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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난징대학살,

by 이성근 2023. 1. 21.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미다스북스2014-04

원제 : The Rape Of Nanking (1997)

 

아이리스 장 (Iris Chang) 1968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미국국적의 중국인 2세로 태어나 일리노이주 샴페인 어배너에서 자랐다.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AP><시카고 트리뷴>에서 잠깐 기자로 일한 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26세 때 발표한 첫 책 <누에의 실(Tread of the silkworm)>은 중국의 미사일 프로그램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난징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들으면서 자라난 그녀는 난징의 강간을 악에 대한 메타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거대한 범죄가 잊혀진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한국판 :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_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을 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수도인 난장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폭로한 이 책은 출간된 첫해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60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이리스 장은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다큐멘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난징 희생자들을 위해 싸우는 행동주의자이자 미국 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난징 희생자들이 아직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중국 정부도 대만 정부도 그리고 수많은 역사학자들도 침묵하고 있는 동안 진실을 향한 순수하고 지적인 열정으로 수백만 명의 방관자들 속에서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책을 저술했다.

 

이후 그녀는 취재과정에서 얻은 우울증과 일본 극우세력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2004년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에 남아 있는 수십만 개의 주인 모를 무덤에 바치는 묘비명이라고 명명한 <The Rape of Nanking>은 그녀의 진실을 향한 열정과 가녀린 목숨을 모두 던져 이뤄낸 기념비적인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출판사 책소개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왜 신사를 참배하는가?

지금은 2014년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21세기도 시작된 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도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부정과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독도를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중국과는 댜오위다오 군도(센카쿠 열도)를 두고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해결될 기미조차 없는데 현직 총리 아베는 지난해 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면서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주일미대사인 캐롤라인 케네디 대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실망했다는 표현을 써가며 전에 없이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때만 되면 국제 면의 주요기사나 최소한 가십기사로 등장하는 일본 우파(또는 극우) 지도자들의 신사참배는 왜 반복되는 것인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는 누구의 혼령이 모셔져 있으며, 그곳을 방문하는 일본 우파세력들의 속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일본 개항 이래 계속되고 있는 세계를 향한 침략욕망의 분출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과 침략적 마수의 근성에서 나온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전몰자들의 명단을 보면 너무도 확연하고 분명한 증거가 드러난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된 혼령 가운데 대표적인 A급 전범(戰犯)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만주사변의 주모자이자 일본 육군대신이었다. 다음으로 난징대학살 당시의 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와 일본제국의 육군 장군으로 버마의 도살자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잔인했던 기무라 헤이타로, 중일전쟁의 확대를 유도한 군인이자 전쟁 중 총리가 되어 군사독재체제를 확립한 도조 히데키, 1942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학도병 제도를 실시하고 총리까지 올랐던 고이소 구니아키, 일본제국 해군 장군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령부총장이 되어 진주만 침공계획을 승인했던 나가노 아사미 등 14명의 전쟁범죄자가 그들이다.

 

시간의 힘 속에서 역사는 진실을 드러낸다!

1853년 일본은 도쿄만에 당시로서는 우주선처럼 보이는 검은 증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을 몰고 온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미국의 페리 제독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그 이후 그들은 마음의 칼을 갈고 준비한 이래 2세기 내내 언제나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진출과 침략을 호시탐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야욕은 2011년 일본대륙을 덮친 대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현실적인 공포로 인해 더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반응과 세계의 대응은 피상적일 뿐 본질적이고 근본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자국의 외교적 안정을 위해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책임추궁 없이 일본과 국교를 수립했던 중국은 21세기가 한참 지나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보관 중이던 난징대학살관련 기록들을 지난 2014219일 외신기자들을 부른 뒤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이어서 매년 1213일을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모일로 삼는다고 발표하였다. 물론 2007년부터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도 제작되고 있고, 2009년에는 난징국제위원회의 회장으로 중국판 쉰들러’, 난징 시민들로부터는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린 존 라베(독일명 욘 라베)를 그린 영화도 개봉되었지만 아직 전국민적, 동아시아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는 못하다.

 

일본의 동아시아 혹은 세계침탈의 야욕과 준비는 생생한 현실이지만 그 야만의 침탈 속에서 깊은 상처와 분노의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 각국의 대응은 그저 역사 속의 잊혀진 과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동아시아 각국에서 힘과 권력과 부를 소요한 자들이 지나간 일본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형편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기간 동안 역사를 왜곡할 수는 있지만 오래갈 수는 없다. 시간의 힘 속에서 역사는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단기간 진실이 은폐되고 정의가 짓밟혀도 언젠가는 바로잡힌다는 사실을 이 책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원제 The Rape of Nanking)>을 읽는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 번 20세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나 침략주의자들의 야만적 만행을 확인하고 21세기 현대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선자리의 실체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던 미모의 역사학자는 왜 목숨을 바쳐 진실을 밝히려 했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장래가 촉망되던 미모의 역사학자 아이리스 장이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잔혹한 야만적 사건이었던 난징대학살을 접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그녀의 조부모는 1937년 당시 난징에 있었고, 일본에 점령당하기 직전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했다. 그런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했지만 미국 도서관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전 세계에 걸쳐 학살의 기록을 찾아다녔다. 특히 난징대학살기간 동안 난징국제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독일인 존 라베는 당시 난징 시민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라는 칭송을 받았기에 더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찾았고, 끝내 그의 유족으로부터 방대한 양의 자료(존 라베의 일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참혹한 진실을 담은 사진자료를 구했다. 이 책에 실은 사진자료들은 일본군이 현상을 맡겼던 곳의 중국인 점원이 목숨을 걸고 빼낸 사진자료이다((16장의 사진을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 어떤 이는 사진을 숨기기 위해 난징을 떠나 몇 년간 중국 전역을 방랑했다). 아이리스 장은 이러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꼈고, 피해자들의 진술에 사심없이 자신의 일처럼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살에 빠져든 그녀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기까지 했다.

 

난징대학살21세기 희생자, 아이리스 장!

책이 출간된 후 아이리스 장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장래가 기대되는 차세대 최고의 역사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난징대학살의 진슬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그 책은 그녀의 운명마저 바꿔버렸다. 세계적인 호평과 달리 왜곡과 날조라며 반박한 일본 우익세력들은 아이리스 장에게 메일과 전화, 시위 등의 방법으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충격적인 소재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있던 아이리스 장은 그들의 협박에 공포를 느꼈고, 끝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200411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처럼 난징에 있는 이름 모를 수십만 개의 무덤에 바치는 묘비명이라고 명명한 은 그녀의 진실을 향한 열정과 가녀린 목숨을 바쳐 이뤄낸 기념비적인 역작이 된 것이다.

 

중국과 난징대학살의 생존자들은 사건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아이리스 장의 노력과 열정을 높게 평가하며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장례식 때 난징에 있던 난징대학살 기념홀(지금의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생존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그녀를 위한 추도식을 열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이 확장 개관을 준비하던 2005년에는 그녀를 위한 별관을 따로 지었으며, 현재 그곳에는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미국 버지니아 노퍽에 있는 중국의 정원에는 난징대학살 당시 여성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했던 미니 보트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 가장 최근의 난징대학살 희생자로서 아이리스 장의 기념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결국 목숨과 바꾸고 <The Rape of Nanking>을 남긴 채 떠난 아이리스 장의 혼백 앞에서 후세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우리 스스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가장 참혹했지만 역사에 묻혀버린 난징대학살’, 그 진실의 기록!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19371213, 중국의 수도 난징이 점령됐다. 그리고 6주 동안 근현대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만행이 벌어졌다. 최대 35만의 중국인이 살해되고, 8만 이상의 노소를 불문한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이다. 당시 세계 각국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이 사건은,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묻혀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조차 그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던 난징대학살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이러한 의문을 가졌던 중국계 미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은 진실을 향한 끝없는 집념과 열정을 가지고 천부적인 재능으로 사건을 조사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난징안전지대를 만들었던 서양인들의 기록과 사진을 확보했으며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한 생생한 증언을 비디오에 담았다. 그렇게 해서 1997년에 <The Rape of Nanking>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난징대학살이 관련 당국들의 정치적 이유로 인한 묵인 하에 역사에 묻혔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난징대학살의 진실과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내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출간 첫해에 6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등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영어로 쓰인 난징대학살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로 호평 받았다.

아이리스 장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한 부정의 발언과 축소 은폐하려는 일본의 행동을 보면서 언젠가는 정말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모든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다. 아이리스 장이 항상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는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경고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숨겨졌던 역사의 진실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정당성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에서 아이리스 장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바탕으로 경각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차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_ 아이리스 장을 위한 짧은 묘비명 29

추천의 글 39

여는 글 45

 

1장 난징으로 가는 길 63

 

2장 지옥에서의 683

난징으로 진격하다 | 지휘관이 바뀌다 | 전쟁포로들을 죽여라 | 양민학살 |

일본 기자들의 증언 | 난징의 능욕 | 마쓰이 이와네의 난징 입성 |

위안부, 난징의 유산 | 학살의 숨은 동기들

 

3장 난징, 함락되다 115

 

4장 공포의 6137

살인시합 | 고문 | 강간 | 엇갈리는 사상자 수

 

5장 난징안전지대 165

난징을 구한 나치 | 난징의 유일한 외과 의사 |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

 

6장 난징, 그 진실과 거짓 211

세 명의 미국 기자들 | 파나이 호의 격침 | 일본, 난징을 봉쇄하다 |

미국도 진실을 알고 있었다 | 일본의 여론 조작 | 안전지대 지도자들의 또 다른 전쟁

 

7장 난징 지배 233

 

8장 심판의 날 245

난징전범재판 | 극동국제군사재판

 

9장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 261

 

10장 아시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 281

교과서 분쟁 | 학문적 은폐 | 자기 검열 | 끝나지 않은 논쟁 | 협박 |

여전히 계속되는 역사 왜곡 망언

 

닫는 글 307

부록 321

주요 사건 연표 | 난징대학살 당시의 주요 인물 |

야스쿠니 신사 A급 전범 합사 | 일본의 난징대학살에 대한 반응 부류

333

감사의 글

 

책속에서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들의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 일본은 이런 일반적인 기대를 배신한 나라이다. 전쟁 직후 전범재판에서 몇몇 지도자가 유죄 선고를 받았음에도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자신이 저지른 악몽과 같은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도덕적인 심판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 때문에 일본은 또 다른 전쟁 범죄의 주모자가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의 경고처럼, 대학살을 잊는 것은 두 번째 학살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책을 계기로 다른 역사 학자들과 작가들이 난징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조사하길 바란다. 그래야만 매년 그 수가 줄어들어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져버릴,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내가 더욱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책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본이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늘 조지 산타야나의 경고를 마음 깊이 새겨두었다.P. 61-62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그때 군인들 사이에 이상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가장 빨리 포로들을 죽이는가 하는 경쟁이었다. 한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누구라도 도망가면 총격을 퍼붓겠다는 듯 보초를 섰다. 나머지 여덟 명의 병사는 두 명씩 네 팀을 만들었다. 한 병사가 포로의 목을 베면 다른 사람이 잘린 머리를 한쪽에 쌓아 올렸다. 공포에 질린 포로들은 자신의 동료가 차례로 쓰러지는 것을 보며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죽이고 수를 세고, 죽이고 수를 세고.” 탕슐산은 이 살육의 속도를 기억하기 위해 속으로 되뇌었다. 일본군들은 웃으며 살육을 했고 한 병사는 사진도 찍었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탕슐산은 기억한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도망갈 수도 없고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 연인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탕슐산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두 줄 앞에 서 있던 임신부가 자신을 무리에서 끌어내 강간하려는 일본 병사와 사력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병사는 그녀를 죽이고 대검으로 배를 갈라 내장뿐 아니라 꿈틀거리는 태아마저 꺼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때야말로 함께 저항할 때라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비록 저항하다 모두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탕슐산은 생각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포로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슬프게도 그 죽음의 구덩이 앞에 서 있던 중국인들 가운데 오직 그 여인만이 가냘픈 용기라도 보여주었다고 탕슐산은 기억한다. P. 143-144

 

여성의 강간은 가족 전체의 몰살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난징에서 일어난 이런 끔찍한 사건들을 기록해두었다. 19371213, 30명의 일본군이 난징의 남동쪽에 있는 싱 루 카오 5번가에 침입했다. 집주인이 문을 열자 병사들은 그를 죽였다. 이 집에 세든 샤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발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다. 집주인의 부인이 남편을 왜 죽였느냐고 묻자 일본군은 그녀에게 총을 쏘았다. 일본군은 한 살짜리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샤의 부인을 강간한 다음 대검으로 찔러 살해하고 성기에 향수병을 찔러넣었다. 갓난아기 역시 대검으로 살해했다. 병사들은 옆방으로 가서 샤의 부모와 두 딸을 찾아냈다. 손녀를 보호하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고 열여섯 살과 열네 살인 두 딸은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여덟 살인 샤의 셋째 딸도 침대 담요 밑에 숨어 있다가 대검에 찔려 큰 상처를 입혔다. 셋째 딸과 함께 숨어 있던 넷째 딸은 침대 담요 밑에서 질식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의 산소 부족으로 뇌가 손상된 샤의 넷째 딸은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P. 151

 

_약탈과 방화로 도시 곳곳에서 식량이 부족했다. 피난민들은 진링 대학 잔디밭에서 쑥부쟁이나 미역취 같은 풀을 뜯어먹거나 야생 버섯 등으로 연명했다. 안전지대 지도자들도 굶주림으로 고생했지만 피난민들에게 쌀을 무료로 나눠주었고 두려움으로 집을 나오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달해주었다.

_책벌레인데다가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안전지대 지도자들은 강간범, 살인자, 약탈자를 상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경찰을 보호했고 불 속에 뛰어들어 중국인을 구했으며 여자를 못살게 구는 일본군을 때려눕혔고 대포와 기관총을 몸으로 막아 발포를 중지시키기도 했다.

_이런 과정에서 국제위원회 위원들은 총상을 입기도 하고 주먹에 맞거나 총검에 찔리기도 했다. 난징 대학의 농기계학과 교수인 찰스 리그스는 중국 민간인을 군인으로 몰아 처형하려는 일본 장교를 막으려다 부상당했다. 화가 난 일본군 장교가 칼을 뽑아 세 번이나 위협하다가 주먹으로 리그스의 가슴을 내리친 것이었다. 마이너 베이츠 교수 역시 권총으로 위협당했고 세 명의 소녀를 덮치려는 일본군을 발로 차버린 윌슨 역시 총상을 입을 뻔했다. 일본인은 매칼럼과 트리머에게 총을 발사했지만 다행히 빗나갔다. 베이츠 교수가 일본군 사령부를 찾아가 대학 부설 중학교의 학생을 끌어간 일에 대해 묻자 일본군이 그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의 표식으로도 이런 수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라베의 기록에 따르면, 1122일 술 취한 일본군의 칼에 희생될 뻔한 중국인을 구하려다 크뢰거와 하츠라는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하츠는 의자로 자신을 보호했지만 크뢰거는 심하게 구타당했다.

_안전지대는 20~30만 명 정도의 피난민을 수용했다. 이는 난징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된다.

이 수치는 난징의 강간에 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으로 난징 인구의 절반 정도가 학살 전 도시를 빠져나갔고 남아 있던 사람 중(60~70만 명 중 난징 함락 당시에는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35만 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절반 이상이 살해된 것이다.

난징 인구의 절반이 안전지대로 피신했다고 보면 안전지대로 피신하지 못한 사람은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P. 208-209

the rape of nanking.

 

'100인 목베기', '생체실험' 알린 작가 죽음, 일본 극우의 타살이다

너무나 잔인하고 엽기적인 난징 대학살

이즈음 일제의 징용과 노동 착취에 희생됐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새삼 뜨겁다. 일본 쪽에선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미 그 문제는 끝났다는 오랜 괴변을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지난날 저질렀던 전쟁범죄는 '과거사'란 이름으로 21세기 오늘에까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다.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는커녕 부정하는 일본 쪽의 고집스런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일본이 부인하는 전쟁범죄 현장 가운데 하나가 중국 난징(南京)이다. 19371213일부터 6주 동안 난징에서 벌어졌던 대학살은 워낙 끔찍했기에 20세기 전쟁범죄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인구 100만 명이 살던 도시에서 무려 30만 명이란 희생자 규모도 규모려니와, 살해 방식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칼로 잇달아 목을 베 죽이고, 생매장해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강간한 뒤 죽였다.

 

야만과 엽기라는 잣대로 보면,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질렀던 잔혹행위는 인류 전쟁사에서 그 어느 전쟁보다도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권을 비롯해 일본 각계에 뿌리내린 극우파들이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완전 허구의 소설이다"라며 부인한다는 점이다(그래서 일각에선 이들을 '허구파' 또는 '부정파'라 부른다). 그들은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겐 협박이나 과격행동도 서슴지 않아왔다. 2004119일 미 캘리포니아주의 외딴 고속도로 갓길에서 권총 자살한 아이리스 장(Iris Chang)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일본 극우파들의 협박에서 비롯됐다.

 

누가 아이리스 장을 죽였나

1997년 갓 서른 살의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중국명은 장춘루)<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으로 단박에 화제의 인물이 됐었다. 그때껏 영어로 된 난징 대학살과 관련된 대중적인 책은 드물었기에, 특히 전쟁과 같은 어두운 과거사에 딱히 관심이 없던 서구 사회의 젊은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논란이 일자, 극우파들이 은밀하게 나섰다. 전화, 편지, 이메일 등 여러 수단으로 협박을 했다. 그녀의 차 앞 유리창에 쪽지를 두고 가기도 했다.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면서, 남편과 두 살 난 아들을 둔 그녀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거나 전화 도청을 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인들에게조차 그녀가 어디로 오고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던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약물로 우울증 치료를 받는 상황에 내몰렸다. 끝내는 새벽에 혼자 차를 몰고 집을 나와 고속도로 갓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식은 자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살이 아닌 타살에 가깝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극우파들이 그녀를 죽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주미 일본대사에게 '유감' 말고 '사과' 요구

<난징의 강간>이 입소문을 타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미국의 언론들도 관심을 쏟게 됐다. PBS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업광고나 오락성 프로를 하지 않는 공영방송의 성격을 지닌 PBS는 미국과 유럽에서 특히 지식층이 즐겨보는 채널이다. 책이 나온 1년 뒤인 199812월 난징 학살 61주년을 맞이할 즈음 PBS는 저녁 뉴스 시간대에 아이리스 장과 쿠니히코 사이토 주미 일본대사 사이에 짧은 화상 토론 자리를 마련했다.

 

사이토는 일본의 직업외교관이 아닌 정치인 출신으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4년 동안 워싱턴에서 주미 대사를 지냈다. 그 무렵 뉴욕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고 있던 필자는 집에서 PBS 뉴스를 듣다가 그 토론을 지켜보게 됐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 하나. 사이토는 난징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진지하게 사과를 하지 않는 교활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아이리스 장이 사이토를 향해 돌직구를 날렸다.

 

: 무엇보다 먼저 일본은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과(apology)와 함께 희생자들에게 배상(reparation)을 해야 하죠. 아울러 (난징 대학살에 관련한 서술을 왜곡 또는 축소하도록 만드는) 일본 교과서 검정을 멈춰야 합니다.

사이토 :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폭력으로 말미암아 불행한 일(unfortunate incidents)이 벌어졌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 그런 말은 전적으로 정확하지 않아요. ‘사과라는 단어를 들어보질 못했어요. (PBS 방송 진행자를 향해) 당신은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요. (일본 대사가) ‘일본군이 한 짓에 대해 개인적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진심으로 말했다면,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유감’(regret)이니 회한’(remorse)이니 불행하게 일어난’(unfortunately happen) 따위의 용어는 사과가 아니지요.

일어 번역본은 없는데 비판서가 베스트셀러

<난징의 강간>은 출간 뒤 단시일 안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동아시아 3국에서 가장 일찍 번역본을 낸 곳은 중국으로, 1998년 번역본이 나왔다. 한국에는 이 책의 초판 번역본이 1999년과 2006년에 나왔고, 2014년 제목이 조금 바뀌어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으로 나왔다. 지금은 미국 출판사와의 계약이 끝나 절판 상태로 일반 서점엔 책이 없다.

 

문제의 일본에선 번역본 출간을 둘러싸고 엄청 시끄러웠다. 극우파들은 반일위서(反日僞書)라며 출간을 막으려 들었다. 협박을 견디다 못한 출판사가 책의 일부 내용을 고치자고 옥신각신하다 계약이 파기됐다. 2007년에야 일어 번역본이 나왔다. 10년 사이에 <난징의 강간>을 비판하고 전쟁범죄의 진실을 왜곡하는 책들이 엉뚱하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괴이한 현상이라고 봐야할까.

아이리스 장이 죽은 뒤 중국 난징대학살기념관에 세워진 조각상. xli

 

100인 목베기, 성폭행, 생체실험...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45일 동안 난징 시민들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군은 포로로 잡은 중국군(당시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군)을 양쯔강변에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했다. 일본군 장교들은 군도로 누가 빨리 더 많은 포로의 목을 베느냐며 ‘100인 목 베기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길 가던 민간인들도 붙잡혀 생매장 당했다. 한마디로 온갖 잔혹한 전쟁범죄들이 한꺼번에 난징에서 저질러졌다.

 

아이리스 장이 고발한 일본군의 전쟁범죄상은 너무 끔찍해 글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거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절단하거나 여러 명씩 묶은 채 구덩이에 넣은 다음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거나 수백 명을 연못으로 끌고 가 알몸 상태로 살얼음이 언 연못에 빠뜨려 죽이거나 허리까지 땅에 파묻고 사나운 개를 풀어 물려 죽도록 했다. 이렇듯 일본군의 만행은 잔인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성폭행도 심각했다.

 

재미로 목 베기 살인 시합을 벌였던 것처럼 일본군은 재미로 강간과 고문을 일삼았다. 난징의 거리 곳곳에서 다리를 벌린 채 죽어있는 여자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강간 후 여성의 성기에 병이나 나무막대를 꽂아놓기 일쑤였다. 남자들 역시 일본군의 비웃음 앞에서 온갖 치욕을 겪어야 했다. 죽은 여자의 시체를 범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을 거부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한 여성을 윤간한 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중국인 승려를 잡고 그 여성과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했다. 승려가 거절하자 일본군은 그의 성기를 자른 뒤 살해했다.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다스북스, 153-154)

 

위에 옮긴 글처럼, 장의 책에서 평정심을 유지한 채로 읽기가 힘든 곳은 갖가지 성범죄 실태를 고발하는 대목이다. 저자 자신도 "난징의 강간은 역사상 가장 엄청난 집단 강간으로 기록될 것"이라 말한다. 적어도 2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의 난징 여성들이 성범죄에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1990년대 전반기 보스니아 내전 당시에도 심각한 성범죄가 벌어졌고, 2만 명쯤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보스니아보다 60년 앞서 난징 여성들은 죽음보다 더한 시련을 겪은 셈이다.

 

강간당한 여성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양쯔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아기들이 태어나자 바로 죽였다. 이들 두고 장은 책에서 수치심과 자괴감에 시달린 중국 여성들은 사랑할 수 없는 자식을 기르느니 차라리 영아 살해를 선택했다라고 풀이했다. 중국은 1213일을 난징 대학살 국가 추모일로 정하고 해마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지도층이 참석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일본군의 또 다른 잔혹상은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생체실험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양쯔강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을 실험실로 바꿔 유행성 질환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1644부대를 운용했다. 이 부대원들은 중국인 죄수나 포로에게 독극물, 세균, 독가스를 주입하면서 신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됐고, 시신들은 부대 소각장에서 처리됐다. 1644부대는 생체실험을 통해 세균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731부대(하얼빈 소재)와 판박이다.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매장 당하는 난징 시민들.

 

난징재판과 도쿄재판

 

일본이 패한 뒤 난징 학살에 대한 전범재판이 벌어졌다. 범죄 현장인 난징과 일본 심장부인 도쿄에서였다. 난징 재판은 19468월부터 194712월까지 이어졌다. 피고는 몇 명 안됐지만, 1000명이 넘는 중국인 피해자들이 증인으로 나와 460여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대해 증언했다. 칼로 목베기 시합을 벌였던 일본군 장교 2명이 피고석에 섰고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두 피고는 구차한 변명과 거짓말을 늘어놓아, 법정을 메운 방청객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난징에서의 전쟁범죄로 처벌 받은 일본군 고위장성은 둘뿐이다. 하나는 일본군 6사단장 타니 히사오 중장으로, 일본에서 강제 송환돼 난징 법정으로 불려나와 총살형을 받았다. 그의 처형 모습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난징 남쪽의 형장으로 몰려갔다. 다른 하나는 일본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겸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지냈던 마쓰이 이와네 대장이다. 그는 도쿄에서 열렸던 극동국제군사재판 뒤 교수형으로 죽었다.

 

난징 전쟁범죄로 처벌 받은 고위 책임자가 일본군 장성 2명뿐이라고?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난징의 강간>의 저자 아이리스 장도 난징 강간의 주요 범죄자들과 그 살육을 막기 위해 권한을 행사했어야 할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고 탄식한다.(253)

 

히로히토는 학살 책임 없다?

법정에 불려가야 마땅할 전범자 가운데 하나가 일본 국왕 히로히토의 삼촌뻘인 아사카 야스히토다. 그는 마쓰이 이와네가 폐결핵으로 몸져눕자, '사령관 대리' 직함으로 지휘권을 물려받고 난징 점령을 지휘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전쟁범죄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도쿄재판에 불려가지 않았다. 패전국 일본 통치의 전권을 휘둘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 지배층에게 선물해준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족에 대한 면책권' 덕분이었다.

 

일본 국왕 히로히토는 난징 학살에 책임이 없을까. 아이리스 장도 <난징의 강간> 끝부분에 그런 의혹을 던진다. 난징 대학살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 중국 본토, 진주만과 동남아에서 저질렀던 침략 전쟁에 책임을 지고 도쿄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섰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히로히토(1901년 생)1989년 사망 때까지 '천황'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다음 주 글에서 좀 더 살펴본다).

 

오히려 히로히토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거론했던 소수의 일본인들은 극우파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아이리스 장이 협박을 받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테면,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는 히로히토 사망 2주 뒤 바로 등 뒤에서 쏜 총알로 폐를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 총격 사건은 "난징 학살 따윈 없었다"는 일본 극우파의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난징 법정에서 총살형이 선고된 타니 히사오 일본 육군중장.

 

나는 전범자였다참회의 목소리들

 

난징 학살 자체가 없었다고 우기는 극우파들과는 달리, 자신의 전쟁범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뜻을 밝힌 일본인들이 없지는 않다. 1954년 랴오닝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용됐던 전 일본군 소령 오타 하사오는 난징에서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한 뒤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밝히는 44쪽 짜리 고백서를 써냈다.

 

이에 따르면, 19371215일부터 사흘 동안 양쯔강에 내다버린 시신은 오타의 부대가 19000, 다른 부대가 81000, 또 다른 부대가 5만 구 등 모두 15만 구였다고 한다. (아이리스 장, 161. 오타가 수용됐던 푸순전범관리소는 점진적인 사상 개조를 통해 일본인 전범 가운데 다수를 반전 평화주의자로 바꾸었다. 푸순에 대해선 김효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서해문집 참조하기 바람.)

 

난징 학살 당시 일본군 16사단 20연대 소속 상등병으로 있었던 아즈마 시로는 1987<아즈마 시로 일기: 소집병이 체험한 난징 대학살>이란 체험기를 통해 그날의 끔찍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중국 난징에서 열린 대학살 50주년 추도식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중국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의 체험기 내용을 둘러싸고 옛 전우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당했고, 일본 극우파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난징과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만주 731부대 소속 소년대원(미성년 군속으로 업무 보조역)이었던 시즈오카 요시오도 양심 고백을 한 인물이다. 731부대에서 죽은 쥐와 벼룩을 이용해 세균무기로 쓰일 세균 배양 작업을 거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푸순전범관리소에 갇혔다가 1956년 풀려나 귀국했다. 그 뒤로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 모임 등을 통해 일본이 중국에서 저질렀던 죄행은 피해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고 무겁다며 사죄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김효순, 410-412쪽 참조)

 

앞서 살펴본 아즈마, 시즈오카 두 사람은 1998년 일본 평화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지난날 일본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려 했다. 하지만 전쟁범죄자란 이유로 시카고 공항에서 미국 입국이 거부당했다. 미 법무부 특별수사국의 입국 금지 명단에 오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전쟁범죄를 고백해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 열린 뉴욕 행사장에는 아이리스 장이 나와 인사말을 했다.)

 

이를 두고 당시 <뉴욕 타임스>이들의 전쟁범죄 고백이 일본에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는데도, 미국에서 입국 감시자 명단에 오른 것은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극우파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은 사람들이 입국을 거부당하다니...누구를 위한 입국 금지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본 극우파들의 영향력은 지금도 미국이나 한국에서 알게 모르게 작동하고 있다.

 

끝으로 다시 짚어보는 물음 두 가지. 첫째, 일본 국왕 히로히토는 어떻게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지지 않고 천황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가. 둘째, 그가 전쟁범죄의 책임을 지지 않았기에 전후 일본에 생겨난 심각한 문제점은 무엇인가. 다음 주 글에서 이런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보려 한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프레시안 23.1.21

 

난징 고발 아이리스 장 자살 일본우익 협박때문

뉴욕대 추이밍후 주장

지난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17번 고속도로 길가에 세워 둔 자기 차 안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된 난징의 강간(한국판 난징 대학살)의 지은이 장춘루(36·미국명 아이리스 장·사진)가 일본 우익의 끈질긴 협박으로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주장은 13일 뉴욕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에서 과거 그를 인터뷰한 추이밍후이 뉴욕대학 영화과 주임이 제기했다고 중국 관영 법제만보15일 보도했다.

 

지난해 장을 인터뷰한 추이는 장이 난징의 강간을 출간한 뒤 일본 우익으로부터 끊임없는 협박 편지와 전화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계속 전화번호를 바꿔왔다고 증언했다. 장은 친구들과도 전화 대신 이메일로만 소식을 주고 받았고 가까운 사람들한테조차 남편과 아들 소식을 말하지 않았다. 추이는 장이 줄곧 공포 속에서 생활해왔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결국 자살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대만 출신 미국 이민 2세 작가인 장춘루는 199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심도 있게 추적한 난징의 강간을 출간해, 세계가 중·일전쟁 때 일본의 만행에 주목하도록 만들었으며, 당시 일본 우익들의 심한 반발을 불렀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2004.11.16.

Documents on the Rape of Nanking Paperback 난징 페이퍼백의 강간에 관한 문서

저자Brook, Timothy (EDT) 출판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발행1999.12.03.

 

The Making of the Rape of Nanking: History and Memory in Japan, China, and the United StatesHistory And Memory in Japa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난징의 강간 만들기: 일본, 중국, 그리고 t에서의 역사와 기억

저자 Yoshida, Takashi 출판 Oxford Univ Pr 발행 2021.01

 

American Goddess at the Rape of Nanking The Courage of Minnie Vautrin난징의 강간을 당한 미국의 여신 미니 보트린의 용기

Hu, Hua-Ling |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 200003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시를 잔혹하게 점령한 것은 "난징의 강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침략 군인들은 2만 명 이상의 여성들을 강간했고, 일부는 8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후화링은 일본에 대한 확고한 저항으로 만 명의 중국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녀가 섬기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전설이 된 미국인 선교사 Minnie Vautrin의 놀라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여기에 제시한다.

중국에서 "살아있는 여신" 또는 "자비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된 바우트린은 외국 기독교 선교회에 가입했고 1912년 중국 민족주의 혁명 동안 중국으로 갔다. 난징에 있는 긴링 대학의 학장으로서, 그녀는 중국 여성 교육을 홍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그녀의 삶을 바쳤다.

 

19377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바우트린은 도시를 철수하라는 미국 대사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12월 난징 함락 이후 일본군들은 살상, 불태우기, 약탈, 강간, 고문 등의 난동을 부리며 도시를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들었다. 점령 4일째 되는 날, 미니 바우트린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이 도시에서 저지르지 않은 범죄는 없을 것이다... , 하나님, 난징의 병사들의 잔인한 야수성을 통제하십시오."

 

일본군이 바우트린에게 캠퍼스를 떠나라고 명령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여기는 나의 집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 피투성이가 된 총검이 그녀의 얼굴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Vautrin은 대학의 문 뒤에서 망명을 요청하는 절망적인 중국인들을 보호했다. 19383월 포위전이 끝난 후, 바우트린은 일본군에 저항하고 피난민들을 돌보며 기진맥진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 남편과 아들들을 찾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가난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고 그녀의 제한된 원천이 신성시되는 난징의 아이들에게 허용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다.

 

1940년 마침내 신경 쇠약을 앓은 바우트린은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1년 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후 주석은 1919년부터 1941년까지 바우트린의 서신과 공성전 기간 동안 유지된 일기, 중국, 일본, 미국의 목격담, 정부 문서, 바우트린의 가족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녀의 전기를 작성한다.

 

 

Purple Mountain: A Story of the Rape of Nanking 보라색 산: 난징의 강간 이야기 Qi, Shouhua | Createspace | 201005

 

8월의 기억여행, 난징대도살기념관 그리고 아이히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갈수록 무더워지는 이 여름, 43평화재단의 난징기념관 견학단에 끼어 2003년 방문에 이어 두 번째로 난징을 찾을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난징기념관의 방문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특히 폐허의 건축물 잔해로 총검의 형태를 본떠 만든 거대한 조형물에 선명히 박힌 300,000이라는 검은 글씨와 기념관 입구의 천여 구의 난징대도살 당시 희생자들의 뼈들로 이루어진 만인갱’, 마치 한라산 고목의 뿌리들이 얽힌 것처럼 반쯤 발굴하다 보존한 뼈와 뼈로 이루어진 시신들(물론 그것과 같은 장면은 제주에도 있었다. 바로 정뜨르비행장 43유해발굴의 현장에서). 그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2007년 난징기념관은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18개월간의 보수와 정비 작업을 마치고 기념관을 확장 개관했다. 대대적인 증개축을 하고 전시기법도 아주 세련된,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만큼이나 괄목할 만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이미 다녀온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지 오래다. 그래선지 기념관 방문을 앞두고 약간은 들뜬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4.3평화기념관과의 꽤 질긴 인연으로 인해, 국가폭력이나 양민학살을 다룬 기념관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듯, 또는 비슷한 사건을 다룬 기념관들은 남의 일 같지 않아선지 꽤 유심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2005MBC의 창사특집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던 <세계를 뒤흔든 순간-난징대학살> 3부작을 다시 보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내 기억 속의 잊혔던 난징의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와 함께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난징난징>과 중국판 쉰들러였던 독일인 실존인물 욘 라베의 이야기를 다룬 <존 라베(영어식 이름)> 등이 함께 떠올랐다. 다큐는 난징대학살의 이야기를 1, 2, 3부에 걸쳐 다루면서 난징의 문제를 영어로 출간한 난징의 강간의 저자 아이리스 장의 스토리와 뜻밖의 자살과 파장을 다루고 있다.

 

2부는 진실게임으로 아이리스 장으로 인해 촉발된 난징대도살의 실제들을 파헤친다. 특히 일본의 부정파들의 견해와 참전군인들이 남긴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 파장을 다룬 것으로 일본 내 우익군국주의자들의 치졸하고 옹색한 변명과 궤변을 다룬다. 3부는 증언-1937년 겨울로 난징전 참전군인들의 인터뷰와 중일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엮어간다.

 

이미 보았던 다큐를 되새김하는 터라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이번에 보면서 새삼 놀라운 것은 한 가지는 여전히 진실과 사실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괴물들(?)’의 존재였다. 특히 90세가 넘은 일본 농촌의 평범한 촌로들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이 전범재판 당시 뱉었던 말을 똑같이 내뱉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사진 속의 일본군들은 분명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금, 90세에 이른 그들은 여전히 정겨운 촌로들이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이라고 해서 모두 죽였어!(난징전 참전 사병 33연대 12중대) 다 죽이라고, 모든 집을 태워버리라고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불을 질렀지! 우리는 명령을 받고 움직였으니까 하기 싫더라도 어쩔 수 없었지.(난징전 참전 사병 15사단 33연대) 중국인의 희생은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난징전 참전 15사단 33연대 6중대)

 

나는 톱니바퀴 하나의 이에 불과했다.(아이히만)

 

분명 19371213일부터 19381월 말까지 6주 동안 30만에 달하는 중국인을 도살한 학살기계였던 그들, 그 광란의 학살극의 주인공들이었던 그들. 명령은 위에서 내렸지만, 그 악의 잔치에서 광기에 도취되어 대학살의 역사를 연출해 낸 그들의 주둥아리에서 내뱉는다는 말이 고작 그렇게 하라니까 했을 뿐이야.(우리는 죄 없어!)”라니.

 

그 선한 눈빛과 착한 노인들이 젊은 날 자신의 손끝으로 30만을 절명으로 몰아갔던 그 불지옥의 기억을 이렇게 간단히 넘어서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저 악마적인 확장 가능성이라니. 한나 아렌트가 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보면서 그를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매달렸는지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 아시아의 8

-‘아이리스 장이야기와 책임지지 않는 제국, 변명하는 일본

난징기념관에 세워진 아이리스 장의 반신상. 손에는 난징의 강간이 들려 있다.

 

8월은 동아시아의 제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는 특별한 달이다. 바로 근대의 초입에 만난 20세기의 끔찍한 경험과 기억 때문이다. 또한 일본들에게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다. 열강들의 각축의 시대, 탈아입구를 모토로 그야말로 욱일승천하던 제국 일본이 침몰한 달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중국대륙과 인도차이나 그리고 일본 열도에 유사 이래 최악의 트라우마를 남기고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193911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신호탄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5월에 유럽에서 먼저 총성이 멎었으며, 급기야 19458월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두어 줄에 서술된 그 기간, 인류는 역사상 전 지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 후 43에서 시작된 또 다른 더 가혹한 전쟁의 시대와 냉전이라는 늑대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어쨌든 8월이면 아시아의 나라들은 이런저런 기념식과 기억의 제의들을 치러야 하며, 그 와중에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193712월과 193816주간의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의 기억을 마주해야 한다.

 

이 사건의 전말을 전 세계에 부각시켰던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리스 장(장춘루어/张纯如)은 난징대도살에 대한 책을 남겼다. 바로 난징의 강간-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윤지환 옮김/미다스북스)>로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서문을 보자.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그 연대기는 길고도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난징대학살에 비견될 만한 정도와 규모를 지닌 사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또한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 600만 명이라 하고, 스탈린은 4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였지만, 이것은 몇 년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단 몇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국의 한 도시에 지나지 않는 난징의 사상자 수는 제2차 대전 전체를 놓고 볼 때, 유럽국가 전체의 사상자수를 능가한다.

 

사실 난징대학살의 희생자를 최대 26만 명에서 최대 35만 명으로 잡는다 해도 이 수치는 미군의 도쿄공습보다 많고 전쟁막바지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 때보다도 많다.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2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적었다. (난징의 강간중에서)

 

난징의 강간은 아이리스 장이 <난징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난징대학살 6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조부모가 학살을 피해 탈주했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난징대학살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조사에 기초해 서술했다. 또한 일본군의 난징점령기간 동안 무력에 의해 중국인들에게 자행된 잔혹한 범죄행위를 담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쓰기 위해서 2년 동안 자료조사와 수집에 매달렸다. 또한 난징대학살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난징을 방문하기도 했다. 조사과정에서 그녀는 미국선교사의 일기와 독일인의 일기, 일본 퇴역병의 고백, 저널리스트들의 글들, 당시의 자료들, 당시 난징의 현장을 기록한 존 마기(Jhon Magee)의 영상물 등 생생한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장은 일본에서 조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는 후에 그녀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아이리스 장의 조사자료 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두 사람의 일기였는데, 첫 번째 일기는 독일 나치당의 일원이자, 비군사지역으로 설정한 난징국제안전지대의 지도자였던 욘 라베(John Rabe)의 것으로, 라베는 1910년에는 베이징(나중에 난징)에 있는 지멘스 AG(Siemens AG)의 중국법인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 중국인들은 그를 난징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렀다.

 

대학살 기간 동안 그는 난징에 있었는데, 19371122일 그곳의 다른 외국인들과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징대학교와 진링예술과학대학, 미국대사관과 관청들이 있는 구역에 <국제안전지대>를 설치했다. 그는 또한 일본대사관과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난징에서의 학살을 묘사한 편지를 보냈다. 라베와 그가 설치한 안전지대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라베는 일본군에게 그의 나치당원증명서를 제시하여 학살을 막아보려는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늘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228일 독일의 소환으로 난징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활동은 적어도 대학살기간 동안 20여 만 이상의 중국인을 구제하게 된다. 그의 일기는 이러한 당시의 활동과 실상을 담은 생생한 기록물이었다. 이 기록들에는 외국인 목격자의 증언, 신문기사, 라디오 방송, 전보, 사진 등도 기록되어 있었다.

난징기념관의 국제안전위원회 코너. 당시 활동했던 외국인들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두 번째 일기는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Willhelmina Vautrin)의 것으로, 중국인들은 그녀를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으로 불렀다. 대학살 당시 진링(金陵)여자예술과학대학 교육학부 학장이자 연구책임자로 일하던 미니 보트린은 대학교 구역를 안전지대로 만들어서 약 만여 명의 여자와 어린아이의 생명을 살렸다.

 

일본군들이 보호구역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찢고 사람들을 끌고 가려 하자 일본대사관에까지 직접 가서 항의를 한다. 그 후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난징 철수를 권고받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답한다.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닙니다.”라고. 그러나 결국 지친 몸으로 1940년 미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이듬해 514, 인디애나폴리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창문과 문틈을 온통 테이프로 막고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녀가 목격한 난징에서 겪은 참상의 환영에 시달리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분노에 차서 그들의 혐오스러운 짓들을 응징할 힘이 내게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만약 일본의 여성들이 이런 혐오스러운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할까.” 그러나 일본군과 일본정부, 일본군출신의 선한 할아버지들은 절대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 일기들은 저자들의 목격담으로 생생한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보고하며, 난징국제안전지대의 환경과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난징대학살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이리스 장이 바랐던 결실인지도. 왼쪽부터, 영화 <존 라베(John Rabe)>, 감독: 플로리안 갈렌베르거(Florian Gallenberger), 2009년 작품 / 남경 남경(南京!南京!/City Of Life And Death), 중국, 감독: 루추안(Chuan Lu), 2009년 작품 /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The Flowers of War)>, 감독: 장예모, 베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 2011년 작품

 

아이리스 장은 욘 라베를 난징의 오스카 쉰들러, 미니 보트린을 난징의 안네 프랑크라 칭했다. 라베의 일기는 800쪽이 넘는 분량이며,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가장 상세히 묘사한 설명들이 포함되었다. 미니 보트린의 일기는 대학살에 관한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러한 자료들과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통신문이나 메모들, 외교문서들에 기초해서 아이리스 장은난징의 강간을 완성한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대학살을 서구사회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논픽션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에도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발간 당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10주간 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작 대학살의 당사국인 일본에서만은 출간되지 못하였고, 도리어 이 책의 가치를 폄훼하고 흠집 내는 등 공격하거나,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거나, 변명하기 위한 책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심지어 그 비판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중일전쟁 이후 벌어진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일본정부가 전쟁기간 동안 자행한 범죄에 대해 사과해야 하고, 희생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였다. 이 책의 출간으로 난징대학살은 미국의 정치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그녀는 1997년에 일본 정부가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도록 제기된 미 의회결의문의 주요한 홍보인 중 한명이 되어, 1999년 당시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만나기도 한다.

 

난징기념관 내의 아이리스 장 관련 전시 벽면과 난징의 강간집필 당시 자료들

 

하지만, 책임질 줄 모르는 일본은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이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는 데 몰두한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극우파들이 주축이 된 난징대학살 부정파라는 일군의 세력이 형성되어 전화와 팩스, 이메일 등을 이용해 아이리스 장에게 암살 위협, 협박 등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또한 일본의 극우파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급기야 책이 출간된 후 일본의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우울증까지 앓았던 아이리스 장난징의 강간을 쓴 지 7년 만인 2004119일 캘리포니아주 클라라 카운티의 남쪽 17번 고속도로변에 세운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진실과 대면하고자 하지 않은 일본의 극우파들과 정부는 결국 난징을 두 번 강간했고, 난징을 두 번 도살한 것이었다.

 

기억할 과거마저 없는 무기억의 국가

현재에도 일본에서 잘 나가는 정치가인 현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일본의 난징대학살사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국가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다.”라는 망언을 직격탄으로 날렸다. 또한 1994년 법무상인 나가노 시게토난징의 강간 등 일본군의 잔혹행위는 모두 날조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은 붕괴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가 사임하고 말았다. 일본정부의 각료들은 한국의 정신대문제와 함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일이 허다하다. 결국 난징의 강간이 나오고 난 다음 벌어진 소위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의 배후가 그들이며, 그들이 곧 몸통이기도 한 것이다.

 

망언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데, 올해 2월 나고야 시장인 가와무라 다카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행위와 관련해 통상적인 전투가 있었지만, 난징(대학살)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망언으로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고, 1978년 이래 34년 동안 자매결연을 통해 맺어온 두 도시 간의 우정도 깨지고 말았다. 난징시는 결국 나고야시와의 교류 단절을 선언했다.

 

난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00인 목 베기 살인시합의 두 주인공을 소개한 당시 도쿄니치니치신문의 1213일자 기사. “100인 목 베기 기록 초과, 무카이 106-노다 105.”(난징기념관 전시실 내 사진)

 

이 망언의 전통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당시 중지방면군(中支方面軍) 사령관 겸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지낸 마쓰이 이와네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긴 세월 동안 나는 이 전쟁을 중국인들이 자기 반성을 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라는 망언으로 전범재판을 지켜보던 이들을 분노케 했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30만을 도살해야 했다니?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악명 높은 살인시합을 벌였던 노다 다케시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중위는 둘 다 150명 이상을 죽인 사실을 끝내 부인했고, 나중에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둘은 난징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19세기 말 탈아입구(脫亞入口)를 외치며, 동아시아를 전쟁의 포화로 끌고 간 제국의 기억을 일본인이나 아시아인들이나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의 방식과 지난 역사를 회고하는 방향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은 난징대학살의 부정에서 갈린다. 난징의 부정(不正)은 곧 일본제국주의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부정이며, 그들의 죄책감이 결여된 역사인식과 더 나아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철학적인 문제를 남긴다.

 

아이리스 장이 난징의 강간을 집필하면서 늘 가슴에 새겨두었다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조지 산 타야나(Gorge Santayana)가 말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는 경구는 현재의 일본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결국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당사국들에게 사과하기보다는 축소, 은폐,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소위 보통국가로 가고자 하는 일본은 기억할 과거마저 없는 무기억의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의 팽창으로 인해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동아시아의 전략에 기대어 기회만을 엿보는 재무장과 군국주의와의 단절 없는 일본정부의 입장은 언제든 <난징대도살>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착한 이웃이 아니라 언제든 악마의 전쟁기계로 표변할 수 있는 위험국가라고 이웃한 아시아국가들은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징을 부정하는 한, 일본은 <난징의 강간>을 재현할 수 있는 위험국가이며, 잠재적 범죄국가이고, 비정상적인 국가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조형한 이 풍경을 무엇이라 부를까? 당시 백기를 앞세우고 투항한 중국군 포로 2만 명을 양쯔강 강둑에서 반달 모양으로 둘러 싼 후 한꺼번에 기관총으로 참살한 장면(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난징난징>에서 재현된 장면).

 

독일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전쟁배상금으로 1,240억 마르크, 달러로 600억 달러를 지불했다. 반면 일본은 전쟁 범죄에 대해 어떠한 배상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으로 전쟁 배상은 일단락되었다고 강변하며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 조약의 514항은 일본은 연합국에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현재 일본의 자산이 충분하지 않다면, 경제상황이 호전된 후 피해와 고통에 대해 충분한 배상을 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의무 또한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난징의 강간중에서) 이 규정은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되도록 그 환경을 조성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의 필요에 의해 난징은 은폐되기도 하였으며, 미소의 냉전구조를 구조화시키기 위해, 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목적에 의해, 일본이 전쟁범죄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도록 하는 데도 일조했다.

 

군국주의가 싹을 자르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군비확장의 길을 터 준 것도 미국이다. 미국의 우산 아래서 일본은 아시아 제 국가들에 대한 전쟁책임으로부터도 유보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에도 차세대 일본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오사카 시장이 또 한 번 망언록을 추가했다. 일본의 차기 유력주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옛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한겨레 신문 기사)

 

일본의 2대 도시 도쿄의 이시하라 신타로도지사와 오사카의 하시모토 도루시장이 비정상국가의 거봉을 이루고 있다. 오늘, 난징대도살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불온한 열도의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 소리 2012.08.24

 

위안부이어 난징대학살도 부정하는 일본

날조됐다’ ‘부풀려졌다’ ‘모르는 일이다반성 외면하는 일본 우익들의 거짓말

19371213,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 난징에 쳐들어갔다. 성곽의 중화문(中華門)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입했다. 중국군이 곳곳에서 저항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무력하게 짓밟혔다. 뒤이어 일본군은 인간 청소에 나섰다. 항복한 중국군 포로들과 민가에서 색출한 젊은 남자들을 성 밖 양쯔강(揚子江)이나 무푸산(幕府山)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그들을 일렬종대 혹은 일렬횡대로 세운 뒤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기관총을 난사한 뒤 숨 쉬는 생존자를 확인사살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때로는 먼저 일본도로 목을 베어 죽였다. 심지어 포로와 민간인으로 하여금 땅을 파게 한 뒤 산 채로 파묻은 일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을 따라 종군한 오마타 유키오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앞줄 포로들의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들의 목이 잘렸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됐지만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 ! ! 포로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

(사진=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http://www.nj1937.org/index.html )

 

난징대학살기념관 추모벽에 기록된 희생자 수 30만 명. 일본은 이 희생자 수가 조작됐다며 비난하고 있다.

 

피해자만 30만으로 추정일본은 모르쇠

남자들에 대한 청소를 끝마치자, 일본군은 여자들을 강간하기 시작했다. 강간 방식은 아주 참혹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ㆍ먼저 강간하고 죽여버림)’ ‘시신훼손등이었다. 대상은 10살이 안 된 어린이부터 70대 노파까지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수녀·비구니 등 눈에 보이는 대로 난징의 여성을 능욕했다. 임신부도 강간했는데, 강간 뒤 여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일본군 병사인 아즈마 시로는 우리는 중국 여자들을 옷 벗겨 구경한 뒤 오늘은 목욕하는 날이다라 외치며 윤간했다. 강간한 뒤 그들을 죽여버렸다. 시체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라고 회고했다.

 

난징이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는 사지가 절단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쌓였다. 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았다. 이처럼 살육과 강간은 6주간 계속됐다. 학살의 광란 속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죽었는지 파악하기란 힘들었다. 징성훙(經盛鴻) 난징사범대학 교수는 필자에게 “1948년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군이 난징에서 20만명 이상의 인명을 학살했다고 판결했다판결문에는 양쯔강에 버려진 시체를 포함하지 않았는데 일본 전범들은 그 수가 10만 명 이상이라고 자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 30만의 학살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난징대학살 자체를 아예 부정한다. 그 선두에 극우 학자와 예술가가 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아세아대학 교수는 1998년에 낸 난징학살의 철저검증에서 난징에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책에 일가족 9명 중 7명이 살해당한 샤수친(夏淑琴)의 사례는 날조됐다고 적시했다. 이에 샤씨는 하가시나카노와 책을 낸 출판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0092월 도쿄 고등법원은 히가시나카노의 책 내용이 샤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400만 엔의 배상판결을 확정했다.

 

미즈시마 사토루 감독은 난징의 진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미즈시마는 난징대학살의 증거로 나온 자료는 모두 중국 측의 선전자료라면서 일본인은 저렇게 시체에 악랄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일본 각계에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데는 일본 정치인들이 배후에서 선동했기 때문이다. 20072월 자민당 내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은 소위원회를 만들어 “(난징대학살에 대한)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 모임은 1997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주도해 결성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이런 시각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정부가 난징대학살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자, 일본 외무성은 히가시나카노의 저서를 인용해 부정했다.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 메이세이대학 교수가 작성한 외무성의 의견서는 난징학살의 철저검증에서 지적한 왜곡된 사례를 그대로 담았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에도 지난해 10월 난징대학살 자료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지난 6월부터 세계기록유산의 일본어 명칭을 세계의 기억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사실 난징대학살은 전쟁 중 갑자기 일어난 탈선행위가 아니다. 난징 공격 전 일본군 지휘부는 각 부대에 모든 포로들을 처형한다’ ‘처형방법은 포로들을 12명씩 나눠 총살한다고 지시했다. 일본 육군 제6사단도 여성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중국인이면 모두 살해하고 집은 불사른다는 명령서를 받았다. 일본군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군 지휘부는 큰 피해를 입고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위안거리를 주려고 했다. 또한 중국인의 저항 의지를 무너뜨릴 본보기가 필요했었다. 바로 그 대상이 중국 수도였던 난징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 치밀한 학살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군사작전을 치르듯 난징 13곳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에서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222km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톤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난징의 강간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과 피해자들이 겪은 참상을 서구 사회에 처음 알린 역작이다. 중국조차 침묵했던 난징대학살을 미국의 중국계 언론인이 생생히 복원해 내어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명의 일본 장교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 시합을 했다고 보도한 일본 신문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골이 발굴된 장소에 세워진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 성곽의 중화문을 무너뜨린 뒤 만세를 합창하는 일본군 © EPA 연합

 

일본, 학살 진상 담은 도서 출간 막아

그러나 난징의 강간은 정작 진상을 알아야 할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1999년 일본 출판사 가시와쇼보(柏書房)난징의 강간일본어판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우익세력은 출판사에 몰려와 협박했다. 수일 동안 선전차로 고성방가를 일삼았고, 전화ㆍ편지ㆍ팩스 등으로 압력을 넣었다. 이에 출판사는 적지 않은 내용과 표현을 수정해 책을 출판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 장은 반대했고, 결국 책은 출판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일본 우익세력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라 규정짓고 대규모 규탄집회를 개최했다. 난징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아이리스 장을 역사를 조작하는 마녀로 비난했다.

 

심지어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를 문제 삼아 본질을 흐렸다. 양심 있는 학자들조차 난징대학살을 인정하면서도 피해 규모와 학살자 수 등에는 중국 학자들과 첨예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어느 독자는 왜 우리가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알아야 하나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한데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이 난징대학살과 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묶어 부정하고 공격하는 현실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오늘 우리가 난징대학살을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종혁 중국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시사저널 2016.08.

 

'존 라베'와 난징대학살, 그리고 시진핑

난징대학살. Nanjing Massacre.

중일전쟁 기간인 19371213일 중화민국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이 1229일까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살 사건.

 

일본은 지금도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수십 종의 책이 출판되었고, 여러 편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건만.

 

2009년에 나온 영화 '존 라베'는 난징대학살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데 좋은 참고 자료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존 라베'일까? (독일어 발음은 욘 라베)

 

이 영화는 대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독일 지멘스사 난징지사장 존 라베(John Rabe 1882~1950)의 일기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업가 존 라베가 주인공이다. 존 라베의 눈에 비친 참극이다. '중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독일인 존 라베. 그는 어떻게 해서 난징에까지 가게 되었을까.

 

라베는 1882년 독일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82년이면 독일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로 뻗어 나갈 때다. 1871년 보불전쟁 승리와 함께 제2제국을 건설한 독일은 영국·프랑스의 뒤를 이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었다. 독일은 중국 대륙에서 칭따오를 조차(租借)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라베는 일찌감치 사업을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수년간 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같은 곳에서 지내며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배웠다.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물여섯 살 때인 1908. 1910년지멘스사 중국 지사에 입사해 베이징·상하이를 거쳐 난징지사장에 임명된다. 양쯔강을 끼고 있는 난징에서 라베는 수력발전 설비운영 책임을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게 1933. 이후 독일 성인남녀 대부분이 나치당에 입당 원서를 썼다. 그 역시 난징에서 나치당에 입당했고 난징지역 책임자가 된다.

193712월 난징 서문 근처의 강가에 버려진 중국인 시체들을 일본병사가 쳐다보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수도를 향해 진격해올 때 난징에는 적지 않은 서양인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업가였고, 일부는 외교관과 선교사였다. 난징 시내까지 포성이 들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외국인 대부분이 여객선을 타고 도시를 탈출했다.

 

1122, 일본군이 난징 외곽까지 접근해 중국군과 교전을 벌일 때 난징에는 라베를 포함한 외국인 22명만이 남았다. 라베는 위기에 빠진 중국인들을 모른 체하고 난징을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고심 끝에 난징에 남기로 한다. 난징 함락은 시간문제. 사업가, 의사, 선교사로 구성된 외국인들은 난징안전지역 설립을 위한 국제위원회를 조직한다. 라베가 국제위원장에 추대된다.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기업 지사장으로 권력층과 선이 닿는 라베가 아무래도 대일(對日) 협상에서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서다.

 

국제위원회는 난징대학과 외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시() 서쪽 지역에 난징안전구(南京安全區 The Nanjing Safety Zone)를 설치한다. 일본군은 안전구에 중국군만 숨겨주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12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되었을 때 난징에는 피난 가지 못한 중국 민간인 50만명이 남았다.

 

라베는 베를린 나치사령부의 신임을 활용해 일본군의 만행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쓴다. 영향력이 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독일어를 하는 자신의 중국인 운전기사가 살해당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라베는 사재(私財)를 털어 안전구에 들어온 중국인들을 지켰다.

난징대학살 기간 중 도쿄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의 제목. ' 100명 참수 시합의 믿을 수 없는 기록'. '무카이 105, 노다 106 연장전 돌입'이라는 부제가 보인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 근무 때부터 일기를 써온 라베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일기 분량이 늘어났다. 라베는 일기에 민간인 5~6만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연구가들은 16일 동안 학살당한 중국인이 20~3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라베는 안전지역 책임자의 위치에서 본 것만을 기록했다. 20~30만명설()은 라베가 수집한 자료 외에 일본 기자를 포함한 외국 언론의 보도 등을 종합해 추정한 숫자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라베가 안전구를 운용해 중국인 25만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한다. 난징대학살은 '난징의 강간'으로도 불린다. 일본군은 집집마다 뒤지며 보이는 남자들은 사살했고, 여자들은 강간했다.

 

19382월 말, 라베는 난징을 떠난다. 샹하이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4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 가방에는 일기장, 사진자료, 동영상 등으로 가득했다. 라베는 베를린에서 사진 자료와 동영상을 보여주며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하는 강연을 했다. 히틀러에게도 일본군의 만행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나치 지휘부는 동맹국을 비판하는 활동을 벌이는 라베에 부담을 느꼈다. 그가 히틀러에게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다. 하지만 지멘스 본사가 로비를 벌여 라베는 금방 풀려난다. 난징학살과 관련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라베는 베를린의 지멘스 본사에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근무한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단죄되면서 그에게 엄혹한 시련이 닥쳤다. 가장 먼저 베를린에 들어온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이어 영국군에 검거되었다. 그는 양쪽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의 나치협력 증거는 넘쳐났다. 나치 협력죄로 '취업 자격'이 박탈된다. 그는 4개국이 분할 점령한 베를린에서 영국 관할 구역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연합군은 나치협력자를 대상으로 탈나치화(de-nazification) 작업을 강도 높게 벌였다. 나치 잔재를 뿌리 뽑고 나치의 부활을 차단한다는 조치였다. 그는 '탈나치화' 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재산을 거의 다 써버렸다. 직장도 잃고 모아둔 돈도 다 날린 그는 가족과 함께 원룸 아파트에 살며 중국에서 가져온 미술품 판매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19466, 그는 최종적으로 '탈나치' 판정을 받고 자유인의 신분이 된다.

 

전쟁이 끝나자 중화민국의 난징 시민들은 생명의 은인인 라베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라베가 베를린에서 곤궁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난징시는 모금 운동을 벌인다. 폐허 속에서 2000달러(현재 가치 21000달러)가 모금되었다. 난징 시장은 이 돈을 들고 스위스를 거쳐 베를린으로 들어가 라베 가족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전달했다. 라베는 난징 시민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후 난징시는 매월 라베 가족에 식료품과 생필품 꾸러미를 보내주었다. 이런 관계는 1948년 동독이 공산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01, 라베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빌헬름황제 기념묘지에 안장되었다. 라베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 난징대학살을 기록한 라베의 일기가 출간되었고, 곧이어 영국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난징의 선한 독일인'(The Good German of Nanjing, 영국), '난징의 선한 사람'(The Good Man of Nanjing, 미국)이란 제목으로.

존 라베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존 라베의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는 지금까지 모두 4편이 나왔다. 물론 난징대학살을 포괄적으로 다룬 영화는 장예모(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진링의 13소녀'를 포함해 10편이 넘는다.

 

1997년 중국 정부는 베를린의 라베 묘지를 난징 학살추모지에 옮겨왔다. 2005년 난징시는 라베가 살았던 난징 자택을 원상 복구해 현재 존 라베와 국제안전구 기념관으로 일반에 개방한다. 나치 추종자였던 존 라베가 목숨을 걸고 중국인의 생명을 구한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얼핏 모순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라베가 중국을 떠난 것은 19382월이다.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 18개월 전이다. 영화에서 라베가 히틀러에게 일본군의 학살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으로 미뤄 나치당원 라베는 히틀러가 편지를 읽게 되면 일본군의 만행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정치의 세계를 모르는 순진한 사업가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거짓선동에 속아 나치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나치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학살 앞에서 본성에 내재한 휴머니즘이 발동했고, 그 양심의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라베는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번역 출간된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이 생각의 단서를 제공한다. 나치 시대 독일을 여행한 영국·미국인들은 한결같이 히틀러와 독일인을 찬미한다. 1937년에만 미국인 방문자가 50만명에 이르렀다. 외국여행자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믿었던 것이다.

베를린올림픽 기간 중 독일 관중들이 메달 시상식에서 나치 깃발이 올라가자 일제히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라베의 나치당 가입과 활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인들은 종일 라디오를 통해 선전방송을 들었다. 그들은 세뇌인 줄도 모르고 세뇌를 당했다. 괴벨스의 거짓선동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독일 성인들의 99% 이상이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청소년들 역시 히틀러유겐트에 참여했다.

 

사업가 오스카르 쉰들러(1908~1974) 역시 나치당원이었다. 나치당원이 아니면 사업을 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친나치' 쉰들러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의 유대인 1200명을 구했다.

 

영화로도 나온 '피아니스트'의 실제 주인공 블라디슬라브 스필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바르샤바 게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그를 살려준 이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교양 있는 나치장교 빌름 호젠펠트였다. 소돔의 무리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어떤 전체주의 폭력도 양심의 소리를 누르지는 못한다는 것을 '피아니스트'는 보여준다.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중인 존 라베의 저택. 이 집은 난징대학살 기간에 난징안전지구에 있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은 왜 라베의 묘를 베를린에서 난징으로 옮기고, 살던 집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만들었을까. 전체주의 만행 앞에서 피어난 양심의 소리를 기억하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시진핑의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가. 공산당 일당 독재인 중국에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없다. 모든 중국인은 공산당의 유리감시망 속에 들어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경고한 전체주의가 지금 바다 건너에서 버젓이 벌어진다. 급기야 꽃미남 연예인들의 방송 출연 제한까지 나온다. MZ세대는 "잘생김을 (추구하는걸) 어찌 막냐?"고 그런 중국에 코웃음을 친다. 알려진 대로, 세계에서 '오징어게임'을 볼 수 없는 나라는 중국과 북조선뿐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통제하는 중국에서 인류 화합의 축제인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벌써 그리스에서 베이징동계올림픽 성화가 채화되었다. 히틀러는 전체주의 독재를 완성하는 선전장으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활용했다. 가장, 극적으로!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