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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이야기가 있는 한국인의 숲

by 이성근 2020. 9. 19.

양떼의 저주가 봄이면 진분홍 선물로

방목 양들이 다 뜯어먹고, 독 있는 산철쭉만 남겨 

 자연이 산딸기 앞세워 복원8년 뒤면 처음처럼

바래봉 능선의 산철쭉 군락.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제공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숲의 해’이다. 숲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노력이 중요함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현명한 손길은 자연과 인간을 모두 살린다. 사람의 삶과 역사, 생태가 어울어진 대표적인 숲을 찾아 자연과 인간, 보전과 이용의 갈등을 푸는 길을 성찰해 본다. 편집자.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자리한 지리산 바래봉(해발 1165m)은 해마다 5월이면 진분홍 산철쭉 꽃으로 물든다.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라는 유명세를 타고 한 달도 안 되는 개화기 동안 약 20만명의 탐방객이 꽃구경을 온다.

 

그러나 이 철쭉 군락이 1970년대 호주에서 들여온 양떼가 수십년 동안 산지를 훼손한 결과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양떼가 사라진 뒤 산철쭉의 쇠퇴현상이 두드러져, 그 복원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자연의 가차없는 복원력 막을까, 독특한 문화경관 유지할까

 

 

▲바래봉 능선에는 해마다 약 20만 명의 탐방객이 몰린다.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제공

 

양떼가 다니던 바로 그 길을 탐방객이 무리지어 걷고 있다. 산철쭉은 운봉읍 가축유전자원시험장 목초지가 끝나고 바래봉 기슭이 시작되는 곳부터 탐방로 양쪽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고, 바래봉 정상부터 능선을 따라 팔랑치와 부운치에 이르는 능선 양쪽에 꽃터널을 이룬다. 철쭉 군락의 면적은 무려 22㏊에 이른다.

 

이곳의 철쭉사진을 찍어온 류오선(62·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씨는 “초록 양탄자 같은 목초 위로 진분홍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전국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경치”라며 “최근 산딸기가 철쭉 군락에 침입하는 등 단정한 철쭉 군락 모습이 사라져 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문제는 양들이 남긴 ‘선물’이 한시적이라는 데 있다. 자연의 복원력은 약 20년 동안 바래봉을 완강히 지키던 산철쭉 군락을 흔들고 있다. 일시에 철쭉 꽃망울이 터지듯 바래봉의 미래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이 터져나오고 있다. 자연의 가차없는 복원력을 막는 게 바람직할까, 또는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바래봉에만 있는 이 독특한 문화경관을 유지하는 것이 옳을까.

 

지난 3일 ‘제 17회 지리산 운봉 바래봉 철쭉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린 운봉읍 사무소에서 자뭇 심각한 토론회가 열렸다. 서부지방산림청과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가 연 이 자리엔 두 기관과 주민대표, 시민단체, 생태 전문가들이 참가해 바래봉의 산철쭉 복원 문제를 논의했다.

 

서부지방산림청은 2007년 국립공원과 협의를 거쳐 바래봉 일대 21㏊에 새로 산철쭉을 심는 한편 73㏊에서 산딸기, 미역줄나무 등 ‘잡 관목’을 제거하는 내용의 복원 계획을 수립했다. 올해부터 5년 동안 10만 그루의 산철쭉을 심을 계획이었다.

  

 “철쭉 군락도 살리고 자연생태도 살리는 두 마리 토끼를”

 

▶운봉 바래봉 철쭉 군락지 지도(위). 바래봉 기슭에 있는 국립축산과학원 가축유전자시험장 전경.

 

이날 모임은 전문가와 시민단체가 국립공원인 지리산에 산철쭉을 대량 식재하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관련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4월 이후 세번째 연 토론회였다.

 

오구균 호남대 조경학과 교수는 “바래봉은 최초 국립공원에 걸맞은 생태경관을 갖춰야 한다”며 산철쭉 위주의 식재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바래봉이 지리산의 또다른 봉우리와 비슷하게 바뀌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버텼다. 이영진(74) 전 운봉 애향회장은 “주민들이 애써 지키고 가꿔 이제 전국의 명물이 됐는데 어떻게든 복원해 살려나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윤지홍 남원시의원은 “1990년대까지 1만 2000여명이던 운봉읍 인구가 현재 4300여명이고 그 절반이 노인”이라며 “이제 가진 건 철쭉밖에 없다”고 주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전했다.

 

김준선 순천대 산림자원학과 교수는 “산림의 아름다움에는 지역 주민이 그 산을 가꾸기 위해 들인 노력도 포함된다”며 바래봉 복원에 생태학과 함께 주민의 염원도 전향적으로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

 

주무기관인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양쪽 주장을 타협시킬 짐을 지게 됐다. 김용무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장은 “철쭉 군락도 살리고 자연생태도 살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밖에 없다”며 “훼손지역 등에 우선 산철쭉을 심고 정상부 등은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농가소득 위해 호주에서 들여와

 

▲양을 방목할 당시의 바래봉 정상 모습.

 

바래봉 산철쭉 군락의 기원은 1968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도 면양을 길러 농가소득을 올려보자고 말한 데서 비롯된다. 1972년 운봉에 한·호 면양시범농장이 국립종축장의 분소로 설치되면서 바래봉 일대는 가축몰이 개가 3000~4000마리의 양떼를 이끄는 한국 속의 호주로 바뀌었다.

 

당시 ‘털깎이 달인’으로 불리던 한종식(59) 가축유전자시험장 반장은 “5월부터 10월까지 양들을 바래봉 일대에서 방목했는데, 양들이 다른 풀이나 나무는 모조리 뜯어먹었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은 살아남았다”고 회고했다.

 

산비탈을 초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획 속에 다수의 양을 몰아넣어 관목과 풀을 모조리 뜯어먹게 한 뒤 발굽에 패인 곳에 목초 씨앗을 뿌리고 다음 구획으로 옮겨 가는 ‘제경법’을 처음 도입했다.

 

양들의 발굽 아래 바래봉 일대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지리산이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고 1971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됐지만, 공원 안인 바래봉까지 양떼를 위한 도로는 아무런 차질없이 건설됐다.

 

그러나 양들에게 선택받은 산철쭉은 목초지에 뿌린 비료가 풍부하고 경쟁자가 없는 양 이동통로를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경제성이 떨어진 목양 방목은 중단됐지만 점차 무성해진 산철쭉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처음부터 철쭉 보전에 나선 것은 아니다. 이병채 남원문화원장은 "바래봉에는 현재의 산철쭉 말고도 고산지대에 사는 철쭉도 많았지만 1980년대 말 업자들이 무분별하게 캐가는 바람에 사라졌다"며 "한 명이 구속되는 등 철쭉 도채 파문이 있고 나서 산악인과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산철쭉을 지키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군락 사이사이 이미 노린재나무, 조록싸리, 고광나무 등 돋아나

바래봉 원 식생을 설명하는 오구균 호남대 교수.

양떼가 사라진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바래봉 일대의 생태는 어떤 상태일까. 지난 4일 오구균 호남대 교수와 함께 산철쭉 군락지의 중심인 팔랑치~부운치 능선을 조사했다.

 

능선 등산로 양쪽에 자리잡은 산철쭉 군락을 억센 가시가 있는 산딸기가 밀어내고 있었다. 오 교수는 “광양 백운산에서 나무를 벌채한 곳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산딸기와 미역줄나무”라며 “햇빛을 좋아하는 산딸기도 7~8년 지나면 그늘에 가려 사라지고 정상 숲으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에게 산철쭉을 쫓는 원흉인 산딸기가 자연 복원의 선구자인 셈이다. 산딸기 밑에는 과거 목장의 유산이 외래종 목조를 뚫고 쑥이 돋아나고 있었다.

 

 

▲등산로 양쪽에 빽빽하게 자란 산딸기. 제거의 대상인가 복원의 신호인가.

 

오 교수는 “산철쭉은 원래 중부 이남지역의 산자락에서 주로 자라며 고산의 능선에서 자랄 나무가 아니다”고 말했다. 바람 센 능선에는 철쭉과 진달래가 잘 자란다.

 

산철쭉 군락 사이사이에는 이미 바람 센 능선을 좋아하는 노린재나무, 조록싸리, 고광나무, 떡버들, 쇠물푸레나무, 병꽃나무, 조팝나무 등이 돋아나고 있었고, 이 산의 최종 주인인 신갈나무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바래봉 능선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과 양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가파른 사면으로 가자, 200년은 돼 보이는 대형 철쭉과 30여년생 신갈나무, 야광나무, 떡버들이 훼손되기 이전 이 산의 모습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 교수는 “정상 숲으로 가는 징조인 산딸기를 베어내고 제 자리가 아닌 산철쭉을 심겠다는 건 국립공원 능선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산철쭉도 모두 없애는 것이 옳을까. 오 교수는 “인위적인 식재가 곤란하다는 것이지 기존 산철쭉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며 “이곳은 사람과 양이 선택해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고 해설판 등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산철쭉의 독성

 

산철쭉의 독성은 진달래를 ‘참꽃’, 철쭉을 ‘개꽃’으로 부르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식물 방언에서 흔히 접두어 ‘ 참’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개’는 먹지 못하는 식물을 가리킨다.

 

철쭉에는 ‘그라야노톡신’이란 독성물질이 들어있음이 학술적으로 밝혀져 있다.

 

면양에게 철쭉이 치명적임이 국내에서 밝혀진 일도 있다. 어경연 서울대공원동물원 수의사는 2009년 <한국임상수의학회지>에 낸 논문에서 면양 4마리와 재래산양 5마리에게 정원수를 가지치기 한 철쭉을 먹이로 준 뒤 무기력, 침 흘림, 구토, 호흡곤란 등의 중독증상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산양 1마리는 폐사했다.

 

흔히 진달래는 화전 등 요리 재료로 쓰고 야산에서 꽃을 따 먹기도 한다. 이때 철쭉과 진달래를 구분하지 않으면 사람도 일시적 중독 증상을 겪을 수 있다.

 

북한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중학생 9명이 철쭉을 잘못 따먹고 사망했다고 <오늘의 북한>이 2008년 6월 보도하기도 했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철쭉 꿀을 다량 섭취해도 중독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진달래, 철쭉, 산철쭉 뭐가 다른가

 

▲산철쭉(왼쪽)과 철쭉

 

진달래와 철쭉, 산철쭉은 모두 진달랫과의 식물로 봄철 산을 물들이는 대표적인 야생화이지만 종종 혼동을 일으키는 식물이기도 하다.

 

진달래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피며 잎보다 진한 분홍색 꽃이 먼저 나와 쉽게 구분된다. 철쭉과 산철쭉은 잎과 꽃이 함께 나온다. 진달래가 강렬한 분홍색이라면 철쭉은 초록과 어우러진 분홍이란 차이가 있다.

 

철쭉과 산철쭉을 헷갈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주로 산자락에서 철쭉보다 먼저 피는 산철쭉은 꽃이 진한 분홍색이고 잎 끝이 뾰족하다. 철쭉은 고산에 많으며 연분홍색 꽃을 피우고 잎 끝이 주걱모양이라는 차이가 있다.

 

산철쭉이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피는 데 이어 철쭉 꽃은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산철쭉 군락은 지리산 바래봉과 주왕산 상의계곡에 있고, 철쭉 군락은 소백산 연화봉과 지리산 노고단이 유명하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2011. 05. 13 

 

자연 끌어들인 한옥, 구석구석 배인 과학

나무 없는 마당의 상승기류가 대청 통해 시원한 바람 끌어들여

나무 통해 보존과 개발 융합 가능, 이용할 숲과 보존할 숲 잘 가려야

 

» 경주시 양동마을의 전통 한옥 대문. 자연을 향해 열린 구조이다. 사진=탁기형 기자

 

나무는 우리가 흔히 접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우리를 놀랍고도 아름다운 세계로 연결시켜 준다. 특히 나무는 경제와 환경을 같이 키워 준다. 사람들은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이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나무를 통해 보면 이들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과 숲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제발전과 환경보전을 분리해서 고집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창의력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자연애호가 중에는 나무로 만든 제품을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벌목은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이율배반은 숲의 생태학을 잘 몰라서 나오는 것이다. 숲은 이산화탄소 흡수와 산소 생산과 같은 공기정화, 기후조절, 맑은 물 공급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모든 나무를 하나도 자르지 않고 자연림으로만 두면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늘어나기 쉽다.

 

특히, 사람이 만든 숲을 그냥 방치하면 이런 문제가 훨씬 심각해진다. 숲을 만들 때는 ㏊당 3000 그루의 나무를 심는데 이들을 솎아 베지 않고 그냥 방치하면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라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 결과 숲 속에 생물이 살 수 없고 낙엽이 분해되지 않아 수자원 함양이 안 되며 병해충도 많이 발생할 뿐 아니라 숲이 쇠퇴하여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 대관령의 전나무 조림지. 1970년대 조림사업의 대표적인 성공지역이다. 사진=조홍섭 기자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를 보면, 상수리나무림을 잘 가꾸면 30년생일 때 ㏊당 매년 14.5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 그런데 숲이 쇠퇴해 축적된 이산화탄소가 한꺼번에 환경에 방출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따라서 숲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입지에 맞게 계획적으로 나무를 잘라 경제적 수익도 올리고 환경 보전에도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나무는 또한 오래 간다. 늦어도 13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직도 튼튼하다. 이런 나무는 온실가스를 보존하는 탄소 통조림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를 보면, 한 변이 10.5㎝이고 길이가 3m인 정사각형 나무기둥 하나에는 약 6㎏의 탄소가 저장되어 있다. 더구나 건축 재료를 만들 때 건조한 나무에 비해 철강은 191배, 알루미늄은 무려 791배의 에너지가 든다고 한다.

 

따라서 목재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은 제2의 산림을 조성하는 것과 같다. 또한 주택의 수명이 다해도 나무는 계속 여러 가지 용도로 쓸 수 있다. 이렇게 목재를 활용하는 것은 지구온난화를 제어하는 나무-문턱 또는, 나무-고개 구실을 한다.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탄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탄소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탄소가 없었으면 생명의 진화도 어려웠을 것이다.

 

» 서울 가회동 한옥마을의 한 모습. 사진=박미향 기자

 

또한 광합성과 호흡을 비롯한 모든 생명 현상도 탄소가 주요 구성성분인 유기물에 의한 것이다. 탄소 carbon의 어원은 숯을 뜻하는 라틴어 carbo라고 하는데, 사실 숯은 에너지 집약체로 불을 때도 연기도 안 나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아 가장 효율적인 탄소 저장고이다.

 

미래의 에너지 재앙에 대비해 비상용 에너지로 침대 밑을 모두 숯으로 채우자는 사람도 있다. 숯을 방안에 두면 습도 유지와 냄새 제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식이조일 것이다. 재미난 것은 숯은 비결정성 탄소로 결정성인 흑연과 다이아몬드와는 동소체이다. 인류 문화의 핵심인 탄소를 잘 활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나뭇결의 패턴은 사람의 심장박동 리듬과 닮았다고 한다. 나뭇결에는 바람의 살랑거림,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햇빛, 물소리 등이 녹아 있는데, 여기에 새소리, 반딧불이의 반짝거림, 고요함의 파동이 공조된다.

 

이런 나뭇결은 자연의 숨결을 집안으로 들이고 인류가 진화과정에서 나무를 만지면서 형성된 안정감이 녹아 있어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분을 좋게 한다. 목재는 향기도 좋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주며 원적외선에 가까운 열선이 나와 건강에도 이롭다고 한다. 집은 제2의 자궁, 제3의 피부라는 말이 있는데 집에 목재를 많이 쓰면 도시 환경에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는 ‘숨을 쉬는 종이’라고 하듯 공기가 잘 통해 천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다. 빛을 적당히 투과하고 습도와 온도를 조절할 뿐 아니라 한 겹일 때와 두 겹일 때 울림도 달라서 자연은 물론 사람과도 부드럽게 소통한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곳에 따라 창호의 앞뒤로 한지를 붙여서 만든 공기층으로 했던 만큼 한옥은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경주 양동마을의 회재 이언적 선생의 집은 안채가 매우 폐쇄적인 공간인 듯해도 햇볕도 잘 들어오고 바람도 잘 통한다.

» 우리 조상들은 햇빛, 물소리, 바람소리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사진=신준환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발행한 <고택 속 숨은 이야기와 전통과학>을 보면, 한옥은 기둥과 기둥을 한 칸으로 하는데, 한 칸은 약 2.5m로 문이 열리는 것을 고려해 4등분하면 각 부분은 사람의 어깨 넓이보다 조금 넓어 활동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공간 구성이 된다.

 

방은 주로 앉아서 생활할 때 편안한 높이인 2.3m, 대청은 서서 생활할 때 편안한 높이인 3.1m로 짓는다고 한다. 방에 앉아 몸을 기대고 밖을 볼 수 있는 머름(바람을 막거나 모양을 내기 위하여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의 높이, 마루의 높이, 창호와 방문의 길이나 대문의 높이 등 한옥 곳곳에 인체공학적인 전통과학이 녹아 있다.

 

한옥의 처마는 한 여름 태양이 가장 높이 걸리는 남중고도 76.5도일 때는 햇빛을 막아 주지만, 한 겨울 남중고도 29.5도일 때는 집안 깊숙이 햇볕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다. 마당에는 밝은 빛깔의 흙을 깔아 빛을 반사하여 집안을 밝게 비춰주어 중국의 전통 가옥에 비해 한옥의 처마가 깊은 편임에도 내부는 밝다고 한다.

 

마당 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을수록 빛이 더 잘 반사되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마당을 잘 쓸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마당에 나무를 심지만, 우리는 마당(口)에 나무(木)를 심으면 곤(困) 자처럼 되어 괴롭다고 하였다.

 

우리 한옥은 마당의 열기를 받은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대청 뒤의 창호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만든 구조인데, 여기에 나무를 심으면 바람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대청마루는 시원하고, 마루 아래는 텅 비워 놓아서 통풍이 잘 되고 시원하게 만들어 음식을 보관하는 광의 냉방 시스템으로도 활용하였다고 한다.

 

우리 조상은 대부분 정원을 집안에 가두지 않고 사방의 자연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효과를 노렸다. 하회마을의 북촌에서는 마을의 주산, 부용대, 낙동강, 남산과 병산이 다 보이고, 명재 윤증 선생의 고택에서는 주변 풍광은 물론 멀리 계룡산도 볼 수 있다.

 

» 차경의 효과. 명재 윤증 고택에서 저 멀리 계룡산이 보인다. 사진=신준환

 

그러나 자연과 소통하는 한옥이니 사람이 살지 않으면 곧 무너지고 야생동물의 소굴이 되기 쉽다. 그런데, 사람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자연과 격리될 수도 없다.

 

나무를 활용하는데 눈이 어두워 중요한 자연림을 없애서도 안 된다. 우리나라 자연의 맥락으로 보아서 자연림이 있어야 할 곳은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 인공림과 자연림 어느 하나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대립을 해소하고 원융(圓融)을 지향하는 나무를 보고 사람과 자연의 공생을 배워야 할 것이다.

신준환/ 국립수목원장·농학박사    2013. 06. 25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생태계 신비 고스란히

③철원 소이산

논밭과 집터는 숲과 습지로…출입통제 덕에 평지 숲 원형 간직

연료림 심은 아까시나무 우세, 조사 전무해 "뭐가 있을지 모른다"

 

 


소이산 부근 지뢰지대 안의 숲 모습. 평지여서 과거 논이거나 집터였을 것이다.

 

텃밭이 딸린 집터를 60년쯤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바뀔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가면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한 뒤 군사목적으로 매설한 지뢰가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사요리 산 1번지가 주소인 소이산(해발 362m)을 찾았다.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희게 물들이고 있는 아까시나무 꽃을 따라 온 양봉가의 벌통이 널려 있었다.

 


소이산 전경. 해발 362m의 낮은 산이지만 철원평야의 조망점이다.

 


북한이 1946년 건설한 노동당사.

 

소이산은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돼 왔다. 읍내 야산이 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다.


일제 때 사방림과 연료림으로 많이 심은 아까시나무가 아직도 숲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외래종이자 생태교란종인 단풍잎돼지풀은 이곳에 오랫동안 군사기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행한 마상규 박사(한국산림기술인협회 회장)는 “이곳은 외래종인 아까시나무가 향토수종에 앞서 황폐한 땅을 선점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를 생태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최적지”라고 말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아까시나무가 줄고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 토종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까시나무가 산을 점령할 것이란 우려는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소이산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의 전경. 멀리 앞에 보이는 녹지가 비무장지대이고 그 너머 산지는 북한이다.

 


1930년대 소이산 정상에서 본 철원읍 전경. 크고 작은 건물이 밀집해 있는 모습이 현재와 대조된다. 건물이 들어선 곳은 현재 지뢰지대이다. 출처 <철원군지>.

 

소이산 정상에 오르자 눈앞이 확 틔었다. 주변과 표고차가 200여m밖에 안 되지만 1000m급 고산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널찍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 북한의 평강고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없었다면 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준락 육군 제6보병사단 공보참모의 설명이 실감났다.

 

소이산은 철원평야 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다. 철원평야를 한 눈에 굽어보는 가치 때문에 이곳엔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설치돼 함경도 경흥에서 서울로 연결되던 경흥선 봉수로에 속해 있었다.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다녀 관광객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밑에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철암 철원문화원 사무국장은 “해방 때 철원읍 인구는 8만이었고 은행 2개와 여고, 도립병원도 있었는데 현재 철원읍 인구는 그 절반 가까운 4만 7000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산물검사소 등 과거의 주요 건물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마상규 박사는 “통일이 돼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소이산은 그 조망점으로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며 “평화의 숲이자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전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과거 농가 주변임을 보여주는 지뢰지대 안의 대형 뽕나무.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지난 60여년 동안 지뢰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그 동안 묵논은 습지로, 묵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영농을 하는 현응기(71)씨는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두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마 박사는 “지금은 모두 사라진 서울의 평지 숲의 원형이 여기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 60년 뒤의 모습.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아까시나무가 둘러싼 모습이 독특하다. 해방 때 2600여 명의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이다. 운동장은 초원이 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 채 생태계의 천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소규모 지뢰지대여서 인접한 도로와 군부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철원읍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뢰지대. 과거 평지였던 곳이 60여년 동안 식생천이를 거친 곳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김명진 국립환경과학원 자연평가연구팀장은 “최근 민통선 지역인 백암산에서 희귀한 사향노루 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철원/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아까시나무의 쇠퇴…황무지 녹화 큰 구실, 조림 중단에 노화 ‘진행 중’

 

소이산 지뢰지대의 아까시나무. 꼭대기가 말라죽는 쇠퇴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여름에 아까시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낙엽이 지는 현상이 2000년대 중반에 전국에 나타났다. 이 ‘아까시나무 쇠퇴현상’의 주요 원인은 1970년대 이후 아까시나무 조림이 중단되면서 나타난 노화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력했다.

 

그러나 요즘 이런 황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시나무의 쇠퇴는 멈춘 걸까.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 박사는 “황화가 심하지 않다 뿐이지 쇠퇴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큰 아까시나무의 꼭대기 부분이 말라죽는 현상을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 증거다.

 

신 박사는 “아까시나무는 토양이 황폐한 곳에 먼저 들어오는 선구 수종이어서 다른 나무와 경쟁을 하거나 그늘진 환경에서는 잘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뒤집어 얘기하면 전후 황폐했던 국토를 녹화하는데 아까시나무는 큰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북미 원산인 아까시나무는 19세기 말 들여와 1970년대까지 심은 대표적 조림수종이다. 특히 어릴 때 베어내면 이듬해 또 그만큼 자랄 만큼 생장력이 왕성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연료림과 사방림으로 널리 심었다. 절정기는 1970년대로 전국의 아까시나무 면적은 지금보다 5배 이상 많은 32만㏊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꿀 공급 식물이자 산림녹화에 기여했지만, 아까시나무는 생활력이 너무 강해 퇴치가 곤란한 나무라는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까시나무는 뿌리가 얕고 목재의 비중이 커 바람 피해를 잘 받아 대개 50년을 넘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산림이 건강해지면서 아까시나무의 설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바람 매운 황무지에 '방풍 울타리'푸른 숲이 열리다

대관령 특수조림지

옛 대관령휴게소 중심 300전나무 낙엽송 빼곡

방풍책 세우고 묘목엔 '통발'…주민들 35년 노력 결실

 


특수조림지 전경. 풍차가 있는 옛 대관령 휴게소에서 자연림으로 덮인 먼 능경봉 사이의 조림지이다.

 

1976년 조림 첫해 황무지에 방풍 울타리를 친 모습. 동부지방산림청 제공.


새 영동고속도로가 뚫린 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서서 사방을 조망하는 감흥을 느낄 수 있던 대관령 휴게소는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러나 최근 옛 대관령 휴게소가 다시 북적거리고 있다. 양떼목장과 대관령 옛길 등이 인기를 끌면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조림 신화’가 깃든 곳이 있다. 대관령 특수조림지가 바로 그곳이다.

 

특수조림지의 전나무 숲. 직경 16~18직경으로 자랐다.

 

옛 대관령 휴게소를 중심으로 도로 양쪽 산자락 311㏊에 걸쳐 있는 이 조림지는, 1976년부터 10년 동안 황무지에 84만 3000여 그루의 전나무, 잣나무,낙엽송 등을 일일이 손으로 심고 가꿔 숲으로 일궈낸 곳이다.

 

한여름엔 33도이다 겨울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고, 초속 30~40m의 강풍이 늘 부는데다 연평균 강설량이 1.8m에 이르는 이곳은 일단 황폐해지면 다시 나무가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숲을 가꾸었는지를 보기 위해 요즘도 몽골과 중국, 그리고 임업 선진국인 캐나다에서까지 견학을 온다.

 

방풍 울타리, 통발, 방풍망 등 전통 기술 총 동원

 

어린 전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대관령 광장에서 현재도 쓰이고 있는 방풍 울타리. 건너편 숲이 특수조림지이다.

 

대관령 정상의 방풍 울타리. 현재도 전나무를 강한 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유력한 도구이다.

 

지난 6일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와 함께 특수조림지를 찾았다. 대형 풍차와 함께 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이 들어선 옛 대관령 휴게소에 서자 줄 맞춰 심은 삼각형 수형의 전나무 숲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숲이 울창한데 왜 조림이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했을까. 의문은 광장 뒷 편에 설치된 사람 키보다 높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방풍 울타리에서 풀렸다. 바람을 차단한 울타리 뒤에서 어린 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35년 전 황무지를 숲으로 바꾼 기술은 아직도 살아있다.

 

야생화 숲길이 있는 광장 오른쪽 특수조림지에 오르는 길 옆에는 당시 방풍 울타리의 기둥이 잔해로 남아 있다. 방풍책은 높이 3m의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조릿대, 싸리 등을 엮어 만들었는데, 울타리의 앞과 뒤 바람을 50% 이상 줄이는 효과를 냈다. 특수조림지에는 20m 길이의 울타리가 240개 세워져 총 길이는 4800m에 이르렀는데, “거센 바람에 무너지면 세우기를 수십 번 되풀이해야 했다.”고 동부지방산림청의 <국유림 경영 100년사>는 적고 있다.

 

조림 첫해의 모습(왼쪽). 아직 황무지 모습 그대로이다. 오른쪽은 묘목을 보호하기 위한 통발. 동부지방산림청 제공.

 

큰 묘목은 이렇게 울타리로 바람을 막았지만 작은 묘목은 나뭇가지로 발을 만들어 둥글게 감싸는 ‘통발’로 보호했다. 조림한 모든 나무에는 지주를 설치해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다.

 

대관령 정상 일대는 극심한 바람과 추위로 산기슭의 조림사업이 성공한 뒤에도 벌거숭이로 남았다. 1999년부터 3년 동안의 복원사업에는 1970년대 이후 고안한 기술이 총동원됐다. 방풍 울타리와 통발 이외에 새로 방풍망이 도입됐다. 삼각기둥의 꼭짓점을 바람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치하고 모기장을 씌워 바람을 막는 장치였다. 논 흙 90t을 산꼭대기까지 옮겨와 객토를 하기도 했다.

 

대관령 정상 복원을 위해 도입한 삼각기둥 형의 방풍망을 설치한 모습. 동부지방산림청 제공.

 

신준환 박사는 “이 모든 과정은 일일이 사람 손이 가는 작업이어서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민이 아니었다면 산림을 복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오영숙(43·평창국유림관리소 숲 해설가)씨는 “학교에서 방풍망을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며 “어른들은 산에서 묘목을 캐오거나 마을마다 정해진 구역에서 반장의 인력동원에 따라 작업을 하고 밀가루 포대를 일당으로 받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풍 울타리와 통발 등은 현재 몽골과 내몽골에서 사막화 방지 조림을 하는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은 지역 주민의 전통기술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조림사업 당시 평창군 산림과 직원이던 김군섭(64·평창국유림관리소 숲해설가)씨는 “이 지역에서는 돌담을 쌓을 돌이 많지 않아 전통적으로 나뭇가지로 담을 세웠다가 나중에 화목으로 써 왔다”며 “방풍책은 이런 전통지혜를 조림에 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특별지시,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

 

영서 쪽에서 부는 강하고 찬 바람 때문에 영동 쪽으로만 자란 낙엽송.

 

애초 대관령 일대는 소나무와 전나무뿐 아니라 피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일제 말부터 가혹한 식민정책을 피해 숨어들어온 화전이 소규모로 분포했다. 5·16 쿠데타 직후에는 병역기피자와 불량배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키기 위해 조직한 국토건설단이 이곳에서 대규모로 화전을 일구기도 했다.

 

이에 더해 북한 게릴라의 잇단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화전민들의 집단 정착촌을 이곳에 세우면서 대관령 일대의 산림은 순식간에 벌거숭이 산으로 바뀌었다.

 

특수조림의 계기는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동고속도로 건설을 시찰하러 왔다가 헬기에서 황폐화된 대관령 일대를 목격하고 녹화를 지시한 것이었다. 당시는 1973년부터 ‘치산 녹화 10개년 계획’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학계에서는 조림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는 무서웠다. <국유림 경영 100년사>는 “상급관서의 사업 독려로 인해 담당자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조림에 생계가 달린 주민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다. 김군섭씨는 “황무지가 푸른 숲이 되기까지 주민의 노력이 가장 컸다”며 “대대로 후손에 물려줄 자랑스런 숲”이라고 말했다.

 

특수조림지 내부의 낙엽송. 애초 목재생산 숲은 아니지만 숲 가꾸기로 목재를 생산하기도 했다.

 

어렵게 키운 숲이어서 숲이 지나치게 울창해지는데도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1998년 금융위기 뒤 공공근로를 이용한 숲 가꾸기 사업을 벌여 1억 5000만원 상당의 목재를 생산하기도 했다.

 

김중기 평창국유림관리소 진부경영팀장은 “애초 특수조림지는 경제림 조성이 아니라 녹화, 곧 환경적 목적에서 출발했다”며 “바람 센 고산지역의 육림사업 모델로서 연구가치가 높은 곳”이라고 말했다.

평창/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2000년 11월 고속도로로 남한을 달리면서 한 세대 전만 해도 헐벗었을 산마다 나무로 꽉 들어찬 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지구를 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세계적인 환경 사상가인 레스터 브라운의 책 <생태 경제학>의 한 대목이다.

 

일본의 식민지 침탈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산이 벌겋게 벗겨졌던 최빈국 한국에서 어떻게 녹화가 성공했는지는 국제적인 관심사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단지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녹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는 것보다 많이 베어내면 산림은 헐벗기 마련이다.

 

18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벌목을 막는 엄격한 형벌규정이 있었고 막대한 양을 조림했는데도 산림 황폐화를 막지 못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베어 아궁이에서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식목일 행사가 일찍이 1946년에 시작됐는데도 산림 황폐화를 멈추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무 태워 얻는 에너지 40년새 90.5%→0.9%, 당시 정부 의지도 한몫

 

전체 에너지에서 나무를 태워 얻은 에너지의 비중은 1950년 90.5%에 이르렀다. 그것이 1960년 62.5%, 1979년 21.6%, 그리고 1990년 0.9%로 격감한 과정이 바로 우리나라 산림 녹화의 역사이다.

 

배재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한국임학회지>에 실린 논문 ‘해방 이후 가정용 연료재의 대체가 산림녹화에 미친 영향’에서 “1955년 당시의 연료재(목재) 소비량이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의 산림 대부분은 황폐화되었을 것”이라며 무연탄의 보급, 도시로의 임산연료 반입 금지, 농산촌의 연료림 조성 등이 산림녹화를 성공으로 이끈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연료 대체도 경제성장과 소득 증가, 농촌 인구의 감소 등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다. 산림녹화사업은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국가 주요사업으로 포함됐고, 1967년 산림청을 설립한 이후 1973년 시작한 제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의 조림 목표량을 4년 앞당겨 달성했다.

 

1979년 시작한 제2차 치산녹화10년 계획에서는 1차 때의 속성수 중심에서 경제수 조림 비중을 높였고, 인건비 등 비용상승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자연휴양림 조성 등으로 정책 방향을 옮겼다.

 

산림 녹화가 성공한 데는 문화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신준환 박사는 “마을마다 숲을 지키는 오랜 전통이 삼국시대부터 내려왔고 그것이 힘든 일제강점기에도 상당수 마을숲이 보존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며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민중의 오랜 나무 사랑 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2011. 07. 13 

 

 

540여년 지켜온 ‘숲의 바다’…5710종 생물들 ‘넘실’

광릉숲

세조때 왕릉 부속림 지정, 천연·인공림 두얼굴 조화

면적당 생물종 국내 최고, 숲의 미래 밝힌 ‘임학 산실’

 

소리봉 천연활엽수림 전경.

 

 

 

 

지난 20일 찾은 경기도 광릉 숲의 핵심구역인 소리봉(536.8m) 일대에는 나무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서어나무, 졸참나무, 까치박달나무, 층층나무 등의 넓은잎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햇빛에 반짝였다. 지난 540여년 동안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성숙한 천연림이다.

 

어둑한 숲 속에 들어서니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100년을 훌쩍 넘겼을 졸참나무와 갈참나무 고목 사이로 수피가 사람의 근육처럼 울퉁불퉁한 서어나무들이 서 있다.

 

서어나무. 오래된 천연 활엽수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광릉의 소리봉과 죽엽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늘을 가린 숲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바닥엔 서어나무 고목 한 그루가 널브러져 있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어린 까치박달나무와 회목나무가 키 자람을 하고 있었다.

 

동행한 신재권 국립수목원 식물보전복원연구실 박사는 “5~6년 전쯤 서어나무가 넘어지면서 숲 바닥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다른 나무들이 기회를 잡은 것”이라며 “촘촘한 숲에 생긴 빈틈을 철저히 이용하는 이런 모습은 오랜 자연림에서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리봉 정상에 오르자 도봉산, 수락산, 천마산, 축령산이 남양주시 진접읍의 아파트 단지와 함께 한눈에 들어왔다. 광릉 숲은 서울에서 불과 39㎞ 떨어져 있다.

 

천연림과 인공림이 숲의 바다를 이룬 광릉숲 전경.

 

그러나 이 숲의 생물다양성은 웬만한 국립공원보다 높으며, 단위면적당 생물종을 따지면 국내 최고 수준이다. 광릉 숲 2240㏊에는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단위면적당 식물종 수는 광릉 숲이 ㏊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8.9종을 크게 웃돈다.

 

이처럼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것은 온대지역에서 이례적으로 장기간 숲이 보전됐기 때문이다. 1468년 조선 7대 왕 세조는 이 지역을 왕릉인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부터 현재까지 한 해도 멈추지 않고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 왔고, 이에 따라 개발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림 보전과 생물다양성만 본다면 광릉 숲의 반쪽만 보는 셈이다. 광릉 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임업 관련 기관이 들어서, 한반도에 적합한 나무를 어떻게 심을지를 연구해 온 우리나라 임학의 산실이다.

 

심은 지 90년 된 리기다 소나무 거목.

 

김석권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장은 “광릉 숲의 가치는 자연림 못지않게 인공림에 있다”며 “90여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가꿔온 광릉 숲에서 우리나라 숲의 미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광릉 숲에서 핵심구역은 소리봉과 죽엽산(600.6m)을 중심으로 한 천연 활엽수림 755㏊이다. 핵심구역을 둘러싸는 완충지역 1657㏊는 인공림이다.

 

전봇대처럼 꼿꼿하게 기른 80년 생 상수리나무.

 

김석권 박사의 안내로 임도인 직동로를 따라가며 광릉 숲 인공림의 모습을 살펴봤다. 1914~1917년 심었다는 팻말이 붙어 있는 낙엽송이 앞을 가로막았다. 가슴높이 둘레가 1m가량이고 높이는 20여m로 하늘로 쭉 뻗은 모습이 “쓸모없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했다.

 

심은 지 80년이 지난 상수리나무도 마을 주변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상처 없이 미끈하게 자라나 있었다. 상수리나무 밑에 잣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는 복층 숲에서 인공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김 박사는 “조림한 지 약 30년이 지난 우리나라의 인공림을 잘 가꾼다면 광릉 숲처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숲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28년에 심은 전나무 숲. 어린 전나무가 돋아나 천연갱신림이 될 잠재력이 있다.

 

실제로 1928년 조림한 전나무 숲 바닥에는 어린 전나무가 빼곡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언제든 상층의 관목을 제거하면 전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다. 독일의 가문비나무 숲처럼 전나무의 천연 갱신림이 형성될 답이 80여년 만에 나온 것이다.

 

그는 임업을 ‘3세대 산업’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심고 아버지가 가꿔 자식이 혜택을 보는 산업이다. 우리의 임업은 이제 2세대인데, 자식 세대가 누릴 혜택을 우리가 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직동로 임도 근처의 90년 이상된 조림지. 천연림과 비슷한 모양이다.

 

90~100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임업의 유장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능내로 임도를 따라가면 1964년 식재한 잣나무림이 나온다. 나무를 얼마나 조밀하게 심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림이다. 2001년 ㏊당 3000그루를 심는 게 가장 낫다는 중간 결론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47년째 지켜보고 있다.

 

광릉 숲은 ‘숲의 바다’이지만 그 바다엔 길이 나 있다. 광릉 숲은 65개의 임반으로 나뉘고 각 임반은 또 여러 개의 소반으로 나뉜다. 임반은 모두 13개 노선 45㎞의 임도를 통해 접근하도록 돼 있다. 광릉 숲의 관리 지도를 보면 마치 동네 부동산 소개업소의 지번도를 보는 것 같다.

 

수백년 동안 손대지 않은 천연 활엽수림과, 그것을 둘러싸고 전국 평균의 약 4배인 ㏊당 255㎥의 목재가 축적돼 있는 인공림은 광릉 숲의 두 얼굴이다.

 

포천/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국전쟁 이후 도벌 횡행 80년엔 일부 군시설 터로

 

광릉 숲의 수난사

 

세조는 1468년 자신의 능이 들어설 자리를 능림으로 정한 뒤 능 주변과 진입로에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를 심고 능원과 산직을 두어 관리했다. 광릉에 당시의 나무가 살아남은 것은 없다. 현재 가장 오래된 활엽수는 졸참나무로 수령 200년 지름 113㎝이다. 광릉 숲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로 383호선 길가에 있는 전나무도 지름 70~90㎝의 거목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는 광릉 숲의 최대 시련기였다. 풀뿌리까지 캐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었고 도벌이 횡행했다.

 

임업연구원(현 산림과학원)이 2003년 펴낸 <광릉시험림 90년사>를 보면, 1965년 광릉출장소의 주 임무는 도벌꾼으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일이었고, 초막을 짓거나 잠복 근무를 하면서 지켰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도벌꾼과 폭력배가 임업시험장 안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엔 인근 군부대가 숲 115㏊를 군사시설 터로 빼앗아 가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휴양지로 숲을 이용하고 개발하려는 욕구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1989년 시험림 일부가 산림욕장으로 개방됐고 수목원, 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이 개장됐다. 관람객이 몰리면서 광릉 숲 주변에 식당, 노래방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마침내 1997년 광릉 숲 보전 종합대책에 따라 산림욕장과 동물원이 폐쇄되고 수목원의 예약제와 관람 인원 제한 조처가 시행됐다. 국립수목원은 1999년 광릉 숲의 절반 면적을 관할하면서 독립했고, 나머지 숲은 현재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가 관리하고 있다. 조홍섭 기자

 

 

물·바람 길 다스리는 ‘나무 병풍’ 400년 간 마을 지킴이로

마을 감싸 안은 '전통 마을숲'

생태계 원리 오롯한 풍수이론 수구막이

 

 

 

마을숲인 금당실 솔숲 전경. 수령 250~300년의 소나무 600여 그루가 마을숲을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로 본 마을숲의 배치도.

수구막이의 전형, 이천 송말숲

 

이천 송말숲에서 바라본 마을 안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외부로부터 차단하는 것이 수구막이숲의 실질 기능이다.

 

두 아름이 넘을 듯한 느티나무 거목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 속은 어둑했다. 숲을 넘어가면 너른 들판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숲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숲은 마을의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송말2리에 있는 송말숲(연당숲)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던 임내신이 1520년 낙향해 이룬 풍천 임씨 집성촌에서 조성한 마을숲으로, 전형적인 수구막이로 꼽힌다.

 

원적산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내려 마을을 감싸 안는 지형인데, 마을 앞쪽에 시냇물이 흘러나가는 터진 곳(수구)에 마을숲을 만들어 양쪽 산줄기와 연결했다.

 

이천 송말숲 전경. 전형적인 수구막이숲으로 양쪽 산을 이은 가운데 부분이 마을숲이다.

 

수구막이를 한 이유에 대해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풍수이론에 따른 것이지만 마을을 안온하고 정서적으로 편하게 만들고, 밖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는 실질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풍수이론에서 수구란 단지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아니라 번영, 다산, 풍요 등의 기운이 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송말2리에는 수구막이와 함께 연못을 만들어 이런 상서로운 기운이 마을에 머물도록 했다.

 

송말숲 옆에 조성한 연당지. 풍수지리에 따라 조성했지만 실질적 의미도 적지 않다.

 

이 마을은 산자락이 마을을 에워싼 모습이 풍수지리상 물 위에 연꽃이 피어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형국인데 이를 완성하기 위해 트인 곳을 마을숲으로 막은 것이다.

 

송말숲은 수구막이의 생태학적 의미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산림과학원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연구진은 마을숲 안팎의 풍향, 풍속, 온도 차이를 정밀 측정해 실제로 이 숲이 바람을 누그러뜨려 주고 봄 갈수기에는 안쪽 논의 수분 증발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에 참여한 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마을숲은 양쪽 산자락을 잇는 생태통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연못은 지하수위를 높여 준다”고 말했다.

 

송말숲 미기후연구시설. 국립산림과학원이 송말숲이 기온과 풍속 등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런 효과를 이미 체감하고 있다. 임광빈(64)씨는 “여름에는 더운 바람을 막아줘 숲 안쪽이 훨씬 시원하고 겨울엔 훨씬 포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말숲은 다른 마을숲에 닥친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기도 하다. 주민들의 소중한 생활공간이던 마을숲은 외지인들의 유원지가 됐고, 이를 막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쳤다. 마을숲 안에는 이천 시민들의 단체행사를 위한 무대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400여년 동안 이어진 이 숲에는 평균 수령이 150살인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음나무 거목들이 들어서 있지만 앞으로 숲을 이어갈 후계목은 자라지 않고 있다. 주민의 노령화와 함께 외지인의 전원주택이 늘어나면서 전통 마을숲은 점차 마을과 멀어지고 있다.

 

매운 강 바람 막아주는 춘천 심금솔밭

 

 

춘천 심금솔밭 전경. 200년 전 방풍과 풍수 비보를 위해 조성한 마을숲이다.

 

논 가운데 훤칠한 소나무들이 기다란 띠를 이루며 도열해 주변을 압도한다.

 

강원도 춘천시 신사우동 올미마을엔 한때 ‘춘천의 명소’로 초등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던 심금솔밭이 있다.

 

올미마을은 여우고개, 시루고개 등 산을 등지고 앞에는 너른 벌판이 있는데 그 끝엔 북한강과 소양강이 흐른다. 풍수지리상 이런 허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약 200년 전 조선 초기에 솔숲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질적으론 겨울철 북서풍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 성격이 강하다. 문종석(48) 올미마을 이장은 “지금도 솔숲을 경계로 안쪽은 바깥보다 꽃 피는 시기가 1주일쯤 빠르다”고 말했다.

 

현재 45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지만, 과거엔 이보다 3배 정도 커 길이가 2㎞에 이르렀고 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심금솔밭의 소나무에서 돋아난 어린 소나무. 살아있는 소나무 둥치에 씨앗이 떨어져 움튼 드문 모습이다.

 

심금솔밭은 한국전쟁 때 군 주둔지로 징발돼 숲 가운데로 포장도로가 생기고 나중에 개인에게 불하되면서 개인주택과 농경지가 야금야금 갉아먹어 크게 위축됐다.

 

박미호 동국대 생태환경센터 연구위원은 “음식점과 개인주택이 숲 안에 들어서고 수세가 약해지는 등 몇 년 전 왔을 때보다 숲이 많이 나빠졌다”고 아쉬워했다.

 

심근솔숲의 고민. 숲 가운데로 도로가 지나가고 일부는 개인집의 정원이 됐다.

 

특히 평지에 소나무들이 띠 모양으로 서 있다 보니 가장자리의 소나무가 햇빛을 받으려고 밖으로 웃자라 결국 쓰러지는 현상이 해마다 4~5그루에서 발생하고 있다.

 

문종석 이장은 “원상회복은 꿈도 못 꾸고 가지치기 등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고의 명당 완성한 예천 금당실 솔숲

 


나무마다 번호를 매겨 관리하는 금당실 솔숲의 소나무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은 조선 중기 <정감록>이 난세에도 전쟁이나 흉년의 피해가 없는 길지로 꼽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다.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든 지형은 소백산 줄기의 높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둘러싼 넓은 들과 마을을 굽이치는 금곡천이다. 한 가지 헛점이 있었으니, 마을 앞쪽에 터진 부분이다. 1500년대에 이런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는 솔숲을 조성했다.

  

경북 예천 금당실 솔숲의 전경. 풍수적 비보숲이자 수해방비와 풍치림이기도 한 대표적 마을숲이다.

 

오미봉에서 금곡천을 따라 정자산까지 2㎞ 길이의 솔숲은 금당실 마을을 완전히 감싸 안는 형태였지만 현재는 600m 가량만 남아 있다.

 

마을사람들이 ‘솔 둥지’라고 부르는 마을숲에는 수령 250~300년 된 소나무 거목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소나무 하나하나에는 예천군이 관리하는 표찰이 붙어있었고 휴계림 육성과 빈 자리에 보식도 이뤄지고 있었다.

 

예천 금당실 솔숲 내부. 350~400년 수령의 소나무 600여 그루가 마을숲을 이룬다.

 

박희식 예천군 문화해설사는 “숲이 전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쉬고 생활하는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재 비슷한 공간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숲 안에는 좁은 오솔길만이 나 있어 많은 주민이 이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마을을 둥지처럼 보듬은 솔숲과 산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한다면 한옥 체험마을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숲, 주실마을숲 

 

자연림으로 바뀐 주실숲 내부. 거대한 느티나무 고목이 나뒹굴고 있다.

 

경북 영양과 봉화를 잇는 918번 지방도로를 가다 보면 갑자기 어둑한 숲 터널이 길을 가로막는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숲이 그곳이다.

 

250살 느티나무를 비롯해 느릅나무, 소나무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숲은 주실마을을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해 준다.

 

주실은 금당실과 함께 ‘반 서울’로 불리던 명당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해마다 지훈 예술제가 열리는 ‘시인의 숲’으로 유명하지만, 1700년대 한양 조씨 집성촌이 풍수의 기맥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마을숲이다.

 

숲 안에는 대부분 100년이 넘은 거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이고 고목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 자연림으로 바뀐 모습이었다.

 

주민이자 영양군 관광해설사인 조식걸(74)씨는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며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시설물이 들어서는 등의 개발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경북 영양의 주실숲. 마을을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가로막는 구실을 하고 있다.

 

행락객이 찾아올 뿐 주민들은 숲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조씨는 “주실 마을 55가구의 인구가 80명에 불과하고 평균연령이 70을 넘는다”며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마을 자체의 존폐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장미아 생명의 숲 마을숲 위원은 “영산홍이나 리기다소나무처럼 외래종을 심었는데 이를 자생수종으로 바꾸어나간다면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고도 현재의 숲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천·춘천·예천·영양/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자연이 낳은 '천년숲'인간의 보살핌은 약일까 독일까

제주 비자림

고려 때부터 비자 채취한 천연림

탐방객 급증과 비자나무 위주 관리로 자연성 위협

▶구좌 비자림 산책로. 500~800년생 비자나무 거목이 산책로를 가로막는다.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에 들어서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엄습한다. 착생식물인 콩짜개덩굴이 푸른 비늘처럼 뒤덮은 회갈색 거목이 주목과 비슷한 바늘잎을 반짝이면서 사방에 가득 들어차 있다. 화산 분화로 생긴 토양인 송이를 깐 보행로의 붉은 빛이 숲 바닥과 수피, 하늘까지 물들인 녹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산간지대의 다랑쉬오름과 돛오름 사이에 긴 타원형으로 들어선 비자림은 면적 44만8000여㎡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최고령 나무는 900살에 육박한다. 두 번째는 2000년 ‘새 천년 나무’로 지정된 비자나무로 수령은 800살이 넘고, 굵기가 거의 네 아름에 키가 14m에 이르러 이 숲에서 가장 웅장하다. 이런 터줏대감 때문에 구좌 비자림은 ‘천년 숲’으로 불린다.

 

구좌 비자림 산책로. 콩짜개덩굴 등 착생식물로 덮인 비자나무 거목이 압권이다.

 

▶새천년비자나무. 수령 800살에 굵기는 네 아름이 넘는다.

 

호랑이 나올까 겁났던 70년대 비자림

 

동행한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 박사가 비자나무 사이에 자귀나무, 팽나무, 비목나무 등이 모여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과거에 비자나무가 죽어 숲에 틈이 생기자 생겨난 선구종입니다. 숲이 계속 울창했다면 저절로 나지 못하는 나무이지요.”

 

비자림이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과거 이 비자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 박사는 “1970년대 숲을 조사하다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며 “호랑이가 나올까 겁났을 정도로 으스스했다”고 말했다.

 

빽빽한 하층 식생과 덩굴로 원시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구좌 비자림은 1999년 숲 가꾸기 사업 대상이 된 이후 비자나무만 주로 보이는 숲이 됐다.

 

설명을 듣고 보니 비자림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비자나무를 덮던 덩굴식물과 다른 나무들은 상당부분 제거됐고 가지치기, 수목치료, 지지대 설치 등으로 비자나무를 보호하고 있었다. 비자나무에는 나무마다 일련번호 팻말을 달아 관리하고 있다.

 

▶줄 맞춘 비자나무. 수백년 전에 인위적인 식재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비자림 탄생의 비밀

 

하성현 제주도 비자림관리소장은 “숲을 가꾸지 않고 방치했으면 비자림은 모두 죽어 사라졌을 것”이라며 “송악, 줄사철, 등수국, 마삭줄 등 덩굴식물이 비자나무를 덮으면 광합성을 하지 못하거나 무게로 가지가 부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숲을 내버려 두면 빨리 자라는 후박나무와 아왜나무가 금세 뒤덮는다”고 덧붙였다.

 

▶덩굴식물인 송악이 휘감은 비자나무.

 

이런 논란은 구좌 비자림의 탄생 비밀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비자림과 달리 구좌의 비자림에는 조림 기록이 없다. 천연림이라는 얘기다.

 

김찬수 박사는 “제삿상에 올린 비자씨앗을 뿌린 것이 숲이 됐다는 속설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천연림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라산 1000m 이상 고지대에 비자나무가 자생하는데, 지형상 그 씨앗이 계곡물에 실려와 구좌에서 싹을 텄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이 낳았다고 해도 기른 것은 사람이다. 비자는 구충제로 중요한 진상품이었기 때문에 비자림도 철저히 보호됐다. 구좌 비자림은 자연과 사람이 절묘한 공조로 이룩한 숲인 것이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비자나무숲을 내버려둔다고 비자나무가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덩굴에 덮인 비자나무가 죽으면 덩굴도 죽고 숲은 새롭게 출발한다. 어린 나무에서 죽어가는 나무까지 모두 있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숲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좌 비자림은 장기간 사람이 보살펴온 전통 마을 숲에 가깝다. 면적도 그리 넓지 않아 자연의 손길에 내맡기기엔 불안하다. 김 박사도 “어느 정도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숲가꾸기가 이뤄지지 않은 곳의 비자림.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제주도는 비자림 관리에 연간 3억 원을 들이고 있다. 덩굴을 제거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걷기 열풍과 함께 올 들어만 12만 명이 찾은 상황에서 나무를 보호하고 산책로를 늘리는 것이 현안일 뿐 숲의 장기적 미래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비자나무의 노령화를 대비해 후계목은 양묘장에서 따로 기르고 있다.

 

비자림 오른쪽 숲 가꾸기를 덜 한 곳에 가면 비자림의 과거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덩굴과 착생식물로 뒤엉킨 열대 정글과 흡사한 숲 군데군데에 비자나무가 서 있다. 바람직한 비자림의 미래는 아마 현재의 숲길과 이곳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비자나무란

 

▶비자나무 씨앗과 잎

 

주목과의 침엽수로 우리나라 남부와 제주도, 일본 중남부에 분포한다. 느리게 자라기로 유명해 100년 지나야 지름이 20㎝ 정도밖에 크지 않는다. 대신 목재의 재질이 치밀하고 고와 건축, 가구, 바둑판 등의 고급 재료로 쓰였다.

 

비자나무의 씨앗은 구충제로 요긴하게 쓰였다. 백양사, 금탑사 등 사찰의 비자림은 모두 주민에게 구충제로 쓰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동의보감엔 ‘비자를 하루 일곱개씩 7일간 먹으면 촌충이 없어진다’는 처방을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비자는 주요한 진상품이었고 이에 따른 애환도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 세제가 문란해져 흉년과 풍년에 무관하게 일정량의 비자를 징수하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비자나무를 일부러 베어버려, 구좌읍 등 일부 지역에만 남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연 10만 탐방 '저지오름 숲길'

 

▶저지오름 둘레길의 숲 터널.

 

곰솔 병풍, 낙엽 양탄자

'덩굴의 습격'을 어쩌나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의 저지오름 숲길은 걷기 편한데다 자연성을 간직해 탐방객이 몰리고 있는 곳이다.

 

높이 239m의 봉우리로 제주도에서는 흔히 보는 오름이지만 숲길에 접어들면 전혀 딴 세상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오름에는 등고선을 따라 두 개의 둘레길이 있다. 숲길 들머리의 현무암 계단을 올라 1.5㎞ 거리의 둘레길을 걸으면 오름의 아랫부분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다.

 

곰솔의 낙엽이 깔려 푹신한 산책로 양쪽엔 담팔수, 자금우, 소태나무, 예덕나무, 보리수나무, 꾸지뽕나무 등의 난대식물이 자라고 있다. 송이로 만든 적갈색 보행로 옆의 고사리밭이 더욱 짙푸르다.

 

오름의 분화구에 오르면 다시 둘레길이 펼쳐진다. 이곳엔 난대림이 더욱 빽빽하게 우거져 숲 터널 밑으로 좁은 보행로가 나 있다.

 

▶분화구에서 내부의 모습. 20~25만 년 전 화산 분화가 일어난 곳이다.

 

둘레길에서 다시 나무 데크를 타고 내려가면 분화구 안의 전경을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무, 보리, 감자를 재배했던 분화구 안과 사면은 덩굴식물로 뒤덮여 원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울의 자녀와 함께 숲길을 찾은 이정열(68)씨는 “걷기 편하고 자연을 잘 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생명의 숲이 주관하는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최근 곶자왈을 품은 올레길과 연결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숲길에는 해마다 약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다.

 

그러나 저지오름은 1960~70년대까지 민둥산이었다. 숲길 조성을 주도한 주민 김태후(46·제주도 한라산연구소 직원)씨는 “어릴 때 오름 꼭대기에서 억새나 띠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를 했을 정도로 나무가 없었다”며 “1980년대에 방목이 중단된 뒤부터 나무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0년 오름에 설치한 방화선을 숲길로 바꾸는 작업에 나서 2006년 공개했다. 그는 “70대인 노부모도 다닐 수 있도록 평탄하게 숲길을 만들었다”며 “힘이 들거나 험하지 않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걷기에 좋다”고 말했다.

 

저지오름은 5개 자연마을 한 가운데 있다. 유명해진 아름다운 숲이 주민들에게는 자랑거리다. 한경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쓰레기와 부러진 나뭇가지 등을 치우는 자원봉사를 하던 조점례(62)씨는 “숲길은 저지의 얼굴이 됐다”고 말했다.

 

▶송악 덩굴에 감겨 죽은 곰솔

 

그러나 이곳에서도 숲의 관리는 난제이다. 송악, 상동나무, 청미래덩굴 등이 곰솔을 휘감아 죽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른 손목 굵기의 송악에 감겨 고사한 곰솔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김씨는 “한 두 그루면 자연성을 위해 그대로 두겠지만 결국 일부는 제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저지오름의 소나무숲은 언젠가 난대림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 관리하는 숲길에서 곰솔과 덩굴식물의 공존은 쉽지 않은 실험이다.

 

제주 구좌, 한경/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죽은 왕들이 노니는 600년 참나무 숲

종묘 숲

수령 300~400년 거목 즐비, 속세와 신의 세계 차단

일제 때 도로 뚫으면서 종묘 주산 응봉 주맥 잘라

 

▶빽빽한 갈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속세로부터 차단된 종묘 정전

 

외대문을 넘어 종묘로 한 걸음 내딛으면 종로3가의 번잡함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 같은 적막감과 엄숙함이 감돈다. 어른 두 아름은 돼 보이는 갈참나무의 쭉 뻗은 가지가 팔을 벌리고 막아서는 듯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600년째 자리를 지켜온 종묘 숲은 조선 왕조의 신림(神林)이다. 나무는 신의 대리물이나 수호신으로 숭배돼 왔다. 민중의 신림이 성황림이나 당산나무라면, 왕조의 신림은 국가에서 보호하던 신성한 숲을 가리킨다.
 

▶종묘의 참나무 거목. 종묘에는 800 그루가 넘는 대형 참나무가 있다.

 

지난달 30일 찾은 종묘 숲은 갈참나무와 잣나무 아래 쪽동백과 때죽나무가 우거져 어둑했다. 단청과 정자, 누각을 짓지 않은 ‘죽은 자의 공간’ 답게 꽃나무를 심지 않고 연못엔 소나무 대신 향나무를 심은 모습이 특이했다.
 

그러나 종묘의 숲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갈참나무 숲이다. 전체 숲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갈참나무는 수령 300~400년 거목이 즐비하다. 멀리서 보면, 일자형 전각인 정전과 영녕전은 참나무의 바다에 배처럼 떠 있다.
 

참나무 숲은 속세와 신의 세계를 차단하는 구실을 한다. 조상신과 만나는 의식이 벌어지는 정전에 갈 때 왕은 동문으로, 신은 남문에서 들어온다. 남문 밖에 있는 것은 바로 참나무 숲이다. 이 숲은 신성한 공간을 차폐하는 곳이기에 앞서 신이 사는 곳인 셈이다.
 

▶아름드리 갈참나무 숲에 둘러싸여 정전이 지붕만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참나무 숲은 언제 생긴 것일까. 전문가들은 애초 종묘에는 소나무가 더 많았지만 수백년이 흐르면서 차츰 참나무 숲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본다.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세종 13년 종묘의 소나무를 간벌했다는 등의 역사기록으로 볼 때 처음엔 소나무가 주요 수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는 “소나무가 주인이었겠지만 참나무도 꽤 많이 심었을 것”이라며 “가벼워 보이는 나무를 의도적으로 도태시키고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참나무류만 남기면서 자연히 참나무 숲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종묘 숲은 왕궁 못지않게 중요한 숲이었지만 가지를 치거나 하는 식으로 숲을 관리하지 않고 자연미를 살렸다. 전 교수는 “우리 조상의 자연관과 전통지혜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종묘의 연못. 다른 궁궐의 연못과 달리 소나무 대신 향나무를 심었다. 또 물소리가 나지 않도록 땅속으로 스며 유입하는 잠류기법을 썼다.

 

외대문 쪽에 야트막한 인공 언덕인 ‘가산’ 3곳을 지어 종묘 내부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도록 하고, 인공 연못에는 흘러드는 물소리를 죽이기 위해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유입되도록 설계하는 등 세심하게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우리 궁궐 지킴이 활동가인 이옥화씨는 “정전 앞에 깔아놓은 박석도 투박해 보이지만 우둘투둘한 표면이 난반사를 일으켜 흐린 날도 어둡지 않고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등 자연미 속에 세련된 기능을 감추고 있다”고 말했다.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하는 율곡로. 일제가 지기를 끊기 위해 개설한 도로로 현재 도로를 터널로 만들어 녹지를 잇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종묘 일대의 위성 사진

 

종묘 건너편 세운전자상가 옥상에 오르면, 종묘 숲이 ‘도심의 허파’이자 북한산에서 북악산 응봉을 거쳐 흘러 내려온 녹지축임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조상에게 이것은 땅의 기가 흐르는 지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돈화문에서 이화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뚫어 종묘의 주산인 응봉의 주맥을 잘라 버렸다. 잘린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졌지만, 현재 도로를 지하 터널화하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종묘는 어떤 곳?

 

▶조선의 파르테논 신전 종묘 정전 건물. 조선 역대 왕과 왕비 등 19기의 신위를 모신 100미터가 넘는 건물로 기둥은 중간이 약간 불뚝한 배흘림 양식을 채용했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해 착공해 이듬해인 태조 4년(1395년) 완공한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 19만 4000여㎡의 터에 본 건물인 정전과 추가로 지은 영녕전, 그리고 여러 부속 건물로 이뤄진다.
 

늘어나는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전의 증축을 거듭해 처음 7칸에서 19칸으로 길어져,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긴 101m에 이르게 됐다.
 

왕이 친히 모시던 큰 제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계승되고 있으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외국인 건축가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물의 하나로 꼽는 곳이며, 건축가 고 김중업은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종묘의 핵심인 정전에서도 일부 주변 빌딩이 그대로 보이는 등 경관을 훼손하고 있다.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이 알려져 주로 일본인인 외국인 탐방객은 연간 20만 명에 이른다. 내국인 탐방객은 27만명이다.
글·사진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거목의 정원’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부용정의 모습.

 

종묘 숲과 창덕궁 후원, 그리고 창경궁 북쪽은 하나의 숲으로 연결돼 있다. 종묘 숲이 죽은 왕들을 위한 숲이라면 창덕궁 후원은 살아있는 왕족을 위한 숲이었다. 이곳은 휴식과 재충전뿐 아니라 활 쏘기 등 야외 행사와 농사 체험, 양잠 등이 이뤄졌다.
 

창덕궁 후원은 나이 많은 거목의 정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만 해도, 돈화문 근처의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 7그루를 비롯해 4종에 이른다.
 

선원전 서쪽 향나무는 최고령으로 수령 750살 정도로 추정된다. 1405년 창덕궁 조성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나무를 옮겨 심은 것으로 보인다. 1820년대 후반의 궁궐 기록화인 <동궐도>에도 이 향나무는 현재처럼 받침목을 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돈화문 근처의 회화나무와 금천교의 느티나무도 이 그림에 나와 있다.
 

애련지 부근의 뽕나무는 왕비가 양잠을 권하기 위해 키웠던 뽕나무 가운데 하나로 수령 400년 정도의 거목이다. 후원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다래나무도 수령 600년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굵은 다래나무이지만 수나무여서 열매는 맺지 못한다.

 

▶600년 된 국내 최대 다래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거목도 적지 않아, 수령 300년 이상의 나무가 70여 그루에 이른다. 아쉽게도 거목은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소나무, 잣나무, 회화나무, 뽕나무, 주목 등 160여 종의 나무가 심겨져 있다.
 

후원 숲의 가장 큰 변화는 소나무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후원 취한정 편액에는 “정원 가득한 소나무 소리가 밤 바다의 파도소리 같다”는 구절이 적혀 있지만 지금은 소나무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글·사진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300년간 모래바람 막아준 국내 최대 해안솔밭

관매도 해송림

주민 살린 곰솔숲, 이젠 사람이 돌봐야 할 숲이 돼


관매도 해송림 전경. 겨울 북서풍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1600년대 조성한 방풍, 방사림이다.

 

“폭풍을 피해 관매도에 배를 대고 솔숲에 들어갔더니 촛불이 꺼지지도 않더랍니다.”

 

부친이 어업을 하는 강양호 진도군청 녹색산업과 관매도 담당자의 말이다. 관매도는 한반도의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그러나 300여년 역사를 지닌 이곳의 해송림은 전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해안림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 숲은 또 앞으로 소나무 숲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기도 하다.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 간다"

 


▶아침 해무가 내린 송림을 탐방객이 산책하고 있다.

  

지난 15일 찾은 관매도 해송림은 거무스름한 수피를 지닌 우람한 곰솔이 백사장을 따라 기다란 띠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숲 안에 들어서니 파도와 바람소리가 뚝 끊기며 갑자기 아늑해진다. 소나무 숲의 폭은 무려 200m이고 길이는 2㎞에 이른다.

 

진도군은 1600년께 강릉 함씨가 이 섬에 들어와 마을을 일궜다고 설명한다. 소나무 숲은 주민들이 “살기 위해서” 조성했다.

 

해송림이 있는 해안은 북서풍이 불어오는 모래언덕이다. “관매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람 세고 모래 많은 곳이었다.

 

 

▶관매도 해송림은 애초 해안사구에 조성한 숲이다. 태풍 피해로 숲 가장자리가 허물어졌다.

 

모래밭 위에 솔숲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관매리 주민 이규종(76)씨는 “조상들이 억새 등을 엮어 만든 발로 바람을 막아 소나무 묘목을 길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닫은 관매초등학교 근처에는 어른 두 아름은 되는 곰솔 거목이 있어 숲의 역사를 말해준다. 해송림 13㏊에는 모두 4600여 주의 소나무가 있는데, 가슴둘레가 평균 42㎝에 이르고 수령은 150~300년으로 추정된다.

 

 

 

▶해풍과 모래로부터 300여년 동안 마을을 지킨 늙은 소나무. 나무 줄기 위에 일엽초와 풍란이 자라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길러온 소나무들은 일본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규종씨는 “전봇대로 쓰려고 곧고 굵은 소나무를 베어내 해변에 쌓아두었는데 전쟁이 끝나 그대로 썩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방 뒤 혼란과 가난 속에서 어떻게 솔숲을 지킬 수 있었을까. 주민 이현심(64)씨는 “마을에서 관리인을 두어 소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감시했지만 바람이 세 나뭇가지가 많이 떨어지는 날엔 숲을 열어 주민들이 땔감으로 쓰도록 했다”고 말했다.

  

병충해와 태풍 피해로 곰솔밭 ‘흔들’

  

▶관매도 해송림은 폭이 200미터에 이르러 다른 어떤 해안 송림보다 폭이 넓다. 염해를 입은 나무가 누렇게 죽어 있다.

 

정작 관매도 해송림의 위기는 다른 곳에서 왔다. 2004년 솔껍질깍지벌레가 번져 소나무의 30%가 죽었고, 수세가 약해진 숲에 소나무좀이 발생해 고사가 이어졌다. 지난해 태풍 무이파는 염해와 풍해를 불러와 아직도 숲 여기저기엔 누렇게 말라죽어 가는 소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해송림의 북쪽 절반은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솔숲을 지키려는 주민과 지자체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난해에는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동행한 김세진 호남생태정보센터 소장은 “관매도 해송림은 다른 해안 방풍림에 견줘 규모가 큰데다 공중의 습기에 의존해 사는 착생식물인 풍란과 일엽초가 자생하는 생태적 가치 높은 숲”이라고 평가했다.

 

▶고사리 등 하층식생에 뒤덮인 송림. 소나무림의 존립을 위해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림 속을 돌아다니는 붉은발농게.

 

▶꽃며느리밥풀

 

관매도 해송림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소나무가 주인인 숲을 유지하는 것이다. 과거 숲 바닥을 긁어 연료림으로 쓰던 때는 소나무 이외의 다른 나무가 전혀 없었다. 주민들은 “맨발로 숲 속을 다녀도 될 만큼 숲 바닥엔 아무 것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숲 바닥에 손을 대지 않자 팽나무, 사스레피나무, 예덕나무 등 난대수종이 무성한 하층식생을 이루게 됐다. 게다가 병충해로 빽빽하던 숲에 빈 틈이 생기고 소나무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토양개량제를 뿌리자 하층식생은 더욱 세력을 늘릴 조짐이다.

 

김세진 소장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소나무숲은 수십년 안에 난대림에 자리를 내 줄 수밖에 없다”며 “소나무의 생육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가능성이 있어 인위적인 간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소나무숲을 유지하는 데 관리 부담이 크다는 점이다. 강양호 진도군청 담당자는 “어린 소나무는 병해충에 쉽게 죽어 후계림 유지가 어렵고, 지난 10년 동안 국비를 포함해 10억원이 든 관리비용도 적지 않은 부담”이라고 말했다.

 

▶바다쪽에서 본 관매도 해송림 전경.폭 200미터의 곰솔숲이 길이 2킬로미터의 해변을 따라 조성됐다.

 

섬 주민들이 어렵게 만든 해송림은 주민의 삶을 지켜주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숲의 생존을 돌봐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진도 관매도/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관매도란 어떤 섬?

 

 

전남 진도군 조도면에 위치한 관매도는 한반도의 남서쪽 끝인 진도군 팽목항에서 다시 24㎞ 떨어진 면적 5.73㎢의 작은 섬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돼 있으며, 관매도 해수욕장을 포함한 관매 8경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올 봄 텔레비전 프로그램 <1박 2일>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주민들은 “태어나서 올해처럼 많은 사람이 오기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용능력은 300명인데 최고 하루에 1300명이 찾았다. 과거와 달리 관광객이 여름 성수기를 지나서도 오고 있고, 해수욕장을 문을 닫은 뒤에도 솔밭 트래킹 등 걷는 관광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26세대 212명의 주민이 상주하고 있다.

 

‘바람 난 섬’에 꽃피운 풍란…복원 노력 5년만에 첫 성과

 


▶올해 처음 꽃을 피운 관매도 복원 풍란(아래 연두색 작은 개체).

 

지난 7월28일 관매초등학교 옆 곰솔 위에 붙어 자라던 풍란이 흰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희귀한 난이 인공증식된 이후 자연에서 처음으로 개화에 성공한 것이다.

 

신원철 순천향대 생명과학과 교수팀은 환경부의 지원을 받아 2006년 인공 증식한 풍란 1만5000 포기를 해송 100그루에 부착했다. 그로부터 5년 만에 복원을 향한 첫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현장을 둘러본 신 교수는 “개화는 했지만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아 완전한 복원에 이르지는 못했다”며 “그러나 복원의 가능성은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자연에 증식한 풍란 개체가 씨앗을 맺어 어린 개체가 태어난다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가슴곰이 새끼를 낳은 것처럼 자생개체군이 생겨나는 것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멸종위기종 1급인 풍란으로서는 한 개체라도 귀하다.

 

▶풍란과 함께 곰솔에 부착해 자라는 일엽초. 공기 속에 습기가 많고 바람이 많은 환경에서만 자란다.

 

풍란은 우리나라 난 가운데 남획의 피해가 가장 심한 종이다. 남해안의 거제도, 거문도, 완도, 흑산도와 제주도 등에 자생했으나 관매도를 빼고는 모두 사라졌다.

 

관매도에서도 2002년 50여 개체가 발견됐으나 이듬해 모두 사라져 섬의 다른 곳에서 구한 2~3개체로부터 씨앗을 받아 복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 3년간 일본산 풍란 9000 포기로 예비 복원을 했을 때 절반이 사라졌고, 특히 사람 손이 닿는 2m 이하의 풍란은 거의 모두 떼어갔다.

 

2006년 복원 때는 높이 3~5m에 부착해 사람 손을 타지 않도록 했다. 신 교수는 현재 약 70%가 살아 남았으며 피해는 주로 병충해와 태풍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풍란은 따뜻한 해풍이 불고 안개가 많은 남부 지방 바닷가 절벽이나 나뭇가지에 붙어 살며, 공중에 드러난 뿌리로 질소를 고정한다.

 

관매도 풍란 복원은 주민의 참여로 이뤄져, ‘바람 난 섬’이란 브랜드를 만들어 생태관광을 추진하고 있고 주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진도풍란보존회가 정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진도 관매도/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9대에 걸쳐 300여 년 정성 손길이 빽빽한 전통숲

부산 기장 아홉산 숲

일제·한국전쟁 때도 참화 모면소나무·참나무 등 하늘 지붕
대나무 세력 커져 다른 종들 질식…그린벨트 묶여 관리 족쇄
 
 

▲아홉산 숲을 대표하는 맹종죽 숲길.

 

부산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미동마을 뒷산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숲이 있다.

 

대도시 근교에 있으면서도 굵고 미끈한 소나무와 참나무 거목들이 곳곳에 서 있고, 조림한 삼나무, 편백나무, 대나무가 이룬 숲 지붕이 잘 닦인 임도를 뒤덮고 있다.

남평 문씨의 일파인 미동 문씨 집안에서 9대에 걸쳐 300여 년 동안 관리해 온 이 숲은, 그 덕분에 일제와 한국 전쟁의 참화 그리고 숲에서 땔감을 구하던 시절의 피해로부터 빗겨날 수 있었다.

 

▲만개한 층층나무 꽃.

 

지난 15일 찾은 아홉산 숲은 층층나무 꽃이 흐드러진 아래로 맹종죽과 왕대나무에서 죽순이 한창 돋아나고 있었다.


9대째 산주 문백섭(54·생명공동체 아홉산 숲 대표)씨가 사는 ‘관미헌’이란 편액이 붙은 집 마당엔 100년 된 은행나무 가 서 있다. 산주의 할머니가 시집올 때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마당엔 마디가 거북 등껍질 모양인 구갑죽이 심겨 있다. 대나무는 이 산의 상징이지만, 최근엔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마디가 거북 등 모양인 구갑죽. 18세기 중국에서 들여온 종이다.

 

메질 당하지 않은 미끈한 참나무 거목 눈길
  
서울 남산보다 조금 높은 아홉산(해발 360m) 아래 약 50만㎡에 걸쳐 있는 아홉산 숲에서는 아름드리 거목을 쉽게 만난다. 부산과 울산에 출퇴근할 수 있는 근교에 자리잡았으면서도 여느 도시 주변 야산과 구별되는 모습이다.
  

울진 금강송 모습을 빼닮은 200~300년 생 소나무가 곳곳에 남아있는 것은 사람의 손길 덕분이다. 동행한 정우규 박사(울산 생활과학고 교사·울산 생명의 숲 공동대표)는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소나무 대신 참나무나 서어나무가 서 있을 자리”라며 “아홉산 숲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오랜 기간 가장 모범적으로 가꾼 보육림의 본보기”라고 평가했다.
  

숲을 땔감 등 사람이 이용하면 좋은 나무부터 사라진다. 좋은 형질을 지닌 나무는 땔감으로도 좋다. 그래서 꼬불꼬불한 소나무 등 열등한 형질의 나무만 남는 것이다. 정 박사는 아홉산 숲에서 열등인자를 솎아내고 토양 유기물층을 꾸준히 유지해 온 결과 임목 육종에 필수적인 훌륭한 유전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도시 근교 산에서는 보기 힘든 상처 없는 상수리나무 대경목.

 

가슴 높이 직경이 70㎝에 이르는 대형 상수리나무도 그런 예이다. 인가 근처에서 이렇게 전봇대처럼 곧고 상처 하나 없는 참나무 거목은 보기 힘들다. 대형 참나무를 사찰 주변에서 볼 수 있지만 예외없이 도토리를 얻기 위해 메로 친 부위가 감염돼 혹이 나와 있다.
  

아홉산 숲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군락 외에도 편백나무, 삼나무, 맹종죽, 왕대, 서어나무가 무리지어 자란다. 정 박사가 2005년 발표한 정밀조사에서는 주왕산 국립공원과 비슷한 529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50년대에 이미 우거진 숲을 관리하기 위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임도 위로 대나무와 히말라야시다 등 거목이 터널을 이뤄 숲길을 걸으며 생태체험을 하기에 제격이다.

 

대나무 숲길에서의 숲 체험 행사.

 

대나무 수요 끊겨 숲 관리비 조달 막막
  
남평 문씨 일파가 미동 마을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년 전, 이들은 뒷산을 정성껏 가꾸고 활용했고 벌채를 하지 않고 이용하는 전통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의 아홉산 숲을 이뤘다.
  

9대 산주 문백섭 대표는 “어릴 때 숲은 지금보다 덜 울창했고 소나무가 많았으며 수박, 과수, 뽕나무도 길렀다”며 “지난 100년 동안 부친과 조부가 체계적인 조림의 틀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울창해진 아홉산 숲은 역설적으로 ‘관리 부재’의 상처가 깊어지고 있다. 숲을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서 그런 징후가 드러난다.
  

대나무 등쌀에 못이겨 누워버린 소나무 거목.

 

무엇보다 대나무가 세력을 너무 뻗쳐 소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햇빛 경쟁에서 압도적인 대나무가 땅속줄기를 확장해 나가면 어떤 나무도 견디지 못한다.
  

과거엔 김발 재료 등 해마다 대나무를 수확해 얻은 수확으로 숲을 관리했지만 요즘엔 “정월 대보름 행사 때 달집 만드느라 몇 대 나가는 게 수요의 전부”이다. 숲에서 나오는 소득은 거의 없지만 해마다 최소한 수천만원이 유지관리에 들어간다.
  

윤석 울산 생명의 숲 사무국장은 “숲 가꾸기 등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밀식한 나무들이 세력을 잃고 질병에 걸리거나 대나무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맹종죽 죽순. 대나무는 땅속 줄기 마디에서 죽순을 내어 세력을 확장한다.

 

죽순 채취를 실습하는 모습.

 

여기엔 아홉산 숲이 상수원보호구역과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관리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다. 문씨는 “대나무를 베었다고 검찰에서 조사받은 적도 있다”며 “연간 벨 수 있는 한도가 편백이라면 2.5그루, 소나무는 0.5그루인 상황에서 숲 관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환경보전 등 공적인 기능을 하면서도 사유림이란 이유로 최근까지도 숲 가꾸기 등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1999년엔 기장군이 이 숲에 테마임도를 낸 뒤 산악자전거 동호인과 등산객이 지나치게 많이 몰려들어 산주가 울타리를 쳐 임도를 폐쇄하는 등 지방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아홉산 숲의 임도 풍경.

 

현재도 훼손을 우려해 아홉산 숲은 일부 단체를 제외하고 일반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문씨는 “이 숲이 다른 숲을 보전하는 본보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며 “숲의 가치를 인정해 크게 손을 대지 않으면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이뤄지는 수목원 형태로 운영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300년 이상 보전돼 왔는데 적어도 앞으로 그 정도는 이 숲이 유지돼야 하지 않겠어요?”
  
300여년 간 아홉산 숲을 지킨 비결

 

▲아홉산 숲의 9대 산주 문백섭씨 부부.

 

과거 미동리는 40여 가구가 사는 꽤 큰 마을이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때는 시절이었지만 보통 때는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해마다 가을이 오면 골짜기를 정해 돌아가며 가지치기를 허용했다. 가장 밑 가지에서 1m가량을 쳐내도록 한 것이다. 이 작업에 어느 동네에서 몇 명이 참가했는지 등을 기록한 자료는 현재 동아대 사학과가 보관하고 있다.
  

비료 확보는 언제나 큰 일이었다. 축산 분뇨만으론 모자라 지나가던 분뇨수거 차를 세워 대밭과 솔밭에 뿌리게 하기도 했다. 또 번화한 동래군 온천장 부근의 식당에서 음식찌꺼기를 수거해 오기도 했다고 9대 산주 문백섭씨는 회고한다.
  

숲을 지키기 위한 일화도 있다. 일제 땐 목재 공출을 피하기 위해 유기를 일부러 숨기려는 척하다 붙잡혀 관심을 돌리기도 했고, 한국전쟁 땐 큰 지주였던 문씨의 조부가 빨치산에 붙잡혀 가다 숲을 가꾸느라 거칠어진 손을 보고 “노동하는 동무”라며 풀려난 적도 있었다.
  

문씨는 조부가 나무를 심을 때마다 옆에 있던 손자에게 “너도 이 나무 덕을 못 볼 것”이라고 했다며 당장의 이익을 떠나 먼 미래를 바라보고 숲을 관리한 것이 아홉산 숲을 이룬 비결이라고 말했다.
  
대나무 숲의 성쇠

 

하늘을 가린 맹종죽_빨리 자라는 대나무를 간벌하지 않으면 밀생과 질병 피해를 입게 된다.


대나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장군의 특산물로 기록될 만큼 이 지역의 대표적 식물이다. 왕대, 솜대, 오죽은 옛날부터 심었고, 맹종죽과 구갑죽은 18세기 중국에서 들여왔다.

 

아홉산 숲에는 5가지 대나무가 있는데 죽순용인 맹종죽의 분포가 가장 넓다. 맹종죽은 가슴 높이의 지름이 최고 20㎝에 이르며 키도 10~20m인 큰 대나무이다.
  

대나무는 땅속으로 줄기를 뻗으면서 마디에서 싹인 죽순을 내 영역을 넓혀간다. 영양상태가 좋을수록 많은 죽순을 낸다. 대나무는 생장속도가 빨라 하루에 1m를 자라는 것도 있다. 1㏊당 1년에 늘어나는 맹종죽의 생체량은 5~22㎥에 이른다. 그만큼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고정하는 능력이 뛰어나므로 기후변화를 막는 수종으로 주목되고 있다.
  

과거 대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널리 쓰여 생활용품이나 공예품 재료로 유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플라스틱이 널리 보급되면서 수요가 급격히 줄어 용도는 죽순, 숯, 대통 밥, 술, 죽세공품 등으로 한정됐다. 이 때문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병충해가 창궐하는 등 쇠퇴하고 있다.
  
기장/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