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고 벼루다 지난 금요일 영화 1987을 보았다. 영화를 먼저 보았던 지인들의 말마따나 내내 눈물이었다. 영화에서 보면 어처구니니 없는 상황에서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 그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누구 말마따나 결코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개봉 달포를 넘어선 현재 관람객 600만을 넘어섰다는 것은 1987년에 대한 진실과 그 시대적 상황이며, 등장인물의 실명에 기초한다고 본다. 물론 1987이 다큐가 아니고 영화라는 것을 전제하긴 한다만 대부분 진실에 기초하여 만들었다. 부족하거나 아쉬운 장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영화 상영 이후 언론에 노출된 다양한 글을 재구성 해 보았다. 글은 SBS 스브스뉴스, 오마이뉴스, 한겨레신문, 뉴스타파, 양심을 지킨 사람들(김형민)을 참조했다. 당시 몇 편의 시를 써 두긴 했으나 30년이 흐른 오늘의 기록이다.
1987년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환 검사는 화장을 막고, 부검을 진행하게 만들었다. 하정우 역의 실존인물이다. 한재동 교도관 역시 영화 <1987>에서 유해진 역의 실존 인물이다. 이를 세상에 알린 기자들도 등장한다. 최초는 중앙일보 였는데 영화에서는 동아일보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한재동은 1986년 5.3 인천 항쟁 배후로 잡혀 와 있던 해직 기자 이부영과 그 쪽지를 교도소 밖으로 전달하던 비둘기 역할을 기꺼이 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최초 검진의사 오연상과 법의학자 황적준 등은 엄혹한 그 시절, 나름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의 용기로부터 1987년이 만들어 진것인지도 모른다.
박종철이 의식을 잃자 다급해진 고문경찰은 중앙대학 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다. 당시 서른 한 살의 의사 오연상이었다.
오 원장의 기억은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께로 거슬러 간다. 그가 일하던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차로 5분 거리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대학생 한명이 죽어가니 긴급 왕진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술을 많이 먹었는지 목이 탄다며 물을 달라고 해 주전자째 마시더니 호흡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어요. 형사들도 황급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형사들의 안내를 받아 대공분실 9호실의 문을 연 순간, 오 원장의 눈에 들어온 건 반대편의 하얀색 욕조와 바닥에 흥건한 물이었다. 오른쪽 낮은 평상에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는 박종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그 순간 형사들의 설명이 사실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오 원장은 이미 숨진 박종철을 상대로 30분간 심폐소생술을 했고, 그 뒤 형사들은 숨진 박종철을 경찰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날 오후 4시께 형사 하나가 다시 오 원장을 찾아왔다.
“사망진단서를 써달라길래 물었죠. ‘사망의 원인을 적어야 하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다. 직접사인, 중간사인을 전부 미상으로 쓸 거다, 그래도 좋으냐’고.” 사인이 미상이면 변사로 처리된다. 검사한테 부검을 청하는 꼴이다. 진단서를 써주고 얼마 뒤 오 원장은 자신의 진료실 옆 화장실에서 그를 찾아온 기자와 만났다. 그가 쓴 ‘사인 미상’이 기자의 눈에 띈 것이다. 기자는 진료실 앞을 ‘감시하던’ 형사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어요. 남영동 갔었느냐, 그렇다. 학생이 죽은 게 사실이냐, 그렇다. 그렇게 사실 확인만 하고 급히 돌아가더라고요.” 다음날 <중앙일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란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린다. 그 다음날 오전 30여명의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오 원장을 감시하던 형사의 제지도 소용이 없었다. ‘물고문’이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오 원장은 자신이 아는 ‘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적극 알렸다. ‘욕조가 있었고 박종철군도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어 있었다. 뱃속에 물이 많이 들어갔는지 촉진해보니 꿀렁꿀렁하더라. 바닥도 물 천지여서 입고 간 가운이 흙탕물에 젖어 빨아야 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가능한 데까지 모두 말하자 생각했어요.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직접 얘기할 순 없으니 뭐든 물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거죠. 예컨대 ‘삽관하고 들어보니 수포음(폐포 내 울혈에서 나는 소리)이 들리더라’ 이런 얘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물고문과 관계없는 의학용어였어요. 다만 비전문가가 들으면 물과 관련돼 있다 생각했을 겁니다.”
마침내 ‘고문치사 기사’가 나간 뒤, 오 원장은 24시간 검찰 조사를 받고 다시 신길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16시간 동안 조사를 받아야 했다.(18.1.10 한겨레)
“얼마전 남영동 대공분실에 갔어요. 박종철 군 영정을 한찬 바라보다 왔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과거에 제가 하던 일도 돌아보게 됐죠. ...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1987년 1월14일 늦은 저녁, 갑자기 치안본부 대공수사관 2명이 사무실로 들이 닥쳤습니다. “수사하던 중 대학생이 쇼크사로 죽었으니 신속하게 처리해주십시오”. ...정식 절차를 밟고 오라 애기하고 하튼짓 못하게 시신보존명령까지 내렸습니다. 85년 김근태 고문사건 86 부천 경찰서 권인숙 고문사건 민주주의 사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거든요. 수사관을 돌려 보내자 청와대를 비롯해 상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한 일이라곤 억울한 화장을 막고, 부검을 공정하게 진행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것 뿐이었습니다.... 박종철군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쳐보려 보려 했지만 군부 정권하에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양심을 지켰던 다른 분들이 없었더라면 진실은 밝혀지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부끄럽습니다. 저는 공직자의 한사람이었고 결국 그를 살해한건 공원력이었으니까요.
....당시 저는 많은 사람들을 구속해야 했습니다. 공안부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해야 했으니까요.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불가피하게 구속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요... 그로부터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제게 1987년은 여전히 뜻 깊으면서,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최환검사
부검이 있었다. 법의학자 황적준이 맡았다. 사인에 대한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
부검결과 조작 지시를 거부하고 일기까지 남긴 당시 황적준 국과수 부검의의 현재(왼쪽). <1987년> 영화 속 그의 모습(배우 김승훈·오른쪽). 한겨레 DB.
1987년 1월15일 박종철 고문치사 최초 보도가 중앙아일보 2단짜리 기사로 나왔다,
활동 당시 윤상삼 기자(왼쪽)와 영화 <1987> 속 윤 기자(배우 이희준·오른쪽). 출처 : 동아일보, 영화 스틸컷
동아일보의 윤종삼 기자는 1999년 43살 나이에 간암으로 눈을 감고, 1987 영화가 나 온 이후 한겨레 신문이 윤기자가 남긴 말로 가상 인터뷰를 했다‘1987’ 특종 윤상삼 기자의 회고 “용감한 보통사람들의 선물”18.1.12
“당시 경찰은 신군부 독재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운동권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박군 사망 사건 이전에도 부천경찰서 소속 문귀동 경장의 권인숙 씨에 대한 성고문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표출됐는데 검찰마저 사건의 진상 규명에 뜻이 없어 분노를 샀다. ‘박군 물고문 살인사건’은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군이 숨진 다음날인 1월15일자 <중앙일보> 2판(1판 신문은 정오께 인쇄됨)의 사회면 2단 기사로부터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이후 사실 확인을 나서 3판(오후 6시 마감)부터 사회면 중간 톱기사로 게재했다. 문제는 박군 사망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부터였다. 방송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대부분의) 신문들도 숨을 죽였다.”
이날 오후6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그 말도 안되는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해명 기자회견을 가졌다.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중배 논설위원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칼럼이 실렸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쪽지만 전달한 것 뿐인데 ...’ 제가 마치 민주화를 이끌어 낸 영웅처럼 나오더라고요. 사실 저는 1987년 그날 이후 지난 25년간 숨죽여 지냈습니다. 군부 독재 정권 아래서 국가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독재정권의 지시를 따르는 게 과연 옳은 걸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게 답을 준 사람이 바로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 형님이었어요. 형님은 5.3 인천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어요.... 그때부터 점퍼 소매 안쪽에 쪽지룰 숨겨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1987년은 공직자가 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준 한해 었습니다. 제 일생을 통틀어 그날의 행동이 가장 잘 일인 것 같습니다. / 당시 교도관 한재동
1987년 1월26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였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 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 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고 했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은 기존의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1987년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정부의 고문 경찰 축소 조작 폭로 발표가 있었다. 고문 가담 경찰이 3명 더 있다며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한 것이다.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면서 박 열사의 고모 박정애 시인과 통화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누나 자나' 하고 문자를 보냈는데 전화가 왔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고 하자 젖어 있는 내 목소리 확인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냈다. 많은 장면들이 택시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쳤다.
'사는 이야기 >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설 연휴 1. 문현동 (0) | 2018.02.18 |
---|---|
2월 (0) | 2018.02.11 |
삼부자 마산행 (0) | 2018.01.05 |
17년 12월 27일 (0) | 2017.12.29 |
수정동 산만디에서 (0) | 2017.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