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어머니의 편지
어용선] 어머니
[김재석] 어머니
[윤일현] 어머니와 소풍
[김초혜] 어머니 11
[아모스 R 웰스] 어머니들과 타인들
[김초혜] 어머니 50
[문정희] 할머니와 어머니 -나의 보수주의-
[함민복] 어머니 1
[박형준] 어머니
[김용락] 어머니
[백인희] 어머니
[이정하] 어머니
[이정하] 어머니
[이성복] 어머니
[고진하] 어머니의 房
[김재진] 어머니
[김동환] 어머니 . 1
[정호승]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강인봉] 어머니 1
[이해인]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조태일] 어머니
'어머니의 편지' - 임태주
[김영재] 어머니의 편지
맞춤법이 엉망인
고향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나의 마음은
웬일일까
가을 들풀처럼
눈물겹다.
[어용선] 어머니
소주 두 잔에 취하시던 어머니
오늘은 돌아와 보니
소주 반 병 드시고 토하십니다.
지주의 맏딸로 태어났어도
조실부모하여 이집 저집을 옮겨다니다가
동대문 평화시장 어느 공장
미싱 밟으며 장사하다
굵은 손마디 주름지며
시동생들 술주정에 화만 쌓여
속병 앓아 누운들 다독거려줄 사람없는
함종어씨 맏며느리되어
40 평생을 얹힌 속을
오늘에야 토하십니다.
그 토사물을 받아먹어도 갚지 못할
빚만 지고 살아온 24년
오늘에야 못난 아들
당신 등을 쳐드립니다.
[김재석] 어머니
이미 이룬 꿈 다 버리고
이루지 못한 꿈
먼 훗날 다 버렸다 생각하고
목탁새 만나러
먼 길 떠나려는 날 새벽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門 틈으로 새어드는 소리
비나이다
비나이다
조왕신께
비나이다
[윤일현] 어머니와 소풍
진작에 귀띔이나 하였으면
뒷집 청송댁에서
쌀 한 되는 꿨을텐데......
닭들만 퍼덕이는 이른 새벽
죽 끓이다 홀로 마당에 서서
소풍 간다는 말 차마 못해
전날 밤 자기 전에서야 말을 꺼낸
어린 나의 조숙함을 안스러워 하며
흐르는 눈물 훔치며 하늘을 볼 때
쌀알 같이 촘촘한 새벽 별들은
메말라 평지가 된 당신의 젖가슴에
총알처럼 비수처럼 내려와 박히고
당신은 서럽게 서럽게 우셨습니다
끓는 죽에서 쌀알 건져
숯불에 졸여 밥처럼 만들어
백철 도시락에 꼭꼭 눌러담고
고구마 두 개,감 세 개
밤늦게 마련한 말표 사이다 한 병
보자기에 싸는 당신의 눈에선
피보다 진한 눈물 한없이 흘러내려
앞마당에 붉게 핀 맨드라미
더욱 검 붉게 물들였습니다
삽짝문 나서는 철부지에게
십원짜리 하나 꼭 쥐어주며
잘 놀다 오너라 나직이 당부할 때
툇마루
밑 복실이도 쪼르르 뛰어나와
어머니 치마 물고 꼬리치며 까불대고
붉게 물든 앞산이 치맛자락 날리며
너울너울 춤추며 우리집으로 내려와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어서 데려 갔습니다
강굽이 내려다 보이는 검단동 산마루
보물찾기 노래자랑 정신없이 놀다가
소풍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야바위꾼
빙빙도는 나무원판 위 닭털달린 작은 화살로
일 원 주고 꽂아보고 일 원 주고 또 꽂아보고
한푼도 남김없이 십 원 다 날려도
그 날은 그렇게도 즐거웠습니다
저물도록 놀다가 돌아오는 방천길
저 멀리 뚝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며
노을에 젖어있던 당신의 모습
강물과 함께 세월은 흘러가도
당신의 모습 당신의 눈물
내 가슴 속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겁니다
[윤일현 시집 "낙동강" 중에서]
[김초혜] 어머니 11
꿈에
울고 난 새벽
가슴에 묻힌
어머니 무덤에
무슨 꽃이 피었던가
뒷산골에
부엉이 울다 가면
그 산에 가득한
어머니 얼굴
현(絃)이 끊기고
말았던가
하늘빛이
변했던가
꽃필 날
다시 없을
뿌리가 뒤집힌
나무들은
생명이 병보다
더 아프단다
[아모스 R 웰스] 어머니들과 타인들
다른 사람들은 떠드는 소리에 피곤해 하나
어머니들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넘어졌기 때문에 꾸짖으나
어머니들은 입맞추고 일으켜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간 우리를 사랑하지만
어머니들은 꾸준하게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용서하고도 미워하지만
어머니들은 용서하고는 잊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전 성적표를 기억하지만
어머니들은 그것을 결코 숨겨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점점 더 의심이 많아지지만
어머니들은 여전히 우리들을 믿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버리지만
어머니들은 그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생1990/5]
[김초혜] 어머니 50
빛 중에
해가 으뜸이듯이
사람 중에
어머니 제일이시네
학문을 많이
익힌 건 아니지만
사람의 법도(法道)
잘 다루시었고
의학을 몰라
의술은 아니어도
자식의 병
신통으로 다스리고
당신의 병은
깊어도
앓지 않으시고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
숨어 있답니까
[문정희] 할머니와 어머니 -나의 보수주의-
김포 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사랑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웬 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함민복] 어머니 1
묵시록
의자에 앉는다
쪼그려 앉으신다
머리카락이 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시다
가위를 고른다
칫솔을 손질하신다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을 염색하신다
잘려나가며 통증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을 욕한다
염색되며 아픔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에 아픔을 느끼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되어 살아온 날들을 반성한다
머리카락 되어 침묵하신다
밥상을 대한다
밥상을 대하신다
밥을 먹는다
밥을 드신다
밥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 골라낸다
넌지시 바라보신다
앗, 염색
(네 흰밥 속에 내 흰 머리카락 들어가면 네 목구멍 멜까봐)
[박형준] 어머니
낮에 나온 반달, 나를 업고
피투성이 자갈길을 건너온
뭉툭하고 둥근 발톱이
혼자 사는 변두리 아파트 창가에 걸려 있다
하얗게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나가버린,
낮에 잘못 나온 반달이여
[김용락] 어머니
서민아파트의 날품 밤 깍는 어머니들
시커먼 아궁이 속 같은 콘크리트 출입구가
기약 없는 생활처럼 너무 어둡다
목에 풀칠하고 자식 위하는 일이라면
밤 껍데기뿐만 아니라
자기 껍데기마저 사정없이 벗겨 내려는 듯이
조금의 틈도 없이 두 손을 놀리는 그 사이로
언뜻 파랗게 곧추선 칼 끝이 하늘을 찌른다
그 주위에는 갈 곳 없는 아이들 몇이서
코딱지를 떼며 어슬렁거리고
도시의 찬바람 속에서
더욱 가난하게 드러나는 어머니들의 노동
그 속에는 시퍼렇게 다져놓고
속으로만 앓아온 당신들의 눈먼 반평생이 들어앉아 있다
비로소 그 속에 나도 있고 혁명도 있지만
오늘은 생명의 싹이 더 크게 보인다
-- 창비시선.148 /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백인희] 어머니
질곡의 세월에 거북등같이 굽어버린
내 어머니의 등줄기는
가을 별 만큼이나 따가운 빛으로
내 눈을 감기운다
어릴적 나의 꿈이
어머니의 꿈이기도 했으련만
굽이굽이 모진 세월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네
어머니 !
소리 없는 가르침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을 깨닫습니다.
깨달음 그대로 살아 가렵니다.
[이정하]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시 하나 애절하게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도 슬픈 시 하나를.
그러나 불로보기만 해도 목메이는 어머니 이름
어머니, 하고 써놓고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
[이성복] 어머니
나는 처음에 봉산탈춤의 사자춤 추는 가면인 줄 알았다
십여 년 전 총 맞아 죽은 아들의 무덤 앞에 풀뿌리 쥐어뜯
으며 통곡하는 팔순 어머니 자신의 가슴에 남의 가슴에 쪼
그라든 주먹으로 못을 박으며 흰 머리 헝클어 무덤을 덮는
어머니 내일이면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제 명에 죽지
못한 아들의 무덤을 맨이마로 바수고 바수는 어머니 대관절
자식이 무엇기이에, 대관절 어찌 그리 귀여운 자식이 있었
기에 통곡으로 꿈틀거리는 봉산탈춤의 사자탈 같은 어머니
[고진하] 어머니의 房
어머니의 방은 토굴처럼 어둡다
어머니, 박쥐떼가 둥우리를 틀겠어요, 해도
희미한 웃음 띤 낯빛으로
괜찮다, 하시고는 으레 불을 켜시지 않는다
오랜 날 동안
어둠에 익숙해지신 어머니의 몸은
심해에 사는 해골을 닮은 물고기처럼
스스로 빛을 뿜는 발광체가 되신 것일까, 흐린 기억의
뻘 속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바지락, 동죽, 가무락조개,
여직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과
마지막 남은 혈기 다 해 가슴 속에
푸른 해초 섞어 끓이는
바다에서의 半生을 반추하는 데는 차라리
짙은 어둠 속이 낫다는 것일까, 얼굴 가득 덮인
검버섯 무수한 잔주름살 속으로 잦아드는
낯선 운명을 더욱 낯설게 덧칠하는
치렁치렁한 어둠 속, 무엇일까, 옻칠된 검은 장롱에
촘촘히 박힌 자개처럼 빛나는 저것은
[김재진] 어머니
엄마,
우리엄마, 하고 불러봅니다.
철들고, 어느새 나이 마흔후딱넘어
한번도 흘려보지 않은 눈물흐릅니다.
정월대보름입니다. 마흔넘어 처음보는
보름달입니다.
눈 내린듯 환한 밤길걸어
술 받으러가는 길이었습니다.
달아,
달 본지 십년도 이십년 더 된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았기에 눈물흘린지
십년도 이십년도 더 된것 같습니다.
어머니,
목메는 이름입니다.
어머니,
세상의 아픈사람들 다 모여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세상의 섧븐 사람들 다 모여 힘껏달불 돌리는
어머니,
대보름입니다.
"우리에게 어머니란 항상 특별한 존재시죠?"
[김동환] 어머니 . 1
그만 들어가세요 어머니
그래 조심해서 가거라
마늘과 쌀을 승용차에 싣고 나서도
궂이 서 계신 어머니를 골목 어귀까지 모셔다 드렸다
차를 돌려 가려는데
이 쪽을 바라보며 골목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헤드라이트에 비쳤다
차에서 내려 다시 집 가까이 바래다 드렸다
천천히 조심해서 가거라
네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어머니
며칠 있다 또 내려올께요
차에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를 켜니
어머니는 아직도 이 쪽을 바라보시며
그대로 골목길에 앉아 계셨다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달에 한 번도 안 오는 놈이
며칠 있다 또 내려온다니
뻔한놈 뻔한놈 뻐꾸기가 울었다
[정호승]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비가 온다
어머니의 늙은 젖꼭지를 만지며 바람이 분다
비는 하루 종일 그쳤다가 절벽 위에 희디흰 뿌리를 내리고
바람은 평생 동안 불다가 드디어 풀잎 위에 고요히 절벽을 올려놓는다
나는 배고픈 달팽이처럼 느리게 어머니 젖가슴 위로 기어올라가 운다
사랑은 언제나 어머니를 천만번 죽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으나
때로는 실패한 사랑도 아름다움을 남긴다
사랑에 실패한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늙은 젖가슴
장마비에 떠내려간 무덤 같은 젖꽃판에 얼굴을 묻고
나는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포기하고 싶다
뿌리에 흐르는 빗소리가 되어
절벽 위에 부는 바람이 되어
나 자신의 적인 나 자신을
나 자신의 증오인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싶다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 1997) 中에서 -
[강인봉] 어머니 1
비록 삯을 기다리는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福은, 초록빛 오랜 인내에서 오는 것이라고
조용히 웃는 法을 가르쳐주신 뒤
당신은 가만히 등을 밀고 계셨지.
저 果園에도
들길에도
노을을 밟고 피곤히 돌아오면
싱그런 과일을 닦고 있는 어머니,
거기서 나는 문득
달을 만나고
당신은 달에서 물을 길어올리시고.
거울은 닦을수록 솟아나는 샘이 있어
두고두고 반복하는 한도 고운 그 인연의
고요히 타오르는 사랑의 불 받드시고
밤 깊어 더욱 초롱한 그 눈매.
우리들 어쩌다 철이 들어
그 속에 몰래 들어가면
아, 벌써 다 알고
소리없이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이여.
아무리 문질러도 때도 안 묻는
그 깊은 信仰의
지금도 우리들 江을 건너면,
저 은은히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 강인봉 <첫사랑>,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해인]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어머니.
제 앞길만 가리며
바삐 사는 자식들에게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끝없는 용서로
-------------
우리를 감싸안은 어머니.
당신의 고통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 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기쁨보다는 근심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은
어머니의 언덕길에선
하얗게 머리 푼 억새풀처럼
흔들리는 슬픔도 모두 기도가 됩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때
눈물속에 불러 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어도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어머니.
아름답게 열려 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어제의 기억을 묻고
우리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살아 있는 강이 되겠습니다.
목마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푸른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조태일] 어머니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오셔
일곱 자식 뿌리시고
서른일곱에
남편 손수 흙에 묻으신 뒤,
스무 해 동안을
보따리 머리에 이시고
이남 땅 온 고을을
당신 손금인 양 뚝심으로 누비시고
휜히 익히시더니,
육십 고개 넘기시고도
일곱 자식 어찌 사나
옛 솜씨 아슬아슬 밝히시며
흩어진 자식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시는 분.
에미도 모르는 소리 끄적여서
어디다 쓰느냐 돈 나온다더냐
시 쓰는 것 겨우 겨우 꾸짖으시고,
돌아낮아 침침한 눈 비비시며
주름진 맨손바닥으로
손주놈의 코를 행행 훔져주시는 분.
- 조태일님의 [가거도] 시집 중에서 -
'어머니의 편지' 임태주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저녁놀(박경규 작곡) - Roman De Mareu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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