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서정아 옮김/세종서적 2020.11
저자 :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 예일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정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일대 로스쿨 교수이자 예일대 사법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오랫동안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진정한 평등’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제시해왔다. 미국 법조계와 학계에서 천재 중의 천재로 꼽히는 마코비츠는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자기 자신을 비롯해 오직 엘리트에만 유리한 쪽으로 사회가 ‘조작’되고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불평등 문제의 원인은 능력대로 공정하게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 그 자체이며, 이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목차
추천사ㆍ6
추천의 글ㆍ8
서문ㆍ14
1부 능력 충만한 엘리트의 시대
1장. 엘리트 귀족의 탄생ㆍ45
너무 치열해진 교육 | 극한 직업 엘리트? | 전례 없는 불평등 | 누구나 인정하는 ‘능력’이라는 잣대
2장. 중산층의 몰락과 엘리트의 자기 착취ㆍ73
기회가 사라진다 | ‘한결같이 좋은 삶’의 끝 | 루저로 몰아가기 | 엘리트 착취 | 고성능 인적 자본 | 화이트칼라의 소금광산
3장. 다가오는 계층 전쟁ㆍ115
능력은 현대판 차별 기준 | 새로운 지배층 | 소득 방어 산업과 법치주의 | 국가에 맞서는 신흥 귀족 | 능력주의가 유발하는 부패 | 중산층의 토착주의와 포퓰리즘 | 계층 전쟁의 격화 | 신 카스트 제도
2부 능력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4장. 일하는 부유층ㆍ161
한량에서 노력가로 | 자본 대 노동의 투쟁에서 탈피 | 노력 문화 | 빈곤과 부 | 빈곤과의 전쟁 | 새로운 분열 | 불평등의 양상이 달라지다 | 대담해진 적수
5장. 엘리트 교육과 신분 세습ㆍ213
엘리트끼리의 결혼 | 요람에서 유치원까지 | 학령기의 특별한 교육 | 명문대 | 대학원과 전문대학원 | 자녀 한 명당 천만 달러 | 기회의 종말 | 특권층의 시련
6장. 암울한 직업과 번지르르한 직업ㆍ281
직장의 기술 혁명 | 복잡해진 금융과 수혜자 | 사라진 중간관리자 | 중산층 공동화 | 제값을 하는 교육 | 할 일도, 여가도 빼앗긴 사람들 | 노력의 착취
3부 새로운 귀족과 나머지의 사회
7장. 직업, 가정, 소비까지 총체적인 격차ㆍ341
명확해진 단층선 | 일하는 곳이 전혀 달라지다 | 엘리트 가정의 생산성 |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 | 엘리트다운 소비 | 성채가 된 도시 |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의 귀환
8장. 슈퍼 엘리트 경제ㆍ397
경영 혁신 | 오늘날의 혁신이 기량을 선호하는 까닭 | 인적 자원의 저주
9장. ‘능력’과 ‘공정성’은 신화다ㆍ435
신흥 귀족제를 타파할 새로운 상상 | 능력이라는 허상 | 거대한 난파선
결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454
감사의 말 479
그림과 표 485
출판사 서평
경제력을 갖춘 초엘리트들이 탄생시킨 새로운 귀족제도 “엘리트 세습”
상위 1% 엘리트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
이제 모든 선진 사회에서 귀족 제도(aristocracy)는 물러나고 능력주의(meritocracy)가 기본 신조가 되었다. 실력에 따라 누구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지극히 타당해 보인다. 능력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그러니까 ‘부모 찬스’로 부당하게 입시나 취업에 성공하는 부정 사례들만 비난을 받는다. 더구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높은 연봉의 직업을 쟁취한 엘리트들은 근면성이라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갖는 듯하다.
엘리트 부모가 자녀들의 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능력’을 대물림 수준으로 키워낸다는 사실에도 능력주의는 공격받지 않는다. 엘리트들은 물리적 자산을 상속하기보다 인적 자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는 중산층 이하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격차다.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는 소득분포상 상위 1%에 속하는 가구 출신이 하위 50% 가구 출신보다 더 많이 재학하고 있다.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다.
능력주의 즉 메리토크라시는 부와 특권의 집중과 세습을 대대손손 유지하는 숨은 메커니즘이자, 계층 간 원한과 분열을 불러일으키는 침묵의 트리거다. 이 새로운 귀족주의는 다음 세대에서 특권을 끊임없이 다시 구축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쓴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업적을 세워 스스로의 엘리트다움을 재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넉넉한 자금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도 탁월하다. 다만 요람부터 지속되는 치열한 자기착취는 불행을 예비한다.
능력 출중한 엘리트 한 명이 중산층 수백 명의 일자리를 대체한다
능력주의는 구직 과정에서도 사회의 격차를 심화시킨다. 엘리트 고용인은 명문대를 졸업생을 선발하며 고액 연봉과 성과보수를 지급한다. 고학력 엘리트들이 높은 기술력으로 노동생산력을 독점하고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시 되면서 괜찮은 일자리의 중산층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 높은 학력과 기술 또는 경영기법을 장착한 소수 엘리트가 수천 명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것이다.
실력과 성실한 직업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노동시장이 갈수록 특별한 교육과 값비싼 훈련을 받은 인력을 우대하는 추세로 변화해 일류 대학 학위가 없는 중산층 근로 인력은 노동시장 전반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능력 경쟁은 중산층을 경제와 사회의 중심부에서 몰아내고 혜택, 명예, 부를 가늠하고 할당하는 사회적 기준의 적용 대상조차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능력주의는 명문대, 로스쿨, 금융가, IT산업을 엘리트끼리 야망을 겨루는 격전지로 만들고, 시민 대다수를 사회 주변부로 몰아낸다. 중산층 어린이들을 무기력한 학교로, 중산층 성인들을 장래성 없는 직장으로 보낸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이처럼 엘리트와 중산층을 갈라놓고 있다. 이런 반발이 제기됨은 타당해 보인다. 복잡해진 금융상품과 우리의 주의를 뺏는 IT기술의 공익은 분명치 않으며, 대다수 중산층 몫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노동하는 엘리트와 중산층 간 격차 심화
예전에는 중산층과 빈곤층의 빈부 격차가 컸으나 오늘날에는 엘리트와 중산층 간 빈부 격차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빈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중산층의 임금이 줄어들면서 중산층과 빈곤층의 생활수준이 비슷해진 것이다. 엘리트와 중산층 두 계층은 결혼, 교육, 소비활동 등 모든 면에서 분리되고 있다. 중산층이 분노하고 사회적 불만이 높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게다가 미국 사회에서 엘리트는 성, 인종, 다문화 출신 엘리트는 적극 포용하지만, 평범한 중산층은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르다”고 쉽게 폄하해버린다.
다음은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쓴 양승훈 교수(경남대 사회학과)의 글 일부이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고 노동소득보다 높다고 했지만, 마코비츠는 이 셈법이 틀렸다고 한다. 엘리트들은 부를 임대 수익이나 금융 수익으로 얻는 게 아니라 노동소득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노동소득으로 수억 원, 수십억 원을 넘어 수백억 원씩 받는 이들,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엘리트인 것이다.”
젊은 엘리트층의 헤아릴 수 없는 불안감 유례없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현대 상류층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들은 과연 행복할까? 능력주의는 과거의 귀족과 달리 불안하고 정통성이 없는 엘리트를 무자비하고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경쟁으로 끌어들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소득과 지위를 얻으라고 부추긴다. 엘리트들은 특권을 얻기 위해 일생 동안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느라 늘 긴장하고 지친 상태다.
능력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엘리트 밀레니얼 세대는 ‘집단 불안’에 빠져 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전에 올린 성과를 확신하지 못하고 경쟁이 심한 학교가 똑같이 장차 경쟁이 심한 직장으로 바뀔 뿐, 이제까지 겪은 시련이 재현될까 봐 걱정한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들조차 능력주의가 진정한 성공을 촉진하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불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능력주의의 덫에서 탈출하는 것은 사실상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오늘날 자존감을 잃고 성공할 길이 막힌 중산층이 능력주의에서 해방되면 원래 위치를 되찾아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이다. 현재 소모적인 자기 착취에 빠진 엘리트 계층이 능력주의에서 해방되면 지위와 부가 축소되는 대신에 귀중한 자유와 여가를 얻음으로써 참된 자아를 되찾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에서 해방되면 능력주의로 말미암아 억압적이고 불신이 만연해진 사회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것이다.
능력주의의 두 중심축인 교육과 일자리에
혁명이 필요하다
이 책의 아이디어 ‘능력주의의 덫’을 20년간 천착해온 저자는,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함께하는 것부터 출발하자고 말한다. 이는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랜 기간 민주주의 사회에서 능력은 공정성과 열린 기회라는 생각이 통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들어진 능력, 만들어진 엘리트, 신흥 귀족인 엘리트의 세습이 보편적인 시대가 지속된다면 지금의 사회는 지탱할 수 없다. 오래 묵은 문제일수록 대안을 찾기 어렵지만, 저자는 교육, 일자리라는 두 가지 경로에서 대안을 제시하며 마무리한다.
과감하고 충격적이다. 마코비츠는 좋은 학교를 나온 전문직 종사자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낙천적인 자화자찬에 제동을 건다. -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책속으로
오늘날 중산층 어린이는 학교에서 부유층 어린이에게 뒤처지고 중산층 성인은 직장에서 명문대 졸업자에게 밀려난다. 중산층에겐 기회가 차단된다. 그것도 모자라 소득과 지위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비난한다. 모두가 규칙대로 해도 부유층만 승리하는 경쟁인데 말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엘리트에게도 해롭다. 그런 교육관 때문에 부유한 부모들은 자녀의 엘리트 교육에 수천 시간과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다. --- 「서문」 중에서
엘리트 대학 졸업자들이 최고 직업을 독점하는 동시에 초고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해 최고 직업은 더 훌륭해지고 나머지 직업은 더 열악해지는 것이다. 능력으로 얻은 근로소득 덕분에 엘리트 부모의 엘리트 교육 독점 현상은 세대가 바뀔수록 점점 더 심화된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는 교육과 직업 사이 되먹임 고리를 만들어내며 그 고리 안에서 개별 분야의 불평등은 다른 분야의 불평등을 증폭한다.--- 「2장 중산층의 몰락과 엘리트의 자기 착취」 중에서
엘리트 직업이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요구함에 따라 엘리트 직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성인들은 성년기를 통틀어 그 규율에 복종한다. 능력주의는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며 결코 끝나지 않는 경쟁에 엘리트들을 가둬둔다. 동료는 모두 경쟁자다. 모든 단계에서 승리가 아니면 탈락이다.--- 「2장 중산층의 몰락과 엘리트의 자기 착취」 중에서
오늘날 노동소득은 소득분포의 최고 정점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10명 가운데 8명은 상속이나 상속받은 자본의 수익이 아니라 창업이나 경영 등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보수로 재산을 일구었으며 보수의 형태는 설립자나 동업자의 주식 지분이다.--- 「4장 일하는 부유층」 중에서
모든 왕조가 동등한 조건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왕조에는 지위에 대한 대가가 따른다. 타고난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자동으로, 그 어떤 비용도 들이지 않고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들어진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부와 지위를 지키려면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배타적이고 엄격한 교육은 그 교육을 흡수하는 이들의 삶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인적 자본을 쌓는다. 능력주의는 기업과 직장과 제품을 본떠 각각 가족, 가정, 어린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왕조를 유지한다.--- 「5장 엘리트 교육과 신분 세습」 중에서
오늘날 새로운 질서 안에 자리 잡은 엘리트 부모는 자녀들에게 상위 근로 계층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자연스럽게 제공한다. 인적 자본 투자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진행되며 엘리트 지위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물적 자본과 금융 자본을 대체했다.--- 「5장 엘리트 교육과 신분 세습」 중에서
과거의 어린이들은 아무런 근심 없이 현재에 충실했지만,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초조하게 준비한다. 오랫동안 소비에 치중했던 부유층 가정은 이제 차세대의 인적 자본을 구축하기 위한 투자와 생산의 현장이 되었다. 1,000만 달러어치의 능력 상속은 새로운 체제의 금융비용이다. 엘리트 학생들이 겪는 피로와 불안과 가짜 정체성은 새로운 체제의 인적 비용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부모의 부당한 행위는 대대손손 자손들을 괴롭힌다.
--- 「5장 엘리트 교육과 신분 세습」 중에서
한때 금융 산업은 중간 숙련도급 중산층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분야였지만 이제는 초고도 숙련도를 갖춘 상위 근로자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중간 숙련도급 직종이 사라지고 소수의 직종으로 대체되면서 번지르르한 업무에 종사하는 초숙련 엘리트 전문가가 금융 산업을 지배하고, 암울한 업무에 종사하는 비전문적인 미숙련 지원 인력은 부수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부문의 노동시장은 양극화되었다.
--- 「6장 암울한 직업과 번지르르한 직업」 중에서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은 향후 10년에 걸쳐 가장 빠른 속도로 줄어들 직업 유형이 모두 중간 숙련도급이며,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날 10가지 직업은 미숙련이나 초고도 숙련도급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매킨지 컨설팅 산하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McKinsey Global Institute)는 미국 노동 인구 중에서 3분의 1 가까이가 2030년까지 자동화 때문에 설 곳을 잃을 것이라면서 한층 더 급격한 변화를 예측했는데, 이들 중 절대다수가 중간 숙련도급이다.--- 「6장 암울한 직업과 번지르르한 직업」 중에서
엘리트의 자산 중 인적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나치게 크며 엘리트들은 인적 자본의 역설에 갇혀 진정성 있게 일하기에는 자신의 기량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투자한다. 직업이 소득을 좌우하고 노력이 지위를 결정지을 때 시장이 원하는 것과 다른 포부와 관심사를 추구하는, 즉 다른 목표를 위해 임금과 직업에 구애되지 않는 근로자는 자신 그리고 자녀를 엘리트 계층에서 추방하는 셈이다.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려면 엘리트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소외된 상태로 일해야 한다. --- 「6장 암울한 직업과 번지르르한 직업」 중에서
능력주의 방식에 따라 재구성된 왕조적 특권은 한때 귀족이 누리던 특권보다는 안정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귀족은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정적인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다). 엘리트에게는 분명 더 큰 비용이 든다. 신세대 엘리트는 성실한 노력을 통해 특권을 새롭게 쟁취해야 한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착취해 소득을 얻는다. --- 「9장 ‘능력’과 ‘공정성’은 신화다」 중에서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한가…
능력주의(Meritocracy)’만큼 공정한 것은 없어 보인다. 능력대로 경쟁해서, 능력만큼 가져가는 사회라면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더 노력하면 되고, 그만큼 성취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에서 다른 고려사항 없이 수학능력 점수대로 줄을 세우는 ‘정시’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능력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과연 현실은 그럴까. 능력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공정할까. 아니, 조금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능력주의에 기반해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까.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돼 논란을 불러일으킨 <엘리트 세습>은 우리가 막연히 공정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능력주의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원제는 ‘능력주의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으로,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는 20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능력주의는 미국사회를 더 역동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현재 미국의 부자들 중에 이른바 ‘세습’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소득 불평등은 과거에 비해 더 나빠졌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상위 1%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20%를 상위 0.1%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10%를 차지한다. (…) 195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간과 비교하면 상위 1%가 소유한 몫이 2배로, 상위 0.1%의 몫은 3배로 늘어난 셈이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한 것은 ‘능력의 격차’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일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자본이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경향이 심화한다는 불만이 쏟아지지만, 실제로는 증가한 자본 가운데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엘리트의 근로소득 증가분에서 비롯된다.” “엘리트 교육, 엘리트의 근면성, 능력주의로 지탱되는 엘리트의 근로소득은 총체적으로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노오오오오오력’을 해서 엘리트 반열에 오르면 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에서 계층 상승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엘리트란 자리는 ‘교육’을 통해 사실상 세습된다. “현재 부유층 어린이와 중산층 어린이의 학업 성과 격차는 중산층 어린이와 저소득층 어린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논지다. 교육이라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진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책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최상층에 있는 엘리트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젊은 투자은행 간부들은 대체로 오전 6시에 출근해 자정까지도 퇴근하지 않으면서 주당 80~120시간씩 일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든, 최상층에 자리잡은 사람이든 삶의 질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능력주의 때문에 일 없이 놀게 되고 그에 따라 소득과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된 다수에게도, 능력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치열하고 소외된 노동을 통해 인적 자본을 착취하는 소모적 경쟁에 참여한 소수에게도 이득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먼저 능력주의가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평등”을 통해 소득과 생산을 남들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래야 엘리트는 자유와 여가를 되찾고, 중산층은 소득과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책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한 대목을 새롭게 인용하면서 끝난다. “이제 중산층 근로자와 상위 근로자를 포괄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에게 잃을 것은 쇠사슬 이외에 없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저자 강준만|인물과사상사 |2020.10
권력자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강준만=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목차
머리말 : 왜 권력을 누리면 사람이 달라질까? · 5
01 왜 권력자는 대중의 ‘사랑’보다 ‘두려움’을 원하는가? · 15
02 왜 권력욕은 오직 죽어서만 멈추는가? · 20
03 왜 대중은 오늘날에도 영웅을 갈구하는가? · 25
04 왜 권력의 적은 역경이 아니라 풍요인가? · 33
05 왜 유대인은 40년간 사막을 헤매야 했는가? · 38
06 왜 부패는 권력의 숙명인가? · 47
07 왜 한국인의 90퍼센트는 양반 출신인가? · 52
08 왜 권력의 속성은 무한 팽창인가? · 59
09 왜 오늘의 혁명 세력은 내일의 반동 세력이 되는가? · 65
10 왜 ‘책임 윤리’ 없는 ‘신념 윤리’만 판치는가? · 71
11 왜 정치인의 허영심은 죄악인가? · 77
12 왜 ‘정치 팬덤’은 순수할 수 없는가? · 82
13 왜 폭력을 쓰지 않는 권력이 더 강한가? · 88
14 왜 촛불집회는 인원 동원 경쟁을 벌이는가? · 92
15 왜 노벨상을 만든 건 악마의 짓인가? · 99
16 왜 침묵은 권력의 최후 무기인가? · 104
17 왜 진짜 권력은 ‘관료 권력’이라고 하는가? · 111
18 왜 권력과 멀어지면 갑자기 늙거나 병이 날까? · 116
19 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 권력’인가? · 122
20 왜 ‘보이지 않는 권력’이 더 무서운가? · 127
21 왜 권력은 인간의 사고를 말살하는가? · 132
22 왜 대통령은 ‘대주술사’가 되었는가? · 136
23 왜 촘스키는 닉슨의 용기에 성원을 보냈을까? · 141
24 왜 독단적 교리는 자유에 대한 적인가? · 146
25 왜 타협은 아름다운 단어인가? · 153
26 왜 대통령은 ‘제왕’이 되었는가? · 158
27 왜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인가? · 163
28 왜 인간은 권력에 그리도 쉽게 굴종하는가? · 167
29 왜 권력을 잃으면 주먹으로 맞는 아픔을 느끼는가? · 171
30 왜 일상을 지배하는 미시 권력이 중요한가? · 177
31 왜 권력자는 늘 고독할 수밖에 없는가? · 182
32 왜 대통령이 목사 노릇을 하면 안 되는가? · 187
33 왜 도덕적 우월감은 정치적 독약인가? · 194
34 왜 권력자는 사람을 개미로 볼까? · 204
35 왜 권력자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가? · 209
36 왜 ‘권력 없는 개혁’을 꿈꾸는 사람이 많은가? · 213
37 왜 한국인은 ‘조폭 문화’를 사랑하는가? · 219
38 왜 한국·일본 국회의원은 배지를 다는가? · 225
39 왜 1퍼센트 극렬 강경파가 정치를 지배하는가? · 230
40 왜 임신한 여성마저 상상하기 어려운 학대 행위를 할까? · 240
41 왜 권력자들은 ‘후안무치’해지는가? · 247
42 왜 5년짜리 정권은 ‘유랑 도적단’인가? · 254
43 왜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뀌는가? · 260
44 왜 권력이 권력을 죽이는 ‘권력의 역설’이 일어나는가? · 265
45 왜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추는가? · 270
46 왜 정치인은 권력이라는 마약 중독자인가? · 279
47 왜 대통령을 보자마자 눈물이 나는가? · 284
48 왜 의전 중독이 권력자들을 망치는가? · 290
49 왜 공기처럼 존재하는 ‘위력’이 무서운가? · 298
50 왜 한국 대통령들의 임기 말은 늘 비극인가? · 305
맺는말 : 왜 정치에서 선의는 독약인가? · 313
주 · 321
출판사 서평
권력은 마약이자 설탕이다
영국 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런 권력 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고 말했다. 인간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죽했으면 죽어야 그 욕망이 멈춘다고 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신념이다. 어떤 신념에 중독되면 우리의 사고방식은 왜곡되어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고 괴롭힘으로써 도취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신념은 진실을 차단하는 방어벽 기능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나의 신념이 옳다’거나 ‘나는 예외다’는 생각이 권력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권력은 사람의 사고를 말살한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상대편을 증오하는 것에 눈이 멀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다. 이들에게 타협은 없다. 독단적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대화를 거부하면서 욕설과 모욕 중심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야 열성 지지자들이 열광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능성을 추구하는 정치를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대하기 때문에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로 활약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독단적 교리가 ‘지도자 숭배’와 맞물려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정치 팬덤’은 그런 독단적 교리의 온상이다. 미국의 급진적 빈민운동가인 솔 알린스키는 “독단적 교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적이다”라고 말했다. 솔 알린스키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며 사회개혁 운동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조응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워싱턴의 최고 마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감각을 둔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아일랜드 신경심리학자 이언 로버트슨은 “권력은 다량을 반복해서 복용하면 중독을 피할 수 없는 강력한 마약과 같”다고 말했는데, 그로 인해 20세기에만도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히틀러, 무가베, 폴 포트 등 수많은 독재자가 권력에 중독되었다. 또 권력은 ‘설탕’이다. 일본 경제학자 유아사 다케오는 “권력은 설탕이다”고 말했다. 권력을 상실하면, ‘저혈당 쇼크’ 상태와 비슷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설탕을 향해 몰려든다. 그들은 ‘순수’를 내세우지만, 그들에게 권력은 열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윤리와 염치가 실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쉽다. 모든 혁명과 개혁의 타락은 바로 그런 착각에서 연유한다.
민주주의는 겸손을 먹고 산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말하는 이의 독선과 오만은 말을 죽인다. 겸손으로 무장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면 성실과 용기와 책임감도 같이 생겨난다. “겸손이 밥 먹여주느냐”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지만, 겸손은 권력의 속성에 대한 해독제로서, 권력의 유혹을 거부하는 것 이상으로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겸손해지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며, 그것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구조 탓’과 ‘경제 탓’을 넘어선다.
겸손을 잃은 오만한 권력에 선의는 그야말로 독약이 될 수 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일을 할 때엔 겸손하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 오히려 큰소리로 호통을 쳐가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자기 무덤 파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 해도 자신의 ‘인정 욕구’나 ‘도덕적 우월감’을 자제하는 겸손을 보일 때에 비로소 자신의 소신을 실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늘 다른 사람의 허물은 현미경으로 관찰하려 들면서 자신의 허물은 망원경으로도 보지 않으려는 독선과 오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바버라 터크먼은 “권력이 독선을 낳고, 국민에게 명령하는 힘을 가지면 안하무인이 되고, 권력을 행사하는 폭과 깊이가 늘어남에 따라 권력에 따르는 책임은 점점 엷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선과 독주로 일관하면 포용과 타협을 적대시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른바 ‘내로남불’의 화신으로 변해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과 비난, 아니 악다구니를 써대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희생과 순수성의 함정을 경계하면서 권력감정을 권력욕 못지않게 자기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권은 ‘선한 권력’인가?
문재인 정권은 스스로 ‘선한 권력’임을 내세운다. 아예 DNA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자들은 그 ‘선한 DNA’를 앞세워 정권 권력을 옹호하며, 그 과정에서 비판자들에게 온갖 모멸적인 딱지를 붙여대는 ‘도덕적 폭력’을 행사한다. 이른바 ‘좌표 찍고, 벌떼 공격’으로 대변되는 일부 지지자들의 전투적 행태는 문재인 정권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그들은 온갖 아름다운 대의(大義)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옳음과 선함을 강변한다. 정권 권력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정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까지 누리면서 그것을 무기 삼아 정권 비판에 호통을 치거나 욕설을 해대고 있다.
한국인들은 지도자를 필요 이상으로 추종하는 동시에 지도자가 가진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유별난 ‘지도자 추종주의’ 문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지도자 민주주의’ 국가다. 오랜 세월 동안 정당은 포장마차나 천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체험한 학습 효과도 적잖이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물 중심주의’ 문화가 더 큰 원인이다. 더구나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은 거의 ‘성인’ 반열에 오른 인물로 추앙된다. 지도자 추종은 지도자 경배로 이어진다. 그래서 지도자를 필요 이상으로 극찬하거나 정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매도하는 양극단의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문재인 정권의 기본적인 국정 운영과 정치 프레임은 ‘적대적 공생’이다. 강경한 독선과 오만을 저지름으로써 반대편의 강경한 극우보수 세력을 키워주고, 이런 구도하에서 다수 대중이 문재인 정권의 ‘독선과 오만’ 행태를 곰팡이가 필 정도로 낡아빠진 극우보수 행태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어 다수 지지를 얻어내는 동시에 장기 집권을 꾀할 수 있다는 셈법이다. 그러나 보수의 수준이 진보의 수준을 결정하고, 진보의 수준이 보수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 간단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잊고 정권 탄생을 지지한 유권자들, 특히 그중에서도 열성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국정 운영을 하는 정권들이 있다. 물론 문재인 정권 역시 그런 정권들 중의 하나다. 정치에서 극단적인 불균형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양극화로 흐르면 희망이 없다. 갈등을 빚는 양측 모두 정열적인 강경파들이 득세해 증오의 대결을 벌이는 판에서 그 어떤 해법이 모색될 수 있겠는가.
미국의 급진적 빈민운동가인 솔 알린스키는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은 타협할 수 있고 타협해야 마땅한 방법론마저 원칙으로 여겨 타협을 거부한 외골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닐까? 반면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원칙에는 한없이 신축적이고 너그러운 여유를 보여온 게 아닐까? 즉, 경쟁 또는 적대 세력에는 원칙의 최대주의, 자기 또는 동맹 세력에는 원칙의 최소주의를 실천해온 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선택적 타협’이라고 해야 할까?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해 보면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선의의 위험성’은 진보주의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건만, 그들은 ‘선의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보수의 경고를 오히려 ‘선의 만능주의’를 더 밀어붙여야 할 이유로 생각한다. 문재인이 ‘선의 만능주의’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며,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문제가 ‘선의 만능주의’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바라는 것은 ‘선한 권력’이지만, 권력 주체가 스스로 ‘선한 권력’임을 내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른바 ‘내로남불’과 ‘남탓’의 상례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악한 게 아니다. 인간인 이상 권력을 쓰는 사람 자체가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선한 권력’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더 큰일을 하기 위해 ‘자기 보호’가 필요하며, 따라서 권력을 어느 정도 오·남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타락하고 몰락한 ‘선한 권력’이 인류 역사에는 무수히 많았다. 결국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책속으로
미국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2004)에서 아예 ‘이타적 권력’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타적 지도자는 설명하기가 쉽다. 관심과 숭배의 중심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추종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엄청난 정서적 에너지를 얻는다.” 사람들의 권력 의지나 권력욕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헌신이 폄하되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걸 인정해야 그런 헌신 끝에 권력을 갖게 되더라도 타락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권력욕을 ‘신념’으로 포장하거나 착각하면서 권력욕이 없는 것처럼 아예 그걸 지워버리는 일이다. --- p.23, 「왜 권력욕은 오직 죽어서만 멈추는가?」 중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권력을 선하게 쓸 것으로 믿고 지지했던 권력자들마저 ‘권력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노예’가 되는 모습에 절망하기도 한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말마따나, “권력은 치사한 것이다”. 실제로 권력을 접하거나 상대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권력이 치사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권력을 갖고 나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해서 왔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부패와 타락의 길로 내달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이 외쳐지고 있을 게다. 잊지 말자. 부패는 권력의 숙명이라는 것을.
--- p.50~51, 「왜 부패는 권력의 숙명인가?」 중에서
권력은 언제든지 폭력으로 변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이라는 점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S. Wolin, 1922~2015)은 “권력의 본질적인 핵심은 폭력이며 권력의 행사는 종종 누군가의 신체나 재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물론 폭력과는 거리가 먼 권력의 이상을 상상한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가 미국 정치학자이자 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다. 『폭력론』(1970)에서 권력과 폭력을 구분한 아렌트는 “폭력은 언제나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며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전자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고 했다. --- p.89~90, 「왜 폭력을 쓰지 않는 권력이 더 강한가?」 중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대통령제 국가의 숙명인가? 관련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내각제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것인바, 그것만으론 다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서민 지도자’? ‘보통 사람’? 사람들은 입으로는 그런 이미지의 지도자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가슴으론 그런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미국 정치학자 어윈 하그로브(Erwin C. Hargrove)는 대통령이 조언자들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경외(敬畏)’를 파괴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대통령 자신도 그걸 원치 않는다. 모든 나라의 지도자가 실제보다 큰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쇼를 한다. --- p.161~162, 「왜 대통령은 ‘제왕’이 되었는가?」 중에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겸손은 권력에의 의지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고,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는 “잘나가는 사람이 겸손하긴 쉽지만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겸손하긴 어렵다”고 했다.326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겸손에 대한 속물적 이해에 따르자면 그렇다. 그런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겸손을 실천하자는 것이지만, 스스로 “지역언론은 별 볼 일 없는 언론이기에 겸손하기 어려운 건가?”라고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어차피 ‘권력자 모델’을 흉내만 낼 뿐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 모델’과 같은 정반대의 모델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 p.205~206, 「왜 권력자는 사람을 개미로 볼까?」 중에서
로버트슨은 개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권력감은 코카인과 같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권력감은 도파민이라는 신경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해 뇌의 중독 중추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집단의 하위에 있는 개코원숭이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도파민 분비량이 늘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공격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쪽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로버트슨은 “권력이 강할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된다”며 “절대 권력의 속성을 생물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버트슨은 “권력은 매우 파워풀한 약물이다(Power is a very powerful drug)”며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고 말한다. --- p.260~261, 「왜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뀌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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