율과 동의를 통한 자발적 복종으로 이동했다고 진단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일으킨 의학적 비상사태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의학적 비상사태를 깊이 있게 토론하는 과정 없이 ‘위기’라는 이름으로 모든 논의를 봉쇄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 한쪽은 정부와 입장을 달리하는 쪽에 ‘토착 왜구’라는 딱지를 주저 없이 붙이고, 반대쪽은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행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퇴행을 거듭하는 지금, 우리 안의 파시즘을 다시 한번 낱낱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이처럼 옭아매고 있는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결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미래가 없다. 지난 20여 년 ‘우리 안의 파시즘’이 2.0 버전으로 업데이트되고 진화하는 동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그 후 20년〉
2. 한국사회는 어떻게 ‘진보’의 덫에 빠졌는가
- 불공정과 불평등, 폭력의 기원을 찾아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인 ‘불공정’과 ‘불평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학자 이진우는 능력주의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명암을 조명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합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가 공정하다는 믿음은 사람들이 있는 힘껏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하지만 ‘능력’을 사회적 상승의 절대적 수단으로 생각할수록 더욱 나은 조건을 갖고 있거나 세습하는 엘리트 계급에게 유리해진다. 능력주의가 사회적 지위의 획득 수단에서 기득권의 세습 수단으로 변질된 지금, 누구에게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조건이 확립되지 못한다면 계급 간 갈등이 심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회학자 이철승은 세대 간 갈등이 세대 내 갈등으로 이전되는 양상을 ‘세대-연공-인구 착종’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 연공 임금제(연공제)는 근무기간이 길수록 높은 임금을 주는 제도로 오랫동안 한국의 노동시장을 지배해왔다. 1980년대부터는 전투적 노동조합과 진보 지식인/정당의 네트워크가 결합함에 따라 다시금 정당성을 획득했다. 여기에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동시장의 상층에 굳건히 자리 잡음에 따라 일자리 배분과 임금 분배가 정체되어버리는 문제까지 발생했다. 지금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2030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도 근본을 파고들면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놓여 있다. 세대-연공-인구 착종과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융합 연구자 정희진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폭력의 근원을 우리에게 깊이 뿌리 박힌 ‘식민지 남성성’과 ‘추격발전주의’에서 찾는다. 서구를 따라잡아야 할 모델로 간주하는 한편 남성을 약자로 설정하는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과 자연을 복종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다. ‘근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사회는 구성원을 경쟁과 갈등의 한가운데로 내몬다. 필자는 한국사회가 진보적 시간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추격발전을 멈춰야 이토록 폭력적인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한국 현대사를 지배하는 식민 콤플렉스 또는 제대로 된 국가, 더 나아가 ‘팍스 코리아나’를 향한 의지의 근원은, 기원을 상정한 역사주의에 기반한다. ‘아직은 아닌’이라는 사고방식, 즉 지금 여기의 현실을 부정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미래 지향의 추격발전주의는 성장 신화를 지속시키고 탈성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 정희진, 〈식민지 남성성과 추격발전주의〉
3. 한국정치는 어떻게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는가
- 대중의 정치적 주체화가 낳은 기묘한 모순
우리 안의 파시즘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한국정치다. 편을 갈라 싸우면서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태도는 여전하고, 더 나아가 상대를 비난하고 조리돌리는 행태가 일상적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문재인 정부의 정치 행태를 ‘국민주권 민주주의’로 요약하고 그것이 드러내는 위험성을 낱낱이 살펴본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촛불집회로 결집된 사회적 에너지는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세력이 힘을 합친 만큼 폭넓은 사회개혁을 추진할 만한 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와 집권 여당은 ‘국민주권’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특정 지지층의 목소리를 키워 반대파를 밀어내는 데 힘을 소모했다. 직접민주주의의 당위만을 강조한 결과 정작 시민의 참여가 약화되는 역설도 발생했다. 대의민주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직접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행태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필자의 지적이 쓰라리다.
신학자 김진호는 대중의 정치적 동원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를 ‘정치종교’와 ‘문화종교’라는 개념을 통해 더욱 자세하게 살펴본다. 정치종교는 후발 국민국가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추상적 비전에 헌신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적군과 아군의 종말론적 대결을 통한 파시스트 구원신화를 가리킨다. 한편 문화종교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문화적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 속에서 대중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반동성애 담론을 통해 ‘적그리스도’와 맞서 싸우는 개신교회와 신도들이 대표적이다. 김진호는 대중이 4·19와 5·16으로 상징되는 정치종교 시대를 지나, 6월항쟁을 거쳐 민주화된 지금의 문화종교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결핍에 시달린 나머지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데 앞장선다고 진단한다.
이제 혐오의 정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널리 퍼지고 있다. 연구자 김내훈은 ‘관심’을 통해 팽창하는 주목경제의 시대에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면서 정치적 부족주의가 심해지는 지금 여기의 온라인 담론장을 살펴본다. ‘관종’은 주목경제 시대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를 무단으로 올리며 논란을 확대하는 이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세상을 반영한다. 왜곡된 인정욕구는 위선과 가식에 대한 위악으로 진화하고 냉소주의와 정치혐오로 자가 발전한다. 언론이 제 기능을 잃고 롤모델이 사라진 담론장은 청년세대의 과격화와 대중의 극우화로 이어지기에 너무나 쉬운 토양이다.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며 국민참여를 주도하려 하면 민주정치는 위험에 처한다. 상대를 동료 시민이나 동료 정치인이 아니라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여도 상관없다. 그런 것이 관행이 될 때쯤이면 민주주의는 ‘스트롱맨’의 게임으로 퇴락한다.” - 박상훈,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정치〉
4. 한국문화는 어떻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만을 욕망하는가
- 우리 일상 속에 무심하게 스며든 파시즘의 흔적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든 파시즘은 눈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일상의 감각, 언어, 노래와 같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커뮤니케이션학자 조영한은 한국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인종주의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인종에 무감한지를 드러낸다. ‘다문화’가 대표적으로, ‘다문화’는 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을 라벨링하고 국민으로 편입시키면서도 무심코 배제하는 장치로 작동해왔다. 특히 한국민은 식민통치와 발전국가 시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억압받아왔다는 인식이 강해, 인종 문제는 다민족국가의 일이거나 지극히 폭력적인 사건에 한정된다는 편견을 가져왔다. ‘한류’의 성공에 심취해 자긍심에 사로잡히는 사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인종주의에 물들어 있는지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국문학자 우찬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식의 언어에 숨은 억압 기제를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코로나19라는 의학적 비상사태 속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마스크를 쓰라는 말은 언뜻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지침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무런 조건도 고려하지 말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한 언명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특히 지나친 강조부사와 최상급 표현은 수신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여지를 좁히고 대화의 가능성을 없앤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파시즘적 언어는 우리 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악학자 배묘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교가와 군가에 숨은 식민성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식민통치 시기에 일제는 대중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집단체조와 국민가요를 만들었다. 아이러니는 반식민 투쟁을 펼친 투사들도, 일제의 식민통치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람들도 모두 일제의 가요 리듬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데 있다. 군사독재 시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의 리듬을 딴 건전가요를 만들고, 학교마다 전해오는 교가에 전쟁과 개발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연 지금은 오와 열에 맞춰 나란히 걷기를 강요했던 국민학교 시절의 규율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일상의 파시즘은 이처럼 더욱 진화하고 있다.
“선거철이면 느끼는 것이지만 후보자들은 결국 유권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기에게 표를 몰아줬으면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 강조부사나 최상급 표현 그리고 대조의 수사를 아무런 반성 없이 사용한다면 더욱 의심해야 한다. 일방향적 파시즘의 언어는 결코 먼 곳에 또는 과거에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찬제, 〈천千의 언어, 천千의 대화〉
책속으로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지 35년이 지나 실시되는 대통령선거가 여전히 색깔론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진짜 문제다. 그러니 한국사회의 정치적 공론장에서 진영론이 종교적 주술처럼 횡행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정치의 제로섬 게임은 일상의 오징어 게임으로 재생산된다. 확신에 찬 정치 지도자나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은 이단을 심판하는 중세의 종교재판관처럼 군림하고,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익명들은 1600년 2월 ‘캄포 디 피오리 광장’에서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에 환호하는 로마 군중과 다를 바 없다.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이처럼 옭아매고 있는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결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미래가 없다. 지난 20여 년 ‘우리 안의 파시즘’이 2.0 버전으로 업데이트되고 진화하는 동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여는 글. 우리 안의 파시즘, 그 후 20년」중에서 P. 20~21
완전한 능력주의의 디스토피아를 신랄하게 묘사한 마이클 영에 의하면, 능력주의는 엘리트와 대중이 동의할 때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능력이 지배 원리가 돼야 한다는 데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과 뜻을 모은 만큼 선택의 수단을 트집 잡을 수 있을 뿐, 모든 사람이 신봉하는 기준 자체는 건드릴 수 없었다.” 능력을 결정적인 요소로 보는 인식이 만연하면, 엘리트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고 아무 능력도 없는 다수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다.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를 받았을 뿐이라고 여기며 오만해지고, 실패한 사람은 능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패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승자에게 갈채하고 패자를 조롱하는 태도가 당연해지면, 패자 스스로 자신을 조롱한다. 신분상승의 수단인 동시에 현상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능력주의는 결국 인간의 존엄을 빼앗는다.---「01. 능력주의의 두 얼굴」중에서 P. 40
베이비부머들이 물러가면 이 모든 세대-연공-인구 착종 문제도 해소될까? 그렇지 않다.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사라지더라도 이들이 구축해놓은 정규직 위주의 연공 시스템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 또한 가파른 연공제 사다리가 부여하는 상층 정규직의 수혜를 누리기 위해 극심한 경쟁에 뛰어들 것이다. 따라서 연공제를 중심으로 확대된 불평등의 구조는 다음 세대에도, 또 그다음 세대에도 반복될 것이고 심지어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02.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낳은 기득권」중에서 P 62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며 국민참여를 주도하려 하면 민주정치는 위험에 처한다. 여론동원정치로의 퇴락을 막을 길이 없다. 정치가 권력투쟁의 승자 자리를 두고 극단적인 다툼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함부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상대를 동료 시민이나 동료 정치인이 아니라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여도 상관없다. 그런 것이 관행이 될 때쯤이면 민주주의는 ‘스트롱맨’의 게임으로 퇴락한다. 공존과 타협의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하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치하는 정치인’은 힘을 쓸 수가 없다. 남는 것은 최고권력자로서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의 권력정치뿐이다.---「03.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정치」중에서 P 88
한국 현대사를 지배하는 식민 콤플렉스 또는 제대로 된 국가, 더 나아가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를 향한 의지의 근원은, 기원을 상정한 역사주의에 기반한다. ‘아직은 아닌not yet’이라는 사고방식, 즉 지금 여기의 현실을 부정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미래 지향의 추격발전주의는 성장 신화를 지속시키고 탈성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환경운동이 어려운 이유다.
환경파괴에 완전히 무지/무감각ignore한 한국사회의 자연파괴 지향과 주류중심주의의 근원에는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에 대한 신념이 자리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우리는 미국의 1990년대” “○○은 서울의 1970년대”와 같은 식의 언설이 대표적이다. 한국사회의 영원한 피해의식은 이런 식으로 분출한다.
---「04. 식민지 남성성과 추격발전주의」중에서 P. 103~104
한국사회의 인종주의는 근대 이후 사회진화론적 세계관 속에서 작동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한국인은 인종주의 위계의 상층부가 아닌 하층부에 속했고 서양, 백인 그리고 백인이 되고 싶은 일본을 모방하고 추월하려는 욕망에 강하게 이끌렸다. (…) 대중문화 등 한국에서 시작된 다양한 현상에 ‘K’를 붙일 만큼 자부심이 커진 ‘국뽕’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한국인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일상적 인종주의는 이러한 우월감을 통해 국가주의/민족주의와 더욱 강하게 결속된다. ‘우리 한국인’에게 이로운 집단과 해로운 집단을 구별하는 국가중심주의는 인종주의를 도덕적이고 정당한 요구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05. 너무 익숙해서 낯선 일상적 인종주의」중에서 P. 124
‘일침’과 ‘사이다’의 향연 가운데서 상호존중이 설 자리는 없다. 오히려 상대방을 시원하게 모욕하고 도발하며 ‘연승’을 거둔 사람은 해당 커뮤니티에서 ‘네임드’가 된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이 ‘네임드’의 발언, 공격 대상과 공격의 레토릭에 주목하고 그렇게 천천히 추종자가 된다. 이런 사람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넘어 본격적으로 미디어 전면에 나서면 프로보커터로 성장해 다양한 도발 퍼포먼스로 담론을 오염시킨다. 오늘날 정치와 언론이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포퓰리스트들과 프로보커터들은 또렷한 전선, 절대 악을 상정한 선동과 도발로써 ‘우리’와 ‘그들’을 분리해 정치적 부족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06. 주목경제 시대의 주인공, 관종」중에서 P. 145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고강도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할 때, 대중은 그 불온한 기획에 수동적으로 순응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 시기에 정권의 국민 만들기 기획은 대중의 열렬한 참여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과 ‘자유교양운동’이다. 대중은 생산적인 산업역군으로서 경제적 주체였을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 체제의 ‘국민 되기’에 앞장선 이데올로기적 주체이기도 했다. 요컨대 그 시대를 성찰하는 데 실패한 다수의 대중은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추종하는 ‘작은 독재자들’이었다.---「07.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중에서 P. 156
선거철이면 느끼는 것이지만 후보자들은 결국 유권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기에게 표를 몰아줬으면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조부사나 최상급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장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슬그머니 말을 바꿀 때도 그런 수사학적 책략을 끌어들인다. 유세 현장에서 후보자의 에토스와 로고스와 파토스 전략을 의심하며 성찰한다면, 의미와 소통의 진정성과는 다른 비판적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조부사나 최상급 표현 그리고 대조의 수사를 아무런 반성 없이 사용한다면 더욱 의심해야 한다. 일방향적 파시즘의 언어는 결코 먼 곳에 또는 과거에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08. 천千의 언어, 천千의 대화」중에서 P. 185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군가풍의 행진곡, 행진곡풍의 군가는 규율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담는 그릇의 구실을 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행진곡류의 노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단지 그것이 일본 제국의 통치와 동원의 수단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배 시대의 자기복제 과정을 거쳐 도달한 내면화의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개발독재는 명실공히 ‘군가와 행진곡의 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국가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행진곡풍의 수많은 건전가요들은 대중에게 국가와 민족, 겨레와 동포라는 거대 서사를 위해 끊임없이 전진할 것을 독려하고 있으며, 여기서 개인의 목소리는 손쉽게 소거되고 있다. 군부독재의 시대가 군가와 행진곡의 장려·유행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09. 우리 안의 행진곡과 소리의 식민성」중에서 P. 201
북로그 리뷰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공정 담론의 바탕에 깔린 복잡한 구도를 이철승은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낳은 기득권’에서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퇴조를, 더 나아가 화석화를 우려하고 있다. 전투적 조합주의와 연공서열 고수 전략은 결국 586세대와 청년세대, 정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노동시장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대단히 씁쓸한 이야기지만, 경향신문, 시사인 등 보수, 진보 진영할 것이 줄 곳 다뤄온 문제들이기에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헤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주노조에 들어가는 자체가 특권이 되어간다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뜨거운 연대의 물결이 언제의 이야기일까 싶을 정도다. 그들은 노동귀족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건만, 어느덧 그 귀족 자리를 꿰차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정노동자, 정규나 비정규냐는 본래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안정된 일자리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없이 그저 세금이나 퍼부어대는 일자리는 아예 없애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해야만 유지될 수 있고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부조화들, 여성 혐오와 식민지 남성상, 인종주의
정치학자 박상훈의 글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정치’는 섬뜩하다. 주권독재라는 표현으로 권위주의적 긴급명령권을 강화함으로써 문재인 정권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 전반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비판한다. 직접민주주의 이름으로 국민 참여를 주도할 때 그 순간 바로 민주정치가 위험에 처한다는 경고, 나치즘을 주권독재라고 했던 독일의 나치시대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말이 여운을….
20세대(이대남, 이대녀)의 문화 가운데 여성 혐오, 식민지 남성상이 교차하고 있음을 지적한 정희진의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서구중심의 역사주의 프레임 속에서 식민지 남성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 안 파시즘의 또 다른 장면, 바로 인종주의다. 우리 사회만큼 외국인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곳도 드물다. 출신 국가의 경제력이 그 사람을 대하는 잣대, 기준이 되니 말이다. 조영한은 한국인의 인종주의가 너무 습관적이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운 것이 돼버려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결속 강화되면서 국수로, 이른바 ‘국뽕’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정치교회, 문화교회
그밖에 관종주의와 한 집 건너 하나씩 들어서는 교회, 누군가 농담스레 뼈있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남산에서 시내로 돌을 던지면, 김씨, 이씨, 박씨 중의 하나는 맞을 거라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교회의 첨탑이 그리 많지 않았는지, 교회 이야기는 없었다. 우후죽순처럼 특히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원도심과 신도심이 어울리지 않는 공간 속, 연결점은 교회 건물들이다. 아무튼, 대형교회를 줄 곳 비판해 온 목회자 김진호는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에서 개발독재 시대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겨 대중의 자발적 동원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정치종교, 소비시대 자신의 결핍감을 소수의 다른 이에 대한 혐오감으로 푸는 문화 종교를 구분 지어 설명한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성장기의 뿌리는 남북분단에 기원한다. 서북 출신의 반공주의자들 종교인들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얻어가면서, 하나의 종교 권력으로…. 연일 끊이지 않는 불협화음들, 이 또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bh**on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우리의 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과거 학생운동으로 지칭되던 민주화 세력들의 기득권화가 만든 보수, 그에 항거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의 진보는 시대의 변화, 세대의 변화를 거쳐오면서 다양성의 포괄적 범위내에 존재하지 않고 파시즘적 양상으로 변모해 나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파쇼는 국수주의와 권위주의, 반공적 정치주의 및 운동으로 이미 100여년 전의 사상으로 오늘 우리의 의식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정치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 파시즘은 좌익집단의 모토이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 근원적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소제인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만주주는 가능한가?' 라는 물음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결과론적 의미를 제시하는것이고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된 민주주의 대한 의식의 변절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내 편만 옳다고 느끼고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사회는 공동의 가치인 '함께' 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를 퇴색시키는 역할을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바로 '함께' 라는 다양성의 수용이고 발전이며 가능성을 성장시켜 나가는 일의 일환이고 보면 파시즘의 성장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하나의 벽이라 할 수 있다 ne**orea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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