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힘이 세다 김이하
대가리 1 고희림
네가 올 때까지 이건청
나비 이화은
쑥 캐기
들꽃 문효치
소쩍새 오세영
아르헨티나-배낭 하나와 낡은 운동화-배경숙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노루오줌꽃
명태 이동순
너희들이 존경해야할 것 들 이건청
수장 樹葬 문인수
하나의 깃털처럼 이상호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
동치미 오탁번
두레반
瞬間
외연도 나태주
욕지도 문인수
덕적도 이재무
농부 오세영
시1. 장석주
눈물은 힘이 세다
김이하
눈물은 힘이 세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들 많았다, 흘러간 옛날
자식을 세게 키워야 한다고
눈물은 여리디 여린 계집애들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이라고, 눈물은 힘이 없다고
사내새끼란 새끼에게는 모두
그 말을 고막 속으로 꾹꾹 밀어넣었다
귀지로 쌓이고 딱지로 앉은 말이었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하나의 의심도 없이
눈물샘에 자물쇠를 채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얼마나 주책없는 것이냐
참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냐
평등한 것이냐, 아름다운 것이냐
어쩌면 무지개의 발원지가 이 눈물샘은 아니었을까
놀라운 눈물의 발견!
오늘 반달빵 하나
밤늦게 씹어 먹으면서
"여학생이 경찰의 군홧발에 차이고, 시민들이 경찰
의 방패에 맞아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를 끝내 읽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이 늦은 밤의 눈물
그 결을 따라
온몸ㅇ릐 힘줄 벼르는 몸의 말
- 눈물은 힘이 세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온몸으로
그 무지개를 안는다.
대가리 1 고희림
국가는 계산적이었다
냉정하게 분류하고 머리 숫자를 중요시했다
명단에 오른 자와 체포된 자
체포된 자와 도라꾸에 실린 자
골에 도착한 자와 구덩이에 엎드린 자
사살된 자와 사진에 찍혀 미군 보고서에 첨부된 자
<하나 예외, 함께 사살된 젖먹이 아이와 미취학 연령대 소녀>
이들은 오직 대가리 숫자였다
그가 3대 독자이든
그녀가 만삭이든
내일 혼례식을 앞둔 약혼녀든
억울하게 명단에 오른 자든
그가 독립운동을 한 자든 애국자든
그를 죽여 되레 전쟁에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명단에 있고 숫자만 맞으면
그 자는 사살되고 생명은 추상 되어 대가리 숫자가 되어
그 골짝 우렁찬 살생의 함성 울릴 때
나무와 숲의 푸른 눈물에
짝짓기에 겨운 여름 귀뚜리조차 감히 울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대가리를 갖고 놀았다
대가리는 오직,
1960년
군경에 신병이 인계된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단 1,402명
구슬치기처럼 숫자로만 의미를 가졌다
여전히
몸이 가진 삼라만상의 가치 중
오로지, 대가리 숫자만 취급하는
그 버르장머리를 숭상했다
네가 올 때까지
이건청
밤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나면
안되지.
안개 속에서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
이건청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
나비
이화은
저 가벼운 터치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단순한 반복을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현란한 수사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허공을 즈려밟는 위험한 스텝을
꽃에 얽힌 지루한 염문을
한 번쯤
하루쯤
한 生쯤은 몸을 바꾸고 싶은
저 미친 외출을 시라고, 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나
쑥 캐기
쪼그리고 앉아
쉬하는 자세가 가장 좋다
멀리서 보면 제 것을 들여다보는 듯,
허나 정말로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쑥이 다 올려다보고 있다
고로 바지보다는 통치마를 입어라 입어보면 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아니 눈 먼 소녀경이던가?
적당히 자란 연애를 자르듯 칼질은 정확해야 한다
싱싱한 추억으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오금이 저리거든, 오금 저렸던 기억들을 한 칼 한 칼 마음에 저며라
인생 공부에 칼 같은 도움이 된다
쑥 캔 자리는 돌아보지 마라
칼잡이가 뒤를 돌아보면 이미 프로가 아니다
허리가 몹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후유증은 없다
이화은 시집 <미간>
들꽃
문효치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한마디 말도 없이
피네 지네
소쩍새
오세영
얘야,
무엇이든 주고받는 시장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울어서 될 일이란 이제
아무것도 없단다.
울 일이 있어서 우는 것이냐.
이 같은 현실을 우는 것이냐.
소쩍소쩍
봄밤 하염없이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
그러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너와 함께 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시인 밖에 없나니
오늘 밤 나도 왠지 모를 슬픔에 젖은 채
한 잔의 술을 앞에 놓고 밤새워
시를 쓴다.
과거와 현재를 착각하고 사는 새여,
시인이여.
오세영 시집 『바람의 아들들-동물시 抄』
아르헨티나-배낭 하나와 낡은 운동화 배경숙
브에노스 아이레스 한인 민박집에서 보았다
방문을 열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간이침대 곁에는 내 배낭이 놓여 있었다
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거기 그대로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았다
꼭 필요한 소지품을 담은 가방 하나와
몸을 뉘고 쉴 공간 외에 정작 무엇이 더 필요한 가
남아메리카 끝자락까지 이민 온 우리 교포들도
새 삶을 그렇게 시작했으리라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고
일용에 쓰일 단출한 물건 몇과 옷가지
현관에 벗어놓은 낡은 운동화
모든 욕망이 빠져나가는 순정한 상태로
나는 어른의 삶에서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단순함,
자유로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고국을 기억하는 얼얼한 가슴과 눈빛은 덤이었다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무갑사 뒷골짝,
그늘볕을 쬐던 어린 꽃
가는 바람 지나가자
여린 목을 연신 꾸벅댄다
전등선원 동명스님은
깜빡 졸음도 수행이라 했다
꽃도
절밥을 하도 먹어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요새
무갑사엔
허물벗은 봄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다
노루오줌꽃
그런 고린내나는 이름만 아니었다면
눈 제대로 맞추지 않았을 꽃,
제 이름을 숨기고 너스레를 떤다
사관생도 모자깃털을 꽂고
하늘거리는 꽃술
연홍의 싱그러움이 꼼실대지만
나는 알고 있다
뿌리에 노루오줌 냄새를 숨겨둔 것을,
그러나 짐짓 눈감아 준다
꽃빛이 농익은 지금
고운 입술 한껏 사르며
기약 없는 사랑을 쪼고 있다
이름 갖고 따지는 것에 동의할지말지를 두고
흔들리는 채
'노루 제 방귀에 놀라 듯'
나는 저 내음을 매달고 허허로운 들판을 휑하니 달린다
류병구 시인 시집 「달빛 한 줌」
명태
이동순
돌담 틈으로
바람 들어오는 소리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
한쪽 다리를 절면서
힘겹게 걸어오시던 날품팔이 아부지
발자국 소리
이런 저녁
꼭 상에 오르던 곤이 명란은
덕장에서 종일 지게 짐 지고 울 아부지
품값으로 받아 오신 찬거리
어두컴컴한 부엌에선 엄마 혼자서
가마솥에 명태 몇 마리 넣고 고춧가루 슬슬 뿌려
간 맞추고 파 송송 썰어 넣으면
서럽게 우러나던 국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말없이 숟가락만 움직이던 식구들
평생 노동으로 구부정한 아부지 등은
점점 낙타를 닮아 가는데 그
것이 애가 타서 석탄가루 덮인 항구 쪽 내려다보면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 오던
더운 눈물방울
이동순 시집 '묵호'
너희들이 존경해야할 것 들
이건청
손주 한울아 한결아,
다음은 할애비가 평생 곁에 두고 싶엇던 이웃들이다.
이들을 늘 존경하도록 하여라.
<<....이슬, 땅강아지, 버들치, 패랭이꽃, 노고지리, 가을들판에서 여문 씨앗들,
그리고, 좋은 시를 300편쯤 즐기면서 암송할 수 있는 사람,
밝은 눈, 맑은 귀로 세상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
수장 樹葬
문인수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면 어떨까.
平平하게 밟아
그 일생이 보이지 않으면 되겠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닳은 족적은 그동안
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죄 罪,
쓸어 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그 걸음을 빨아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
어떤 춤으로 벌서면 다 풀어낼 수 있겠는지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배롱나무든 이제
오래, 아름다운 감옥이었으면 좋겠다.
하나의 깃털처럼
이상호
그래 이만큼이면 됐네
안개 자욱한 들판에서
무연히 날아오르는 새처럼
새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하나의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가겠네
내가 기웃거리던 시장 골목
내가 사랑하던 이웃들
너무 유정하여 때로는
희고 큰 그리움 꽃으로 피어날지 모르지만
날아가는 새가 뒤를 돌아보지 않듯이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저 소란스런 골목
더 사랑하지 못해 안달하던 그대
이제는 모두 안녕 !
슬픔이란 한 때의 안개 같은 것
햇살 퍼지면 이내 말끔히 사라지고
또 다른 꽃들 피어나 지친 그대의 벗이 되리니
나 오늘 하나의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가겠네.
시집 <시로 쓴 유언>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트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동치미
오탁번
감곡에 사는 여자들이
꽃 피는 원서헌에 놀러왔다
국수 말아 점심 먹고
술기운이 노을빛으로 물들 때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내 옆에 선 여자가 살갑게 말했다
-이래도 되죠?
내 팔짱을 꼭 꼈다
-더 꼭!
사진 찍는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때면 나는
마냥 달콤한 생각에
푹 빠진다
-나랑 사랑이 하고 싶은 걸까
헤어질 때
또 팔짱을 꼭 꼈다
나는 살짝 속삭였다
-나랑 同寢이 하고 싶지?
속삭이는 내 말을 듣고
그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치미 먹고 싶으세요?
허허, 나는 꼭 이렇다니까!
두레반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는다
이 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햇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 비치는
조붓한 우리집 아침 두레반
瞬間
음력 4월 15일
夏安居 結制날 아침
백담사 극락보전 부처님께
三拜 올리는 스님을
멀찌가니 뒤에서 바라보다가
한 瞬間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섬돌 위에
스님이 벗어놓은
힌 고무신 한 켤레가
뇌성벽력 치는 하늘로
노 저어가는
작은 돛배처럼 보였다
三拜 올릴 때
무슨 생각했느냐는
나의 물음에
-아무 생각 안 했어
스님은 덤덤히 웃었다
은하수 물녘까지
한 瞬間에 다녀온 듯
袈裟 자락이 서늘했다
오탁번 시집 <우리 동네>
외연도
나태주
길은 마을에서도 자주 막히고
막힐 듯 하다가도 자주 뚫렸다
더러는 사람이 살다 떠난 빈집을 지키며
능소화 혼자 피었다 지고
골목길의 수국도 혼자 늙어가고 있었다
길은 또 사람을 데리고 한사코
등성이로 치달아 오른다
없을 것 같은 바다를 슬쩍 보여주고는
물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사람보다도 일찍
일어난 새소리들은 숲 속에서
또 하나의 숲을 이루고
우리는 한 가지 새소리를 두고
서로 다른 새의 이름이라 우기면서
잠시 두고 온 육지 사람들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욕지도
문인수
섬의 길들은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유동마을 덕동마을 도동마을 대송마을 돌아오는데
내 마음도 꼬아 샛길 치며 꼬리 감추는 길,
녹음 속 바람 아래 낮은 지붕들을 묶거나
등이 힌 만灣에 내려가 작은 고깃배를 푼다.
혹은 후박나무꽃 향기의 숱한 파도소리로 풀려서
그 노래가 밀어올린 저 절벽 꼭대기에
야생으로 나간 염소들이 몰려 있다.
섬의 길들은 섬 안으로 되돌아 간다
덕적도
이재무
생소한 얼굴로 저녁이 오고
새로 맺은 인연에게 눈 맞추다
저녁 해가 배음으로 깔리는 바다
수박처럼 둥둥 떠 있는 섬들
저 아름다운 간격 앞에 머리 숙이다
한 알의 모래알로 뒹굴며
낮 동안 달구어진 바닷물 힘껏 끌어당긴다
농부
오세영
농부는
대지의 성감대가 어디 있는지를
잘 안다.
욕망에 들뜬 열을 가누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기조차 힘든 어느 봄날,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쓸어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아, 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 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
대지는 잠시 전율한다.
맨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땀을 닦는 농부의 그 황홀한 노동,
그는 이미
대지가 언제 출산의 기쁨을 가질까를 안다.
그의 튼실한 남근이 또
언제 일어설지를 안다.
오세영 생태시집 '푸른 스커트의 지퍼
시1. 장석주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이니
피와 살로 살고 남은 시간은 몸에 저축한다
허나 몸은 사상누각이니
그 집이 영원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낙타를 만나거든 낙타가 되고
모래바람 이는 사막이 되라
순례자를 만나거든 옛길이 되고
오래된 성전이 되라.
비를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천둥으로 울고 번개로 화답하라
장석주 시집 '몽해항로'|
Eva Cassidy-Imagine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복(飮福 - 아버지) 외 (0) | 2016.07.09 |
---|---|
어머니 (0) | 2016.07.09 |
세월호 2주기 -추모시 모음 (0) | 2016.04.16 |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0) | 2016.04.02 |
이상국 -틈 外 (0) | 201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