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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싱가폴 연수 3박5일 16.9. 24~28

by 이성근 2016. 9. 29.

 

일자

지역

시간

세 부 일 정

식사

1

09/24

부 산

 

홍 콩

 

싱가폴

 

 

 

 

06:00

08:00

10:20

11:20

15:05

 

 

 

 

김해 국제공항 국제선 청사 1층 부산은행 앞 미팅

부산 김해 국제공항 출발 - 소요시간 3시간 20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도착 후 환승 - 환승시간 1시간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출발 - 소요시간 4시간

싱가폴 창이 국제공항 도착 후 입국수속 / 가이드 미팅

이슬람의 향기가 가득한 아랍스트리트, 삶의 활력이 느껴지는 차이나 타운 관광, 싱가폴 재래시장 방문 등 시내관광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기내식

 

 

:한 식

HTL: 오키드 호텔 또는 동급 예정 (4성급)

2

09/25

싱가폴

조호바루

 

 

 

 

 

싱가폴

 

 

 

 

 

 

 

 

 

 

전 일

 

 

 

 

 

 

 

 

 

 

 

 

 

 

 

 

 

호텔 조식 후

가든스 바이 더 베이 : 도시 안팎을 싱그러운 정원으로 꾸민 싱가폴의 새로운 관광지 가든스 바이더 베이는 사운드 쇼와 라 이트 쇼가 벌어지는 12개의 인공나무 슈퍼트리(Super tree), 열 대림의 식물을 만날 수 있는 클라우드 포레스트(Cloud forest)등 다양한 식물들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클라우드 포레스트돔 (Cloud Forest dome),플라워돔 관람 포함

싱가폴 귀환후

싱가포르 국립 식물원인 보타닉 가든 관광 : 식물원, 난원,

녹색공간 및 산책로 조성 실태, 파크커넥터 현황 등을 볼 수 있 습니다

동남아 최대 규모인 새들의 천국 주롱새공원 : 세계적 수준의 새쇼 등 자연자원을 관광자원화한 주롱새공원의 조류 전시장

(20, 3805000여 마리) 관람

석식 후 리버보트 단독 탑승 (19) : 싱가포르 역사의 발상지 인 싱가포르강을 따라 약 30분 동안 배를 타면서 유럽풍 카페거 리의 모습을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호텔 투숙 및 휴식

:호텔식

 

 

 

 

:몽골리안

BBQ

 

 

 

:한 식

HTL: 오키드 호텔 또는 동급 예정 (4성급)


3

09/26

싱가폴

 

 

 

 

 

 

 

 

 

 

전일정

 

 

 

 

 

 

 

 

 

 

 

호텔 조식 후

도시개발청 URA Gallery (Urban Redevelopment Authority)

-도시개발계획, 공원 수변계획, 하수도 시설 현황을 볼 수 있 습니다

싱가폴 국립박물관, 구민회관(Community Centre)

싱가폴 국립 국립대학교 캠퍼스투어

LTA (Land Transport Authority : 육상교통청) 갤러리 방문

오차드 로드 거리 : 오차드 로드 등을 중심으로 한 싱가포르 도심의 가로경관 실태 및 도심지역 파크커넥터 현황을 탐방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호텔식

 

 

:현지식

 

 

 

:한 식

(전체회식)

HTL: 오키드 호텔 또는 동급 예정 (4성급)

4

09/27

싱가폴

 

 

 

 

 

 

 

 

 

 

 

 

 

 

 

 

 

 

홍 콩

전일정

 

 

 

 

 

 

 

 

 

 

 

 

 

 

 

 

 

20:10

00:10

호텔 조식 후 체크아웃

NEW WATER FACTORY (하수의 재이용 시설 견학) : 폐수 및 하수를 재생시켜 공업용수와 상업용수로 공급하는 선진화된

재생수(NEWATER) 기술 및 물 재이용 시설 견학

MARRINA BARRAGE (박물관,갤러리,옥상정원..) : 싱가폴강 을 모두 가두어, 민물로 활용하려는 계획하에 만든 인공댐을

중심으로 한 복합 시설입니다.

마리나 베이 샌즈 지역탑사 스카이팍(하늘정원) 둘러보기

싱가폴의 상징인 도심속의 여유공간 머라이언 공원 관광, 에스 플러네이드 (오페라하우스) 관광

플라톤 호텔(, 우체국건물) 외관 관광

중식후 다양한 볼거리와 놀이시설이 갖추어진 센토사섬 관람

- 쥬얼케이블카, 머라이언타워 -

머라이언 홍보관 방문(MBSIR)

 

시간관계상 석식은 스낵식으로 대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석식 후 공항으로 이동

싱가폴 창이 국제공항 출발 - 소요시간 4시간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도착 후 환승 - 환승시간 2시간 20

:호텔식

 

 

 

 

:로얄

스팀보트

 

 

 

 

:한 식

5

09/28

홍 콩

부 산

02:20

06:40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출발 - 소요시간 3시간 20

부산 김해공항 도착 안녕히 가십시오...

:기내식

* 싱가폴은 술(11리터 가능 / 싱가폴 재입국시에는 절대 반입불가), 담배(19개피가능/전자담배 불가), (불가) 반입이 엄격합니다. 압수 및 벌금 발생할 수 있으며, 손님 부담입니다.(벌금 5000) , 주류관리법 변동으로 인해 22:30~07:00까지 술집을 제외한 공공장소(편의점 및 일반슈퍼) 음주와 주류구매가 금지됩니다. 이를어길시 벌금 SGD1,000(재범시 SGD2,000, 3개월 징역) 부과됩니다.

*상기일정은 현지사정(교통,기상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 다음 일정을 위해여 축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예정에 없었던 일정이었다. 창조재단 주관 2016 시민활동가 선진도시 체험 및 대안모델 실행 연수 프로그램이 진행되니 참가를 신청하라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기간 내 사)부산녹색도시포럼 주관 민간공원의 합리적 실현전략  이란  심포지움 토론자로 내정되어 있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추천이  있어 고민해야 했다.  제의를 받아들이고 토론 대타를 구해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밟을 것인가. 결국 후자를 택했다.  흔치 않는 기회였고 의견을 물었든 대다수가 갔다오기를 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우여곡적 끝에 싱가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전에 먼저 다녀온 경험자로부터 일정 외 꼭 봐야할 곳도 코치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런 별도의 일정 때문에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다 공부라 여겼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에는 늘 창가로 좌석배치를 희망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낙동강하구역 일대의 변화를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비행기는 김해방향으로 기수를 올렸다가 선회하여 가덕도와 거제도를 가로질러 비행한다.  비행시간으로 보자면 극히 짧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하구역의 상황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기회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창가를 고집한다.

서낙동강 변 둔치도를 비롯하여 에코델타 사업현장을 본다. 어처구니 없게도 사업명이 에어부산으로 바뀐지 얼마 안된다.

하늘에서 하구역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였고, 아주 더물게 헬기를 타고 일대를 모니터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낙동강하구를 이 도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가치와 기능에 대한 평가 절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난해 서시장이 하구둑 개방을 선언했다.  정치적 판단과 의제의 선점이지만 아쉽게도 1년이 경과한 지금 더이상의 진척이 없다.  립서비스일 뿐일까

김해공항에서 싱가폴 직항은 없다. 홍콩을 경유하여 가는데 비행기도 갈아타야 한다. 케세이픽항공의 자회사 격인 드레곤항공을 이용했다. 홍콩에서 환승한 비행기는 덩치가 큰 케세이픽 항공이었다. 

가는 내 숲과 관련된 영화를 보았다.

창이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한시도 차창밖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도시국가를 완성하다시피한 리콴유(李光耀 | Lee Kuan Yew)

라는 총리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그의 이야기는 그 자신이 쓴 '리관유자서전'과 2013년 톰 플레이트가 인터뷰 형식으로 쓴 '리관유와의 대화'가 있다.  그외 2010년에 나온 양현모 외 여러 명이 쓴 '싱가포르의 행정과 공공정책' 이란 책도 있으나  절판되어 목차만 살폈을 뿐이다.  아무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이루어낸 현재의 싱가포르가 그 어떤 평가보다도 정확할 것이다.

 

리콴유는 1923년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이주자의 3세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식 교육을 받고 명문 래플스 중고등학교와 래플스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가 되어 노동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했고, 우체국 집배원 및 전화 교환수 노조 파업과 해군기지 노조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싱가포르 정치계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고, 1954년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 을 창당했다. 그때나이 서른 하나였다.  그리고 1959년에는 인민행동당이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가 됐다.

 

리콴유가 정치 입문 하기 전 싱가폴은 100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3년 반 정도 정령하였다. 이후 2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싱가폴은 영국과 여러번의 협상을 통하여 독립의 길을 가고 있었다. 당시 세계정치 상황은 특히 신생국의 경우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세력을 형성한 나라가 많았고 싱가폴의 경우 중국의 영향이 컸다. 한편으로는 말레이시아와 관계 또한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변수였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정치를 구현했다. 리콴유는 그의 자서전에서

 

"3년 반 동안의 일본군 점령 시절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나는 그 시절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의 행동양식과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 인간의 욕구와 충동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 정부의 절대적 필요성, 그리고 권력이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은 내가 점령 시절을 겪지 못했더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콴유는 1946(23)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데 처음에는 LSE대학에 다니다가 런던생활의 고됨을 이유로 캠브리지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등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된다. 1950년 귀국한 뒤 레이콕 앤 옹에서 변호사 수업을 시작했다.  1952년 집배원 및 전화교환수 노조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노동운동계에 뛰어 들어 변호사로서 맹활약을 하기 시작하여,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1954년 공산주의자들(공산주의가 불법이었으므로 이들은 사회주의자로 위장하고 있었다)과 함께 인민행동당을 창당하여 1955년 선거에 임하여 총 28석 중 4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마셜이 이끄는 노동전선은 10석을 차지 마셜이 수상이 되었다. 마셜은 런던의 개헌협상에서 자신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공개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으로서 실각하고 림유혹이 그 뒤를 이어 수상이 되었다. 림유혹은 공산세력에 대하여 강경하게 대했다. 이 당시 인민행동당 내의 공산주의자들(대표적 사람이 림 친시옹, , 나이르 등이다)이 구속되는 등 공산주의 1세대가 침몰하게 되었다.

 

리콴유는 마셜과 제2세대 공산주의 연합전선과의 투쟁을 위하여 의원직을 사직하고 다시 보궐선거에 임하여 승리하였다. 1959년 총선에서 리콴유는 약관 35세의 나이로 인민행동당을 제1당으로 이끌어 내고(51석 중 43), 구속되었던 공산계 인사들을 석방시킨 후 65일 취임식을 가졌다. 취임이후, 공무원 연봉삭감 등을 통한 균형예산, 노동쟁의중재재판소의 도입, 황색문화추방운동, 대규모 주택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탄탄대로였던 그의 정치행로에서 위기는 인민행동당 출신으로 시장과 장관을 지냈덙 파퓰리스트가 노선에 반기를 들고 사작 보궐선거를 요청하면서 였다. 결과적으로 이때 그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패배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또한 그는 기회로 판단했다.  

내각재신임투표를 선택했고  이과정에서 친공세력들은 패배했다. 1961년 7월  친공세력은 인민행동당을 탈당하여 인민행동당과 똑같은 창당이념을 내건 바리산 사회주의당을 창당한다.  와중이던  1961년 5월 말레시아 툰쿠가 연방제 의사를 표명하면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이 연방을 맺는 과정이 진행된다.  리콴유는  이 시기 국민을 대상으로 앞으로의 싱가폴을 호소한다.  내부적으로는 친공세력과의 결별을 또 외부적으로는 말레이시아와의 합병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주 3회 한달간 국민 설득에 나섰다.  그간 어떻게 정치를 해 왔고 공산주의자들과 협력과 결별의 이유를 솔직하게 전달함으로써 국민의 동의와 이해를 얻게 된다. 

 

1962년 9월 말레이 연방 가입을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친공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75%의 찬성을 이끌어 낸다그런데 브로네이에 적을 두고 있던 수카르노의 사주에 의해 반란이 발생하는데 말레이시아 연방이 또 다른 식민국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란은 영국군에의해 진압되었고, 투쿤은 친공세력 소텅작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리콴유는 연방결성에 미온적이던 주앙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싱가폴의 독립을 선언하고 1963년 9월 말레이시아 연방을 결성한다, 새로운 갈등이 잉태되었다.

 

예컨데 말레시아를 말레이시아인들이 지배해야 한다는 중앙정부의 입장과 다민족 의 말레이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싱가폴의 입장이 충돌하게 되고 1964년 7월과 9월 급기야 민족간 폭동이 발생한다.  이에 더이상의 신뢰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툰쿠와 리콴유가 비밀협상을 통해 싱가폴을 분리 독립시키기로 합의히고 연방탈퇴를 선언했다.  1965년 8월 9일 싱가폴이 독립국가 선언을 함으로써 오늘의 싱가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볼 때 리콴유의 정치적 판단과 선택, 나아가 세력의 이용과 협상에 탁월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1990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2015년 작고할때 까지 원로장관 (Senior Minister) 또는 고문장관 (Minister Mentor)으로 추대되어 오로지 싱가폴만을 위해 일생을 살다 갔다.

 

경이로운 사실은 한때 도시국가로서는 독자적 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연방주의를 천명했지만, 오히려 그 도시국가로의 선택이  1인당 GDP 400달러에서 2016년 현재 5만달러를 상회하는 국가로의 변신이다.  제주도의 두 배에 못미치는 국토면적(700㎢)에 인구 500만이 전부였던 나라, 나아가 550만을 먹여살릴 식량생산  토대는 고사하고 전기나 물 조차 자급 시스템이 부재했던 나라였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됐을 때, “내 평생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싱가폴 사람들은 오늘의 국가적 번영과 개방적이고 경쟁력 있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린 장본인을 리콴유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기억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20~21세기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자 아시아 경제 기적을 촉발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우리의 존경을 받는 원로이며 지금도 쉼없이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가 잘못되면 무덤에서라도 일어나겠다(1988년)고 말했던 리콴유 전 총리는 국가에 대한 애정은 컸지만 자신이 우상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후에 자택이 국가 성지로 지정될까 염려해 자신이 죽거든 집을 허물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의 사후 국내 언론이 평가한  리콴유의 싱가폴(한국일보)은 명암을 달ㄹ 했다.  "...

후발 자본주의 발전에서 리콴유가 이끌었던 싱가포르 모델은 명암이 분명한 전략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리콴유가 추진한 친기업·반부패 정책은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살고 투명한 나라로 만들었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 네 마리 작은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가운데 싱가포르는 1인당 GDP 5만 달러에 가장 먼저 도달했다. 말레이반도 끝에 놓인 한갓진 섬나라에 불과했던 1960년대의 과거를 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일궈낸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싱가포르 모델은 그늘이 작지 않다. 정치적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여전히 한 정당이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이며,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등 국민 기본권 또한 크게 제한돼 있다. 사회적 측면에선 빈부격차도 큰 문제다2013년 싱가포르 지니계수는 0.478을 기록했고, 전체 인구의 10~12%1,000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야말로 싱가포르 모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리콴유가 평생을 거쳐 추구한 국가 목표는 일관된 부국(富國) 노선이었다. 나라를 부강할 수 있게 한다면 그는 민주주의를 유보하더라도 주저 없이 그 길을 따라갔고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강소국 싱가포르 모델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이식하기 어렵다. 500만이 겨우 넘는 도시국가라는 조건은 싱가포르식 발전전략에 유리한 조건을 이뤘지만, 인구 규모가 큰 경우에는 산업구조와 사회갈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벤치마킹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목할 것은 싱가포르 모델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싱가포르식 부국 노선과 이를 추진한 강력한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그리움의 원인은 현재에 대한 불만에 있다. 과거에의 그리움을 갖는 것은 그 시절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가 곤궁(困窮)할수록 과거에 대한 그리움 또한 커지는 법이기도 하다. 프로이센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 모델에 기원을 두는 싱가포르식 발전전략이 정보사회가 진전하고 시민사회가 다원화된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저성장, 심화되는 빈부격차, 활기 잃은 시민사회의 현재적 상황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문제의 핵심은 싱가포르와 함께 발전국가의 대표 사례였던 우리나라의 경우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발전모델을 여전히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발전전략을 이끌어갈 정치적 리더십 또한 부재하다는 데 있다. ..."

 

리관유는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며 강력한 법치로 나라를 이끌었다. 태형은 이러한 그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임시절 담배꽁초 투기, 화장실 물 내리기 등 사소한 부분까지 통제하면서 일일이 간섭하는 유모국가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그는 정부는 국민을 교육하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경제가 부흥하면서 지도층의 부정부패에서도 그는 엄격했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지론으로 측근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1986년 개국공신이자 최측근인 태 치앙완 국가개발부장관이 두 차례에 걸쳐 40만 싱가포르 달러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구속수사를 지시했다. 결국 태 장관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본인에게는 더 엄격했다. 1995년 부동산 급등으로 자신의 일가에 대한 투기 의혹이 일자 조사를 자청했고, 무혐의 결론이 난 뒤에는 차익을 모두 기부했다. 싱가포르의 청렴 풍토는 이런 바탕에서 싹텄다.

 

오마이뉴스  "...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하며 초대 총리에 오른 리콴유는 당시 열악한 주거 환경, 실업률, 국방력 등 싱가포르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발전에 주력했다.대외적으로는 독립 후 곧바로 유엔에 가입했고, 다른 4개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을 세웠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을 통해 서민 주택 보급에 힘썼고, 천연 자원이 부족한 싱가포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해 실업률을 낮췄다.

 

리콴유의 과감한 투자로 싱가포르는 창이 공항이라는 세계적인 국제 공항을 보유하게 됐고, 세계 유명 금융 기관의 아시아 지사를 대거 유치하며 일본, 홍콩 등을 제치고 아시아 금융 허브로 일으켰다.

 

리콴유의 지도력이 주목을 받는 것은 가파른 경제 발전 속에서도 개발 도상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부정부패나 환경 오염, 범죄를 거의 완벽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깨끗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공직 비리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대신 공무원의 임금을 사기업 수준으로 높였다. 또한 마약은 물론이고 거리에 껌을 뱉거나 작은 쓰레기를 버려도 큰 벌금을 물리며 공중 도덕 의식을 강조했다. 그 결과 리콴유가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임할 때까지 26년간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성장 모델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화려한 빛 뒤에는 그림자도 뒤따랐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심각한 인권 침해나 무력 동원은 없었지만, 벌금이나 태형을 통한 강압적 법치, 그리고 집회·결사의 자유나 언론의 표현을 억압하며 사회를 지나치게 통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리콴유를 지지하는 쪽은 리콴유의 강력한 지도력을 '아시아적 가치(Asia value)'라고 표현하며 옹호했다. 반면 리콴유를 비판하는 쪽은 '싱가포르의 히틀러', '온건적 독재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리콴유의 맏아들 리셴룽이 2004년 싱가포르 제3대 총리로 취임하면서 세습 논쟁이 불붙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리콴유의 지도력은 때로 자유를 억압했지만, 그의 공식은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리콴유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퇴임 후에도 선임 장관, 고문 등의 직함을 맡아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자신을 정책이나 업적을 비판하는 정치 평론가, 서방 언론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법정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싱가포르도 세대 교체의 흐름 속에 리콴유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도 늘어났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 위기로 싱가포르의 경제 모델이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고, 깊어지는 양극화는 더 많은 분배를 원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최근 고소득층 세율을 높이고 복지 예산을 늘리는 까닭이다.

 

2006년 총선까지만 해도 리센룽 총리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84개 의석 중 82석을 차지했지만 2011년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야당인 노동당(WP)에게 6석을 빼앗겼고, 이후 보궐선거에서도 연거푸 패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리콴유를 생각한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리콴유는 덩샤오핑, 박정희와 함께 동아시아적 발전국가 리더십의 전형이었다.발전국가는 개발독재의 다른 이름이다. 민주주의보다 물질적 가치를 더 중시했던, 서구적 가치보다 아시아적 가치를 더 강조했던 리콴유에 대한 평가는 국가발전 목표를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발전의 목표가 경제성장에 있다면,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정치가다. 하지만 그 목표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동시발전에 있다면, 그는 일방적으로 고평(高評)하기는 어려운 지도자다.


후발 자본주의 발전에서 리콴유가 이끌었던 싱가포르 모델은 명암이 분명한 전략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리콴유가 추진한 친기업·반부패 정책은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살고 투명한 나라로 만들었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 네 마리 작은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가운데 싱가포르는 1인당 GDP 5만 달러에 가장 먼저 도달했다. 말레이반도 끝에 놓인 한갓진 섬나라에 불과했던 1960년대의 과거를 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일궈낸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싱가포르 모델은 그늘이 작지 않다. 정치적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여전히 한 정당이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이며,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등 국민 기본권 또한 크게 제한돼 있다. 사회적 측면에선 빈부격차도 큰 문제다. 2013년 싱가포르 지니계수는 0.478을 기록했고, 전체 인구의 10~12%1,000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야말로 싱가포르 모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리콴유가 평생을 거쳐 추구한 국가 목표는 일관된 부국(富國) 노선이었다. 나라를 부강할 수 있게 한다면 그는 민주주의를 유보하더라도 주저 없이 그 길을 따라갔고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강소국 싱가포르 모델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이식하기 어렵다. 500만이 겨우 넘는 도시국가라는 조건은 싱가포르식 발전전략에 유리한 조건을 이뤘지만, 인구 규모가 큰 경우에는 산업구조와 사회갈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벤치마킹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목할 것은 싱가포르 모델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싱가포르식 부국 노선과 이를 추진한 강력한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그리움의 원인은 현재에 대한 불만에 있다. 과거에의 그리움을 갖는 것은 그 시절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가 곤궁(困窮)할수록 과거에 대한 그리움 또한 커지는 법이기도 하다. 프로이센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 모델에 기원을 두는 싱가포르식 발전전략이 정보사회가 진전하고 시민사회가 다원화된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저성장, 심화되는 빈부격차, 활기 잃은 시민사회의 현재적 상황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문제의 핵심은 싱가포르와 함께 발전국가의 대표 사례였던 우리나라의 경우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발전모델을 여전히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발전전략을 이끌어갈 정치적 리더십 또한 부재하다는 데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제시된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소득 주도 성장, 포용적 번영 등의 담론을 지켜볼 때, 새로운 발전모델은 성장과 복지를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전략이 돼야 한다. 그리고 좋은 정치적 리더십이란 성장과 복지에 대한 일관된 철학을 요구한다. 성장과 복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성장 없는 복지는 지속불가능하고, 복지 없는 성장은 결코 소망스럽지 않다.

 

리콴유의 죽음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한 시대가 지나갔음을 상징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싱가포르 모델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모델이다.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일궈내는 21세기에 걸맞은 그런 정치적 리더십을 고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한국일보 2015.03.30

숙소 Orchid Hotel은  칸톤먼트 로드와 안손로드 사이에 있고  호텔 앞은  Tras St이며 뒷쪽은 한인 식당이 많은  Tg Pagar Rd가 있다.  하단부 대로는 도시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케플 비아덕이고 MCE 마리나 코스털 엑스프레스 웨이 ECP와 연결되어 창이공항까지 이어진다.   머무르는 동안 수없이 다녔지만  정작 찾아 오기는 싶지 읺았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자부해 왔지만  의외로 길치란 사실을 알았다.  

싱가폴 입국 후 MCE를 지나며 본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모습이다.

아랍스트리트와 차이나타운 관광에 나섰던 첫날에서부터 마지막날 MBSIR에 이르기까지 내게는 싱가폴의 곳곳이 인상적이었다.  

창조재단 김윤경 팀장과 사회적 기업 미디토리 허소희 팀장, 어쩌면 김은민 팀장인지도 모른다.  5일을 같이 다녔지만  얼굴과 이름을 동시에 입력시키지 못했다.

민언련의 김유경 사무차장과 미디토리 김 아님 허 ^^

주롱 새공원에서

숙소의 밤

숙소앞 잔디 광장

숙소 3층 식당 옆에 있는 수영장,  왠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시설이다. 휴가의 개념이 다륻기 때문일까. 하긴 언제 수영장 딸린 호텔을 숙박장소로 이용해 본작이 있긴 한가.  되짚어 보니 올여름 경주로 휴가여행을 갔을때  리조트에 3일 머문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영장 이용은 별도였다.  그래서 아들만  놀게 했었다. 참 얄궂다  투숙객에 대한 서비스의 개념이 차원이 다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반면 다른국적의 투숙객들은 참 자연스레 이용했다.

아침 시간 수영장 방문지며 이동 동선을 보며 누워 있자니  누군가 찍어 두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시간은 이날 이후 없었다.

찌르레기과 자반구관조 JAVAN Myna  (Acridotheres Javanicus)다. 싱가폴 하면 이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싱가폴리버 최상류

호텔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건너다 본  Tg Pagar 주변 상가 

 

보타닉가든

 

리버보트 선상에서

 

도시개발청 URA Gallery (Urban Redevelopment Authority)

 

 

 

 

 

 

 

NEW WATER FACTORY

 

 

한가지 마음에 안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선물 사기 였다. 사고 안사고는 개인의의지지만 혅지 가이드가 먹고살기 위한 구조적 문제일수도 있지만  가이드는 일행을 두번 쯤 이런 곳을 데려 갔다. 참석자들은 또 착실히 물건판매자의 설명을 듣고 주방용품과 건강보조식품 두곳이었다. 현지에서는 싱가폴 달러로 사용하면서 유독 이런데는 US달러 기준 환율로 구매를 강요? 했다. 솔직히 못마땅했고 급기야 실소하고 말았다. 가이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참 씁쓸했다. 더무지 개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시간을 들여 봐야 할 곳과 안가도 될 곳 그의 고객이 뭘 원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성실하고 친절하고를 떠나서 의 문제다. 질이다. 

그런마음들을 오래 달고 있을 수도 없어 일정이 끝나는 밤이면 이렇게 간단한 맥주 자리를 가지곤 했다.

마음이 안스럽웠던 것 중의 하나를 남기자면 기념품의 구매같은 것이랄까.  모처럼 나온 해외 나들이에다  국내보다 가격대비 싼  면세물품이 구매를 충동하고, 또 그런 걸 대비하여 얼마간의 여행경비를 마련해서 가겠지만 게중에는 그런 구매들을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부익부 빈익빈이랄까.  하기사  사면 얼마나 많고 비싼것을 구매했을까 만은  그래서 사실은 오십보 백보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세번째 불만 허구한날 된자이며 김치찌개 먹는데, 그 몇날 된다고 하루에 꼭 한번 한식집을 이요한단 말인가.  그냥 밥 때라서 허기져 먹기는 했지만 불만이었다. 이 또한 가이드와 연결된 현지 구조 때문이다.

 

가든스 바이더 베이

 

 

 

센토사섬

싱가폴에서의  네번째 불만은 흡연이다.  엄격하게 적용되는 관련법규는 입국시 담배소지 부터 흡연장소에 이르기까지  명시하고 있었지만 확인하고 경험한 바로는 시내 어디서든 흡연할 수있었고, 심지어 저들이 자랑해 마지 않는 국립이란 지위가 부여된 곳에서도 흡연할 수있는 곳이 적잖이 있었다.

기간 내 가지고 간 담배가 바닥나면 입국전까지 피우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어디서든 담배를 피을 수 있는 환경임을 알고나니 구태여 금연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담배 한값이 우리 돈 1만2천원 가량이니 적잖히 망설여 지기도 했다.

 거기다 담배갑에 새겨진 문구가 살벌하기 짝이없었고 혐오감을 가지게 했다.  싱가폴이 유독 심했다. 그 정도는 홍콩을 경유하여 다시 국내로 들어와 즐겨 피우는 담배갑에 새겨진 문구로서 확연히 대비되었다.  담배가 국민건강에 끼치는 해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겠지만 

그렇지만 상가폴에서의 4일은 만족했다.  이런 기회가 더 많아져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이 한번은 탐방했으면 한다.  이번 탐방에는 모두 지역의 10여 개 단체가 참여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다루는 업무의 영역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목도한 현장은 부산과 비교되고 앞으로 그리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이 한달 여 알두고 있는 가운데   1차 TV 토론이 중계되고 있었다.  트럼프와 힐러리의 차이는 뭘까. 분명한 것은 들다 미국 대통령이 되늕 것이다.. 정책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저들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미국 국민도 그 이익을 따를 뿐이다. 지구적 차원의 기여는 얼마나 될것인가.  경찰국가를 자임하면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  그렇건만 트럼프 같은 인간은 미국에도 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죽하면  같은 공화당 전 의원들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 철회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미국 선수가 결정되고 내년 대한민국의 대선이 치루어 진다. 복잡한 국제정세속 박근혜정권의 외교력은 형편없다. 살얼음판을 강요하는 남북문제라든지 산적한 국내 정치사회문제에 있어 도무지 소통의 기미가 없다. 참 슬픈일이다. 리드십이란 뭘까.

싱가폴 창이공항과 부산김해공항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만  한번 쯤은 정리를 해야 할 둣하다. 사실 지난 번 신공항 입지 문제가 생겼을 때 나름 자료를 수집하고 축적하긴 했지만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다만 구역질만 일어켰다. 기회주의자와 개발만능주의자, 거기에 편승한 부동산 투기세력,  나아가 영혼 없는 군상들의 백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루한 탑승대기 시간 끝에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하고  창넘어 어둠속에 묻힌 싱가폴을 본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와 보고싶은 곳이다. 그때는 보다 철저히 내 의지대로 움직이라라

야간비행의 경우 가끔 좌석의 여유가  많을 때도 있다

해서 보다시피 이런 경우도 생긴다.

그러다 홍콩에 착륙하고

홍콩의 활주로는 심야에도 부산하다

홍콩에 기항하는 항공사들

다시 드래곤으로 갈아타고

만석이다

비구름 자욱했던 항로 

타이완을 지날 때나 동지나를 지날 때 비행기는 매우 흔들렸다,  태풍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녁 도착했던 부산도 흐렸다.

3박5일 일정의 싱가폴을 정리해야 한다.  그들의 정책과 그 결과물인 도시의 모습에 대해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입혀야 한다. 그래서 공유하고 만들어야 하리

집 역시 좋은 곳이다.  심리적으로도  다 내려놓아도 문제될 것이 없는 ... 도착후 하루내 잤다.